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애로사항 (1)
문제가 생겼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회사일로 바빠서 순위 오른 것만 보고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190이 넘는 큰 키, 넓게 각진 어깨, 빵빵한 가슴과 글래머러스한 엉덩이, 근육질에 쭉쭉 뻗은 팔다리가 눈을 사로잡는다. 그의 건장하고 훤칠한 몸매는 쓰리피스 고급 회색 양복으로도 가려지지 않았고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잘생긴 얼굴도 도수 낮은 안경으로 가려도 가려지지 않았다.
그는 드물게 난처한 얼굴로 두 여자의 앞에 서 있었다. 매출과 순위가 견조하게 상승하던 작품의 이번 달 매출이 전월에 비해 처음으로 하락하고 만 것이다. 2127 엘 드라카 시즌을 종료한 지 이제 두 달 반, 초기 예상 매출 자료에 따르면 최소 월 5%씩의 매출 상승을 기대하고 있었다.
“…….”
“…….”
알다시피 도현 킬스버그와 로웰 리, 두 사람은 이번 작품에 사활을 걸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까딱 잘못됐다간 둘이 손잡고 상하이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송선호의 멀티스크린에 뜬 통계자료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웰을 시작으로 세 명의 남자까지 가세하여 도현 킬스버그의 어마어마한 빚을 갚아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나 일단 선수 두 명은 고액의 연봉에도 불구하고 올해 여름 까지 거지나 다름없는 상태였으며(미르 킹쉴드는 자기 걸즈의 병원비를 대주고 현금이 아주 똑 떨어졌다) 송선호는 이미 자신이 쓸 수 있는 자금을 모두 끌어다가 도현의 빚 일부를 갚아준 상태였다. 그런데도 원금이 7백억 넘게 남아 있기 때문에 이자는 여전히 달에 억 단위로 나온다. 지금까지 도현과 로웰, 그리고 채 사장이 손에 손잡고 이자를 막고 있었다.
채 사장은 도현이 스톤캐피탈에서 빌린 빚을 먼저 갚고 있었기 때문에 고액의 주택자금대출이 대부분인 누리은행의 빚을 갚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작품 호조에 힘입어 올해부터는 누리은행의 원금도 차차 갚아나갈 계획이었는데 예상보다 수입이 하락하면 채무상환일정을 다시 조정해야 한다. 그리고 채무상환일정 조정은 이자 상승이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왜죠? 우리 작품이 재미가 없어진 걸까요, 작가님?”
침묵의 끝에 로웰이 먼저 입을 뗐다. 괴로운 질문이었다. 도현은 지끈지끈한 이마를 감싸고 한숨을 쉬었다.
“그럴 리가요….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수정된 매출 추세를 보고 있는 도현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세 사람 사이에는 조금 더 침묵이 이어졌다. 도현이 결심을 하고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이제 발 빼시는 게 어떠세요? 이건 진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요.”
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여전히 초코색인 로웰 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머리숱을 치고 짧아진 금발 삐삐 머리는 오늘도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솟아있었다. 도현은 그녀가 좋았다. 로웰은 도현의 손을 잡고는 고개를 저었다.
“여자가 한 번 마음 먹은 사람을 그렇게 쉽사리 저버리는 거 아닙니다.”
“선생님…….”
도현은 감동 받아 눈물을 글썽하며 로웰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로웰은 도현을 끌어안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면서 송선호에게 물었다.
“순위도 올랐는데 왜 매출이 줄었죠? 이상하네요.”
“…그게… 2달 전에 중국에서 신인 작가 한 명이 작품을 냈는데….”
사실 그의 최대 라이벌은 로웰 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송선호의 머릿속을 잠깐 스쳤다. 그는 멀티스크린 홀로그램 기능으로 중국 조이 왕이라는 작가와 그녀의 작품 <파이트>에 대한 정보를 띄웠다.
“아… 이거 1위 작품. 못 보던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도현이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홀로그램을 돌아보았다.
“조폭물입니다. 여자 주인공은 변호사입니다. 로펌에서 쫓겨나 모델 에이전시에서 일하게 되고 스폰서 스캔들에 휘말린 S급 여자 모델 대신에 경찰 조사를 받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스폰서 아들이 그 여자를 협박하면서 엮이는 내용입니다.”
도현과 로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도현이 중얼거렸다. 게다가 어디서 들어본 것만 같은 도입부다. 송선호가 KP미디어에서 가져온 자료를 쭉 보면서 말했다.
“엄청 선풍적인 인기에요. 동북아, 동남아는 물론이고… 예전에 작가님이 낸 <바로 나> 시리즈보다 더 인기 있을 것 같은데요. 벌써 영화랑 드라마도 제작한다고 합니다.”
송선호가 자세히 봐도 알아보기 힘든 숫자들을 보면서 홀로그램으로 자료를 파바박 띄웠다.
“파이트 열풍이 너무 세서 지금 플랫폼 대다수 독자가 1위 작품으로 쭉 흡수됐어요. 관련 커뮤니티도 전부 파이트 바이럴뿐이고. 2, 3위는 상승세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그 아래로는 타격이 좀 있습니다. 파이트랑 비슷한 옛날 작품들이 다수 실시간이나 일일 순위권에 들어오고 있구요. 아마 다음달부터는 우리 작품 순위도 떨어질 것 같아요.”
“아니… 잠깐만요. 인기요인이 뭐래요? 진짜 옛날 옛적 선사시대 고리짝 소잰데?”
로웰이 그렇게 물었다.
“복고 열풍…이라고도 볼 수 있고, 한동안 능동적인 여자 주인공이 트렌드였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강압적인 남자 주인공들이 별로 없었는데 여전히 그 수요는 시대가 바뀌어도 시장에 크게 잠재되어 있었다는 거죠. 그게 파이트랑 시기적으로 맞물리면서 확.”
송선호가 파이트의 인기 요인을 분석하여 말했다. 도현과 로웰은 다시금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도현이 중얼거렸다.
“나도… 재벌남이니 마왕님이니 이런 소재로 벌어먹었던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 참… 여자들이란….”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남성 독자도 20%나 됐습니다.”
송선호가 부언했다. 도현의 <바로 나> 시리즈의 팬인 로웰도 부언했다.
“재벌남이나 초인적 남자와의 사랑에 대한 선망이야 뭐, 잘난 남자를 원하는 여성 본연의 본능이라고 하지만 왜 하고 많은 남자들 중에 사회 밑바닥에서 구르면서 불법적인 폭력으로 더러운 돈 만지는 남자를 우상화해서 좋아하는 건지 내가 옛날 옛적 고리짝부터 이해가 안 돼요. 유달리 아시아가 심해.”
로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엄마는 그거 정신병이라고 하더라구요….”
도현이 지나가듯이 말했다. 도현은 심각하게 주인공을 강압적으로 대하는 남자 주인공 하나를 등장시킬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알다시피 그녀는 빚쟁이가 하느님이었다.
“어머님께서….”
도현의 어머니에 대한 얘기는 거의 들어보지 못한 송선호였다. 그다지 험한 말을 쓴 것도 아닌데 어쩐지 그 발언에 긴장이 되었다. 언제 뵐 수 있을지, 아니, 뵐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저 한 문장만으로도 엄청난 사전대비가 필요할 것 같은 분이라는 생각이….
“왜요?”
로웰도 도현의 어머니가 어떤 분일지 궁금했다. 도현의 어머니라면 분명히 아름답고, 고혹미가 넘치는 미모의 여성일 것이다. 도현은 어머니의 말씀을 생각나는 대로 전했다.
“전에 바하마에서 말했던 <남자는 7점론>이랑 비슷해요. 아버지, 친형제, 만나본 남친들, 주위 남자들이 자신을 항상 2등 시민으로 대하니까 거기에 익숙해서 좋은 대접을 받는 여주한테는 현실감 있게 감정이입이 안 되는 거예요.”
“아니… 우리 아람이도 열심히 혼자 벌어먹는 2030세댄데?”
로웰은 그렇게 자신의 작품을 방어했다.
“그것보다도 세상의 남자들과 여자인 자신과의 관계성이랄까… 내심 그래도 자기 주변 남자들보다는 괜찮은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욕망은 있는데 또 그런 남자가 정상적으로 날 좋아한다는 건 현실감이 들지 않고. 그러니까 차라리 그나마 본인들에게 현실성이 있는 나쁜 남자에 외모와 돈이라는 옵션을 붙인 폭력적인 남자가 협박이나 폭력 같은 강압적인 방식으로 여주에게 집착하는 걸 보면서 대리만족을 하는 거죠. 유니콘이 자길 사랑한다는 것보다 그게 더 감정이입이 잘 되는 거예요.”
로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어머니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몇 살 때?”
“음… 12살 땐가.”
“와… 어머니께서 교육을 아주 확실하게….”
로웰이 감탄을 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덧붙여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남자들의 판타지를 스스로 내재화한 것도 크다고 생각해요. 욕망의 대상이 되는 판타지밖에 접해보지 않았으니 욕망의 주체가 되는 판타지는 익숙하지 않은 거죠.”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리고 도현은 계속해서 진지하게 작품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로웰과 송선호에게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남주들을 좀 폭력적으로 만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새 남주를 하나 더 투입해볼까요? 폭력적인?”
빚을 갚는데 혈안이 된 여자는 생각의 방향이 산으로 가고 있었다. 로웰과 송선호가 말렸다.
“그럼 우리 작품 어그러져요, 작가님. 잠깐 생각 좀 같이해봅시다.”
“맞습니다. 일단 지금까지 매출 및 독자 증가량 추이와 그때그때 증가 요인을 분석한 표입니다.”
그리고 송선호가 약간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사실 우리의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그러자 여자 둘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홀로그램으로 답을 띄웠다. 그걸 보자 지구방위대는 아! 하고 깨달음이 온 얼굴로 곧바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리고는 집으로 곧장 돌아가 셋이서 오랜만에 촬영세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결국 22세기 여성이 원하는 것도 ‘섹스’라는 것이다.
여자들은 섹스를 원하고 있었다. 항상 원하고 있다. 매시 매분 생각했다. 남자들도 그렇다고들 한다. 그런데 왜 여전히 수요와 공급의 미스 매치가 생기느냐. 도대체 여자들이 원하는 ‘그’ 섹스가 무엇이냐.
바로 현실 남자들이 그들에게 절대 주지 못했고, 주지 못하고, 주지 못할, 황홀하고 짜릿하고 노골적인, 7점을 가장한 하층민 남자가 아니라, 체념하고 만날 수밖에 없는 비슷한 수준의 남자가 아니라, 바로 세상에 단 몇 명밖에 존재하지 않을 최고의 남자와의 섹스였다.
22세기에도 억압되어 있는 여성들의 성적 욕구가 세기적 분란을 만들기 전에 우리 지구방위대가 세상을 지키기 위하여 내민 카드가 바로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 이 작품이지 않았던가! 대중의 광범위한 정신병적 욕구를 따라가느라 대의를 잃느니 차라리 작품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이 맞다. 송선호의 나이스 어시스턴스다.
“맞아요…. 우리가 요새 스토리 전개하느라 본분을 잊었어요.”
도현이 그렇게 반성했다. 로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우리의 본분은 여성향 19금 금자탑이었다는 걸 깜빡했네요.”
로웰도 반성했다.
“대중적인 체위는 이미 3D 모델까지 다 있어서 안심하고 있었어요. 제가 안일했습니다. 언제나 더 야한 자세는 존재하는 법인데…!”
“저도 요즘 매너리즘에 빠져서 중요한 장면들을 너무 대충대충 떼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요새 안한 지 너~~무 오래돼서 그런지 더 그런 것 같고.”
도현이 그렇게 덧붙여 말하자 송선호가 대놓고 움찔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가 어떤 얼굴로 그녀를 보든지 상관없이 아주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도현이었다. 로웰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예 못하거나, 해도 만족 못 하는 여자들을 위한 작품이라구요. 작가님처럼 깨끗하고 쩌는 성생활 하는 여자의 경험담 넣어봤자 여자들은 이해도 못 하고 좋은지도 몰라요.”
“아, 그건 확실히… 난 남자들만 그런 줄 알았는데 여자들도 삽입섹스에 엄청 집착하더라구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
그냥 내가 하는 것처럼 하는 게 훨씬 기분도 좋고 100% 안전한데. 로웰은 그걸 왜 모르냐는 태도로 대꾸했다.
“여자들이 섹스에서 주도권이 없으니까 그렇죠. 남자 머리채 잡고 자기 것만 빨게 할 만한 능력있는 여자들이 세상 대다수였으면 우리는 작품 가지고 돈 못 벌어요. 본인들은 남자한테 삽입 당하는 것 외의 섹스는 못하는데 그런 거 쓰면 약 올리는 것밖에 더 되겠어요? 몇 십 년짜리 욕구불만에 찬 밥 더운 밥도 가릴 처지가 아닐 거고.”
로웰이 그렇게 말했다. 일리가 있었다. 도현이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아… 그럼 여기서 더 금욕을 해야지 뭔가 떠오르는 건가….”
도현이 후욱 하고 한숨을 크게 쉬었다. 송선호는 두 여자의 적나라한 대화를 들으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제기랄….’
만약 하게 된다면 그녀에게 머리채를 잡힌다는 말인가. 그런 식으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데도 아주 생생하게 상상되었다. 그녀가 송선호의 머리채를 붙잡고 그의 얼굴 위에 올라타는… 송선호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기분이 몹시 이상해진다….
도현은 잠깐 더 생각을 하다가 멀티스크린에다 생각나는 대로 금욕에 따른 부작용과 깨달음(?)에 대해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디바이스로 전화를 걸었다.
“네, 다니엘 씨. 어디에요? 오늘 늦어요?”
일단 당장 필요한 것은 다니엘 스톤하츠다. 그는 도현과 로웰의 작품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의 남자 주인공, 세한 로마노프의 모델이었다.
자학, 공연음란, 불면, 공황장애 등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는 주인공 아람 첸에게 점점 끌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해 화를 내거나 꾸짖으면 묘하게 안도감이 드는데도 동시에 그녀가 자신을 이해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녀와 하나가 되고 싶다고 바라지만 동시에 그녀에게 거부 당할까 봐 무섭다.
그리고 세한 로마노프에 이어 등장한 두 번째 남자 주인공, 세스 블랑은 천재 소드마스터로 특이하게도 용병 시장에 팔려간 적도 없는 건강한 정신과 뛰어난 육체미를 가진 남자였다. 당연히 미르 킹쉴드가 모델이다. 여자관계는 복잡하다. 그는 청순하고 올바른 캔디형 캐릭터인 아람 첸에게 첫눈에 반해(이런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그녀에게 명렬한 육탄공세 중이다. 세한 로마노프가 은근히 열등감을 느끼는 상대다.
세 번째 남주는 아람 첸의 직장 선배이자 상사로 그녀가 일하는 미디어 회사 <뉴 제너레이션>의 상속자이자 편집장, 시재헌이다. 상류층 출신의 일벌레이고 츤데레 캐릭터다.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지만 상사인 자신이 그녀에게 호감을 표하는 것이 그녀를 곤란하게 할까 봐 고민하며 그녀에게 마음 한 번 표현하지 못하는 순애보 캐릭터다.
세한 로마노프의 방황은 아람 첸에게 도미넌트로서의 본능을 일깨웠다. 그녀에게 사회 상식을 배운다는 미명하에 벌써 여러 번 조교 당했다. 그러다 어느 날 클럽 홈구장에서 인터뷰를 하다가 세한이 폭력성과 잔인함을 드러내자 아람에게 그 자리에서 바로 조교를 받고 그것을 세스 블랑에게 들키게 된다.
항상 올곧고 바른 그녀의 모습에 반했던 세스 블랑은 그런 아람 첸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자신의 환상을 깬 그녀에게 화를 낸다. 아람은 처음엔 그의 말을 수긍해주다가 그가 점점 선을 넘는 발언을 하자 저도 모르게 그를 무릎 꿇리고 중요 부위를 발로 짓밟으며 라이딩 크롭으로 그의 뺨을 세게 때려 그의 잘못을 꾸짖는다. 세스 블랑은 자신이 그런 식으로 여자한테 기를 눌렸다는 사실에 충격에 빠져 한동안 그녀에게서 받은 굴욕을 잊지 못하나 한 번 참교육(?)을 받는 남자는 그녀의 손길 또한 잊지 못하게 되는데….
“일단 시재헌이랑 서비스샷 좀 생각해볼까요? 재헌이랑 제발 한 번만이라도 붙여달라는 요청도 꽤 많은데. 소설판에 서비스 삽화로 넣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로웰이 그렇게 말하자 통화를 끝낸 도현이 고민했다. 아직 스토리상 시재헌이 비중 있게 나오려면 좀….
“음….”
서비스 삽화 볼려고 소설을 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만큼 로웰 리의 그림은 예쁘고 섹시했으니까. 그리고 두 여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송선호는 대놓고 시선을 피했다.
“저는 좀….”
“이제 와서 왜 그래?”
휴가를 얻기 위해 비축분을 탈탈 턴 지구방위대였다. 촬영을 하면 로웰이 바로 트레이싱 수준으로 그림을 그려서 어시에게 채색과 배경을 맡길 것이다. 로웰은 벌써 다음 주 연재분의 칸을 재배치해서 흐뭇한(?) 장면을 끼워넣기 위해 시화를 그려 넣고 있었다. 그 후 본편보다 더욱 흐뭇한(?) 예고장면을 구상했다. 도현은 그걸 훔쳐보면서 송선호를 가져(?)왔다.
“앗. 그 포즈 좋네요. 소설에도 넣어야겠다.”
“야… 난 좀….”
도현은 시화를 보며 송선호를 밀어 카우치에 걸터앉게 하고 그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넣어 벌리게 했다. 송선호의 얼굴이 하얘졌다.
“야… 진짜 나는….”
“이렇게 맞아?”
그러면서 도현이 다른 발을 송선호의 엉덩이 옆에 올리고 그의 넥타이를 양복에서 살짝 빼서 잡았다. 송선호는 두 손바닥을 그녀에게 내밀며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 라는 자세를 취했다.
“작가님, 죄송하지만 제가 좀….”
“선생님, 이 자세 높이가 안 맞아요. 너무 우스꽝스럽지 않아요?”
도현이 그렇게 말하자 로웰이 스크린에서 고개를 들고 그들을 살펴보았다.
“엇, 그러네요. 카우치가 생각보다 높구나…. 송 편집장을 바닥에 꿇려보시죠.”
“일어나, 송선호.”
“작가님… 진짜 저는….”
“아, 진짜. 협조 좀 해. 네가 이러자며?”
“아뇨… 제가 이러자는 게 아니라 작품을….”
도현도 멀티스크린을 띄운 채 열띤 집필 중이었다. 송선호는 분위기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도현이 조신하게 오므린 송선호의 탄탄한 허벅지 사이에 발을 넣어 다시 양쪽으로 쫘악 벌렸다. 도현은 힐끗힐끗 아래를 보면서 그와 자신의 자세를 조정했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머리채를 잡혀(?) 그녀의 거기에 입술이 아주 가까운 포즈였다. 송선호의 얼굴이 파래졌다. 도현이 약간 더 다리를 벌리며 포즈를 잡아 그의 넥타이를 한 번 잡아봤다가 고개를 갸웃하곤 고개를 돌리고 있는 그의 턱을 검지로 스윽 쓰다듬어 올렸다. 송선호는 저절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그다음엔 다시 그녀의 거기에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윽… 젠장…! 진짜 싫어. 안 돼. 하지 말라니까!”
그녀가 몸을 더 가까이할 태세를 취하자 송선호가 기겁했다. 로웰이 얼른 카메라로 사진을 찰칵 찍었다.
“오케이. 서비스 삽화는 이걸로….”
트레이싱 프로그램을 이용해 벌써 선을 다 따고 그 위에 슥슥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로웰이다. 도현은 송선호를 놔주면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참나… 네 거 만지는 것도 아닌데. 나 사랑한다며? 나 안 만지고 싶어?”
“…일하는 중입니다, 작가님.”
송선호는 그렇게 말하며 도현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도현은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자신을 받아달라며 달려왔던 송선호는 그날 이후 도현이 손가락 하나라도 대려고 하면 멋모르는 숫총각처럼 기겁했다. 다른 남자 둘과 다르게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미 양손이 넘치는 도현은 적극적이지 않은 남자까지 관리하기가 힘들었다. 왜 저러나 싶다가도 까먹게 된달까….
그렇게 두 여자 다 작업에 몰두했고 몇 시간 뒤 다니엘 스톤하츠와 미르 킹쉴드가 시차를 두고 집에 돌아왔다. 둘 다 TFC 연맹 및 엘 드라카 위원회에서 주최하는 <올해의 선수> 시상식에 참여하고 오는 길이었다. 이틀 전에 스위스로 가서 계속 있다가 돌아온 것이다.
“누가 받았어요?”
아직 확인을 못 한 로웰이 그렇게 묻자 다니엘이 답했다.
“신태호가 받았습니다.”
“오오! 역시!”
로웰이 기뻐했다. 도현은 앗 하면서 미르의 팔을 잡았다.
“벗지 마요.”
“응? 왜?”
드물게 다니엘과 미르 둘 다 슈트를 입고 있었다. 송선호만큼 싹 다 갖춘 복장은 아니었지만, 역시 남자의 전투복. 둘 다 잘 어울렸다.
“슈트에 대해서 조사 좀 하고 한번 특집으로 적어야겠다….”
도현은 남자 둘을 요리조리 보며 그들이 입은 슈트 브랜드도 확인하고 기록했다. 도현의 앞에 마네킹처럼 서 있게 된 두 남자는 거실의 상태를 보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었다.
“사진은 이제 필요 없으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니엘이 물었다.
“저희가 비축분도 모자라고… 특히 선생님은 만화라서 이제 하루하루가 마감이에요. 그림 빨리 그리시게요. 그리고 자세도 조금만 더 특이한 거 찍어보게요.”
도현은 생각을 멀티스크린에 정리하느라 정신이 팔려 비전문가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했다. 로웰이 덧붙였다.
“블랑이 전에 아람이한테 당한 이후로 혼자 상상하거나 꿈을 꾸는 장면으로 그렇고 그런 거 넣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다음 화에서는 로마노프랑 다시 조교 플레이.”
역시나 막 들어온 두 남자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다니엘은 이제 슬슬 작품을 읽어보기 시작하는 중이고 미르는 사놓고 야한 장면만 훑어보고 끝이었다.
“네. 그럼 미르부터 이리 와요.”
“오.”
미르는 좋아했다. 그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게, 집에 들어온 지 벌써 한 달이 넘게 지났지만 도현과 잠자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다퉜던 것 때문에 요새 평범한 스킨십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사진을 찍으면 어쨌든 그녀를 만질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싸웠거나 말거나 그건 그거고 만질 수 있을 땐 만져야지.’
그게 이득이다. 미르는 얼른 도현을 끌어안았다. 아직 다투고 있는 상황이라 도현은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어떻게 할까요, 선생님?”
“일단 이거요.”
로웰은 도현의 멀티스크린으로 대충 그린 시화를 보내주었다. 도현이 앗 하고 로웰을 돌아보았다.
“너무 매니악해요.”
“일단 해봅시다.”
“아… 이거 괜찮을까.”
미르가 그녀의 멀티스크린을 훔쳐보았다. 도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미르, 이거 가능하겠어요?”
“가능하긴 한데… 옷은 좀 벗어야겠는데?”
“진짜요? 해봤어요?”
미르 킹쉴드는 양복을 벗어서 카우치에 던지고 넥타이를 풀었다. 그 모습은 도현과 로웰, 어시 둘까지 아주 흡족하게 했다. 원래 멋진 남자가 넥타이를 푸는 모습은 그가 팬티를 벗는 것보다 더 섹시한 법이다.
“그런 불편한 걸 내가 왜 해줘?”
미르 킹쉴드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식으로 그렇게 답했다. 그는 셔츠 단추도 가슴 가운데까지 풀고 팔도 걷었다. 그리곤 단박에 자세를 잡았다.
“이러라는 거 아냐?”
“네. 안 무겁겠어요?”
“철근 얹어도 돼. 올라와.”
그렇게 말하자 도현이 약간 갸웃했다.
“안 힘들면 그것도 의미가 없는데.”
“힘들어야 하는 거야?”
미르가 어이가 없어 웃었다. 그는 일명 <로데오 체위>의 황소가 되어 있었다. 바로 누운 자세에서 팔과 다리로 몸을 최대한 띄운 모양이었다. 도현이 그의 아랫배에 올라탔다. 생각보다 단단하고 안정감이 있었다.
“진짜 안 힘들어요?”
“잠깐은 상관없어. 굳이 버티라면 더 버틸 수도 있고.”
원래 이런 건 힘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몸무게를 견디는 게 힘든 것이다. 하지만 미르 킹쉴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작가님, 위치 더 정확히요.”
홀로그램으로 생성된 3D 모델을 보며 로웰이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좀 더 아래로 내려가서 미르 킹쉴드의 딱 그 위에 앉았다. 그녀가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멀티스크린을 보며 허리를 세우며 마치 오르가즘을 느끼는 여자처럼 고개를 살짝 들었다. 로웰의 작업을 단순화시키기 위해서다. 그러자 미르가 약간 신음소리를 냈다.
“야… 으… 내가 요새 너 때문에….”
미르 킹쉴드야말로 요새 다시없을 금욕 중이었다. 그가 사회로 돌아오고 나서는 시즌 전 합숙 때가 아니고서야 여자 없이 사흘 밤을 지나 본 적이 없었다. 근데 벌써 2달이 넘게 그를 기다리게 하고 있는 도현 킬스버그다. 금방은 그녀랑 스킨십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죽을 것 같다.
“근데 진짜 미르 힘 세다…. 뛰어도 괜찮을 거 같아.”
미르의 근육은 도현이 올라타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도현이 양 허벅지에 힘을 주고 들썩 엉덩이를 앞뒤로 움직이자 미르가 헉 하고 한 팔로 균형을 유지(대단)하고 도현의 다리를 꽉 잡았다.
그는 전체적으로 다 그랬지만 거기도 질량감이 어마어마했다. 도현도 오랜 금욕 중이라 저도 모르게 스윽 또 눌러버리고 말았다. 이런 남자랑 몸을 맞대고 있으면서 아무 생각도 안 들면 그건 여자가 아니다….
“하지 마!”
미르가 이를 악 물며 소리치자 도현이 깜짝 놀라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이 벌겠다.
“아니, 이 남자들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야…. 어디서 성교육 받고 왔어요?”
도현이 미르 킹쉴드와 송선호를 번갈아 보았다. 송선호는 그녀의 눈길을 피했고 미르는 아윽 하면서 그녀를 다시 내렸다. 그는 흥분했다. 그는 바닥에 앉은 채로 괴로워하며 도현의 허리를 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으윽… 젠장. 킬스버그… 진짜 좀 하자….”
“미르….”
도현은 그런 그를 보면서 약간 의아한 얼굴을 했다.
“설마 이 정도로… 조루는 아니죠?”
이런 몸을 가진 남자가… 도현이 정말 싫다~ 하는 얼굴로 자기를 보자 미르가 버럭 화를 냈다.
“뭔 소리야! 요새 제대로 못 빼서 그렇다고. 윽. 씨발….”
“그게 그 말….”
미르가 노려보자 얼른 그의 무릎에서 내려와 버렸다. 미르 킹쉴드는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괜찮아요?”
“네. 이거저거 섞어서 하면 멋진 블랑의 망상 세트가 될 거 같습니다.”
“그림에서는 좀 묶어야 할 것 같아요. 보니까 금방 그 정도 자세 유지하는 건 일도 아닌 거 같은데. 벌이 안 되잖아요, 그럼.”
“그렇죠. 벌이 되어야 하죠.”
트레이싱 위에 볼개그, 무릎과 팔꿈치 묶기 등이 추가되었다.
“음… 그럼.”
두 사람은 다니엘 스톤하츠를 보았다. 어시 중 하나가 의견을 냈다.
“이거랑 이거랑 이거 하고 앞에서 보게만 하는 건 어때요?”
“어?! 천잰데….”
로웰이 좋은 아이디어를 낸 어시의 그림을 보며 말했다. 의견을 낸 어시 윤지호와 다른 어시 신재인은 박스 안을 뒤적거리며 물건을 찾았다.
“…….”
다니엘은 자신의 앞에 온갖 구속구를 들고 서 있는 여자 둘을 잠깐 봤다가 도현을 돌아보았다. 도현은 그를 구해줄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어 보였다.
“하세요.”
그녀는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다니엘을 보면서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다니엘은 정색했다.
“도현 씨가 해주시는 게 아니면 싫습니다.”
원래 이런 건 주인님(?)이 아닌 사람이 해주면 불쾌할 뿐이다. 다니엘의 말에 도현이 눈을 한 번 깜박했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어시에게서 벨트를 받았다.
“다니엘 씨도 참….”
이유는 모르겠지만 도현은 그의 말에 살짝 감동받은 것 같았다. 그녀는 어시 윤지호에게서 벨트를 받고 그의 양복 단추를 풀었다.
“등 뒤로 묶으려면 풀어야 할 거예요.”
다니엘의 귀가 약간 빨개졌다. 그녀가 자신이 입고 있는 옷 단추를 풀고 있었다. 왜인지 야하게만 느껴진다.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다니엘 역시 지니 호에서의 그 일이 있고 나서는 가벼운 키스나 포옹 이상의 진도를 못 나가고 있었다. 그날 같은 욕망이 언제 또 튀어나올지 모른다. 만약 단 한 번이라도 그 욕망에 저버린다면 이 관계가 끝나는 것뿐만 아니라 도현에게도 큰 상처를 줄지 모른다.
“…잠시만.”
도현이 자신의 팔을 묶기 전에 다니엘은 그녀에게서 벨트를 건네받았다. 여성용 벨트였다. 그는 그 벨트뿐만 아니라 다른 구속구까지 전부 마도 주문을 걸었다. 스스로 건 것이니 끝까지 풀 수 없지는 않겠지만 시간은 벌어줄 수 있을 것이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마음만 먹는다면 세상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남자였다. 그는 혼자서 군대 단위의 몬스터도 상대할 수 있는 자다. 그의 미완성 중력 마법으로도 메트로서울 정도의 거대 도시를 흔적도 없이 소멸시켜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 그가 세상에도, 여자에도, 생사에도 무감했던 건,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남자라면 이런 힘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인간성을 회복하지 않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자신은 그녀의 곁에 있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곁에 있고 싶다.’
다니엘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더 꽉… 묶어 주십시오.”
“피 안 통하지 않겠어요?”
팔을 벨트로 묶고 아이리쉬 수갑을 채워 무릎을 꿇리고는 그의 허벅지와 종아리도 묶었다. 발목과 그의 아이리쉬 수갑을 끈으로 연결했다. 불편하긴 한지 그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가 그가 한 가지를 깨닫고는 중얼거렸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면 광역 마법은 못 쓰겠군….”
“네?”
“제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주시겠습니까? 훈련 때문에 감각이 명확하지 않을 때는 절대 마법을 쓰지 않습니다. 저번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다니엘이 심각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도현이 웃었다.
“안 보면 의미가 없는 건데요?”
“네?”
그러면서 도현이 다니엘의 앞에 섰다. 다니엘이 깜짝 놀라 움찔할 정도로 그의 얼굴과 그녀의 아랫배가 가까웠다. 하지만 옴짝달싹도 못 하게 묶인지라 단 1cm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그곳과 다니엘의 입술이 주먹 하나 들어갈까 말까 할 정도로 가까웠다.
“이 정도면 괜찮을까요?”
“조금만 뒤로요. 아니, 그거보단 앞으로. 네. 아니, 좀만 오른쪽으로….”
그렇게 두 여자가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 같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조금 더 내밀어 그녀의 그곳에 코를 들이댈 것 같았다. 마치 전의 미르 킹쉴드처럼 말이다. 도현은 그걸 굉장히 불쾌해했었다.
이미 다니엘은 저번에 그녀의 향기를 잠깐 맡은 적이 있었다. 그녀에게서 어떤 향기가 나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얇은 속옷 한 장을 사이로 그녀의 다리 사이에 코와 입을 묻었었다.
‘으윽….’
도현에게선 그런 향기가 나는 것이다.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흥분과 욕망이 번뜩였다. 그때 그녀가 다니엘의 머리를 짓눌러 핥게 하려고 했던 거기를, 지금 바로 눈앞에 보이는 그곳을 강하게 깨물고 싶었다.
그녀가 비명을 지를 만큼 세게.
“흥, 꼬라지 하고는.”
그때 미르 킹쉴드가 옷을 편하게 갈아입고 2층에서 내려왔다. 그의 기준에서 편한 옷이란 아마 헐벗는 것인 모양이다. 그의 아래위 사이즈를 생각해보자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는 다니엘 스톤하츠가 꽁꽁 묶인 걸 보고 비웃었다. 언제나 무뚝뚝하면서도 도를 닦는 사람처럼 맑은 얼굴을 가진 다니엘이었으나 지금은 어두침침한 눈밑을 하고 어쩐지 전체적으로 색이 돈다. 도현은 또 이상한 빛을 내는 그의 눈동자와 어두워 보이는 그의 표정에, 이상하게 조금 끌림을 느꼈다. 아까 미르랑 좀 문질러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자세 때문에? 이런 상황 때문에?
“작가님, 손 최~대한 예쁘게 해서 한다(?)는 느낌으로 거기에 손가락 대봐요.”
근데 딱 그때 메가폰을 잡은 로웰이 그렇게 주문하자 몸을 움찔했다. 도현의 뺨이 약간 붉어지고 그녀는 인상을 썼다.
‘진짜 말 안 들어, 다.’
도현은 그렇게 속으로 불평했다. 그녀를 기분 좋게 해주지도 않으면서 요구만 잔뜩 많은 이 남자들 때문이다. 그런 주제에 스펙만 좋아서 딴 남자는 눈에 안 차게 만들고.
그렇게까지 생각했더니 진짜 좀 젖는 거 같았다.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약간 창피하기도 했다. 손가락을 딱 제자리에 두고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떨어져 서 있는 남자 둘을 힐끗 보았다. 그 둘의 태도는 서로 달랐지만 섹시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한 도현을 관음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미르 킹쉴드는 대놓고 입맛을 다시면서 보고 있었고 송선호는 안경을 추켜 올리면서 스크린을 보는 척했지만 결국 도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둘은 저런 식으로라도 도현을 즐기는데 도현에게 그들은 세워놔서 예쁜 것 말고는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도현은 마지막으로 다니엘 스톤하츠를 내려다보았다. 무덤덤하고 숙맥같은 평소와는 다르게 전체적으로 위험한 계통의 섹시함이 흘렀다. 그는 괴로운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는 도현의 손가락, 정확하게는 그 부위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발기한 상태였다. 그마저도, 이렇게 묶여서 꼼짝도 못 하는 상태로도 도현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도현은 화가 확 나서 동시에 화악 흥분했다.
“다 됐어요? 이제 필요한 건 다 찍은 거예요?”
도현은 로웰에게 물었다. 로웰이 대꾸했다.
“스톤하츠 씨랑은 그거 하나로 됐구요. 송 편집장이랑 하나만 더….”
“그럼 저 타임이요!”
도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니엘을 풀어주지도 않고 갑자기 부엌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고 제일 아랫칸을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내고는 거실이 아니라 자기 침실로 걸어갔다. 남자 셋의 시선이 그녀를 그대로 따라갔다. 로웰이 엇, 하고 뭔일인지 깨닫고 물었다.
“제 거 아니죠?”
“선생님 건 금색이잖아요. 검은색은 제 거!”
“네~”
로웰은 트레이싱을 손질하여 어시에게 넘겼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풀어달라는 말도 하지 않고 잠깐 눈을 감고 심호흡 중이었다. 미르는 뭔가 싶어서 로웰에게 물었다.
“왜 갑자기 방에 간 거야, 킬스버그? 뭔데 냉장고에서 뭘 들고 가?”
그러자 로웰은 방금 포즈의 다른 각도 트레이싱을 손보며 빠르게 대답했다.
“우머나이저라고 자위기군데, 차갑게 해서 하면 더 기분 좋다고 그러더라구요.”
“…….”
“…….”
“…….”
남자 셋은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다가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
제일 먼저 움직인 것은 미르 킹쉴드였다.
“킬스버그! 내가 해줄게! 내가! 어? 왜 나 놔두고 그런 이상한 기계를 써! 내가 있는데! 킬스버그~ 문 좀 열어줘! 제발!!”
그는 도현의 침실 문을 열려고 했지만 잠겨서 열리지 않았다. 물론 그는 문뿐만 아니라 벽도 부수고 들어갈 수 있는 남자였으나 그런 짓을 했다간 바로 쫓겨날 것이다. 그는 도현의 문을 두드리며 최대한 설득력 있는 어조로 외쳤다.
“나 잘해! 잘 한다니까! 너한테 한 소리 듣고 내가 안 좋은 습관 싹 고쳤다고! 응? 어? 듣고 있어? 문 열어줘!”
그러자 안에서 그녀가 소리를 쳤다.
“아!! 시끄러우니까 저리 가요!!”
그때 다니엘 스톤하츠는 정신을 차렸다. 바로 구속을 끊어내고 도현에게 달려가려고 했으나 자기가 건 마도 주문 때문에 단박에 구속을 풀지 못했다. 끊어내지도 불태우지도 못했다. 아까 생각나는 대로 방마 주문을 다 걸어놨기 때문이다.
“아윽….”
그는 미르 킹쉴드 같은 괴력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몸부림을 칠수록 더 괴로웠다. 정신을 집중하고 겨우 주문을 해제하자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그리고 그도 얼른 문으로 달려갔다. 어느새 음침한 욕망은 저 멀리 사라지고 사춘기 소년처럼 흥분해서는 도현에게 애원했다.
“도현 씨! 이번엔 진짜 잘 할 수 있습니다! 진짭니다! 믿어 주십시오! 뭐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다 찾아봤습니다! 도현 씨! 도현 씨!”
그녀가 자신 때문에 흥분했다고 생각하니 사랑스러움이 마구 몰려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남자 둘이 쿵쿵 문을 두드리고 있으니 어떤 여자가 집중(?)할 수 있겠는가. 도현이 문을 확 열자 남자 둘의 얼굴이 순간 환해졌다.
“입 다물고 가서 앉아 있어요. 한 번만 더 문 두드리면 내가 쫓아낼 거야.”
하지만 그녀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카우치를 가리켰다. 도현이 이런 목소리를 내는 건 처음 들었다. 그녀는 두 남자에게 경고하고는 문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송선호를 한 번 봤다가 문을 쾅 닫았다. 미르와 다니엘은 깜짝 놀라서 문에서 멀찍이 손을 떼고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 두 남자는 또 서로 방식은 달랐지만 똑같이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아, 왜! 아, 왜! 아, 왜!! 아, 왜애!!!!’
‘어떻게 하면 되는지 책을 열 권이나 찾아봤습니다, 도현 씨…! 이번엔 진짜 잘할 수 있습니다! 진짜!’
그들에게 저 문을 여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문을 열기는커녕 소리라도 잘못 내면 쫓겨난다는 거 아닌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진짜 기분 좋게 해줄 수 있는데…! 하지만 마음속으로만 외칠 수밖에 없었다.
20분쯤 지나니 그녀가 나왔다. 들어가기 전보다 더 기분이 나빠 보이는 얼굴이었다. 만족스럽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미르와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드물게 둘이서 얌전히 카우치에 앉아 있었다. 기다려! 라는 명령을 들은 멍청하고 큰 고양이과 맹수와 늘씬하고 멋진 사냥개 같았다.
“송선호랑 어떤 거요?”
“송 편집장이랑은 자료가 거의 없어서요. 기본적인 것도 없어서… 일단 이번엔 간단하게 송 편집장이 앉고 작가님이 마주 안는 식으로, 서로 얼굴 바라보구요.”
그러자 송선호가 딱딱한 태도로 또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정말 저는….”
그러자 도현과 로웰이 서로의 눈을 한 번 봤다가 송선호를 다시 보았다.
“예전엔 게인 줄 알았죠, 작가님.”
“그런 말도 했었죠, 선생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것들이!”
송선호가 화를 냈다. 그는 마뜩잖은 얼굴로 등이 없는 넓은 촬영용 의자에 앉았다. 도현이 다가가서 그의 안경을 살짝 잡았다. 송선호는 티 나지 않게 꿀꺽 침을 삼켰다. 사실 그는 지금 엄청 긴장하고 있었다.
‘아으… 씨발…. 뭐야, 이게. 젠장. 지금… 얘 혼자서 하고 나온 거라는 거지? 그런 거지? 내가 지금 어떻게….’
