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1부 2권) (3/21)

엘 드라카(2)

그럼 이제 목요일 남자로 다시 돌아가 보자.

“뭐… 하고 싶으십니까?”

“음… 요새 계속 집에만 있었더니. 바다라도 보러 갈까요?”

일찌감치 다니엘 스톤하츠의 센스에 대한 기대를 싹 버린 도현은 그냥 그를 운전기사나 잘생긴 마네킹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모델 같은 그는 데리고 다니면 사람들이 다 쳐다보니 그런 맛으로 데리고 다닐 만했다. 엄청 비싼 한정판 백을 들고 다니는 기분이랄까. 나쁘지 않다. 다니엘은 금방 본인의 자가용 비행차가 주차된 주차빌딩으로 향했다.

“와, 이거 직접 타보는 건 처음이에요.”

요즘은 비행차가 많이 보급되긴 했지만 그러기 전에 도현은 자신의 부를 다하고 말았다. 차가 부우웅 공중으로 떠올랐다. 다니엘이 여전히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바다, 어디로 가고 싶으십니까?”

“음… 한국 바다보다는… 외국 바다처럼 에메랄드빛 바다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될까요?”

“됩니다.”

“얼마나 걸려요?”

“30분이면 도착합니다.”

“와, 진짜 빠르네요.”

목적지가 입력되자 차는 곧바로 빠르게 비행하기 시작했다. 메트로서울을 지나 대전, 광주를 지나고 어느샌가 남해가 나타났다. 햇빛에 비친 끝없는 수평선을 이 높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와….”

아무런 생각 없이 바다로 가자고 한 것이었는데 잘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진짜 잘했다. 도현이 좋아하는 기색을 보이자 비행차의 모드를 바꾸어 거의 전 방향을 볼 수 있도록 차 벽을 투명하게 만들었다.

“와…!”

주위로 둥그랗게 이어진 수평선을 볼 수 있었다. 그것도 이런 높이에서 내려다보면 정말 엄청난 넓이와 공간을 볼 수 있었다. 크루즈를 타고 여행을 다닐 때도 이 정도로 넓은 바다라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는데 거기에 이런 높이가 더해지니…. 예전에 몇 번 헬기에 타보았을 때 이런 풍경을 볼 수는 있었지만 이렇게 조용하고, 그리고 이렇게 전 방향을 한눈에 다 볼 수 있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절벽에서 내려다보는 것과도 또 다른 느낌이다.

“오늘 날씨도 진짜 좋고… 나오자고 하길 잘했네요. 진짜 좋다.”

햇빛에 바다가 반짝인다. 도현은 한참을 그렇게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 좋다…. 다시 배 타고 여행 다니고 싶어요.”

나중에 로웰 선생님도 같이 가자고 해야지. 도현은 데리고 가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을 쭉 생각해보았다.

“배를 타고 여행을 다니셨습니까?”

“네. 저 진짜 큰 배 하나 있거든요. 수영장도 딸려있는 걸로…. 그거 타고 여기저기 많이 다녔어요.”

“많은 경험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네. 저 바다 좋아해서요. 물고기들도 예쁘고. 뭔가 탁 트이고 상쾌하고 아무 생각 안 해도 되고…. 해안가 도시들 들려서 필요한 물건 사고 또 돌아다니고 그랬어요. 현지 사람들이랑 얘기하는 것도 재밌었구요.”

“어디가 제일 좋으셨습니까?”

“음… 팔라우나 셰이셀도 진짜 좋았죠.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는 2주나 있었어요. 이탈리아도 좋았고 푸에르토리코도 좋아요. 아, 바하마 진짜 좋아요. 가보셨어요?”

“아뇨. 못 가봤습니다.”

“한 번 가보세요. 거기 핑크샌드도 예쁘고 돼지들도 귀여워요.”

“네. 꼭 가보겠습니다.”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니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와 만나고 난 이후로 마음속에 있는 말은 하나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번에 그렇게 헤어지고 혹시나 그녀가 자신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고 있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긴장이 되었다. 다니엘은 옆에 앉은 그녀의 얼굴을 힐끗힐끗 훔쳐보았다. 가슴이 계속 두근거렸다. 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그녀를 생각하면 바보 같이 굴었던 자신의 언행이 생각나서 창피한데도, 어째서일까, 좋았다. 그녀의 웃음소리, 목소리… 머리카락… 일에 집중한 얼굴이나 장난스러운 면모도….

‘허벅지가 진짜 부드러웠다….’

탄력 있고 정말 부드러웠다. 따뜻한 비단이나 벨벳이라도 만지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다니엘은 얼굴까지 확 벌게졌다.

그때 만약….

그녀와 함께 밤을 보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만.’

다니엘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했다. 곧 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도를 보니 오키나와다. 일본 영공에 다다르니 곧바로 디바이스를 통해 무비자 입국처리가 되었다. 오키나와는 메트로서울보다 조금 더 더운 것 같았다. 도현은 볼레로 자켓을 벗어서 차에 두고 내렸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탁 트인 바다에 새하얀 모래 해변이 아주 길게 이어져 있었다. 도현은 정말 오랜만의 바다라 주변을 몇 번이나 돌아보고 디바이스로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해변으로 다가가려고 하니 다니엘이 잠깐 도현을 멈춰 세웠다.

“여기 잠깐만 계십시오.”

“아, 네….”

도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가만히 바다를 감상했다. 상쾌하다. 좋다…. 다시 배 타고 나가고 싶다. 파티도 하고 수영도 하면서. 그렇게 잠깐 옛날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다니엘이 살짝 뛰다시피 빨리 도현에게 돌아왔다.

“해변에 들어가실 거면 신발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그리고 이것도… 햇빛 뜨거우실 것 같아서.”

다니엘은 도현의 구두 앞에 하얀색 플립플랍을 놓아두고 도현의 머리에 조심스럽게 챙이 넓게 너울지는 커다랗고 하얀 모자를 씌워주었다.

“제 옷 색깔이랑 맞춰 주신 거예요?”

이런 센스를 발휘할 수 있는 남자인 줄 몰랐는데…. 도현이 물끄러미 올려다보니 다니엘은 좀 쑥스러워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하얀색… 잘 어울리십니다.”

“고마워요.”

도현이 미소를 지었다. 다니엘은 더 쑥스러워했다. 도현은 신발을 갈아 신고 해변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맨발로 들어가기엔 너무 뜨거웠을 것 같다. 다니엘이 따라왔다. 도현은 그를 돌아보았다.

“다니엘 씨야말로 더울 것 같아요. 옷도 검은색이고….”

“아, 이것만 벗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니엘은 검은색 양복 자켓을 벗었다. 그리고 팔을 약간 걷고는 잠깐 바다를 보는데 진짜 모델이 따로 없었다. 아니, 진짜 모델들보다도 훨씬 분위기 있다.

‘진짜 얼굴 하나는 끝내준다…. 눈 색깔도 진짜 예쁘고….’

도현은 그렇게 감탄하면서 그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바다를 보았다. 잠깐 아무 말도 없이 걸었다. 도현은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크루즈를 타고 나가 놀 때도 가끔 아무도 없이 혼자 가만히 바다를 보고 있는 걸 좋아하곤 했었다는 기억이 났다. 고요함이 좋을 때가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드디어 다니엘이 먼저 입을 뗐다.

“이런 곳은 정말 오랜만에 옵니다. 아마 도현 씨가 아니었으면 올 일 없었을 텐데…. 감사합니다.”

“아뇨. 다니엘 씨가 데리고 와주신 건데요. 저야말로 감사하죠.”

“죄송합니다.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지루하셨을 거 압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도 오랜만에 이렇게 나와서 좋아요.”

다니엘은 약간 난처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도현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바다보다도 도현의 얼굴을 더 많이 보고 있었다.

가슴이, 마음이 이상했다. 한 번 고삐를 놓쳐버렸기 때문일까. 명상 할 때나 잠을 잘 때마다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서 심란했는데 이제는 하루종일 그녀의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그녀와 함께 있었다.

다니엘이 불쑥 말을 꺼냈다.

“…저는… 도현 씨가 정말 좋습니다.”

“아….”

그제야 도현이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그는 다시 묵묵히 앞을 보았다. 그는 다른 남자들처럼 여자를 달콤한 말로 유혹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도 이대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적어도 이 마음만은….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무작정 그렇게 들이…대서… 싫으셨을 거 압니다.”

“아니에요. 이제 지난 일인데요.”

“지금도 저만 좋은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전에도 느꼈지만, 이렇게 진지하다 못해 강박적일 정도의 남자는 처음이다. 도현은 가만히 다니엘의 얼굴을 보다가 물었다.

“…제가 어디가 그렇게 좋으신데요?”

“분위기랄까….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말해봐요.”

“뭔가 막연하게… 이런 여자를 만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오던 게 있었는데… 거기에 딱 맞게, 아니 그것보다도 훨씬 더 좋은 느낌으로… 모르겠습니다. 그냥 처음… 백화점 앞에서… 그때부터 도현 씨 밖에 안 보였습니다.”

“저한테 실망하신 거 아니셨어요?”

“실망이라기보단… 제가 멋대로 도현 씨를 판단한 거였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제가… 싫으시다면 더 이상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많이 좋아한다고… 한 번이라도 제대로 말하고 싶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둘이.”

도현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다니엘은 한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쌌다.

“아니…. 사실은 절 싫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계속 만나고 싶습니다. 도현 씨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습니다. 이런 적은 처음입니다.”

다니엘의 귀가 빨갰다. 도현은 천천히 손을 뻗어서 언젠가처럼 그의 귀를 만졌다.

“진짜 잘생겼는데… 귀엽기까지 하단 말이에요, 다니엘 씨.”

언젠가 했던 말이랑 비슷한 말까지 하는 도현이었다. 다니엘은 목까지 빨개져선 도현을 돌아보았다.

“도현 씨….”

“일단 계속 걸어요. 저기까지 가보고 싶어요.”

먼저 걸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에 맞춰 얼른 다니엘도 옆을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가 서로의 손등이 우연히 스쳤다. 다니엘은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도현이 돌아보자 귀가 벌건 채로 작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하하.”

그러자 도현이 영문도 모르게 웃었다. 다니엘은 좀 긴장했다. 도현은 웃는 얼굴로 다니엘의 손을 끌었다.

“빨리 저기까지 가봐요. 저기서 바다 보고 싶어요.”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바늘 모양처럼 가느다랗고 뾰족한 곶이라 끝에 가면 또 수평선을 길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푸른색, 에메랄드색, 하늘색이 오묘하게 섞인 바다, 그 군데군데 산호들이 음영을 더했다. 새하얀 모래사장은 발을 따뜻하게 덥혀주었다.

그렇게 또 꿈결 같은 데이트였다.

적어도 다니엘에게는 말이다.

“오늘 데이트는 어땠어요, 작가님?”

그렇게 목요일, 금요일 도현이 집에 돌아오면 로웰이 도현이 사온 메로나를 먹으며 그렇게 물었다. 도현은 똑같은 대답을 했다.

“크게 잘난 남자들이라고 뭐가 크게 다른 건 아니네요.”

말하는 톤은 좀 많이 달랐다.

*

도현 킬스버그, 로웰 리, 그리고 송선호는 작품에 필요한, 정확하게는 로웰 리의 그림을 위한 도구를 사러 어딘가에 와있다.

그 어딘가는 메트로서울의 중심가에 위치한 꽤, 아니, 엄청 큰 섹스토이 샵이었다.

샵은 다양한 문을 통해 입장할 수 있었으며 손님들의 신상을 위하여 입구에 위치한 자판기에서 마스크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일 때문에 온 것이라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다들 쓰고 들어가는 걸 보니 호기심이 생겨 다들 하나씩 선택했다. 로웰은 하얀색 매드래빗 가면을 썼고 도현은 오페라의 유령과 같이 얼굴 반을 가리는 검은색 가면을 썼다. 송선호는 눈만 가리는, 양쪽으로 눈매가 사납게 올라가는 하얀색 가면을 썼다.

도현과 로웰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와… 신세계네요. 엄청 많네.”

그리고 그들은 곧장 SM 코너로 향했다. 전체적으로 분홍빛 조명을 잔뜩 쏘고 약간 어둡게 해 놓은 다른 섹션들과는 다르게 SM 코너는 환한 화이트 조명을 쓰고 있었다. 안전이 최우선인 이쪽 세계에서(많이 공부한 둘이었다) 제대로 제품을 살펴보라는 조치인 것 같았다.

“아플 것 같다….”

전체적으로 본 도현이 말한 감상이었다. 그리고 로웰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너무 마니악한 건 못 쓸 것 같아요. 별로 섹시하게도 안 나올 것 같고.”

“음, 그렇죠. 역시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도구들이랑 그것보다 약간 더 마니악한 정도가 좋을 것 같죠?”

“네. 유명한 도구들을 가지고 조금 참신한 플레이를 하는 거나….”

그렇게 말하면서 여자들은 도구를 고르기 시작했다.

“적당히 사세요, 적당히.”

물론 이것들은 다 작품을 위한 비용처리를 할 예정이라 과소비를 막기 위하여 송선호도 행차해 있었다. 로웰이 일단 덥썩 Riding Crop(말채찍, 마편)을 집어 들었다. 금발 삐삐 머리, 미친 토끼 가면을 쓴 땅꼬마가 그걸 가만히 보더니 도현을 올려다보았다. 도현이 쑥 자기 엉덩이를 내밀어주었다. 로웰은 그걸로 도현의 엉덩이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

“음! 괜찮은데요, 작가님?”

구도를 보더니 로웰이 그렇게 말했다. 심드렁하게 있던 송선호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서 둘을 보았다. 가면을 쓰고 있는 여자의 두 얼굴과, 도현의 엉덩이와 마편…. 저도 모르게 그녀의 엉덩이를 스팽킹하는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한다면 마편보다는 손으로….

무릎에 엎드려 눕게 해서….

“…….”

송선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면서 겨우 고개를 돌렸다.

‘미친놈아… 죽자. 죽어.’

하지만 여자 둘은 마치 마트에서 식료품을 고르듯이 자연스럽게 이것저것 들어보며 그것들을 어떻게 작품에 쓸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음. 이런 것도 유명하지 않아요? Tickler.”

로웰이 가느다란 대 끝에 깃털이 달린 검은색 기구를 들어 올렸다. 한 번 자기 손으로 만져보았다가 도현의 팔을 쓸어보았다. 도현이 팔을 움츠리며 웃었다.

“아, 진짜 간지러워요.”

“보자… 가슴이나 허벅지나….”

“앗, 앗! 하지 마요, 선생님. 진짜 간지러워요. 하하.”

송선호는 귀도 막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로웰이 손에 든 걸 송선호가 든 장바구니에 넣으면서 말했다.

“로마노프가 건방지게 아람이한테 이런 걸 했다가 벌 받게 하는 것도 그려보고 싶네요.”

“어? 괜찮다.”

도현은 바로 디바이스를 들어 소재를 적어 넣었다. 그들은 송선호가 들고 있는 장바구니에 물건을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문득 로웰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변에서 물건을 보고 있는 손님들이 자꾸 송선호를 힐끗거리고 있는 것 같다. 190이 넘는 훤칠한 키에 운동을 잘해서 탄탄한 체격과 쓰리피스의 양복, 꼿꼿한 자세, 딱 봐도 잘생긴 얼굴, 깔끔하게 넘긴 머리까지…. 앞에서 장난만 치고 있는 여자 둘 뒤에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서 있으니 에세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걸까나. 로웰은 다른 물건을 보고 있는 도현의 팔을 잡아당겨 허리를 낮추게 해서는 그녀의 귀에 속닥거렸다.

“과연 여기 있는 손님들은 송 편집장을 어느 쪽으로 생각할까요? 도미넌트? 서브미시브?”

도미넌트는 상대를 지배함으로써 쾌락을 느끼는 사람, 서브미시브는 상대에게 지배당함으로써 쾌락을 느끼는 사람을 말했다. 로웰이 그렇게 말하자 도현도 주변의 시선을 감지하고 앗, 하고 고민했다.

“그러게요….”

로웰과 도현이 물끄러미 송선호를 쳐다보았다. 가만히 시선을 돌리고 있던 송선호가 조용해진 그들을 느끼고 그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그가 그렇게 입을 떼자 로웰과 도현이 동시에 말했다.

“섭.”

“돔?”

그러자 도현과 로웰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에이, 우리 작가님이 아직도 감이… 그런 글(?)을 적으시면서 그러시면(?) 어떡해요?”

“아, 저도 헷갈리긴 했는데… 으음. 그래도 여자들 입장에서는 돔인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선생님? 여자들이 보통 섭이 많다고도 하고. 그러려면(?) 그래야 하지(?) 않나 싶어서.”

그들은 여자들의 꿈과 희망을 지키는 지구방위대 같은 사람들이지 않았던가. 언제나 취향과 대중의 간격을 좁히려고 노력해야 하는 법이다.

“그러면 작가님 개인적으로는요?”

“당연히 송선호가 섭, 제가 돔.”

뭣. 어쩌다가 얘기가 저렇게까지 된 것인가.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감을 못 잡고 있다가 도현이 그렇게 말하니 송선호는 엄청 당황했다. 이런 플레이는 결국 19금적인 일을 한다는 건데 그런 걸 그와 하는 걸 상상했단 말인가. 가슴이 크게 두근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아니, 다른 남자들도 싫을 마당에 네가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면 진짜 짜증 날 것 같고…. 난 솔직히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지만 굳이 정하라면 내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낫잖아.”

도현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손에 들고 있던 Flogger(여러 갈래 꼬리를 가진 스팽킹 도구)로 슬쩍 송선호의 가슴 한가운데를 쿡 찔렀다. 물론 송선호의 머릿속에 그녀가 그걸로 자신의 등을 치는 상상이 어렵지 않게 지나갔다. 송선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이, 미, 미친년! 나, 난 그런 건…!”

흐음. 여자 둘의 눈이 가늘어지며 송선호를 아래위로 몇 번 훑어보았다. 어쨌든 그를 모델로 하는 캐릭터도 작품에 등장할 것이다. ‘기왕이면 쉽게 쉽게 가자’가 이번 작품을 만드는 두 사람의 모토이니만큼 송선호라는 남자의 명과 암을 차분히 생각해보았다.

“섭이네요, 선생님.”

“그렇죠?”

“솔직히 아람이가 누구한테 맞는 꼴 보기도 싫고 그냥 남자가 어떤 남자든 무조건 남자는 섭으로 가야겠어요.”

“그렇죠?”

의견일치를 본 둘은 여느 때처럼 짝하고 하이파이브를 하였다. 플로거, 패들, 라이딩 크롭 같은 스팽킹 도구와 티클러, 월튼버그 휠 같은 간지럼을 태우는 도구, 볼개그, 비트개그 같이 말을 못 하게 하는 도구, 개처럼 목에 채우는 칼라, 여러 구속 도구들까지 샀다. 비주얼을 생각해야 하다 보니 너무 주인공들의 비주얼이 망가질 것 같은 도구들은 사지 않았다. 뭐니 뭐니 해도 잘생기고 예쁜 게 짱이니까 말이다.

들어갈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간 송선호였지만 나올 때는 지친 얼굴이었다.

“후….”

그는 영수증을 회사에다 제출하고 물건들을 싣고 이것저것 영감을 잔뜩 받은 창작자들을 집에 데려다주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송 편집장님.”

로웰이 그렇게 인사를 했다. 송선호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해야 할 거 한 것뿐인데요. 그래도 선생님 계셔서 적당한 수준으로 잘 비용처리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둘이 인사를 하고 있는데 도현이 구두를 벗으면서 송선호에게 말했다.

“밥 먹고 가.”

“…니 말은 밥을 하고 가라는 거겠지.”

“나도 같이하면 되잖아.”

도현이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는 결국 퇴근 시간을 늦추고 집안에 들어갔다. 송선호는 상의를 셔츠만 두곤 넥타이까지 싹 풀어서 카우치에 잘 얹어 놓으니 도현이 집어 들어서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이러면 구겨져.”

빈 옷걸이에 그의 옷을 잘 걸어 두고 그녀도 옷을 들고 얼른 욕실로 향했다.

“빨리 씻고 나올게.”

그동안 송선호는 일단 냉장고를 살폈다. 오늘은 뭐 해야 하나…. 해둔 건 다 먹은 모양이었다. 일단 마트에서 음식 재료를 시켰다. 30분이면 도착한다. 그동안 엉망인 싱크대를 정리했다. 그리고는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지금 나 여기서 뭐 하냐….’

아마도… 곧 그녀에게 새로운 남자가 생길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다.

이제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그녀에게 잘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송선호 나름대로는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든 습관이나 회의를 되돌리기가 힘들 뿐이었다. 송선호도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그녀를 볼 때마다 옛날 생각이 나던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점점 괴롭다. 또 예전처럼 다른 남자의 품에 있는 그녀를 계속 보게 될 거란 걸 알기 때문이다.

송선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나쁜 년….’

처음 그녀를 만났던 건 6년 전, 인턴으로 처음 회사 일을 시작했을 때였다.

*

대학교에 다니면서 집안 회사에서 인턴을 하게 되었다. 당연히 낙하산이었다. 하지만 낙하산이니 뭐니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제대로 할 생각뿐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그게 바로 돈이고 힘이었다. 특히나 요즘 같은 시대에 사람들의 기호는 환전율이 어마어마했다. 개인적으로도 대중매체에 관련하여 하고 싶은 사업도 많았다.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송선호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작가님 관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도현 킬스버그라고 합니다.]

팀장의 소개로 새로운 신입 작가를 담당하게 되었을 땐 저도 모르게 집에 처박혀서 연애 못하는 불만을 자신의 글로 자위하고 있는 못생긴 여자를 만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웃는 낯으로 처음 본 그녀에 대한 인상은 뜻밖이었다.

[‘뭐야…. 예쁘잖아….’]

게다가 이 분위기는 뭐지?

[그럼 얘기해. 문제 있으면 연락하고.]

사람들이 그다지 없는 시간대의 커피숍에서, 팀장은 둘을 놔두고 떠났다. 예쁜 다리를 잘 드러내는 딱 달라붙은 밝은색 청바지에 흰 티셔츠, 딱 떨어지는 짙은 베이지색 자켓을 입은 그녀는 지나가던 남자들이 한 번쯤은 힐끗 보고 갈 만큼 세련되고 예쁜 여자였다. 목소리가 정말 좋았다. 허리까지 기른 남색 머리카락도… 어쩐지 섹시한 거 같고….

[‘분명히 나보다 어릴 텐데…. 무슨 분위기가….’]

[그럼… 앞으로 어떻게 이야기가 진행될지에 대해서 먼저 얘기하면 되나요?]

[아, 아, 네. 저희가 분석한 요즘 트렌드와 작가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층의 키워드 분석을 가져왔습니다. 같이 보면서 얘기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잠깐 정신이 팔렸던 송선호는 아차, 하고 가져온 스크린을 얼른 내밀었다. 그녀도 자신의 스크린을 내밀었다.

[앞으로 100편에서 150편 사이로 완결 날 것 같거든요. 그리고 앞으로 이야기 전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이어지기 위해서 더 시련을 겪는 게 작품을 위해서 더 좋을 것 같아서요. 내외면적으로, 그리고 좀 더 현실적으로요.]

[네, 작가님이 보내주신 시놉시스는 미리 읽어봤습니다.]

송선호는 들고 있던 펜으로 살짝 스크린을 두드렸다가 말했다.

[그런데 요새 독자들은 갈등구조 자체를 기피하는 성향이 있어서…. 갈등이 아무리 있어도 두 사람이 해피엔딩이 된다면 괜찮다는 게 독자들 반응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현실적으로 남녀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은… 좀….]

[왜요?]

[요새 각종 플랫폼에서 인기를 얻는 작품들을 전부 분석해 본 결과 나오는 게 이겁니다.]

소재, 이야기 구조, 남녀 주인공의 캐릭터, 문체, 표현, 서사 등을 아주 상세하게 분석해 놓은 한 장의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도현에게 내밀었다. 도현은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어떤 글들이 많이 읽히는지는 저도 알아요. 그래서 제가 새로운 걸 보고 싶어서 적는 거라구요.]

[지금 작가님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독자님의 글을 왜 좋아하는지도 살펴보면 결국 이 두 사람이 많은 갈등을 겪더라도 마지막엔 서로가 서로에게 만족하고 서로에게 헌신적인 좋은 커플로 마무리될 거라고 믿고 보는 거지 만약에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는 느낌으로 가면 결국 찝찝하다는 소리만 듣게 됩니다. 이게 결국엔 로맨스 작품이라는 걸 생각하셔야 합니다. 독자들의 기대를 부응해야 돈을 버는 거니까요. 작가님의 시놉시스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여기는 이렇게 좀 더 고치거나 순화시킨다면 독자들과 작가님 둘 다 만족하는 결과를 얻지 않을까 싶습니다.]

[…싫어요.]

[물론 작가님의 소신은 알겠습니다만 이제 프로가 되셨으니….]

의외로 고집이 있었다. 계속 얘기를 해보았지만 결국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게 이 신입 작가의 결론이었다. 그걸 좀 더 팔리는 방향으로 이끄는 게 송선호의 역할이었다.

[‘이 팀장님 자기가 설득 못 하니까 나한테 맡긴 거 아냐?’]

결국 몇 시간이고 커피숍에서 작가와 대치하고 있다가 내린 송선호의 결론이다. 송선호는 왼손으로 얼굴을 괴고 지금껏 얘기한 게 정리된 스크린을 내려다보다가 역시 더 설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약속 있으세요, 작가님? 없으시면 조금 더 얘기를 했으면 싶은데요.]

[아, 죄송해요. 선약이 있어서요. 안 그래도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그녀는 손목에 찬 클래식하고 예쁜 시계를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는 스크린에 뜬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생각 좀 더 해볼게요. 그럼 다음 주에 뵈면 될까요?]

[네. 따로 편하신 장소 있으시면 얘기해주세요.]

[네. 다음 주에 봬요.]

[네. 조심해서 가십시오.]

송선호는 일어나서 그녀를 배웅했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서 밖을 나가는 그녀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녀가 커피숍을 나가자 길가에 서 있는 파란색 스포츠카에서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내려서 그녀를 맞이했다. 웃는 얼굴로 잠깐 얘기를 나누면서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갔다.

[‘역시 남자친구 있네….’]

꽤 잘생겼고…. 글 쓰는 것만 보면 연애 제대로 못 해본 여자들의 심금을 울릴 만한 글인데 본인은 저렇게 연애 잘하고 사는 팔자라는 거 알면 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려나.

그로부터 3달 뒤엔 도현의 작품 <그 재벌남의 사랑은 바로 나!>가 범 아시아적 히트를 쳤고 그 뒤 일주일 만에 바로 시작한 <그 마왕님의 사랑은 바로 나!>와 <그 바람둥이의 사랑은 바로 나!>의 동시 연재도 연재 내내 대대적인 히트를 쳤다. 동시 연재를 할 무렵의 도현은 정말 하루 종일 글을 쓰고 가다듬고 또 글을 쓰고 가다듬어야 했다. 그 당시엔 도현만 담당하고 있었던 송선호도 편집장으로서 교정, 교열은 물론이고 앞으로 시놉시스에 대해서도 많은 조언을 하고 또 더 팔리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수정하도록 그녀를 설득하기도 했다. 홍보 전략이나 프로모션 기획도 많이 했다. 송선호는 그 학기 수업도 대폭 줄여서 들을 만큼 일에 열성이었다.

둘이 함께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3일에 한 번은 처음 만났던 그 커피숍에서 2시간 정도 작품에 대해 얘기를 했다. 도현은 송선호에게 ‘네가 남자 주인공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냐’라던가 ‘네가 보기엔 어떻게 할 때 여자가 사랑스러워 보이냐’ 등의 질문도 하며 송선호의 의견을 꽤 참고하기도 했다. 또한 처음처럼 절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식의 스탠스는 취하지 않고 송선호식의 더 팔리기 위한 글을 쓰는 것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타협점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게 된 지는 6개월쯤, 동시 연재가 시작되고는 3개월쯤 지났을까.

[오늘은 데리러 안 왔네요?]

이야기를 끝내고 이제 일어설 시간이 되어 송선호가 커피숍 밖을 한 번 보았다가 그렇게 물었다.

[아, 헤어졌거든요.]

여름도 지나고 꽤 싸늘해졌다.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무릎까지 오는 새하얀 예쁜 코트를 입고 허리띠를 묶은 후 머리카락을 밖으로 빼냈다. 송선호는 그게 정말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기회다.’]

송선호는 자신의 스크린을 정리해서 클래식한 서류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좀 긴장을 해서 가방을 꽉 쥐고 지나가듯이 말했다.

[그럼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요?]

[아, 그럴까요?]

그녀도 마치 매일 그랬다는 것처럼 대꾸해주었다. 그게 뭐라고… 되게 기뻤다. 정말 좋은 음식점에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같이 일하는 사이에 그녀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적당히 분위기가 좋은 정갈한 일식집으로 갔다. 검은색 옻칠을 한 인테리어에 주홍빛 불빛이 아름답고 음식도 무척이나 정갈하게 나오는 집이었다. 물론 갔을 때는 여기도 너무 오버한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다른 대학생들이 갈 만한 저가 음식점 같은 덴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특별했다.

[와… 여기 예쁘네요.]

도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송선호는 긴장해서는 침을 꿀꺽 삼키고 안내를 받아 걸어가며 말했다.

[비즈니스 접대하기도 좋은 곳이라서요.]

[그렇구나. 알아둬야겠다.]

2인석 치고 좌우는 좀 넓지만 상대방과의 거리는 가까운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여기는 가이세키가 유명해서… 그걸로 두 개 시킬게요.]

[네. 기대돼요.]

그녀가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는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다. 진짜… 여자랑 둘이서 밥 먹는 게 처음도 아닌데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예쁜 애라서 그런 걸까?

[송 편집장님 저보다 나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이런 데를 다 어떻게 아세요?]

확실히 어린 대학생들이 올만 한 곳은 아니라서 도현은 사진을 몇 번 찍기도 하였다.

[가족끼리 가끔 와서요.]

[와… 확실히 송 편집장님 집 엄청 잘 살 것 같긴 했어요.]

[아니에요. 집이 좀 엄해서 그래 봤자 제가 알아서 먹고 살아야 해요. 작가님이 더 대단하죠. 벌써 자기 능력으로 이렇게 성공하고.]

[하하. 아니에요.]

가이세키 요리는 12가지 코스 요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직원이 간단히 설명을 해주면서 예쁜 잔에 식전주부터 가져다주었다. 송선호가 아차, 하고 물었다.

[한 잔 정도는 괜찮죠?]

[네. 괜찮아요.]

목구멍에 넘어가는 게 바로 느껴질 정도로 꽤 강한 술이었다. 안 그래도 긴장한 데다가 심장박동이 엄청나게 높아진 송선호는 굉장히 빨리 술이 도는 걸 바로 느낄 수 있었다. 다음 전채가 나올 때 송선호가 문득 얘기했다.

[1년 인턴 끝나고 나면 회사에 정식으로 입사할 거고 그러면 계속 담당으로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진짜요? 잘 됐다.]

도현은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냥 하는 얘기더라도 송선호는 또 굉장히 기뻤다. 쓰쿠리로 나온 생선회를 먹을 때쯤엔 송선호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남자친구랑은… 왜 헤어진 거예요?]

[아… 그냥 저도 바빠지고 잘 못 보니까 자연스럽게 헤어진 것 같아요. 어제 자꾸 자기만 기다리는 것 같아서 싫다고 징징거리길래 그냥 헤어지자고 했어요.]

보이는 것보다 칼 같은 면모도 있는 것 같았다. 송선호는 생각했다.

