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21)

그 남자들의 애로사항 (1)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는

대체로 인내심이 강한 남자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여자가 자신과 만나던 도중에 남자를 둘이나 데리고 들어와도 일언반구 하지 않고 그녀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 줄 수 있을 정도로 대인배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도현 킬스버그였다. 그녀가 그의 곁에 있어 주는 것이었다. 그는 도현 킬스버그를 사랑했다. 그녀의 곁에서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자기 자신마저도 좋아질 정도로. 그는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연봉도.

제대로 그녀와 만나기 시작한 지도 가장 최근인 송선호가 그녀에게 자신의 방식을 계속 요구하여 그녀에게 거절당하고 심한 소리를 듣거나 미르 킹쉴드가 사고를 쳐서 쫓겨날 때도 그는 항상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그가 떠나야만 했던 것은 그의 욕망이 그녀를 해칠까 봐 그랬던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녀가 다니엘 스톤하츠의 암적인 면을 알고도 받아들여 줬을 때는 아주 기뻤다. 몸도 마음도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 행복하고 충만한 나날이 이어졌다.

“뭐라고 부르는 게 좋아? 킬스버그? 그냥 도현? 도현아? 우리 예쁜 도현 님?”

XX도 예쁜 우리 도현이? 미르 킹쉴드는 카우치에 누워 자신의 위에 있는 도현의 뺨을 깨물면서 매력적인 웃음을 흘렸다. 마감을 막 끝내고 한숨 자려고 하는 도현 킬스버그의 허리를 낚아채서는 음담으로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앗, 미르…! 깨물지 좀 말라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가 아주 자연스럽게 도현의 치마 속에 손을 넣어 엉덩이를 은근히 만지며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손으로 잡고 그녀의 뺨에 입을 쪽쪽 맞추면서 장난을 쳤다. 도현은 꺅 하면서 그의 빵빵한 가슴을 잡고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가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기분 좋게 상기된 얼굴로 미르의 코를 꽉 깨물었다.

“아파. 아파아파.”

“복수에요.”

아주 둘이서 까르르 웃고 좋아 죽었다. 다니엘 스톤하츠가 소속된 TFC 클럽, 이스트드래곤은 벌써부터 일주일 중 5일은 단기합숙이기에 그는 자주 집을 비웠다. 주중에는 도쿄에서, 그리고 주말에 겨우 서울로 돌아온 다니엘이었다.

“…….”

그리고 그사이 저 멍청한 미르 킹쉴드가 다시 돌아와서는 그의 도현 씨를 날름 또 낚아챈 것이다.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는 용하게도 그녀의 환심을 사는 데 능했다. 저렇게 바보 같고 쓸데없는 짓만 하는 데다가 가끔 대형사고를 쳐서 선을 밟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장외로 떨어져 나갔다 싶은데도 다시금 그녀의 마음을 얻고는 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예전의 그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도 살의라는 것에 대해 알지 못했다. 하지만 미르 킹쉴드는 그의 안에 잠재되어 있던 살인 본능을 일깨웠다. 무지한 얼굴로 밝게 웃으며 그녀에게 멍청한 말이나 속삭이며 환심을 사려고 하는 그의 작태가 너무나 뻔뻔해서 꼴보기가 싫었다.

TFC 선수들은 상대 클럽의 선수를 경기 중에 ‘실수로’ 죽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미르 킹쉴드. 미하엘 로드리게스. 조나단 훅. 2128 엘 드라카에서 그가 합법적으로 죽일 남자들의 명단이다.

‘아니….’

미하엘 로드리게스와 조나단 훅은 죽여도 상관없을 건 분명한데 미르 킹쉴드가 문제였다. 저걸 제일 먼저 죽이고 싶은데 그가 죽으면 도현이 슬퍼할 것이다. 그녀가 슬퍼하는 것은 싫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상처받고 슬퍼하는 그녀는 아름다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위로하는 것은 참으로 뿌듯한 일일 것이다. 다니엘은 용병 일을 그만두면서 다시는 살생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아주 미약하게나마 살생을 하는 것에 거부감을 지닌 상태였는데 이번에 미르 킹쉴드가 다시금 도현의 곁으로 돌아오면서 아예 살의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솔직히 이 정도까지 인간성을 가지게 된 스스로에게 조금 놀랐다. 그는 질투로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이다.

“도현 씨.”

“아, 다니엘 씨.”

그는 거실로 좀 더 들어와 도현을 불렀다. 도현은 미르 킹쉴드의 코를 놔주고 고개를 돌렸다. 다니엘의 얼굴을 보자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왔어요?”

“네.”

그녀는 미르의 품에서 벗어나 다니엘에게 다가오려고 했다. 아마 포옹을 하고 입맞춤을 해줄 것이다, 평소처럼. 하지만 미르 킹쉴드가 놓아주지 않았다. 미르는 아주 호전적으로 씨익 웃으며 다니엘을 보면서 물었다.

“너 우리 예쁜 도현이가 가슴 만지라고 대줘도 못 만지겠다고 찌질댔다고 내가 들었는데 이제는 괜찮냐?”

도현 킬스버그와 다니엘 스톤하츠가 그러고 있던 걸 그때 지니 호에 타고 있던 몇몇 크루들이 보았고 미르 킹쉴드가 나중에 돌아왔을 때 그녀와 그가 어떻게 잘 되고 있는지 궁금해하자 그들이 미르에게 말해주었다. 미르 킹쉴드란 남자는 도현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의 환심을 사는 데도 아주 능숙했다. 아니, 그냥 그가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이 자력에 이끌린 쇳가루처럼 슬슬 끌려갔다.

“미르! 다니엘 씨한테 시비 걸지 말아요. 싸우면 제가 어떻게 한다고 했어요?”

“헹! 넌 이렇게 못하지? 부럽지, 새끼야?”

도현이 그렇게 말했으나 미르는 아주 보란 듯이 그대로 도현의 가슴을 손으로 조물조물 주물렀다.

“…….”

“미르, 그만. 그만!”

도현이 그의 팔뚝을 잡으며 그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쳤다. 미르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도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으나 그녀가 정색한 얼굴을 유지했다. 미르는 그녀를 놔주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니엘에게 다가갔다. 미르도 벌떡 일어났다.

“아! 하지 마! 하지 말라니까.”

“다니엘 씨, 보고 싶었어요.”

“도현 씨.”

도현은 다니엘의 등을 끌어안으며 그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다니엘도 눈을 감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미르 킹쉴드가 도현의 골반을 손으로 잡으며 끌어당기려고 했으나 그들이 결국 입을 맞추자 그가 ‘아!’ 하고 짜증을 냈다.

“질투 나!”

“이제 와서 왜 그래요? 보이즈라도 되겠다고 한 건 미르면서.”

도현이 다니엘을 끌어안은 채 그를 돌아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미르는 좀 억울한 표정으로 도현의 얼굴을 보면서 대꾸했다.

“그래도!”

“아, 정말.”

미르는 기어코 다니엘의 품에 안겨있는 그녀의 입술에 자기도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다니엘 스톤하츠를 노려보았다. 또 보란 듯이 그녀의 가슴을, 이번에는 양쪽 다 손으로 주물주물 하고 주물렀다. 미르 킹쉴드로서도 이전에 아~무런 이유 없이 이 찌질이 마도사 새끼가 마법으로 사람 뒤통수를 몇 번 쳤던 것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

왜 지금 죽여버리면 안 되는 걸까? 다니엘 스톤하츠는 자신을 노려보는 미르 킹쉴드를 무지렁이처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다니엘, 그거는요?”

“아.”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도현에게 내밀었다. 도현은 기뻐하며 그것을 받았다.

“저 이거 정말 좋아하거든요. 도쿄 안 가면 못 먹는 거라서. 고마워요, 다니엘 씨.”

도현은 아주 비싸고 화려한 화과자 세트를 확인하고 밝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다니엘의 뺨에 입을 쪽 맞추었다.

“같이 먹어요.”

그렇게 도현이 가운데 앉고 왼쪽에는 다니엘 스톤하츠가 모델처럼 앉았고 오른쪽에는 미르 킹쉴드가 도현 쪽으로 몸을 틀고 앉았다. 등받이에 탄탄하고 멋진 근육이 보이는 팔을 얹고 머리를 기댄 채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도현이 못 말린다는 얼굴로 그의 입에 작게 조각을 낸 화과자를 입에 넣어주었다.

“맛있네.”

“그렇죠? 다니엘 씨도 먹어 봤어요?”

도현은 여러 남자를 거느리는 여자답게, 평등하게 그의 입 앞에도 작게 조각을 내서 나무포크로 집은 화과자를 내밀었다. 다니엘은 감사의 말을 하며 먹었다. 그의 수려한 옆선이 아름다웠다.

“맛있습니다.”

“하지 마. 하지 마.”

미르는 자신의 기다란 다리로 도현이 다리를 얽으며 다니엘을 챙기는 그녀를 자꾸 말렸다. 도현은 시끄러운 그의 입에 화과자를 하나 더 물려주었다. 그러자 미르는 도현의 뺨을 잡고는 다시 입을 맞추었다. 도현이 ‘앗’ 하며 그의 팔을 찰싹 쳤다. 그가 자신의 입안에 있던 것을 그녀의 입안에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미르!”

“너도 먹어야지.”

“그래도…!”

“왜? 더러워? 우리 맨날 뽀뽀 엄청 하는데?”

미르가 그녀에게 엉겨 붙었다. 도현은 그를 좀 흘겨보았지만 그의 허벅지를 한 대 더 찰싹 치는 수준에서 끝냈다. 입에 들어온 걸 씹어서 넘기고는 ‘아차’ 하고 도현이 손바닥을 쳤다.

“아, 차를 안 내왔네요. 화과자는 차랑 마셔야죠. 잠깐만요.”

그녀가 허리를 감싸 안고 무게를 기대는 미르의 허벅지를 찰싹찰싹 몇 대 더 쳤다. 미르가 뭉그적거리며 손을 뗐다. 그녀는 일어나서 부엌으로 향했다.

카우치에는 2m 전후의 남자 둘만이 남았다.

“…….”

“…….”

미르 킹쉴드는 삐딱한 자세로 얼굴을 괸 채 부엌에서 차를 준비하는 도현 쪽을 보았고 다니엘은 바르게 앉은 자세 그대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넌 도대체 언제 꺼지냐.”

미르가 그렇게 툭 말했다. 다니엘은 대꾸하지 않았다. 미르는 도현을 보고 있다가 ‘엇!’ 하고 번개같이 그를 항해 고개를 돌렸으나 이미 늦었다.

“이 씹…!!”

그는 이미 쉴드에 갇혔고 산소 공급이 차단되었다. 도현을 향해 소리쳤으나 그녀는 듣지 못했다. 쉴드를 깰 수도 없었다. 소드마스터이니 산소를 차단당한 채 4분이 지나도 보통 사람들처럼 죽지는 않았지만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물론 어느 순간이 지나면 제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죽는다. 디바이스도 집의 인공지능도 음성기반이라 미르 킹쉴드의 위기를 확인하지 못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미르 킹쉴드를 쳐다보지도 않고 도현이 돌아올 때까지 그대로 그를 묵사발 냈다. 그리고 그녀가 차를 준비하는 걸 다 끝내고 거실로 돌아오기 직전 쉴드를 해제하였다. 2분 정도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는 없었지만 미르 킹쉴드는 머리에 핏대가 잔뜩 서서는 바로 다니엘 스톤하츠에게 달려들었다.

“이 또라이 새끼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

그는 다니엘의 멱살을 잡고 그 무지막지한 주먹을 휘두르려고 하는데 도현이 비명을 질렀다.

“다니엘 씨…!! 미르!! 안 돼요!!”

미르 킹쉴드가 멈칫하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는 열이 뻗쳐서 눈까지 벌게져서는 그녀에게 외쳤다.

“이 새끼가 금방 나한테…!!”

“놔요, 미르!! 미르는 왜 항상 모든 걸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해요? 그러지 말라고 말했잖아요!”

“그게 아니라 이 새끼가 금방 나한테 마법으로…!”

그러자 도현이 화가 난 얼굴로 미르를 보다가 다니엘을 보았다. 다니엘이 대답했다.

“그런 적 없습니다.”

그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억양의 변화도 없이 그렇게 말하자 도현이 홱 미르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차를 준비한 쟁반을 테이블에 놓고 미르에게 다가가 혼냈다.

“이제 안 싸운다고 했잖아요!”

“아니…! 아니, 진짜로…!”

미르는 답답해서 죽으려고 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그녀가 믿을만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다니엘 스톤하츠의 모르쇠는 아주 훌륭했다. 누가 저런 무덤덤한 샌님이 금방 사람을 벌레 죽이듯 잡으려고 했다고 생각하겠는가!

‘이 새끼 진짜 또라이 아냐?’

그를 여자도 모르는 숙맥, 병신, 찌질이 정도로 무시하고 있던 미르의 야수적 감각이 징징 알람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는 다니엘에게 싸움을 걸지 않겠다고 약속하고야 같이 카우치에 앉을 수 있었다. 미르는 아까보다 더 도현에게 달라붙어 다니엘 스톤하츠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를 방패 삼아 바짝 몸을 낮추고 수풀에 숨어 경계를 하고 있는 고양잇과 맹수 같은 날카로운 기운을 풍기기 시작했다.

“미르….”

도현이 경고했다. 그녀가 그의 입에 다시금 과자를 넣어주니 그가 그걸 느리게 씹어 먹으면서도 여전히 다니엘을 경계하고 있었다.

“응… 예뻐. 예뻐.”

미르는 그녀의 뺨에 입술을 누르면서도 계속해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이 걸리면 죽여버리겠다는 태세다. 다니엘은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은 태도로 부드럽고 아름답게 미소를 지은 얼굴로 도현을 대했다.

“올해 초에 새로운 선수들이 몇 명 들어왔다고 했던 거 기억나십니까?”

“네, 그랬죠?”

“19살짜리 한 명과 22살짜리 두 명이었는데 오랜만에 저희 클럽에서도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아… 정말요? 얼마 전에 웨스트이글도 정말 거하게 싸움났는데….”

도현이 대답했다. 그녀는 다니엘의 말에 흥미를 가지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스트드래곤은 싸움 잘 안 난다고 그랬잖아요.”

“아무래도 새 멤버들이 들어오면 그렇게 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음….”

신입이 들어오면 아무래도 그들식의 서열 정리가 필요한 모양이다. 도현이 물었다.

“얼마나 싸웠어요? 누가 이겼어요?”

“보통은 몇 시간씩 걸리는데 이번에는 순식간에 끝났습니다. 신태호는 그런데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겨우 다들 안 죽는 선에서 끝났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는 쉽니다.”

“어머….”

“저희 클럽이 싸움이 잘 안 일어나는 건 신태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대로 붙으면 마도사를 제외하고 신태호를 제압할 수 있는 선수는 한 명도 없습니다.”

다니엘이 그렇게 설명했다. 도현이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 되네요. 완전 원탑이구나. 원래 소드마스터들끼리는 그렇게 실력 차이가 많이 안 나는 편인가요, 미르?”

“같은 클럽이면… 결국 비슷한 수준끼리 모이니까. 약한 놈들은 약해.”

미르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도현은 또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하긴… 로웰 선생님이 한하 팬이라서 몇 번 한하 경기하는 거 봤는데… 볼 게 못 되더라구요….”

팬심으로도 이길 수 없는 노잼…. 상대팀도 이쪽팀도 둘 다 약하니 지지부진 이어지기만 하는 경기였다. 오히려 누구도 지지 않는 것이 아슬아슬한 맛이 있다고 해야할까.

도현은 원래 쉬려고 했는데 다니엘과 미르를 양쪽에 끼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국 오랜만에 창을 전체 스크린으로 바꾸고 영화까지 보았다. 미르 킹쉴드는 다니엘 스톤하츠가 오랜만에 도현과 만났다고 해서 자리를 비켜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같이 식사를 하고 잠을 자야 할 시간이 되자 도현은 침실로 같이 들어가려는 그들을 둘 다 거절했다.

“오늘은 피곤해서 혼자 잘게요. 잘 자요, 둘 다.”

도현은 남자 둘의 뺨에 쪽쪽 입을 맞춰주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또 그녀의 방문 앞에는 2m 전후의 남자 둘만이 남았다. 정적이 흘렀다.

“…….”

“…하암, 잠이나 자러 가야겠다.”

