엘 드라카 (1)
“이 미친년들이….”
송선호의 이마에 빠직 핏줄이 돋았다.
보통 엘 드라카 리그를 맞이하는 각종 연예, 미디어, 콘텐츠 업계의 반응은 얌전한 순응에 가까웠다. 이 철이 지나면 또 때가 올 거라고 생각하며 각종 매출 급감과 조회 수 및 시청률 감소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큰 프로젝트들은 한겨울에 시작하여 여름에 끝내 매출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썼다. 엘 드라카 시작되면 술집이랑 스포츠 미디어 빼고는 다 안 된다는 게 통설이다.
소재가 소재니만큼 바로 이 시기에 연재 시작을 결정한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 만화&소설 프로젝트는 그렇기 때문에 꽤 리스크를 안고 시작하는 작품이었다. 엘 드라카 리그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오늘 자정부터 연재다. 몇 달 전부터 기획했던 프로젝트이니 벌써 10주분의 만화판 연재 비축과 16주분의 소설판 연재 비축을 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연재가 시작되게 되면 지금까지처럼 느긋하게 작품을 가다듬을 시간이 없어지는 것이다. 소설이야 연재까지 아직 8주 남았으니 그렇다 쳐도 1회를 완성하는데 시간이 더 걸리는 만화의 경우 연재 초반이 지나면 꽤 촉박한 마감이 예상되었다. 게다가 주 2회 연재다. 요새 인공지능이 원체 좋아서 채색이나 배경작업에 드는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었다고는 해도 힘들 것이다.
지금도 경건하게 책상 앞에 앉아 집필을 하고 콘티를 짜고 그림을 그려야 할 인간들이 거실에다가 아주 술판을 벌여 놓고 쓰러져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한 송선호는 다시는 험한 말을 쓰지 않겠다고 백 번은 결심을 하고 온 주제에 곧바로 욕설을 하고 말았다.
“오늘 밤부터 연재 시작인데 지금 잠이 옵니까! 예?!”
그들은 커다란 카우치 양쪽 귀퉁이에 하나씩 누워서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오후 2시다. 도현 킬스버그의 발이 로웰 리의 배 위에 올라가 있었다. 이번 연재 잘못되면 정말 큰일 난다며 그렇게 엄살을 피우더니 대망의 첫 연재 날이 다가왔는데 이 꼴이란 말인가. 이게 얼마짜리 프로젝튼데. 어디 정한수 떠놓고 기도라도 드리진 못할망정!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도현의 집에는 옛날부터 술이 많았다. 송선호는 어디를 어떻게 만져도 될지 한참을 주저하다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작가님. 작가님.”
도현은 끙, 하고 몸을 송선호 쪽으로 돌렸다. 더운지 귓가의 머리카락이 약간 땀에 젖었다. 게다가 허술한 옷차림…. 꿀꺽. 송선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과 목, 어깨를 잇는 선을 쭉 보았다가 시선을 확 돌렸다.
“야. 야. 빨리 일어나. 야!”
송선호는 그대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옷을 잡고 흔들었다. 도현이 신경질을 냈다.
“야… 옷 벗겨져.”
송선호는 저도 모르게 확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송선호 때문에 내려간 옷깃을 어깨 위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는 당황해서는 확 하고 화를 냈다.
“옷 좀 제대로 된 거 입고 살아, 이 썅…!!”
겨우 뒷말을 멈췄다. 송선호는 인상을 팍 쓰며 한숨을 푹 쉬었다. 도현은 카우치에 얼굴을 묻으며 귀를 막았다.
“으응…. 머리 아파. 선생님이랑 콘티 짜다가 잔 거라고. 논 거 아냐….”
“…일을 술 먹으면서 하냐?”
그래도 뭐라고는 해야겠는지 송선호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일하다 보면 좀 마실 수도 있지. 이런 것도 다 일이야, 일…. 같이 쭉 일할 건데 더 돈독하게 잘 지내야 할 거 아냐….”
말은 잘한다. 이미 더 친해질 것도 없더만. 송선호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이제 하루하루가 마감이잖아.”
“그러니까 어제가 마지막이다 싶어서 좀 마신 거야. 잔소리 좀 그만해. 너 그러다 대머리 된다.”
“…….”
뭐라고 더 하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다. 송선호는 로웰의 상태도 한 번 보았다가 오늘은 일 시키기엔 영 그른 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는 엎드려 누운 도현의 얼굴을 잠깐 보았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고 있었다.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단정히 넘겨주었다. 왜인지 한숨이 잠깐 나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정하게 입고 옷 쓰리피스 양복을 셔츠만 남겨두고 벗어서 다른 소파에 걸쳐 놓았다. 넥타이는 넥타이핀으로 다시 고정했다. 에어컨도 약하게 틀었다. 셔츠 소매를 걷고는 부엌으로 갔다.
‘그나저나 이것들은 도대체 뭐 먹고 사냐.’
자주 여기로 출근 도장을 찍는 송선호였지만 이 여자들이 뭘 제대로 먹는 꼴을 못 본 것 같았다. 부엌에는 별로 들어와 본 적이….
“…….”
매우 엉망이다. 배달음식 용기와 각종 그릇들, 수저들이 너저분하게 싱크대를 채우고 있었다. 송선호는 내 천자를 미간에다 강하게 잡고 마스크와 고무장갑부터 찾아 꼈다. 그리고 약 1시간 뒤, 부엌이 아주 멀끔해졌다. 송선호는 고무장갑을 걸어 놓고 마스크는 버렸다. 손을 깨끗하게 씻고 음식을 하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송선호는 다시 고무장갑을 꼈다. 30분 뒤엔 그것도 멀쩡해졌다. 고무장갑도 버렸다. 냉장고 상태를 확인한 즉시 바로 마트에서 필요한 것들을 주문했더니 청소를 끝마칠 때쯤 도착을 했다. 문자 메시지를 받고 현관문을 열어보니 이미 드론이 두고 가 상자만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송선호는 그걸 안으로 들고 들어왔다.
송선호는 일단 밥솥에 밥을 안쳤다. 그리고 예쁘게 생긴 투명한 냄비를 하나 찾아내서 거기에 정수물을 받고 다시마와 멸치를 넣어 끓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콩나물을 헹궈 놓고 파랑 청양고추를 썰었다. 미역 줄기를 씻어서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양파와 당근, 홍고추도 다듬어 잘랐다. 냄비 물이 끓자 다시마를 건지고 팬을 달궈 들기름과 식용유를 넣고 미역 줄기를 넣은 후 냄비에 남은 멸치도 싹 건져냈다.
그리고 콩나물을 많이 넣고 끓이면서 팬을 휘저었다. 국이 끓자 간을 했다. 거품을 걷어내면서 다진 마늘과 양파를 팬에 넣고 불을 줄였다. 다른 재료와 양념을 넣고 같이 다시 볶았다. 국이랑 반찬 하나를 끝내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갈치 조림, 호박전, 계란말이, 시금치 무침….
“뭐해?”
뭔가, 좋은 향기가 송선호의 코를 은은하게 간지럽혔다. 항상 귀를 간지럽게 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송선호가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았더니 도현이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아까 입고 있었던 것과 비슷한 새 박스티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머리를 닦으며 서 있었다. 송선호가 뭘 하고 있는지 보고 싶은 것인지 밀접하게 서서 송선호의 팔을 잡았다.
“냄새 좋다. 너 요리도 할 줄 알아?”
“…나 먹으려고 한 거다. 너 안 줄 거다.”
“아, 왜~.”
도현이 송선호가 지금 하고 있는 요리에 손을 뻗자 송선호는 바로 그녀의 손등을 때렸다.
“로웰 선생님은?”
“일어나셨어. 많이 드셔서 힘드신가 봐.”
다이닝룸의 으리으리한 식탁 위에 예쁜 접시들이 쫙 깔렸다. 숙취로 인하여 암흑의 기운을 흩뿌리고 있던 로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집밥…!”
도현도 새삼 송선호를 쳐다보았다.
“우리 송 편집장 장가 잘 가겠어.”
“…….”
“잘 먹겠습니다~.”
“예…. 많이 드십시오.”
밥을 한술 뜨더니 두 여자 다 완전 기가 막힌다고 감탄사를 내었다. 도현이 로웰과 속닥거렸다.
“그냥 우리 송 편집장 데리고 살까요, 선생님? 그간의 악감정이 샤르르 풀어지는 맛인데요, 이거?”
심지어 도현이 먼저 이렇게 말했다. 로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됴껀 탄떵(무조건 찬성).”
로웰은 입에 있던 걸 꿀꺽 삼키더니 부언했다.
“옛말에 얼굴이 잘생긴 남자는 3년, 음식을 잘하는 남자는 30년이란 말이 있죠.”
“어쩜~.”
송선호는 인상을 살짝 쓰고는 말했다.
“쓸데없는 얘기하지 말고 밥이나 드십시오.”
“우리 송선호 완전 귀한 집 도련님이신데, 어디서 이렇게 요리를 배웠대?”
도현은 엄청 신기한지 계속 송선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송선호는 약간 얼굴이 화끈했지만 무시했다.
“대학 다닐 때. 맨날 시켜 먹기 싫어서.”
“돈도 많으면서 사람 안 쓰고?”
“모르는 사람이 집에 들락날락하는 거 싫어.”
“싫은 것도 많다.”
그러면서도 로웰이랑 도현은 밥을 두 공기씩 먹었다. 벌써 6시가 되었다. 여자들은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영 집중을 못 했다. 사각사각, 로웰이 스크린 위에 그림을 그리는 소리와, 톡톡톡톡, 도현이 스크린에 타자를 치는 소리가 일정하게 나다가도….
“…반응 괜찮을까요, 작가님?”
“…글쎄요. 다들 엘 드라카에 미쳐 있을 때라…. 오늘 반응 좋아야 앞으로도 괜찮을 텐데.”
이 작품은 먹고 살기 이전에 빚이라는 재앙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작품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두 여자 다 여기에 사활을 걸었기 때문이다. 송선호도 앉아서 오늘 밤 12시에 올라갈 연재분을 체크하고 SNS나 스페이스 등에 예정된 포스팅을 올리고 광고 영상이 게재된 사이트들도 하나하나 확인해보았다. 연재 플랫폼에 올라오고 있는 독자들의 기대 반응도 체크했다.
12시가 다 되어갔다. 다들 자기 디바이스로 연재되는 플랫폼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플랫폼에 들어가 첫 화가 올라오기만을 기다렸다.
“올라왔다…!”
로웰이 그렇게 외쳤다. 다른 사람들도 다 들어가서 한 번 더 쭉 작품을 읽고 문제 사항이 없는지 체크했다. 그리고 댓글란으로 들어갔다.
도현이 로웰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로웰이 짝 소리가 나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
엘 드라카.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 국민여러분. 2127 RVB 엘 드라카 중계위원 이민아입니다. 현재 저희 중계팀은 메트로서울 과천구 웨스트이글의 홈구장 게헨-세나에 와있습니다. 응원 열기가 굉장합니다. 들리십니까, 여러분?]
오오~ 날아라, 웨스트이글~ 오오~ 이렇게 이어지는 웨스트이글 팬들의 노랫소리와 각종 악기와 나팔이 울리는 소리가 귀가 먹먹할 정도로 가득 찬 게헨-세나였다. 무려 7만 명의 관중이 만석을 이루어 앉아 있었다. 웨스트이글의 깃발인 파란색 바탕에 은색 방패, 그리고 그 위에 그려진 독수리 머리.
[어제 전야제의 뜨거운 분위기를 이어 드디어 개막! 비기닝 포틴의 퍼스트 먼데이! 과천구 게헨-세나에서 메트로서울의 웨스트이글과 메트로뉴욕의 <이스트호크>와의 빅매치!]
중계위원 이민아가 힘을 주어 말하자 와아아악!! 하고 엄청난 함성 소리가 퍼져 나가 서울의 밤을 울렸다. 이민아 중계위원보다 15살 정도 어리고 잘생긴 남자 캐스터가 안경을 다시 쓰며 자신의 스크린을 내려다보며 대본을 확인했다.
[맹금들끼리 만났네요, 맹금들끼리.]
[그렇습니다. 비기닝 포틴부터 유래없이 빅매치죠. 작년 엘 드라카, 무려 4강에 빛나는 우리 웨스트이글, 그리고 16강의 이스트호크가 비기닝 포틴, 퍼스트 먼데이 매치라니.]
[양 클럽 다 이번에는 우승하겠다고 엄청나게 벼렸을 텐데 8강 전을 비기닝 포틴에서 치르게 됐습니다. 대진표 나왔을 때 우리 웨스트칙들 다 때려 부수고 난리도 아니었죠. 제 차도 망가졌습니다. 아아, 제 건 줄 또 어떻게 아시고.]
[하하. 그 열기로 오늘 응원하고 이기면 되는 겁니다. 오늘 하루만 320개의 클럽들이 경기를 벌입니다. 160전. 그중 가장 주목을 받는 매치가 바로 게헨-세나에서 곧 벌어질 웨스트이글 대 이스트호크 전입니다. 선수들 좀 살펴볼까요? 웨스트이글….]
중계팀의 뒤로 화면이 바뀌며 사람의 얼굴이 크게 나타났다.
[센터 포워드, 9번 미르 킹쉴드!]
와아아아!!! 와아아악!!!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다른 경기장과는 다르게 TFC 경기장은 관중석의 기울기가 가파르고 더 높았다. 경기장 한가운데 커다란 정육면체 홀로그램이 변화하며 빛나는 플래티넘 블론드, 환한 아이스블루 아이, 2미터의 키에 쪼개질 듯한 근육질 육체! 미르 킹쉴드의 형상이 나타났다. 미르 킹쉴드, 등번호는 9번. 이번에 검은색으로 바뀐 전투복을 입고 있는 그가 한쪽 팔을 안쪽으로 당기며 몸을 풀고 있는 것이 그대로 보였다.
