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MOST PARADISE(2)
결국 도현 팀이 졌다.
로웰 팀 다섯 명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설마 엉덩이로 이름 쓰기 같은 구질구질한 거 생각하는 사람 있는 거 아니죠?”
회색으로 탈색한 보브컷에 보라색 립스틱을 바른 여자가 미리 경고했다. 검은색 머리에 피부가 가무잡잡한 여자는 고통스러워했다.
“아… 이겨도 문제야. 뭘로 해. 아윽. 뭐가 제일 타격감이 쩔지?”
그들은 아주 깊고 심오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상대 팀의 벌칙을 뭘로 할 것인가.
“선생님… 살살해요. 내일도 있어요.”
도현 킬스버그가 약간 불안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로웰이 동글동글 안경을 빛내며 헹 하고 코웃음을 쳤다.
“제가 오늘만 사는 사람이라는 걸 아직 모르셨군요, 작가님!”
그리고 로웰 팀은 심사숙고 끝에 도현 팀의 벌칙을 정했다. 그들은 승무원을 시켜 강한 펀치를 만들어오게 시켰다. 딱 한 잔이었다. 그걸 보자 맙소사, 하고 도현 팀 중 몇 명이 고개를 저었다. 저건 도현 팀의 미래 결속을 저해하려는 장기 전략임이 틀림없었다. 벌칙이 뭔지 눈치챈 남자들도 환성을 질렀다. 뭔지 모르는 다니엘과 송선호만 어리둥절한 얼굴로 허리를 일으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비키니 벗기기 게임!”
로웰이 ‘예이!’하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뭐?!’
송선호가 헉하고 선베드에서 등을 일으켰다. 아까 발리볼을 할 때 벗겨질 것 같다는 것도 신경 쓰여 죽는 줄 알았는데 지금 누가 누굴 벗기겠다고?!
“아, 진짜 재밌다.”
화끈한 결정이었다. 로웰 팀은 흥분해서 테이블을 세팅했다. 그들은 키득거리며 도현 팀을 보았다. 역시 이기는 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다.
“아! 싫어!!”
“미쳤어?”
도현 팀 멤버들이 반발했다. 회색 머리의 여자, 시즈카가 혀를 내밀었다.
“루저들.”
로웰이 착착 설명했다.
“마지막에 살아남는 사람은 이거 원샷이요. 그리고 비키니 제일 많이 획득한 사람은 상품으로 이거~.”
로웰은 어디선가 최신 한정판 SS 시리즈 디바이스 <넘버 나인>을 꺼내 칵테일 옆에 두었다. 전작에 비하여 무게가 170g이나 가벼웠다. 전체가 투명한 바디에 테두리의 황금이 고급스러운 세련된 디바이스였다. 홈버튼이 무려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어 아주 영롱하고 아름답다. 눈이 돌아가는 아이템이었다.
“와! 선생님, 그거 어디서 구했어요!”
도현마저도 깜짝 놀라서 그렇게 외쳤다. 로웰 리가 ‘에헴’하고 말했다.
“팬 중에 아는 분이 한 개 더 생겼다고 그냥 주시겠다길래 받았습니다. 경품으로 써도 되냐니까 된다고 하시더라구요.”
로웰 리라는 사람의 배포란 도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이런 아이템을 선뜻 경품으로 내놓다니. 그녀는 그저 재밌어서 만면 웃음을 띠고 키득거렸다. 반해 도현 팀의 분위기는 아주 심각해졌다.
“…….”
어마어마한 경품이 등장하자 일심동체로 벌칙에 반발하던 도현 팀 다섯 명 사이로 쌩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게 이간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아까 도현의 비키니를 조정해주었던 허리까지 오는 풍성한 금발을 가진 장신의 승무원, 셀리가 몸을 살살 풀며 말했다.
“가진 것도 많으신 분은 이런 데서 욕심내지 마시죠.”
그녀가 도현에게 그렇게 말했다. 도현도 팔과 어깨를 풀며 대꾸했다.
“나 이제 빚밖에 없어. 알면서.”
“나 어제 디바이스 바다에 떨어뜨린 거 다들 알지?”
그러자 머리를 까까머리로 자른 빨강 머리를 가진 퀸이 자기 얼굴에 잔뜩 있는 피어싱 중 게임이 불리할 만한 것을 제거하며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데 잡히면 바로 뺏긴다.
“밑에 벗기는 것도 인정인가요?”
갈색 단발머리의 서연이 물었다. 로웰 팀은 아주 키득거리면서 너도나도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아, 됐고 빨리 시작이나 합시다.”
탄력 있는 검은 피부의 사라가 몸을 다 풀고 무심하게 말했다. 그렇게 여자들 다섯 사이에 전운이 흘렀다.
“그럼 수영장에 들어가시구요. 다섯 명 최대한 서로 멀리 서세요.”
로웰이 지시했다. 남자들이 휘파람을 불며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로웰 선생님! 저도 벌칙 받고 싶은데요!”
앉아 있던 남자 승무원 중 하나가 그렇게 외치자 로웰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팬티밖에 벗길 게 없어서 재미없어서 안 됩니다.”
“위에도 입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도 볼 게 없어서 안 됨.”
“저 나름 가슴 큰데요!”
그러자 로웰이 다시금 그를 자세히 보았다. 그리고 또 고개를 저었다.
“아직 D컵 되려면 먼 것 같습니다. 분발하십쇼.”
그러는 사이 도현 팀 다섯 명이 자리를 잡았다. 로웰은 라이프가드의 목에 걸린 호루라기를 잡고 다섯 명을 지켜보다가 준비가 다 된 거 같아 휙! 하고 호루라기를 불었다.
“시작!”
“휘익!! 서연아, 사랑해!”
“닥쳐, 이 대머리야!!”
게임이 시작되자 곧바로 검은 피부의 사라는 상대적으로 왜소한 갈색 단발머리의 서연에게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달려갔다. 퀸도 조금 더 가까웠던 서연에게 다가갔다. 순식간에 서연의 비키니 상의는 사라가, 팬티는 퀸이 벗겨버렸다. 남자들이 환호를 하며 휘슬을 불렀다. 퀸에 의해 발목이 잡혀 물에 확 빠졌던 서연은 가슴을 한 팔로 감싸며 황급히 튀어 올라와 물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아, 진짜~!!”
순식간에 탈락이다. 그녀는 분하고 아쉬워서 발을 굴렀다. 저거 갖고 싶었는데!! 퀸과 사라가 벗긴 비키니를 수영장 밖으로 던지자 일찌감치 선베드에서 박차고 일어나 수영장 바로 앞에 달라붙어 구경을 하던 남자들이 그 비키니를 다 챙겼다. 그리고 그들이 서연에게 휘파람을 불고 놀리자 서연이 턱을 치켜들며 흥 하고 그들을 무시했다.
그 사이 도현과 셀리는 아주 치열한 공방 중이었다. 서로의 두 손을 맞붙잡고 어떻게든 상대의 비키니를 강탈하려고 부딪치고 있었다. 도현은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셀리를 뿌리치고 자신이 잡은 그녀의 손목을 확 꺾어서 몸을 돌렸다.
“아! 잠깐만…! 윽!”
그리고 뒤에서 도현이 그녀의 비키니를 확 재껴 올려 벗기자 그녀가 황급히 몸을 낮추고 가슴을 가…릴 줄 알았지만, 그런 건 없고 셀리는 도현의 머리채를 잡았다. 도현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셀리는 오늘 계속 벗겨질 것 같아서 불안했다는 도현의 비키니를 쉽게 갈취했다. 그렇게 수영장 바깥으로 던진 비키니 두 개 중 도현의 것은 우연히도 다니엘 스톤하츠에게 날아갔다. 물론 다니엘 스톤하츠는 이런 데서 마법을 쓰고 그러는 치사한 남자가 아니다.
일찌감치 탈락한 서연을 제외한 남은 사람들은 전부 비키니를 한 점씩 가졌다. 그렇게 도현과 셀리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와중에 퀸과 사라도 그들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아… 잠깐만… 잠깐! 잠깐만!”
도현과 셀리가 깜짝 놀라서 그들을 보았다. 둘이 먼저 안 붙을 생각인가 보다. 누가 봐도 퀸과 사라가 도현 팀 다섯 명 중에서 제일 피지컬이 쩔었다. 사라는 오자마자 도현의 무릎 밑을 자기 다리로 걸어 한 방에 넘어뜨리고 그녀를 물속에 거꾸로 처박아 팬티를 벗겨냈다. 물론 셀리도 비슷한 걸 당했다. 전투력의 급이 달랐다.
도현은 그렇게 물을 확 먹고는 천천히 물 밑에서 올라와서 얼굴만 물 밖으로 빼선 사라를 노려보았다.
“내가 운동한다, 진짜….”
물론 사라는 그런 그녀를 비웃었다. 그녀는 바깥으로 도현의 팬티를 던졌다. 이제 강자만이 남았다.
“…….”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송 편집장님도 할 수 있었으면 했을 겁니다.”
도현의 비키니 세트를 두 손으로 소중히 쥐고 있는 다니엘 스톤하츠를 송선호가 대놓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자 그가 지레 찔려서는 그렇게 변명했다. 송선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꾸했다.
“안 합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진짜 안 합니다.”
“제가 앞으로 두고 볼 겁니다.”
그 사이 남자들이 퀸과 사라의 편으로 나뉘어 응원을 열성적으로 했다.
“퀸! 퀸!!”
“사라 누나!! 안아 줘요!!”
“누구든 이기면 날 가져요!!”
퀸과 사라는 남자들이 뭐라고 지껄이든지 하등 신경 쓰지 않았다. 서로를 보며 손을 잠깐 풀었다. 그렇게 잠시 서로의 파워를 가늠하다가 이내 맞붙었다.
“오오!”
말 그대로 격투전이 일어나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나왔다. 그렇게 몇 분은 아주 팽팽했다. 그러다가 사라가 퀸의 틈을 노려 긴 리치와 큰 손을 이용해 퀸의 뒤통수를 잡고 다리를 걸며 바로 그녀의 머리를 물속에다 처박았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허우적거리며 균형을 잃은 퀸의 비키니 두 장을 사라가 아주 손쉽게 풀어냈다.
“아오, 씨발….”
퀸이 바로 물에서 튀어나와 욕을 했다. 사라는 훗 하고 웃으면서 풀장 밖으로 나와 이리떼처럼 모여 있는 남자들에게 퀸의 비키니를 던져 주었다.
“와아아아!”
로웰 팀은 진심을 다하여 다가오는 승자에게 박수를 쳤다. 쩐다. 강하다. 존경스럽다. 사라가 승리의 미소를 띤 채 상품과 벌주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한 방에 독한 펀치를 원샷하고 상품을 잡자 완전 로웰 팀에서 왁자지껄 웃으며 박수를 쳤다.
“언니! 멋져요!”
“우리 오늘 어떻게 이겼지?”
“킬스버그 님이 오늘 완전 구멍이라.”
로웰 팀은 간간이 상대 팀의 이간질을 계속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이제 도현 팀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남자들에게서 비키니를 돌려받아야 한다는 숙제가 남아 있었다. 남자들이 아주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각자 손에 든 비키니를 휙휙 돌리고 있었다.
알다시피 이 배는 본래 도현 킬스버그의 여행 및 파티용 크루즈였고 남자들이 으스댈 수 있는 기회가 무지막지하게 적은 곳이었다.
“줘!”
서연이 자신의 눈앞에서 그녀의 하얀색 수영복 팬티를 흔들고 있는 남자에게 화를 내며 그렇게 외쳤다. 그녀가 손을 뻗어 낚아채려고 하자 그가 손을 확 물리며 주변 남자들과 킬킬 웃으며 즐겼다.
“주세요, 오빠~ 하고 말해봐.”
“닥쳐! 죽어도 안 해! 못생긴 게!!”
서연이 질색을 하며 외쳤다.
“어허, 그럼 오빠가 이거 안 준다. 어?”
“악! 죽어 버려!!”
그 사이 퀸은 척척 자신의 비키니를 가지고 있는 무리에게로 갔다.
“안 줄 건데~.”
그렇게 남자들이 웃자 퀸이 약간 초점이 흐릿한 특유의 벽안으로 그들을 보면서 흉내를 내었다.
“안 줄 건데~.”
그리곤 코웃음을 쳤다.
“병신 새끼들. 내놔.”
“…….”
그러자 남자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가 약간 갈등을 하는가 하더니 서로 쑥덕거리다가 결국 쫄아서는 조용히 건네주었다. 잘못하면 맞는다, 진짜…. 저쪽의 셀리는 서연과 엇비슷하게 고생하고 있었다.
“…….”
다니엘 스톤하츠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선베드에서 일어났다. 항상 의연하고 감정의 변화가 옅은 그의 눈 밑으로 그늘이 깊게 졌다.
‘가서… 조용히 건네주고… 신사답게….’
그녀를 애원하게 만들 수 있을까?
다른 남자들처럼 저렇게 놀릴 수 있는 것일까. 그녀를 이 손으로, 이 목소리로 부끄럽고 난처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인가. 고작 이런 천 쪼가리 두 장으로…!
‘신사답게…. 그런 짓을 했다간 날 미워하실 거다…. 안 된다…. 절대….’
저번의 컨셉화 포즈를 찍을 때… 그때 다니엘 스톤하츠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조금 밟고 말았다. 한 팔로 가슴을 가리고 다니엘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젖은 알몸의 그녀는… 너무나 예뻤다.
“다니엘 씨….”
그녀가 참 듣기 좋은 목소리로 때마침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감미로웠다. 섹시한 남빛 머리카락이 젖어 햇빛에 빨갛게 된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다. 평소보다 더 요염한 느낌이 난다. 그녀는 실오라기 한 장 걸치지 않고 일렁이는 물속에 몸을 가리고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그런 그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이 구도도 위험했다. 그녀가 아래에서 위로 다니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주기 싫다. 주고 싶다. 주기 싫다. 빨리 주고 싶다. 아니, 주기 싫다. 다니엘은 생각보다 훨씬 극렬한 갈등 속에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앞에 앉았다. 그녀를 좀 더 가까이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다. 한 팔로는 가슴을, 한 팔로는 자신의 허벅지를 감싸 잡으며 아래를 가리고 있는 그녀였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다 보인다.
‘아… 이 여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위험한 게임을 상상해냈단 말인가…!’
남자를 시험에 들게 한다. 다니엘은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도현에게 수영복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위 남자들이 아우성쳤다.
“아! 그러면 안 되죠, 스톤하츠 씨! 킬스버그 님이야말로 엄청 놀려야 한다구요!”
“킬스버그 님 화내면 완전 섹시한데!”
“…!”
누군가의 말에 다니엘이 움찔했다. 번뇌가 깊어진다.
‘줘야 한다. 줘야 한다, 다니엘 스톤하츠. 바보 같은 킹쉴드나 송선호처럼 다 망치지 말자….’
다니엘은 심호흡을 했다. 다니엘이 스스로의 암적인 부분을 이기고 도현에게 바로 손을 내밀자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다니….”
그런데 바로 그때, 누군가가 엄청난 물보라를 튀기며 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다니엘의 손에 있던 도현의 수영복이 사라졌다.
“아, 늦잠 자지 말걸. 완전 재밌었겠다.”
미르 킹쉴드가 젖은 플래티넘 블론드를 넘기며 환하게 웃었다.
*
미르 킹쉴드는 무슨 운동선수 아니랄까 봐 몸을 잽싸게 날려 다니엘의 손에서 수영복을 낚아챈 후 한 바퀴 돌아 멋지게 물속에 착지했다. 덕분에 도현과 다니엘은 엄청난 물세례를 맞아야 했다. 미르가 특유의 핀업보이 같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도현의 비키니 팬티를 손가락에 끼워 빙글빙글 돌렸다.
“이런 거 완전 좋다. 나도 다음에 해야겠다.”
역시 노는 것도 상상력이 필요한 법이다. 술 마시고 약 하고(마리화나 같은 거 안 한다. 여긴 기본이 코카인이다) 난교나 반복하는 미르의 파티는 사실 레퍼토리가 항상 거기서 거기였다.
큰일 났다! 저 망할 난봉꾼이…! 그렇게 당황해서 입을 딱 벌린 다니엘이나 송선호와는 다르게 다른 이들은 입을 다문 채 어쩐지 살짝 깬 얼굴로 미르 킹쉴드를 보고 있었다. 미르가 바로 얼굴 앞에서 자기 팬티를 흔드는데도 도현조차 팬티를 잡으려고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 근무인 라이프가드와 시큐리티가 얼른 달려왔다. 그들은 두 손으로 가슴 앞에 엑스자를 만들거나 고개를 저었다.
“킹쉴드 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나오시죠“
“응? 왜?”
“비키니 벗기기 게임 할 때 남자들은 물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그러자 미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왜? 그럼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일단 빨리 나오시죠. 사람들 기분 나빠 하는 거 안 보이십니까.”
미르가 도현을 돌아보았다.
“어? 기분 나빠?”
“빨리 나가요.”
도현이 인상을 약간 찌푸리며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미르는 살짝 놀란 얼굴로 도현을 보았다. 아니, 여자들이 옷 벗는 거야 다 남자들이랑 놀려고 그러는 거 아닌가? 미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풀장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 사이 서연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남자들의 손에서 자기 팬티를 확 뺏어냈다. 아까부터 줄기차게 서연을 놀리던 남자가 와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 치사하게! 서연아! 오빠 지금 좀 마음 상했다! 애먼 남자 마음에 상처 주고 그러면! 어! 책임져야지!”
“오빠 소리 좀 그만해! 토 나와!”
“어? 우리 서연이 드디어 오빠한테 오빠라고 한 거야? 심쿵.”
서연은 수영장 벽에 붙어서 얼른 비키니 팬티를 입었다. 셀리는 그걸 보고 자신도 남자들의 틈을 노렸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서연은 비키니 상의는 포기하고 가슴을 가린 채 계단으로 가서 풀장 밖에 나갔다.
“와! 진짜 치사! 서연아~ 오빠라고 한 번만 더 해봐. 준다니까?”
“닥쳐, 이 멸치들아!”
그녀는 비치 타월로 몸을 감싸 원피스처럼 만들고는 이제야 마음이 놓인 얼굴로 사라와 퀸, 로웰 팀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언니! 언니! 나도 보여줘!”
SS 시리즈 <넘버 나인> 한정판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다들 그거 만진다고 정신이 없었다.
“제발 좀 내놔라. 어?”
셀리는 이제 완전히 지쳐서는 수영장 벽에 붙어 몸을 가리고 자신을 둘러싸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들에게 애원했다. 그녀는 대단히 글래머한 금발의 미녀였다. 그런 여자가 알몸에다가 이런 식으로 애원을 해오는 게 얼마나 좋은가. 꿈 같은 상황이다. 남자들은 상기되고 흥분해서는 그녀의 얼굴 근처에 비키니를 흔들며 놀렸다. 셀리가 지친 얼굴로 손을 뻗어 보았지만 그들은 돌려주지 않았다. 셀리가 하으, 하고 좌절해서 수영장 밖 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자 시큐리티로 근무를 서고 있던 남자 하나가 오더니 어떤 놈의 손에 들린 셀리의 비키니 팬티를 뺏어서는 셀리에게 주었다.
“적당히 좀 해라.”
“주드!”
셀리가 얼굴이 확 피어서는 얼른 그걸 잡고 벽에 붙어서 입으며 다른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내가 니들 다 기억해 놓는다.”
셀리도 서연처럼 상의는 포기하고 가슴을 두 팔로 가리고 수영장 밖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다갈색 머리에 제법 잘생긴 주드라는 시큐리티한테 달려가서 까치발을 들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주드, 완전 땡큐.”
“와… 배신자 새끼.”
물론 그는 바로 셀리를 놀리던 이들의 공적이 되었지만, 어쨌든 그는 셀리가 키스를 해줄 줄은 몰랐는지 많이 당황했다. 물론 셀리도 그러고 얼른 다이아몬드가 달린 디바이스를 구경하기 위해 달려갔다.
“아으! 진짜 완전 대박 아이템인데! 아깝다!”
물론 그동안 도현 킬스버그는 미르 킹쉴드를 상대하고 있어야 했다. 다니엘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내놓지, 킹쉴드.”
“앙? 내가 왜?”
미르 킹쉴드는 손가락에 도현의 비키니를 걸고 휙휙 돌리며 불량하게 반응했다.
“사람들 앞에서 꼴사나운 꼴 보이기 싫으면 잠자코 내놓으라고.”
“뭐라는지 모르겠고. 아, 귀찮게 하지 말고 좀 꺼져라. 킬스버그가 나 기다리는 거 안 보이냐.”
미르가 자기 손에 들린 비키니만 보고 있는 도현을 보며 씨익 미소를 날렸다.
“빨리 줘요, 미르.”
“맨입으로?”
“아, 어쩌라구요!”
도현도 슬슬 초조하고 짜증이 나는지 화를 냈다. 누구의 말처럼 정말 섹시했다. 그것도 알몸으로. 다니엘은 그래서 더 화가 났다.
“키스하게 해주면 하나 주고.”
미르가 의기양양한 태도로 그렇게 말했다. 다니엘은 꼭지가 확 도는 걸 느꼈다. 자기가 어떻게 참고 그냥 준 건데 저걸 낼름 들고 가서 그녀를 괴롭히려고 든단 말인가. 게다가 그녀에게 입을 맞추겠다고! 감히! 스스로의 암적인 부분과 맞서 싸우며 쌓인 욕구불만과 어제 일에 대한 앙금, 그에 대한 못마땅함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평소에는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심적 동요가 없는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그는 마지막 경고를 했다.
“후회하지 마라.”
“아, 조잘거리지 말고 꺼….”
그 순간 미르가 휘청하며 무릎을 쿵 꿇었다.
“야! 씨발…! 잠… 윽!”
그대로 미르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팔꿈치도 바닥에 부딪혔다. 머리카락마저도 일직선으로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몸에 핏줄이 불끈불끈 섰다.
“와…! 윽… 씹새꺄, 이건 반칙….”
그는 버티지 못하고 쿵 하고 얼굴까지 바닥에 박으며 납작 엎드렸다. 마법 중에서도 최고위 마법인 중력 마법이 시전된 것이다. 다니엘은 미르 킹쉴드를 무지렁이처럼 내려다보면서 그의 손에서 떨어진 도현의 비키니를 다시금 가져왔다.
“도현 씨, 여기….”
그때 여전히 중력 마법에 의해 바닥에 철썩 붙어있던 미르 킹쉴드가 팍하고 튀어 오르더니 다니엘의 머리를 한 손으로 잡고 바닥에 퍽 박았다. 진짜 퍽 소리가 났다. 중력 마법이 끊겼다. 미르는 완전 열이 받아 얼굴에 핏줄까지 선 채로 화를 냈다.
“내가 봐준 거 알지? 씨발. 너 이거 실전이었으면 내 손에 벌써 죽었어.”
다니엘 스톤하츠는 엄청난 뇌진탕으로 코피까지 흘렸다. 순간 마력을 운용해 스스로 치료를 하지 않았더라면 기절해서 병원에 실려 갔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놓고 잘도 봐줬다는 소리를 한다. 다니엘도 싸울 마음이 단단히 들어 머릿속으로 수백 가지 공격 마법을 검색하는데 시큐리티와 라이프가드가 와서 정색한 얼굴로 두 사람을 말렸다.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선생님들.”
“그만하시죠. 일어나세요. 지니 호에서 싸움 벌이면 바로 하선하셔야 합니다.”
“알만한 사람들이 꼭 이런다니까. 일어나세요. 빨리 일어나십시다.”
마치 취객 싸움꾼을 상대하는 경찰처럼 귀찮고 성가시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지만 어쩔 수 없이 예의 바르게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그들은 시큐리티에게 등이 밀려 야외 수영장에서, 아니, 배에서 쫓겨나갈 위기에 처했다.
“도… 도현 씨….”
“어… 잠깐만…. 진짜? 잠… 킬스버그….”
도현은 그들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짜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그들이 떨어뜨리고 간 비키니를 잡기 위해 폴짝폴짝 뛰며 손을 뻗고 있었다.
“아…!! 짜증 나!”
비키니는 그녀의 손에 닿을 듯 닿지 않았다. 여기서 더 물 위로 올라갔다간 엉덩이를 다 보여줘야 할 것이다. 게다가 남자들이 슬렁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도현의 비키니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도현이 그들에게 소리쳤다.
“안 돼! 오지 마!”
“흐응, 킬스버그 님도 참. 안 돼~ 오지 마~ 이러면 우리가 안 갈 것 같아요?”
그때까지도 선베드에서 엉덩이를 안 떼고 있던 송선호가 인상을 팍 찌푸리고 있다가 결국 척척 걸어가서 도현의 비키니를 주웠다.
‘하여튼 상종 못 할 새끼들….’
TFC 선수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사회화가 덜 된 야만인들 같다. 그나마 낫다고 생각했던 다니엘 스톤하츠가 먼저 싸움을 시작하는 걸 봐라. 송선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도현에게 다가갔다. 도현의 얼굴이 활짝 폈다.
“송선호!”
송선호는 도현의 바로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털썩 앉았다. 그는 복잡한 얼굴로 알몸의 그녀를 보고 있었다. 도현이 마지막으로 남은 패자였다. 도현이 자기 비키니에 손을 뻗었다. 송선호가 손을 뺐다. 도현은 깜짝 놀라서는 소리쳤다.
“왜!”
“…내가 저기 앉아서 머리 터지게 고민해봤는데.”
“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너한테 악감정도 좀 많아. 알지?”
“…나 좋아한다며. 사랑한다고….”
도현이 약간 불쌍한 얼굴로 수를 썼다. 그러자 송선호가 확 하고 열 받은 얼굴을 했다.
“그래. 내가 너 바로 그런 식으로 나올 줄 알았다. 혼자 편하자고 앞으로 사람 마음 막 이용하겠지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열이 확 받더라고. 어?”
“그래서… 안 줄 거야?”
수영장 벽에 붙어 몸을 가리고 있는 도현 킬스버그의 초조하고 불안하고 짜증이 난 얼굴을 바로 앞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뭔가 가슴이 찌르르하다. 송선호는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 마감 얘기부터 하자.”
송선호가 아주 벼른 것 같다. 도현은 완전 울상이 되었다.
“너 진짜 앞으로도 이렇게 마감 펑크 내고 튈 거냐? 어?”
“안 튈게….”
“목소리 작다.”
“안 튀겠습니다.”
“그리고 로웰 선생님께 이상한 바람 넣지 마라, 어? 적어도 한 사람은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할 거 아냐.”
“이상한 바람이 아니라… 한 번 사는 인생 일밖에 모르고 사시는 우리 선생님이 너무 딱해서….”
“그래서 마감 펑크 내고 둘이 손잡고 튀어서 회사가 돈, 시간 버리면서 니들 잡으러 다니게 해야 하냐? 어?”
“아니요….”
송선호는 전에 한 번 벼른 것처럼 아주 그녀를 울릴 작정인 것 같았다. 도현은 그의 설교가 계속되자 처음에는 좀 고분고분 대답하다가 중간에는 열이 받아서 그를 노려보았다.
“너 나한테 고백한 거 쪽팔려서 더 이러는 거지?”
“뭐? 지금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그럼 그냥 수영복부터 주고 얘기하지 왜 사람을 자꾸 이렇게 세워놔?”
“이런 상황 아니면 네가 사람 말을 듣냐? 네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서!”
도현은 부글부글 끓는 듯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너 진짜 싫어. 됐어. 그냥 나간다.”
“…….”
내가 싫다고…. 송선호는 불의의 일격을 맞아 심장이 확 수축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뭘 잘못했지? 그녀가 잘못해서, 그런 게 많으니까 그래서, 그의 말을 조금이라도 들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이런 것뿐인데. 오늘 사랑한다고 처음으로, 6년 만에 처음으로 고백했는데 몇 시간 만에 그녀에게 싫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송선호는 그녀의 어깨를 황급히 잡았다.
“아니… 아니. 줄게. 그냥 나가지 마.”
“됐어. 너 해. 네가 계속 주무르고 있는 거 입기도 싫어. 기분 나빠.”
그녀는 송선호의 손을 털어내듯 쳐냈다. 기분 나쁘다고…. 화가 나서 하는 말이겠지만 진짜 상처받았다. 예전에는 그녀가 그의 마음을 모르니까 심한 말을 듣더라도 어느 정도 심적 방어를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안 되었다. 심장에 멍이라도 들 것 같다.
“아니, 아니. 진짜….”
도현이 계단으로 그냥 걸어가기 시작하자 송선호가 깜짝 놀라서 그녀를 따라갔다. 가다가 얼른 비치 타월을 들고 계단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남자들이 휙휙 휘파람을 불어서 엄청 짜증 날 법도 했는데 그녀의 화난 얼굴밖에 안 보였다. 진짜로 그녀는 알몸으로 계단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가슴을 한 손으로 가린 채 그냥 올라오자 송선호는 얼굴이 파래져선 그녀의 몸 주위로 비치타월을 둘러서 다른 놈들이 그녀를 볼 수 없게 했다. 물론 본인도 얼른 고개를 돌렸다. 도현은 그의 손에서 비치 타월을 빼앗아 몸에 단단히 두른 후 그를 그냥 지나쳐갔다.
“…….”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뒤에서 스트리퍼들이 휘슬을 부르며 송선호를 놀렸다.
“아, 그렇다고 너무 나가시면 안 되죠. 눈치껏 해야지.”
“범생이들이 이래서 문제야. 눈치가 없어, 눈치가.”
“…….”
저 새끼들을 전부 바다에다 버려 버리고 싶었다. 물론 제일 뛰어들고 싶은 건 송선호 본인이었다.
드디어 마지막으로 일행에 합류할 수 있게 된 도현은 기분이 확 잡쳐서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서연이 완전 탐스럽다는 얼굴로 사라가 쥐고 있는 디바이스에서 눈을 못 떼면서 도현에게 말했다.
“킬스버그 님 남자 취향 바뀌었어요?”
“아니. 왜.”
“아, 다들 완전 별로.”
서연은 드디어 자기 차례가 되어 <넘버 나인> 한정판을 들고 본인 디바이스로 사진을 찍으면서 이어 말했다. 물론 송선호는 그 말에도 칼이 꽂히는 느낌이었다.
“생긴 것만 번드르르하고 하는 꼬락서니 보니 본인들이 잘났다 이건데. 그래도 스트리퍼들이 더 낫겠어요. 걔들은 말이라도 잘 듣지.”
거기서 제일 어린 서연이 그렇게 말하자 다른 이들도 한 마디씩 덧붙였다.
“솔직히 킬스버그 님 남자들 중에 제일 괜찮았던 건 에반 블랙 아냐? 생긴 것도 그렇고 스타일도 그렇고 하는 것도 그렇고.”
셀리가 서연과 같이 인증샷을 찍고는 SNS에 업로드 하면서 말했다.
푹. 송선호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새끼들 중 영원한 원탑인 그 양아치 새끼의 이름이 나오자 송선호는 아까 전의 자신을 패고 싶어졌다.
“아, 그건 그래.”
도현이 드디어 영롱한 <넘버 나인>을 건네받아 만질 수 있게 되자 기분이 좀 풀린 얼굴로 그렇게 대꾸했다. 그녀가 그렇게 확답까지 하자 송선호는 그냥 조용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아, 난 본 적 없는데. 다들 자주 얘기하더라. 완전 미남이라면서요?”
서연이 그렇게 물었다. 로웰 팀의 회색머리 시즈카가 선베드에 누워 선탠을 하다가 그 말을 듣고 확 일어나서 말했다.
“진짜 쩐다? 진짜 분위기가 막…! 막! 진짜 보통 남자랑은 다른 느낌. 저런 짐승 같은 새끼들이랑은 차원이 달라.”
“와, 진짜? 어느 정도길래… 사진 없어요, 킬스버그 님?”
“있지.”
사진도 아직 있단 말인가. 송선호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도저히 신경을 끌 수가 없었다. 도현은 자기 디바이스를 꺼내 갤러리로 들어가서 사진을 검색했다.
“우와….”
서연이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시즈카는 선베드에서 나와 그의 사진을 보려고 다가왔다.
“와. 사람이에요? 대박.”
“야, 직접 보는 게 더 쩔어. 이 남자는 진짜 분위기가… 킬스버그 님이랑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뭔가… 뭔가…! 아, 설명하기 힘들다.”
“아, 난 좀 무섭던데. 남자가….”
사라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검은 피부에 선오일을 바르고 있었다. 퀸이 서연이 자꾸 안 주려고 하는 넘버 나인을 휙 빼앗았다.
“야!! 그거 떨어뜨리는 년은 내 손에 죽는다!”
사라가 기겁을 해서 그렇게 외쳤다. 퀸이 휘리릭 넘버 나인의 이것저것을 눌러보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미안, 미안. 뭐, 그 남자 돈도 많고 돈 쓸 줄도 알고 사람 마음도 귀신같이 잘 알고… 가만히 있어도 사람 홀리는 게 있었지. 아, 씨발. 존나 아깝다, 이거. 개좋네?”
“대하기는 힘들었지, 솔직히. 킬스버그 님 아니면 거의 상대도 안 했으니까.”
셀리가 그렇게 말했다. 도현도 다른 여자들이랑 같이 전남친의 사진을 보면서 말했다.
“이 남자, 우리 엄마랑 닮았어.”
“아, 진짜요?”
“생긴 게 닮았다기보단… 성격이랄까. 음, 분위기도.”
“엄마 사진도 보여줘요.”
서연이 열심히 도현의 전남친 사진을 돌려보다가 그렇게 말했다. 도현이 대답했다.
“없어.”
“에이.”
서연이 아쉽다는 듯 그렇게 반응하며 그의 사진을 열심히 보았다. 그리고 서연이 자연스럽게 질문했다.
“그럼 왜 헤어졌어요?”
그건 다들 모르는 사실인지 도현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게. 왜 헤어지셨대?”
시즈카가 되물었다. 도현이 서연과 함께 슥슥 사진을 넘기며 대답했다.
“글쎄. 우리 엄마랑 너무 닮아서?”
“지금은 뭐 하고 살아요?”
“글쎄… 원래도 뭐 하는지 몰랐어.”
“진짜? 제일 오래 만났잖아요. 2년?”
“그러니까.”
도현이 그렇게 대꾸했다.
*
다니엘 스톤하츠는 지금 엄청난 좌절에 빠져 있었다.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싸움을 벌이다니. 태어나서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도현의 앞에서만 꼭 병신짓을 하는 그였다. 어떤 여자가 싸움질이나 하는 남자를 좋아하겠는가. 숱한 연애코칭 서적에서도 엄금하고 있는 것이 바로 여자 앞에서 싸움질이다. 기껏 쌓아 올린 게 다 날아갔을 것이 분명했다. 오늘도 그녀가 키스를 해주었는데 내일부터는 안 해줄 거란 얘기였다. 절망스러웠다.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그들을 끌고 온 시큐리티 팀은 그들을 책상 앞에 앉히고 유인물을 건넸다. 펜도 줬다.
“자자. 일단 이거부터 보시구요. 그리고 시험 쳐서 통과하신 분부터 나가시면 됩니다. 특별~히 바로 안 내쫓는 겁니다. 교육 이수하고 앞으로 문제 안 일으키겠다는 각서까지 쓰시면 이번 바하마-푸에르토리코 여행은 함께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응? 교육 이수? 미르 킹쉴드도 완전히 기분이 잡친 얼굴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시큐리티 중 한 명이 커다란 스크린에 동영상을 재생했다.
<지니 호 규칙 -남자편->
여자편도 따로 있는 것인가. 시큐리티 팀은 2시간짜리 동영상을 하나 틀어주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지니 호에 탑승하신 남성 승객 여러분. 킬스버그 님과 함께 하는 여행, 너무 즐거우셨던 모양이죠? 하지만 지니 호에서는 우리 남성 승객 여러분이 반드시 지켜야 할 수칙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함께 한 번 알아볼까요?]
깔끔하게 생긴 사람 한 명이 화면 속에서 그렇게 말했다.
[첫째, 탑승하신 여성 승객 및 승무원에게 성적 불쾌감을 주는 언행, 모욕하는 말이나 몸짓 등을 하다가 적발될 시엔 곧바로 지니 호 인공지능 비서에 의한 경고 없는 고소절차에 들어갑니다.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조신하게 행동하도록 합시다.]
간략화된 남자의 모형이 무슨 짓을 하는 여러 가지 경우에 전부 빨간색으로 X표를 해놓았다.
[둘째, 만약 당신이 다수의 여성 승객 및 승무원과 성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있게 된 행운남이라면 다음번 여성을 유혹하기 전 반드시 이전 파트너에게 양해를 구해야 합니다. 선내를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남성은 곧바로 하선 조치합니다. 정조에 각별히 유의해주시길 바랍니다.]
“…….”
[셋째, 선내에서 싸움을 벌이는 남성의 경우에 따라 교육 이수 혹은 하선 조치가 따릅니다. 여성을 사이에 둔 싸움이라면 1회 경고 후 2회부터는 하선 조치됩니다. 때에 따라 정식으로 결투신청 절차를 따를 수도 있습니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지니 호 측 보안요원에게 자세한 정보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선 다니엘 스톤하츠와 미르 킹쉴드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넷째, 지니 호의 1층에는 최신 장비가 구비된 멋진 트레이닝 클럽이 있습니다. 언제나 멋진 엉덩이와 이두, 삼두, 가슴과 복근, 튼튼한 허벅지를 만들어 놓도록 합니다. 노력이 부족한 남성분은 1회 경고 후 일주일 내에 시정되지 않을 시 바로 하선 조치됩니다.]
“…….”
[다섯째, 매일 야외 수영장에서는 발리볼, 물총 싸움, 피구, 숨바꼭질, 눈 가리고 술래잡기 등 다양한 게임을 진행합니다. 여성끼리, 혹은 남성끼리, 혹은 남녀 혼성으로 이루어져 주로 단체전을 합니다. 같은 팀 여성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합니다.]
“…….”
[여섯째, 벌칙 게임 시, 특히 여성끼리 하는 게임에서의 벌칙 게임 시 본인이 본격적으로 즐기려고 들면 절대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특히 비키니 벗기기 게임의 경우 수영장에 따라 들어가서 여성을 희롱하면 바로 경고 조치 후 때에 따라 첫 번째 조항에 위반하여 고소·고발 및 하선 조치가 뒤따릅니다.]
이런 게 365가지나 있었다. 2시간이나 보고 나서 받은 시험지는 각 케이스 별로 어떤 행동이 올바른지 혹은 나쁜 것인지를 선택하는 육지선다 형 문제가 200개가 출제되어 있었다.
“…….”
“…….”
다니엘 스톤하츠는 2시간 만에 다 풀고 100점 만점에 92점을 맞아 통과하였고 미르 킹쉴드는 마구 찍다가 연달아 90점을 넘지 못해 1번 더 쳐서 통과하느라 무려 6시간이 더 걸렸다. 밥도 안 줬다.
그리고 노을이 지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은 삼삼오오 자기 선실이나 식당, 트레이닝 클럽, 전망대나 바에 갔다. 수영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다만 오늘 인생의 루저가 된 남자 셋만 서로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끔 맞춘 것처럼 동시에 한숨을 쉬기도 했다. 특히 송선호나 다니엘 스톤하츠가 그랬다. 미르 킹쉴드는 아예 하루를 공으로 날린 것이나 다름없어 피곤해 보였다.
“야… 도대체 킬스버그는 남자 취향이 어떻게 되냐. 난 도저히 모르겠다.”
갑자기 미르가 그렇게 입을 뗐다. 송선호와 다니엘이 그를 돌아보았다.
“웬만한 여자들은 다 나 좋아하는데. 진짜 쟤는 좋아하는 것 같다가도 싫어하고.”
미르가 불평했다.
“널 좋아하는 여자들은 네 돈을 좋아하는 거다. 네가 싫을 때도 참는 거라고.”
“그게 날 좋아하는 거지! 원래 여자는 자기한테 뭐든 해줄 수 있는 남자를 택해야 좋은 거야.”
“그런 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웃기고 자빠졌네. 네가 여자를 아예 모르는구만.”
미르가 코웃음을 쳤다. 물론 다니엘은 바로 그 말을 미르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미르는 송선호를 보았다.
“야, 네가 제일 킬스버그랑 오래 같이 있었잖아. 쟤 어떤 스타일 좋아하냐? 어?”
“…….”
그걸 알고 실천할 수 있는 남자였다면 지금 여기서 그들이랑 한숨짓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 송선호도 미르 킹쉴드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송선호는 194의 훤칠한 키에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 그리고 아주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깔끔하고 세련되고 엘리트적인데다가 젠틀해서 인기도 많았다. 캐쥬얼하게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꽤 있으니 성적 매력 또한 상당할 것이다. 정식으로 교제하고 싶은 여자들도 많았으니 그만큼 사람 됨됨이도 크게 나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런 게 도현 킬스버그에게는 하나도 안 먹혔다. 왜일까. 그건 송선호가 제일 알고 싶었다.
‘에반 블랙….’
그리고 그녀나 그녀의 주변 여자들이나 하나같이 높이 쳐주는 그 양아치 새끼. 송선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새끼는 그녀에게 사치나 유흥을 가르쳐 준 쓰레기 같은 놈이었다. 도대체 그 새끼가 왜 그녀의 인생에서 중요한 남자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한다. 속이 부글거렸다. 송선호가 한숨을 섞어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었다.
“…엄마랑 닮은 남자가 좋은 모양입니다.”
“엥?”
송선호의 말에 미르가 눈을 크게 떴다. 다니엘도 놀란 눈치였다.
“엄마 닮은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가 다 있어? 뭐지? 아니…. 애초에 엄마가… 엄마는 뭐 하는 사람이지….”
미르는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개념 생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다니엘도 혼란을 겪긴 마찬가지였다.