한동안 다니엘을 경계하던 미르는 그렇게 기지개를 켜더니 2층으로 먼저 올라갔다. 다니엘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새벽 3시쯤 되었을까. 미르 킹쉴드는 자는 척을 몇 시간 정도 하고 있었다. 그는 옆방에 있는 다니엘 스톤하츠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하고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행동을 개시했다.

‘우리 킬스버그가 아무리 싸우지 말라고 했어도 내가 당하고는 못 살지.’

요는 들키지 않으면 되는 거다. 배구공으로 뒤통수를 맞추거나 펀칭 마법으로 한 대 맞는 것 정도야 웃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그때는 그가 잘못한 것이 도현의 눈앞에도 버젓이 보였으나 이번에는 그녀를 감쪽같이 속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고요한 살기가 미르의 야수적 본능을 일깨웠다. 이르든 늦든 이 새끼는 언젠가 분명히 미르를 죽이려고 들 것이다.

‘일단 눈부터 날려버리고 시작하자.’

마도의사 짓도 하는 놈이라고 했으니까 오히려 편하다. 마도의사는 없어진 팔도 자라나게 하는 22세기의 화타였다. 앞으로 허튼짓 못 하고 도망이라도 가게끔 살짝(?) 겁만 주면 될 일이다. 지금만큼은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마도사의 능력을 과하게 맹신하기로 마음먹은 미르 킹쉴드는 발걸음 소리,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침대에 바로 누워 얌전히 잘 자고 있었다. 그의 앞에 선 미르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그의 눈을 오라의 검으로 그어버리려고….

깡!

‘씨팔…!’

쉴드였다. 좆 됐다. 미르가 다니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다니엘은 조용히 눈을 뜨고 있었다. 마도사 기습에 실패하면 백에 백….

“잠깐만…! 으윽!!”

미르는 곧바로 쉴드에 갇혔고 다니엘 스톤하츠의 가벼운 중력 마법에 기절할 때까지 짓눌렸다. 다니엘은 침대에 가만히 앉아 무음의 공간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정신을 잃자 쉴드를 해제하고 둥둥 띄워 방으로 옮겨주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방으로 돌아와 드디어 평온하게 잠들었다.

다니엘은 아침에 일어나서 가볍게 마도순환을 하고 씻었다. 씻고 나온 그는 옷장을 보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곧 그녀가 좋아할 만한 스타일로 챙겨 입었다. 캐쥬얼하면서도 그의 늘씬하고 훤칠한 몸매가 부각되는 옷차림이었다. 연애 서적 이후로는 패션지를 열독하고 셀레나 카토의 도움까지 받아 채운 옷장이었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머니를 닮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지 꽤 되었고 패션지 이후로는 요리 서적을 탐독하여 제법 훌륭한 요리를 만들 수 있게 된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아침을 과하게 먹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그녀였으니 상큼한 유자 드레싱에 바싹하게 말린 대추를 뿌린 샐러드를 준비하고 작은 잉글리시 머핀 위에 저염 연어 스테이크를 데쳐서 올렸다. 그 위에 수란, 또 그 위에 껍질을 벗긴 붉은 토마토를 살짝 으깨어 올린 후 바질을 잘라 용케 균형을 잡았다. 곁에는 과일을 예쁘게 잘라 데코까지 한 후 곡물 음료를 잔에 따라서 준비했다. 그의 식사도 같은 것으로 준비했다.

“아, 맛있는 냄새.”

음식 향기에 잠에서 깼는지 그녀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침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다니엘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다니엘.”

그녀의 목소리에서 애정이 느껴졌다. 다니엘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항상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며 도현도 그의 뺨에 쪽하고 입을 맞추었다. 도현은 자리에 앉아 다니엘과 오붓하게 식사를 하며 대화하다가 의아한 얼굴로 2층 계단을 돌아보았다.

“이상하네….”

배가 고파서 내려왔어도 한참 전에 내려왔을 텐데…. 미르 킹쉴드는 웬만해선 절대 식사를 거르지 않았다. 다니엘이 말했다.

“아침 일찍 나가던 것 같았습니다.”

“아, 그래요?”

다니엘이 그렇게 말하자 도현이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이 씨익 웃으며 나이프를 잡은 그의 오른손을 손끝으로 살살 간지럽혔다.

“그럼 오늘 우리 진도는 어쩌죠? 미르까지 놀리잖아요. 가슴도 못 만진다고.”

“그건….”

석고 조각처럼 매끄럽고 아름다운 그의 얼굴에 홍조가 어렸다. 그가 곤란해하는 얼굴은 볼수록 참 흐뭇하다. 부끄러워해도 흐뭇하고 흥분해도 흐뭇했다. 그는 아름다운 남자였다.

“열심히 연습해야죠. 이런 것도 못 하면 우리 다른 건 어떻게 해요.”

“열심히 하는 건… 열심히 할 자신 있습니다.”

“거짓말.”

“도현 씨… 식사부터 마저….”

도현의 손이 다니엘의 셔츠깃 사이로 슥 들어오자 다니엘 스톤하츠는 조신하게 얼굴을 붉혔다.

“진짜 귀엽다니까….”

도현이 그의 귓가에 입술을 누르며 그렇게 속삭였다. 다니엘의 얼굴이 더 벌게지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부들 한 번 떨더니 그녀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아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도현 씨…!”

“아, 또 이런다. 천천히요… 응? 이렇게….”

도현이 부드럽게 그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가 다시 그의 아랫입술을 빨았다.

천천히… 다니엘은 얼굴이 벌게진 채 그녀와 입을 맞추었다. 귀가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섹시한 한숨을 흘리며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어때요? 오늘은 잘 참을 수 있겠어요?”

도현이 물었다. 다니엘은 구름 위에 둥둥 뜬 것 같은 얼굴로 멍청하게 동문서답했다.

“너무 좋습니다….”

그의 말에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저도 다니엘 씨가 너무 좋아요.”

저번의 가출 이후로 도현과 다니엘의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다. 그전까지의 다니엘 스톤하츠는 도현 킬스버그에게 모든 것을 100% 맞췄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무엇 하나도 흘려듣지 않고 모두 해주었다. 자신을 꾸미는 것부터 시작해서 가정(?)생활, 데이트와 이야깃거리 등등 그녀가 말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녀가 말로 하지 않은 것들도 눈치껏 척척 해주곤 했다. 그는 똑똑한 남자였고 점점 갈수록 제값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 부담이 되었던 것일까? 그렇게 보이진 않았는데. 어쨌든 그는 이제 자신이 바라는 것도 조금씩 입밖에 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기겁을 했을까. 타이밍이 좋은 것뿐일까. 도현이 하필이면 그런 것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을 때 그가 조금 더 특별한 연인관계에 대한 욕망을 드러냈고 도현은 흥미를 느꼈다. 그들은 약속했던 것처럼 천천히 관계를 진척시켜 갔다. 그는 이제 도망가지 않았다. 누구처럼 마음만 급하지도 않았고 누구처럼 관계가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하지도 않았다.

‘신기하단 말이야….’

도현은 그의 무릎에 앉은 채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손가락으로 그리듯이 쓰다듬었다. 요즘 들어선 따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좋은 느낌이다. 같이 여행을 가거나 데이트를 하거나 그러지 않더라도 서로만으로도 충분하달까. 충분히 흥미롭달까.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가 흥미로웠다. 이런 남자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왜 내가 좋아요?”

도현은 남자들에게 이런 걸 묻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당연한 것에 굳이 남자들의 의견을 더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남자에게는 몇 번이고 묻게 되지 않는가. 그와 사귀기 전에도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다니엘이 눈을 떴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속눈썹 사이로 드러났다. 아름다운 눈동자다. 잠시 그렇게 가까이에서 눈을 마주치고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처음엔 저도 잘 몰랐습니다.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도현 씨가 없으면 저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말을 듣는 건 부담스러우시겠지만…. 제게는 도현 씨가 꼭 필요합니다.”

“으음, 왜일까. 왜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에게 내가 필요한 걸까?”

그녀는 가늘게 눈을 뜨고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는 약간 긴장하더니 어떻게든 말을 자아내려고 했다.

“도현 씨는… 도현 씨는… 뭔가 특별합니다. 저를 이상하게 보지 않으십니다.”

“가끔 진짜 변태긴 변태구나, 하고 생각하긴 하는데.”

“그건….”

평소에는 1mm도 표정 변화가 없는 남자의 얼굴이 한 번 울렁하고 변했다가 돌아왔다. 그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제 말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도현 씨가 저를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이상하지 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니까 비정상이라고 생각한다기 보다는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봐주신다는 의미로, 저를 있는 그대로 변태라고 생각하시는 것도 제 입장에서는 저를 이상하게 보지 않는, 색안경을 끼지 않고 제대로 판단해주신다는 뜻으로…!”

괴롭히는 법을 알고 나니 제법 괴롭히는 재미가 있는 남자다. 하긴, 전에도 이렇게 숙맥같이 구는 게 귀여워서 놀리긴 했지. 도현이 말없이 잠깐 웃고만 있자 그가 조금 더 말이 빨라졌다.

“그런데 제, 제가 그렇게 변태 같습니까? 아직 그렇게 심한 건 한 적 없지 않습니까? 제가 너무 변태 같아서 싫으십니까? 그렇다면 바로 고치겠습니다!”

“하하하.”

도현이 결국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녀가 웃자 다니엘이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한숨을 조금 쉬었다.

“저는 도현 씨에게 잘 보이고 싶습니다…. 멋있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그건 이미 늦었어요.”

“…그, 그렇습니까….”

도현의 말에 다니엘이 약간 풀이 죽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도 어쩐지 그가 끙끙거리는 강아지 같다. 그러니까 도현은 이 무표정한 남자의 표정과 기색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도현은 다시 웃었다.

“후후, 귀엽다니까.”

도현은 그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니 그가 눈을 한번 깜빡거리더니 다시 도현을 돌아보았다.

“제가 좋으십니까?”

“네.”

“정말로요?”

“네.”

“귀엽다는 말씀은… 남자로서 매력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자 도현이 다시 하하하 하고 소리를 내서 웃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거울 안 봐요?”

도현이 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참 남자답고 멋진 어깨다. 다니엘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도현 씨는 제가 왜 좋으십니까?”

“음….”

도현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그의 눈동자에 입을 맞췄다.

“눈동자가 너무 예뻐요. 계속 보고 있고 싶어요.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요. 머리카락도 부드럽고 목소리도 좋고…. 얼굴도 정말 잘생겼어요. 매일 봐도 깜짝 놀라요.”

도현이 그렇게 칭찬하자 다니엘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살짝 쑥스러워했다.

“무슨 말을 해도 두 번 말해야 하는 법이 없고 사려 깊어요. 박학다식하고 똑똑하고. 뭘해도 근면하고 성실하고 잘하고. 쉽게 쉽게 하는 것처럼 보여도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도 못하잖아요. 다니엘만큼 아는 게 많고 똑똑하면 세상을 보는 눈도 훨씬 밝고 넓겠죠? 대단해요. 대단한 남자라는 생각이 들어요.”

도현이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은 똑똑하고 학문적 지식도 깊고 강하기까지 했다. 그 누가 다시 태어나도 그와 같기는 힘들 것이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알아준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그를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래도 가슴에 와닿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다니엘 스톤하츠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약간의 진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녀는 다니엘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무지하고 깨닫지 못한 인간들처럼 자신의 짧은 잣대와 편견으로 그를 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까지 쉬이 인정했다. 그녀는 아마 어떤 인간, 어떤 것을 보더라도 이럴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자유로웠다. 그녀 자신으로부터도.

“저는… 그렇게 대단한 남자가 아닙니다.”

“그래요? 맞는 것 같은데.”

도현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가 물었다.

“제가 대단한 남자가 아니라면 저를 싫어하실 겁니까?”

“대단한 남자가 자신이 대단한 남자가 아니면 어쩔 거냐고 물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요?”

“도현 씨는 그런 말을 남자들에게 해주는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만큼 대단한 남자가 없었을 뿐이에요.”

좋은 건 보는 순간 아는 법이다.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의 퀄리티는 숱한 사람들은 쉽사리 접해볼 수도 없어 이런 좋은 게 세상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훌륭하다. 본디 남자의 훌륭함이란 유전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데(미르 킹쉴드를 보라) 그는 다시없을 외모와 지능,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것까지 몹시도 훌륭하게 타고났다. 거기에 그는 지금까지 매우 금욕적으로 살아 사생활로도 뭐 하나 흠을 잡을 구석이 없다. 다소 숙맥 같은 부분은 오히려 그의 매력이 될 뿐이다.

“도현 씨는 미르 킹쉴드를 더 높게 쳐주시지 않습니까?”

다니엘이 그렇게 묻자 도현이 다시 소리를 내서 웃었다.

“하하하. 본인은 절대 그렇게 생각도 안 하면서.”

“제 생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도현 씨의 생각이 중요할 뿐입니다.”

“자신 없어요?”

“…….”

“미르 킹쉴드, 참 여러 남자 가슴 아프게 하는 남자야.”

도현은 그렇게만 말하고 다니엘의 물음에는 제대로 답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당연히 그녀가 대답할 때까지 추궁하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도현은 그의 귀에 속삭였다.

“오늘은 뭘 할까요?”

“오늘은….”

다니엘은 깜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질문은 했지만 딱히 그의 대답을 바라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식기를 식기세척기에 정리해 넣었다. 심장의 고동이 귀를 울렸다. 추궁에 대한 것은 잊어버리고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찼다.

‘오늘은 뭘 해주실까.’

그녀는 여전히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는 것에는 거리낌이 있었다. 뺨을 한번 맞아보고 싶어서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전처럼 어중간했다. 이전에 구입했던 물건들 외로 다니엘과의 플레이를 위해 그녀는 매주 새로운 아이템을 사들이고 있었다. 너무 매니악해서 작품활동에는 쓰지 못하겠다 여겼던 것도 제법 사는 것 같았다. 쇼핑도 그녀의 숱한 취미 중 하나였으니 물건도 전부 양품으로 잘 구비되고 있는데도 아직까지는 다니엘 스톤하츠에게 크게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녀가 해주는 것에 불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는 그녀가 해주는 것이면 그게 뭐든지 좋았다. 당장 바닥에 흘린 물을 핥으라고 해도 기쁘게 핥을 것이다. 다만 그럴수록 더, 더 원하게 된다는 게 문제였다.

그녀가 무표정하면 미소 짓게 하고 싶고 그녀가 미소를 지으면 활짝 웃게 만들고 싶고 그녀가 활짝 웃으면 스스로도 참지 못할 정도로 소리를 내서 웃게 만들고 싶었다. 그녀를 간지럽히면 마음이 간지러웠고 그녀가 아파하면 그도 가슴이 아팠다. 그녀가 싫어하면 그도 싫었고 그녀가 느끼면 그도 느꼈다.

이런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다니엘 씨.”

곧 도현은 자신의 서재로 그를 불렀다. 다니엘은 가슴을 졸이며 그녀의 부름에 응했다. 그렇게 그날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붓하게 보냈다. 나날이 사이가 깊어졌다.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그렇게 세상에 둘밖에 없는 것처럼 오후까지 보내고 저녁쯤이 되어서야 미르 킹쉴드가 표정을 구기며 머리를 붙잡고는 2층에서 내려왔다.

“어? 미르? 아침에 나간 거 아니었어요?”

카우치에 앉아 다니엘의 무릎 위에 두 다리를 얹고 글을 쓰고 있던 도현이 미르를 발견하곤 깜짝 놀라 그렇게 물었다. 다니엘은 부드럽게 도현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

미르는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다니엘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도현이 그 둘을 번갈아 보았다.

“설마… 싸웠어요?”

“아닙니다.”

“아니.”

둘은 동시에 대답했다. 미르 킹쉴드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기절해서 회복할 때까지 열 몇 시간 동안 쓰러져 있었다. 배가 고파서 죽을 것 같다. 냉장고를 털어버릴 정도로 먹고 난 미르는 좀 더 회복할 시간이 필요한지 다시 위로 올라갔다.

‘엘 드라카만 시작하면… 방법은 많다.’

다니엘은 도현의 다리를 정성껏 주무르며 생각했다. 그녀와 자신 사이에는 이제 아무런 방해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한다면 저 미르 킹쉴드 같은 미미한 돌멩이 정도다. 물론 그녀와 자신의 사이에 저런 한낱 미물이 끼어드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니 어리석은 그의 목숨도 얼마 안 남았다. 마음을 관대하게 먹기로 했다. 그래서 나머지 시간도 평온하게 보낼 수 있었다. 다음 날은 평일이라 미르 킹쉴드도 훈련을 가야 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신태호 덕분에 뜻하지 않은 휴가를 받은 다니엘 스톤하츠는 오늘도 도현과 단둘이 있을 생각에 행복해졌다.