[킹쉴드 씨, 손 한 번 흔들어 주시죠!]
그러자 미르 킹쉴드가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며 짧게 미소를 지었다. 나팔소리가 귀를 찢을 정도로 울렸다.
[미르 킹쉴드… 세계 최고의 포워드죠. 방어력, 체력, 근성, 뭐 하나 떨어지는 게 없습니다. 근접전 실적 또한 세계 최고입니다. 메트로서울 출신의 미르 킹쉴드 선수는 15살에 아칸소로 가서 주로 대몬스터전에서 실전을 쌓은 후 웨스트이글 팀에 4년 전 영입되었습니다.]
[신체조건이 워낙 우수하고 소드오라가 강해서 근거리에서 바주카포를 쏴도 막을 수 있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도 나네요. 일단 손에 걸리기만 하면 아웃! 오늘도 기대해봅니다. 그다음은 레프트 포워드 11번 제수스 강!]
그렇게 웨스트이글의 선수들과 이스트호크 선수들을 한 번 쭉 살펴보고 난 뒤 광고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약 4분간의 광고가 끝나고 다시 중계팀이 화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오늘은 우리가 이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민아 중계위원이 그렇게 운을 뗐다. 대진표가 홀로그램으로 중계진 3인방의 앞에 떴다.
[맞습니다. 오늘 이기지 못하는 클럽은 오늘이 올해 엘 드라카의 시작이자 마지막이 되겠지만 이긴 팀은 다다음 주 세컨드 포틴을 맞이해야 합니다.]
[지금 양 팀 다 자기 클럽 최고 멤버들로 포메이션을 짰단 말이에요. 보통 비기닝 포틴에서는 볼 수 없는 조합이죠. 그런데 여기서 까딱하다가 주력 멤버가 다 부상을 입으면 이겨도 이기는 게 아니게 됩니다. 세컨드 포틴이나 써드 포틴이야 운 좋게 약팀을 만나 가볍게 지나간다고 치더라도 포스 포틴부터 약팀은 없습니다. 오로지 강자만이 남습니다. 강자들의 게임은 포스 포틴부터인데 비기닝 포틴부터 주력 멤버를 잃으면 양 클럽 다 올해 피날레는 물 건너간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양 팀 다 머리가 아플 거예요, 지금. 몸 사리면서 4강이나 16강까지 올라간 클럽을 무슨 수로 이긴답니까? 게다가 이제 비기닝 포틴이라 양쪽 다 아주 쌩쌩한데.]
그리고 보니 온통 파란색뿐인 경기장 안에 작게나마 노란색 기를 흔들고 있는 이스트호크 진영의 팬들이 있었다. 그들의 근처에 간혹 벌집 모양이 나타나며 웨스트이글 팬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올해부터 선수들의 헬멧에 도입된 대미사일 방어 쉴드 기술이 관중석에도 도입된 것이다. 저런 조치가 없으면 경기장 안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사람이 죽는 게 엘 드라카다.
[양 팀 전략부터 한 번 살펴볼까요?]
[지금 웨스트이글 포메이션은 아주 정석적입니다. 3-4-2로 디펜스의 미르 킹쉴드, 제수스 강, 가람 리한, 미드필드의 미하엘 로드리게스, 오펜스의 소강재를 중심으로 방어, 방어, 공격의 축을 잡고 시작하겠다는 거거든요. 그에 비해 이스트호크 포메이션은 조금 실험적입니다. 3-3-3. 이건 공격에 더 비중을 주겠다는 겁니다.]
[이게 지금 이스트호크가 몸을 사리겠다는 거예요. 마도사들의 공격력으로 시작하자마자 경기의 끝을 보겠다 이겁니다.]
[웨스트이글의 디펜스를 어떻게 보고. 미르 킹쉴드는 세계 2위의 선수, 세계 최고의 포워드이고 미하엘 로드리게스는 세계 5위,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하나란 말입니다. 아무리 봐도 이건 이스트호크가 영 작전을 잘못 가지고 나온 건데.]
[그래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게다가 이번에 이스트호크 주전에 루키가 2명이나 있어요.]
[하, 그렇습니다. 다른 스포츠 경기는 뉴비 같은 거 들어오면 그냥 들어왔나 보다 싶은데 엘 드라카는 가끔 뉴비들이 판도를 뒤집으니까 긴장을 놓을 수가 있나요.]
[작년 이스트드래곤 신태호 선수의 활약 이후론 다들 루키만 보면 지립니다, 지려.]
[아, 도쿄학살. 엄청났습니다. 직접 보고도 제 눈을 믿을 수가 없더군요. 인정합니다. 웨스트이글의 라이벌은 이스트드래곤입니다. 이스트호크가 이름이 비슷하다고 비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자, 이제 곧 경기 시작합니다. 2127 엘 드라카 리그! 비기닝 포틴 퍼스트 먼데이 매치! 웨스트이글 대 이스트호크! 경기~ 시작합니다!]
쾅!! 포워드들이 부딪쳤다. 경기 시작 휘슬이 불리자마자 경기장 한가운데서 대포가 터지는 소리 비슷한 게 울리며 경기장이 떠나가라 관중의 환성이 퍼져 나갔다.
엘 드라카.
강함, 젊음, 죽음, 승리의 축제가 시작된 것이다.
[죽여라!! 죽여! 저 병아리 새끼들 다 죽여 버려! 죽여!!]
[웨스트이글!! 가라!!! 죽여라!!!]
[킹쉴드!! 킹쉴드!!! 하, 한 명 아웃!! 와아아아악!!!!!!!]
[저 새끼! 저 새끼부터 잡아야 돼!!]
[경기 시작한 지 3분, 이스트호크의 레프트 포워드 10번 제롬 피셔가 아웃 되었습니다. 우리 쪽 포워드들이 육중한 거구에도 불구하고 기동력이 상당하죠. 9번 킹쉴드가 잡고 11번 제수스 강이 바디 블로우! 피셔 선수, 딱히 많이 다친 것처럼 보이진 않네요. 방어가 약한 이스트호크의 포메이션. 초반부터 문제를 보입니다.]
“오오. 오오오. 와! 진짜 조심조심….”
로웰 리는 TFC 진성 덕후였다. 전면 유리창이 전부 TV로 전환이 되는 1층 거실은 이제 로웰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로웰은 자기 집보다 화면이 다섯 배는 크다면서 엄청 좋아했다. 홀로그램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실물이 있는 디스플레이의 화소를 따라갈 수가 없다. 도현 킬스버그는 사실 TFC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엘 드라카 리그를 제대로 시청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도현은 노란 팀 선수가 자기 진영 가운데로 달려가는 파란 팀 선수의 발목을 잡아 바닥에 패대기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엄청난 힘이었다. 바닥이 움푹 파였다. 공중의 홀로그램과 선수의 위로 바로 타격 스코어가 바로 뜬다. 하지만 그는 움직일 수 있었다. 그의 손이 하얗게 빛나더니 위에서 아래로 세게 휘두르자 말로만 듣던 소드오라가 쿠콰광 땅을 긁으며 지나갔다. 노란 팀 선수가 몸을 날려 피했다. 그러자 공중에 몸이 떠서 기동력을 잃은 그를 노리고 멀리서 섬광이 날아오더니 그가 전기에 감전이 되어 파들파들 바닥에서 떨었다. 도현은 깜짝깜짝 놀라다가 슬금슬금 로웰의 쪽으로 갔다.
“와! 야! 오늘 웨스트이글 잘하네. 와. 와. 날아다닌다. 으… 와…! 진짜 아깝다. 안 죽었네.”
“…….”
그러자 도현은 어쩔 수 없이 반대쪽으로 엉덩이를 옮겨 슬금슬금 송선호에게 붙었다. 딱히 열성 팬은 아닌지라 심드렁한 얼굴로 경기를 보고 있던 송선호가 맥주를 마시다 깜짝 놀라서 약간 뿜었다.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왜 이래?”
“어? 아니… 좀….”
게다가 더 무서운 건 이번이 미르 킹쉴드가 소속된 팀의 경기인 데다가 미르가 포워드라는 포지션이었기 때문에 몸으로 다른 선수들과 부딪치면서 아슬아슬한 장면을 많이 만들어낸다는 것에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아는 얼굴이 저런 위험한 상황에 있으니까 걱정이 되어서 자꾸 움찔거리게 되었다.
“어머, 미르…!!”
[미르 킹쉴드! 원거리 저격에 맞았습니다. 리미트…! 넘지 않았습니다. 강해 보였는데 안 넘었네요. 이번 대미사일 쉴드 기술이 접목된 헬멧 정말 좋군요. 예전이었으면 아마 머리에 맞는 순간 목이 꺾였겠죠.]
[아, 그런 무서운 소리 하지 마세요, 브랜든 캐스터. 미르 킹쉴드는 우리 웨스트이글의 소중한 선수입니다. 다행히 스코어는 얼마 안 되는군요. 아웃되지 않았습니다.]
미르는 머리가 띵한지 잠깐 무릎을 잡고 숨을 골랐다. 저쪽 포워드가 하나 모자라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는 상대편 미드필더 하나를 잡았다.
[아웃! 킹쉴드 바로 복수하네요!]
도현은 비명을 지르며 송선호의 셔츠를 거의 찢을 듯이 움켜쥐었다. 도현의 얼굴이 거의 새파래졌다.
“나 이거… 안 맞는 거 같아.”
“보기 싫으면 방에 들어가 있어.”
“이거 생중계지? 무섭다….”
물론 그새 로웰은 투덜거리고 있었다.
“아니, 전투복이랑 헬멧 잘 나왔으면 마도사들 마법제한 좀 풀라고, 이 미친 새끼들아. 팬들이 우습냐!”
금색 삐삐 머리를 가진 아동 만화보다 더 만화 캐릭터같이 생긴 여자가 경기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겠다고 테이블 앞 바닥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하는 말이었다.
“방에… 데려다줄까?”
송선호는 약간 주저하다가 경기 화면을 보며 무심한 척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경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대꾸했다.
“가고 싶은데… 무슨 일 일어날까 봐 무서워서 더 눈을 못 떼겠어.”
도현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뭔가 의지할 것이 필요한지 점점 송선호의 팔을 온몸으로 껴안았다. 그건 좀 곤란해서 송선호는 그녀를 밀어내려고 했다.
“야…! 야, 잠깐만. 잠깐만! 야…!”
다 닿는다. 다 닿아…. 윽, 씨발. 집에선 속옷도 제대로 안 입는 그녀다. 얇은 박스티 하나나 셔츠로는 여체의 부드러운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손이 떨린다. 긴장이 되어서 약간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아슬아슬하게 이스트호크 13번 미르셀라와 16번 마츠모토 체인지! 와, 이스트호크 작전을 이렇게 가지고 나오나요. 아웃되기 전 또 선수 교체! 벌써 4명째입니다! 32강 이후에나 써야 할 작전을 지금 쓰네요. 저렇게 선수들 소비하다가 나중에 괜찮겠습니까?]
[엘 드라카에 나중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이겨야 나중도 있는 거죠. 그만큼 우리 웨스트이글이 강팀이라는 겁니다. 아, 이스트호크가 오늘 포메이션부터 안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모르겠는데요? 몸을 사리는 줄 알았던 이스트호크가 전부 불사릅니다! 이스트호크 3명의 마도사, 강력합니다. 우리 포워드가 원거리 히트를 많이 맞아서 생각보다 아슬아슬한데… 경기 계속 진행됩니다.]
[16번 빌 마츠모토, 22세. 3년 전 2124년 엘 드라카 슈퍼 루키 중 하나였죠. 아웃이 안 돼, 아웃이.]
[막강한 체력. 포워드로 그것보다 나은 능력이 또 없습니다. 그 뒤 다소 부진했는데요. 네, 마츠모토 선수, 우리 쪽 미드필더 준 필립을 집중 마크합니다.]
웨스트이글이 8명, 이스트호크도 초반에 아웃된 두 명을 제외한 7명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잔디밭은 쑥대밭이 된 지 오래다. 이스트호크의 남은 미드필드 및 포워드 4명이 결사항전하여 웨스트이글의 전진을 막는 사이 3명이나 되는 오펜스가 미친 듯이 공격을 난사하고 있었다(저건 자기 팀이 한 번쯤 맞아도 눈 감겠다는 뜻이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이스트호크의 디펜스에 잡혀 기동력을 잃은 웨스트이글 선수가 타격을 입었다. 물론 웨스트이글 마도사들도 노는 것은(하지만 오펜스는 상대편 오펜스를 공격하는 게 불가능하다) 아니라 확실하게 타격 스코어를 올리고 있지만 아슬아슬할 정도로 맞은 이스트호크 디펜스가 교체되어 쌩쌩한 새 선수가 다시 들어온다는 게 문제였다. 선수들이 아웃되는 최고 스코어는 선수들마다 달랐다. 선수 본인의 체력, 디펜스 능력(소드오라나 쉴드 마법), 전투수트의 기능을 모두 합하여 정말 죽지 않을 정도로 타격받으면 아웃된다.
[미하엘 로드리게스, 달립니다. 상대편 진영 중앙으로 침… 아, 잠깐! 아…! 아! 이건…! 네. 원거리에서 이스트호크 4번 자넷 블록이 엄청난 명중률로 준 필립 아웃시키네요. 이건 우리 쪽 실수입니다. 미드필더가 기동력을 잃으면 어떡합니까. 마츠모토를 빨리 제꼈어야죠. 아, 이러면 안 되는데요. 아, 진짜… 부상은… 아, 네. 다행히도 부상은 심하지 않습니다. 걸어 나갑니다.]