‘여성스러워져야 한다는 말인가? 잘 보살펴 주는 남자가 좋다는 걸까? 가정적인 남자가 좋다는 말인가?’
아까의 <지니 호 규칙 - 남자편>으로 미루어보아 도현은 몸이 좋고 게임을 잘하고 여자를 즐겁게 해주는 남자를 좋아하는 것으로 보였다. 사실 점수를 왕창 깎아 먹고 받은 패널티였지만 다니엘은 교육 이수를 받은 것이 잘한 일이다 싶었다. 아마 도현을 대할 때도 중요할 365가지의 유의사항을 머릿속에 입력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엄마 같은 남자라…. 엄마 같은… 엄마… 어머니….’
다니엘은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려 보았다. 다니엘의 어머니는… 그저 어머니였다. 시골 촌구석에 배운 것 없이 그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만 사는… 그런 수동적인 인간상을 좋아한다는 말일까? 하지만 도현이 그런 남자를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다. 다니엘의 숙맥 같음을 귀엽다고 표현하는 도현이었지만 그 말의 내심은 어쩐지 남자로서 매력이 없다는 말 같아 심란한 다니엘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근데 그 새끼가 어머님이랑 비슷하다고? 도대체 어머님이 어떠시길래….”
고민하던 송선호가 갑자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은 모두에게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그만두겠다는 생각도 어느새 거리껴진다. 이 새끼들이 여기 다 있는데, 고백까지 해놓고 좋아하는 여자를 이런 짐승 같은 놈들과 내버려 두고 싶은 마음이 도저히 안 드는 송선호였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와 잘 지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그녀를 볼 때마다 욕망과 분노가 동시에 등판했다. 아니, 그것보다도 도현이 안 해줄 것이다.
송선호는 한숨을 푹푹 쉬며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다행히 도현의 집에 놔뒀던 옷을 들고 와서 입을 게 있었다. 네이비색 면바지에 흰색 셔츠를 입고 허리띠를 했다. 바다로 놀러 온 것이니 셔츠 단추는 좀 풀고 머리만 정리했다. 안경은 두고 잠깐 거울을 보다가 나왔다. 그리고 승무원을 찾아서 도현이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앗, 아까 그 미남!’
승무원은 송선호의 자태를 한 번 스윽 훑어보았다. 도현 킬스버그가 이번에 데려온 남자들은 이래저래 화재였지만 그녀는 이 남자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잘생기고 몸 좋은 것도 완전 취향으로 잘 빚어졌고 좋은 집안 출신에 엘리트 느낌? 클래식하게 고급스럽다. 이런 남자는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다. 그녀는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가 입을 열었다.
“킬스버그 님은 지금 퀸룸에 계십니다.”
객실의 수준이 두바이의 6성급 호텔 수준은 되는 것 같은 지니 호였다. 게다가 그 중 유일한 프레지덴셜 스윗룸인 통칭 <퀸룸>은 도현 킬스버그 전용실이었다. 배를 렌트로 내놓아도 그 방은 안 열어줄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러고 송선호가 옷깃이나 머리를 끊임없이 신경 쓰며 지나가자 승무원은 살짝 휘파람을 불며 그의 뒤태를 감상했다.
송선호는 자신의 상태를 계속 체크하면서 퀸룸으로 갔다. 2층의 야외 수영장에서 보면 외벽이 유리로 싹 되어 있는 4층을 전부 쓰는 방이었다. 송선호는 내부 계단을 통해 4층으로 향했다. 으리으리한 서양식 하얀 문짝 앞에 서자 약간 기가 질린다. 누차 얘기하듯 노는 것도 돈을 쓰는 것도 다 아는 사람들이나 제대로 쓸 수 있는 거지 상상력과 노력이 부족하면 이런 예술품 같은 배는 못 만든다.
송선호는 마음부터 가다듬고 문에 노크를 했다. 조금 있다가 문이 열리면서 포르세린 화이트와 그레이, 톤 다운된 실버, 로즈 골드 등의 칼라를 중심으로 한 화려한 방이 살짝 드러났다. 모던하고 세련된 도현의 자택과는 다르게 여기는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17세기 서양의 궁전 같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남색의 머리카락에 짙은 속눈썹을 가진 묘한 분위기의 여자가 가벼운 아이보리색 홀터넥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그녀도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모양이었다.
“송선호?”
“아, 음….”
송선호는 그녀를 보자 확 긴장해서는 벌써부터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단둘은 역시 위험하다.
“아니, 아까… 미안하다고… 하려고…. 음….”
분명히 말해두지만 송선호가 다른 여자를 대할 때는 이런 식으로 멍청하고 뻔하게 대하지 않았다. 오늘 어떤 승무원이 유혹을 해왔을 때도 그녀의 제안을 멋지게 받아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런 걸 도현 킬스버그 앞에서는 하나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너무 신경 쓰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실패했다. 그런 부분에서는 송선호나 다니엘 스톤하츠나 비슷했다. 그리고 다니엘보다도 사회성이 훨씬 뛰어난 송선호가 오히려 그쪽으로 문제가 더 심각했다.
도현이 그대로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 송선호는 문을 손으로 멋지게 잡고는 시선을 가로 돌린 채 등 뒤로 엄청나게 식은땀을 흘렸다. 물론 손도 흠뻑 젖은 상태였다. 얼굴만큼은 흐르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송선호는 침묵을 참지 못하고 겨우 입을 뗐다.
“예쁘네…. 옷….”
“…….”
“아까는 진짜 미안… 내가 너무 나갔다.”
“…….”
“앞으론 조심할게….”
“…….”
“…….”
결국 그의 얼굴에도 땀이 나서 턱을 따라 흘렀다. 가슴이 꽈악 조여온다. 이런 게 싫었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이 느낌. 실제로도 그녀에게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무 긴장되어서 몸이 다 떨린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까는 무슨 용기로 그녀를 다그칠 생각을 했던 걸까. 고백을 할 때도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 뒤도 패닉으로 제정신이 아니라 생각이 마구 방어적으로 달렸다. 억울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역시 그만두고 싶다.’
그녀와 연관될 때면 그는 항상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남자가 되었다. 불쑥 반지를 사지를 않나, 울면서 고백을 하질 않나. 고작 이런 것부터가 너무 힘들다. 역시 안 될 것이다. 아무것도…. 송선호는 문을 잡은 손을 뗐다. 그리곤 평소처럼 말했다.
“그것뿐이야. 쉬어.”
송선호는 인상을 약간 쓴 채로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며 턱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미친놈. 병신. 꼴사납다. 고작 사과 한마디를 제대로 못 해서. 내가 여자라도 나 같은 병신 새끼는 싫겠다. 씨발. 머리가 다 아프다.
잘 차려서 입고 오면 뭐하겠는가. 병신같이 덜덜 떨고 온몸이 땀투성이다. 송선호는 셔츠를 펄럭거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스스로가 너무 병신 같아서 화가 날 지경이다. 어디 가서 빨리 머리라도 처박고 싶었다.
‘진짜 그만두자. 더 못하겠다. 씨발… 관두자. 다….’
이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다.
“야.”
계단을 이제 한층 내려가는데 위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문밖으로 나와서 나선형의 계단 한 층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송선호는 잠깐 멈칫했다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잠깐 얘기 좀 하자.”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는 잠시 굳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슨 약속 있어?”
“…아니.”
송선호는 다시 뒤돌아서 그녀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그는 그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고급스럽게 마감된 아이보리색 나무로 만들어지고 옅은 회색의 고급 패브릭으로 된 소파가 여러 개 배치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것에 송선호를 앉게 한 도현은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보이는 인피니트 창을 등지고 선반에서 은제 주전자를 들었다.
“커피? 차?”
“그냥… 물 줘.”
도현은 투명한 컵에 물을 한 잔 따라 송선호에게 갖다 주고 본인은 망고 주스를 잔에 따라 빨대를 꽂아 가져왔다.
“너… 진짜 일 못 할 정도야?”
“어? 뭐가….”
“혹시 오늘 미안한 짓 한 건 아닌가 싶어서.”
“…….”
도현이 다 젖어서 등에 달라붙은 게 훤히 보이는 송선호의 셔츠에 힐끗 시선을 두었다가 뗐다. 아침에 괜히 따라 나가서 잡은 건 아닌가 싶었다. 송선호가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은 좀 진정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분히 말할 수 있었다.
“아니지…. 너야 지금 일이 중요하니까. 내가 당장 빠지는 거 너나 로웰 선생님한테나 부담스러운 건 분명한 거고.”
“응….”
“그냥… 나는….”
송선호는 그렇게 입을 떼었다가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 일 관계로 알게 된 남자가 집적거리는 게 제일 불편할 텐데. 만약에 앞으로 내가 너랑 계속 일하게 되더라도… 그런 거 불편하게 느껴지면 바로 말해라.”
송선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한숨을 푹 쉬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니, 벌써 불편하겠지. 젠장….”
그는 얼굴을 감싼 채로 팔꿈치를 자기 무릎에 받치고 허리를 숙인 자세로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냥… 나 안 되는 거면 빨리 말해주면 안 되냐? 내가… 내가 네 앞에만 있으면 좀… 미친놈이 되는 것 같아.”
도현은 물끄러미 송선호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글쎄….”
‘글쎄’는 뭔가, ‘글쎄’가…! 송선호는 살짝 울컥해서 얼굴에서 손을 떼고 도현을 보았다.
“내가 말했잖아. 나 요새 그냥 이대로가 좋다고. 일 열심히 하고 시간 나면 이렇게 놀러도 나오고.”
“…안 된다는 말이야?”
송선호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현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진짜 별생각 없었는데 너….”
도현은 그렇게 운을 뗐다. 짧지만 칼을 들고 그의 배를 쑤시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내가 남자로서 매력이 없나…. 아니, 내가 그런 식으로 대했으니까 당연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송선호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현은 평이하게 말을 이었다.
“그냥… 지금은 좀 궁금하긴 해. 울면서 고백한 남자는 처음이라.”
‘젠장….’
쪽팔려서 송선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하지만 그가 궁금하다는 말에 심장이 뛰었다.
“수영장에선 진짜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는데 지금 또 이렇게 와서 이러는 거 보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며 고백을 하고도 좋아하는 여자를 그렇게 다그칠 때는 언제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사과를 하는 그의 모습이 신기했다. 자존심이 세고 신경질적이고 일에 철저한 면모만 보이며 도현과는 언제나 거리를 유지하던 남자가 오늘 하루만 해도 의외의 모습을 연달아 보이니 너무 이상하고 어색하고 신기하고… 그렇다.
“넌 어쩌고 싶은데? 나한테 뭘 바라?”
도현이 물었다. 송선호에게서 약간 떨어져 앉은 도현은 옆으로 몸을 돌려 앉아 소파에 푹 기대어 송선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너한테 뭘 바라냐고?
머릿속을 스쳐가는 수많은 이미지에 송선호는 미간을 좀 찌푸렸다. 그녀는 그런 의도가 아닐 텐데도 송선호에게는 그 말이 너무나 도발적으로 들렸다. 이끌림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녀도 가만히 송선호를 관찰하고 있었다.
송선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살짝 건드렸다가 감쌌다. 부드럽다. 그녀는 피하거나 아까처럼 뿌리치지 않았다. 송선호는 점점 자신의 심장 소리가 빠르게, 그리고 크게 들리는 것을 느꼈다. 숨이 거칠어졌다. 천천히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귀에 심장 소리와 이명이 가득했다. 그녀의 짙은 속눈썹과 부드러운 연갈색 눈동자가 시야에 가득 들어온다. 코가 살짝 닿았다. 그녀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
송선호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입맞춤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왜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대로 그녀의 얼굴을 살짝 엄지로 쓰다듬었다. 정말 부드러웠다. 잠시 그렇게 있자 내부의 흥분과 소란이 겨우 좀 잠들었다.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미안.”
도현은 그런 그를 관찰했다. 왜 이러는지 그녀도 모르겠지만 송선호의 질릴 정도로 잘생기고 딱 떨어진 엘리트 같은 느낌 때문에 오히려 지금 그의 얼굴이 아주 아슬아슬하고 불안해 보였다.
“너 이러는 거 진짜 처음 봐. 나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도현이 신기해서 그렇게 말하자 송선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너 같은 거 싫어, 이….”
말을 멈추긴 했지만…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 송선호는 두 손으로 다시 얼굴을 감싸며 신음을 흘렸다. 도현은 좀 놀랐다가 인상을 팍 썼다.
“진짜 넌 말버릇부터 고쳐야겠다.”
“…지금 나한테 그런 말 하지 마.”
“아, 이런 게 싫었다고. 왜 이렇게 자존심을 세우는데?”
“그만하라고.”
“아니, 그렇게 좋아하는 거면, 나 같으면 진짜 잘해주려고 할 텐데.”
“조용히 해.”
도현도 살짝 열 받았다. 좋아한다는 놈 태도가 이런 게 말이 되는가. 이해가 안 된다.
그러고 보면 웬만해선 남자들과는 싸운 적도 별로 없고 그들이 열 받게 하면 무시하거나 내쫓곤 했는데 유독 송선호는 점잖은 사람의 언성을 높이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저 콧대를 좀 눌러 주고 싶다는 생각이 막….
“야.”
도현이 송선호를 그렇게 부르자 그가 컨디션 안 좋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도현을 보고 깜짝 놀란 송선호가 눈을 크게 떴다. 도현은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밀어 그를 소파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탔다. 덩칫값 아깝게 저항도 제대로 못 했다.
“야…! 야! 뭐, 뭐, 뭐하는 거야, 이 미친년아!”
“아! 짜증 나! 또 욕했어!”
도현도 화를 냈다. 송선호도 깨닫고 헉하고 입을 다물었다. 도현이 그의 입술을 손으로 빠르게 때렸다.
“입 좀…!”
송선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그녀가 다른 손으로 그의 입술을 계속 때렸다.
“그만해! 알았으니까…! 윽! 내려와!!”
“알겠긴 뭘 알겠어? 아까도 알겠다고 해놓고!”
“알았다고!! 빨리 꺼…!”
그가 도현을 밀어내려고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가 화들짝 놀라서 두 손을 자신의 어깨 위로 들었다. 옷 위로 만지는데도 너무 부드럽다. 송선호가 완전히 식겁을 하고 있자 도현이 바로 그의 두 손목을 잡아 그의 얼굴 양옆에 짓눌렀다.
“…!”
“아, 이제야 좀 가만히 있네.”
송선호가 말문이 턱 막혀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도현이 송선호의 아랫배 위에 앉아서 그의 두 손을 결박한 채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가 입은 얇고 가벼운 아이보리색 홀터넥 드레스가 희미하게 비치는 재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래에서 보니 햇빛 때문에 달아오른 그녀의 하얀 어깨와 늘씬한 팔과 예쁜 얼굴과 손으로 쥐면 분명 흡족할 가슴, 사람을 내려다보는 눈빛, 배꼽이 비칠 것 같은 옷, 가슴, 그녀의 눈….
그녀가 웃었다.
“뭘 그렇게 봐. 싫다고 할 땐 언제고.”
“…….”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숨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지은 얼굴로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하자 송선호는 깜짝 놀라서 숨을 멈추었다.
‘씨발! 씨발씨발씨발씨발. 잠깐. 안 돼. 잠깐만…! 씨발!!!’
그녀와 거의 코를 맞닿게 되자 송선호는 진짜 헉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멎을 것같이 아찔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녀의 달콤한 숨결이 뺨을 스친다.
“뭘 기대하는 거야. 정신 차려.”
그녀는 송선호의 귓가에 그렇게 속삭이곤 그의 양 뺨을 손바닥으로 짝 소리가 나게 한 번 치면서 잡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송선호의 전부를 다 본 것같이 말이다.
“…….”
송선호는 잠깐이지만… 정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무언가에 완전히 지배당한 느낌이다. 그리고 그건 송선호의 기분을 아주 좆같게 만들었다.
*
지니 호는 밤이나 낮이나 멈추지 않고 푸에르토리코로 향하고 있었다. 잔잔한 무풍지대를 항해하는 지니 호는 매일이 쾌청하고 쾌적했다. 하와이로 향하는 길목에 우연히 산호섬을 발견한 지니 호는 잠시 정박하고 다들 스노클링과 다이빙을 즐겼다.
도현도 이른 아침부터 스노클링을 위한 마스크를 하고 수영을 했다. 연한 에메랄드빛 따뜻한 물속에서 화려한 빛깔을 자랑하는 산호와 갖가지 물고기를 보았다. 커다란 대왕조개를 잔뜩 보고 거북이도 세 마리나 봤다. 커다란 곰치들이 사람을 경계하며 입을 뻐끔거렸다. 오징어 떼가 피부를 반짝거리며 한 차례 스윽 지나갔다. 이름 모를 치어떼가 물속을 은색으로 반짝이게 했다.
그렇게 지칠 때까지 수영을 하다 올라왔다. 마스크를 얼굴에서 떼서 오늘은 근무를 서고 있는 서연에게 넘겼다.
“아, 아깝다. 오늘 오프면 나도 수영했을 텐데.”
서연이 여러 가지 색깔로 일렁이는 산호섬의 바다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내일까지 있을 거야. 내일 해.”
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비치 타월을 건네받아 머리카락을 닦았다. 서연이 그녀에게 생수를 건넸다. 마스크 덕에 바닷물을 먹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많이 움직여서 좀 마셔줘야 했다. 오늘은 남색 모노키니를 입은 도현이었다. 등이 훤히 드러난 예쁜 수영복이었다. 그녀의 여리여리하면서도 건강한 몸매를 잘 드러냈다. 서연이 그녀의 등을 닦아주며 말했다.
“킬스버그 님은 잘 안 타네요.”
“응, 탠오일 엄청 바르면 조금 타긴 하는데.”
햇빛을 받아 벌게졌다 하얘졌다를 반복하는 도현의 피부였다. 그에 반하여 사흘 만에 멋진 구릿빛 피부가 된 로웰은 자기 어시스턴트들과 다이빙을 갔다 돌아오며 쌍따봉을 치켜들었다.
“다이빙 짱 재밌어요, 작가님!”
“그렇죠?”
“네, 거북이 엄청 봤어요.”
어시스턴트 중 하나가 그렇게 말했다.
“작가님은 안 하세요?”
“내일 하려구요. 오늘은 스노클링만 하게요.”
다이빙도 재밌지만 무거운 장비를 차고 물 안팎을 오르내리는 게 피곤하다. 오늘 오프인 몇몇 승무원들은 윈드서핑을 하고 있었다. 바람이 별로 안 불어서 탈 만할까 싶었는데 다들 바다에 살다시피 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잘했다.
“와, 퀸 언니는 완전히 날아다니네.”
서연이 엄청 멀리서 쌩쌩 윈드서핑을 하고 있는 빨간 머리를 발견하고는 그렇게 말했다.
“안 피곤하세요? 물 더 드릴까요?”
로웰의 시중을 들고 있는 회색 머리의 시즈카가 그렇게 물었다. 로웰은 노는 게 사흘째가 되니 약간 지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주 2회 연재의 늪에 빠진 만화가였다. 운동은커녕 책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생활을 영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에구구 하면서 말했다.
“어제 발리볼 한 근육통이 지금 오네요. 으… 진짜 나이 좀 든 거 실감 난다.”
로웰 리는 시차를 두고 오는 근육통에 그렇게 말했다. 시즈카가 웃었다.
“에이, 선생님 해봤자 20대 초반 정도밖에 안 됐을 거 같은데요?”
“저 서른셋인데요.”
로웰이 답했다. 그러자 도현도 깜짝 놀라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진짜요?”
“네.”
“언니였어….”
도현도 막연히 그녀가 자신보다 어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녀의 배포가 어린애들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종류의 배포이기는 했다. 로웰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늘어지자 시즈카가 물에 젖어도 건재한 그녀의 삐삐 머리에서 물을 짜냈다.
“와… 선생님 진짜 숱 많다. 셀리보다 더 많을 것 같아요.”
“한 번 확 잘라버릴 때가 온 거 같아요. 삭발도 한 번 한 적 있는데 다시 길면서 피부를 찔러서 못 참겠더라구요. 맨날 면도해도 아파. 꾹 참고 다시 길렀어요.”
사회적 기준이나 남의 시선에 매우 대범한 로웰 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녀의 대머리(?)는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어쨌든 그렇게 다들 신나는 물놀이를 즐긴 후였다.
“선생님 컨디션 안 좋다고 안 봐줄 거예요.”
도현이 웃으며 말했다. 로웰이 훗 하고 대꾸했다.
“어제부터 작가님이 너무 구멍이라 오늘도 쉽게 이길 것 같은데요.”
“그래서 오늘은 비키니도 튼튼한 걸로 입었어요.”
“훗. 비키니 탓이 아닐 텐데요, 작가님.”
진정한 고수는 연장을 탓하지 않는 법. 지금 지니 호에 승선한 대부분의 여자들(선장, 부선장, 갑판장, 항해사 등은 제외)은 첫날 한 인공지능 추첨에 의하여 로웰 팀과 도현 팀으로 나뉘어 있는 상태였다. 매일 근무 쉬프트가 돌아서 격일로 팀원이 달라지고 있었다.
“오늘은 뭐하죠, 선생님?”
“지니한테 물어보죠.”
그러자 서연이 들고 있는 스크린을 돌려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피구>
“어, 괜찮네요. 중학교 이후로 한 번도 안 해봤는데.”
로웰이 그렇게 말했다.
“이번엔 남자들 섞어서 할까요, 선생님?”
“그래요.”
일단 다들 바다 수영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현과 로웰, 어시스턴트들은 차양 밑에 누워 오늘자 마사지를 받았다. 그리고 슬슬 게임을 해야 할 시각이 되자 윈드서핑이나 스노클링을 하던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음… 6점.”
“7점.”
“5점.”
“5.5점.”
어떤 남자가 바다에서 계단을 통해 2층 야외 수영장으로 올라왔다. 그가 자연스럽게 마사지를 받고 있는 이들의 앞을 지나가고 나자 4명의 MIP(Most Important Person)가 그렇게 평했다. 시즈카가 스크린에 자동으로 기록되는 점수를 확인하며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아, 점수가 짜다. 쟤 어깨 진짜 섹시한데.”
“오늘 수영복이 에럽니다.”
“왜 남자들 수영복이 하나같이 다 삼각이죠? 요즘 같은 세상에 T자형이 유행해도 모자랄 판인데!”
어시스턴트 하나가 그렇게 분개했다.
“탈의실에 비치를 많이 해놨는데도 다들 안 사요…. 그냥 공짜로 내놔야 하나.”
“너무 싼 티 나게 드러내는 것도 별로지만 딱 적절한 정도가 있는데. 그걸 모르네.”
도현은 한숨을 쉬고 로웰은 투덜거렸다. 그리고 몇 명의 남자들이 더 그들의 앞을 지나갔다. 수영장 여기저기에 삼삼오오 모인 다른 사람들의 점수도 전부 집계되고 있었다. 사람 눈이란 원래 다 비슷비슷한 것인지 MIP의 평가와 크게 벗어나는 건 그다지 없었다. 평점이 대부분 6점이나 7점 수준이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는 묶어놓은 새카만 머리카락을 풀면서 한 번 쓸어넘겼다. 물이 뚝뚝 떨어졌다. 195의 훤칠한 키에 너무나 아름다운 얼굴이 현실성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그의 보석 같은 보랏빛 눈동자는 멀리서 보아도 햇빛 아래 반짝였다. 게다가 모델 뺨은 애저녁에 치고도 남을 탄탄하고 늘씬한 근육은 조각상이 저리가라였다. 몸의 골격, 비율, 선 하나도 허투루 만들어진 게 없어 보인다. 무뚝뚝하면서도 진중한 느낌이 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는 어제보다 더 작은 파란색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그가 계단 옆에 선 승무원의 말을 잠깐 듣더니 대답 없이 한 번 고개를 끄덕했다. 그리고 도현의 얼굴을 잠시 보면서 걷다가 앞으로 시선을 돌리고 4명의 앞을 지나갔다. 여자들이 천천히 그의 움직임에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태까지 뚫어지게 보고 그가 자기 선베드를 찾아가서 앉는 자태까지 쭈욱 감상했다. 누구 하나 바로 점수를 입에 담지 않았다. 그리고 어시스턴트 둘이 시즈카를 돌아보면서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10점!! 무조건 10점!!!”
그들은 엎드린 자세로 힘들 텐데도 완전 쌍따봉을 들어 올렸다. 로웰조차도 갈등했다.
“아… 만화가로서 이건 진짜 10점 안 부르면 안 될 각이긴 한데….”
괜히 그가 그들의 작품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 남자 주인공 세한 로마노프의 모델인 게 아니었다. 제일 완벽한 남자 주인공 감의 얼굴과 몸이었다.
“9.5요.”
로웰은 갈등하다가 그렇게 말했다. 도현도 뚫어져라 그림같이 앉아 있는 그의 자태를 계속 감상하다가 말했다.
“9.”
“오. 오늘 최고점이네요…. 솔직히 저도 그냥 10점. 직접 보니까 더 멋있어요, 다니엘 스톤하츠. 팬 됐어요.”
시즈카도 감탄하며 말했다. 몇 명이 더 지나갔다. 5점과 7점을 또 왔다 갔다 했다(5점대는 경고를 먹었다). 그리고 또 누가 올라왔다.
안경을 쓰지 않으면 그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잘생긴 남자라는 걸 항상 느끼게 한다. 남자의 전투복이라는 명품 슈트로 꽁꽁 몸을 감추어도 워낙 우월한 체격과 몸매라 그 속을 계속 궁금하게 만드는 남자다. 그의 몸가짐을 보면 그가 상류층 집안의, 우수한 품종의 남자라는 게 바로 티가 났다. 그런 건 몇 대를 거쳐서 형성된 클래스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말이다. 평소와 다르게 물에 젖어 흐트러진 게 여자의 음심을 돋군다. 여자한테 위험한 충동을 들게 하는 남자다. 벗겨서 올라타 보고 싶게 한다.
약간 피곤한 얼굴로 올라온 그는 계단 옆 승무원의 설명을 듣고는 장난하냐는 듯한 신경질적인 얼굴을 했다. 승무원은 어깨를 으쓱하며 눈짓했다. 그는 확연히 짜증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로 그냥 젖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걸었다. 시선을 MIP와는 정반대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도현은 그가 자신의 앞을 지나갈 때 손을 뻗어서 그의 수영복 팬티를 노렸다.
“…!!”
그가 벗겨질 뻔한 자신의 수영복을 황급히 잡았다. 그의 배렛나루가 살짝 드러났다. 오오…! 완전 섹시하다…. 다른 이들은 숨을 죽였다. 도현이 품평회에서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송선호는 인상을 확 찌푸리며 도현을 노려보았다.
“깎아. 맨들맨들한 게 좋단 말이야.”
그랬더니 송선호가 부글부글한 얼굴로 도현의 손을 쳐냈다.
“웃기지 마.”
그리고는 지나갔다. 물론 MIP들은 그의 뒤태까지 주얼리 작품을 보듯이 감상했다. 그가 선베드에 누웠다. 선글라스를 끼고 햇볕을 쬐기 시작했다.
“금방 그거 뭐에요?”
둘은 전혀 진전 없을 줄 알았는데…. 로웰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도현을 돌아보았다. 도현이 송선호를 계속 보면서 대꾸했다. 그는 도현이 자신을 보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무시했다.
“몰랐는데 쟤가 놀리는 맛이 쏠쏠하더라구요.”
“때리는 건 아플 게 상상이 돼서 못하겠다던 양반이….”
로웰이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도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게 때리는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사디스트는 아니지만 도미넌트라는 것인가. 시즈카가 물었다.
“그래서 점수는요?”
“9점.”
로웰이 말했다.
“9.5점.”
“10점요.”
“어? 뭐야, 너.”
“아, 전부터 송 편집장님 짱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9.5.”
도현이 말했다.
“몸은 송선호가 좀 더 취향인 듯.”
도현은 그렇게 말했다. 잠시 후 그녀는 송선호를 괴롭히는 걸 멈추고 다시 베드에 머리를 뉘었다. 그리고 다시 품평회를 계속했다.
“어, 주드다.”
시즈카가 말했다. 주드는 어색하고 긴장한 얼굴로 MIP들 앞을 지나갔다.
“역시 온 지 얼마 안 되는 놈은.”
서연이 어색해하는 주드를 보며 혀를 찼다. 시즈카가 최신 정보를 건넸다.
“어제 그걸로 셀리랑 썸 타는 모양이던데.”
“와, 진짜?”
“귀엽네.”
도현도 그를 제대로 본 것은 처음이라 쭈욱 훑어보고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뉴페이스였으므로 8점이란 준수한 평점을 받고 갔다. 슬슬 남자들이 다 들어와서 서로 잡담이나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처럼 마지막 남자가 올라왔다.
원래도 빛나는 플래티넘 블론드는 물에 젖어 더욱 환하게 빛이 나서 사람들의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살짝 타서 건강한 피부가 섹시하다. 게다가 눈동자까지 빛이 나는 듯 환한 아이스블루라서 더 눈에 띄는데 키가 2m에 덩치도 산만 하니 어디 세워놔도 가장 눈에 띄는 남자일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근육은 그 크기도 단단함도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얼굴, 목, 어깨, 팔, 가슴, 허리, 복근,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낼수록 보는 여자들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미르 킹쉴드는 승무원에게 설명을 듣자 곧 MIP들을 향해 장난스럽게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그들의 앞을 지나갔다. 넷 다 베드에서 자동으로 일어나서 고개를 빼고 신이 내린 그의 육체를 감상했다.
“와… 씨발….”
한 어시스턴트가 저도 모르게 욕을 했다.
“10점이요….”
“12점이요….”
“그럼 난 15점….”
앞선 사람들의 점수에 도현이 엄청 고민을 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신의 작품에 제가 감히 숫자를 붙일 수가 없네요…. 아, 어제부터 제대로 봤어야 했는데…. 아깝다….”
어제는 화가 나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역시 저 남자는 벗을수록 더 빛나는 남자다. 도현은 자기 디바이스를 찾았다. 그리고 그의 엉덩이를 노리며 사진을 찍으려다가 ‘아흑’하고 디바이스를 내렸다.
“왜 속옷 광고 안 찍나 싶었는데 화면에 다 안 나타나.”
“어디 봐요.”
“하… 그래도 쩐다.”
“저렇게 만들라고 해도 못 만들겠다….”
서연도 감탄해서는 고개를 빼서 미르 킹쉴드를 감상했다. 매일 남자 승무원과 스트리퍼들을 멸치나 대머리라고 부르는 그녀였다.
“미르 저 덩치라 옷 입기도 힘들 텐데 옷도 꽤 잘 입거든요.”
도현이 말했다.
“그래도 역시 미르는 맨날 벗고 다녀야 해. 우리 작품보다 인류 평화에 기여할지도 몰라요, 선생님.”
“하… 역시 사람의 작품은 신의 작품을 못 따라가는 거네요. 처음으로 기량에 한계를 느낍니다, 작가님….”
그렇게 미르 킹쉴드는 전지전능한 존재(?)의 어시스트를 받아 깎아 먹었던 점수를 한방에 회복했다.
*
일단 로웰 팀 여자 다섯 명과 도현 팀 여자 다섯 명은 정해진 상태였다. 승무원은 격일로 쉬거나 아니면 이틀을 연달아 쉬고 이틀을 연달아 일하는 형태로 근무하고 있었다. 현재 정말 휴가를 위해 지니 호에 승선한 사람들은 도현 킬스버그, 로웰 리, 윤지호(어시스턴트), 신재인(어시스턴트)가 MIP로, 송선호가 VVIP, 다니엘 스톤하츠와 미르 킹쉴드가 VIP로 전부였다.
도현과 로웰은 오늘 오프인 6명의 남자 승무원과 열 명 정도의 스트리퍼, 그리고 나머지 3명의 남자를 쭉 둘러보았다. 지난 이틀 동안의 전적은 1 대 1. 둘 다 오늘은 이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제 발리볼을 같이 했던 퀸은 오늘도 쉬어서 도현 팀에 있었고 나머지 셋은 어제와는 다른 인물들이었다. 로웰 팀의 네 명은 전부 다르다. 그중 하나가 로웰의 어깨를 열심히 주물렀다. 로웰이 목과 팔을 돌리며 전의를 다졌다.
“시작하시죠, 작가님.”
“네, 선생님.”
둘은 ‘후읍’하고 숨을 한 번 들이켜더니 외쳤다.
“가위, 바위, 보!”
도현은 가위, 로웰은 보를 냈다.
“아으!”
“와!”
도현은 엄청 기뻐했다. 생각해둔 남자가 있었는지 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미르!”
아~! 로웰 팀에서 탄식이 나왔다. 저쪽도 그를 노리고 있었다. 무려 그는 소드마스터란 말이다. 몸 쓰는 거 하나로 먹고사는 남자다. 미르 킹쉴드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도현에게 다가왔다.
“내가 최고지?”
“잘해야 해요.”
“알았어. 이기면 뽀뽀해줘.”
“음, 뺨이면 해줄게요.”
“아, 치사하다. 의욕이 안 난다.”
“그래도 뺨.”
그리고 로웰과 도현은 다시 심기일전해서 가위바위보를 했다.
“아싸!”
이번엔 로웰이 이겼다. 그녀도 생각해둔 남자가 있는지 바로 그를 돌아보았다.
“스톤하츠 씨!”
이쪽도 운동선수다. 다니엘은 도현이 자신을 먼저 뽑지 않았다는 것에서 감점의 위력을 확연히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무엇보다도 묘하게 미르 킹쉴드의 점수가 올라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막연히 그 이유도 추정하고 있었다.
‘운동을 더 해서 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
주변과 비교를 해보아도 다니엘 스톤하츠는 몸이 굉장히 좋은 편이었지만, 미르 킹쉴드에 비하자면 컵이 작은 것은 당연했다.
“가위바위보!”
이번엔 또 도현이 이겼다. 그녀는 가만히 보다가 손가락을 까닥까닥했다. 그러자 상대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안 해.”
“빨리 와.”
“안 한다고.”
“빨리 오라고.”
그러자 로웰이 물었다.
“송 편집장 운동 잘해요?”
“쟤는 뭐든 시키면 다 잘하더라구요. 여기선 내 말이 법이야! 빨리 와!”
도현이 송선호를 대하듯이 다른 사람들을 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서로 역사가 있다 보니 격의가 너무 없어진 것이다. 송선호가 도현에게 험한 말을 하는 것을 흘려듣는다고 도현이 거기에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런 문제로 날을 세우고 많이 싸우기도 했고 그에게 스크린을 집어 던진 적도 있었다.
‘근데 그것도 여기 와서는 분위기가 묘하단 말이야. 특히 송 편집장….’
로웰은 송선호가 도현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도현과 살기 시작한 지 몇 달 지나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도 서로 싸워서 몰랐는데 미르 킹쉴드가 도현에게 데이트를 신청할 때가 되어서야 어라? 싶었다. 보통 남자들은 그런 거 잘 못 숨기지 않나? 어쨌든 뭔가 불안불안 하다. 그만두겠다고 한 것도 왠지 그런 마음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송선호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도현 팀으로 와서 섰다. 그다음도 도현이 이겼다.
“오늘은 제가 이길 건가 봐요.”
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남자들을 보다가 시큐리티로 근무하는 주드를 뽑았다. 보통 이상은 하겠지?
“그건 끝까지 가봐야 아는 거죠!”
그다음도 도현이 이겼다. 그녀는 이번에도 시큐리티에 근무하는 오렌지 머리 하나를 데리고 왔다. 그다음은 로웰이 이기고 그다음은 또 도현이 이겨서 마지막으로 한 명 더 데리고 왔다. 로웰도 나머지 머릿수를 채웠다. 그렇게 10대 10으로 널따란 수영장의 안에 들어갔다. 맞아서 나간 사람은 상대편 바깥에 서서 본인들 편을 보조하게 될 것이다. 가운데 수영장을 가로지르는 라인이 하나 놓였다.
로웰이 가위바위보에서 이겨서 선공을 하게 되었다. 로웰이 공을 잡고 이쪽저쪽 보다가 연한 갈색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사람에게 공을 던졌다. 그녀는 올해 스톤캐피탈이 지니 호를 렌트하면서 채용된 새로운 승무원이었는데 이런 종류의 게임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한 방에 아웃이었다.
“죄송해요, 킬스버그 님!”
“나가서는 잘 잡아!”
도현이 다급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총총 뛰어가 로웰 팀의 뒤에 섰다. 서 있는 것도 못 미덥다…. 도현은 다른 여자에게 던지는 척하다가 로웰의 얼굴을 딱 맞추고 말았다.
“앗! 선생님! 괜찮으세요!”
도현이 깜짝 놀라서 그렇게 물었다. 로웰은 얼굴에 확 눌린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썼다. 그리고는 암흑의 기운을 뿌리며 도현을 쳐다보았다.
“우리 작가님은 내가 처단한다.”
“선생님, 살살 부탁드려요….”
도현은 미안해서 그렇게 말했다. 로웰은 물 밖으로 나갔다. 몇 번 공이 휙휙 날아다니고 아무도 못 맞추다가 드디어 로웰 쪽 남자 팀원의 손에 공이 떨어졌다. 그는 바로 앞에 있는 도현 팀 여자 멤버에게 던지려고 하다가,
“아으…!”
여자가 확 움츠리며 깜짝 놀라자 자기도 깜짝 놀라더니 허술하게 남자 쪽에 던졌다. 가만히 구경을 하고 있던 미르 킹쉴드 쪽으로 슬렁 날아와서 그는 그걸 한 손으로 잡았다. 그는 공을 한 번 공중으로 던졌다가 잡았다가 하다가 상대편을 보더니 팔을 살짝 휘둘렀다. 공은 쌔액! 하고 공기를 찢으며 날아가더니 상대편에 있는 남자 멤버 하나의 이마를 정통으로 퍽! 맞췄다.
“꺅! 미르! 살살해요!!”
도현이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어… 살살한 건데.”
미르가 머쓱하게 대답했다. 다행히 정말 살살한 것인지 맞은 남자는 괜찮은 것 같았다. 이마에 벌건 자국이 남은 채 물 밖으로 나갔다. 도현 팀 대 로웰 팀은 현재 9명과 8명이 각각 남아 있는 상태였다. 다니엘 스톤하츠의 가까이에 떨어졌으나 아까 처음 맞아서 나간 도현 팀 수비가 얼른 바닥에 주저앉아 물 위의 공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다니엘을 보고 깜짝 놀라 그에게 공을 던졌지만 패스를 하는 수준이었다.
“앗.”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도현 팀 쪽으로 바로 공을 던졌다. 다들 당황했다. 그가 공을 너무 위로 높게 던져 누굴 맞추는 게 아니라 포물선을 그리며 느리게 날아갔다. 아예 수영장 밖으로 나갈 것이 분명했다. 이쪽 팀이고 저쪽 팀이고 관중이고 다들 공에서 눈을 떼고 황당한 얼굴로 다니엘 스톤하츠를 보았다. 그는 엄청 유명한 TFC 선수였….
쌔애애애액! 뻐어억!!!
그리고 그 공은 그대로 역주행하여 미르 킹쉴드의 뒤통수를 엄청 세게 쳤다. 공이 터졌다.
“…….”
다들 다시금 말을 잃고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지니 호에 처음 왔던 날 밤에 저지른 미르 킹쉴드의 악행과 어제 그가 먼저 시비를 걸어서 도현에게 점수를 확 깎인 것이나 오늘 도현이 그를 다니엘보다 먼저 선택한 것이나 기타 등등 미르 킹쉴드에게 점점 쌓이는 것만 많아지는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미르… 괜찮아요?”
이거 반칙 아냐? 아닌가? 맞나? 헷갈린다. 도현은 공에 맞아 고개를 숙인 상태로 가만히 있는 미르를 살폈다. 갑자기 공기가 찌릿해졌다. 미르의 주변으로 물방울들이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씨팔, 저 개 같은 마도사 새끼가… 가만히 있는 사람을 자꾸 건드려…!”
그의 주변으로 황금빛 오라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도현이 식겁해서 두 손으로 T자를 만들어 타임을 외쳤다.
“미르랑 다니엘 씨 둘 다 나가세요. 안 되겠어요. 민간인이랑 이런 거 같이 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었어. 싸우면 바로 쫓아낼 거예요. 태평양 한가운데 버리고 갈 거라구요!”
그렇게 다니엘과 미르는 풀에서 쫓겨났다. 둘은 시큐리티에 의해 야외 수영장에서 서로 제일 먼 곳에 떨어져서 앉아야 했다. 그리고 승무원이 새 공을 갖다 주었다. 8대 7. 그렇게 다시 평범한 피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어어. 이거 내가 잡을 수 있을 거 같아.”
누군가에게 맞고 위로 뜬 공을 같은 팀이 잡으면 탈락이 아니었다. 도현은 폴짝폴짝 열심히 물속에서 뒤로 뛰었다. 공을 잡으려고 두 팔을 위로 뻗은 채 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등에 누군가의 탄탄한 몸이 푹신하게 닿아왔다.
“응?”
도현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송선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도현에게 손을 대지 않기 위해 양손을 어깨 위로 들고 있었다. 영 게임에 관심 없이 뒤에서 갤러리나 서고 있던 그였다. 그는 도현의 얼굴로 떨어지던 공을 잡아주었다.
“자….”
“땡큐.”
도현은 그가 건네준 공을 잡고 다시 폴짝폴짝 뛰어 가운데 라인으로 갔다. 그리고는 세게 던졌다. 오늘 오프인 승무원 하나가 노리기도 전에 당황하길래 그쪽으로 던졌다. 그랬더니 뒤에 있던 남자가 그녀를 끌어당겨 안으며 대신 맞아주었다.
“오올~.”
관중에서 그런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도현 팀이 의외로 더 빨리 잡혀서(도현은 로웰에게 복수 당했다) 마지막에는 가만히 있던 송선호만 남게 되었는데 당연히 게임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던 송선호는 그냥 로웰 팀이 던지는 공에 쉽게 맞고 퇴장당했다.