[‘맺고 끊는 것도 확실하고… 진짜 좋다.’]

한창 눈에 콩깍지가 씌었을 때다. 술에 그렇게 강하진 않았으므로 딱 한 잔 더 마셨을 땐 한 번 더 용기를 내어서 물을 수 있었다.

[그럼… 어떤 남자 스타일 좋아하세요? 로맨스 소설도 적으시니까 작가님이 쓰시는 남자 주인공 같은 스타일 좋아하시려나.]

[글쎄요….]

도현은 의외로 고민을 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제가 어떤 남자 스타일 좋아하는지. 그냥 적당히 잘생기고 적당히 말 잘 통하고 적당히 말 잘 들으면 만나는 건 크게 문제없는 것 같은데…. 딱히 제가 좋아서 못 살겠다, 이런 건 못 느껴봐서요.]

그녀의 이 말을 들었을 때 송선호가 생각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내가 그 남자가 되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날 좋아할까?’]

그렇게 식사를 무난히 마무리하고 여자 혼자 집에 보낼 순 없다는 핑계로 집 앞까지 데려다주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첫 번째 데이트로는 무난했겠지?’라고 스스로 호평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3일 뒤 회의 때는 처음부터 영화를 보러 가자고 청할 기회만을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 송선호가 겨우 입을 뗐다.

[저… 영화 <리바운드> 보셨어요? 요새 호평이던데.]

[아, 아직 안 봤어요. 안 그래도 요새 엄청 얘기 많이 들리더라구요.]

[이번 주 마감도 빨리 끝냈는데 혹시 아직….]

[어? 벌써 와있었네?]

안 보셨으면… 하고 이야기를 계속하려는데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밖을 보았다. 꽤 비싼 세단에 기대어 서 있는 훤칠한 남자가 도현과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었다.

[…누구….]

[아, 학교 선밴데 며칠 전부터 계속 밥 먹자고 하더라구요. <리바운드>도 보자고 하고.]

[네….]

송선호는 그 간략한 설명에서 저 새끼도 송선호처럼 도현이 전 남자친구와 헤어지길 기다리던 남자들 중 하나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3일 뒤 회의부턴 그놈이 바톤을 터치하여 계속 데리러 오기 시작했다. 송선호는 결국 다음 기회를 다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6개월 뒤, 다시 찾아온 기회는 안타깝게도 송선호의 차지가 아니었다. 도현이 그 비싼 세단을 끌고 다니던 놈과 헤어지기도 전에 어떤 양아치 같은 놈이 그놈한테서 그녀를 빼앗아 갔기 때문이었다.

*

그쯤 도현은 1년 만에 엄청난 돈을 번 상태였다. 비싼 세단을 끌고 다니던 그 훤칠한 놈은 도현을 잊지 못해서 꽤 오랫동안이나 질척거렸다. 일단 차인 그날부터….

[야, 이 씨발! 네가 여기가 어디라고 와! 내 여자친구야! 내 애인이라고!]

[나 한국말 못 해.]

[야, 죽고 싶냐? 어? 죽고 싶어?! 빨리 꺼져! 빨리 꺼지라고!]

항상 만나던 커피숍의 앞엔 전보다 더 비싼 세단과, 으리으리한 최고급 스포츠카가 아직 추운 봄날에도 뚜껑을 열고 서 있었다. 거기에 기대어 서서 디바이스를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는 키가 아주 훤칠하게 크고 구불구불한 어두운 금발이 턱 끝 정도 길이까지 기른 남자였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기다란 검은색 롱코트에 캐시미어 목도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안에는 어두운 군청색의 셔츠 한 장이었고…. 무슨 패션잡지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처럼 세련되고 멋있는 남자였다. 시원하게 큰 입에 붉은 입술이 좀 야살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남자였다.

[…….]

[아… 경찰 불러야 하나.]

약간은 걱정스러운 기색이 있긴 했지만 그다지 난처해하거나 당황하지도 않았다. 마치 남 일인 것처럼 그렇게 중얼거리며 도현은 자신의 스크린을 보았다. 작품에 대해 골몰히 고민을 하고 있었다. 두 가지의 다른 이야기를 동시 연재하는 건 힘드니까 말이다. 잘못하면 자가복제 되는 건 순식간이고…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서 편집장도 있는 것이다.

[…….]

하지만 그 편집장은 그때 약간 멘탈이 나가 있었다. 그녀는 인기가 많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아직 대학생이었고 학교에는 혈기왕성한 남자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그녀를 그런 눈길로 보면서 사귀고 싶어 하는 남자가 어떻게 송선호 하나뿐일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예쁘고 이렇게 분위기 있는데….

아직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 스타일을 모르겠다던 도현은 그 스타일을 찾을 때까지 끊임없이 남자를 만나볼 생각인지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데 그다지 거리낌도 없었고 심지어 이런 식으로 갈아타는 것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앞뒤 없이 일단 사귀자고 대시부터 하는 게 아니면 어떻게 저놈들은 이렇게 빨리 사귈 수 있는 거냐고.’]

진짜 그러는 건가? 송선호는 혼란스러웠다. 송선호는 도현 킬스버그를 좋아했다. 목소리도, 웃는 얼굴도, 기다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습관도, 고민을 할 때 약간 미간을 찌푸리는 것도. 다 너무나 좋아했다.

그래서 그녀도 자신을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항상 바라고 있었다. 서로 좋아하기 때문에 사귀는, 그런 연애를 그녀와 하고 싶었다. 필사적으로 멋있게 하고 그녀를 만나러 오고 일 외로도 접점을 만들려고 하면서 자신의 좋은 면이나 남자다움도 어필하려고 노력했다.

벌써 1년이나 아는 사이이니 도현도 친근감을 드러내거나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역시 일로 아는 사이, 혹은 좀 친해진 친구 사이 이상의 거리감을 나타내진 않았다. 아직 남자친구랑 잘 사귀고 있는 그녀에게 송선호로서는 그 이상 어떻게 더 할 수가 없어서 항상 초조하게 그와 빨리 헤어지기만을 빌고 또 빌었는데 이렇게 난데없이 나타난 놈이 그녀를 덥썩 채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속이 쓰렸다. 이번에는 그도 다른 남자의 사정을 봐줄 필요 없이 기회를 봐서 바로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자신과 사귀어 달라고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 양아치한테서 바로 그녀를 뺏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어떤 남자를 만나도 언제나 덤덤하고 그다지 열기가 느껴지지 않던 그녀였지만 이번은 좀 달랐다. 그녀가 달라지기 시작하는 걸 느끼는 데에는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꼭 필요할 때 말고는 굳이 회의 같은 거 안 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요즘 같은 시대에… 디바이스 하나만 있어도 화상으로 가능하잖아요.]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동시 연재라는 게 항상 유의 깊게 체크하지 않으면 금세 내용이 망가질 수도 있어서….]

[벌써 9개월이나 써서 캐릭터나 줄거리도 확실하고 결말도 이미 구상해둬서 괜찮을 거 같은데요. 그리고 솔직히 동시 연재하는데 둘 다 주 2회 연재는 너무 하잖아요. 주 1회로 해도 독자들도 이해할 것 같구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왜 갑자기….]

[1년 반 동안 매일매일 글만 썼는데 답답하기도 하고… 하고 싶은 것도 좀 하고 싶어서요.]

[그래도 이제 완결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3개월만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연재해온 게 있는데 유종의 미를 거두셔야죠.]

하지만 도현은 기어코 주 1회 연재를 고집했고 결국 그렇게 하기로 되었다. 이미 인기가 최절정에 달한 데다가 결국엔 주 4회나 연재를 하는 작가의 고충을 이해한다는 반응이라 장기적으로 좀 더 매출을 올릴 수 있는 요인이 되어 주긴 했지만….

원래도 도현은 세련되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차림을 할 줄 아는 여자였지만 점점 그 세련됨과, 그 옷차림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들고 다니는 것, 하고 다니는 것 어느 것 하나 만만찮게 볼 수 있는 게 없어졌다.

그때 송선호와 제대로 된 가이세키를 처음 먹어보았던 그녀는 모르는 미식이 없을 정도로 입맛이 까다로워졌고 고급 차를 여러 대 사서 옷차림이나 날에 어울리는 차를 끌고 다녔으며 곧잘 해외에 나가 있기 시작했다.

물론 송선호와는 만나는 날이 점점 적어졌다.

결국 그녀가 무단으로 연재 펑크를 내고 그다음 날, 송선호는 처음으로 그녀의 집에 찾아갔다. 전에 데려다주었던 집이 아니었다. 이사를 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찾아왔더니, 송선호의 본가보다도 으리으리한 정원을 가진 모던하고 커다란 3층짜리 저택이 나왔다.

[아, 잠깐만. 하하. 손님 왔잖아. 누구세요?]

[…….]

문이 열리면서 보였던 것은 슬립을 입은 채 반쯤 헐벗은 그 양아치랑 끌어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송선호를 보고 대단히 당황한 그녀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옷을 제대로 입고는 그를 맞이했다.

[웬일이세요?]

[…어제까지 보내셔야 하는 원고를 안 보내주셔서요.]

[네? 오늘 밤까지 아니었… 아! 어떡해!]

[계속 연락을 안 받으셔서요. 건강상의 문제로 휴재하게 되었다고 저희가 알아서 공지는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날짜를 헷갈려서… 진짜 죄송합니다. 일단 들어오세요. 다 써 놓긴 했는데….]

[…….]

송선호는 그 집안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그래서 그냥 현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자기 스크린을 찾으러 어디론가 갔다. 분주하게 발소리만 들렸다. 그동안 그 양아치 새끼는 묘한 눈길로 송선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마치 그녀처럼 속눈썹이 짙었지만 머리색과 같은 금색에다가 비취색의 눈동자가 예쁜, 진짜 미남이었다. 선글라스 끼고 있는 것만 항상 봤는데 벗은 것을 보니 안 그래도 야살스러운 인상이 몇 배는 증가한다. 분위기가 마치… 엄청 안 좋은 버전으로 몇 배나 불린 그녀 같아 보이기도 했다.

송선호는 당연히 그가 아니꼬웠다.

[…지금이 작가님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지금 잘 마무리를 지어야 차기작도 잘 되는 거란 말입니다. 너무 작가님한테 이상한 바람 안 넣어 주셨으면 합니다.]

쓸데없는 말이라는 것도 알고 질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슬쩍 시선을 올려 도현이 2층에 있는 기색을 살피고는 다시 송선호를 보며 평이하게 말했다.

[미안. 어제 우리가 이런 거 하느라 바빠서.]

그는 V자를 그린 자신의 중지와 검지 사이에 그 야살스러운 입술을 두고 한 번 날름 핥는 행동을 하였다.

[!]

송선호의 얼굴이 확 붉어지며 표정을 확 구겼다. 그러자 그가 씨익 웃었다. 도현은 그제야 스크린을 찾고 그들에게 돌아왔다.

[금방 편집장님 메일로도 보냈는데 일단 여기서 한 번 확인해 보시겠어요?]

[…됐습니다. 회사에 가서 확인하겠습니다.]

송선호는 곧바로 등을 돌려서 밖으로 나왔다. 그 뒤로도 한두 번 더 그런 식으로 펑크를 내자 송선호는 아예 마감날 그녀의 집으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어떤 날은 크루즈로도 출근하였다. 그리고 어느 날은 남자 스트리퍼들이 한가득 크루즈 한 켠에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그렇게 어느 날부터는 그녀에게 빈정거리는 말을 많이 하기 시작했고 그녀도 그에게 말을 놓았다. 처음 험한 말을 했을 땐 그녀가 스크린을 집어 던지며 가지고 꺼지라고 했다.

그녀를 위해 스트리퍼를 불러 주고 비싼 파티를 열어 주고, 명품이나 와인, 보석, 약 같은 걸 가르쳐주는 그가 증오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그와 그가 해주는 것들을 좋아하는 그녀가 미워졌다. 나중에는 그 양아치보다도 그녀가 수백 배는 더 싫어졌다.

그 뒤로 도현은 다들 알다시피 슬럼프에 돌입했고 그녀가 작품 활동을 하지 않고 크루즈를 타고 몇 년이나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을 땐 당연히 송선호도 더이상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차라리 보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송선호도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대시를 받아보거나 소개를 받아서 여자를 만나보며 나름대로 새로운 여자와 연애를 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어떤 여자도 그녀와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도 기분도 들지 않는 여자에게 몇 번 이상 만나고 노력하기가 싫었다. 그냥 일과 사업에 몰두했다.

그리고 작년 신정이 지나고 여행에서 돌아온 그녀는 다시 작품 활동을 하겠다는 의사를 회사로 타진해왔다. 회사에 큰돈을 벌어다 준 대작 작가였으니 당연히 회사의 반응은 좋았다. 그녀에게는 다른 담당이 붙었다. 하지만 몇 주 그녀를 담당하던 직원은 그녀가 제대로 글은커녕 소재나 시놉시스조차 잘 못 낸다고 말했다. 이미 몇 년이나 글을 손에서 놓아서 그런지 아무리 봐도 재미가 없다는 말이었다.

길을 가다가도, 얘기를 하다가도 영감을 받거나 쓰고 싶은 이야기가 떠오르면 금세 그 자리에서 집중해서 글을 쓰던 그녀였다. 믿기지가 않았다. 송선호는 그녀에게 더이상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저도 모르게 그 담당에게서 그녀가 쓴 글을 받아 보았다. 솔직히 충격적이었다. 그건 말그대로 지금의 트렌드 키워드를 전부 박아 넣기만 한 조잡한 글이었다. 이야기를 이끄는 흐름이 강하고 또 어쩔 때는 마음이 다 안타까워질 정도로 섬세했던 그녀의 필체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렇게 한 반년 정도 지났을까. 결국 KP노벨 사장인 송선호의 삼촌은 원래 네가 담당하던 작가이니 네가 잘해서 작품 좀 뽑아 보라고 말해왔다. 사실… 그때 거절했어야 했는데.

그리고 다시 만난 그녀는 예전보다 더 예뻐지고 섹시해지고… 그 양아치와도 헤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글을 쓰는 것을 보면 핀치에 몰린 것처럼 우왕좌왕하는 것이 보였고 어떻게 해서든 단박에 돈을 벌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싶어 했다. 그래도 계속 쓰다 보니 조금씩 나아지긴 했는데도, 정말 이거다! 싶은 글은 쓰다가 지레 포기하기도 했다. 그녀를 독려하거나 혹은 닦달하기 위해 그녀의 집에 자주 가다 보니 전과 다르게 그녀의 허술한 면모나 어린애 같은 면을 알게 되기도 했다.

그렇게 반년 정도 지나니 그녀가 처음으로 얼굴이 새파래져선 빚 얘기를 했다. 진짜 작품을 해서 돈을 안 벌면 큰일 날 것 같다고. 그렇게 돈이 많았던 그녀인데,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의 소비 습관이 줄이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자포자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아예 아무것도 적지 못하고 힘들어만 했다. 그제야 약간 심각성을 느끼고 그녀에게 얼마나 빚을 졌냐고 물어봤지만 그녀는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 뒤로도 계속 물었지만 절대 말해주지 않았다.

그리고는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해서 예전 인터뷰에서 도현의 팬이라고 한 유명 만화가 로웰 리에게 연락을 하여 삽화를 그려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고 그녀가 흔쾌히 수락을 해주어 그녀와 로웰을 연결시켜주고….

그리고나서 이렇게 되었다.

“택배 왔는데?”

“…….”

도현이 현관 앞에서 택배를 들고 부엌으로 왔다. 송선호는 자신이 지금 어떤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을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요즘 컨디션 안 좋네, 송선호.”

택배를 선반에다 두고 다가온 그녀는 막 씻어서 촉촉한 상태였다. 그녀는 손을 뻗어서 송선호의 이마에 손을 댔다. 뭔가 아찔해서 송선호는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뭐가 다를 거라고….’

이런 마음 같은 거 어차피 몰라줄 거다.

*

“…씨발.”

비기닝 포틴에선 작년 엘 드라카 16강 이스트호크, 세컨트 포틴에선 작년 라스트 포틴까지 버텼던 나인훅을 만났던 메트로서울 클럽 웨스트이글은 써드 포틴, 첫째 주 목요일에 작년 64강 런던 레드폭스와 대전하게 되었다.

16강 이스트호크도 무찔렀는데 64강이 무슨 걱정이냐 하겠지만, 런던 레드폭스는 사실 작년 우승 후보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던 팀이었다. 포쓰 포틴에서 불행하게도 주전 멤버 셋을 부상으로 잃고도 64강까지 올라간 무서운 저력을 가진 클럽이다. 그런 클럽이 올해를 얼마나 벼르고 있겠는가.

“아, 씨발. 올해 우리 대진운 너무 안 좋은 거 아냐?”

라이트 포워드 가람 리한이 운을 뗐다. 같은 라이트 포워드인 조나단 훅도 다 나을 때까지 23시간 정도 남은 깁스를 살펴보면서 쌍욕을 했다.

“비기닝부터 존나 느낌 안 좋았어, 시팔.”

“남들 다 편하게 가는 8주를 왜 우리만 이렇게 개고생이야? 아, 니미.”

강호 클럽이니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말이다. 세컨드 포틴은 주력 멤버를 세이브 하고 경기를 치르고 이겼다고는 하지만 작년 라스트 포틴, 4,500여 개의 클럽 중 140여 개 안에 남을 수 있는 클럽이면 약팀은 당연히 아니었다. 출전 선수 등록은 어떤 클럽이든 30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 서른 명으로, 피날레까지 12전을 치러야 하는 게 바로 엘 드라카다. 손가락 하나로도 일반인을 즉사시킬 수 있는 괴물들의 살육제에서 말이다. 그래서 초반에 최대한 주력 멤버들을 세이브 하고 <드로우 선데이> 이후로는 정말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는 식으로 작전을 짜서 하나씩 이겨 나가야 한다. 마치 비기닝 포틴에서 웨스트이글과 맞섰던 이스트호크처럼. 아니, 그것보다 더 빡세게.

“로드리게스, 정밀 검사는 철저하게 받고 있지? 약 안 하고?”

다 해진 야구 모자를 쓰고 항상 껌을 질겅질겅 씹고 다니는 스튜어트 감독은 어제 인공지능 추첨 결과를 듣고 감독실을 다 때려 부수고 한바탕 열을 쏟아냈다. 그리고 나서는 주력 멤버의 의료기록을 포함하여 30명의 주전 선수들을 면밀하게 살폈다.

“니들 다 약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진짜 경기하다 죽는다. 어? 알았냐?”

스튜어트는 스크린을 네 개나 띄워 놓고 코치들과 보면서 선수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소강재, 너 이 새꺄. 마력 리미트 300 이하로 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냐? 어? 네가 프로면 다니엘 스톤하츠만큼은 못 해도 200선 정도는 지켜야 할 거 아냐?”

“죄송합니다.”

“오늘부터 당장 가서 리미트 연습부터 해. 오펜스 전부 다 가서 해라. 2일 동안 연습한 결과 보고 주전 바꾼다. 못 하는 새끼부터 내보낼 거다. 매일 리미트 만 번, 명중 만 번씩 한다, 실시.”

백(Back), 오펜스를 담당한 멤버 7명은 전부 게헨-세나 오펜스 전용 연습장으로 향했다. 써드 포틴 퍼스트 먼데이 아침이었다. 스튜어트는 13명에 달하는 미드필드 진을 보았다. 그는 얼굴에 부상을 입은 준 필립의 얼굴을 잡고 휙휙 둘러보았다. 눈두덩이가 가라앉긴 했지만 시야 확보가 멀쩡할 때만큼 될지….

“약하지 마라, 약. 진짜 뒤진다. 나 책임 못 진다. 피셔, 랜달, 미드필드 데리고 가서 몸 풀고 달리기부터 시켜라, 10km. 그리고 중앙돌파 연습. 해질 때까지 해라. 결과 바로바로 보내고.”

미드필드들이 나가자 10명의 포워드가 남았다. 감독은 미르 킹쉴드의 앞으로 가 그의 상의를 곧장 위로 뒤집어 올렸다. 좀 살펴보다가 주먹으로 갈비뼈를 가볍게 몇 대 두드려보았다.

“괜찮냐? 안 아프냐?”

“잘 때 가끔 뻐근하긴 한데. 괜찮습니다.”

병실에서는 그렇게 쌍욕을 해대던 미르였으나 게헨-세나에서까지 그러진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는 그들의 감독이었다. 스튜어트는 들고 있던 펜으로 눈썹을 긁적이다가 포워드 코치에게 말했다.

“야, 니들 얘 데리고 가서 크러쉬 연습해라. 한 천 번 해라. 이 새끼 왠지 좀 쫄 거 같다.”

“아! 싫어요!”

부상을 당하고 난 포워드들이 부상의 악화나 또 다른 부상을 두려워하며 디펜스에 소극적으로 될 때가 있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하여 경기 시작 첫 돌격으로 포워드끼리 부딪치는 크러쉬를 계속 시키는 연습 방법이었다. 나름의 재활(?)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몸이 워낙에 튼튼하니 다른 문제는 없지만 멀미는 난다.

“가. 가. 빨리 가. 지금 기분 좆 같으니까, 이 새꺄.”

스튜어트는 스크린으로 미르의 등을 한 대 쳤다. 그의 등쌀에 밀려 미르는 코치 둘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써드 포틴 대진표가 발표되기 전부터 기자들이 게헨-세나 밖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마 더 바글바글할 것이다. 방음 설비로 바깥의 소란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선수들의 컨디션을 위해 가볍게 바람 소리나 새 소리로 만든 백색 소음을 틀어 놓은 상태였다.

미르 킹쉴드는 크러쉬를 천 번 하고 짧은 휴식 시간을 받아 바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스포츠음료로 입만 조금 축이고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경기장 내의 에어 컨디셔닝 시스템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시 코치.”

“왜.”

“분명히 분위기 좋았는데 그냥 가버리는 여자는 도대체 뭐지?”

“여자 얘기하지 마라, 여자 얘기. 지금 여자, 술, 약 얘기하다 걸리면 감독님한테 맞는다.”

조금 숨을 놓은 미르는 코치들의 도움을 받아 스트레칭을 했다.

“아니, 떡 치는 얘기가 아니라. 진짜로. 뭐지? 뭘까? 진짜 분위기 좋았는데.”

미르는 그렇게 물었다. 뭐, 아무리 그래도 남자들이 여자 얘기를 마다하긴 힘든 법이다. 시 코치가 대꾸했다.

“네가 뭐라고 했겠지. 뭐라고 했는데?”

“그냥… 내 걸즈 들어오라고. 내가 빚도 갚아주고 잘해준다고.”

그러자 시 코치는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완전 땡잡았는데? 왜 나가?”

“내 말이.”

“에이, 네가 뭘 더 했겠지.”

“아니, 진짜 그전까지는 엄청 분위기도 좋고…. 진짜 좋았는데 그 말 딱 하니까 표정이 싹 바뀌어서….”

“에이, 네가 더 뭘 했을 거라니까.”

“아니라니까! 그게 다라니까! 데이트 시작하자마자 해러드 데리고 가서 사고 싶은 거 다 사줬고! 비싼 레스토랑 가서 먹고 싶은 거 시켜줬고, 걔 요새 하고 있는 일도 다 신경 써주고. 다 했다니까. 그리고 분위기 좋길래 딱 기회다 싶어서 걸즈 들어오라고 했는데. 내가 이런 거 한두 번 해 봐?”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런 식으로 느껴진 여자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진짜 잘 해주려고 했다. 엄청 잘해줄 생각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확 기분이 나빠졌다. 시 코치는 뒤에서 미르의 등을 눌러주며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진짜 이상한데? 뭐 하는 여잔데? 어떤 선수 걸즈야?”

“아니… GAS(Girls and Sisters)는 아니고. 일반인인데.”

“응? 그런 여자는 어디서 또 만났대?”

“어쩌다가… 아니, 빚도 50억이나 갚아준다는데 솔직히 나 같으면 감사하다고 절을 하겠다.”

“응, 그건 나도. 이상하네.”

다들 빚 때문에 어마어마한 고생을 하고 여기까지 온 남자들이었다. 그것도 대부분이 자기가 진 빚도 아니었고. 시 코치가 수긍해주니 말이 더 나왔다.

“자기 빚이 500억이면 어쩔 거냐고 그러더라.”

“와… 비싸게 나온다. 대단한 년이네. 돌았다. 걔 돈 많냐?”

“아니, 빚이 50억이 넘게 있다니까.”

“뭐 하는 여자라고?”

“글 쓰는 여잔데.”

“글?”

“응. 뭐 연재해서 돈도 많이 벌어봤던 여자더라고. 걔 집이 진짜 어마어마하다.”

“얼마나?”

“못 해도 몇백억은 할 집이던데.”

“뭐? 야. 그런 여자가 널 왜 만나?”

“뭐라고?”

미르가 홱 고개를 돌렸다. 시 코치가 정말 몰라서 그러냐는 듯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아니, 난 빚이 50억이라길래 또 얼굴 반반하고 씀씀이 헤픈 여자일 줄 알았더니만 완전 부잣집 아가씨네. 그런 아가씨가 널 왜 만나냐.”

“…….”

“게다가 니 걸즈가 5명이나 되는데 그 복작복작한 데 그런 여자를 데리고 같이 살겠다고? 어련히 같이 살아주겠다.”

시 코치가 혀를 찼다. 그리고는 그를 놀렸다.

“우리 미르 킹쉴드, 이렇게 꿈이 큰 놈인지 내가 처음 알았네.”

미르는 내심 엄청 당황했다.

“아니… 지금은 걔가 빚 때문에 힘들어서… 팔려갈지도 모른다고 계속 그래서….”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그래도 클래스가 있지. 아직 그 정도 집도 있는 여자고 네가 마음에 들어 할 정도면 그래도 제법 반반할 텐데 차라리 다른 돈 많은 남자를 물지, 뭐 하려고 여자 많고 약 빠는 놈을 만나냐?”

언제 뒤질지도 모르고. 그 말은 입 밖에 내서 말하진 않았지만 서로 알고 있는 말이었다. 미르는 당황해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여자도 니 말 듣고 꽤 기분 나빴겠는데? 그러니까 당장 나가지.”

“…내가 별 볼 일 없는 놈이니까 그런 거라고?”

미르는 정색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렇다기보단… 그, 보통 남자들은 여자 5명이나 데리고 안 산다?”

“그럼 내가 걔들 다 내보내면 나랑 같이 산다고?”

“그거야 모르지.”

“왜?”

미르는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태도로 그렇게 물었다. 시 코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그 여자 마음이지.”

“그런 게….”

미르는 뭔가 굉장히 억울해졌는데 반박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

이기는 것은 좋다. 기분 좋으니까. 미르 킹쉴드는 TFC가 적성에 딱 맞는 사람이었다. 엘 드라카가 시작하니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것도 없어졌다. 답답함도 사라졌다. 경기에 집중하고 있으면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으니 좋았다. 술, 약, 여자보다도 더 흥분되는 것이 바로 승리다. 이기는 것이었다.

물론 여자도 좋다. 기분 좋으니까. 약도, 술도 좋다. 기분 좋으니까. 그리고 세상에 널린 것이 TFC 클럽이고 널린 것이 여자고 널린 게 술과 약이니 미르는 약간의 고민 끝에 그냥 도현 킬스버그에 대한 미련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지가 싫다는데 어쩌겠는가. 세상에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미르에게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다. 정 그러면 시즌 끝나고 닮은 여자로 한 번 찾아보든가. 어쨌든, 그런 것보다도 지금은 써드 포틴이 훨씬 중요했다.

통상적으로 강호 클럽들이 슬슬 긴장하기 시작하는 건 남은 클럽이 560여 개 정도 되는 포쓰 포틴부터다. 본전은 써드 포틴부터다, 라고 얘기하는 건 보통 팬들이었다. 그때부터 엘 드라카 폐인들은 하루 40전의 경기를 모두 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TV, 스크린, 멀티스크린, 디바이스 등 모든 디스플레이를 활용한다). 그리고 그쯤부터 엘 드라카 투기수요가 미친 듯이 증가한다. 560여 개의 클럽을 모두 분석하고 대진표가 나올 때마다 어떤 클럽이 이길지 배팅하는 것은 엘 드라카의 주요 재미 중 하나였다. 적게는 몇백 원 수준에서 몇천만 원, 몇십억까지도 배팅할 수 있었다.

비기닝 포틴부터 강적들만 상대하고 있는 웨스트이글의 향방은 웨스트이글 팬들뿐만 아니라 다른 클럽 팬들, 전 엘 드라카 팬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드로우 선데이 이전에 이렇게 투기가 흥하는 경기는 오랜만이다. 작년 4강에 빛나는 메트로서울 웨스트이글 대 작년 비운의 우승 후보 런던 레드폭스! 현재 배팅 상황은 4:6 정도로 런던 레드폭스가 앞서고 있었다.

“씨발, 이기자. 어? 저딴 여우 새끼들은 어차피 드로우 선데이 이후에 박살 낼 생각이었다. 좀 빨리 만나는 거라 생각하자. 올해 우승은 우리다.”

런던 <빅토리아 돔>. 웨스트이글 주전 30명과 코치들, 감독이 둥그렇게 어깨동무를 하고 전의를 다졌다.

“레드폭스도 우리처럼 디펜스가 강한 팀이다. 어느 팀 디펜스가 먼저 무너지느냐가 관건이다. 당연히 저 좆 같은 새끼들이 먼저 꺾인다.”

스튜어트 감독이 말했다. 영국계 인도인인 스튜어트는 모자를 쓴 채 모든 선수들의 눈을 하나씩 보았다.

“오펜스, 레프트 포워드 놓치면 니들이 죽는 거다. 킹쉴드랑 로드리게스는 잘 파고들어라. 킹쉴드, 처음부터 넌 미리 한 대 맞는다고 생각해라. 로드리게스, 넌 부상은 절대 안 된다. 이번 작전은 한 번 밖에 못 쓰는 거고 타이밍이 전부다. 알았냐?”

“네!”

“간다. 이기자.”

그리고 기합을 한 번 내지르고 선수들이 나가고 벤치는 들어왔다.

“우우우우!!”

“우우우우우!!”

레드폭스 클럽 팬들이 야유를 보냈다. 미하엘 로드리게스 및 몇몇 미드필더는 관중을 향해 욕설을 의미하는 손짓을 날렸다.

몇몇 스페어는 벌써부터 몸을 풀고 있었다. 빅토리아 돔은 런던 레드폭스의 홈이다 보니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레드폭스 팬들이 경기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게다가 웨스트이글 팬들도 2천 명쯤 온지라 관중석 쉴드가 계속 황금색으로 번쩍번쩍하며 쿵쿵 소리가 나고 있었다. 팬들이 배트를 가지고 서로 쉴드을 치고 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는 걸 보니 오늘 훌리건은 사람 여럿 죽일 것 같다.

검은색 슈트를 입고 파란 홀로그램을 전신에 두른 웨스트이글 팀 9명과 흰색 슈트를 입고 빨간 홀로그램을 전신에 두른 레드폭스 팀은 이미 색깔부터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네, 다시 중계팀 연결합니다. 2127 엘 드라카, RVB 스포츠 중계위원 이민아입니다. 저희 중계팀은 한국 시각 오후 8시, 현지 시각 오후12시. 런던 빅토리아 돔에 와있습니다. 웨스트이글의 첫 런던 원정 경기. 시작 30초 전입니다.]

[작년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런던 레드폭스 클럽. 불행히도 포쓰 포틴에서 주전 셋이 심각한 부상으로 출전이 불가능해지면서 우승이 날아갔다고 여겨지는 비운의 클럽이었죠.]