다니엘은 아침이 되어 식사 준비를 하러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누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멋진 슈트를 차려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한 잘생긴 남자다. 송선호였다.

“♪”

그는 어딘가 익숙한 유행곡을 흥얼거렸다. 그답지 않다 싶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은 얼굴로 뭔가 잔뜩 들고 집에 들어오더니 얼른 부엌부터 갔다. 그가 식사를 준비하자 고소한 커피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이 집의 살림을 책임진 건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살림을 책임진 사람에게 부엌이란 성지나 다름없었다. 거기를 멋대로 쳐들어가 자기 마음대로 도현 씨의 아침을 준비하다니… 다니엘은 바로 내려가지 않고 가만히 계단의 중간층에 선 채로 상황을 살폈다.

‘송선호랑은 그때 우리 문제 때문에 싸웠다고 들었는데… 결국 엠페리오스에 가서 화해를 한 거군.’

다니엘은 그렇게 판단했다. 곧 그녀의 침실문이 열렸다.

“커피…?”

그녀가 의아해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송선호는 식탁 위에 접시를 놓다가 그녀를 발견하고 미소 지었다.

“도현아.”

“연락도 없이….”

송선호는 다가온 그녀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고 포옹했다.

“보고 싶어서.”

“저건 다 뭐야?”

도현이 거실에 잔뜩 있는 쇼핑백을 보면서 물었다.

“스위스 안 갈래?”

“응? 갑자기 웬 스위스?”

“이틀 갈 거야. 취리히 슐로스도 갈 건데.”

“어? 진짜?!”

미식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회원제 레스토랑이었다. 유럽에서 최고였다. 물론 본인들은 자신들은 유럽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도현도 예전에 딱 한 번 가본 곳이었다.

“언제?”

“사흘 뒤에. 열심히 써서 빨리 마감해.”

“아, 어떡해. 뭐 먹지? 다 먹고 싶은데.”

벌써부터 그녀가 고민하기 시작하자 송선호가 소리를 내서 웃었다.

“다 먹어. 이틀 동안 내내 거기만 있어도 되니까.”

“진짜?”

도현은 그의 갑작스러운 초대에 당황했다가 그가 슐로스라는 대단한 카드를 내밀자 마음이 확 흔들렸다.

“아, 입을 것도 없는데.”

“옷도 사 왔어. 엄마가 너 주라고 집에 몇 벌 사 오셨더라.”

“진짜? 안 그러셔도 되는데….”

도현은 그가 가져온 것을 보러 갔다. 쇼핑백들을 열어보니 너무나 아름다운 드레스들이 줄줄이 네 벌이나 나왔다.

“이건 주얼리 내 거 하면 될 거 같은데…. 이건… 없이 입어야 하나?”

도현은 곰곰이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데 송선호가 제일 밑에 있던 쇼핑백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커다란 벨벳 케이스였다. 도현이 ‘응?’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뚜껑을 열자 도현이 깜짝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설마… 이거 샀어?”

“내가 요새 돈이 어디 있어. 엄마가 빌려주신대.”

“와….”

도현은 말문을 잃고 바라보기만 하다가 그에게서 케이스를 받아 들고도 홀린 듯이 계속 보았다. 천 개가 넘는 최고급 다이아몬드가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티아라, 목걸이, 귀걸이, 팔찌 세트였다. 가운데 큼직한 분홍색 다이아몬드가 달린 목걸이가 정말 아름다웠다.

“지금 한 번 해볼래?”

“아니… 나중에 다 차려입고 할래.”

지금 이대로 걸치는 건 다이아몬드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도현은 넋을 놓고 있었다. 송선호가 도현의 뺨에 쪽 입을 맞추면서 그녀의 손을 끌었다.

“일단 밥 먹어.”

이 남자가 이렇게 잘 웃는 남자였던가… 도현은 다이아몬드에 정신을 빼앗겼다가 그가 아주 매력적인 미소를 짓자 좀 정신 차리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참나… 해주고 싶은 게 이렇게 많았단 말이지.’

도현은 다니엘이 집에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송선호와 아침 식사 내내 스위스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사가 끝나고 그녀가 옷을 시착해보기 전에 씻으러 들어갔다. 송선호는 여전히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질 않아 혼자서 쿡쿡 웃었다.

‘아, 행복하다….’

도쿄에서 그녀와 고대하던 첫날밤을 보내고 난 이후로 송선호의 불안과 그녀에 대한 원망은 눈이 녹듯 사그라들었다. 그녀에게 남자가 아니었던 것과 그녀에게 그저 스쳐 지나가는 남자로 끝나고 말 거라는 생각에 얼마나 초조했던가. 하지만 그녀와 로맨틱한 밤을 보내고 나니 그것만으로도 서로의 관계가 특별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둘만의 그 시간이 감동으로 가슴에 남아 기억할 때마다 가슴이 뿌듯해 웃음이 나왔다. 게다가 뜻하지 않은 일이긴 했지만 부모님께도 자연스럽게 소개시켜 주기도 했고 그녀와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나랑 애를 잔뜩 낳고 싶다는 얘기도 했고….’

송선호는 살짝 착각하여 그때의 대화를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여자가 좀(?) 사치스러운 것이야 다 남자 하기 나름이다. 송선호는 이번에 합병한 회사에 공동 대표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번에 아버지와 정리해본 바로는 먼 훗날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송선호의 손에 있는 재산이 꽤 되었다. 감당할 수 있었다.

그는 도현이 씻고 나오기를 기다리며 그릇을 식기 세척기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척을 느껴 웃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다 씻….”

“오랜만이네요, 송 편집장님.”

다니엘은 자연스럽게 컵에 물을 따랐다. 송선호의 얼굴이 굳었다. 다니엘은 냉장고에서 셀레나 카토가 준비해둔 식단을 쟁반 위에 올리며 본론만 간단하게 말했다.

“미르 킹쉴드 돌아온 건 아십니까?”

다니엘은 도현 킬스버그를 이해하고 그녀의 사랑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었다. 비록 그가 보기에는 미물이나 다름이 없지만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하는 남자 둘을 관찰하는 것도 그 일환 중 하나였다.

“…!”

살짝 굳었던 그의 표정이 반전되었다. 역시 미르 킹쉴드는 바보인 게 분명하다. 경쟁자는 이렇게 제치는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은 유유히 2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

‘그래…!’

사치? 해라, 해! 자기 여자가 원하는 거 하나도 못 이뤄주는 남자가 무슨 배짱으로 결혼까지 하자고 하겠냐.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사고 싶은 거 다 사라고 해. 씨발, 내가 다 해줄 수 있어!

바람기? 지금도 걔 남자들만 생각하면 꼭지가 돈다. 그것들 다 죽여버리고 싶다고. 아니, 지금까지 만났던 새끼들도 전부 다 어디 묻어버리고 싶다고. 근데, 씨발, 네가 싫어하니까! 네가 만나고 싶어 하니까! 그래도 언젠가는…! 언젠가는 네가 나 선택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너한테 나만 한 남자는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니까!!

그에게는 그렇게 끝까지 기다릴 각오가 있었다. 다만 그가 지금 단 하나 그녀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적어도 그가 그녀를 지켜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팔려가거나 위험한 남자와 만나거나 그 부분에 있어서는… 그 정도는 그녀를 위해서라도 송선호의 말대로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화가 났다. 송선호는 지금 너무 화가 나서 어디에 앉지도 못하고 이마를 두 주먹으로 꽉 누르며 참고 있었다. 지금 당장 욕실로 쳐들어가서 그녀에게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넌 도대체 왜…!! 그럼에도 송선호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화가 나는데도 동시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 전처럼 그녀에게 옳은 소리를 해대면… 그녀는 또 송선호를 이해하지 못하고 화를 내다가, 그러다가 그녀가 헤어지자고 하기라도 한다면, 그러면 송선호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고 좋아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러면서 단 한 번도 행복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항상 그만두고 싶었다. 그녀를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멀어지고 싶었다. 괴로웠다. 그러다… 그러다가 6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와 함께 있는 게 너무나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렇게 괴로웠더라도 송선호의 선택은 옳았던 것이다. 그녀만이 그의….

송선호는 심장박동이 엄청나게 빨라지고 눈까지 벌게졌다. 넥타이를 잡아당겨 죄임을 느슨하게 하고 씩씩거리면서 생각을 계속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그녀가 세상 모든 남자들 중에서도 자신을 선택하기를 바랐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그녀에게 호소했다. 자신을 선택해달라고.

그녀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런 그녀에게 어떻게 다른 남자들이 끌리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더더욱, 그녀가 자신을 선택해서 다른 남자 같은 건 쳐다보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이 그러는 것처럼. 그러지 않으면 이건 끝나지 않을 테니까.

송선호는 그녀가 다시금 잘못된 선택을 하고 고작 그런 병신 때문에 자신을 저버렸다는 사실에 좌절과 분노를 오가다가 디바이스를 꺼냈다. 그녀는 절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화면을 보며 숨을 헐떡이다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김 비서… 아침 일찍 미안해요. 전에 동생이 흥신소 크게 한다고 하지 않았어?”

[네, 대표님.]

“좀 개인적인 부탁인데… 미르 킹쉴드 알지? 그 새… 그놈 좀 알아봐 줘요. 아마 용병 짓 할 때나 선수하면서 사고 친 게 꽤 있을 텐데. 그런 건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알아봐.”

[음… 선수들 사고 치는 걸로 감방에 넣기는 힘들지 않나요? 문제 안 되도록 매니지먼트에서 잘 관리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김 비서는 눈치 빠르게 그렇게 되물었다. 송선호는 미간을 손으로 주무르며 말했다.

“그걸 왜 못해. 하려면 다 할 수 있어. 되도록 빨리 알아봐.”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렇게 통화를 끝내려다가 송선호가 덧붙였다.

“그리고 다니엘 스톤하츠도.”

[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송선호는 두 손으로 눈을 문질러 닦고는 자리에 앉았다. 곧 그녀의 침실문이 열리며 그녀가 타월만 몸에 휘감은 채 나왔다. 그녀는 카우치에 늘어놓은 드레스 중 하나를 골랐다.

“여기다 하는 게 좋겠지?”

그녀가 그렇게 물었다. 송선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 그를 돌아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주 멀끔했던 그가 머리와 옷매무새가 흐트러지고 눈은 벌게진 채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도현은 그의 쪽으로 다가갔다.

“왜 그래?”

“…미르 킹쉴드 다시 만난다고?”

송선호는 분명히 그녀에게 이 말을 하면 싸우게 될 거라는 걸 알아 두려워했으면서도, 결국 이 주제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응.”

“왜 말 안 했어?”

송선호가 그렇게 묻자 도현이 약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한숨을 쉬었다.

“네가 이렇게 할까 봐.”

“이렇게가 뭔데.”

“이렇게.”

송선호의 눈이 좀 더 벌게졌다.

“내가… 내가 말이라도 해달라고 했잖아. 뭐가 다 끝나기 전에, 내가 뭔가 할 수 있을 때…. 그래야 너한테 무슨 일 생기기 전에 어떻게든 해줄 수 있을 거 아냐…!”

“아직 아무 일도 안 생겼어.”

“그 새끼가 앞으로도 얌전히 있을 거 같아? 그런 새끼는 평생 사고 칠 놈이야. 모르겠어?”

“…….”

“당장 헤어져.”

“싫어.”

그대로 고성이 오고 갔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2층에 있는 다이닝룸에서 천천히 아침을 먹다가 아래층에서 큰 소리가 오고 가다가 어느 순간 뚝 그치자 몇 분 시차를 두고 아래로 내려갔다. 도현은 골치가 아프다는 얼굴로 카우치에 앉아 있었다. 다니엘은 챙겨온 수건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받쳐 들었다.

“다니엘….”

그녀는 다니엘의 얼굴을 보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감기에 걸리시겠습니다. 머리부터 말리죠.”

다니엘은 그녀의 머리카락에 가볍게 마법을 불어넣어 빠르게 머리를 말려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자리에서 일으켜 드레스룸으로 데리고 갔다. 기운이 빠진 그녀에게 다니엘이 직접 옷을 골라주었다.

“오랜만에 바다를 보러 갈까요?”

“좋아요.”

도현이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다니엘 씨랑 있는 게 제일 마음이 편해요… 왜일까요?”

“제가 도현 씨와 함께 있을 때 제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맞아요… 다니엘 씨 말이 맞네요.”

도현이 미소를 지었다. 도현은 다니엘의 목에 손을 감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원망스럽지는 않아요?”

“뭐가 말입니까?”

“알면서.”

“원망스럽지 않습니다. 도현 씨는… 도현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저에게 정말… 중요한 사람입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다른 건 전혀 상관없습니다.”

“다니엘….”

그는 입에 침 하나 묻히지 않고 그렇게 거짓말을 했다. 도현은 감동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조금 더 몸을 붙이며 말했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요… 지금까지 이런 생각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도현은 그렇게 뜸을 들였다.

“다니엘 씨와는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니엘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가 지금껏 보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괴로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니, 기뻐서 괴로운 것 같다.

“저는 도현 씨와 함께할 겁니다. 끝까지… 끝까지.”

“다니엘….”

그리고 둘은 입을 맞추었다. 영원을 약속하듯.

*

그래서 다니엘 스톤하츠는 행복했다. 비록 그가 여자 경험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던 세계에 갑작스럽게 발을 디뎌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감을 못 잡았던 기간이 길었지만, 그는 원래부터 이모저모 능력이 출중한 남자가 아니었던가. 그는 다른 남자들보다 뒤졌던 부분, 아니면 다른 남자들조차 갖추지 못한 소양까지 단기간에 훌륭하게 성취해냈다.

게다가 이제와서 보면 그의 경쟁자랍시고 있는 것들은… 미르 킹쉴드? 그는 바보다. 질투가 난다고 오히려 그녀의 눈밖에 날 멍청한 짓을 대놓고 저지른다. 송선호? 누누이 말했듯이 그는 가만히 놔둬도 무너지는 스타일이다.

그녀는 그녀에게 바라는 게 많은 남자들에게 질려가고 있었다. 아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도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점점 더 알아가고 있었다. 도현 킬스버그라는 사람과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스스로를. 세상을.

미르 킹쉴드는 지금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존재를 생존의 위협 요소로 느끼고 나니 어떤 야만적 본능이 올라와 견디지를 못하는 것 같았다. 싸우든 죽이든 해서 그를 영역에서 축출해버리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싸움을 벌이지 말라는 도현의 말이 제약이 되어 손발이 묶여 있었다. 그 뒤로도 몇 번 보이지 않을 때 덤비는 걸 잡았다. 분명 다니엘이 마도사 용병으로 많은 소드마스터를 상대해 보지 않았더라면 죽거나 병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그간 잠은 다 잤다.

‘날 죽이고 싶으면 올해 엘 드라카까지 기다리면 되는 거 아닌가.’

엘 드라카에서 마도사들은 전력을 내지 못하도록 제한당한다. 그 정도 참을성도 없기 때문에 그는 또 사고를 크게 낼 것이고 그러면 이제 영원히 그녀의 눈 밖에 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설사 그가 기적적으로 참아낸다고 하더라도, 영역에 들어온 다른 수컷을 제일 참아내지 못하는 건 송선호였다. 그는 미르 킹쉴드 같은 것보단 훨씬 문명인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선택을 원하고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엠페리오스에 갔다 온 이후로 그의 얼굴을 보니 그녀와 좋은 시간이라도 가졌는지 마음이 한달음에 앞서간 것이 훤히 보였다. 그러니까 몇 번이나 사고를 치고도 그녀의 곁으로 돌아온, 아니, 그런 미르 킹쉴드를 곁에 있도록 허락해준 그녀에게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동시에 이제는 그녀를 확실하게 ‘자기 여자’라고 느끼고 있는 모양인지 그런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공산이 크다.

생각대로 안 될 것 같으면 정말로 엘 드라카에서 죽이면 된다. 이러나저러나 미르 킹쉴드는 빠른 시일 내에 확실하게 배제될 것이다.

‘송선호는….’

그는 근본적으로 그녀와 맞지 않았다. 아마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그녀에 대한 마음을 끊지 못했고, 그래서 스스로가 변해 가려고 하는 동시에 그녀를 바꿔 보려는 마음도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룰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남자를 어떻게 하려는 짓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그녀의 권리였으니까. 많은 선택지가 있더라도 그중에 자신만을 선택해주기를,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바라고 있었다.