어떻게 했을지 상상이 안 갔다. 아까 들고 들어간 게 어떤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씨발… 어떤 남자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가 자위를 했다는데 차분할 수 있겠는가. 다른 남자들만 없었다면 송선호도 주저하다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좀 더 편하게 앉아.”
송선호는 그녀가 평소보다 더 아찔하게 느껴졌다. 향기로운 체취도 짙어진 것 같았다. 착각일까.
그녀는 욕망에 솔직하고 자신이 가진 힘을 숨기지 않았다. 여성이라는 힘. 그것도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힘.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힘. 그녀는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의 힘을 휘두르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송선호는 그녀에게 휘둘리는 게 너무나 싫으면서도 자신을 휘두르는 그녀가 좋았다. 이 힘을 온전히 그를 위해서 써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이런 그녀를 완전히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그녀가 나를 선택하고 나만을 사랑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상상하곤 했다.
그녀는 그의 안경을 벗기면서 그의 무릎 위에 올라탔다.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 뒤에 시간 있어? 퇴근 언제야?”
“왜….”
도현이 자세를 잡아 그와 아랫배를 지그시 붙였다. 그가 살짝 움찔했다. 그의 흠잡을 데 없이 잘생긴 얼굴이 불안, 초조, 긴장으로 약간 찌푸려져 있었다. 지금까지 그토록 좋아하는 여자가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그냥 좋아하고 즐기면 될 텐데. 도현은 그의 목을 감싸며 그의 턱을 엄지로 스윽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와 눈을 마주치며 요청한 자세를 바로 취했다.
“아니, 그냥… 오늘 둘이 밥이나 먹으러 갈까?”
“…!”
데이트 신청인가? 그녀가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한 것인가! 이런 건 처음이다. 송선호는 깜짝 놀라서 입을 좀 벌리고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퇴근은 5시…인데.”
“그럼 6시쯤 만날까? 아는 레스토랑 있어? 너 그런 거 잘 알 거 같아.”
“어… 음… 뭐 먹고 싶은데?”
송선호의 손에 땀이 잡혔다. 그녀와 끌어안고 있는 것도 모자라 그녀가 먼저 데이트를 신청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그녀와 단둘이 밥을 먹는 건 거의 6년만이었다.
“음… 맛있는 거?”
“알았어…. 골라볼게. 6시에 데리러 오면 돼?”
“여기 말고 내가 가는 미용실로. 기억하지?”
“알았어.”
그리고 간단하게 사진을 몇 장 더 찍을 때의 송선호는 더 이상 군소리를 하지 않았다. 다니엘 스톤하츠와 미르 킹쉴드가 묘한 눈길로 노려보고 있는데도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그녀만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혹시나 자신의 마음을 눈치챌까 봐 단 한 번도 그러지 못했는데. 그녀에게 고백을 하고 나서도, 그녀에게 자신을 받아달라고 말하고 나서도 왠지 그녀가 비웃거나 놀릴까 봐 그럴 수가 없었는데.
사실 그가 항상 바라왔던 게 이런 것이 아니었던가. 그녀가 먼저… 조금이라도 먼저 다가와주는 것. 그를 남자로 봐주는 것.
끝나고 촬영 세트를 정리해준 송선호는 회사로 돌아갔다. 여자들은 전부 마감 때문에 입 다물고 모여 열심히 일했다. 다니엘은 명상원에 갔다. 미르는 도현을 자꾸 귀찮게 하다가 쫓겨났다.
“아… 끝.”
도현이 기지개를 켜며 그렇게 말했다.
“아! 좋겠다!”
로웰 및 어시들이 엄청 부러운 얼굴로 도현을 보았다. 애초에 비축된 분량도 만화판보다 훨씬 많았던 도현이었다. 회사 인트라넷에 마무리한 것을 올렸다. 송선호가 바로 확인을 하는지 처리 단계가 바뀌었다.
“죄송해요. 30분 정도면 저도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도현이 로웰과 어시들에게 다가갔다. 간단한 채색이나 인공지능 채색이 잘못된 부분을 판별하는 건 이제 도현도 잘했다.
“아니에요. 오랜만에 데이튼데 즐기고 오세요….”
로웰이 흑흑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나도 작가님이랑 놀고 싶은데.”
“마감 끝나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도현은 입을 옷과 악세서리, 구두를 챙기고 리니어카를 불러서 탔다. 자주 가던 스파에 가서 씻고 마사지 받았다. 자리를 옮겨 왁싱이나 손톱, 발톱까지 싹 관리를 받았고 옷을 입고 샵으로 내려와 머리 손질과 화장을 받았다.
“오랜만에 왔네? 요새 바쁘다며.”
헤어샵 디자이너가 도현의 머리를 가위로 살짝 다듬고 세팅을 해주며 물었다.
“그냥 평소랑 비슷해.”
“오늘 누구 만나?”
“송선호.”
“어머, 진짜? 자기 그 남자랑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항상 얘기하더니.”
“그랬는데, 어쩌다 보니까… 그러게.”
도현도 약간 웃겨서 그렇게 말했다. 그녀도 그와 이런 사이가 될 줄은 몰랐다. 애초부터 일을 통해 알게 된 남자라 서로 선을 긋고 만났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는 도현의 머리카락에 풍성하고 굵은 웨이브를 줘서 더 섹시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 남자가 가까이 있는데 정분이 안 나면 이상한 거지.”
“아니, 난 진짜 걔가 나 싫어하는 줄 알았다니까?”
“자기 같은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가 어딨어. 자기답지 않은 말이다?”
“걔랑 한 번만 얘기해보면 생각 달라질 걸. 보통 남자가 아니야.”
도현이 한숨을 섞어서 그렇게 말했다. 머리를 하는 동안 얼굴에 미용용 가습기와 냉풍기의 바람을 약하게 받고 있었다. 머리를 할 때 생기는 열 때문이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도현의 얼굴에 앰플을 듬뿍 발랐다. 금세 피부가 아주 촉촉해졌다. 머리를 다 하고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본격적으로 화장을 해줄 때도 디자이너는 옆에 걸터앉아 도현과 계속 얘기를 했다.
“왜? 난 너무 좋은데, 그런 남자. 잘나도 함부로 여자 안 후리고 다닐 것 같고. 뭔가 엄청 비쌀 것 같은 남자?”
송선호를 보는 여자들의 감상은 어쩐지 다들 비슷비슷한 것 같다. 어디서 쉽게 볼 수도 없는 비싼 남자.
‘하긴 그렇지… 잘생긴 남자도 있고 몸 좋은 남자도 찾으려면 찾을 순 있겠지만.’
돈과 클래스가 있는 남자야말로 보통 사람들은 꿈도 못 꾸는 남자다. 게다가 그 외모에 성격이니….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클래스보다 높은 클래스의 세상을 선망하곤 하지만, 그걸 단순히 돈의 차이라고 여긴다. 진정한 클래스의 차이는 사고방식의 차이다. 진정한 부유함은 가난에 대한 무지라고 하지 않던가. 애초에 가난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설사 스스로 상위 클래스에 들어갈 정도로 재산을 축적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온전히 그 클래스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이미 가난한 시절에 생성된 사고방식과 인간관계 때문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구든 능력만 있으면 돈을 번다지만 그 사고방식이나 부모 형제, 친구까지 바꾸는 것은 어렵다.
“너무 비싼 남자라서 문제야.”
도현이 말했다. 화장까지 다 되자 전신거울 앞에서 치장한 모습을 확인했다. 블랙에 각이 팍팍 져서 시크한 원피스였다. 오랜만에 짧은 기장이다. 가슴이 확 파였다. 왼쪽 손목엔 검은 가죽 시계와 다이아몬드 팔찌, 사파이어가 달린 백금팔찌를 했다. 오른쪽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목걸이도 하지 않았다. 휴가 때 약간 태운 것 덕분에 검은색 원피스가 더 섹시하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신발은 검은색 지미추를 신었다.
“오늘 입은 슈트랑 잘 어울리겠지? 너무 짧나….”
도현은 오늘 송선호가 입은 옷을 떠올려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디자이너가 대꾸했다.
“짧으면 짧을수록 더 좋아해.”
“음… 그럴까. 은근히 보수적이라서.”
“그런 남자가 더 좋아한다?”
“하하. 그건 그렇지.”
섀도우는 옅게 음영만 나게 하고 눈이 더 또렷하게 보이도록 얇게 아이라인을 강조했다. 그리고 짙고 긴 속눈썹이 돋보이게 마스카라를 많이 하고 빨간 립스틱을 발랐다. 검은색 퍼 코트를 어깨에 걸쳤다. 어차피 코트야 잠깐 찬 바람 쐴 때만 걸칠 거니까 싶어도 잘 어울리도록 신경을 썼다.
“오셨대요.”
직원이 알림을 받고 그렇게 말했다. 딱 6시였다. 어쩐지 더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 같다. 도현은 거울을 가만히 보면서 립스틱을 한 번 더 덧바르고 확인한 뒤 나갔다. 3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밖으로 나가니 송선호가 자기 차 앞에 서 있었다. 안경은 벗었고 셔츠는 갈아입은 것 같았다. 그러고 있으니 영화에서라도 튀어나온 것 같다. 사람들이 다 그를 쳐다보았다.
미르 킹쉴드도 자신이 돋보이도록 화려하게 꾸밀 줄 아는 남자였지만 송선호는 요란하지 않게 해도 격식이 있고 고급스럽게 꾸밀 줄 알았다.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하는지도 모르게 자연스럽고, 마치 타고난 것처럼 멋있게 말이다. 물론 타고 난 게 크지만. 도현은 그런 그를 잠깐 감상한 뒤 다가갔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그는 도현이 내미는 손을 자연스럽게 잡았다. 그리고는 좀 긴장하는 것 같았다. 그는 도현의 모습을 보더니 약간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예쁘네….”
“마음에 들어? 너무 짧을까 봐.”
도현이 자신의 엉덩이 양쪽을 번갈아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가 에스코트하듯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며 다시 말했다.
“예쁘다니까.”
그리고는 송선호는 시계를 잠깐 보았다.
“아직 배 안 고프지?”
“별로?”
빨리 차에 안 타면 안 될 것 같다. 춥다. 송선호도 그걸 알고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멀리 향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 해러드부터 갔다 갈까?”
송선호가 모른 척 그렇게 물었다. 도현이 눈을 딱 두 번 깜박이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하늘로 시선을 피했다. 도현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그녀의 사치를 힐난하던 그가 먼저 백화점을 가자고 하니 어이가 없어서 그런가. 도현은 그가 살짝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늘 기억해둔다, 진짜.”
“뭘.”
도현은 키득거리며 그의 뺨에 저도 모르게 입을 맞췄다가 앗, 하며 그의 뺨을 보았다.
“어떡해.”
“어…?”
사람들이 그들의 애정행각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송선호는 아까 도현이 데이트 신청을 먼저 했을 때부터 기분이 둥둥 떠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평소와 달리 영 빠릿빠릿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녀가 ‘여자로서’ 이렇게 자신을 ‘남자로’ 대해주니 그냥 주체할 수 없이 홀리는 기분이었다. 홀리고 있었다. 아는데도 홀린다. 홀려… 도현이 웃으면서 디바이스로 그의 얼굴을 찰칵 찍었다.
“왜….”
“아니, 너 뺨에 입술 자국 있는 게 너무 잘 어울려서.”
이렇게 깔끔하고 정돈된 남자에게 이런 건 뜻밖이라 더 섹시하다. 송선호는 자신의 뺨을 만졌다. 손에 그녀의 빨간 립스틱이 묻어나온다.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화려한 클러치에서 티슈를 꺼내 그의 뺨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차를 타고 해러드 백화점으로 향했다. 도현은 그냥 평소대로, 반은 시험 삼아 마음에 드는 걸 이것저것 골랐는데 그가 군소리 없이 짐꾼 노릇을 했다.
“이건 어때?”
“예뻐….”
“야, 다 예쁘다고 하면 어떡해? 골라야지.”
도현과 직원이 앞은 짧고 뒤는 길게 늘어지는 짙은 노란색 원피스를 하나, 같은 디자인의 군청색을 하나 들고 있었다. 허리를 갈색 벨트로 조여 여성스럽고 섹시한 스타일의 원피스였다.
“으음….”
어머니와의 쇼핑이나 다른 여자와의 쇼핑이야 그냥 예의를 지킨다는 느낌으로 얌전히 따라다니며 이런 질문에도 대충 답하곤 했지만 사랑스러운 자기 여자가 옷을 고르는데 그의 의견을 바라는 것은 어쩐지 기쁘기까지 했다.
“…그냥 둘 다 사.”
“아, 진짜.”
물론 송선호는 고를 수가 없었다. 둘 다 그녀에게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녀에게 저걸 입히고 봄에 벚꽃 구경을 가고 싶었다. 생각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렇게 명품관을 돌아다니다가 문득 송선호의 시선이 섹시한 속옷을 파는 가게에 멈추었다.
저번에 지니 호에서 그녀의 비키니야 잔뜩 봤지만… 아무리 모양이 비슷하다고 해도 수영복과 속옷은 엄연히 다른 법이다. 그녀가 안에 청순한 하얀 속옷을 입었을지 아니면 오늘 의상처럼 도발적인 것을 입었을지 궁금하다….
“왜? 마음에 드는 거 있어?”
도현이 고개를 빼서 그가 보는 가게를 쳐다보았다. 송선호는 시선을 확 돌렸다.
“아, 아니.”
그가 뭘 봤는지 안 도현이 ‘흐응~’ 소리를 내며 그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한 번 때렸다.
“음흉해~”
“네가 더 음흉해…!”
공공장소에서 도현에게 엉덩이를 한 대 맞자 그가 깜짝 놀라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기는 그를 아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큰 장소였다.
그리고 차 뒷좌석에 산 걸 잔뜩 쌓아두고 식사를 하러 갔다. 예약을 해둔 모양이었다. 도현이 지금껏 타본 엘리베이터 중 가장 크고 화려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오직 이 건물의 최상층에 위치한 레스토랑만 가는 VVIP 전용 엘리베이터였다.
“어딘데 이렇게….”
그녀는 고급 문화에 대해 제법 알았기 때문에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엄청 비싼 곳을 가는 구나, 라고 짐작하긴 했다. 그녀가 한창 돈이 있을 때 여행을 다니며 유럽이나 중동의 최고급 레스토랑은 몇 번 발도장 찍어 봤지만 그것마저도 거기의 회원이었던 남자를 사귀어서 가능했다. 그리고 22세기 고급 문화의 중심은 동아시아였다. 보통 북경, 상해, 메트로서울, 도쿄를 최고로 쳤다.
직원이 자연스럽게 도현의 코트를 챙겼다. 역시나 회원제 레스토랑이었다. 들어 본 적이 있는 곳이라 어딘지 알긴 알겠는데 도현도 한 번도 못 와 본 최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이런 데는 사진도 함부로 못 찍는 곳이다.
“와….”
인테리어부터가 어마어마했다. 천장은 샹들리에 대신에 별이 쏟아질 것 같은 천문돔을 만들어놓았다. 바깥의 야경과 천문돔이 이어지는데도 어색함이 하나 없었다.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다. 별과 야경이 반짝이는 보석 같다.
인공 폭포가 흐르는 커다란 일본식 모래 정원에는 투명한 인공 연못이 있었고 한 마리에 몇백만 원을 호가하는 화려한 관상용 물고기가 헤엄쳤다. 환한 조명을 아래에 두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환상을 구현한 것처럼 아름다웠다. 미끄러질 것만 같은 투명한 대리석 바닥은 이어붙인 틈도 없는 최고급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한 벌에 몇백에서 몇억까지 오가는 비싼 드레스를 입고 온몸을 보석으로 치장한 여자들과 역시나 비싼 가격대의 고급 정장을 입은 수컷 공작 같은 신사들이 미소를 띄운 얼굴에 느릿한 말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도현은 깜짝 놀라서 송선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런 덴 줄 알았으면 더 긴 거 입고 왔지!”
“왜? 너보다 더 짧은 거 입은 여자도 있는데?”
“아, 더 비싼 거 입었어야 했는데…. 보석이라도 더 하고 올 걸.”
손님 몇 명이 송선호를 알아보자 그가 눈인사를 했다. 천하의 도현도 긴장했다. 송선호의 손을 꽉 잡았다. 이런 곳은 정말 전세계의 최상류층에 속한 사람만이 올 수 있는 곳이었다. 유럽이나 두바이야 남의 나라니까 그러려니 했는데 여긴 도현이 실제 뉴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 뉴스에조차 안 나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너… 이런 데는 어떻게 오는 거야? 아무리 너희 집이 대단해도 조건 까다롭지 않아?”
“조건은 아직 좀 모자르긴 해. 나 우리 회사 부사장 달고 나니까 아버지가 꽂아줬어. 슬슬 미팅할 땐 이런 곳 쓰라고.”
“너 부사장 됐어? 벌써?”
“어. 우리 삼촌 지금 할머니한테 찍혔거든.”
직원이 안내해주는 대로 야경과 돔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로 가 앉았다. 그는 직원을 물러나게 하고 도현의 의자를 직접 빼주었다. 그리고 그는 직원이 빼주는 의자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이런 자리가 당일 예약이 돼?”
도현이 약간 무섭다는 듯이 눈만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송선호가 메뉴를 받으며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난 아직 못 하고… 할머니께 예약 좀 해달라고 부탁했어. 아버지도 당일은 안 되더라고.”
“와… 너네 할머니 한번 뵙고 싶다.”
도현이 감탄하며 그렇게 말했다. 곧 그녀는 허리를 펴고 표정을 단정하게 하고는 메뉴를 천천히 넘겨보았다. 금세 적응을 한 그녀를 보며 그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도현이 직원을 불러서 메뉴에 대해서 물었다. 직원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직접 요리를 하는 게 아닐 게 분명한데도 메뉴에 나오는 요리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였다. 미식에 대해서 까다로운 도현이라 재료를 약간 변경하고 송선호의 것까지 골라주고는 직원을 보냈다.
“나도 번다고 벌었는데… 항상 더 위가 있다는 게 신기해. 상상이랑 직접 접하는 건 공기부터가 다르고. 확실히 동아시아는 긴장감이 다르네.”
도현이 그렇게 말했다.
“무슨 말이야?”
“이런 곳. 두바이랑 유럽에서는 몇 개 가봤거든. 거긴 그래도 분위기가 부드러웠던 것 같은데. 더 어렸을 때 가서 잘 몰랐던 걸까.”
“유럽 쪽은 확실히.”
누구랑 같이 갔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예의가 아니었다. 그녀는 야경과 레스토랑 내부를 천천히 감상했다. 그녀가 이런 걸 좋아할 줄 알았다.
“다른 데도 가고 싶은데 있으면 말해.”
송선호가 말했다. 도현이 눈을 깜박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안 되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한번 말했다.
“도쿄 엠페리오스….”
“알았어.”
“진짜? 거긴 동반 입장도 안 된다던데?”
“하는 방법이 다 있어.”
진짜 다르구나, 와… 도쿄 엠페리오스는 회원 패밀리를 딱 천 호만 유지하는 세계 최고의 회원제 레스토랑이었다. 아는 사람들만 알아 보통 사람들은 그게 세계 최고인지도 모르는 진짜 세계 최고. 도현은 또 그를 다시 보았다. 진짜 유서 깊은 재벌집 아들이었다.
돈이 많으면 재화를 얼마든지 사는 건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좀 더 상위 클래스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진정한 클래스는 거길 이루는 사람들, 그 자체다.
“진짜 너 자신만만 했구나? 나 호강시켜준다는 거.”
그가 말로만 던질 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은 살짝 실감이 들어 도현이 그렇게 물었다.
“그럼 내가 헛소리하는 줄 알았어?”
송선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도현은 이것이 마치 수컷 공작이 화려한 꼬리털을 뽐내는 것처럼 그가 자신이 가진 힘과 매력을 아주 고급스럽게 자신에게 선보인 거라는 걸 알았다. 전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들이댔을 때보다 이성을 되찾은 것이다. 원래 클래스는 직접 보여주지 않으면 잘 모른다. 그리고 도현은 그게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식사도 인테리어만큼이나 환상적이었다. 도현이 지금까지 먹어본 라뇨 프르살레(양고기 구이) 중에 최고였다. 누벨 퀴진이 섞인 오트 퀴진을 이루는 모든 요리들이 최고였다. 디저트에 지금 나온 칵테일, 파리지앵까지도. 음식, 분위기, 서비스, 사람. 모든 게 최고였다. 과히 최고였다. 도현은 정말, 실로 오랜만에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하나 획득했다. 솔직히, 갱신했다.
“마음에 들어.”
“뭐가?”
“이거. 너. 오늘.”
도현이 칵테일을 마시며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는 스카치 위스키인 몇천만 원짜리 맥칼란 77년을 스트레이트로 한 잔 시켜 천천히 마시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서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다행이네.”
고급 문화와 사치는 그 자체보다도 그 클래스에 자신이 속할 수 있다는 것이 더 기분 좋아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도현이 이전 절제 없는 소비를 했던 것도 결국 접해보지 못했던 상위 클래스의 문화가 너무나 즐거웠기 때문일지도.
도현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얌전을 떨고 있는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송선호가 깜짝 놀라며 테이블의 테두리를 잡았다.
“야… 여기선….”
“이런 데가 아니면 어디서 해?”
앞으로 몇 번 더 와서 익숙해지지 않는다면 죽을 때 기억날지도 모를 만큼 멋진 곳이다. 도현은 송선호의 넥타이를 더 잡아당겨 천천히 그의 긴장하고 잘생긴 얼굴을 감상하다가 드디어 비싸게 굴던 그의 첫키스를 가져갔다.
송선호는 숨을 멈추었다가 미간을 확 좁혔다. 도현이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살짝 입술을 뗐다가 다시 부드럽게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문질렀다.
송선호는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쌌다. 엉덩이가 절로 의자에서 떨어졌다. 그때부터 세상 모든 것을 잊고 그녀와의 입맞춤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눈을 마주쳤다가 눈을 감는 그녀의 모습이 아주 아찔할 정도로 요염했다. 그녀의 보드라운 뺨과 목을 만지며 고개를 천천히 이쪽저쪽 바꾸어가며 그녀의 입술과 혀를 탐했다.
너무나 부드러웠다. 너무나 달콤하고 아찔하다. 너무나 고대하고 기대해왔던 그녀와의 입맞춤.
“죄송합니다, 송선호 님, 킬스버그 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인사 수준의 입맞춤이 아니다 보니 제지가 들어왔다. 송선호는 도저히 그녀에게서 떨어질 수가 없었지만 엄청난 인내력을 발휘하여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술을 크게 한모금 마셨다가 그 독함에 콜록 기침을 했다. 도현은 언제 자기가 남자를 유혹했냐는 듯 깔끔하고 도도한 얼굴로 칵테일을 홀짝 마셨다. 송선호만 벌게져서는 얼굴에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잠깐 그렇게 있다가 도현이 물었다.
“여기 아는 사람들 있지 않아? 괜히 소문나서 너 곤란해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이미 날 소문은 다 났다….”
전에 박예나를 그렇게 차고 아버지한테 꾸짖음을 꽤 들었는데 여기 예약하겠다고 부탁을 하고 할머니에게 말했을 때부터 집에 소문은 다 났다고 봐야했다. 이제 여기서 도현 킬스버그를 본 여자들이 지연 이바노프에게 그녀에 대해 소상히 전달하기만 하면, 이제부터 부모님은 그를 볼 때마다 놀려댈 것이다.
그녀가 그 장소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해서 그들은 칵테일을 몇 잔 더 시키고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안 지도 오래되었고 서로 아는 점이 많은 그들이니 이야기는 끊일 새가 없었고 재미있었다. 6년 전의 어색했던 첫 데이트와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와 다르게 지금의 도현은 송선호를 편하게 여기고 심지어 놀리는 것도 좋아했다. 몇 번 더 키스를 했다가 또 경고를 먹었다. 송선호는 입술에 잔뜩 묻은 그녀의 빨간 립스틱을 닦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더 하면 쫓겨나겠다. 그러면 다시 못 와.”
“아, 진짜? 그럼 그만 하자. 또 오고 싶어.”
그렇게 즐겁고 즐거운 데이트를 끝내고 밤이 한참 늦어서야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으음….”
그녀의 집 앞에서 또 키스했다. 송선호는 가슴이 너무 뛰어서 심장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녀와의 입맞춤이라니. 그녀의 몸이 자신에게 착 달라붙어 있었다. 손에 닿는 그녀의 허리가, 그 여성스러운 선이 아찔했다. 꿈만 같았다. 아니, 이건 그의 그런 꿈보다도 훨씬 좋았다.
“들어올래…?”
그녀가 그렇게 속삭였다. 송선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그녀의 집에 들어가면 그와 그녀는…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도현 킬스버그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현관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의 손을 끄는 그 은근한 힘에, 송선호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홀린 듯이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사랑해… 너무 좋아.’
송선호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끌어안고서 그녀가 이 마음을 전부 알아줄 때까지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응? 왔어? 왜 이렇게 늦었어?”
“어, 미르… 들어왔네요?”
“응~ 보고 싶어서.”
거실에 있던 미르 킹쉴드가 도현을 뒤에서 끌어안고 그녀의 뺨에 입을 쪽 맞췄다. 그는 남자 셋 중 가장 도현과 스킨십이 자연스러운 남자였다.
그러니까
남자 셋 중에.
“…….”
송선호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좋아도, 아무리 사랑해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수많은, 스쳐 지나가는 남자들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뭐야… 둘이….”
약간 분위기가 깨진 두 사람을 보고 미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 완전 나이스 타이밍! 미르는 아예 송선호를 노려보며 도현의 허리를 더 꽉 안았다.
“아…! 숨 막혀요!”
“응? 아, 미안.”
그러면서 미르는 그녀의 허리를 놓아주며 다시 쪽 뺨에 입을 맞췄다. 송선호의 눈이 확 벌게졌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는 천천히 도현의 손을 놓으려고 하다가 다시 꽉 잡았다.
“…방으로 가자.”
송선호는 다시 도현의 허리를 끌어안고 미르 킹쉴드를 노려보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씹새끼야, 꺼져.’
“늦게 들어온 주제에! 내가 먼저야, 이 개새끼가!”
미르가 열이 받아 화를 내자 도현이 어이가 없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미쳤어요? 내가 무슨 물건이야? 순서대로 쓰게? 방이나 올라가요.”
도현이 인상을 쓰며 그에게 눈짓했다. 미르는 확 열이 받은 얼굴로 그녀를 보다가 구시렁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미안… 호텔 갈 걸 그랬나? 네가 그냥 집에 데려다준다고 해서 이럴 줄은….”
“아니….”
6년 통틀어 데이트 2번밖에 안 해봤고 지니 호에서도 너무 그런 긴장만 주고받았으니 오늘은 얌전히 집에 데려다 줄 생각이긴 했었다. 현관 앞에서 그런 입맞춤만 안 했어도 말이다.
“어… 야….”
송선호가 말없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씨발… 진짜 열 받는다….’
솔직히 송선호는 지금 눈물이 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금방 미르 킹쉴드가 그녀를 포옹하는 걸 보고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고 지금 자신의 처지도 확 떠오르고 이래저래 가슴이 욱신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집에 있는 남자들 중에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놈은 한 명도 없었다. 결국에는 그녀의 마음을 얻어 독차지할 생각밖에 없는 그들이었다. 여기서 전처럼 멘탈 관리를 하지 못하고 상처받기 싫어 물러나기만 한다면 지금까지 그에게 일어났던 일의 반복일 뿐이었다.
오늘 얘기를 들어보니 이 남자들 중에 그녀와 잠자리를 한 놈은 아직 없다. 게다가 그녀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남자와 ‘제대로’ 섹스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송선호는 그녀의 제일 처음이 되고 싶었다.
송선호가 팔에 힘을 풀었다. 둘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쪽 하고 송선호의 입술에 먼저 입을 맞추었다. 분명히 또 그녀의 흔적처럼 빨간 립스틱이 묻었을 것이다. 그녀가 너무나 좋은데, 방금 미르 킹쉴드 때문에 미운 마음도 일어난 상태였다. 그런데도 좋았다. 미웠다. 그래도 좋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방으로 함께 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거대한 현대회화 그림이 눈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오른쪽엔 욕실로 통하는 문이 있고 왼쪽엔 화려하고 향기가 좋은 생화가 장식되어 있었다. 킹 사이즈 보다 큰 커다란 침대는 창 가까이에 있었고 그 앞에는 검은색 유리로 된 세련된 테이블 세트가 있었다. 그리고 들어오는 문 왼쪽엔 화장대가, 오른쪽엔 벽에 군데군데 붙은 검은색 선반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선반 위에는 책과 액자, 선인장 등이 놓여 있었다.
전에 송선호가 술에 취해서 그녀의 침대에서 딱 한 번 잔 적이 있었다. 정원이 훤히 보이는 그녀의 방은 굉장히 넓었다. 창밖의 정원이 고요하고 휘영청 뜬 달이 밝아 어두운데도 사물이 잘 보였다.
그녀는 들어와서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침대 옆에 있는 커다란 알 모양의 조명을 켰다. 크리스탈을 모자이크로 붙여 만들어 부드러운 주홍빛 불빛이 은은하고 아름다웠다. 방문이 닫히고 그녀의 방에 온전히 둘만이 들어와 있었다. 두 사람의 실루엣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송선호의 심장은 이미 마구 뛰고 있었다. 얼굴이 뜨거웠다. 그들이 있는 곳은 어두웠기 때문에 도현에게는 제대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다행이다. 이번엔 송선호가 먼저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음….”
그녀가 작게 신음소리를 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다. 그녀의 뺨을 잡고 엄지로 살짝 그녀의 뺨을 눌렀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그녀가 입을 좀 더 벌렸다. 송선호는 그녀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혀를 끝부터 끝까지 살살 핥았다.
“으응….”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자신에게 꼭 붙였다. 그녀의 곡선이 그대로 느껴진다. 등허리를 문질렀더니 그녀가 더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스르륵 손을 내려 그녀의 엉덩이를 살짝 잡았다. 그녀의 엉덩이를 만지는 건 처음이다. 허리가 잘록하고 골반이 넓어 그녀의 여성스러움이 극대화되는 지점이기도 했다. 이게 뭐라고 진짜 기분이 두둥실 뜬다. 옷 위로 만지는 것뿐인데도 부드러운 살의 느낌이 너무나 좋아서 손을 떼고 싶지가 않았다. 그녀가 살짝 입술을 떨어뜨리면서 하아, 하고 한숨을 약간 쉬었다.
“뭔가 너… 너무 잘하니까 과거가 좀 의심된다?”
여자도 함부로 후릴 것 같지 않은 비싼 남자라는 게 그를 보는 여자들의 총평이지 않았던가. 도현은 그가 비싼 남자이기 때문에 아마도 섹스는 별로이지 않을까, 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진짜 비싼 남자들은 자고로 엉덩이도 무겁고 아쉬울 것도 하나 없는 법이었다. 여자들이 다 알아서 대접해 준다. 노력해서 여자를 만족시킬 필요가 없는 남자들이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키스도 스킨십도 부드럽고 섹시하게 잘했다. 특히나 가슴부터 허겁지겁 만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큰 점수를 줬다. 등허리를 살살 쓰다듬어 기분 좋게 한 후 엉덩이를 살짝 주무른 것도 타이밍이 좋았다. 너무 난봉꾼 같지도 그렇다고 숙맥 같지도 않은 아주 미묘한 적정선을 그린 느낌이다.
“아니….”
잘한다는 칭찬은 듣기 좋았지만 과거가 의심된다는 말에는 기분이 복잡해졌다. 여자랑 데이트를 한 적이 없진 않았지만 키스나 이런 스킨십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이전에 삼촌이 소개해준 일본계 브라질 여자와 그렇고 그럴 뻔한 적도 있긴 했지만 그때도 키스는 하지 않고 약간의 스킨십만 했을 뿐이다.
이런 건 사랑과 관심과 노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자신보다 여자의 쾌락을 위해 아주 조금만 더 신경 쓰면 되니까. 다른 남자들은 그것마저도 제대로 못 한다는 말인가?
그녀가 송선호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무릎을 넣으며 부드럽게, 다시 깃털처럼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이런 점이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 섹시했다. 그리고 그걸 자기도 잘 알고 어떻게 남자를 유혹해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 가끔은 대놓고 뻔히 보이게 그래도 저항하기가 힘들다. 그런 점이 밉기도 하다. 송선호는 그녀의 엉덩이를 받치고 번쩍 들어올렸다.
“앗… 하하.”
그녀가 약간 놀랐다가 웃었다. 송선호는 심장이 뛰고 간질간질거렸다. 그녀만이 마치 그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올려다보았다. 이 세상에 단둘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 좋아해?”
송선호가 물었다.
“응.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
“…….”
그건 또 그것대로 남자의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대답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녀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침대로 가서 털썩 그녀를 눕혔다. 몸을 맞댄 채 그대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뭔가 실감이 들었다.
‘드디어… 드디어….’
침대를 짚은 손이 떨렸다. 금방까지만 해도 그나마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했는데 지금부터도 괜찮을 수 있을까? 발기는 진즉에 한 상태였다. 그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도현은 자신의 립스틱이 잔뜩 묻은 그의 입술을 엄지로 한 번 문질렀다가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려 그의 양복 단추를 하나 풀었다.
“도현 킬스버그….”
송선호는 자신의 옷을 벗기는 도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몇 겹이나 입은 그의 옷을 벗기는 게 불편하다고 생각하기는커녕 흥미진진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양복의 단추를 다 풀고 그의 어깨에서 옷을 내릴 때 그가 도현의 머리카락과 뺨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응?”
“…사랑해.”
그녀에게 이미 몇 번이나 사랑한다고 말했는데도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그녀와 함께 할 때마다 이렇게 심장이 요동치니 장수는 글렀다.
“내가 그렇게 좋아?”
도현이 ‘자기도 차암~’이라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송선호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입을 맞추면서 그의 베스트를 벗기고 던져버렸다. 그녀는 그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뗀 뒤 넥타이는 아주 천천히 풀었다. 스르르륵.
“흐응.”
도현이 그의 명품 넥타이를 손에 살짝 감아 만지며 송선호의 모습을 감상했다. 아무리 스스로를 슈트로 꽁꽁 감싸 무장하고 있는 단정한 남자라도 넥타이를 풀면서 새하얀 셔츠의 첫 번째 단추가 벌어지는 순간,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느낌이 든다. 원래 새하얀 셔츠는 남성의 속옷이었고 그것이 살짝 벌어진다는 건 그의 숨겨뒀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말이 아니던가. 그의 단단하게 올라온 목젖이 남자답다. 깔끔하게 면도가 된 그의 턱 끝부터 손끝으로 살살 간질이면서 그의 목젖으로 내려갔다.
“윽….”
원래 목젖은 남자의 급소다. 전에도 느꼈지만 민감한 모양이다. 그의 질릴 정도로 잘생기고 깔끔한 얼굴이 살짝 찌푸려지니 색기가 돈다. 이런 표정도 근사할 거라곤 생각 못 했다. 그리고 더 간지럽혀서 내려가 단추를 하나 둘 풀다가, 도현이 두 손으로 그의 셔츠를 잡고 양쪽으로 북 뜯어버렸다.
“야….”
송선호가 놀라서 움찔하자 도현이 키득키득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밀어 자연스럽게 그를 침대에 눕히고 올라탔다. 그녀는 웨이브를 넣어 치렁치렁해진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아 내리며 그의 셔츠를 마저 풀었다.
“아니… 누가 너 셔츠 뜯어보고 싶다고 했는데 나도 갑자기 해보고 싶어서. 생각보다 기분 좋다, 이거. 자주 해야지.”
“그게 낭비라고.”
이게 한 장에 얼마짜리 셔츠던가. 송선호는 약간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그의 남은 셔츠 단추를 마저 풀고 그의 벨트도 세게 잡아당겨 한 번에 빼냈다. 송선호는 마찰열 때문에 허리를 다 데이는 줄 알았다. 그의 셔츠를 어깨에서 내리며 도현이 그의 어깨에 코와 입술을 묻고 그의 체취를 맡았다.
송선호는 진짜 손이 다 덜덜 떨리고 등에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지만 조심스럽게 그녀의 등 뒤를 두 손으로 감싸며 그녀의 예쁘고 섹시한 드레스 지퍼를 잡았다. 살살 내리려고 하니 의외로 단단해서… 조금 더, 조금 더 힘을 주다가 지퍼가 쭉 내려가니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러자 도현이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왜 이렇게 긴장했어? 처음도 아니면서.”
‘처음이라고…!’
자기만 생각하면서 보낸 6년을 정말 몰라주는 그녀였다. 그녀에게 처음 반했을 때는 송선호도 20대 초반이었고 한 번 누군가를 마음에 두니 다른 여자가 눈에 안 들어오는 걸 어쩌란 말인가!
드레스 지퍼를 그녀의 엉덩이까지 천천히 내렸다. 송선호는 자신의 얼굴이 진짜 터질 듯이 빨개져 있을 게 예상이 되었다. 그녀는 송선호의 셔츠를 벗기고 그의 바지도 내렸다. 그 뒤엔 송선호가 한숨을 한 번 쉬면서 마저 바지와 양말까지 알아서 벗었다. 그의 탄탄하고 육감적인 몸매가 그대로 노출되었다. 그의 몸은 심미적으로 아주 완벽했다. 여심을 흔드는 모양새다.
“운동 열심히 했네?”
“너… 몸 좋은 남자 좋아하잖아.”
“좋은 자세야.”
그녀가 칭찬했다. 도현이 송선호의 시계를 벗기는 동안 그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면서 천천히 그녀의 드레스를 어깨에서 내렸다. 그의 비싼 시계를 커다란 침대 어딘가에 던진 도현은 그가 자신의 드레스를 내리자 불편한 악세사리를 풀어서 옆에 고이 두었다. 그리고 팔을 빼주었다.
그녀는 가슴골이 드러나는 드레스 때문에 양쪽에서 안쪽으로 푸시업을 해주는 면적이 작은 검은색 속옷을 입고 있었다. 흥분으로 예민해진 후각으로 그녀의 체취가 확 몰려드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속살을 이렇게 가까이서… 송선호는 그 순간의 충동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가슴에 곧장 얼굴을 묻었다. 들끓는 듯한 신음이 나왔다. 부드럽다. 너무 부드러웠다. 향기롭다. 탄력 있으면서도 부드럽고 촉촉한 그녀의 피부가 그의 양 뺨에 닿았다. 엄청 흥분됐다. 기분이 너무 좋다. 평생 이러고 있고 싶다….
“진짜 남자들 가슴 좋아해.”
도현이 약간 웃기다는 듯이 말했다. 송선호는 그대로 그녀의 가슴 사이에 얼굴을 비비며 그녀의 허리를 확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옷을 다 입고 포옹을 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다. 촉감이, 향기가, 느낌이… 송선호는 그대로 그녀의 드레스를 마저 내려 벗겨냈다. 그리고는 아까 긴장한 건 잊어버린 채 그녀의 허벅지를 양손으로 쥐고 주무르며 쓰다듬어 올렸다. 그대로 그녀의 팬티 속에 손을 넣어 그녀의 엉덩이를 맨살로 주물렀다. 미치겠다…. 그리고 한 손으로 그녀의 매끄럽고 부드러운 등허리를 쓰다듬어 올라가 그녀의 브래지어를 풀었다.
“도현 킬스버그.”
송선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응?”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던 도현이 그렇게 되물었다.
“나랑 오늘 자자.”
“응? 이제부터 할 거잖아?”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도현이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제대로 하자고.”
그는 도현을 침대에 확 눕히고 그녀의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끝까지 하자. 안 아프게, 부드럽게 잘 할게.”
“…….”
그가 그렇게 말하자 도현은 ‘아…’ 하며 의미를 모를 소리를 냈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뒷통수를 침대에 꽉 눌렸다.
“어째 잘 지나간다 싶더라….”
그녀는 뭔가 확 깬 얼굴로 송선호의 가슴을 밀어내며 다른 팔로 속옷이 붕 뜬 자신의 가슴을 감싸 가렸다.
“나 삽입섹스 안 한다고 말했잖아.”
“왜?”
“그거 여자는 별로 기분 안 좋아. 좋다는 여자들 진짜 얼마 안 돼.”
삽입을 하지 않고 섹스를 하면 여자도 매번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는데 왜 그게 제대로 된 섹스가 아닌가? 삽입으로 남자만이 매번 오르가즘을 느끼는 섹스는 제대로 된 섹스고? 어쩌다 한 번을 위해 왜 매번 느낄 수 있는 쾌락을 포기해야 하는 건가? 왜? 그리고 사람이 하기 싫다고 하는 말이 우습게 들리는가.