그러자 삼인방 중 가장 차분하게 지금까지 중계를 해온 이민아 중계위원이 대본을 정리하면서 상큼하게 웃었다.

[좆 까라고 합시다. 우리는 작년 4강이었고 레드폭스는 64강밖에 못 올라갔습니다. 당연히 오늘은 우리가 이깁니다.]

[말씀 한번 잘하셨습니다, 이민아 중계위원.]

[경기 시작합니다.]

양쪽 다 3-4-2 포메이션. 웨스트이글 오펜스 2명은 일제히 레드폭스의 레프트 포워드를 노리며 펀칭 마법을 날렸다. 펀칭 마법은 전에 미르 킹쉴드가 이스트호크 전 중반에 맞았던 원거리 마법이었다. 말 그대로 맞으면 주먹으로 세게 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런 별명이 붙었다. 엘 드라카 허용 마법 중 가장 널리 쓰이는 공격 마법이었다. 레드폭스의 레프트 포워드는 미친 듯이 날아오는 집중공격을 피하다가 결국 머리를 한 대 맞고 그때를 노려 라이트닝 공격까지 당했다.

[어어…! 이러면 우리 미드필드 엄호가 안 되는데…!]

[킹쉴드!! 뛰었습니다…! 레드폭스 센터 포워드를 노립니다. 크러쉬 전에 점프라니 무슨….]

아직 선수들이 섞이기도 전에 점프하면 당연히 상대편 오펜스가 타격하기 쉬워진다. 미르 킹쉴드는 몸을 띄우자마자 두 대부터 맞았다. 아무리 소드오라를 추진력으로 삼아 공중에서 기동력이 있다 하더라도 땅에 발 디디고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미르 킹쉴드는 전방에 방어를 위해 소드오라를 집중하고 허를 찔린 센터 포워드의 머리를 무릎으로 강타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상대를 넘어 앞으로 달리고 그의 뒤를 바짝 따라 달리던 미하엘 로드리게스가 소드오라로 칼날의 형태를 만들어 오른손에 씌운 상태로 씨익 웃었다.

“나쁘게 생각하지 마라.”

그는 곧바로 센터 포워드의 복부를 세게 찔렀다. 머리를 맞아 순간 정신에 공백이 생긴 레드폭스 센터 포워드는 방어를 위한 오라를 제때 돌리지 못했다. 곧바로 전투복이 서걱 썰리고 그의 등 뒤로 오라의 칼날이 삐죽 튀어나왔다. 미하엘은 곧바로 소드오라를 해제하고 앞으로 달렸다.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온다. 그 사이 미드필더 둘이 웨스트이글 오펜스에 의해 타격을 받은 레드폭스의 레프트 포워드를 아웃시켰다. 경기 시작된 지 30초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레드폭스 센터, 레프트 포워드 아웃!!!!]

[레드폭스 센터 포워드 필리페 버밍험 아웃 앤 다운!!! 세계 랭킹 4위! 필리페 버밍험 아웃 앤 다운!!! 메딕 뛰어갑니다!]

오펜스의 엄호를 기대할 수 없던 웨스트이글 미드필드는 이미 전방에 소드오라로 쉴드를 최대한 전개하여 앞으로 뛰고 있는 중이었다. 곧바로 웨스트이글 오펜스의 공격은 레드폭스의 남은 포워드에게 향하고 있었다.

[스튜어트 감독!! 레드폭스 전으로 엄청난 전술을 씁니다! 스튜어트 감독!!!]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네? 왜 레드폭스 포워드들이 방어를 못 하는 겁니까!!]

중계 카메라 몇 개가 벤치에 서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웨스트이글 감독 스튜어트에게로 향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카메라를 그가 바라보았다.

“씨발. 우리가 이긴다, 이 좆밥들아.”

그리고 그는 손으로 Fuck you를 날렸다. 웨스트이글 클럽 팬들은 지금 입고 있던 옷을 찢고 깃발을 흔들고 난리가 났다. 악기를 마구 두드리고 승리의 나팔을 불었다.

초반부터 강호 클럽들을 상대하며 디펜스들이 원거리 히트에 하도 많이 맞다 보니 이번에 새로 바뀐 대미사일 방어 쉴드 기술을 접목한 헬멧의 단점을 발견한 스튜어트는 그것을 곧바로 레드폭스 전에 사용하기로 했다. 바로 머리에 펀칭 공격이나 강력한 타격을 맞으면 전의 헬멧보다 뇌진탕이 심하게 일어난다는 점이다.

레드폭스 팀 감독과 코치들이 경계선까지 나와 선수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지시를 새로 하고 있었다. 곧바로 중앙 침투의 목전까지 온 미하엘 로드리게스에게 레드폭스 오펜스가 공격을 집중하고 레드폭스의 미드필드 진이 쇄도했다.

[어어, 안됩니다. 안됩니다!! 로드리게스!!!! 로드리게스…!!!!! 아! 오펜스!! 드디어 미드필드 엄호로 돌아옵니다!]

원거리 히트는 최대 출력의 소드오라로 막고도 몇 번 타격 스코어가 올랐다. 그대로 레드폭스 미드필드 진에게 덮쳐지기 전 웨스트이글 오펜스가 눈이 먼 레드폭스 미드필드 두 명을 타격해서 날려버렸다. 하지만 레드폭스 오펜스에게 쇄도하기 직전 상대편 다른 미드필더가 미하엘 로드리게스를 덮치고 바닥을 함께 굴렀다.

[아아!!! 아깝습니다!! 정말 아깝습니다…!!]

[경기 시작 3분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미 중계진도 흥분해서 말이 중구난방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9대 7. 그것도 디펜스가 강한 클럽의 포워드 둘을 제거했다.

[레드폭스! 작년 엘 드라카의 악몽이 다시 살아나나요!! 센터 포워드 9번 필리페 버밍험! 2급 부상 소식이 들려옵니다.]

[올해도 버밍험은 드로우 선데이를 넘기지 못할 예정입니다.]

[버밍험 뿐인가요. 레드폭스는 올해 64강도 못 갈 겁니다! 날아라, 웨스트이글!!]

순식간에 포워드 둘을 날려버렸으나 그 이후로 경기는 고착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이미 작년에도 주력 멤버를 셋을 잃고도 64강까지 올랐던 레드폭스였다. 버티기야말로 그들의 장기였다.

[가람 리한…!! 가람 리한…! 안 됩니다. 타격 스코어 한계에 달하고 있습니다. 빨리 선수 교체를… 네! 선수 교체 들어갑니다! 조나단 훅! 26번 조나단 훅 아슬아슬하게 가람 리한을 대신하여 라이트 포워드로 들어갑니다!]

[스튜어트 감독, 칼을 갈았네요. 까딱했다간 리한 선수가 심각한 부상을 입을 뻔했는데도 스코어 레프트 500 이하로 남을 때까지 버팁니다.]

[과연 명장. 사사로움은 버려둡니다. 레드폭스 대전, 분명히 그럴 가치가 있을 겁니다. 가람 리한 선수 부상 회복에 만전을 기하길 바랍니다.]

그대로 20분 동안 상대의 미드필더 한 명씩을 아웃시킨 양 클럽은 8대 6. 6명. 아슬아슬한 숫자다.

“한 명만 더!!”

“한 명!!”

웨스트이글 팬, 웨스트칙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보통 상대 팀과의 명수 차가 3명 이상으로 벌어지면 그때부터는 확연히 승기가 기우는 법이다.

“씨팔….”

이쪽도 아슬아슬하다. 여기도 몇 번만 더 타격을 입으면 한꺼번에 줄줄이 셋 정도는 아웃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선수 교체 사인도 안 들린다. 지금 포메이션이 웨스트이글 최고 멤버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사령탑은 이 멤버로 레드폭스를 제쳐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레드폭스는 미드필드도 전부 포워드 같은 놈들이었다. 게다가 미드필더로서의 기동력도 상당한 편이다. 웨스트이글 포워드들이 포워드치고 기동력이 상당하다는 것과 미드필더로서 기동력이 상당하다는 것은 비교하는 게 좀 우스울 정도다.

미르는 경기 초반부터 히트를 꽤 맞고 움직이고 있는 데다가 상대편 미드필드가 체력도 강하고 빨라 이미 체력소모가 간당간당한걸 스스로도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한 놈만 잡자…!’’

미르는 아직도 버티고 있는 상대편 라이트 포워드에게로 달렸다. 그는 달려오는 미르를 발견했다. 그대로 격투가 벌어졌다.

[오펜스!!!! 킹쉴드 엄호!! 엄호해야 합니다!!!]

곧바로 미르의 근처로 상대편 원거리 공격을 막기 위한 쉴드와 달려오는 미드필드를 막기 위한 오펜스의 엄호가 이어졌다. 상대팀 오펜스도 똑같은 전략을 취했다.

“브랜!! 브랜!! 브랜!! 브랜!!”

레드폭스 팬들이 자기들 라이트 포워드의 이름을 연호했다. 양 팀의 포워드가 그대로 소드오라를 무기화하고 오라를 날리며 싸우자 끼이잉 하고 이상한 소리가 퍼지며 갑자기 바닥이 움푹 파였다. 관중들의 고함소리에 광기가 어렸다. 저런 1대1 격투에선 선수 교체 카드도 쓸 수 없다. 그대로 3분 격렬한 공방 끝에….

[잡았습니다!!! 레드폭스 라이트 포워드 10번 브랜 쇼 아웃!!]

[드디어 8대 5!! 기세를 잡아야 합니다!!!]

미르 킹쉴드는 복부를 움켜잡고 헉헉 숨을 내쉬었다. 오펜스의 쉴드가 엄호를 해주는 사이에 움직여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씨발….”

저쪽 미드필더 하나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때 휘슬이 불렸다.

“웨스트이글 9번 킹쉴드 체인지!!”

선수 교체는 이미 양쪽 다 벼르고 있었다. 브랜 쇼가 아웃 되자마자 선수 교체 카드를 든 스튜어트 감독의 요청이 들어갔다. 아슬아슬하게 사인이 먼저 떨어졌다. 그 뒤 미르 킹쉴드는 상대편 미드필더에게 오라로 강화된 니킥을 먹고 바닥을 굴렀다.

[아…!! 아슬아슬했습니다…! 킹쉴드! 괜찮습니까? 부상이….]

[아직 모르겠습니다. 일어나지 못합니다.]

[28번 샤샤 부퍼 센터 포워드로 출격합니다.]

[메딕 뭐합니까! 빨리!]

대미사일 쉴드 장치로 보호를 받은 메딕이 달려가 미르 킹쉴드를 공중 부양 리프트에 태워 빠르게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잠시 그들을 엄호로 쓰는 선수도 있었다.

그렇게 런던 레드폭스 대 메트로서울 웨스트이글, 무려 2시간 30분이 걸린 공방 끝에 웨스트이글이 간신히 승리하였다.

*

“Q3 투약 준비해주세요. 16, 아니, 17개.”

온몸에 광범위한 근육 용해 진단을 받은 미르 킹쉴드는 이번엔 침대가 아닌 세로로 세운 철제 구조물에 묶인 상태였다. 당연히 구속을 하기 위한 도구에는 마법이 깃들어 있었다.

“아, 씨발….”

이게 제일 싫다. 이거 진짜 존나 아프단 말이다. 17대면…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아직 주사를 맞기 전이지만 알아서 다른 선수들이 그를 미리 묶어버렸다. 반쯤 체념한 미르는 욕을 하면서도 묶이고 말았다. 아무리 최고의 포워드라고 해도 다른 포워드 세 명이 붙잡으면 꼼짝도 할 수 없다.

“미리 모르핀 맞을까요?”

의사가 의견을 물었다.

“싫다고. 안 맞는다고 몇 번을 말해?”

미르가 찾아올 고통 때문에 벌써부터 헐떡거리면서 화를 냈다. 의사는 덤덤하게 주사기기를 손에 들면서 말했다.

“진짜 아프니까 그렇죠. 일단 바이코딘 투약부터 합시다.”

IV를 맞고 5분이 지나고 곧바로 의사가 가장 근육 용해가 심한 복부부터 주사를 시작했다.

“으윽…!!! 아아악!!!!”

그리고 빠르게 두 대를 더 맞자 미르 킹쉴드의 얼굴이 시뻘겋다 못해 보라색이 되었다. 이에 물 수 있는 것을 간호사가 물려주었다. 그렇게 복부에 3대, 오른쪽 가슴 근육에 1대, 오른팔 상완, 이두, 삼두 한 대씩, 양 허벅지에 3대씩, 허리와 등에 5대, 엉덩이에도 2대 맞았다. 이제 미르 킹쉴드는 꼬박 이틀 동안 눕지도 못하고 이대로 버텨야 하는 상황이 왔다. 일단 17대를 다 맞은 미르는 진통제를 제일 강하게 맞고 있는데도 고통 때문에 기절했다. Q3는 마취제와 함께 투약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빈번했다.

“진통제는 최대로 하고 이틀 버텨봅시다.”

근육 용해를 저지하고 용해된 근육을 재구성하는 Q3 용액은 근육 부상을 당한 운동선수의 운동력을 최대한으로 보존시켜 주지만 고통이 장난이 아니라는 엄청난 단점이 있었다. 용해된 근육도 독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환부가 갈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게 통설이다. 사실 2, 3일은 모르핀을 달고 살아야 하는 치료법이다. 물론 사흘 지나도 아프긴 아프다.

경기 중이야 흥분 상태라 아픈지도 모르고 뛰는 거지만 미르 킹쉴드는 포워드 치고, 아니, 소드마스터 치고도 고통에 대한 인내력이 매우 부족한 편이었다. 한 이틀을 몸부림치고 욕하고 저주하고 별 생난리를 다 쳤다.

“아… 씨발… 다 죽여 버릴 거야….”

그리고 이틀 뒤에는 처음의 그 철제봉에 묶인 채 지쳐 늘어져 있었다. 매니저 박샘은 그의 주변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슬금슬금 살폈다.

“아직 아픈 거죠?”

“어제보단 낫긴 할 거예요.”

“와… 17대 맞으면 사람이 이렇게 되는 구나….”

예전에 9대까지는 맞아봤다. 9대 맞았을 때도 주변 사람들을 다 때려 죽이려고 들었던 그인데 이번엔 진짜 미친놈 같았다. 축 처져 비틀거리던 미르는 매니저를 불렀다.

“야….”

“네, 킹쉴드. 좀 괜찮습니까?”

“괜찮냐고 물어보지 마, 씨발… 딱 봐도 좆 같은 거 안 보이냐.”

“죄송합니다.”

“씨발… 그 여자 좀 불러봐.”

“네? 누구요?”

“킬스버그. 그 여자 좀 불러봐.”

“아, 그 작가님. 사인받아야겠다.”

박샘은 디바이스를 꺼내며 그렇게 말했다. 두 번 정도 얼굴을 마주쳤다 보니 호기심이 생겨 그녀의 작품을 찾아보았다. 전작은 모르겠는데 이번 작품은 만화가 있어서 스르륵 읽을 만했다. 업계 얘기기도 하고 야한 내용이라.

“…….”

미르는 선 채로 묶여 있는 상태로 구속 구에 온몸의 체중을 의지한 채 축 늘어져 있었다. 풀어 달라고 해도 안 풀어준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죽었을 것이다. 이제 난리를 칠 기운도 없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작가님. 킹쉴드 선수 매니저 박샘입니다. 네. 네. 아, 다름이 아니라, 킹쉴드 선수가 부상 때문에 힘든지 작가님이 보고 싶다고….”

박샘은 그 정도까지 말했다가 약간 당황했다.

“킹쉴드, 이번엔 그냥 안 오신다는데요? 연락하지 말래요…. 뭐 잘못했어요?”

“…바꿔봐.”

박샘은 멀찍이서 스피커를 켰다.

“야… 저번엔 미안….”

미르는 곧바로 그렇게 말했다. 여자는 많고 시즌이 끝나면 비슷한 여자를 찾겠다고 마음먹었던 게 무색하게도 말이다.

“내가 잘못했어…. 와서 나 좀 풀어줘. 죽을 것 같아.”

미르는 최대한 불쌍하고 기운 빠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알아서 하세요.]

그녀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미르는 솔직히 좀, 상처받았다.

“내가 진짜 잘못했다니까…. 다시는 그런 말 안 할게…. 이 새끼들이 나 안 풀어줘. 죽을 것 같아. 나 좀 살려줘….”

미르가 애원했다. 욕을 하고 난동을 피웠으면 피웠지 아파서 애원해본 건 처음이다. 용병 생활을 하다 다쳐도 이렇게까지 아팠던 적은 없었다. 아픈 게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너무 아팠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그녀가 보고 싶었다.

[싫어요.]

“…….”

그래도 거부당했다.

‘왜? 어째서? 내가 더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내가 더 뭘 해야 하는데?’

그는 유명 클럽의 선수였다. 연봉도 높고 잘생기고 인기도 많았다. 그녀를 위해서 그 나름대로 해줄 수 있는 것도 많았고 어느 정도 이상 해줄 용의도 충분히 있었다. 도대체 여기서 더 뭘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애원까지 하는데….

“아….”

씨발… 미르는 이틀 동안 IV 말고는 뭘 먹을 수 있던 것도 없었다. 그대로 또 깜박 정신을 잃었다.

일어났을 땐 침대 위였다. 묶여 있지 않았다. 그리고 옆의 소파에는 도현 킬스버그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스크린을 공중에 띄워 놓고 톡톡 뭔가를 쓰고 있었다. 청바지에 흰 티셔츠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맨얼굴인 것 같다.

“킬스버그….”

몸을 일으키려고 했더니만 그것만으로도 온몸이 짜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헉, 하고 동작을 멈추었다. 도현은 고개를 돌려 미르를 보았다.

“내가 잘못했어…. 이리 와줘.”

미르는 궁지에 몰린 어린애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현은 한숨을 푹 쉬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전처럼 곁에 앉거나 하지는 않고 거리를 두었다.

“이런 식으로 다칠 때마다 연락하실 거예요? 이렇게 사람 마음 불편하게 하는 사람인지 몰랐어요.”

“그러지 마…. 네가 말하는 거 다 할 게. 500억도 상관없어. 어? 이리 와서… 전처럼 해줘….”

미르는 이전보다도 꼼짝 못했다. 훨씬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현은 인상을 찌푸리고 한숨을 쉬었다.

“내가 잘못했어…. 응? 미안…. 다시는 그런 말 안 할 게. 나 죽을 거 같아. 미안해….”

미르는 병원 이불 속에서 간신히 손을 뻗어 도현의 손을 살짝 잡았다. 도현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까와는 약간 느낌이 달랐다.

“진짜….”

나쁜 짓을 해도 진심으로 미워하기가 힘든 남자다. 왜일까? 오만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도현에게 걸즈에 들어오라는 말이나 했던 남잔데. 도현은 미르 킹쉴드라는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조금 궁금해졌다. 키가 2미터나 되고 덩치도 산만 한 남자가 가끔 너무나 어린애 같이 느껴진다.

“…많이 아파요?”

도현은 미르의 곁에 앉아 그의 머리카락을 조금 쓸었다. 워시세트에서 세안 도구를 꺼내 그의 얼굴을 가만히 닦기 시작했다.

“죽을 거 같아….”

미르는 몸을 겨우 움직여 도현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허리를 손으로 감쌌다. 곧 다시 깜박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났을 땐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았고 도현은 없었다. 미르는 다시 침대에 묶여 있었다. 뭔가… 허탈하다. 몸의 찝찝함이 좀 가신 걸 보니 병원에서 씻긴 것 같다.

“이제 진짜 기운 없어서라도 사람 못 치니까 좀 풀어라…. 어?”

미르가 그렇게 말하자 박샘이 꾸벅 졸다가 일어나서 미르를 보았다.

“아, 일어나셨어요?”

“좀 풀라고. 이제 사람 안 칠 테니까.”

“괜찮으시겠어요?”

이제 사흘은 지났다. 박샘은 약간은 긴장하면서 미르의 구속을 풀었다. 구속을 풀자마자 근육경련이 꽤 심하게 일어나서 박샘이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이… 씨발….”

미르는 그걸 이를 악물고 견디고는 다시 축 늘어졌다.

‘진짜 이러다 죽겠다….’

“배고프다…. 밥 좀 가져와라.”

미르는 엎드려 누워, 다리는 여전히 경련하는 채로 말했다. 박샘이 대답했다.

“안 그래도 킬스버그 작가님이 죽 사러 가셨어요.”

“…왜 네가 안 가, 이 개새끼야.”

“네? 아니, 혹시 작가님 계시다가 험한 꼴 보실까 봐….”

갑자기 쌍욕을 먹은 박샘이 얼떨떨한 말투로 대답했다.

“화해했나 봐요? 오늘 또 오시고. 마감날 아니신가?”

오늘 일요일이다. 해는 아직 떠 있지만 그림자가 길다. 또 사흘이나 병원에 처박혀 있었다. 미르는 엎드려 누워 있는 상태에서 간신히 몸을 돌려 바로 누웠다. 여전히 온몸의 근육이 찢어지는 것 같고 계속 묶여 있었던 지라 많이 저리다. 씻기고 난 후 온몸의 테이핑도 새로 했는지 전신이 마구 당겼다. 박샘이 다가와 침대를 세워줄 때 도현 킬스버그가 돌아왔다. 미르는 안도하여 도리어 억울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냥 간 줄 알았어.”

“네? 오늘 다시 온 건데요?”

도현은 머리를 틀어 올려 묶고 시원해 보이는 홀터넥 점프슈트를 입고 왔다. 바지는 발목 정도에서 가볍게 조여졌다. 신발도 굽이 없는 운동화인 걸 보니 오늘은 준비하고 간호를 하러 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손에 든 종이봉투 여럿에서 비싼 죽집의 음식과 음료, 과일, 자기가 먹을 커다란 초밥 세트 등을 꺼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은 나무 상자에 든 초밥 세트 둘은 박샘에게 넘겼다. 미르가 짜증을 냈다.

“아! 나도 저거 먹을래.”

“안 돼요.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먹었다면서요.”

도현은 빨대와 일체형인 텀블러 두 개에 라임민트 음료와 생수를 각각 따랐다. 그녀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엔 공짜로 안 해줄 거예요. 간호료 받을 거예요.”

“…알았어.”

치사하다 뭐다 할 줄 알았는데 미르는 순순히 그렇게 말했다.

“숟가락 쥘 수 있어요?”

“못 쥘걸요.”

못 쥔다. 텀블러도 못 쥔다. 전신 근육 부상이었다. 도현은 미르의 오른편에 앉아 그에게 물부터 좀 먹이고 죽을 먹여 주기 시작했다.

“경기 봤어?”

미르가 물었다. 그는 오른팔에 경련이 일어나고 있어 계속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웰 선생님이 꼭 봐야 한다고 해서요.”

“나 멋있었어?”

“걱정됐어요.”

또 어린애 같은 말.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전에는 상처 하나 없이 수술 후유증 때문에 아팠던 거라던데 오늘은 전신 테이핑에 피멍이 잔뜩 들어 있으니 보는 사람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이러면 포쓰 포틴 때는 좀 쉬어요?”

“몰라…. 사나흘 지나면 아픈 것도 없어져서…. 대진표 나와봐야 알 것 같다. 우리가 올해 대진운이 별로라.”

“그렇다면서요.”

“아… 먹을 땐 좋은데 먹고 나면 꼭 아파. 으윽….”

갑자기 다급하게 숨을 쉬더니 미르가 이를 악물고 복부를 손으로 감쌌다. 복부의 근육이 파르르 경련했다. 도현은 당황해서 그의 복부에 같이 손을 댔다.

“그럼 계속 먹으면 괜찮을까요?”

“어…. 좋은 생각이다. 하나 더 줘봐.”

죽을 하나 더 뜯었다. 그리고 다시 먹기 시작하니 고통이 좀 잦아들었다. 미르는 좀 심각한 얼굴로 죽을 내려다보았다.

“3일 내내 1초도 안 빼고 먹어야겠다.”

그러자 도현이 풋 하고 웃었다. 아차, 하며 싹 표정을 지웠다. 미르는 왠지 기분이 좀 좋아졌다.

“어, 웃었다.”

“아니에요.”

“웃었잖아.”

“아니라니깐요.”

“화 풀렸어?”

“안 풀렸어요.”

“미안, 응? 미안.”

아프면 사람이 애가 된다더니 미르 킹쉴드가 딱 그 짝이었다. 도현은 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미르는 아플 때가 차라리 낫네요. 멀쩡할 땐 꼭 미운 말만 하면서.”

그리고 그녀의 표정이 좀 풀어졌다. 미르는 좀 더 기분이 좋아졌다.

“작가님 식사하세요. 저녁 시간 다 지나겠어요.”

미르의 얼굴에 순간 난처함이 스쳤다. 지금 미르는 숟가락질을 못 한다. 얘가 안 주면 난 못 먹는다. 못 먹으면 아프다. 그걸 알아차린 도현은 또 풋 하고 웃더니만 말했다.

“알았어요. 매니저님, 제 건 여기 주세요.”

미르의 침대 식탁에 검은색 나무 상자에 예쁘게 종류별로 진열된 14피스의 싱싱한 초밥과 입맛을 돋울 각종 절임과 야채 샐러드, 간장과 쪽파로 살짝 간한 연두부, 그리고 꿀에 절인 견과류와 과일, 푸딩이 작게 디저트로 들어가 있었다. 거기에 미소국까지 있는 훌륭한 음식이었다.

“나 하나만.”

미르가 단박에 말했다. 딱 봐도 밍밍한 죽보다 훨씬 맛있어 보인다.

“안 돼요. 속 버려요.”

도현은 미르의 입에 죽을 넣어주고 자기도 음식을 하나 입에 넣었다. 그렇게 같이 식사를 하고 도현은 미르의 상태를 살피다가 시계를 보았다.

“가지 마.”

미르는 대번에 말했다. 도현은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여자친구들도 많으면서 왜 자꾸 저를 불러요? 여자친구들한테 간호해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녀… 걔들은 와봤자 아무것도 안 해. 못 해. 할 줄도 모른다고.”

“…….”

물끄러미 미르를 보던 도현이 스크린을 들고 미르를 마주 보고 그의 발 치에 앉았다.

“그럼 간호료 대신에 제 일 좀 도와주세요.”

“응? 만화 모델?”

“아뇨. 그거 말구요.”

도현이 웃으며 말했다.

*

써드 포틴 때는 스페어 7명과 주력 2명. 포쓰 포틴 때는 스페어 8명과 주력 1명을 멤버로 하여 20분 내에 가볍게 승리한 이스트드래곤은 하늘이 돕는 것인지 대진운이 아주 좋았다. 시기상조지만 클럽 내에서는 엘 드라카 사상 최초로 2년 연속 우승컵을 드는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잘 지내고 계십니까, 도현 씨? 소설도 연재 들어간 것 확인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반응이 좋은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못 읽지만 휴식기에 들어가면 꼭 읽도록 하겠습니다.>

<네. 연락 감사해요, 다니엘 씨. 경기할 때 조심해요. 미르 계속 다치는 거 보니까 다니엘 씨도 그러실까 봐 걱정되네요. 다치지 마세요.>

다니엘 스톤하츠는 도현의 답장을 한 번 엄지로 쓸었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보고 싶다.

‘절대 다치지 않겠습니다.’

다니엘은 진지하게 그렇게 다짐하고 입장했다. 올해 엘 드라카 첫 출전이었다. 엄청난 관중들과 함성이 들려왔다. 저절로 심장이 좀 빠르게 뛰며 긴장감이 온다. 익숙하면서도,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감각이었다. 선수들끼리 기합을 넣기 위해 슬슬 둥그렇게 모여 섰다. 그리고 그의 옆에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는 어린 소년이 손을 떨면서 서 있었다.

“신태호.”

“네?”

그는 무슨 공황에라도 빠진 것처럼 보였다. 식은땀도 흘렸다. 다니엘은 그의 양 뺨을 가볍게 찰싹찰싹 때렸다. 그는 눈동자를 심하게 떨다가 다니엘 스톤하츠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고작 170이 간당간당 한 어린 소년이었다.

“연습처럼만 하면 된다. 너무 긴장하는군.”

그도 이번 엘 드라카 첫 출전이었다. 피프쓰 포틴 퍼스트 먼데이 전. 상대는 올해 처음으로 피프쓰 포틴까지 출전한 클럽이었다. 현재 승리 예상팀도 9대 1로 이스트드래곤의 압승이 기대되고 있었다. 드로우 선데이 전에 주력 멤버들이 한 번쯤 실전을 뛰어야 할 것 같다는 판단에 이번 피프쓰 포틴에는 주력 멤버가 다섯이나 출전한다. 퍼스트 먼데이이고 상대 팀이 전통 강호 팀이 아니라는 것에서 몸풀기로는 딱 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그중 다니엘 스톤하츠, 치엔이 루카스, 카흐 밀란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작년 엘 드라카 이후로 단연 최고의 화제인 신태호도 출전이다.

17살. 천재 미드필더.

“감독이 방어만 하라고 했잖아. 오펜스 근처에서 상대 팀 미드필더만 막으면 된다.”

“네, 네…. 네….”

새카만 머리카락에 아주 어두운 푸른 눈동자를 가진 신태호는 소드마스터라고 보기도 힘들 정도로 체격도 작았다. 가장 작은 소드마스터라고 알려진 미하엘 로드리게스보다도 키가 작고 덩치는 그의 반의 반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다. 그는 몇 번을 심호흡을 하며 달달 떨리는 숨을 잠재웠다.

“괜찮나?”

“…네, 괜찮습니다.”

다니엘은 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신태호는 그 뒤로도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곧 감독과 다른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마지막 지시를 들었다. 그리고 경기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30분 만에 승리를 거두었으니 말이다.

“싸우자! 이기자! 죽이자! 드래곤! 이스트드래곤!!!”

함성이 퍼져나간다. 다니엘은 얼굴의 땀을 닦았다. 눈을 감은 채 무릎을 짚고 턱을 닦고 있는 신태호가 눈에 들어왔다. 어리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그는 어렸을 적의 자기 자신을 떠올리게 했다. 정확하게는, 어렸을 때의 그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계속 눈에 들어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드로우 선데이까지 라스트 포틴만이 남았다. 140개 클럽이 라스트 포틴 동안 경기를 치르고 나면 단 70개의 클럽만이 살아남게 된다. 그리고 드로우 선데이를 지나 퍼스트 세븐이 되면 64강이 시작된다.

드로우 선데이 때 인공지능 추첨도 아닌 제비뽑기로 6개의 팀을 자동 탈락시켜 숫자를 맞췄다. 드로우 선데이의 추첨결과만을 위한 투기도 전체 엘 드라카 투기의 10%를 차지할 만큼 큰 행사였다.

다니엘은 도쿄에 있는 도쿄 인피니트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 가벼운 게임에서 오펜스들은 사실 체력 소모도 그렇게 심하지 않는 편이었다. 후방에서 디펜스 및 미드필드의 엄호와 상대 팀 타격 등 전체적인 경기를 좌지우지하지만 실제 다른 포지션에 비해서 움직임이 적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드오라를 최대치로 뿜으면서 경기하는 소드마스터들과는 달리 마도사들은 마력 리미트가 있어 마력 소진으로 인한 체력 저하도 사실상 없다고 보는 게 무방하다.

“퍼스트 먼데이 전인 데다가 가볍게 이겨서 감독님이 미들 선데이는 자유시간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도현 씨를 보러 가야겠다. 다니엘은 곧바로 마음을 먹었다. 셀레나 카토는 스크린을 통해 스케쥴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요새 웨스트이글 장난 아니더라구요. 피프쓰 포틴에선 또 작년 64강 팀을 만난다고 합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요.”

“인공지능 추첨이 좀 잘못된 거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대진운이 정말 나쁘군요.”