그가 이런 상황을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미르 킹쉴드는 도현에게 다른 남자가 몇 더 스쳐 지나간다고 해도 도현과 함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대놓고 질투가 난다며 앞에서 시위를 해도 어쩐지 그는… 그녀에게 그래도 되는 놈이었다(죽이고 싶다).

그래서 송선호는 빠르든 늦든 스스로의 벽 때문에 무너질 것이다. 더 손을 댈 필요도 없었다. 아마도 이번 미르 킹쉴드의 일 때문이라도 그는 빠르게 스러질 것이다.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던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다니엘 스톤하츠, 그는 누가 부정할 수도 없는 세계 최강의 남자였다. 그가 가져야 할 것은 문명인다운 인내심뿐이었다.

“다니엘 씨.”

테니스복을 입고 나타난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다니엘의 이름을 불렀다. 먼저 나와 테니스 코트 옆에 있는 테이블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다니엘은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바닷가 근처의 테니스 코트에 왔다. 아직 쌀쌀한 날씨였지만 온풍기를 잔뜩 틀어놓아 괜찮았다. 도현은 지인들과 매해 테니스 대회를 연다고 했다. 작년에는 일신상의 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했지만 올해부터는 다시 참여한다고. 예전보다 연재 주기도 빨라지고 신경 써야 할 것도 많다 보니 연습을 많이 하지 못했다고 해서 이번 데이트에서는 같이 테니스 연습을 하기로 했다.

다니엘은 테니스 같은 건 쳐본 적도 없지만 오늘을 위해 일주일 동안 열심히 테니스 경기 룰을 숙지하고 연습했다. 그는 원래 다방면으로 천재다. 그의 머리와 신체조건이면 무엇을 못 하겠는가. 뭐든 금방이다.

“다니엘, 테니스 쳐본 적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습니다.”

도현은 다니엘에게 다가와서 라켓을 잡은 법과 휘두르는 법, 경기의 룰에 대해서 핵심만 잡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다니엘은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귀를 기울여 들었다. 다니엘은 그녀의 사랑을 느꼈다. 자신에게 조곤조곤 설명을 해주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다니엘은 그녀의 예쁜 광대에 부드럽게 입술을 눌렀다.

“다니엘? 안 듣는 거예요?”

“아니…! 아닙니다. 죄, 죄송합니다.”

그 뭐든 쉬운 남자가 도현 킬스버그만큼은 쉽지가 않아서 여전히 버벅거리고 있었다. 다른 것은 뭐든 되는데, 정말… 다니엘이 얼굴을 확 붉히며 당황해하자 도현이 풋 하고 웃었다.

“다니엘 씨가 이렇게 귀여운지 누가 또 알겠어요.”

도현은 쪽 하고 다니엘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부들 떨었다가 가만히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키를 맞추어 입맞춤을 계속했다. 그리고 본론인 테니스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몇 번 쳐다보니 금세 요령이 붙어 곧바로 도현과 연습경기를 할 수 있었다. 공을 주워 주는 볼키즈도 필요없었다. 다니엘이 마법으로 볼을 정연하게 모아두었기 때문이다.

‘참… 편리하단 말이야.’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니엘을 보는 도현이었다. 테니스를 다 치고 나니 아직 3월이라 추운데도 불구하고 땀이 흠뻑 날 정도였다. 도현은 푹신한 수건으로 얼굴을 눌러 닦으며 다니엘에게 말했다.

“빨리 가서 씻고 수영해요, 우리.”

“네.”

근처에 잡은 호텔에는 바다와 산이 훤히 보이는 인피니트 수영장이 있었다. 호텔로 돌아와 빨리 씻고 따뜻한 온천수로 가득 찬 수영장에 들어갔다.

수영을 하고 인피니트 수영장의 끝에 매달려 산이 바다를 둘러싼 절경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고요하고 서늘하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다니엘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그녀의 등 뒤를 감싸 같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도현이 웃으면서 그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다시 이렇게 마음 편한 날이 올까 싶었어요.”

도현이 말했다. 다니엘은 예전만큼 긴장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단전이 당기는 걸 느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아직 다 해결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절 도와주고 곁에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특히 선생님이나… 다니엘 씨. 마음이 든든하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어요. 정말 고마워요.”

“더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무언가 더 말할까 하다가 멈췄다. 사실 그에게는 많은 선택지가 있었다. TFC를 관두어도 된다. 마도의사로서 더 수련을 받는다면 훨씬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을 것이다. 학계로 들어간다면 더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

지금도 너무 좋아서 더 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도현의 곁에 있는 게 좋았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에게 뭔가 더 해주기 위해 좀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못 했을까. 지금의 상황에서 어떻게든 쪼개서 도울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송선호마저도 미친 듯이 돈을 벌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생각이 짧았군.’

다니엘은 곰곰이 투잡이나 쓰리잡에 대해서 더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이미 그는 투잡, 쓰리잡을 뛰고 있었지만 더 하자면….

“그럼 전 다니엘 씨한테 뭘 해드리면 될까요?”

“아무것도 해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이렇게 함께 있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정말 기쁩니다.”

“후후. 거짓말. 야한 짓 하고 싶어서 도망갔던 주제에.”

도현이 몸을 돌려 풍경을 등에 지고 다니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카락, 조각 같은 몸매, 보석 같은 보랏빛 눈동자. 다니엘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변명하려고 했다.

“아니…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는… 굳이 그런 게 아니더라도… 그러니까….”

“거짓말.”

“!”

그리고 도현이 다니엘의 유두를 꼬집어 강하게 당기자 그가 움찔했다. 도현이 살짝 내리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앞으로 거짓말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숨기는 것도 없고.”

“윽… 네.”

그는 인피니트 수영장의 유리를 두 손으로 꽉 잡았다. 도현 킬스버그는 그의 강인한 두 팔 사이에 갇혀 있었지만 전혀 갇혀 있지 않았다. 다니엘은 뜨거운 온천수 속에서 더욱 열기를 받아 땀을 주룩 흘렸다.

“그래서요?”

“곁에…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건 사실입니다…. 다만… 도현 씨가….”

어째서일까. 이런 짓을 좋아하는 변태인데 막상 이런 걸 해주면 엄청 청초한 느낌이 난다. 고통을 참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시선을 내린 그는… 참. 아름다운 남자란 이런 것인 모양이다. 도현은 느긋하게 그를 감상했다. 지금까지 만난 남자들 중에 이 정도로 ‘내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남자가 있었나.

“이렇게 해주시면 더 기쁠 뿐입니다.”

도현은 그의 말에 웃음을 흘리고는 시계 방향으로 그의 유두를 확 비틀었다. 물이 수영장을 넘어 밖으로 좀 넘쳤다.

“그때 미르한테 마법 썼죠?”

다니엘의 보랏빛 눈동자와 도현의 밝은 갈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다니엘은 거짓말을 할까 했지만 이런 그녀의 앞에서 거짓을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느낌이었다.

“네….”

도현은 다니엘의 유두에서 손을 뗐다. 벌을 받은 부분만 부어서 징징 울렸다. 도현은 짤막하게 당부했다.

“싸우지 좀 말아요. 항상 미르한테 싸움 거는 건 다니엘 씨라니까.”

“알겠습니다.”

다니엘이 대답했다. 혼이 난 모양새라 도현이 풋 웃으며 그의 가슴을 살살 어루만지며 그와 몸을 붙였다.

“다니엘 씨 말은 믿어요.”

“기쁩…니다.”

아아… 그녀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이미 미르 킹쉴드의 버튼도 눌렀고 송선호의 버튼도 눌렀으니 다니엘이 앞으로 아무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은 끝장날 것이다. 그러면 그녀가 얼마나 슬퍼할까? 결국 그녀의 남자들을 괴롭히고 없애려고 하는 것은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니엘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상처받고 싶은 만큼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그녀에 의해 아픔을 느끼고 싶은 만큼 그녀를 아프게 하고 싶었다. 그가 느끼는 기쁨을 그녀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이런 날 당신에게 전부 말하고 싶다….’

그녀가 이번에도 그를 받아줄까. 그러길 바랐다. 아니, 언젠가 꼭 그렇게 될 것이라 믿었다. 눈앞에 있는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았다.

*

[…스위스는 갈 거야?]

도현은 고개를 돌렸다. 지금 그녀의 등을 마사지하고 있는 사람은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렸고 로웰의 등을 마사지하고 있는 사람도 동그라미를 그렸고 로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의견들을 참고하여 도현이 대답했다.

“네가 하는 거 봐서.”

[…….]

출발한다면 당장 내일 출발이다. 비행 기술이 발달하며 비행차를 타면 메트로 서울에서 취리히까지 4시간 안으로 걸린다지만 그래도 먼 길은 먼 길이다.

[그땐… 미안. 내가 너무 흥분했다.]

그러자 그가 고분고분히 그렇게 말했다. 로웰이 ‘오오’ 하면서 감탄하는 입 모양을 만들었다. 그의 성격이 어떤지는 로웰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응… 그 부분은 내가 뭐라고 안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내가 좀… 미안. 앞으로 다시는 너한테 큰소리 안 낼게.]

송선호가 그렇게 말했다. 진짜 너무 고분고분한데? 정말 변한 걸까? 어쨌든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가 자존심이 너무 센 부분은 처음엔 싫어했는데 지금은 좋아했다. 꺾는 맛이 있었다. 그가 다니엘 스톤하츠만큼 도현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넙죽 기뻐하는 날이올까? 글쎄. 아직 상상은 잘 안 된다.

“아버지랑 같이 간다면서?”

[어머니도 같이 가. 대부분 따로 움직일 거야. 아버지랑 나만 잠깐 만나면 되는 일이니까. 부모님은 하루 일찍 돌아가실 거야.]

“아, 그래? 그럼 뭐.”

[걱정하지 마. 차도 따로 쓸 거니까.]

“하하. 걱정하는 건 너라니까.”

싸웠다 다시 만났다 싸웠다 다시 만났다 하는 것도 결국 습관이라더니. 결국 전화를 끊을 때쯤에는 화기애애했다.

“킹쉴드도 그렇고 스톤하츠도 그렇고 송 편집장도 그렇고, 특히 송 편집장 예전에 했던 거 생각하면… 영 우리 작가님한테 안 좋은 영향 끼치는 것 같아요.”

“그런가요?”

“그렇죠. 그 남자들이 얼굴 예쁜 거 빼면 뭐가 있어요?”

돈도 많은 줄 알았는데 잘 보니 다들 개털이야. 로웰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렇…게 말하자면 그건… 그렇네요.”

하긴. 돈이나 얼굴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 정도까지 문제 있는 남자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도현이 으음, 하고 잠깐 과거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돈 많고 그렇게 얼굴도 예쁜 남자가 흔하진 않죠….”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변명하듯이 덧붙였다.

“저도 눈 달린 생물이라 어쩔 수가 없나 봐요. 결국 눈에 들어오는 건 제일 예쁜 거 아니에요?”

그 예쁜 부분도 돈이랑 좀 연관이 있는 것 같고…. 아무리 잘생겨도 남자가 천한 느낌이 나면 싫다. 도현은 확고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인정.”

로웰이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푹 엎드렸다.

“예전에 언제더라… 그런 말 했던 기억이 나네요.”

도현도 다시 눈을 감고 엎드렸다. 마사지사의 부드러운 손길이 기분 좋았다. 그녀는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적당히 잘생기고 적당히 말 통하고 적당히 말 잘 들으면 만나는 건 크게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내가 좋아서 못 살겠다, 한 적은 없다구요.”

그래도 예쁘니까 같이 있으면 기분은 좋은데… 그뿐이랄까. 도현은 그렇게 말했다.

“음, 뭐. 우리 바하마에서 말했잖아요. 결국 그런 거 한다 하는 사람들도 죄다 착각이거나 자기도취거나. 결국엔 대부분 애정결핍이에요, 애정결핍.”

“네.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우리가 지구방위대 짓 한다고 연애 이야기 쓰지만 걔들처럼 서로 사랑에 죽고 못 살고 그런 거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드니까 결국 판타지인 거 아니에요.”

“그렇죠. 솔직히 여자들이 연애랑 남자에 대해 환상 가지면 결국 고마운 건 남자들 아니에요. 남자 상위 0.1% 빼고는 사실 쥐뿔도 없는 자기들 부풀려 주는 건 우리니까. 사실 우리 지구방위대가 아니라 사실 남성방위대 아니에요?”

“하… 그렇군요. 엄청 나쁜 짓 하고 있는 기분이에요.”

“하… 사실 저도.”

그들은 그렇게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도 킹쉴드는 미련 남아서 잡은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요. 저도 그게 신기하다니까요. 미르는… 뭐랄까. 이건 뭔가 본능적으로, 본능적으로… 뭔가 그런 거라니까요. 그거에요.”

“아~ 뭔지 알 것 같다.”

로웰도 같이 사는 사람으로서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여자를 속이려고 들거나 자기 자신을 과장하지 않아도 충분하달까.”

“음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다른 남자는 몰라도 킹쉴드는 정말 솔직하고 숨기는 게 없죠. 그러니까 제일 믿을 수 있잖아요.”

“맞아요… 결국 신뢰가 가장 중요한 건가.”

도현은 로웰의 말에 크게 수긍했다. 결국 그런 문제인가 보다.

“킹쉴드는 안 그러는데 송 편집장이랑 스톤하츠는 은근히 저 견제한다니까요?”

남자들 질투란, 쯧쯧. 로웰이 혀를 찼다.

“어머? 정말요? 생각보다 똑똑하네… 그래도 미르는 귀엽다.”

“결국 남자는 예쁘고 돈 많고 순진한 게 짱이란 말인가….”

로웰은 그렇게 생각하며 약간 고민하더니 말했다.

“차기작은 킹쉴드 같은 남자를 남주로 해야겠어요, 작가님. 엄청 인기 있을 거 같아요.”

“찬성이요~”

그렇게 두 시간 동안 마사지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 작품 활동을 하고 건강을 위하여 다음 날 아침에는 요가 강사를 불러 도현과 로웰, 어시스턴트 두 명이 함께 요가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도현은 캐리어를 가볍게 꾸려 송선호와 함께 스위스로 날아갔다.

몇 년만일까. 오랜만에 온 스위스는 메트로서울보다 추웠지만 청량한 공기가 폐부를 시원하게 씻어내는 느낌이 들었다. 눈이 탁 트일 정도로 정갈한 도시의 전경과 호수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도시 전체에서 부드러운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아….”

예전에도 스위스는 참 좋아해서 자주 왔는데… 몇 년만이다. 도현은 그렇게 많은 감회에 젖어 도시를 바라보았다.

“좋아?”

“응… 나 스위스가 제일 좋아.”

“그랬어? 넌 휴양지를 더 좋아할 줄 알았는데.”

“휴양지도 좋은데… 스위스는 있으면 거슬리는 게 없어서.”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리무진을 불러 호텔로 이동했다. 호텔은 취리히가 전부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 있는 성이었다. 입구에서부터 하얀 대리석 열주들이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도현은 캐리어에 있는 옷을 옷장에 몇 개 넣다 말고 발코니로 달려갔다.

“아, 너무 좋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성을 둘러싼 나무들, 유리같이 깨끗한 호수, 깨끗한 산소를 뿜어내는 산이 정갈한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야경이 기대되었다.

그녀는 한참 밖을 보고 있었다. 송선호가 도현의 옷을 전부 옷장에 넣고 자신의 옷도 대충 정리한 후 발코니로 왔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아름다운 취리히, 프레지덴셜 스위트의 안부터 밖의 풍경까지 흠잡을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시야 한가운데를 확실하게 차지하고 있는 그의 여자는 풍경보다도 훨씬 예뻤다. 차가운 공기에 뺨이 좀 빨개지고 있었다. 송선호는 그녀의 등을 끌어안으며 발코니의 난간을 잡은 그녀의 두 손을 감싸 잡았다.

“춥다.”

“너무 좋지 않아? 아… 여기서 살고 싶다.”

“여긴 집 안 샀어?”

“샀는데 팔았지.”

“아깝네.”

“그치? 아, 진짜 좋다. 너무 예쁘다.”

그녀는 연신 감탄했다. 그들은 곧 밖으로 나갔다.

오늘 도현 킬스버그의 드레스코드는 캐쥬얼이었다. 그녀는 기다랗고 늘씬한 다리를 드러내는 검은색 스키니진에 9cm 되는 검은색 부티를 신고 안에는 얇고 밝은 회색 티셔츠에 호피 무늬 벨트, 외투로는 두꺼운 갈색 무스탕을 입었다. 머리카락도 자연스럽게 늘어뜨려 앞부분이 볼륨감 있게 한 번 구불거리며 앞으로 떨어졌다.