“악!”
도현이 카우치와 송선호의 사이로 거의 들어가려고 했다. 분명히 몇 번이나 떨어지라고 말했는데도 안 듣는다. 송선호는 인상을 팍 구겼다.
‘씨발…. 진짜 이건 내가 남자로 안 보이나….’
“야, 좋은 말로 할 때 떨어져라. 어? 야, 이 씨… 떨어져. 빨리 안 떨어져?”
송선호가 화가 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도현이 여전히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겨우 떨어졌다. 경기가 계속 진행되었다. 7대 7. 아주 난전이다. 쿠웅!! 누군가 날아가 관중석의 쉴드에 처박혔다. 그런데도 아웃되지 않고 곧바로 쉴드를 박차고 경기장으로 돌진했다. 쉴드 위에 핏자국이 선명하다. 간발의 차로 그 핏자국 위에 공격 마법이 꽂혔다. 콰광! 그러다가 곧 도현이 비명을 지르며 송선호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아!! 어떡해! 어떡해!!”
[아…! 안 되는데…!! 어! 아!!! 킹쉴드 아웃! 이 개…! 씨…!! …예… 이스트호크 팀 미드필드 둘에 오펜스 하나까지 가세, 킹쉴드 아웃입니다! 부상인 것 같죠?]
[네. 아아! 미치겠네요. 아, 킹쉴드는 안 되는데. 이스트호크 끈질깁니다. 아, 네. 지금 정보 들어옵니다. 미르 킹쉴드… 네, 4급 부상이라고 합니다. 갈비뼈 두 대 나갔네요.]
[포워드가 갈비뼈 두 대면 심각한데요?]
[만약 오늘 경기를 이기면 클럽에서 마도의사라도 불러서 분명히 고칠 겁니다. 킹쉴드가 없으면 웨스트이글 포워드가 확 약해진단 말이에요. 세컨트 포틴은 킹쉴드를 세이브 하고 24번 카루스 쇼를 내보내고 써드 포틴을 위해서 휴식을 취하게 해야 할 겁니다. 웨스트이글 9번, 미르 킹쉴드 2명 아웃시키고 3명 타격 스코어 올리고 나갑니다. 오늘도 좋은 기록이네요.]
[말씀하시는 사이 미하엘 로드리게스 드디어 중앙 침투! 히…트가…! 성공!!! 네. 아웃! 상대편 오펜스! 마도사 하나를 아웃시켰습니다. 이스트호크 4번 자넷 블록!! 아웃!!! 이제 승기가 기우나요!]
다른 선수들에 비하면 현저히 키가 작은 웨스트이글의 미드필더 미하엘 로드리게스가 전광석화와 같이 달리더니 아까 준 필립을 아웃시켰던 마도사를 덮쳐 굴렀다. 딱히 다른 공격을 하지 않아도 그대로 아웃이었다. 미하엘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었다.
[아, 다행입니다. 이스트호크 정말 강하네요. 2126년 엘 드라카 16강에 빛나는 이스트호크! 얕잡아 볼 상대는 분명 아니었습니다.]
승기가 기우는 순간 확실하게 몰아붙여야 빠르게 이긴다. 웨스트이글은 그 순간 전체 진영을 전진시켜 상대편을 압박했다. 미하엘 로드리게스가 상대편 마도사를 한 명 잡은 이후 10분 만에 결판이 났다. 상대편 디펜스가 결국 소진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웃! 아웃! 아웃!!! 네! 경기 끝났습니다!!! 웨스트이글이 승리했습니다!!! 메트로서울 홈!! 게헨-세나에서! 메트로서울 클럽 웨스트이글!! 우리의 웨스트이글!! 우리의 홈구장 게헨-세나에서!! 이겼습니다!!! 날아라, 웨스트이글!!!!]
거대 도시를 연고지로 하는 클럽이 강팀을 상대로 홈에서 승리를 했으니 그야말로 떠나가라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악!!! 와아아아아!! 웨스트이글!!! 사람들은 옷을 벗고 나팔을 불고 울고 소리를 질렀다. 커다란 폭죽이 터져 올랐다. 그 환성을 뒤로하고 중계팀이 겨우 흥분을 가라앉히고 마무리를 짓기 시작했다.
[오늘의 영웅은 미하엘 로드리게스네요. 이번 이스트호크 전, 무려 7명에 타격 스코어에 3명 아웃, 그중 둘은 본진의 마도사. 대단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올 엘 드라카에서 그의 활약을 더욱 기대해볼 수 있겠는데요?]
[네, 네…! 그렇습니다. 아, 흥분이 가시지 않습니다…! 홈에서 이런 경기 너무 오랜만이지 않습니까? 역시 강팀은 강팀과 붙어야지 이런 경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게다가 부상 없는 주력 멤버들끼리 이런 자웅을 겨룰 수 있다니…. 아, 좋았습니다. 멋졌습니다. 양 팀 다 너무나 멋졌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스트호크… 이스트호크. 좋은 경기였습니다. 아쉽습니다. 내년 엘 드라카에서는 좀 더 나중에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단 우리 팀 선수들 부상관리 잘하고 컨디션 조절하는 데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이스트호크를 만났긴 했지만 퍼스트 먼데이 매치라 운이 좋았습니다. 추첨이 잘 나와서 미들 선데이 전에 걸리면 좋겠는데요. 킹쉴드 선수한테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좀 더 주고 싶은데.]
그 뒤로 중계진은 웨스트이글과 이스트호크 매치를 좀 더 분석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현재 매치가 진행되고 있거나 끝난 주요 클럽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다. 여전히 떠나가라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게헨-세나였다.
“하아….”
도현은 거의 송선호의 무릎에 올라타 있었다. 송선호는 양손을 위로 든 채로 난처한 얼굴(완전 찌푸렸다)을 하고 있었다. 도현은 양손으로 잡고 있던 송선호의 셔츠를 놓으며 안도감에 허, 하고 힘 빠진 소리를 냈다.
“아무도 안 죽었다….”
미르 킹쉴드 아웃 이후로 로웰의 욕설과 도현의 비명으로 송선호도 귀가 아팠다. 로웰이 도현의 말을 들었는지 웃으면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엘 드라카 맛에 중독된다니까요, 작가님.”
“진짜요, 선생님? 내가 죽겠는데? 지금 손 떨려요.”
도현은 진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건 영화도 드라마도 아니고 실전이었다. 카메라에 붉은 피와 살이 튀기는 게 그대로 보이는 그야말로 살육제(殺肉祭). 로웰도 긴장을 하긴 했는지 맥주 반 캔을 꿀꺽꿀꺽 다 마셔버리고 캬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렇게 아무도 안 죽었다는 거에 안도하다 보면 나중에 남의 팀 선수 하나 죽어도 우리 팀 아니라서 다행이다 싶고, 우리 팀 선수 하나 죽으면 울고불고 난리 치다가 분노하고 다음에 기필코 복수하자고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가 리턴 매치에서 진짜로 복수하면 엄청 짜릿하고 그러거든요.”
“그런 건가….”
어쨌든 소리를 한참 지르다 보니 뭔가 후련함은 있긴 했다. 온몸을 달리던 아드레날린이 소진되고 난 후의 노곤함과 개운함. 로웰은 중계진의 설명을 들으며 스크린을 공중에 띄워 오늘 경기를 한 320개 팀 중 유명 클럽들의 결과를 확인했다.
“…근데 선생님은 웨스트이글 팬이세요?”
이렇게 열성적 팬 치고 처음 미르 킹쉴드를 만났을 때의 반응이 약했던([우오오오! 오오오오!!]) 것 같다. 도현의 질문에 로웰이 올 게 왔다는 태도로 후훗, 하고 웃더니 대답했다.
“저… 한하 팬이요.”
“아… 대전팀?”
메트로서울 웨스트이글이야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강호 팀이지만 나머지 도시들 클럽이야 사실 국내 전을 치를 때나 가끔 미디어를 타지 별 볼 일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대전을 연고지로 하는 한하는….
“저희 한하는 웨스트이글이 쓰는 전투수트를 똑같이 입기 때문에 부상자가 적다는 장점이 있어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제 새끼들 안 다치고 올해 비기닝 포틴도 무사하게 지나가면 그것만으로 소임을 다 한 거예요.”
로웰은 마음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포워드가 그냥 한 대 맞으면 아웃 되는 찌질이들뿐이라 그렇지 국내전 하면 꼴등은 아니라니까요, 꼴등은.”
“경기 언젠데요?”
“라스트 선데이요. 운도 없죠, 한하… 허허. 그래도 세컨드 포틴 갈 일은 없는 애들이니까 됐어요. 상대팀 보니까 런던 <레드폭스> 클럽이더라구요. 허허. 5분 버티면 제가 한하골드너 기부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생각입니다.”
로웰은 그러고 쭉 한하 클럽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게 밑도 끝도 없이 장황해지기 시작하자 도현도 좀 듣다가 당황했다. 이게 엘 드라카 진성 팬인가. 본업도 만화가다 보니 아주 클라스가 다르다.
“…이제 좀 내려와라.”
송선호가 여전히 양손을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렇게 도현에게 말했다. 그녀는 아직도 몸이 덜덜 떨려서 겨우 카우치에 내려갔다.
“미르 씨… 많이 다친 건 아니겠지?”
도현이 그렇게 걱정하자 송선호가 말했다.
“갈비뼈 두 대면 부상치고 양호한 거지.”
“그런 거야?”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죠, 편집장님.”
“그래도….”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저런 걸로 먹고 사는 남자를 잘도 협박했다는 생각이 든다. 도현은 금방 기절해서 실려 나가던 미르 킹쉴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게 다친 걸 보니 인간적으로 조금 걱정이 되었다.
‘나도 돈이 급했다고는 하지만….’
이번에 작품을 준비하면서 알아본 바로는 TFC 선수들의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녹록한 게 아니었다. 명과 암이 너무나 극명하게 대비되는 삶.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나 좋아하는 것일까? 도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만히 화면을 보고 있다가 디바이스를 들었다.
<킹쉴드 씨… 괜찮아요? 연락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많이 안 다친 거면 좋겠어요. 걱정돼요. 잘하는 것도 좋지만 조심해요.>
그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
“으윽! 씨발…. 윽…! 아!!!”
아파. 아파.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아파서 죽을 것 같아.
“킹쉴드, 킹쉴드! 야, 잡아. 잡아. 묶어.”
“씨발! 정신 차려, 이 병신 새꺄! 진짜 죽고 싶냐?!”
갈비뼈가 두 대 나간 것이 결국 폐를 찔렀다. 게다가 경기 중반쯤 머리에 맞은 공격 마법이 심하게 뇌진탕을 일으켰다. 모르핀 계열 진통제는 죽어도 안 맞겠다고 해서 다른 진통제를 맞았지만 아직 효과가 나타나려면 멀었나 보다. 전에 한 번 부상을 심하게 입었을 때 의사고 간호사고 다 던져서 다치게 하는 바람에 이번엔 동료 선수들이 그를 아예 침대에다 묶어버렸다. 당연히 그냥 노끈 같은 걸로는 안되고 이럴 때를 대비한 마도구를 이용했다.
특제 침대의 양쪽에다 마법이 깃든 수갑을 채운 것도 모자라 어깨와 허벅지도 침대에다 묶었다. 이마도 고정했다. 침대도 당연히 마법으로 강화한 것이다. 침대가 펄쩍펄쩍 뛰어서 선수들이 잡고 있어야 했다. 오늘 주전으로 뛴 포워드들뿐만 아니라 벤치에 있던 포워드들도 다 같이 도왔다. 그때 옆에서 약간 긴장해서 서 있던 의사의 인공지능 비서로 연락이 왔다.
[마도의사 수잔 킴 선생님 도착하셨습니다.]
“네, 옮깁시다.”
마도의사가 도착했다. 메트로서울 국립병원의 VIP 병동은 이미 엘 드라카에 출전하는 선수들을 위해 싹 비워 둔 상태였다. 여기저기 선수들이 꽉 차 있었다. 흉부외과 의사 하나와 정형외과 의사 하나, 외부에서 초청된 마도의사가 같이 수술실에 들어갔다. 선수들이 수술실 앞까지 침대를 밀어주고 외부에서 마취를 시킨 후 그가 잠잠해지자 그제야 침대에서 손을 뗐다.
“아, 징한 새끼. 부상만 입으면 저 지랄이야.”
정밀검사를 받고 나온 미하엘 로드리게스가 미르 킹쉴드한테 한 대씩 얻어맞아 부상이 영 악화된 것 같은 포워드들을 보고 혀를 찼다. 웨스트이글 레프트 포워드 제수스 강이 앓는 소리를 했다.
“씨발놈아, 보이면 좀 도와라.”
“저 새끼 덩치를 봐라. 내가 저걸 어떻게 잡냐?”
미하엘은 오늘 부상이 거의 없었다. 왼팔에 실금이 세 개 정도 가고 여기저기 멍이 좀 든 정도였다. 요새 컨디션이 아주 좋아 날아다닌다. 미하엘 로드리게스는 웨스트이글 선수들 중에 제일 기동력이 좋은 선수였다. 팔에 홀로그램 장치까지 되어 있는 깁스를 하고 있다. 다 나을 때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뭘 조심해야 하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 매니저 둘이 여기저기 전화를 하며 무언가를 알리고 있었고 의사가 그의 몸에 든 멍을 다시 살피고 있었다.
“제수스 강 씨도 이리 오세요.”