“처음엔 진짜 운이 나빴던 것 같고 이제는 남은 클럽 수가 적어지니까 어쩔 수 없이…. 그래도 레드폭스만큼 하는 클럽은 아닐 테니까 웨스트이글이 이기지 않겠어요?”

“주전도 스페어도 많이 소진되었겠군요.”

“그렇겠죠. 드로우 선데이는 넘길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레드폭스 전은 엄청났어요. 우리 감독님 3번이나 돌려보셨다고 하더라구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럼… 일요일에는 서울에 가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 차 불러드릴까요?”

“아닙니다. 알아서 가겠습니다.”

“일요일 밤 11시까지만 돌아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셀레나는 약간 샐쭉한 얼굴로 다니엘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정밀 검사가 끝나자 그는 또 디바이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메시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전에 내가 골라준 옷을 입고 갔던 날… 잘 된 건가? 꽃을 주고 싶다던….’

물어보고 싶었다. 물어볼까? 셀레나는 괜히 스크린 위를 이것저것 누르고 스와이프 하며 지나가는 척 물었다.

“전에 데이트 가신 건 잘 되셨나요? 세컨드 포틴 후에….”

“아, 네. 그때는 감사했습니다. 괜찮…았습니다. 괜찮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저만 좋았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럼 또 데이트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셀레나는 전투복을 벗고 옷을 갈아입는 그의 몸을 힐끗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다니엘이 누구 만나는 거 처음 보네요.”

“아직… 만난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일방적인 거라….”

뭣이? 다니엘은 난처한 얼굴로 표정을 굳히고는 그렇게 진지하게 말했다. 셀레나는 으윽, 하고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도대체 어떤 여자길래 이런 남자도 눈에 안 찬단 말인가…!

“대단한 분이신가 봐요. 다니엘을 마다하는 여자도 다 있고.”

“그게… 제가 실수한 게 많아서…. 아, 셀레나도 같은 여성이니 이해하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러니까 고백을 몇 번이나 했는데도 아직 가타부타 말씀이 없으셔서… 왜 그런 걸까요? 메시지는 보내면 늦어도 답장은 보내시긴 하는데 그렇다고 바로 보내는 건 아니고….”

“…그분이 뭐라고 대답하셨대요? 고백했을 때?”

“그냥….”

다니엘은 귀를 약간 붉혔다. 자신의 귀를 한 번 만지작거리곤 조용히 대답했다.

“귀엽다고 하더라구요.”

“…….”

그건 그냥 자기가 먹기는 싫고 버리기는 아깝다는 뜻 아닌가? 셀레나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다니엘 스톤하츠는 도현에게 일요일에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도현은 로웰의 마감이 일요일까지라 밖에서 만나는 건 조금 힘들 것 같다고 답장을 보내왔다. 그래서 다니엘은 그녀의 집에서 보는 것도 좋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녀가 이렇게 답장을 보내왔다.

<미르도 일요일밖에 시간이 안 된다고 해서요. 다 같이 보실래요? 죄송해요. 로웰 선생님도 딱 한 장면만 더 포즈 좀 부탁하고 싶다고 하시고.>

“…….”

물어보고 싶은 것은 한가득 있었다.

미르 킹쉴드도 지금 만나는 것이냐.

미르 킹쉴드를 지금 이름으로만 부르는 것이냐.

그것도 그렇게 편하게?

다니엘은 미르 킹쉴드가 도현에게 집적거리는 것이 정말 싫었다. 아무리 도현의 부탁을 받아서 포즈 모델도 해주는 것이라지만 정말 싫다. 그가 능숙하게 그녀에게 접근하거나 말을 거는 것도 싫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저번에 세 명의 남자 중에 킹쉴드가 제일 낫다고 평한 것도 다니엘로서는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하며 질투가 나는 상황이었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기분도, 질투가 난다는 기분도… 너무 오랜만이라서 더 이러는 걸까.’

원래 감정이라는 것이 이렇게 격한 것이었던가. 원래 이렇게 참을 수가 없던 것이었나. 그는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도현의 집 앞에서 미르 킹쉴드뿐만 아니라 항상 도현의 곁에 있었을 그 편집장까지 마주치자 다니엘은 평정심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도현을 차지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나 많았다.

지고 싶지 않았다.

지고 싶지 않다니. 다니엘은 태어나 누구한테 져본 적도 없었고 질 수도 없는 남자였다. 그런데도 지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송선호가 먼저 둘에게 인사를 해왔다.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들어가시죠.”

언제나 멀끔한 정장을 입고 다니는 이 편집장은 TFC 선수를 하는 미르나 다니엘보다 훨씬 훌륭하게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남자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차분하고 엘리트적으로 보이면서도 멋져서 누가 봐도 여자들이 좋아할 스타일….

미르 킹쉴드 또한 저 화려한 머리에 환한 눈동자, 여자를 여럿 데리고 사는 만큼 여자한테 익숙해서 만만치가 않았다.

‘다 얼려 버리고 나만 들어가고 싶다….’

송선호의 안내를 받으면서 다니엘은 그렇게 익숙지 않은 생각을 또 하며….

“흑… 선생님… 선생님…. 너무 아파요….”

세 명의 남자는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얼어붙었다.

“!!!”

남자 셋의 입이 떡 벌어졌다. 카우치 앞에 서 있던 로웰 리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주변에는 평소의 아동 만화적인 채감이 사라지고 분노의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아, 오셨어요…. 근데 저희가 지금 여자 대 여자로 중요한 얘기 중이라. 좀 나가 계시겠어요?”

로웰은 그들이 나가는지 확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우치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도현 로렌스 킬스버그가 무릎을 꿇고, 손목과 발목이 빨간 로프로 뒤로 묶인 채 몸에 잘 달라붙는 새 원피스 위로 니플 체인을 달아 놓은 상태였다. 로웰은 손에 라이딩 크롭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카우치에는 쇼핑백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로웰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도현을 을렀다.

“보석이 팔렸으면 원금을 갚을 생각을 해야지! 쇼핑부터 해요!!”

“아, 아니…. 흑… 그게 아니라…. 앞으로 2년은 괜찮을 것 같길래….”

“그게 바로 빚지는 마인드 아닙니까! 뭐 하려고 쓸데없는 이자를 내요!”

로웰이 마편으로 테이블을 짝 쳤다.

“혼나야 돼! 혼나야 돼!”

“앗! 앗! 흑…! 흐윽… 선생님… 잘못했어요.”

로웰이 그녀의 허벅지를 라이딩 크롭으로 때릴 때마다 남자들이 더 움찔움찔했다. 날개뼈까지 오는 남빛 머리카락에 어울리는 분홍빛이 도는 하얀 피부는 고통 때문에 발개지고 촉촉해져서 남심을 마구 뒤흔들었다. 그 증거로 송선호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벌써 몸을 떨고 있었고 다니엘 스톤하츠는 토마토 저리 가라 시뻘게졌으며 미르 킹쉴드는 표정을 아주 심각하게 하고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저기 앞에 있고 싶다…. 다니엘도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다. 그녀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니엘… 하아… 아파요….]

그녀는 어느 쪽이냐면, 분명 남자들을 애원하게 만드는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다니엘에게 애원을 해온다면… 얼마나 아찔할까. 남자들은 제각각의 버전으로 그런 상상을 하고 있었다. 로웰이 도현에게 계속 화를 냈다.

“내 돈 갚을 때까지는 우리 작가님 힘내서 작품 써야지 이상한 데 또 흥청망청 돈 쓰면 안된다구요! 쇼핑하고 싶으면 차라리 저기 있는 멍청한 남자들 돈이나 뜯어요! 남자들 뒀다 뭐에 써요!”

눈을 감고 아파서 파르르 떨던 도현이 눈물을 글썽거리다 ‘어?’하고 눈을 떴다.

“금방… 선생님 우리 엄마 같았어요.”

하나도 안 닮았는데…. 도현이 로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시 도현의 허벅지를 한 대 짝 때렸다. 물론 저기 세 남자는 또 움찔했다.

“집중 안 하죠!”

“아파요. 아파요, 선생님….”

“빚을 갚고 쇼핑을 하면 내가 뭐라고 해요! 빚부터 갚자고! 빚부터!! 우리 둘 다 손잡고 중국 갈까요?! 네?!!”

“잘못했어요. 흑. 흐윽.”

결국 도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다니엘은 심장이 찌르르 떨렸다. 안 되겠다. 가서 말려야….

“사람이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가지고 싶은 거 다 가지고 사는 것도 좋은데 우선순위라는 것도 있잖아요. 일단은 빚부터 갚아야 할 거 아니에요. 내일은 안 살 거예요?”

로웰의 말에 도현이 반박해왔다.

“그래도… 그런 식으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인생 금방 가버린다구요. 하고 싶은 건 그때그때 다 해야 후회 안 남죠.”

“그렇게 살아서 지금은 후회 없어요?”

“…….”

“인생은 밸런스에요, 밸런스. 하고 싶은 거 하고 가지고 싶은 거 가지는 것도 좋은데 지금 상황에 맞는 정도가 있는 거라구요. 빚 다 갚고 돈 엄청 많으면 저것보다 열 배 더 사와도 내가 뭐라고 하겠어요.”

도현이 말을 잃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지고 싶은 건 꼭 가지고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한다고 배웠다. 인생 두 번 사는 게 아니니까.

[너희 아빠 말 듣지 마라. 인생은 가지기 위해 있는 거니까.]

[세상에 네가 가질 수 없는 건 없어. 나도 포함해서.]

하지만… 로웰의 말이 맞다. 맞았다. 우선순위. 밸런스…. 도현은 시선을 떨구고는 가만히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두 개만… 사올 걸 그랬나 봐요. 나머지는 환불할게요.”

“…그 정도는 괜찮을 거 같네요. 저한테 당장 돈 안 갚아도 되니까 일단 전부 원금 갚아요. 알았죠?”

“네….”

로웰의 주위로 다시 만화적 체감이 돌아왔다. 그녀는 라이딩 크롭을 테이블에 두고 도현의 뒤로 돌아가 로프부터 풀었다. 도현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손목을 매만졌다. 그녀는 우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떨었다.

“이, 이거 제가 못 뗄 것 같아요. 너무 아파요.”

“이거… 생각보다 더 아픈 가봐요?”

도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로웰이 체인을 건드리자 도현이 움찔하며 얼굴이 더 확 빨개졌다.

“아! 아파요. 손대지….”

“더 있으면 더 아프죠. 뗄게요.”

“아…!”

도현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는 말했다.

“앞으로 남주들 기분에 엄청 이입해서 쓸 것 같아요.”

“오, 그건 또 예상외의 소득이네요.”

도현이 자신의 가슴을 두 손으로 감싸 잡고는 지끈지끈한 고통을 겨우 참고 있었다. 그제야 도현은 자신을 그렇고 그런 눈길로 보고 있는 세 남자를 발견했다. 도현은 화를 냈다.

“그렇게 보지 마! 기분 나빠!”

“…….”

그러자 찔린 셋은 얼른 제각각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뒀다가 뭐에 쓰기는. 어디 둬봤자 쓸모도 없는 남자들이다. 도와주지는 않고 보고만 있고….

“잠깐 묶은 거라 멍은 안 들 거 같은데… 그래도 약 바를까요?”

“네….”

자신을 혼낸 로웰에게는 화를 내지 않는 도현이었다. 로웰은 저번 섹스토이 샵에서 산 연고도 같이 가져왔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과 발목에 발라주었다.

“여기는 제가 할게요.”

“네.”

도현이 자신의 원피스를 들어 거기 안에 약을 바르려다가, 내가 해주고 싶다… 이런 눈빛으로 보고 있는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보지 말라고!”

화를 내면 좀 무섭다…. 남자들은 다시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허벅지에도 좀 바르고는 일어났다.

“이건 백화점 직원 바로 부를게요. 이거랑… 이것만 빼야겠다.”

도현은 그렇게 물건을 골라 옆에 두고 디바이스로 백화점에 연락을 했다. 도현은 눈가를 손가락으로 훔치면서 부엌으로 갔다. 로웰은 금방 도현을 체벌(…)하면서 영감이 막 왔는지 스크린에다 음산한 웃음을 뿌리며 스케치 중이었다. 남자들은 쭈뼛쭈뼛하면서 어떻게든 그녀의 곁으로 가려고 했다.

‘도현 씨… 괜찮으신가….’

‘와… 씨발, 금방 그거 진짜 야했다. 쩐다. 뭐지? 뭐지? 나랑도 해주려나?’

‘망할… 둘이서 뭐 하는 짓이야…. 저 양아치 같은 년 괜히 소개시켜준 것 같다….’

그들은 집에 들어오고 나서 단 한 마디도 그녀와 말을 나누지 못한 상태였다. 다니엘 스톤하츠와 미르 킹쉴드뿐만 아니라 여기를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들던 송선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있던 와중에 다니엘이 용기를 내서 그녀에게 먼저 다가갔다. 핑계도 있었다. 그래도 손님이 왔고 집주인이니 차라도 내오려고 했던 도현은 다니엘이 다가오자 그를 올려다보았다. 물론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약간 울상인 얼굴도 너무 예쁘다…. 너무나 잘 꾸몄는데 약간 흐트러진 것 같은 모습도….

“저… 많이 아프시면 제가 마법으로 치료해드릴 수 있습니다. 전처럼….”

“아… 진짜요?”

“네. 저 마도의사 면허증도 있습니다.”

전에 센트럴 백화점 테러 때 도현이 발에 상처를 입었던 것도 그가 흉 하나 남지 않게 싹 고쳐줬었다. 도현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지만, 손목을 내밀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심하지는 않지만 약간 붉어지고 조금 쓸렸다. 다니엘은 약간 긴장해서는 그녀의 두 손목을 한 손으로 가볍게 받쳐 들었다. 이렇게 그녀의 피부를 만지는 것은 오랜만이다. 전에 손을 잡았던 이후로. 심장이 이상하게 뛴다. 긴장이 되었다. 솜털이 솟는 느낌이다.

‘어째서….’

그녀만 보고 있으면 이렇게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다니엘은 다른 손으로 양 손목 위를 덮었다. 다니엘의 손에서 은은하게 빛이 나왔다. 그러자 붉은 자국이 없어졌다. 다니엘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발목도….”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도현의 두 발목을 양손으로 가볍게 감쌌다. 그리고 은은한 빛이 나왔다.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넘겼다.

“그럼….”

허벅지도…. 라이딩 크롭에 맞아 붉은 자국이 남은 도현의 허벅지, 몸에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고 있는 도현의 다리를 보았다. 다니엘은 귀가 빨개져서는 그녀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 벨벳과 비단을 섞은 듯한 부드러움과 탱탱한 탄력… 손에 달라붙는 듯한 느낌까지… 마도의사가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 적은 많았지만 오늘만큼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다니엘의 목이 빨개졌다. 그가 주춤하고 미르가 확 다가왔다.

“아! 치사하게! 전에 난 못 만지게 해 놓고!”

도현이 확 짜증을 냈다.

“무슨 말 하는 거예요, 지금. 그럼 제 가슴이 공공재라도 돼요? 누가 만지면 다른 사람도 다 만질 수 있게? 세상 남자들이 다 돌려쓰는 물건이에요, 제 몸이?”

미르는 이번에도 도현의 기분을 거스르는 말을 하고 말았다. 안 그래도 지금 컨디션이 안 좋은 도현이었는데.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고 미르를 노려보았다. 그는 주춤 물러났다.

“아니, 내 말은….”

“옷 벗어야 하나요?”

도현은 미르를 무시하고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다니엘은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눈이 뱅글뱅글 도는 것 같았다.

“옷을 그러니까… 옷을… 보고 하는 게 제일 좋기는 하지만… 제, 제가 아직 그런 마음의 준비가….”

“진짜… 아직도 아파요.”

도현은 한숨을 쉬면 원피스 옷깃을 들어서 자기 가슴을 보았다.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가슴골을 쳐다보고 말았다. 그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이, 일단 옷 위로 해보겠습니다. 통증이 사라지시면 그걸로 괜찮을 겁니다.”

“네.”

도현은 정말 의사라도 마주하는 것처럼 다니엘이 몸을 만지는 것에 대해 별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았다. 다니엘은 천천히 그녀의 가슴에 주변에 손을 올렸다. 조금 공간을 띄워서 직접 만지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도 안 되었다. 그의 손에 광채가 서렸다. 도현이 눈을 깜박였다.

“괜찮은 거 같아요. 안 아파요.”

“다, 다행입니다.”

도현은 다시 옷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보았다. 붉은 기운이 사라졌다. 그제야 도현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고마워요, 다니엘 씨.”

“아닙니다.”

도현 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더… 다니엘은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도현은 음료를 들고 거실로 향하면서 자신의 눈치를 보는 미르를 한 번 더 노려보았다.

“미안… 응? 미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시끄러워요.”

“미안하다니까.”

확실히 킹쉴드는 여자를 대하는 것에 익숙하다. 자신은 저런 식으로 말실수를 했을 때 도현에게 제대로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다니엘은 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들이라면 당연히 무뚝뚝하고 재미도 없는 자신보다는 킹쉴드 같은 남자를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거실로 돌아온 도현은 일단 손님인 다니엘과 미르를 카우치에 앉히고 음료를 대접했다. 그 뒤 송선호와 촬영을 위해 미리 준비를 해 둔 거실의 장치를 살펴보았다.

“이거 이쪽으로 조금만 더 옮겨줘.”

도현은 뒤에서 팔짱을 끼고 송선호에게 이리저리 지시를 했고 송선호는 그에 맞춰 움직였다. 아까부터 일상적인 대꾸밖에 안 하고 있었지만… 송선호는 밖으론 티를 안 냈지만 기분이 안 좋은 그녀의 눈치를 엄청나게 보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로웰과의 관계에서부터 자잘하게 필요한 건 없는지까지 그녀에게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같이 사는 거 괜히 스트레스 받고 있는 거 아냐? 괜찮나?’

“일단 포즈부터 간단히 괜찮을까요? 선생님께서 인물 별 컨셉화가 필요하게 돼서요.”

도현은 흐트러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그렇게 말했다. 머리카락을 넘기며 자연히 시선을 사선으로 돌려 로웰을 힐끗 보았다가 다시 다니엘과 미르를 보는데… 분위기가….

‘저런 걸 어디서 배우는 걸까….’

간단한 동작인데도 뭔가 요염하게 느껴진다. 아니면 그들이 그녀에게 흑심이 있기 때문에 더 그렇게 여기는 것일까.

“오늘은 각자 이런 포즈 부탁드려요. 이번엔 송선호 너도.”

“뭐?”

도현은 남자들에게 각각 얼굴과 몸체가 둥글게 표시된 도안을 나눠주었다.

“…….”

로웰은 아무래도 남녀 주인공이 서로 가까이 붙어있을 때의 현실적인 느낌을 드러내는 데 난항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진짜 TFC 선수들의 체격 때문인지… 전에 비하면 그림도 좀 더 날렵하고 세련되게 변하기도 했다. 이번은 전과 같은 섹스 체위를 찍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도 다니엘 스톤하츠부터 같이 찍었다.

“이런 식이면 되나요, 선생님?”

“스톤하츠 씨 고개 좀만 더 들게 해주세요. 카메라 보게.”

그러자 다니엘이 어떤 식으로 고개를 들어야 하나 약간 당황할 때 다니엘의 가슴 위에 무릎을 벌리고 몸을 세운 자세로 올라타 있는 도현이 다니엘의 턱 각도를 라이딩 크롭으로 슥 조정했다.

“이 정도면 될까요?”

“…….”

안 된다. 다니엘은 꿀꺽 침을 삼켰다. 뭔가 위험하다. 다니엘은 요즘 엘 드라카에서 뛰는 것보다도 훨씬 긴장하고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 그는 어둡게 윤이 나는 비싼 검은 구두와 검은 바지, 새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거기에 두 팔은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촘촘히 감싸는 새카만 가죽 구속 구에 묶인 채 딱딱한 테이블 위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도현 킬스버그가 올라타 있었다!

“엇. 이쪽을 안 보는 게 낫네요. 더 로마노프 같은 느낌이….”

사진은 자동으로 찍히는 것과 로웰이 직접 찍는 게 따로 있었다. 다니엘이 카메라도 차마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리자 그렇게 말하는 로웰이었다.

“흠….”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들의 작품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의 남자 주인공 세한 로마노프의 모델이었다. 외견은 거의 그의 특징을 잡았고 성격 설정도 정말 진지한 남자이지만 겉으로 보기엔 어느 정도 위트 있고 여성을 대할 줄도 어느 정도 아는, 그러니까 다니엘보단 연애적으로 나은 느낌으로 잡았다. 도현도 그에게서 좀 더 작품에 대한 영감을 받으려고 노력했다.

도현은 그의 몸을 아래위로 좀 훑어보았다. 그녀가 손을 뻗어 다니엘의 허리띠를 손으로 잡았다. 다니엘은 깜짝 놀라 허리를 구부렸다.

“도현 씨…!”

“아, 죄송해요. 허리띠 좀 빼도 될까요, 다니엘 씨?”

다니엘은 엄청 놀라서 굳어 있다가 긍정의 뜻을 겨우 전했다. 도현은 다니엘의 혁대를 스윽 빼냈다. 찰캉. 바닥에 떨어졌다. 다니엘은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뺨을 보고 있다가 그녀가 시선을 돌려 자신을 보자 천장을 똑바로 보았다.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긴장하고 있는 것은 누구든 알 수 있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누가 그의 옷을 벗기는 것은, 그러니까 여자가 그의 옷을 벗기는 것은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는 TFC 선수였고 매 경기를 치르고 나면 정밀 검사를 위해서 간호사들이 그의 옷을 벗겼다. 그 간호사들 중에 반은 여성이었으니 옷을 벗기는 여성의 손길이 그렇게 크게 놀랄 일은 아닐 텐데도 잠깐 그녀가 그의 단전 근처에 손을 댔다고 온몸에 털이 솟았다.

“으음, 다니엘 씨 조금만 더요.”

“도, 도현 씨….”

그녀는 거기에서 끝내지 않고 다니엘의 바지 버클을 풀어 살짝 그의 속옷이 드러나게 했고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탄탄한 가슴을 드러냈다. 다니엘 스톤하츠의 심장은 밖에서 봐도 확연할 정도로 쿵쿵 뛰고 있었다. 숨이 점점 찼다.

그리고 다니엘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도현과 눈이 마주쳤는데, 평소와 같이 수줍어할 새가 없었다. 이건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니엘을 무슨 물건처럼 관찰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녀의 옷차림과 그녀가 위에서 그를 고압적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자세, 그녀의 손에 들린 체벌 기구까지 더해 가녀린 그녀에게서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빛에 사로잡혔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아까 그녀가 로웰에게 혼나고 있을 때 그녀를 어떻게 하고 싶다고 느낀 것과는 정반대의 기분이었다.

‘…날 어떻게든 해줬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가만히 있기가 너무 힘들었다. 차라리 온몸을 다 묶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녀가 딱딱한 느낌의 마편으로 다니엘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몸에 자꾸 소름이 돋았다. 전처럼 그렇고 그런 장면을 연기하는 것도 아닌데… 발기할 것 같다.

그녀와 구도를 바꾸어 그녀가 이렇게 아래에 깔려 있고 자신이 그녀의 위에 있다면 어떨까. 그녀를 묶고 그녀의 몸을 체벌 기구로 쓰다듬으면서 그녀가 어떻게 떠는지 관찰을 하고 싶었다. 그녀를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다소는….’

꼼짝도 못 하게 해서 나만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고 싶다. 나에게만 온 신경을 기울이도록. 숨소리 하나에도 움찔하도록. 그런 걸 상상하는 걸 상당한 죄악감이 들었는데도 상상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다니엘은 이 짧은 시간 동안에 그녀를 가지고 부끄러운 상상을 잔뜩 했다. 그가 결국 텐션을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자 도현이 살짝 웃었다. 그러니 어째서인지 부끄러움이 약간 들었다. 정말 생소한 감정이었다.

“좋아요. 스톤하츠 씨 감사합니다.”

로웰이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 도현이 조심스럽게 그의 위에서 내려왔다. 다니엘은 뭔가 또 아쉬운 마음이 드는 자신에게 놀라서 도리어 바로 벌떡 일어났다. 도현이 테이블 위에 앉아 있는 다니엘의 손을 풀어주었다.

“아프진 않으셨어요? 제일 헐겁게 했는데.”

“아뇨….”

오늘 세상 태어나 처음 보는, 그리고 처음 느껴보는 기분에 다니엘은 좀 멍해진 상태였다. 뭐지. 뭘까…. 그렇게 다니엘은 멍청하게 카우치에 앉았다. 도현은 빠르게 떠오른 소재나 영감을 디바이스에다가 기록했다. 그 뒤엔 미르 킹쉴드에게 다가가는 도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멀티스크린을 보면서 미르를 뒤로 돌려 세웠다.

“이거 하면 되는 거죠, 선생님?”

은색으로 된 수갑은 가운데 체인도 달려 있지 않은 8자 모양의 아이리쉬 수갑이었다. 세 개나 채우라는 것 같다. 미르의 팔을 뒤로하고 손목에다 수갑을 채우는 데 도현이 그의 뒤태를 보고 감탄하여 말했다.

“미르는 근육이 정말….”

훤칠하고 알맞은 근육량에 모델같이 근사한 다니엘의 몸도 정말 눈이 즐겁지만, 이런 게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의 우월함일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미르의 근육은 지방이나 쓸모없는 부분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키가 엄청 커서 둔해 보이지 않는 거지 팔 근육이 도현의 허벅지보다도 두꺼웠다.

“나? 쩔지~.”

그러면서 미르가 의기양양하게 팔에 힘을 약간 주었더니만 쇠로 된 수갑이 쩍 하고 쪼개졌다. 도현이 앗 했다.

“아… 이거 우리 출판사 돈으로 산 건데….”

“어… 미안….”

미르는 머쓱해 하며 자기 손목을 보았다. 도현은 부서진 수갑을 풀어주며 난처해 했다. 이러면 딴 것도 해봤자… 다니엘이 도현에게 말했다.

“나머지 줘보십시오.”

“아, 네.”

남은 아이리쉬 수갑을 다니엘에게 주었다. 쩡! 하는 소리가 나더니 이상한 문양이 번쩍했다. 그리고 다니엘이 다시 도현에게 넘겨주었다. 도현은 미심쩍게 그것을 보았다. 저번에 보니까 마도 주문이 들어가도 부수던데… 하지만 이번엔 그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움직이면서 저도 모르게 팔에 힘을 줘서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 미르였지만 수갑은 멀쩡했기 때문이다.

“음….”

카메라와 조명의 각도를 생각하며 미르에게 이리저리 움직이라 지시한 도현은 이내 맞는 자세를 찾았다.

하이힐을 신고 서 있는 여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아랫배에 얼굴을 묻은 채 목에 칼라(개목걸이)가 채워지는 남자.

“고개 약간만 카메라 쪽으로 돌려주세요.”

여러 각도로 찍은 사진으로 3차원 모델까지 만들 수 있었지만 일단 빠른 스케치를 위하여 로웰은 직접 사진을 찍고 확인했다. 미르는 이때다 싶어서 그녀의 아랫배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향수를 안 뿌리는 것 같다. 더 좋다. 잘 세탁된 섬유의 냄새와 향기로운 살 냄새가 났다.

‘좋은 냄새….’

약간 여자의 냄새(?)가 나는 것도 같고… 맡을 수 있을 것(?)도 같고… 미르가 가만히 안 있고 계속 도현의 아랫배와 골반에 코를 비비적대자 도현은 그의 머리카락을 콱 쥐고 그의 고개를 들게 했다.

“아, 진짜 이 남자가…! 색골. 변태. 진짜 싫어.”

그가 뭘 하는지 알아차린 도현이 그렇게 화를 냈다. 뭐?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다니엘과 송선호가 엉거주춤 일어나며 놀란 눈을 했다. 저 짐승 새끼가 또 그녀한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어, 그거 좋네요….”

로웰은 엇 하고 지금 장면을 찍었다. 목에 칼라를 하고 머리채를 잡힌 채 주인님(?)을 올려다보고 있는 엄청 덩치 큰 짐승남… 여자들이 완전 좋아할 구도다.

미르가 되지도 않는 변명을 시도했다.

“아니… 이건 그… 본능적인 거라…!”

“본능 같은 소리 하네. 그런 식으로 변명하지 마요. 제일 싫어요.”

그러자 미르가 투덜거렸다.

“이런 것도 공짜로 해주는데 좀 맡을 수도(?) 있지!”

미르가 반성 없이 다시 코를 들이밀려고 하자 도현이 버럭 했다.

“아!! 진짜 싫어!”

도현은 미르의 따귀를 때렸다. 전에는 미르에게 그런 짓을 당해도 그 자체는 상대도 안 하던 도현이었는데, 자연스럽게 화를 내는 게 오히려 사이가 가까워진 걸 반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기대도 안 하는 사람에겐 화도 안 낸다. 고소하지.

“아!! 나 때렸어?!”

소드오라를 두르지 않으면 보통 사람들만큼 아프기는 하다. 맷집이 좋아서 얼마든지 더 맞을 수 있는 것뿐이지. 미르가 화를 내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수갑을 부수려는데 안 부숴졌다. 미르는 당황했다.

“어… 야… 나 이거 풀어줘.”

“싫어요.”

“…….”

도현은 화가 난 얼굴로 그를 외면했다. 미르는 그대로 카우치에 방치됐다. 다른 사람들도 한 번씩 쳐다보았는데 다들 미르 킹쉴드를 못 본 체했다. 치사한 새끼들.

도현은 다음 타자를 불렀다.

“송선호.”

“난… 이런 건….”

송선호가 여전히 마뜩잖은 얼굴을 하자 오늘 영 컨디션이 안 좋은 도현이 그를 타박했다.

“그냥 해.”

“…….”

송선호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한숨을 푹푹 쉬며 끌려 나오듯 나왔다. 탄탄한 그의 몸은 타고난 남자다움이 있었다. 슈트도 잘 어울리고. 도현은 공중에 뜬 멀티스크린을 보며 무작정 그의 옷을 풀어헤쳤다. 송선호는 당황해서 양팔을 어찌할 줄 모르고 어정쩡한 자세를 한 채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옷은 왜….”

“아니, 지금 너 복장도 설정이랑 비슷해서 조금 만들어 보게. 니 캐릭터가 지금 제일 애매하거든.”

영감이 필요하다…. 도현은 마구 그의 양복 단추와 베스트 단추도 다 풀어헤치고 넥타이를 다 풀어서 그대로 흐트러뜨렸다. 셔츠도 단추를 세 개 정도는 풀고… 손길이 거칠었다. 도현은 거침없이 그의 얼굴에도 손을 뻗었다.

“안경은 어쩌지…. 음. 씌우는 게 더 낫다.”

그리고 그런 송선호를 바로 앞에 방치하고 디바이스에다가 뭐라고 타다닥 쳤다.

<절제. 금욕. 일반남. 티 안 남. 자존심 셈. 수치 플레이. 방치 플레이?>

보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의 나열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송선호를 이리저리 보다가 손에 든 그의 넥타이를 손으로 미끄러뜨렸다. 스르륵. 왠지는 모르겠는데 괜히 긴장된다. 그리고 그걸로 그의 손목을 묶었다. 역시 다른 남자들을 대할 때보다 조심성이 없는 도현이었다. 그녀가 그의 손목을 꽉 묶자 송선호는 움찔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디바이스를 잡고 뭔가를 열심히 쓰면서 송선호한테 말했다.

“누워.”

바닥에 말인가. 로웰이 카메라를 조작해서 자동으로 지잉 그를 따라갔다. 송선호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의 말대로 그녀의 발 치에 누웠다.