송선호는 짙은 군청색의 터틀넥에 검은색 바지와 약간 캐쥬얼하지만 비싼 구두, 목깃이 넓고 빳빳한 검은색 코트를 입었다. 머리도 자연스럽게 바람에 날렸다. 유례없이 캐쥬얼한 모습이었다. 보통 때는 주로 아주 고가의 양복을 입고 다니는 송선호였지만 오늘은 그녀의 옷차림에 맞춘 것이다.

송선호는 가죽 장갑을 낀 도현의 손을 잡고 리무진에서 내렸다. 그들은 호수가 훤히 보이는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여행 책자를 참고하였다. 둘 다 취리히는 초행이 아니었기 때문에 뭐가 어디에 있는지는 다 알고 있었다.

“현대 미술 전시하네. 취리히 미술관 가자.”

“좋아.”

입장료는 한화로 6만 원 정도. 미술관 내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런던의 미술관이나 네덜란드의 고흐 미술관은 갈 때마다 사람들이 빽빽해서 가끔 엄두가 안 나는데 스위스는 이 한적함이 좋았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 중에 가장 우아하게 즐길 수 있는 미술관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작품이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유명 화가들의 유명한 작품이나 가장 비싼 작품은 스위스에서 곧잘 찾아볼 수 있었다. 도현이 그런 감상을 말하자 송선호가 말했다.

“그랬어? 런던 한 번 가자. 폐관했을 때 보면 돼.”

“…분명히 그런 거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송선호의 말에 도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태도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그냥 웃었다. 일본화의 영향을 짙게 받은 선이 굵은 고흐의 작품을 보다가 가느다란 자코메티의 주물 작품을 보았다. 샤갈의 우마를 좋아한다. 클로드 모네의 부드러움과 밝음이 좋다. 그런 전통적인 유명작을 천천히 관람하고 기획전으로 넘어갔다. 익숙하지 않은 남미의 사회적 작품들을 흥미롭게 보다가 현대 미술 기획전으로 들어갔다.

“퐁피두랑 모마 중에 어디가 좋아.”

“퐁피두.”

“나도. 역시 현대 미술은 초기작들이 가장 의미가 있는 것 같아. 나중엔 다르기 위한 다름을 만들기 위해서 너무 용을 쓰는 느낌이랄까.”

“하하. 다 그렇게 돈 버는 거지.”

그들은 그렇게 얘기를 나누며 2시간 정도 미술관을 돌았다. 그리고서 따뜻한 호박 수프와 빵을 들고 취리히호 근처 공원으로 나갔다. 커다란 백조들에게 사 온 빵을 다 뺏겼다.

“나 나중에 스위스 와서 살까 봐. 로웰 선생님도 꼬셔야지.”

송선호는 그녀의 허리에 다시 팔을 감으며 대꾸했다.

“스위스는 물가 비싸니까 더 벌어야겠네.”

“아, 힘내야겠다. 열심히 살아야지.”

그러다가 호수가 너무나 아름다워 중간에 충동적으로 커다란 돛이 달린 하얀 배를 빌렸다. 취리히의 중심가가 훤히 보이는 곳부터 천천히 떠내려가듯이 멀어졌다. 어디로 가든 상관없다는 듯이. 보트의 지붕에 있는 선베드에 앉았다. 따뜻한 핫보틀을 안은 도현이 그의 품에 등을 기댔다. 같이 담요를 뒤집어쓰고 석양에 물들어가는 취리히를 감상하고 있었다. 송선호가 속삭였다.

“항상 네 생각이 났어.”

“언제?”

“좋은 걸 볼 때마다.”

“그랬어?”

“응.”

송선호는 그녀의 차가운 뺨에 자신의 뺨을 대었다.

“그래서 지금 같이 있는 게 너무 좋다.”

맛있는 걸 먹을 때나 아름다운 걸 볼 때나, 그럴 때면 언제나 그녀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늦은 밤 홀로 있으면 불현듯 그런 생각이 나곤 했다. 자신과 함께 있는 그녀를 상상하며 속앓이했던 불면의 밤들.

“오래 생각날 것 같아. 오늘.”

송선호가 그렇게 말하자 도현이 듣기 좋은 목소리로 웃음을 흘리더니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한국만 나오면 이렇게 좋은 데가 많은데. 같이 많이 다녀야겠네.”

“그럴까?”

“비 오는 날 이름 모를 유럽 도시를 손잡고 걸어 다니고… 그런 거 낭만 있잖아.”

말만 들어도 좋다. 송선호도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혼자 다닐 때랑 너랑 다닐 때랑은 정말 다른 거 같아… 너무 재밌어.”

“혼자서 유럽 여행 온 적 있어?”

“여행이라기보단 MBA 따려고 와서 살았지. 9개월 정도.”

“아, 좋았겠다.”

“난 그냥 살았다는 느낌이 더 강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보낸 게 아쉽다.”

“후후.”

송선호의 말을 듣고 도현이 웃었다.

“왜?”

“아니, 너 아까 우리가 갔던 카페 같은 데서 아침에 커피 한 잔 시켜 놓고 신문 보고 있을 거 생각하니까… 좀 멋있었을 거 같아서.”

“…….”

송선호는 그녀의 말에 잠깐 입을 다물고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는 그녀를 다시 꼭 끌어안았다. 그대로 다시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눈에 담았다.

“…사랑해.”

송선호가 작게 속삭였다. 도현이 미소 지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이게 뭐라고… 세상 다시없을 정도로 행복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둘은 추운 야외에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담요 안에서 서로의 옷을 벗기고 농밀한 시간을 가졌다. 송선호는 당장 죽어도 행복하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것만 같았다.

‘이래서 얘가 여행을 좋아했구나…. 같이 다닐 시간 좀 낼 수 있을까?’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저번에 그렇게 싸웠다가도 이렇게 머나먼 스위스, 취리히에서 함께 석양을 보고 있으니 꿈을 꾸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함께 있었다. 취리히의 밤이 왔다. 도시에 별을 심어놓은 듯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기온이 더 떨어지자 아쉬운 마음으로 배를 돌렸다. 어두운 뱃나루에 도착하여 송선호가 먼저 내리고 도현의 손을 잡아주었다. 둘은 서로 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연인처럼 허리를 끌어안고 손을 맞잡은 채 취리히의 밤거리를 걸었다. 어디선가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리무진 부를까?”

“아니, 조금 더 걷고 싶어.”

도현이 그렇게 대답했다가 아차 하고 그를 보았다.

“지금 가야 하지?”

“응… 가기 싫다.”

그는 도현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그가 아버지와 만나 스위스 은행 일을 보러 갈 시간이 다 된 것이다.

“으음, 스위스 은행 하면 뭔가 범죄 자금만 왕창 있을 것 같은 느낌이야.”

“뭐, 거짓말은 아니지.”

“그런 게 없으면 이렇게 우아한 도시도 생길 수 없는 걸까?”

“글쎄. 그럴지도.”

“만나보고 어떤지 감상 좀 말해줘. 참고하게.”

“무슨 감상?”

“스위스 은행원들은 이렇구나, 그런?”

그렇게 둘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알아온 기간이 긴 만큼 더 많이 싸우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더 대화할 거리도 많고 재미있었다.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다. 그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고 그녀도 그렇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송선호는 자신 있었다. 자신에게 그녀 같은 여자가 다시 있을 수 없듯이 그녀에게도 자신 같은 남자는 다시없을 것이다. 그들 둘은 이렇게 맺어져야 더욱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그 어떤 남자보다도 너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그러니까 나랑 결혼하자.”

송성호는 도현의 귓가에 입술을 묻고 속삭였다. 그의 부드럽고 좋은 목소리는 그렇게 듣기에는 너무나 간지러웠다. 도현이 꺅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가 웃었다.

“또 이런다.”

송선호는 리무진을 불러 함께 타고 호텔로 향했다. 리무진의 안에서는 가만히 서로 껴안고 함께 창밖으로 지나가는 도시를 구경했다. 호텔에서 그녀를 내려줄 때는 몇 번이고 입을 맞추며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다가 보내주었다.

‘하… 너무 좋다. 너무 좋아.’

송선호는 자신의 온몸에 남아있는 그녀의 향기와 손길을 기억하며 사랑의 행복에 젖어 취리히의 야경을 리무진 창밖으로 스쳐 보냈다. 미르 킹쉴드나 다니엘 스톤하츠의 생각 같은 건 전혀 나지 않았다. 빨리 일을 끝내고 그녀에게 돌아갈 생각밖에 없었다. 곧 아버지가 계시는 호텔에 도착했다. 도쿄에서 서로 불편하게 마주쳤으니 미리 말해서 조정했다. 아버지는 깔끔한 고급 정장을 격식 있게 갖춰 입고 계셨다.

“늦었구나. 빨리 와야지. 옷은 또 왜 그렇게 입었어?”

“아, 죄송합니다. 오셨어요?”

옷을 갈아입고 오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었다. 일어난 아버지의 맞은편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그가 확실히 늦긴 한 모양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송선호라고 합니….”

송선호는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 남자는 베이지색 쓰리피스 양복에 연녹색 실크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양복 상의 단추를 담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당한 길이로 자른 황금빛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넘겨져 있었고 똑같이 짙은 금색 속눈썹에 아름다운 비취색 눈동자가 인상적이다. 색기가 느껴지는 붉은 입술로 짙게 미소를 지었다. 패션지에서 당장 튀어나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미남이었다. 그도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네.”

“…….”

송선호는 지금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왔어?”

따뜻한 불빛이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도현은 테라스에 앉아 와인을 한 잔 마시며 야경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실크 가운을 입고 두꺼운 양모로 가볍게 몸을 감싼 채 그렇게 있었다. 송선호는 호텔의 문가에 선 채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빛을 등진 그의 멋진 실루엣만이 보일 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뭐해? 안 들어오고?”

도현이 그렇게 묻자 송선호는 가만히 있다가 조금 굼뜨게 행동했다. 천천히 걸어서 테라스로 갔다. 그리고 그는 도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그녀의 의자를 자신의 쪽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왜 그래? 일 잘 안 됐어?”

“…….”

얘가 왜 이러나… 도현은 그의 머리카락을 왼손으로 쓰다듬으며 오른손으로는 와인잔을 잡고 한 모금 마시며 야경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그의 기분을 신경 쓰며 안달복달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항상 달랐다.

“…나 사랑해?”

송선호가 물었다. 대꾸 대신 도현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좋은 목소리.

“사랑한다는 말 듣고 싶어?”

“나 사랑하냐고.”

“좋아한다니까.”

“그럼 아직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거지….”

송선호가 중얼거렸다. 도현이 또 웃었다.

“글쎄… 전에 말한 거 기억나? 사랑 같은 거 잘 모르겠어.”

진짜 있는 거긴 한 건가.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송선호는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혼자 있으면 생각나고 뭐 하고 있나 궁금하고… 함께 뭘 하고 싶다든가… 아니, 그냥 함께 있기라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 그냥… 그냥 계속 생각나는 거. 그런 거.”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송선호가 말했다. 도현은 ‘으음’ 하고 잠시 생각하더니 아리송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글쎄….”

송선호가 고개를 번쩍 들고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같이 있으면…!”

그렇게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다가 멈췄다. 사랑은 사업도 아니고 토론도 아니었다. 설득한다고 해서 누군가 그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건 또 무슨 아이러니인가.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갑자기 왜 그래? 지금도 좋아. 충분해. 오늘 재밌었잖아. 진짜 무슨 일 있었어?”

그녀가 이상하다는 눈길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송선호는 그제야 자신이 엄청 이상하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그냥.”

그리고 그는 일어났다.

“씻고 올게.”

그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긴장감에 이명이 웽웽거리고 있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뛴다.

‘아… 병신. 뭐 하자고 티를 내냐, 티를. 가만히 있자. 가만히….’

그녀는 지금 자신과 함께 있었다. 그가 아니라. 송선호는 심호흡을 했다. 아까는 그저 당황했을 뿐이었다. 생각도 못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그는 그녀의 옛날 남자일 뿐이고 지금 그녀와 만나고 있는 건 송선호였다. 불안해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씻고 나오니 도현도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실크 가운을 침대 옆 테이블에 걸쳐놓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

“아, 피곤해. 졸려.”

도현은 이불 안으로 파고 들어가며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는 헐벗은 채 가만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손으로 괴고 송선호를 보았다.

“왜 그러고 있어? 머리 말리고 빨리 들어와. 자자.”

“…내일 일찍 일어나서 러닝이라도 한 바퀴 할까?”

“어, 좋아. 여긴 공기도 좋으니까.”

“수영하고 마사지 받고… 그리고 뭐 할래?”

“점심 간단히 먹고 오페라 하우스 가자.”

“아, 오랜만에 괜찮겠네. 내일 낮에 있는 걸로 그냥 한다?”

“응.”

송선호는 간단하게 비서에게 문자를 남겼다. 머리를 다 말리고 속옷 차림으로 이불에 들어갔다. 밤 11시였다. 그녀를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허리를 끌어안은 그의 손을 도현이 감싸 잡았다. 송선호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아직도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왜 계속 이렇게 불안하지….’

그는 이제 정말 노력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그녀와 평생 함께하기 위해서. 질투도 나고 이해도 되지 않을 때도 많고… 그런 건 같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전과 다르게 그는 그녀와 함께 있었다. 이렇게 체온을 나누고 사랑의 말을 나누고 같이 잠들고… 그가 꿈꿨던, 아니, 꿈꿀 생각도 못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함께하고 있었다. 행복했다. 앞으로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아니, 더 행복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렸다.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지고는 했다. 그녀는, 도현 킬스버그는 그의 전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그녀를 꺼렸던 것만큼, 그녀는 무서울 정도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때… 그땐 정말 말도 없이 떠났지.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그냥 그렇게 가버렸지. 인사라고 할 만한 것도 없이… 그냥… 그냥…….’

3년 전, 그녀는 그렇게 메트로 서울을 떠났다. 잠깐 여행을 가는 것처럼 말하더니 그대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땐 또 일 때문에 얼굴을 붉히며 서로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그 뒤로는 일이랍시고 연락하는 건 전부 메일을 통한 것뿐이었다.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려고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상실감에 마음을 다치면서 방향을 잃은 미움과 원망만을 치료법으로 생각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떠나는 걸 아닐까. 이번에도 그 남자의 손을 잡고, 자신이 볼 수 없는 곳으로 그렇게 가버리는 건 아닐까. 그러면… 그러면 그는 도대체 어떻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아니야. 아니야. 너무 비약하고 있다고, 씨발… 그럴 일은 절대 없어. 없어… 절대 없어. 절대 안 놔줘. 절대 안 놔줄 거다. 도현이는 이제 내 여자야. 내가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도현이 몸을 뒤척거렸다. 그녀는 몸을 돌려 송선호와 마주 보며 베개를 고쳐 벴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안으며 말했다.

“안 자?”

“자.”

“빨리 자. 내일 일찍 일어나자며….”

“응….”

송선호는 밤새도록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랬다. 그리고 계획한 대로 아침에 일어나서 호텔 조식을 먹고 조깅복으로 갈아입고 호반의 주변을 달렸다. 장난을 치기도 하고 경주를 하기도 했다. 호텔로 돌아오니 배가 고파져 호텔 레스토랑으로 가서 늦은 조식으로 샐러드와 크래커, 캐비어를 시켜 먹었다. 그리고 호텔 수영장에 들어가 도시의 풍경을 감상하며 따뜻한 물에서 가볍게 수영을 하고 놀았다. 마사지를 받고 점심으로는 송어를 먹었다. 옷을 갈아입고 오페라를 보러 가기 위해 나왔다.

어둡고 짙은 청색 셔츠에 흑록색이 반질반질한 세련된 양복을 쫙 빼입고 머리까지 깔끔하게 넘긴 송선호는 아주 근사했다. 그는 주로 클래식하게 입는 편이었지만 도현은 세련된 느낌으로 자주 입었기 때문에 분위기를 맞췄다. 193cm의 키에 건장하고 탄탄한 체격, 4분의 1은 슬라브 계열의 피가 섞이고 8분의 1은 앵글로색슨 계열의 혈통이, 그것도 상류층 유전자만 섞여 얼굴도 굉장히 귀족적이면서 남자답게 잘생긴 그였다.