그리고 의사가 제수스 강을 불렀다. 불타는 빨간 머리, 키가 2m에 달하는 데다가 덩치는 미르 킹쉴드보다 더 큰 제수스 강이었다. 의사도 키가 170은 되어 보이는데 반의반만큼도 안 되어 보였다. 제수스 강은 의사의 얼굴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정밀 검사실로 가시죠. 아직 안 받으셨죠?”
의사는 간호사들을 시켜 제수스 강의 전투복을 해체했다. 부상이 잦은 TFC 경기 특성상 전투복은 벗는 형식이 특이했다. 매니저가 간호사에게 특수 리모컨 같은 것을 건네자 그들이 리모컨 레이저로 전투복을 조각냈다. 그렇게 부위별로 차근차근 전투복 조각들을 떼어냈다. 제수스 강은 가만히 양팔을 벌리고 서서 그걸 받으면서 의사에게 집적거렸다.
“의사 선생님 몇 살이야?”
뇌의 이상을 살피기 위해 까치발을 들고 제수스 강의 눈에 불빛을 비춰보던 의사는 이런 집적거림이 익숙한지 대답도 하지 않고 의료용 멀티스크린에다가 정보를 기록했다.
“이쪽 보세요.”
제수스 강의 한쪽 눈은 핏줄이 터져 있었다. 대미사일 쉴드기능이 들어있다지만 지반에 고정되지 않는 쉴드는 결국 얼굴에다 진짜 튼튼한 헬멧을 씌워 놓은 거랑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강한 충격으로 안에서 흔들려버리면 결국 다친다.
“몇 살이냐니까.”
“아~, 해보세요.”
팔과 어깨의 전투복이 대충 떨어지자 제수스 강은 그녀의 허리에 은근슬쩍 팔을 감쌌다. 그러자 의사가 눈살을 확 찌푸렸다.
“이래서 TFC 선수들은… 손 안 떼면 고소할 겁니다.”
“아, 치사하게.”
“아까 전에 조나단 훅 씨가 한 말이랑 토씨 하나 안 틀리네요.”
라이트 포워드인 조나단 훅의 이름을 거론하자 제수스 강이 약간 자존심 상한다는 얼굴을 했다.
“헐, 내가 그 땅꼬마 새끼랑 여자 꼬시는 방법이 똑같다고?”
“이게 꼬시는 겁니까? 성희롱이지.”
키가 188인 조나단 훅을 땅꼬마라고 부르는 제수스다. 전투복을 다 벗기자 온몸에 피멍이 들었지만 엄청난 근육질의 몸이 드러났다. 속옷만 입고 있으니 더 두드러졌다. TFC 선수들은 경기를 하고 있을 땐 흥분 상태라 부상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흥분이 가라앉고 나면 픽픽 쓰러지는 경우가 있었다. 덩치 큰 간호사들이 제수스 강을 데리고 천천히 정밀 검사실로 향했다.
“아니, 의사 선생님이 너무 내 스타일이라서.”
“아까 조나단 훅 씨도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 걔는 왜 따라 하고 지랄이야!”
“그렇게 흥분하지 마세요. 내출혈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의사는 제수스를 파란빛이 나는 캡슐에다 집어넣었다.
“가만히 계세요.”
그러자 아래위로 윙윙하고 파란 불빛이 번쩍번쩍하며 온몸을 찍자 제수스를 데려온 의사뿐만 아니라 검사실에 위치한 의사까지 합해 세 명이 거대 화면에 나타난 검사결과와 영상을 보았다.
“좌상완 근육이 용해되고 있네요. Q3 투약 준비해주세요.”
강한 타격 때문에 근육 손상이 심각하여 용해가 진행되고 있었다. 제수스를 데려온 의사가 간호사에게서 주사를 받아 위치를 살피고 그의 어깨에 팍 찔렀다.
“우악…!!”
엄청 아프다. 너무 아파서 제수스는 숨이 헉 막혔다. 의사는 무심하게 말했다.
“두 대 더 맞아야 해요.”
“자, 잠깐만, 악! 윽….”
왼쪽 이두와 삼두, 그리고 오른쪽 허벅지에 주사를 맞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진통제 때문에 아픈지도 모르고 서 있었던 제수스였으나 온몸에 열이 올라 땀을 후두둑 흘릴 정도로 고통이 밀려왔다.
“이, 씨발…. 아윽….”
“모르핀도 주세요.”
그러자 정량으로 맞춰져 있는 모르핀을 정맥주사로 놓았다. 곧 제수스가 숨을 길게 내뱉었다. 온몸에 근육이 풀어지는 듯하면서 아찔한 도취감이 몰려왔다. 간호사가 그의 코와 입에 산소마스크를 댔다. 다른 간호사가 그가 앉을 수 있는 휠체어를 가지고 왔다. 제수스 강은 휠체어에 앉아 병실로 옮겨졌다. 그때 수술실 앞 전등이 꺼지고 미르 킹쉴드가 실려 나왔다. 역시 마도의사가 있으니 수술도 순식간이었다. 수잔 킴이라는 의사는 시계를 보며 나왔다. 그녀의 옆으로 비서가 붙었다.
“아슬아슬하게 다음 예약 시간 맞출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오케이.”
그렇게 말한 그녀는 바로 수술 마스크와 수술복을 벗어 던졌다. 뒤에 있는 사람들이 그걸 얼른 챙겼다. 미르를 담당한 의사에게 빠르게 말했다.
“아마 일어나면 엄청 기분이 안 좋을 겁니다. 원래 마법이 소드마스터들이랑 별로 안 맞아서 구토감이랑 어지러움이 심할 거예요. 피 같은 붉은 덩어리 토하고 나면 구토감은 나아질 겁니다. 마력액 나올 때까지 이틀은 걸릴 거고. 뼈와 장기, 살은 깨끗하게 붙었어도 면역작용 잦아들려면 며칠 시간이 걸려서 붓기 가라앉을 때까진 통증도 꽤 심할 겁니다. 모르핀 항상 투약해주세요.”
“아, 킹쉴드 씨는 모르핀 투약을 거부 하셔서….”
“그럼 펜타닐….”
“아편계는 전부 안 됩니다.”
“TFC 선수가 별 걸 다 따지네.”
수잔 킴이 그렇게 투덜거렸다.
“그럼 바이코딘이라도. 통증 정도 따라서 적당히만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수잔 킴은 곧바로 옥상으로 향했다. 비행 차를 타고 다음 스케줄로 향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르 킹쉴드는 VIP 병실에 여전히 묶인 채로 옮겨졌다. 3시간쯤 지나니 그가 일어났다.
“괜찮습니까, 킹쉴드?”
매니저가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의사랑 간호사들이 상태를 체크했다. 산소마스크를 뗐다. 미르는 허억, 하면서 숨을 들이마셨다.
“네. 계속 크게 숨 쉬세요, 킹쉴드 씨. 멈추시면 안 됩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동공반사를 확인하고 환부를 살폈다.
“환부는 흉도 하나 없이 잘 붙었습니다. 그래도 당분간 통증은 심할 거라고 하구요. 구토감이랑 어지러움이 심할 거라고 합니다. 뇌진탕도 있고 마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악… 윽…. 씨발… 존나 아프잖아. 아윽….”
미르는 자신의 팔을 풀려고 했다. 아까와 달리 숨쉬는 건 괜찮아졌으나 다친 부분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인 데다가 머리도 장난 아니게 아팠다.
“1ml만 더 투여합시다.”
그러자 간호사가 링거액에 주사를 꽂아 진통제를 넣었다.
“더 넣어, 씨발! 죽겠으니까!”
미르가 화를 냈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1ml를 더 넣었다.
“그리고 이거 풀어! 뭐 하는 거야!”
“안 됩니다, 킹쉴드. 풀어주면 여기 못 있습니다. 쫓겨납니다.”
작년 엘 드라카 4강에서 패했을 때도 부상이 심각했던 미르 킹쉴드가 여기 의사 하나를 거의 죽일 뻔했다. 통증이 심한 동안에는 절대 벨트 못 푼다.
“아악!! 헉…! 윽…!!”
미르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의사가 진통제를 더 투여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다들 나갔다. 매니저는 남고 곧 구단 관계자들이 들어와 미르의 상태를 살폈다.
“2주 동안 다 나을 수 있을까? 못해도 4주 안에는 나아야 하는데.”
웨스트이글 감독인 요셉 스튜어트가 미르의 의료정보를 보면서 쯧 하고 혀를 찼다.
“아~, 선수 교체하려고 했는데. 그 개새끼들이 떼거지로 달려들어 가지고.”
스튜어트 감독은 캡 모자를 벗으며 자기 미간을 검지로 긁적거렸다. 감독은 미르의 환부를 들쳐보았다. 칼 대서 흉부를 갈랐을 텐데도 흉터 하나 남지 않았다. 다만 환부가 벌겋게 부풀어 올라서 열이 뜨끈뜨끈했다.
“모르핀 그냥 맞자, 킹쉴드.”
감독이 고통에 혀라도 깨물 것 같은 미르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얼굴과 눈까지 벌겋게 된 미르가 화를 냈다.
“안 맞아, 씨발!! 이거나 풀어, 이 개새끼야!!”
“야, 이러다 너 말고 우리도 다 쫓겨나. 좀만 참아, 좀만. 그래도 하루 지나면 이 정도까진 안 아파.”
“헉…! 씨팔새끼가 지가 아픈 거 아니라고! 아윽!!”
“야, 이거 약 안 도는 거 아냐? 왜 이러냐?”
“뇌진탕까지 있어서 그래요. 머리도 깨질 것 같을 걸요, 지금.”
매니저가 속닥거렸다. 감독은 한숨을 쉬고는 미르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루만 딱 참아, 하루만. 그러면 좀 나아진다.”
그리고 감독은 다른 선수들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나갔다. 매니저는 미르의 옆에 앉아서 그를 위로했다.
“진짜 감독님 말대로 하루만 지나면 그래도 좀 나아질 거예요.”
“하아… 윽…. 아. 으윽….”
그의 얼굴이 땀으로 다 젖었다. 매니저는 그에게 물었다.
“여자친구분들 병문안 오신다는데 언제 오시라고 할까요?”
“그… 씨발년들 여기 오면 더 짜증나…. 헉….”
작년에도 기껏 병문안 온다고 해서 들여보냈더니 지들끼리 내내 수다 떨고 디바이스나 보고 있는 게 다였다. 아픈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카흐 밀란 씨랑 치엔이 루카스 씨가 문자 주셨는데요. 살아 있냐고.”
“씨팔새끼들, 지들이나 나자빠지지 말라고 해. 헉. 아윽….”
“넌 죽어도 되는데 의사는 죽이지 말라네요. 나는 살아야 하니까. 참, 루카스 씨도 말씀을.”
“개새끼들….”
미르는 웃을 여력도 나지 않았다. 매니저는 그러다가 말했다.
“처음 보는 이름이네요. 도현 킬스버그 씨가 괜찮냐고 연락 주셨네요. 잘하는 것도 좋지만 몸 조심하라고…. 새 여자친구세요?”
“으윽…. 하… 줘봐. 뭐라고 보냈는데.”
매니저는 묶여 있는 미르의 눈앞에 디바이스 화면을 보여주었다.
<킹쉴드 씨… 괜찮아요? 연락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많이 안 다친 거면 좋겠어요. 걱정돼요. 잘 하는 것도 좋지만 조심해요.>
미르는 고통 때문에 짜증과 분노가 머리끝까지 쌓인 상태였다. 아파 죽겠는데 움직이지도 못하게 사람을 이렇게 묶어 놨다.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미르는 약과 고통에 취해 화를 냈다.
“그 여자 불러. 씨발. 당장 불러.”
“음… 네. 알겠습니다.”
새 여자친군가 보네. 다른 걸즈랑 같이 사는 건 아닌가 보다. 매니저는 미르의 디바이스로 전화를 걸었다.
“아, 네. 안녕하십니까. 도현 킬스버그 씨 되십니까?”
미르는 아파서 신음과 욕설을 뱉다가 전화가 연결되자 귀를 기울였다.
“아, 네. 네. 저는 킹쉴드 선수 매니저 박샘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킹쉴드 선수가 지금 병원으로 당장 오시라고 연락드리라고 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다 들을 수 있을 텐데 약에 취해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뭐라고 대답을 한 모양이었다. 매니저는 마이크 부분을 막고 약간 당황한 얼굴로 미르에게 말했다.
“지금은 못 오신다는 데요. 마감이 어쩌고….”
미르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화를 냈다.
“아!! 그딴 거 집어치우고 당장 오라고 해! 돈이든 뭐든 다 줄 테니까!!”
매니저는 그 말을 전했다. 그리고는 엄청 난처한 얼굴로 다시 마이크를 막고 말했다.
“그래도 안된답니다.”
“아악!!! 윽… 헉… 씨발….”
미르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가 흉부가 압박되며 엄청난 고통이 밀려오자 끙끙거리며 꿈틀거렸다. 묶여서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미르는 겨우 이를 꽉 깨물고 고통을 참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그럼 언제 올 수 있는데….”
그러자 매니저가 다시 마이크에서 손을 떼고 물었다.
“아, 네. 그럼 언제 오실 수 있으시냐고 킹쉴드 씨가 물으십니다. 네. 아, 네. 네. 알겠습니다. 네? 아. 아… 지금 킹쉴드 씨가 부상 때문에 힘들어하셔 가지고…. 보내신 메시지 보시더니 연락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그러고는 매니저가 통화를 끝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미르를 돌아보았다.
“여자친구 아직 아닌가 보네요. 왜 부르냐고 묻던데.”
“그래서 온대, 안 온대!”
“오신답니다. 오늘내일은 안 되시고 모레 오전 11시에 오신답니다.”
“씨발… 맨날 집에만 처박혀 있는 게 무슨 시간이 없다고…. 아윽… 죽을 거 같아.”