“너도 안 해보면 모르는 거 아냐?”
그가 그렇게 말하자 도현은 더 깬 얼굴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브래지어의 후크를 다시 채우고 제자리를 잡았다.
“어떻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들 똑같은 말만 하지? 진짜 신기하다….”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게다가 그걸 첫날밤부터 말하는 건 그 ‘소위’ 자기들이 비싼 남자라 생각하는 놈뿐이다.
“해봐도 안 좋아.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너 딴 남자랑 안 해봤다고 했잖아…!”
송선호가 깜짝 놀라서 그렇게 말하자 도현은 진짜 짜증난다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18살에 궁금해서 딜도 사서 쑤셔봤다, 됐냐? 됐어? 나가. 나가!”
어느샌가 그녀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이런 얼굴은 예전에 처음으로 그녀에게 험한 말을 했을 때 이후로 처음 봤다.
“한 번에 말을 듣는 놈이 없어! 지긋지긋해! 에반이랑 다니엘 씨 빼고는 다들 지가 더 잘난 놈이지. 빨리 나가. 너랑 안 해.”
“잠깐만… 야… 아니, 내 말 좀….”
“들으면 더 짜증나. 그냥 나가. 가.”
그는 그대로 팬티 바람으로 쫓겨났다. 그녀는 문을 쾅 닫았다. 송선호는 오늘 이 집에 있는 다른 남자들이 그런 것처럼 애타게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야…! 도현 킬스버그! 내 말은…!!”
그러자 또 아까처럼 문이 확 열렸다. 그녀는 송선호의 옷과 물건들을 밖으로 집어 던지고 다시 문을 쾅 닫았다.
“…….”
송선호는 그대로 잠깐 닫힌 문을 바라보며 굳어 있다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씨발….”
*
메트로서울 외곽에 위치한 도현 킬스버그의 대저택은 공원 같은 정원, 1.2m부터 4m의 깊이까지 아우르는 커다란 수영장과 야외 자쿠지까지 딸린 3층짜리 대저택이었다.
1층에는 전면 유리가 전부 TV로 전환되는 커다란 거실과 도현의 침실, 부엌, 식당, 드레스룸, 서재가 크게 있었고 2층에 가면 1층보다는 약간 작은 거실과 도현의 침실과 크기, 구조가 같은 로웰의 침실이 있었다. 로웰은 2층에 있는 서재를 작업실로 썼다. 그리고 4개의 게스트룸이 있었는데 그 중 둘은 다니엘 스톤하츠와 미르 킹쉴드가 차지했고 나머지 둘 중 하나는 가끔 송선호가 썼다. 드레스룸은 있는데 아직 아무도 안 썼다. 3층은 거실이어야 할 부분을 넓은 테라스로 만들어 주변의 자연경관을 보거나 영사기를 이용하여 영상을 보기 좋게 만들었다. 부엌과 다이닝룸도 있었고 칵테일 바 같은 시설도 있었다. 바비큐도 가능했다. 그리고 3층에도 게스트룸이 또 3개.
그런 여기도 벌써 식구가 여자 둘에 남자 둘이고 자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셋이 더 있으니 1층에 있는 시중에서 가장 커다란 냉장고 안에 먹을 게 가득했다.
도현 킬스버그의 칸은 각종 샐러드와 과일, 견과류들이 소분되어 반을 채우고 한쪽엔 이름 모를 건강 음료가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집에 있을 때 식사는 고급 도시락 업체를 애용하는 지라 아침에 먹을 것과 간식 거리, 음료밖에 없다.
로웰 리의 칸은 사람이 와서 항상 정리를 하는데도 엉망이었다. 입에 줄줄 간식을 달고 일을 하는 그녀라 각종 초콜릿, 비스킷, 쿠키, 감자칩(이것도 차갑게 먹는 걸 좋아한다) 등이 잔뜩 있었다. 식사는 도현과 함께 도시락. 그리고 어시들의 간식도 공간을 채웠다.
다니엘 스톤하츠의 칸은 다른 칸에 비해서 영 부실해 보였지만 어쨌든 도현과 비슷해 보였다. 샐러드와 곡물이나 과일 음료, 체격 및 체력 유지를 위한 닭가슴살과 프로틴 음료 등, 셀레나 카토가 설계해준 건강식 그대로 매 끼니를 먹는 그였다.
그리고 미르 킹쉴드의 칸은 고기, 고기, 고기, 고기와 우유, 우유, 우유, 우유. 간식은 로웰 리의 것을 훔쳐 먹었다.
“미르는 참….”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꿀꺽꿀꺽 마시는 미르 킹쉴드의 헐벗은 뒷모습을 아직 잠에서 덜 깬 눈으로도 열심히 감상하는 도현이었다. 아침마다 장관이다. 그는 옷을 입는 게 불편할 수밖에 없는 체격과 사이즈라 집에 있을 때는 거의 드로즈 차림이었다. 오늘은 검은색에 회색 테가 달린 명품 드로즈다.
오늘도 그의 빵빵한 몸매를 잘 감상한 도현은 엄지를 들었다. 그의 몸은 정말 신이 선사하신 몸이다. 질리기는커녕 항상 경건하게 감사의 마음이 든다.
“잘 잤어?”
미르는 씨익 웃으면서 그녀에게 다가가 뺨에 입을 맞췄다. 도현도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아침 하게요?”
“응. 배고프다.”
미르는 이로 우유팩을 문 채 냉장고에서 고기를 양껏 꺼냈다. 그리고 팬을 꺼내 인덕션 위에 올렸다. 자동으로 온도가 맞춰지며 후드가 조용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신이 내린 몸은 그만큼 유지비도 빵빵하게 들었다. 미르 킹쉴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엄청나게 먹어댔다.
“너무 생으로만 먹으면 질릴 거 같아요. 줘봐요.”
“응?”
그냥 그대로 고기를 구으려고 하는 미르를 옆으로 밀고 도현이 손을 씻었다. 넓고 각진 유리 그릇을 꺼내 미르의 소고기를 놓고 소금과 후추, 허브, 그리고 화이트 와인도 살짝 붓고는 재웠다. 냉장고의 자기 칸에서 샐러드와 과일 주스를 골라 내고 넓은 대접에 미리 얹어 꾸며놓았다.
“아무리 그래도 고기만 먹으면 건강에 안 좋아요.”
“별로 그런 생각 안 해봤는데.”
미르는 도현을 뒤에서 끌어안고 그녀를 구경했다. 누가 이런 걸 그를 위해 해주는 건 처음이다. 그것도 돈도 안 받고. 그나 그의 걸즈나 요리 같은 거와는 영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다들 대충 먹고 살았다. 미르야 배고픈 건 딱 질색이니 매끼니 이렇게라도 먹었지만.
“배고파.”
여자의 부드러운 살은 입에 담고만 있어도 맛있다. 도현은 피부가 아주 좋으니까 더 맛있다.
“아, 미르. 안 돼. 앗.”
그가 도현의 뺨을 물고 우물우물 빨자 그녀가 그의 엉덩이를 한 대 때렸다.
“자국 남아요!”
“뭐, 어때.”
“뭐가 어떻긴… 앗. 아파. 아파요! 깨물지 마!”
도현이 그의 엉덩이를 마구 때렸다. 미르는 뺨을 포기하고 그녀의 귓불을 입에 물고 우물거렸다. 도현은 참나, 하면서 중얼거렸다.
“진짜 여자 없이는 못 살 남자야….”
“남자가 여자 없이 어떻게 살아?”
미르가 당연한 걸 왜 말하냐는 식으로 말했다. 그는 살짝 억울하다는 듯이 덧붙였다.
“아, 근데 여자는 남자 없어도 잘 사는 거 같아. 어제 집에 잠깐 가봤는데 이것들이 집에서 나갈 생각을 안 해. 지들끼리 잘 살아. 나 없으니까 더 잘 살아.”
“하하. 그렇죠.”
“확 내쫓을까 하다가 일단 뒀다.”
“그래도 든 정이 있는데 너무 그러지 마요.”
“그런 게 어디 있어? 내 집인데.”
미르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얼마간 잘 기다린다 싶더니 그는 곧 배가 고프다고 도현을 계속 보챘다.
“그게 그런다고 빨리 돼요? 기다려요.”
맛이 좀 들었을까. 그녀가 올리브유를 잔뜩 두르고 고기 두 덩이를 팬에 올렸다. 소스도 그대로 좀 부어 넣어 센 불에 소스를 끼얹으며 계속 구웠다. 미디움 레어 정도로 하고 접시에 올렸다. 그걸 미르의 손에 들게 하고 도현도 자기가 먹을 샐러드와 주스 두 개를 들고 식당으로 갔다. 커다란 식탁의 상석에는 도현이 앉고 오른편 가까이에 미르가 바싹 붙어서 앉았다.
“야채도 먹으라니까요.”
“알았어.”
커다란 잔에 우유를 잔뜩 따라서 같이 먹었다. 이 남자는 술 아니면 우유밖에 안 마시는 것 같다.
“미르 우유 진짜 좋아하네요?”
“응.”
도현은 신기하다는 듯이 그를 보았다. 은근히 입맛이 어린애다.
“왜요?”
“어렸을 때도 우유 좋아했는데 너무 비싸서 잘 못 먹었어. 그래서 더 그런가 봐. 우리 클럽에도 꽤 있어, 그런 놈들.”
그러다가 미르가 아, 하고 덧붙여 말했다.
“우리 클럽 이번에 구단주 주최로 파티 하는데 갈래? 재밌어. 엄청 커.”
“어? 갈래요. 갈래요.”
그런 파티 아주 좋아한다. 게다가 TFC 선수들이라면 몸 좋은 남자들이 잔뜩인데다가 쭉쭉빵빵 미녀들도 잔뜩일 것이다.
“언젠데요? 어디서 해요?”
“로얄팰리스. 다음 주 금요일.”
“설마 로얄팰리스 다 빌리는 거예요?”
“그럴 걸?”
“와.”
역시 돈이 돈이다. 웨스트이글 구단주면 중국계 인도인 사업가 제임스 첸, 23억 인도의 거대 인터넷 기업 소유주다.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부자다. 준우승을 기념하여 이제야 파티를 하는 모양이었다.
도현이 천천히 샐러드를 먹을 동안 미르는 그 큰 고기들을 다 먹었다. 그리고 도현이 꼭 다 마시라고 해서 각종 채소와 과일이 들어간 주스를 원샷했다.
“운동하러 가요?”
“응.”
미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쭈욱 기지개를 폈다. 천장이 높은 집이라 다행이지. 항상 커다란 맹수를 보는 기분이다. 털이 부드러운 거대한 재규어나….
2달 반 정도를 쭉 쉰 웨스트이글 선수들은 열흘 전부터 다시 훈련에 들어갔다. 다니엘은 그보다 빠른 보름 전부터였다. 엘 드라카 최초 2연승이라는 역사적 기록을 남긴 이스트드래곤은 이 기세를 올려 3연승을 외치며 더욱 열심히 준비하는 것 같았다.
“아, 올해는 이스트드래곤이 어디서 자빠져야 돼. 신태호 그 꼬맹이 답이 안 나와.”
미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욕실에 들어갔다. 도현은 그의 말에 흥미가 생겨 따라 들어갔다. 미르는 팬티를 훌렁 벗고 벽 한 면을 다 채우는 샤워 장소에서 물을 틀었다. 도현은 반대쪽 벽면에 위치한 세면대 옆 선반에 앉아 그의 멋진 뒷태를 구경하며 물었다.
“신태호 선수가 대단하긴 한가 봐요?”
“피날레에서 진짜 죽겠다 싶더라.”
“다른 소드마스터랑 뭐가 다른 거예요?”
“이거.”
미르가 오라를 확 뿜어내 황금색으로 형상화된 쉴드를 작게 만들었다. 실제로 본 건 처음이라 도현이 큰 소리로 감탄하며 선반에서 뛰어내려 보러 갔다.
“만져도 돼요?”
“응.”
만지니까 엄청 딱딱하고 잔 진동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황금색에 약간 반투명하며 선수마다 고유의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미르는 가운데 커다란 눈모양 같은 것이 번뜩였다.
“이게 너무 강해. 덩치도 쥐똥 만한 게 이거 쓰고 붙으면 힘이 존나 세더라고. 나 그때 보니까 갈비뼈 세 대에 실금 5개나 갔더라. 죽는 줄. Q3도 10대나 맞았잖아.”
“알아요…. 그때 미르 진짜 미친놈 같았죠.”
피날레 때 병문안 갔을 땐 예전보다 경과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갔다. 그가 묶인 채로도 주변을 다 때려 부수려고 해서 의료진이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Q3부터 맞게 하고 마도수술까지 시키려고 하니 답이 없었던 것이다.
“아픈 거 싫어.”
“아! 미르…!!”
미르가 도현을 슥 물 안으로 끌어당겼다. 다 젖었다. 도현이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눈을 마주치니 미르가 씨익 웃었다.
“어차피 너도 씻을 거잖아. 같이 씻자.”
“같이 씻는 건 상관 없는데….”
미르 킹쉴드의 저 미소는 어쩐지 화를 내는 게 의미 없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도현도 그냥 피식 웃었다.
“응? 뭐가?”
미르는 벌써 도현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도현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미르 킹쉴드의 거대한 물건은 이미 살짝 더 커져 있었다.
“할 거면 콘돔 하고….”
“아! 그거 싫다니까!”
도현의 말에 미르가 질색을 했다.
물론 여기서 짚고 가야할 것은 1. 이미 미르 킹쉴드는 삽입섹스를 하지 않는다는 것에 (일단) 동의했다. 2. 도현이 말하는 그 ‘콘돔’이 보통 콘돔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애초에 넣지도 않을 건데 왜 해야 돼?”
“솔직히 미르 다 깨끗해졌다고 해도 좀 불안하고….”
사람의 심리가 그렇다. 아무리 잘 빨아서 번쩍번쩍해진 실크 손수건이더라도 그 꼴이 원래 어땠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콘돔하는 건 예의죠.”
“그래. 그러니까 내가 평범한 건 한다고 했잖아.”
“그거 너무 잘 찢어져요. 살균 기능이나 그런 것도 없고. 그냥 다른 부위도 다 덮히는 게 안심이 돼서….”
“…….”
그녀가 말하는 그 콘돔은 명품 브랜드 <라인하트>에서 나온 최고급 콘돔이었다. 그냥 최고급이면 미르라도 왜 마다하겠는가. 미르는 그 물건의 모양부터가 싫었다.
‘그게 무슨 콘돔이야! 거의 기저귀더만!!’
그냥 그녀는 아직도 영 미르가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도현이 덧붙여 말했다.
“어제도 걸즈 만나고 왔다고 했잖아요.”
“아…!! 아무것도 안 했어! 당연히! 그리고 걔들도 다 병원 보내서 멀쩡해!”
“키스도 안 했어요?”
도현이 물었다. 그러자 미르가 살짝 움찔했다가 답했다.
“그냥 엄청 가볍게, 인사로만….”
“흠.”
미르가 박스티를 벗기자 도현의 어두운 청록색 슬립이 드러났다. 몸의 모양이 그대로 보여서 야했다. 미르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그녀의 가슴을 뚫어져라 보았다. 미르 기준에서는 아무리 봐도 작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몸이 예뻤다.
미르는 확 흥분했다.
“그럼 넌 내 거에 손도 대지 말고 그냥 내가 좀 핥게나 해줘.”
“일단 키트 검사부터 해요.”
도현은 세면대에서 키트를 가져왔다. 미르는 이제 이런 부분은 거부해봤자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걸 알고 알아서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혀도 내밀었다.
“음….”
아직(?)은 깨끗한 듯했다. 도현은 약간 갈등했다. 그녀도 쌓인 게 참 많아서 하고 싶기는 한데. 미르 킹쉴드는 그냥 존재 자체가 하늘이 여자를 위해 내린 섹시 다이너마이트니 보면 건드리고 싶은 게 여자의 솔직한 욕망이긴 한데…. 애초에 불안할 때 하면 딱 후회하는 게 섹스 아닌가.
“그럼… 일단 키스부터 해보고….”
“아싸!”
미르는 다시 도현을 훅 끌어당겼다. 그는 도현의 코에 쪽 입을 맞추었다가 지그시 그녀의 눈을 보고는 입을 맞추었다. 물이 계속 서로의 얼굴 사이로 흐르고 물에 젖어 촉촉한 입술이 앵두알처럼 매끄럽다. 미르는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입안으로 두터운 혀를 넣어 그녀의 입안을 싸악 핥았다. 그리고 서로 혀를 내밀어 비비다가 그녀의 혀를 살짝 깨물고 입천장을 긁었다.
“푸하…! 미르….”
그녀의 얼굴이 확 빨개졌다. 미르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그녀의 살을 쪽쪽 빨았다. 그리고 그녀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쥐고 주물렀다.
“이런 거 입고 자? 야해.”
그녀의 슬립과 검은색 레이스 팬티를 보고 미르가 말했다. 도현은 미르의 머리카락을 쥐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잘 땐… 하아… 아무것도 안 입는 게 좋아서….”
“안 입고 자?”
“네… 으응….”
미르가 도현의 슬립 위로 그녀의 가슴을 입술로 앙 물었다. 그녀가 움찔했다. 그리고 젖꼭지를 혀끝으로 건드리니까 그녀가 민감하게 야한 목소리를 냈다.
“언제 니 방에 몰래 들어가야겠다.”
“그러면 내쫓을 거예요… 아앗… 하아… 으응….”
그녀의 슬립을 내리고 드디어 맨살을 드러낸 그녀의 가슴을 보았다. 커다란 미르의 손에 비하자면 역시 작다…. 하지만 부푼 모양이나 핑크빛 유두가 예쁘다. 부드러울 것 같다. 미르는 그녀의 가슴을 쥐고 엄지로 살짝 그녀의 유두를 문질렀다.
“으응…!”
미르는 도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 걸 관두고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킬스버그… 너 진짜 예쁘다. 응? 진짜 예뻐….”
느끼는 얼굴이 진짜 예뻤다. 그것도 그의 손에 느낀다고 하니 뿌듯하다. 그대로 그녀의 가슴을 만지면서 한 손을 천천히 그녀의 몸을 쓰다듬어 내려가 그녀의 속옷 속에 손을 넣었다. 미르는 그녀를 휙 돌려 세워 벽에 붙어 있는 거울을 함께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가슴과 아래를 만지며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거울을 보자 더 느껴지는 모양인지 섹시한 얼굴을 했다. 미르는 그녀의 목과 어깨를 죄다 빨았다. 달고 식감이 좋았다. 부드럽고 매끄럽고 달다.
“아… 얼굴 보면서 하고 싶은데….”
미르가 거울 속의 그녀와 다시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으응… 빨리… 하아… 빨리…!”
도현이 손을 뻗어 미르의 머리카락을 꽉 잡았다. 그녀는 스스로 몸을 돌려 차가운 거울에 등을 기댔다. 샤워기에서 뿜어나오는 물길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미르의 머리카락을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가 다시 쥐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아래로 눌렀다. 서서히 그의 머리가 내려가면서 눈높이가 맞자 미르가 씨익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나한테 이럴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알아요.”
그는 당연히 더 내려가야 했다. 미르 킹쉴드는 천천히 도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의 팬티를 이로 물어서 내렸다. 그녀의 무릎을 만지며 그녀의 매끈한 살에 입과 코를 묻고 냄새를 한 번 맡았다.
“난 여자들 이렇게 다 없는 게 좋더라.”
“저도 위생상… 남자들도 다 없는 게 좋아요.”
“응…? 그래? 그럼 나도 밀어버려야겠다.”
철저하게 관리를 해서 그런지 냄새가 엄청 좋다. 날이 갈수록 그녀가 마음에 드는 미르 킹쉴드였다.
“미르… 하아… 빨리요….”
그녀는 미르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미르는 그녀의 부들부들한 살을 살짝 빨고 이로 물었다가 드디어 그녀의 한쪽 허벅지를 어깨에 올려 다리를 벌리게 하였다. 그녀의 붉은 점막에 혀를 댔다.
“아앗…! 아… 아으… 미르… 미르….”
그녀가 엄청 움찔움찔 했다. 살짝만 핥았는데 말이다. 그녀의 색기 어리고 좋은 목소리가 저런 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니 엄청 뻐근해진다. 미르는 자신의 것을 한 손으로 잡아 문지르며 그녀의 살을 엄지로 벌려 슬슬 단단하게 부풀어 오르는 그녀의 분홍빛 보석 같은 그곳에 입술을 대고 쪽쪽 빨았다.
“흐읏…! 아!”
미르의 플래티넘 블론드를 쥔 그녀의 두 손에 힘이 확 들어가며 그녀가 엉덩이를 떨었다. 미르는 아예 그녀의 몸을 붕 뜨게 들며 그녀를 더 벌려 혀로 얇고 여린 살 두 장도 빨고 그 사이를 혀로 스윽스윽 핥았다. 그러자 도현이 미르의 정수리를 주먹으로 살짝 쳤다.
“거기 말고…! 하던 데 계속…! 아아…!”
“으음….”
그가 낮은 신음을 내며 두터운 혀로 그녀의 입구를 핥다가 안으로 혀를 밀어넣을 듯 말 듯 움직였다.
“미르… 미르… 앞에… 앞에 해줘요. 아읏… 가고 싶어.”
미르는 탐이 난다는 듯 그녀의 틈을 한참 핥다가 다시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녀의 살을 엄지로 쫙 들어서 거기에 입술을 박고 엄청 빨고 혀로 8자를 그려 자극했다.
“으응… 하으으. 미르… 미르. 아으… 기분 좋아….”
도현은 오랜만의 섹스에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전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클리토리스가 욱씬욱씬 하며 아래가 전부 뜨거웠다. 몸이 저절로 꿈틀거리며 자꾸 입에서 비명이 나올 것 같다. 숨이 차서 숨 쉬기가 힘들다.
오르가즘도 레벨이 있다. 자위기구를 통한 짧은 인스턴트식 쾌감도 나쁘지 않지만 이런 남자를 무릎까지 꿇려서 빨게 하는 건 정말 실패가 없는 섹스다. 게다가 미르 킹쉴드… 찾아보자면 부족한 점이 없진 않지만 이런 것에선 하나를 들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잘한다. 게다가 이런 힘과 끈기는 정말 칭찬해줘야 한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미르… 진짜 잘해요…. 아앙. 기분 좋아…. 하아… 좋아해요…. 으응…!”
도현이 미르의 머리카락과 귓가를 매만지며 그렇게 야한 목소리로 말했다.
“으윽.”
뭐지? 진짜 마음이 찌르르 울렸다. 뭘 해주는 것도 아닌데 그녀의 칭찬이 온몸을 불끈불끈하게 했다. 미르 킹쉴드의 대단하고 멋지게 쪼개진 등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가 움찔하며 그녀의 살을 꾸욱 물며 잠깐 멈췄다가 계속했다. 그의 것도 단단해질 대로 단단해져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앗… 응… 하… 아…!!!”
미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심장을 관통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미르의 등을 발꿈치로 꽉 눌렀다. 미르는 그녀의 거기에 살짝 이를 긁었다가 힘껏 빨면서 자신의 것을 마구 흔들었다.
“으으윽…!”
이걸로 뭐가 좋을까 싶었는데 엄청 나온다. 미르는 헐떡이는 그녀의 아랫배에 얼굴을 묻고 끝까지 자신의 것을 흔들었다. 그의 근육이 돌처럼 단단해졌다. 온몸의 피부가 짜릿하고 기분이 좋았다. 도현은 자신의 배를 꾸욱 압박하는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안고 그에게 기댔다.
“하아… 하아….”
“으윽… 하….”
그대로 잠깐 시간을 보냈다. 쏴아아 하는 샤워기의 물소리가 시원하다. 미르가 그녀의 품에서 얼굴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좋았어?”
“응… 진짜… 최고… 하아….”
도현은 아직도 후희에 빠져있는 상태인지 얼굴이 빨갛고 야했다. 엄청 예쁘다. 엄청 섹시하다. 미르는 그게 아까웠다.
“다음엔 네 얼굴 보고 하고 싶어.”
미르는 일어나서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도현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의 몸을 살살 쓰다듬었다. 손에 넘치는 그의 단단한 근육들이 더욱 흡족한 기분이 들게 했다.
“알았어요… 하아.”
“아니면 지금 한 번 더 할까? 내 거 만져줘.”
“아… 일단 좀… 이렇게… 가만히 있어요.”
“응.”
아, 그래도 뭐 좀 했다. 미르는 싱글벙글 그녀를 끌어안았다. 생각보다 괜찮고 기분도 좋았다. 이런 식으로 여자가 원하는 대로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진짜 기분 좋게 해준 것 같아서 뿌듯하기까지 했다. 보람 있었다.
그 뒤로 한 번 더 했다. 미르는 당연히 훈련 시간에 왕창 늦어 혼자서 벌로 크러시 천 번에 오라강화훈련 3시간으로 진이 빠질 정도로 굴러야 했지만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
“야, 너 걸즈 다 끊었다며?”
칸칸이 나뉘어 있는 샤워실에서 미르 킹쉴드가 씻고 나왔다. 미하엘 로드리게스가 거울 앞에서 스킨을 팍팍 얼굴에 바르며 그렇게 말을 걸었다. 키는 170 정도 밖에 안되는 어마어마한 단신이었기 때문에 근육이 울끈불끈한 그는 거의 직사각형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짙은 다갈색 머리에 약간의 말상인 그였지만 벽안에 나름 훈남이긴 했다.
“어.”
“뉴걸이랑 살림 차리고?”
“어.”
그렇게 말을 하고 있자 빨간 머리 제수스 강이 울끈불끈한 근육들을 거울에 비춰서 한 번 다 잘 움직이는지 확인해보며 끼어들었다.
“어, 야. 그럼 나 제시카 좀. 걔 진짜 예쁘더라.”
“알아서 꼬셔.”
“아, 잠깐만. 제시카 내가. 나 요새 금발이 완전 땡긴다.”
흑인인 조나단 훅이 굵직한 목소리를 내며 그렇게 말했다.
“알아서 꼬시라고.”
“제시카랑 파티마랑 타냐랑 다 내가 싹쓸이 해도 되냐?”
조나단이 금발만 콕콕 집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미하엘도 끼어들었다.
“그럼 난 빨강머리.”
“알아서 꼬시라고, 병신들아.”
다들 벌써 디바이스로 메시지 보내는 중이다. 그러자 슬슬 포워드 가람 리한이나 미드필더 준 필립도 끼어들었다.
“남은 걸 누구야, 그럼.”
“셀리.”
미르가 답했다.
“아, 셀리 좋지. 몸매 좋고.”
가람 리한이 그렇게 말하며 바로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너 걔들 모으는 거 고생 몇 번 했잖아? 왜 그러냐? 그냥 뉴걸이랑 다 같이 살면 될 거 가지고.”
미하엘은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의 멋진 모습에 심취하여 이쪽저쪽 얼굴을 비춰보고 있었다. 미르는 오늘 아침의 그녀를 떠올리곤 저도 모르게 실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뉴걸 님이 어마~어마하게 까다로우시거든.”
“왜?”
뉴걸은 말 그대로 New Girl이었다. GAS(Girls and Sisters)에 처음으로 데뷔한 여자라는 뜻이다. 선수들 손을 한 번도 안 탄 새삥. 그런 거 다들 관심 많다. 그 뉴걸이 미르의 병문안을 오는 것을 다들 몇 번 봤다. 미하엘이나 제수스는 한두 번쯤 말도 해봤지만 그뿐이었다.
“잘하냐?”
그 여자는 미르 킹쉴드의 취향이나 일반적인 GAS의 스탠다드에서는 많이 벗어나 보였지만(가슴이 작다) 얼굴이야 반반했다. 하지만 원래 그의 걸즈도 반반하기야 끝내주게 반반했으니 남은 건 그거 아닌가?
“몰라. 안 해줘서.”
“응?!”
“벌써 몇 달 만나더니만?”
제수스와 미하엘이 미르를 뭐 잘못 먹은 놈을 보듯이 봤다. 마음에 드는 여자는 자고로 만나자마자 바로…!
“우리 뉴걸 님은 봉사만 받으신단다. 그래도 기분 좋더라. 약도 안 하고 했는데.”
미르가 뭐 놓은 놈처럼 계속 실실 웃었다. 미르보다도 큰 덩치의 제수스와 TFC 최단신 미하엘이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어… 그 말은 전설의 명기라는 소린가? 어?”
다른 놈들이 킹쉴즈 걸즈를 다 선점하자 입맛을 다시던 준 필립이 그렇게 말하며 관심을 보였다. 좀 착각을 한 것이 분명하다.
“엇, 누가. 누가 명기야? 그건 금발 아니어도 좋다.”
메시지 보내느라 정신이 없던 조나단이(세 명이니까) 그렇게 끼어들었다.
“기왕 여자 끊기로 한 거면 뉴걸도 넘겨라. 뉴걸 좋더라. 뭔가 도도해 보이고. 난 마음에 들었다.”
미하엘이 말했다. 미르는 화도 내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근데 걔 데리고 살려면 걔 빚부터 해결해줘야 한단다.”
“응? 뭐… 얼만데?”
뉴걸 중에는 그렇게 데뷔하는 여자들도 심심찮게 있는 편이니 이상할 건 없다. 미하엘은 로션도 단계별로 잘 바르며 물었다. 미르가 간단하게 답했다.
“천억.”
“…뭐?!”
미르의 주위에 있던 선수들은 전부 제 귀를 의심했다. 미르는 그들의 반응에 어쩐지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
“야, 구라치지 마. 빚을 어떻게 천억이나 져? 천만 원이겠지!”
미하엘이 그렇게 말했다. 싸게는 천만 원짜리 뉴걸도 있긴 했었다.
“진짜야. 천억. 나도 깜짝 놀랐다.”
보통 GAS들 중에 본인의 연예계 데뷔나 명성을 위해 데뷔하는 아주 소수의 여자를 제외하고는 빚이나 돈 때문에 들어오는 여자들이 대부분이다. 보통 1년에 얼마를 쓰겠다든가, 빚을 탕감을 해주는 대신에 선수랑 얼마동안 산다는 계약을 하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경우 그들의 빚은 많아봤자 몇억 수준이었다. 애초에 개인한테 담보도 없이 그 이상의 돈을 빌려주는 금융기관은 없다. 선수들마저도 어린 시절 팔려가야만 했던 빚이 1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통 몇천만 원이다.
“야… 너 돈 있냐? 너 뭐 걸즈들 병원 보내준다고 돈 다 썼다고 들었는데?”
걸즈들끼리 가십은 아주 빠르다. 미르의 걸즈와 미하엘의 걸즈는 사이가 좋기도 했다.
“없어. 그래서 올해 연봉 나오면 그냥 반은 걔 빚 갚는데 다 넣으려고.”
미르가 기지개를 쭉 펴며 슬슬 자기도 뭘 바르고 머리를 말렸다.
“미쳤냐?”
말이 연봉이 6백, 7백이지 그거 반이 적은 돈이 아니었다. 걸즈를 내보낸 게 결국 그 유지비를 다 한 여자에게 올인하겠다고 그런 거라 하더라도 약값이나 술값으로 쓸 돈이 팍팍 줄 게 뻔했다.
“약도 끊겠다, 너?”
“응~”
미르는 방향을 바꾸어 몸을 쭉 늘렸다.
“약 안 한지 꽤 됐다. 약 안 하는 게 더 좋아.”
“…….”
이러니 다들 진짜로 미친놈 보듯이 보고 있었다. 미르 킹쉴드는 정말 약을 안 하고 있었다. 밖에 나가서 이상한 짓을 하던 것도 그녀를 만나고 나서는 어느샌가 뚝 끊겼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에 그를 고민하게 하는 문제도 사라지고 그녀와 사이도 좋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 하품을 하면서 한참 머리를 말리다가 진짜 죄다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자 미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짠데?”
“이 새끼… 감독님한테 말해야 하는 거 아냐? 이상하다? 어? 정신 감정, 뭐, 그런 거 받아야 하는 거 아냐?”
제수스가 조나단한테 그렇게 말했다.
“진짜 구라 아냐? 천억이면 1년에 이자만 백억 뭐 이렇게 나올 텐데.”
미하엘은 거기부터 영 믿기지 않는지 그렇게 말했다.
“맞다. 그렇더라. 이자만 그렇게 나오더라.”
“야, 그건 어디 팔려가도 못 갚아. 상하이 팔려가도 못 갚을 걸? 애 백 명쯤 낳아도… 5백억인데… 미친.”
미하엘이 그렇게 계산을 했다.
“아니, 우리 뉴걸 님이 또 능력이 있으셔서 알아서 이자를 막고 계신다. 정원이랑 수영장 엄~청 크게 딸린 집도 서울에 가지고 있고 수영장 딸린 크루즈도 있고 그래.”
미르는 아닌 척 자랑했다. 그러자 약간의 침묵 끝에 제수스가 툭 말했다.
“그런 여자가 널 왜 만나.”
저 말 나올 줄 알았다. 미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엄청 호쾌하게 미소를 지으며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근데 날 만난다는 거 아냐! 큭큭큭. 나 진짜 능력 쩔지 않냐? 존경해라.”
“아… 내가 봤을 때 이거 거짓말이야. 어. 거짓말.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미하엘은 회의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르가 검지를 까딱까딱 좌우로 움직였다.
“사진 보여줄까~”
그러자 엄청난 덩치의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서 미르 킹쉴드의 디바이스 홀로그램을 보았다. 집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일단 대문에서 한 방, 정원, 집, 끝내주는 집안의 인테리어와 침실, 부엌, 3층의 테라스에서 찍은 넓은 정원의 모습.
“와… 이런 집은 얼마냐?”
“못 해도 몇백억 할걸.”
서로 알아서 자문자답하는 그들이었다. 그리고 미르는 도현의 배, 지니 호에서 찍은 사진들도 보여주었다. 바하마에서 지니 호의 전체 모습을 찍은 사진, 야외 수영장에서 여자들과 잔뜩 찍은 사진, 미르가 묵었던 방과 도현의 프레지덴셜 스위트의 사진까지 보여주었다.
“이런 건 얼마야?”
“이건 천억도 넘겠다….”
한 놈이 미르의 홀로그램 사진을 알아서 넘겼다. 마지막엔 그 뉴걸을 뒤에서 끌어안고 장난스럽게 뺨을 깨무는 미르 킹쉴드의 즐거운 얼굴과 그녀의 환한 미소가 담긴 사진이 있었다.
행복해 보였다.
“…….”
“나 요새 너무 좋다. 진짜 기분 째진다.”
미르는 그 사진을 뚫어져라 보는 다른 동료들을 무시하고 팍 디바이스 화면을 끄고는 들뜬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이건… 뭐랄까. 다 같이 죽자고 놀던 난봉꾼들 사이에서 갑자기 한 놈이 난 운명의 상대를 만났어! 라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 자기 여자와 알콩달콩 가정을 꾸리고 새끼를 치는 그런 모습을 본 다른 난봉꾼들의 어마어마한 배신감(?)이랄까.
“그러니까 니들도 이제 정신 차려. 어?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
거기다 이 씹새끼가 뭐가 더 잘났다고 훈계까지 하고 지랄이 풍년이다. 다들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거기다 이 묘한 패배감….
“나 나간다~”
미르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옷을 갈아입고 나갔다. 다들 미르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미하엘이 살짝 인상을 쓰며 다시 거울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잘난 얼굴과 몸을 비춰보며 말했다.
“아, 배 아파서 뺏어야겠다.”
그러자 제수스도 영 신경 거슬린 얼굴로 대꾸했다.
“그러게. 멍청한 새끼가 자랑은 하고 지랄이야.”
근데 여긴 TFC의 세계다.
여자는 힘으로 뺏는 거다.
*
누가 불안할 때 하면 반드시 후회한다고 했던가. 오늘따라 유난히 반질반질 윤이 나는 도현 킬스버그였으나 동료들의 놀림에서 무사할 순 없었다. 미르 킹쉴드는 아직 훈련받을 게 한참 남은 맹수였다.
“그만 놀려요.”
“근데 진짜 작가님 어떡해요. 큭큭. 금요일에 어디 가야 한다면서요. 큭큭큭.”
“금요일이 문제에요. 큭큭. 밖에 어떻게 나가.”
아침부터 영 사람을 사탕처럼 빨아댄다 싶었더니만 그가 나가고 한두 시간쯤 지나 거울을 보았더니 피부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오른쪽 뺨과 목, 어깨는 특히 울긋불긋해서 그대로 둘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남자가 보이는 데 이런 걸 남기는 걸 허락하지 않는 도현이라 할 때 말리긴 말렸는데 그녀도 오랜만이라 영 정신을 못 차렸다. 어쨌든 멍 빠지는 약을 사 와서 잘 발라놓은 상태다.
“아, 진짜 미르는… 말은 잘 듣는 거 같은데 이상한 곳에서 기본이 안 되어 있어요.”
도현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어쨌든 금욕 끝낸 기념으로 파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일단 마감부터 끝내구요.”
토요일이라 다들 마감으로 바빴다. 로웰 쪽은 마감 2일 전부터는 거의 밤샘 작업이었다. 도현은 자신의 1차 마감을 끝내고 로웰의 시중을 들어주고 있었다. 때에 맞춰서 그녀의 입에 과자와 음료를 물려주는 중이다. 그녀가 과자를 먹기 위해 손을 닦고 먹고 또 손을 닦고 작업을 하는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다.
“아… 대충 될 거 같아요.”
“그럼 송선호 오라고 할게요.”
화상 전화, 홀로그램 등 많은 기술이 발전해도 커뮤니케이션은 결국 직접 얘기하는 것이 최고였다. 실시간 수정이 가장 빠르기도 했고. 연락하니 송선호는 금방 집으로 왔다.
“다 되셨습니까?”
“다 됐어요. 채색 조금만 더 하면 돼요.”
“…….”
로웰 리가 들어오는 송선호에게 눈길도 주지 못하고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는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의 눈길은 도현 킬스버그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도현은 엄청난 속도로 채색을 수정하는 로웰의 옆에서 음료수 잔을 들고 있다가 그의 눈길을 느끼고 살짝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미르가….”
“…일단 작가님이 1차로 마감하신 거 체크한 부분입니다. 봐주시죠. 로웰 선생님 건 지금 바로 봅시다.”
송선호는 안경을 추켜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카우치로 가서 앉아 송선호의 메모를 보기 시작했고 로웰은 거실에 차린 작업대에서 그녀와 어시들이 한 작업을 송선호가 같이 보면서 빠르게 체크했다.
그의 역할은 현재 대중의 트렌드와 기존 독자의 니즈, 잠재 독자의 수요를 끌어오기 위한 포인트를 잡아주는 거였다. 로웰은 처음부터 끝까지 송선호가 포인트를 잡는 것에 거의 토 달지 않고 바로 수정을 하면서 작업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수정까지 끝마치니 송선호가 오케이를 하고 거기서 최종 마감이 끝났다. 도현보다 일찍 끝난 것이다. 로웰과 어시들은 의자에 축 늘어졌다.
“전 자러 갑니다….”
“저도….”
윤지호와 신재인은 유령처럼 흐느적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 로웰은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 피곤한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아… 죽겠다….’
그러고 빼빼로를 습관적으로 먹고 있는데 수정을 하고 있는 도현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송선호가 눈에 들어왔다. 옆에서 보니 안경 속에 감춰진 그의 얼굴이 잘 보인다.
‘울것다….’
노관심이다. 자러나 가야겠다. 로웰은 암흑의 기운을 흩뿌리며 발을 질질 끌며 2층으로 올라갔다.
“주무세요. 저녁 때 깨워드릴까요?”
“아뇨. 그래도 도시락은 시켜주세요. 일어나서 먹을게요.”
“네~”
도현은 그렇게 대답했다. 디바이스로 미리 저녁 도시락 주문을 넣어놓고 송선호의 메모에 따라 수정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방향으로 영감을 받아 표현이나 대사를 수정하기도 했다.
“다 됐어. 다시 확인해줘.”
도현이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는 멀티스크린을 보면서 빠르게 확인하고 그대로 마감을 했다.
“으응~ 하. 다시 회사 가?”
도현도 기지개를 쭉 펴곤 카우치 등에 머리를 기대며 잠깐 눈을 감았다. 그대로 몸에서 힘을 빼니 나른하다.
“…….”
송선호가 답도 없는 데다가 약간 느낌이 이상해서 눈을 떴더니 어느새 그가 도현이 앉은 카우치 등받이를 한 손으로 잡고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응? 뭐해?”