도현 킬스버그는 송선호가 사 온 네 개의 드레스 중에서 은은하게 광택이 나는 세련된 검은색 드레스를 입었다. 드레스는 허리 높이부터 허벅지까지 꽉 조여 그녀의 멋진 골반을 드러냈다. 옷감의 한쪽이 트여 그녀의 늘씬한 다리를 드러냈다. 그리고 가슴과 등은 짙은 자수가 반짝거리며 덮었고 가슴은 좀 파이고 팔은 시스루 재질로 예쁜 꽃문양이 덮여 있었다. 머리는 깔끔하게 올렸다. 그녀의 사슴같이 예쁘고 기다란 목을 수백 개의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목걸이가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가슴골이 시작되는 윗부분에 옅은 분홍색 다이아몬드 펜던트가 투명한 다이아몬드에 둘러싸여 늘어져 있었다. 귀에도 딱 달라붙는 큼직한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왼손에는 꽃처럼 화려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송선호가 준 것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나는 여자가 아름다운 드레스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에 휩싸여 있으니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그녀의 숱이 많은 속눈썹은 투명한 마스카라로 모양을 좀 더 냈고 입술은 옅은 분홍색으로 칠했다. 건강하게 분홍빛이 도는 하얀 피부에 특유의 분위기에….

슐로스 갈 걸 생각하고 차려입은 것이었지만 그러고 길거리에 나오니 사람들이 촬영이라도 하는 줄 알고 계속 그들을 쳐다보았다. 둘은 손을 잡고 오페라 하우스로 들어갔다. 유명한 극이 아니었는데도 재미있어 잘 보고 나왔다.

“피가로의 결혼에서 영감 많이 받았나 봐.”

“나도 그 생각 했는데.”

다 보고 나서는 서로 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둘 다 그렇게 입고 있으니 길거리 카페에 들어가면 대번에 눈에 띌 옷차림이긴 했지만 거리낄 것이 없었다. 손을 잡고 커피를 마시며 거리를 보고 있으니 송선호는 이게 그녀가 말한 낭만일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가 잠시 한숨을 쉬었다.

“응? 왜 그래?”

“아니… 좋아서.”

“너 너무 일만 해서 그런 거 아냐.”

도현이 웃었다.

“진짜 그런가?”

송선호도 미소를 지었다. 금방 그건 안도의 한숨이었다. 날이 밝아올 때까지 잠들지 못하게 했던 그 이상한 불안이 드디어 가셨다. 그녀는 이렇게 그와 함께 있어 주고 있었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이렇게 같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와 그 남자와는 옛날옛적에 헤어졌으며 다시 만날 거였으면 벌써 다시 만나고 연락을 했을 것이다. 그 양아치도 송선호에게 도현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와는 끝난 것이다. 끝났다. 송선호가 불안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취리히에 그가 있다고 해서 도현과 꼭 마주치라는 법도 없다. 취리히가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작은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 남자의 곁이 아니라 자신의 곁에 있었다. 그랬다.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괜한 걱정을 했던 것이 좀 쪽팔렸다. 둘은 드디어 대망의 슐로스로 향했다. 언덕 위를 프랑스 궁전처럼 꾸며 놓았다. 해가 슬슬 떨어지고 있었다. 낮은 곳부터 높은 곳까지 웅장하게 퍼진 구름 사이로 떨어지는 태양이 주홍빛 수를 놓았다. 커다란 궁전 안에선 따뜻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름 있는 유화를 보는 듯 고풍스러웠다. 관현악단의 연주 소리가 은은했다. 리무진이 도착하자 연미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송선호가 먼저 내리고 도현의 손을 잡아주었다. 검은색 높은 샌들을 신은 그녀의 늘씬한 다리가 드러났다. 우아하게 바닥을 내디디며 그녀가 차에서 내렸다.

“배우 할 생각은 없었어?”

송선호도 내심 그녀의 자태에 감탄하여 그렇게 속삭였다.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기 때문에 더욱 고아한 느낌이 났다. 도현이 피식 웃었다.

“나 몸 쓰는 일 못 해.”

“안 하는 거겠지… 하긴, 안 해서 다행이다.”

안 그래도 남자가 줄줄이 꼬이는데 그녀가 연예인이라면 더 꼬였을 것이다. 송선호는 그녀의 귓가에 살짝 입을 맞추고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계단을 올라갔다. 들어가자 정말 프랑스 궁전처럼 사람들이 춤을 출 수 있는 회장이 마련되어 있었고 주변으로 검은색 고급 대리석 테이블들이 간격을 두어 위치해 있었다. 그 위에 새하얀 포르셀린 도자기들이 놓여 있었다. 아름다운 남자와 여자들이 앉아 미소를 띤 채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도현과 송선호는 2층으로 안내되었다. 아래층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과 관현악단과 정원이 전부 보이는 자리였다. 도현은 아주 기분이 좋은지 굳이 따지지 않고 추천으로 코스를 정했다.

“아, 기대된다.”

도현은 춤을 추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나중에 춤출래?”

“그럴까? 오랜만에.”

7개의 코스가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나왔다. 전채 요리부터 디저트까지 한입 한입이 천국이었다. 도현은 마지막으로 와인을 한 잔 더 시켜 입을 축이며 말했다.

“여기 이러고 있으니까 프랑스 귀족이라도 된 기분이다.”

“지금 우리도 크게 다르진 않지.”

“하하. 넌 그렇게 말해도 되겠다.”

그녀가 꽃이 피듯 미소를 지었다. 마음속에도 꽃이 피는 기분이었다.

“넌 공주님 같아….”

송선호는 꿈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목이 드러나게 틀어 올린 그녀의 남빛 머리카락이 예뻤다. 짙은 속눈썹과 깨끗한 피부, 선이 아름다운 그녀의 자태… 우아하면서도 섹시한 그녀였다. 그녀는 그가 산 드레스를 입고 그의 어머니의 보석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빛과 이지를 담은 눈으로 송선호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모든 순간이 황홀하다.

“내가?”

“응….”

“하하. 하하하. 너 진짜.”

송선호가 그러고 있자 도현이 좀 웃었다. 도현이 발끝으로 그의 무릎을 건드렸다.

“야, 적당히 해. 네가 이러니까 약간 민망하다. 아니, 이렇게 좋아하면서 예전에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어?”

“…미안.”

송선호는 움찔하더니 시선을 돌렸다. 도현은 한쪽 턱을 살짝 괴면서 관찰하듯이 그를 보았다.

“진짜. 말 좀 해봐. 뭐라고 그러려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그래.”

“…….”

진짜 몰라서 그러는 것일까. 송선호는 와인을 벌컥 마셨다. 그리고 입술을 살짝 닦고는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몰라… 미워지더라고….”

“난 도대체 네가 왜 날 그렇게 싫어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더라고. 딱히 이유 없이 사람 싫어할 남자로 안 봤는데. 아니, 애초에 누구 싫으면 안 보고 살아도 문제없을 남자가 왜 계속 저러나. 자기 회산데 담당 바꾸면 되는 거고.”

도현이 말했다. 송선호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도현은 종종 추궁하곤 했다. 그의 사과를 받고 싶은 것일까?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원하는 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송선호는 잘 알 수가 없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송선호가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도현은 ‘으음~’ 하고 잠깐 고민하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대답했다. 그녀는 정말로 궁금해하고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송선호라는 남자를.

“그때는 별로 너한테 관심이 없어서 생각해본 적 없는데.”

“…….”

“네가 나한테 그러기 시작한 게 에반을 만나면서부터란 말이야.”

송선호가 움찔했다.

“내가 다른 남자들 만날 때는 안 그랬는데. 글쎄. 왜일까? 너 기본적으로 웬만한 남자들은 너한테 안 된다고 생각하잖아.”

도현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장난스럽게 송선호를 괴롭히기 위해서 이 주제를 꺼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송선호가 자기 앞에서 당황스러워하며 쩔쩔매는 것을 재미있어했으니까. 하지만 타이밍이 안 좋았다.

“그 남자는 될 거라고 생각했어?”

송선호는 정색을 했다.

“무슨 소리야. 그런 양아치 새끼… 네가 만난 남자들 중에서 제일 최악이었어.”

그러자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분명한 얼굴이었다. 송선호는 뭐라고 더 하려고 했다.

“그 새끼는….”

“그랬어?”

그 순간 낮게 울리면서도 허스키한, 귀에 흔적이 남는 것 같은 그런 멋진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송선호의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송선호는 도현의 얼굴을 보았다. 도현도 그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이미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녀의 눈이 놀라움에 좀 더 커졌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약간 어둑한 조명 아래 미소를 지은 그의 눈동자가 은은하게 빛났다. 자연스럽게 구불거리는 금발머리, 비취색 눈동자, 붉은 입술. 불온한 색기를 두르고 사람을 홀리는 미소를 머금은 남자. 도현 킬스버그와 에반 블랙은 그대로 시선을 마주친 채 아무런 말없이 몇 초를 보냈다.

“에반….”

이윽고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반이 더욱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야.”

“어떻게….”

도현은 천천히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미묘했다. 에반은 한 발자국 다가와 그녀의 양쪽 어깨를 잡고 가볍게 뺨을 마주치며 인사를 했다. 송선호는 의자의 팔걸이를 꽉 잡았다.

“여긴 웬일이야?”

도현은 그제야 좀 더 놀란 기색을 보였다. 에반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일 때문에.”

“머리 잘랐네?”

“어때?”

“잘 어울려.”

도현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그의 얼굴을 한 번 지긋이 관찰했다.

“몇 년만이지?”

“2년. 좀 더 됐어.”

에반은 그녀의 손을 잡아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려고 했다가 그녀의 반지를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은 채 그녀에게 물었다.

“둘이 결혼이라도 한 거야?”

도현은 자신의 왼손을 보더니 ‘아’ 하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근데 만나고 있긴 해. 인사해. 둘이 몇 번 본 적 있잖아.”

도현이 송선호를 돌아보았다. 송선호는 역시나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에반도 그제야 송선호를 돌아보았다. 입은 똑같이 웃어도 눈빛이 다르다. 항상 그랬다.

‘기분 나쁜 새끼….’

송선호는 짓씹듯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에반은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건넸다.

“안 그래도 어제 봤어.”

“…!”

송선호는 말없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시다가 깜짝 놀랐다. 그가 그걸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반과 송선호를 번갈아 보았다.

“진짜?”

송선호는 그녀의 시선을 잠시 피했다. 에반은 미소를 지었다.

“너랑 같이 왔을 줄은 몰랐지.”

에반은 도현의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잠깐 눈을 마주치고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뭔가 추억이 있는 행동인 걸까. 도현도 짧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둘은 다시금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도현은 에반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에반도 그대로 도현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근사한 두 사람이 그렇게 있으니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사람의 시선을 붙잡아 두는 마력이 있었다.

송선호는 막 벌떡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둘을 떨어뜨려 놓기 위해서다.

“나….”

“그럼 난 갈게.”

그런 타이밍에 둘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에반은 그녀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듯 눈짓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자 에반은 그저 미소만을 남기고 자신의 일행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그대로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의 일행은 하나같이 선남선녀들이었다. 그가 돌아오자 그의 팔짱을 낀 여자의 뒷모습이 아주 섹시했다.

“하….”

기분이 묘하게 이상하군… 도현은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녀가 만났던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만난다고 해서 복잡한 기분이 들었던 적은 없었다. 대부분 ‘잘 됐구나’ 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차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 애매했던 적이 있는데, 그게 에반 블랙이었다.

[네가 어디에 있어도, 어떻게 살고 있더라도… 난 평생 널 사랑할 거야.]

한창 여자에게 빠져 있는 남자가 하는 말은 조금 걸러 들어야 한다. 그걸 곧이곧대로 믿고 나중에 울고불고하는 여자만큼 멍청해 보이는 것도 그렇게 많지 않다. 도현이 염세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하지만 저렇게 있는 그를 보니 아무리 도현이라도 기분이 퍽 복잡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는 그런 말을 쉽게 흘리고 다닐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잘못 본 것뿐일지도 모르지.’

도현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춤추러 갈까?”

“…….”

그리고 송선호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더니 그의 표정이 좀… 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너랑 데이트하면 항상 이래. 나 남자 눈치 보는 거 정말 싫어하거든?”

“나는…!”

송선호는 억울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았지만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기분 나쁠 수도 있다는 거 아는데 갑자기 에반이 나타난 게 내 탓도 아니잖아? 표정 풀어.”

“…….”

애당초 송선호는 그와 만났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말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그 사실을 말하고 가는 바람에 송선호의 꼴이 우스워졌다. 게다가 그 직전에 송선호가 그의 흉을 보고 있었다는 것도….

‘망할 새끼, 맞춰서 나타난 것도 아니고.’

송선호는 부글부글한 숨을 내뱉었다가 표정을 겨우 풀었다.

“미안… 춤추러 가자.”

그들은 1층으로 내려갔다. 곡에 맞춰서 춤을 추다 보니 다시금 분위기가 좋아…지나 싶었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2층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향하자 도현과 송선호도 거기로 시선을 돌렸다.

짙은 금발 머리, 부드럽게 미소를 띤 붉은 입술, 클래식한 턱시도를 입고 반짝이는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새카만 머리카락을 가진 글래머의 손을 잡고 내려오는 에반이었다.

남자도 짙은 섀도우를 바른 여자도 엄청난 미남미녀라 사람들의 시선이 저절로 향한 것이다. 그리고 그 둘도 멀리서는 들리지 않는 대화를 약간 나누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젠장….’

일부러 그러는 것일지 모르겠는데 송선호는 에반과 눈이 제법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그는 살짝 미소 지으며 예의를 차렸다. 배알이 꼴렸다.

‘아니, 젠장! 나 왜 이러냐? 저 새끼는 전 남친! 나는 현 남친인데? 배알 꼴리면 저 새끼가 꼴리겠지!’

송선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스렸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의 앞에서 기분 나쁜 티를 더 이상 내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서 말이다. 송선호는 부드럽게 그녀를 리드하며 속삭였다.

“최근에도 춤 춘 적 있었어? 잘하네.”

“아… 뭐. 오랜만인데 몸에 익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잘… 되네.”

“…….”

집중하지 못한 것은 그녀였다. 송선호가 그 남자와 눈이 계속 마주쳤다면 도현은 그와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는 흑발의 글래머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송선호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질투 나?”

“응?”

도현은 송선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질투 나냐고.”

“그렇다기보단….”

도현도 약간 실수했다는 생각이 드는지 송선호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미안. 너무 오랜만에 봐서 좀 놀랐나 봐.”

“미련 남았어?”

“아니야.”

그녀는 송선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그렇게 속삭였다. 송선호는 그런 그녀의 눈을 보면서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웃는 얼굴로 송선호를 유혹했다.

“응?”

“진짜….”

그는 그녀를 이기지 못하게 된 지 오래였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눌렀다. 정말 부드러웠다. 부드럽게 쪽, 쪽 하고 입술을 부딪쳐 나가니 주변에서 춤추고 있는 모두가 사라진다. 도현도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 여기도 쫓겨나는 거 아니야?”

“그래도 해외는 좀 낫지….”

그리고 쪽쪽 다시 입을 맞추면서 서로 눈빛을 섞었다. 그리고는 손을 잡고 춤추는 곳에서 빠져나왔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있었다. 살짝 민망해서 둘은 웃었다. 정원으로 나왔다.

“안 추워?”

“와인 마셔서 괜찮아.”

송선호는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상의를 걸쳐주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프랑스식 정원은 나무도 네모 반듯이 깎아두고 잔디도 어디 하나 모난 데 없이 평평하게 잘라놓았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분수에는 옛 그리스 신의 조각이 나른하게 누워있었다. 달이 휘영청 떴다. 그들은 손을 잡고 정원을 걸었다.

“사랑… 같은 거 잘 모르겠다고 했지.”

“응? 어제?”

“응.”

“그랬지.”

“넌 로맨스 소설 작가가 왜 그걸 몰라? 적는 건 잘하면서.”

송선호가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도현이 웃었다.

“글쎄. 좋아. 좋아해. 그런데 사랑…이라고 말하는 건 좀 거리껴진달까. 사랑이라고 할 정도면 뭔가 없으면 못 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 아냐? 아직 그럴 만한 남자를 못 만나본 걸까? 근데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거든.”

그녀가 만나본 남자들보다 더 잘나고 괜찮은 남자를 만난다는 거야말로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돈 많은 남자? 착한 남자? 똑똑한 남자? 다 만나봤다. 그래도 죽고 못 살 만큼 사랑한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녀가 실제로 보고 들은 사랑들? 네가 날 사랑한다면 나도 널 사랑하겠다는 식의 기브 앤 테이크, 혹은 집착이나 체념 정도였다.