“하루만 참으시면 진짜 나아질 거예요. 전에도 마도 수술받은 소드마스터 본 적 있는데 딱 킹쉴드 같았어요. 부상 입은 것보다 더 죽으려고 하더라구요.”
*
“어디 가세요, 작가님?”
로웰이 엘 드라카 광팬이다 보니 이러다 까딱하면 시즌 내에 연재를 펑크 낼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녀가 꼭 봐야 할 때를 제외하곤 TV를 엄금하고 있었다. 소설도 한 달 뒤부터 연재에 들어가기 때문에 몇 번이고 다시 고치고 뒷얘기도 한창 쓰고 있는 도현이었다. 매일 집순이만 하고 있는 두 여자다 보니 항상 입는 옷이 거기서 거기였는데 오랜만에 도현이 미용실까지 다녀와 단정하게 투피스를 입고 귀걸이를 하는 걸 보고는 로웰이 그렇게 물은 것이다.
“아니, 미르 씨요. 많이 안 좋은가 봐요. 갑자기 병문안 오라고 매니저 통해서 연락을 하더라구요.”
“아, 진짜요? 갈비뼈 두 대만 나갔다더니…. 뭐가 더 있었나? 큰일이네….”
로웰은 이미 우승팀으로 웨스트이글을 찍고 스포츠복권을 잔뜩 산 상태였다. 국내 팀이라는 애정 반, 요새 웨스트이글의 기량이 최고라는 분석 반으로 산 복권이었다. 돈 한 푼 없는 상황이라 당첨금에 잠시 눈이 돌았다.
무릎까지 오는 남빛이 섞인 짙은 파란색 치마는 앞뒤 가운데가 허벅지까지 트여 있었고 민소매에 세로로 예쁘게 주름이 잡힌 아이보리색 실크 상의는 V자로 목이 파여 은근히 섹시하면서도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도현은 가느다랗게 세공된 금줄에 다이아가 하나 달린 팔찌와 목걸이, 귀걸이를 세트로 하고선 가방을 들었다. 남빛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펴서 한쪽으로 내렸다.
“이것저것 다 팔아서 요새 하고 다닐 게 마땅치 않네요.”
“엄청 예쁜데요.”
로웰은 엄지를 치켜들며 송선호가 해놓은 음식이 있나 확인하러 부엌에 들어갔다. 새벽까지 마감을 하고 잠들었다가 지금 일어났더니 배가 엄청 고팠다. 손목에 찬 클래식한 하얀 가죽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도현은 급하게 구두를 들고 현관으로 갔다.
“늦었어요. 저 갔다 올게요, 선생님!”
“올 때 메로나요.”
“네~.”
차도 팔았다. 저번 달 인세가 정산되어 다음 달 중반에나 들어오기 때문에 저번 달은 로웰의 도움을 받아, 이번 달은 차랑 그녀가 가지고 있는 명품들을 팔아서 겨우 이자를 낸 도현이었다. 도현은 9cm의 하얀색 스트레토힐을 신었다.
‘음! 오랜만에 이러고 나오니까 상쾌하고 좋네.’
척척 걸어가서 미리 불러놓은 자율주행 리니어카를 타고 메트로서울 국립병원으로 향했다. 디바이스에 등록된 카드(로웰 거)로 운임을 계산했다. 리니어카는 가고 도현은 거대한 종합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병실이… 1211A호….”
도현은 디바이스를 통해 방문증을 받고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12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와… 여기 VIP 병동은 이렇구나….”
도현은 복도의 넓이와 디자인부터 다른 VIP 병동을 둘러보았다. 게다가 딱 봐도 TFC 선수인 남자들이 드글드글 했다. 그들이 휘파람을 휘익 불렀다.
“처음 보는데. 어디 아가씨야?”
왼팔에 테이프 질을 엄청 해놓은 빨강머리 하나가 그렇게 물으며 도현에게 다가왔다.
“예쁘다. 이름 뭐야?”
“미르 킹쉴드 씨 찾아왔는데요. 1211A면 이 근처일 거 같은데….”
“아, 킹쉴드? 지금 안 가는 게 좋을 텐데. 걔 지금 컨디션이 안 좋아서.”
“오라고 하셔가지구요.”
“근데 너 킹쉴즈 걸즈 아니잖아? 처음 보는 얼굴인데?”
“병실이 어느 쪽인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에이, 예쁜데. 응? 나 좀 상대해주라. 병원에만 있으려니까 심심해 죽겠어.”
어쩐지 TFC 선수들은 다 미르 같은 모양이었다. 여자만 보면 아주 그 생각밖에 안 하는…. 도현은 스윽 주변도 둘러보았다. 그리고 디바이스를 꺼내며 톡톡톡 뭔가를 또 기록하기 시작했다. 원래 무례에는 무례로 답하는 법이다.
“그래서 어디라구요?”
“저기.”
제수스가 손가락으로 병실을 가리켰다. 문밖에는 정숙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도현은 똑똑 하고 노크를 했다.
“킹쉴드 씨.”
그러자 문이 바로 열렸다. 약간만 문을 열고 밖을 확인한 매니저가 도현을 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네, 들어오십시오. 킬스버그 씨 맞으시죠?”
“네.”
도현은 자기가 챙겨온 문안 선물을 그에게 주었다.
“이런 것까지 또….”
“어머….”
병실로 들어온 도현은 깜짝 놀랐다. 미르가 침대에 묶여 있는 데다가 평소 그의 모습에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안색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침대 시트에 핏자국이….
“아, 피 아닙니다. 금방 마력액을 뱉어냈거든요. 그래서 좀 지치셨어요. 시트 갈아야 하는데 풀어줄 수가 없어서요.”
“큰 부상 아니라고 들었는데요.”
“부상보다도 수술 통증 때문에 그렇습니다. 뭐든 빨리빨리 되는 것도 그렇게 좋은 게 아니라서….”
매니저 박샘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전히 놀란 기색을 버리지 못하고 도현을 티 나게 훑어보고 있었다. 저~~~언혀 미르 킹쉴드의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현은 미르가 누운 침대에 가까이 다가갔다.
“킹쉴드 씨, 괜찮아요?”
그러자 파리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던 미르가 눈을 반쯤 떴다.
“넌… 씨발… 왜 나한테만 킹쉴드, 킹쉴드야. 이름 불러.”
“깜짝 놀랐어요. 많이 아파요? 괜찮아요?”
“안 괜찮아….”
그리고 미르는 다시 눈을 감았다. 도현은 매니저를 돌아보았다.
“이거 풀어주면 안 돼요? 왜 묶어 둔 거예요? 움직이면 안 되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킹쉴드가 아프면 좀 위험해서….”
“그래도….”
도현은 미르의 파리한 얼굴을 보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식사는 어떡해요? 밥은 먹을 수 있어요?”
“일단은 링거로….”
“환자는 잘 먹어야 하는데.”
세상에 무슨 짐승도 아니고 사람을 이렇게 묶어 놓았단 말인가. 항상 활기가 넘치던 그가 이렇게 지쳐서 누워 있는 걸 보는 건 생각보다 훨씬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런 남자는 좀 미운 짓을 해도 항상 에너지가 넘쳐야 보기 좋은 법이다.
“일단 이건 좀 풀죠. 시트도 갈구요. 사람이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뭐가 위험하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아, 진짜 안됩니다. 킹쉴드는 모르핀도 안 맞아서 아직 통증이….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 하나 작살내는 건 일도 아니라니까요. 킹쉴드는 아프면 눈에 보이는 게 없어서 진짜 안됩니다.”
“미르 씨, 미르 씨. 많이 아파요? 이거 풀어준다고 저 때릴 거 아니죠?”
도현이 웃으면서 그렇게 미르에게 물었다. 미르가 희미하게 눈을 떴다. 그가 말했다.
“이거 좀 풀어줘…. 진짜 이거 때문에 더 죽을 거 같아.”
도현은 그를 묶고 있는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여도 전쟁용병을 둘이나 협박하는 여자이니 확실히 겁대가리는 어디 두고 태어난 모양이다. 도현은 이거 때문에 그가 자신을 부른 걸까, 라고 지레짐작했다. 매니저는 두 손을 들었다.
“그럼 전 나갑니다. 책임 못 져요, 킬스버그 씨.”
그의 어깨와 다리를 침대에 고정하고 있는 벨트를 세 개 풀었다. 그리고 수갑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보고 있었다. 미르가 완전 짜증 나는 얼굴로 손목을 몇 번 잡아당기자 침대에 고정되어 있는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나머지 팔도 그렇게 하고 수갑과 손목 사이에 손을 넣고 잡아 뜯어냈다. 아파서 골골거리며 누워 있던 그가 그런 괴력을 보이니 도현도 약간 놀라기는 했다.
‘진짜 눈 돌면 무섭기는 하겠다….’
도현은 머리맡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여기 침대 좀 바꿔주세요. 부서졌어요. 시트도 더럽구요. 워시세트도 갖다 주세요.”
하지만 역시 계속 묶여 있었던 탓에 미르는 그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온몸에 쥐가 났기 때문이다.
“아윽. 씨발…. 이 개새끼들… 진짜 내가 가만두나 봐라….”
미르는 자신을 짐승처럼 묶어 놓은 클럽과 동료 선수들에게 이를 갈았다. 도현은 그를 옆으로 돌려 누이고 그의 손을 주물러주었다.
“계속 그렇게 누워 있으니까 쥐 나죠?”
“아, 하지 마. 하지 마. 아파.”
“이렇게 하는 게 더 나아요.”
도현은 어쩐지 사람을 간호하는 게 익숙해 보였다. 그녀는 미르의 팔도 주물러주다가 간호사들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미르가 풀려 있는 걸 보고 주춤하는 게 보였다. 미르는 쥐가 나는 발로 일단 바닥에 내려섰다.
“안 팬다, 씨발. 빨리 이거나 치워.”
간호사들은 부서진 침대를 끌고 나갔고 새로운 침대를 제자리에 위치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워시세트를 가지고 오자 그는 신경질을 냈다. 그는 저린 팔을 몇 번 흔들다가 IV 바늘을 뽑아버리고 샤워실로 향했다. VIP 병실이라 샤워실도 근사하게 잘 딸려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온 미르는 쥐가 나는 것은 좀 나아졌으나 며칠이나 묶여 있었던 탓이 온몸이 뻐근해 미칠 지경이었다.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다면 살이 물러졌을 것이다. 게다가 흉통도 여전히 심했고 머리도 울렁거리는 데다가 몸에서 모든 기력이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다. 대충 닦고 환자복을 다시 입는데 부은 환부에 옷깃이 닿는 것도 싫어 상의는 그냥 집어 던져버렸다. 그리고 나갔더니 도현이 없었다. 방에 아무도 없다. 미르는 좀 당황했다.
‘어디 갔어….’
미르가 병실문으로 다가가 벌컥 열었다.
“이건 먹어도… 아, 미르 씨.”
문 앞에서 도현이 간호사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미르가 나오자 그를 돌아보았다. 간호사는 아예 식겁을 하더니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배고플 것 같아서요. 곧 점심시간이고. 죽 좀 사 왔어요. 먹여도 되는지 확인….”
미르는 그냥 그녀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리고 병실 문을 닫았다. 진통제가 안 들어가니 바로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것 같다. 미르는 식은땀을 흘렸다.
“진통제는 다시 맞아야 할 것 같다….”
“그래요?”
도현은 호출 버튼을 눌러주었다.
“진통제.”
미르는 그렇게 한 마디 딱 했다. 그러자 곧 다른 간호사 하나가 쭈뼛 들어와서는 얼른 정맥주사를 놓아주고 나갔다. 도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 여기서 무슨 일 저질렀어요? 사람들이 엄청 무서워하네요, 미르 씨.”
“그냥 미르라고 불러. 짜증 나니까.”
“일단 이것 좀 먹어요. 링거 가지고는 안 돼요.”
도현은 침대에 설치된 식탁을 올리고 거기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비싼 죽과 무로 된 피클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미르의 침대를 세웠다. 수저를 놓아주고 자기가 들고 온 문안 선물을 뜯어서 잔에 초록색 음료를 따르고 거기에 얼음을 몇 개 넣고는 빨대를 꽂았다. 그리고 돌아보니 미르는 수저를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있었다. 묶여 있었던 것 때문에 아직 세세한 움직임은 힘든 모양이었다. 도현은 물을 따른 컵도 들고 와서 미르의 침대에 앉았다.
“이거 제 동생이 좋아하던 건데.”
도현이 미르의 입술에 빨대를 갖다 댔다. 미르는 한 모금 빨았다가 약간 인상을 찌푸리고 더 넘겼다. 며칠 동안 링거로만 수분을 섭취했다. 라임과 민트 맛이 나는 청량한 음료를 목구멍으로 넘기니 말랐던 목이 적셔지고 마음까지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근데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돼요. 지금 미르 공복이라.”
“아, 왜. 더 줘.”
“일단 물도 좀 마시고, 죽부터 먹어요.”
미르는 짜증을 확 내려고 했으나 그녀가 가만히 죽을 떠서 입 앞에 내밀자 그냥 인상을 팍 쓰고 먹었다. 도현이 웃었다.
“잘 먹네요.”
“배고파 뒤지는 줄 알았다.”
“아니, 도대체 병원에서 사람을 얼마나 팼길래 환자를 묶어만 두고 밥도 안 줘? VIP인데?”
“내 말이.”
“아, 더 사올 걸 그랬나? 너무 양이 적나요, 이거?”
“나중에 더 사오라고 하면 돼.”