‘씨발….’

누우니까 그녀의 다리가 훤히 보인다. 그리고 치마 속도. 안에 따로 속바지라도 입었을 줄 알았는데 이 여자는 도대체 머리에 뭐가 들었길래 이렇게 조심성이 없는가! 송선호는 시선을 확 돌렸다.

‘검은색… 젠장….’

좋아하는 여자가 너무 섹시하면 마음고생이 심한 법이다. 도현은 삘이 확 받아 글을 쓰고 있는 디바이스에서 시선을 거의 떼지 못하면서 멀티스크린을 힐끗거리며 자세를 잡았다. 송선호의 팔과 몸통 사이에 발하나를 넣고 다른 발은 그의 얼굴 옆에 놓았다. 올려다보면 바로 다 보인다…. 도현은 여전히 소재 기록 삼매경이었다. 검은색 지미추 하이힐은 그녀가 보통 때 신던 것보다 약간 더 높았다. 재질이 매끈하고 약간 차가운 그 구두가 송선호의 뺨에 닿았다. 송선호는 엄청 긴장한 얼굴로 구두를 보았다가 도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구두를 신은 발로 그의 왼쪽 뺨을 툭툭 쳤다.

“고개 돌려. 자세 알잖아.”

디바이스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힐끗 멀티스크린을 확인한 도현이 그렇게 심드렁하게 말했다. 송선호는 그녀의 말대로 하기 진짜 싫었지만 억지로 겨우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현의 그의 왼쪽 뺨 위에 스트레토 힐을 신은 발을 살짝 올렸다. 날카로운 굽이 뺨을 누른다. 쓰고 있는 안경이 끼익 소리를 내며 틀어졌다.

‘씨발…. 씨발. 씨발.’

뭐지. 뭐지?! 식은땀이 흘렀다. 이 상황이 너무나 싫었다. 안 그래도 자신을 휘두르기만 하는 그녀에게 양가적인 감정이 가득한 송선호인데 그런 그녀에게 이런 굴욕적인 자세로 얼굴을 밟히기까지 하니 반발심과 호승심이 치솟았다. 심지어 그녀는 송선호를 거의 보지도 않았다. 일이라는 것을 알아 겨우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발을 쳐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욕설도 턱 끝까지 치민다. 송선호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사진은 계속 찍히고 있었다.

“음….”

도현은 드디어 디바이스나 멀티스크린이 아닌 송선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자세를 바꾸고 싶었다. 그녀는 그의 뺨에서 발을 살짝 떼고 뾰족한 구두 앞코로 그의 턱을 밀어 올려 그의 목을 밟았다.

“윽….”

그녀의 뾰족한 힐이 위협적일 정도로 송선호의 목젖을 눌렀다. 송선호는 얼굴을 왕창 구기며 눈을 질끈 감으며 크게 가슴을 부풀렸다가 가라앉혔다.

“선생님, 이건 어때요?”

로웰은 대충 보고는 ‘오’하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다른 남자들이야 남이지만 송선호야 식구(?)니까. 둘 다 대충대충이다.

“뭔가 이런 것도 괜찮을 것 같고….”

자세를 낮춰 송선호의 가슴에 거의 앉은 도현이 그의 단정한 머리채를 잡고 옆으로 강제로 고개를 돌리게 했다. 송선호는 결국 못 참고 그녀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야! 이, 씨발…!! 적당히 해!!!”

“아니…. 뭘 또 화를 내? 일인데.”

도현은 송선호의 머리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의 위에서 나와주었다. 송선호는 씩씩거리면서 벌떡 일어났다. 도현은 그의 손을 풀어주었다. 송선호는 자신의 안경을 바로 쓰며 도현을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의 뺨을 닦듯 쓸어 만지며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송선호는 다니엘의 옆쪽에 좀 떨어져서 털썩 앉았다.

“…….”

“…….”

“…나 좀 풀어줘, 킬스버그.”

남자 둘은 단정했던 머리가 흐트러진 채 얼굴이 벌건 채로(한 명은 불가해한 느낌에, 한 명은 화가 나서) 앉아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묶여서 방치되어 짜증이 좀 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로웰은 사진을 분류하다가 도구를 정리하는 도현에게 말했다.

“작가님, 여기 소질 있는 거 아니에요? 엄청 잘 어울린다.”

키가 커도 가녀린 느낌이 많이 나는 도현인데, 그래서 그런가. 오히려 스트레토 힐을 신고 덩치 큰 남자들을 밟고 있는 모습이 더더욱 반전 매력이 있었다.

도현은 라이딩 크롭을 소독제로 닦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선생님. 전 맞는 사람들 보면 얼마나 아플지 저도 모르게 상상이 돼서 누구 때리는 건 좀….”

…그 말은 울리느니 차라리 우는 게 낫다는 말 아닌가. 남자들이 절로 도현을 바라보았다.

‘씨발…! 그래, 내가 언젠가는 울린다. 기필코 울린다!’

‘맞다. 아까 그거 쩔었지…. 뭐 해주면 해줄까? 또 해러드 데리고 갈까?’

‘하아… 도현 씨는 왜 이렇게 섹시하지…. 계속 이상한 생각만 하게 된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직도 분수를 모르는 남자들이랄까.

*

피프쓰 포틴에서 작년 64강 중 하나였던 브라질 <상파울루FC>를 1시간 45분 만에 승리한 웨스트이글은 라스트 포틴에서는 올해 신흥 강팀으로 떠오르며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러시아의 두 팀, <하인델토크FC>와 <볼코스키FC> 중 <볼코스키FC>와 맞붙어 2시간 12분의 접전 끝에 승리하였다.

그에 반하여 이스트드래곤은 피프쓰 포틴에선 30분, 라스트 포틴에서는 무려 17분 만에 승리하였다.

그렇게 드로우 선데이에 71개의 클럽이 남게 되었다. 64강에 남을 클럽 64개를 제외한 7개의 팀이 추첨결과에 따라 탈락할 예정이다.

비행차 및 각종 비행기의 발전으로 많은 이들이 전 세계를 4시간 안에 오갈 수 있게 된 지금, 71개 팀 감독들이 라스트 포틴의 라스트 선데이, 즉 드로우 선데이 오후 11시 55분에 세계 TFC 연맹 및 엘 드라카 위원회가 위치한 스위스 취리히에 모였다.

떨어지는 7팀에 대하여, 혹은 남을 64개 팀을 예상하는 투기 금액은 예년의 규모를 10% 정도 웃돌았다고 한다. 금액이 조 단위를 넘는 세계 최대의 한 방 도박이다.

엘 드라카 우승컵만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달려온 클럽들이니 누가 맥 빠지게 지금 떨어지고 싶겠는가. 여기까지 온 강호 클럽들은 준우승이나 4강이나 이런 건 바라지도 않았다. 오로지 1등, 우승만이 목표다.

‘씨팔… 딴놈들은 모르겠고. 이스트드래곤이나 떨어져라.’

물론 떨어졌으면 좋겠는 팀이 한두 개겠냐만. 그래도 단연 1등으로 꼽는 것은 이스트드래곤이었다. 이스트드래곤은 원래도 안정적인 수비와 빠른 미드필드진, 막강한 오펜스 때문에 엄청 짜증 났는데 신태호라는 조커까지 있어 전략을 짜는 게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게다가 강한 선수들을 적재적소에 써먹는 용병술까지.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이스트드래곤의 감독 하네다 스즈키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또 지금까지 미디어의 주목을 받은 바가 별로 없는 신생 클럽으로 신생팀답지 않은 과감한 전술과 무쌍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러시아 하인델토크의 <하인델토크FC>의 감독 보리스 세르게이, 아르헨티나의 의 티지아노 핀도 많은 카메라 세례를 받는 중이었다. 그 외에도 23개의 신생팀이 드로우 선데이까지 와서 많은 미디어들이 관심을 보였다. 보통 15개에서 19개 정도의 클럽이 매년 엘 드라카 드로우 선데이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는데 올해는 이례적일 정도로 많은 편이었다. 팬들은 웨스트이글이 하도 강호 팀을 많이 쓰러뜨려서 그런 거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렇게 비기닝 포틴부터 강적들만 만나온 웨스트이글의 감독 요셉 스튜어트의 다크서클이 팍 진 신경질적인 얼굴도 카메라의 주목을 많이 받고 있었다. 이미 주전도 스페어도 많이 소모된 웨스트이글이 과연 드로우 선데이 이후 얼마나 갈 수 있을 것인가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는 자신에게 계속 귀찮게 따라붙는 드론 카메라를 신경질적으로 노려보았다.

그 외 정통 강호들이라 할 수 있는 베이징 연고 클럽 <노던타이거>, 상하이 클럽 <서던라이온>, 인도 뭄바이 클럽 <두르가>, 밀라노 <밀라노FC>, 피렌체 <팔라딘>, 에든버러 <퀸즐랜드>, 샌프란시스코 <레드불> 등도 자리하고 있었다.

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며 모든 감독들이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드로우 선데이 진출 확정 순으로 위원회가 든 제비를 뽑기 시작했다. 71개 팀 팬들이 두근거리며 결과를 기다렸다.

호주 1팀, 인도 2팀, 미국 1팀에 중국 2팀, 스페인 1팀이 떨어졌다. 모두가 바라던 이스트드래곤의 탈락은 실현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몇천억이 순식간에 오가는 결과였을 것이다.

“그럼 곧바로 64강 대진표를 발표하겠습니다.”

드로우 선데이 이후 64강부터는 본래의 토너먼트 전으로 간다. 그래서 처음 대진표가 아주 중요했다. 그에 따른 사령탑의 전략도 빛을 발하게 된다. 공중의 홀로그램이 모양을 바꾸며 고딕 형태의 문자가 떴다. 그리고 여성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세계 TFC 연맹 및 엘 드라카 위원회에서 퍼스트 세븐 대진표 구성을 의뢰받은 스위스 연방 법무부 소속 세컨드 시크리터리 어시스턴트 LF-23-IIT 입니다. 대진표 구성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경기장의 공중에 홀로그램으로 대진표가 떴다. 순식간에 경기장이 조용해졌다.

1. 노던 타이거

2. 팔라딘

3. 퀸즐랜드

4. 웨스트이글

5. 두르가

6. 에보리진

7. BAFC

…….

60. 하인델토크FC

61. 쿠르가

62. 밀라노FC

63. 레드불

64. 이스트드래곤

‘…됐다. 이스트드래곤은 결승에서 만나지 않는 이상 못 만나겠군.’

피렌체 팔라딘이나 베이징 노던타이거 둘 중 누구 하나라도 먼저 재껴지면 땡큐다. 웬만하면 팔라딘이 올라왔으면 좋겠다. 노던타이거랑은 상성도 안 맞고 지역적으로 가까워서 친선경기도 많이 해 서로 전략 노출이 심하다. 부담스럽다. 에든버러 퀸즐랜드는 3년 전부터 64강은 꼭 밟는 팀이라 전략이랑 선수 파악은 되어 있지만 그다지 눈에 안 띄었던 팀이라 크게 생각이 안 난다. 디바이스를 꺼내니 코치진이 이미 퀸즐랜드에 대한 분석과 장단점, 대비 전략들을 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스튜어트는 껌을 질겅거리며 바로 경기장을 빠져 나와 비행차에 탔다. 곧바로 차 안에 있는 코치 3명과 메트로서울에 있는 코치진과 전략 전술 회의를 했다.

드로우 선데이 이후 1주일 휴식 후 퍼스트 세븐부터는 포틴즈와 다르게 일요일 단 하루만 경기를 했다. 어떤 팀은 월요일 경기를 하고 다음 주 일요일 다른 팀과 경기를 하고 어떤 팀은 일요일에 경기를 하고 다음 날 월요일에 경기를 해야 하는(체이닝) 불합리함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물론 4,500개나 되는 클럽들이 남아 있었을 때는 그런 공정함 따위 엿 바꿔 먹었었다.

물론 그렇다고 세븐즈가 포틴즈보다 경기하기 편하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일요일 단 하루만 경기를 하는 대신에 드로우 선데이 이후 일주일간의 휴식을 제외하고 퍼스트 세븐부터 더블 세븐, 즉 피날레까지 매주 일요일 경기다. 피날레까지 가는 팀은 3위 전을 하는 식스 세븐을 제외하고는 매주 대전을 치러야 한다는 말이었다.

클럽 수가 많이 남아 있는 포틴즈에서 사망자 수의 80%가 나오고 세븐즈에서 20%가 나온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라 진짜다. 4,500개 클럽에서 200명과 64개 클럽 중 50명은 완전히 다르다. 비율은 물론이고 몸값에서도 말이다.

선수들도 웬만하면 서로 죽이지 않고 경기를 이기려고 하지만, TFC, 엘 드라카는 승리가 곧 법이다. 4,500개 클럽 중 단 64개. 우승이 코앞에 보이는 지금, 사실상 모든 클럽의 리미트가 해제되었다고 보는 게 정상이다. 그런 거 치고는 사람이 많이 안 죽는(?) 건 서로 그 사정을 잘 알고 대비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고로 부상 없이 멀쩡한 다니엘 스톤하츠는 드로우 선데이에 바로 메트로서울로 돌아갔다. 도현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가 비행차를 타고 서울 상공에 들어가는 동안 많은 홀로그램 광고가 스쳐 갔는데 그중 도현과 로웰의 작품을 발견하니 괜히 반갑기도 했다. 아마 다니엘의 인공지능 비서가 그의 관심사를 알아차리고 추천광고를 띄운 모양이었다. 그동안 연재된 것도 다 사야 하는데.

만화판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가 연재되기 시작한 지 딱 20주 정도가 흘렀다. 소설판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도 연재되기 시작한 지 12주가 흘렀다. 바빠서 제대로 확인은 못 해봤지만 다니엘은 시간이 날 때마다 꼬박꼬박 연재분을 사 모으고 있었다. 그녀에게 부담스럽지 않게 해줄 수 있는 것 중 하나였다. 그녀에게 뭔가 크게 해주고 싶어도 이제 너무 속이 보여서, 그녀가 싫어할까 봐 겁이 나는 다니엘이었다.

‘공부가 필요하다….’

조금 더 그녀에 대해서 알 수 있다면 그녀의 마음에 들게 행동할 수 있을 텐데. 조금만 더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조금만 더 얘기해준다면. 지금의 다니엘 스톤하츠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집에 잠깐 들러서 옷을 갈아입을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매니저인 셀레나 카토의 도움을 받은 코디로 준비해두었다. 이런 쪽은 전혀 문외한인 다니엘이라도 스타일이 좋은 미르 킹쉴드나 여자들이 아주 좋아할 느낌인 송선호의 차림새와 자신이 비교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항상 도현을 만나기 전엔 셀레나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비행차를 주차장에 대고 집에 들어가려는데 집 앞에 누군가가 있었다.

“…신태호?”

“아… 스톤하츠 씨.”

신태호는 긴장한 얼굴로 다니엘의 집 앞에 서 있었다. 평상복을 입은 신태호는 영락없는 10대 청소년이었다. 그는 일단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쉬는 날에….”

“무슨 일이지?”

“그게… 별일은 아닌데….”

겉으로 보이는 신태호는 아직 어리고 소년티가 많이 남아 있었지만 목소리는 약간 비음이 섞인 중저음으로 반전이 있었다. 그는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갈 데가 없어서요….”

물론 다니엘 스톤하트는 도현 킬스버그를 만나러 가는데 이런 혹을 붙이고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

셀레나 카토는 계속해서 다니엘에게 신태호를 부탁하곤 했다. 그녀가 이스트드래곤 구단 소속 직원이기는 했지만, 관리하고 있는 본인 선수 외에 다른 선수를 그렇게 신경 쓰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런 게 여자의 감이라는 것일까.’

그녀는 은연중에 신태호와 다니엘의 공통점을 알아차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천재.

비운의.

다니엘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엄청 고민을 하다가 디바이스를 들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아주 큰 결심이었다. 그는 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현 씨 다니엘 스톤하츠입니다.”

[아, 다니엘 씨. 잘 됐다.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러셨습니까.”

[네. 먼저 말씀하세요.]

“그게… 오늘 만나는 것 때문에 그러는데…. 죄송하지만 일행을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어린앤데… 혼자 두기가 좀 그래서….”

연애경험이 전무한 다니엘 스톤하츠는 데이트에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간다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실감하지 못했다. 어쨌든 다니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사회로 돌아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메트로서울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신태호였다. 게다가 미성년자다.

[아, 저도 비슷한 부탁이라…. 아니, 미르가 또 아프다고 간호하러 오라고 난리를 쳐서 지금 병원인데…. 잠깐 미르 좀 같이 만나면 안 될까요? 제가 미르한테 부탁한 것도 있고 해서 거절하기가 곤란해서요. 정말 죄송해요.]

“…알겠습니다.”

미르 킹쉴드…. 만약 대진표에서 이스트드래곤과 같은 조에 있었다면 반드시 한동안 의식불명으로 만들어버렸을 텐데. 두 팀 다 결승전까지 오르지 못하면 서로 대전할 일이 없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아, 약속 있으셨어요? 그러신 거면 저는 그냥….”

신태호가 엄청 당황하더니 그렇게 말했다. 다니엘은 쉿 하고 입 앞에 검지를 세웠다.

“네. 네. 지금 거기로 바로 가겠습니다. 네.”

다니엘은 전화통화를 종료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어 두고 들어가자 신태호는 당황하다가 슬금 안으로 들어갔다. 신태호가 현관에 멀뚱멀뚱하게 서 있는 사이 다니엘 스톤하츠는 이를 두 번이나 닦고 옷을 갈아입고 거울을 보고 머리를 만진 후 다시 현관으로 와서 신태호에게 물었다.

“나 어때.”

“…멋지십니다.”

신태호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가 그렇게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다니엘은 그의 대답이 꽤 흡족해서 그의 머리를 한 번 손으로 쓰다듬었다.

“가자.”

그리고 다니엘은 신태호를 태우고 메트로서울 시립병원으로 향했다. 그래도 문병이라고 꽃다발을 사들었더니만 사람들이 다 쳐다보았다. 꽃과 꽃 같은 남자다. 게다가 엘 드라카 시즌에 다니엘 스톤하츠와 신태호가 웨스트이글의 본진(?)이 된 메트로서울 시립병원을 찾으니 파파라치의 카메라 세례가 뒤따랐다. 하지만 보통 다른 연예인이나 셀레브리티와 다르게 TFC 선수의 파파라치는 선수에게 끈질기게 따라붙거나 사생활을 심하게 침범하지는 않았다. 손가락만 까딱해도 신체에 영구적 손상을 줄 수 있는 파파라치 대상이란 아무리 겁 없는 기자도 무서운 것이다.

“아, 나 못 한다니까.”

“할 줄 아는 거 알아요.”

“치사하게 그러지 말고. 어? 뭐든지 물어봐도 되니까.”

“미르가 저번에 남중국해 가기 전까지 얘기해줬잖아요. 오늘은 그 뒷얘기 해주세요.”

“아, 진짜 남중국해는 개씹쓰레기였어…. 인생 막장 중에서도 막장만 간다더니만 다른 곳이랑은 아주 차원이 달랐달까.”

부상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쌩쌩한 미르 킹쉴드가 병실 침대에 앉아 침대에 걸터앉은 도현 킬스버그를 가까이에 두고 그녀의 무릎을 만지면서 신나게 얘기를 하고 있었다. 도현은 미르에게 먹이는 게 분명한 음식을 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병실에 들어선 다니엘 스톤하츠를 보고는 미르 킹쉴드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 넌 여기 왜 왔어!!”

TFC 선수로서는 아주 이례적인 이력을 가지고 있는 다니엘 스톤하츠를 매우 싫어하는 미르였다. 대체로 마도사들은 소드마스터들보다 좀 더 배우는 편이지만 그중에서도 다니엘은 너무너무 배운 범생이였다. 게다가 강하다. 껄끄럽다.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그러자 도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 다니엘 씨.”

도현이 미소를 지으면서 다니엘을 맞이했다. 다니엘은 그녀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도현은 어머, 하며 꽃다발을 보았다.

“미르 주는 건가요?”

“도현 씨 드리는 겁니다.”

“고마워요. 진짜 예뻐요.”

도현이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그가 데리고 왔다는 일행을 찾아 눈길을 돌렸다. 다니엘의 뒤에 쭈뼛 서 있던 신태호는 도현과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랐다. 미르와 눈이 마주쳤을 땐 더 놀랐다.

“진짜 미르 킹쉴드다….”

신태호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도현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도 모르게 손가락질을 했다.

“신태호…!”

다니엘은 얼른 변명했다.

“신태호가 집이 도쿄에 있는데 무작정 서울에 혼자 와서 그냥 내버려 두기가 좀… 일단은 미성년자라서 데리고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도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은 몸에 딱 붙는 탱크탑 위에 시스루 셔츠를 입고 H라인 스커트를 입은 도현이었다. 검은색 지미추까지 신고 머리는 구불구불하게 세팅했다. 힐을 신고 있으니 170도 간당간당한 신태호보다 훨씬 크다. 도현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신태호를 살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신태호 선수. 도현 킬스버그라고 해요.”

“아, 네….”

신태호는 숫기 없이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겨우 도현의 손을 잡았다. 도현은 얼른 종이를 찾았다.

“사인 해주세요.”

“아, 네. 네.”

“두 장 부탁드려요. 같이 사는 분이 신태호 선수 광팬이거든요.”

그녀가 미르와 다니엘을 처음 봤을 때는… 그래, 사인이 문제가 아니긴 했지만, 그 뒤로도 사인해달라는 소리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도현이었다. 도현은 신태호의 사인을 받아 들고 아주 좋아했다.

“선생님 엄~청 좋아하시겠다.”

도현이 웃으면서 말했다. 신태호는 자기보다 훨씬 덩치도 큰데다가 선배(?)라고 할 수 있는 두 남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굳어버렸다. 도현은 신태호와 다니엘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신태호에게 물었다.

“앉아요. 서울엔 웬일이에요? 오늘 쉬는 날이에요?”

“아, 네…. 오늘 대진표가 나와서… 집에 있기 싫어서 나왔는데… 마땅히 갈 데가 없어서….”

신태호에게서는 어린 소년 특유의 숫기 없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도현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화면으로 봤을 땐 몰랐는데 완전 귀엽네요. 여자애들한테 인기 많겠다.”

그랬다가 손을 떼었다.

“미안해요. 마음대로 만지는 건 싫은가요?”

“괜찮아요….”

그러고 있자 미르가 못마땅한 얼굴로 도현을 툭툭 건드렸다.

“전에도 느꼈는데, 너 어린애들 어지간히 좋아하네.”

여자애, 남자애 가릴 것 없이 아직 덜 자란 어린이를 보면 귀여워해 주는 도현이었다. 병문안을 왔을 때도 가끔 어린 환아나 환자 가족 중 어린애랑 마주치면 웃으면서 말을 곧잘 걸곤 하는 걸 본 미르였다. 물론 신태호는 그중에서 매우 큰 편에 속했지만.

“애기들 좋지 않아요? 귀엽고 막 귀여워해 주고 싶고?”

도현이 미르를 돌아보며 물었다.

“애는 딱 질색이야.”

미르가 인상을 팍 썼다. 도현은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좋아합니다, 애들. 귀엽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다니엘은 바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에게 점수를 따고 싶은 일념뿐인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

미르 킹쉴드는 피프쓰 포틴 때도 Q3 4대 정도 맞고 묶여 있었고, 라스트 포틴 때는 토 나오게도 둘째 주 토요일 경기였던지라 병원에 붙들린 채 드로우 선데이를 보내야 했다. 체력을 보존한 다른 팀 선수는 드로우 선데이 때 그래도 한 번은 쉰다.

이번엔 Q3를 3대 맞은 미르였다. 아무래도 이걸 맞으면 맞을수록 근육 부상을 덜 당하는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볼코스키FC 전은 꽤 빡셌는데도 생각보다 부상이 적었기 때문이다. 17대 맞았을 때는 진짜 세상 사람들 반만 죽이고 싶었는데 그래도 내성이 생겼…지는 않고 여전히 세상 사람을 반쯤은 죽이고 싶었지만, 일요일이 됐을 때는 생각보다 통증이 거의 없어서 당황했다. 근데 잠시 생각해보니 굳이 당황할 필요가 없다 싶었다. 그냥 아프다고 구라를 치고 도현 킬스버그를 부르면 되겠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저번 레드폭스 전 이후 간호를 해줄 때 미르에게 부탁을 하나 했다. 그가 살아온 얘기를 해달라고 말이다. 인터뷰는 다 읽었지만 그다지 와 닿지 않는다고 했다. 매니저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종류의 선수 매니징은 구단에서 거의 다 했다. 선수의 강한 이미지, 난봉꾼에 돈을 흥청망청 쓴다는 스트레오 타입은 어느 정도 구단이 만들고 유지하는 부분이 컸기 때문이다. 작품의 소재로만 이용하고 익명성은 철저히 지키겠다고 하니 매니저가 허락했다. 거기에 도현은 꽤 놀라는 얼굴을 했었다.

[어쩐지 TFC가 연예인들보다 이런 관리가 심한가 봐요….]

여자, 약, 경기 중 살인은 상관없지만 진솔한 인생 이야기는 안 된다니. 분명히 돈이 될 텐데. 이상하고 신기하다. 어쨌든 미르는 그딴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고 자신의 말을 열심히 경청해주는 그녀가 왠지 좋았다.

많은 TFC 선수가 그렇듯 부모의 얼마 안 되는 빚에 팔려가 뼈 빠지게 고생해서 빚을 갚고 TFC 스카우터의 눈에 들어 한 방에 인생을 폈다는 그런 흔한 얘긴데도 뭐가 재밌다고 열심히 들어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정말 ‘잘’ 들었다. 뭐랄까. 누가 미르의 말을 들을 때 이렇게 그를 ‘이해’하면서 들어준다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되게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그녀는 이상한 곳에서 그를 기분 좋게 해주는 신기한 능력이 있었다. 미르에게 화가 나 있다가도 그의 말에 웃음을 못 참고 피식 웃거나, 힘들 때 힘드냐고 물어보거나, 어린애를 대하듯 음식을 먹여주거나, 말을 잘 들어주거나. 여자가 섹스를 할 때 빼고 기분 좋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아프다, 죽겠다, 나 좀 살려달라 아주 죽어가는 소리를 하며 그녀를 불러냈다. 물론 그녀는 병실에 있는 그를 보자마자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딱 봐도 멀쩡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졸라서 밥도 먹여 달라고 하고 신나게 체첸이나 남중국해에서 몬스터를 썰던 얘기를 하려는데 불청객이 찾아온 것이다. 게다가 혹까지 달고.

“흠….”

미르 킹쉴드는 앞에 앉은 신태호의 얼굴을 한 손으로 잡고(손으로 그의 얼굴이 덮이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막 돌려보았다.

“겁나 비실비실해 보이는데? 너 소드마스터 맞냐?”

미하엘 로드리게스도 키가 엄청 작아서 동료들이 많이 놀렸다. 물론 그 성격에 상처받고 그럴 만큼 물렁한 성격도 아니라 잘 받아치곤 했다.

[씨발. 내가 못 먹고 못 큰데 네가 보태줬냐, 이 개새끼야? 니네 부모는 너 잘 먹여줘서 팔려갔냐, 씨팔놈아?]

이러면 놀린 놈이나 놀림당한 놈이나 한바탕 웃는다. 그래도 소드마스터 종특으로 체력, 스피드가 굉장하고 근육 때문에 덩치도 컸다. 근데 여기 신태호는 근육도 없고, 마도사인 다니엘 스톤하츠보다도 약해 보였다.

“그래도 신태호 선수도 어린애치고는 근육이 꽤.”

도현이 신태호의 뒤태를 슬쩍 한 번 보더니 그렇게 평했다. 미르는 고개를 저었다.

“너 우리 애들 봤잖아. 보통은 그렇다니까. 미드필더도, 아니, 오펜스도 이 정도는 아니다. 야, 오라 좀 내봐라.”

미르가 그렇게 말하자 신태호가 난처한 얼굴로 다니엘 스톤하츠를 돌아보았다.

“안 돼. “

다니엘이 그렇게 말하자 미르가 혀를 찼다.

“소드오라 내는 거야 다 똑같은 건데 뭔 상관이야. 뭐 얼마나 다르다고.”

그러면서도 미르는 신태호의 팔을 잡아당겨 보거나(“아야야….”) 악력을 측정해보기도 했다.

“얘 대체 뭐냐?”

농담 안 하고 진짜 비실하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경기를 뛴다고. 몸이 가볍고 소드오라 출력이 남다르니 빠른 건 이해된다만.

“죄송합니다….”

미르가 그런 식으로 말하자 신태호는 기가 살짝 죽어서는 사람들의 눈치를 봤다. 도현은 몇 번 미르의 병문안을 오며 웨스트이글 선수들도 직접 보고(“휘익!! 아가씨 어디서 왔어? 나랑 놀자~.”) 멀찍이서 이스트호크 선수들도 본(역시나 휘파람을 불고 말이 영어라는 게 다를 뿐이었다) 바로 다니엘 스톤하츠가 상당히 이질적인 TFC 선수라는 걸 느낀 바 있었는데 신태호는 그냥 길에 널린 고등학생이랑 별반 다를 것 없이 보였다. 테스토스테론이 훅훅 뿜어 나오는 다른 선수들과 비교를 하자면 어린이로 보일 정도다.

미르는 한 손으로 계속 신태호의 얼굴을 찌그러뜨리며 뭔가 알아보려고 했지만 보면 볼수록 영 시원찮을 뿐이었다. 도현이 웃으면서 미르의 손목을 잡았다.

“애 괴롭히지 마요.”

그리고 시간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르도 괜찮은 거 같으니까 이제 우리도 밥 먹으러 갈까요?”

“어! 나 안 괜찮은데!”

미르가 팍 침대에 누우며 그렇게 말했다. 도현이 피식 웃었다.

“진짜 괜찮으시네요. 다음에 봐요. 다치지 말구요.”

도현은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 미르의 엄살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자 둘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약간 한숨을 쉬었다. 다 큰 남자가 저러는 건 기본적으로 피곤하다. TFC와 엘 드라카의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부족한 거 같아서 그의 얘기를 이것저것 듣기로 하긴 했지만 말이다.

“음, 오늘은 태국 음식 먹고 싶네요. 잘하는 데 알아요.”

저번 로웰의 진심 어린(?) 충고가 도현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인지 그녀는 수입이 생기면서 소소하게 재개해가던 자신의 미식 생활에 남자들의 도움을 좀 받기로 했다. 그중 제일 도움이 되는 건 당연히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그가 제일 많이 데이트 신청을 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가 맛집을 알아올 때도 있었다. 별로 기대 안 했는데 도쿄에 있는 좋은 음식점 2개를 새로 알게 된 도현이었다. 깜짝 놀랐다. 게다가 도현이 아무리 비싼 집을 데려가도 맛있는 곳을 알게 됐다며 고마워하면서 깔끔하게 결제했다. 좀 무뚝뚝한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기본은 된 남자다. 이런 스타일은 한 번도 안 만나봐서 신기하기도 했다.

물론 아플 때마다 간호해달라고 조르는 미르 킹쉴드는 이미 데이트 상대로서 실격 점수를 넘은 지 꽤 되었다. 여자에게 바라는 것만 많은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일도 일이고 이제 좀 친해지니 연이 이어지는 거지.

그렇게 도현은 메트로서울에서 제일 유명하지는 않고 유명한 사람들에게만 유명한 비싼 음식점으로 일행을 데리고 갔다.

“와….”