“사랑 같은 감정 느껴보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 보통 여자들처럼….”

“글쎄.”

누군가를 그만큼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이상하다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굳이 누군가를 그만큼 사랑해야겠다고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도현은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했다.

“난 진짜 이대로가 좋은데….”

그러다 도현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송선호를 돌아보았다.

“넌 항상 내가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만들려고 하는구나?”

“그런 게 아니라….”

“넌 자꾸 마음만 급해. 우리 제대로 만나기 시작한 지 두 달도 안 됐어. 왜 이래? 계속 결혼하자고 하고.”

송선호가 살짝 기가 꺾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랑 있는 게 너무 좋아서… 불안해.”

“뭐가?”

“…….”

그리고 그들은 밤늦게 호텔로 돌아갔다. 송선호는 그녀를 졸라서 사랑을 나누었다. 화려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귀걸이도 아무렇게나 테이블에 던져놓고 그녀를 요염한 꽃과 같이 보이게 만들었던 드레스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송선호의 세련된 고급 슈트도 구겨져 바닥을 뒹굴었다. 두 번, 그렇게 체온을 나누었다.

‘어떻게 하면 허락해줄까? 그 새끼도 못 해봤을 거 아냐….’

송선호는 도현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싫다고 하는데도 굳이 하고 싶은 이 마음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도현이 그의 몸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송선호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엎드렸다. 서로의 손끝까지 스치듯 쓰다듬으며 도현은 가운을 챙겨 입었다. 곧 디바이스를 챙겨 들고 테라스로 나갔다. 양모로 된 담요를 무릎에 덮고 무언가 쓰기 시작했다. 영감을 좀 받은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내 생각? 아니면 그 양아치? 아니면 다른 남자? 아니면….’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일찍 호텔을 나섰다. 그녀와 함께한 취리히 여행은 너무나 행복했다. 비록 중간에 이물질이 잠시 끼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또 가자, 스위스.”

메트로서울 비행차 타워에 도착하고 비행차에서 내리면서 송선호가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송선호는 진지했다.

“태어나서 제일 행복했어. 다시 가고 싶어.”

“…나도.”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가 좀 바뀌는 게 느껴졌다.

*

“…….”

그녀가 송선호랑 같이 스위스로 가버렸다. 그렇게 싸웠으면서. 그리고 송선호도 미르 킹쉴드 때문에 그녀에게 마음이 상했으면서 또 같이 갔다.

‘왜?’

크게 사고를 몇 번 쳐서 그녀의 눈 밖에 났다가 어느샌가 다시금 그녀의 곁으로 돌아와 애정을 받는 미르 킹쉴드나, 근본적인 다름 때문에 계속 싸우면서도 또 세상 둘도 없는 연인처럼 그녀와 데이트를 다니는 송선호나. 다니엘이 보았을 때 그녀의 선을 몇 번씩 넘어버린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주제 넘게도 그녀에게 바라는 게 아주 많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그들은 당당하게 안 되는 걸 떼쓰곤 했다. 얕은수로 넘어가려고 하거나 교묘하게 그녀의 앞에서 속임수를 쓰기도 했다. 그녀에게 그것이 훤히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결국엔 어떻게든 넘어가고 말았다. 분명히 이번엔 그녀가 송선호를 버릴 것이라 생각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런 그들에게 질투를 느꼈다. 동시에 열등감도 느꼈다.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렇게 다니엘을 받아들여 줬는데 어떻게 이 이상을 바랄 수 있는가. 아니… 더 바라고 있기 때문에 결국 이런 생각을 하고 마는 것일까?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자. 그게 다니엘 스톤하츠의 전략이었다.

“…….”

“…….”

이른 아침, 도현 킬스버그는 없고 다니엘 스톤하츠와 미르 킹쉴드가 부엌에서 딱 마주쳤다.

“싸움은 안 됩니다, 싸움은.”

그때 로웰 리가 배를 긁으며 나타났다. 그녀는 눈싸움을 하고 있는 둘 사이를 뚫고 지나가며 하품을 했다. 그녀는 냉장고를 열었다.

“아, 밥하기 귀찮아.”

“…앉아 계십시오, 선생님.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엇, 감사합니다~”

로웰은 기다렸다는 듯이 식탁으로 유턴했다. 그녀는 자신의 시그니처인 삐삐 머리를 묶지도 않고 산발인 채로 의자에 늘어져 앉았다.

“아, 아침 싫어. 마감 싫어. 작가님 좋겠다. 아, 나도 소설 쓸걸. 만화는 너무 노동집약적이야. 반도체냐고. 아~ 아침은 왜 밝은 걸까. 누구 하나 뒤지기 좋~은 날씨다~”

비축분이 떨어진 로웰 리는 근래 자주 흑화하고 있었다. 그녀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의자에 불량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녀가 암흑의 기운을 흩뿌리고 있을 동안 남자 둘은 아침을 하기 시작했다.

미르는 A+++ 등급의 소고기를 굽기 시작했고 다니엘은 능숙하게 수란을 만들고 있었다.

싸움은 안 된다고 집주인인 도현뿐만 아니라 로웰도 자주 말하곤 했지만 이미 미르 킹쉴드는 틈만 나면 다니엘 스톤하츠를 노리고 있었으며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걸 아주 조용히, 무쌍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게다가 도현이 잠시 집을 비웠더니 미르 킹쉴드는 이걸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시도 때도 없이 덤볐다.

“아, 꼭 이럴 때 엘 드라카 재탕을 할까, 나는. 아, 죽어야 돼. 죽어야 돼. 누가 대신 좀 죽어줘. 아~~”

로웰이 또 세상을 부정하고 있을 때 미르는 부젓가락으로 다니엘의 옆구리를 노렸다. 파삭. 부젓가락이 부러졌다.

“응?”

로웰이 고개를 더 젖혀 거꾸로 그들을 보았다. 토스트기가 빵을 노릇노릇하게 구웠다. 다니엘은 로웰의 접시와 자신의 접시를 꾸몄고 미르는 한 손으로 프라이팬을 튕겨 고기를 뒤집었다. 로웰이 상석에 앉아 있었고 다니엘이 그녀의 오른편에 미르는 왼편에 한 칸을 띄워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카페 브런치로 나와도 손색이 없을 음식이 나오자 로웰이 고개를 들어 인사했다. 다니엘은 잔잔하게 미소를 띤 얼굴로 답했다.

“맛있게 드십시오.”

“와~ 스톤하츠 씨 점점 갈수록 일취월장이네요. 팔아도 되겠어요.”

“안 그래도 뭘 좀 더 할까 생각 중입니다.”

“일이요?”

“네.”

“지금도 하시는 거 많잖아요.”

“러시아에 들어가는 지원금을 끊을까도 생각했는데… 도현 씨가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아서 그냥 일을 더 하기로 했습니다. 용역이나 대학 연구실 쪽으로 일을 더 받아볼까 합니다.”

“와… 요새 이스트드래곤 훈련 엄청 빡시지 않아요? 단기합숙 계속하는데 그거 할 시간이 나겠어요?”

“시간은 만들면 납니다.”

다니엘이 그렇게 말하자 로웰이 슬그머니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

“뭔가 인생이 반성 되네요…. 저도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흡. 로웰이 그렇게 단전에 힘을 주며 또 하루를 살아갈 힘을 모았다. 마감이 내일이다.

“오늘 우리 작가님 오시겠네요. 선물 뭐 사 오시려나. 아, 아니다. 사오지 말라고 했지….”

빚 갚아야지… 빚쟁이는 하느님이다. 로웰이 한숨을 쉬었다. 다니엘이 슬쩍 물었다.

“두 분 수입이 적지는 않으실 텐데… 아직 많이 힘드신 상태입니까?”

“이번 작이 전작들만큼 그렇게 매출이 안 나네요. 재미가 없는 건 아닌데….”

로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현 킬스버그의 <바로 나!> 시리즈나 로웰의 <다시 만난 시간>은 지금 생각해보면 로맨스를 판타지로 소비하는 사람들의 입맛을 광범위하게 저격하는 작품이었다. 그렇게 의도하고 쓴 것은 둘 다 아니었는데.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는 독특한 소재와 구상으로 시작했으나 그러니만큼 좀 마이너했다.

“저번에 송 편집장이 원금 4분의 1쯤 내줘서 좀 나아지긴 했는데요. 그래도 원리금 내고 생활비 빠듯하게 쓰고 나면 끝이에요. 돈 남으면 바로 원금 갚고 있거든요. 단돈 몇백이라도….”

로웰은 그렇게 말했다가 ‘아!’ 하고 미르 킹쉴드를 보았다.

“작가님한테 보석 좀 그만 사줘요, 킹쉴드 씨. 현금을 줘, 현금.”

로웰이 검지와 엄지를 비볐다.

“우리 작가님 킹쉴드 씨가 사준 다이아 팔찌 보면서 거기 어울리는 드레스 사겠다고 마감 앞두고 백화점 신상을 몇 시간이나 보고 있더라니까요. 정신 건강에 안 좋아요.”

“드레스도 같이 사줘야겠네. 네가 마감 앞두고 엘 드라카 몇 시간 보는 거랑 똑같은 거지.”

미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로웰이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아, 안 돼. 빚 갚아야 돼, 빚. 돈 있으면서 안 주는 거였어요?”

“있는 건 줬잖아.”

“비상금도 내놓으라고.”

굳이 말하자면 도현 킬스버그와 사실혼 상태에 있는 것은 미르 킹쉴드도, 다니엘 스톤하츠도 아닌 로웰 리였다. 그녀와 도현은 법과 금전으로 꽁꽁 묶인 훌륭한 유사 부부를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굳이 따지자면 도현보다 금전 감각이 훨씬 나은 그녀가 가장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 그것도 없으면 난 어떡해. 남자가 그 정도도 없으면 가오 빠진다고. 쟤 봐라.”

“아… 그러니까 송 편집장도 바닥 긁을 정도로는 바로 안 주는 거야. 아~ 이 남자들 다 빠져나갈 구멍 킵 하고 우리 작가님한테 덤비는 거 봐라.”

로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니엘이 조용히 덧붙였다.

“전 아닙니다.”

“아, 그건 인정… 저두요.”

돈 딸린다… 로웰이 한숨을 푹 쉬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올해 마XXX 새 차 못 산 게….”

돈 없어서 가오 빠지는 건 여자가 더 심하다. 로웰은 명품 가방이나 옷, 보석에는 관심이 없어도 차, 게임기, 엘 드라카 관련상품, 전자 제품 등은 좋아했다. 올해는 하나도 새로 못 샀다. 팬들이 주는 선물로 근근이… 그렇게 로웰과 남자 둘은 아침 식사를 끝냈다.

그리고 로웰은 2층 거실에 앉아 봄꽃이 핀 정원을 바라보면서 마감에 돌입했다. 미르는 훈련을 하러 갔다. 다니엘은 아르바이트하러 갔다. 그리고 약 10시간쯤 뒤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도현이 돌아오기로 한 날이기 때문에 미르 킹쉴드도 6시까지 훈련을 하고 칼같이 돌아온 것이다.

둘은 차고에 주차를 하고 나오면서 정원에서 딱 마주쳤다.

“…….”

“…….”

미르는 대놓고 한숨을 한 번 푹 쉬더니 집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는 훌훌 벗고 검은 바지에 흰 반팔 티셔츠를 걸쳐 입은 채로 내려왔다. 아주아주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1층 거실에서 TV를 보기 시작했다. 앞에 맥주와 안주를 깔아놓고 삐딱한 자세로 카우치에 드러누웠다. 그의 훤칠하고 울끈불끈한 멋진 몸매는 어떻게 있어도 대단했다.

‘아~, 저 마도사 새끼 아무리 해도 안 잡히네.’

미르가 카우치 팔걸이에 쭉 뻗은 목을 걸치며 ‘하’ 하고 한숨을 뱉었다. 살짝 집중하니 위층에서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다니엘 스톤하츠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마도사 용병으로 꽤 이름을 날렸다고 어디선가 얼핏 들은 것 같다. 그 이름값을 하는 모양인지 소드마스터를 상대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미르 킹쉴드는 약간 맥이 빠진 상황이었다. 도저히 틈이 안 보였다. 서로를 죽일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면 99% 마도사들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소드마스터의 지구력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일주일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미르를 잘 막아냈다. 처음에 그가 싸움을 걸었을 땐 겁대가리 없는 게 병신 되려고 쇼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그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결국 장기전으로 돌입하면 미르 킹쉴드가 이길 것이다. 오늘은 도현이 오니 얌전히 있을 생각이었을 뿐이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처음 싸움을 걸 때 빼고는 미르에게 먼저 덤비지 않았다. 미르가 열이 받아 그를 제치려고 일주일이 넘게 덤볐다.

그러고 다시 그에게서 신경을 껐다. TV나 보고 있는데 현관문 쪽에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미르는 ‘엇’ 하고 몸을 뒤집고 고개를 들었다. 문이 열리면서 도현 킬스버그가 들어왔다.

“왔어?”

미르는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듯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미르, 얌전히 잘 있었어요?”

“응~”

그러고 고개를 들었더니 송선호가 도현의 캐리어를 양손에 든 채로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미르는 그에게 혀를 쭉 내밀었다. 그는 열 받은 얼굴로 미르를 노려보다가 그녀의 캐리어 두 개를 들고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미르는 도현의 얼굴에 쪽쪽 뽀뽀를 했다.

“너 왜 자꾸 외국을 가. 도대체 이번 달에만 몇 번을 가는 거야. 가지 마.”

“하하. 간지러워요, 미르.”

“나랑 있자, 응?”

미르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는 그녀의 가슴에 ‘으음~’ 소리를 내며 얼굴을 막 비볐다. 그녀가 까르르 웃으며 그의 머리를 안았다.

“미르, 일단 캐리어 좀 들고 가게….”

“흐응.”

그녀와 피부를 맞대고 있으니 심드렁했던 짜증도 사라지고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미르는 그녀의 나머지 캐리어 두 개를 한 손으로 들고 다른 쪽 팔로 도현을 안은 채로 계속 그녀의 가슴을 입술로 지분거리고 그녀의 목덜미와 어깨에 얼굴을 문질렀다. 그녀의 향기를 맡으며 자기 냄새를 잔뜩 묻히고 있었다.

그녀의 캐리어를 갖다 놓으려 드레스룸으로 가니 아까보다 더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는 송선호가 보였다. 그는 그녀의 캐리어를 열어 정리하고 있었다. 미르는 그에게 나머지 캐리어 두 개도 던져주고는 다시 거실로 나갔다. 그녀를 안은 채 카우치에 털썩 앉고 실실 웃으며 그녀의 입술을 쪽쪽 빨았다. 그녀가 웃으며 그의 뺨을 감싸 잡고 있다가 살짝 입술을 뗐다.

“다니엘 씨는요?”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다니엘이 2층에서 내려와 있었다.

“다니엘.”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았다. 그녀는 미르를 밀어내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가 쉽게 놔주지를 않았다.

“아, 싫어.”

“또 이런다, 또. 좀 놔봐요.”

그녀가 없는 동안 다니엘 스톤하츠와 아주 살벌하게 신경전을 벌여온 미르는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의 허리를 놔주었다. 그래도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다니엘 씨.”

그녀는 다니엘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다니엘이 미소를 띤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다녀오셨습니까.”

“네. 그동안 잘 쉬었어요?”

미르 킹쉴드는 다니엘과 입을 맞춘 그녀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로웰 선생님은요?”

“일하고 계십니다. 조금 있다 올라가시는 게 나을 겁니다. 집중하고 계시더라구요.”

다니엘은 마법으로 그를 슬쩍 밀었다. 여전히 도현과 눈을 마주치고 손을 잡고 있는 상태였다. 미르는 살짝 밀리나 싶더니 덥석 도현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미르.”

도현이 살짝 목소리를 깔며 경고를 했다.

“흥.”

미르는 왼팔을 그녀의 허리에 두르고 가슴이 살짝 파인 그녀의 원피스 목으로 오른손을 넣어 그녀의 왼쪽 가슴을 쥐었다. 그는 다니엘의 얼굴을 보며 씨익 웃었다. 도현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그의 손목을 잡았다.

“미르, 이러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 왜.”

미르는 그녀의 뺨도 깨물었다. 도현이 그의 머리카락을 잡으며 그의 얼굴을 떼어내려고 했다. 옷 속에 들어간 그의 손도 말이다.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아, 진짜. 하지 말라니까요. 다니엘 씨랑 얘기 좀 하려는데!”

“왜애. 너도 내 가슴 만지는 거 좋아하잖아.”