미르는 기운이 다 빠져서 흐느적거리며 앉고는 새끼 새처럼 도현이 주는 음식을 가만히 받아먹고 있었다. 아까 속을 다 게워냈다가 씻고 물도 마시고 따뜻한 것도 먹으니 좀 살만했다. 미르는 아직도 팔이 저릿저릿했지만 자신의 왼편에 앉아 자신에게 가만히 음식을 먹여주는 도현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물론 힘이 없어서 그냥 늘어뜨린 채였지만. 도현이 ‘참나’하고 어이없어했다.
“남자는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이런다더니.”
“숟가락 들 힘도 없다….”
미르는 표정이 계속 안 좋았다. 그래도 사람을 묶어 놓을 정도는 아닌데. 도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의 입에 계속 죽을 넣어주었다. 잘 먹는다. 정말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아, 더 사올까요? 과일 같은 것 먹어도 되려나?”
“아! 가지 마.”
미르가 손가락에 까딱 힘을 줬다고 도현은 순식간에 그에게 훅 끌려갔다. 힘이 없어 보여도 힘이 없을 수가 없는 남자다.
“다른 사람 시키면 되잖아.”
“아… 매니저분한테 사오라고 할까요? 그래도 간호사들한테 과일 먹어도 되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그냥 여기로 불러. 저거 누르면 되는 거 아냐?”
“아, 그래도 이런 일로까지 누르기엔….”
어쨌든 이것저것 더 사오라고 매니저를 불러서 시켰다. 매니저는 미르의 상태를 보고 좀 놀라더니 먹을거리를 사러 갔다. 미르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자 도현이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이제 보니까 간호하라고 부른 거네요?”
“그런 건 아니었는데….”
왜 불렀는지 사실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는 진통제를 꽤 세게 맞았을 때라…. 다친 곳이 욱신욱신했다. 도현은 그의 얼굴을 더 꼼꼼히 닦아주고는 물었다.
“뭐 더 필요해요?”
“아까 그거… 더 줘.”
“네.”
도현은 미르의 입술에 빨대를 대주었다. 누가 이렇게 보살펴 준다니.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는데 그게 싫지가 않았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쭉,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너… 이런 거 잘하네.”
“네?”
“간호….”
“아.”
도현은 미르의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자연스럽게 그를 보살폈다. 호출버튼이나 환자식에 대해서도 잘 알고…. 도현이 웃었다.
“습관인가 봐요. 동생이 좀 아팠거든요. 그때 병원에 살다시피 해서.”
“그래? 너 동생도 있어?”
“지금은 못 만나요.”
“…….”
도현의 표정은 별달리 변하지 않았다. 미르는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그냥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힘들다….
“나도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
도현은 미르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어주었다. 속에 뭐가 들어와서 괜찮다 싶었는데 또 슬슬 열이 오르며 몸이 욱신거렸다.
“괜찮아요?”
“응….”
보통 때 같으면 이 정도에도 욕을 하고 물건을 던지고 난리를 쳤을 텐데 미르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도현은 일단 미르를 침대에 다시 눕혔다. 그는 여전히 도현의 허리와 엉덩이 부근, 하여튼 거기까지 잡고 있는 상태였다. 도현은 가만히 미르의 상태를 보다가 디바이스를 꺼내 또 슬슬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언동이 가볍고 호색한에, 밝고 쾌활하고 단순하다. 미운 짓을 해도 악의는 없는 것 같고 사람 말을 안 듣는 것 같으면서도 다 듣고 있다. 세계에서 강한 남자라고들 하지만 다치고 약해지면 숟가락 하나도 제대로 못 들고….>
“그래서, 내가 불쌍해?”
미르가 보고 있었나 보다. 도현은 약간 놀랐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조금요.”
미르는 고통에 힘이 빠지고 지친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오늘은 계속 여기 있어.”
“…알았어요. 일 좀 해도 되죠?”
“마음대로 해.”
미르가 계속 보는 건 좀 그랬으므로 도현은 미르 쪽으로 좀 돌아앉아서 아까부터 봤던 TFC 선수들의 모습이나 행동, 분위기 같은 것을 쭈욱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미르에 대한 감상도 많았다. 그렇게 한참 소재 거리를 정리하거나 아니면 극 중에 나올 한 장면을 집중해서 적고 있을 동안 미르는 그냥 눈을 감고 고통을 삼키며 도현의 허리띠를 만지작거렸다.
‘이것도 내 앞에서 디바이스만 붙잡고 있는데….’
그의 여자친구들이 작년에 여기 왔을 때도 수다를 떨거나 디바이스를 잡고 인터넷만 하고 있었다. 도현도 똑같이 그러고 있었다. 미르는 눈을 뜨고 도현의 얼굴을 보았다. 집중하고 있는 얼굴이다.
“뭐 필요해요?”
도현은 미르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는 걸 알아차렸는지 그렇게 물어봤다. 미르가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배고파.”
“아… 그러게. 왜 이렇게 안 오시죠?”
먹을 걸 사러 간 매니저가 아직도 안 돌아온다. 도현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병원 앞이란다.
“곧 오실 거예요.”
“…….”
생각해보면 이 여자는 항상 이렇게 사근사근했지만(물론 처음 만났을 땐 아주 간땡이가 처 부어 있었지…), 그러면서도 자신과 다니엘 스톤하츠를 협박하기도 하고 들어보니 빚도 어마어마하다고 하고 돈 쓰는 걸 걸즈 이상으로 좋아하는 여자인데….
뭐 때문에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전에 그녀의 집에서 그녀가 자신에 대해 쓴 문장을 읽었을 때 뭔가… 설명할 길도 없이 마음이 풀어진 것처럼 지금도 그런 불가해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는 도현이 먼저 미르의 성질을 긁은 것이지만 이번은 그런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 오셨다.”
“일어나지 마.”
그녀가 일어나려고 하자 또 손에 힘을 줘서 그녀를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도현은 새삼 감탄했다.
“진짜 힘세다…. TFC 선수들은 다 이래요? 다니엘 씨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다니엘도 TFC 선수 종특으로 웬만한 건 힘들이지도 않고 번쩍 번쩍이었지만 미르는 진짜 손가락에 잠깐 힘만 줘도 이랬다.
“내가 비리비리한 그 마도사 새끼랑 같냐? 딱 봐도 내가 더 크고 강하고 멋있고.”
“하하하.”
다시 식탁에다가 음식을 펼쳐 놓았다. 같은 죽은 질린다고 안 먹으려고 하고 다른 건 잘 먹었다. 도현은 이제 그가 숟가락질을 할 줄 아는 걸 알고 직접 먹으라고 했지만 그는 싫다고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 좀 편한 거 입고 올걸.”
누군가를 간호하기에 그다지 편한 옷은 아니었다. 미르는 그녀의 옷차림을 슥 보더니 말했다.
“그러게… 왜 평소처럼 안 입고 왔냐?”
“그래도 밖에 나갈 땐 좀 꾸미고 나가는 게 좋아서요. 별로예요?”
“예뻐.”
미르는 이제야 좀 컨디션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일단 머리 아픈 게 좀 사라졌다. 두통이야말로 사람을 진짜 미치게 한다. 미르는 ‘하아’하고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그래요? 잘됐네요.”
도현은 미르가 잡을 새도 없이 바닥에 내려섰다. 옷매무새를 좀 바로잡더니 바로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시계를 보더니 미르에게 말했다.
“빨리 집에 가서 금방 쓴 것들 좀 더 손 봐야겠어요. 배도 고프고.”
“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가 미르한테서 더이상 돈을 원하는 것 같지도 않고…. 사실 서로 얘기도 제대로 해본 적 없었다. 오늘도 그냥 일방적인 보살핌이었을 뿐이고. 아니, 미르에게는 원래도 제대로 된 대화 상대자랄 게 없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미르는 침대에 기대앉은 채 그녀를 보면서 이윽고 입을 열었다.
“…또 와.”
“다음엔 다 같이 올게요. 먹을 것도 잔뜩 사서요. 쉬어요.”
그녀는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그녀를 돌아보면서 밖에 있던 매니저가 다시 들어왔다.
“…….”
“와… 저런 여자는 또 어디서 만났대요?”
박샘이 물었다. 그는 제대로 병실로 들어오지 않고 복도를 걸어가는 문안객의 뒷모습을 계속 보고 있었다.
“연예인? 킹쉴드가 만나는 여자치곤 너무 고급스러운데요?”
내 스타일이다…. 박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쭈욱 그녀의 자태를 감상했다. 미르는 잠시 또 머리가 지끈하자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저 여자가 빚만 50억이 넘는 여자다….”
“흐억… 진짜요?”
*
그 뒤 도현과 로웰, 송선호는 미르의 병실을 함께 찾았다. 그렇게 큰 부상이 아니라면서 일주일이 넘게 병실에 붙들려 있는 미르 킹쉴드였다. 생각해보면 웃긴 게 보통 사람이 갈비뼈가 부러지면 몇 주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 있는 건 상식인데 어째서 다들 ‘가벼운 부상’이라고 하는 걸까. 도현은 그런 궁금증을 느꼈다.
어쨌든 미르 킹쉴드의 경우 부상보다도 그 부상을 위해 했던 수술이라는 게 더 큰 통증을 일으켜서 힘들었다고 한다. 여차하면 당장 세컨드 포틴에 내보내야 하기 때문이란다. 참 봐주는 게 없는 TFC의 세계다.
그래도 이제 진통제를 아주 약하게 맞으면서 컨디션 조절을 위해 매일 간단한 훈련도 하고 있는 미르였다. 혹여 있을지 모르는 부작용이나 발견하지 못한 부상이라도 있을까 봐 매일 정밀검사를 한다고 한다. 이건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미르 말고도 다른 주전 선수 두 명은 병원에 아예 자리를 잡고 게헨-세나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부상을 좀 입었던 이스트호크 선수들도 이제 메트로뉴욕으로 돌아가 VIP 병동이 조금 한산해졌다.
“킹쉴드 씨, 괜찮으세요?”
로웰이 널따란 병실의 창문 앞에서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하고 있는 미르를 보고는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테이블에 문안 선물을 두었다. 미르는 로웰의 삐삐 머리를 손으로 잡아당겼다.
“어. 이제 쌩쌩하다.”
“아, 좋은 말로 할 때 놓으십쇼. 머리는 여자의 자존심입니다. 제 삶의 철학이 담긴 머리란 말입니다.”
“마감 때문에 일찍 못 왔어요.”
도현도 손에 싱그러운 꽃을 한 다발 들고 왔다. 오늘은 캐쥬얼한 느낌으로 군청색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몸에 딱 맞는 원피스를 입었다. 머리도 포니테일을 하고 하얀색 손수건으로 묶었다. 악세사리도 간단히 백금으로 된 수수한 걸 하고 왔다. 시계는 검은 가죽 시계고 구두는 베이지색 웨지힐을 신었다.
“오늘 다니엘 씨네 팀이 호주에서 경기하잖아요. 같이 볼까 하구요.”
“아, 그거 오늘이었나. 비기닝 포틴에 둘째 주 수요일이면 날짜 운이 썩 안 좋네.”
“그렇다고 하더라구요.”
“그래도 우리만 하겠어. 죽겠구만.”
첫 경기부터 16강 팀과 붙은 웨스트이글이었다. 미르가 물었다.
“뭐 사 왔어? 배고파.”
“이 남자는 내가 밥 셔틀인 줄 아나 봐.”
도현이 약간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좋은 병원식이라도 밋밋한 건 어쩔 수 없다. 송선호가 침대의 간이식탁에 가져온 음식을 내려놓았다.
“티본 스테이크랑 갈비랑 이것저것 사 왔습니다. 고기 드시고 싶으실 것 같아서.”
“오! 고기!”
미르는 아주 기뻐했다. 그렇게 병실에다가 한 상을 차렸다. 송선호는 의자를 끌고 와 앞에 앉고 로웰은 침대 발 치에 앉고 도현은 미르의 오른편에 앉았다. 그리고 TV를 틀고 채널을 검색하니 바로 멜버른FC의 홈구장 멜버른 센티넨탈이 떴다.
[…무난히 이스트드래곤이 승리하지 않을까 그렇게 다들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무려 작년 챔피언인 이스트드래곤. 도쿄를 연고지로 하는,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는 세계 최고의 클럽 중 하나죠.]
[그렇습니다. 우리 웨스트이글의 영원한 라이벌. 스카우팅 시스템이 너무 훌륭해요. 특히 남중국해에서 데려온 선수들 기량이 장난이 아닙니다. 치엔이 루카스, 카흐 밀란, 팬터 밀러, 잭 라인하트. 이스트드래곤이 10년 전부터 남중국해를 주목하기 시작하자 다른 클럽들도 부랴부랴 남중국해로 스카우터를 보내기 시작했죠.]
[남중국해 게이트가 15년 전부터 열리기 시작했는데 전문가에 따르면 현존하는 몬스터 게이트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강한 선수들이 육성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거죠.]
[우리도 이런 시류를 빨리 캐치하는 눈을 길러야 할 텐데요.]
[맞습니다.]
[작년 챔피언에 대항하는 호주 멜버른 클럽, 멜버른FC. 멜버른FC의 포메이션부터 살펴보겠습니다. 4-3-2 포메이션. 디펜스에 더 중점을 주는군요.]
[이스트드래곤과 매치하는 클럽들이 종종 이런 포메이션을 짜곤 하죠. 다니엘 스톤하츠의 마력 리미트 5만을 정확히 정량한 초특급 아이스애로우는 사실 리미트가 의미가 없어요. 일점 타격이라 쉴드 없이 맞으면 웬만한 전투복은 나갑니다, 나가. 항상 쉴드 최대로 치고 소드오라를 엄청 내뿜고 있던가 아니면 알아서 잘 피해야 해요.]