그는 도현의 목을 잡고 엄지로 그녀의 턱을 들게 하면서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갑자기 왜… 응…? 야! 송선호!!”
송선호는 그녀의 목을 강하게 빨아서 제일 짙은 흔적을 남겼다. 그가 입술을 떼자 도현이 목덜미를 잡고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송선호는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야… 이런 거 예의 아닌 거 알잖아.”
도현은 그가 그런 걸 모를 거 같진 않아서 화를 낸다기 보단 당황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디바이스를 미러 버전으로 바꾸어 목을 살펴보았다. 약 다시 발라야겠다.
“…….”
사실 둘은 며칠 전에 그러고 제대로 얘기를 못 한 상황이었다. 도현은 아예 그의 변명이나 설명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리고는 그냥 흐지부지되어버렸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여전히 가까이에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도현이 진심이냐는 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또 하게?”
“아니… 미안.”
그녀의 곁에 있는 건 예상대로 힘들었다. 예전보다도 훨씬 더… 그녀는 분명히 미르 킹쉴드와 잠자리를 했을 것이다. 질투는 당연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잠깐 사이 순서가 밀렸다는 생각에 패배감도 들고, 무엇보다도 가슴이 시큰거리며 아프다. 송선호는 그녀에게서 떨어지면서 속삭였다.
“전엔 미안해. 사랑해.”
이전에도, 그녀가 다른 남자들과 잠자리를 하는 것을 수없이 봤어도 결국 그녀에 대한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번이라고 다르지가 않다는 게 그의 가장 큰 불행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어쩐지 그녀의 눈을 볼 수가 없었다. 도현이 멀어지는 그의 넥타이를 잡고 끌어당겼다. 바로 눈을 마주쳤다. 도현은 약간 인상을 쓰며 미소를 지었다.
“널 잘 모르겠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손에 살짝 넥타이를 말며 더 잡아당기자 송선호가 시선을 피하면서 약간 인상을 썼다.
“뭘.”
“질투나?”
“…….”
“근데 그날 왜 그랬어?”
도현은 천천히 그의 안경을 벗겼다. 송선호는 더 인상을 쓰며 눈을 마주쳤다.
“사랑하는 여자랑 하고 싶은 게 이상한 거야?”
“사랑하는 여자가 해달라는 대로 하고 싶지는 않아?”
“미르 킹쉴드는 불평 안 하고 그렇게 해줬어?”
“응.”
“…….”
그러자 송선호가 움찔하며 인상을 더 찌푸렸다. 그는 허리를 펴서 일어났다. 흐트러진 자기 넥타이를 천천히 바로 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알았어. 도쿄 가자. 언제 시간 돼? 금요일?”
“아, 금요일은 선약.”
“…그럼 그 다음 주는.”
“괜찮아.”
송선호는 도현의 손에서 안경을 가져와 다시 쓰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다시 허리를 숙여서 그녀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밉다….”
그는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
요즘은 약이 좋아서 멍 빼는 연고를 발랐더니 피부는 하루 만에 멀끔해졌다. 그리고 며칠 뒤 웨스트이글 로얄팰리스 파티를 위해서 미르 킹쉴드와 해러드로 왔다.
“그래도 좀 격식이 있는 자리잖아요. 미르도 싹 머리 정리해서 넘기고 이런 거 입으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수선이 바로 되려나. 전체적으로 새하얀 미르 킹쉴드였지만 약간 윤이 나는 검은색 정장을 입으면 커다란 흑표범 같이 섹시할 것 같았다. 흰색이나 검은 셔츠를 하고 풀윈저 넥타이에 어두운 회색 베스트까지 쓰리피스로 입으면…. 남성 정장 명품 브랜드에 와서 직접 미르의 몸에 대어보는 도현 킬스버그였다.
“네가 마음에 드는 걸로 해.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미르는 그냥 도현의 손을 잡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주 싱글벙글했다. 그는 자신이 앞서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멍청한 샌님 마도사나 그 번듯한 도련님은 여자를 몰라요. 여자란 자고로 자신이 남자를 쥐락펴락하고 있다고 믿을 때 가장 남자한테 빠져드는 법이다. 자신의 말에 남자가 귀를 기울인다고 생각할 때, 남자가 자신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싶을 때의 그 느낌에 중독되니까.
‘뭐, 나도 완전 좋아하고.’
경쟁에 뛰어들어서 승자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여자를 다른 선수에게서 뺏거나 인기가 있는 여자를 차지하는 건 언제나 좋다. 그가 뛰어난 남자, 강한 수컷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니까. 쟁쟁한 수컷들 사이에서 이겨서 그 트로피로 아름다운 여자를 가진다는 건 모든 수컷들의 존재이유이자 존재방식이다. 그 어떤 스포츠에서 이기는 것만큼 기분이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약하고 거세된 수컷들이나 경쟁하는 것조차 무서워할 뿐, 아름답고 건강하고 뛰어난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것은 승패를 떠나서 그 자체로도 즐겁다. 게다가 이번엔 육체적으로 강한 남자들뿐만이 아니라 그 샌님이나 있는 집 도련님까지 끼여도 그가 이긴다는 거 아닌가. 더더욱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구두는 이게 어울릴 것 같은데요, 킬스버그 님?”
“아, 정말. 좋다.”
직원이 미르의 발 앞에 사이즈가 맞는 구두를 놔주었다. 홀로그램으로 예상 핏을 보았다. 썩 잘 어울렸다. 그녀는 보는 눈이 있다. 평소 그가 입는 것만큼 화려한 편은 아니었지만 마음에 들었다.
“수선 이대로 진행할까요?”
“그럴까요, 미르?”
“응. 네 마음에 들면.”
“그렇게 해주세요.”
그녀는 살짝 미소를 띄운 얼굴로 직원에게 말했다. 도현은 오늘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었는데 손등까지 내려오는 슬리브와 무릎에서 5cm 위까지 내려오는 기장에 가슴이 살짝 파이는 우아하고 예쁜 옷이었다. 거기에 얇은 백금줄에 겹겹이 이어진 다이아몬드 다섯 개가 달린 목걸이를 하고 오른손에 있는 반지와 귀걸이 또한 다이아몬드였다. 구두도 스와로브스키 스톤이 잔뜩 달린 반짝이는 도로시를 신고 있었다. 남색 머리카락을 쫙 펴서 등 뒤와 오른편으로만 단정하게 내렸다. 아마 멀리서 보면 조명을 받은 그녀가 차분하면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넌? 뭐 입고 싶어? 제일 예쁜 걸로 골라.”
자기 옷을 고르는 게 끝나자 미르는 다시 도현의 허리에 팔을 둘러 그녀의 배를 자기 손으로 다 감싸듯 잡았다. 도현은 그의 손등을 자연스럽게 잡으며 고민했다.
“발렌티노부터 가볼까요?”
“그래.”
가서 미르도 도현의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아예 시스루로 안이 다 비치는 드레스를 잡자 도현이 웃었다.
“아, 한 번만? 어? 한 번만 입어줘.”
“이런 걸 어떻게 입어요?”
“아니, 딴 놈들 앞에서 말고 내 앞에서만. 어? 완전 예쁠 것 같은데.”
그리고는 미르가 훅 다가와서 도현의 귀에다 속삭였다.
“니 XX랑 XX까지 다 보이게.”
“진짜! 미르~!”
도현이 미르 킹쉴드의 가슴을 밀며 살짝 질색을 하면서도 웃었다. 미르는 앙! 하며 장난을 치며 그녀의 귀를 물었다. 도현을 잘 보다가 약간 진주빛이 도는 옅은 베이지색이랄까, 반짝이는 장식이 연하게 옷감 위를 감싼 튜브탑에 발끝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드레스를 골랐다. 전체적으로 타이트한 드레스였다.
‘음… 구두도 한 13, 4cm는 신어야겠지? 귀고리만 하고… 머리는 피스 붙이고….’
도현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의 몸에 드레스를 대봤다. 미르는 어랏 하고 물었다.
“다들 엄청 파지고 야한 거 입을 텐데. 이 정도로 괜찮겠어? 더 막 이런 거야 하지 않을까?”
미르는 아까 자신이 고른 안이 훤하게 보이는 드레스를 흔들었다. 거기에 다리 옆선과 엉덩이, 허리까지 다 밖으로 보이는 드레스도 집어 들었다. 도현이 웃었다.
“그런 건 내 스타일 아니에요, 미르.”
“그래도 이거 사자, 응? 한 번만 입어줘.”
“아, 싫어요. 미르나 입어요.”
“응? 남자가 이런 거 입는 거 좋아해? 내가 한 번 입어줘?”
미르는 자기가 들고 있던 드레스를 자기 몸에 대주었다. 도현이 약간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어… 진짜?”
도현이 미르를 돌아보았다. 미르가 옷을 대보는 도현의 뺨을 앙 물려다가 그녀가 피하자(화장 망가진다) 다시 귀를 물었다.
“응. 뭐든. 우리 킬스버그 님이 원하시는 건 내가 다 해드려야지.”
“진짜죠….”
도현은 번뜩 떠오른 게 있는지 거울을 통해서 미르와 눈을 마주쳤다. 미르가 씨익 웃었다.
“뭘 입혀도 잘 어울릴 거 같지 않아? 응? 내가.”
“흐응….”
“그럼 이거 입어줄 거야?”
“…일단 생각해볼게요.”
“아싸.”
그래서 드레스를 두 벌 샀다. 구두랑 귀걸이는 집에 있는 걸로 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런 드레스를 입을 때는 많은 악세사리를 하지 않는 법이다. 산 건 차에 두고 도현이 먹고 싶다는 음식이 있는 레스토랑에 가서 먹고 웃고 떠들다가 집에 들어오니 시간이 생각보다 늦었다. 현관에서 들어갈 때 미르가 뒤에서 도현에게 장난을 쳤다. 그는 도현을 막 끌어안고 간지럽히면서 현관으로 들어갔다.
“하하. 간지러워. 아, 간지럽다니까요. 하하.”
그녀가 웃었다. 기분 좋다. 미르는 그녀의 뺨에 쪽 입을 맞추면서 말했다.
“오늘 같이 자자. 하기 싫으면 손만 잡고 자도 되고.”
그러자 도현이 뒤로 돌아 미르의 목을 두 팔로 안으며 쪽 입술에 입을 맞췄다.
“같이 자요.”
미르는 활짝 웃었다. 역시 세상에 그를 싫어하는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
금요일 저녁, 준우승을 한 메트로서울 웨스트이글 선수들을 위해 구단주 제임스 첸 주최하는 파티는 메트로서울 한복판에 있는 로얄팰리스 타워 꼭대기에서 개최되었다. 제임스 첸의 일정 때문에 조금 늦은 축하 파티였다. 프라이빗 파티라 취재진의 접근은 제한되었다.
구단주인 제임스 첸은 중국계 인도인이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뭘 해도 ‘크게’ 한다는 것이다.
도현과 미르가 빨간색 카펫을 밟으며 입장하니 바로 보인 것은 파티장 한 가운데 있는 천장까지 쌓은 샴페인 타워였다. 아래에서 조명을 쏘아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그리고 샴페인 잔으로 만든 타워 둘레로 한 병에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샴페인이 몇 줄이나 둘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십자 모양으로 스트리퍼들을 위한 스테이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엄청난 가슴과 엉덩이를 가진 여자 스트리퍼들이 봉을 잡고 요염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에 어울리는 박자로 음악이 울린다.
벽을 따라서는 화려하게 데코레이션이 된 음식이 비치되어 있었다. 엄청난 크기의 게와 랍스터에는 화려한 금칠이 되어 있었다. 반은 실내 파티장이고 반은 야외 파티장으로 실내 파티장만큼 넓은 야외 테라스에는 꼬냑이 흐르는 와인 폭포(저건 저렇게 마시는 게 아니다….)와 거대한 불을 피워놓고 가장자리마다 강한 온풍기와 화로를 피워 아직 쌀쌀한 날씨에도 여자들이 살이 드러낸 옷을 입고 다녀도 문제가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게다가 준우승을 위해 고생한 선수들에게 금일봉으로 줄 금괴를 야외 테라스와 실내 파티장의 중간에 산으로 쌓아놓았다.
들어가자마자 도현은 입을 딱 벌렸다. 전에 송선호와 갔던 회원제 레스토랑 <천요정>이 하나하나 허투루 마감된 것이 없는 인테리어, 야경, 음식, 사람 등이 최상류층의 클래스를 확연히 보여줬다면 여기는 말 그대로 세상의 부를 모아놓은 듯 화려했다. 혹자는 천박하다고 말할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충격적일 정도다.
금에는 사람의 이성을 빼앗는 마법이 걸려있는 것이 분명했다. 은행 마크가 선명한 금괴 더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 여자를 적어도 넷씩 두르고 다니는 웨스트이글의 선수들은 마치 암컷을 여럿 거느린 수컷 사자 같았다.
도현은 입을 다물 생각도 못 하고 계속 파티를 구경했다. 이렇게 많은 음식에 전부 금박이 되어있는 것 처음 봤다.
“킹쉴드 군.”
“제임스, 오랜만이네요.”
동시통역기를 통해 넘어온 목소리는 약간 딱딱하게 들렸지만 의사소통을 하는데는 충분했다. 70대 노인인 제임스 첸은 22세기 의학의 힘을 빌어 표준 나이 기준으로 50대 정도로 보였다. 그는 정확하게 똑같은, 몇백 개나 되는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진 목걸이를 하고 찍어낸 듯 이를 드러낸 미소를 지은 여자 다섯을 뒤에 거느리고 나타나 미르와 악수를 했다.
“이번 시즌에도 고생 많았네. 이번에 제일 고생했어.”
“아뇨. 우승할 수 있었는데 못해서 열만 받았는데요.”
“하하. 그래. 다음 시즌은 우승하세. 몸조심하고. 보자.”
제임스 첸은 선수와 말을 할 때마다 그들의 몸에서 손을 떼질 못했다. 미르의 팔과 가슴을 엄청 만지는 노인네였다.
“누구? 못 보던 얼굴인 것 같은데.”
그리고 도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미르가 소개했다.
“아, 새로 만나는 여잡니다.”
“그래? 나머지는?”
그는 미르의 뒤를 슥 보았다.
“지금 이 여자한테만 올인이거든요.”
“그래? 반가워요. 잘 즐기다가요, 뉴걸 양.”
제임스 첸은 도현과도 한번 악수를 하고는 다른 선수에게로 옮겨갔다. 도현은 화려한 여자 5명이 마치 조명처럼 그를 비추러 따라다니는 것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아마 태어나서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돈 많은 사람이겠죠….”
“그렇겠지?”
“저거 봐요…. 저거 다 얼마일까요?”
도현은 다시금 금괴의 산을 보았다. 1kg 금괴가 오백 개 정도는 쌓여 있는 것 같았다.
“이번 시즌만 해도 저거 몇십 배는 버셨을 양반인데.”
그렇게 말하고 미르는 가운데 있는 화려한 수정 기둥에 등을 기대고 도현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네가 오늘 여기서 제일 예뻐.”
미르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가슴부터 발끝까지를 진주빛이 나는 타이트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피스를 붙여 아래쪽에만 자연스러운 웨이브를 넣은 그녀는 정말로 파티에서 제일 눈에 띄는 여자였다. 도현은 늘씬하게 쭉 뻗은 목과 어깨를 드러낸 우아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GAS는 선수들의 천편일률적인 몰취향에 의하여 전부 비슷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슴과 다리가 훤하게 드러나는 옷차림, 바짝 태닝을 한 피부와 짙은 화장, 화려한 장신구. ‘다르다’라는 것 하나만으로 튈 수밖에 없었다.
“근데 사람들이 너무 쳐다보는 것 같아요.”
선수들은 다들 미르보다 조금 더 화려한 느낌으로 정장을 껴입고 있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맹수를 직접 볼 때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이 위협적인 느낌이 내재되어 있었다. 병원에서 골골거리며 휠체어나 침대에 늘어진 것만 보다가 이렇게 모여 있는 것을 보니 약간 무섭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다 네가 예뻐서 그래.”
미르 킹쉴드는 그냥 싱글벙글이었다. 그녀의 핑크빛이 도는 하얀 피부가 빛에 반짝거리는 것만 같다. 다른 여자들에 비해 가벼운 화장이라 오히려 아름다운 피부와 이목구비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미르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한 그녀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아니… 그래도 너무 쳐다본다니까요.”
어떤 선수의 눈은 마치 고양이과의 동물처럼 빛이 번뜩 났다. 도현이 돌아보면 하나 같이 눈을 한동안 마주치고 있다가 천천히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 좀 어두운 데 있는 놈들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어.”
“왜요?”
미르가 자신의 눈 위를 손으로 가리며 눈가에 그림자가 지게 했다. 도현은 깜짝 놀랐다. 그의 눈에서 순간 밝은 안광이 나왔기 때문이다.
“집중하면 적외선이랑 자외선도 볼 수 있거든.”
“진짜요?”
그건 몰랐다. 도현은 자신이 미르의 눈썹 위에 차양을 만들고 다시 자세히 그의 눈을 보았다. 그랬더니 미르가 쪽 하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도현이 주변을 보며 그의 턱을 약간 밀었다.
“아, 공공장소에서….”
“뭔소리야. 다들 하는데.”
미르는 그녀의 뺨에 쪽쪽 입을 맞췄다.
“아! 화장 망가져요. 오늘따라 왜 이래, 이 남자가.”
미르는 들뜬 기색으로 도현의 뺨에 입을 맞추며 흐흐 웃더니 기어코 그녀의 입술에 다시 쪽쪽 입을 맞췄다. 혀까지 넣으려고 해서 그의 얼굴을 또 밀어냈다.
“아, 하지 마. 진짜.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요.”
“좋아서, 응? 너무 좋아.”
그는 진짜로 들떠 있었다. 드디어 그녀를 모두에게 직접 자랑할 수 있어서다. 여기 있는 모든 여자들 중에서 그녀가 가장 뛰어나고 대단한 여자인 건 확정이다. 그녀는 똑똑하고 이런 곳에서도 자신을 가장 돋보이게 할 줄도 알고 능력도 있고 그를 협박할 정도로 겁도 없는 여자다. 데리고 오기 정말 잘했다. 다들 부러워서 쳐다본다. 너무 좋다.
하지만 도현은 뭔가 안정이 안 되는 기분이었다. 볼거리도 많고 멋진 파티인데 왠지… 전엔 먼저 송선호에게 공공장소에서 입을 맞췄던 도현이지만 여기는 뭔가 그런 걸 하기가 긴장이 된다. 피부가 따끔따끔했다. 중인환시 속에 그와 둘만 서 있는 기분인데 그는 익숙해서 그런 건지 신경도 쓰지 않고 도현만 약간 불편한듯 만듯한 기분이었다. 원래 남의 시선 같은 건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 도현인데… 이건 그런 시선과는 다른 것 같았다.
“이리 와요. 음식이나 먹어요.”
“그럴까?”
미르 킹쉴드는 그냥 실실 웃으며 그녀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웨이터가 금박이 된 킹크랩에서 먹을 부위를 잘라서 접시에 덜어주었다. 도현은 한 입 먹어보고 미르의 입에도 포크로 음식을 넣어주었다. 자연스러웠다. 그녀가 마치 병원에서 해준 것처럼 음식을 먹여주니 미르는 기분이 매우 좋아 가르릉거리는 맹수 같이 그녀에게 괜히 몸을 부대꼈다. 도현은 또 뺨에 입술을 부비는 그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어리광이 심해….”
도현은 미르가 자신에 대해 동료들에게 엄청 자랑했고 그걸 지금 과시하고 있는 거란 걸 알 턱이 없었다. 도현은 좀 심하게 들뜬 그를 보고 결국 좀 웃고 넘어갔다. 신이 아주 공들여 빚어 놓은 것 같은 세계 최강이라는 2미터짜리 남자가 이렇게 구는 건 의외로 귀엽다. 어린애 같은 남자는 딱 질색이던 도현이었는데 말이다. 음, 어린애라기보단 진짜 맹수를 길들이는 느낌이라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볼거리가 많은 파티이니 도현이 엄청 좋아하고 즐길 만한 파티인데도 그녀가 어느 정도 본능적으로 불안감을 느끼는 건 바로 그 맹수 같은 남자들이 하나 같이 그녀를 먹잇감 보듯이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진짜 미르… 나 화장 고쳐야 할 것 같아요.”
미르가 너무 쪽쪽거리니 도현이 결국엔 또 웃으며 자신의 얼굴을 잠깐 만져보았다.
“괜찮은데.”
“미르가 분명히 립스틱 다 먹었어요.”
“어차피 고쳐도 또 내가 먹을 건데?”
“그래도 고쳐야겠어요. 아, 좀 놔요.”
“같이 가.”
“여자 화장실에? 안 돼요.”
“왜?”
“안 돼요.”
미르는 도현을 따라 여자 화장실 앞까지 따라갔다가 자기도 미리 물이나 빼놓을까 해서 남자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러자 제수스 강이 눈짓을 했다. 가람 리한과 조나단 훅, 미하엘 로드리게스까지 어슬렁 자리에서 일어났다. 행동할 때가 온 것이다.
*
‘그래도 재밌네. 엄청 화려하고.’
아까 선수들과 함께 샴페인 타워를 채울 땐 정말 장관이었다. 금괴의 산도 몇 번이나 직접 만졌다. 실물로 그렇게 많은 금을 본 건 처음이었다. 몰래 사진도 찍어놓았다. 이런 거 두 번 보기는 힘들 것이다.
‘사실 다이아몬드도….’
세상 다이아몬드 중에 볼 만한 건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제임스 첸이 데리고 다니던 여자 다섯이 하고 다니던 다이아몬드 목걸이만 합쳐도 다이아몬드 2천 개는 가뿐히 넘을 것이다.
거기에, 남자 스트리퍼들이야 그녀 나름대로도 많이 봤지만 여기 여자 스트리퍼들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그 볼륨이라니.
‘여기 기준에는 진짜 작은가 봐.’
도현은 피부 화장을 수정하고 립스틱을 바르다가 거울에 자신의 몸매를 비춰보았다. 꽉 찬 80C 정도는 되는데…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거울에 딱 봐도 볼륨감이 훌륭한 가슴들이 여럿 나타나기 시작했다. 못 해도 더블D에서… G컵까지? 그녀가 깜짝 놀라 시선을 올려 등장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여자들….
“안녕?”
“네… 안녕하세요…?”
날 아나? 어째 여기 있는 모두가 그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버릴 수가 없는 도현이었다. 금발 머리가 셋에 빨강 머리 하나, 갈색 머리 하나…. 그들은 하나 같이 글래머한 몸매에 섹시하게 태닝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목구비를 강조하고 뺨에 쉐딩을 넣은 화장까지 비슷하다. 하나 같이 끝내주는 미녀였다. 그들은 화장실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두 명은 거울 보고 세면대 앞에 서고 세 명은 뒤에 주르륵 서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도현은 입술을 바르면서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그들을 힐끗거렸다.
‘뭐지….’
“그이는 잘 있어?”
도현의 옆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페이퍼타월로 손을 닦는 빨간 머리, 레이시가 그렇게 물었다. 도현은 그 순간 떠올랐다. 예전에 미르와의 스캔들이 떴던 그 가십지에서 봤다.
‘킹쉴즈 걸즈!’
“아….”
그의 전 여자친구들인 것이다. 그것도 다섯 명 전부! 그 순간 도현 킬스버그는 왜 여자를 한꺼번에 다섯이나 만나는 남자와 사귀면 안 되는지 깨달았다. 쪽수에서 밀린다.
도현이 세면대에서 몸을 돌려 뒤에 서 있는 세 명의 금발머리를 보자 그중에서 제일 키가 큰 타냐가 위협적으로 척척 다가와 도현을 세면대와 자신의 사이에 가두었다. 그녀의 커다란 E컵 가슴이 도현의 가슴을 꽉 눌렸다. 그녀는 도현의 턱을 잡았다.
“네가 그렇게 비싸게 군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타냐는 도현을 가늠하듯 턱을 잡고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그녀의 가슴도 자세히 보았다. 심지어 도현의 가슴을 잡아보기까지 했다.
“수술은 안 했네?”
“…몸에 이상한 거 넣는 건 질색이라. 근데 넌 수술이네?”
물론 도현의 깡이란 세계 최강이라는 남자들도 협박할 정도니 이 정도 위협에 굴할 리 없었다. 그러자 타냐가 픽 웃었다.
“곱게 자라서 영 분위기 파악이 안 되나 봐? 어?”
“곱게 안 자라서 이런 거 우습다는 것도 모르나 봐?”
타냐가 욱 해서 손을 치켜들자 도현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아, 퀸이랑 사라 때문에 운동 좀 하기 잘했다. 이런 데 쓸 날이 올 줄이야.
“여기서 머리채 잡고 싸우면 우리 다 꼴 우스워지는 거야. 왜 이래?”
“이 쌍년이… 안 놔?”
도현은 타냐의 손목을 좀 더 잡고 있다가 놔주었다. 타냐와 그대로 눈을 떼지 않고 서로 노려보았다. 뒤에 서 있던 파티마가 타냐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만해.”
“잠깐만, 놔 봐. 이 쌍년아, 눈 안 깔아?”
“너나 깔아.”
그와는 정리가 되어서 이런 데는 안 올 줄 알았는데 다 와있다. 어떻게 된 일인가. 파티마가 타냐의 팔을 더 끌어당기자 타냐가 도현의 발 치에 침을 뱉었다. 드레스에 묻을까 봐 황급히 한 발 물러났다.
“미안. 근데 우리도 너 때문에 꽤 곤란해져서.”
금발에 녹안을 가진 굉장한 미인, 제시카였다. 그녀가 한숨을 쉬면서 도현을 보았다.
“너 때문에 우리 꼴이 지금 말이 아니야.”
“왜?”
도현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약간 인상을 썼다. 도현은 그들에게 피해 같은 걸 끼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실제로 대면하는 것도 처음이고 애초에 여자를 다섯이나 데리고 사는 남자니 그가 자신을 꼬실 때도 그들에게 굳이 죄책감 같은 걸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할 땐 분명히 걸즈와 정리하고 들어왔다고 했다.
“그냥 조용히 걸즈 들어오면 안 되는 거였니? 왜 미르가 우리 다 버리게 만들어? 우린 어떡하라고.”
제시카가 말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사귀다가 헤어질 수도 있는 거잖아.”
도현이 말했다.
“아무리 뉴걸이라지만 기본은 알아야 하는 거 아냐?”
갈색 머리의 셀리가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황당해서 되물었다.
“뭘?”
“우리 만한 걸들은 옮겨갈 때 계약조건이 높다고. 근데 미르가 너 때문에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는 바람에 다들 가격을 후려치려고 한단 말이야.”
이건 선수가 경기 중에 죽어버릴 때나 생기는 일이었다. 적이 없는 GAS는 대부분 빨리 새로운 선수를 물지 않으면 금방 생활에 문제가 생긴다. 그걸 아는 선수들은 그럴 때 아름다운 GAS를 헐값에 사들이려고 한다. 차라리 옮겨갈 거라면 한 선수와 계약 중에 다른 선수를 유혹해서 여유롭게 그에게 옮겨가는 게 훨씬 더 좋은 조건으로 옮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그들 같은 GAS가 한꺼번에 시장에 나오게 되면 어중이떠중이까지 다 덤벼든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미르 킹쉴드가 데리고 있던 걸즈가 다섯이나 나왔다는 소문이 쫙 돌아 한중일 빅 클럽이나 안면이 있는 선수에게서 연락이 너무 많이 오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계약조건은 미르와 살 때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선수들은 버림받은 걸즈가 어떤 상황에 처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병원 같은 데 보낼 돈을 그냥 주지. 왜 쓸데없는데 돈을 써서…. 어차피 딴놈 만나면 똑같은 건데.”
레이시가 그렇게 한숨을 쉬었다. 걸즈도 병원에 보내라고 한 것은 도현이 미르에게 말한 것이었다. 그게 적어도 사귀었던 여자들에 대한 예의라고.
“…….”
도현은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 아닌가? 물론 사치를 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그렇게 여섯 명의 여자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그래서 미르랑 헤어지라고?”
도현이 침묵을 깨고 그렇게 물었다. 파티마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들어보니까 돈으로 그렇게 곤란한 상황은 아닌 거 같은데. 그래주면 고맙지.”
“하….”
도현은 어이가 없어서 그런 소리를 냈다. 그녀는 다시 거울을 돌아보고는 립스틱을 마저 바르기 시작했다.
“글쎄. 내가 왜 너희 그런 상황까지 신경 써줘야 하는지 모르겠네. 미르가 필요할 때까지 집에 지내도 된다고 한 건 알고 있는데. 알아서 능력껏 해.”
도현이 말했다. 그러자 타냐가 결국 그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싫어, 이 개년아. 우린 미르가 좋다고!”
“놔!”
도현이 팔꿈치로 타냐의 얼굴을 때렸다. 그러자 결국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말리려고 하던 다른 여자들도 도현에게 손을 대려고 했다. 결국엔 진짜 5대 1로 싸워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쾅!!!
그때 남자 화장실 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서로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여자들이 깜짝 놀라서 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그리고 곧 여자 화장실의 벽이 우르르 무너지자 너나 할 것 없이 화들짝 놀라서 그쪽에서 멀리 물러났다.
그리자 보이는 건 각이 잘 잡힌 비싸고 화려한 명품 정장을 입은 커다란 남자들이 쓰러진 남자를 둘러싸고 서 있는 모습이었다.
“아, 씨팔… 반항은 하고 지랄이야.”
쓰러진 남자는 미르 킹쉴드였다. 세계 최강이고 나발이고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미하엘 로드리게스가 그의 머리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제수스 강이 팔을 털었다. 조나단 훅도 남자 화장실의 거울을 보며 머리를 싸악 뒤로 다시 넘겨 정리했다. 그리고 그는 남자 화장실 거울에 비치는 한 무더기의 여자들 모습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기뻐했다.
“오! 한꺼번에 다 모여 있어.”
“진짜네? 아싸~”
“아.”
다른 놈들은 좋아했지만 미하엘은 약간의 계획 차질을 감지했다. 원래 이런 건 조용히 남자를 배제하고 여자를 꼬셔야 하는 건데.
‘아, 벌써 겁먹었다.’
미하엘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여자가 그를 대할 때 너무 겁을 먹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너무 겁을 안 먹어도 좋아하지 않지만.
“꺄악…!”
조나단이 순식간에 다가와 노리던 금발들을 한꺼번에 다 허리를 채서 끌어안았다. 그들은 겁을 먹고 있었다.
“연락을 그렇게 했는데 왜 답장을 안 해, 제시카.”
“아뇨… 아직 생각 중이라….”
“생각할 게 뭐가 있어? 그중에 어차피 내가 제일 낫잖아?”
“어허, 그건 좀 경솔한 발언이다.”
처음부터 제시카를 노렸던 제수스도 끼어들어 팔을 잡았다. 가람 리한은 구두에 묻은 콘크리트 먼지를 털고는 들어와서 셀리를 챙겼다. 그는 세면대와 자신의 몸 사이에 셀리를 가두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웃었다.
“항상 예쁘다고 생각했어.”
“그건 고맙지만… 자, 잠깐만….”
그들이 미르의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GAS는 선수들에게 속한 소유물이었다. 주인이 없는 값진 물건들이 길바닥을 굴러 다닌다고 생각해봐라. 미하엘도 천천히 들어와서는 레이시의 손목을 잡아당겨 허리를 안고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도현의 손목도 잡았다.
“아, 많이 놀랬지? 미안하다.”
미하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레이시는 어색한 미소를 띄며 얼른 말했다.
“답장 못 드린 건 죄송해요….”
“아니, 아니. 이해해. 나 같은 놈들이 얼마나 연락을 했겠어. 뉴걸도 오랜만이네. 이름이 도현 킬스버그라고 했나?”
“…….”
…지금 이 남자들이 제정신인가 싶었다. 물론 헤어지고 헤어지지 않고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지금 여기 있는 여섯 명의 여자들은 저기 쓰러진 남자와 연인이었다. 그래, 옛말로 그의 여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지금 그 남자를 단체로 때려눕히고 쓰러진 그의 앞에서 그의 여자들을 가로채는 이건, 무슨… 동물의 왕국이라도 되는가? 아니, 동물들도 이렇게 하진 않는다.
“…일단 놔요.”
도현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다른 손으로 머리를 짚고 그렇게 말했다. 미하엘은 오히려 그녀를 끌어당겼다.
“아, 미안. 미안. 넌 이런 거 처음이니까 놀란 건 이해해.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고 그래. 불편하면 나가서 잠깐 얘기 좀 할까?”
“일단 놓으세요.”
“아, 정색하지 말고. 오늘 진짜 예쁜데. 아깝잖아.”
“사람 부를 거예요. 좋은 말로 할 때 놔요.”
도현은 그를 노려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미하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성격 있네.”
그렇게 안 생겼는데. 미르 킹쉴드가 아주 자랑을 할 만한 여자인 모양이다. 미하엘은 그대로 레이시와 도현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도현은 이런 식으로 남자가 자신을 끌고 가는 건 처음이라 깜짝 놀랐다.
“놔요! 신고할 거예요! 놔…!!”
“아니, 사람들 부르고 싶다며? 그래서 사람들 있는 데로 나가자는 건데.”
미하엘은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태도였다.
“놔!!”
도현이 세면대 위에 있는 자기 클러치에 손을 뻗었다. 디바이스를 꺼내 신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는 남자는 보통 남자가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다른 선수들에 비해 왜소하다고 해도 올해 미르 킹쉴드를 제치고 세계 TFC 선수 랭킹 3위에 등극한 소드마스터였다.
“아니, 왜 내가 나쁜 짓 하는 사람처럼 그래? 얘기만 하자는데.”
“이게 나쁜 짓이라고! 놔! 고소할 거야!”
도현이 소리쳤다.
“어허! 야, 야! 놔라. 여자가 싫다잖아.”
제시카의 손목을 잡고 있던 제수스가 바닥에 떨어진 콘트리트를 발로 띄워 정확하게 미하엘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그리고 뉴걸은 다 노리는 건데 그렇게 들고 슥 나가면 뭐 어쩌자고. 싸우자고?”
“아, 씨발. 뭐, 개새끼야. 니들은 걔들이나 챙기라고.”
밖에 소란이 들린 것인지 다른 선수들이 들어왔다. 도현이 화급하게 외쳤다.
“도와주세요!”
“어… 뭐야? 여기? 벌써 했어?”
미르 킹쉴드와 같은 센터 포워드 포지션의 샤샤 부퍼였다. 그는 굴러다니는 콘크리트를 툭 발로 찼다. 그 뒤로 준 필립, 파샤 신, 짐 브라운 등의 미드필더들도 들어왔다.
“안녕?”
샤샤 부퍼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도현에게 인사를 했다. 도현은 거기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미르만큼이나 티없이 맑은 미소였다. 같은 센터 포워드라 그럴까. 그의 키도 덩치도 미르 못지 않다. 그리고 그는 방심한 미하엘 로드리게스의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씹…!”
그의 허리가 팍 굽었다. 일단 체격적으로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둘이었다. 그가 도현과 레이시의 손을 놓치자 둘은 저도 모르게 서로 껴안고 벽 쪽으로 확 물러났다. 조나단과 같은 라이트 포워드인 프랭크 클라크가 여자들을 잡고 있는 남자들에게 고개짓 했다.
“야야. 일단 다 놔라. 여자들 다친다.”
“씹새끼들아, 우리가 먼전데?”
제수스 강이 한숨을 쉬면서 그렇게 말했지만 그의 말투엔 이미 체념이 섞여 있었다. 전에 신태호의 팔을 자를 수 있을 뻔(?) 했던 미드필더 짐 브라운은 귀를 파고 후 불었다.
“씨팔아, 그럼 저기 뻗어있는 새끼가 임자지.”
“병신, 오늘 내내 정신 빼놓고 있더라. 꼬시다.”
누군가 그렇게 미르를 비웃었다. 제수스, 가람, 조나단이 여자들을 놔주었다. 레이시가 그들에게 손짓해서 얼른 다들 끌어모았다. 그리고 화장실 밖으로 얼른 나갔다. 선수 둘 사이에 잡혀 있었던 제시카는 공포 때문에 다리가 풀려서 다른 여자들이 부축해서 옮겨와야 했다. 저 남자들이 욱 해서 힘만 좀 더 줘도 그대로 간단히 팔이 뜯어질 수도 있었다. 그런 사고가 정말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일어나곤 했다.
“디바이스 내놔. 신고할 거야.”
도현은 열이 뻗쳐서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클러치는 아직 화장실 안이었다. 그러자 파티마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안 돼. 신고하면 우린 더 이상 선수들 못 만나.”
“뭐라고?”
도현이 황당하기 짝이 없어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곧 여자 화장실이 아예 터져나갔다. 그러자 큰 음악 소리에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들이 거기를 다 돌아보았다. 술을 질펀하게 마시고 있던 스튜어트 감독이 뭔 일인지 깨닫고 야구 모자를 벗어 그걸로 잠깐 얼굴을 감싸고 있다가 누군가에게 손짓했다.
“강재야, 쉴드 쳐라. 오펜스, 쉴드.”
그러자 뭔가 바람이 분다 싶더니 층 전체와 사람들을 지키는 쉴드가 쳐졌다. 그리고 스튜어트 감독이 직접 여자 화장실로 갔다.
“나와! 나와, 이 웬수들아! 싸우려면 쉴드 안에서 싸워!!”
그도 소드마스터였기 때문에 잡히는 대로 선수들을 잡아서 밖으로 끄집어냈다. 더 부수면 이게 다 돈이다. 제임스 첸은 허허 웃으며 자리를 잡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도현은 더 황당했다. 이게 처음이 아닌가 보다.
“아, 작가님! 아, 맙소사….”
그때 미르 킹쉴드의 매니저 박샘이 도현을 찾아왔다. 아주 식겁한 얼굴이었다. 그는 도현을 마구 살폈다.
“어, 어디 안 다치셨죠? 괜찮으시죠? 무슨 일 당하시고… 그러신 건 아니죠?”
그는 구단의 매니지먼트 소속이었다. 선수들의 사건사고도 기본적으로 매니지먼트가 관리했다. 선수들이나 GAS 내에서 일어나는 것은 그래도 그들끼리 암묵적으로 해결이 나는데 외부인에게 사고를 쳤다간 진짜 대형 사건이 되고 만다.
“무슨 일 안 당했냐고요? 네? 이거 제가 고소할 거예요. 제 디바이스에 다 감지되어 있을 거라구요!”
“왁…! 자, 잠깐만요. 그, 그 전에 저희랑 얘기부터 하시면 안 될까요? 네? 선수 누가… 누굽니까, 네? 아주 무릎 꿇려서 싹싹 빌게 하겠습니다.”
법이 사람을 사고파는 것까지 쫙 정비가 되어 있는 마당에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면 법치 자체가 무너진다. 요즘은 사고 치면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 아무리 대단한 선수라도 변호사 쓰는 게 무색할 정도로 바로 잡혀가서 실형 산다. 선수들이 그렇게 난봉짓을 하고 가끔 사고를 쳐도 결국 그들의 세계 내에서 일어나니까 바로 합의가 나오고 크게 문제가 안 되는 것이다.
“미하엘 로드리게스가…!!!”
도현이 화를 내며 이름을 대자 박샘이 파드득 놀랬다.
“와아악! 안 됩니다! 네…! 네. 일단 얘기부터…! 로드리게스 선수 매니저랑 사장님 불러오겠습니다. 잠시만요. 잠시만….”
그는 그녀에게 오펜스 선수 하나까지 붙여서 그녀를 안전하게 지키라고 단단히 일러놓고는 매니지먼트 사장을 찾으러 나섰다. 도현이 분이 안 풀려서 씩씩거리고 있자 다른 여자들이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나와!! 나와, 이 새끼들아!!”
한두 명 나온다 싶던 게 우르르 튀어나왔다. 쉴드에 의해 막혀서 누가 사람들에게 날아가도 쉴드에 텅 소리고 나며 막혔다. 그래도 그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숨을 삼켰다. 20명이 넘는 남자들이 아주 서로를 패고 던지고 난리였다. 그 소란은 그대로 성난 양(?)을 모는 양치기의 역할을 한 스튜어트가 모는 대로 야외 테라스로 몰아넣어 졌다. 쉴드에 피가 잔뜩 튀었다. 매니저로 보이는 몇몇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대로 다 나가고 밖에 있는 사람들은 쉴드의 보호 아래 안으로 들어오자 스튜어트 감독이 소강재에게 야외 테라스만 쉴드로 막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곤 마치 할 일을 다 한 사람처럼 다시 술을 마시러 들어왔다. 소강재도 쉴드만 펼쳐놓고 열심히 음식을 축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야외 테라스에 쳐진 투명한 쉴드 너머로 소드마스터들이 떼로 싸우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돈도 건다. 제임스 첸이 가람 리한에게 크게 걸었다.