“그거야….”

“만질래?”

다니엘을 신경 쓰며 그를 떼어내려고 했던 도현이 멈칫하더니 미르 킹쉴드를 돌아보았다. 화려한 플래티넘 블론드, 아이스블루 아이, 그에 더불어 그가 아주 빛이 날 정도로 환히 웃었다.

“응?”

미르는 도현에게서 손을 떼고 자기 티셔츠를 쭈욱 위로 들어 올렸다. 신이 빚어주신 그의 완벽한, 몹시나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드러났다. 도현은 ‘하…’하고 감탄 및 탄식 같은 소리를 내더니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그의 왼쪽 가슴에 턱 하고 올렸다.

“미르는 정말….”

도현은 미르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두 손으로 그의 울끈불끈한 복근과 가슴을 문질문질 만졌다.

“정말, 뭐?”

“참….”

“참, 뭐?”

“그냥….”

“그냥, 뭐어.”

미르가 계속 캐묻자 도현이 세상 다 잊고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행복해서요.”

“그치?”

그녀가 좋아하니 미르도 웃었다. 그때 대놓고 들으라는 듯이 탁 하는 소리가 나더니 송선호가 드레스룸에서 나왔다.

“상스러운 짓 좀 그만하지.”

도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싱글벙글거리고 있던 미르도, 그런 그를 죽이고 싶다, 죽이고 싶다 하면서 참고 있던 다니엘도 그를 돌아보았다.

단정한 쓰리피스 회색 양복에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송선호는 오는 길에 잠깐 일을 보느라 안경을 끼고 있어 더 포멀한 느낌이 났다. 그는 미간에 ‘내 천’자를 강하게 잡고 다니엘 스톤하츠, 미르 킹쉴드, 그리고 미르 킹쉴드의 가슴을 만지고 있는 도현 킬스버그를 보았다.

도현은 살짝 발끈했다.

“이건 상스러운 게 아니라 신성한 거야.”

“남자는 몸보다는 마음이라고.”

송선호는 전부터 벼른 것인지 그렇게 말하며 팔짱을 꼈다. 도현은 눈썹을 살짝 띄우고 눈을 내리깔면서 동의하지 못한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미르의 가슴을 한 손으로 잡은 채로 그의 멋진 허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그리고 예술품, 아니, 마치 화려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미르 킹쉴드의 몸을 보며 대꾸했다.

“남자는 스펙이 마음이야.”

그러자 미르가 또 아주 기뻐하며 그녀의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역시 우리 예쁜 도현이. 똑똑해~”

그러니 송선호는 또 아주 자존심이 팍 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발견하고 도현이 어이없어 픽 웃었다.

“왜 그래? 자기도 잘생겨서 좋아하는 건데.”

“…….”

송선호는 움찔하며 입을 열려고 하다가 다물었다. 하지만 미르 킹쉴드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뭐?! 내가 잘생겼어, 쟤가 잘생겼어?!”

“얼굴이요?”

“그래!”

그러자 도현의 시선이 잠깐 세 남자를 둘러보다가 다니엘 스톤하츠에게 멈추었다. 살짝 암적인 생각을 하고 있던 다니엘 스톤하츠의 보랏빛 눈동자가 낮게 빛나고 있다가 도현이 자신을 보자 번뜩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셋 다 잘생겼죠.”

“…….”

“…….”

미르는 말문을 잃었고 송선호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이라도 좀 성의있게 해라.’

미르는 다니엘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홱 도현을 보았다.

“몸은?!”

“그건 당연히….”

뭐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듯이 미르를 올려다보자 그가 울렁거리는 얼굴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내가 최고라고 했으면서…!”

“미르…! 숨 막혀요!”

그러자 다니엘이 미르의 손목을 잡더니 도현의 몸에서 떼어냈다. 마법을 실은 것이다. 거기서 억지로 힘을 더 주면 도현이 다칠 수 있기 때문에 미르가 팔을 뗐다.

“뭐 하는 거야, 이 찌질이 새끼가.”

그는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이 찌질이가 자신에게 건방지게 싸움을 걸었던 것보다 도현이 이 찌질이 마도사 새끼가 자신보다 더 잘생겼다고 생각한 것에 더 화가 났다. 미르는 앙심을 단단히 품었다.

“도현 씨가 힘들어하시잖아.”

이럴 때 다니엘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는 몇 번 미르 킹쉴드에게 적의를 드러냈다가 그녀에게 점수를 깎인 적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에게서 벗어난 도현이 한숨을 쉬며 다니엘을 보았다.

“고마워요, 다니엘 씨.”

“…그럼 난….”

울렁거리는 얼굴을 한 건 송선호가 더 심했다.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도현이 ‘응?’ 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실수했다는 얼굴로 그녀의 시선을 피했지만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이런 농담을 이 남자들이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돈?”

하고 한 번 더 농담을 했더니 그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냥 집을 나가려고 했다.

“야, 야. 농담이야, 농담.”

도현은 그의 손을 잡으며 돌려 세웠다. 그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녀의 손을 보고 있었다.

“그러게 누가 먼저 시작하래?”

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그의 고개를 끌어당기며 안았다.

“스위스 또 가자더니.”

송선호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중얼거렸다.

“아… 빡쳐….”

그러자 또 미르 킹쉴드가 슬 다가왔다. 그리고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놔. 이제 그만해.”

그가 또 도현의 가슴을 노리며 뒤에서 끌어안으려고 하자 송선호가 그의 얼굴을 손으로 막으며 그 손도 잡았다. 미르가 발끈했다.

“손가락 부러뜨려버린다!”

“부러뜨려봐, 이 개새끼야.”

“미르!”

그러자 도현이 깜짝 놀라서 미르를 타박했다. 눈이 벌게진 송선호와 그의 손에 얼굴이 잡힌 미르 킹쉴드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아, 엄마….’

도현은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두 남자 다 밀어냈다.

“나와. 나와. 둘 다 내 몸에 손대지 마.”

그녀는 두 손을 들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송선호와 미르 킹쉴드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더니 마지못해 떨어졌다. 그녀는 카우치를 손으로 가리켰다.

“셋 다 저기 앉아요.”

*

가운데는 송선호, 왼쪽에는 다니엘 스톤하츠, 오른쪽에는 미르 킹쉴드가 앉았다. 미르 킹쉴드는 삐딱하게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얼굴을 괴고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허리를 펴고 바로 앉아 있었다. 송선호는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카우치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도현 킬스버그는 양 허리에 손을 얹고 그 남자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송선호와 미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둘은.”

그녀는 왼손으로 다니엘을 가리켰다.

“다니엘 씨를 본받아야 돼요.”

미르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송선호는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이었다. 도현은 눈썹을 살짝 들면서 물었다.

“왜, 싫어요?”

“당연하지! 내가 어떻게 저런 샌님처럼 살아?”

미르가 발끈했다.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계속 서로 싸울 거예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이미 싸우고 있다. 미르는 뭔가 그녀에게 호소하고 싶어 했지만 제대로 말을 못 찾는 것 같았다.

“어쨌든 싫어!”

“다니엘 씨가 되라는 게 아니라… 좀….”

도현은 답답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미르와 다니엘이 집에 들어온 지는 4개월이 다 되어 가고 송선호와 만난 지도 2개월이 되어갔다. 도현은 기본적으로 그들의 관계에 대해 노터치였다. 알아서 잘 행동하기를 바랐다. 도현도 이런 남자들을 셋이나 만난 적은 없었다. 문제를 크게 일으킨다면 그냥 안 만나고 말 생각이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지만….

“걸즈 데리고 살 때 걸즈도 항상 싸웠어요?”

“응…? 아니….”

전에 미르와 스캔들이 나서 가십지에 오르내렸을 때 잠깐 본 바로는 그의 걸즈는 꽤 사이가 좋았다. 한 번 그의 걸즈를 거쳐 갔던 여자들과도 서로 가끔 만나서 노는 사진도 찍히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이좋게 지내요.”

“그래도 그거랑 이건….”

“그럼 계속 싸울 거예요?”

“그건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사이좋게 지내라고요.”

“아, 씨… 도대체 뭘 더….”

미르는 내적갈등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약속한 대로 사고는 안 치고 싶은데 그렇다고 이 새끼들이랑 잘 지내고 싶지는 않고, 그녀와 얘기를 하다 보면 그녀의 말이 맞는데 뭔가 마음에 들지는 않고. 미르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 쪽으로 쭈욱 끌어당겼다. 그는 삐딱하게 앉아 있던 자세를 바꿔 앞으로 당겨 앉았다. 그녀의 허리를 안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맨날 같이 자게 해줘.”

미르는 그렇게 말했다. 도현이 잠깐 웃었다가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응? 손만 잡고 자자니까.”

“생각해볼게요.”

“진짜?”

미르는 기뻐했다. 물론 다른 남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송선호는 스트레스를 매우 받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도현아.”

“응?”

도현은 미르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은 채로 그를 돌아보았다. 미르도 빼꼼 그를 돌아보았다.

“너한텐 내가 이 새… 선수한테 몸 파는 창녀들이랑 같아 보여?”

“그런 말이 아니잖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사이좋게 지내는 게 좋잖아.”

“너 내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 거 뭐로 들었어?”

송선호가 팔짱을 풀고 한 손으로 자기 얼굴을 문질렀다. 안경을 벗어 손에 잡았다.

“너랑 둘이 평생… 우리 도쿄에서도 취리히에서도 좋았잖아. 네가 다른 놈들 만나겠다는 생각만 안 하면 우리… 우리 정말 행복한 거잖아.”

송선호가 그렇게 말했다. 미르랑 다니엘이 깜짝 놀라 그와 도현을 번갈아 보았다. 둘이 결혼 얘기까지 했다고? 미르가 도현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았다.

“결혼하면 안 돼! 차라리 나랑 해.”

미르가 그렇게 말했다. 평생 결혼 같은 건 생각도 안 해봤을 남자다. 도현이 대꾸했다.

“결혼 안 해요.”

연애 관계를 시작할 때는 서로의 동의가 없으면 시작할 수 없지만 헤어질 때는 한 사람의 마음만 떠나도 끝나야 맞는 것이다. 하지만 결혼은 웃기게도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인데도, 마음이 떠난다 하더라도 누구 하나의 의사로는 끝낼 수가 없다. 상대가 상당한 유책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게 이혼이다.

[결혼만 안 했어도.]

아무리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라도 구질구질해지는 꼴 보기 십상이다. 서로 좋아 만났던 남자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나 너랑 결혼 안 해.”

“…….”

“앞으로 누굴 만난다고 해도 딱히 결혼하고 싶을 것 같지 않고.”

도현은 미르를 잠시 떼어내고 송선호를 바로 내려보았다.

“아직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지금까지 대충 넘겼는데. 솔직히 네 목적이 결혼이면, 다른 여자 만나는 게 좋을 거야.”

그러자 송선호의 표정이 곧바로 일변했다. 그가 화를 냈다.

“다른 여자?! 웃기지 마. 다른 여자 같은 거 필요 없어. 결혼이 목적이 아니라 네가…! 난 너랑 평생 같이 살고 싶은 거라고! 그래서 결혼하고 싶은 거라고! 왜 그걸 아직도 몰라!”

송선호가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가 쥔 손에는 그가 사준 화려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너…! 나 이제 좋아하잖아! 같이 있는 거 좋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왜 나만으로는 안 되는 거냐고….”

마지막에는 살짝 목이 멨다.

“난 너만 있으면 되는데….”

고개를 살짝 숙인 그의 정수리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도현이 그의 앞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다리를 꼬고 그에게 잡힌 손을 그대로 둔 채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살짝 괴었다. 그녀는 송선호를 관찰했다.

“평생 같이 살고 싶다면서 왜 내 집에 안 들어와?”

“…너랑 이 새끼들이랑 이러고 있는 걸 나 보고 매일 보라고?”

“그런 식으로 하면 너 나랑 하루도 같이 못 살아.”

송선호가 다른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그가 자꾸 도현을 데리고 외국을 나가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를 이 집에서 멀리 떨어뜨리고 싶었다. 그만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분명히… 같이 있을 때의 그녀는 항상 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랬다. 하지만 역시 그녀는 다른 남자들처럼 그를 즐기기만 한 것일까? 그가 그토록 행복하다고 느꼈던 시간들이 그녀에겐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역시… 날….’

독한 술을 마시고 싶은 기분이다. 송선호는 자신이 잡고 있는 그녀의 왼손을 보았다.

“날…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거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 여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이지….”

그녀는 사랑을 모르겠다고 했고 별로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모든 걸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사랑에 관심이 없는 여자는 도대체 무엇으로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송선호, 나 봐.”

천천히, 송선호는 고개를 들었다. 도현은 살짝 내리뜬 눈으로 송선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송선호가 사 온 클래식하고 우아한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의 프러포즈 반지를 끼고 있었다. 팔찌도 귀걸이도, 목걸이도, 전부 송선호가 준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많은 남자였다. 그런데도 그가 싫은 것일까? 억울하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너같이 자존심 너무 강하고 게다가 나한테 험한 말 했던 남자, 절대 안 사귀었어.”

“…….”

“나도 이런 적 처음이야. 너랑 있는 거 좋아해. 재미있어. 생각보다 좋아서 깜짝 놀랐어.”

그녀가 솔직하게 말했다. 송선호는 인정을 받은 것에 대한 안도감과 조급함이 같이 들었다. 그래, 나도 알고 있었어. 우리 둘이 잘 맞을 거라는 거, 너무나 좋을 거라는 거 잘 알고 있었다고.

“지금 헤어지면 나도 아쉬울 거야. 같이 살고 싶으면 집에 들어와. 네가 정해. 난 너랑 결혼 안 해.”

그리고 도현은 그의 손을 놓고 자신의 왼손에 끼워져 있는 그의 프러포즈 반지를 빼려고 했다. 송선호는 깜짝 놀라서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빼지 마.”

그는 도현의 눈을 곧바로 올려다보았다가 피했다.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그녀가 모든 걸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

“생각…해볼게….”

생각해본다고? 그는 점점 갈수록 더욱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랑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생각만으로 마음이 미어졌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이런 자신을 그녀가 몰랐으면 싶었다.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사랑하는 이 마음을 안다면 과연 그녀가….

“…….”

“그럼 이제 좀 정리된 거죠, 다들? 다니엘 씨는 혹시….”

“전 괜찮습니다.”

다니엘이 그렇게 말했다. 도현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짧게 숨을 쉬며 그를 돌아보았다.

“괜히 꾹꾹 눌러 담고 있다가 전처럼 도망가거나 하지 말아요. 혼나요.”

그러자 다니엘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도망가고 싶어집니다.”

“다니엘 씨도 참.”

그렇게 정리하고 도현 킬스버그는 한숨을 놓았다. 다들 그래도 성인이니 이 정도로 말했으면 다 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했다. 도현이 누차 강조했다시피 이 게임의 룰이 싫은 사람은 그냥 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도현은 언제나 그랬듯, 그녀가 만나는 남자들이 그 정도의 상식인일 거라는 인간적인 기대는 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예의이기도 했고.

*

하지만 이 기회에 남자 셋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걔는 지금… 누구 하나를 선택할 생각이 없어.’

송선호는 스크린에 떠 있는 폴더 두 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클래식한 고급 시계가 언뜻 드러나는 멋진 슈트 차림을 한 그는 머리를 좀 잘라 더 멀끔해 보였다. 두 손을 깍지 끼고 턱을 괸 채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KP노벨과 NK미디어가 합병하면서 만들어진 <리엔 컴퍼니>의 사장실이었다. 이전 NK미디어 사장이었던 그의 삼촌 송병제와 공동대표였다. 제임스 윤은 미디어 출판부 이사가 되었다. 회사는 잠실에 있는 여러 고층 빌딩 중 하나의 한 층을 다 쓰고 있었다. 한 층 월세가 2억은 나오는 건물이었다. 오피스에서 저 멀리 한강이 보였다.

이건 정말 쓰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었다. 그 어떤 남자가 있다고 해도, 그를 인정하고 선택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수를 써서 그놈들을 제친다고 마음이 시원할까. 그녀가 알아줄까? 내가 그녀에게 최고의 남자라는 걸?

‘이번만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이제 빚도 내가 파악했고 그 새끼들 없어도 내가 다 갚아줄 수 있잖아. 당장은 안 되더라도… 그것만 아니었으면 그런 새끼들을 도현이가 다시 만날 일이 있겠어?’

송선호는 미동도 하지 않고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그는 몇 번이고 충동에 시달리다가 스크린을 껐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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