“뭐하는 거야! 졌잖아!”
도현이 화를 냈다. 송선호는 짜증이 난 얼굴로 대꾸했다.
“어린애같이 왜 그래? 공놀이 가지고.”
“앞으로 다시는 너 안 뽑아!”
“제발 뽑지 마라. 이런 거 질색이야.”
“출판사 파티 때는 잘했으면서!”
“싫은 걸 어쩌라고.”
“진짜 싫어! 짜증 나!”
“윽…! 나한테 그 말 좀 하지 마!”
둘이서 그러고 있거나 말거나 로웰이 ‘흐흐흐흐’하고 암흑의 미소를 흩뿌렸다.
“그러고 계실 때가 아닐 텐데요, 여러분. 벌칙이 아직 남아 있는데요, 여러분.”
“…….”
둘 다 입을 다물고 로웰을 돌아보았다. 로웰의 뱅글뱅글 안경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리고 로웰 팀이 2연승에 의기양양한 얼굴로 시시덕거리며 벌칙을 정하기 시작했다.
“아, 또 다 벗겨버릴까요?”
“오늘은 남녀 혼성이라 그러면 완전 19금이에요.”
“뭐 어때요.”
이러면서 도현 팀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살살해요, 선생님.”
도현이 말했다. 로웰이 그녀를 홱 돌아보았다.
“저도 첫날에 작가님이 봐줄 줄 알았죠! 세상은 비정한 거라면서요!”
“선생님….”
도현은 당연히 첫날 자신만만했던 자신의 언행에 대해 몹시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로웰 팀은 쑥덕쑥덕거리더니 벌칙을 정했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 게임으로 하죠! 제일 짧은 두 사람은 우리 팀 두 명한테 오프 하루씩 주기! 손님은 근무 대신 서주기!”
“오오!!”
로웰 팀이 박수를 짝짝 쳤다. 그리고 뒤에서 로웰 팀 소속 직원끼리 가위바위보를 해서 두 사람을 추려내기 시작했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 게임은 벌칙 팀 멤버가 립스틱을 잔뜩 바르고 상대를 아무나 정해 그 사람의 몸에 한 번에, 끊기지 않고 가장 기다란 선을 그리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중간에 입술을 떼거나 입술을 떼지 않더라도 선이 끊기면 그중 가장 긴 선을 기준으로 판단했다.
“가장 긴 선을 그은 사람은 이거! 드립니다!”
로웰이 도라에몽처럼 뭔가를 또 쓱 꺼냈다. SS 시리즈 멀티스크린 프로 27.5였다. 로웰이 손에서 놓자 최신 마도과학 기술을 접목한 멀티스크린이 자연스럽게 공중에 둥둥 떠서 머물렀다.
“일할 때 쓰려고 샀는데 전에 쓰던 게 손에 더 맞아서 방에 처박아두고 있었습니다. 딱 한 번 켜봤습니다. 보증서 있고 A/S 2년 됩니다.”
“아… 내 거 고장 나서 하나 필요해….”
역시나 SS 시리즈 멀티스크린 최신판. 도현이 입맛을 다셨다. 원래 신상은 빛나 보이는 법이다. 여러 가지 종류의 립스틱이 테이블 위에 주르륵 진열되었다. 9명의 도현 팀 멤버가 대기했다.
“스타트!”
로웰이 시작 신호를 크게 내자 사람들이 잽싸게 뛰어가 자신이 아는 브랜드 중 제일 지속력과 발림성이 좋은 립스틱을 차지하려고 했다.
“꺅!”
“사람 길막하시고 그러면 안 되죠, 배우신 분이.”
퀸은 도현이 뭘 노리는지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그녀를 확 밀고 자신이 그걸 낚아챘다. 립스틱 브랜드 같은 건 잘 모르기 때문에 머리를 썼다. 도현이 분한 얼굴로 퀸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진짜 내가 운동한다!!”
“헹. 수고하세요.”
퀸도 어제의 사라랑 비슷한 얼굴로 그녀를 비웃었다. 뭘 한다고 되는 줄 아는가. 이런 건 타고 나야 하는 거다. 이미 다른 여자들은 립스틱을 다들 골랐고 도현도 그중 그나마 괜찮은 걸로 골랐다. 남자들 다섯도 당황스러운 얼굴로 립스틱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게임 경력(?)이 좀 되는 남자 셋은 비교적 빨리 골랐다. 주드랑 송선호는 어안이 좀 벙벙한 얼굴이었다. 다갈색 머리에 호감상의 주드는 송선호에게 순서를 양보했다.
“먼저 고르시죠.”
저쪽은 VVIP니까 말이다. 그러자 송선호는 열의 없는 손짓으로 그냥 하나 골랐다. 주드도 나머지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자들이 우어어 하며 자신에게 오라고 가슴을 열며 벌칙 팀을 부르고 있었다.
“퀸!! 나!! 나 해줘!!”
“좆 까, 멸치 새꺄.”
이미 그들은 누굴 정한 게 틀림없었다. 다들 한 방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얘네들 참 신박하고 재밌게 논다….’
킬스버그한테 한 수 배운다고 생각하며 흥미진진하게 사람들을 보고 있던 미르 킹쉴드는(아예 게임에서 제외당했다) 갑자기 여자 다섯 명이 우르르 자신의 품에 뛰어들자 좀 놀랐다.
“응??”
벌칙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어떻게 하나 보려고 했는데 다들 자신에게 달려든 것이다.
뭐… 그야 원래도 여자를 다섯, 여섯씩 데리고 살던 남자니 좀 놀라더라도 감당 못 할 건 없지 않은가. 천편일률적인 그의 걸즈와 달리 여기는 다들 개성이 넘쳐서 색다른 맛이 있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평소에 하듯이 여자들을 다 끌어안았더니 여자들이 아우성을 쳤다.
“악!”
“꺅!”
“이 새끼 뭐하는 거야!”
그러자 미르가 팔에 힘을 좀 풀고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 여자 다섯은 짜증이 난 얼굴로 그의 얼굴을 째려보았다.
“왜? 이러는 거 아냐?”
“누구 한 명 정해요!”
누굴 한 명 정하라니. 미르 킹쉴드의 사전에 굳이 품에 들어온 여자를 버리는 건 없었다. 몇 명이 되었든 말이다. 그는 여자들을 여전히 품에 가둔 채(아무도 못 빠져나갔다. 심지어 퀸도 못 빠져나갔다) 로웰을 보았다.
“굳이 한 명 정해야 돼?”
미르가 그녀에게 물었다.
“아뇨. 뭐 굳이… 능력만 있으시다면야….”
로웰이 다 하시라는(?) 듯이 두 손바닥을 내밀어 권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미르 킹쉴드가 환하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품속의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라는데?”
그러자 그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다들 미르 킹쉴드를 노리고 뛰어온 건 당연히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갑빠가 넓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길게 그리고 싶어도 도화지(?)가 작으면 소용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걸 서로 나눠야 한다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요 도화지가 원체 넓어야지….’
다들 미르 킹쉴드라는 훌륭한 도화지를 내려다보며 다시금 그를 가늠했다. 그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는 얼마든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대범한 남자니까 말이다.
그렇게 여자들 중 단 한 명만 자기는 다른 도화지(?)를 찾겠다며 떠나고 무려 나머지 네 명이 그를 선택하고 남았다.
“와… 이 벌칙 게임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시즈카와 서연이 혹시 반칙을 하는 사람이 없는지 지니 호의 인공지능 비서와 함께 미르 킹쉴드에게 붙은 사람들을 감시했다. 다들 구경하러 왔다.
“발 받침 좀!”
“저두요!”
미르 킹쉴드가 일어났다. 키가 원체 크다 보니 그의 사방에 선 여자들이 발 받침을 요구했다. 미르는 발 받침에 올라서는 도현의 허리를 잡아주었다. 등 뒤에 붙은 여자도 능숙하게 잡아주었다. 키가 큰 퀸은 그의 옆에 발 받침 없이 섰다. 180cm의 키를 가진 그녀였지만 그런 그녀보다도 20cm가 더 큰 미르 킹쉴드였다. 남자를 이런 식으로 올려다보는 게 어색할 지경이다. 다른 여자 하나는 미르의 다리 쪽을 준비하고 있었다.
“천천히 해. 천천히.”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기분이 퍽 좋은 얼굴이었다. 그걸 구경하던 남자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와… 부럽다.”
그러자 미르 킹쉴드가 씨익 웃으며 질시 어린 눈길로 쳐다보는 남자들을 훑어보았다. 승리자의 얼굴이었다. 원래 크고 강한 수컷이 모든 암컷을 독차지하는 법이다. 모든 암컷은 가장 강한 수컷을 택하고 싶어 한다. 그건 자연의 법칙이란 말이다.
미르의 앞판을 차지한 도현은(이것도 퀸과의 경쟁 끝에 가까스로 사수했다) 입술에 새빨간 색 립스틱을 잔뜩 발랐다. 그러면서 태평양처럼 넓고 탄탄한 미르의 육감적인 가슴을 보며 머릿속으로 루트를 그렸다.
‘D컵이 뭐야…. F컵쯤 되는 거 아냐?’
가까이서 보니까 더 대단하다. 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울끈불끈한 그의 양 가슴에 두 손을 대며 자세를 잡았다. 그의 가슴은 크고 탄탄했다. 한 손에 절대 들어올 생각을 안 했다. 넘친다, 넘쳐. 저도 모르게 그의 근육을 만지며 감탄했다.
“진짜… 미르는 몸이… 참….”
“더 만지게 해줄 수도 있는데?”
도현이 홀린 듯 감탄해서 그의 몸을 만지자 미르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목소리가 엄청 낮고 남자다워서 본능적으로 소름이 쫙 끼쳤다.
‘역시… 괜히 여자를 다섯 명이나 데리고 사는 건 아니야….’
도현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세상에 이 남자보다 더 ‘남자다운’ 남자는 없을지도 모른다. 호르몬이 확 느껴진달까.
“하… 멀티스크린.”
도현은 상품을 머릿속에 그리며 다시 집중했다.
“그럼 시작하시죠.”
다들 대충 자리를 잡은 것 같자 시즈카가 신호했다. 도현이 미르의 얼굴 쪽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그의 턱을 손으로 들게 하며 말했다. 아니, 네 명의 여자가 동시에 말했다.
“가만히 있어요.”
“가만히 있어.”
미르 킹쉴드는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알았어.”
그리고 네 명의 여자는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남신(男神)이 강림한 듯한 그의 육체에 입을 맞추었다.
도현은 그의 턱 끝부터 입을 맞추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이 남자는 체취부터가…. 미르 킹쉴드의 커다란 손이 도현의 허리를 잡았다. 그의 다른 손은 자신의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다른 여자의 뒤통수를 감쌌다. 도현이 천천히 입술로 그의 아름다운 육체를 그리며 아래로 내려가자 미르는 그런 그녀의 여성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손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올라오며 그녀의 어깨를 만졌다. 가슴 부분은 편하게 입술을 움직이던 그녀가 자신의 울퉁불퉁한 복근에서는 어렵사리 입술을 떼지 않고 천천히 움직였다. 아랫배가 확 긴장되었다. 핏줄이 더 강하게 올라왔다. 그녀가 미르의 배꼽 주변을 둥글게 그리며 선을 더 길게 이어 그리려고 하자 그가 인상을 약간 썼다. 등이나 팔이나 다리가 엄청 간지럽고 아찔했다. 뭘 본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윽….”
그는 못 참고 도현의 목을 감싸 잡으며 엄지로 그녀의 턱을 확 들게 했다. 당연히 입술이 떨어졌다. 도현이 깜짝 놀랐다.
“아…! 뭐하는 거예요, 미르!”
“와… 씨발. 나 못 참겠어.”
그의 말과 함께 도현은 자신의 가슴 가운데 뭉툭하게 압박감이 느껴져서 헉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 거린데…? 미르가 손에 힘을 풀어주자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
밑은 그래도 금발이 아니구나…. 수영복 위로 볼 때도 아슬아슬하구나 싶었지만 지금은 수영복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의 상체에 입을 맞추던 여자들은 그의 엉덩이 쪽으로 내려온 상태고 밑에서 올라오던 여자도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다들 벌칙도 잊고 입술을 떨어뜨렸다.
“…….”
“…….”
“…….”
한참 보다가 그들 네 명은 동시에 미르 킹쉴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으윽’하고 신음을 흘렸다.
“어떻게 좀 해봐.”
엄청 남자답고 섹시하다…. 남신이 화한 듯 강하고 크고 단단하고 훌륭한 육체의 남자가 그들을 원하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의 본능에 버튼이란 게 있다면 아주 주먹질을 당했다고 해야 하나….
“어허…! 어허! 어허! 안됩니다!!”
시큐리티와 라이프가드가 달려왔다. 엄연히 이 배도 풍기문란(?)에 대한 규칙이 존재했다. 대낮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곳은 안 된다. 정신을 화들짝 차린 여자들이 그에게서 떨어졌다.
‘와… 이런 건 처음….’
네 명은 다 비슷한 걸 생각하며 가슴이 두근두근한 걸 느꼈다. 아니… 다른 곳도 아니고 여긴 지니 호란 말이다. 여자 하나가 남자 여럿을 거느리는 게 당연한 곳인데….
“와… 윽… 죽는 줄 알았다….”
얼굴이 벌게진 미르 킹쉴드가 표정을 왕창 구기고는 시큐리티가 건네는 비치타월을 받아 허리에 둘렀다. 그 사이 시즈카와 서연이 상기된 얼굴로 미르의 얼굴과 몸을 힐끗거리며 디바이스를 이용해 네 명의 여자가 그린 선을 정확하게 측정했다.
“음, 퀸 게 제일 길고 킬스버그 님이 두 번째로 짧네.”
시즈카가 그렇게 말했다. 미르 킹쉴드는 바로 도현의 허리를 확 잡아당겼다. 그녀의 귀에 입술을 묻고 눈을 감았다.
“야… 네 방 가자. 어?”
“아, 안 돼요.”
도현은 두 손바닥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말을 더듬었다. 그의 얼굴에서 최대한 멀리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진짜… 진짜 안 돼요. 게임 중이잖아요.”
그리고 분명히 바이러스도 잔뜩 있을 거고…. 미르는 지금에 와서도 그런 말을 하는 도현을 진심이냐는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도현은 식은땀이 살짝 흐르는 걸 느끼며 그에게서 시선을 더 멀리 뗐다. 말릴 거 같다….
“알았어…. 하아… 후우….”
미르는 엄청나게 기합을 넣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후욱 내쉬었다. 그의 엄청난 가슴이 더 빵빵하게 커졌다가 가라앉았다.
그대로 그는, 미르 킹쉴드는 야외 수영장에 있는, 말 그대로 모든 여자들의 끈적한 시선을 받으며 밖으로 퇴장했다.
‘킬스버그 님 남자만 아니었으면 벌써 덮쳤다….’
엄청난 남자, 아니, 수컷이다…. 남자는 성격 같은 거 다 필요 없는 거구나…. 쩐다…. 그렇게 다들 침을 꼴깍 삼키며 오래도록 그의 잔상을 버리지 못했다.
*
“자자. 이제 남자들만 하면 되나요?”
현재 제일 짧은 사람은 미르 킹쉴드를 떠났던(?) 승무원 하나와 그의 다리에 선을 그었던 여자였다. 남자들은 당연히 같은 남자가 아니라면 누구든 좋았지만 여자들이 질색을 하며 싫어했다.
“제발~.”
“싫어! 저리 가.”
처음부터 게임에 적극적이었던 남자 세 명은 주야장천 거절당하고 있었다. 주드는 한숨을 쉬며 주변을 쭈욱 둘러보았다. 역시 해줄 만한 여자가 없는 것 같아서 흐릿한 눈으로 남자들도 살펴보았으나 역시 징그러웠다. 한숨을 쉬면서 있는데 흥미진진하게 남자들이 애원하는 꼴을 보고 있던 셀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는 오늘 근무였다. 셀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드를 검지로 가리키고 자신을 가리켰다. ‘나?’라고 묻는 것 같았다.
“어….”
주드는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다. 기대도 못 했는데… 괜찮은 건가? 주변에서 그걸 발견하고 ‘오오오!’하며 환성을 질렀다.
“아, 어제 빚진 거 갚는 거야!”
셀리가 그렇게 외쳤다. 되나 보다…. 주드는 엄청 긴장해서 굳었다. 이, 이런 건 난생처음이다…. 그는 보수가 좋고 여행도 다닐 수 있는 아르바이트라길래 이 일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그의 얼굴이 긴장으로 바짝 굳었다. 승무원복을 입고 있는 셀리가 목을 두른 스카프를 풀며 그에게 다가왔다.
“음… 다 벗어야 하나….”
아까 미르 킹쉴드라는 거대한 도화지를 택한 여자들이 어마어마하게 길게 그리는 걸 봤다. 주드는 셀리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니….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주드는 이미 민소매 셔츠의 단추를 풀고 있는 그녀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 게임하면 계속 벌칙 받아. 열심히 해야지.”
그녀가 셔츠를 벗자 육감적이면서 늘씬한 그녀의 상체가 드러났다. 남자들이 휙휙 휘파람을 불어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제는 머리를 풀고 있었는데 오늘은 틀어 올리고 있어 목선이 확 살아나 더 섹시해 보였다. 주드는 입을 쩍 벌릴 뻔해서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성기게 입을 가리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어제 그녀가 반라로 품에 뛰어들었을 때도 깜짝 놀라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음… 손끝에서부터 이렇게 발까지 가면 제일 길게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셀리는 그를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인지 그렇게 말했다. 주드는 눈이 핑글핑글 도는 것 같았다.
“어?”
“아… 그럼 속옷을… 아, 이렇게 하면 되겠다.”
끊기면 안 되니까 말이다. 그녀는 바지도 한 방에 내려서 벗었다. 양쪽에서 끈으로 묶는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팬티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등 뒤로 돌려 브래지어의 버클을 풀다가 주드를 올려다보았다.
“뭐해? 빨리 립스틱 발라.”
“어?! 어… 어….”
정신을 놓고 있던 주드는 얼굴이 뜨끈뜨끈한 걸 느끼며 립스틱 뚜껑을 열다가 뚜껑은 놓치고, 입술에 바른다는 게 아예 부러뜨리고 난리를 쳤다. 셀리가 그런 그를 보고 하하 웃더니 자신의 가슴을 속옷과 함께 한 손으로 잡아 가리며 당황하고 있는 그의 손에서 립스틱을 빼앗았다.
“이렇게 하는 거야.”
그녀는 부드럽게 그의 뺨에 손바닥을 받치고 꼼꼼하게 그의 입술에 립스틱을 발라주었다. 그녀의 얼굴이 가깝고 내리뜬 금색 속눈썹이 예뻤다. 주드는 진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의 향수 냄새가 났다. 너무 가까웠다.
“자.”
몇 번에 걸쳐서 엄청 두텁게 발라준 셀리는 그렇게 립스틱을 든 채 손을 뗐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알았지?”
“어….”
뭘까…. 그냥 하라는 대로 하게 된다. 손에서 땀이 났다. 주드는 손으로 셀리의 왼손을 살짝 받쳐 들고 그녀의 손등부터 입술을 미끄러뜨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약간 건조한 피부를 타고 올라갔다. 손목과 팔, 어깨… 그리고 가슴 쪽으로 내려오는데 진짜 콧김이 확확 나왔다.
“밑으로 계속….”
셀리가 말했다.
‘아니까 말하지 마.’
그렇게 대꾸하고 싶었다. 그녀의 말이 왠지 너무 야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대로 그녀의 가슴 옆으로 입술을 내려가는데 긴장되어서 심장이 목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상한 곳을 더듬고 싶지 않아서 그녀의 배와 등허리를 잡았더니 셀리가 ‘앗.’하며 움찔했다.
“간지러워.”
주드는 헉하고는 침을 꿀꺽 삼키며 겨우 계속 내려갔다. 그녀의 오목한 허리를 지나 둥글게 나온 골반으로 내려오니 또 엄청 긴장되었다. 그녀가 미리 속옷의 왼쪽 끈을 풀어주었다.
‘섰다…. 젠장….’
주드는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리고 빨리 그녀의 발목까지 확 내려가고는 벌떡 일어나선 옆에 있는 벽에 딱 붙어섰다. 시즈카가 셀리에게 다가갔다.
“오오! 딱 봐도 제일 길어.”
“진짜.”
셀리는 자기 일인 듯 기뻐해 주었다. 어쨌든 어제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도와준 상대였으니까 도와주고 싶었다. 셀리도 170이 넘는 키니 작은 키는 아니다. 손등부터 발목까지 하니 2미터를 넘긴다.
“오.”
시즈카는 벽에 딱 붙어선 주드에게 엄지를 들었다. 주드는 ‘하하….’하고 한 번 웃고는 다시 벽에 머리를 박고 애국가를 계속해서 되뇌었다.
다른 남자들도 어찌저찌 상대를 구해서(“아악! 악! 간지러워, 새꺄! 남자 냄새 토 나와!”) 벌칙을 끝내니 미적거리던 송선호만 남았다. 송선호도 딱히 주목을 받고 싶은 건 아니라 도현에게 다가갔다.
“양심 없어.”
도현은 게임에도 성의 없이 참가했던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도 그걸 알고 인상을 팍 찌푸리며 시선을 내렸다. 그래도 다른 사람은 싫다. 그가 말했다.
“…상품 타면 너 줄게.”
“진짜?”
“어.”
“어떻게 하게. 나 셀리랑 키 비슷한데. 오늘 수영복도 이래서….”
도현도 상품 욕심은 아직 남아 있는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확인했다. 송선호는 한숨을 쉬며 립스틱의 뚜껑을 열었다.
“내가 알아서 할게.”
송선호는 능숙하게 자신의 입술에 립스틱을 발랐다.
‘응? 남자도 빨간 립스틱 바르면 섹시하구나….’
잘생긴 남자라서 그런 건가, 송선호라서 그런가…. 약간 신경질적인 미간에 내천자를 잡은 그의 입술이 핏빛처럼 새빨개졌다. 근육질의 아름다운 그의 육체는 골격부터가 건장했다. 서로 키 차이도 자로 재서 맞춘 듯하고. 도현은 잠시 립스틱을 바르고 있는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물론 송선호는 곧 빠르게 자신의 입술을 립스틱 떡칠로 만들었다. 소세지 입술이 되었다. 상품을 타서 준다고 했으니 제대로 할 생각인가 보다.
“가만히 있어.”
송선호가 그렇게 말하고는 도현을 뒤로 돌려세웠다. 그는 도현의 왼쪽 새끼손가락부터 시작했다. 그는 빠르게 쭉 팔을 타고 올라가 어깨까지 향했다.
“야, 그렇게 빨리하면 끊겨.”
도현이 약간 놀라서 자신의 팔을 보았는데 엄청 립스틱을 바르더니만 깔끔하게 선이 쭉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가 도현의 머리카락을 모아 잡아 어깨 앞으로 넘기며 그녀의 어깨에서 약간 한숨을 쉬더니 날개뼈 쪽으로 내려가 그녀의 엉덩이로 또 한 방에 쭉 내려왔다가 그녀의 목으로 올라갈 때는 또 천천히 올라가고 다시 엉덩이로 내려갔다가 그녀의 옆구리를 타고 올라와 오른쪽 팔을 쭈욱, 그리고 처음과 같이 새끼손가락에서 마무리하고 입술을 뗐다. 등과 허리가 엄청 간지러워서 도현이 좀 움찔움찔했다. 참는다고 참았는데도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송선호는 자신의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벌건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재 봐.”
도현은 자신의 등을 볼 수 없으므로 제대로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즈카, 어때? 셀리보다 길어? 응?”
“잠깐만요. 재볼게요.”
시즈카는 디바이스의 길이 측정 앱을 이용해서 립스틱 범벅이 되어 있는 그녀의 팔과 등을 찍었다.
“어! 최고 기록인데요. 2m 92㎝요.”
“대박!”
도현이 기뻐했다.
“하면 제대로 한다니까.”
도현은 득템하자 완전 좋아하면서 송선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송선호는 당연히 기겁했다.
“야! 떨어져!”
당연히 도현도 그렇게 기쁨을 표현하곤 그에게서 바로 떨어졌다. 도현은 상품을 끌어안고는 켜서 확인해보았다.
“아… 근데 계속 선생님이 이런 아이템을 들고나오니까 저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요…. 이것도 결국 그렇게 상품으로 쓰이는 거 아냐….”
도현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송선호는 약간 빡쳤다. 기껏 사람이 상품으로 타줬더니만….
‘됐어…. 이제 가만히 두겠지.’
하도 많이 발랐더니만 립스틱이 아무리 닦아도 안 지워졌다. 송선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어가며 계속 손바닥과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사람들은 이제 점심을 기다리며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거나 선탠을 하기 시작했다.
‘충전이야 다 됐을 거고….’
그는 자신의 비행차에 대해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여기 있으나 없으나 사실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미르 킹쉴드나 다니엘 스톤하츠와 뭔가를 하고 싶다면 그가 있든 말든 할 것이다. 그렇다고 송선호에게 그런 기회가 올 거라는 생각은 거의 들지도 않는다. 그녀는 그의 마음을 알게 되니 오히려 그것으로 놀리려고만 들었다. 그녀에게 심하게 대해 왔으니 자업자득이라면 자업자득이겠지만…. 송선호는 방에 도착해서 수영복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그리고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 나와 거울을 보는데 얼굴이 여전히 엉망이었다.
“이건 뭔데…. 계속 안 지워지고….”
요즘 립스틱은 전용 제거제가 없으면 아예 묻어나오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송선호는 자연스럽게 입술을 계속 닦으면서 욕실 밖으로 나갔다.
“네.”
문을 열어주었다. 앞에는 도현 킬스버그가 수영복을 입은 그대로 서 있었다.
“하하. 너 이럴 줄 알았다.”
도현이 송선호의 얼굴을 보면서 그렇게 웃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송선호는 얼떨결에 뒤로 물러나서 그녀가 들어올 수 있게 해주었다.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그녀는 손에 웬 병과 화장솜을 가져왔다. 그녀는 화장솜 하나에 병에 든 액체를 잔뜩 묻혔다.
“이리 와.”
안 온다. 도현은 별다른 말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송선호의 긴장한 얼굴을 화장솜으로 슥슥 닦았다.
‘아…! 미친!!’
순간 송선호는 자신이 바스타월 빼고는 하나도 입고 있지 않은 허술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그녀도 어제보단 면적이 넓어도 야하기 짝이 없는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수건이 흘러내리기라도 한다면…. 송선호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나기 시작했다.
“아! 야, 땀 흘리지 마. 안 닦이잖아.”
“…….”
그게 마음대로 되면 이러고 있겠냐! 송선호는 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도현이 ‘하하’ 소리를 내서 웃었다.
“너 이렇게 눈 감고 있으면 뭔가… 무방비해 보인단 말이야. 괜히 괴롭히고 싶어진다고.”
도현의 말에 송선호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눈을 천천히 떴다. 얼굴이 뜨끈뜨끈한데 그녀가 새 화장솜에 액체를 묻혀 바르니 그것이 증발하며 시원한 느낌이 배가되었다.
“다 됐다. 아마 또 안 씻어도 될 거야.”
도현은 송선호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확인을 하며 그렇게 말했다.
“벌써 쉬려고? 아직 해 많이 남았는데? 수영해. 아깝게.”
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다 쓴 화장솜을 휴지통에 버렸다. 송선호는 계속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녀와 둘만 있으면 이제 이런다. 도현은 ‘응?’하고 송선호의 손을 잡았다.
“너 손도 닦아야겠네.”
그 순간 송선호는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
“…….”
어째서인지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이 긴장감은.
나만 느끼는 것일까.
송선호는 잡고 있는 부드러운 손과 깍지를 꼈다. 그녀가 가만히 있었다. 사실 어제부터 그녀가 더 주체적으로 송선호와의 성적 긴장감을 팽팽하게 밀고 당기고 있었다. 게다가 아까 미르 킹쉴드 때문에 흥분했던 것도 있고…. 둘 다 성인 남녀다. 단둘밖에 없는 방에 반라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송선호는 그녀를 테이블 옆의 벽으로 부드럽게 밀었다.
“아… 이런 건 좀….”
도현이 벽과 송선호의 사이에 갇혀서 작게 불평했다. 그는 도현의 얼굴을 일렁이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어제는 그녀의 관찰하는 듯한 무언의 태도에 자신을 다 드러내는 게 꺼려졌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분위기가 다르다. 그녀의 표정도… 열기도….
송선호는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처음으로, 정말로 그녀와 키스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도현이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의 입술과 자신의 입술 사이를 막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바닥에 입술이 닿자 송선호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이러기 전에 너도… 검사부터 받아서 보여줘.”
“나 깨끗해.”
“여자랑 한 번이라도 할 거 했으면 모르는 거야. 여기 방에도 키트 있어.”
진심인가? 이 분위기에? 하지만 도현은 송선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서 처음이라고 말하면… 그녀가 얕볼 것이다. 송선호는 약간 몸을 떨어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어디 있는데.”
“침대 옆 서랍에.”
송선호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손과 깍지를 낀 채 뻐근한 얼굴로 걸어가서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키트를 한 손으로 땄다. 그랬더니 갑자기 사람 목소리가 들려서 둘 다 깜짝 놀랐다.
[STD 검사 키트 사용 시 추가 요금이 붙습니다.]
“어… 미쳤다. 이런 건 안 나와야지….”
배 주인인 도현이 경악해서 천장을 보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컴플레인이 안 들어왔는데 아무도 이럴 때 안 썼다는 말 아닌가.
“하하. 진짜… 하하하.”
도현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확 터뜨렸다.
‘씨발… 어떡하지….’
송선호도 깜짝 놀란 채 굳었다. 분위기가 깨진 건 당연했다. 아까는 자연스럽게 그녀와 분위기를 탔는데 금방 그걸로 정신 차리니 다시 손에서 땀이 난다.
“지니야, 내 권한으로 이 알림 꺼줘. 나중에 객실 비울 때 손님들한테 청구하면 돼. 여기 탈 정도면 그렇게 수전노도 아닐 텐데.”
[알겠습니다. 대신 입실안내서에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사전알림 안 하면 불법이거든요.]
“알았어.”
도현이 여전히 웃긴지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딱딱하게 굳어서 서 있는 송선호를 돌아보았다.
“뭐해?”
도현은 송선호의 손에서 키트를 빼앗았다. 그리고 그의 턱을 확 잡고 입을 벌리게 해서 그의 혀를 푹 찔렀다.
“윽.”
그는 땀이 흥건한 송선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떼며 키트를 흔들었다. 그리고 보니 송선호의 말대로 깨끗했다. 도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의외네…. 너도 이런 거 관리해?”
“…….”
어쩐지 다시 취급이 좀 험해지는 것 같다…. 분위기가 깨졌는데도 그녀는 계속할 생각인 거 같은데. 송선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야말로 해. 네가 남자를 얼마나 만났는데.”
그러자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웃었다. 그녀는 송선호를 침대로 밀었다. 송선호가 침대에 털썩 앉았다. 도현은 새 키트를 꺼내서 땄다. 그리고 송선호의 어깨를 밀며 그를 침대에 눕히고 그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를 내려다보며 혀를 낼름 내밀고는 키트의 바늘을 대었다. 그녀의 혀에 피가 맺혔다.
‘젠장… 또….’
그녀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요염한 분위기가 확 강해졌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아팠다. 그녀는 슬렁 키트를 흔들고는 보았다. 그리고 송선호에게도 보여주었다.
“나한테 하라고 한 남자는 네가 처음이네.”
그리고 키트를 멀리 던졌다. 그녀는 송선호를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송선호의 하반신을 가린 수건도 어느새 흐트러졌다. 바로잡을 생각도 못 했다. 오늘은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윽….”
괴롭다. 견디기가 힘들다. 송선호는 자신의 어깨 옆을 짚은 그녀의 손목을 손으로 꽉 잡았다. 도현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키스해주세요, 라고 말해봐.”
송선호는 인상을 더 찌푸렸다.
“말해. 그럼 해줄게.”
“…싫어.”
“왜? 하고 싶잖아.”
“너야말로 아까부터 발정 났잖아.”
송선호가 낮게 가라앉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미르 킹쉴드와 벌칙을 하던 걸 말하는 것이다. 도현은 몸을 좀 더 낮춰서 그의 얼굴 양옆에 팔꿈치를 대며 엎드렸다. 그녀의 수영복이 피부에 닿는 게 느껴지자 그의 몸에 소름이 확 끼쳤다. 그녀의 허벅지가 그의 허리에 닿고 있었다. 그녀는 피부가 탄력 있고 부드러워서… 송선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말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
“그냥 해.”
“나 사랑한다고, 어떻게 하면 되냐고 울 때는 언제고.”
송선호는 그녀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화난다…. 남의 마음 가지고 또…. 도현은 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을 꼬면서 물었다.
“근데 왜 가르쳐줘도 못 해?”
“가르쳐주긴 뭘 가르쳐줘. 씨….”
송선호는 속으로 욕을 삼키면서 신경질을 냈다. 지금 이 긴장감은 너무 견디기가 힘들었다. 온몸에서 땀이 엄청 났다.
정말 좋아하는 여잔데도, 아직 사귀기도 전인데도, 아니, 사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이렇게 기싸움부터 하게 되는 이유가 뭐일까.
“그냥 해.”
송선호는 용기를 내 손을 움직여 그녀의 등을 쭉 쓸어올렸다. 그녀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으응….’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도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주인님, 키스해주세요, 라고 말하라니까?”
“너 지금 네 작품 흉내 내냐?!”
“뭐 어때. 해.”
“싫다고.”
송선호는 그녀의 등허리를 손톱으로 천천히 부드럽게 긁었다.
“아, 거기 안 돼. 앗.”
“그러니까 그냥 해.”
도현은 상기된 채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목을 한 손으로 감싸 잡으며 그의 목젖을 엄지로 긁었다. 송선호가 깜짝 놀라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빨리 말해.”
그녀가 귀에 속삭였다. 송선호가 이를 꽉 깨물었다. 미추가 엄청 찌릿했다.
“안 해! 너나 해!”
“아!! 이렇게 고집불통인 남자도 네가 처음이야!”
도현이 화를 냈다.
“벌써 선 주제에!!”
“어쩌라고!! 하고 싶으면 네가 말해!”
송선호도 지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한참 입씨름을 하다가 얼굴이 벌건 채로 서로 멀리 떨어져 앉았다.
“…나 간다.”
도현은 씩씩거리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바로 방을 나갔다.
“…….”
‘아… 이 병신….’
송선호는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 잡으며 뒤로 드러누웠다.
*
남자 두 명 때문에 아주 오랜만에 스위치가 켜진 도현 킬스버그는 현재 심각한 욕구불만이었다.
‘아… 집에 있는데….’
독일제의 훌륭한 자극기는 집에 두고 왔다. 스트리퍼를 불러 빨게 하자니 점수대가 높은 남자들 때문에 달아오른 거라 다소 불만스러울 것 같다. 그래도 급한 대로 어쩔 수 없으니까…. 도현은 퀸룸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온몸에 스킨케어 제품을 싹 바른 후 멀티스크린을 눌러 승선한 남자들의 목록을 쭉 보았다. 현재 다른 여자랑 조금이라도 감정적 관계가 있는 남자들은 제외하고 프리한 이들 중에서 타입으로….
‘없다….’
여기 근무하는 남자나 스트리퍼도 고르고 골라 뽑은 이들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레벨이 나뉘는 법이다. 역시 괜찮은 남자들은 이미 다 채갔다. 여자가 논다고 해서 모든 남자를 돌려가며 쓰는 게 꼭 재밌는 건 아니니까. 외모가 훌륭한 건 기본이고 어느 정도 대화도 되고 취향도 맞아야지 좋은 것이다. 매일 다른 남자를 쓰는 건 병균만 신경 쓰인다. 어차피 그런 건 남자한테나 좋은 짓이었다. 그들이 어디서 도현과 같은 사람 가까이에라도 와보겠는가. 도현이 삽입섹스를 안 해준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속된 말로 ‘꽁씹’인 것이다. 도현은 그런 취급을 순순히 받아들일 정도로 자기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그녀에게 그녀 자신만큼 중요한 존재는 없었다.
뭐, 엄청 급이 높은 최상품만 있다면 조금 다른 얘기지만….
‘미르는… 안 돼. 분명히 바이러스랑 병균 덩어리야. 송선호… 이 등신.’
그렇다면 한 명밖에 없다.
“아… 다니엘 씨….”
도현은 편안하고 캐쥬얼한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다니엘 스톤하츠.
너무나 아름다운 얼굴, 보석 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신비스럽다. 기다랗고 매끈한 검은 머릿결과 탄탄하고 늘씬한 근육, 훤칠한 키에 진중한 분위기…. 사귀는 남자에 대한 도현의 기준치를 모두 만족시키는 남자였다. 특히나 외모는, 그와 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남자는 그 외엔 단 한 명밖에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현재 도현에게 가장 열성적이고 진지하게 대시를 하고 있는 남자였다. 꽤 마음에 들었다. 무뚝뚝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귀여운 면도 많고. 열심히 하는 걸 보면 괜히 놀리고 싶기도 했다. 동정이라면서 또 하면 하는 대로 제법 잘하고 흥분한 얼굴도 엄청 섹시했다. 냄새도 좋고 몸도 만지면 뿌듯할 정도로 기분 좋고… 데리고 다니면 꽤 으쓱하고….
도현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한숨을 쉬었다.
‘근데 너무 진지해서…. 하아….’
하지만 의외로 그는 지니 호에 와서 도현이 노는 것을 보고도 간섭하거나 이래라저래라하지 않았고 지니 호의 룰에 잘 따랐으며 여전히 도현에게 열심히 어필하고 있었다. 그런 걸 보면 좀 더 진도를 나가도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발기부전이랬는데…. 그래도 꽤 잘 서던데?’
물론… 입으로 잘하는 것과 거기랑은 큰 상관이 없으니 괜찮다 치더라도, 그래도 엄청 잘생긴 남자라 흥분해서 기분 좋아진 것도 보고 싶은데.
‘그럼 확인이나 해볼 겸 오늘…?’
머리를 빗는 것만으로도 간편하게 세팅되면서 머리를 말려주는 드라이어를 사용해 머리를 말끔하게 한 도현은 한 번 더 스킨케어 제품을 가볍게 덧바르고 자외선 차단 기능이 있는 베이스만 바르고 입술을 살구빛으로 발랐다. 더운 곳이라 화장하면 답답하기만 하다. 그리고 다니엘 스톤하츠가 어디 있는지 찾았다. 곧 점심시간이니 야외 수영장에 그대로 있을까?
“지니야, 다니엘 씨 어디 있어?”
디바이스에 대고 물었다.
[지금 트레이닝 클럽에 계십니다.]
“응?”
밥 먹기 전에 운동인가. 도현은 그를 찾아서 1층으로 내려갔다. 이런 시간대니 당연히 트레이닝 클럽에는 아무도 없었고 다니엘 스톤하츠만 있었다. 그는 추를 엄청 달고 벤치 프레스를 하고 있었다.
“다니엘 씨.”
도현은 조용히 다가가서 벤치에 누워 있는 다니엘의 얼굴 위로 빼꼼 고개를 숙였다. 다니엘이 깜짝 놀라더니 손이 미끄러졌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도현이 저도 모르게 다니엘이 들고 있는 걸 잡았다가 엄청난 무게에 꺅 하고 휘청했다.
“도현 씨…!”
다니엘이 엄청 놀라더니 순간 도현과 역기와 벤치프레스 등이 동시에 두둥실 떠올랐다.
“아…! 다니엘 씨…!”
마법으로 인한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는 건 처음인 도현은 허우적거리지도 못하고 굳어버렸다. 그리고는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다니엘은 손을 뻗어서 도현의 손을 잡았다.
“그건 손 떼십시오.”
“아, 네.”
도현은 얼른 역기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차분히 벤치와 역기가 먼저 바닥으로 향했다. 툭 하는 가벼운 소리만 내고 바닥에 얌전히 놓였다. 그리고 다니엘 스톤하츠가 먼저 벤치 위에 서고 도현의 손을 끌어당겨 그녀도 벤치의 위에 서게 했다.
“와… 공중부양 마법인가요?”
“이건 반중력 마법입니다.”
다니엘과 알게 되면서 치료마법을 하는 건 몇 번 본 적 있었다. 오늘 미르를 공으로 노렸던 것도 마법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이게 제일 신기한 것 같다. 도현이 상기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짜 신기하네요…. 마법 좋다…. 다니엘 씨는 하늘도 막 날아다닐 수 있어요, 그럼?”
“네. 하지만 도심에서는 못 합니다. 비행차나 드론의 경로에 들어갈지도 몰라서요.”
“와… 그럼 여기서는 괜찮나요? 아무것도 없는데….”
“아마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날아보고 싶으십니까?”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은 자신의 얼굴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남은 단백질 셰이크를 다 마셨다.
“일단 씻어야 할 것 같습니다. 3분만 기다려주십시오.”
“네.”
다니엘은 트레이닝 클럽의 샤워실로 들어가더니 3분 만에 멀끔해져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아마 이것도 마법을 쓴 건 아닌가 싶었다. 마도사는 일반인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살지 않을까. 도현은 생각했다.
“일단 제 방으로 갈까요? 제일 높은 데 있어요.”
그들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근데 갑자기 웬 운동이세요? 다니엘 씨가 더 운동할 게 뭐 있으시다고….”
도현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다니엘이 앞을 보며 대답했다.
“도현 씨가… 몸이 큰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아….”
오늘 미르 킹쉴드가 원체… 도현은 뭔가 살짝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도현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여자들도 다 봤다. 딴짓을 한 것도 아니고 벌칙 때문에 손댄 것 말고는 보기만 했는데…. 뭔가 바람을 피운 게 아니냐고 에둘러서 추궁당한 느낌이었다.