“…….”
아무도 말릴 생각이 없었다. 어째 여기서 황당한 사람은 도현밖에 없는 것 같았다. 도현은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도현을 부탁받은 마도사 루크 왕이 전쟁통이 따로 없는 쉴드 안을 보면서 설명해주었다.
“쟤들이 문명화가 덜 되어서요. 가끔씩 저렇게 서열정리를 하더라구요.”
도현은 진심이냐는 듯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사이 나쁜 건 아니에요. 죽는 놈은 안 나와요. 아마도.”
도현이 기대하는 설명은 아니었다. 그녀는 말을 잃고 입을 딱 벌린 채 보고 있다가 박샘이 막 매니지먼트 사장이라는 사람을 데리고 왔을 때 미르 킹쉴드 생각이 퍼뜩 났다.
“아, 잠깐만요. 미르…!”
그가 괜찮은지 보려고 화장실로 가려고 하자 레이시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가지 마. 그냥 놔둬.”
“아무리 그래도 네 남자가 다쳤는데 그런 말이 나와?”
도현이 그렇게 쏘아붙였다. 그리고 레이시의 손을 뿌리치고 화장실로 갔다. 완전히 박살이 난 화장실의 가운데 그가 여전히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쏟아져 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겨우 쪼그리고 앉아(망할 드레스) 미르의 뺨을 두드렸다.
“미르. 미르! 미르!! 괜찮아요? 정신 좀 차려봐요!”
어딜 어떻게 맞은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몇 번 뺨을 때렸더니 미르의 눈썹이 꿈틀하면서 서서히 눈을 떴다. 그는 깜짝 놀라 바닥을 두 손을 짚고 머리를 한 번 털었다.
“괜찮아요, 미르? 나 좀 봐요.”
“씨발… 이 개새끼들이….”
미르 킹쉴드는 도현을 보지 않았다. 고개를 드는 그의 두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자신의 넥타이를 말 그대로 족쇄를 뜯어내듯 뜯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현이 골라준 것이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듯 그를 말렸다.
“하지 마요, 미르! 잠깐만…!”
레이시가 말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도현이 자신을 깨웠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밖으로 튀어나갔다.
황급히 그를 따라 나갔더니 식사를 하던 소강재가 알아서 쉴드를 조금 열어주었다. 미르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곧바로 뛰어들어 그 난리 통에 참전했다. 그는 미하엘 로드리게스의 다갈색 머리통을 잡아 곧바로 난간에 쳐진 쉴드의 벽에 처박았다. 미하엘이 그의 복부에 엘보우를 먹이고 그 뒤로 아주 격투를 벌였다. 근데 곧 둘 다 상대가 바뀌었다. 미르는 조나단과, 미하엘은 짐 브라운. 그리고 그 뒤에는 미하엘이 샤샤 부퍼에게 엄청나게 처맞고 미르는 제수스 강의 머리카락을 다 뜯어놓을 작정으로 한 손으로 잡아 쉴드의 벽에다 쿵쿵 내리쳤다. 그런 뒤 미르는 조나단에게 다시 잡혀 얼굴을 엉망으로 맞고 쉴드에 처박혔다.
“…….”
“저… 작가님, 저희 사장님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킬스버그 씨. 오늘 일은 정말로, 정말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로드리게스가 정확하게 어떤 정도의 일을 저질렀는지….”
도현은 말없이 화장실에서 가지고 나온 클러치에서 디바이스를 찾아 켰다. 그리고 인공지능 비서의 변호사 모드를 선택했다.
[미하엘 로드리게스 씨를 성희롱, 강제 추행 및 일반 폭행으로 신고 및 고소가 가능합니다. 접수하시겠습니까?]
도현은 곧바로 YES 버튼을 눌렀다. 사장이 아주 난처한 얼굴로 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아… 킬스버그 씨, 잠깐만 저희랑 얘기 좀 하시죠. 저희가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아시다시피 로드리게스는 이번에 세계 TFC 선수 3위에 랭크될 정도로 뛰어난 선수입니다.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하나입니다. 웨스트이글에는 정말 필요한 선수입니다. 꼭 필요한 선수입니다. 클럽을 위해서라도 좀 양해를….”
“…….”
도현은 인공지능 비서를 통해 변호사를 찾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사건에 관련된 정보를 넘겼다.
[형사사건 전문 변호사 세리나 현입니다.]
“변호사랑 얘기하세요.”
도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샴페인 타워에서 잔을 하나 들어서 한 모금 마셨다. 매니지먼트 사장은 다시금 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정말로, 정말로 어떻게….”
“변호사랑 말씀하세요. 한 번 더 얘기하게 만들면 이것도 문제되는 거 아시죠?”
그러자 사장은 한숨을 푹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매니지먼트 팀은 도현의 변호사와 홀로그램 영상을 연결한 채 조용한 곳을 찾아 갔다.
이제 선수들 중 반은 테라스에 쓰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1대1 싸움이나 근접전에서는 포워드가 방어력과 힘이 강해 끝까지 남는 것 같았다. 미르 킹쉴드, 샤샤 부퍼, 조나단 훅, 가람 리한, 제수스 강 등 포워드는 다 남았다. 그렇게 도현이 카운트를 하는 순간 미르는 나머지 포워드들 중 두 명에게 견제를 받아 엄청 맞더니 쓰러졌다. 몇 분 지나니 정말 포워드들만이 남았다. 샤샤 부퍼, 조나단 훅, 가람 리한, 제수스 강이 남아 서로 죽일 듯이 싸우다가 제수스 강도 두 명에게 다구리 당해 기절하고 가람 리한도 조나단에게 처맞아 리타이어 되었다. 제임스 첸이 아주 아까워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샤샤 부퍼와 조나단 훅이 그나마 경기에서처럼 오라로 검을 만들어 휘두르지 않아서 그렇지 같은 동료들끼리 주먹질을 살벌하게 하던 끝에 검은 피부에 피를 꽤 뒤집어쓴 조나단 훅이 샤샤 부퍼를 리타이어 시켰다.
“조나단! 조나단! 조나단!”
사람들이 승자에게 환호했다. 제임스 첸도 박수를 짝짝 치며 쉴드 밖으로 나오는 그에게 직접 샴페인 잔을 들려주었다. 그의 명품 정장 따위 갈기갈기 찢어진 지 오래라 역시나 신이 빚었다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 역삼각형의 엄청난 피지컬에서 증기를 뿜어대며 척척 걸어왔다. 그는 다 마신 샴페인 잔을 그냥 옆에다 던져버리고 여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왔다.
“전부 다 이제부터 내 거야.”
그가 말했다.
“하.”
도현이 웃었다. 그녀도 마시고 있던 잔을 그냥 바닥에다 집어던졌다. 쨍그랑.
“누구 마음대로? 내가 물건이야?”
그녀는 조나단을 노려보았다. 그는 유난히 하얘 보이는 흰자를 가지고 있었다. 눈을 한 번 깜박한 그가 말했다.
“내가 이겼으니까.”
“네가 이긴 게 나나 이 여자들이랑 무슨 상관이야? 가서 아까처럼 수컷들끼리 사이 좋게 손이나 잡고 놀아. 누구 멋대로 날 상품 취급해?!”
아까부터 한참 열이 받은 그녀가 소리치자 매니지먼트 일동이 얼른 또 달려왔다.
“조나단, 이분은 함부로 그러면 안 되고, 어? 일단 비켜, 어? 비키고. 음… 니네들은 조나단 괜찮냐? 그럼 그냥 빨리 같이 가.”
구단에서는 그렇게 정리를 하려고 했다. 그때 누가 또 나왔다. 제수스 강이었다. 그는 조나단의 드레드 머리를 한 손으로 잡고 질질 끌고 갔다.
“아직 안 끝났는데 왜 멋대로 나가고 지랄이야, 씹새끼가.”
“뭐?! 놔! 놔, 이…!!”
거기서 싸우려고 하자 소강재가 마법으로 그들을 빠르게 다시 쉴드 안에 처넣었다. 그들이 야외 테라스로 던져져 데굴데굴 구르다가 벌떡 일어났다. 미르 킹쉴드도 머리를 한 번 흔들며 다시 일어났다. 몇 명 빼고 다 일어났다. 정말 미친듯한 체력과 힘이다. 그렇게 다시 2차전이 벌어졌다. 한 십 분쯤 더 그러자 스튜어트 감독이 영 안 되겠다 싶은지 소강재에게 주문했다.
“안 되겠다. 저것들 다치겠다. 밀폐해. 밀폐해.”
지금 피 터지는 건 다친 것도 아니란 말인가? 소강재는 금박이 잔뜩 들어간 랍스터를 우물거리며 답했다.
“네.”
소강재가 쉴드를 밀폐형으로 만들었다. 그러자 단 1분도 되지 않아 허억 하고 과호흡을 일으키며 남자들이 하나둘 바닥을 짚고 쓰러졌다. 공기의 흐름이 차단되면서 산소가 부족해진 것이다. 무슨 짐승을 다루듯이 선수들을 다루는 스튜어트 감독이었다. 그리고 다시 밀폐를 풀었다. 대단한 심폐능력으로 산소를 잘 전달해서 대단한 근력을 낼 수 있을지라도 산소 자체가 부족해지면 금방 체력이 나가버리는 건 당연한 운동의 법칙이었다. 한 번 그러고 나니 선수들은 다시 제대로 일어나질 못했다.
“허억… 씨발….”
스튜어트 감독이 야외 테라스로 나가서 쭈욱 그 꼴을 구경했다. 소강재의 쉴드에 의해 화장실 빼고는 인테리어 하나 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자. 병원 가야 할 것 같은 놈들, 알아서 손 들어 봐라.”
그러자 다섯 명 정도가 알아서 손을 들었다. 루크가 가서 손을 든 선수들을 공중부양마법으로 두둥실 들어 올려서 미리 불러 놓은 구급차 들것 위에 하나씩 놓아주었다.
“알아서 손 못 든 놈은 그냥 은퇴하고. 엄살 피우지 말고 일어나. 일어나!”
스튜어트가 가까이 있는 선수부터 엉덩이를 발로 찼다. 그들은 헐떡거리며 엄청한 근육통을 느끼면서 일어났다. 다들 머리가 핑핑 돌고 있을 것이다. 이마를 부여잡고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각자의 걸즈나 매니저가 가서 상태를 살폈다.
미르 킹쉴드도 도현이 있는 곳으로, 도현과 걸즈, 매니저가 있는 곳으로 왔다. 그도 상의는 거의 다 뜯어지고 머리랑 얼굴이 엉망이었다. 주먹과 입술이 터져서 피가 묻어 있었다.
“미르, 괜찮아?”
파티마가 물었다.
“아으, 씨발… 머리 아파. 니들은 여기서 뭐하는 거야?”
미르가 파티마와 나머지 걸즈를 보고 그렇게 물었다.
“미르 보고 싶어서….”
타냐가 그렇게 말했다. 미르가 아파서 짜증을 냈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어서 그렇겠지. 아, 으윽….”
그리고 그는 도현을 찾았다.
“킬스버그, 나 아….”
짝! 도현은 미르의 뺨을 쳤다. 미르가 눈을 크게 떴다. 천천히 그녀를 다시 돌아보았다. 도현은 다시 그의 뺨을 세게 쳤다. 그리고 도현은 화끈하게 아픈 자기 손을 몇 번 털었다.
“이런 거 아프지도 않겠죠, 미르는.”
“…….”
“집에 오지 마요. 짐은 정리해서 보내줄게요.”
“…….”
“잘 지내요.”
도현은 이 말을 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뺨을 친 건 순간적인 욱함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자신에게 또 어리광을 부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도현은 한숨을 쉬며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곧장 파티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저… 킬스버그 씨, 정말 로드리게스 건은….”
“변호사랑 얘기하라고 했을 텐데요!”
도현이 신경질을 냈다. 그렇게 따라붙는 사람들을 떨치고 바로 파티장을 나갔다. 미르는 충격을 받아 우뚝 선 채로 맞은 뺨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시선을 내린 채 약간 생각을 했다. 걸즈를 돌아보았다.
“저 여자… 나 왜 때린 거지? 왜 저렇게 화났지?”
그의 질문에 걸즈는 서로의 얼굴을 보다가 레이시가 답했다.
“미르… 그냥 미르는 저런 여자랑 안 맞아.”
“왜?”
“사는 세상이 다르잖아.”
미르는 몇 번이나 맞은 뺨을 닦아내듯 만졌지만 그런다고 그녀가 그를 때린 사실이 없어지진 않았다.
“왜?”
미르는 그녀를 위해 싸운 것이었다. 다른 남자들에게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그녀가 가장 뛰어난 암컷이듯 자신도 가장 뛰어난 수컷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근데 사는 세상이 다르다니. 결국 그런 여자가 왜 자신을 만나냐는 다른 놈들의 말과 별 다를 바가 없는 말 아닌가. 근데… 그녀는 이렇게 급작스럽게 이별을 통보했다. 3달도 만나지 못 하고….
“미르… 잠깐 우리랑 얘기 좀 해.”
타냐가 말했다.
“미르… 일단 우리한테 시간 좀 더 주면 안 돼? 갑자기 이러니까 우리 슬슬 생활하기도 어려울 것 같고….”
미르는 계속 뺨을 닦다가 그녀가 나간 파티장의 출구를 보았다. 드디어 그녀를 잡기 위해 달려갔다. 1층으로 내려가 리셉션에 물어보니 이미 리니어카를 타고 간 것 같다. 미르도 주차장으로 가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니 정원 너머로 그녀가 현관으로 들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킬스버그!!”
미르는 주차장까지 가기도 시간 낭비라 거기서 내려서 열리는 대문 사이로 틈을 비집고 들어가 순식간에 현관 앞에 도달했다.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내가 잘못했어.”
“놔요.”
“응?”
“이렇게 사람 못 가게 잡는 것도 범죄에요! 놔요! 진짜 기본이 안 되어있어!”
그녀가 화를 내자 미르가 손을 퍼뜩 뗐다. 그녀는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며 인공지능 비서에게 말했다.
“미르 킹쉴드 생체정보 지워.”
[알겠습니다.]
“잠깐…!”
현관문이 닫혔다. 그러자 미르는 집에 들어갈 수조차 없어졌다. 물론 그 순간 머릿속으로 3층 테라스를 통해 들어가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아마 그랬다간 그녀가 더 화를 낼 것 같다.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고 전화를 했지만 그녀는 하나도 받아주지 않았다. 한 시간을 그러고 있자 더 이상 문을 두드리면 신고를 하겠다는 냉정한 말만 되돌려주었다.
“…….”
조금 있으니 도쿄를 다녀온 다니엘 스톤하츠가 엉망이 된 모습으로 현관 앞에 서 있는 미르 킹쉴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를 스쳐 지나가며 문을 연 다니엘 스톤하츠는 분명히 미소를 지었다.
“썅…!!”
미르는 엄청 열이 받았다. 하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도현은 미르의 짐을 박스에다가 마구 넣어서 부양 캐리어로 문 밖에 내놓기까지 했다. 그러자 미르는 정말 기가 팍 죽었다.
‘진짜? 진짜로…?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사실 미르는 자기가 정확히 무슨 잘못을 한 건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처럼 다른 여자를 만나겠다든가 하는 생각은 전혀 나지 않고 마음만 동동거렸다. 그녀는 화가 났고 그래서 그를 때렸고 여전히 화가 나 있고 그래서 그를 집에서 내쫓은 것까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씨발, 어떡하지?’
미르는 현관 앞에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일단 화가 풀릴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배고파.”
미르 킹쉴드가 한숨을 쉬었다.
*
집에 들어온 다니엘 스톤하츠는 진주빛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카우치에 앉아 있는 도현 킬스버그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예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고 표정이 좋지 않았다. 가슴이 덜컥 했다. 그는 얼른 그녀에게 다가섰다.
“도현 씨… 무슨 일 있으셨던 겁니까?”
“다니엘 씨….”
도현은 한숨을 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뭔가 마음이 상한 듯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다니엘은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했다. 그는 자신의 변화를 무시하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살폈다.
밖에 있는 미르 킹쉴드도 옷이 다 찢어지고 엉망이 된 채로 서 있었다. 설마 무슨 일이 그녀에게 생긴 것일까. 그가 그녀를 위험에 처하게 한 거라면 기필코 미르 킹쉴드를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하며 도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웨스트이글 준우승 파티에 갔는데요…. 싸움이 일어나서요.”
도현이 말했다. 다니엘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도 그게 무엇인지 안다. 다니엘은 도현의 목덜미에 손톱자국을 발견하고 바로 치료를 해주었다.
“하필이면… 크게 안 다치신 게 천만다행입니다.”
“미르 걸즈까지 다 와서 저보고 미르랑 헤어지라고… 정말 끔찍했어요.”
“원래 소드마스터들 쪽이 좀… 문명화가 덜 됐습니다.”
“웨스트이글 마도사도 그렇게 말하더라구요.”
도현이 기가 차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지친 기색으로 다니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다니엘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미르 걸즈랑 저까지 두고 이긴 남자가 다 갖기로 했는지 쉴드 안에서 미친 듯이 싸우다가 조나단 훅이라고 막 이런 선수가 와서 우리 보고 다 자기 거라면서….”
도현이 팔로 큰 형상을 그리며 설명했다.
“…네.”
조나단 훅. 다니엘은 그가 누군지 알고 있다. 드레드 머리를 하거나 가끔 머리를 싹 밀고는 하는 괴물 같은 덩치의 흑인 선수다.
“열 받아서 소리 지르니까 매니지먼트가 와서 말리더라구요. 아, 그 전에 미하엘 로드리게스가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해서 신고까지 했어요.”
“…….”
미하엘 로드리게스. 이렇게 다니엘이 경기 중에 실수로(?) 죽여야 할 남자들의 이름이 점점 늘어난다.
“절대로 합의 안 할 거예요. 4개월은 실형 받을 거래요.”
“좋군요.”
“흥. 시즌 망하든 말든 그놈 탓이지.”
그러자 다니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수들 모임에는 사실 안 가는 게 좋습니다…. 예전에 미르 킹쉴드의 병문안을 가는 것도 많이 걱정했습니다.”
“그랬어요? 왜 말 안 했어요?”
“도현 씨는 그런 식으로 간섭하는 걸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맞아요.”
도현이 그제야 약간 웃었다. 걱정을 빙자한 협박이나 간섭이 제일 싫다. 그녀는 의외로 다니엘 스톤하츠가 자신을 매우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머리가 좋은 남자는 눈치가 빠르다. 이제 비위를 제법 잘 맞추지 않는가. 지금껏 정말로 눈치가 빠르고 똑똑하다는 느낌이 든 남자는 에반 정도였는데. 다니엘 스톤하츠도 도현 킬스버그라는 사람을 깊이 이해해줄 수 있는 남자일까?
“기분 나빴어요. 재밌을 줄 알았는데.”
“그러셨습니까.”
그래서 그럴까. 어쩐지 그에게는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다니엘 스톤하츠를 카우치에 눕히고 그의 위에 올라가서 기대어 엎드렸다. 그가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다니엘 씨도 그런 건 아니죠? 미르처럼?”
도현이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다니엘이 피식 웃었다.
“제가 그렇게 보입니까? 미르 킹쉴드처럼?”
“아뇨….”
“주로 어렸을 때 팔려가서 몬스터 게이트 용 용병으로 산 선수들이 그렇습니다. 인생에 여자, 약, 술 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러면 진짜 포워드나 미드필더는 죄다….”
“그렇다고 보시면 됩니다.”
“오펜스는요?”
“오펜스도 용병을 많이 하긴 합니다만 보통 사람들끼리 하는 전쟁에서 더 값을 쳐줍니다. 계급을 받고 정규군이랑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소드마스터 같은 느낌은 덜 나긴 합니다.”
“소드마스터랑 반대네요? 왜죠?”
“마도사를 쓰면 총알이나 미사일 값을 줄일 수 있거든요.”
몬스터의 움직임을 감지할 만한 인지능력이 있는 마도사가 적기도 하다. 몬스터를 제대로 상대하기 위해선 소드마스터의 초감각, 초신체능력, 오라가 필요하다고들 한다. 다니엘이 그렇게 말했다. 도현이 혀를 내둘렀다.
“아… 정말 전쟁이야말로 돈의 논리로 돌아가네요?”
“그렇지 않은 게 세상에 있기나 할까요.”
“다니엘 씨랑 저도 그런 걸까요?”
그들 둘도 돈으로 엮여 있었다. 도현이 다니엘의 속눈썹을 만지작거렸다. 다니엘은 그쪽 눈만 감아주며 보석 같은 보랏빛 눈동자로 도현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이 마음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현이 웃었다. 귓속이 간지러운 목소리였다.
“이런 점은 은근히 남자답단 말이야.”
그녀가 이렇게 말하자 그가 당황했다.
“제가… 평소에는 별로 남자답지 않습니까?”
“아니, 뭐랄까. 모를 땐 그냥 멋지다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소년 같았달까요.”
이래서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가는 걸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보다 입을 다물고 얌전히 있는 게 그녀에게 더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이었던 걸까? 그렇게 다니엘 스톤하츠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가끔 진짜 섹시할 때도 있어요.”
“언제 말입니까?!”
다니엘이 얼른 물었다. 그러니까 이런 점이 숙맥 같고 소년 같다는 건데… 귀엽다. 도현이 웃었다.
“음… 전에 배에서 나 버리고 가기 전이랑 최근에 사진 찍었을 때.”
“…….”
그건 다 다니엘이 대실수를 했던 날이 아닌가. 그의 머릿속에서 가설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 짓은 앞으로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고 엑스표를 열심히 쳐놓았는데 그때가 제일 그녀에게 매력적으로 보였다니….
“하아… 옷 갈아입고 씻어야 하는데 기운 빠져서 귀찮아요.”
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다시 다니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와 몸을 맞대고 있는 건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무게도 부드러움도 향기도…. 다니엘은 그대로 그녀를 안고 가만히, 그 느낌을 음미하고 있었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 그리고 다니엘은 용기를 냈다.
“씻겨… 드릴까요?”
그러자 도현이 다시 고개를 약간 들었다. 그녀가 씨익 웃었다.
“아직 가슴도 못 만지면서?”
맞다. 하지만 그는 그런 야한 걸 노린 건 아니었다, 절대…! 그냥 그녀를 편하게 해주고 싶을 뿐이었다.
“얼굴을 씻겨 드리는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요?”
“샤워하고 싶은데.”
“그건….”
다니엘의 귀가 벌게졌다. 그의 심장박동이 수직상승했다. 가슴을 맞대고 있는 도현도 그걸 알아차린 것인지 그의 탄탄하고 멋진 가슴을 손으로 더듬었다.
“심장 엄청 빨리 뛰어요.”
그랬더니 그의 목도 빨개졌다. 도현이 웃으면서 그의 귀를 만졌다.
“귀엽다니까.”
다니엘이 인상을 약간 썼다.
‘제가 당신을 더 귀여워해 주고 싶습니다.’
다니엘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그런 낮은 음성이 울렸다.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는 살짝 내리뜬 눈으로 도현의 눈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자세를 반전하여 그녀를 카우치에 눕혔다. 그리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랑하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강하게 내리눌렀다.
“으응….”
도현이 살짝 인상을 썼다가 입술을 벌렸다. 다니엘은 평소의 그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과감하게 그녀의 입안에 혀를 넣어 능동적으로 입맞춤을 리드했다.
“하아… 으응… 응…!”
도현의 얼굴이 상기되기 시작했다. 평소에 키스를 할 땐 도현이 하는 대로 따라오기만 하던 그가 빠르게, 그것도 깜짝 놀랄 만한 테크닉으로 야하게 핥아대자 입을 맞출 뿐인데도 등골이 오싹거렸다. 전신의 포인트가 그의 손길을 바라듯 민감해졌다.
‘언제 이런 걸….’
이런 건 가르쳐준 적 없는데. 도현은 다리가 조이는 듯한 타이트한 드레스가 너무 불편하게 느껴졌다. 아래가 불편하다. 다리를 벌려서 그에게 문지르고 싶었다.
“다니엘….”
그렇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그녀의 마음이라도 읽은 듯 그녀의 겨드랑이를 은근한 손길로 주물렀다가 그 아래에 있는 드레스 지퍼를 잡고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그 속에 손을 넣어 그녀의 살을 만졌다.
다니엘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녀를 잔뜩 젖게 해서 찔러넣을 생각뿐이었다. 그들의 사랑을 기념하여 둘 다 아플 정도로 강하게 결합하여 잊지 못할 첫날밤을 보내고 싶다. 그의 모든 것을 다하여 그녀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는 거추장스러운 그녀의 드레스를 확 내렸다. 그러자 도현이 움찔하며 그를 밀어냈다. 타액의 선이 서로의 혀를 이었다.
“옷 망가지겠어요….”
도현이 그렇게 속삭였다.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야한 얼굴이었다. 다니엘은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드레스와 함께 속옷까지 약간 내려가서 핑크색 그 포인트가 보일 듯 말 듯….
“…!!”
다니엘은 깜짝 놀라서 그녀에게서 몸을 확 뗐다.
“왜 그래요?”
도현이 약간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안 좋은 일이 잔뜩 있었는데 기분 전환이 되고 있던 참이었다. 애무도 없이 키스만으로 이렇게까지 달아오르기 어려운데…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를 다시 볼 참이었다.
다니엘은 질겁을 한 얼굴로 도현의 시선을 피했다.
“죄, 죄송합니다. 방에…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도현은 그가 또 도망가려는 것을 알고 얼른 그의 셔츠를 꽉 잡았다.
“도대체 뭐가 문젠데요? 왜 자꾸 사람을 내버려 두고 가!”
“놓으십시오, 도현 씨. 후회하십니다.”
“그러니까 뭐냐구요!”
이 남자가 제일 질이 나쁘다. 잔뜩 달아오르게 해놓고 계속 내빼는 저의가 뭔가!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순진한 척 그녀를 가지고 노는 것일까. 도현이 화가 나서는 소리쳤다.
“또 내버려 두고 도망가면 진짜 화낼 거예요!”
“!”
예기치 못한 한 방에 다니엘이 윽 하고 신음을 흘리며 목과 귀, 얼굴까지 확 붉히고는 입을 뻐끔거렸다. 금방 그녀의 말이 그의 스위치에 주먹을 휘갈겼다.
‘안 돼. 말하면 안 돼. 안 돼. 안 돼!’
다니엘 스톤하츠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화를 내주십시오. 혼내주세요. 꾸짖고 소리치고 화난 눈으로 내려다보면서 따귀를 쳐주십시오.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소년처럼… 애정을 담아, 감정적으로 매질해 주십시오.
“으윽….”
기본적으로 차분하고 여유가 있는 그녀가 히스테릭하게 따귀를 치는 상상만으로도 이미 발기했다. 도현도 그걸 발견했다. 그녀는 그의 것을 무릎으로 쿡 누르며 살짝 어이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니엘 씨도 이런 상태면서. 왜?”
“도현 씨… 잠깐만. 윽.”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녀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렇게 추궁했다. 다니엘은 온몸이 오싹오싹한 느낌이었다.
“저랑 하기 싫어요?”
“아닙…니다.”
“근데 왜 자꾸 빼요? 저 진짜 화내요?”
“으윽.”
화내주세요. 더 화내주십시오. 더 가혹하게…. 다니엘은 얼굴이 진짜 벌게진 상태였다.
“제 말 듣고 있어요?”
“듣고 있습니다.”
“할 거예요, 말 거예요?”
“하, 하겠습니다.”
다니엘이 얼른 그렇게 대답했다. 그녀는 옛날 옛적부터 그의 주인님이었다. 그가 고분고분히 그렇게 대답한 데다가 표정이 굉장히 섹시해지자 도현이 미소를 지었다.
“진짜 잘생겼어.”
도현이 그의 미간에 입을 맞추었다. 다니엘은 그녀의 칭찬에 부르르 몸이 떨었다.
“제가…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다니엘은 기대와 불안을 잔뜩 담아 그녀에게 물었다. 도현이 웃었다.
“제가 말하는 대로 다 해주시는 거예요?”
“네.”
“도망 안 가고?”
“…최대한 참아 보겠습니다.”
다니엘이 그렇게 대답하자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또 웃었다.
“뭐야… 그럼 못 참으면 또 도망간다는 거예요?”
“그게….”
“그럼 꼭 참아요. 못 참으면 안 돼요.”
이건 또… 몹시 어려운 퀘스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한다는 것인가.
‘힘들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더욱 두근거렸다.
“안아서 방으로 옮겨주세요.”
도현이 미소를 띄운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다니엘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위에서 내려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하하.”
두둥실 떠오르는 느낌이 기분 좋았다. 도현이 다니엘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니엘은 도현의 방으로 걸어갔다. 그녀를 침대에 앉혔다.
“옷 벗겨주세요. 아까처럼 세게 말구요.”
“…네.”
다니엘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녀의 드레스를 살살 내렸다. 손이 떨렸다. 드레스가 꽤 타이트했기 때문에 잘못하면 그녀의 피부에 상처를 낼 것 같았다.
‘그럼 그녀가 아파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아까 전처럼 그냥 그녀의 옷을 확 잡아당기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참기로 약속했으니까. 다니엘은 마른침을 삼키며 겨우 그녀의 발끝까지 옷을 내렸다. 그리고 드레스가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다 두었다. 그녀는 튜브탑 드레스를 위한 아이보리색 튜브탑 푸시업을 입고 있었다. 아래는 타이트한 드레스를 위한 노라인 팬티로 정말 얇았다. 도현은 자신의 머리에 붙여놓은 헤어피스를 떼어서 드레스 위에다 툭툭 던졌다. 그리고 지끈거리는 두피를 문지르며 마사지를 했다. 그래도 불편한 드레스를 벗으니 살 만한지 그녀가 스스로 일어나서 욕실로 향했다. 다니엘은 일어서는 그녀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도현은 그를 살짝 돌아보았다.
“안 들어와요?”
“…갑니다.”
신이시여. 이 역경을 이길 용기와 힘을 주소서… 다니엘은 그렇게 침음을 삼키며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벗은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목욕을 하고 싶은 모양인지 동그랗고 커다란 욕조에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입욕제를 두 개 넣었다. 안마를 위한 물줄기가 욕조의 사방에서 나왔다. 곧 보글보글 거품이 생기며 금방 물이 차기 시작했다. 도현은 속옷을 다 벗고 물에 들어갔다. 그리고 욕조의 등에 편하게 등을 기대고 머리받침에 머리를 대었다. 편하게 몸을 이완시키고 그녀가 다니엘을 불렀다.
“오면서 그것 좀 가져와요.”
다니엘은 세면대 위에 있는 것 중에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거품이 이미 그녀의 가슴 위까지 찼다. 도현은 좀 있다 인공지능 비서를 이용하여 물을 껐다. 욕실 안에 은은하게 증기가 찼다. 다니엘은 그녀의 머리맡 뒤 층계에 앉았다. 도현이 눈을 감고 있다가 반짝 뜨고 거꾸로 다니엘을 보았다.
“씻겨 주세요.”
“…네.”
그는 긴장한 태도로 참하게 대꾸했다. 증기와 스스로의 열기 때문에 셔츠와 옷이 답답했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다니엘은 무방비한 그녀를 보는 게 좋으면서도 힘들었다. 그녀는 이제 이렇게나 다니엘이 익숙한 것이다. 기뻤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명령’을 기쁘게 이행하는 중이었지만 동시에 그녀에게 ‘명령’하고 싶어졌다. 그녀의 무방비함을 후회하고 싶게 만들고도 싶었다.
‘참자….’
다니엘은 마법으로 손을 깨끗하게 하고 오일을 손에 짜서 그녀의 얼굴에 살짝 바르기 시작했다. 바하마에서 몇 번 그녀에게 선탠오일을 발라준 적이 있어 익숙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녀는 조금 탔다가 메트로서울로 돌아오고 나서부터 점점 하얘지더니 다시 제 피부 색깔로 돌아가버렸다. 피부가 너무 부드러웠다. 그와는 달랐다.
양손 끝으로 뺨을 문지르고 이마를 문질러서 화장을 녹여냈다. 그리고 눈을 조심스럽게 닦아내니 검은색 물이 나오다가 다른 곳과 섞여 옅어졌다. 그녀의 예쁜 코도 만지고 턱과 입술을 닦아냈다.
“잘하네요….”
그가 그녀의 입술을 만지는데 그녀가 그렇게 칭찬했다. 그가 피부의 화장을 다 녹여낸 것 같자 물에 젖은 자신의 손으로 한 번 더 얼굴을 문지르고 욕조의 물로 몇 번 씻어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말끔해지며 화장기 없이 반질반질해졌다.
“머리도 감겨줘요.”
그녀는 다니엘의 목욕시중이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욕조의 안에서는 안마용 물줄기가 나와 그녀의 등과 다리, 발바닥을 시원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다니엘은 공중부양마법으로 샴푸와 컨디셔너를 가져왔다. 그리고 욕조의 물을 방울로 띄워 도현의 머리카락을 적셨다.
“와.”
도현이 눈을 뜨고 자신의 머리를 감싼 물방울을 보려고 했다.
“전에 다니엘 씨 샤워할 때 진짜 빨리 씻는다고 생각했는데 다 마법으로 한 거였죠? 편하겠다.”
다니엘은 물방울 속에 손을 넣어 그녀의 두피를 문지르며 마사지했다.
“도현 씨도 원하신다면….”
“어떻게 하는 건데요?”
그러자 갑자기 도현이 들어있는 욕조가 물살을 일으키며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꺄악! 자, 잠깐만요!”
너무 느낌이 이상했다. 그녀는 다니엘의 셔츠를 잡으며 그쪽으로 몸을 일으켜 기대었다. 다니엘도 마법을 얼른 멈추며 그녀의 몸을 안았다.
“…….”
그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녀는 알몸이었다. 몸에 손을 못 대겠어서 공중에 손을 띄우고 있었다. 그녀는 다니엘의 어깨를 잡고 몸을 붙이고 있었다. 도현은 그런 그를 발견하고 그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더 빨개지고 당황했다.
“진짜 왜 이럴까, 이 남자… 영문을 모르겠네.”
천천히 해주기로 했으니까 씻으면서 여유를 가지고 같이 해볼까 했는데. 아까는 그렇게 능숙(?)하게 입을 맞추며 리드를 했으면서. 정말 알기 힘든 남자다. 도현은 굳어 있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그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섬세하게 문질렀다. 다니엘이 질끈 눈을 감으면서 작은 신음을 흘렸다. 도현은 계속 뒤로 물러나려는 그의 셔츠를 양손으로 꽉 잡아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속삭였다.
“빨리 입 벌려요.”
“으….”
다니엘 스톤하츠는 마치 매일 밤 판타지로 삼던 우상이 눈앞에 나타난 소년 같았다. 어쩔 줄을 몰라하며 빨개진 미남은, 그냥 엄청 귀엽다. 그는 입을 벌렸다. 이번에는 도현이 그의 입안에 혀를 넣었다. 그의 턱을 잡고 엄지로 그의 입술을 눌러 입을 더 벌리게 했다.
“혀 내밀어요.”
다니엘은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벌겋게 붉히고는 혀를 약간 내밀었다. 그의 양손은 주먹도 쥐지 못하고 여전히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도현은 느릿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더요.”
다니엘은 그녀의 말대로 했다. 그러자 그녀가 아주 부드럽게 그의 혀를 살살 핥고 빨아 주었다. 미칠 것 같았다. 다니엘은 온몸이 오싹오싹하고 기분이 좋아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서로의 타액이 질척하게 섞였다. 두 손으로 욕조를 꽉 잡은 채 그녀에게 리드를 맡기고 온몸이 심장처럼 벌렁거리는 걸 겨우 견뎠다.
‘죽을 것 같아.’
너무 야했다. 그녀는 알몸이었다. 그녀의 입술과 혀가 너무나 부드러웠다. 눈을 떠 그녀의 얼굴을 살짝 훔쳐보았다. 그녀도 눈을 떠서 다니엘의 눈을 보자 다시 질끈 감았다. 도현이 다니엘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진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다. 원래 자신의 심장이 이 정도로 뛸 수 있는 물건이었던가.
‘죽는다. 진짜 죽는다.’
진짜 죽을 거다! 다니엘은 그 정도의 긴장감이 자신을 꼼짝도 못 하게 만드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반한 여자가 이렇게 요염한 게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아니, 행운인 건 분명했지만 다니엘의 수용력이 따라가지 못했다. 도현은 다니엘이 숙맥이라는 것에 꽤 익숙해진 모양인지 그녀의 몸을 만지지도 못하고 둥 손을 띄우고 있는 그의 오른손을 잡아 자신의 허리에 감쌌다. 그리고 그의 손등을 손으로 덮고 서서히 자신의 몸을 쓰다듬어 올라갔다.
“으응….”
그녀는 정말 민감했다. 그렇게 다니엘의 손으로 자신의 몸을 쓰다듬어 올라간 것뿐인데도 야한 소리를 내면서 움찔했다. 다니엘은 뻣뻣하게 굳어서는 그녀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몸이 너무 뜨거워서 그녀의 피부가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마음만은 끊임없이 부풀어서 결국 그녀에게서 입술을 떼고 속삭였다.
“도현 씨, 정말 사… 헉….”
“네?”
그는 사랑을 말하려던 입으로 숨을 헉 들이켰다. 다니엘은 자신의 오른손에 닿은 느낌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가슴…!!’
저번에 속옷 위로 만진 적은 있었지만 오늘은… 오늘은…! 분홍빛이 도는 건강하고 부드러운 피부가 아주 예쁘게 봉긋, 볼륨감 있게 솟아서 손에 착, 아주 착, 부드럽게 들어왔다. 다니엘의 시선이 절로 아래를 향했다. 그의 오른손등을 도현의 손이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이 아래에서 위로 부드럽게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모양이었다. 그녀의 예쁜 가슴을 이렇게 직접 보는 건 처음… 그녀의 알몸을 이렇게 보는 것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다니엘은 귀에 스팀이 나올 정도로 빨개졌다. 그는 입을 뻐끔뻐끔거리면서 그녀의 얼굴과 그녀의 몸을 번갈아 보다가 푸쉬쉬, 질끈 눈을 감으며 작게 말했다.
“너무 예쁩니다, 도현 씨… 윽… 야해요. 너무 합니다. 천천히 해주겠다고 했으면서….”
그는 살짝 원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도현이 웃었다.
“마음에 들어요?”
그녀의 질문에 다니엘은 다시 눈을 떴다. 물에 젖은 도현의, 실오라기도, 화장기 하나도 없는 자태를 쭈욱 눈에 담았다.
“너무 좋습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다니엘은 스스로 손을 움직여 그녀의 가슴을 살짝 주물러 보았다. 못 참겠다. 그는 도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그녀의 피부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왼손으로 그녀의 등허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녀의 가슴을 천천히 계속 주무르고 저, 젖꼭지도 만졌다. 다니엘은 새빨개져서는 고개를 떼고 그녀의 가슴을 뚫어져라 보았다.
‘엄청 부드럽다….’
핥고 싶다…. 다니엘은 완전히 그녀에게 홀려서 헤롱헤롱거렸다. 큰일날 만한 생각도 지금은 들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에 몇 번이나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그녀의 피부를 전부 핥기 시작했다.
“앗… 다니엘 씨, 간지러워요. 하하.”
그녀의 웃음소리가 귀를 녹이는 것만 같았다. 다니엘은 콧김을 훅훅 뿜으며 그녀의 이마, 뺨, 턱, 목, 쇄골, 어깨 그리고 가슴까지 핥으면서 내려갔다. 그는 무척 서툴렀다. 그리고 봉긋하고 예쁜 가슴을 바로 눈앞에서 홀린 듯이 감상하다가 그녀의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양 뺨에 닿는 푹신한 가슴의 촉감이란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다….’
죽는다고 그렇게 속으로 엄살을 피우다가 이제 내린 결론이었다. 다니엘이 그렇게 그녀의 가슴에 홀려 있는 사이 도현은 그의 셔츠를 다 벗기고 그의 벨트도 풀어냈다. 그의 버클을 풀어 그 안으로 손을 넣었다. 이번엔 그가 도망가는 걸 원천봉쇄하기 위해서였다.
“도현 씨…!”
그가 깜짝 놀라면서 도현의 손목을 잡고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미 그의 것은 엄청 딱딱한데다가 질척질척했다. 다니엘은 창피해서 얼굴을 더 붉히며 당황했다.
“그, 그게…!”
