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2부 3권) (9/21)

그 남자들의 애로사항 (2)

그는 이제 도현과 로웰을 비롯한 유명 작가 세 팀만 직접 손볼 뿐 나머지는 다 직원들에게 맡겼다. 그는 비슷한 중소 플랫폼들의 인수합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시아 콘텐츠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서다.

외근을 나가 다른 회사 사장과 투자자를 만나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시장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였다. 3~4년 전부터 불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미 그의 방에는 잘 정리된 커다란 캐리어 세 개가 있었다. 그는 옷장에서 몇 벌의 슈트를 꺼내서 캐리어 위에 올렸다. 나머지는 비워둔 그의 맨션에 있었다.

‘아, 맨션 내놓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팔리네.’

가격을 좀 내려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짐을 챙기는데 누가 똑똑 노크했다.

“아들.”

지연 이바노프였다. 그녀는 짐을 싸고 있는 송선호를 보고는 아쉬운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에 우리 아들이랑 같이 있어서 좋았는데….”

대학에 진학하고부터 맨션을 얻어 독립하여 친가에서 지내지 않던 송선호였다. 올 초부터 한 계절 정도 집에 들어오더니 다시 나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짐을 차에 실으려고 사람들을 부른 송선호는 더 챙길 게 없나 방안을 다시 살피며 말했다.

“아버지는 저 보고 빨리 나가라고 성화시던데요.”

“그이도 참.”

그녀는 훌쩍 다가와서 아들의 뺨을 양손으로 잡아 자신에게 돌렸다. 얼굴을 제대로 보려고 한 것이다. 송선호는 그제야 약간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랑 아직도 화해 안 하셨어요?”

“몰라… 우리 아들 안 갔으면 좋겠어.”

“이렇게 오래 싸우시는 거 처음 봐요. 아버지가 뭐 잘못하셨어요?”

방에 있는 카우치에 어머니와 나란히 앉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 도현 씨가 너무 부러워서 나도 1년 정도 여행 가고 싶다고 했더니 네 아버지가 펄쩍 뛰는 거야.”

“아.”

걔가 지금 우리 엄마한테 무슨 바람을 불어넣은 건가. 송선호는 내심 놀라서 그렇게 반응했다. 어머니는 송선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을 지으며 창밖을 보았다.

“평소엔 별도 따다 줄 것처럼 굴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칼같이 안된대. 마음 상해서 진짜.”

“아버지가 엄마 너무 사랑하셔서 그러시잖아요. 엄마가 좀 이해해주세요.”

“나도 항상 그렇게 생각했는데… 요새는 잘 모르겠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금 송선호에게 익숙한 얼굴로 웃었다.

“우리 아들 짐 싸서 다시 나가는데 괜한 얘기했네. 그래도 이제 집에 자주 와, 응? 보고 싶으니까.”

“…네.”

짐을 옮기기 위한 차는 자율주행으로 맞춰놓고 송선호는 자신의 차를 타고 으리으리한 그의 본가에서 나와 도현 킬스버그의 집으로 향했다. 공원 같은 정원을 지나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짐을 직접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집을 올려다보며 한 번 한숨을 쉬었다. 문은 자동으로 열렸다. 도현이 집에 있었다. 그녀는 일하던 중이었는지 검은색 긴 레깅스에 헐렁한 박스티를 입고 있었다.

“왔어?”

“응.”

“짐 얼마 없네?”

“딱히 필요한 건 얼마 없어서.”

“방은 2층에 네가 쓰던 방. 알지?”

“…어.”

짐을 2층으로 다 옮기고 구겨질 양복과 다른 옷부터 빨리 걸었다. 그리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다른 사람들은?”

“응… 로웰 선생님은 술 약속 있어서 나가셨고 다니엘 씨는 합숙. 주중엔 집에 없어. 미르도 동료들이랑 술 한잔하고 온대.”