“다니엘 씨도 좋아요. 정말 멋있는데…. 그런 거 비교 안 해요.”
도현이 그렇게 말했다. 다니엘이 여전히 무뚝뚝한 목소리로 답했다.
“거짓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도현 씨 취향대로 다 만들 수 있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도현은 그의 얼굴을 보았다가 살짝 주저하다가 말했다.
“그럼 전체적으로 조금만 더 크게… 가슴이랑… 팔이랑… 엉덩이랑….”
다니엘의 몸은 근육이 꽤 뭍어 있었지만 키가 커서 호리호리한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운동선수도 아닌 송선호보다도 약간 슬랜더한 느낌이다. 조금 불쾌해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도현은 3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다니엘을 관찰했다. 이렇게까지 말을 잘 듣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이렇게까지 그녀를 위해 뭐든 하겠다는 남자도 말이다. 언제나… 뭐랄까. 남자들은 타산적이지 않은가. 간이라도 빼줄 듯하다가도 결국엔 더 큰 걸 바란다. 물론 다니엘 스톤하츠도 도현과 연인이 되고 싶어서 이런 거겠지만, 그럼에도 도현의 생활이나 이번 여행에 대해서 일언반구 하지 않으면서도 도현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도현 킬스버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고지식할 줄 알았는데….’
너무 송선호가 그러니 미르 같은 스타일 아니면 송선호 같은 스타일의 남자만 있을 거라고 은연중에 분류를 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3층의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 도현은 퀸룸의 문을 열었다. 다니엘이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멋진 방이네요….”
“그렇죠? 풍경도 멋있어요.”
“네.”
다니엘은 이런 풍경은 처음 봐서 눈을 좀 크게 뜨고 방 안과 밖을 보았다. 다니엘 스톤하츠야 이런 것은 완전 문외한이었지만 원래 좋은 것은 한눈에 봐도 좋은 법이다. 도현이 이런 것에 취향이 고매하다는 것만은 간신히 눈치챌 수 있었다.
“여기에요, 테라스.”
도현이 방문으로 들어와 직선으로 쭉 걸어 인피니트 윈도우의 한쪽 면을 열었다. 크루즈의 전면과 바다를 바라보는 멋진 테라스가 나왔다.
“제 발 위에 서시겠습니까?”
다니엘이 도현의 한쪽 손을 자연스럽게 잡으며 살짝 끌어당겼다.
“어… 아까처럼 못 나는 건가요?”
“마도사 본인의 몸은 항상 인지 상태에 있기 때문에 마법 조절이 자동적인데 다른 사람의 몸은 좀 신경 쓸 게 많아서요. 이게 더 안전합니다.”
다니엘은 그렇게 말했다가 아차 하고는 변명하기 시작했다.
“도, 도현 씨를 만지기 위해서 수작 부리는 것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하하하.”
다니엘의 무뚝뚝한 얼굴이 확 긴장하며 난처한 표정을 짓자 그게 귀여워서 도현이 웃었다. 그녀는 다니엘의 발 위에 서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실 제가 다니엘 씨를 만지고 싶어서 수작 부리려고 했는데요, 오늘.”
“…….”
도현은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다니엘의 귀가 살짝 빨개졌다.
“그럼 일단….”
다니엘이 천천히 공중으로 몸을 띄우기 시작했다.
“앗….”
생각보다 엄청 무서워서 다니엘을 꽉 끌어안았다. 도현의 머리카락도 두둥실 뜨면서 아까만큼은 아니지만 중력의 느낌이 줄어드는 감각도 들었다. 한 5m 정도 떠올랐을까.
“섬으로 가보시겠습니까?”
“아… 잠깐만요…. 너, 너무 무서워요…. 으….”
발밑을 보니 눈이 핑글핑글 도는 것 같았다. 고소공포증 같은 건 있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안전장치도 없이 맨몸으로 떠오른다는 게… 아무리 마법이라고 머리로는 알겠지만 눈에 보이는 게 없으니 엄청 무섭다. 단번에 떨어지는 것만 계속 생각났다. 그럼 지니 호의 난간이나 테라스에 부딪혀 정말 고통스럽게….
“알겠습니다. 내려가겠습니다.”
다니엘이 천천히 공중에서 다시 테라스로 내려왔다. 바닥에 발이 닿았지만 도현은 오금이 저려서 다니엘을 놓을 수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천천히 올라갈 걸 그랬나 봅니다.”
다니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현의 얼굴을 살폈다. 도현도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공포가 가끔 그런 충동을 일게 한다고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도현은 그의 셔츠를 끌어당겼다. 입술이 맞닿았다.
“…!”
다니엘은 숨을 들이켜더니 도현의 한쪽 손목을 잡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입맞춤을 나누었다. 도현이 살짝 입술을 떼자 다니엘이 그녀와 이마를 맞대며 낮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안 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왜요?”
“점수가 깎여서….”
다니엘의 말에 도현이 웃었다.
“그게 뭐예요?”
“어제 저에게 화가 나지 않으셨습니까. 킹쉴드와 싸움을 벌여서….”
“그래도 절 위해 그러셨던 거잖아요. 알아요.”
“도현 씨….”
그들은 다시 입을 맞추었다. 키스를 하며 도현의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도현의 침대에 그녀를 털썩 눕혔다. 잠깐 입술을 떼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단 둘뿐이었다.
“도현 씨.”
“네?”
“좋아합니다.”
“알아요.”
“도현 씨는 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다니엘 씨가 좋아요.”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다니엘은 벌건 얼굴로 못 참겠다는 듯이 다시 도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부드럽고 기분 좋은 키스였다. 온몸이 간질간질한 느낌이다. 도현은 서서히 다시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쯤 되면 그가 좀 스킨십을 할 줄 알았는데. 이 배에 처음 온 날은 생각보다 손이 빠르더니 오늘은 어쩐지 많이 조심하는 것 같다.
“으음….”
도현은 살짝 불만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상대는 동정에 원래 숙맥이었다. 여기저기 만져지고 얼른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일단 그의 셔츠 단추를 풀고 그의 어깨를 확 내렸다. 다니엘이 움찔했다. 도현은 그의 섹시한 목덜미와 어깨, 가슴과 허리를 쭉 만져내려 갔다.
“하아… 도현 씨….”
다니엘이 입술을 떼며 신음을 했다. 무뚝뚝하기 짝이 없던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꽃이 피듯 화려해졌다. 반짝이는 보랏빛 눈동자, 상기되어 분홍빛을 띠는 피부. 그는 흥분하였다. 주저하던 금방의 태도는 버리고 바로 도현의 양 허벅지를 자신의 허리에 걸치게 했다. 그리고 도현의 원피스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으응….”
그의 것이 다리 사이를 누르자 도현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신음을 흘렸다. 그의 것은 훌륭하게 발기하고 있었다. 다니엘이 도현의 허리를 만지며 그녀의 원피스를 가슴 위까지 끌어올려 벗겼다. 이제 도현은 오로지 검은색 속옷만 입은 상태였다. 다니엘의 심장이 쿵, 쿵 뛰었다. 땀이 난다. 도현이 다니엘의 셔츠를 벗겼다. 그녀가 자신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아직 이 정도로 점수를 채운 것 같진 않은데. 가설이 잘못된 건가.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사라졌다.
‘천천히… 천천히.’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것만 생각했다. 그녀에 대한 마음을 왜 끊을 수가 없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도 오래전이다. 이제는 이 끌림이 그가 가진 전부인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도에 관한 게 아니라면 다니엘 스톤하츠는 언제나 세상에 무감각했다. 한 번에 사람을 11만 5천 명이나 죽여도 별 감흥이 없었다. 사람들이 괴물이라 부르고 수군거려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이 그저 많이 ‘이상한 인간’이라는 것만 인지하고 있었다. 분명히 어릴 때의 그는 평범하게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소년이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죽인 군인의 가족을 돕는 것도 그런 자신의 이상함을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별로 소용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구제불능의 자신을 평범한 남자로 만들어 주는 게 바로 도현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저항할 수 없이 끌렸다.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스스로가 놀랍고 그를 그렇게 만들어 주는 도현이 고마웠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이런 게 운명이란 걸까.’
다니엘도 속옷만 남긴 채 전부 벗었다. 그의 멋진 몸이 에어컨디셔너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뜨거운 열기를 내고 있었다.
“이대로 해요….”
도현이 속삭였다. 다니엘은 그녀가 말하는 대로 뭐든 할 생각이었다. 다니엘은 그녀의 부드럽게 착 달라붙는 허벅지를 만지며 서로의 몸을 맞댄 채 천천히 문질렀다. 이것이 다니엘 스톤하츠의 첫경험이었는데도 본능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그도 결국 인간이었던 것이다.
“으응… 하아….”
그녀가 흥분하고 있었다. 붉어지며 느끼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건 충격적이었다. 시각적 정보가 그 수용자에게는 너무나 자극적이다. 심장을 마구 떨리게 했다. 그녀는 예쁜 눈을 감고 눈살을 약간 찌푸린 채 점점 가쁘게 숨을 쉬었다. 다니엘은 그녀의 얼굴에 찬양을 바치는 것처럼 입을 맞추었다.
“도현 씨… 너무 예뻐요….”
그가 홀린 것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니엘도 기분이 좋았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중러전쟁 이후로는 아예 자위도 안 될 정도였으니까 이런 센세이션 자체가 몇 년만이었다. 그리고 그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느꼈다. 여자와 이렇게 몸을 맞대는 것도, 사랑하는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것도 처음이다. 금방 끝나버려서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서 뭐든지 하고 싶었다.
그녀를 위해선 뭐든 할 것이다.
‘하아… 벗기고 싶다. 넣고 싶어. 입에도… 부드럽게 하고 싶지 않아. 아프게 하고 싶다. 울리고 싶다. 나에게 애원하게 만들고 싶다. 그러면… 그러면 더 많이… 많이 뭔가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동시에 다니엘의 안에서 위험한 충동이 일었다. 다니엘은 도현의 한쪽 가슴을 쥐며 그녀의 가슴골에 얼굴을 묻었다.
이대로 그녀의 속옷을 강제로 벗겨서 그녀의 가슴을 꽉 깨물고 싶었다. 젖꼭지를 물고 혀로 희롱하고 빨갛게 부어오를 때까지 씹어보고 싶었다. 그러면 그녀가 어떤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자신에게 애원할지 궁금했다. 옛날에 그에게 목숨을 애원했던 무지렁이 같은 사람들과는 다를 것이 분명했다. 가슴이 떨리고 흥분이 될 것이다. 그녀를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안 돼….’
다니엘은 충동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했다.
“아앗… 아으… 떨어지지 마….”
다니엘이 맞붙인 하반신을 떼고 도현의 가슴에서 점점 얼굴을 미끄러뜨려 아래로 내려가자 도현은 더 흥분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다니엘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으며 그의 머리를 아래로 힘을 주어 눌렀다.
세련된 취향에 고급스러운 느낌을 지닌 그녀였지만 동시에 묘하게 색기가 돌고, 위압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했다. 남자라면 누구나 그녀의 욕망을 채워주고 싶어질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은 그녀의 그런 행동에 매우 흥분했다. 속옷이 찢어질 것 같이 부풀었다.
차라리 그녀가 이런 자신을 마도구로 묶어서 결박해주었으면 좋겠다. 그의 힘으로도 끊을 수 없는 아주 강력한 것으로. 온몸을 움직일 수 없게 꽉 묶어줬으면 좋겠다. 그녀에게 심한 짓을 할 생각을 하는 자신을 추궁하고 채근해서 전부 알아낸 뒤 조목조목 혼내주었으면 좋겠다. 회초리로 때리고 윽박을 지르며 잘못했다고 빌라고 명령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기꺼이 따를 것이다. 그 상태로 그녀를 핥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싶다. 그리고 그녀가 끝까지 허락해주지 않기를 바랐다.
‘아니…. 그래도 진짜 핥고 싶다…. 아냐, 그녀가 허락해야….’
강렬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다니엘은 자신의 충동을 계속해서 억눌렀다.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그 마음이 저런 충동 따위보다 훨씬 위에 존재하고 있었다.
“다니엘 씨….”
그녀가 저런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다니엘은 도현의 배꼽을 핥다가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를 강하게 짓눌렀다. 그리고 드디어 도현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달콤한 향기를 맡자 헉하고 그녀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내부의 욕망이 그를 갈기갈기 찢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 어떤 것에도 무감하던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저한테… 저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도현 씨….”
“네…?”
그의 눈 밑에 깊게 그늘이 졌다. 그리고 동시에 붉게 흥분한 얼굴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창 기분이 좋다가 그런 소리를 듣자 도현은 좀 황당했다. 그리고 그의 눈빛에 놀랐다. 격렬한 감정이 드러나는 보랏빛 눈동자는 심장이 두근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항상 보석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러니까… 정말 생생하게 살아있다. 살아있는 보석이었다. 그녀는 그 눈동자를 만지고 싶었다. 도현이 손을 뻗어 그의 눈가를 만졌다. 그는 파르르 떨더니 자신의 옷을 확 잡고는 도현의 침대에서 내려갔다.
“…죄송합니다.”
“응?! 진짜요? 진짜 이렇게 가요?? 왜요?”
도현이 깜짝 놀라서 그렇게 물었다. 다니엘은 도현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답했다.
“이대로라면 도현 씨에게… 심한 짓을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는 누구한테 쫓기는 사람처럼 퀸룸을 나갔다.
“…….”
황당하다…. 이럴 때 그녀를 내버려두고 도망가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믿기지가 않아서 문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다시 돌아오겠지.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 황당했다.
‘아… 이건 어떡해….’
도현 킬스버그는 털썩 침대에 다시 누웠다. 혼자 해결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아야.”
미르 킹쉴드가 팔에 느껴지는 따끔함에 그렇게 반응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쭉쭉빵빵인 여자들만 주변에 가득 앉히고 밥을 먹고 있던 미르였다. 그런 그의 뒤로 조용히 다가가 도현이 말도 없이 그를 키트로 찔렀다. 물론 이런 건 해당 부위에 하는 게 더 정확하지만…. 도현은 키트의 뚜껑을 닫고 몇 번 흔들고 화면을 확인했다.
“…….”
확인해보니 굳이 그 부위를 찾을 필요도 없는 남자다. 역시… 보통 TFC 선수들이 하고 다니는 꼴을 봐도 그렇고 미르 킹쉴드의 몸에 밴 습관이나 생활상을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도현은 말없이 앉아 있는 미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미르… 나한테 관심 없는 거죠?”
그러자 미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응? 무슨 소리야. 완전 관심 많아. 내 걸즈 들어오라는 소리 뭐로 들은 거야?”
“…걸즈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도현은 인상을 팍 구겼다. 미르는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이 도현의 손을 잡았다. 그의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숨을 죽이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그가 도현 킬스버그의 남자라는 것을 알고도 탐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내심은 그럴지도 모르지만) 미르 킹쉴드라는 남자가 본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여자의 기분을 좋게 만들 수밖에 없는 남자라 그냥 얘기나 하고 있었다. 모이다 보니 조금(?) 많이 모이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건 사람의 본능이었다. 이렇게 크고 강한 남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흡족해진다. 세상이 아직 살만한 거 같고 아름다워 보인다. 다른 두 남자랑 다르게 친근하게 구는 것도 다들 마음에 들어 했다.
그들은 미르와 도현을 번갈아 보았다. 미르가 진지하게 말했다.
“솔직히 그때 네가 왜 그렇게 화냈는지 아직도 이해 안 돼. 네가 싫으면 딴 애들은 다 내보낼게. 응?”
도현은 짜증이 잔뜩 난 얼굴로 그의 손을 떼어내고 그의 무릎에 키트를 던졌다. 미르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그걸 잡았다.
“이게 뭐야?”
“일단 그것부터 해결해요.”
도현은 그렇게 말하고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녀는 누구하고도 같이 앉지 않고 혼자 자리를 잡고 앉더니 웨이터를 시켜 음식을 시켰다. 그리고 살짝 찌푸린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남자들… 지금 나 가지고 노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하나같이 상태가 이렇단 말인가? 한 놈은 도현에게 주도권을 뺏기기 싫어 싸움만 걸고 한 놈은 멀쩡히 잘하다가 도망가고 한 놈은 검사받고 오라고 해도 눈도 한 번 깜박 안 해서 보니 정말로 병균 덩어리…. 이것들이 진짜 자신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도 헷갈렸다.
그래서 도현은 지금 욕구불만에 짜증도 많이 나 있는 상태였다.
[남자에게 휘둘리는 여자야말로 여자로서의 가치가 없는 여자지. 여자는 언제나 남자를 지배해야 돼.]
요즘 들어 엄마가 한 말들이 자꾸 생각난다. 어렸을 때는 그녀가 하는 말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도 그녀가 하는 말에 모두 동의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받을 거면 남자 팬티 속까지 탈탈 털어야지. 고작 그런 거에 기뻐하지 마라.]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도 21세기 사람치고 참 대범한 사람이었지…. 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녀가 도현에게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너희 아빠 말 듣지 마라. 인생은 가지기 위해 있는 거니까.]
‘지금은 어떻게 살고 계시려나…. 뭐, 엄마니까 잘 살고 계시겠지만.’
잠시 생각이 방향을 잃고 흘러갔다가 다시 미르 킹쉴드의 모습이 도현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고민없는 얼굴로 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주 자기 세상이다. 여기는 도현의 왕국인데. 다시 짜증이 났다.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이 남자들이 왜 이렇게 벌써부터 바라는 게 많냐고…!’
보통 남자들은 초반엔 본색을 숨기고서라도 여자를 유혹하려고 드는 법이다. 뭐든 해주려고, 기분 좋게 해주려고 하고 말하는 건 뭐든지 해줬다. 그리고 여자가 그런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애정을 느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그제야 본인도 본전 찾겠다고 움직이는 게 정석이다. 그러니까 남자는 나중에 바뀌는 게 아니라 원래 그런 놈이 목적을 가지고 여자를 대하는 것뿐이다.
근데 이것들은 처음부터 뽕을 뽑으려고 들었다. 벌써부터 도현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티를 팍팍 내었다. 다들 욕심만 많아가지고….
그래, 잘난 놈들인 건 알겠다. 도현도 이렇게까지 잘난 남자들을 만나본 건 몇 번 안 되었다. 이렇게까지 잘난 남자들이라는 건 원래 숫자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 훌륭한 외모에 훌륭한 재정 상태, 무엇보다도 세상 매력 있고 섹시한 남자들이었다. 그것도 한꺼번에 세 명이나. 이런 거 인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사건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근데, 그래서 뭐?’
그래 봤자 고작 ‘남자’들일 뿐이다.
왜 자꾸 성가시게 하냐는 말이다.
반한 주제에 고분고분해야지.
‘확 다 내쫓아버릴까….’
도현은 적당히 식사를 하고 그냥 방으로 올라갔다. 더 놀 기분이 안 났다. 그녀가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가 퀸룸으로 향하는데 방문 옆에 누가 앉아 있었다.
“뭐야, 너.”
송선호였다. 도현이 그렇게 말하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대답 안 할 건가? 이제 정말 짜증이 난다. 꼴도 보기 싫다. 도현은 그냥 들어가려고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는 무릎을 세운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자세로 있다가 손을 내렸다. 까끌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랑 잤어?”
송선호는 아까 반라로 도현의 방에서 나오는 다니엘 스톤하츠를 보았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
도현은 문을 반쯤 열다가 말고 그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도현의 얼굴도 보지 않은 채 또 물었다.
“나랑 그러고 나서?”
“너랑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도현이 말했다. 송선호는 인상을 썼다. 도현은 방 안으로 들어가며 덧붙였다.
“기회를 찬 건 너지.”
송선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닫히는 문을 잡았다. 도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게 어떻게 기회야.”
“왜 아냐?”
“스톤하츠랑 이제 사귀는 거야?”
“아, 너랑 그게 무슨 상관이야.”
“왜 상관이 없어. 내가 널…!”
송선호는 벽을 잡을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씨발. 씨발. 씨발….
“나… 궁금하다면서. 남자로서 관심 생겼다는 거 아냐? 아까도….”
“그건 그거고.”
도현은 아까의 앙금이 남아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송선호는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나… 너 다른 남자들이랑 그러는 거 더이상 못 봐. 진짜 못 봐….”
송선호는 얼굴이 파래져서는 덜덜 떨었다. 그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모양이었다. 도현은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문을 닫으려고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팔짱을 끼고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너 도대체 왜 이러는데? 이럴 거면서 아깐 왜 그런 건데?”
“당연한 거 아냐? 씨발… 내가 네 스트리퍼냐? 어? 너 하고 싶을 땐 그러고 아닐 땐 내팽개칠 거잖아!”
송선호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는 얼굴로 그렇게 소리쳤다.
“…….”
도현은 살짝 어이도 없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입을 좀 벌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난 내가 하고 싶을 때만 할 거야. 뭐가 잘못된 건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송선호는 욱해서 문을 확 더 열고 그녀의 팔을 잡았다.
“윽… 사랑한다고…. 젠장… 왜 모르는데….”
송선호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이 벌게졌다. 도현은 그의 덜덜 떨리는 입술을 보았다.
‘아… 진짜 짜증 나게 한다….’
도현은 그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그가 끌려왔다. 그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이마가 살짝 부딪쳤다. 그렇게 가까이에서 서로의 눈을 보았다.
“웃기지 마. 나 좋아하면 내 식대로 하라고. 다 알면서 왜 계속 튕겨?”
그는 도현을 오래 봐왔다. 그는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송선호는 거의 울 뻔했으면서도 그대로 도현의 눈을 노려보았다.
“죽어도 싫어, 씨발. 내 여자가 딴 놈들이랑 놀아나는 거 내가 그냥 둘 거 같아?”
“네 여자 된 기억 없는데?”
“나랑 하고 싶으면 내 여자부터 돼.”
그가 이를 갈듯 말했다.
‘이것 봐라….’
솔직히 도현은 송선호를 다시 봤다.
6년이나 좋아했던 주제에.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면서도 울면서 고백할 정도로 좋아하는 주제에. 그는 도현의 유혹에도 넘어오지 않고 도현이 만나봤던 남자들 중에서 가장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그가 잘난 남자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사회 최상류층 출신에 잘 교육받고 잘생기고 엘리트 향기가 짙은, 좀 놀랄 정도로 딱 떨어지는 남자였다. 공사 구분도 확실하고 유혹이나 감정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말이다. 그런 남자, 솔직히 세상에 정말 없다.
그런데 6년이나 지나서 한 꺼풀 벗겨보니 이렇게나 도현을 좋아해 왔고, 또 한 꺼풀을 더 벗겨보니 영 만만치가 않은 남자다.
도현을 안 좋아하는 남자더라도 유혹하면 백에 백은 넘어왔다. 원래 남자들은 그랬다. 예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니까 말이다. 근데 이렇게 좋아한다는 놈이….
“…….”
그를 괴롭히는 건 즐거웠다. 그 어떤 남자가 도현과 이 정도로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할 수 있었던가. 그에게 더 호기심이 생기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잘 아는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모르겠다.
‘송선호….’
도현은 그의 셔츠를 거칠게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하지만 여전히 얼굴은 가까웠다.
“그럼… 키스는?”
도현이 물었다. 눈을 살짝 내리뜨며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확 흔들렸다.
“할래?”
그의 숨이 거칠어졌다. 이런 거 보면 엄청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도현이 먼저 눈을 감으며 살짝 더 다가갔다.
“먼저 나 좋아한다고 말해.”
“…….”
그가 도현의 입술을 손으로 막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송선호의 눈을 노려보았다. 도현은 오늘 쌓이고 쌓인 게 폭발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송선호의 거기를 손으로 꽉 잡았다. 송선호가 ‘윽’하고 고통에 얼굴을 구겼다. 도현은 화를 냈다.
“좋아하는 주제에 비싸게 굴지 마!”
그리고는 그를 밀치고 문을 쾅 닫았다.
*
원래부터 인생을 그저 편하고 쉽게 사는 한 남자를 제외하고는 다들 불편한 밤을 보내고 이름 모를 산호섬에서의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자고 일어나서 산호섬의 아름다운 물빛을 보니 다시 기분이 좋아진 도현 킬스버그는 다이빙 장비를 챙겼다. 라이프가드를 데리고 다이빙에 나섰다. 역시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면 행복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메트로서울은 참 사는 낙을 가지기가 힘든 도시다. 우중충한 회색의 도시. 배를 타고 태평양을 지나다 보면 사막 위의 오아시스처럼 이렇게 아름다운 섬도 볼 수 있는데. 도현은 상쾌한 기분으로 바닷물에서 나왔다.
“아, 정말 운동해야겠다.”
도현은 라이프가드의 도움을 받아 무거운 산소통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바다 수영을 좋아했다. 수영장 수영도 좋아하는 편이지만 실내 수영장은 또 별로 안 좋아했다. 혼자 하는 운동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메트로서울로 돌아가면 뭐라도 하나 해야 할 것 같았다.
‘음, 테니스를 다시 해야겠다.’
잠깐 쉬었다가 스노클링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야외 수영장으로 올라왔다. 그녀를 발견한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 킬스버그 님!”
“응? 왜?”
“이거 봐요.”
일을 하는 사람도 안 하는 사람도 다 모여서 스크린 하나를 같이 보고 있었다. 도현은 뭔가 싶어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가십지를 보고 있었다.
“응?!”
스크린 위에는 사진이 크게 떠 있었는데 눈은 검은색 테이프로 가렸지만 분명히 도현이었다. 미르 킹쉴드와 함께 손을 잡고 있는 사진이었다. 전에 해러드 백화점에 같이 갔을 때인 것 같다.
<역대 킹쉴즈 걸즈 vs 뉴걸!>
뒷장으로 넘겼더니 다른 킹쉴즈 걸즈와 그녀를 비교 분석한 글이 있었다.
<…그렇게 미르 킹쉴드의 대쪽같은 취향은 유명하다. 허리까지 오는 길고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에 D컵 이상의 육감적인 몸매. 구릿빛 피부에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는 섹시한 여자들. 지금까지 걸즈를 졸업한 이들 16명과 현재의 걸즈 5명까지는 하나도 빠짐없이 이 특징이 지켜지고 있었으나 이번에 H 백화점에 같이 간 이 뉴걸은 이례적으로 슬랜더하고 옷차림이 정숙하다….>
“뭐야, 이게….”
도현은 황당해서 앞뒤로 잡지를 넘기면서 중얼거렸다. 엘 드라카가 끝난 지 이제 고작 일주일. 가십지는 10페이지에 걸쳐서 구구절절한 미르 킹쉴드의 여성편력에 대해서 늘어놓고 있었다. 이름을 알만한 꽤 유명한 잡지였는데 대형 포털 사이트의 뉴스 랭킹에서도 꽤 상단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들 엘 드라카의 여운에 푹 빠져 있을 때 그 인기 스포츠 스타의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조회수가 꽤 많다. 안 그래도 여성편력이 심한 남자의 스캔들이다.
당연히 도현은 엄청 당황스러웠고 이 상황이 부담스러웠다. 걱정도 되고 말이다. 인상을 약간 찌푸렸다가 야외 수영장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았다.
“선생님, 이거 보셨어요?”
선탠을 하고 있는 로웰 리를 찾은 도현은 그녀에게 자신의 디바이스 화면을 보여주며 그렇게 물었다.
“네? 이게 뭔데요?”
그리고 읽더니 그녀도 놀란 얼굴이 되었다.
“어… 이거 그때 찍힌 거예요? 데이트했을 때?”
“네…. 아, 이런 거 싫은데….”
“킹쉴드 씨한테 말해봤어요?”
“아뇨, 아직….”
“어떡해요. 아는 변호사라도 있어요?”
요새야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하여 민간인을 함부로 찍어서 신문 같은데 실으면 고소 맞는 건 물론이고 배상금도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얼굴도 가리고 저렇게 사진을 올린 것이겠지만, 그래도 알아볼 사람들은 다 알아볼 만한 사진이 아닌가. 게다가 지금도 미르 킹쉴드는 도현의 배에 있었다.
“일단… 지금 고용해야겠어요.”
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디바이스에 연결된 개인 인공지능 비서를 이용하여 변호사를 찾았다. 그리고 상황과 자료를 정리하여 그녀에게 보냈다. 그녀가 사건을 수임했다. 검토해보겠다는 답장이 왔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이상 개인정보를 노출하면 고소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좀 부족하지만… 일단 개인정보검색금지 신청부터 내시죠.>
그녀는 대충 자료를 훑고는 그렇게 답변했다. 도현은 휴, 하고 한숨을 쉬고는 그렇게 해달라고 답변을 보냈다. 그리고 그제야 고개를 들어 미르 킹쉴드를 찾아보았다. 오늘도 그는 늦잠인지 아직 수영장으로 나오지 않았다. 도현은 그를 찾아 나섰다.
도현은 미르가 묵고 있는 방을 찾아가 초인종을 눌렀다. 수영복의 위로 가벼운 베이지색 명품 가운을 입은 채였다. 허리를 묶으니 그리스 여신이 입는 튜닉 같았다. 몇 번 더 누르자 문이 그냥 열렸다. 미르 킹쉴드가 인공지능을 이용해 문을 열어준 것이다. 그는 여전히 침대에서 일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침대에 얼굴을 박고 엎드려 있는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알몸이었다.
“…….”
태평양보다 너른 등짝이다. 조각조각 쪼개 놓아도 우람하고 대단한 그의 근육이 오늘 아침도 빛났다. 우연히 송선호를 따라서 지니 호에 왔다가 쭉 묵게 된 사람치고는 아주 제 세상인 그였다. 딱히 여자를 돈으로 사지 않더라도 여자가 넘칠 수밖에 없는 남자다. 도현은 침대에 앉으며 그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흔들었다.
“미르. 미르.”
“아… 왜….”
미르는 잠에 취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도현의 손목을 잡았다.
“이거 알고 있었어요?”
“뭘….”
“이거요.”
도현은 그의 얼굴 앞에 디바이스 화면을 가까이 가져갔다. 미르 킹쉴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겨우 눈을 뜨고는 화면을 확인했다.
“어… 찍혔네….”
“어떡해요?”
미르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대답했다.
“진짜 내 걸즈 들어오면 되지 않을까….”
“…….”
이 남자는 얼굴과 몸만 완벽한 것일까. 정말 생각이라는 걸 하나도 안 하는 것 같다.
세 남자 모두 스펙이 좋아도 확 어떻게 하기에는 문제가 있어서 먹지도, 그렇다고 버리지도 못하고 지켜보고 있는 상태였는데 이렇게 되니까 다 태평양 한복판에 던져버리고 제 갈 길이나 가고 싶어졌다.
“하아.”
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신이 내린 육체를 쿠션 삼아 등을 기댔다. 뭔가, 이번 여행은 유례없이 피곤하고 자꾸 사건사고가 일어난다.
‘뭐… 큰일이야 있겠냐 싶기는 한데….’
그나저나 미르나 다니엘 같은 남자를 만나면 이런 게 매번 신문에 뜨게 되는 건가? 좀 부담스럽기는 하다. 차라리 정말 교제라도 하는 거면 모르겠는데 그런 것도 아니고…. 게다가 그들이 도현의 사생활이라도 캐게 되면 괜히 일이 짜증 나게 될 거니까.
세상에 당당한 미르 킹쉴드 같은 남자는 수두룩해도 당당한 미르 킹쉴드 같은 여자는 없는 게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22세기에도 사람들은 여자가 ‘감히’ 당당하게 즐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현재 전 세계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는 종교가 이슬람이다. 다시 말하지만 22세기다.
도현은 많은 사람들의 눈에 차는 세계를 만들 수 있는 상상력과 표현력이 있는 사람이었고 만약에 그런 것이 신문을 탔을 때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비난을 할지도 눈에 그릴 듯 예상할 수 있었다. 도현 본인은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아, 불공평해.’
어렸을 때 엄마가 21세기의 영화 중 하나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12살짜리가 보기엔 상당히 선정적인 영화였지만 그런 건 엄마에게 썩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영화의 제목은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가진 것 없는 남자가 사람들을 상대로 금융사기를 쳐서 돈을 벌어 동료들과 함께 약과 여자, 파티와 명성을 즐기며 한 시대를 풍미하고 추락하지만 그럼에도 마지막엔 다시금 재기하는 그런 내용의 영화였다. 진짜 옛날 영화.
[다 보니까 무슨 생각이 드니?]
[음… 사람들에게 사기 치고 살면 안 된다? 약 하면 안 된다?]
[하하하.]
엄마가 웃었다.
[이 영화를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건 여자들뿐이야.]
엄마는 도현과 같은 남색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틀어 올려 손질해 놓았다. 엄마의 손에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거렸다.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면 안 되고, 조강지처를 버리면 안 되고, 여자를 때리면 안 되고, 약을 하면 안 되고, 난교를 하면 안 되고….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베이비시터가 동생의 점심을 다 먹이자 엄마가 3살배기 아기의 입술을 티슈로 닦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자신의 아기를 아기 의자에서 빼내어 안아 들었다. 아기도 방긋방긋 웃으면서 똑같은 남색 머리카락을 자기 엄마의 턱에다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남자들은 이 영화를 보면 단 한 순간이라도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고 말하지.]
마음껏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고 조강지처를 버리고 여자를 때리고 약을 하고 난교를 하고. 그러자 도현은 인상을 약간 찌푸렸다. 뭐랄까. 정말? 약간의 배신감이 든다. 왜일까. 그리고 왜 난 그런 생각이 안 들었지?
[단 한 명도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말하는 남자를 본 적이 없어. 그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여자와 남자의 차이야.]
엄마는 동생의 뺨에 입을 맞추고 코를 만지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여자들은 말이야. 아무리 똑똑한 여자라도 나이브해. 뭐, 멍청하면 당연히 더 나이브하고. 내가 착하게 굴면 남도 착하게 굴 거라고 생각하지. 세상을 좀 안다는 여자들도 말이야. 내가 노력하면 그만큼 남들도 대우를 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아냐?]
[어떨 것 같아?]
엄마가 말했다. 도현은 엔딩 크레딧이 여전히 올라가고 있는 화면을 보면서 말했다.
[그래도 난 저렇게 살기 싫어. 더러워.]
그러자 엄마가 도현을 한 번 보았다가 동생의 얼굴을 보며 또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지. 여자랑 남자는 다르니까. 여자가 저렇게 살면 남자만 좋은 일 해주는 거지. 무슨 짓을 해도 박수를 받으며 다시 재기를 할 수 있는 남자와 다르게 병에 걸리고 임신하고 몸을 망치고 추락하면 여자들은 비웃음을 받고 조리돌림을 당하고 세상 여자들이 그렇게 살면 안 되는 표본으로써 전시될 거야.]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도현이 말했다.
[선생님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그랬어.]
그러자 엄마는 세상 그렇게 우스운 말이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학교 바꿔야겠네.]
[왜? 착하게 살면 안 돼?]
[인생은 착하게 사는 게 아니야.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거지. 착하게 살아야 하는 건 착하게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뿐이야.]
엄마는 발버둥을 치는 동생을 바닥에 내려주었다. 동생은 한 번 넘어졌다가 마구 달려서 도현에게 왔다. 엄마는 도현의 앞을 지나가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도현은 엄마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넌 그렇게 살지 않아도 돼. 내 딸이니까.]
엄마는 거울을 통해 도현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 후 엄마는 도현의 선생님들을 다 바꿔버렸다. 정말 학교’를’ 바꿔버린 것이다.
‘엄마….’
도현은 다시 잠들어 있는 미르 킹쉴드의 등에 팔꿈치를 대고 머리를 살짝 괴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엄마를 한 번 만나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빚에 허덕거릴 때도 엄마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요새 영 엄마 생각이 나는 게… 동생도 진짜 보고 싶었다.
‘근데 아빠는 연락처 없다고 했고….’
도현은 엄마의 이름을 한 번 검색엔진에다 쳐보았다. 아무것도 안 뜬다. 동생도 쳐보았다. 동명이인인 것 같은 사람들만 잔뜩 떴다. 하나하나 눌러보다가 포기했다. 요즘은 이런 식으로 개인정보를 찾는 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도현은 미르의 등에 기대어 누워 눈을 감았다.
“하아.”
세상 사는 게 그리 쉽지가 않은 것 같다.
엄마는 도현에게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려고 했던 것 같다. 근데 아직 모든 걸 다 이해할 수 없을 나이에 그녀와 헤어져야만 했다. 유산은 소실되었다.
전에 만났던 남자는 그녀가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녀가 가질 수 없는 건 없다고 말했다. 어쩐지 엄마랑 닮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말을 믿었다.
하지만 도현은 여전히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따로 방법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없는 것인지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인생은 밸런스예요, 밸런스. 하고 싶은 거 하고 가지고 싶은 거 가지는 것도 좋은데 지금 상황에 맞는 정도가 있는 거라구요.]
“으음….”
역시 인생은 임기응변인가…. 어쩐지 선생님 말씀이 제일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 있다가 문득 그녀의 아래에서 팔자 좋게 잠들어 있는 그가 바로 이 모든 고민의 원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현은 미르 킹쉴드의 화려한 플래티넘 블론드를 노려보았다. 그의 등짝을 힘껏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
미르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잠이 번쩍 깬 그가 도현을 보았다.
“왜 그래?”
그가 따가운 등을 한 번 만졌다가 옆으로 누워서 머리를 괴고는 뛰어난 육체미를 여과 없이 드러내며 도현을 바라보았다. 미르가 조금도 구김이 없는 미소를 지으며 도현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이렇게 침대에 둘이 있으니까 엄청 좋은데? 병원에 있을 때보다 더.”
“미르….”
도현은 한숨을 약간 쉬며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솔직히 계속 이런 식이면… 앞으로 더 이상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응?! 왜…!”
미르 킹쉴드는 도현의 말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놀라 하는 걸 보니 오히려 더 싫다.
“나 뭐 잘못했어? 전에 싸운 건 미안….”
그의 입장에선 전에 시큐리티에게 끌려갔던 그게 그가 걸리는 것의 다인지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약간은 우울한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르 싫은 건 아니에요. 매력있고…. 근데 그냥… 미르 병도 너무 많고 눈치도 너무 없고… 피곤해요.”
“…….”
알다시피 그가 여자들에게 싫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도현 킬스버그가 유일했다. 다른 여자들은 아무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신경 쓰이고…. 그때 안 만날 걸 그랬나 봐요.”
도현이 그때 미르와 데이트했던 걸 후회하면서 그렇게 말하자 미르가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로 허리를 일으켜 앉았다.
“아니…. 왜 그래? 응? 난 너 진짜 좋은데. 어?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아뇨…. 딱히 미르가 해줄 건…. 그리고 좋아하는 여자도 많잖아요. 딱히 나쁘다고는 생각 안 해요. 잘난 남자한테 여자 몰리는 거야 당연한 거고…. 근데 그냥 병이 너무 신경 쓰여서 그런 남자는 안 만나고 싶어요.”
“나 그렇게 뭐 많아?”
미르가 당황해서는 그렇게 말했다. 도현이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그때 확인 안 해봤어요?”
“나중에 보려고 했는데 잃어버렸어….”
도현이 한숨을 쉬며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새 키트를 따서는 미르의 얼굴을 살짝 잡았다.
“입 벌려요. 혀.”
그렇게 말하니 미르가 낼름 혀를 내밀었다. 이렇게 산만한 남자가 그러고 있으니 좀 귀엽다. 도현은 그의 혀를 바늘로 살짝 땄다. 그리고 키트의 뚜껑을 닫고 흔들었다. 바로 빨간 불이 들어왔다. 버튼을 눌렀더니 이 키트로 알아낼 수 있는 병명과 바이러스, 병균들이 홀로그램 위로 쫙 뜬다.
“어… 진짜네….”
미르는 그렇게 도현이 말했는데도 믿지를 않았던 모양이다. 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건강에 안 좋으니까 꼭 고쳐요. 미르 여자친구들도 병원 가보라고 하구요.”
그리고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만나서 재밌었어요. 차 필요하면 쓰세요.”
“자, 잠깐만…. 나 진짜… 가라고? 지금 가라고 하는 거야?”
미르가 침대에 바로 앉아서 도현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더 있으려구요?”
“나 안 만날 거야?”
“이제 사진도 더 안 필요할 것 같고… 미르도 딱히 저 만나는 거 진지한 건 아닌 것 같아서요. 이제 나이가 좀 들어서 그런지 적극적이지 않은 남자는 그냥 귀찮기나 하고….”
도현이 그렇게 말했다.
“내가 적극적이지 않다고? 왜?”
도현이 인상을 약간 쓰며 그를 돌아보았다.
“몸 상태가 이런 데도 그냥 있는 게 안 진지한 게 아니면 뭐예요? 나보고 미르 만나고 병이나 걸리라는 거예요?”
“아니…. 근데… 다른 여자들은 그런 거 신경을 안 써서….”
미르가 정말 얼떨떨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인 것이다. 아무도 그에게 이런 걸 안 가르쳐주었다.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알아요, 여자들 바보 같은 거. 근데 전 바보 같이 안 살아서 제 몸은 좀 챙기거든요. 그러니까 미르가 이해해요. 고작 남자 하나 만나고 병이나 걸리는 거 최악이잖아요.”
“…….”
그녀가 여성스럽고 사근사근하고 부드럽게 말한다고 해서 호락호락한 여자인 건 아니라는 것은 미르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 그녀가 그를 협박하던 때를 생각해봐라.
그녀가 더 이상 미르에게 병실로 부르지 말라고 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그녀는 미르 킹쉴드라는 남자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굴었다. 별 볼 일 없는 남자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이 말이다. 마치 지금처럼.