신태호는 음식점에 들어오자마자 입을 딱 벌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장은 엄청 높고 넓고 사람은 꽤 있는데도 조용하고…. 뭔가 잘 모르겠지만 비싼 느낌이 확 든다. 쫄 것 같다.

“따로 드시고 싶은 거 있어요, 두 분?”

“도현 씨가 시켜주십시오. 저번에 데려가신 곳에서도 도현 씨가 시켜주신 게 맛있더라구요.”

“신태호 선수는요?”

“전… 아무거나 잘 먹어서….”

신태호가 여전히 낯을 좀 가리는지 기가 약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두 번 권하지 않고 그냥 본인이 시키고 싶은 대로 음식을 팍팍 시켰다.

그리고 도현과 다니엘은 제법 대화를 나누었다. 엘 드라카나 도현의 작품이나 하다못해 날씨와 요새 이슈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처음에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던 남자였다. 무뚝뚝하긴 해도 남자답고 나날이 조금씩 발전해 나가고 있는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학습능력이 뛰어난 남자다.

음식이 나오자 도현은 한 입을 천천히 먹으며 음미했다.

“태국 음식은 잘못하면 느끼할 수도 있고 간도 안 맞을 수 있는데 여긴 항상 이렇게 맛이 풍부하고 좋아요.”

“네, 정말 맛있습니다.”

신태호도 둘이 먹는 걸 보고 조심스럽게 따라서 한 입 먹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다른 두 사람이 깜짝 놀랄 정도로 말이다. 나중에 음식 2개가 더 나왔을 땐 수저도 집어 던졌다.

“신태호 선수, 맛있어요? 천천히 먹어요. 더 시켜줄게요.”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거 처음 먹어요.”

대충 이런 말을 양 뺨이 가득 차서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하는 신태호였다. 누가 보면 굶긴 줄 알겠다. 얼굴이 햄스터 같았다. 도현은 그가 귀여워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니엘을 보았다.

“이스트드래곤에서 선수들 밥도 안 주나요?”

“줍니다. 그때도 잘 먹긴 하는데…. 신태호가….”

아직 성장기라 그런 줄 알았더니 진짜 맛있는 음식점에 데려왔더니만 아예 눈이 돌았다. 하긴… 아직 전역한 지도 얼마 안 됐고 어린애고. 그래도 다니엘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번 데이트는 망했다.’

얼마나 점수가 깎였을지 모르겠다. 도현이 겉으론 사근사근해 보여도 음식에 까다로운 만큼 데이트 상대에도 까다로운 것 같다는 걸 깨달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음식점과 그곳의 음식을 꼼꼼히 평하고 장단을 파악하는 것처럼 남자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평가하는 것이 느껴졌다.

가만히 그녀가 남자들을 대하는 걸 보면, 그 편집장 같은 경우는 전혀 남자로 보지 않았고 미르 킹쉴드는 점수를 팍팍 깎이고 있는 중이며 자신은 판단을 보류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학구적 관점에서 심도 있는 관찰의 결과 나온 가설이었다.

약간 불안해하며 도현의 기색을 살폈으나 그녀는 신태호가 잘 먹는 걸 보기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음식을 세 개나 더 시켰는데도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다.

“걱정 안 해도 신태호 선수 잘 크겠는데요? 엄청 잘 먹어서.”

신태호는 도현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주는 음식은 하나같이 맛있었다. 맛있는 걸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신태호는 음식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누나.”

언젠가 다니엘의 매니저 셀레나 카토가 말한 적이 있다. 연상의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을 땐 ‘누나’라고 하라고.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뜬 도현이 웃었다.

“숫기도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네.”

본인이 생각해도 본인답지 않은 짓이라 신태호는 엄청 쑥스러워져서 다시 음식을 와구와구 먹었다.

“태호 진짜 귀엽네요. 다른 선수들도 귀여워하겠어요.”

“그런 것 같긴 한데… 구단에서 자주 못 어울리게 합니다. 나쁜 물 든다고.”

“아, 그건 그렇겠네요. 애한테 좋은 교육환경도 아니고…. 학교는 어떻게 하나요?”

그 뒤 그렇게 무슨 애 하나 딸린 부부처럼 이야기를 해나간 도현과 다니엘이었다. 그렇게 데이트는 무난하게 마무리되었다.

*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음 주 일요일, 첫 경기가 끝나자마자 모든 미디어 매체가 같은 사진을 띄워 대서특필하였다.

<신태호! 그는 승리의 신인가, 악마인가!>

사진은 작고 가느다란 체구의 선수가 자신보다 배는 덩치가 큰 선수를 들어 올려 허리를 꺾어 즉사시키는 장면이었다. 소드오라 출력이 마치 마도사가 마법을 부리는 수준이며 중장거리 공격까지 가능하다는 것에서 엄청난 주목을 받던 선수가 이런 괴력까지 냈으니. 무엇보다 상대를 봐주지 않는 저 잔인함이야말로 모든 엘 드라카 팬들이 염원해오던 진정한 베르세르크, 광전사가 아닐까. 엘 드라카가 진정한 강함과 죽음을 겨룰 수 있는 경기가 되는 것이다.

“신태호 님….”

로웰 리는 무릎을 꿇고 신태호의 싸인 두 장을 고이 모셨다. 각종 게시판 및 커뮤니티, 스페이스에서는 <신태호 드디어 각성!>, <기다리던 신태호!>라는 말이 맥락도 없이 마구 튀어나오고 있었다.

“어머… 그렇게 순해 보였는데….”

적나라하고 잔인한 사진에 도현이 깜짝 놀라 그렇게 말했다.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까. 그의 얼굴은 상대 선수의 그림자와 피에 가려 보이지가 않았다.

“진짜 엘 드라카 팬들은 신태호 님한테 절해야 해요. 이제야 초기 엘 드라카의 레전설 느낌이 좀 나겠는데요, 이번 세븐즈.”

로웰은 그렇게 말했다. 엘 드라카 초기야 마도사의 마력 리미트도 제대로 없을 때였고 경기를 하면 선수가 밥 먹듯이 죽던 때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팬층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지 않았을 때였지만, 진성 엘 드라카 팬들은 그때가 엘 드라카의 최전성기라고 곧잘 말하곤 했다.

“요새 난리긴 하더라구요. 엘 드라카가 잘 되면 우리 작품도 잘 읽힌다고 하니까 좋은 건가….”

도현이 송선호가 준 통계분석자료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인터넷상에 엘 드라카 관련 검색어가 폭주하면 자연히 작품으로 유입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문득 전에 로웰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렇게 아무도 안 죽었다는 거에 안도하다 보면 나중에 남의 팀 선수 하나 죽어도 우리 팀 아니라서 다행이다 싶고….]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작품이 잘 팔리겠다는 생각이 드는 자신도 누구에게 뭐라고 할 거 없이 훌륭한 22세기의 인간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지금 스친 생각을 디바이스에 기록했다. 그리곤 잊었다.

저번에 보석을 판 돈이 백억 가까이 들어왔다. 혹시나 인세가 예상만큼 안 들어올 때를 대비하여 아주 약간만 남겨두고 로웰의 말대로 전부 이자율이 높은 대출부터 갚았다. 그랬더니 당장 다음 달에 막아야 할 이자가 대폭 줄었다. 숨통이 좀 트였다. 로웰의 말대로 하길 잘한 것이다. 빚을 다 갚는다면 얼마나 자유로울지 생각해보니 확실히 먼저 빚을 빨리 갚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 만화판의 인세를 도현과 로웰이 반반씩 나누기로 한 것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도현도 돈이 급했던지라 덥석 하겠다고 했다. 그 뒤 소설판의 계약 시기가 왔을 때 도현은 이것도 반반으로 나누고 싶다고 했다. 점점 갈수록 소재나 사건을 같이 구상할 때도 많았고 그대로 소설판 인세를 도현 혼자 날름 먹기는 너무 미안했던 것이다. 게다가 만화를 그리기 위한 로웰의 순수 노동력을 보아도 만화판 순수익 5대 5는 로웰이 엄청나게 손해를 본 것이었다. 로웰이 도현에게 해준 것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더 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을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예상대로 현재 만화판이 소설판 인세보다 약 2배 정도 더 들어오고 있었다. 여러 국가에 동시 연재되고 벌써 오디오 드라마도 붙어서 2차 저작물 인세도 들어오고 있었다. 2차 저작물은 로웰과만 계약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한 달 소설 인세가 현재 도현 혼자만 2억 정도다.

물론 이 정도로는 이자나 겨우 갚는다. 편수가 훨씬 쌓이면 아마 빚은 차차 갚을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전작처럼의 대작은 아니라서 예전 같은 사치는 무리일 것 같고 연재가 끝난다면 반드시 새 연재를 해야 하겠지만, 오랜만에 이렇게 돈을 버는 건 기분이 좋았다. 아니, 사람들에게 자신의 글을 다시 선보일 수 있다는 게 기뻤다.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 주인공 아람 첸은 공공장소에서 이상한 짓을 하면서도 대중매체엔 GAS도 없이 멀끔한 얼굴로 나오는 세한 로마노프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그에게 인터뷰 신청을 한다. 거절을 당하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승낙을 받고 그의 인터뷰를 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인터뷰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몰랐지만 만나고 나서는 세한 로마노프도 그녀가 자신의 추태를 발견했던 여자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긴장한다. TFC 선수답지 않게 대중적 이미지가 건실한 그였다. 스스로가 비난받아 마땅한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모르는 척 일반적인 인터뷰를 하다가 결국 아람 첸이 인터뷰 예상질문과는 다른 질문으로 그를 추궁하게 된다.

[로마노프씨, 혹시 변태신가요?]

[!]

[다른 선수들과는 다르게 대중적 이미지가 건실한 분이 그런 짓을 하고 다닌다는 건 다른 선수가 그런 짓을 하는 것보다 더 이슈가 될 텐데요.]

하지만 숨길 수 없는 그녀의 눈빛에 담긴 경멸에 그의 가슴이 두근…!

“후후….”

도현이 웃었다. 쓰는 것이 즐거운 글은 정말 오랜만이다.

도현은 멀티스크린을 반으로 나눠 지금까지 연재가 된 부분과 지금 쓰고 있는 부분을 띄우고 다른 스크린에는 지금까지 정리한 소재나 캐릭터에 대한 생각, 구상, 느낌, 앞으로의 전개방향에 대해 낙서식으로 정리한 노트를 열었다. 그리고 한 번 찬찬히 읽으며 노트를 추가하기도 하고 수정하기도 하다가 로웰에게 말했다.

“근데 생각보다 TFC 선수들이 로마노프처럼 고뇌에 차있거나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하거나 그러진 않는 거 같아요, 그렇죠?”

“왜요?”

로웰이 한 스크린엔 엘 드라카 경기, 태블릿엔 원고를 띄워 작업을 하며 되물었다.

“아니, 다들 고생도 많이 했던 남자들이라 내면에 아픔이 있고 외면의 화려함 같은 건 다 허상일 것 같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로마노프를 기획했는데 지금까지 본 일반적인 선수들은 다 미르 같단 말이에요. 아주 생각이 없어요, 아주.”

도현이 강조했다. 로웰이 잠깐 뜸을 들였다가 답했다. 한꺼번에 세 가지 작업은 역시 버퍼링이 걸린다.

“다니엘 씨는 약간 그런 면이 없잖아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다른 선수들처럼 여자들 만나고 약 하면서 흥청망청 살지도 않고.”

“다니엘…씨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체적으로요. 이번에 미르 인터뷰해보면서 느꼈는데 생각보다도 정말 생각이 없어요. 아니, 멘탈이 강하다고 해야 하나?”

“원래 단순한 게 최고라고 하긴 하죠.”

“팀원들 다 죽고 혼자 살아남았는데도 그때 죽은 어떤 팀원이 곱게 죽지 않아서 자기도 죽을 뻔했다고 진심으로 죽은 팀원을 욕하더라구요.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죽는 게 그 바닥 최고 미덕이라면서.”

“오, 그래요?”

“그러다가 또 웃으면서 그 팀원이 어떻게 빚을 져서 체첸까지 오게 되었고 부모 형제는 몇이고 어떤 사연이 있고 이런 건 다 좋게 얘기를 해주더라구요. 좋은 놈이었다면서. 태도도 거리낌이 없었어요. 뭐랄까. 유감이 전혀 없다고 해야 하나. 뭔가, 어떻게 봐도 일반적인 사고방식은 아니라고 해야 하나. 근데 그게 막 이상하다기보다는… 그게 상식인 그런 세계가 진짜 존재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도현은 말로 풀어 설명하기가 약간 난감한 것 같았다. 로웰이 물었다.

“근데 그 야외자위플, 그거 킹쉴드 씨라면서요?”

“네.”

도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에는 이 남자도 문제 많은 남자구나 했는데 지금 보면 그냥 즐기려고 그렇게 했나 싶기도 하고 그래요. 맨날 다쳐서 아프다고 난리를 쳐도 다 나으면 다음 경기할 생각에 신나 있어요. 다 때려눕힐 거라고. 처음엔 이게 뭔가 싶었는데…. 진짜 단순하면 그럴 수가 있는 걸까요?”

창작자는 기본적으로 여러 인격을 기획하고 표현해내야 하니 생각을 다차원적으로 하려고 노력한다. 그게 그들의 일이니까. 상상하고 구체화하고. 그래서일까. 아주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충격적일 정도로 놀랍다. 미르를 보면 언제나 모든 것이 쉽고 호쾌하지 않던가. 사람은 저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더 얘기를 해봐요. 그럼 좀 더 알 수 있겠죠.”

“네. 금방 선생님 말씀 들어보니까 다니엘 씨도 한 번 인터뷰해봐야 할 것 같아요. 다른 선수들도 된다면…. 진짜 이 남자들 사고방식이 특이해.”

도현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되새겨보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 집으로 들어왔다. 도현과 로웰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그냥 집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왔어?”

도현이 현관 쪽을 보며 말했다. 송선호는 실내 슬리퍼로 갈아신으며 물었다.

“이번 주 원고는 다 되셨나요, 두 분?”

“난 다 됐어.”

도현은 멀티스크린의 화면을 바꿔서 송선호에게 넘겼다. 그는 곧바로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로웰을 보았다. 로웰은 빙글빙글 안경을 빛내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엘 드라카 시즌이라 좀 늦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작년에도 그랬고.”

“…일요일 전까지만 해주십시오. 일요일 되면 어차피 경기 보신다고 일 못 하실 테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제가 뭐 도와드릴까요?”

도현은 로웰에게 가서 그렇게 물었다. 인공지능이 색칠한 곳들 중 이상하거나 틀린 부분을 찾아달란다. 송선호도 동참했다.

“…….”

“…….”

도현은 한참 일을 하다가 문득 송선호를 보았다. 언제나 약간 신경질적인 그였지만 요새 따라 특히 더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도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부분의 남자란 여자보다 훨~씬 사고가 단순하다는 걸 경험상 팩트라고 여기고 있는 도현이었다. 심지어 너무 단순해서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인 미르 킹쉴드도 있지 않은가. ‘모두’가 아닌 ‘대부분’으로 표현하게 만든 몇 안 되는 남자들 중 하나가 송선호다. 뭐 때문에 맨날 저렇게 짜증이 나 있는 건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재벌집 도련님에다가 가진 거 많고 배운 것 많고 미래 창창하고 운 좋게 얼굴, 키, 몸, 어느 것 하나 빠질 것 없이 다 가진 그였다. 숫자 자체가 드물기는 해도 보통 그런 남자들은 성격이 참 좋은데. 혹시나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집안사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싶었는데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참, 불가해한 남자다.

“뭘 봐?”

“캐릭터 구상 중.”

“…….”

인상을 찌푸리며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는 송선호였다. 알다시피 뒤끝이 삼만오천 리 정도 되는 송선호는 저번 컨셉화 포즈 일로 생긴 악감정이 아직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 엘 드라카 끝나면 휴가 줄 거지?”

8월 시작했던 엘 드라카가 이제 고작 6주를 남겨두고 있다. 벌써 11월이라는 소리다.

“시즌 끝나고 3달은 신규 유입이 많을 거라 연재 펑크는 없었으면 하는데요, 작가님.”

송선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도현이 얼른 말했다.

“나 벌써 4달 치나 먼저 써놨는데. 다듬기도 3번이나 다듬었고.”

로웰에게 한 번 혼이 나고 나니 확실히 우선순위라는 게 생기긴 했는지 무작정 놀겠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본 송선호는 생각했다.

‘그래도 놀고 싶어 죽네, 죽어. 정신 못 차리지.’

송선호는 심드렁하게 로웰의 그림을 체크하며 틱틱거렸다.

“너 혼자만 갈 겁니까. 로웰 선생님은 어쩌고요.”

“어… 선생님…. 비축분 조금은 있으시죠? 일주일 치라도….”

“전 지금 하루살이입니다, 작가님.”

엘 드라카 하는데 비축분이 웬 말이냐, 후훗. 로웰이 그렇게 말했다. 도현이 다급하게 말했다.

“안 돼요! 일해요, 선생님! 저랑 배 타고 놀러 가기로 했잖아요!”

“후훗… 신태호가 각성한 마당에 휴가 따위 반납할 수 있습니다. 기꺼이!”

“안 돼요!”

도현이 엄청 당황해서는 로웰을 쳐다보았다. 송선호도 로웰을 거들었다.

“너도 그냥 일하세요. 연재 주 3회 하시든가요.”

“그런 게….”

로웰이 말한 것처럼 도현도 상황에 맞는 정도(?)를 지켜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했다. 예전 같으면 이미 배를 타고 놀러 다니면서 글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배를 움직이는데 드는 돈도 있으니 엘 드라카가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집필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 한 달에 이자 이상의 인세가 들어올 거라 예상되는 때도 엘 드라카가 끝난 직후부터였기 때문이다.

도현이 약간 시무룩해져서 자기 스크린을 보며 생각에 빠지자 송선호는 내심 꼬셨다.

“사람이 살다 보면 못 하는 것도 있고 한 게 당연한 거죠.”

송선호가 그렇게 그녀를 훈계하자 도현이 째릿 그를 노려보았다.

“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거 아냐.”

돈도 많은 집에서 태어났으면서. 재수 없어…. 도현이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는 말문이 막혔다.

“…아니, 딱히 그렇진 않아….”

그렇게 조용히 대답하곤 안경을 괜히 고쳐 쓰며 일로 돌아갔다.

*

“우리 꼬맹이 또 떠네. 괜찮냐? 어? 기운 좀 내라.”

“남자가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고 한 거야.”

덩치가 산만한 남자들이 작은 소년을 둘러싸고 그를 격려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이스트드래곤의 대기실이었다.

“끝나고 감독님 몰래 약 할까? 약한 것도 구할 수 있는데.”

“아니면 내가 찍어놓은 여자가 있는데… 진짜 죽이거든? 양보해줄까? 어?”

“쨔샤, 네가 우리 클럽 마스코튼데. 기운 좀 내라.”

“내가 니 나이 땐 날아다녔다. 날아다녔어. 어? 표정 풀고.”

이게 나름대로 그들식의 격려였다. 하지만 동료 선수들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신태호의 얼굴은 노랗게 질려 있었다. 금방 구토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스트드래곤의 퍼스트 세븐 대전 상대 샌프란시스코 레드불 클럽의 미드필더 22번 페르난데스 크룸의 죽음, 신태호의 아홉 번째 살인이었다.

‘죽이고 싶지 않아. 더이상 사람은 죽이고 싶지 않아. 제발. 제발.’

세컨드 세븐, 인도 클럽 쿠르가를 꺾고 올라온 밀라노FC 전이 시작되기 직전, 신태호는 언제나처럼 그렇게 빌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말이다.

포틴즈까지만 해도 전력을 보존한다는 의미에서 신태호의 출전이 딱 한 번밖에 없었지만 세븐즈부터는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게다가 이스트드래곤을 상대하는 모든 클럽들이 자신을 견제하는 이상 ‘위험’은 계속해서 커지기만 할 것이다. 주목을 받을수록 더….

[본능에 저항하지 마라. 그냥 죽여. 네가 상대편 선수를 죽이면 죽일수록 사람들은 널 신으로 추앙할 거다.]

이스트드래곤의 감독 하네다 스즈키는 레드불 전 이후에 구토를 하며 못 하겠다고 우는 신태호의 얼굴을 붙잡고 그렇게 말했다. 신태호는 그런 말을 하는 감독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감독뿐만 아니라 엘 드라카에서 뛰는 거의 모든 소드마스터는 몬스터 게이트에서 죽음의 사선을 넘어 겨우 사회로 돌아온 이들이었다. 동지였다. 형제라고 말해도 좋았다. 설사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더라도. 그런데 죽이라고?

죽고 싶지 않았다.

남중국해에 처음 갔을 때 신태호의 머릿속을 지배했던 생각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반년은 잠을 한숨도 자지 않았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몬스터 때문이었다. 공중, 지하 어디도 할 것 없이 예민하게 감각을 곤두세웠다. 하늘에서 덮치는 가고일, 땅에서 솟아나서 기지를 파괴하는 어쓰웜, 몇십 미터에서 몇백 미터까지 되는 타이탄…. 신태호보다 강했던 이들도 방심하는 순간 곧바로 곤죽이 되고는 했다. 시신을 남기지 못하는 게 당연한 죽음. 신태호는 그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병사들은 곧잘 약을 하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신태호는 그런 것에 절대 어울리지 않았다. 죽고 싶어 환장하는 놈들이나 그런 걸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1년을 지내니 그는 몬스터의 살기에 반사적으로 반응하여 그들을 제거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신태호는 남중국해에 있는 그 어떤 병사들보다도 실적이 좋은 용병이 되었다. 빚도 거의 다 갚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스카우팅이 들어왔다. 단 1년 만에. 다른 이들은, 설사 명이 길어 10년을 버텨도 그 바닥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산데 1년 만에 신태호는 다시 사회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든 용병들이 신태호를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그리고 행운을 빌어주었다. 신태호도 돌아갈 수 있는 게 너무나 기뻤다.

워낙에 위험하다고 들었고 같은 강자들끼리 경기를 한다고 해서 걱정도 많이 되었는데 훈련은 아주 잘 맞았다.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단련하는 것이 적성에 맞았다. 훈련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딱 중간 정도랄까. 만족했다.

동료 선수들이 좋았다. 그들은 정말 강했다. 그가 봤던 그 어떤 남자들보다도 강했다. 그런 강한 사람들은 언제나 신태호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죽지 않을 거니까.

몇 번 해본 친선 경기도 좋았다. 누군가와 힘을 겨룰 수 있고 그래서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 왠지 흥분되고 즐거웠다. 강해진다는 것도 신태호에게 굉장한 안도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죽지 않을 가능성을 더 높여주는 거니까.

그런데 엘 드라카는 달랐다.

거기엔 살기와 광기가 흘렀다.

선수, 코치, 감독, 관중, 카메라… 모두의 눈에 살기가 흘렀다. 그는 언제나 본능을 억누르려고 노력했다.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몬스터가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인간이었다. 그들은 신태호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었다. 다만 이기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작년 써드 포틴, 프로덴트 전. 그때 이스트드래곤이 핀치에 몰렸을 때 달려들던 상대편 선수들은… 모두가 타이탄의 타오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반사적으로 모두 죽여버리고 말았다. 신태호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모두는 그런 그에게 열광했다.

‘제발. 제발. 제발….’

“신태호.”

기도를 하고 있는 신태호의 머리에 무거운 손이 하나 턱 올라왔다. 낮고 울리는 목소리. 신태호는 고개를 들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보석 같은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와는 또 다른 의미로 어쩐지 다른 선수와는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 남자였다. 그는 함성이 들려오는 경기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난 러시아에서 한 번에 11만 5,426명의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

신태호는 숨을 멈추었다.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했다고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무력한 인간들이었지. 벌레 죽이듯 죽였다.”

“…….”

“심지어 그들을 죽이고 난 이후엔 기뻐했다. 오랫동안 구상했던 마법이 성공했거든. 그리고 눈을 들어보니 초록색 평원이 새빨갛게 물들고… 너무나 조용하더군.”

신태호는 그의 표정을 읽으려고 했다. 그의 얼굴은 무뚝뚝했다. 그는 더 이상 뭔가 설명해주진 않았다. 그 뒤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경기장에 입장했다. 다행히도 그날은 아무도 죽이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다.

*

이스트드래곤 하네다 스즈키가 신태호의 우는 소리를 받아주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레드불 전 이후 이스트드래곤이 출전하는 경기의 시청률이 대폭 높아졌다. 당연히 구단의 입장에서는 그게 전부 돈이었다. 이스트드래곤의 경기뿐만 아니라 엘 드라카 자체에 대한 관심과 팬층이 두터워졌다. 굉장한 흥행이었다. 이스트드래곤은 바로 이것 때문에 신태호라는 선수의 잠재력에 주목한 것이 아닐까. 이스트드래곤에게도, 엘 드라카와 관련된 모든 이권 단체에도 신태호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게다가 신태호로 인한 엘 드라카 흥행은 메트로서울 외곽의 대저택에 살며 소소하게(?) 덕질을 하며 돈을 버는 두 여자에게도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 소설판 및 만화판의 매출이 퍼스트 세븐 이후로 두 배로 껑충 뛰었기 때문이다.

“영화화 요청도 왔습니다. <다시 만난 시간> 때 촬영감독 하셨던 분이 이번에 감독 데뷔를 하신다는데 첫작으로 하고 싶으시다고.”

“와아!!”

도현과 로웰은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며 팔짝팔짝 뛰었다. 빚 청산의 길이 가시화되었다. 도현이 로웰의 두 손을 잡고 그녀와 빙글빙글 돌면서 물었다.

“이제 쇼핑 좀 해도 될 거 같죠!”

“네! 작가님 사고 싶은 신상 사러 가요!”

“놀러도 가도 될 거 같죠!”

“네! 갑시다! 태평양!!”

“꺅! 너무 좋아요!!”

두 여자가 흥분해서 방방 뛰자 송선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두 분 좀 진정하시구요. 아직 그렇게 기뻐하기는 시기상조예요. 도장 찍기 전엔 아무것도 모르는 겁니다.”

“에이, 분위기 깨지 말고 너도 웃어, 좀!”

그렇게 시원찮은 표정을 한 송선호의 손도 억지로 잡고 강강술래를 했다. 그리고 도현은 바로 와인셀러로 달려가서 샴페인을 가져와 터뜨렸다.

“너무 좋아서 안 되겠어요! 한 잔씩만 해요!”

로웰은 입을 벌려서 뿜어나오는 샴페인을 마시며 킬킬 웃었다. 송선호가 짜증 난다는 얼굴을 했다.

“이거 누가 다 치우라고…!”

“시끄럽고 너도 마시자!”

즐길 수 있을 때는 즐기는 것이다. 도현은 송선호의 입에다 술병을 꽂다시피 했다. 그리고 들고 온 다른 샴페인도 터뜨려 잔 세 개에 따랐다. 그리고 로웰에게 하나, 송선호에게 한 잔 주고 자기도 한 잔 들었다.

“일해서 성공하는 거 이렇게 기분 좋은 거였는데. 정말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것 같아요.”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로웰이 선창했다.

“빚 청산!”

“빚 청산~.”

그러자 송선호도 어쩔 수 없이 잔을 들었다.

“빌딩건설.”

*

“으….”

정신이 드는 순간 느꼈던 건 머리를 가르는 듯한 통증이었다. 송선호는 이마에 손바닥을 대고 한동안 끙끙 앓았다. 엄청 마셨다. 이렇게 마신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겨우 눈을 떠 주변을 보니 그는 카우치 위에 엎드려 있었고 테이블엔 술병이 하나둘… 7병이나 있었다. 와인을 인당 두 병 넘게 마셨으니 당연히 머리가 이렇게 아플 수밖에 없었다. 과일주는 원래 숙취가 독한 법이다. 송선호는 엉망이 되어 널브러져 있는 자신의 양복 재킷과 베스트를 찾았다.

“머리야.”

송선호는 겨우 일어나서 비틀거리며 다른 사람들은 괜찮나 찾아보았다. 바로 도현의 침실로 가서 노크를 했다.

“야, 살아있냐?”

문을 제대로 안 닫아둬서 노크를 하니 문이 절로 열렸다. 그래서 그는 그냥 살짝 들여다봤더니 도현과 로웰이 엉켜서 자고 있었다. 보기 싫은 꼴이라 송선호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대로 문을 닫고 손님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송선호는 절대 도현의 집에 물건 같은 걸 두고 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어쩔 수 없이 몇 개 정도 있긴 했다.

2층에 있는 제일 큰 침실은 로웰의 침실이었다. 송선호는 현대미술 작품이 장식된 복도를 지나 전망 좋은 게스트룸 하나의 문을 열었다. 넓고 햇빛이 잘 들어오고 정원이 훤히 보이는 그 방은 킹사이즈 침대 하나에 가구가 몇 개 들어가 있는 모던하고 멋진 침실이었다. 게스트룸까지 이렇게 번쩍번쩍하니 볼 때마다 질리긴 했지만 좋은 방이긴 했다. 송선호는 옷장을 열었다. 버튼을 누르자 자동으로 열린 옷장 안에는 송선호의 사복 두 벌과 양복 세 벌이 있었다. 서랍에는 속옷과 양말도 몇 벌 들어 있었고 넥타이 함에는 넥타이가 네 개 있었다. 그렇게 확인을 하고 옷을 훌훌 벗은 송선호는 숙취 때문에 욕을 하면서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 안에는 고급스러운 크리스털 용기로 된 목욕용품이 잘 진열되어 있었다. 바닥은 새카만 무광 돌에 대리석으로 된 하얀 욕조가 저쯤에, 오른쪽 벽면은 널찍한 샤워공간이 있었다. 거기로 가 물을 틀자 머리 위 샤워헤드에서 바로 미지근한 물이 나왔다. 그의 탄탄하고 남자다운 몸을 따라 물이 굽이굽이 흘렀다.

송선호는 문득 한숨을 쉬었다.

‘미르 킹쉴드랑 다니엘 스톤하츠… 누구랑 사귈까….’

둘 다 그녀가 만나던 스타일은 아닌 것 같긴 한데…. 굳이 따지자면 미르 킹쉴드 쪽일까. 하지만 다니엘 스톤하츠랑 만나는 것도 분위기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좋은 놈이고 나쁜 놈이고를 떠나서 둘 다 싫다…. 도현이 만났던 남자들을 다 통 틀어봐도 그 둘은 개성이 아주 강한 남자들이었다. 그녀의 기억에 오래 남을 것만 같다. 그 양아치 새끼처럼….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남자가 또 있나?’

아니면 둘 다?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도현까지 좀 질렸다.

“하아….”

송선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머리는 지끈지끈하고 그런 머리로 생각하는 것도 지끈지끈한 주제라 송선호는 눈을 감고 가만히 물을 맞고 있었다. 이 물과 함께 모든 생각이 쓸려내려 갔으면 좋겠다. 약간 어지러워서 벽에 손을 짚고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샴푸가….”

솨아아아. 샤워기는 기분 좋을 정도로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그는 도현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는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긴 채 무심한 듯 섹시하고, 흐트러진 듯 우아한 자태로 나타났다. 여느 때처럼…. 송선호는 그대로 1mm도 움직이지 못하고 굳었다. 도현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가 곧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못 봤어.”

“…….”

거짓말이라도 좀 성의있게 해라…. 도현은 필요한 걸 찾아서 다시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송선호는 샤워를 끝마치고 오랜만에 양복이 아니라 캐쥬얼한 옷을 입었다. 안경은 쓰지 않았다. 그리고 내려갔더니 쑥덕거리던 여자 둘이 그를 돌아보았다.

“어디 가?”