[게다가 요즘은 또 신태호가 신태호죠. 리미트 제한을 받지 않는 소드마스터가 소드오라로 마도사 같은 중장거리 공격기를 쓰는데 그걸 무슨 수로 막습니까?]
[골드 스플래시, 도쿄돔에서 단 한 번 선보인 그 기술.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는데요.]
[필살기를 아끼는 걸까요, 이스트드래곤.]
[어쨌든 오늘은 신태호, 스톤하츠, 밀란, 루카스… 뭐 다 못 보지 않겠습니까? 비기닝 포틴이고 멜버른FC가 엄청난 강팀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렇게 중계위원들이 경기 시작 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웨스트이글 대 이스트호크 전보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열심히 갈비를 뜯고 있는 미르에게 도현이 물었다.
“요새 무슨 경기를 봐도 꼭 신태호 선수 얘기가 나오던데 왜 그런 거예요?”
아무리 슈퍼 루키라지만 예전 슈퍼 루키들한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미르는 손가락을 쪽쪽 빨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 그 꼬맹이가 마음먹고 기술 쓰면 사실상 상대 팀을 다 조질 수 있어서 그래.”
“네? 그런 게 가능해요? 어떤 팀이 상대가 되더라도요?”
“응.”
도현은 약간 이해가 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했다.
“마도사들은 쉴드 마법도 있고 소드마스터들도 소드오라가 있잖아요. 도쿄에서 그랬던 건 프로덴트 팀이 방심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도현도 작품을 준비하면서 이것저것 사전조사를 많이 했다. 미르가 커다란 고기의 살점을 뜯으며 대답했다.
“아니, 뭐… 디펜스는 잘하면 죽진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오펜스는 그 꼬맹이 그거에 당하면 그냥 죽어. 마도사들이 마력 리미트가 5만이라 쉴드도 그 정도밖에 못 치거든. 게다가 리미트 해제한다고 해도 반응속도가 못 따라갈 거고. 그 꼬맹이 엄청 악질이던데? 급소만 딱 노리고.”
“그런 거예요?”
로웰이 헉하고 고개를 돌려서 미르를 보았다.
“까딱하면 경기하다 다 뒤질 판이라 클럽들이 단체로 위원회에다가 제소하긴 했는데…. 마력 제한이랑 마법 제한도 풀라고 요즘 난리라 팬들 눈치 보여서 못하는 거 같더라고.”
하긴 여기 있는 로웰도 경기 볼 때마다 그 소리였다. 미르는 영 남 일처럼 얘기하며 끊임없이 갈비를 뜯었다.
“우리도 나중에 이스트드래곤 전 할지도 모르니까 그 꼬맹이 대비 전략 엄청 고민한다더라, 우리 감독. 까딱하면 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선수들 다 잃게 생겼다고.”
뭔가 엘 드라카 전체적으로 문제적 인물인 모양이다. 이스트드래곤 대 멜버른FC 전에서는 중계위원의 예상대로 이스트드래곤의 유명한 주력 멤버들은 하나도 나오지 않은 채 스페어 멤버들로 경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경기는 20분 정도 만에 마무리되었다. 모두의 예상대로 이스트드래곤의 승리였다.
“뭔가… 좀 시시하네요.”
처음으로 제대로 본 경기가 웨스트이글 대 이스트호크 전이라 그런지 상대적으로 매우 심심했다. 멜버른FC는 쪽도 못 쓰고 당했다. 도현은 저번처럼 긴장해서 소리를 지르지 않고 얌전히 경기를 관람할 수 있었다.
“원래 강팀이랑 약팀이 붙으면 기량 차이가 많이 나서 어쩔 수 없어요.”
로웰은 그렇게 말하고는 열심히 갈비를 뜯었다. 다들 배가 고파서 많이 사오길 잘한 것 같다. 도현은 로웰의 그 말을 듣고 또 영감이 내려와 바로 디바이스를 들고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또 저번처럼 미르가 훔쳐보려고 하길래 그를 피해서 송선호의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요새… 글 열심히 쓰네…. 진짜 정신 차렸나….’
송선호는 눈만 돌려 그녀를 힐끗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송선호가 4년 동안 그렇게 닦달할 때는 정말 제대로 못 쓰던 그녀였다. 처음에 글을 쓰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때그때 소재나 이야깃거리가 떠오르면 어디서든 홀린 듯이 이렇게 뭔가를 썼다.
머리까지 하나로 묶어 캐쥬얼한 원피스 같은 걸 입고 있으니 어려 보인다. 집중하고 있는 옆얼굴이 예쁘다. 송선호는 가만히 옆에 앉아있는 그녀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어쩐지… 옛날 생각이 난다.
“먹으면서 해. 뭐 쓰는데? 또 내 얘기 써? 보여줘.”
“으음… 안 돼요. 보고 싶으면 사서 봐요.”
미르가 도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며 고개를 빼꼼 내밀어 또 훔쳐보려고 했다. 송선호는 바로 눈길을 돌렸다. 도현은 입에 들어온 걸 손으로 잡아 조각을 내 먹었다.
“벌써 나왔어?”
미르가 눈을 깜빡 한 번 하더니 물었다. 자기가 모델까지 도와주면서 영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로웰이 손의 기름기를 종이타올에다 닦고 미르의 디바이스를 조작해서 자기 만화를 보여주었다.
“오… 진짜 네 그림이네?”
“에헴.”
러프 스케치는 자세 때문에 몇 번 본 적이 있는 미르였다. 하지만 채색까지 다 된 이런 건 처음 봤다. 제목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 옆에는 <그림: 로웰 리 / 글: D. L. 킬스버그>라고 적혀 있었다. 미르는 그걸 한 번 보고는 두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미르도 알 만한 사이트의 메인 상단에 위치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이것들이 진짜 자기 밥벌이는 하고 사는 여자들이었구만.’
도현이야 처음 만난 게 그런 식이었으니 영 밥벌이는 못 할 것 같다(?)는 인식이 팍 박혀 있었고 로웰 리도 하고 다니는 게 무슨 어린애들 수준이니 미덥지 못했다. 게다가 미르가 가까이에서 교류하는 여자들이라고 해봤자 다 돈 많은 남자들한테 기생하듯 사는 여자들뿐이라….
“도현 작가님 글은 3주 뒤부터 나와요. 알림 설정하면 뜨자마자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아직 킹쉴드 씨 모델로 한 등장인물은 안 나왔는데 2주 정도만 지나면 나올 거예요.”
“오, 그래?”
그 길로 미르는 알림 설정도 하고 지금까지 연재된 분량을 모두 구입해주었다. 로웰이랑 도현이 그걸 보고 하이파이브를 했다.
“저번처럼 1시간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금방 끝났네요. 이제 저희 갈게요.”
경기도 끝나고 음식도 바닥을 긁자 도현이 슬슬 치우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미르가 인상을 팍 썼다.
“저번에도 그렇고… 누가 쫓아내냐? 왜 이렇게 못 가서 안달이야?”
“아니… 미르 쉬기도 해야 하고….”
갑작스러운 미르의 타박에 도현이 얼떨떨하게 대꾸했다. 로웰이 거들었다.
“아까 매니저도 2시간 정도만 있다가 가라고 했어요. 벌써 1시간은 있었으니까 이제 슬슬 가야죠.”
“…….”
그러자 미르는 못마땅한 얼굴로 인상을 썼다.
“다음 경기도 몸조심하구요. 응원할게요.”
도현이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이제 거동은 충분히 하는 미르이니 문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미르는 문 옆을 손으로 높게 잡고 도현을 내려다보았다.
“세컨드 포틴 끝나고 나서 시간 있냐? 하루 정도는 비울 수 있는데, 나.”
“저요?”
도현이 미르를 올려다보았다.
“어.”
“마감날이랑 그 전날만 아니라면 괜찮을 거 같은데요?”
지금 로웰과 도현은 돈이 없어서 만화 어시스턴트를 못 쓰고 있었다. 아쉬운 대로 로웰과 인공지능의 지도에 따라 도현과 송선호가 도와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가 언젠데?”
“토, 일이요.”
“그럼… 목요일쯤?”
송선호는 도현의 뒤에서 인상을 쓴 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로웰만 힐끗 그의 얼굴을 보았다.
“음… 목요일은 안 될 것 같네요. 다니엘 씨가 보자고 했거든요.”
“…젠장.”
그 마도사 새끼가 선수를 친 모양이다. 세컨드 포틴 때 부상을 입든 안 입든 사람 꼴 좀 할 수 있으려면 목요일 정도는 되어야 할 거고 토 일 이후로는 써드 포틴 때문에 밖에 못 나간다. 금요일은 도현이 마감인가 뭔가 촉박할까 봐 피했더니만….
“그럼… 금요일?”
“알았어요.”
도현의 디바이스에 스케줄이 자동으로 등록되었다.
“잘 쉬어요, 미르. 갈게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저 스포츠복권 웨스트이글로 엄청 샀으니까 우승 꼭 해주세요.”
“오냐.”
*
도현은 당연히 이게 데이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굳이 데이트를 한 명이랑만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은 지금까지도 해본 적 없고 앞으로도 할 일이 없을 예정이었다. 지금 만나는 남자들도 그녀가 전에 그들을 협박했던 것은 까마득히 잊은 것처럼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하지 않는가. 그래서 도현은 목요일과 금요일에 걸쳐 편하게 남자 둘을 만났다.
목요일의 남자, 다니엘 스톤하츠는 끝내주는 전망을 가진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해왔다. 경기도 나가지 않았겠다 당연히 어디 다친 곳도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기다랗고 새카만 머리카락에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 훤칠한 키에 매끈한 근육. 다니엘은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도현 씨.”
“네. 그러네요, 다니엘 씨.”
다니엘은 깔끔한 정장을 입고 나왔다. 키가 크고 몸이 좋은 데다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는 그이다 보니 어디 잡지에라도 나와야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검은색 정장이라 자칫 단조로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도 넥타이 없이 셔츠 깃을 약간 열고 입은 모습이 어쩐지 누구한테 코치라도 받은 것 같은 옷매무새였다. 머리도 깔끔하게 정리해서 묶고 나왔다. 그에 반해 도현은 몸에 붙은 H라인 진줏빛 원피스에 같은 색깔의 짧은 볼레로를 입어 그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구두도 하얀색이다. 머리를 깔끔하게 틀어 올려 목선이 시원하게 드러나는 예쁜 차림새였다. 다니엘은 어쩐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저번에 그런 일도 있었고….
[좋아합니다. 첫눈에 반했습니다. 그때, 그 백화점 앞에서부터… 이제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도현 씨… 저랑 사귀어 주십시오.]
[저도 해오겠습니다…! 전 애초에 저 난봉꾼처럼 여자들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전… 진짜 도현 씨 좋아합니다. 진심입니다…. 제가 싫다면 그저 마음속으로만 좋아하겠습니다. 이런 적, 이런 적 진짜 처음이라….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저도 도현 씨를 만질 수 있다면… 만지고 싶습니다.]
아아. 다니엘 스톤하츠는 이미 밑천의 밑천까지 다 보인 상태였다.
“저… 잘 지내셨습니까? 저번에는 죄송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잊어주십시오.”
“네, 알아요. 벌써 다 잊어버렸어요.”
도현이 싱긋 웃었다. 다니엘은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았다가 저도 모르게 숨을 길게 내뱉으며 다시 시선을 내렸다. 진짜 너무할 정도로 그의 취향이었다…. 뭘까? 여자 취향 같은 건 잊고 산 지 오래였는데.
계속 억눌러 왔던 감정이 계속해서 넘쳐난다. 그녀와 처음으로 식사를 같이했을 때는 무려 자신의 가장 숨기고 싶은 비밀을 불쑥 말했던 것처럼…. 다니엘은 도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알려주고 싶었다. 자신이 어떤 남자인지, 도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뭘 하고 싶은지…. 그리고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니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녀는 어떤 여자인지….
그녀는 정말 매력적인 여자였다. 누가 언제 채갈지 알 수가 없다. 벌써 미르 킹쉴드도 있었고 그녀와 항상 일을 같이하는 그 편집장이라는 남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안하다. 초조하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안 될 것만 같고 그랬다.
얼굴을 보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난감한데도, 얼굴부터 보고 싶었다. 정말 좋아한다는 말부터 할지, 변명부터 할지, 아니면 너무 예쁘다는 말부터 할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그렇기에 쉽사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다니엘은 한참 말을 고르다가 겨우 입을 뗐다.
“그럼… 오늘 하시고 싶으신 거나 그런 건 없으십니까? 도현 씨가 원하시는 대로….”
“음… 그럼 일단 커피부터 시킬까요? 목마르네요.”
“아, 네. 그렇게 합시다.”
아직 물도 한 잔 안 시킨 상태였다. 그는 웨이터를 불렀다.
“저는 에스프레소로 주시고… 도현 씨는…?”
“전 아이스 화이트 모카 라떼 한 잔 주세요.”
“네, 그걸로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
“…오늘 참 덥네요, 그죠?”
“아, 네. 네, 그렇습니다.”
“요즘 로웰 선생님이랑 같이 엘 드라카 보고 있는데 다들 더울 때 경기해서 힘들겠어요.”
“요즘에 전투 슈트가 좋아서 체온 조절하기가 용이합니다.”
“아, 그런가요?”
“네.”
“…저번에 멜버른 클럽이랑 경기하는 거 봤어요. 다니엘 씨는 안 나왔지만….”
“아, 그러셨습니까?”
“…….”
“…….”
목요일의 남자는 숙맥이라 엄청난 지루함이 예상되었다. 물론 예전에 한 번 데이트를 해봤던 남자라 알고 있긴 했지만, 그때는 도현의 코가 석 자였기 때문에 다 맞춰줬던 것이었다. 다니엘은 다니엘대로 당황하고 있었다. 꿈결 같고 좋았던 예전의 데이트처럼 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쨌든, 이게 전반전의 목요일 남자였다.