화가 났다. 너 말고도 여자는 얼마든지 있다고 소리치고 싶기도 했다. 그의 인생에서 여자는 간단한 디저트나 다름이 없었다. 손쉽고 맛있고 언제라도 기분 전환이 되는 훌륭한 디저트. 그리고 그 어떤 남자도 그런 디저트 따위가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예쁘고 맛있게 생겼어도 그의 디저트가 아니었다. 아니, 디저트도 아니었다.
[뭐? 야. 그런 여자가 널 왜 만나?]
사실 그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본능적으로. 그는 자신이 대단한 수컷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크고 강하고 단단하고 훌륭한 남자였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대단한 암컷이라는 것도 바로 알아차렸다.
그녀는 자신만큼이나 잘 만들어진 여자였다.
“…이것부터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미르는 시선을 내려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키트를 다시 손으로 잡아 찌푸린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아뇨…. 이제 와서 그런다고….”
도현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미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도현을 지나쳐 속옷을 입고는 옷장에서 옷을 골랐다. 도현은 옷을 잘 차려입는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섹시하긴 했다. 그는 옷매무새를 확인하면서 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너랑 잘 거야.”
“…….”
미르는 그렇게 말하며 도현의 허리를 안아 가볍게 포옹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
그렇게 미르 킹쉴드는 메트로서울로 돌아갔고 그날 종일 킬스버그의 남자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도현에게 그건 딱히 문제가 아니었다.
도현 팀과 로웰 팀 멤버는 15명씩 수영장의 양편에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차양 아래에서 도현과 로웰이 서로의 운을 시험하고 있었다. 거기엔 총 60잔의 알록달록한 샷잔들이 놓여있었다. 독한 술이 30잔, 약한 술이 30잔 있었다. 도현과 로웰이 한 잔씩 잡았다. 그리고 서로의 눈빛을 보고는 동시에 마셨다. 도현이 바로 옆에다 뱉었다.
“아…!!”
도현가 입술을 닦으며 오늘 일을 하는 서연을 돌아보았다.
“이거 거의 약 탄 수준이잖아!”
“에이, 그 정도는 해야죠.”
도현 팀 멤버들이 눈빛을 주고받다가 여자 하나가 외발로 섰다. 다리 줄이기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독한 술이라도 그냥 한 번에 마실 수 있으면 상관없었지만 보니까 70도 바카디 같은 걸 놓아두었다. 바로 뱉었는데도 입안이 화끈하다. 진짜 운으로 게임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아, 오늘은 이겨야 하는데…!”
2대 1. 3주, 21일에 이르는 휴가 동안 로웰 리와 도현 킬스버그는 내기를 했다. 하루하루 게임도 물론 벌칙이 따랐지만 합산 벌칙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둘 다 목숨 걸고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벌써 승기는 제게 기운 지 오래입니다!”
로웰은 훌륭한 초콜릿 빛 피부를 빛내며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다음 잔은 둘 다 독한 술이라 뱉어냈다. 두 팀 다 여자들이 다리를 하나씩 줄였다.
“설탕이라도 좀 타줘.”
도현은 독한 술을 못 마시는 게 아니라 쓴 걸 못 마셨다. 그녀가 괴로워하며 눈물을 찔끔했다. 그렇게 30잔 정도를 해치우자 도현 팀 멤버들 다리가 7개, 로웰 팀 다리가 9개 줄었다. 남자들이 여자를 몇 명씩 들고 있었다.
“킬스버그 님 진짜 술 못 마셔.”
셀리가 주드의 등에 엎힌 채로 그렇게 키득거렸다. 주드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아니, 도대체 이런 게임은 누구를 위한 거란 말인가. 비키니를 입은 셀리가 똑같이 수영복을 입고 있는 주드의 등에 업히니 바로 맨살이 맞닿고 있었다. 가슴이 진짜 물컹했다. 주드는 얼굴로 너무 열이 올라서 눈이 핑글핑글 도는 것 같았다.
“아… 나 무겁지?”
셀리는 주드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자 아차 하며 그의 얼굴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주드가 깜짝 놀라서 움찔했다.
“아… 아니…! 진짜 가벼워….”
“응? 거짓말. 나 60킬로는 넘을 걸?”
그녀의 키와 육감적인 바디와 숱이 풍성한 긴 머리카락을 봐도 그거 이하로 나오기는 무리가 있었다. 주드는 그녀의 말에 좀 당황했지만 어쨌든 대꾸했다.
“괜찮아…. 나도 90킬로 넘어.”
“아, 진짜? 그렇게 안 보이는데. 몸이 좋아서 그런가? 너 8점 넘었다?”
셀리가 그의 어깨를 살짝 만져보았다. 주드는 땀이 더 줄줄 났다. 그녀의 허벅지를 끼우고 있는 팔이 미끄러질 것만 같았다.
“어, 어…. 감사하다고 전해줘….”
“하하. 그냥 네가 가서 말해.”
셀리가 또 웃었다. 아… 여자의 웃음소리는 원래 이런 것일까. 가슴이 간지러워진다. 남중 남고를 나오고 공대에 재학 중인 주드였다. 여자 자체가 어색한 인생인데 이런 친밀한 접촉이라니. 주드는 오늘도 애국가를 속으로 열창하기 시작했다. 까딱하다간 주기율표도 외울 것 같다.
오늘 게임은 그렇게 오래 걸릴 게임이 아니었다. 결국 20잔 정도 더 마시니 여자를 둘씩 들고 있는 남자들이 생겼고 6잔을 더 마시니 도현 쪽 멤버가 수영장에 빠졌다. 로웰이 독한 술을 두 잔 정도 그냥 마셔버린 덕분이었다.
“아싸!”
로웰이 환호했다. 도현은 좌절했다. 3대 1이라니. 도현은 이런 게임을 잔뜩 했던 경험자였고 로웰은 초심자였는데도 벌써 3일이나 내리 진 것이다.
“벌칙 뭐로 하죠?”
3연승이다. 로웰 팀은 아주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선베드에 모여 앉아서는 시시덕거렸다.
“아, 오늘 밤은 파티 있는 날 아니에요? 폴댄스나 시킵니다, 전부.”
“오! 랩댄스도!”
첫날 같은 파티는 매일 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술을 먹으면 승무원의 근태나 건강에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날 같은 선상 파티의 빈도는 나흘에 한 번씩이었다.
“춤….”
주드는 춤 같은 건 춰본 적도 없었다. 그가 입을 딱 벌린 채 당황하고 있을 때 셀리도 꺼려지는 얼굴을 했다.
“아, 이런 거 하면 사람들 너무 좋아해서 싫은데.”
셀리는 춤을 추는 것 자체는 좋아했지만 남들 즐거우라고 추는 춤은 싫었다. 그런 건 스트리퍼들이나 돈 받고 하는 거지. 그래도 이 한 몸 던져 분위기를 또 띄워야 하는 거구나, 라고 생각하니까 귀찮았다.
“춤 잘 춰…?”
폴댄스라는데…. 랩댄스라는데…. 주드는 그게 뭔지도 개념이 잘 안 잡혀 있었다. 게임이 끝나자 셀리는 선베드로 돌아가려다가 주드의 질문에 그를 돌아보았다. 주드는 자신이 그녀의 가던 길을 방해한 걸 알고 아차 했다.
“아, 아냐….”
“응? 뭐라고? 이리 와.”
셀리는 아무렇지 않게 그를 자신의 옆에 있는 선베드에 앉혔다. 그는 그녀가 그저 직장 동료일 뿐이고 안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자신이 그녀를 그냥 조금 도와줬던 것 때문에 자신을 좋게 생각해준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저얼~대 그렇고 그런 분위기는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주변에서 엄청 엮고 있었지만 셀리가 하는 걸 보면 그냥 직장 동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주드는 남중 남고 공대 테크를 탄 다른 병신들(?)이랑은 다르게, 괜히 도끼병 걸려서 병신짓(?)하는 그런 병신(?)들이랑은 저~얼대로 다르게 살겠다고 굳건히 마음을 먹고 살고 있는 착한 청년이었다. 예쁜 여자가 먼저 자신을 좋아하는 그런 판타지는 만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잘 숙지하고 있었다. 그 새끼들처럼 괜히 엄한 여자들에게 집적거려서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 병신들한테 피해받는 여자들을 보면 괜히 주드가 양심이 찔릴 정도였으니까.
“뭐라고 했어?”
“아, 아니…. 그, 그냥… 춤… 잘 추냐고.”
“응? 그냥 좀. 왜?”
“어… 어… 그게… 랩댄스가 뭐야?”
근데 셀리의 앞에서 주드는 왠지 그, 같이 남중 남고 공대 테크를 탄 병신 친구들과 같은 병신이 되는 것 같았다. 알게 된 지 며칠도 되지 않았다. 진짜 그 병신들 같다.
그냥 학교 다니면서 다른 여자애들을 대할 때도 그냥 남학생을 대하는 것처럼 평범하게 대하고 잘 살았다. 과 여신이라느니, 공대 아름이니, 그런 여자애들에게도 그냥 평범하게 잘 대해서 흑역사 따위 없이 두루두루 친구도 많았다. 물론 심심하게 청춘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딱히 막 추하게(주드가 본 친구들의 추파는 아주 추했던 모양이다) 여자를 꼬시면서까지 그렇게 해야 하나 싶었다. 하도 못 볼 꼴을 많이 봐서….
하여튼 주드는 여자들이 좋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지켜줘야 하는 존재이지 절대 그렇게 해를 끼치거나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불쾌하게 만들거나 필요 이상으로 집적거리는 기타 등등을 포함해서 말이다.
“앉아 있는 사람 무릎 위에서 추는 거야.”
셀리는 그렇게 대답하며 선베드 옆 탁자에 있는 빗으로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주드는 저도 모르게 멍하게 쳐다보았다. 뭔가… 이런 게 여성스러움이란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배에 타고 나서 주드는 여성관이 확 바뀌었다. 메트로서울에서 학교에 다닐 때 봤던 여자애들은 다들 비슷비슷한 얼굴과 옷차림에 뼈밖에 안 보일 정도로 마르고 하얀, 어린 소녀 같은 느낌이었는데 여기는 아주 다양했다. 흑인, 백인, 다양한 혼혈들, 머리가 짧은 여자, 긴 여자, 피어싱을 잔뜩 한 여자, 삭발을 한 여자, 주드보다 힘이 센 여자, 금발에 삐삐 머리를 한 여자…. 100명 중에 한 명 볼까 말까 한 여자들이 여긴 잔뜩 있었다. 물론 눈이 화하게 밝아지는 것 같은 미녀들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태도가 달랐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 특히 남자들의 시선에 신경을 전혀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남자들을 쳐다보는 시선에 거침이 없었다. 그런 게 주드를 엄청 긴장하게 만들곤 했다. 한국에선 그러다가 남자랑 눈이 마주치면 먼저 피하는데 여기선 남자가 먼저 피했다.
“왜?”
“아, 아니…!”
마치 지금의 주드처럼 말이다. 셀리가 머리를 빗는 걸 멍하게 쳐다보고 있는 걸 그녀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주드는 확 하고 고개를 돌렸다.
“너무 걱정할 거 없어. 너 뉴페라서 아마 사람들이 많이 봐줄 거야.”
셀리는 그가 벌칙이 걱정되어서 그러나 싶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반대쪽 어깨로 다 넘기고 뒤통수부터 앞으로 다시 전체적으로 빗기 시작했다. 셀리는 숱이 많고 머리카락이 아주 길었기 때문에 가끔씩 이렇게 방향을 바꿔서 빗겨주지 않으면 두피가 아팠다. 귀찮아서 자를까 하다가도 머리가 긴 게 좋아서 길렀다. 그녀의 뒷목선이 확 드러나자 주드는 또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예뻤다. 진짜 예뻤다. 환한 금발도 풍성하게 길고 예뻤고 남자랑은 아예 다른 몸의 곡선도 풍만하고 또 잘록하고…. 근데 목이나 쇄골이나 손목 같은 데는 또 가녀린 듯한 느낌이 나서… 진짜 여자구나, 그런 느낌이 막….
“왜 그렇게 자꾸 봐?”
셀리가 약간 이상하다는 듯이 주드를 다시 보았다. 주드는 깜짝 놀라서 시선을 수영장으로 돌렸다.
“아, 아니…!”
어, 잠깐만…. 이거 설마 첫 번째 규칙에 위배되는 건가? 서, 성희롱인가? 그, 그렇지? 이렇게 쳐다보는 거…. 아, 최악이다.
“미안….”
주드는 저 멀리 시선을 돌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심장이 뛰었다. 조심해야겠다. 셀리처럼 예쁜 여자에게 그런 병신짓을 하고 미움받는 것은 정말 사양이었다. 가만히 있어야겠다. 가만히 있으면 뭐든 중박은 가는 법이랬다.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겠다. 1도 안 움직이고 가만히….
그녀는 머리를 다 빗고 곧 선베드를 눕히고 엎드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비키니 끈을 풀고는 시즈카를 불렀다.
“시즈카, 나 등에 오일 좀 발라줘.”
“오케이.”
근무인 시즈카는 차렷 자세로 셀리의 옆 선베드에 앉아 있는 주드를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보았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태울 거면 제대로 누워. 그러면 어깨랑 이마만 탈걸?”
“아, 어. 어.”
“너도 오일 줄까?”
시즈카는 쓰라는 듯 작은 선반 위에 오일을 두었다. 그리고 미리 자신의 손에 짠 걸 두 손으로 잘 비비더니 셀리의 등에 부드럽게 손을 댔다.
“어떠십니까, 손님?”
“아… 잘한다, 진짜. 아….”
“팁은 두둑이요.”
“아, 진짜 줘야겠다.”
그러다가 셀리가 볼멘소리를 냈다.
“아… 선베드 너무 불편해. 구멍 좀 뚫을 수 있으면 좋겠다.”
“맞아. 가슴 크면 그게 문제라니까.”
시즈카도 셀리랑 비슷한 사이즈였다. 주드는 헉하고 저도 모르게 또 그녀를 돌아보고 말았다. 물론 비키니를 풀고 있는 그녀의 가슴 쪽으로 눈이 간 것은… 진짜 본의가 아니었다. 두 여자랑 눈이 딱 마주쳤다. 주드는 진짜 너무나 당황스럽고 자신이 못내 실망스러워서 표정도 관리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아니…. 으… 미안…. 나, 난 딴 데 갈게.”
그러고 그가 황급히 자리를 피하자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두 여자는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갔다.
“어리더니만 버진인가 봐.”
시즈카가 말했다.
“그런가 보네.”
“잘해봐. 귀여운데. 썸 타는 거 아냐?”
“응? 누가 그래?”
“애들이.”
“딱히…? 별로 내 스타일도 아니고.”
“아, 그래?”
“그냥… 미르 킹쉴드 실제로 보니까 다른 남자들이 무성체로 보여, 요새.”
“아, 전 다니엘 스톤하츠요. 너무 잘생겼어, 너~무.”
미르 킹쉴드가 옳다. 사실 여자들은 차선이나 차악이 아니라 언제나 최선, 최상의 수컷을 선택하고 싶은 법이다. 스스로를 속이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게임이 끝나고 다들 햇빛 아래에 늘어져 있는 가운데 오늘 진검승부를 벌인 두 사람, 로웰 리와 도현 킬스버그는 한쪽에서 술이 떡으로 취해 서로의 우정을 견고히 하고 있었다.
“제가… 내가 우리 선생님 없었으면 진짜…. 흑… 선생님… 저 선생님 사랑해요…. 알죠…? 내 마음 모르는 거 아니죠?”
“압니다. 제가 그걸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작가님. 이리 와요.”
아까 먹은 술이 다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도현은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아이처럼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고 로웰은 그녀의 등을 힘차게 두드려주었다.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었지만…! 다 잘 될 거예요. 우리 둘이면 못할 게 뭐가 있습니까!”
“선생님…!”
“같이 갚으면 돼, 같이 갚으면!”
로웰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외치자 도현은 진짜 감동을 받아 눈물 어린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선생님이 남자였으면 결혼해달라고 했을 것 같아요.”
결혼 같은 거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도현이 코를 한 번 훌쩍했다. 로웰이 그녀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결혼? 그까짓 거 하면 되죠!”
“선생님…!”
그때쯤 영 컨디션이 안 좋은 얼굴을 한 송선호와 원래부터 무뚝뚝한 얼굴인 다니엘 스톤하츠가 차례로 야외 수영장에 들어왔다. 서로 멀찍이 떨어져서는 각기 도현이 어디 있는지 찾았다. 승무원들은 같은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켜주었다.
‘뭔가… 자꾸 싸워. 제대로 얘기 좀 하고 싶다. 다른 건 그다음이야….’
‘어제 일을 어떻게 사과드리지? 뭐라고 해야 그녀가 조금이라도 점수를 덜 깎을까….’
그들은 차양 밑에서 다리가 없는 푹신한 카우치에 앉아 아까 게임에서 남은 술을 앞에 깔아놓고 한 잔씩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 도현과 로웰을 발견했다.
‘젠장, 대낮부터 술은 또 왜 저렇게 많이 마셨어? 얘기가 되겠냐. 아… 되는 게 없다.’
‘술… 드신 게 더 나은 건지 아닌지 판단할 수가 없는 변수다.’
도현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선생님 아니었으면 저 벌써 상하이로 팔려가서 지금쯤이면 못생긴 아저씨나 손님으로 받고 있었을 거예요…. 흑. 그때 팔려갔으면 벌써 몇 달째야…. 아, 끔찍해….”
“?!!”
뭐라고?!! 송선호와 다니엘 스톤하츠가 그 말의 내용에 대단히 경악하여 도현 킬스버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도현 씨!”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술에 거하게 취해 둘밖에 없는 줄 알던 로웰과 도현이었다. 남자 둘이 기척도 없이 다가와 갑자기 소리를 지르니 둘은 깜짝 놀라 그들을 돌아보았다. 이런 남자들은 목소리 울림부터 다르다.
“깜짝이야….”
도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남자 둘을 올려다보았다. 로웰은 이제 완전 초콜릿 색으로 타서 술을 많이 먹어도 얼굴에 빨간 티도 나지 않았고 도현은 뺨과 이마, 어깨까지 불그스름해진 상태였다. 해를 좀 등지고 커다란 남자 둘이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까 다니엘 스톤하츠랑 송선호다.
“그… 여자들 얘기하는데 함부로 끼고 그러지 마시죠. 우리 작가님 놀라신 거 안 보이십니까.”
로웰 리는 술에 취한 흐리멍덩한 말투로도 그렇게 호통을 쳤다.
“여자들이 인생 얘기를 하고 있는데, 어? 함부로.”
로웰이 혀를 쯧쯧 찼다. 송선호는 바로 몸을 낮춰서 도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
“뭐야? 진짜 무슨 소리야? 어? 야! 너 그 정도는 아니라고 했잖아!”
“응…? 그거야 1년 전 얘기고…. 반년 지나니까 진짜 좀… 내가 힘들다고 그랬잖아.”
도현 킬스버그는 이제 와서 왜 이러냐는 듯이 송선호의 얼굴을 보았다. 다니엘 스톤하츠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들의 앞에 앉았다.
“그렇게… 빚이 많으셨던 겁니까? 도대체 얼마나….”
그녀가 빚 때문에 몸을 팔려고 그에게 접근한 것을 알고 얼마나 실망하고 좌절했던가. 그 이후로는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고 신경 쓰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던지라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아니, 자세히 알아볼 생각도 못 했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려고 했으니까…. 그 이후로는 아예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도현 자체도 티를 전혀 내지 않았고 그 자체가 빚과는 먼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빚이 무서운 건 알고 있다. 다니엘 스톤하츠도 TFC의 세계에 몸을 담고 있는 이상 대부분의 소드마스터가 빚에 팔려가 전쟁터에서 얼마나 죽도록 고생하고 오는 지 대강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몬스터게이트 쪽으로 보내졌다. 대인전보다 보수가 훨씬 좋기 때문이었다. 두세 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고 들었다. 물론 대인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망률도 높았다. 대인전은 대부분 국가기관이 용병에게 임금을 지불하지만 대몬스터전은 사기업이 지불한다. 당연히 시장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사기업이 훨씬 돈을 잘 준다.
몬스터게이트는 요즘 가장 활동이 활발한 남중국해를 비롯해 남태평양, 북대서양, 남극해, 수에즈 같은 바다뿐만 아니라 체첸, 다이아몬드 국립공원, 구 아르헨티나 같은 지상에서도 전개되고 있었다.
50년 전만 해도 바로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 동해 한가운데 대규모 몬스터게이트가 생성되어 한중일에 러시아, 동남아, 태평양 건너 미국까지 초비상이 났다고 한다. 매일 대규모 물류와 인구가 움직이며 인천공항에서 1시간 거리 내에 70억이 넘는 인구가 사는 곳이었다.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 같은 열강의 이권이 첨예하게 둘러싸고 한국이 그나마 자금력이 되는 선진국이 아니었다면 구 아르헨티나나 수에즈 운하 인근국이었던 구 이집트, 구 수단, 구 소말리아, 구 에티오피아처럼 나라가 몇 개 날아갔을지도 모를 규모였다. 3차 중러전쟁이 체첸과 동해 몬스터게이트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는 학자도 다수 존재했다.
그렇게 해양운송을 통한 수출 중심으로 먹고사는 나라들 한복판에 초대형 몬스터게이트가 출현했으니. 한국 SS그룹, H&K그룹, 일본의 네오미츠비시그룹, 중국의 레이쥔그룹, 88그룹 등 전 세계 시가총액 100위 안에 드는 대형 그룹 30개가 대규모 용병을 고용했었다. 그때가 역사상 용병 시장이 가장 컸을 때라고. 20년 전부터는 게이트가 많이 축소되고 활동이 빈약하여 SS그룹이 다른 그룹들에게 관리비를 받고 동해를 단독 관리 중이라 들었다. 한창때는 한중일러 정부도 몬스터게이트에서 각국으로 넘어오는 몬스터를 관리하기 위해 용병 및 군대 운용을 확대했었다. 일본의 평화헌법이 사실상 완전폐기된 것도 그때쯤이다.
메트로서울의 웨스트이글과 도쿄의 이스트드래곤이 세계 최고의 강호 클럽 중 하나가 된 것도 결국 동해 게이트 덕분이라 할 수 있겠다.
사기업은 용병의 빚을 떠안고 선금으로 일부를 변제해주었다. 용병의 50%는 첫 전투에서 바로 죽는다. 소드마스터들은 그걸 고깃값이라고 불렀다.
현재 세상에서 제일 큰 규모의 몬스터게이트가 전개되고 있는 남중국해 게이트의 경우 중국 기업과 인도네시아 기업들이 관리한다고 들었다. 베트남 기업도 아주 조금. 덕분에 필리핀이나 말레이시아가 안 망했다고 다들 말했다. 당연히 250년 중국과 대만의 양안관계는 박살 나고 중국이 대만을 무력점거했다.
바야흐로 폭력과 자본의 시대라 할 만하다.
물론 사회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용병이 전쟁터로 팔려가게 되는지까지는 다니엘도 잘 알지 못했다. 그건 소드마스터 당사자도 잘 몰랐다. 그들은 대부분 미성년일 때 스스로의 빚이 아니라 부모의 빚에 의해 팔려갔다. 게다가 소드마스터가 아닌 경우에 어떻게 되는지는 더더욱 모른다.
다니엘은 그렇게 자신이 아는 인간 시장의 전부, 용병 시장을 떠올려 보았다. 도현이 다니엘의 말에 대답했다.
“다른 것도 그랬지만 그냥 작년에 빌렸던 게 좀 크게 문제가 되어서요. 사채라….”
도현이 그렇게 말하자 송선호가 기겁했다.
“미쳤냐?! 돌았어?!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런 데서 돈을 빌려!!”
송선호는 얼굴이 파래져선 그렇게 소리쳤다. 그는 알만큼은 알았다. 아니, 잘 알았다. 사업하는 사람이 세상일에 정통하지 않아서야 쓰겠나. 사업은 원래 남의 돈으로 굴리는 것이다.
“아니…. 이제 와서 이러면 뭐… 안 도와준다며….”
도현이 그렇게 말했다.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이 정도인 줄 알았으면 바로…!!”
송선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진짜 장난이 아니었다.
송선호는 곧잘 그러다 팔려간다고 그녀에게 경고하곤 했지만 진짜일 줄은 몰랐다. 그녀에겐 여전히 보통 사람들은 꿈도 못 꿀 인세가 나오고 있었고 그녀도 소비 수준을 전혀 줄이지 않고 자기 라이프스타일대로 잘 살길래 괜찮은 줄 알았다. 미르 킹쉴드나 다니엘 스톤하츠를 협박했다는 걸 알았을 땐 정말 정이 떨어져서 생각도 하기 싫었는데 며칠 지나니 뭔가 이상해서 몇 번이나 캐물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얘기해주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턴 이제 괜찮다는 말을 해서 정말 괜찮은가 보다, 라고만….
‘왜… 말을….’
너무 일을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녀에 대한 감정을 부정하려고만 노력하다 보니 그녀의 상태조차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하이라니…. 팔려간 여자들이 제일 빡세게 구르는 곳이다. 윤간, 사디즘, 페도파일…. 그런 곳에서 알지도 못하는 남자들에게 당하고 있을 그녀를 상상하니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게 벌써 몇 달 전 일이라고? 송선호는 엄청난 공포와 스스로에 대한 실망, 그녀에 대한 분노, 다시 공포, 좌절감, 실망감, 그리고 후회로 심장이 쥐어짜 뭉개진 것 같이 욱신거렸다.
그가 다니엘 스톤하츠보다 이 사실을 공포스럽게 느끼고 있는 건 그가 ‘세상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마도 연구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다니엘은 여자가 상하이로 팔려간다는 게 정확하게 뭔지도 모른다. 아마 도현조차도 제대로 몰랐을 지도 모른다.
“하… 으….”
“야… 괜찮아? 왜 이래?”
송선호가 그녀가 앉은 카우치를 찢을 듯 꽉 쥐고 덜덜 떨자 도현이 오히려 그의 얼굴을 만지며 상태를 살폈다.
로웰이 흥, 하고 술을 한 잔 마셨다.
“송 편집장은 작가님이 마지막엔 자기한테 매달릴 줄 알았던 거예요.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어…? 진짜?”
“…….”
송선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리가 없이 바닥에 붙어있는 커다랗고 고급스러운 카우치 위에 로웰 리가 한쪽 다리를 쭉 펴고 다른 다리는 접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팔걸이의 쿠션에 등을 기대고 술을 마시고 있었고 도현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앉아서 자신의 앞에 좌절해서 앉아 있는 송선호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승무원이 가져다준 작은 의자에 앉아, 다른 이들과 다른 눈높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도 후회하고 있었다. 그는 원래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벌써 5잔을 비웠다.
“지금도 많이 힘드신 겁니까? 혹시 불쾌하지 않으시다면… 일단 제가 도와드려도 괜찮을까요?”
다니엘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로웰의 눈을 바라보았다. 로웰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쨌든 로웰 선생님이 사채랑 신용 급한 건 거의 갚아주시고 지금도 같이 갚아주고 계셔서 이제 팔려갈 일은 거의 없지 않을까 싶은데요….”
도현은 술에 취해서 로웰이 한 말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일단 자신을 걱정하는 송선호와 다니엘 스톤하츠에게 그렇게 말했다. 로웰은 한 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진짜 그날은 무서웠죠. 저 그런 거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에요.”
“저는 본 것도 처음, 당한 것도 처음….”
도현은 더 부르르 떨었다.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것이다.
“직원들이 다짜고짜 딱지부터 붙이고…. 아니, 작가님이 경매에 올라가니까 누리은행이 바로 알고 출동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작가님 뺏길 거 같으니까? 요즘 세상에선 빚이 제일 무섭다, 무섭다 얘기는 들었는데 그 정도일 줄은….”
한 개인이나 한 금융기관의 일이 아니라 사회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사회의 시스템이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못 갚으면 사람을 파는, 그런 구조를 견고히 형성해놓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개인과 금융기관은 그저 객체일 뿐이다.
“게다가 전 그 채 사장 말하는 게 더 무서운 거 있죠? 사채회사 사장이라고 무섭고 나쁜 사람일 줄 알았는데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더 무서워.”
로웰은 약간 황당했다는 듯이 말했다. 도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무섭긴 한데 나쁜 사람은 아니더라구요. 그냥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아저씨예요. 이 배 렌트도 엄청 열심히 돌려요. 우리보다 제 빚을 더 많이 갚아주고 있다니까요. 자기가 빌려준 돈을 셀프로 갚아.”
그들이 하는 말을 남자 둘은 그저 가만히 듣고 있었다. 다니엘은 생소한 이야기라 듣고만 있었고 송선호는 도현의 손을 아주 꽉 잡고 있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누가 그녀를 끌고 갈 것처럼 말이다.
“…지금은 얼마나 남았는데.”
말의 말미엔 송선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제 팔려갈 일이 없기는, 씨발.’
이래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들은 돈을 빌리면 안 된다. 인공지능 비서 동행 제도가 왜 만들어진 건 줄 아는가. 그녀 같이 수입에 등락이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까딱하다간 이자가 밀리기 십상이다. 그런 이자를 3개월만 밀려도 금융기관은 사람을 팔 곳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이체 전적은 그 후 이자를 막기 위해 다시 대출할 때의 이자율을 기하급수적으로 올린다. 빚이 빚을 낳게 되는 구조란 말이다.
“네 수입에 그런 일까지…. 후우, 있었으면 원금이나 이자나 내 생각보다 많다는 거잖아. 내가 원금은 막아줄 테니까 이자라도 좀 줄여.”
송선호가 아직도 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몇 번 문질렀다. 그의 손에서 식은땀이 잔뜩 나서 도현은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가 놓아주지 않았다. 술에 좀 많이 취한지라 그냥 두고 도현이 로웰을 보았다.
“그럼 우리는 땡큐긴 한데….”
로웰이 그렇게 말하고는 똑같이 도현을 보았다. 그들 둘만이 정확한 빚의 액수를 알았다. 다니엘 스톤하츠도 말했다.
“저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도현은 남자 둘을 번갈아 보며 약간 고민했다. 정작 그녀가 진짜 도움이 필요했을 땐 도와주지 않았던 그들이라 지금에 와서 굳이 그들에게 빚을 져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 말하는 정도야.’
도현은 술을 한 잔 더 먹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이제 천 안쪽으로 남았죠, 선생님?”
“그렇겠네요, 작가님. 채 사장이 일을 엄청 열심히 해. 렌트 일주일만 돌려도 1억은 나온다면서요?”
남자 둘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다니엘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천…만원은 아니실 테고….”
“이 미친년이….”
송선호는 그렇게 욕을 안 하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해놓고도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
“…….”
“…….”
남자들은 입을 다물고 각자의 계산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송선호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건 애초에 수입이 엄청날 때부터 그걸 기반으로 돈을 빌려댄 것이다. 그녀는 6년 동안 회사에 많은 돈을 벌게 해주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받아간 인세만 2천억이 넘었다. 그리고 후에는 이자를 막을 수 없을 걸 예상하고 신용이 될 때 미리 대규모로 돈을 또 빌렸을 것이다. 그때부터는 이자가 이자를 낳는 식으로 원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을 것이고….
“너… 부동산은 얼마나 있어?”
송선호가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그렇게 물었다. 그는 그녀의 무릎을 마치 회계장부 보듯이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메트로서울이랑 도쿄랑 메트로뉴욕, 어… 바하마에도 집 하나…. 몰디브 섬 하나도 샀고…. 근데 서울이랑 도쿄 빼고는 집값이 내려서 빌린 원금도 안 돼. 섬은 내놨는데 안 팔리고….”
“아, 이 정신 나간 년….”
몇 년 전 전 세계 부동산 시장이 피크를 찍었을 때 주택을 많이 구입한 것이다. 게다가 주문 건조한 크루즈도 있고… 그런 게 지금 같은 불경기에 팔릴 리가 있는가. 그런 게 다 부채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송선호가 아무리 재벌이라도 지금 당장 한꺼번에 그 정도의 현금을 쓸 순 없었다. 일단 그는 재벌 집안의, 아직 3세일 뿐이다.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오면 가까스로 당장 다 갚아줄 순 있는데 그러려면 지금 회사나 집안 계열사 지분에 손을 대야 할 것이다. 근데 지금은 팔고 싶어도 못 판다. 그룹에서 2세대 승계 및 경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상황이라 지분엔 손을 못 댔다. 여자 때문에 지분을 팔았다간 아버지가 그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안 그래도 지분 경쟁에 들어설 걸 대비해 현금을 잔뜩 끌어모으고 있는데….
그가 당장 운용할 수 있는 최대 현금량은 올해 연말까지로 쳐도 고작 2백몇억 원… 그것도 다 썼다간 집에 끌려가야 할 것이다. 그건 전부 온전히 송선호의 재산이긴 했지만 지금 집안 상황이….
‘일단 원금이 천억이면 이자가 못해도 일 년에 몇십 억이란 소리다. 아마 넘겠지….’
그는 다니엘 스톤하츠를 보았다.
“보니까 연봉이 500억 정도는 하지 않습니까? 지금 선수들 중에서 제일 많이 받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다니엘 스톤하츠는 미르 킹쉴드처럼 여자를 잔뜩 데리고 사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돈을 흥청망청 쓰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TFC 선수로 있었던 것도 벌써 몇 년이니 분명히 돈이 있을 것이다.
“…….”
물론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 정도의 돈이 없었다. 그의 돈은 전부 러시아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정부 및 기업 용역으로 받는 돈은 한국 내 미혼모 및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기부하고 있었다. 그의 저금이라고 해봤자 지금 몇십 억도 되지 않았다.
‘내년…부터 기부금을 다 끊으면….’
한국은 그렇다고 쳐도… 러시아에 있는 전사자 가족들 중에는 그가 지원을 끊으면 바로 자식을 팔아야 할 수준이 꽤 많았다. 그래도 그냥 끊을까 싶었다. 당연히 그녀가 더 중요했다.
“지금 당장 그 정도의 돈은… 없습니다. 거의 대부분 러시아에 보내고 있어서…. 수중에 있는 건 몇십 억 정도….”
다니엘이 그렇게 말하자 나머지 셋이 놀라서 그를 보았다. 그 많은 돈을 다 남을 줬단 말인가? 이 남자는 무슨 성인인가? 송선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손을 뻗어서 술잔을 잡고 한 잔 마셨다. 목이 탄다. 일단… 이제라도 알았으니까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일단… 백억 정도는 지금 당장 해줄게. 백억 더는 아마 연말까진…. 나머지는 내년에 해결하자. 나도 당장에 그 정도 자금은 없다….”
지금 가진 부동산이랑 주식을 담보로 해서 저금리로 돈을 빌리면…. 송선호는 여전히 자신이 가진 걸 하나하나 생각해보고 있었다.
도현은 얼떨떨한 얼굴로 답했다.
“어… 땡큐. 꼭 갚을게.”
“…….”
술을 한 잔 더 마시고 나니 뭔가… 엄청난 실감이 드는 송선호였다.
‘나… 얘 감당하고 살 수 있을까.’
송선호는 집에서 적당히 물려주는 회사들을 받을 건 받고 따로 자기 사업을 할 생각이 더 강했다. 집안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싶은 마음도 컸기 때문이다. 형제나 가족끼리 너무 치열하게 경쟁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지금도 2세대가 조금 격화될 조짐이라…. 게다가 그가 그걸 물려받으려면 아직 시간이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근데 그녀는 당장 일 년에 못해도 몇백억은 써야 하는 여자란 말이지 않은가.
‘데리고 살려면….’
진짜 몸을 깎아 일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집에서도 받을 건 어떻게든 다 받아내야 하고…. 송선호의 고민이 깊어졌다.
“…….”
다니엘 스톤하츠도 고민이 깊긴 마찬가지였다.
‘러시아….’
그는 갈등하고 있었다. 그걸 끊으면 죽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아니, 어차피 그때 벌써 죽었을 사람들이었다고 본다면 그렇게 봐도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현 킬스버그는 말이 없는 두 남자를 번갈아 보다가 로웰 리를 보았다.
“…선생님?”
“짠.”
한 남자의 인생 계획과 타국에 사는 이름 모를 많은 사람의 운명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는 걸 알 턱이 없는 여자 둘은 빚 청산의 꿈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선 걸 깨닫고 자축배를 들었다.
“야….”
송선호는 지치고 좀 질린 얼굴로 도현의 얼굴을 보았다.
“너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돈 쓰고 살 거냐? 진짜 답 없어, 그러면… 아무리 나라도….”
“부담스러우면 굳이 안 빌려줘도 돼. 내가 빌려달라고 했어?”
도현은 드디어 송선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고 승무원에게서 메뉴를 받아 안주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야, 지금 작품이 저번 작품 반의반에 반이라도 대박 칠 거 같냐? 너 이거 평생 못 갚아.”
송선호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도현이 인상을 팍 찌푸리고 그를 돌아보았다.
“왜 말을 그렇게 해? 점점 잘 되고 있잖아.”
“그리고 너 지금도 돈 이렇게 쓰는데, 원금 본격적으로 갚기 시작할 때는 어떡할 건데? 너 이거 감당 못 한다고.”
도현은 입을 다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있는 데서 굳이 그렇게 말해야 돼? 선생님도 여기 계시잖아.”
송선호는 로웰을 보고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다시 도현의 손목을 잡았다.
“잠깐 둘이서 얘기 좀 해.”
“아, 또 뭘….”
도현은 엄청 귀찮아하며 손목을 빼내려고 했다. 억지로 그녀를 끌고 갈 순 없는 일이다. 송선호는 다시금 말했다.
“진짜 잠깐만.”
“으음… 선생님 그럼 저 잠깐만…. 안주 좀 대신시켜주세요.”
“네.”
다니엘 스톤하츠는 여전히 내부에서 엄청난 갈등 중이었다. 러시아… 그건 그가 마지막으로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 인간성의 표현이지 않았던가. 당연히 마음은 이미 끊어야겠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 누군가가 있었다.
‘송선호도 역시 포기한 건 아니군.’
그녀에게 마이너스 점수대를 넘어 남자가 아닌 것으로 취급받고 있던 그였는데 오늘 보니 또 분위기가…. 하지만 다니엘은 그녀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제 그녀를 그렇게 내버려 두고 떠났던 자신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런 다니엘에게 양해를 구하고 도현은 송선호를 따라서 일어났다. 그녀는 게임과 로웰과의 우정 다지기로 술을 꽤 많이 마신 상태였다. 송선호는 그녀의 명품 가운을 챙기고 승무원 하나에게 방으로 술 깨는 약과 숙취 제거제를 갖다 달라고 말했다. 그는 그녀를 데리고 자신의 객실로 갔다.
“아… 술 돈다.”
도현이 그의 침대에 앉았다. 송선호는 여전히 안 좋은 표정으로 그녀의 팔에 가운을 끼웠다.
“입고 앉아.”
“왜. 어차피 다시 갈 건데….”
“입어.”
송선호가 기어코 가운을 다 입히고 옷깃을 여미고 끈을 꽉 묶자 도현이 웃었다.
“너 진짜 나한테 왜 이렇게 명령조야? 가끔 진짜 웃겨.”
“내가 언제?”
“항상 그러더라….”
“일단, 너 대출 계약서랑 원리금 상환 내역 전부 나한테 보내라. 확인하고 줄일 만한 건 줄여야 하니까.”
“응…. 그거 로웰 선생님 변호사가 다 해주셨어….”
“…….”
그때 승무원이 말한 걸 객실로 갖다 주었다. 송선호는 그걸 받아서 뚜껑을 따서 도현에게 건네주었다. 도현은 마시기 싫어했다. 송선호는 그녀의 옆에 앉아서 그녀에게 술 깨는 약을 먹이려고 하며 말했다.
“제발 좀 마셔. 벌써 많이 마셨잖아. 나중에 머리 아프다고 징징거리지 말고.”
“아, 진짜 귀찮게….”
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결국 마셨다. 송선호는 가만히 그런 그녀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될 때까지 나한테 말 안 했어?”
“뭘….”
“빚. 그렇게 심각하면 미리 말해야 할 거 아냐. 작년 초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그런 걸 왜 너한테 말해….”
도현이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안 지 6년이나 됐고…. 너 나 돈 있는 거 알았잖아. 못 해도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볼 순 있잖아.”
송선호는 그녀가 실제로 팔려갈 뻔했다는 것에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도현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힘들다곤 했잖아. 그럴 때마다 잔소리만 엄청 했으면서….”
도현은 자연스레 손에 있는 것을 계속 마셨다. 독한 술 때문에 머리가 멍한 상태였다.
“…….”
“…….”
그렇게 둘 사이로 잠깐 침묵이 흘렀다. 송선호는 눈을 감고 두 손을 침대에 짚은 채 뒤로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 그녀의 붉은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까딱했다간 이렇게도 그녀를 못 볼 뻔했다는 말이었으니까….
“로웰 선생님께… 진짜 감사하다고 해야겠다. 큰일 날 뻔했는데.”
그녀가 로웰을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다. 송선호는 정말 후회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제대로 관심을 기울였어야 했다. 평생… 마음에 멍에를 질 뻔했다. 로웰 리에게는 앞으로 진짜 잘해야겠다. 은인이다.
“아깐 그렇게 말해서 미안…. 그래도 진짜 돈 쓰는 건 좀 줄이자.”
그녀가 술 때문에 약해진 상태라서 그런지 송선호도 조심스럽게 어조를 낮추어 말했다.
“네가 잔소리 안 해도 갚을 때까진 줄일 거야. 이것도 선생님이랑 나랑 얼마나 큰맘 먹고 놀러 나온 건데.”
도현이 말했다.
“서울 빼고는 집이나 섬도 팔리는 대로 팔 거고…. 그러면 좀 괜찮지 않을까 싶고….”
도현은 술 깨는 약이 술처럼 느껴지는지 한 번에 다 들이켰다. 송선호가 한숨을 쉬며 빈 캔을 받고 숙취 제거제도 따서 주었다.