도현이 물었다. 뭔가 장난기가 가득한 게 아까 본 걸(?) 로웰과 품평하고 있었을 거라는 걸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불쾌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뭐라고 평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누구 만나는 거 아니에요? 오늘 뭔가 좀 다른데?”

로웰이 해장으로 술을 한 잔 마시며 그렇게 말했다.

“어, 그런가? 그러네. 오늘은 양복도 안 입고.”

도현은 그렇게 말했다. 금방 앞에 있는 남자의 알몸을 본 여자의 반응이라기엔 영 관심이 없고 일상적이었다. 의식도 안 하는 것 같고….

‘부끄러워하길 바란 건 아니긴 한데….’

어쩐지 좀 빡친다. 송선호는 심드렁하게 거짓말을 했다.

“소개팅 간다, 왜.”

그러자 두 여자 다 눈이 반짝했다.

“오오! 후기 좀요.”

“재밌겠다!”

“네가 노는 것처럼 그렇게 노는 건 줄 아냐?”

송선호는 그렇게 틱틱거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도현이 말했다.

“잘 갔다 와.”

역시나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열까지 받으려고 한다. 송선호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가 간다, 라고 짧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당연히 소개팅 같은 건 없는 송선호는 회사를 잠깐 들렀다가 집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회사에 가서 잠깐 일을 확인하고 물건을 좀 챙기는데 누가 불렀다.

“선호야.”

“사장님, 출근하셨네요?”

KP노벨 사장이자 송선호의 삼촌인 제임스 윤이었다. 다갈색 머리카락에 수염까지 덥수룩하게 기른 히피였다.

“또 수염 기르셨네요. 회장님 싫어하실 텐데.”

“그 할망구는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그런 것 가지고 트집을 잡는지 모르겠다.”

제임스는 하품을 늘어져라 하며 그렇게 말했다.

“너 요새 작품 잘 된다며.”

“네.”

“스트레스 많이 받더니만 잘됐네.”

“원래 잘하던 선생님들이었으니까요.”

“음, 그래그래. 근데 너 요새 만나는 여자 있냐?”

제임스는 영 대충 대답하고는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송선호가 의아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아뇨.”

“그럼 오늘 밤에 나랑 밥 좀 같이 먹으러 가자. 내가 진짜 끝~내주는 미녀 소개시켜 줄게.”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제임스가 송선호의 귀에 그렇게 속삭였다.

*

그래.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니, 기회였다. 그래, 그날. 그날 그냥 혹했던 거지. 생각했던 것보다는(?) 막장이 아니었으니까. 괜히 어렸을 때, 멋 모를 때, 콩깍지 썼던 그때 그 기분이 난 거지. 착각인 거지.

‘다 여자를 안 만나서 그런 거다. 일만 해서!’

삼촌의 안목이라면 그의 호언장담대로 분명히 미인일 것이고 집안도 품성도 좋은 여자라고 했으니까 분명히 그도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난 이미 정신 차렸다. 이미 정신을 차린 거다.’

송선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며 그날 밤 제임스 윤이 말한 비즈니스 회의 겸 소개팅 장소에 나갔다. 당연히 집에 가서 더 좋고 멋진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음식점에서 삼촌과 함께 얘기를 하다가 기다리던 여자가 당도했을 때는 깜짝 놀랐다.

“안녕하세요, 베아트리스 스오입니다.”

저쪽은 남미를 중심으로 한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회사 <칼림>의 전무고 일본계 브라질인 회장의 딸이라고 들었다. 게다가 삼촌 말대로 엄청난 미인이었다. 살짝 태운 구릿빛 피부에 남자라면 누구라도 돌아볼 정도로 육감적인 몸매, 시원시원한 미소가 사랑스러운 벽안의 미녀다. 애인이나 배우자가 되어준다면 어떤 남자라도 처갓집 말뚝에 절을 할 만한 미인에 능력 있고 배경도 좋은 여성.

“반갑습니다. 송선호라고 합니다.”

할머니가 한국계라고 하더니 생각보다 한국말도 잘한다. 송선호도 원어민급으로 할 수 있는 언어가 몇 개 있어 다른 언어라도 상관이 없었을 텐데도 한국어를 써주는 걸 보면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다.

“드시고 싶으신 것 있으신가요? 여기 다 맛있어서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일식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송선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메뉴를 권했다. 기대했던 것을 훌쩍 뛰어넘은 건 이미 예전이고 송선호도 마음을 굳혔다. 매너 좋게 일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제임스 윤을 보내고 나서도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이도 또래고 얘기도 잘 통했다. 게다가 분위기를 보니 저쪽도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나도 잘해보자.’

연락처를 교환하고 헤어졌을 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기분도 좀 좋아졌다. 다음날엔 삼촌에게서 연락이 바로 왔다.

[어때. 삼촌 말 맞지~. 쩔지~.]

“깜짝 놀랐어요.”

[봐라. 삼촌 말을 잘 들으면 가만히 있어도 떡이 떨어져요. 나도 처음 봤을 땐 무슨 모델인 줄 알았다.]

“저도요.”

[연락처는 받았냐?]

“네.”

[삼촌한테 잘해라. 평생 감사하고 살아라. 노예처럼 일해라.]

삼촌의 말에 송선호가 피식 웃었다. 삼촌들 중에 제임스를 제일 좋아하는 송선호였다. 그가 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오냐. 잘해봐라.]

그렇게 송선호는 정말 오랜만에 여자를 만나기 시작했다. 베아트리스 스오. 미모, 배경, 능력, 성품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도현 킬스버그보다 좋은 여자였다. 얘기도 잘 통하고 재미있었다. 이런 여자를 만나기 위해 그런 마음고생을 해온 거라고 말한다면 다른 남자들은 오히려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백 번을 마음고생 하더라도 베아트리스 같은 여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게 보통 남자들이다.

그리고 세 번째 데이트에서는 마지막에 가볍게 술을 한잔하며 밤새도록 이야기를 했다. 그것도 그녀의 펜트하우스에서 말이다(3시간 동안 비행차를 타고 브라질까지 갔다). 분위기가 그렇고 그런 것이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었다.

송선호의 페이스는 보통 이렇지 않았지만 이런 여자인데 뭐가 문제겠냐 싶었다. 어차피 한 번은 지나가야 할 일. 남들만큼은 안다.

빛나는 상파울루의 야경. 이를 등지고 아름다운 여자와 남자가 어두운 거실 카우치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아트리스가 섹시하게 미소를 지었다.

“선호 씨….”

그녀가 눈을 감으며 드디어 입을 맞추려고 했다. 송선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잡고 그녀의 뺨에 먼저 입을 맞추었다.

“오랜만이라 긴장했나 봅니다.”

그런 어쭙잖은 변명이 먹힐까 싶었지만 베아트리스는 웃으며 귀엽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의 손으로 천천히 자신의 허리를 쓰다듬게 했다. 백인 혼혈이다 보니 피부가 약간 건조하고 두부를 누르듯 물렁한 느낌이 들었다.

송선호는 문득 도현의 피부를 처음으로 만졌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베아트리스와 데이트를 하며 도현의 생각을 했던 적은 별로 없었는데, 하필 지금. 몸이 반응을 할까 봐, 혹은 다시 그녀를 좋아하게 될까 봐 겁이 나서 바보같이 벌벌 떨기만 했다.

“무슨 생각 해요?”

베아트리스는 천천히 송선호의 손등을 이끌어 자신의 가슴 아랫부분을 감싸게 했다. 아주 풍만한 가슴이다 보니 손등에 닿는 느낌이 무겁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다시 그녀가 입을 맞추려고 할 때는 벌떡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송선호는 곧장 그녀의 집을 나왔다. 혼란스러웠다. 후회하기도 했다. 사과를 하고 다시 베아트리스의 집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왜? 도대체 왜? 뭐 때문에? 배부른 새끼. 미친놈. 정신 나간 새끼. 왜 들어온 복을 차? 왜? 뭐 때문인데? 왜.’

송선호는 한숨을 푹푹 쉬며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 길도 잃어버렸다. 야심한 새벽. 화려한 상파울루. 밝은 불빛 아래, 그의 그림자만이 짙게 지는 것 같았다. 그는 디바이스로 자신의 비행차를 불렀다. 자택의 주소를 입력하려고 했다.

“어? 송선호? 이 시간에 웬일이야?”

그런데 몇 시간 뒤, 송선호는 도현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서울은 해가 막 지고 있었다.

“…….”

어디 나갔다 온 것일까? 꽤 차려입었다. 여성적인 굴곡이 잘 드러나면서도 어쩐지 가녀린 듯한 몸매. 만지면 깜짝 놀랄 정도로 부드러운, 분홍빛을 띤 하얀 피부. 색기가 어린 짙은 속눈썹.

‘예쁘다….’

그녀도 데이트를 한 걸까? 다니엘 스톤하츠일까, 아니면 미르 킹쉴드? 아니면 송선호가 모르는 또 다른 남자일까.

‘그래도 지금 이 시간에 혼자 집에 들어온 거면 아직 그렇게 깊은 사이는 아닌 거겠지?’

잠깐 그녀를 바라보던 송선호는 곧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도현은 가족이라도 들이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아 했다. 송선호는 말없이 카우치에 앉았다. 도현은 눈치 좋게 술을 내왔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차라리 말이라도 하면 속이나 시원해질까.

[네가 날 좋아한다고? 하하하하하!]

곧바로 우스갯소리로 치부해버릴 그녀의 리액션이 어렵지 않게 예상되었다. 하하… 송선호는 헛웃음이 나왔다. 미친놈. 그 정도면 다행이지.

[그럼 지금까지 나 좋아하면서 그렇게 괴롭힌 거야? 깬다. 기분 나빠.]

라든가,

[일하는 사이에 이런 거 불편한데. 미안하지만 담당자 바꿔줘.]

라든가….

“…….”

관두자, 관둬. 술이나 마시자. 송선호는 앞에 놓인 잔에 담긴 술을 한 번에 마셨다. 이 속상하고 답답한 기분이 모두 씻겨져 내려가길 바랐다. 그럴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도현은 송선호의 굳은 얼굴을 가만히 살피다가 입을 뗐다.

“…잘 될 거야.”

송선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음… 내가 아는 남자 중에 한 명도 그… 좀 문제가 있는 남자가 있었는데 그래도 때가 되면 다 되는 것 같더라고. 생각보다 많다, 그런 남자들.”

…뭐라는 거야? 도현이 자신의 목을 좀 만졌다. 그 사인이 마치 자신의 목을 확인하라는 것 같아서 송선호는 자신의 목을 만져보았다. 뭔가 약간 축축한 것 같다? 셔츠 깃을 좀 당겨서 보았더니 선명하게 분홍색 립스틱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송선호는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변명을 했다.

“아니, 이건… 삼촌이 소개해준 거 그냥 만나보기만 한 건데…!”

“아니, 아니. 자세히 말 안 해도 돼.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안 되는 남자들 사정 같은 거….”

혼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미친년이. 송선호는 그녀가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그것도 이중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 여자 없다.”

송선호가 말했다.

“그럼 그 립스틱은 여자가 바른 거 아냐? 네가 발랐어? 다 큰 어른들끼리 그럴 수도 있지. 뭘 또 그렇게 변명하려고 해.”

또 안 될 수도 있는 거고. 도현이 웃었다.

“…….”

다른 여자들은 아무리 친한 남자라도 그런 남자한테 여자가 생기면 기분이 싱숭생숭해진다던데… 정말 얘는 아닌가 보다. 그때 도현이 자신의 알몸을 봤을 때도, 그 뒤 소개팅을 나간다는 말에 하는 반응도, 지금의 이 말도… 아니,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단 한 번도 소리 내서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그녀의 마음이었다.

넌 나한테 남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는 매번 상처받았다.

‘…진짜, 씨발, 존나 싫다… 이 기분. 진짜 미치게 싫다. 이걸 또. 씨발. 씨발. 진짜 싫다. 씨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기분. 그것도 좋아하는 여자의 앞에서. 언제나. 여길 왜 왔을까. 다른 곳은 다 가도 여기는 안 왔어야 하는 거 아니냐, 이 병신 새끼야… 병신. 씨발새끼. 병신.

“…….”

송선호는 답답한 넥타이도 당겨 풀고 그냥 술만 줄창 마셨다. 다 잊고 싶다. 다. 도현은 측은한 눈빛으로(씨발) 송선호의 잔에 말없이 술을 따라주었다. 좋고 독한 술이었다. 바라는 바대로 금방 정신을 잃었다.

*

꿈은 언제나 비슷비슷했다.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꿈이다.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통하고, 그런데도 더욱 원해서 그녀에게서 떨어질 수가 없는, 그런 관능적이고 아찔한 꿈. 그런 꿈이다. 깨고 나면 허무하고 자괴감이 올라와서 송선호는 언제나 꿈을 꾸는 것을 싫어했다.

눈을 떴을 땐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아는 천장인 것 같긴 한데 이 구도에서 본 적이 없는….

“헉.”

송선호는 벌떡 일어났다. 머리가 띵 하고 울렸다.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도 도현 킬스버그의 침대다. 송선호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몸을 더듬어보았다.

오, 옷… 옷을 안 입고 있다. 설마. 설마. 설마. 설마…. 그리고 보니 바닥에 그녀의 옷도 떨어져 있었다.

‘설마설마설마설마…!’

송선호는 패닉에 빠져 얼굴이 하얘졌다. 기억해내라, 송선호. 기억!! 그렇게 잊고 싶다고 술을 처마시던 남자가 하루아침에 그 말을 물리고 미친 듯이 어젯밤을 기억해내려고 노력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송선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일어났어?”

도현 킬스버그가 아침부터 어딜 나가는지 옅은 갈색의 코트를 여미고 머리카락은 잘 틀어 올려 우아한 느낌이다. 그녀는 귀걸이를 귀에 달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색기가 있는 그녀라 저런 차림이 오히려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항상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니 머리가 더욱 새하얘졌다.

“어? 어….”

“나 친구 결혼식이라 조금 있다가 나가야 되는데.”

“어? 어….”

“로웰 선생님 요새 밤새워서 엘 드라카 보신다고 컨디션이 안 좋으시거든? 나중에 밥 좀 해드려.”

“어? 어….”

“갔다 올게.”

“어? 어….”

그녀는 침실에서 자신의 디바이스를 챙겼다. 송선호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녀를 불렀다.

“야….”

“응?”

도현이 돌아보았다.

“잘… 갔다 오라고.”

“난 또 뭐라고.”

도현은 그렇게 말하곤 방에서 나가고 곧 집에서도 나갔다. 송선호는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는 걸 느꼈다.

‘뭘까? 무슨 의미지? 하룻밤 실수? 그러니까 없던 일로? 싫어한다고 했으니까 끝까진 안 했다고 해도…. 그래도… 한 건 한 거잖아.’

어차피 하룻밤 같이 보낸 남자들도 많으니까 나도 그냥 그런 남자들 중에 하나라는 건가?

“씨발….”

그건 최악이다. 그거야말로 송선호가 최악으로 여기는 시나리오였다. 씨발. 씨발. 씨발. 송선호가 아무리 기억을 하려고 해도 기억이 하나도 나지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감쪽같이 기억이 안 날 수가 있을까. 송선호는 다시 침대에 털썩 누웠다. 도현의 침대였다. 항상 그녀가 잠자는… 씨발. 앞으로 이곳이 꿈에 나올 거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

정말… 정말로? 정말? 이 침대에서 그녀와… 함께 있었을까?

송선호는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고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시트에서 그녀의 향기가 났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몸이 그녀의 향기에 가득 감싸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피부에 소름이 일어나게 했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송선호는 그녀의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엄청나게 힘들었다. 그런 자신이 너무 변태 같다는 것을 깨닫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식사하세요, 선생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송 편집장님….”

송선호는 겨우 일어나 씻고 로웰 리를 위한 요리를 하고 2층에서 여벌의 정장으로 갈아입고 느지막이 출근을 했으나 일이 손에 하나도 잡히지 않았다.

스페이스에 들어가 <하룻밤 실수>, <좋아하는 여자랑 실수>, <아직 고백 못 했는데 섹스> 등등 다양한 물음을 검색하고 읽고 있었다. 심지어 익명의 고민 상담 사이트에 글을 올렸더니 <ㅊㅋㅊㅋ>나 <능력남, 홈런 치셨네요>, <여자 예쁘냐>, <공유 좀> 뭐 이런 좆 같은 답이나 받아 바로 삭제해버렸다. 쓰레기 새끼들.

“하아….”

정말로 그녀와 사랑을 나눈 것일까. 나는 그녀를 어떻게 만졌을까. 그녀는 나를… 어떻게 만졌을까. 너무나 오래도록 바라왔던 일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게 통탄스러웠다. 게다가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에 온갖 상상이 다 들었다. 그렇게 사무실 안에서 혼자 흥분했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했다. 송선호는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이렇게 된 이상 본의는 아니지만, 절대 본의는 아니지만… 책임져야겠다. 킹쉴드고 스톤하츠고 다른 남자는 일체 못 만나게 할 거고….’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를 독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머리에 열이 올랐다.

‘바람은 절대 안 돼. 죽어도 안 돼. 그래, 기왕 책임지겠다고 마음먹었으면… 그래, 남자라면 결혼까진 생각해야지. 그래. 그냥 화끈하게 반지도 사서 결혼하자고 하자.’

좋아하는 여자를 생각하는 남자의 마음속엔 이미 애가 셋에 환갑까지 같이 살았다지만…. 송선호는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비약되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도현 킬스버그와 관련된 일에 언제 그가 그다웠던 적이 있었던가.

“…….”

그리고 놀라운 건 진짜 반지를 사고 말았다는 것이다. 반지를 살 때까지만 해도 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나가 있었는데 사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로 환불하면 되는데….

또 환불은 못 했다.

송선호는 좌절해서는 차 핸들에 머리를 박고 자학했다.

‘병신. 나 왜 이렇게 병신이냐. 진짜 누가 이렇게 만들라고 해도 못 만들 병신이다….’

당연히 송선호는 도현에게 반지를 주지 못했다.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다짜고짜 그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좋아한다고 고백도 못 하는 마당에 반지라니. 처음부터 못 할 거라는 건 자명했는데. 누가 그의 커피에 약이라도 탔던 게 아닐까.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저녁도 거르고 창밖의 야경을 보며 한숨만 짓다가 겨우, 진짜 겨우 전화 한 통을 걸었다. 시끄럽다. 결혼식 피로연인가. 대번에 신랑 친구들이 엄청 대시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 왜?]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어제 말이야.”

송선호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어, 왜?]

“무슨 일 있었어?”

아침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물어볼 것 같았는데, 어쩐지 지금은 그냥 말이 나왔다.

[어제? 너 술 마시고 그냥 잤는데?]

“…별일은 없었고?”

[응. 너 무거워서 2층까지 못 데려다주겠어서 그냥 내 방에 재웠어. 카우치에 재울까 했는데 네가 그날 너무 딱해서.]

“…나 실수한 건 없었어?”

[어? 별로… 침대에 눕히니까 내가 있든 말든 훌훌 벗더라, 너? 나 다 봤어. 너 이제 장가는 다 갔다.]

도현이 그렇게 말하자 우습게도, 정말로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남색 벨벳 케이스에 영원한 사랑을 상징하는 다이아몬드.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응? 뭐? 잠깐만, 시끄러워서 잘 안 들려.]

“…….”

가슴이 떨린다. 가슴뿐만 아니라 온몸이 떨린다. 심장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도현 킬스버그… 내가….”

[여기서 뭐 하세요? 다들 기다려요!]

[앗! 하하. 잠깐만요. 간지러워요. 야, 나중에 전화해.]

전화가 끊겼다. 잠깐 동안, 정말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하하….”

또 웃음이 나왔다. 미친놈…. 송선호는 디바이스를 내려놓고 손을 뻗어 반지 케이스를 잡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쓰레기통에다 버렸다.

*

16강, 써드 세븐. 이스트드래곤의 상대는 이번에 드로우 선데이를 처음으로 넘긴 러시아의 하인델토크FC라는 클럽이었다. 처음으로 드로우 선데이를 넘긴 클럽이 16강이라니 아주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다국적 선수들로 이루어진 대부분의 클럽들과 다르게 강인한 중부 러시아 남자로만 구성된 특이한 팀이었다. 보리스 세르게이라는 젊고 잘생긴 감독도 인기가 대단했다.

따라서 다니엘 스톤하츠는 이번 써드 세븐에 출전하지 않았다. 이미 3년 전 이스트드래곤과 계약을 했을 때부터 명시했던 사항이었다. 러시아 하인델토크 출신이 소속된 클럽과의 경기에는 출전하지 않는 것으로 말이다.

[다시 생각해보지, 스톤하츠. 기껏 신태호로 흥행이 올랐는데 여기서 지면 우리가 뭐가 되나. 다시 생각해봐라.]

물론 써드 세븐까지 온 마당에 감독이 다시 생각해볼 수는 없냐고 몇 번이나 말렸지만 다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벤치에 앉아 경기를 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아예 일요일에는 서울로 돌아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도현 씨. 가실까요?”

그리고 도현의 집으로 가 그녀를 데리고 우선 베이징의 고급 쇼핑거리를 다니며 물건을 샀다. 본인의 노력과 상대의 훌륭한 인도(?) 끝에 많이 발전한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거나 도현의 눈치만 보던 그는 이제 없다.

“이거 다니엘 씨한테 잘 어울릴 거 같은데요?”

도현은 베이직한 면바지에 카라가 있는 셔츠를 다니엘에게 대보았다.

“그렇습니까?”

도현은 거기에다가 허리띠, 시계 등을 더 갖다 댔다.

“네. 이거랑… 이거랑. 이거까지 하면… 근데 다니엘 씨는 뭘 입혀도… 와.”

거지 옷을 입혀도 잘생길 남자다. 다니엘은 도현의 물건과 도현이 고른 자신의 물건까지 깔끔하게 계산했다. 이렇게 행복해 보이는 그녀는 처음이었다. 옷이나 신발 같은데 이 정도의 돈을 써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녀가 기뻐하니 됐다고 생각했다.

‘예쁜 여자는 돈이 많이 든다고 했었지….’

다니엘의 아버지가 언젠가 그렇게 말씀하셨던 적이 있었다. 배운 게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인생의 연륜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도현이 골라준 옷을 입고 그녀와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걷는 건 아주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도시를 옮겨 남중국의 바다를 바라보며 저녁을 먹고 와인까지 한잔 했다.

“신기해요…. 다니엘 씨는 다른 선수들이랑 정말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어깨가 넘는 새카만 검은 머리카락,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 아름다운 얼굴. 190이 넘는 훤칠한 키에 탄탄한 몸. 모델이나 연예인이라고 해도 놀라울 정도의 미모를 가진 남자지만 어딘지 모르게 진중하고 분위기가 있어 쉽사리 말을 걸 수 있는 느낌의 남자는 아니다. 우락부락한 소드마스터의 이미지가 강한 TFC 선수들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미모였다. 미르 킹쉴드도 미르 킹쉴드이지만 이런 독보적인 분위기의 남자라 팬에게 인기가 엄청났다.

물론 도현 킬스버그는 그런 다니엘 스톤하츠의 숙맥 같은 부분을 엄청 보아왔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어렵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일단은 조금 귀엽고, 심심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많이 나아졌다. 다니엘도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면서 대꾸했다.

“그렇습니까.”

“네. 미르 때문에 병원에 자주 가다 보니까 몇 명 안면이 생겼거든요. 전부 다 하나같이 미르 같았어요.”

도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들이 어떤 느낌일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다니엘이 미소를 지었다.

“미르 킹쉴드가 그렇게 유별난 건 아닙니다.”

다니엘이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살짝 괸 채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다니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럼…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다니엘 씨에 대해…. 다니엘 씨는 인터뷰가 하나도 없어서 더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더라구요. 다니엘 씨에 대해 개인적으로도 궁금한 것도 많고.”

도현이 그렇게 말했다. 다니엘은 약간 당황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도현과 데이트를 하기 시작하면서 정독했던 수많은 연애조언 도서에서 나온 설명에 따르자면 여자가 자신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은 아주 좋은 신호였다.

‘나에 대해 뭐가 궁금하신 걸까? 기쁘다. 뭐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가슴이 기분 좋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를 이렇게 만드는 것은 정말 도현뿐이었다. 그의 뇌가 온갖 신경 물질을 뿌리며 흥분하고 있었다.

‘이름은 어머니가 지어주심. 취미는 독서, 마법 연구. 요즘 읽고 있는 책은 <여자에게 좋은 남자>. 감명 깊었던 점은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 여자를 속이는 남자야말로 여자에게 가장 해롭다. 남자들은 자신이 가진, 여자에게 가장 치명적인 부분부터 숨기기 때문이다.> 저는 도현 씨에게 언제나 충실하고 진실된 남자가 되겠습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성실한 남자였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각에 일어나 같은 시각에 출근을 하고 정해진 것만 먹고 남은 시간엔 수련과 봉사에 전념했다. 전역하고 난 이후로 그 외로 시간을 내서 이렇게 보내는 것은 오직 도현과 관련된 일뿐이었다.

‘도현 씨의 일도, 불러주신다면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번보다 훨씬 더 심한 걸(?) 시키더라도 기꺼이 하겠습니다. 거꾸로 매달아 온몸의 구멍을 틀어막아도 괜찮습니다…!’

그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물었다.

“뭐가 궁금하십니까?”

“아, 말씀해주시는 거예요? 싫어하실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른 사람이 싫을 뿐이다. 도현이라면 뭐든지 좋았다. 다니엘은 도현의 아름다운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기다렸다.

“TFC에는 어떻게 들어오시게 된 거예요?”

“러시아에 있을 때 스카우트됐습니다.”

“아… 다니엘 씨는 보통 대인전만 참전하셨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네. 몬스터는 해상으로 이동할 때 한 번 본 게 답니다.”

“몇 년이나 계셨어요?”

“17살부터 21살 때까지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래 있었던 건 아닙니다.”

“참전했던 곳이… 3차 중러 전쟁이랑, 중인 전쟁, 중월 전쟁인가요?”

근데 질문이 어쩐지 상당히 준비해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TFC 선수를 인터뷰하는 기자와 비슷한 느낌이 났다. 다니엘은 그녀가 좀 더 개인적이고 은밀(?)한 질문을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쓰리사이즈 및 다른 사이즈(?)도 전부 오픈할 마음이 충분했다.

“네, 중국군 용병이었습니다.”

“다니엘 씨도 빚 때문에 참전하신 건가요?”

“아뇨… 아닙니다.”

“그럼요?”

그러자 도현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다니엘은 단 한 번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다짐한 대로 그녀에게 충실하고 싶었다.

“13살 때 제가 마법의 힘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마법을 대부분 할 수 있게 되었을 쯤에는 제가 가진 힘을 시험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항상 궁금했거든요.”

“아, 다니엘 씨가 영구보존 마법 쪽으로 유명하시다는 말씀은 들었어요. 멀티스크린 부양 마법도 다니엘 씨가 참여한 회사에서 나왔잖아요.”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의 학구적인 이미지는 그런 쪽에서 나온 것일까. 배운 사람은 티가 난다. 원래부터 공부를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영구 보존보다는… 중력 마법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중력이야말로 시공간을 넘어서서 모든 곳에 닿을 수 있는 궁극의 힘이라 다들 말하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을 구성하는 4개의 힘 중에 가장 약하면서도 결국 다른 모든 힘을 붕괴시킬 수 있는 게 바로 중력이니까요.”

“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현은 약간 이해하기 어려워서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다닐 때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과학 교양 프로그램인 <유니버스>도 보곤 했는데. 다시 보면 좀 도움이 될 것 같다. 다니엘은 계속 말을 이었다.

“참전을 했던 이유도 중력 마법을 연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대학을 들어가면 중력 마법을 제대로 배울 때까지 몇 년의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그러기 싫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연습을 할 수 있는 장소를 구하는 건 힘든 데다가 무슨 부작용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저에게 필요한 건 황폐화되어도 상관없는 넓은 장소였습니다. 넓은 장소에 있는 적군에게는 아무리 써도 저한테 돈을 내라고 하지 않더군요.”

다니엘은 그렇게 말하며 우스운지 살짝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별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20살 때 러시아 하인델토크에서 반경 10km가 넘는 대규모 중력 마법을 성공시켰습니다. 엄청 기뻤습니다. 마치… 마치 신의 길에 한 걸음 더 다가선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정말 조용하더군요. 적군은 전부 다 죽어버렸고 제 뒤에 있는 아군들은 살아있어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저를 괴물 보듯이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무뚝뚝한 어조로 그렇게 차분하게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도현을 돌아보았다.

“사실 지금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신태호는 사람을 하나 죽이는 것도 벌벌 떨더군요. 그게 일반적인 사람들이 하는 생각일까요? 제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건 도현 씨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도현의 이름을 언급하자 다니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는 그가 물었다.

“이런 저는… 싫으십니까?”

도현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그의 무뚝뚝하고 아름다운 얼굴에서 초조함이 읽혔다. 그는 이랬다. 도현을 향한 그의 마음은 언제나 손에 잡힐 듯 뻔하게 보이는데 그 외 그의 생각을 읽기란 힘들다. 너무 훤하고 너무 말초적이라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든 미르 킹쉴드도 신기했지만 아마도 모든 것이 복잡하고 깊고 평범한 사람을 초월한 그가 사랑이란 감정 앞에서는 얕아지는 것이 신기했다. 도현은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가 조금 더 궁금해졌다.

“싫다기보단… 흥미롭네요. 다니엘 씨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기쁩니다.”

다니엘은 살짝 귀를 붉히며 와인잔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사람은 얼마나 죽어도 상관없다는 남자가 이러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아니, 사실 다른 사람이 얼마나 죽어도 상관없는 건 다들 마찬가지인가?’

직접 죽이는 것과는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도현은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런… 것보다도 다른 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쓰, 쓰리사이즈라든가….”

그가 망설이다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동시에 소리를 내서 웃고 말았다.

“제 쓰리사이즈가 궁금한 게 아니구요?”

“그, 그것도 궁금합니다…! 아, 아니! 당연히 궁금합니다만… 저에 대해 궁금하시다고 하셨으니까…. 그게… 이, 일하실 때 혹시 필요하실 수도 있으니까…!”

오늘은 제법 능숙하게 데이트를 리드하던 다니엘이었으나 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와르르 무너지는 안타까운 수비력을 보였다. 도현이 웃으면서 살짝 턱을 괴고 그를 보았다.

“서로 재볼까요?”

“그, 그런….”

“제대로 재려면 좀 벗어야 할까요? 어때요?”

“그, 그런…!”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숙맥 같은 다니엘을 희롱하며 즐겼다.

*

[솔직히 우리 팀입니다만 저도 웨스트이글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 줄은 짐작도 못 했습니다. 비기닝부터 너무 악조건이라….]

[저도 그랬습니다. 비기닝 포틴 때 이스트호크뿐만 아니라 써드 때 레드폭스는 어땠습니까. 그 뒤로도 쭉 그랬죠. 어떻게 대진운이 이렇게까지 안 좋죠? 경기 중계하면서 욕하고 벌금 낸 걸로 차라리 선수들한테 밥 한 끼라도 사고 싶습니다.]

세 중계위원 중 한 중계위원은 이번 엘 드라카에서 방송에 부적절한 언행을 하여 무려 37번이나 벌금을 냈다. 메인 중계위원인 이민아가 본론으로 다시 이야기를 돌렸다.

[그렇게 악전고투 끝에 드디어 첫 피날레입니다. 그리고 상대는 사상 최초로 2년 연속 피날레에 오른 이스트드래곤….]

그러자 다른 중계위원이 펜으로 스크린을 두드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피날레 진출이 확정된 두 클럽의 로고를 화면의 양쪽에 홀로그램으로 띄운 엘 드라카 중계 중계위원들은 세상 심각한 얼굴로 두 클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피날레를 앞두고 모든 엘 드라카 중계 채널들이 다 이런 상태였다.