그에 반하여 금요일의 남자는 호쾌했다. 지붕을 뒤로 확 젖힌 시원한 스포츠카를 끌고 바람같이 나타난 미르 킹쉴드는 도현을 태우고 해러드 프레스티지 백화점으로 직행했다.
“뭐 사고 싶은 거 있어?”
남색 바지에 푸른 셔츠 하나, 클래식한 벨트를 하고 선글라스를 낀 미르 킹쉴드는 예전에도 생각했지만 옷 입는 센스가 제법 있는 남자인 것 같았다. 원체 키도 크고 덩치도 있는 남자라 옷 입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닐 텐데 말이다. 예쁜 머리색이랑 눈 색이 확 돋보이는 옷차림이다. 이쪽도 여자들 코치가 있는 것일까. 어쨌든 이런 것도 날인지 도현은 오늘 남색 빛 부드러운 재질의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어 무슨 커플룩이라도 입은 것 같았다. 상체는 몸매를 부각하는 민소매에 가슴이 U자로 확 파인 시원한 차림이었다. 원피스의 아랫부분도 하늘거리지만 부드럽게 몸을 감싸서 가녀리면서도 글래머러스하게 보였다. 거기에 빨간색 구두를 신고 눈알이 큰 선글라스를 머리에 낀 도현이었다. 입술도 빨간 립스틱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자연스럽게 도현의 손을 잡은 미르는 곧바로 해러드 프레스티지 2층 명품관부터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물건 있으십니까.”
“있어?”
“일단… 잠깐만요…. 지금 너무 감격스러워서… 이 감동을 좀 느껴야겠어요….”
백화점 자체가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이 수많은 신상들…! 해러드 프레스티지면 저번에 테러로 날아간 센트럴 백화점보다 더 고급스럽고 가격이 나가는 제품들을 디스플레이 하는 백화점이었다. 에르메스 대형 직영점은 기본이고 서 있는 직원들 외견부터가 다르다. 게다가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저가의 명품인 선글라스나 향수, 화장품을 파는 1층이 아니라 가방, 옷, 주얼리를 파는 2층으로 오니 아주 쾌적하고 좋았다. 사방에는 온통 예쁜 것들 천지…. 도현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운명처럼… 한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아….”
도현은 좋은 목소리로 감탄사를 내었다. 그쪽으로 걸어가며 잡고 있는 미르의 손을 끌었다. 미르는 그녀를 따라가며 흡족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고로 명품 싫어하는 여자는 없는 법이며 명품 싫어하는 여자가 있다면 그 여자는 별 볼 일이 없는 여자다.
“들어 보시겠습니까?”
장갑을 낀 직원이 웃는 낯으로 디스플레이 된 가방을 들고 도현에게 권했다. 다른 직원 둘이 전신거울을 들고 왔다. 빨간색 악어가죽 가방은 오늘 차림에 아주 잘 어울렸다. 얼굴이 상기되어 반짝반짝한 눈으로 거울을 보고 있는 도현의 뒤로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슬그머니 와서 서서는 말했다.
“예쁘네. 살래?”
하으… 도현은 대명천지에 이런 유혹은 없다는 얼굴로 가방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또 미르의 얼굴을 보았다. 도현은 겨우 결심했다.
“안… 돼요…. 이런 거 사주고 결국 어떻게 해보려고 그러는 거죠? 그런 거면 안 받을래요.”
몇 달도 되지 않았다. 빚쟁이들이 도현을 그렇고 그런 곳에 팔아서 돈을 벌게 하려고 했던 것 말이다. 그런 건 아주 싫다. 예전에 돈이 많을 때야 그럴 걱정이 전혀 없으니 남자들이 어떤 선물을 줘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았지만 지금처럼 상황이 안 좋을 때 누가 봐도 자신에게 흑심이 있는 남자한테 이런 걸 받아 봤자 나중에 이거 이상으로 토해내야 하는 게 그렇고 그런(?) 세계의 법칙이다.
그리고 도현의 어머니는 여자가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받을 거면 남자 팬티 속까지 탈탈 털어야지.
손해 볼 바에야 처음부터 받으면 안 된다고.
미르는 도현이 건네준 가방을 일단 손에 들고 직원한테 손짓해서 검은색 원피스를 하나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손에 든 걸 도현의 몸에 직접 대주었다.
“이렇게도 예쁠 것 같은데?”
“!”
카라의 모양부터 길이까지 너무나 완벽했다. 게다가 지금 신고 있는 구두와 가방과 립스틱의 조화까지….
‘사고 싶다. 사고 싶다. 진짜 사고 싶다!’
지미추에 발을 끼워 넣는 순간부터 여자는 영혼을 판다고 했던가. 도현은 진짜 손에 땀이 쥐고 오한이 들었다. 안 그래도 요새 정말 기본에 기본을 제하고는 전부 팔아서 드레스룸이 텅텅 비다시피 하였다.
“아니면, 이거 구두랑 목걸이랑, 아, 시계랑 팔찌랑… 반지도 껴? 반지랑….”
미르가 되는 대로 앞에 있는 멀티스크린 화면을 계속 탭 하자 잠시 뒤 다른 매장에서 직원들이 물건들을 가지고 줄줄이 이쪽으로 왔다. 곧 도현의 발 앞에 톤이 다운된 말린 장미 색깔의 구두가 놓였다. 다이아몬드가 주르륵 박힌 팔찌, 그리고 백금에 또 다이아 몇 개로 예쁘게 장식된 목걸이, 모던한 느낌의 검은색 글래스 시계랑 반지까지 대령이다. 으…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 예쁘다. 도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신없이 물건들을 보았다. 그리고 상기된 얼굴로 미르를 홱 돌아보며 말했다.
“미르 진짜 보는 눈 있네요. 미르 여자친구들은 좋겠다. 남자친구가 보는 눈 있어서….”
저도 모르게 이렇게까지 말하고만 도현이었다. 미르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치?”
고개를 끄덕이려고 하다가 정신이 또 든 도현이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 가운데를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안 돼. 안 돼. 안 된다니까요. 하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그냥 어울리는지 한 번 해보기나 해. 그 정도는 상관없잖아?”
“그럴…까요?”
“자.”
미르는 도현의 손목에 다이아로 된 팔찌를 채워주었다.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도현 킬스버그는 심장이 마구 뛰는 것을 느꼈다. 절로 고통과 환희의 신음이 새어 나온다.
“하으….”
그만큼 금요일의 남자는 엄청나게 매력적이었다.
*
결국 샀다.
새 옷을 입고 새 구두를 신고 새 가방을 들고 어울리게 머리까지 싹 하니 도현은 기분이 매우 상쾌해지며 좋아졌다. 아까는 피크닉 나온 사람 같았다면 지금은 도도한 재벌 3세라도 된 것 같은 차림새였다. 검은색 셔츠 원피스가 기분 좋을 정도로 몸에 딱 맞았다. 말린 장미색 구두도 주얼리도 다 마음에 들었다. 머리를 반 묶음 하여 차분하게 뒤로 내렸다. 그것 말고도 쇼핑백을 여러 개 들었다. 미르는 더 들어주었다. 한창 쇼핑을 하고 나오니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다.
“뭐 먹죠?”
“예약해 놨어. 가자.”
미르의 끝내주는 스포츠카를 타고 얼마 안 가 거대한 빌딩의 앞에서 내렸다. 차는 직원에게 맡겼다. 그리고 안내를 받아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니 한강과 메트로서울이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프랑스 요리집이 나왔다. 도현은 미식도 아주 좋아했다.
오랜만에 이렇게 쇼핑도 하고 좋은 것도 먹으러 오니 정말 좋았다. 이런 것이 매일 당연했던 때가 있었다. 잠깐 현실의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버섯 수프에 살라드 베르트, 코트 다뇨에 레드 와인은 추천으로 주세요.”
도현은 익숙하게 음식을 시켰다. 미르는 그냥 추천으로 주라고 했다.
“어때? 책은 잘 팔려?”
“으음… 일단 반응은 좋은 것 같아요. 엘 드라카 시즌에 맞춰서 내서 어떻게 될까 걱정 많이 했는데 트렌드를 잘 탄 것 같아요.”
“빚은 다 갚을 수 있을 거 같아?”
“그게 문제죠….”
도현이 약간 한숨을 쉬었다.
“전에 썼던 책은 진짜 운 좋게 대박이 나서… 그때 씀씀이로 썼던 걸 지금 갚는 거라서요. 또 이렇게 쓰는 버릇 다시 키웠다간… 정말 안 될 거 같은데.”
도현은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며 약간 한숨을 쉬었다. 원래 백화점에서 가방 서너 개만 사도 1억은 금방 쓰는 법이다. 가방이야 싼 편이지. 코트 같은 거 제대로 사면 하나에 3, 4억씩 하는 것도 있다. 게다가 미식도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돈이었으니 말이다.
“일단 보석들 팔리고 크루즈 렌트 좀 되면… 그래도 당장 어디 팔려 가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전채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미르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도현을 바라보면서 제안했다.
“그러지 말고 내 걸즈 들어와라. 빚 같은 건 내가 갚아줄 테니까.”
세컨드 포틴에는 출전하지 않은 미르였다. 언제 아팠냐는 듯이 다시 활기차고 건강해졌다. 자주 코웃음을 치는 그 오만함도 여전했다. 도현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대꾸했다.
“…저 생각보다 진짜 빚 많은데요?”
“50억 아냐?”
“더 많아요.”
“60억?”
“훨씬 더 많아요.”
“얼만데?”
“한 500억 된다고 하면 어쩔 건데요?”
그러자 미르가 약간 당황했다.
“야… 어떤 은행이 개인한테 그만큼 돈을 빌려줘?”
“500억이면 어쩔 건데요?”
“…….”
하아… 한숨이 나왔다. 50억이면 살만하고 500억이면 너무 비싸다 이건가. 항상 엄마 말이 맞았다. 짜증이 날 정도다. 도현은 후회했다. 이런 거 받는 게 아니었다. 은행이나 대부업체가 닦달하며 사람을 어디로 팔겠다고 할 때마다 항상 느꼈지만 자신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서 값을 받거나 혹은 치르려고 하는 것을 보면 기분이 많이 상한다. 심지어 도현은 그들이 말하는 그 가치보다 수 배로 돈을 벌었던 여자였으니 더욱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치사해서… 사도 내 돈 주고 사야지. 하….’
남자들이 그녀에게 아부하는 건 싫어하지 않았다. 선물을 가져다 바치고 입바른 소리를 항상 하고, 그런 거 다 좋아한다. 다 좋다. 그게 구애의 일환이라면 뭐가 나쁘겠는가.
하지만 미르 킹쉴드의 제안은 매춘이었다.
“제가 그때는… 진짜 어디 팔려가도 팔려갈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다니엘 씨에게 그러긴 했는데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남자들 그거 끼우기 싫어서 한 번도 안 했다고 했잖아요. 몇 번은 장난으로 받아줬는데요. 계속 이러시니까 솔직히 기분 많이 나쁘네요.”
도현의 집에서도 그렇고 병원에서도 그렇고, 미르 킹쉴드는 상당히 솔직하고 순진한 면모를 보였으니 뭐가 좀 다를 줄 알았던 걸까.
‘도대체 뭘 기대한 거야.’
생각해보면 공공장소에서 그런 짓이나 하고 어디서 굴렀을지도 모르는 남자. 내가 미쳤지. 도현은 인상을 썼다.
“어? 뭐가? 갑자기 왜 이래?”
“저 몸 안 팔아요. 이건 주신 거니까 감사히 받겠습니다. 식사는 제가 낼게요.”
도현은 전채에 손도 안 댄 상태로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르가 당황해서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도현은 인상을 팍 쓰고 카운터로 향했다. 바로 디바이스를 내밀어 빠르게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도현은 한숨을 쉬면서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아니, 엄마도 틀렸다. 역시 본인에게 돈이 있고 예전의 도현처럼 사는 게 가장 행복한 길이었다. 빨리 작품 몇 개 잘 써서 빚부터 갚으면 그때부터는 정말 계획적인 소비로 무리 없이 평생 럭셔리한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지. 아껴 쓰자.
“야… 갑자기 이렇게 가면 어떡해?”
미르가 쫓아 나와서 도현의 팔을 잡았다. 도현은 미르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놓으세요.”
“아니…. 진짜 왜 이러냐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놓으세요. 신고할 거예요.”
“…왜 그러는지 이유라도 말해.”
미르는 도현의 팔을 놓았다. 그는 진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현은 기가 차서 웃었다.
“이래서 매춘에 찌든 남자는….”
마치 처음 미르를 봤을 때나, 다니엘과 식사를 하고 있는 그녀에게 집적거렸을 때, 그때의 도현을 보는 것 같았다. 자기 앞에 있는 남자가 인생을 말아먹든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냉정한 얼굴이었다.
“제가 물건이 아니라서요. 50억을 주든 500억을 주든 5,000억을 주든 미르 킹쉴드 씨랑 할 생각 없어요. 그간 감사했습니다.”
“아니, 난… 네가 마음에 들어서….”
“그래서 초이스하고 돈 내면 될 것 같았나 보네요. 뭔지 알아요. 근데 제가 초이스를 하면 했지 당할 사람은 아니라서요. 안녕히 가세요.”
도현은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탔다. 미르는 따라 타려고 했지만 바로 도현이 미르의 발을 쳐다보았다. 넘어오기만 해보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순간 움찔하고 멈춰 섰더니 바로 문이 닫혔다.
이게 금요일 남자의 후반전 실적이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