“다니엘 씨, 사실 발기부전 아닌 거 아니에요? 잘만 되는데?”
도현이 의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다니엘은 완전 당황해서는 목소리가 떨렸다.
“도, 도현 씨가 그, 그렇게 만지니까… 호, 혼자는 해도 안 되는데…!”
“어? 언제 혼자 했어요?”
“아, 아니…!”
도현의 물음에 다니엘이 확 당황해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더 질척질척해졌다. 도현이 흐응, 하고 그의 얼굴을 지그시 보았다.
“내 생각하면서 했어요?”
“그건…!”
“내 허락도 없이?”
추궁 당하자 그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더 빳빳하게 흥분했다. 그리고 그런 상태를 스스로도 알고 빠르게 변명하기 시작했다.
“제, 제, 제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이전엔 아예 혼자서 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현 씨를 만나고 나니 항상 도현 씨 생각만 나서…! 그리고 전에 도, 도현 씨가 절 만졌던 생각이 나서 하, 한 번, 그, 그러니까 딱 한 번, 딱 한 번 그런 겁니다. 정말입니다.”
“하하하.”
그가 말까지 더듬어가며 열심히 스스로를 변호하자 도현은 그런 그가 귀여워서 웃었다.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울렁거리는 얼굴을 했다. 평소에는 표정 변화도 잘 없는 그였다. 자신의 앞에서만 이렇게 다채로운 모습을 보이는 그가 어쩐지 사랑스럽다. 더 변명을 하고 싶은데 말을 삼가는 것 같았다. 도현은 그의 팬티랑 바지를 조금 내려서 그의 것이 밖에 드러나게 했다.
“여기 색깔도 예쁘네?”
도현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니엘은 이제 도현을 말리지도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도, 도현 씨…!!”
다니엘은 빨개질 수 있는 곳은 다 빨개졌다. 그는 매우 아름답게 생긴 남자였고 이렇게 벗긴 몸매도 여전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잘생겼는데 이렇게 손에 그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쥐니 또 보통 남자 같다. 도현이 남자부터 이렇게 해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나 이 남자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면 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도현이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가 헉, 하면서 죽으려고 하자 손을 뗐다.
“벗고 빨리 들어와요.”
“…으… 으윽….”
그는 자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어깨까지 벌게져서 움찔움찔 하다가 일어나서 겨우 옷을 다 벗었다. 도현은 그런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각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아름다운 몸이었다. 깨끗한 피부에 멋진 몸매…. 그가 얼굴이 벌건 채로 욕조 안에 들어왔다. 도현은 그의 자태를 보며 입술을 살짝 핥았다. 그가 욕조에 겨우 앉자 도현이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다시 그의 것을 잡았다.
“윽…!”
그가 파드득 몸을 떨자 물살이 확 일며 그의 위에 타고 있던 도현의 몸도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가고 싶어요?”
다니엘은 눈을 질끈 감고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이런 쾌감 자체가 거의 몇 년 만이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그녀의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일념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네, 으윽… 도현 씨…….”
그는 애원하듯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수려하고 빼어난 그의 얼굴이 성적 욕망과 쾌락에 괴로워 찌푸린 것은 정말 섹시하고 음란했다. 광물 같이 무미한 빛을 내는 평소의 보랏빛 눈동자도 지금은 열기와 흥분을 담아 살아서 펄떡이는 것 같았고 깎아놓은 것만 같아 현실감이 들지 않는 그의 미모가 생기를 얻어 취할 듯 매력적이다. 평소의 깔끔한 그를 생각해보자면 더더욱 그랬다.
“흐응… 예뻐.”
도현이 그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후후 웃으면서 만족스러움을 표했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다시 입을 맞추면서 그의 남성기를 매만졌다. 발기하니 도현의 손에 다 안 잡힐 정도로 두껍다. 길이도 상당했다. 한 뼘은 족히 넘고도 남았다. 짙은 분홍빛에 살이 부드럽고 귀두는 탱탱하고 매끈하게 모양이 잡혀 있었다. 객관적으로도 정말 잘 빠진 물건이었으며 도현이 지금까지 직접 봤던 물건들 중에서도 단연 세 손가락 안에 꼽을 만 했다.
이런 남자를 안고 있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마음이 뿌듯하다. 누구나 탐을 낼만한 남자였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아름다운 얼굴을 섹시하게 일그러뜨리며 거친 신음을 내었다.
“헉…! 도현 씨… 으윽…! 하아… 자, 잠깐만요… 윽.”
다니엘이 신음을 흘리며 도현의 팔을 꽉 잡았다. 도현이 그의 아랫입술을 깨물며 속삭였다.
“또 도망가려구요?”
“윽…! 아뇨…! 아닙니다. 헉… 제발….”
그가 애원했다. 그녀가 다니엘의 귀두를 좀 더 강하게 쥐며 그의 눈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그의 코끝에 입을 맞추었다.
“기분 좋아요?”
“네, 윽… 네… 으윽!”
다니엘은 도현의 작은 손짓에도 쿵 소리가 날 정도로 욕조 안에서 몸부림을 쳤다. 도현은 그의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손에 감아쥐며 그의 고개를 들게 해 다시 그의 예쁜 입술을 탐했다. 그리고 입술을 떼고 둘은 눈을 마주쳤다.
“…….”
“…….”
두 사람의 헐떡거리는 숨소리만이 오갔다. 다니엘의 보석 같은 보랏빛 눈동자와 도현의 짙은 속눈썹에 싸인 예쁜 갈색 눈동자가 그대로 열기를 머금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떤 말도 필요가 없었다. 충만했다. 맞닿은 피부가, 체온이, 간격이 그저 세상의 모든 것인 듯했다.
‘도현 씨….’
수증기로 둘러싸인 몽환적인 욕조. 그리고 그녀. 마도와 힘 같은 게 도대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던 걸까? 그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다니엘 스톤하츠는 여전히 힘과 과거와 끊임없이 마모되는 인간성에서 오는 번뇌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충족감 같은 것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사랑합니다, 도현 씨.”
그의 눈빛으로도 그 마음은 고스란히 표현되었지만 다니엘은 참지 못하고 그것을 언어로 옮겼다. 그랬더니 그것이 어찌나 가볍던지. 하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다니엘은 가슴이 아프다고 느낄 정도였다. 도현은 다니엘의 입술과 코, 미간, 이마에 천천히 입을 맞추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니엘은 침을 꿀꺽 삼켰다. 물속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아름다운 몸이 그의 코앞에서 모든 것을 드러내었다. 다니엘은 손을 한 번 움찔하며 그대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
다니엘은 입을 벌린 채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물에 젖어 피부에 달라붙은 그녀의 남색 머리카락, 목과 어깨를 잇는 가녀리고 여성스러운 선, 쇄골,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가슴에… 예쁜 유두, 배 가운데를 가르는 부드러운 근육의 선, 잘록한 허리, 너울지는 골반…. 그리고 터럭 하나 없는 그녀의… 그녀의….
도현은 오른쪽 발을 들어 다니엘의 왼쪽 어깨를 꾸욱 눌러 밟았다. 다니엘의 시선이 어디에 고정되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분명했다. 다니엘은 꼼짝도 못 하고 그녀에게 밟힌 대로 욕조에 등을 기댔다. 도현의 발이 자연스럽게 욕조의 테두리에 닿았다. 그러자 다니엘이 다시 천천히 허리를 일으켰다. 그는 도현의 얼굴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이 엄청 심각했다. 그의 숨이 100m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거칠어졌다. 그는 도현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양손으로 확 끌어안았다.
“아…!”
도현의 그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쥐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다니엘… 아앗…! 으읏….”
그는 어디서 연습이라도 하고 온 것인지, 아니면 독학으로 연구를 한 것인지 그의 입술이 거기 닿자마자 도현의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입에서 미친 듯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 아아! 아…! 아아아…!”
그만, 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의 혀끝이 힘 있게, 강약과 가감을 넣어 그녀의 음핵을 문질렀다. 그리고 입술을 대고 강하게 빨다가 다시 핥고 그녀가 가기 직전에 몇 초를 쉬는 등 엄청난 테크닉을 보였다.
“다니엘…! 하…! 다니엘… 으으응…! 애타게 하지 말아요…. 아…!”
도현은 어느새 다니엘의 머리와 어깨에 모든 몸무게를 기댔다. 다니엘은 힘든 기색도 없었다. 그는 도현을 자극하는 것만으로도 갈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는 위험할 정도로 헐떡거리면서 도현의 이름을 불렀다.
“도현 씨… 도현 씨… 하아….”
도현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절정에 이를 만하면 그가 입술을 떼고 다시 하고 또 떼고 다시 하는 식으로 매우 정성을 들였다. 이렇게 하면 오르가즘의 강도가 엄청나게 올라갔다. 숙맥에 동정인 그가 이렇게까지 잘하니 기특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도현이 자기 다리 사이에 벌건 입술을 묻고 있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다니엘이 가는 얼굴도 보고 싶어요.”
“이대로도… 윽…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짜요?”
도현이 약간 놀라서 그렇게 물었다. 다니엘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도현의 클리토리스를 핥고 그녀의 질에서 나오는 애액을 전부 먹어치웠다. 향기로웠다. 다니엘은 그대로 끝내줄 생각인지 도현의 소음순 사이에 엄지를 대어 마구 입구를 자극하며 음핵을 혀끝으로 빠르게 비볐다.
“아앗! 하아아…! 아…!!”
도현이 깜짝 놀라서 다니엘의 얼굴에(정확히는 입술 위에) 앉았다. 하지만 다니엘도 TFC 선수다 보니 도현 정도의 무게는 한 손으로도 거뜬했다. 도현이 경련하며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애원해도 그는 그녀를 놓치지 않았다.
“다니엘…! 아! 아아! 그만…!! 이제 그만…! 아앙! 하아아앗!! 아앗!!”
절정에 이른 그녀의 부푼 붉은 보석을 아플 정도로 빨고 그녀의 젖은 입구에 결국 엄지를 밀어넣어 마구 움직였다. 감촉이 너무나 좋았다. 부풀고 푹신하고 너무나 부드러워서…. 그녀는 너무 느껴서 숨도 못 쉴 정도였다. 그녀의 비명을 듣자 그도 사정하여 부르르 떨었다. 다니엘은 짜릿한 엑스터시에 무너지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일어나며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그리고 한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받치고 한쪽 다리를 다른 팔에 걸친 뒤 그 손으로 자신의 남성기를 잡고 그 끝을 그녀의 입구에 문질렀다.
“하아….”
그녀는 오르가즘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가 예뻤다. 예뻐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니엘이 준 쾌락으로 촉촉하고 붉게 젖어서…. 이대로 전부 가지고 싶었다.
이대로 그녀를 범하고
같이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면 그녀의 머릿속도 몸속도 나뿐이야….’
그녀는 고통과 쾌락에 다니엘의 이름만 부르다가, 그 또한 고통과 쾌락에 도현의 이름만 부르면서 그렇게, 그 누구도 끼어들 틈 없이, 완벽하게, 최상의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빛을 바랠 만큼 강렬한 엔딩.
나와 당신의 완전한 엔딩.
“다니엘…?”
도현이 눈을 뜨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다니엘은 그녀의 안에 무작정 박으려던 참이었다.
“!!!”
다니엘은 기겁을 해서는 그녀의 몸을 놓쳤다. 도현은 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욕조의 안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행히 물이 가득차 있어 다치지는 않았지만 물에 흠뻑 젖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갑자기 왜 이래요?”
하지만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우당탕 소리가 들리더니 눈에 보이는 것은 훤히 열린 욕실문에 흔적처럼 남은 작은 물웅덩이들뿐이다. 도현은 황당해서 중얼거렸다.
“아… 이 남자 또 도망갔어….”
*
“다니엘?”
셀레나 카토는 메트로서울 외곽 어떤 상가 옆 골목에 숨어있는 다니엘 스톤하츠를 찾아냈다. 그는 말 그대로 알몸으로 벽돌벽에 바짝 붙어 있었다. 그의 아름다운 근육질 몸은 그런 누추한 골목이 송구할 정도로 빛이 나고 있었지만, 그래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신고를 안 당한 게 용하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는 게 없는데 셀레나에게는 어떻게 연락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니엘은 고개를 돌려 셀레나를 내려다보았다. 전에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려있는 표정이었다(아마도). 셀레나는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아차 하고 그에게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그가 손을 뻗어서 가방을 받았다. 그리고 골목으로 더 들어가 셀레나를 등에 지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셀레나는 저도 모르게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확 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의 알몸을 보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었지만 훔쳐보는 건 역시 죄책감이 든다.
“무, 무슨 일 있었어요?”
셀레나는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그렇게 물었다. ‘평정심’ 하면 다니엘 스톤하츠고 다니엘 스톤하츠 하면 ‘평정심’이었다. 다니엘은 대답 없이 옷을 다 입고 골목 밖으로 나왔다. 그는 빈 종이가방을 셀레나에게 건넸다. 그녀는 그것을 받고 가만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표정이 안 좋았다.
‘다니엘 같은 남자가 누구에게 강도를 당했을 리도 없고….’
영문을 모를 일이다. 다니엘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전… 이제 안될 것 같습니다.”
“네? 뭐가요?”
“전 최악의 남자입니다….”
“네?”
셀레나는 좌절하고 있는 그를 데리고 조용한 커피숍으로 향했다.
‘설마….’
강도는 아닌 모양이다. 저번의 삐삐 머리랑 뭐가 잘못된 것인가? 게다가 그런 모습으로 그런 곳에…. 셀레나의 가슴이 기대와, 또 그런 기대를 누르기 위한 다그침으로 두방망이질 쳤다.
“왜 그래요? 만나시는 분이랑 무슨 문제 있는 거예요?”
셀레나는 먼저 커피를 두 잔 시키고 그렇게 물었다. 이렇게 불러낼 정도니 이 정도는 물어봐도 될 것 같았다. 아니, 공적으로나, 예전 같으면 사적으로도 자신만큼 다니엘 스톤하츠에게 가까운 사람은 없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지금까지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던 그가 요즘은 여자를 만나지 않나, 게다가 그런 여자를 만나지 않나! 처음 보는 모습의 연속이다.
‘그래, 차라리 이건 기회야!’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는 철벽 중에서도 티타늄 철벽을 두른 남자였다. 이런 변화란 결국 그의 벽에도 틈이 생겼다는 말 아닌가. 셀레나는 마음을 다잡고 다니엘의 얼굴을 보았다. 언제 보아도 홀릴 듯이 아름다운 얼굴…. 어째서일까. 아름다움만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하고 정직한 남자였다. 자신에게 엄격한 남자였다. 난처함으로 일렁이는 그의 보석 같은 눈동자는 전에 없이 반짝였다. 너무 예뻤다. 게다가 셀레나 카토의 사심과 취향을 가득 담아 빚어놓은 그의 몸 또한 어떤 옷을 입혀도 태가 났다(물론 다니엘 본인은 왜 이렇게 근육이 안 만들어지나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다니엘은 두 손을 이마 앞에 모아 쥐며 얼굴을 약간 숙였다. 그는 남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그는 좌절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 이제 끝났습니다. 그런 짓을 하려고 했으니 도현 씨는 절대 절 다시 보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미르 킹쉴드가 쫓겨난 걸 보고 비웃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제가 제일 문제였는데…!”
‘미르 킹쉴드?’
아니? 그의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는가? 셀레나는 되물어 보지도 못했다. 다니엘이 이렇게 격앙된 것은 처음 봐서 끼어들 수가 없었다.
“도현 씨는 연애에 있어서만큼은 절대로 기준을 굽히지 않으십니다. 아니, 이미 저를 위해 많이 굽히신 겁니다. 생각보다 절 높게 쳐주시는 것 같으니까요. 항상 귀엽다고 해주고 격려와 칭찬도 해주시고 키스나… 오늘 같은 것도 항상 먼저 권해주셨는데 어째서 망치는 건 항상 저인지.”
“…….”
이건 그 삐삐 머리와… 지금 섹스를 하고 온 것이라는 말일까.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셀레나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동시에 그가 어떤 식으로 여자를 만질지 궁금해졌다. 그녀는 다니엘 스톤하츠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를 짝사랑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그녀에게 수작을 걸려고 하는 다른 선수와는 달랐다. 일면 무기질적으로 보이지만, 한없이 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높은 남자라서 그런 것이었다. 그런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랑스럽다고도 느꼈다.
셀레나는 자신을 앞에 두고 고해성사라도 하는 것 같은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런 말을 할 상대도 셀레나말고는 없는 것이다.
“도현 씨는 제가 자신에게 걸맞은 남자가 돼줄 거라고 기대를 해주셨습니다.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제가 아무리 숙맥 같이 굴어도 항상 기다려주시고 먼저 리드를 해주시고 그랬는데, 왜 저는 그런 도현 씨를 볼 때마다 이상한 생각이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데요?”
그러자 다니엘이 잠깐 말을 멈추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자세를 약간 바꾸어 깍지를 낀 두 손으로 입가를 누르며 테이블 위의 커피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기다란 속눈썹 사이로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가 셀레나가 알지 못하는 감정을 담고 약간 흔들렸다가 멈추었다.
“이런 말을 하면 셀레나도 절… 무서워하게 될 겁니다.”
다니엘은 그렇게 말했다. 셀레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 다니엘. 전… 다니엘의 힘이 되어줄 수 있다면 뭐든… 뭐든 괜찮아요.”
4년 짝사랑의 힘을 우습게 보지 마라. 셀레나는 마음을 다잡고, 아니,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끼며 그의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바로 이 선이 그와 그녀의 사적인 라인을 넘는 기점이 될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적어도 그 삐삐 머리 이외에는, 다니엘은 지금까지 절대 그 선 안으로 남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고 조각상처럼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지배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프게 하면 어떤 목소리를 낼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원하는 목소리는 얼마나… 듣기가 좋을까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어집니다. 그녀가 싫어할 걸 아는데도… 그런 식으로 귀여워하고 싶다고… 계속 그런 생각이 듭니다.”
셀레나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움찔했다. 그녀의 얼굴이 확 상기되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가, 미를 관장하는 신의 사랑을 한껏 받은 것만 같은 이 남자가 자신을 지배해서 거칠게 원해올 걸 상상하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젖을 것만 같았다. 어떤 것에도 초연한 이 아름다운 남자가 그 순간 얼마나 섹시할지 생각만 해도….
“온통 제 생각만 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그게 아픔이든 뭐든…. 그렇게 그녀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온전히 제 것으로… 어떤 놈들도 건드리지 못하게….”
그의 눈밑이 어두워지고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게다가 그의 표정과 말에서 느껴지는 이 묘한 괴리는 뭘까. 셀레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말을 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저를 그녀가 혼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뺨을 때리고 힐난하고 꾸짖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쓸데없는 욕망 같은 건 가지지 말고, 오로지 그녀에게만 복종하라고 그렇게 말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지배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니엘은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꽉 감싸 잡으며 신음을 흘렸다.
“솔직히 지금 당장 그녀가 있는 힘껏 뺨을 쳐준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본인도 이게 말도 안 되는 욕망이라는 것을 알았다. 전혀 다른 두 가지의 욕망, 아니, 세 가지의 욕망이 상충하고 있었다. 그는 그저 그녀와 사랑을 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에게 사랑받고 싶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더러운 욕망이 끼어들어 자꾸 그녀와 그의 사이를 갈라놓냐는 말이다. 다니엘이 이런 상태인 걸 안다면 그녀는 아주 질색을 할 것이다. 그녀가 경멸하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팠다. 지금 당장 흥분해서 세울 수 있을 정도로.
다니엘 스톤하츠란 남자는 이렇게 손쓸 곳을 찾기도 힘들 정도로 구제불능이었다. 도현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당장에 그를 버릴 것이다. 아니, 지금 이렇게 또 도망 나온 것만으로도 이미….
“…….”
셀레나 카토마저도 말을 잃고 멍청하게 다니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펑 하고 빨개졌다.
‘뭐지…. 뭐지?’
이상하게 가슴이 설렌다. 그녀가 그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면 당연히 거짓말이었지만 그가 워낙에 담백해서 평범한 것(?) 이상은 상상해본 적도 없는데 이건…. 셀레나는 심장이 너무 뛰어서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지금 당장이라도 그에게 고백의 말을 하고 말 것 같았다. 정말 좋아한다고,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해왔다고. 그러니까, 그의 주인님이 되어줄 테니 그도 자신의 주인님이 되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 으… 다니엘….”
셀레나는 기대와 흥분으로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 여러 색이 섞인 아름다운 눈동자가 사랑의 감정으로 더욱 매력을 발했다. 그녀는 그대로 오래도록 지니고 있던 마음을 그에게 토로할 작정이었다.
“다니엘, 사….”
“도현 씨뿐입니다, 이런 건….”
“치엔이 루카스 선수에게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셀레나는 순간적으로 말을 바꾸며 그렇게 외쳤다. 다니엘이 고개를 들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셀레나는 가슴 깃을 움켜쥐며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하아… 하아… 위험했다….’
이런 상태로 고백했다간 끝이다. 매니저고 뭐고 단박에 모든 관계가 끝날 것이다. 셀레나는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루카스가 그런 취, 아니, 루카스 시스터즈랑 그런 관계로 지낸다는 건 유명하잖아요.”
“루카스가….”
다니엘은 영 영문을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셀레나는 다니엘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속상해서 그의 시선을 피한 채 아무 말이나 계속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백 외의 어떤 말이라도 좋았다. 셀레나는 성급하게 마음을 고백하려고 했던 스스로를 속으로 자책하며 나오는 대로 말로 내뱉었다.
“루, 루카스 시스터즈는 전부 치엔이 루카스 선수의 매저 노예들이잖아요. 루카스의 시스터즈가 되고 싶은 GAS는 한 명도 없지만 한 번 그의 노예가 되면 헤어나올 수 없다고 다들….”
“…루카스, 나다.”
다니엘은 셀레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디바이스를 덥썩 잡고 치엔이 루카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셀레나는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치엔이 루카스. 이스트 드래곤의 센터 포워드다. 그는 그 어떤 남자도 롤모델로 삼아서는 안 되는 인간말종 쓰레기였다. 특히나 그게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라면 더더욱! 셀레나는 순간적으로 말을 돌리기 위해 아무것이나 생각나는 대로 말했는데 그것이 고백을 하는 것보다 더 최악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얼른 다시 말을 돌리려고 했다.
“아, 아니… 다니엘, 제가 실언했어요. 루카스 선수한테 조언을 얻는 건 잘못된 생각인 것 같아요.”
“아뇨.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경험자의 조언이 필요한 순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이야말로 이상한 확신을 얻은 얼굴이었다. 그는 필사적이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필사적인 필요는 없었을 텐데도. 그렇기에 셀레나도 필사적으로 그를 말렸다.
“아니요!! 절대 아닌데요! 차라리! 차라리 그분께 솔직하게 말해보는 건 어떨까요? 연인 사이엔 솔직한 게 최고에요! 더더군다나 이런 문제일수록 서로 맞춰가는 게…!”
“일단 루카스를 만나보고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뇨…!”
이런 쪽으로는 아예 문외한인, 순백과도 같은 그가 치엔이 루카스 같은 버러지에게서 어설프게 나쁜 것만 배울 경우 그것은 다니엘 스톤하츠뿐만 아니라 그 삐삐 머리, 그리고 셀레나 카토에게도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 뻔했다.
“뭐든지 알아서 나쁠 건 없습니다.”
“몰라서 좋은 것도 분명히 있다구요!”
그의 학자적 학구열이 이런 곳에서 맹점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지식의 저주랄까. 무언가를 알고 나면 알기 전으로는 절대 돌아가지 못한다. 다니엘조차도 그때의 촬영이 없었더라면 이랬을까. 차라리 인터넷에서 대충 주워듣는 게 나을 판이다. 셀레나는 자신의 입에서 왜 치엔이 루카스의 이름이 나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사랑한다는 말 이외에는 전부 좋다고 생각했다지만! 다니엘의 말을 듣자마자 치엔이 루카스의 기행이 생각났고 그래서 당황할 때 저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렇게 셀레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다니엘 스톤하츠와 함께 치엔이 루카스의 자택이 있는 도쿄로 날아갔다. 전화를 받은 루카스가 따로 만나기 귀찮다면서 그냥 집으로 오라고 한 것이다.
그의 집은 도쿄의 중심부에 있는 맨션이었다. 세계적으로 부동산이 가장 비싼 곳 중 하나다 보니 얼마짜리 집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다른 선수들의 집과는 다르게 약냄새나 술냄새는 전혀 나지 않고 깔끔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일체 말을 하지 못하도록 입에 하나같이 막대 개그(gag)를 물고 있는 여자들의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멀쩡한 차림새를 하고 있든, 본격적으로 플레이를 할 것 같이 가죽끈으로만 이루어진 옷을 입고 있든,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할 것 없이 전부 그랬기에 적막까지 흘렀다. 셀레나는 히익 하면서 다니엘의 팔을 꽉 붙잡고 치엔이 루카스의 성으로 입장했다.
“빨리 왔네.”
그렇게 말한 건 막 샤워하고 물이 뚝뚝 흐르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으며 팬티만 입은 채 나온 장신의 미남이었다. 남미계의 혈통이 보이는 구릿빛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 나른한 회색 눈동자에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역시나 멋지게 빚어진 몸매를 가진 치엔이 루카스다. 그는 하품을 하며 부엌으로 가서 크리스탈 컵에 물을 따랐다.
“차 마실래? 커피?”
“물이면 됐다.”
“알아서 마셔라.”
루카스는 그러고 나서야 다니엘 스톤하츠와 셀레나 카토를 돌아보았다.
“으음… 누구? 네가 걸즈도 있었나.”
분명히 몇 번이나 마주치고, 심지어 치엔이 루카스 본인이 몇 번 추파를 던진 적도 있으면서 셀레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매니저다.”
“아, 그래? 흐음. 예쁘네. 월급은 얼마나 받아? 걸즈는 관심 없어?”
“관심 없습니다. 절대 없습니다.”
셀레나가 얼른 대답했다. 다니엘은 그가 셀레나에게 더 추파를 던지기 전에 용건을 꺼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길래 여자들한테 그런 짓을 하고도 괜찮지? 특히 그쪽 취향이 아닌 여자도 넘어오게 할 수 있다는 부분부터 자세하게 설명해봐.”
옆에서 엄청나게 말리는 셀레나 카토를 내버려 둔 채 오는 길에 루카스의 성벽에 대해서 간략하게 조사를 해본 다니엘이었다. 동료 선수로 벌써 몇 년을 함께 했지만 관심이 없어서 전혀 몰랐다.
“음? 너 진짜 그쪽이냐? 별꼴이네….”
여러 매체에서도 그렇게 표현되고 있긴 했지만 훈련을 같이 하고 직접 마주치는 이스트드래곤 선수들 사이에서도 다니엘 스톤하츠는 이단아로 소문이 자자했다. 술이나 약이나 여자 중 하나만 안 해도 이상한 게 TFC 선수인데 셋 다 안 한다. 물론 마도사니까 술이나 약은 잘 안 하겠지만, 그래도 여자까지 없는 건 진짜 이상하다.
루카스는 살짝 부담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뭐… 신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딱히 내가 새디스트니 뭐니 그런 건 아니야. 난 그런 거 자세하게 잘 몰라.”
“네?”
주변에 보이는 여자들이 대놓고 그렇고 그런 SM 구속구를 몇 개씩 달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도 루카스가 그렇게 말하자 셀레나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그렇게 반응했다.
“하암. 진짜로. 난 다른 놈들처럼 여자 꼬시기도 귀찮고 그래서 그냥 맘에 드는 여자 있으면 일단 때리고 보거든.”
개새끼라는 건 누누이 알고 있었지만 진짜 개새끼였다…. 셀레나는 더 질겁해서 다니엘의 팔을 꽉 잡았다.
“그런 식으로… 여자들이 걸즈가 되어준다고?”
다니엘은 미심쩍은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셀레나가 굳은 어조로 그를 말렸다.
“그냥 가요, 다니엘. 진짜요. 제정신 박힌 여자 치고 그런 데 넘어가는 사람은 없어요.”
“응? 아닌데? 내 시스터즈 반 이상이 뉴걸이나 일반인이었어.”
“말도 안 돼! 그러면 바로 잡혀 간다구요! 걸즈 상대로 그래도 잡혀갈 마당에!”
셀레나가 강하게 반박했다. 루카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뭐… 나도 위험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의외로 걸즈보다도 일반인이 더 신고를 못 하는 것 같더라고. 반항도 안 하고. 미안하다고 하면 신고 안 하고 끝내는 년들도 많고. 뭐… 내가 그럴 거 같은 년만 고르는 것도 있지만.”
셀레나는 굳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앗, 싶을 정도의 미녀도 있었지만 어디 놔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나쁜 말로는 밋밋하고 평범한 외견을 한 여자도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저항 같은 건 하지도 못할 것 같은 여자들…. 셀레나는 생리적 혐오감에 인상을 팍 찌푸리며 루카스를 노려보았다.
“범죄자.”
“아, 뭐. 합의가 되면 범죄는 아니지. 왜 이래. 나 유치장도 가본 적 없는 청렴한 납세자다.”
이런 점에서 사람들은 이스트드래곤이 웨스트이글보다 문명화된 느낌이 난다고 말하는 것일까? 더 싫다.
“…….”
“그런 방법으로 도… 내… 아니, 그 사람이 넘어올 것 같진 않은데.”
고소와 절연이 기필코 뒤따라올 것이다.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다니엘이 한숨을 쉬었다. 셀레나는 루카스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그의 조언에 관심을 보이는 다니엘을 믿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그의 가치관에는 의뭉스러운 부분이 보였지만, 그래도, 진짜 이런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남자였단 말인가?
“뭐, 그럼… 넌 마도사니까 더 쉬울 것 같은데. 일단 디바이스부터 태워서 못 쓰게 만들어. 네 것도 꼬실 때까지는 들고 다니지 말고. 그리고 금요일 저녁부터 24시간 정도만 가둬 놔. 그 뒤엔 상태 봐서 물이나 음식 줄 때는 좀 상냥하게 하고 말 안 들으면 적당히 안 다칠 정도로 때리고. 월요일엔 할 일 하라고 풀어주고. 풀어주기 전에 신고하면 인생 좀 고달프게 해주겠다고 협박도 좀 하고.”
셀레나는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고 다니엘은 경청했다.
“처음 할 땐 약도 주고 해서 엄청 기분 좋게 해주고 그 뒤부턴 때리거나 묶거나 하면서 마지막엔 기분 좋게 마무리하는 식으로 하면 그 뒤부턴 그냥 맞기만 해도 좋아해. 사랑해서 그러는 거라는 말까지 하면 금상첨화고.”
“으음….”
다니엘은 여전히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셀레나는 계속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듣지 말라는 것이다. TFC 선수라는 건 본래 한 놈도 빠짐없이 나쁜 놈이긴 했지만 그중에도 급이 있는 법이었다. 치엔이 루카스는 바닥 중에 바닥이었다.
“근데 난 이런 것도 이젠 귀찮아서 그냥 가둬놓고 내 시스터즈 되겠다고 하거나 나랑 자겠다고 진심으로 말할 때까지 때려. 하루 이틀이면 돼. 여자들은 겁먹으면 엄청 고분고분해지거든.”
“진짜 최악….”
이런 놈이 이런 세상에서 멀쩡하게 밖을 나돌아다닐 수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겉으로는 이렇게 발전한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도 고칠 점이 수두룩했다. 아니, 발전하지 않는 것은 인간뿐인가. 셀레나는 불구대천의 원수를 보는 것처럼 혐오스러운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루카스는 그녀의 시선을 미소로 되받아쳤다.
“다니엘….”
셀레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연적이라지만 다니엘이 그런 방법까지 그 삐삐 머리에게 쓰길 바라지 않았다.
‘도현 씨한테는 절대 안 먹힐 방법이고 그러기도 싫다.’
셀레나의 걱정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다니엘은 치엔이 루카스의 말을 듣자마자 그쪽으로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셀레나처럼 표현하진 않았지만 다니엘도 루카스의 방법에 강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새디스트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다니엘은 그의 방법에서 아무런 메리트도 느낄 수가 없었다.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다니엘이 원하는 형태는 분명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질문의 방향을 선회했다.
“너… 어떤 사람을 보면 때리고 싶은 거냐? 그쪽은 아니라면서.”
“고분고분할 거 같은 사람? 때리면 때리는 대로 잘 맞을 거 같고. 나중에 되면 오히려 좋아할 것 같고. 신고도 못 할 것 같고. 뭐, 그게 제일 중요하지. 으음~ 여자가 같은 여자지 무슨 차이가 크게 있냐.”
치엔이 루카스는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
다니엘은 그 조건에 아주 잘 부합했다. 그는 도현에게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따귀를 맞는 게 소원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도현 킬스버그는 다니엘에게 손찌검을 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맞는 사람을 보면 아픈 게 상상이 되어서 싫다는 말까지 하기도 했고… 게다가 그 또한 그저 맞는다는 행위만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뭔가 더 있는데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다니엘의 얼굴에 근심이 깊어지자 치엔이 루카스가 으응? 하고 이상한 얼굴을 했다.
“뭐야? 너 둘 다 되냐?”
“…….”
그러자 루카스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내가 소드마스터인 여자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너 마도의사 자격증도 있고… 여자보다는 튼튼할 거고… 얼굴도 예쁘고….”
“아아악!! 미쳤어요!!!”
그가 다니엘을 노리는 것 같자 셀레나가 기겁을 해서 다니엘의 앞을 가로막았다.
부엌에서 계속 서서 말하기엔 긴 이야기라 루카스는 옷을 입고 나오고 둘을 거실로 안내했다. 야한 옷을 입은 여자는 그들이 오기 전까지 맞았던 것인지 엉덩이와 허벅지에 매를 맞은 자국이 선명했다. 다니엘은 다른 사람이 그런 꼴을 하고 있는 것에는 전혀, 아무런 자극도 받을 수가 없었다. 다만 자신이 도현의 몸에 저런 자국을 남긴다면, 이라고 생각하니 심장이 좀 두근거렸다.
“자.”
완전 인간말종 쓰레기인 치엔이 루카스였으나 평소엔 기본적으로 무감정한 다니엘 스톤하츠보다 훨씬 ‘보통 남자’ 같았다. 그래서 더 혐오스럽다. 그는 드레스룸에서 상자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다니엘도 몇 번 도현의 집에서 본 적이 있는 물건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니, 그녀의 집에서 보지 못했던 괴악한 모양의 것도 꽤 있었다.
“안 쓰는 건데 너 해라.”
남도 아니고 동료이니 선심 쓸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다른 선수와 잘 어울리지 않기로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가 이렇게 도움을 청해온 것이 썩 기분 나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남들이 썼던 건 싫다.”
“그래? 그럼 너 할래?”
“싫어요!”
루카스가 나른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자 역시나 엉덩이가 벌겋게 부어오른 여자가 루카스의 어깨를 주물렀다. 많은 선수를 보아온 셀레나였지만 루카스만큼 자신의 GAS에게 떠받듦을 받는 선수는 처음 봤다. 그의 여자들에게선 기이한 분위기가 났다. 어떻게 표현하는 게 좋을까. 다니엘보다도 더 무감각하게 보였다. 무개성적이고 인형 같은 느낌이랄까. 어떻게, 원래는 그저 보통 사람이었다는 그들이 이렇게까지 될 수 있는 것일까. 셀레나가 SM의 세계에 대해 아는 바는 적었지만 정말로 이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 차라리 다른 선수 이름을 댈걸.’
셀레나는 몇 시간 동안 후회한 걸 그대로 다시 하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어떤 여자길래 천하의 다니엘 스톤하츠가 이러고 있냐? 난 너 고자인줄 알았는데.”
루카스가 농담이라고 픽 웃었다. 다니엘은 정말 심각한 발기부전이었기 때문에 농담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다니엘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주 당차고 인생관도 뚜렷하고 멋진 여자야. 취향도 연애관도 분명하고 심미안도 높고 예쁘고 똑똑해.”
“그래? 그런 여자는 그런 거 힘든데. 까딱하면 바로 신고 당해.”
“난 그 사람한테 범죄를 저지르고 싶은 게 아니라….”
“그 여자 때리고 싶다는 거 아냐?”
“그게….”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어떤 방식으로 아프게 하고 싶은 건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루카스가 하는 식으로 그저 때리기만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녀를 지배하고 싶었지만 루카스의 방식은 분명히 아니다. 아니, 다니엘은 그저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좀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는 와중에 자꾸… 그런 이상한 욕망이 드는 것이 문제였다.
다니엘이 말했다.
“평소엔 괜찮은데…. 가끔 심한 짓을 하거나 심한 짓을 당하고 싶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얼굴을 두 손으로 문지르며 한숨을 쉬는 다니엘을 보다가 루카스는 셀레나를 보았다. 그는 자신의 관자놀이 옆에서 검지를 휘휘 돌렸다. 그가 미쳤냐는 물음이었다. 셀레나는 답하지 않았다. 루카스는 디바이스를 집어 들었다.
“어. 어어. 난데. 지금 우리 집에 스톤하츠 왔거든? 너 근처냐? 와라. 응? 이 새끼 여자 하나 만나더니만 영 이상하다. 응. 연애상담인가 봐. 웃기지?”
그러자 곧 루카스의 집은 짐승 같은 기운을 뿜어내는 선수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다들 심심한 모양인지 5명이나 왔다. 집에 TFC 선수들이 우글우글하니 깔끔하던 루카스의 집에도 곧 약과 술이 가득 찼다. 루카스는 시스터즈도 굉장히 많아서 그들이 선수들의 시중을 들었다.
“뭘 하고 싶은데? 여기 시어스 백화점 데리고 가서 사고 싶은 거 잔뜩 사줘. 그리고 하게 해달라고 해. 뭘 그렇게 고민을 하고 앉아 있냐?”
앞머리가 약간 긴 흑발에 검은 눈을 가진 카흐 밀란이 옆에 있는 루카스 시스터즈 중 하나의 부은 엉덩이를 주물러 보았다. 그녀는 싫어하며 루카스에게로 도망갔다.
“너도 그런 거 하냐?”
“뭐, 호기심에 한 번. 잘못해서 하나 팔 부러뜨리긴 했는데 재밌긴 했어.”
셀레나는 이스트드래곤 매니지먼트 소속 매니저라 모두와 안면은 있었지만 그래도 안전하게 다니엘과 신태호의 사이에 앉아 있었다. 셀레나는 이 되먹지 못한 남자들의 조언을 조언이랍시고 진지하게 듣고 있는 다니엘을 포기하고 신태호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구단에서도 다른 선수들이랑 어울리지 말라고 했잖아요, 태호 군. 왜 계속 같이 다녀요?”
“그래도 형들… 그렇게 나쁜 거 가르쳐주고 그러진 않는데요?”
약도 이제는 오히려 하지 말라고 하고…. 그동안 정이라도 든 것인가. 소심하기 짝이 없는 신태호가 동료들을 감쌌다. 어려도 TFC 선수는 선수라는 것인가.
“그냥 같이 다니는 게 문제에요. 결국 물든다구요!”
다니엘마저도 이러는데 심약한 신태호야 말할 것도 없다. 구단과 매니지먼트에 강력하게 항의해야겠다. 셀레나는 이 중에서 신태호라도 지켜야겠다는 마음에 그의 머리를 껴안고 귀를 막았다.
“셀레나 누나?”
어차피 이래봤자 그는 소드마스터라 집중하면 다 들린다. 신태호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가 아주 단호하고 화가 난 그녀의 얼굴을 보자 그냥 순응하기로 했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으니 대번에 다른 선수들이 놀린다.
“이야, 우리 태호 능력 좋다? 누나한테서 사랑 많이 받네?”
저번에 같이 놀러 갔을 때도 여자들이 신태호를 그렇게 귀여워했다. 어쨌든 아무리 그래도 아직 키도 좆만한 어린애일 뿐인데. 물론 강하기는 하지만. 역시 그래서일까? 카흐 밀란이 덧붙였다.
“그러니까. 돈 안 줘도 여자들이 절로 붙네. 개이득. 엄청 좋겠다?”
그러자 이제 신태호가 제법 잘 대꾸를 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말이었다.
“난 귀여운 영계고 형들은 벌써 한물갔잖아요.”
“이열~”
“태호 군!”
다른 선수들은 기특하다는 반응이었고 셀레나는 기어코 나쁜 물이 좀 든 그를 나무랐다.
“그런 게 아니야.”