[하… 솔직히 말하자면 절대 쉽지 않을 겁니다. 지금까지 전적을 살펴보면 우리 클럽의 평균 경기 시간이 1시간 43분, 이스트드래곤은 48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게 뜻하는 게… 우리 선수들이 이스트드래곤 선수들보다 평균 두 배 이상 소모되었다는 거거든요.]

[그렇습니다. 게다가 우리 쪽 디펜스는 부상으로 병원에서 고생도 많이 했죠. 게다가 세븐즈에 들어오니 미하엘 로드리게스 선수에 대한 견제가 극심해 결국엔 로드리게스 선수도 4급 부상을 연이어 당했습니다.]

[디펜스가 강한 우리 클럽의 디펜스는 소진이 많이 되었고 오펜스가 강한 이스트드래곤의 장점은 거의 소모가 되지 않았다고 봐야 하니 진짜 환장할 노릇입니다.]

중계팀은 처음부터 심각한 얼굴로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웨스트이글 한정 편파중계도 마다하지 않던 중계위원도 일단 걱정부터 깔고 들어갔다. 웨스트이글이 악전고투 끝에 더블세븐, 즉, 피날레에 다다르게 되니 더더욱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지금까지 피날레에 두 번 도달한 클럽은 없었다. 이스트드래곤이 사상 최초다. 웨스트이글에게는 이번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우승 기회일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전반적으로 무난히 승리를 거둬온 이스트드래곤에 비하여 강호 클럽과 대전해온 웨스트이글은 많은 엘 드라카 팬들의 관심을 끌어왔습니다. 실제로도 여론조사에 따르면 웨스트이글의 승리를 바란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우리 팬들은 쉬운 승리자보다는 어렵게 승자를 꺾은 도전자를 좋아하니까요. 작년부터 이스트드래곤이 원체… 그런데 팬들의 바람은 저희가 이기는 것입니다만, 우승자 로터리 상황을 보면 이스트드래곤의 승리에 돈을 건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죠. 웨스트이글이 이기기를 바라지만 이스트드래곤이 이길 거다, 이게 모두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한 중계위원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서 대꾸했다.

[하지만 우리는 레드폭스 전에서도 질 거라고 하고 이겼고 피프쓰 세븐에서도 질 거라고 하고 이겼습니다. 이번 피날레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네, 분명 그럴 겁니다. 그럼 일단 예상 전략부터 살펴볼까요? 주전 구성은 어떻게 될 거라고 보십니까?]

그런 내용이 TV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프쓰 세븐을 끝으로 피날레에 가는 두 클럽에게는 2주 정도의 시간이 주어지게 되었다. 미르 킹쉴드는 4강전을 치르고 한 사흘 정도를 아주 병원을 다 깨부술 정도로 난리를 치고 나서야 아픈 게 좀 사라져 누워 있었다. 이번에는 마도 수술을 받고 Q3까지 다섯 대 맞았기 때문이다.

“내가 봤던 제일 큰 타이탄은 300m짜리였어, 300m. 와… 진짜 산만한 뻘건 타이탄이 걸어오는데 이건 뭐… 어쨌든 팀원들이랑 발목부터 열심히 썰었지.”

이래서 소드마스터는 은근히 화합이 잘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일까. 개인적인 것 같으면서도 잘 뭉친다. 과거나 지금이나 팀워크가 중요한 일을 해서 그런 모양이다. 도현은 병실 침대의 식탁을 세워놓고 그 위에 스크린을 띄운 채 미르를 마주 보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모든 TFC 선수를 대표하여 미르 킹쉴드라는 남자에 대한 성격 및 사고 분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캐릭터 구상의 일환이다. 미르의 말을 녹음하고 간간이 생각나는 것을 노트에 적어 넣다가 이제 슬슬 그가 몬스터를 잡고 돌아다닌 얘기는 충분히 들은 것 같아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음, 그럼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셨어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넣은 질문이었다. 미르 킹쉴드나 여타 다른 선수의 멘탈을 보았을 때 빚으로 팔려가게 한 부모 욕을 오지게 하면서 신나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

그런데 의외로 미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도현도 그런 그의 표정에 약간 놀랐다. 미르는 금세 표정을 바꾸더니 미간을 살짝 좁히며 눈썹을 긁적거렸다.

“음… 내 부모… 그냥… 어….”

미르 킹쉴드라는 남자가 이렇게 당황하는 건 처음 봤다. 이 남자도 평범한 사람이었구나. 도현도 당황했다.

“아뇨. 아니에요. 대답 안 해도 돼요. 불편한 질문해서 미안해요.”

그리고는 분위기가 약간 어색해졌다. 도현은 당연히 좀 미안해졌다. 도현은 자리에서 가만히 일어나 미르에게 다가갔다.

“미안해요.”

“아니, 아니야. 별거 아닌데. 뭐랄까… 너무 오랜만에 들어서.”

미르는 정말 세상에 처음 부모라는 단어를 들은 사람처럼 약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도현이 물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뭐 사올게요.”

“응… 먹을 건 다.”

그 뒤 미르는 뭔가 생각에 잠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도현은 진짜 괜히 얘기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왔더니 다른 선수들과 얘기를 하고 있는 미하엘 로드리게스를 발견했다. 그도 도현을 발견했다.

“요! 뉴걸~.”

그는 도현을 그런 식으로 불렀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남자는 널릴 데로 널렸고 어차피 뭔가 말한다고 그 상대나 세상 남자들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우습게도 그 중에도 급이 있어 웨스트이글 소속 소드마스터 선수들 중엔 미하엘 로드리게스가 그나마 제일 똑똑하다. 도현은 그에게 물었다.

“로드리게스 씨 부모님이 어땠냐고 물어보면 로드리게스 씨는 뭐라고 하실 거예요?”

“응? 완전 개쌍놈인데?”

그는 두 번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식으로 즉답했다. 미하엘은 붕대와 테이프를 칭칭 감은 몸으로 고급 휠체어에 누워 시원한 음료를 한 번 빨았다. 도현은 약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그녀는 사실 미르한테도 이런 반응을 기대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와의 인터뷰에서 그에 대해 많이 파악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사고회로를 가지기도 했고…. 도현은 그에게 다시 물었다.

“다른 선수들한테 물어도 비슷하게 대답할까요?”

그랬더니만 또 미하엘은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뭔 소리야. 걔들은 나처럼 점잖게 말 안 해. 입에 거품 물고 욕할걸?”

“으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라는 건가. 미르 킹쉴드. 오만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살아가던 남자가 간혹 너무 어린애같이 굴길래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얘기를 좀 듣다 보니 남자가 이렇게 단순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또 뭔가가 튀어나온다. 부모와 사이가 좋을 리는 당연히 없겠지만, 뭔가 더 있는 걸까? 뭘까? 도현은 그 뒤로 계속 상태가 이상한 미르를 상대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찝찝한 기분이었다.

“선생님?”

“아, 네. 다녀오셨어요.”

로웰은 미친 듯이 작업 중이었다. 이번 엘 드라카 피날레에 무려 웨스트이글이 진출하다 보니 그녀는 한창 진성 덕후 동료들과 함께 피날레를 대비하여 온갖 전략과 선수진 파악 및 승패 예상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덕분에 일을 해도 항상 촉박하게 했다. 물론 주 2회 만화 연재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긴 하다만.

“어시스턴트는 구했어?”

도현은 가방을 카우치에 내려두며 거기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는 송선호의 멀티스크린을 슬쩍 훔쳐보았다. 이제 인세도 제법 들어오겠다, 로웰을 위한 전문 어시스턴트를 뽑아야 했다. 비축분이 날아가면 어시스턴트 없이 주 2회 연재는 정말 무리였다. 송선호는 돌아온 도현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어시스턴트 지원 목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골라놨어. 오늘 중으로 로웰 선생님이 선택해주시면 두 명 뽑으려고.”

“잘됐다. 이제 선생님도 한숨 놓으시겠다.”

엘 드라카도 곧 끝날 것이다. 도현은 집에 들어왔는데도 바로 씻고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보통은 그러는 게 그녀의 습관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곧 초인종이 울렸다. 도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현관으로 갔다. 곧 다니엘 스톤하츠가 들어왔다. 송선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놈만 만나라….’

금방 미르 킹쉴드의 병문안을 갔다 왔다는 걸 알고 있는 송선호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더이상 신경 쓰지 말자.

“어머, 웬 꽃이에요.”

다니엘은 품에 가득 차는 예쁜 꽃다발을 사 왔다. 향기가 그윽한 백합이었다. 하얀색 백합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환해지는 싱그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꽃 같은 남자가 주는 싱그러운 꽃다발.

“오다가 보여서 샀습니다. 이건 도쿄에서 유명한 디저트 집에서 사 왔습니다.”

다니엘은 선물 상자까지 하나 더 건네며 그렇게 말했다. 그에게서 약간의 기대와 설렘이 느껴졌다. 그녀가 기뻐하기를 바라며 가져온 것이다. 도현은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 여기 진짜 맛있죠.”

“신제품입니다.”

“와!”

도현은 기뻐했다.

“진짜 예뻐요. 고마워요.”

이제 제법 도현의 집에 들르는 게 익숙해진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도현이 기뻐하니 다니엘도 작게 미소를 지었다. 예의를 지키면서도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남자는 원래 좀 귀여운 법이다. 이제 제법 데이트에 능숙한 남자를 흉내 내려 하지만 곧잘 숙맥인 걸 티 내는 것도 귀엽다. 도현은 가볍게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입술이 너무나 부드러웠다.

다니엘은 깜짝 놀랐지만 엄청 기뻤다. 그간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다니엘도 가볍게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도현이 웃었다. 다니엘은 진짜 가슴이 뭉게뭉게 부풀며 기분이 끝내주게 좋아지는 걸 느꼈다. 그는 속으로 외쳤다.

‘도현 씨, 사랑합니다…! 너무너무 좋습니다! 정말 사랑합니다!’

하아, 참자. 참자. 뜬금없는 고백만큼 여자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이 없다. 전처럼 그러지 말자. 고백이야말로 타이밍의 싸움이다. 아무리 좋아도, 아무리 말하고 싶어도, 아무리 빨리 대답을 듣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안 그러면 또 차인다.

그렇게 그는 그의 입장에선 상당히 헤벌레 풀린 얼굴로 졸졸 도현을 따라 들어왔다. 송선호는 그걸 보았지만 곧 외면했다.

‘관둘 거니까. 관두자. 관둘 거야.’

송선호는 그렇게 되뇌었다. 다니엘 스톤하츠와 만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예전의 그가 상상했던, 그런 연애와 비슷했다. 서로에 대해 호감을 가진 남녀가 서서히 상대에 대해 알아가고 그래서 서로를 좋아하게 되고, 그리고 사귀게 되는… 그녀도 저런 식의 만남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라, 송선호. 이제 다 지나간 일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녀와 다시 만난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 다시 마음을 인정하고 그녀에게 잘해주고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다시금 노력하겠다고 생각했던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아무리 다양한 전략과 루트를 생각해봐도 결국엔 안 될 거라는 결론만 나왔다. 게다가 이미 그녀에겐 저렇게 만나는 남자도 있었다. 그와 경쟁해서 그녀를 차지한다? 자존심도 상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걸 차치하더라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애초부터 그녀를 스쳐 가는 고만고만한 남자친구 중 하나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마음에 드는 여자였다면 모든 걸 다 불사를 수 있었을까? 마음에 안 드는 것도 많고 짜증도 나고 싫다는 생각이 드는데도 왜 이러는지 송선호도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에 대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수록 그런 스스로가 싫어졌다.

‘그때는 어렸지. 그러니까 순진하게… 그렇게 오래….’

송선호는 진지했다. 담당자를 바꾸고 다시는 그녀의 일에 대해 일체 관심도 가지지 않으며,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한 상태였다. 일이 아니라면 다시 볼일도 없을 것이다. 송선호는 거기서 할 일만 빨리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그리고 사내 인트라넷에 공지를 올렸다. 작품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의 편집장을 뽑는다는 것이었다. 그 뒤 사무실에 가서 앉아 마켓 리서치 보고서를 업데이트하고 있는데 누가 그의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 회사에 들어온 지 3년 차 정도 된 젊은 남자 직원이었다.

“송 편집장님.”

“아, 어. 웬일이야?”

송선호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며 그를 보았다. 키가 크고 개구진 소년 같은 느낌이 나는 훈남으로 KP노벨에서 많은 작가들을 관리하는 편집장 중 하나인 리오 정이었다.

“킬스버그 작가님이랑 로웰 리 선생님 담당 뽑으신다면서요?”

“어. 하려고?”

“네. 저 해도 돼요?”

“지금도 담당 많지 않아?”

“제가 담당하던 작가님 한 분이 당분간 작품 활동을 좀 쉬고 싶다고 해서요. 시간 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괜찮겠지.”

그러자 리오 정이 ‘아싸!’하며 주먹을 쥐었다.

“아, 킬스버그 작가님 진짜 예쁘더라구요. 완전 제 스타일.”

예쁘면 다 자기 스타일이지. 송선호는 평이하게 대꾸했다.

“일해라, 일. 쓸데없는 사감 가지지 말고.”

“네~ 그럼 작가님들께는 이미 말씀드린 거예요?”

“아니…. 아직.”

“그럼 천천히 말씀드리고 알려주세요.”

“그래.”

그가 나가고 송선호는 잠깐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미간을 손으로 주물렀다. 이걸로 끝이다. 이제 그쪽으로는 자다가도 안 돌아누울 거다. 송선호는 디바이스를 들고 전화를 걸었다.

[응, 송선호. 뭐 두고 갔어?]

“아니….”

그리고 송선호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송선호? 야? 듣고 있어? 뭐야?]

“…아무것도 아니야. 글 써.”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씨발.

*

[드디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게헨-세나에서 2127 엘 드라카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 왔습니다. 웨스트이글 대 이스트드래곤. 이스트드래곤 대 웨스트이글!]

어차피 드로우 선데이를 지나온 클럽은 전부 무시무시한 강호다. 더 이상 누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관중은 누가 승리하든 열광했다. 피날레. 7만 명의 관중이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5! 4! 3! 2!”

그들은 카운트다운을 하기 시작했다. 경기장의 하늘에 뜬 거대한 홀로그램이 0을 가리키자 쾅! 하고 포워드끼리 부딪치는 크러시가 일어났다. 메트로서울의 웨스트이글과 도쿄의 이스트드래곤이 드디어 결승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웨스트이글! 날아라, 웨스트이글!”

경기는 추첨에 의해 메트로서울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번 엘 드라카에서 선수진이 많이 소진된 웨스트이글의 입장에서는 이스트드래곤에 비하여 이점이라 할 수 있겠다. 홈경기와 원정경기는 기세부터가 다르다.

끊임없이 움직인다.

접근하는 놈은 막는다.

잡으면 아웃시킨다.

미르 킹쉴드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은 그것밖에 없었다.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이다. 모든 걸 불태워도 상관없다. 관중의 함성과 중계진의 시끄러운 중계도 피안의 저편이었다. 오로지 동물적인 감각만이 경기장 내의 모든 이를 느끼게 해주었다. 잡히면 전부 죽여 버릴 것이다.

‘이기는 건 우리다.’

미르는 온몸에서 최대한의 오라를 결집시켜 그의 왼편으로 달리는 상대편 미드필더에게 날리고 그를 잡기 위해 뛰었다.

“킹쉴드!!!!”

아웃시키지는 못했지만 상대편 뒤쪽의 쉴드에 날려서 처박고 웨스트이글의 오펜스가 그에게 공격 마법을 맞추었다. 연달아 타격스코어가 뜨고 상대 선수는 겨우 아웃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사이 웨스트이글의 미드필더 준 필립이 상대편 오펜스의 얼음 마법에 맞아 아웃되었다.

[마력리미트 5만을 정확히 지킨 이스트드래곤 다니엘 스톤하츠의 아이스 애로우가 정확하게 우리 클럽 미드필더 준 필립을 맞춥니다! 빨리 스톤하츠부터 잡아야 하는데요!!]

[양 팀 다 서로의 디펜스만 소모할 뿐, 본진에는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으윽…!!”

중계진이 뭐라고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준 필립이 동상을 입고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며 쓰러졌다. 미르는 상대편 오펜스를 돌아보았다.

“씨팔새끼가….”

그는 욕지거리를 하고 다시 다른 디펜스를 막았다. 몇 번의 접근전이 벌어졌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소드오라를 최대 출력으로 뿜고 있기 때문에 심한 타격을 받아도 스코어는 많이 올라가지 않았다. 다만 시간을 끌면 끌수록 체력 소진이 극심해질 것이다.

요즘 엘 드라카에서는 미드필드 진의 다각적 운용으로 경기를 빠르게 결판 짓는 방식의 전략이 유행하고 있었지만 TFC의 기본은 오펜스와 디펜스였다. 오펜스가 공격을 하고 디펜스는 막는다. 누가 빨리 상대편 오펜스를 잡느냐가 경기 전체의 승패를 가른다. 결국 오펜스가 전체 경기의 흐름을 관장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천재 마도사가 있는 이스트드래곤은 상대하기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클럽이었다. 더군다나 디펜스가 많이 소진된 피날레에서는 오펜스의 공격력이 승패를 크게 좌우하는 법이다.

[그럴수록 하나씩 잡는다.]

스튜어트 감독은 전략을 그렇게 잡았다. 초반부터 전체적인 진영을 바짝 전진시키고 미드필드를 전부 제거한다. 따라서 원거리 공격을 많이 맞았지만 소드오라를 아끼지 않고 방어를 하여 순식간에 이스트드래곤의 미드필더 2명과 포워드 1명을 아웃시킨 웨스트이글이었다. 홈구장 게헨-세나는 지금 열광의 도가니다. 남은 미드필더는 그 유명한 신태호와 이브게니 할.

웨스트이글의 포워드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 한 명의 미드필더가 가세했다. 그래서 다른 쪽으로 달리는가 싶다가 곧바로 이브게니 할을 노렸다. 미르 킹쉴드가 그의 복부에 크게 한 방 먹이고 뒤로 돌아 그의 양 겨드랑이를 잡았다. 그리고 레프트 포워드가 오라의 칼로 그의 복부를 베었다. 아웃이었다.

“신태호!! 신태호!!!!”

이제 남은 상대편 미드필더는 신태호뿐. 웨스트이글은 포워드 2명, 미드필드 3명, 오펜스가 2명이 남았고 이스트드래곤은 포워드 2명, 미드필드 1명, 오펜스가 2명이 남은 상황이다. 미드필더가 없으면 상대편 오펜스를 잡기 힘들다. 관중들이 신태호의 이름을 광기 어린 목소리로 불렀다. 웨스트이글의 연고 도시 메트로서울, 홈팬은 그의 죽음을 원했다.

[네, 갑니다. 전체 진영을 또 전진시키는 웨스트이글. 가깝습니다. 아주 가깝습니다. 웨스트이글 오펜스가 이스트드래곤의 센터 포워드를 집중 사격합니다.]

[우리 팀, 오늘 아주 신중합니다. 포워드 하나, 미드필더 하나씩 착실하게 제거해나갑니다. 섣부른 중앙 침투로 미드필드진을 소진하지 않습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아! 움직입니다! 미르 킹쉴드와 제수스 강이 상대편 레프트 포워드를 잡는 사이 우리 팀 미드필드가 신태호를 노립니다!!]

[신태호!! 신태호는 데뷔 이후 단 한 번도 경기에서 아웃된 적이 없는 선수입니다!]

재빠른 미드필더들이 발이 묶인 상대편 디펜스들을 지나쳐 가운데서 오펜스를 지키고 있는 소년에게 뛰었다. 다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 같은 눈빛이었다. 신태호가 선수를 쳤다. 그는 웨스트이글 3명의 미드필더 중 한 명에게 빠르게 다가가 그에게 먼저 접근전을 걸었다. 그리고 나머지 미드필드 중 한 명은 그쪽에 가세하기 위해 달렸고 미하엘 로드리게스는 곧바로 오펜스에게 돌진했다. 오펜스의 공격이 자신에게로 집중되자 미하엘 로드리게스는 땅이 거의 1미터는 파질 정도로 소드오라를 방출하며 전방으로 도약했다. 이스트드래곤 오펜스는 순간 그를 놓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미하엘은 도약해서 오히려 그들보다 뒤쪽인 관중석 쉴드로 향한 것이다.

[아!! 로드리게스!! 이스트드래곤 오펜스의 뒤를 노리는 겁니까!]

하지만 한 명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공격 마법을 너무 맞아 아웃을 당할 것 같으니 다시 뒤로 훌쩍 물러났다.

[아깝습니다! 이때 이스트드래곤 레프트 포워드 아웃!!! 아웃!! 킹쉴드!! 이스트드래곤 센터 포워드 치엔이 루카스가 아닌 우리 팀 미드필더 쪽으로 뜁니다! 신태호를 아웃시키겠다는 겁니다!!]

웨스트이글 미드필더 둘의 공격을 받고 있던 신태호 쪽으로 미르 킹쉴드가 쇄도했다. 그 작고 왜소한 소년은 자기 덩치의 두세 배는 될 법한 웨스트이글 두 미드필더의 공격을 무쌍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공중의 홀로그램과 각종 대형 스크린에서 비치는 그의 모습엔 귀기가 흐를 정도였다. 두 명에게 너무 둘러싸이면 거리를 벌렸다가 한 명을 검기로 견제하고 다른 선수에게 돌진해서 공격한다. 이게 말이 쉽지, 엄청난 기동력과 파워가 아니라면 자신보다 리치가 긴 두 사람을 이렇게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소드오라가 맞붙으며 끼이이잉 하고 불길한 소리가 울리며 여기저기가 움푹움푹 패였다.

[으아…! 우리 팀 미드필더!! 13번 파샤 신이 아웃되었습니다!! 신태호 선수의 제대로 된 접근전은 처음 보는데…!! 장난 아니군요!!]

[저런 건 처음 봅니다! 놀랍습니다!! 킹쉴드! 파샤 신의 뒤를 받아 신태호를 견제합니다!]

중계진은 상대 팀이라는 것도 잊고 그렇게 감탄하고 말았다. 강력한 중장거리 공격기를 가진 미드필더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상대편 선수들을 다운시켰을 때도 워낙에 순식간이라 접근전이라고 부르기도 힘들 정도였는데 저 작은 몸에서 강력한 소드오라와 그에 따른 엄청난 근력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주먹과 다리, 몸이 부딪치고 오라의 검과 쉴드가 스칠 때마다 굉음이 퍼졌다. 미하엘 로드리게스는 상대편 오펜스가 신태호를 엄호하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치고 빠지고 있었다. 신태호의 기량을 생각해보자면 절대 그에게 뒤를 내어준 채로는 이스트드래곤의 오펜스를 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붉은색의 점수가 신태호의 전투복 위에 처음으로 떴다.

[아! 드디어 신태호 선수의 전투복에 타격 스코어가 뜹니다!]

[네, 그렇…!!! 와! 저게 뭡니까!]

중계진이 말을 멈추었다.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신태호와 접근전을 벌이던 두 명의 소드마스터가 발을 땅바닥에 긁으며 확 밀려났다. 신태호를 중심으로 한 소드오라가 그들을 밀어낸 것이다. 이런 건 처음 봤다.

“씨발… 이 새끼가….”

미르는 어이가 없었다. 분명히 먹혔다 싶은 공격도 타격이 안 떴다. 전에 봤던 그 심약해 보이던 소년과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년이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의 몸에는 눈에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강력한 황금색 소드오라가 넘실거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있었다. 전에 미하엘이 한 것처럼 미르는 한 손에 소드오라로 검을 구체화시켰다. 타이탄의 피부도 한 방에 자를 수 있는 검이었다. 다른 미드필더도 똑같이 그렇게 했다. 죽이겠다는 각오가 아니라면 상대를 쓰러뜨릴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C 패턴.’

한 사람을 두 명이 상대할 때 쓰는 연계 전술 중 하나를 쓰기로 했다. 중거리 견제 공격에 미드필더가 물러나는 척하면서 덩치와 맷집이 좋은 미르 킹쉴드가 신태호와 근접전을 벌이고 그가 상대의 팔다리 중 하나를 묶으면 곧바로 나머지 하나가 묶인 팔다리를 잘라버리는 것이다.

‘마도 수술 받겠네, 꼬맹이!’

미르는 신태호의 중거리 견제를 소드오라로 막고 그에게 더 접근했다. 동료 미드필더는 옆으로 훌쩍 뛰어 피했다. 그리고 미르 킹쉴드는 온 힘을 다해 그와 격투를 벌였다. 대인 격투는 TFC 경험이 많은 미르가 더 뛰어난 편인데도 소드오라로 전신을 감싼 쉴드가 워낙에 강해서 때려도 공격이 잘 안 먹혔다. 하지만 그가 소드오라로 강화된 근육의 힘으로 미르를 타격하면 전투복을 입고도 고통이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지만 곧 미르는 그의 주먹을 옆으로 흘릴 때 그의 팔을 잡을 수 있었다.

[잡는 겁니까! 신태호를 잡는 겁니까!!!]

“짐!!”

미르가 미드필더를 불렀다. 물론 그는 부르기도 전에 이미 오라의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신태호의 목 주변에 손가락만 한 황금빛 금속이 생성되었다. 개수는 열 개 정도. 물론 금속이 아니었다. 소드오라가 압축된 석영기둥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미르 킹쉴드는 영원으로 늘어난 것만 같은 시간 속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초감각이 극대화된 것이다.

‘뭐지, 이건?’

미르의 초감각, 초능력은 인간은 물론이고 동물의 것도 넘어선 지 오래였다. 밤에도 집중하면 적외선이나 자외선도 볼 수 있을 정도다. 같은 팀 미드필더가 검을 휘두르는 것은 너무나 느려 보이고 그 와중에 신태호의 목 주변을 회전하는 금속은 속도가 빨라 보였다. 미르는 알 수 있었다.

죽는다.

본능적으로 최대 출력의 소드오라로 전방을 방어했다. 하지만 너무 근거리라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영원으로 늘어난 초감각의 시간이 끝나고 오라의 금속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쾅!! 콰광!! 쾅!!

삐이이이익!!

뭔가가 거대한 벽을 때리는 것 같은 울림이 경기장에 퍼졌다. 그리고 경기장 내에 빨간색 불빛이 가득 차며 커다란 휘슬 소리가 울렸다.

“…….”

미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목 바로 앞에 자신의 소드오라와, 그리고 분명히 웨스트이글의 오펜스가 쳤을 쉴드에 의해 정지한 황금색 조각이 있었다. 작년 써드포틴, 전 세계에 신태호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던 그 무시무시한 장거리 공격기, 골드 스플래시였다. 미르 킹쉴드뿐만 아니라 전 웨스트이글 멤버를 노린 광역기였다.

[…웨스트이글… 오펜스… 소강재 아웃입니다. 등 번호 2번 소강재 아웃. 마력리미트 오버로 아웃입니다. 리미트 오버는… 35만.]

메인 중계위원 이민아의 목소리가 경기장을 조용히 울렸다. 소강재가 마력 조절은 잘 못 해도 명중률과 초감각은 얼치기 소드마스터 급이라는 소리를 듣는 마도사였다. 미르의 눈이 순간 코치진을 향했다. 스튜어트 감독은 팔짱을 낀 채로 소강재에게 차분히 손짓을 하고 있었다. 소강재의 실수가 아니다. 미리 합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대(對) 신태호 전략으로 오펜스 하나를 희생하기로 한 것이다. 그것도 웨스트이글 오펜스 주전력인 선수다.

‘잡자…!’

누가 어떻게 아웃이 되어도 경기는 안 끝난다. 미르는 소강재의 쉴드 마법이 사라지는 타이밍을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빗겨 골드 스플래시를 피하며 곧바로 신태호의 턱밑을 강하게 올려쳤다. 그러자 잠깐 정신을 빼놓고 있던 신태호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헉, 하고 정신 공백을 일으켰다. 그 사이 미르 킹쉴드는 그를 힘껏 두드려 팼다. 소드오라를 무기화하지 않고 상대의 소드오라를 최대한 침식하는 방향으로 바꾸었다. 오로지 완력으로 그를 팼다. 그의 헬멧까지 날려버리자 신태호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기 시작했다.

[어… 어어… 어어어어!!]

“킹쉴드! 킹쉴드! 킹쉴드!!”

관중과 중계진의 열기가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시, 신태호 아웃!!]

[신태호 아웃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게헨-세나가 떠나가라 환성이 울렸다. 미르는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신태호를 툭 놓았다. 그리고 다시 달렸다. 끊임없이 움직인다. 접근하는 놈은 막는다. 잡으면 아웃시킨다. 이긴다.

‘이긴다. 이긴다. 우리가 이긴다. 이긴다.’

다시 기세를 잡은 웨스트이글 선수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죽을 고비까지 넘겼고 그 상대는 아웃되었으니 의욕이 전에 없을 정도였다. 모두들 달렸다.

그렇게 절멸의 고비와 분전에 분전을 거듭한 끝에

결국 웨스트이글은 이스트드래곤에게 석패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오펜스를 잃은 것이 큰 패인이었다.

[먼저 오펜스를 잡힌 팀이 패한다는 엘 드라카의 법칙이 또 적용되었습니다. 초반부터 타격을 많이 받은데다가 신태호 접근전으로 아슬아슬했던 미르 킹쉴드, 짐 아놀드 선수가 바로 잡히면서 기세가 반전되고 이미 오펜스를 하나 잃은 우리 웨스트이글 클럽은 안타깝게도 2127년 엘 드라카 준우승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으윽… 흑… 으윽…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진짜… 우리 선수들… 비기닝 때부터 온갖 고생 다 해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씨팔… 이스트드래곤이 이번 엘 드라카에서 한 게 뭡니까. 약팀 만나서 슬렁슬렁 이기면서 올라왔는데…. 씨발… 이건 너무 불공평합니다…. 흑… 씨바알….]

[과감한 전술로 지금까지 웨스트이글을 이끈 스튜어트 감독… 신태호 대비 전술로 우리 팀 오펜스 주축인 소강재를 버리는 강수까지 두고 신태호를 아웃시켰으나 역시 연전 고투로 소진된 우리 팀 디펜스에 비하여 건재한 이스트드래곤의 디펜스, 그리고 이스트드래곤의 강력한 오펜스 주력 선수 다니엘 스톤하츠… 결국엔 많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결과가 나오고 말았습니다.]

[이번 엘 드라카의 주인공은 우리 웨스트이글입니다. 흐윽. 우리가 다 했다구요.]

[메트로서울 웨스트이글 클럽. 작년 4강에 이어 이번 2127년 엘 드라카 준우승. 분명 대단하고 값진 경기였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선수들. 코치진, 감독들. 많은 여러분들이 아쉬워하시는 걸 압니다만 우리 선수들 격려해주도록 합시다. 내년도 있고 내후년도 있습니다, 여러분.]

홈구장에서 졌으니 완전 초상집 분위기였다. 웨스트칙은 다들 눈물 콧물 쏟으면서 울거나 상대 클럽을 욕하면서 흥분하고 있었다.

[씨팔… 개새끼들… 내가 진짜 이스트드래곤 홈구장 가서 똥 싼다, 두 번 싼다. 흑… 씨팔놈들….]

[2127년 엘 드라카는 사상 최초 2년 연속 우승에 빛나는 이스트드래곤의 승리로 막을 내립니다. 우리 선수들 부상 완쾌하기를 바라며 이번 엘 드라카 경기 방송을 종료하도록 하겠습니다. 메인 중계위원 이민아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청자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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