“그래…. 부동산은 진짜 잘 알고 투자해야 돼….”
“나도 이번에 그게 제일 뼈 아픈 교훈이야. 차라리 다이아몬드나 더 살걸.”
“야… 그것도 잘 생각하고 사야 돼.”
“그래도 이름 있는 건 다 제값 이상 받고 팔았는데? 다른 게 문제였지…. 하, 반값밖에 못 받고 판 내 보석들 생각하면 진짜 눈물이 나.”
“하하.”
그제야 송선호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서 웃었던 것이 얼마 만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
송선호의 표정이 그대로 점점 심각해졌다.
“도현 킬스버그….”
“왜?”
도현은 숙취 제거제도 다 마셨다. 잠깐 명현현상 때문에 술이 더 도는 건지 그녀는 천천히 송선호의 침대에 누웠다. 그는 두 손을 깍지를 껴잡고 잠깐 생각을 하다가 몸을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다이아 정도는 얼마든지 살 수 있게 해줄게.”
“…….”
“그러니까 나 선택해줘.”
송선호는 약간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 진짜 너한테 최선을 다할게. 나 평생 너 책임질 수 있어. 열심히 할게.”
송선호는 도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더더욱 진심을 담아 한 마디를 덧붙였다.
“사랑해.”
“…….”
도현은 가만히 송선호의 진지한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약간 술이 깬다. 그녀는 한 손으로 천천히 머리를 괴고 옆으로 누워 그와의 눈높이를 좀 줄였다.
그녀는 자신의 다른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자신의 허벅지에 두고 그 손을 뭔가 가늠하듯이 검지로 슬슬 쓰다듬었다. 송선호는 긴장한 얼굴로 도현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이거 뭐야. 프로포즈야?”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진심이야.”
“넌 무슨 고백하고 며칠이나 지났다고…. 프로포즈면 반지라도 가져와야 하는 거 아냐?”
“…….”
집에 있다…. 아무리 송선호가 재벌이라고 해도 그때 그걸 그렇게 버리진 못한다. 환불하려고 했는데, 그것도 결국 못했다.
“그래서… 네 말대로 네 여자 되면 내 빚도 해결해주고 다이아도 잔뜩 사주고 호강시켜 준다고?”
“…나 진짜 잘할 수 있어.”
“지금까지 나한테 그렇게 해놓고?”
“그건… 그건 미안…. 나 너 포기하려고 한다는 게…. 미안하다…. 그건….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
“너랑 결혼하고 네 애 낳고 그러자고?”
“절대 너 고생 안 시켜.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줄게.”
“딴 남자랑 노는 것만 빼고?”
“그건…! 당연하지!”
송선호가 발끈해서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술이 좀 깨기도 한 것 같고 아직 취한 것도 같은 상태로 자신의 허벅지에 있는 송선호의 커다란 손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슬슬 만지고 있었다.
“아… 술 취했을 때 이러는 건 반칙 아냐?”
“…….”
유사 이래로 여자가 술에 취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을 때 이렇게 저렇게 하는 건 남자들의 고전적인 수법이라지만. 어쨌든, 이런 경우 어떤 여자라도 득실을 따져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좀만 노는 건 안 돼? 그냥 가끔 배 타고 놀러 다니고….”
“스트리퍼는 안 된다. 절대 안 돼. 남자랑 그렇게 야한 게임하는 것도 안 돼. 바람피우는 건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 본다.”
“아… 깐깐하다, 진짜….”
그리고 도현은 또 가만히 생각하다가 물었다.
“근데 너네 집… 집안 행사나 이런 건 여자들이 해야 하는 거 아냐?”
“싫으면 안 해도 돼. 고생 안 시킨다니까.”
“흠… 그게 진짜 네 선에서 커트가 돼? 한국 환경에서….”
“돼.”
송선호가 지금까지 살았던 거랑 좀 많이 다르게 살긴 해야겠지만. 그녀가 자신을 제대로 고려해주는 것 같자 송선호는 정말로 긴장되어 다시 식은땀이라도 날 것 같았다. 그녀가 자신의 손을 계속 만지고 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음… 그럼 너 잘해?”
뭘… 이라고 물어보려다가 얼굴이 확 붉어졌다. 도현은 심각했다.
“딴 남자랑 절대 못 하고 너랑만 하고 살려면 네가 진짜 잘해야 할 것 같은데….”
“잘해.”
송선호는 얼른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송선호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엄청 잘할 것 같진 않은데…. 딱 봐도 여자들이 다 맞춰줬을 거 같고.”
그게 뭔가. 한 번도 안 해봤다. 송선호는 그녀가 이런 쪽을 따질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아니, 그녀의 생활상을 본다면 충분히 예상할 법도 했는데, 왜 미리 대비를 못 했을까….
‘다른 여자라도….’
“난 딴 남자 못 만나게 할 생각이면서 넌 다른 여자 만나서 연습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송선호는 또 얼른 그렇게 대답했다. 도현은 머리를 괴고 있던 팔로 침대를 짚고 좀 더 몸을 일으켜 그와 눈높이를 같이 하며 그의 얼굴에 얼굴을 들이댔다. 코끝이 스친다.
“잘하는지 지금 확인해봐…?”
“…….”
송선호는 지금 속으로 오만 욕설을 다 하고 있었다. 긴장돼서 죽을 것 같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의 얼굴이 더 다가올 것 같자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송선호의 눈을 계속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아무리 봐도 네가 지금 내 상황 이용해서 나 날름 하려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많이 찝찝해. 이제 와서… 좀 많이 치사한 느낌이다?”
“…….”
“진짜 못할 것 같기도 하고.”
술이 거의 깬 도현은 침대에서 일어나서 송선호를 두고 방을 나갔다.
*
그리고 송선호는 프러포즈 후 실연을 당한 남자의 정석적인 루트를 밟기 시작했다.
Phase 1. 현실부정
‘거짓말이지…. 진짜? 거짓말… 거짓말….’
송선호는 도현 킬스버그가 나가고 난 뒤 그 자세 그대로 굳어있었다. 그는 믿지 못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말이다. 이 결과를.
왜냐면… 왜냐하면 그는 이런 걸 거절할 수 있는 여자는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녀와 같은 상황에서. 자의식과잉이 아니었다.
평생 헌신적인 사랑을 약속하고 그럴 자신도 있는, 여자관계도 없이 깨끗한, 상류층 출신의, 훤칠하고 잘생긴 젊은 남자가 어마어마한 빚을 갚아주고 앞으로의 호강도 보장하는데. 여자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의 남자가 어디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녀에게 송선호보다 더 좋은 조건의 남자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타이밍을 살짝 놓치긴 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상황은 좋지 않았고 그녀는 그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고작 스트리퍼나 다른 남자들을 지금까지처럼 쉽게 쉽게 만나고 흘려보내는 생활을 위하여 자신을 거절했다고?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
‘술 취해서 잘못 생각한 거겠지. 그렇겠지. 괜히 술 먹었을 때 얘기해서…. 다시 한번 제대로 얘기해보면 분명히….’
송선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야외 수영장으로 그녀를 찾아가니 그녀는 다니엘 스톤하츠와 웃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송선호의 고백과 프로포즈… 그의 사랑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실연의 두 번째 단계로 돌입했다.
Phase 2. 분노(feat. 술) ⇄ Phase 3. 자학
“하… 내가 미친놈이지. 내가… 내가 돈 놈이지. 이러고 사는 년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빚까지 갚아주고… 다~ 하겠다고. 젠장. 씨발. 원래 그만두려고 했어. 원래부터 그냥 칼같이 다 그만두려고 했다고.”
라운지 바에 앉아 대낮부터 술을 푸기 시작한 송선호는 아주 빠르게 취했다.
“그런 년이 뭐가 좋다고! 그래! 원래도 싫었어. 진짜 좆같이 싫었다고…!”
6년 동안 짝사랑을 해왔던 남자는 끝내 견디지 못하고 마음을 털어놓고 나서부턴 고백, 프로포즈, 실연까지 일주일 만에 해치우는 화끈함을 보였다.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혼자서 반지까지 샀던 남자답다면 답다.
“그래, 혼자 그렇게 즐길 거 다 즐기고 잘 살아라. 씨발… 그래, 늙어 죽을 때까지 싸구려 스트리퍼나 상대하고 살라고. 돈 펑펑 쓰다가 진짜 팔려가면 그런 스트리퍼들이 구해줄 수나 있을 거 같아? 나 같은 남자가 그렇게 흔한 줄 아냐고…. 씨발….”
그는 술에 절어 있었다. 혼자서 분에 참지 못하고 여자를 욕했다가 자기 자신을 욕했다가 그러고 있었다.
“씨발, 다니엘 스톤하츠 이 병신새끼는 자기는 뭐가 다를 줄 아는 거야, 뭐야? 지는 뭐가 다를 줄 아냐고오, 어?”
다른 놈 욕도 한다. 그는 몇 시간째 똑같은 말을 반복 중이었다. 글래스를 닦고 있던 바텐더가 가끔 조용히 호응을 해주곤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제일 미친놈이야! 내가 제일 돈 놈이라고. 그런 년 눈을 씻고 쳐다봐도 좋은 점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사귀면 뭐해! 바로 바람이나 피울 게 뻔한데!!”
바텐더는 웃으면서 송선호를 위로했다.
“진짜 나쁜 여자였나 보네요.”
“…….”
Phase 4. 후회(feat. 눈물)
“사실… 그렇게 나쁜 여자는….”
그렇게 말하는데 송선호의 눈에서 갑자기 뚝,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는 정말 예쁜 여자였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래서 아주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세련되고 단정하고 분위기가 독특해서 자꾸 눈이 가고…. 주변의 또래 여자애들은 그냥 철이 안 든 어린애 같았는데 그녀는 자신보다 한 살이 어린데도 차분하고… 그런데도 어쩐지 요염했다.
“걔 주변엔 항상 남자들이 많더라구요…. 흑… 씨발. 당연하지. 그렇게 예쁜데…. 내가 병신같이 신사인 척한다고 자꾸 빼고…. 용기도 없는 등신이라 고백도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분명히 언제든… 언제든 그럴 수 있었는데…. 이렇게 되기 전에….”
그가 지금보다도 더 괜찮은 남자였을 때가 있었다. 추잡하게 질투하고 욕망하고, 그걸 못 견뎌서 그녀에게 화풀이를 하고 그러지 않았을 때 말이다.
“그러면… 그러면 우리도 그냥 대학생 커플이나… 그냥 그런 커플들처럼 사귈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다시 만났을 때… 그때라도 좋았다. 그녀의 주변에 그 지긋지긋한 남자들도 없었고 분명히 그녀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더 욕심을 냈다. 자신이 아니라 그녀가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그의 매력과 그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을 가늠하고 그녀가 먼저 원해서, 그녀가 먼저 자신에게 다가와 주기를 바랐다. 그때까지 상해왔던 자존심의 보상을 원한 것이다.
“으흑….”
송선호는 먹은 술을 전부 눈물로 쏟아내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개를 숙인 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뚝 떨어졌다.
“처음부터 잘해줄걸…. 포기하지 말걸…. 아… 진짜… 흑… 이렇게 좋아하는데…. 사랑하는데…. 왜 모르냐고…. 왜… 흑… 아… 나 진짜 이제… 진짜… 흑… 진짜 잘할 수 있는데….”
송선호는 더이상 술을 마시지도 못했다. 더 마시면 사람이 실려 나갈 지경이었다. 그는 바(bar)에 이마를 박고는 엉엉 울었다.
“내가…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냐고…. 흑… 내가 더… 내가 바라는 게 그렇게 큰 거냐고…. 내가… 내가 사랑하는 여자랑 둘만… 그렇게 사랑하고 싶은 게 그렇게 큰 바람이었냐고…. 도현 킬스버그… 흐윽… 으윽… 이 나쁜 년….”
그는 대낮부터 마시기 시작해서 저녁쯤이 되자 직원들이 겨우 부축하여 방으로 보냈다. 물론 다음날도 그는 똑같은 단계를 그대로 밟았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뭐, 그다음 날도.
*
“무엇을 바라는가, 방랑자여.”
로웰 리는 차양 밑에 자리를 깔고 앉아 승무원의 부채질을 받고 있었다. 물론 옆에는 최신 냉풍기도 돌아가고 있다. 그녀의 앞에 공손히 앉은 이는 바로 다니엘 스톤하츠. 그는 심각한 얼굴로 입을 뗐다.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그게 무엇인고.”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녀의 앞에 커다란 스크린을 돌려서 보여주었다. 거기엔 사람들의 신상이 적힌 명단이 좌르륵 있었다.
“제가 러시아에 후원하고 있는 가족 1만 호입니다. 제가 연봉이 7백이 좀 안 되는데 거의 그쪽에 넣고 있습니다. 연구소나 정부, 기업 용역으로 한 해 백 정도 나오는 돈은 한국에 있는 미혼모와 저소득층 아동에게 전부 들어가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연봉 및 기타 수익과 사용 내역을 간단하게 그녀에게 밝혔다.
“전부 다 끊으면 도현 씨 빚은 빨리 갚을 수 있는데 분명히 죽거나 팔려가는 사람이 나올 겁니다. 러시아에 있는 가족 1만도 11만 호 중에 고르고 골라서 택한 거라….”
“봅시다.”
송선호가 술독에 빠지기 시작한 날, 다니엘은 도저히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아 누군가의 의견을 들어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의 도현 로렌스 킬스버그 학론에 따르자면 현재 도현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치는 사람은 바로 로웰 리. 이럴 때 그녀의 말을 따르면 도현에게 가장 좋은 방향으로 일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이걸 개인이 하고 있다구요? 국제기구는 뭐 하나요?”
로웰은 무슨 TFC 선수가 자선사업이야? 라고 꺼림칙해 하면서 명단을 하나 눌러보고 있었다.
“요새 자선단체는 전부 게이트로 파괴된 나라 중심으로 구호활동 중이라 러시아같이 아직 정부가 존속하고 있는 국가는…. 그리고 러시아라….”
다니엘이 그렇게 말했다. 로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네요…. 관리해주는 정부도 없이 몬스터한테 먹히는 사람이 천지인데.”
하지만 러시아 1만 호, 한국 천여 호에 달하는 가족들 중 누군가를 솎아내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다니엘이 말했듯 고르고 골라 정말 어려운 사람들만 지원하고 있는 중이라 러시아뿐만 아니라 한국도 지원을 끊었다간 단기간 내에 미혼모나 아이들이 팔려나가겠다 싶을 정도였다.
“한국도 꽤….”
로웰이 황당해서 그걸 보고 그렇게 말했다. 다니엘이 답했다.
“15세 미만의 아동은… 어쨌든 나라에서 100% 지원이 됩니다, 한국 같은 경우는요. 15세 이상이 문제죠. 금융판단을 할 수 있는 나이라 보고 부모의 설득에 의해서 많이 팔려가니까요.”
“헐… 그렇구나. 몰랐네요. 그러게 왜 갚지도 못할 돈을 빌려…. 참나, 애들이 무슨 죄야. 아니, 지가 빌린 돈이면 지가 팔려가야지 왜 애들을….”
로웰은 상투적인 문구를 중얼거렸다.
본인이 책임지는 이상 뭐든 누릴 수 있는 시대, 개인정보와 재산권, 상표권 등이 강력히 보호되고 재능과 미래를 보는 안목만 있다면 단기간에도 억만장자가 수십 명은 나오는 시대, 환율 외에는 각국의 무역을 제한할 수단이 없는, 모든 국가가 통합된 진정한 세계 시장의 시대, 진정 누구든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 제1, 2세계의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시대. 인공지능에 의한 법리 판단으로 억울한 판결이 없는 진정한 법치의 시대.
그들은 22세기, 유사 이래 가장 공명정대한 시대를 살고 있었다. 폭력과 자본이야말로 이 공평하고 기회로 넘치는 시대를 지키는 수호자들이다.
21세기 신마르크스주의가 판을 치며 금융 윤리가 사라지고 많은 개인과 국가, 기업들이 도덕적 해이에 빠져 파산을 일삼을 때 전 세계 과학기술, 정치, 시민의식, 교육, 학문 등 모든 것이 쇠퇴일로를 걸었다. 냉전 종식까지 눈부시게 발전했던 모든 것들이 말이다. 게다가 기형률, 유전병 발병률, 정신병 발병률, 범죄율 등 사회 암적인 수치가 매년 최고치를 경신했다. 21세기의 인류는 병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한 게 바로 제1세계 금융기관의 세계적 승소로 퍼진 신자본논리이다. 사람들은 자본을 숭배했고 자본은 숭배자들에게 부유함을 선사했다. 기회와 책임을 누릴 자격을 가리고 올바른 시민의식과 상식이 없는 자들은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제거되었다. 문명과 약육강식-자연의 법칙의 기막힌 조화.
“한국은 다 끊읍시다. 러시아도 아니고 이런 나라 살면서도 이 정도밖에 못 산다는 건 사람이 문제가 있는 거죠. 차라리 애를 나라에 맡기면 되지 꾸역꾸역 자기가 데리고 있는 것도 영 애들 팔려는 수작인 거 같아서 보기 싫네요. 빈민층 애들은 다 나라에 애들 맡기는 방향으로 설득할 순 없을까요?”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애를 못 키울 여건의 가정은 아이의 친권 및 양육권을 나라에 맡길 수 있었다. 그런 아이는 국가에서 보장하는 의무교육과 양육을 무상으로 만 18세까지 받을 수가 있었다. 당연히 나라는 애를 어디다 팔지 않는다. 공명정대한 정부는 그런 종류의 부모보다 훨씬 나은 존재다.
“근데 러시아는 아직도 인공지능 대의원제를 안 하는 후진국이라….”
“누구 도와줄 만한 사람은 주변에 없어요? 자선활동에 관심 있다거나. 아는 선수들 중에 없습니까?”
또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다니엘은 새로운 사고방식에 좀 놀라서 약간 소화를 시키다가 바로 디바이스를 통해 누군가에게 연락을 했다.
“셀레나.”
[어머, 다니엘. 휴가 기간인데 무슨 일로….]
여러 색이 섞인 오묘한 눈동자가 아름다운 미녀, 셀레나 카토였다. 그녀는 마치 노린 듯 야시시한 수영복을 입은 자신의 몸과 얼굴을 끝내주는 각도로 찍으며 다니엘의 전화를 받았다.
“물어볼 게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휴가 기간 중에 죄송합니다.”
[아뇨. 다니엘의 일이 제 일인걸요. 언제든 편하게 연락해도 된다고 했잖아요.]
“저… 그러니까….”
다니엘은 말을 고르다가 로웰을 보았다. 그러자 로웰이 셀레나에게 인사를 하며 카메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안녕하세요.”
[…….]
그러자 셀레나는 좀 경악한 얼굴로 로웰을 보더니 약간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녀의 예쁜 가슴이 모이며 가슴골이 짙어졌다.
[누구…시죠?]
“다니엘 스톤하츠 씨 지인 되는 로웰 리라고 합니다.”
[다니엘 선수 매니저 셀레나 카토입니다만….]
“다름이 아니라 저희가 같이 러시아 빈민층에 구호금을 보낼 만한 선수를 찾고 있는데요. 누구 없을까요?”
“부탁드립니다.”
다니엘도 살짝 얼굴을 카메라 앵글에 넣으며 그렇게 말했다. 셀레나는 당황해서는 자신의 디바이스를 조작했다.
[음… 그런 데는 아무도… 아, 태호 군한테 물어볼까요? 왠지 태호 군이라면 그런 데도 관심 있을 것 같은데.]
“아,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헐!! 우리 신태호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지금!!”
로웰이 흥분해서 그렇게 소리쳤다. 그녀는 다니엘을 보면서 말했다.
“저 신태호 선수 팬이에요! 전에 싸인도 액자에 넣어서 벽 한가운데 걸어놨습니다. 한 장은 금고에다 넣어두고요!”
[태호 군… 연결해드릴까요? 연락처 있어요, 다니엘?]
“없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디바이스 위로 홀로그램이 하나 떴다가 곧 신태호의 얼굴이 떴다. 그도 바닷가에 있었다.
[꼬맹이~~ 누구냐? 여자냐?]
[어머, 나 두고 누구래?]
[아, 아뇨. 앗. 저 좀….]
홀로그램 속의 신태호는 엄청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만지는 여자의 손을 피했다. 그는 우글우글한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어? 스톤하츠네? 야, 뭐하냐? 어디냐?]
이스트드래곤 선수들이 뒤에 꽤 보였다. 같이 휴가를 간 모양이었다. 신태호도 덩달아 거기에 끼여 또 나쁜 형들 사이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바하마 가는 중이다. 비켜. 신태호에게 용건이다.”
그제야 신태호의 얼굴이 화면 가운데 위치했다. 아직 얼굴에 안대와 밴드를 붙이고 있는 신태호였다. 로웰 리는 디바이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안녕하십니까, 신태호 님. 로웰 리라고 합니다. 왕팬입니다.”
[아… 네. 네. 안녕하세요.]
“신태호, 자선에 관심 있나?”
다니엘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네?]
다니엘의 말에 당황스러운 얼굴을 한 신태호는 셀레나와 로웰의 설명을 듣고 어… 하고 약간 고민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선수 중 하나가 뭔데? 하고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얘기를 나눴다.
[엇, 그런 거 하면 동상 같은 거 세워주고 그러는 거 아니냐?]
[그건 아닐 텐데요….]
셀레나가 대꾸했다. 그렇게 얘기를 하다 보니까 어떻게 십시일반이 되는 것 같았다. 신태호가 물었다.
[혹시… 그중에 소드마스터인 애들도 있을까요?]
“그럴지도.”
“있네요.”
로웰이 다니엘의 명단에 분류항목을 넣어보자 소드마스터인 아이를 가진 가정에 대한 통계자료가 나왔다. 그러자 신태호는 생각보다 꽤 거금을 투척했다. 현행 기부 금액의 3분의 2는 다니엘이 그대로 부담하고 3분의 1은 이스트드래곤 다른 멤버들이 부담하는 형식으로 되었다. 그중 신태호가 가장 많이 기여했다.
“이 정도면….”
다니엘은 금전 쪽은 확실히 잘 몰랐지만 그래도 도현이 돈을 못 버는 사람도 아니고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로웰을 봤더니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내년 스톤하츠 씨 연봉 나올 때까지 어떻게든 이자 막는 게 우선이겠군요. 스톤캐피탈 거야 채 사장이 셀프로 갚고 있으니까 두고… 누리은행이 문제구나….”
로웰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
그동안 셀레나 카토는 충격에 빠져있었다. 보니까 다니엘이 지금 같이 있는 금발 삐삐 머리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서 이렇게 다른 선수들에게 연락까지 한 것 같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전우와 같은 동료들과도 최소한의 교류 이상은 하지 않는 것으로 매우 유명했다.
근데 저 금발 삐삐 머리는 아무리 봐도 사회에 반항적인 땅꼬마일 뿐, 미녀는커녕 여성으로서의 매력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위해 바로 ‘그’ 다니엘 스톤하츠가 이렇게 발 벗고 나서고 있다고? 셀레나 카토는 여성으로서의 자존심에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누구를 만나는 걸 본 적이 없는 다니엘이 요새 어떤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바로 그 여자가 이 삐삐 머리…. 그게 이 삐삐 머리….
‘이게 다니엘의 취향인가…? 삐삐 머리?’
그녀는 다니엘에게 사적인 감정이 아주 지대했다. 몸과 마음을 다해 그를 보필할 생각이 매우 충만했다. 그에게 고백을 해볼까도 몇 번이나 고민했지만 그는 공적인 관계를 벗어나 사적으로 접근하는 여자들을 대단히 불편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참고 또 참았는데 그를 뺏은 게 이 삐삐 머리….
그 사이 이스트드래곤의 다른 멤버들과 이야기를 끝내고 신태호가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다.
[저… 감사합니다.]
“감사할 사람은 난 것 같은데.”
다니엘이 그렇게 말했다. 신태호가 대꾸했다.
[이런 걸 할 수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이렇게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도 생각 못 해봤어요. 제가 죽인 선수들의 목숨을 되돌릴 순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별로 의미 없을지도 모르지만요….]
“그래.”
그리고 신태호와의 통화를 끝냈다. 셀레나와도 통화를 끝내기 위해 보는데 그녀는 약간 눈물이 글썽한 채로 다니엘을 보고 있었다.
“셀레나?”
[다니엘….]
그녀는 울먹울먹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미녀가 그러고 있으니 남심이 흔들릴 만도 했으나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많은 다니엘은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다니엘… 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러자 다니엘은 눈을 한 번 깜박했다가 대답했다.
“유능한 매니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거 말고… 여자로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마 다니엘은 그녀가 셀레나 카토가 아니었다면 대번에 또 자신에게 돈 때문에 접근하는 여자겠거니,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셀레나는 아주 유능하고 좋은 매니저였다. 그렇기에 그런 가능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투에선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셀레나는 그가 만나는 여자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보다 그게 저 삐삐 머리라는 걸 알았을 때 더 충격을 받았다. 분명히 엄청난 몸매와 엄청난 얼굴의 미녀라, 아니, 못해도 훌륭한 여성성을 지닌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셀레나가 납득을 할 수 있을 만한 그런, 그런 여자 말이다.
[흑… 다니엘 이 바보 같은 남자.]
그리고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
다니엘은 끊어진 화면을 보면서 고개를 또 갸우뚱했다. 물론 뭐가 뭔지 알아차린 로웰은 약간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음, 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언제나 안타깝다. 울먹거리는 얼굴이 정말 예쁜 여자다…. 우리 작가님도 예쁜데.’
둘이 나란히 묶어놓고 라이딩 크롭으로 허벅지를 때리면 아주 기가 막힌 그림이 나올 것 같다. 도현 킬스버그의 색기나 셀레나 카토의 순정적인 느낌이 빛을 발할 것이다.
‘음! 아주 좋은 영감이…!’
로웰은 얼른 멀티스크린을 띄워 지금 떠오른 영감을 스케치하고 아이디어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휴가 중에도 창작자의 의욕은 멈추지 않는 법이다.
“뭐해요?”
도현 킬스버그가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머리를 닦으며 다가왔다. 그녀는 오늘 하얀색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하얀색을 입으니 그녀의 발갛고 분홍빛이 도는 살결이 더욱 돋보였다.
‘도대체 비키니라는 수영복을 발명해낸 자의 저의가 무엇인가….’
다니엘은 그렇게 침음을 삼키며 그녀의 몸에서 황급히 눈을 떼고 대답했다.
“아… 잠깐 통화 중이었습니다.”
“스톤하츠 씨가 이스트드래곤 선수들한테 부탁해서 기부금을 마련했어요. 작가님 빚 갚아주려구요.”
“어머…!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도현은 그가 정말로 돈을 갚는 데 일조해줄 거라고 생각을 못 했는지 그렇게 말했다.
“일단 작가님이랑 스톤하츠 씨는 저~쪽에 가서 얘기하세요. 저 지금 영감이 폭발해서….”
로웰이 손을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으며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다니엘의 손을 잡고 자리를 옮겼다. 파라솔을 펴고 선베드에 앉았다. 다니엘은 무뚝뚝하지만 역시나 긴장한 얼굴로 입을 뗐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도현 씨.”
“왜 그렇게 갔어요?”
도현이 물었다. 다니엘은 머뭇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도현 씨한테 심한 짓을 할 것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
이래서 동정은… 그렇게 한편으로 생각했지만 귀엽다는 생각도 다소 들었다. 도현이 또 물었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도망가실 거예요? 저 두고?”
“앞으로…가 있는 것입니까?”
다니엘이 살짝 놀라서 그렇게 물었다. 도현이 웃었다.
“왜요? 싫으세요?”
“아, 아닙니다. 좋습니다. 정말 좋습니다.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앞으로 그런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은 긴장하여 엄청나게 빨리 말했다. 도현이 다니엘의 아름다운 얼굴을 손으로 감싸 잡았다. 그리고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부드럽다.
“귀여워요, 다니엘 씨.”
“…….”
다니엘의 귀와 목이 빨개졌다. 그걸 보고는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때 너무 뭐가 빨랐나 봐요. 다니엘 씨 진도에 맞춰서 하나씩 천천히 해야겠어요.”
“처, 천천히 하면… 괘, 괜찮을 것 같습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나씩이라니… 뭘 하나씩….’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그녀의 손가락부터 차근차근 만져보고 싶었다. 가늘고 길고 모양이 예쁘고 여성스러운 그녀의 손… 언제나 예쁘다고 생각했다. 입을 맞춰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다음엔 발을….
그리고 그 정도라면 그런 저질스러운 욕망 따위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천천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설레면서도 긴장되고 또 설레는 그녀의 말이었다. 다니엘은 미소를 지은 그녀의 예쁜 얼굴만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새카맣고 매끄러운 머리카락에 귀랑 목은 빨간데 아름다운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있고, 또 너무나 예쁜 보석 같은 다니엘 스톤하츠의 눈동자는 평소와 다르게 감정을 담아 반짝거린다. 도현 킬스버그는 그런 다니엘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래, 순결은 한 입씩 베어먹는 맛이라고 했고.’
도현은 잡고 있는 다니엘의 손을 자신의 쪽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가슴부터 만져볼래요?”
“너무 진도가 빠릅니다…!!”
다니엘이 기겁을 하며 그렇게 외쳤다.
*
일주일 만에 푸에르토리코에 도착한 지니 호에는 이미 이러한 상황이 소문으로 쫙 퍼진 상태였다.
미르 킹쉴드는 아예 배에서 쫓겨났고
송선호는 차인 충격으로 술판만 벌이고 있으며
결국 승자는 다니엘 스톤하츠라고
“아, 예쁘다.”
도현 킬스버그는 새하얀 원피스에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푸에르토리코의 아름다운 해변에 정박한 지니 호에서 작은 보트로 건너 타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바다를 볼 때마다 감탄했다. 다채로운 색깔로 일렁이는 투명한 바닷물. 푸에르토리코! 얼마 만인가! 도현이 상기된 얼굴로 아름다운 해변과 바다가 이루는 장관을 천천히 돌아보는 사이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녀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아 가볍게 그녀를 보트에 태웠다.
“고마워요.”
그녀가 유례없이 활짝 웃으며(오늘 기분이 아주 좋은 그녀였다) 다니엘의 뺨에 뽀뽀를 했다. 푸에르토리코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을 차지하고 다들 자리를 잡았다. 윈드서핑, 카이트서핑을 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나가 수상스포츠를 즐겼다. 바나나보트나 수상스키를 빌린 사람들도 있었다. 오늘은 저녁까지 해변의 상점과 가게의 서비스를 받아 즐기기 때문에 지니 호를 관리하기 위한 최소 인원을 제외한 모두가 해변에 나와 있었다.
로웰과 어시스턴트들은 윈드서핑을 배우고 있었고 도현과 다니엘은 둘이서 데이트를 했다.
‘행복하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언제나 감각과 인지능력을 날카롭게 벼리고 명정하게 의식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굳이 훈련 중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마도순환과 마법 구현을 위한 최상의 신체 및 정신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그에게 언제나 최우선 순위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약에 취한 것이나 별반 다를 것 없을 정도로 분별이 없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그녀와 키스를 잔뜩 하고 있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가벼운 입맞춤부터 혀를 섞는 것까지. 다행히 저번 같은 그런 음침한 욕망은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다니엘 씨.”
그녀가 불러서 돌아보았더니 그녀가 다니엘의 얼굴에 물을 뿌리며 장난을 쳤다. 그녀가 활짝 웃고 있었다. 다니엘의 얼굴에도 자연히 그 미소가 따라붙었다. 다른 연인들이 하듯이 그도 그녀에게 물을 살짝 튀겼다.
“꺅!”
“죄, 죄송합니다!”
다니엘은 이런 걸 처음 해봤기 때문에 영 요령이 없었다. 휘청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물을 잔뜩 맞은 도현이 하하하고 웃었다.
“다니엘 씨도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도현이 잔뜩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는 다니엘의 팔을 만져보았다. 물에 젖어 촉촉한 그녀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뻐 보이는지. 그녀가 미소를 지을 때마다 가슴이 뭉게뭉게 부풀고 기분이 좋다. 다니엘이 미소를 지으니 도현이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또 입을 맞추었다.
“다니엘 씨는 웃는 게 진짜 예쁜 것 같아요. 자주 웃어요.”
“네….”
아… 그녀가 너무 좋다….
다시 입을 맞췄다. 서로의 입술이 바닷물 때문에 짜서 오히려 그녀의 타액이 더 달게 느껴진다고 다니엘은 생각했다. 그녀의 혀가 너무 부드러웠다. 허리도… 배도… 다리도… 그는 도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낮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뇌가 질퍽질퍽해진 기분이었다.
기분이 너무 좋다….
정말 둥둥 뜨는 기분….
“음…?! 읍…!! 푸하! 다니엘 씨!!”
“네…?”
다니엘은 목과 귀에 얼굴까지 벌건 채로 도현과 입을 맞추고 있다가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밀어내자 아쉬운 마음에 자꾸 그녀에게 입술을 들이대고 있었다. 도현은 그의 뺨을 두 손으로 밀어내며 소리쳤다.
“꺅! 내 배!!”
“?”
다니엘은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직경 약 1km 내에 있는 것이 전부 다 공중에 떠올라 있었다. 저 멀리 윈드서핑을 하고 있던 이들도 죄다 떠올랐다. 도현과 다니엘도 공중에 둥둥 떠서 천천히 돌고 있었다. 도현이 무서워서 다니엘에게 힘껏 매달린 채로 지니 호를 바라보며 걱정했다.
“처, 천천히 내려줘요. 우리 지니… 아, 어떡해.”
“…….”
다니엘은 잠시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니엘이 무의식중에 마법을 발현시킨 건 사춘기 때 이후로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잠을 잘 때마다 주변에 있는 모든 걸 공중으로 떠올리고는 했다. 훈련을 받고서야 그런 일이 없어졌다. 선천적인 재능과 성실한 수련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마도사가 된 그의 마력은 사춘기 때와는 비교도 할 수도 없을 만큼 강력해져 있었다. 이 정도 범위 내의 사물을 의식 없이 띄운 건 처음이다.
다니엘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러자 모든 사물이 위아래로 크게 진동했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졌다.
“내 배…!!”
다니엘은 지니 호부터 천천히 하강시켰다. 정말 천천히… 물에 부딪히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부드럽게 착륙시켰다. 그리고 해변에 있는 사람과 물건이 천천히 아래로 향하게 했다. 그렇게 해변에 가까운 순으로 모든 사람을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도현과 다니엘도 그 순서에 맞추어 아래로 내려갔다.
“…….”
다들 입을 딱 벌리고 다니엘 스톤하츠를 쳐다보았다. 다니엘은 모두의 시선을 피하고 먼바다를 보고 있었다. 도현마저도 다니엘을 그렇게 보자 그는 변명조로 말했다.
“…도현 씨 때문입니다.”
도현이 그의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가 풋 하고 웃었다.
“키스 좀 했다고 이러면 우리 섹스는 어떻게 해요.”
“…!”
그녀의 말을 듣자 다니엘의 온몸이 벌게지면서 그의 주변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엔 바닷물까지 뭉게뭉게 방울져서 떠올랐다.
“꺅! 다, 다니엘 씨…!!”
도현이 다니엘의 어깨를 잡으며 떠오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번엔 배까지 떠오르진 않았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또 떠올랐다. 다니엘은 한숨을 후욱 내쉬며 다시 모두를 아래로 내려주었다.
“…….”
“요, 요새 명상을 하지 않아서 이런 것뿐입니다. 이런 경우는 아주… 아주 극히 드뭅니다. 15살 이후로 이런 적은 처음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도현 씨.”
도현의 표정이 미심쩍어지자 그가 황급히 변명했다. 그래서 일단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뽀뽀는 그만하기로 했다. 다니엘은 아쉽기도 하고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애가 타는 마음에 그녀에게 애원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내심 그녀가 그걸 매정하게 거절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면 그녀에게 화를 내고 싶다…. 그녀를 겁먹게 하고 싶어. 그러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또 이상한 욕망이 예고도 없이 튀어나왔다. 그는 도대체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명상이 필요했다. 마도순환을 너무 오래 쉬었다.
물놀이도 잔뜩 했겠다, 쉬려고 선베드로 돌아온 둘이었다. 도현도 물놀이에 지쳤는지 선베드에 엎드려 누웠다. 그 사이 다니엘은 정신을 집중하고 온몸의 마력을 순환하기 시작했다.
“다니엘 씨, 저 오일 좀 발라 주실래요?”
다니엘이 눈을 돌려 옆을 보았다. 납작 눕힌 선베드에 그녀가 비키니를 풀고 한 팔로 가슴을 가린 채 다니엘을 돌아보고 있었다. 헉. 순간 마도순환을 멈추지 않았으면 말로만 듣던 주화입마라도 걸릴 뻔했다. 그녀는 아까 그 일이 왜 일어난 건지 모르는 것인가!
“매일 선탠하는데도 잘 안 타서요.”
그녀가 건넨 것은 탠오일이었다. 다니엘은 귀와 목, 얼굴, 어깨까지 벌게져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만 짜서 따뜻하게 해서, 부드럽게 발라주세요.”
그가 이런 걸 해본 경험이 전혀 없을 거라고 판단한 도현이 아주 구체적으로 주문했다. 다니엘은 손에 갈색 탠오일을 한 번 짜고 손바닥에 문질렀다. 그리고 그녀의 분홍빛이 도는 하얀 등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한 팔로 나신의 가슴을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앞으로 모아 잡고 있었다. 가녀린 듯 건강하고 여성스러운 그녀의 목, 어깨, 등, 허리… 그리고 골반이 넓고 예쁜 엉덩이….
‘다니엘 스톤하츠… 넌 할 수 있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안에 이런 거대한 욕망이 있었던가. 그녀를 만지고 싶었다. 그녀의 등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녀를 부끄럽게 할 만한 말을 잔뜩 하고 싶다. 그녀가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고 당혹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속에서 마구 튀어 오르는 말도 안 되는 욕망을 억누르며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다니엘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댔다.
‘부드러워…!’
미치겠다…. 그가 천천히 손가락으로 어깨를 문지르다가 날갯죽지를 손바닥으로 감싸 오일을 바르고 천천히 허리로 내려가자 도현이 눈을 감으며 으응… 하고 소리를 냈다. 다니엘이 움찔 떨며 그녀의 등에서 손을 뗐다.
“손에 오일을 더 발라야 할 것 같아요.”
“네, 네…!”
다니엘은 손에 오일을 더 바르고 그녀의 등과 허리를 마사지했다. 그리고 나니 그녀는 다리까지 발라달라고 주문했다. 아아, 첩첩산중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었다. 진도를 아주 천천히 나가기로 합의하지 않았던가. 도대체 그녀에게 ‘천천히’란 어느 정도인 것인가. 그럼 ‘보통 속도’였다면 벌써 한참(?)을 더 할 수 있었다는 말일까? 천천히 하자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던 건가! 아니다. 이건 그저 오일을 바르는 것뿐이다. 우리의 진도와는 다른, 완전 별개의, 그런, 그런 거다. 한 번 침음을 흘린 다니엘은 다시 심기일전하여 그녀의 다리를 부드럽게 만졌다. 몇 번이고 주변의 물건을 띄울 뻔했지만 가까스로 인내하고 완벽하게 과업을 완수했다.
“잘하네요. 자주 해달라고 해야겠다. 으음….”
그녀가 칭찬했다. 발기한 걸 그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그러고 나니 이상하게 뿌듯하고 기분이 좋은 게… 엄청난 고통과 욕망을 인내한 스스로가 대견하달까. 참는 과정이 정말 힘들었는데… 꽤 좋았달까….
“…….”
마도순환!! 다니엘 스톤하츠는 선탠을 하는 도현의 옆 선베드에 정좌를 하고 앉아 미친 듯이 마력을 순환시키고 명상에 돌입했다. 그가 그러든지 말든지 도현은 나른해서 깜박 잠이 들까 말까 하는데 누가 찾아왔다. 예전에 송선호를 따먹겠다고 노리던 바로 그 승무원, 윤지였다.
“킬스버그 님.”
“응…. 왜?”
엄청난 마도순환으로 다니엘의 머리카락이 떠오르고 헤일로가 생성될 지경이었다. 윤지는 그런 다니엘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가 다시 도현을 보았다. 그녀가 물었다.
“킬스버그 님 이제 VVIP랑 아무런 사이 아니신 거죠? 그럼 제가 따먹어도 돼요?”
그러자 도현은 약간 당황하더니 고민했다. 그리고 답했다.
“음… 내가 이래도 된다 만다 할 사항은 아닌 거 같아. 송선호한테 물어봐.”
“네~ 아싸!”
그녀가 쾌재를 불렀다. 도현이 다시금 선베드에 엎드려 누우며 덧붙였다.
“꼭 물어봐야 해~.”
“네~.”
윤지는 그녀의 말을 흘려들으며 곧바로 배로 돌아가 라운지 바로 향했다. 거기엔 아까의 난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있는 송선호가 있었다. 이러고도 아직 한국으로 안 돌아간 걸 보면 정말 미련이 많은 남자라고 해야 할지…. 그러니까 윤지도 기회를 잡은 것이니까 뭐, 나쁜 건 아니다.
“밖에서 안 노세요? 다들 해변에 나갔는데.”
윤지가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옆에 앉았다. 송선호는 이미 술이 거나하게 취한 상태로 그녀를 힐끗 보았다. 누군지는 알아봤으나 곧 술병으로 고개를 돌렸다. 윤지도 그냥 그의 옆에서 가벼운 칵테일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지나고 술이 더 들어가자 송선호는 울기 시작했다.
“윽… 흑… 도대체… 여자들은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 겁니까.”
“음… 글쎄요. 잘생기고 몸 좋고 그러면 대충 마음에는 다 드는데.”