이제껏 여성 편력으로는 다른 어떤 남자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수컷들만 대량으로 앞에 앉혀놓고(물론 TFC 선수의 여성 편력이라는 건 다른 셀레브리티 남성의 여성편력과는 좀 다르지만) 조언이랍시고 많은 훈수를 듣고 나서 다니엘이 내린 결론은, 결국 이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놈들이 여자를 대하는 방법은 결국 돈, 아니면 폭력이었다. 다니엘도 그녀와 금전적으로 엮여 있었고 심지어 어떤 종류의 가학이 오고 갔으면 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그들과는 절대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은 드디어 이성을 되찾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하군. 나도 정신이 없었다지만.’
이런 버러지 같은 것들과 그가,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만나는 것들과 도현이 같을 리가 있는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주어진 대로만 사는 벌레들. 자신의 입에 들어가는 게 뭔지도 모르고 먹어치우는 개나 돼지 같은 존재들. 약과 술, 섹스에 미쳐 오늘을 어제 같이 살고 내일도 오늘 같이 살다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쓰레기들.
다니엘 스톤하츠는 언제나 평정을 잃지 않는 남자라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나 역시 도현 킬스버그와 관계된 일에는 이렇듯 자신답지 않은 짓을 하곤 했다. 아니, 이런 어리석음이야말로 자신의 본질이었던 걸까. 그런 자아성찰을 잠깐 하고 다니엘은 한숨을 섞어 말했다.
“분명히 싫어하실 거라고.”
그의 말에 루카스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여자 기분을 왜 이렇게 신경 써? 그냥 하고 싶은 거면 해. 내가 너 같은 마도사였으면 도쿄 시내에 있는 여자는 싹 다 따먹었다.”
“아, 나도 그런 생각한 적 많지. 큭큭.”
선수들이 키득거렸다. 마도사의 사기급 능력을 생각해보자면 마음을 먹고 조금의 노력을 더한다면 그다지 어려울 일이 아니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도 말이다.
다니엘은 그들의 말을 싹뚝 자르고 말했다.
“난 그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어.”
그리고 장내가 침묵에 휩싸였다.
그녀의 사랑을 받고 싶다. 결국은 그것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끝까지 그에겐 그것밖에 없었다. 그녀에 대한 사랑도 욕망도 결국 같은 궤를 그리고 있었다.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고 깊은 관계를 맺고 싶었다.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었다. 지금도 예전보다는 훨씬 특별해졌지만 지금보다도 더, 더욱더, 누구보다도 깊은 사이가 되고 싶었다. ‘완벽’하게 되고 싶었다. 분명히 도현과 함께라면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말을 하는 동물 수준이라고 말하기엔 동물에게 미안할 정도인 이 벌레 같은 것들이 이런 고차원적인 욕망과 사랑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거나 상상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누군가와 이토록 애타게 교감하고 싶은 마음을. 애초에 피상적인 공통점만을 보고 치엔이 루카스를 찾아온 것 자체가 우스운 짓이었다.
카흐 밀란은 치엔이 루카스를 바라보면서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고 치엔이 루카스도 마찬가지였다. 대략 나머지도 소름이 돋는다는 표정으로 말을 잃었고 셀레나 카토와 신태호가(셀레나의 가슴에서 겨우 얼굴을 뗐다) 다니엘 스톤하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냥… 솔직하게 다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도현 누나한테.”
신태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셀레나도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어요.”
셀레나는 처음부터 다니엘에게 그렇게 조언했었다. 물론 연적을 돕는 건 눈물이 나는 상황이지만. 그러다가 셀레나는 신태호를 휙 돌아보았다. 전에 화상으로 통화한 게 끝 아니었나? 언제 다니엘이 만나는 여자랑 누나 동생 하는 사이가 된 건가!
“…도현 씨가 싫어하시면 어떡합니까.”
다니엘은 한숨을 푹 쉬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이스트드래곤 선수들 중 두 명은 고개를 절레 절레 저으면서 곧바로 끼어들었다.
“여자 버릇 그렇게 들이면 쭉 고생한다.”
“야, 이 병신아, 차라리 루카스가 하는 것처럼 패는 게 낫겠다.”
둘이 그렇게 말하자 신태호가 깜짝 놀란 얼굴로 형들을 훈계했다.
“여자 때리면 안 돼요.”
“야, 그렇게 여자만 콕 집어서 때리지 말라는 게 평등의식에 위배된다는 생각 안 드냐? 왜 여자만 쉴드 쳐?”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왜 죄 없는 사람을 때려요. 그러니까 선수들이 욕 먹는 거라구요. 그리고 요즘 세상에 누가 누굴 쳐도 문제 될 판에 형들이 치면….”
역시 이스트드래곤에서 제일 제정신이 박힌 건 신태호다. 셀레나는 신태호를 다시 꼬옥 끌어안았다.
“태호 군, 이대로만 자라줘요.”
못된 남자들을 그의 곁에서 치워버려야 한다. 이스트드래곤의 매니저이자 올바른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는 셀레나 카토였다.
패닉에서 빠져 나와 제정신을 찾은 다니엘은 가만히 문제점을 하나하나 짚었다. 결국 문제는 일차적으로 오늘 또 도현에게서 도망친 것이며 그다음으로 이 이상한 욕구를 어떻게 도현에게서 이해받을 수 있느냐였다. 도현은 싫어할 것이다. 그래도 그녀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녀가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을 받고 싶다. 이건 앞으로도 문제가 될 것이다. 셀레나의 말처럼 그녀에게 말하는 것이 맞을까. 그녀가 싫어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녀가 싫어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냉정을 되찾아 생각해보면, 도현 씨는 오히려 흥미를 가질지도 모른다. 지금 쓰시는 작품과도 연관이 되니까 호기심을 가지실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걸로 괜찮을까? 나는 요즘 나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다.’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가 무엇을 했던 남자고 무엇을 할 수 있는 남자이던가. 그가 자신에 대한 확신을 잃는다면 그건 불발된 원자폭탄이 도심 한 가운데 방치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다른 인간들이야 어떻게 되든 알 바가 아니지. 하지만 그녀만큼은…. 그는 한숨을 푹푹 쉬며 고민스러운 얼굴로 선수들이 권하는 술을 마셨다. 원래 술 같은 건 마시지 않는 다니엘이었지만…. 애초에 소드마스터 정도의 신체능력은 아니다 보니 그들을 따라가다 금세 취했다. 그리고 다니엘이 취하니 다른 선수들이 은근히 셀레나에게 더 집적거리기 시작했다.
“아! 형들이 그러니까 욕먹는 거라구요! 싫다잖아요!”
신태호가 셀레나에게 집적거리는 카흐 밀란의 팔을 잡았다.
“아, 우리 꼬맹이 또 형한테 잔소리한다. 어? 너 임마, 형들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대해야지, 어, 임마?”
카흐 밀란이 셀레나의 손목을 놓으면서 신태호에게 짐짓 엄격한 척 되려 훈계를 하자 신태호가 받아주지 않고 정색했다. 그러자 카흐 밀란이 신태호에게 헤드락을 걸며 얼굴을 마구 뭉개듯 주물렀다.
“이거 봐라. 얘 요새 엄청 기어오르지 않냐?”
“아, 처음엔 눈도 못 마주쳤지.”
“이 새끼 다른 팀 선수들한텐 엄청 쫄보면서 이제 우리는 만만한가 봐.”
신태호가 숨이 막혀서 카흐 밀란의 팔을 마구 쳤다. 셀레나가 걱정이 되어서 그를 말렸다.
“장난 그만치고 이제 놔주세요. 진짜 힘들어 보여요.”
“뭐, 이정도 가지고. 야, 너 이것도 못 풀면서 선수 생활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래. 훈련이다 생각해라.”
신태호의 얼굴이 진짜 파래지기 시작했다. 카흐 밀란은 여유롭게 한 팔로 그에게 헤드락을 꽉 걸고 술을 마시며 다른 선수들과 시시덕거렸다. 신태호는 실전과 훈련에서 기량 차이가 심하게 나는 선수였다. 카흐 밀란도 네임드 포워드다. 힘으로는 당해낼 수가….
“아, 태호 군 잠…!”
그 순간 신태호의 온몸에 황금색 오라가 번쩍 하더니 카흐 밀란을 포함, 뒤에 있던 선수 둘까지 퍽 하고 맨션의 유리창으로 날아갔다. 와장창!! 대형 유리창이 깨져서 다들 밖으로 떨어질 뻔했다. 그들은 간신히 창틀을 잡거나 오라를 내뿜어 밑으로 떨어지지 않고 얼른 바닥을 손으로 잡았다. 약에 취해서 반응이 늦었다.
신태호는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콜록콜록 기침했다. 그리고는 자기가 뭔짓을 한지 깨닫고는 깜짝 놀라서 깨진 창으로 달려갔다.
“형! 괜찮아요?”
다들 올라오기는 올라왔다. 여기는 34층이었다. 소드마스터니 떨어진다고 죽진 않겠지만. 신태호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금방 그걸로 밑에 있는 사람들이 다치지 않았을지 걱정되었다. 사람들이 현장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훌쩍 밖으로 뛰어내렸다.
“어, 야…!”
그래도 여길 그냥 뛰어내리면…. 세 명이 그대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집주인인 치엔이 루카스도 옆에 쪼그리고 앉아 밑을 구경했다. 그게 보이나 보다. 30분쯤 흐르자 초인종이 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신태호가 다시 올라왔다.
“아… 다친 사람은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루카스 형, 수리비 낼게요.”
경찰도 온 것 같았다. 다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응? 아니, 됐어.”
“그래도 너 요새 좀 조절이 되나 보다? 이러면 보통 다 죽이더니만.”
카흐 밀란이 기특하단 얼굴로 신태호의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었다. 그럼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신태호에게 그런 장난을 친단 말인가. 하여튼 선수들의 머릿속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형이 저 죽일 리도 없고…. 근데 진짜 전 형들처럼 조절이 잘 안 돼요….”
신태호가 우울한 얼굴로 깨진 창을 바라보았다. 실내의 공기가 바뀌었다. 이번엔 운이 좋았지만 누가 다쳐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죽는다고 해도…. 신태호가 우울해하자 카흐 밀란이 도리어 당황해서는 그의 등을 두드렸다.
“아니, 형이 장난이 심했다. 응? 기분 풀어.”
신태호가 들어오고 나서 느낀 거지만 이 남자들은 같은 남자에게도 험하게 굴고 여자에게도 험하게 구는데 어린애한테는 약한 것 같다. 아니, 신태호라서 그런 걸까? 어쨌든 우울해하는 신태호가 영 안 되어 보이는지 카흐 밀란 말고 다른 선수 둘도 달래주었다.
“그래서… 매니저라고?”
신태호도 저기 묶여버리자 치엔이 루카스가 셀레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렇게 또 말을 걸었다. 셀레나가 질색하며 피했다. 괜히 TFC 선수 매니저가 거의 남자인 게 아니다. 아까 치엔이 루카스가 하던 말을 들어봐라. 그의 매니저가 여자였으면 애저녁에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을 것이다. 셀레나는 이제 일어나야 할 것 같았다. 사랑의 힘으로 모든 걸 극복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치엔이 루카스는 극복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한동안 루카스는 정말 조심해야겠다….’
막장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그의 입으로 들으니 더 경악할 정도다. 구단에도 보고를 해야겠다. 이런 건 분명히 언제라도 문제가 터질 것이다.
“다니엘, 저 먼저….”
먼저 가겠다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다니엘이 셀레나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리고 취해서 상기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얼굴이었다. 오늘 내내 셀레나를 심란하게 만든 그였지만, 이렇게 흐트러진 그를 보는 것도 처음이라서 마음이 더 심란해졌다.
“그냥… 그분한테 솔직하게 말하는 게 맞아요.”
“알고 있습니다. 단지… 이 선택이 나중에 잘못된 결과를 불러올 것만 같습니다. 그녀가 절 버리든가, 아니면….”
“…….”
다니엘은 도대체 무엇을 이렇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셀레나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하나 없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남자였다. 다니엘이 만나고 있는 그 삐삐 머리가 이 남자에게 정말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은 분명했다. 그녀를 만나고 다니엘은 혼란스러워하고 고민하고 좌절하거나 기뻐하기도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보였다.
그는 분명 누가 보아도 멋진 남자였지만, 그의 삶은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있는 것처럼 공허해 보였다. 그가 마치 블랙홀처럼 많은 여자들의 관심을 끌어들였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남자의 커다란 결핍. 그런 모습은 여자에게 그 구멍을 바로 자신이 채워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만드니까.
그가 평생의 목표로 삼았던 마도의 길은 오히려 그의 인간성을 파멸시켰다. 그 후 그는 이 어울리지도 않는 TFC의 세계를 정처 없는 부표처럼 떠돌고 있었다. 명성도 돈도 그에게는 어떤 감흥을 줄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사랑과 욕망, 두려움과 고통을 알려주는 그녀는, 그녀가 비록 패션 테러리스트에 삐삐 머리를 하고 있더라도, 분명히 그에게 좋은 사람이었다. 셀레나 카토는 정말로 다니엘 스톤하츠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에게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가 생겨 많이 속상했지만, 그래도 단 한 번만이라도 그가 진심으로 환하게 미소를 짓는 얼굴을 보기만을 오랫동안 바랐던 사람으로서…. 그에게 조용히 디바이스를 내밀었다.
“전화해요.”
다니엘은 말없이 그녀의 손에 들린 예쁘게 커스텀 된 디바이스를 보다가 받아 들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걸었다.
“도현 씨….”
[여보세요? 다니엘? 지금 어디에요?]
그렇게 밤에 집을 나와 커피숍에서 삽질하다가 도쿄에 날아와 치엔이 루카스의 헛소리(+다른 놈들 헛소리)를 듣다 보니 이미 해가 뜬 지 오래다. 굳이 약을 하지 않아도 다른 놈들이 피우는 것 때문에 다들 각성 상태가 멀쩡하게 유지된 것이었다.
“도현 씨…….”
[다니엘…. 술 마셨어요? 어제 그렇게 나가면 어떡해요? 걱정했잖아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다니엘은 울컥했다. 밤새도록 그녀의 생각에 마음을 졸였다. 패닉에 빠져 그녀가 자신을 싫어하게 됐을 거라고 확신하기까지 했다. 그런 짓을 하려고 한데다가 또 그녀를 내팽개치고 도망쳤다. 버림받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지만 지금 도현의 목소리는 화보다는 걱정을 더 많이 나타내고 있었다.
다니엘은 다시금 깨달았다. 도저히 그녀에게서 사랑을 받을 자신이 없었다.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왔고, 분명히 그녀는 다니엘에게 가시적인 기회를 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없었다.
그는 아마도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친 인간말종일 것이다. 치엔이 루카스와 같았다. 죄책감도 없고 어떤 감상도 없다. 그가 자신이 강간한 여자를 전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다니엘은 자신이 죽인 사람을 단 한 명도 기억하지 못했다. 아마 여기에 있는 이들을 전부 죽인다고 뭐가 다를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때의 이유도 무척이나 이기적이었고 아마 지금 다시 한다 하더라도 그럴 것이다. 변명의 여지도 없고 딱히 변명할 것도 없었다.
셀레나가 치엔이 루카스를 혐오하는 것처럼 도현도 그러지 않을까. 전에 그저 담담하게 다니엘의 고백을 들었던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말해줘서, 다니엘은 정말 기뻤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다니엘이 어떤 인간인지 ‘실감’한다면 과연 그녀는 지금처럼 이렇게….
[다니엘?]
다니엘의 이름을 불러줄까?
“…도현 씨… 정말로…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절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다니엘이 어렵사리 완성한 문장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를 보는 셀레나의 표정이 흔들리고 그의 말을 들은 다른 선수들은 불가해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다니엘의 얼굴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전 치엔이 루카스보다 더 가망이 없는 놈입니다.”
다니엘은 그렇게 단언했다.
“가끔… 이런 제가 도현 씨의 곁에 없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계속… 도망쳤습니다. 도현 씨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그의 실패를 의미했다. 또 다른 실패다. 아아. 다니엘은 또다시 의도적으로 그녀를 속이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그녀가 알아듣지 못하는 방식으로 의뭉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중적인 것은 욕망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모든 것이 이중적이기 짝이 없었다.
[무슨 말이에요, 다니엘 씨?]
계속 이래선 답이 없다. 다니엘은 침을 꿀꺽 삼켰다. 미동도 하지 않고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책에서도 그러지 않던가. 연애에 성공하기 위해선 결국 솔직해져야 한다. 여자를 속이는 남자만큼 해로운 것은 없다.
“저는… 도현 씨가 제 주인님이 되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분명 평범한 소년으로 태어났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인형 같은 존재가 되었고, 그는 왜 자신이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매니저는 죽은 사람의 수만큼 살리면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그걸로 자신이 괜찮아지기를 바랐다. 그렇게 얄팍하고 타성적인 이유로 스스로를 기만하는 비열한 남자이기도 했다. 필사적으로 도현에게서 그런 자신을 숨겼다. 오로지 그녀에게 자신의 최선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욕망이 수시로 그녀와 그의 사이를 위협하는 것일까? 그녀를 위협하는 것일까?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다니엘은 매우 개인적인 이유로 수십만의 목숨을 앗아도 아무런 유감이 없었듯이 이기적이고자 한다면 한없이 이기적인 남자가 될 수 있었다. 다만 그렇다는 걸 도현이 모르기를 항상 바랐다.
“그리고 저도 도현 씨의 주인님이 되고 싶습니다.”
말했다. 어째서일까. 수치감이 든다. 생소한 감정이다. 다니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도현은 잠깐 말이 없다가 대꾸했다.
[…지금… 그러니까 그거 말하는 거죠? 우리 작품처럼 그….]
“네….”
[그럼…….]
도현은 그렇게 말문을 열었지만 말을 잇지는 못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다니엘은 알몸으로 그녀의 집에서 뛰쳐나온 것부터 여기서 동료 선수들에게 말도 안 되는 조언을 들으며 술을 마시고 있는 것까지, 어느 것 하나 꼴사납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무겁게 입을 다물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대답 대신에 질문을 했다.
[…저 아픈 거 싫어하는 거 알죠?]
“네. 압니다.”
[저 누구 때리는 것도 싫다고 전에 말한 거 기억나요? 아픈 게 상상된다고.]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
“…도현 씨를 정말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끔… 죄송합니다.”
다니엘은 그렇게라도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너무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언제나 다니엘을 그녀에게서 도망치게 했다. 가장 사랑하는 그녀에게서.
또 사고를 쳐서 쫓겨난 미르 킹쉴드를 비웃을 때가 아니었다. 송선호는 스스로 무너지는 타입이라고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게 우습다. 셋 중에 내재된 문제가 가장 많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다니엘 스톤하츠 본인이었다.
도현이 잠깐의 침묵 뒤에 말했다.
[일단… 생각할 시간을 좀 줄래요, 다니엘?]
그 뒤 다니엘은 자신이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전화가 끊기고도 그 자세 그대로 유지하다가 툭 손을 귀에서 떨궜다.
“…….”
“뭐라고 하세요, 다니엘?”
다니엘은 곧바로 후회했다. 참았어야 했다.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냥 닥치고 참고 있었어야 했다. 그녀에게 이런 부담을 지워주고 싶은 게 아니었다. 아니…!
‘어째서 사랑만으로는 안되는 것일까.’
그에게서 그가 줄 수 없는 것들만 잔뜩 바라는 여자들이 싫었다. 그런데 어째서 다니엘 스톤하츠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그런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인간이란 어째서 이렇게 추한 것일까. 그란 존재도 그저 그런 인간이었을 뿐일까. 왜 꼭 더 바라고 마는 것일까.
다니엘은 이미 좌절했다. 마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그를 감동시킬 수도 좌절시킬 수도 없었는데 그것보다도 더욱 절망스러웠다. 그녀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니 거절당한 것보다도 더 낙담하고 말았다.
‘잘 안 됐나 보다….’
하긴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선뜻 그런 걸 하겠다고는…. 다니엘이 아무런 말없이 술에 다시 손을 뻗자 셀레나가 그의 손을 잡았다.
“더 마시지 마요, 다니엘. 여기서 더 마시면….”
“…셀레나는 이제 돌아가십시오. 이런 곳은 여자 혼자 있기엔 위험합니다.”
여기 이렇게 동료 선수들이 많아도 이런 곳에 셀레나가 있는 것은 ‘여자 혼자 있는 것처럼’ 위험하다는 것을 다니엘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야 아직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신 것이 아니지만 지금보다 더 술을 많이 마셨을 때 생길 불상사에서 다니엘이 그녀를 지켜주기 힘들지도 모른다. 아니, 다니엘 자체가 위험해질 공산도 컸다. 마도사가 괜히 술을 안 마시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셀레나는 그가 걱정되었다. 그가 전화하기 전까지만 해도 여길 나갈 생각이었지만 그가 이렇게 낙담한 순간에는 옆에 있고 싶었다.
“다니엘도 같이 가요.”
“갈 곳이 없습니다.”
“왜요?”
다니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셀레나는 약간 망설이다가 다시 그의 옆에 앉았다. 살짝 얼굴을 붉히고 그에게 조심스럽게 권했다.
“그럼… 저희 집 가실래요? 여기서 그렇게 멀지는 않은데….”
그러자 다른 선수들이 또 그건 귀신 같이 듣고 놀렸다.
“뭐야? 나한테는 안 대줄 것처럼 굴더니 다니엘 스톤하츠는 되냐?”
치엔이 루카스가 낄낄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다른 남자들도 야유했다. 셀레나는 진짜 싫어했다. 도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그들을 한 번 노려보았다가 다시 다니엘을 보았다. 다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같은 상태로는 셀레나에게 폐만 잔뜩 끼칠 겁니다.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하지만 셀레나는 그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사회적 이성이 약한 소드마스터들이 약과 술을 빨면서 점점 더 야만스러운 분위기가 나는 것을 보며 셀레나는 긴장했다. 신태호가 곁으로 왔다.
“계시고 싶으시면 제가 옆에 있을게요, 누나.”
신태호는 술도 안 하고 약도 안 한다. 그리고 사실상 여기서 다니엘 스톤하츠를 제외하면 제일 최강자일 것이다. 셀레나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부탁해요.”
셀레나는 주로 다니엘의 옆에 앉아 그의 과음을 막는 데 주력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던 그가 이렇게 자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비싼 양주를 몇 잔 더 마시자 정말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야… 우리 그냥 저 새끼 패서 기절시키자.”
“콜.”
치엔이 루카스의 고급 맨션 내에 있는 모든 것이 둥둥 떠서 가운데서 자전하는 커다란 소파와 그것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이스트드래곤 선수들이 소(小)태양계를 이루고 있었다. 소파 위에 앉아 있는 다니엘과 셀레나, 신태호 정도만이 그나마 품위를 지킬 수 있었고 소파에 가까운 카흐 밀란은 약간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가장 멀리 있는 치엔이 루카스는 은반 위를 느릿하고 우아하게 미끄러지는 피겨스케이트 선수처럼 천천히 거실을 돌고 있었다. 가죽옷에 구속구를 한 루카스 시스터즈 몇 명은 혜성처럼 넓게 타원을 그리며 공전했다. 그들은 신태호가 깬 창밖까지 나갔다 들어왔다 했지만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재밌다고 공중에서 텀블링을 몇 번 해보는 약쟁이도 있었다.
“다니엘, 진짜 위험해요. 누구 다치겠어요.”
셀레나가 다니엘을 말렸다. 선수들도 소드 오라를 써서 추진력을 얻지 않은 이상, 중력에서 벗어나 이런 식으로 둥둥 떠 있으면 운신할 수가 없었다. 경기 중에 오펜스가 공중부양마법을 쓰지 못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오라를 잘못 쓰면 아까 신태호 꼴이 나는 건 자명했다.
그렇게 현해탄 너머 메트로서울에서 도현 킬스버그라는 여자의 고민이 시간을 더할수록 그대로 치엔이 루카스의 집에 죽쳐버린 다니엘 스톤하츠에 의한 소태양계 모형은 끊임없이 공전과 자전을 계속해야만 했다.
*
송선호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이 운전하는 방향과 반대로 달려가는 남자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리 보고 저리 볼 것도 없이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그것도 알몸이다. 한밤중이라 잘못 본 건가 싶었는데도, 역시 잘못 보기가 힘든 외모를 한 남자라서 한방에 알아보았다.
“뭐야.”
저 새끼가 미친 건가? 저 꼴로 어딜 가는 것인가? 기시감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예전 도현의 휴가 때도 그녀의 방에서 저런 식으로 뛰쳐나가는 그를 본 적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차를 세우고 그를 염려해줄 의리는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속력을 높였다. 괜히 느낌이 안 좋았다.
오늘은 그녀가 약속이 있다고 해서 다음 주에 도쿄로 가는 일정을 잡았다. 다니엘 스톤하츠와 약속이었던 걸까. 집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차를 몰고 그녀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있을 것 같다.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 차를 주차하고 현관으로 걸어가니 또 현관 앞에 커다란 뭔가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안광을 발했다. 미르 킹쉴드였다. 그는 걸어오는 송선호를 발견하고 바라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모습이 엉망이었다. 그의 짐까지 전부 밖에 내던져져 있었다.
가지가지 한다. 이것들이 설마 집에서 싸우기라도 한 것인가? 만약 도현이 다치기라도 했다면 전부 감방에다 처넣어버릴 것이다. 일단 이러고 있는 걸 보니 그녀에게 크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병신들.”
송선호는 그렇게 픽 비웃었다. 미르가 발끈해서 그를 노려보았다.
“죽고 싶냐?”
“감당할 수나 있고?”
둘 다 겉만 번드르르하지 결국 문명화가 덜 된 놈들이라는 건 누가 봐도 명확했다. 삐꺽하면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짐승들. 그녀가 백 배 아깝다. 굳이 도현에게 내쳐지지 않더라도 조만간에 전부 정리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스포츠 스타라는 건 겉으로 보기엔 화려해 보이고 대중의 관심을 받지만, 결국 한철이고 그뿐이다.
역시 그녀에게 자신보다 좋은 남자는 있을 수 없었다.
송선호는 언제나 도현이 만나는 남자들을 싫어했다. 전부 공평하게, 하나같이 싫어했지만 다니엘 스톤하츠나 미르 킹쉴드는 더더욱 싫었다. 그녀가 지금 당장 만나는 남자들이라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들이 폭력에 발을 담그고 있는 남자들이라서 싫었다. 그녀가 상하이로 팔려갈 뻔했다는 소리에도 손이 다 떨렸는데 TFC 선수를 만나는 여자들의 생활상이나 사건사고를 들으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걱정이 되었다. 그런 걱정을 할 때마다 도리어 그런 놈들이나 만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 같은 남자를 두고.
송선호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옷깃을 한 번 바로 잡고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주홍빛이 은은하게 도는 조명만 켜져 있었고 침실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집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컨디션이 썩 좋지 않던 송선호였는데 그녀의 집에 들어오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인정하지 못할 때도 그녀의 남자들을 볼 때마다 기분이 바닥을 치곤 했는데 오늘은 오히려 유쾌했다. 그들보다 자신이 더 우월하고 잘났으며 그녀에게 훨씬 좋은 남자라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걸로 그녀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송선호는 그녀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막 욕실에서 나왔는지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머리카락을 닦고 있었다. 헐렁한 하얀색 박스티에 검은색 팬티만 입은 그녀는 송선호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온다고 안 했잖아.”
“그냥.”
“회사에 있다가 온 거야?”
“집에 들렀다가.”
“늦게 퇴근했네.”
“미팅 있었어.”
자세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물을까 싶었지만, 관두었다. 듣고서 화를 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크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가 싶어 몇 번을 살펴보았지만 그런 건 아닌 거 같았다. 슈트의 단추를 풀면서 의자에 앉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물었다.
“누구 만났는데?”
“병제 삼촌. KP미디어랑 우리 회사랑 합병할 거라서.”
“아, 리엔 회사. 너네 집 회사였지…. 합병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우리 출판사가 KP미디어 밑으로 들어가는 거야?”
“출판사는 그렇게 될 것 같고 지분 따라서 병제 삼촌이 사장 계속하든가, 내가 사장되든가.”
“진짜?”
KP노벨도 근 6~7년 동안 폭발적으로 성장한 출판사였지만 동아시아 최대 콘텐츠 플랫폼을 가지고 있는 KP미디어와는 체급이 달랐다. 밸류 체인을 수직화하여 이익률을 높일 생각인가 보다.
“제임스 삼촌은 지분 가지고 이사회 쪽으로 물러날 것 같고 내가 KP미디어 지분 30%, 병제 삼촌이 60%에 출판사는 제임스 삼촌 지분까지 해서 85% 정도 되니까 합병 비율 잘 협상해야지.”
“와…. 우리 회사도 상장하면 장난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KP미디어까지 하면….”
역시 재벌 3세…. 그때가 되면 도현의 빚 천억이 우스워지는 상황이 올 것이다. 도현이 좀 놀란 얼굴로 송선호를 돌아보자 그는 살짝 어이가 없어서 대꾸했다.
“내가 호강시켜 준다고 할 때는 거절하더니.”
“다이아몬드도 사고 싶은 만큼 사주고?”
“그래.”
“그래서 결혼하자고?”
“…그래.”
송선호가 그렇게 대답했지만, 도현은 웃기만 했다. 그는 역시나 마음이 달았다. 채근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견뎠다. 도현은 토닥토닥 얼굴에 에센스를 한 번 더 바르고는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자고 갈 거면 씻고 옷 갈아입어.”
“…….”
송선호는 얌전히 2층으로 올라가 속옷만 챙겨서 내려와서 그녀의 욕실을 썼다. 그는 씻을 동안에 아주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번엔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줘야지.’
저번처럼 실수하지 않고 정말 그녀가 해달라는 건 일단 다 해줄 것이다. 다른 건 그 다음부터인 것 같다.
‘미친….’
근데 진짜 떨린다. 문자 그대로 몸도 심장도 떨린다. 저번에 한 번 그런 식으로 쫓겨나서 그런지 오히려 처음보다도 엄청나게 긴장되었다.
송선호는 그렇게 떨리는 마음을 안고 속옷만 입고는 스윽 그녀의 침실로 나왔다. 도현은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인공지능으로 방의 불을 껐다. 침대 주변의 은은한 조명만이 남았다. 그녀는 하품을 했다. 송선호는 당황했다.
“자게?”
“응…. 나 오늘 너무 피곤해.”
벌써 꾸벅꾸벅하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 하고 싶어….’
그날 그렇게 기회를 날려버리고 얼마나 후회했던가. 송선호는 자신의 인생에서 그녀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그렇게나 노력했는데도 항상 그녀의 꿈을 꾸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자괴감에 휩싸였던지. 그런데도 그녀에 대한 마음을 끊어낼 수가 없었다. 그에게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욕망만큼 강렬한 감정이 따로 없었다.
“…….”
하지만 송선호는 아무 말없이 얌전히 침대 위로 올라갔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가 손에 감긴다. 그녀와 다리가 얽히자 아찔해졌다.
‘젠장…. 너무 좋다.’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나왔다. 송선호는 그녀의 몸을 더 바짝 끌어안아 느끼려고 했다. 그녀의 티셔츠 안에 손을 넣어 그녀의 허리와 배를 부드럽게 만지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너무나, 너무나 부드러웠다. 그녀가 으응, 하고 신음을 냈다.
“야… 나 진짜 피곤해. 안 해.”
“알았어….”
송선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물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응? 아니… 그냥 좀…. 별일 아니었어.”
“그럼 다행이고…. 무슨 일 있으면 꼭 말해. 전처럼 다 지나서 말하지 말고.”
“알았어….”
그녀와 함께 이 침대에서 잘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상상할 때마다 허무하고 화가 났다. 그녀가 자신을 남자로 보지 않는다는 걸 송선호 본인이 가장 잘 알았기 때문에, 다른 남자들은 그렇게 쉽게 만나주면서, 질투가 나고 화가 나고 그래서 그녀를 싫어하기 위해 노력했는데도 자꾸 그런 상상을 하고 마는 자신이 싫었다.
그럴 정도로 욕망했던 그녀였다.
그리고 드디어 이렇게 단둘이, 둘이서 아무도 없이, 둘만… 이런 밤을 보내는 날이 올 줄이야. 이게 뭐라고… 행복했다. 송선호는 금방 잠든 그녀의 손을 자꾸 만졌다. 몸을 뒤척여 자신의 쪽으로 돌아누운 그녀의 얼굴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예뻤다. 너무 좋았다.
그녀가 부디 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이렇게나 사랑하는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다른 놈들처럼 그렇게 가볍게 보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다르다는 걸 알아주길 바랐다. 그리고 끝에는 제발 그를 선택해주기를 바랐다.
‘나 좋아하기는 할까? 아직은 아닌가? 내가 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날 밤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보는 송선호는 마음이 너무나 애틋하고 애타는 나머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새벽녘에 겨우 잠들었다. 그토록 바라왔던 사람을 앞에 두고도 제대로 건드리지 못해서 그런지 그날따라 아주 생생한 꿈이 펼쳐졌다.
꿈속의 둘은 어느새 훌륭하게 알몸이 되어 끌어안고 있었다. 둘 다 잔뜩 흥분해서 헐떡거리기만 했다. 뒤에서 그녀에게 꽉 몸을 붙여 그녀의 아름다운 몸을 자신의 것인 것처럼 전부 만졌다. 너무나 부드러웠다. 매끈하고 부드럽고, 또 부드럽고…. 송선호의 몸에 닿는 그녀의 모든 것이 좋았다. 부드럽고 아찔해서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이 절정으로 치달아가기만….
“아… 송선호… 응… 잠깐만… 송선호… 으응. 숨막혀. 잠깐만… 으응…! 야!!”
“으응…?”
송선호는 눈을 번쩍 떴다. 도현이 송선호의 양손을 자기 몸에서 떼어내려고 그의 팔을 꽉 잡았지만, 그에게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송선호는 그녀의 가슴과 거기(!)를 손으로 만지고 있었다.
“…!!”
정확하게는 그녀의 맨살을 움켜쥐고 유두를 엄지와 검지로 주무르며 그녀의 거기까지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헉! 송선호는 깜짝 놀라서 손을 확 떼고 뒤로 확 물러나다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도현이 흐트러진 머리를 한 채 인상을 찌푸렸다.
“앞으로 너랑 같이 못 자겠다. 잠버릇 엄청 안 좋아.”
송선호는 너무 놀라서 말도 못 하고 침대 밑에 떨어진 그대로 멍청하게 그녀의 짜증 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위로 올라간 티셔츠를 내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녀는 송선호에게 화를 냈다.
“진짜 싫어. 손도 안 씻고!”
심장이 철렁한다. 불쾌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계속 화를 내자 송선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미, 미안….”
그가 얼굴을 확 붉히며 인상을 썼다. 그렇게 그녀가 원하는 대로만 하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동침했기 때문에 어젯밤에는 그저 그녀의 얼굴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만족했는데 잠결에 이런 짓을 할 줄은 자신도 몰랐다. 깜짝 놀라서 그도 심장이 엄청 뛰었다.
“너 전여친들한테는 이렇게 해도 됐는지 모르겠는데 난 싫어. 알았어?”
“…….”
네가 처음이다…. 아직 섹스도 하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진도를 확 건너뛰는 게 될 리가 없었다. 그것도 그녀의 성격에. 그녀가 다시금 대답을 채근했다.
“알았냐고.”
“…알았어.”
도현이 찝찝하다고 씻으러 가자 송선호는 신음을 흘리며 침대에 얼굴을 박았다. 죽고 싶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더니 지금은 손이 떨린다. 만졌다. 만졌다. 씨발. 진짜로 만진 것이다. 전에도 속옷 위로 가슴만 만졌지 여기까진…. 항상 몰래 상상만 했었는데 그걸 잠결에… 미치겠다. 게다가 엄청 싫어한다….
‘씨발… 미친놈. 병신. 어떡해. 싫어하잖아. 아…. 씨발. 어떡하지?’
겁난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송선호였다. 의기양양하게 그녀에게 가장 좋은 남자는 자신밖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약간의 실수(?)로 인하여 자신감이 급격히 하락했다. 그녀가 씻을 동안 간단히 세수와 양치를 하고 바지와 셔츠, 벨트 정도만 입었다. 그 정도만 해도 무지하게 근사한 남자였지만,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아침을 준비하면서 그는 어떻게 하면 자기 여자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지 고심했다.
“하아….”
그가 언제나 생각했던 그녀와의 첫날밤은 아주 특별했다. 아침이 되면 그들의 사이가 더욱 깊어진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하지만 현실은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거기다가….
‘내가 원래 이렇게 밝히는 놈이었나?’
잠결에 좀 만진 것뿐인데 그녀의 몸에 대한 생각을 끊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껴안고 그녀의 얼굴을 밤새도록 보던 것은 꿈결같이 너무나 좋았는데, 그녀의 몸을 좀 만졌다는 것만으로도 좀 미칠 것 같았다. 그녀와의 첫날밤은 플라토닉 했으나 아침은 동물적이다.
송선호는 인상을 팍 찌푸린 채로 아침 식사를 예쁘게 플레이팅했다. 냉장고에서 그녀가 먹는 샐러드를 적당히 꺼내 청록색 접시 한편을 장식하고 그 위에 수란을 놓고 작은 그릇에 그릭 요거트를 회오리 모양으로 담고 넛츠를 뿌렸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에는 블랙베리와 블루베리, 사과 몇 조각을 놓고 식탁으로 가져갔다. 레몬 조각을 넣은 차가운 물을 투명하고 길쭉한 컵에 담고 빨대를 꽂았다. 막 그녀가 침실에서 나왔다.
“뭐해?”
그녀가 다 씻고 나왔다. 그녀에게 결벽증이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녀와 사귀기 시작하면서 보니 그녀는 남자와의 접촉에 확실한 규칙이 몇 가지 있었다. 특히 청결에는 신경을 많이 썼다.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고 그녀를 미워했을 때는 쉽사리 그녀를 ‘더러운 여자’라고 생각하려고 했는데 문자 그대로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여자였다.
‘물론 상하이에 팔려갔으면 전부 도루묵이었다.’
그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벌렁벌렁거렸다. 송선호는 새하얀 유리로 된 모던한 식탁의 옆에 비스듬히 서서는 답했다.
“아침.”
그녀는 아직 약간 촉촉한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서 가볍게 집게로 고정하고 보랏빛이 도는 검은색 슬립을 하나 입고 나왔다. 가슴 부분을 둘러 하얀 꽃문양이 덧붙여져 있었다. 그녀의 예쁜 가슴이 은근히 드러나는 데다가 허리가 잘록하게 붙어 섹시했다. 게다가 어찌나 짧던지 엉덩이가 살짝 보일락 말락 했다. 송선호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큼큼 헛기침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예쁘다. 그녀가 항상 이것만 입고 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손에 땀이 잡히기 시작했다.
“해놨으니까 먹어.”
“…응.”
그녀는 살짝 송선호의 얼굴을 보았다가 그의 말대로 의자에 앉았다. 송선호는 약간 안도했다. 더 화를 내진 않을 모양이었다.
“넌?”
송선호는 간단한 토스트에 커피 한 잔을 가져와서 앉았다. 식탁 가운데는 커다란 알을 가진 탐스러운 포도가 은쟁반 위에 놓여 있었다. 신문을 읽고 있었는지 테이블 위엔 신문도 놓여 있었다. 도현은 요거트를 한술 먹다가 왼손으로 턱을 괴고는 송선호를 물끄러미 보았다. 커피를 마시면서 신문을 보고 있는 송선호였다. 손에 잡기 편할 정도로 작게 접어서 어떤 평론가의 사설을 읽고 있었다. 커다란 거실 창에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그는 어디 비즈니스 잡지에 나오면 완벽할 것만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엘리트적이면서 상류층 출신의 젊은 사업가 같은 느낌이고, 실제로도 그랬으니까.
“왜 그렇게 봐?”
송선호는 그녀의 시선을 아까부터 느끼고 있다가 그렇게 물었다.
“아니… 나한테 아침 해주고 나서 신문 읽는 남자는 처음이라.”
아침까지 이렇게 대령하는 남자는 가정교육을 제법 잘 받은 남자다. 그들은 보통 자신이 해준 식사를 즐기는 그녀를 가만히 감상하고는 했다. 그런데 송선호는 도현으로 하여금 아침으로 커피를 마시는 그를 감상하게 만들었다.
“아, 미안. 습관이라.”
송선호는 그렇게 말하며 신문을 내려놓았다. 물론 신문 내용 같은 건 잘 머리에 안 들어왔다. 그녀가 나오기 전에 대충 다 읽었기 때문에 계속 읽었다. 이런 어색한 아침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도 있었다.
“오늘까지 마감은 되겠어?”
“응… 아마도. 목요일에 다 쓰긴 해놨거든. 오늘 오후까지는 보낼게.”