윤지는 처음부터 그의 술 상대를 해준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그녀는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런 거 말고… 진짜 진지하게 생각할 만한 남자 말입니다…. 젠장. 이 배 탄 여자들은 하나같이….”
잘생기고 단정한 남자가 잔뜩 흐트러져 눈물을 흘리는 건 매우 볼 만했다. 건장하고 되게 남자답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남자가 술에 잔뜩 약해져서는…. 진풍경이라 윤지는 뿌듯한 마음으로 감상을 지속했다.
‘아우, 진짜 잘생겼다. 지금 당장 확 자빠뜨리고 싶네.’
하지만 윤지는 육식동물답게 때를 기다렸다. 원래 맹수가 자신보다 더 큰 먹이를 잡을 수 있는 건 다 몸을 바싹 낮추고 먹이가 가장 약해진 때를 잘 기다리기 때문이다.
윤지는 점점 더 술에 떡이 되어가는 송선호를 잘 보살폈다. 구구절절한 그의 미련 많은 사랑 얘기도 다 들어주고 등도 두드려주고 호응도 잘 해주었다. 그리고 그가 거의 정신을 잃을 듯 말 듯 할 때 일으켜 세웠다.
“너무 많이 드셨어요. 방에 가요.”
“아… 한 잔만 더….”
“들고 가요, 들고.”
그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예상대로 술이 확 돌아 그는 바로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리고 윤지는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결심한 것처럼 그를 따먹기 위해 그를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쓰러뜨리고 그의 위에 올라탔다. 그녀는 마음먹은 것은 다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그의 셔츠 단추를 확 뜯었다.
‘아, 이러고 싶어 죽는 줄 알았네. 여자의 로망이지, 로망~.’
몸을 못 가누게 마시는 남자가 잘못이지. 내가 전에 분명히 자기랑 자고 싶다고 했는데도 내 앞에서 꽐라된 건 다 자기도 그럴 생각 있었다는 거 아냐? 이건 묵시적 동의지, 묵시적 동의.
‘되게 비싸게 굴더니만 생각보다 헤프네….’
물론, 당연히, 윤지는 그가 비싸게 굴다가 이제 와 좀 헤프게(?) 굴었다고 실망해서 여기서 그를 안 따먹을 건 아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열심히 그의 옷을 벗겼다.
“아, 이런 가슴 진짜 쩐다…. 얼마 만이야.”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숨을 마셨다. 술 냄새도 나지만 잘 관리된 그의 체취와 애프터쉐이빙 크림, 약간의 스킨로션 냄새가 난다.
‘아, 이런 게 좋아. 노는 남자들처럼 향수 냄새 풍풍 나지도 않고. 단정하고… 아, 진짜 잘생겼다. 키도 크고 몸도 진짜 좋고. 이런 남자를 따먹다니~~. 밑에도 잘 생겼으려나.’
큰 것도 중요하지만 모양도 중요하다. 굵기도 매우 중요하다. 색깔도 너무 검고 더러워 보이면 입맛이 떨어진다. 이런 얼굴에 그런 게 달려 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흥분과 기대로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아, 진짜 그러면 깰 거 같아.’
그러면서 그의 허리띠를 푸는데 정신을 거의 잃은 것처럼 보이던 그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았다.
“응? 일어나셨어요? 계속 자도 되는데….”
윤지는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는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런 거 싫다고…. 난… 난 너랑 진지하게 만나고 싶은 거라고…. 젠장….”
송선호는 윤지의 두 손목을 꽉 잡은 채로 침대에 얼굴을 묻고는 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러면 분명히… 나만 또 힘들어질 거 아냐…. 넌… 넌 그냥 별것 아닌 거로 잊고 지나갈 거면서…. 나만 또 더…. 분명히 더… 씨발….”
음… 남의 연애사정 같은 건 껄끄럽고 싫다. 듣기도 싫고 관심도 없고…. 따먹을 남자가 인생에 뭔 고통이 있건 그녀랑 무슨 상관인가.
“네. 네. 그러셨어요.”
윤지는 한 귀로 듣고 흘리면서 그에게서 손목을 빼고 그를 계속 덮치려고 했으나 그가 그녀의 두 손목을 잡은 채로 진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저기요…. 저 좀 놔주시면 안 될까요? 할 건 합시다.”
“싫다고…. 씨발….”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아까 술을 더 먹였어야 했나 보다. 그렇게 대치 상태가 계속되자 뭐 이건…. 윤지는 손목을 빼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그는 도현 킬스버그(?)에게서 자신의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으로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넘게 지나니 송선호가 약간 정신을 차렸다. 그는 가만히 있다가 헉하고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고 자기 위에 올라타 있는 여자를 보았다.
“도현… 킬스버그…?”
아니다. 송선호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을 더듬거려 만졌다.
“뭐… 뭐한 겁니까….”
“하… 아무것도 안 했어요….”
실패다. 윤지는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그의 위에서 일어났다. 그는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아무것도 묻어나오진 않았다. 한숨을 푹 쉬었다. 가슴을 만져보았다. 립스틱이 약간 묻어나왔다. 송선호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그쪽이랑 잔다고 했습니까? 그런 기억 없는데….”
“아, 뭐… 자기한테 관심 있는 여자랑 술 먹으면서 영 절제 없이 마시길래 그러고 싶은가 하고…. 실연도 당했다고 하고. 리바운드로 프레시하게 그쪽한테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
물론 윤지도 찔리는 게 영 없지는 않았기 때문에 슬쩍 누군가를 앞에 방패로 내세웠다.
“킬스버그 님한테도 물어본 거예요. 그쪽 건드려도 되냐고. 자기가 상관할 바 아니라고 해서….”
“…나가. 당장 나가, 이 개년아.”
송선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오히려 자기가 먼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는 실연의 히든 단계로 돌입했다.
Hidden phase. 진상
이미 한밤이었다. 사람들은 다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할 때다.
“야…! 야!! 당장 나와!”
송선호는 당장에 퀸룸으로 뛰어 올라갔다. 이미 새벽 세 시였다. 문을 쾅쾅 두드렸다. 한참을 두드렸더니 도현이 슬립을 입은 채로 나왔다. 잠에 잔뜩 취해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니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송선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그녀에게 따졌다.
“너…! 너 진짜 그랬어?! 네 직원 시켜서 나 덮치라고 했냐!! 어?!!”
“뭐…? 무슨 소리야….”
도현은 손끝으로 눈을 살짝 문지르며 송선호를 다시 보았다. 그의 셔츠는 단추가 다 뜯어진 채 가슴이 훤히 노출되어 있었다. 게다가 거기에 립스틱 자국….
“네 직원, 윤진가 뭔가 하는 그 개 같은 년이 사람 취한 걸 끌고 가서 덮치려고 했다고!”
송선호가 계속 화를 냈다. 도현은 어안이 벙벙해서는 대꾸했다.
“진짜…? 그러지는 않는 앤데….”
“너 지금 네 직원이라고 편 드냐!! 어?! 네가 그래도 된다고 했다며!!”
“아니… 아냐. 무슨 소리야. 너한테 관심 있다길래 너한테 물어보라고 했어.”
“뭐….”
송선호는 숨을 씩씩거리면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숨이 점점 가라앉았다.
“…….”
그녀가 잘못한 건 없었다. 그녀는 송선호를 찼고 그의 성생활은 그녀가 참견할 바가 아니고…. 안다. 아는데… 아는데…. 송선호는 왈칵 눈물을 흘렸다.
“진짜… 진짜 다시 한번만 생각해주면 안 돼…? 어? 나… 나 진짜 너 너무 좋아. 좋아해. 사랑해. 흐윽…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어? 제발 좀 가르쳐줘. 나랑… 나랑 결혼해줘.”
“너 너무 많이 취했다. 일단 가서 자라. 어?”
“제발… 다시 생각해줘, 어? 나… 나 진짜 잘할 수 있어. 너도 알잖아. 흐윽… 제발….”
도현은 남자 승무원을 불러야 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난 송선호가 욕실 벽에 머리를 처박고 후회를 한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금 실연남의 원래 생활로 돌아왔다. 다른 여자가 관심을 보이고 다가오면 처음부터 쌍욕을 했다. 그는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남자였다.
그는 실연남의 1~4단계를 꾸준히 밟다가 한 번 더 히든 모드에 들어가서 술에 잔뜩 취해 또 그녀를 붙잡고 진상을 부렸다. 그녀는 화가 나기보단 어이가 없는 얼굴이었다.
“야… 이럴 거면 그냥 내 말대로 하고 그냥 만나면 되잖아. 왜 이렇게 오버를 해?”
“너 노는 거 그냥 두라고? 스톤하츠 만나는 것도 그냥 두고!”
“응…. 그게 그렇게 힘들어?”
“씨발, 그걸 말이라고 하냐!”
울면서도 그가 그렇게 소리치자 도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아직 너도 다니엘 씨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당장 널 선택하라고 나한테 강요를 하는 게 이해가 안 돼. 고백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는 다시 승무원에 의해 끌려갔다. 그렇게 지니 호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삼국지는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걸출한 남자의 승리로 끝이 나는가 싶었다.
그리고 그 한 축을 담당했던 남자는 지금 메트로서울 시립병원에 있었다.
‘사람을 완전 병균 덩어리로 취급하고 말이야.’
미르 킹쉴드는 병원에서 채혈을 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아주 그냥 싹 없애고 달려가서 앙앙 울려줄 테다.
“흠… 많네요.”
안면이 있는 의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검사 결과를 스크린에 띄운 뒤 돌아왔다.
“뭐?”
미르는 ‘설마….’하면서 스크린을 보았다. 의사가 쭉 설명을 해주었다.
“일단 자궁경부암 바이러스가 저위험군부터 고위험군까지 6개 정도 있구요. 사마귀나 임질균도 뭐… 그것 외에도 기본적인 건 다 있습니다. 성병은 아니지만 충치도 하나 있으시네요. 치료받고 가세요.”
“…….”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궁은 애가 생기는 곳이고 거기에 암 생기게 하는 바이러스가 6개나 있단 소리지…? 미르는 약간 좌절했다가 의사한테 바로 물어보았다.
“요즘 세상에 이런 거 다 없앨 수 있는 거지? 응?”
“그러니까… 음, 웬만한 건 다 되긴 하죠. 이런 건 남자한테도 위험한 건데….”
“어떻게 하면 돼?”
“일단 주사부터 몇 대 맞으시죠. 그리고 모레 오전에 다시 오세요. 그동안 무분별하게 성생활 하시면 안 됩니다.”
“알았어.”
미르 킹쉴드는 주사를 잔뜩 맞고는 돌아갔다. 사회로 돌아오고 나서 이렇게까지 금욕하고 산 것은 처음이었다. 도현 킬스버그의 배에 탔을 때부터는 쭉….
모레 아침에 병원에 다시 오자 또 주사를 잔뜩 맞았다. 그리고 전신 레이저 실로 가서 알몸으로 번쩍번쩍 광조사를 받았다. 그 뒤 약 몇 개를 처방해주었다. 밥을 먹고 약을 먹고 오란다. 그리고 다시 피를 뽑아 검사를 했다. 그다음엔 미르를 홀딱 벗겨서 피부 검사를 하더니 말했다.
“음, 소드마스터시니까 오라 한 번 돌리셔서 피부 회복 좀 시켜보시죠.”
심각한 부상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지만 가벼운 상처 같은 건 오라를 돌리는 것으로 지혈이나 회복이 가능했다. 애초에 신체 스펙이 보통 사람과는 비교도 할 수가 없는 그들이다.
“응? 왜?”
“레이저 시술 몇 번 더 받으셔야 할 것 같아서요. 그리고 성 간호사 킹쉴드 씨 제모 좀.”
이 제모는 깎는 것이 아니라 뿌리까지 뽑아내야 하는 것이라 제모 크림을 바르고도 아파서 생난리를 친 미르였다. 그리고 깔끔해진(?) 채로 오라를 돌려서 피부를 회복시킨 미르는 눈가리개를 하고 다시 광조사를 번쩍번쩍 받았다. 그리고는 어떤 약이 가득한 욕조에 들어가 한 시간을 불린 뒤 다시 광조사를 번쩍번쩍 받았다. 마지막으로 주사를 한 번 더 맞았다.
“이틀 뒤에 다시 오세요.”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미르가 짜증 나서 그렇게 말했다. 의사는 미르 킹쉴드의 치료 경과를 확인하면서 대꾸했다.
“이 정도도 예전에 비하면 적게 걸리는 거죠. 옛날엔 못 고쳤던 것도 수두룩해요.”
그리고 이틀 뒤에 가서 다시 검사를 받았더니 바이러스나 병균이 딱 6개가 남았다. 미르는 당황했다.
“뭐야? 왜 이래? 어? 이거 왜 다 안 없어져? 에이즈도 요즘은 주사 한 방이면 해결이잖아.”
이러니 의사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꾸했다.
“이게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이상하게 남자들이 많이 걸려서 문제가 되는 성병은 백신이 빨리 나오는데 여자들이 걸려서 고생하는 병은 완치되는 약이 빨리 안 나와요. 나와도 상용화도 잘 안 되고. 아니면 비싸고. 부작용도 심하고. 이상하죠?”
남자인 의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미르는 황당하기까지 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이거랑 이거랑 이거는 아직 임상 단계 밖에 약이 안 나왔고. 그래도 이거랑 이거는 있긴 한데 비싸요.”
“내가 이런 약값 따질 거 같아? 뭐하는 거야, 씨발. 장난해?”
그렇게 한 대에 몇백만 원짜리 주사까지 맞으니 딱 4개가 남았다.
“이건 다 뭔데. 이제 별로 안 위험한 거지?”
미르가 물었다. 의사는 남은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를 하나하나 눌러보았다.
“이거 2개는 자궁경부암 관련 바이러스고 이건 질염 일으키는 바이러스고 이건 사마귀네요. 남자한테는 증상 없는 건데…. 앞에 두 개는 고위험, 중위험 바이러스라 걸리면 나중에 나이 들어서 자궁에 혹 정도는 100% 생겨서 수술해야 할 거고 운 안 좋으면 암 되는 거고.”
그는 남 일이기 때문에 남 일인 것처럼 말했다. 미르는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근데 요새는 암도 고치기 쉽잖아?”
이렇게 말하니 의사가 또 애매한 얼굴로 대꾸했다.
“근데 또 여성 관련 암은 그렇지도 않아요. 동아시아 여자들 사망원인 1순위가 여성 관련 암이에요. 대부분 남자한테서 옮아서….”
“…….”
도현이 그렇게 질색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미르는 이런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살았다. 그가 겪어온 여자들이 몇 명인데… 하나도 몰랐다.
의사는 또 남 일이기 때문에 남 일처럼 기복 없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암이야 빨리 발견만 하면 된다 치더라도 오히려 질염이나 사마귀가 제일 스트레스 받는다더라구요. 특히 생식기 사마귀는 한 번 걸리면 웬만한 사람은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
그럼… 진짜 그 여자랑은 못 하는 건가? 정말로? 고작 눈에도 보이지 않는 이런 바이러스들 때문에?
미르는 인기가 많았다. 왜 인기가 많은지는 거울과 통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여자들은 그를 원했다. 비단 걸즈 같은 여자만 그를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크고 강하고 잘생기고 돈이 많은 남자는 어느 나라에서나 통용되는 만능지폐와도 같았다. 누구나 미르를 가지고 싶어 했다. 미르는 도현을 꼬실 자신도 당연히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것 때문에 못 꼬신다고? 진짜? 정말로?
“정말 없어? 이런 거 없앨 방법?”
그러자 의사는 의료용 인공지능을 이용해 리서치 데이터베이스를 쭉 검색해보았다. 공중에 띄운 홀로그램에 여러 논문이 뜨고 인공지능이 키워드와 요약을 뽑아냈다.
“의학-마도 관련한 연구들을 보면 특정 바이러스나 병균만을 타겟 해서 열화 변성시키거나 살균하는 방법이 있긴 한데. 이건 진짜 비쌀 텐데요…. 마도의사들은 진짜 화타예요. 죽은 사람도 일으킨다구요. 예약이 10년씩 차있다는데.”
“그 인간들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데.”
전 세계에 마도의사로 등록되어 있는 사람은 채 몇만 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 99%가 여자였다.
“소드마스터랑 다르게 마도사는 여성에게 발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나마 있는 남자 마도사는 공부하는 것보단 용병이 되는 쪽을 선택하더라구요. 거참. 섬세한 작업이라 그런지 여자들이 훨씬 잘해요. 남자 마도의사보다 사람도 덜 죽이고. 부작용도 덜 하고.”
전에 미르를 수술한 마도의사도 여자였다. 그 중 메트로서울 근처에 주재한 인간들이 30명 정도. 이름을 쭉 보다가 다니엘 스톤하츠의 이름을 발견했다. 미르는 이를 갈았다.
“젠장…. 어째 자기만 엄청 깨끗한 척하더라. 이 치사한 새끼….”
그는 그 길로 주치의를 통해 4가지 병원체에 대해 치료받고 싶다는 메일을 모든 마도의사의 공식 계정으로 보냈다. 자동응답 메일로 90%의 마도의사가 그 병에 대한 치료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답변했다. 나머지 가운데 20%가 정도가 하나나 두 개의 병을 치료할 수 있고 70%는 세 가지, 10%는 모두 다 치료할 수 있다고 답변이 왔다. 요즘 인공지능 비서는 환자가 기다릴 필요 없이 알아서 이렇게 답변을 보냈다. 그리고 치료가 가능한 병원체가 있다고 답변한 모든 마도의사들의 일반 진료 예약 대기 기간이 제일 짧은 곳이 3년, 긴 곳은 30년에 달했다. 게다가 모두 다 치료를 할 수 있는 100여 명은 대부분 20년 이상… 미르가 입을 딱 벌렸다.
“미친… 이 새끼들은 몸에 금칠하고 다닌대? 뭘 이렇게 비싸게 굴어? 어?”
“금칠 이상이죠. 이런 마도의사 하나만 데리고 있어도 그 종합 병원은… 어휴.”
의사가 답했다. 거기다 치료금액은 1개당 대충 1억에서 5억까지.
“싸네요. 이런 거 치료하려고 마도의사까지 찾는 사람은 킹쉴드 씨밖에 없을 테니까요.”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다 된다는 놈들한테 개당 5억씩 낸다고 해. 일주일 내로 치료받고 싶다고 하고. 현금일시불.”
곧바로 이메일을 보내자 그중 80% 정도는 곧바로 리젝트를 했으며 15%는 인공지능이 판단을 보류하고 관리자에게 의견을 묻는 중이었다. 미르는 입을 딱 벌렸다. 80%가 사람한테 물어볼 것도 없이 인공지능 비서 수준에서 커트 되자 미르가 헉하고 중얼거렸다.
“씨발… 세상에 돈 많은 새끼들 진짜 많네.”
“킹쉴드 씨 정도면… 사실 진짜 돈 많은 사람들 중에서는 돈 많은 축에도 못 들죠.”
“아… 진짜? 그런 거야?”
“중소기업 같은 거 매출 1조, 2조 되는 기업들만 해도 기업가치가 5조~20조 이렇게 되는데 그런 데 오너들은 재산이 조 단위잖아요. 게다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도 다르고. 킹쉴드 씨는… 몇백 억 수준 되시나요? 한 해 연봉이 얼마나 되시더라.”
“광고비나 이런 거 저런 거 다 하면 8백억 정돈데…. 나 데리고 사는 여자도 많고 해서 돈 많이 쓰긴 해…. 전역한 지 4년밖에 안 됐고….”
미르는 저도 모르게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 사이에 3명이 또 리젝트했다.
“와….”
그 순간 미르가 생각한 건 다니엘 스톤하츠가 자기보다 더 돈이 많겠구나, 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아주 짜증이 났다. 그 여자는 돈을 아주 좋아한다. 아마 세상에서 자기 자신 외엔 돈이 제일 좋을 여자였다.
“돈을 더 올릴까?”
그러자 의사가 말했다.
“내일까지 기다려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다음날 답변을 확인해보니 5명 외엔 전부 리젝트였다. 답변을 주지 않은 5명도 확인해보니 휴가기간이다. 사실상 전부 리젝트 된 거라고 봐도 무방했다. 아니, 고작 눈에도 보이지 않는 병원체 4개 없애는데 20억 가지고도 안 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같이 확인을 한 의사가 하는 말이 이렇다.
“잠깐 알아봤더니 보통 마도의사 1회 진료에 25억은 내야 한답니다. 하루에 많아 봤자 몇 명도 못 받는다고 하네요. 아마 이거 고치는데 그렇게 시간이 걸릴 것 같진 않고…. 5억 모자라서 안 됐나 봐요.”
“…….”
어떤 사람은 경기하다가 시체도 온전히 못 건지고 죽을지도 모르면서 돈 버는데 이 새끼들은 하루에 몇백억씩 번다 이거냐…. 미르는 25억으로 수가를 올려서 다시 메일을 보냈다. 그러자 여전히 대부분은 바로 리젝트했고 15명은 사람에게 물어본다. 5명은 여전히 휴가 중이라 답변이 없었고 나머지 15명 중의 14명은 다시 리젝트를 했으며 단 한 명만이 일주일 내에 할 거면 5억을 더 얹으란다. 그래서 5억을 더 얹었다. 그리하여 3일 뒤 월요일 아침 7시 로스앤젤레스에서 예약이 잡혔다.
미르는 사실 전쟁이나 TFC 말고는 세상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인공지능 비서와 매니지먼트는 더더욱 미르가 그런 것을 알지 않고 살아도 좋게 만들었다. 용병짓을 하면서 세계 물동량이 어디가 많고 적은지, 어느 쪽이 더 돈이 되는지는 좀 아는 편이지만…. 어쨌든 뭔가 세상의 한 면을 본 느낌이었다. 미르의 주치의는 마도의사 쪽에서 요구하는 의료 전처리에 대해서 설명했다.
“술, 약 엄금입니다. 섹스도 웬만하면. 기껏 없앤 다른 바이러스가 걸릴 수도 있으니까요.”
“…뭔가 진짜 치사하네…. 마도사 새끼들만 이런 돈 벌 수 있는 거야? 우리는 이런 쪽으로 안 되나?”
“글쎄요…. 군사과학 관련으로는 소드마스터도 참여하는 연구가 꽤 있다고 듣긴 했는데요. 의학 쪽은 잘 모르겠네요. 마도 연구는…. 음,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마도 연구 관련해선 다니엘 스톤하츠가 정말 유명합니다. 특히 마도기술 첨가 산업 관련해서 한중일 프로젝트 어디든 스톤하츠를 데려가려고 난리예요. 본인도 계속 대학에서 틈틈이 연구하고 공부해서 마도-과학기술 이해도가 최신 연구자들만큼 되고 본인도 시간 날 때마다 열성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해주니까요. SS그룹 디바이스 영구 부양 기능도 스톤하츠 선수 협력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대단하죠.”
“아, 씨팔…. 그 새끼 돈 엄청 많겠네.”
그렇게 미르는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가고 거기서 올클린이 뜨는 걸 확인하고 바로 바하마로 향했다.
*
의학과 마도의학, 그리고 돈으로 새 남자(?)가 된 미르 킹쉴드는 당당히 바하마로 날아왔다. 그리고 도현을 찾았다.
“나 완전 깨끗해.”
“어….”
바하마의 핑크 해변에서 귀엽고 행복한 돼지들과 놀고 있던 도현 킬스버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미르를 보았다. 그를 다시 볼 거라고는 생각 못 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이렇게나 빨리. 몸을 걸레짝처럼 함부로 굴리면 그 어떤 병원을 가도 치료를 못 하는 건 당연했다. 한 번 걸리면 평생 안 없어지는 성병도 매우 많았다.
“진짜야. 짠.”
미르는 자신의 검사 결과를 그녀에게 들이밀었다. 영 못 미더웠다. 그녀는 STD키트로 그 자리에서 검사를 다시 했다. 사실 종합 병원에서 쓰는 거나 정확도는 크게 차이가 안 나는 것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안 나왔다.
“돈을 얼마나 쓴 거예요?”
도현이 깜짝 놀라서 그렇게 물었다. 미르가 실실 웃으며 그녀의 몸을 벌써 자기 것인 것처럼 끌어당겼다.
그녀는 오늘 캐리비안의 바닷물처럼 예쁜 에메랄드빛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비단 같은 재질이 만지면 기분 좋을 것 같다. 햇빛 때문에 많이 발개진 피부가 예뻤다. 미르의 기준에서 가슴이 조금 작긴 했지만 골반이 넓고 엉덩이가 있어서 되게 여성스러운 몸이었다. 가녀린 느낌인데도 키도 크고 건강하고…. 고급스러우면서도 속눈썹이 짙어 색기가 어린 그녀의 얼굴이 좋다. 오랜만에 보니까 더 예쁘고 좋았다. 미르는 가까이에 코를 대서 그녀의 냄새를 맡았다.
“내가 너 진짜 좋아한다고 했잖아.”
미르 킹쉴드가 자신의 플래티넘 블론드만큼이나 환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신이 내린 그의 육체는 캐리비안에서 더욱 근사하게 빛났다. 크고 강하고 멋지고…. 하지만 더러울 게 분명한 몸이었는데. 도현은 솔직히 좀 놀랐다.
지금 이 시대가 돈이면 아무리 걸레 같은 남자도 숫총각처럼 순결(?)해질 수 있는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도현에게 들이대는 미르 킹쉴드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냈다. 당연히 힘으로는 안 밀릴 테니까 마법도 함께 썼다. 미르가 아무리 힘을 주어도 얼굴이 점점 도현의 얼굴에서 멀어졌다. 푸하, 하고 결국 스스로 얼굴을 뗀 미르가 짜증을 냈다.
“뭐하는 거야, 이 샌님이?”
송선호와 다르게 다니엘은 스트리퍼들이야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니엘이 함께 있을 때의 그녀는 스트리퍼 따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런 걸 보면 미르 킹쉴드의 말이 정말 맞다. 여자들은 아무리 남자가 많아도 급이 높은 남자만 상대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경쟁이 될 만한 남자들은 달랐다. 송선호야 스스로 무너지는 타입이니 애초부터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아무리 도현의 곁에 가장 오래 같이 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근데 미르 킹쉴드는 점수를 다 깎아 먹었다 싶을 때도 아차 하면 저돌적인 태도로 도현에게 다시 접근하곤 했다. 그런 건 다니엘이 갖추지 못한 소양이었다.
“엇, 킹쉴드 씨….”
로웰은 며칠 동안 윈드서핑을 배우느라 오늘은 아예 몸져누운 상태였다. 이틀이 지나 몰려온 근육통 때문에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던 것이다. 그나마 여행하면서 운동을 꽤 해서 이 정도지…. 그녀는 귀여운 돼지들과 수영하고 있는 도현의 옆에 커다란 에어매트리스를 띄우고 둥둥 떠서 망고주스나 마시고 있었다. 로웰이 옆으로 누워서 오랜만에 본 미르에게 물었다.
“혹시 킹쉴드 씨는 돈 좀 있으세요?”
“갑자기 왜.”
도현을 사이에 두고 다니엘 스톤하츠와 노려보고 있던 미르 킹쉴드가 대꾸했다.
“혹시 저희한테 돈 좀 빌려주실 생각 있으세요? 이자는 최대한 낮게, 무이자면 더 좋고.”
기왕 이렇게 된 것, 쓸(?) 수 있는 남자라면 다 쓰는 게 좋은 거 아닌가. 로웰이 그렇게 묻자 미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로웰과 도현을 번갈아 보았다.
“왜? 지금 문제 있어? 팔려갈 지경이야?”
이미 팔려본 경험이 있는 남자는 대번에 그렇게 물었다. 도현이 대답했다.
“팔려갈 지경은 이미 지나긴 했는데. 잘 갚고 있어요. 됐어요, 미르는.”
건장하고 잘생기고 잘난 남자들이 자신을 두고 경쟁하는 건 기분이 좋지만 좀 귀찮기도 하고, 또 좋기도 한데 한편으론 귀찮고, 좋은데 다시 생각하면 그냥 귀찮고…. 도현은 자신의 허리를 감은 두 남자의 손에 힘이 점점 강해지자 둘의 팔을 찰싹찰싹 때렸다.
도현이 그렇게 말하자 로웰이 ‘어랏?’하면서 도현을 보았다.
“왜요?”
“미르는 돈까지 주면 분명히 자기 걸즈에 저 넣을 거예요. 싫어요….”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다니엘이 정색을 했다.
“그런 건 절대 안 됩니다. 제가 다 해결해드릴 수 있습니다. 몇 년 걸리긴 하겠지만….”
다른 스트리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안 하는 다니엘 스톤하츠였지만 미르 킹쉴드는 안 되겠는지 그렇게 말한다. 도현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는 귀여웠다.
“몇 년이면 진짜 감사하죠…. 평생 갚아야 할 수준이었는데. 정말 고마워요.”
도현은 다니엘의 뺨에 쪽 입을 맞추고 그의 입술에도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악!! 왜 맨날 저 새끼한테만 해주는 건데! 나는!!”
질투가 난 미르가 대단히 화를 냈다. 자기가 그녀를 위해서 아주 약과 돈과 마법으로 몸을 빡빡 씻고(?) 온다고 얼마나 귀찮고 짜증이 났는데! 도현은 미르의 손을 기어코 자기 허리에서 풀어냈다.
“아, 정말 미르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냥 다니엘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꼭 다 갚을게요.”
“아닙니다. 갚아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현 씨는… 저에게 정말 고마운 존재입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니에요. 갚을 거예요.”
“괜찮습니다. 저한테 갚아도 몇십 년 갚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다니엘 씨를 몇십 년 보면 되죠.”
“도현 씨….”
러시아에 돈을 보내는 것보다 그녀가 옆에 잠깐 있어 주는 게 그의 인간성 회복에 훨씬 도움이 되었다. 물론 요새는 다른 문제가 대두되고 있긴 했지만 사랑의 힘으로 이겨낼 생각인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이렇게 되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된 미르 킹쉴드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잠깐만… 나도 해결해 줄 수 있어.”
“아, 미르는 싫다니까요. 분명히 걸즈 들어오라느니 같이 자자고 할 거잖아요.”
“걸즈 들어오라고 안 할게. 자는 건 네가 하고 싶을 때 그렇게 해. 절대 강요 안 해.”
그러자 도현, 로웰, 다니엘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다니엘은 탐탁치 않은 얼굴이지만 솔직히 원금이 너무 많았다…. 이자만 거의… 로웰이 물었다.
“얼마나 해주실 수 있는데요?”
“도대체 빚이 얼마길래 이래? 50억 정도 아니었어? 그 정도는….”
도현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녀라고 딱히 이런 걸 자꾸 남들에게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게….”
그리고 미르 킹쉴드는 빚의 총액을 전해 들었다. 그는 충격을 먹고 라운지 바로 향했다. 술이 필요했다. 생각이 필요했다.
미르 킹쉴드는 돈 먹는 하마 같은 여자를 5명, 한때는 9명이나 데리고 살았다. 돈 같은 건 빚을 지지 않을 정도로 쓴다. 그러니까 다 쓴다는 말이었다. 까딱하다간 죽을지도 모르는 인생 다 쓰고 죽어야 할 거 아닌가. 약, 파티, 여자들 치장할 값, 먹고 쓰는 돈, 가끔 사고 쳐서 물어주는 값까지 하면 정말 딱 맞춰 쓴 듯이 다 썼다.
‘으음… 요 일주일만 해도 30억 넘게 썼는데…. 아, 잠깐만. 내가 그랬으면 내 걸즈도 다 엉망이라는 거 아냐? 아, 씨팔… 그것들도 안 고치면 말짱 도루묵이란 소린데.’
고민이 깊어졌다. 게다가 그년들도 어디에다 꿍쳐둔 남자 한둘 정도는 있을 거라서(분명히) 결국엔 동아시아 TFC 선수와 GAS를 전부 병원에 처넣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골치 아프다.
그리고 그냥 50억 정도는 친구한테 잠깐 빌려서라도 낼 수 있는 돈이니까 부담이 크지는 않았는데 저 액수는… 게다가 그 정도 돈을 빌릴 수 있는 여자라니…. 정말 생각보다도… 그녀는 더 대단한 여자였던 것이다. 시 코치의 말이 머리에 왱왱 맴돌았다.
그런 여자가 널 왜 만나냐. 그런 여자가 널 왜 만나냐. 그런 여자가 널 왜 만나냐….
잘난 남자한테는 언제나 수준이 높은 여자들이 몰리는 법이다. 잘난 여자에게는 수준이 높은 남자부터 쓰레기까지 다 몰린다. 걸즈라고 다 쉽게 쉽게 들인 줄 아는가. 인기가 있는 GAS는 데려가려는 경쟁이 치열하다. 주먹다짐이 우습지, 술집 몇 개 날리는 건 예사다. 그렇기에 미르 킹쉴드는 자신이 월등히 경쟁력 있는 수컷이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의 걸즈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할 정도로 쭉쭉빵빵한 미녀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도 항상.
그런데 지금 설마 자신이 이 암컷에 대한 경쟁에는 명함도 못 내미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팍 들었다. 난생처음으로 말이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힘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사람 자체의 매력과 그로 인한 힘, 금전능력, 사회적 계급과 그에 따른 인프라, 그리고 실제 물리적인 힘. 전쟁터나 TFC에선 물리적인 힘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앞의 세 가지가 더 중요했다. 그리고 그게 부족했기 때문에 사람이 몸으로 굴러야 하는 그런 곳으로 추락하는 것이기도 했다.
미르 킹쉴드는 자신이 벌어들이는 돈을 쓸 줄만 알았지 그것을 관리를 하거나 그것을 어떻게 다른 힘으로 바꿀 수 있는지, 그 개념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 하나 만난다고 그 정도로 돈을 써야 하는 거야? 진짜로? 그런데 잘 수 있을지 없을지는 여자 마음이고? 저 범생이 미친 거 아냐?’
미르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남자와의 경쟁에 이겨서 그녀를 독차지하기 위해선 다른 남자들과 함께 그녀의 빚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단독으로 해결해야지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게 수컷끼리의 경쟁이다.
하지만 천억은 미르에게도 큰 숫자였다. 게다가 앞으로를 생각해보자면 더 깜깜한 숫자다. 도대체 1년에 얼마를 쓴다는 건가. 미르가 여자를 한둘만 데리고 사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이면 여자들 사이에서도 문제 생기고 골치 아파진다….
그런 것을 차치하더라도 다른 놈은 이미 경쟁에 뛰어들었는데 자신이 내뺀다고 생각하니 그냥 어이가 없었다. 그것도 세상 잘 만들어진 그녀 같은 여자를 두고.
그가 남자답듯이 그녀는 여성스러웠다. 그가 단단하듯이 그녀는 부드러웠다. 그녀는 미르 킹쉴드가 지금까지 가져보지도 못했고 영원히 가지지 못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병원에서 단둘이 있던 그때가 미르 킹쉴드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 중에서 가장 평온하고 기분이 좋았던 때였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게 병원인데도. 종종 가만히 그때를 떠올리곤 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르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좋았다. 별 볼 일 없었던 자신의 과거 얘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그녀가 좋았다. 미르를 마치 투명한 물을 보듯이 꿰뚫어 봐 주는 게 좋았다.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보살펴주고… 말을 조근조근히 하는 그녀의 말투가 좋았다. 예쁜 옷차림이 좋았다. 자신의 바보 같은 말에 웃어주는 게 좋았다. 그녀의 주위를 둘러싼 공기가 좋았다.
‘아… 딴 놈한테 뺏기기는 죽어도 싫다….’
근데 천억…. 미르 킹쉴드는 태어나 이렇게 갈등해본 적이 없었다. 그의 인생 기조는 언제나 심플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할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고. 미르는 바에 이마를 박았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저건 저기서 왜 저러고 있는데?”
이 라운지 바는 바로 송선호가 죽치고 살고 있는 바로 그 라운지 바다. 글래스를 닦고 있는 바텐더에게 바 끝에 앉아 독한 술을 마시고 있는 송선호에 대해서 물었다.
“킬스버그 님한테 차였대요.”
바텐더가 조용히 속삭였다.
‘씨팔….’
저 도련님도 설마 그 말도 안 되는 경쟁에 뛰어들기라도 했다는 건가? 아니겠지?
“너도 쟤 빚 얼만지 아냐?”
미르는 이마를 여전히 박은 채로 멀찍이 있는 송선호에게 말을 걸었다. 이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은 그들 둘밖에 없으니 멀리 있어도 들릴 것이다.
“씨팔… 뭐.”
송선호가 답했다.
“쟤 천억이나 빚 있다는대.”
“그래서 뭐, 씨발.”
“너도 갚아준다고 했냐.”
미르가 물었다. 송선호는 본인이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그를 마시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고 들어가는 술은 족족 눈에서 줄줄 흐르는 것 같았다.
“내가 빚만 갚아준다고 했겠냐, 이 개새끼야? 어? 하고 싶은 건 내가 다 해준다고 했다고. 다이아도 사고 싶은 만큼 다 사주겠다고…. 내가… 내가… 뭐든 해서… 씨발….”
“…….”
“이 걸레 같은 새끼가 갑자기 말은 걸고 지랄이야, 씨팔. 흑… 흐윽… 씨발… 도현아… 흐윽….”
미르 킹쉴드는 자존심이 상했다. 저 세상 물정 모를 것 같은 도련님도 저런 여자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남자라는 말 아닌가. 여자한테 차여서 눈물 콧물 다 빼고 있는 병신 같은 놈인데.
“아….”
이런 건 정말 처음이었다. 어떤 결정이 바로 안 나는 건…. 미르 킹쉴드는 어려운 수학문제를 앞에 둔 수험생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연히 그는 수험 생활은커녕 교과서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도 없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하루종일 마도순환에 몰입했다. 잘못했다가 정말 큰일이라도 일어나면 답이 없다. 그는 조용한 곳을 찾아 떠났다. 미르 킹쉴드와 송선호는 어느새 의기투합해서 같이 술을 마시고 있다고 들었다. 뭐, 남자들이 어떻게 지내든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다. 오늘도 바하마의 핑크샌드는 예뻤다. 비싼 휴양지라 사람도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다. 푸에르토리코보다는 적은 편이다. 비싼 건 역시 비싼 값을 한다.
“주드, 너 엄청 잘 탔다. 그렇지 않아?”
시즈카가 탠오일을 바르다가 주드를 보고 셀리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걸 보더니 셀리도 주드에게 말을 걸었다.
“어, 정말. 너 뭐 쓰는 거 있어? 오일?”
“아니, 난 선크림 잘 발라도 이렇게 타더라고. 별로 안 타고 싶은데.”
“에이. 남자는 태우는 게 차라리 나아.”
그리고 그렇게 얘기를 나누는 세 사람을 멀찍이서 도현 킬스버그와 로웰 리가 빤히 보고 있었다. 그들은 창작자였고 사람이 모이면 바로 그게 이야깃거리였다.
“주드 같은 남자도 한 명 어떨까요, 선생님?”
도현이 물었다. 작품 캐릭터로 제안한 것이다. 로웰이 망고주스를 마시다가 ‘에엥?’하고 부정적인 소리를 냈다.
“왜요?”
“쟁쟁하고 개성 넘치는 남자들이 부담스러운 독자도 있는 것 같아서요. 평범한 훈남 느낌으로 한 명.”
“에이. 남자는 크면 클수록 좋은 건데? 잘나면 잘날수록 좋은 건데?”
훈남이라는 말은 못생겼다고 말하기 애매할 때나 쓰는 말이지. 로웰이 말했다.
“우리야 그렇게 생각하지만…. 은근히 <남자는 7점>론 가진 여자들이 아직도 있다니까요?”
“진짜요? 그런 건 우리 엄마 세대 때나 돌던 말 아니에요?”
“아닌 것 같아요…. 아무 생각 없이 넣어놓은 조연남에게 팬 생기는 게 심상치 않아요.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도현이 그렇게 말했다. 휴가를 와서도 결국 작품 얘기를 하고 마는 것이 지구방위대, 로맨스 작가와 만화가의 사명이었다.
“도대체 잘난 남자를 마다하고 굳~이 판타지에서까지 7점을 고수하는 그들의 저의가 뭔가….”
로웰은 새삼 이해가 되지 않는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글쎄요….”
도현도 그 이유까진 짐작이 가지 않는지 그렇게 대꾸했다.
“결국 잘난 남자는 잘난 값을 할 거란 생각 때문 아닐까요? 그러느니 무난히 7점 남자를 택하겠다?”
“그건 진짜 구시대적 발상이다…. 애초에 7점 남자라고 바람피울 놈이 안 피우는 것도 아닌데. 진짜 그런 생각이면 순진, 아니, 멍청…. 그리고 그건 또 현실 얘기지 우리 얘긴 판타진데? 그것도 로맨스 판타진데? 꿈속에서라도 백마 탄 남자를 꿈꿔야지? 왜죠?”
“그러게요…. 사실 생각보다 여자들이 잘난 남자를 그다지 안 좋아하는 거 아닌가 싶다는 생각도 요새 좀 들고….”
여자들은 정말 남자들의 마음속까지 다 파악하여 점수를 매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것이다. 어차피 점수로 매길 수 있는 건 스펙밖에 없다. 그들이 생각하는 남자의 마음이란(혹은 그 마음이란 게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은) 그들의 욕구가 반영된 환상일 뿐이다. 그래서 로맨스 판타지란 로맨스가 판타지인 그런 장르지만. 잠시 뒤 로웰이 자기 손바닥을 주먹으로 치며 한 가지 깨달음을 전했다.
“꼭 좋은 거에선 기어코 나쁜 점 찾고 나쁜 거에선 좋은 점도 아닌 좋은 점 찾아서 나쁜 걸 선택하는 그런 여자들 있잖아요, 왜.”
“어? 맞아…. 그거 왜지? 생각보다 많은데.”
엄청 많지. 도현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로웰이 삐삐 머리를 잡아당기며 무언가를 기억해내려고 노력했다.
“음… 그… 누가 그랬더라. 권력은 맛본 자만이 탐한다고 하잖아요. 좋은 걸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실제로 그게 좋은지도 모른다는 거죠. 말로만 들어 아는 척할 순 있을지 몰라도. 모르니까 선택도 못 하는 거예요.”
“아, 그래서 결국 익숙한 나쁜 걸 선택한다는 건가? 그럼 윗세대 7점론도 그런 거 때문에 나온 건가요?”
“사실 7점이 다 같은 7점이 아니라 결국 자기 수준에서 7점짜리란 말이죠.”
“음… 결국 끼리끼리 만날 수밖에 없다.”
도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결국 끼리끼리 만날 수밖에 없는 자신의 팔자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7점론이니 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것이 나온 것인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의 조건에서 만날 수 있는 남자들 중에서도 굳이 못난 것만 골라서 만나고 결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왜일까? 로웰은 디바이스를 통해 자기 작품에 달린 리뷰나 댓글을 보기 시작했다. 몇 개는 도현과 함께 보기도 했다.
“하긴…. 착한 남자 부르짖는 독자들이 이렇게 많아서 저도 놀랐죠. 남자는 마음이라고.”
그러자 도현과 로웰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도현이 말했다.
“남자는 스펙이 마음이에요. 하나라도 빠지는 남자들은 이상하게 열등감이랑 허세가 심해서 좀. 그리고 그걸 내가 괜찮다고 말해주길 바라더라구요.”
안 괜찮은 건 그냥 안 괜찮은 것이다. 그리고 굳이 안 괜찮은 걸 괜찮다고 기를 세워줘야 하는 이유가 뭔가? 그리고 그 밑으로 내려가면 아예 내세울 스펙이 마음밖에 없는 남자들, 아니, 내세울 스펙이 마음밖에 없다는 남자치고 여자들에게 남자의 마음만 봐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 놈을 본 적이 없다. 남자의 마음만 보라고 말하면서 본인들은 여자의 머리털부터 발톱까지 따지고 평가하고 판단한다. 그런 남자들이 정말 본인의 마음을 자랑스럽게 스펙으로 내세울 수 있는 남자들인가?
도현은 태어나 그런 남자들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못난 남자들을 만나며 못난 취급을 받는 걸 견디기엔 스스로를 너무나 사랑했다. 그래도 모두가 그녀처럼 사는 것은 아니니.
“경험담인가요?”
“경험 반 간접체험 반.”
“소설이나 만화야 주인공 속마음까지 보이니까 마음, 마음 하는 것 같죠? 로맨스 판타지를 본인 연애 기준으로 잡으면 어쩌자는 거야.”
“으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거라도 가질 수 있다고 믿고 싶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
그러자 도현이 약간 미간을 찌푸리고 미묘한 음성을 냈다.
“이렇게 말하니까 전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 생각나네요. 죄책감 든다고. 우리가 사실 세상에 없는 사랑을 만들어 팔고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건 아닌가.”
“글쎄요…. 없다곤 생각 안 해요. 너무 드물어서 모두가 가질 수가 없어서 그렇지.”
사람들은 본인의 인생에서 다른 건 못 가져도 사랑만은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도리어 가진 것도 없는 사람들이 그런 환상에 인생을 저당 잡히고 이름도 없이 묻히지 않는가. 로웰이 망고주스를 빨았다.
“그런가요?”
도현이 되물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곰곰이 지난날을 떠올려보고는 역시나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지금까지 만났던 남자들, 싫어하진 않았어요. 저에게 잘해주려고 하고 맞춰주려고 그랬으니까. 나중에 다들 좀 귀찮아져서 그렇지….”
“그래요? 좋아하진 않았어요?”
“좋아했다면 한 거라고 볼 수 있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사랑이니 뭐니 하기엔 좀 그렇네요. 남자 하나 때문에 죽고 못 사니 이런 거 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그렇게 보여요.”
“네가 사랑을 몰라서 그렇다고 말하는 친구들도 있기는 한데… 딱히? 걔들이 죽고 못 살았다는 남자들 보면 솔직히 돈을 억만금 주고 만나라고 해도 안 만날 남자들.”
도현은 머리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했다.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사랑은 결국 자아도취밖에 없었어요.”
“아니면 체념?”
“아, 맞아요. 자기 수준이 이 정도니까 서로 체념하고 만나는 거. 소위 7점들끼리. 그리곤 둘 다 욕구불만이야.”
“욕구불만 없이 그냥 자기 분수다, 받아들이고 동지처럼 살기라도 하면 그나마 낫죠. 나쁘다곤 생각 안 해요.”
로웰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런 식으로 살아요. 한 번 사는 인생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배 타고 여기까지 왔지. 우리 빚이 얼만데.”
그러자 도현 킬스버그와 로웰 리, 둘 다 빵 터져서는 키득키득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우리 돈 많이 벌어요, 선생님. 제가 정말 새 세상을 보여드릴게요.”
“하하하. 전 이것도 벌써 새 세상인데. 뭐가 또 더 좋은 게 있어요?”
“많아요. 아흐, 옛날엔 도시마다 가장 유명하고 실력 있는 요리사들 불러서 배에서 요리하게 하고 그랬어요. 하얀 모래사장과 에메랄드빛 바다에 지는 석양을 보며 먹는 미식이란. 행복했어요….”
“아, 역시 예쁜 거랑 먹는 게 남는 거군요, 작가님.”
“맞아요, 선생님.”
*
어쨌든 그렇게 송선호, 미르 킹쉴드는 패배, 다니엘 스톤하츠의 승리로 이번 바하마·푸에르토리코 여행이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2주 동안 송선호는 술만 펐고 미르 킹쉴드는 고민했다. 그리고 그는 살면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무언가를 고민하고 결국 결론내렸다.
그는 처음으로 도현의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인 퀸룸으로 찾아갔다. 훤칠하고 큰 키에 신이 내린 멋진 몸매가 드러나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곤 경쾌하게 노크해서 그녀를 불러냈다. 도현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귀걸이를 하며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지금은 나도 얼마 없는데 그래도 나도 앞으로 도와줄게.”
미르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매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제 배는 하와이를 한참 지나 한국에 다 와 가고 있을 때였다. 도현은 그가 인사말도 하기 전에 그렇게 말하자 무슨 말인가 했다가 살짝 인상을 썼다.
“아니…. 굳이 안 그래도 된다니까요. 왜 이래요?”
도현은 미르를 황당하다는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며칠 동안 얼굴을 안 비춘다 싶더니 갑자기 나타나서 이런다.
“나도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는데, 애초에 이런 고민을 한다는 거 자체가 굳이 이렇게 하고 싶어서인 거 같아서.”
미르 킹쉴드는 또 아주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도현의 허리를 양손으로 가볍게 둘러 안고는 그녀의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자와 멋진 옷차림을 한 커다란 남자. 누가 봐도 잘 어울렸다.
미르는 구김살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너 진짜 좋아하거든.”
“걸즈 안 들어갈 건데요.”
“안 들어와도 돼.”
“딱히 요새 미르한테 관심 없어서 별로 하고 싶은 마음도 없구요.”
“지금 좀 벗을까? 응? 내 근육 좋아하잖아.”
미르는 자기 같은 남자를 앞에 두고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냐는 듯 단순한 뉘앙스로 말했다. 도현은 살짝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저 다니엘 씨랑 좀 진지하게 만날 거 같은데요?”
“음? 너 남자 하나 있다고 다른 남자 못 만나는 그런 그릇 작은 여자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
“…….”
“나도 너 딴 놈한테 뺏긴다고 생각하니까 잠깐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았는데, 일단 뺏기는 건 아니라면 또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이…. 생각해보면 나도 여자를 다섯 명이나 데리고 살았고. 네가 그러지 못하라는 법도 없고.”
미르는 미간을 약간 좁히고 자기 턱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고민을 여과 없이 그녀에게 전했다. 지나고 보니 별거 아니었다는 식이다.
“…저…. 일단 병 때문에 여자 많은 남자는 좀 그렇다고….”
도현이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보통 한 번 관심을 끊은 남자에게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응, 그래서 나 집 나오려고. 걸즈한테는 갈 곳 생기는 대로 나가라고 했고. 일단 너한테만 올인할까 싶다.”
처음에 도현의 빚 얘기를 듣고는 그답지 않게 엄청 당황하는가 싶더니 며칠 되지도 않아 그는 결정을 뚝딱 내리고 또 세상 걱정 없는 얼굴로 호쾌하게 그녀에게 결정한 사실을 통보했다. 그리고는 물었다.
“그러니까 나 네 집 들어가서 살아도 돼? 내가 네 보이즈나 되지, 뭐.”
그의 빛나는 플래티넘 블론드만큼이나 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미르 킹쉴드….
역시 한 방이 있는 남자다.
도현이 교제했던 남자들은 어째서인지 도현의 라이프스타일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아니, 누구는 월화수목금토일 각기 다른 남자를 만나도 서로가 다른 남자의 존재를 쉽게 인정해주고 그런다는데 유달리 그녀의 남자들은 처음엔 안 그러겠다고 해놓고 나중엔 결혼을 해달라느니, 다른 남자는 만나지 말아달라느니 요구가 많았던 것이다. 그중 최고가 송선호이기도 하고. 아니, 꼭 다 아는 남자들이 그러는 게 더 성가시다.
하지만 역시 미르 킹쉴드는 본인이 여자를 여럿 데리고 살아본 남자라서 그런지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져봤을 판타지를 일깨워주었다.
최고의 남자로만 이루어진 나만의 하렘
지니 호 위의 천국은 재밌고 즐겁다. 도현 킬스버그가 만든 최고의 놀이동산. 꿈같은 공간이다. 하지만 꿈의 공간은 돈이 너무 많이 드는 게 문제였다. 7점짜리로 채워놓은 스트리퍼들이야 사실 자위기구와 뭐가 다르겠는가. 하지만 이런 남자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남자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
미르는 거기에 덧붙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결국 내가 차지하면 되는 거니까 지금은 과도기적인 거라 생각하고….”
“아수라장은 사양인데요. 그러면 다 내쫓을 거예요.”
“아, 쳇.”
미르는 약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대답했다.
“알았어.”
‘뭐, 그럼 몰래 하면 되는 거고.’
그리고 도현은 다니엘 스톤하츠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는 미르 킹쉴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여기서 거절을 하면 아마도 자신보다 그녀의 자유를 더 인정해주는 그를 선택할 거란 결론을 내고 결국 받아들였다.
*
송선호는 이번 휴가 때 고백, 프로포즈, 실연, 미련의 테크트리를 아주 훌륭하게 완수했다. 이번 겨울 휴가의 목적이었던 인연의 끝은 결국 그가 아니라 그녀가 성사시킨 것이다. 어찌 보면 처음부터 당연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6년이 넘게 질질 미련을 끌어온 그는 언제까지고 이 관계를 끝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진짜 끝….’
끝맺음마저도 그의 식으로 하지 못했다. 모든 걸 밝히고 모든 걸 다 던졌는데도 결국 안 됐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냥 담당자를 바꾸고 잠수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잊혀지고 싶었다.
그는 먼저 누리은행에 갔다. 빚을 지면 죽더라도 갚아야 하는 시대. 상속세나 증여세 같은 건 당연히 없다. 그는 연말까지 마련할 수 있는 현금을 그냥 대출이란 수단을 이용해 지금 출금했다. 대출이라 원래 생각했던 금액보다 더 빌렸다. 그리고 도현 로렌스 킬스버그의 대출 중 금리가 높은 순으로 갚아달라고 했다. 은행은 누구 돈을 받든 상관 없으니 바로 그렇게 해주었다.
“…….”
아무리 그래도 사랑하는 여자가 팔려가는 꼴은 못 볼 것 같다. 이대로라면 진짜 언제 팔려가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지금 이 결정이 충동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고 나중에 분명히 후회할 것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그녀의 인생에 이 정도 영향이라도 끼치고 싶다는 오기인 것 같기도 하다. 나 같은 남자 놓친 걸 후회하라고…. 바보 같은 짓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이자도 훨씬 줄 거고 다니엘 스톤하츠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긴 할 것이다.
이제 진짜 끝이다. 은행을 나왔다. 전화가 왔다.
[너 어디야, 지금? 너 갑자기 무슨 대출을 2백이나….]
아버지였다.
“잠깐 쓸 일이 있어서요. 네. 아뇨. 네…. 네…. 죄송합니다. 네….”
그는 그대로 집으로 호출당했다. 송선호의 부모님이 사는 집은 도현의 집보다는 지니 호의 퀸룸처럼 화려한 편이었다. 한적한 교외에 지어진 상앗빛 맨션(Mansion)이다. 거실마다 커다란 샹들리에가 있고 가구가 클래식했다. 어머니의 취향이었다.
“아니, 뭐냐고? 어? 너 어디서 사고 쳤냐? 사람이라도 죽였어? 어?”
“그냥 좀 쓸 일이….”
아버지는 화가 났다기보단 황당해 보였다. 그는 머리를 깔끔하게 넘기고 양복을 입고 있었다. 막 회사에서 퇴근을 한 아버지의 넥타이를 풀어주며 어머니가 슬쩍 송선호를 보았다.
“여자 문제 같은데….”
“진짜? 진짜냐? 진짜로? 누구?”
아버지는 여전히 황당함이 가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유 없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는 아들이라서 더 그랬다. 어머니는 부드럽고 연한 황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무릎까지 오는 깔끔한 정장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넥타이를 개서 옆에 있는 사용인에게 넘겼다.
“진짜 좀 쓸 일이 있었어요….”
송선호가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자 아버지는 그제야 약간 골치가 아프다는 얼굴로 거실에 놓인 카우치 중 상석에 앉았다.
“선호야, 너… 야, 그거 네 삼촌 KP미디어 지분 살 때 써야 하는데 그걸….”
비상장회사인 KP미디어는 송선호의 삼촌 송병제가 70% 소유하고 있었다. 훗날엔 KP노벨과 합병될 것이다. 송선호는 KP노벨의 주식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합병을 할 때 합병비율을 잘 조절하지 못하면 송선호나 사장인 제임스가 크게 손해를 볼지도 모른다. KP미디어 지분의 나머지 30%를 소유한 그룹 회장인 리자 송(그녀는 자신의 성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었다)은 송선호에게 30%의 지분을 팔기로 했다. 송병제보다 송선호가 가격을 더 불렀기 때문이다.
“일단 제가 가지고 있는 부동산이랑 주식 담보로 하고 빌리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도 당연히 부족하지. KP미디어만 있냐. 알면서 왜 그래?”
“아버지 돈 좀 없으세요? 어머니나….”
“먹고 죽을 돈도 없다.”
지금 집안의 돈이 전부 어디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송선호의 아버지 송영제는 그렇게 한숨을 쉬며 어머니가 주는 시원한 녹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좀 더 편안하게 앉아서 소파 등에 머리를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가 그 뒤에 서서 아버지의 눈썹을 만졌다.
“어머, 당신 인상 자꾸 쓰지? 여기 주름 또 생기잖아.”
어머니는 톤이 다운된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훌륭한 몸매가 잘 드러나는 옷차림이었다. 클래식하고 단정한 악세사리가 잘 어울렸다.
“그래?”
“속상해.”
“왜 그래, 응?”
“내 친구들 다 내 남편 잘생겼다고 부러워했는데 자꾸 늙으면 어떡해?”
“거참…. 선호야, 아빠 그렇게 늙었냐? 어? 네 엄마가 요새 자꾸 구박한다. 늙었다고.”
송영제는 디바이스로 자신의 얼굴을 심각하게 비춰보면서 물었다.
“제 눈엔 그대로이신 거 같은데요…. 물론 엄마에 비하자면….”
“어? 그래?! 그러면 안 되는데.”
송영제는 더 심각하게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 피부과라도 한 번 따라갈까?”
“그럴까? 박 선생한테 한 번 봐달라고 하자.”
송선호의 엄마 지연 이바노프는 자기 남편의 얼굴을 만져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열심히 송영제가 받아야 할 시술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재벌 집안이라고 썩 뭐가 다른 건 아니다. 집안에서도 둘은 금슬이 좋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너 진짜 여자 문제로 돈 쓴 거냐?”
송영제가 가만히 미동도 하지 않고 눈만 돌려 송선호를 보았다. 자기 아내가 자신의 얼굴을 만지면서 어떤 시술을 받아야 할지 가늠하고 있었다.
“아뇨.”
송선호는 그렇게 대답했다.
“좋아하는 여자는 있냐?”
“아뇨.”
송선호는 그렇게 대답했다. 송영제는 아내와 함께 거울을 보며 자신의 눈꼬리를 살짝 들어보았다.
“이러면 너무 젊어 보이려고 기 쓰는 느낌 아냐?”
“그런가?”
“남자가 여자보다 더 자연스럽게 해야 하는 거라고 이런 건…. 음…. 그럼 선이나 한번 봐라, 아들.”
“선이요?”
“그래. 집에 말도 없이 돈도 그렇게 썼는데 그런 건 한 번 해줘야지. 당신 그거 어디에다 뒀지?”
“아, 당신 서재에.”
물론 원래 송선호의 돈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돈을 몇백억 써도 이 정도에서 추궁이 끝나는 게 결국 그가 사는 클래스와 세계를 보여주는 걸까. 어머니는 일어나서 아버지의 서재로 갔다가 돌아왔다. 그리고는 책자 하나를 내놓았다. 송선호는 저게 뭔지 알고 있었다. 마담뚜가 들고 다니는, 여자들 신상 정보가 가득 든 책이다.
“강요하는 건 아니고. 네 마음에 들면 결혼하고 아니면 그냥 말고.”
송영제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드디어 거울을 내려놓았다.
“아… 진짜 해야 하나. 내가 벌써 그 정돈가…. 아니, 당신 친구 있잖아. 열다섯 살 연하랑 결혼했다는. 생각해보니까 당신 모임에선 항상 내가 스타였는데 그 친구 남편이 하도 어리니까 나는 뒷전 느낌이라 상당~히 불쾌했던 기억이 난다.”
“미리미리 관리했어야 했어. 당신이 타고 난 거 과신하다가 훅 늙을 상이었어.”
“당신이 요새 너무 그러니까 스트레스받아…. 지연아, 와서 전처럼 나 잘생겨서 좋다고 말해봐, 어? 빨리.”
“아이, 참. 애도 있는데.”
“…아버지는 어머니랑 어떻게 만났어요?”
송선호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부모님을 위해서 자리를 비켜주려다가 말고 그렇게 물었다. 아버지는 벌써 어머니 허리를 잡고 끌어당겨 자기 무릎에다 앉혀 놓고 괴롭히고 있었다. 빨리 자기 잘생겼다고 하라고 말이다.
“응? 친구 모임에 따라갔다가 보고 소개시켜 달라고 졸라서 만났지.”
송영제는 아내의 옆구리를 계속 간지럽히고 있었다. 그녀는 하지 말라고 그의 어깨를 막 치고 있었다.
“어떻게 꼬셨어요?”
“당신 진짜 그만해. 그만해!”
어머니는 남편의 짓궂은 장난에 그를 마구 밀어내려고 했지만 송영제가 손을 잡고 안 놔줬다. 지연이 포기했다.
“네 아빠 진짜 웃긴 남자다? 처음 만나자마자 자기 인생 계획을 쭉 읊더라. 대학 졸업하면 회사 들어가서 일 배우고 회사 물려받고 그래서 나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준다고. 그러니까 졸업하자마자 결혼하자고. 내가 웃겨 가지고 그냥 웃었다.”
“아, 어쩔 수가 없었어. 네 엄마가 그때 아는 오빠가 한 트럭이었다, 한 트럭.”
송영제가 인상을 팍 쓰며 그렇게 말했다.
“어머, 뭐가 한 트럭이야. 애 오해하게.”
“뭐가 아니야? 내가 그때 받은 스트레스로 지금 늙는 거잖아.”
“진짜 당신도, 참.”
“…….”
아버지한테 졌다…. 송선호는 정말 겁쟁이였던 것이다. 드디어 그는 부모님을 위해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송선호가 외동인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라 아이를 낳는 자기 와이프가 거의 죽을 정도로 고생하자 다시는 애를 안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만약에 그전에 이걸 알았으면 송선호도 안 가졌을 거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아빠가 우리 아들 진짜 사랑하긴 하는데. 그래도 역시 마누라가 더 좋다.]
그리고 거기에 어머니가 지나가듯이 뭐라고 덧붙였다.
[난 솔직히 남편보다는 아들…. 왜 다들 아들, 아들 하는지 알겠다니까. 우리 아들 최고.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
그날 이후로 아버지가 어찌나 괴롭히던지. 그때 송선호는 16살이었다. 어머니가 결국 그 말을 물릴 때까지 그는 송선호를 주구장창 괴롭혔다. 어머니랑 얘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와서 뒤통수를 치고 가지 않나…. 어렸을 땐 아버지 같은 사랑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결혼이나 하자….’
그는 실연당한 남자였다. 자포자기한 상태라 그녀가 아니라면 누구든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식당으로 가서 식탁에 앉아 책을 펼쳐 넘기기 시작했다.
‘그래…. 이상형대로… 참하고 조신하고… 개념 있고 정숙한….’
그녀랑 조금이라도 닮은 여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
“…….”
“…….”
지연과 송영제는 할 말을 잃은 채 자신들의 아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면서 쑥덕거렸다.
“여자 문제 맞다니까.”
“차였나…. 차였나 보다.”
다 들린다. 송선호는 자신이 고른 여자가 있는 페이지를 부모님께 내밀고는 자기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진짜? 진심이야? 못 무른다, 이거?”
“네.”
아버지의 경고에 그렇게 선선히 대답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씻고 저녁도 거르고 그냥 잤다.
다음날 송선호는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바로 정 편집장에게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 작품을 맡겼다. 자료랑 두 작가에 대한 주의 및 중요 사항까지 빼곡히 정리하여 넘겼다. 리오 정은 좀 놀란 얼굴로 자료를 살폈다.
“엄청 신경 많이 쓰셨네요. 이제 궤도 잘 탔는데 손 놓기 아쉬우시겠어요.”
그는 그렇게 말했다. 동아시아 최대의 콘텐츠 플랫폼인 <리엔>에서 로맨스 소설 16위, 로맨스 만화 부분 18위에 랭크되어 있는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였다. 저번 달에 비하여 순위가 30위씩은 올랐다.
“고생해.”
송선호는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아버지가 주선한 선자리에 나갔다. 송선호는 깔끔하게 정리한 머리에 안경을 쓰고 쓰리피스 슈트를 입은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상류층 출신에 엘리트적이고 매우 잘생기고 빼어난 몸매에 앉아 있는 자태까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와 비슷한 클래스의 여자를 만나기 위해 수컷 공작처럼 단장하고 나온 송선호였다. 그는 여자를 기다리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송선호 씨?”
짙은 머리색에 날개뼈까지 닿는 차분하고 세련된 머리스타일. 도현 킬스버그와 머리스타일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선택한 여자였다. 그녀는 일어나는 송선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나쁘지 않다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박예나라고 해요.”
“송선호라고 합니다.”
그들은 악수를 했다. 그리고 박예나는 미리 송선호가 직원을 시켜 바꿔놓은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들어오자 사람들이 전부 박예나와 송선호를 쳐다보았다.
“요새도 선 같은 거 보는 거 좀 구시대적이죠?”
박예나가 물었다. 송선호가 가볍게 미소를 띤 얼굴로 답했다.
“한국이니까요.”
사람들이 약간 수군거리는 것 같자 송선호는 직원에게 눈짓을 하고 그 사람들도 잠깐 쳐다봐 경고를 주면서도 자연스럽게 박예나에게 말했다.
“회장님은 잘 계시죠? 저번에 J. 로건 회장 장례식 때 마지막으로 뵀는데.”
“아버지야 잘 계시죠. 여전히 골프 좋아하시구요. 선호 씨 어머님이랑은 저번에 해러드에서 잠깐 인사 한번 했는데.”
“그러셨어요?”
그녀랑은 다르긴 했지만 목소리가 꽤 예쁜 여자였다. 그녀도 목소리가 매력적이니까…. 생각보다 잘 고른 선택이었나 보다. 하지만 자리를 빨리 바꿔야 할까. 사람들이 너무 쳐다본다.
“죄송합니다. 제가 장소를 잘못 정한 모양입니다.”
그러자 박예나는 호호 웃으며 말했다.
“다들 제가 부러워서 그래요. 선호 씨 진짜 미남이시니까요.”
“그건…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이유는 굳이 송선호가 미남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도 평소만큼의 관심은 받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오고 나서만큼은 아니었다. 그녀는 전체적인 모습이 삼각형으로 보일 만큼 엄청난 거구의 여성이었다. 점같이 새카만 눈에 속눈썹을 쨍하게 붙인 통통하고 분명히 나름 귀여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미남보다도 이런 거구의 여성이 더 눈초리를 받는, 아니, 그런 거구의 여성이 분명히 선자리로 보이는 만남에서 이런 미남을 만난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관음 어린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이다.
“신경 쓰지 마세요, 선호 씨. 전 하나도 신경 안 써요.”
“예나 씨가 신경 쓰지 않으신다면 저도 상관없습니다.”
송선호가 그렇게 말하니 박예나가 그를 좀 다시 보는 눈초리로 한 번 더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송선호는 그녀가 속으로 자신을 자세히 품평하고 있을 것을 알았지만 모르는 척했다. 어차피 그러자고 만나는 자리다. 둘은 서로의 취미나 일이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자리를 옮겨 밥을 먹고, 밥을 먹고 나서는 술까지 한잔 걸치고 다음 번 약속을 잡는, 아주 훌륭한 첫 데이트를 끝냈다.
“으음… 오늘 어땠냐? 괜찮았냐?”
아버지는 송선호가 자기 펜트하우스가 아니라 집으로 돌아오자 그렇게 물었다. 송선호는 당분간 혼자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까딱하면 지니 호에 있을 때처럼 매일 술만 마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송선호는 양복의 단추부터 풀면서 말했다.
“나쁘지 않았어요.”
“진짜? 너… 원래 사이즈가 큰 여자가 좋았던 거냐?”
송영제는 요새 시간이 없어서 집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령을 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아들에게 물었다. 지연 이바노프는 잘 준비를 끝내고 화장기 없는 모습으로 실크 원피스 잠옷 위에 숄을 걸친 채 아들의 넥타이를 풀어주었다.
“그런 걸로 사람 판단하지 마세요. 그런 것보다 여자는 마음입니다.”
송선호는 쌩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말하고는 자기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지연도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남편을 돌아보았다.
“어머… 진짜 마음에 든 모양인데?”
“허… 그런가? 지금까지 같이 있다 온 거면….”
부부는 아들이 올라간 자리를 바라보며 살짝 말을 잃었다. 어쨌든 송선호는 박예나와 결혼을 전제로 한 데이트를 계속했다. 여전히 그녀가 아니라면 누구든 상관없었지만, 생각보다도 박예나는 송선호와 잘 맞았다. 얘기도 잘 통하고 그녀만큼이나 당당하게 인생을 사는 것 같아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자신감은 도현보다도 더한 것 같았다. 원래 송선호의 이상형대로 조신하고 참한 그런 부류의 여자는 아니었지만, 아마도 아니라서 더욱 다행인 것 같았다.
그러던 와중에 리오 정이 도움을 요청했다.
<송 편집장님, 바쁘신 와중에 죄송합니다만 앞으로 이야기 방향에 대해서 두 작가님 사이에 의견 조율이 안 됩니다. 저랑도 안 되구요ㅜ 헬프미>
라면서 지금까지의 이야기 진행과 문제에 대해서 정리한 문서를 송선호에게 보내왔다. 송선호는 대충 어떤 파란이 벌어지고 있는지 예상되어서 간략하게 그의 의견을 적어 정 편집장에게 보냈다. 그러자 며칠 뒤 그가 다시 도움을 요청했다.
<송 편집장님 메모 전했더니 내용이 더 산으로 가요ㅜㅜ 살려주세요ㅜㅜ 이제 비축 없어요ㅜㅜ 마감 어떡해요ㅜㅜㅜ>
“…….”
송선호는 도현이나 로웰이 하는 연락을 전부 수신차단하고 안 받는 중이었다. 이번엔 그 정도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송 편집장님ㅜㅜㅜ 작가님들 빚 많다면서요ㅜㅜㅜ 마감 못 지키면 당장 다음 달 수입부터 줄 텐데>
결국 송선호는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일이니까. 일이다.’
송선호는 그렇게 몇 번이나 생각하면서 도현의 집으로 향했다. 이제 도현의 집에는 송선호의 생체정보가 말소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처럼 초인종을 눌렀다.
“오랜만입니다.”
“송 편집장님!”
리오 정이 핼쑥한 얼굴로 그를 맞이하러 나왔다. 두 작가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눈에 보였다. 저기서 도현과 로웰이 서로 쳐다도 보지 않고 있었다. 죽이 맞을 때는 엄청 잘 맞는데, 그래도 덕후의 취향이란 이상한 곳에서 양보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송선호….”
그의 얼굴을 보자 도현이 깜짝 놀라서는 다가왔다.
“갑자기 그런 돈을 주면 어떡해. 깜짝 놀랐잖아. 당장 도로 들고 가.”
“당장 안 주셔도 됩니다. 나중에 돈 버시면 천천히 주세요. 일단 작품 얘기부터 하죠.”
송선호는 안경을 살짝 추켜올리며 스크린을 두 개 띄우고 바로 리오 정, 로웰 리, 도현 킬스버그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전히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지만 작가들에게 절절매는 리오 정(그는 여자에게 아주 약하다. 특히 미녀에게는 더)과는 달리 송선호가 끼니 이야기가 차차 마무리되긴 했다. 소설판과 만화판의 맥을 분리할 때가 온 것이다. 양쪽 다 납득이 될 만한 시나리오가 나오자 도현과 로웰이 반짝반짝한 눈으로 그것을 보며 하이파이브 했다.
“누구야…. 시끄럽게.”
그때 2층에서 누군가 거의 헐벗은 채로 내려왔다. 플래티넘 블론드에 환한 아이스블루의 눈동자, 쪼개질 듯한 근육질의 육체. 미르 킹쉴드였다. 그는 늦잠을 자고는 훌륭한 복근을 긁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우유를 팩으로 들고 꿀꺽꿀꺽 마시면서 1층 거실로 왔다.
“…….”
다니엘 스톤하츠와 만나는 게 아니었나? 분명히 미르 킹쉴드는 지니 호의 라운지바에서 송선호와 실연 동지(?)로서 술을 같이 마셨는데 왜 그가 여기서 저러고 나오는 것인가. 송선호는 당황스러움에 배신감이 양념 된 기분을 느꼈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신경 쓰지 말자….’
미르는 도현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쪽 하고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도현이 약간 질색을 하며 그의 팔을 잡았다.
“아, 미르… 우유 묻잖아요.”
“너희 집은 먹을 거 잔뜩 있어서 좋네.”
미르는 아주 자연스럽게 도현의 박스티 안에 손을 넣어 그녀의 배를 만졌다. 송선호는 안경을 추켜올리곤 스크린에만 집중했다. 그때 거실의 창문이 자동으로 열리며 누가 들어왔다. 이 한겨울 날씨에 정원에 있는 수영장에서 냉수마찰을 하고 온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그는 미르가 도현에게 들러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자 ‘저도 모르게’ 그의 이마에 가벼운 펀칭 마법을 먹이고 말았다.
“윽…! 이 미친 마도사 새끼가…!”
미르의 이마가 벌게졌다. 보통 사람이 맞았으면 벌써 뻗어서 실려갔다. 도현도 깜짝 놀라서는 미르를 살폈다. 그가 열이 받아서 다니엘을 쳐 죽일 듯 노려보았다.
“너 진짜 죽고 싶냐? 어? 너 내가 마음먹고 달려들면 마법 쓰기도 전에 뒈져. 그건 알고 이러는 거지? 어?”
“내가 할 소린 거 같은데.”
“해볼래, 씹새꺄?”
둘이 그러고 있자 처음에는 살살 말리던 도현이 화를 냈다.
“계속 싸우면 둘 다 쫓아낼 거라고 했죠!”
“…죄송합니다.”
“아니~ 쟤가 먼저 시비 텄잖아. 내가 먼저 그런 거 아닌데. 응? 나 아파. 호 해줘.”
다니엘은 굳은 얼굴로 사과했고 미르는 애교를 부렸다. 참나…. 집채만 한 덩치로 애교를 부려 넘어가려고 수작치는 미르 킹쉴드를 보고 도현은 약간 할 말을 잃었다.
“빨리~.”
“진짜… 미르는….”
도현은 그렇게 헛웃음을 짓고는 그의 이마에 진짜로 호~ 하고 바람을 불어주었다. 그는 좋아했다.
‘정신 나간 새끼들.’
이것들이 진짜 제정신인 건가? 사랑하는 여자를 다른 남자랑 나누겠다고? 미르 킹쉴드야 상상을 뛰어넘는 걸레일 테니 그렇다고 쳐도 다니엘 스톤하츠는 뭐하는 건가. 이런 걸 견딜 수 있다고? 아니,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 거라면 방금 같은 시비도 걸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이럴 줄 알았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술에 취해 다니엘 스톤하츠를 욕할 때 했던 말이 맞았던 것이다. 어떤 남자라고 그녀 앞에서 다르겠는가. 지고지순 다 바치고 그가 지금 받는 취급을 봐라. 이런 걸 위해서 그가 그렇게 고민하고 애쓰면서 도현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했겠는가.
게다가 저런 식이면 누구도 그녀를 가지지 못한다. 저러다가 저들도 흘러가는 인연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송선호는 그게 죽어도 싫었다. 항상 그녀에 대한 꿈을 꿀 정도면서 그녀의 유혹에 버텼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저 잠깐 즐기다가 스쳐 갈 인연으로 끝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분명히… 분명히 송선호는 자신이 그녀를 평생 잊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그녀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도 충분히 비참한데 거기까지 가면 얼마나….
일이 끝났다. 송선호는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빨리 이 집을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가 집을 나서려고 일어나니 도현이 따라 나왔다.
“너… 그렇게 인사도 없이 가버리고 갑자기 돈도… 놀랐잖아. 연락도 안 되고…. 와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일을 마무리한 송선호는 신발을 신으며 그렇게 대꾸했다. 도현이 높고 넓은 현관의 벽에 살짝 몸을 기댄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딱딱하게 그러지 마…. 마지막인데.”
도현도 오늘이 그와 얼굴을 볼 수 있는 마지막이라는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정말 고마워. 빚은 빨리 갚을게. 이자도 은행이자 정도는 꼭 줄게.”
“…됐어.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빨리 은행 돈이나 갚아.”
송선호는 그렇게 말했다. 명품 남성 구두를 잘 갖춰 신은 그는 현관의 커다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도. 마지막으로.
“그동안 실례 많았습니다. 작품 번창하시길 빌겠습니다.”
송선호는 그렇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혔다. 그러자 크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가 대문을 나가 차를 타고 최대한 빠르게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송선호는 한동안 좀 멍하게 살았다. 집에 돌아가서 아침엔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아버지와 함께 엄마가 골라주는 넥타이를 하고 회사에 가서 일했다. 그야 대작 작가만 직접 관리했다. 대부분의 시간은 회사 내 인사, 사업 기획 및 운영, 투자에 관한 의사결정을 했다. 사장이자 삼촌인 제임스는 요새 또 히피 본능이 올라와서 회사를 슬렁슬렁 다니고 있었으니 더더욱 송선호가 할 일이 많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하고 나면 또 사업차 미팅 겸 식사나 술을 하면서 요즘 경기가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에는 술을 좀 삼갔다. 전처럼 술을 먹고 실수를 할까 싶었다. 하지만 태평양 위가 아닌 일상으로 돌아온 송선호는 그렇게 술을 마시고 정신을 놓는 짓은 더 이상 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그냥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박예나와도 꾸준히 만났다. 그리고 일과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과 대화를 하다가 시간이 되면 잠들었다.
그런 평온하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일상을 유지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그렇게 한 달인가 두 달인가 지났나.
“엄마는 직접 백화점 와서 쇼핑하는 거 싫어하시거든요. 물건은 보고 사야 한다고 말해도 남들이 보는 거 싫다면서.”
박예나의 어머니도 박예나만큼은 아니었지만 거구라고 알고 있었다. 바깥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사모님이라서 송선호도 그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송선호가 대꾸했다.
“저희 어머니는 좋아하십니다. 나중에 같이 다니면 정말 좋아하실 겁니다. 항상 같이 쇼핑할 딸이 있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셨거든요.”
“어머, 정말요? 좋다.”
박예나는 송선호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여전히 그녀와 같이 다니면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정말 당당했다. 오히려 무례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을 깔보는 듯한 시선으로 보았다. 그들은 가지지 못한 자들이고 그녀는 다 가진 자다.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것은 그들이다. 송선호는 그녀가 구입한 물건이 담긴 쇼핑백을 얌전히 잘 들고 그녀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첫째, 둘째가는 거대한 고급 백화점에 위치한 명품관이라 없는 명품이 없었다. 여자들 쇼핑하는 데는 말없이 따라주는 것이 법칙이었다. 송선호나 그의 아버지도 가끔 지연 이바노프의 쇼핑에 동행할 때면 말없이 짐꾼이다. 그가 도현 킬스버그의 절제 없는 소비를 자주 나무랐다고 해서 그런 기본 매너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송선호도 자신이 입을 옷은 알아서 고르는 편이긴 했지만 바쁠 때는 정장 명품 브랜드를 하나 지정하여 거기서 추천해주는 것으로 샀다. 그 외에는 어머니가 골라주시는 거나 가끔 선물로 들어오는 것도 입었다. 신발, 시계나 커프스, 넥타이는 선물로 꽤 많이 들어왔다. 젊은 남자라 많이 꾸밀 것이라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송선호에게 그런 걸 입히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어머니 친구분들도 그런 선물을 많이 해주셨다.
송선호는 이름도 모를 많은 명품관을 스쳐 지나가면서도 박예나의 말에 매너 있게 호응했다. 관심이 있는 듯 없는 듯 다른 가게를 구경할 때 박예나가 갑자기 발을 멈추며 감탄사를 냈다.
“어머… 예쁘다.”
송선호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가….”
송선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웨딩드레스였다.
웨딩드레스는 세밀하고 짙은 자수로 가슴과 허리를 감싸 여성스러운 선을 극대화하고 어깨와 팔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깨 위나 손목 부분을 부드럽게 옅고 가느다란 자수가 감쌌다. 그리고 엉덩이까지 바싹 붙어있던 자수가 허벅지부터 퍼지면서 뒤로 길게 새하얀 천이 늘어졌다. 목과 가슴골과 쇄골이 다 드러나서 섹시하면서도 신부의 청초함을 드러내는 그런 웨딩드레스였다.
“나중에 결혼식에서 이거 입으면 진짜 예쁠 것 같아요…. 와….”
송선호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입으면 정말 예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걸 입고 자신과 결혼해주었으면 정말 좋았을 것 같다고. 그녀의 손에, 아직도 버리지 못한 그 반지를 끼워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했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끔 그녀와 안 맞아서 대판 싸우기도 하겠지만, 결국엔 아버지보다 더한 팔불출이 되어서 그렇게 평생 같이하고 싶었다.
“…….”
눈물이 흘렀다. 앞으로 평생, 이렇게 사랑하는 여자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 같은 여자도 두 명은 없을 거니까. 아니, 설사 두 명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겐 도현 킬스버그밖에 없었다.
“선호 씨?”
미친…! 송선호는 자신이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깜짝 놀랐다. 씨발….
“죄송합니다.”
송선호는 눈물을 훔쳐 닦았다. 씨발…. 근데 눈물이 안 멈췄다.
‘병신 같은 새끼. 병신. 머저리. 미친놈….’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어차피 그녀가 자신을 좀 즐기고 버리든 말든 그는 그녀를 못 잊을 게 분명했다. 송선호는 자신을 걱정하는 박예나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왜 그래요, 선호 씨. 무슨 일 있어요?”
“진짜 죄송합니다. 저… 예나 씨 앞으로 못 만날 것 같습니다.”
그러자 박예나가 점 같은 귀여운 눈으로 깜박깜박 속눈썹을 움직였다. 송선호는 괴로운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습니다…. 도저히 다른 여자랑은 결혼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왜 선보셨어요?”
송선호가 주먹으로 눈을 마구 닦아 겨우 눈물을 그치고는 대답했다.
“차였습니다.”
그는 박예나에게 쇼핑백을 넘겨주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가시는 거예요?”
“네.”
송선호는 엄지와 검지로 다시금 눈물샘을 꾹 누르면서 눈가를 정리했다. 박예나는 팔짱을 끼면서 송선호를 못마땅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후회할걸요. 저 같은 여자가 그렇게 흔한 줄 아세요?”
그러자 송선호가 웃으면서 수긍했다.
“맞습니다. 분명히 후회할 거 압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송선호는 박예나를 두고 달려갔다. 얼른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타고 도현의 집까지 갔다. 이제 그는 초인종을 눌러야 하는 신분이다. 그는 대문에서 초인종을 몇 번이나 눌렀다.
[누구세요?]
“나. 문 열어.”
문이 열리자 송선호는 달렸다. 분명히 후회할 것도 알고 분명히 고통스러울 것을 아는데도 달리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가 막 현관에 도착하여 숨을 고르려는 찰나 현관문이 열렸다. 도현 킬스버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송선호의 얼굴을 보았다.
“갑자기… 웬일이야?”
“사랑해.”
송선호가 앞뒤 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는 이 한겨울에 땀이 다 날 정도로 달려와서는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러니까 네 말대로 할게. 네가 뭘 하든 다… 다 괜찮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 받아줘.”
“…….”
도현은 말을 잃고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땀 때문에 불편한 안경을 벗으면서도 도현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새 본의 아니게 남자복이 터지는 것 같다.
“…일단 들어와.”
도현 킬스버그는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는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러블리 빗치 1부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