그녀의 목소리에 아까의 화는 확실히 없었다. 송선호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괜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귀 뒤로 넘겨주었다.
“응?”
“아니… 먹을 때 불편할까 봐.”
키스하고 싶다…. 송선호는 평소에 그녀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토스트를 한 입 정도 먹고 커피만 마셨다. 하지만 원래 커피는 마실수록 더 목이 타는 법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아침을 먹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막 씻고 나와서 촉촉하고 예쁜 그녀였다.
“지금 입은 거… 뭐야?”
송선호는 그녀의 허벅지를 살짝 덮은 그녀의 슬립을 살짝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도현이 블루베리를 하나 먹다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슬립? 왜?”
“아니….”
여성 속옷 가게 앞을 지나다가 비슷한 걸 본 기억이 나는 것 같다. 몇 개 사서 선물할까 싶었다. 그의 시선이 슬립에서 떨어지질 않자 도현이 피식 웃었다.
“진짜 샵 언니가 한 말이 맞네.”
“어? 뭐가?”
“보수적인 남자가 오히려 더 좋아한다고.”
“뭘?”
도현은 씨익 웃었다. 그녀가 저런 식으로 웃는 건 그다지 좋은 신호는 아니다. 그녀는 다리를 꼬고 다시 턱을 괴고는 흔들흔들 다리를 흔들며 송선호의 다리를 발끝으로 살짝살짝 쳤다.
“그래도 자기 게 아니면 싫다 이건가.”
“무슨 말이야?”
“너 말이야.”
송선호가 영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니 도현은 약간 어이가 없었다.
“너 나 짧은 거 입으면 그렇게 뭐라고 하고 옷 똑바로 입으라고 잔소리 엄청 했잖아.”
송선호가 시선을 확 다른 곳으로 돌렸다. 식은땀이 난다.
“너무 속 보인다, 어?”
“…….”
송선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도현의 발이 그의 바짓단 밑으로 들어가 들추며 대답을 채근했다.
“너 진짜 그동안 나 계속 좋아한 거야? 어?”
진짜로 땀 난다. 등이 다 젖을 것 같았다. 송선호가 드디어 입을 뗐다.
“…먹기나 해.”
“내가 아직도 영 안 믿겨서, 응? 말 좀 해봐. 진짜 6년 동안?”
“회사 간다.”
“아, 왜. 아직 시간 많잖아. 아니, 오늘 토요일인데?”
“일 있어.”
“거짓말. 오늘 집에 아무도 없는데? 로웰 선생님도 없는데?”
“…….”
도현이 송선호의 다리를 발가락으로 간지럽혔다. 뭐가 그녀의 버튼을 누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또 송선호를 괴롭힐 기분이 든 것 같다. 그녀가 이럴 때는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송선호에게 다가가 그의 무릎에 앉았다. 그는 당연히 매우 긴장했다. 그녀는 그의 입에 요거트를 한 스푼 넣어주었다.
“으음…. 어젯밤에도 빨리 안 자는 거 같던데…. 뭐 했어? 나한테 이상한 짓 한 거 아냐?”
“아니…! 아무 짓도 안 했어!”
송선호가 지레 찔려서 얼른 답했다.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까도 그랬는데 내가 어떻게 믿어?”
“지, 진짜야…. 손만 잡았어.”
“흐응.”
그녀는 바짝 긴장한 송선호의 새하얀 셔츠 목깃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등에는 말 그대로 식은땀이 줄줄 나고 있었다.
“그래서 이게 그렇게 마음에 드신다고?”
도현이 슬립의 어깨끈을 살짝 잡아 들며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송선호의 탄탄한 어깨를 손끝으로 은근히 그리며 그를 희롱했다.
“아, 아니….”
“그래서 진짜 나 6년 동안 좋아했어? 근데 왜 빨리 고백 안 했어?”
오늘 그녀가 아주 날을 잡은 모양이다. 옛날 일에 관해 물으면 송선호는 정말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것저것 말이다.
‘씨발… 씨발. 씨발. 미치겠다.’
송선호는 겨우 입을 열었다.
“6년…은 아니고…. 그러니까….”
“으응~ 거짓말. 너 사실 나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든 거지? 근데 남자친구 있어서 대시 못 한 거고. 맞지?”
“아, 아니!”
“아닌 게 아닌데? 응? 그럼 정확하게 언제부터야?”
“갑자기 왜 이래.”
“어, 말 돌리는 거 봐.”
작품의 매출이 줄어 약간의 타격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보다 채무 상태가 많이 양호해졌다. 간당간당하게 현재 가진 자산과 빚이 비슷한 수준이었다. 물론 작품의 매출이 확 줄거나 도현이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면 일이 또 달라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영 방법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도현은 난감해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다신 안 볼 것처럼 하면서도 내 빚은 갚아줬단 말이지.’
그때 송선호가 아예 연락을 끊으면서 도현의 빚을 2백억이 넘게 갚아줬을 때는 그녀도 깜짝 놀라서 그에게 연락하려고 엄청 노력했다. 아무리 재벌이라고 해도 차인 상대에게 그러지는 않는 법이었다. 그녀와 잘 되지 못하더라도 그녀가 팔려가는 꼴은 못 보겠다는 거 아닌가.
지니 호에서 울면서 고백을 하고 나서부터 그는 그때까지 어떻게 숨겨왔나 싶을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프러포즈를 하지 않나 술 먹고 진상을 부리지 않나…. 그녀가 그때까지 봐왔던 그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흥미가 생기기도 했다.
빚도 여전히 문제였고 전에 살던 거에 비하자면 영 팍팍하기 짝이 없었고 미래도 불투명했지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친구와,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잘난 것 같은 남자 셋을 데리고 사는 도현 킬스버그의 삶은 아주 재미있었다. 비록 그 중 둘이 지금 또 문제를 일으켜 쫓겨나거나 도망을 간 상태이긴 한데.
‘한동안 남자를 안 만나다가 만나서 그런가? 아니면….’
7점이나 8점이나 9점보다 10점이 좋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애초에 7점이나 8점이 10점보다 좋은 거였으면 그건 이미 7점도 8점도 아니다. 성격이 좋다든가, 그녀에게 잘해준다든가 그런 이유로 남자가 좋아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남자들은 편리하긴 했지만, 어쩐지 다 개성이 없달까. 아니, 그냥 그들이 7점이나 8점이나 9점이었기 때문일까. 그녀도 10점짜리 남자들은 몇 번 만나본 적이 없었고, 한꺼번에 이렇게 3명을 만나본 적도 없었고, 하나같이 이렇게 눈에 띄는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꽤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까 미르 킹쉴드가 아무리 사고를 치고, 다니엘 스톤하츠가 아무리 도망을 가고, 송선호가 아무리 자존심을 세워도, 화가 나긴 하는데 이러고 있는 걸 보면 마음이 슬쩍 풀린달까?
“나도 너 처음 봤을 때 엄청 잘생겼다고 생각했는데.”
“…….”
“내가 말 안 했나? 몸도… 뭔가 내 스타일.”
도현은 그의 뒷덜미를 손가락의 살살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다른 놈이면 옛날에 손 뗐을 텐데 잘나고 잘생기고 매력적이니까 가지고 있고 싶다.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사고 안 치거나 입 안 열면)다. 그것도 이번엔 무슨 운인지 한꺼번에 셋 아닌가, 셋. 이런 거 솔직히 여자로서 으쓱할 일 아닌가?
“그래서 자기는 나 언제부터 좋아했다고?”
안 그런 척하려고 무척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그가 긴장한 데다가 그녀의 말에 당황하고, 또 좋아하는 게 보인다. 다른 남자들 보다 송선호는 좀 꼬인 편이라 원하는 말을 들으려면 빙빙 돌아가야 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거 다른 거 입어줄까?”
보수적인 남자가 더 좋아한다는 건 진짜다. 송선호가 확 하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몹시 갈등하고 있는 것이 바로 보였다. 그는 도현에게 지는 것을 싫어한다. 수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수지를 따지는 게 무슨 소용인가. 먼저 좋아하는 놈이 지는 것은 만고의 법칙이었다. 도현이 그의 빵빵한 가슴을 검지로 더듬으면서 희롱의 결과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다니엘 스톤하츠 씨 연락입니다.]
디바이스가 침실에 있어서 저택의 인공지능 비서가 그렇게 알려주었다.
*
송선호가 말 그대로 기겁을 하고 펄쩍 뛰었다.
“안 돼. 안 돼. 절대 안 돼. 미쳤어?”
“아, 왜 이래. 생각만 해보겠다는데.”
“그 새끼가 하는 말 못 들었어? 결국 너 때리고 싶다는 얘기잖아!! 이 또라이 새끼가!!”
그는 완전 정색한 얼굴로 그녀에게 큰소리를 쳤다. 그녀는 흥분한 그를 일단 진정시키려고 했다.
“일단 자기야, 진정하고.”
“자기 소리 집어치워! 다니엘 스톤하츠랑 앞으로 연 끊어. 알았어? 대답해!”
“야….”
“대답해라, 빨리. 누구한테 너 맞는 꼴 내가 볼 수 있을 거 같아?!”
“일단… 플레이는 섹스지 폭행은 아니잖아.”
“도현 킬스버그!! 네가 지금 그런 글 쓴다고 개념이 어디로 날아갔냐? 어? 그딴 건 어디 모자란 놈이나 변태 새끼들이나 하는 거야!”
도현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랑은 가끔 이렇게 말이 안 통한다. 그는 모든 걸 다 그가 판단하고 결정하려고 했다. 사귀기 전에도 좀 그랬는데 연애적으로 얽히기 시작하니 오히려 그런 부분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기 시작했다. 사소한 부분에서 잔소리를 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정말 도현이 결정권을 가진 아주 사생활적인 부분에서 강하게 간섭하려고 했다. 지금처럼.
도현은 일단 그의 무릎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그가 도현의 손을 꽉 잡았다.
“대답 안 해?”
“야… 너랑 만나기가 더 싫어, 지금.”
도현이 결국 짜증스럽게 그를 노려보았다. 송선호도 인상을 쓰며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했다.
“왜?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다니엘 씨랑 만나고 안 만나고는 내가 결정해. 왜 네가 이래라 저래라야?”
“그건…!!”
송선호는 확 하고 뭔가 내뱉으려다가 부글부글한 얼굴로 눈을 감고 참았다.
“걱정되니까 하는 말이잖아.”
“그래, 걱정 고맙다. 이제 좀 놔.”
“…….”
도현은 송선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고 그의 무릎에서 일어났다. 송선호는 정말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은 기분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신음을 흘렸다.
‘망할….’
실수하지 않고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저번 이후로 아주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벌써 양보를 못 하는 순간이 왔다.
‘절대 안 돼.’
정말로 안 된다. 그녀가 지금 송선호랑 만나면서도 그 짐승 새끼들을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는데 그 미친 새끼가 얌전한 얼굴을 하고 그녀에게 당당하게 그런 짓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걸, 그것도 직접 들었는데 어떻게 진정할 수가 있겠는가!
‘손만 대봐라, 씨발.’
기필코 매장해버릴 거다. 송선호는 이를 갈았다.
아직 춥긴 하지만 봄이다. 개나리의 꽃망울이 터지고 있었다. 도현은 굵은 실로 두껍게 짠 무릎 밑까지 오는 가디건을 입었다. 그녀는 3층 테라스로 올라가 양모가 깔린 흔들의자에 앉아 담요를 덮고 집필에 들어갔다. 야외 난로를 틀어놓고 뜨거운 유자차를 테이블 위에 둔 채 간간이 생각이 필요할 땐 널따란 정원과 분수를 바라보았다. 몸은 따뜻하고 머리는 차가워서 기분이 좋았다.
회사를 가려다가 결국 안 간 송선호는 몇 번을 주저하고 고민하다가 간식거리를 들고 위로 올라갔다. 다시 아까 일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 했어?”
송선호는 과일과 따뜻하게 덥힌 쿠키를 쟁반에 담고 3층 테라스로 갔다. 도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대충. 지금 확인해 볼래?”
송선호는 자리에 앉아 그녀에게서 스크린을 받아 내용을 확인했다.
<“선배가 제 선배인 건 알겠는데요. 그렇다고 사적인 부분까지 저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는 거 아니에요?”
“뭐?”
여자만 보면 가르치러 들려는 남자는 정말 싫다. 잘생겼으니까 한두 번은 귀여워 보이는 것뿐이다. 그걸 넘어서면 불쾌한 걸 넘어서서 가소롭다. 아니, 애초에 여자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왜 여자를 아는 척하는지 모르겠다. 한 번이라도 여자로 살아봤어? 게다가 나에 대해서는 알면 얼마나 안다고 난리야. 한 살 많은 게 대수야? 사회경험 좀 많으면 자기 말이 다 맞아? 사실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니까 더 허세 부리는 것으로밖에 안 보인다. 왜 자기가 그녀에게 직장 선배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모르는 걸까? 남자들은 왜 이렇게 주제 파악을 못 할까? 단체로 정신병이라도 걸렸나?>
“…….”
송선호가 가져온 쿠키를 먹고 차를 마시며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옆얼굴을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부분은 너무 쓸데없는 사설 같은데. 아람이 캐릭터도 깨지는 거 같고….”
“아, 그래?”
도현은 선선히 송선호가 지적하는 부분을 수정했다. 다니엘 스톤하츠와의 일에 대해서 확실하게 확답을 받아내려고 올라온 송선호였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답답했다. 그녀가 송선호의 걱정을 그런 식으로 오해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르치려고 드는 게 아니라… 씨발.’
그럼 놔두라고?
약이라도 처먹지 않는 이상 어떤 남자가 미쳤다고 자기 여자가 그런 변태랑 엮여서 그런 변태짓을 하는 걸 두고 보겠는가. 아니, 그냥 변태짓도 아니고 까딱하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게 그쪽이다. 그쪽으로 물들었다가 영영 정상적인 섹스로는 만족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걸 그녀가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픈 것도 싫어하고 누가 아파하는 걸 보는 것도 싫어한다면서 왜 단박에 다니엘 스톤하츠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감을 끝내는 동안 송선호이 머릿속은 복잡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마감을 끝낸 도현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찌뿌둥해… 마사지라도 받으러 가야겠다.”
“너… 수입 줄어서 이자 내기도 힘들다며.”
물론 마사지 한 번 받고 안 받고로 문제가 생길만한 금액도 아니기는 했지만 그래도 송선호는 걱정이 되어서 물어보았다. 도현이 집 안으로 들어가며 대답했다.
“그래도 받을 건 받아야지. 나 글 쓰는데 정기적으로 그런 거 안 받으면 일 못 해.”
송선호는 이마를 살짝 짚었다가 한숨을 쉬며 디바이스를 꺼냈다.
“끊어줄게. 네가 가는 미용실 있는 스파지?”
“어? 그럼 케이지로 해줘.”
도현은 더 가격대가 높은 스파 살롱을 불렀다. 송선호가 다니는 피트니스도 거기였다. 그는 군말 없이 2시간 반 풀코스 전신 마사지와 스파 이용권을 10회 끊어서 도현에게 주었다. 거기서 제일 비싼 코스로 해주었다. 도현은 잠깐 기뻐했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집안은 따듯했다. 외투를 벗어서 근처의 의자에 걸었다. 송선호는 바깥의 난로를 끄고 그릇을 정리하여 쟁반 위에 담아 안으로 들어왔다가 그녀를 보고 조금 놀라서 헛기침을 하고 시선을 돌렸다. 아침 먹고 나서부터 일을 했고 아직 오전이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슬립 차림이었던 것이다.
“아니, 전에 나한테 돈 주는 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거라고 미친놈 아니고서야 어떤 남자가 나한테 돈을 주겠냐고 그랬던 남자가 있었는데.”
“…….”
도현은 송선호의 손에서 쟁반을 자연스럽게 빼앗아 꽃병이 있는 테이블 위에 대충 놓았다. 그리고는 그의 목에 두 손을 걸고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스크린 본다고 안경을 쓰고 있는 송선호였다. 그의 입매가 굳게 다물리며 남자답고 근사한 얼굴이 살짝 궁지에 몰린 듯한 느낌이 든다.
“그 남자가 여기에 있네?”
연봉이 높아봤자 당장엔 돈도 없는 미르 킹쉴드와 다니엘 스톤하츠보다 현재 몇 배나 더 도현의 빚을 갚아준 송선호였다. 그것도 아예 차였을 때 말이다. 송선호는 당연히 할 말이 없었으므로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그녀의 양어깨를 살짝 잡고 그녀를 떼어내려고 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질 못했다.
“마사지 받으러 간다며.”
“아니, 내가 진짜 이해가 안 돼서, 응?”
“…데려다 줄 테니까 일단 옷 입어.”
송선호가 그렇게 말을 돌리자 도현은 더 웃겨서 피식 웃었다. 그에게 몸을 더 붙이며 그의 셔츠 위로 등을 살짝 간지럽혔다.
“이렇게 나한테 해주고 싶은 게 많으면서 왜 그랬대?”
“아니…! 내가 원래 여자한테는 잘하는데…! 그러니까 어렸을 때부터 그러라고 배워서 이런 건 그냥 자연스러운….”
송선호는 그렇게 변명을 시도했다. 그러자 도현이 아~ 하면서 알겠다는 듯이 대꾸했다.
“아~ 다른 여자들한테는 다 잘했는데 나한테만 그냥 개새끼처럼 굴었다?”
“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하긴 나 싫다고, 쌍년이라고 했던 적도 있지.”
“…!”
송선호는 아주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절절맸다. 도현은 한 손으로 그의 뒷머리를 비비 꼬았다. 그녀는 그의 안경을 벗기고 그의 어깨에 다시 팔을 걸치면서 더욱 얼굴을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턱으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래서.”
“…….”
“나 언제부터 좋아했다고?”
그녀는 짙은 속눈썹으로 둘러싸인 눈을 살짝 가늘게 뜨고 가만히 송선호의 얼굴을 관찰했다. 송선호는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고 심장은 쿵쾅거리고 말 그대로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씨발… 씨발. 씨발. 누가 나 좀 살려줘!’
미칠 것 같았다. 긴장감에 속이 안 좋아졌다. 뱃속까지 쿵쾅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꼼짝 못 하게 만들 때는 두 가지의 경우로 나뉘었다. 아주 천국이거나 아주 지옥이거나. 그녀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몰아가면 아주 기분이 좆같아질 때가 있는데 오늘은 뭔가 반반을 걸쳐서 더 미칠 것 같았다.
그녀가 다른 남자들도 이렇게 다루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기분이 좆같음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자신만큼 오래 곁에 있었던 남자도 없었다. 아마 그뿐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흥분된다. 말할까, 말까. 어차피 반쯤은 짐작하는 거 같은데 그냥 확 말해?!
‘아냐. 아냐. 아냐. 안 그래도 나 좀 우습게 보는데 절대 안 돼.’
그때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도 아주 병신같이 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그간의 마음까지 고백했다간 그가 얼마나 등신 같아 보이겠는가. 아니! 애초에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으면서 고백은커녕 좋아하는 여자한테 삐딱하게 굴었던 흑역사는 어떻게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오히려 실책 중 실책이 될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대답을 하지 않는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으나 그는 그녀의 눈도 더이상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마주치고 있었다. 정말로 죽을 것 같았다. 그녀의 힘에 꼼짝도 못하고 눌리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송선호는 약간 표정이 무너지면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도현은 눈을 감지도 않으면서 인상을 좀 찌푸리곤 ‘Uh-uh’ 라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이거 뭐야? 이거 아니다, 지금.”
“…다음에. 다음에 얘기할게.”
최대한 애원하는 것처럼 안 하려고 노력했지만 거의 애원같이 들렸을 것이다. 송선호는 그대로 이마를 마주 댄 채로 도현의 눈빛을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아마 여기서 더 추궁을 받으면 그냥 또 사실대로 뱉어내고 오늘 밤에 이불을 차게 될 것이다.
애초에 도현이 자신을 전혀 남자로 봐주지 않는다는 것에 좌절했으면서도 그녀가 의도하지 않아도 그녀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자신이 싫고 그래서 그런 그녀가 미웠던 거니까. 그녀가 작정하고 휘두르면 그는 백에 백은 진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이젠 그게 싫으면서도 좋다. 답이 없다.
“흐응….”
도현은 여기서 더 그를 괴롭힐까 말까 아주 즐거운 고민을 하였다. 그가 한 몇 년 작정하고 도현에게 못되게 굴며 도현이 하는 거나 사생활에 사사건건 잔소리를 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앙심 같은 걸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괜히 골려주고 싶다. 그가 좋아한다고 이러고 있는 게, 그러면서도 도현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신기하고 또 웃겼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 사랑한다고 말해봐.”
“…갑자기….”
“왜? 잘하잖아.”
“…….”
이제 자기가 하고 싶을 땐 곧잘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작 시키니까 입 밖으로 안 나오는 건 또 무슨 오기일까. 어쩌면 이런 자신을 도현이 이미 다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까지 드는 송선호였다. 송선호는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아 온몸을 붙였다. 그리고 매우 초조하면서도 약간 불만스러운 듯한 얼굴로 그녀의 눈을 그대로 바라보았다.
“…넌?”
“응?”
“너도 나 사랑한다고 말해.”
말하고 나선 송선호 스스로도 미친 짓이라고 평하며 속으로 자기 자신에게 욕지거리를 했다. 해줄 리가 없었다. 도현이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더욱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자 송선호가 ‘어어…’ 하면서 물러났다. 그녀가 미소를 씨익 지으며 간지럽게 속삭였다.
“사랑해~”
송선호는 깜짝 놀라 얼이 빠졌다. 그리고는 얼굴이 곧바로 빨개지면서 귀에서 스팀이 나는 것처럼 열이 확 올라왔다. 온몸이 심장처럼 뛰었다. 기대도 안 했기 때문에 더 그랬다.
밑도 끝도 없이 행복감이 몰려오면서 온몸이 부풀어 터질 것만 같다. 진짜 눈물부터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는 더듬더듬 말했다.
“사, 사랑해. 나도 사랑해. 정말 사랑해. 나 진짜 처음 봤을 때부터 너 좋아했어. 계속 좋아했어… 진짜 예뻐. 너무 좋아. 도, 도현….”
도현아, 하고 처음으로 그렇게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려는데 그녀가 웃었다.
“와, 너 진짜… 아니, 세게 나오려면 끝까지 좀 버텨보든가. 너무 쉬운 거 아냐?”
“…….”
“그러게 말 좀 예쁘게 하지.”
도현은 송선호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검지를 튕겼다. 그리곤 옷을 갈아입으러 룰루 1층으로 내려갔다. 송선호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바로 파악했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이를 갈았다.
역시 그는 그녀가 너무 좋은데도 그녀가 미웠다.
*
다니엘 스톤하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도현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다니엘 스톤하츠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윤기 나는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 보석 같은 보랏빛 눈동자, 미의 신이 곱게 깎아 만든 것처럼 아름답기 짝이 없는 얼굴. 하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무표정한 남자. 그때 그가 도망가고 사흘 만에 다시 보는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대체로 남자들의 머릿속이란 훤한 법이며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알아내는 것은 일도 아니다. 송선호조차도 조금만 신경을 써서 들여다보니 결국 어떤 놈인지 훤하게 보이게 된 것도 같은 이치였다. 남자를 보는 시각에서 로맨스에 대한 환상을 지워버리면 그가 보이는 법이다. 그래도 제대로 알아낼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도현의 인생에 딱 한 남자밖에 없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매주 월요일 아침 같은 시각에 일어나 씻고 명상을 하고 도현의 식사를 준비하고 시간에 맞춰 도쿄로 갔다. 그리고 금요일에 돌아오면 그때부터 일요일까지 내내 도현과 함께 있었다. 그동안의 모든 것은 오로지 도현이 하고 싶은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머리가 좋은 남자라 그런지 지나가듯 말했던 것도 다 기억하여 그 다음 주 주말이면 멋지게 준비를 해놓곤 했다. 같이 운동을 하고 미식을 즐기고 공연을 보러 가고 야경을 보며 서로의 사색을 나누고 입을 맞췄다. 그리고 월요일이 되면 그 전과 매우 흡사한 한 주가 시작되었다. 그가 합숙 훈련을 하는 주중에는 어떨지 눈에 훤했다. 그가 도현을 만나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을지도 쉽게 상상이 갔다.
하지만 도현은 그가 어떤 남자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그에 대해서는 알아낼 수 있는 것이 극히 적었다. 그는 좋아하는 음식도, 싫어하는 음식도 없었고, 좋아하는 음악도, 싫어하는 음악도 없었으며 좋아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도 없었다(물론 그는 그냥 도현 외의 모든 사람을 꺼리는 것 같았다. 그냥 사람을 싫어하는 걸까?).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남자이며 본인 입으로 용병 시절 몇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였다고 했는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서 도리어 도현이 긴가민가할 정도였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있는 게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그가 진심으로 도현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해주고 싶을 정도로 도현을 사랑했다. 사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해 보자면 좀 맹목적일 정도였다. 도현은 자신이 아주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사랑은 어쩐지 조금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본인은 필사적으로 숨기는 것 같긴 한데, 사실 그가 엄청 잘생긴 걸 빼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걸 본인만 모르는 것 같다.
그는 그저 해야 하는 일을 제시간에 딱딱 맞춰 해내는 걸 좋아하는 남자인 것일까? 하지만 그가 그런 강박적인 초조함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겉으로 보기엔 전 세계 정상급 남자 모델의 뺨을 힘껏 후려쳐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멋지고 진중한 느낌의 빼어난 미남이었다. 하지만 도현 앞에서의 그는 사춘기 소년처럼 허둥지둥거렸다. 그는 뜬금없이 미르를 공격할 때도 있었다. 아무 말없이 갑자기 섹시해지기도 했다. 능숙했다가 다시 숙맥 같아지고 숙맥 같다가도 갑자기 능숙해졌다가 도망간다. 분명히 똑똑한 남자인 것 같은데 간혹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했고 알몸으로 뛰쳐나가는 것처럼 엉뚱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연애를 안 해본 남자라서 그런 것일까?
재미있다고 하면 재미있는 남자다.
잠깐 그렇게 다니엘 스톤하츠를 관찰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데 그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낮게 울리는 근사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저번엔 그렇게 도망가서 죄송했습니다, 도현 씨.”
“왜 그랬어요? 그냥 사실대로 말하지 도망을 가면 어떡해요.”
도현이 한숨을 섞어 그렇게 말하니 그가 약간 더 긴장하는 것 같더니 준비해온 말을 빠르게 이었다.
“죄송합니다. 도현 씨에게 그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게 만들다니. 도현 씨는 도현 씨가 원하는 데로만 하시면 됩니다. 저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다시는 없게 하겠습니다. 도현 씨가 이런 걸 싫어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참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절대 그렇게 도망가지 않겠습니다. 벌써 두 번째라니….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원래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않는…!”
약간의 고민 끝에 일단 얘기를 해보자고 도현이 먼저 연락했다. 아니, 도현이 먼저 연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고 연락을 하기로 했으니까. 이런 걸 보면 역시 그는 머리가 좋은 남자다. 항상 도현이 먼저 움직이게 만든다. 이런 숙맥 같은 모습도 거짓인가, 라는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쳤지만, 석고대죄라도 할 기세의 그를 보고 역시 그건 아니지 싶었다. 사흘간 그 나름대로 괴로워한 모양이다.
“일단… 도대체 언제부터 자각한 거예요? 여자는 안 만나봤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현이 물었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고 지냈는지 모르겠지만 도현에게는 그의 말이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어쨌든 그렇게 숙맥 같던 남자가 갑자기 SM플레이를 하자니?
“그때… 도현 씨랑 사진을 찍을 때부터, 아니, 전에 로웰 리 선생님께서 도현 씨를 혼낼 때부터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로웰 선생님 대신에 도현 씨를 애원하게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뒤에 도현 씨가 절 묶고 내려다보시니까 제가 애원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변태…. 도현은 미소를 지은 얼굴로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너무 배운 남자는 변태끼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을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다.
“그 뒤로도 계속… 도현 씨의 배에서도, 그때도 도현 씨에게 심한 짓을 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도현 씨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커피에 입도 대지 않았다. 그는 테이블만 쳐다보고 있다가 시선을 들어 도현과 처음으로 눈을 마주쳤다.
“역시… 기분 나쁘십니까?”
도현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버려진 강아지 같은 눈망울이다. 아이러니하다. 도현이 그렇고 그런 글을 적고 먹고 살고 있긴 하지만 실제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체험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녀 자체는 그냥 기분이 좋은 게 좋았기 때문에 아프거나 누굴 아프게 하거나 하는 것에 흥미를 느낀 적이 없었다.
“기분이 나쁘다기 보단….”
호기심은 든다. 그녀가 지금 가까이하고 있는 남자들이 다 그랬지만, 그들은 도현에게 궁금증을 가지게 했다. 이 남자들은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무슨 생각을 하길래 이러는 건가. 지금까지 만났던 남자들과는 다르다. 아마 예전 같으면 안 만났을 남자들이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도대체 어떤 남자인가? 빼어난 외모에 진중한 성격과 달리 숙맥이고 그래서 귀여운 남자라고 생각했다.
‘글 쓰는 데는 확실히 도움 될 것 같고….’
도현은 고민했다. 그녀가 고민하는 건 다니엘 스톤하츠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도현은 그의 보랏빛 눈동자를 사랑했다.
우수에 찬 그의 자태를 사랑했다.
가끔 깜짝 놀랄 정도로 섹시해지는 게 좋다.
숙맥 같아서 데리고 다니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도 예전 일이고 지금까지 그가 계속 노력해오고, 도현도 그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에 때때로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는 서투름이 이젠 마냥 귀엽다고 생각한 지 오래였다. 오히려 그런 순진함이 새로웠다. 그녀에게 오로지 잘 보이고 싶어서 이렇게까지 고민하고 노력하는 남자라니.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가 본디 정동 없이 깨끗한 수면처럼 차분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함께 있으면 그런 그마저도 인간성을 드러내곤 해서 재밌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그런 차분함은 주위를 환기해주어 좋았다. 그는 가만히 도현을 관찰하고 도현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도현이 가만히 그를 관찰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것처럼.
‘그 남자랑 같이 있을 때랑 비슷한 느낌도 들고….’
물론 그는 너무나 도현을 잘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문제였지만. 방향이 다르긴 하지만 위험할 정도로 섹시하다는 면도 공통점이다. 역시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니엘 스톤하츠. 도대체 어떤 남자란 말인가? 도현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안 돼. 안 돼. 절대 안 돼. 미쳤어?]
게다가 송선호가 그런 식으로 기를 쓰고 반대하니 이미 반발 심리도 충분한 상태였다. 그가 말하는 건 어지간하면 듣기가 싫다. 왜일까. 여기서 다니엘과의 관계를 관둔다면 송선호가 기뻐할 것이라 생각하니 더 그러기 싫다.
도현은 다니엘을 좋아했다. 이런 일로 그냥 헤어지거나 사이가 어색해지는 건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설사 이 문제로 헤어지는 날이 오더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 도현은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를 충분히 겪어보지 못했다. 그는 끝까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였다.
도현은 다니엘의 긴장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저 다니엘 씨 좋아해요.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일단 천천히 같이해볼까요? 우리 진도처럼.”
그러자 다시 수그렸던 다니엘 스톤하츠가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확 들더니 도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현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확 상기하며 보석 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생기를 띄고 마구 일렁였다.
“감사…합니다.”
그의 귀에서 김이라도 빠져나올 것처럼 얼굴이 벌게졌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만 보고 있는 사람은 보는 재미가 있었다. 도현을 살짝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그런 그를 귀엽다고 생각하며 보았다.
“그동안 어디서 지냈어요?”
“치엔이… 루카스 집에 있었습니다.”
“치엔이 루카스요? 아….”
그는 TFC 세계에서도 아주 저질로 유명했다. 게다가 그의 시스터즈를 M 노예로 사육하는 걸로도 유명했다. 다니엘 스톤하츠 같이 정갈한 남자가 그런 남자와 어울릴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는데. 같은 클럽이니 당연히 교류가 있긴 했을 것이다.
“그래서 루카스 선수가 다니엘에게 많이 가르쳐주던가요? 저 진짜 아픈 건 싫은데.”
“아… 당연히 도현 씨가 싫다는 건 전혀 할 생각 없습니다. 절대 없습니다…!”
도현이 허락을 해줬다는 사실 때문에 전에 없이 마음의 동요가 극심한 다니엘 스톤하츠는 마구 손을 내저으며 그렇게 말했다.
“저, 저도… 이런 건 잘 몰라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그래서 잠깐 보러 간 것뿐입니다. 절대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요!”
“…….”
누가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 했던가. 다니엘 스톤하츠는 간혹 이런 당황과 혼란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도 도현의 앞에서만 말이다.
“도, 도현 씨에게 그런 식으로 폭력을 쓴다든가…! 아니면 감금을 한다든가, 그, 그런 야한 옷을 입힌다든가, 아이처럼 엉덩이를 때린다든가…! 개처럼 기어 다니게 한다든가, 공을 물어오게 한다든가, 암퇘지 취급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천장이 아주 높아 햇살이 따뜻하게 들어오는 고급스러운 커피숍이었다. 사람들이 두 사람을 다 쳐다보았다. 대낮에 그렇게 크게 말하기엔 아주 문제가 있는 발언이었다. 다니엘은 결국 한 손으로 자기 입을 막으며 도현의 시선을 피했다. 도현은 웃는 얼굴 그대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천천히요.”
“네….”
*
“어! 스톤하츠 씨! 돌아오셨네요?”
집에서 기구를 이용해 운동을 막 하고 나온 로웰 리가 돌아온 다니엘을 보고 깜짝 놀라 그렇게 말했다. 다니엘이 인사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 연애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며칠이라고 다시 보니까 반갑네요.”
로웰은 여느 때처럼 금발 삐삐 머리에다가 헤어밴드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니엘의 등을 한 번 팡팡 두드려주고는 슬금슬금 도현에게로 갔다. 그녀가 도현에게 속삭였다.
“설마… 하기로 한 거예요?”
등 뒤로 도현이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로웰이 헉 하더니 키득거렸다.
“나중에 후기 좀요.”
그리고 그녀는 둘을 위해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도현과 다니엘은 1층에 있는 서재로 갔다. 거기엔 맞은편 벽을 가득 채운 책장이 있고 책상과 소파가 세련되게 배치되어 있었다. 도현은 책장에 다가가 박스를 하나 들어서 소파 앞의 낮은 테이블 위에 놓았다. 다니엘은 그 박스 안에 시선을 고정하며 소파에 앉았다. 도현은 그가 앉은 소파의 등받이를 손으로 잡고 약간 삐딱하게 섰다.
“음… 다니엘 씨는 돔도 되고 섭도 되고 새디스트도 되고 매저키스트도 된다는 거죠?”
“아마도요….”
다니엘은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지식은 하나도 없이 그쪽으로 욕구만 들끓던 그였으나 치엔이 루카스 집에서 속성(?)으로 좀 배웠다. 루카스와 루카스 시스터즈 양쪽에서.
그는 도미넌트, 즉 상대를 지배하고 통제하고 싶어하는 욕구와 동시에 서브미시브, 상대에게 지배받고 통제당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동시에 느꼈다. 그와 상대에게 고통을 주고 싶기도, 또한 고통을 받고 싶어 했다. 묶이거나 묶고 훈육을 받거나 훈육을 하고 싶어 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동정이었던 주제에 엄청 까다로운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다니엘은 지식도 제대로 없는 상태로 이렇게 다양한 욕구를 느끼고 있지만 도현은 지식은 있으나 욕구는 없었다.
도현은 ‘흠…’ 하고 박스 안을 같이 보다가 라이딩 크롭을 꺼냈다. 전에 로웰 리가 도현을 혼낸다고 허벅지를 쳤던 것이었다. 그때 살살 쳐서 다행이었지 사실 다른 스팽킹 도구보다 훨씬 고통이 심한 체벌 기구였다.
분홍빛이 도는 도현의 새하얀 피부에 빨갛게 예쁜 자국이 남을 정도로…. 다니엘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체벌 기구와 도현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도현이 그걸로 다니엘의 턱을 살짝 받치자 다니엘이 저절로 도현의 얼굴로 시선을 고정했다.
“이런 게 좋아요? 이건 진짜 아플 텐데.”
“괜찮습니다.”
다니엘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녀가 곧바로 그걸 휘둘러 뺨을 때려주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강한 반발감이 들어 다니엘은 그녀가 든 라이딩 크롭을 손으로 잡아서 자신의 턱에서 떼어냈다. 도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요?”
“다른 남자한테 썼던 건 싫습니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참… 알 수가 없네.’
그는 도현이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간섭하지 않았다. 도현이 그들에 대해 이야기 하거나 불평을 말해도 마치 전혀 관계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차분하게 대응할 뿐이었다. 말이 통했다. 그에게는 어떤 말이든 할 수 있었다. 도현의 다른 남자들과의 경쟁을 즐기면서도 그들을 견제하며 독주했던 미르 킹쉴드나 대놓고 질색하는 송선호랑은 달랐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썼던 이걸 쓰기는 싫다라…. 도현은 라이딩 크롭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럼 새로 사러 가요.”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싫다면 무리하실 필요는….”
다니엘이 살짝 시선을 피하며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피식 웃으면서 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제가 싫을 때는 싫다고 할 거예요.”
“그래도….”
다니엘은 그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아니… 싫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싫다는 말을 할 수 없도록 만들고 싶어지겠지…. 다니엘은 머리카락을 만지는 그녀의 손을 잡아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다니엘이 말했다.
“저는 도현 씨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그것뿐이라고는… 이제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결국 제가 진심으로 바라는 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도현이 또 웃었다. 그녀는 그가 귀여워서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웃음을 섞어 말했다.
“겁쟁이. 이러니까 자꾸 도망가는 거였어.”
“…….”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항상 그랬지만 그녀는 예리하다. 그녀는 남자를 잘 알았다. 그래서 결국 ‘남자’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은 남자들을 쉽사리 꿰뚫어 보고 그녀에게 올 득실을 따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르 킹쉴드는 그렇게 단박에 내치고 다니엘은 그녀가 먼저 만나러 와주었다.
그래서 다니엘은 아는 것이다. 선을 넘으면 아마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다. 그녀의 옆에서만 사람도, 남자도 될 수 있는 다니엘이었다.
‘결국 이 마음도 이기심일 뿐인 걸까.’
그렇다 하더라도 놓지 못한다. 결국엔 미르 킹쉴드나 송선호보다도 가장 욕심쟁이인 것은 다니엘 스톤하츠일지도 모른다.
“둘이서 사귀는 거잖아요. 제대로 이야기하면 괜찮을 거예요.”
도현은 그의 앞에 선 채로 소파에 앉은 그의 머리를 안고 있었다. 그의 매끄러운 흑단 같은 머릿결을 만지며 조용히 말했다.
“좋아하는 남자가 함께 있다가 계속 도망가면 슬프잖아요.”
다니엘은 움찔했다가 인상을 썼다.
“사랑…합니다.”
“네, 저두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녀는 다니엘에게서 몸을 떼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도 자연스럽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오늘 짙은 회색의 H라인 스커트에 가슴이 깊이 파여 있는 몸에 달라붙는 검은색 캐시미어 니트를 입었다. 허리엔 터키색 얇은 허리띠, 귀에는 황금술로 된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차분하게 내린 머리카락까지 모든 것이 그녀에게 꼭 맞는 차림이었다. 우아하고 섹시한 자태다. 그녀는 다니엘 스톤하츠의 조각 같은 턱을 받쳐 들며 잠깐 살펴보았다.
기다랗고 숱이 많은 속눈썹에 휩싸인 그녀의 갈색 눈동자와 다니엘의 보라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관찰하는 눈빛. 다니엘은 그녀와 눈을 계속 마주치고 있을수록 점점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눈빛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일단 기구는 싫다고 했으니까 손으로 때려도 괜찮은 건가요?”
도현이 물었다. 그러자 다니엘이 눈을 약간 크게 뜨더니 그대로 잠깐 굳었다.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냥 때리기만 해도 좋은 거예요?”
“잘 모르겠습니다. 좋을 것 같습니다.”
“흠.”
그리고 그녀가 오른손을 확 치켜들었다. 다니엘은 그대로 꼼짝 못 하고 굳어 있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뺨을 바로 내려치지 않자 그제야 그가 눈만 돌려 그녀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인상을 약간 찌푸렸다. 잠깐 그대로 있다가 한숨을 쉬었다.
“뭔가… 못 때리겠어요.”
그녀는 손을 내렸다. 다니엘은 그녀가 손을 치켜들었을 때부터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가 지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자신의 심장이 맞나 싶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