송선호는 카우치에 앉아 공중에 멀티스크린을 띄우고 글을 쓰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겉옷을 벗고 셔츠에 양복바지, 벨트 정도만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그녀를 살짝 들어 자신의 다리 사이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를 등 뒤에서 껴안았다. 그녀의 티 한쪽을 내려 어깨를 드러내게 하고 그녀의 부드러운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진짜 부드럽다… 냄새도 너무 좋아.’

그녀의 살 냄새를 맡으면서 그러고 있으니 이렇게 그녀의 집에 들어오게 된 온갖 번잡한 마음과 고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해.”

그런 마음이 절로 소리가 되어 나왔다. 도현이 멀티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응, 나도.”

“언제 끝나?”

그녀가 일을 하는 걸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송선호는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사슴 같은 목과 어깨에 천천히 입을 맞추고 있었다.

“지금 한창 클라이맥스라….”

“응…?”

클라이맥스? 그가 눈을 뜨고 멀티스크린을 보았다.

<세한 로마노프,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하얀 근육질 피부 위로 붉은 자국이 캔버스 위의 물감과 같이 피어올랐다. 그의 표정이 점점 갈수록 일그러지더니 어느 순간 짐승 같은 신음을 흘리며 움찔했다. 그 순간 그의 목에 채워진 칼라(Collar)가 확 뒤로 당겨졌다.

“세한 씨?”

“네, 아람 씨… 윽.”

“또 바닥을 더럽혔네요.”

그녀가 혀를 찼다.

“죄송합니다.”

그는 수치심에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세한 씨는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말만 그러고… 이럴 땐 어떻게 하라고 했죠?”

아람은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그의 목줄을 강하게 잡아당기면서 그의 머리를 짓밟았다.

“어지른 건 깨끗이 치워야죠.”>

글은 거기까지였다. 송선호가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응?”

도현이 대충 대꾸했다. 송선호는 그녀를 뒤에서 안은 채 그녀의 얼굴을 미심쩍게 보았다.

“이런 거 벌써….”

그 새끼랑 한 건 아니지? 그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아니, 묻고는 싶었지만 대답을 듣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도현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치채고 여상히 말했다.

“다니엘 씨랑? 했지.”

“…….”

송선호는 그녀에게 불쑥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땠냐고, 좋았냐고,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이런 걸 하는데 자신과 하는 섹스를 시시하게 생각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며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아, 젠장… 내가 이래서 못 하게 하려고 했는데. 미치겠다, 씨발….’

정말로 다니엘 스톤하츠와 하는 걸 더 마음에 들어 하면 어쩌지? 자신과 하다가 그의 생각을 한 적이 있을까? 미르 킹쉴드는? 그 새끼는 어마어마한 걸레 새끼다. 많이 해봤으니까 잘할까? 그녀가 더 좋아할까? 그렇게 생각하니 돌아버릴 것 같았다. 송선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하다가 겨우 운을 뗐다.

“나, 나는 싫지만… 절대 절대! 싫지만 만약에… 마, 만약에 네가 하고 싶으면….”

“응?”

도현이 또 성의 없이 대꾸했다.

“그, 그러니까….”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송선호는 슬쩍 겁이 났다. 등이랑 손에서 땀이 날 것 같았다. 그는 언제나 도현에게 끌리면서도 도저히 그녀를 감당을 할 재간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곤 했다. 송선호는 좀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으면….”

그는 두 손으로 깍지를 꼈다. 손이 축축했다. 도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속눈썹이 짙은 그녀의 예쁜 눈과 마주치니 마음이 더 초조해졌다. 서로의 사이에 있던 선이 사라진 뒤 느낄 수 있는 이 밀접함. 송선호는 불안하면서도 그녀에게 마음이 끌려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해도… 된다고.”

약간 주저하듯 작게 말했다. 도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리고는 웃었다.

“흐응.”

그리고 송선호의 입술 오른쪽 끝을 콱 깨물었다. 그가 움찔하며 눈을 감았다.

“한 말은 지켜.”

“…근데 너무 센 건 좀….”

송선호가 살짝 불안한 마음에 그렇게 말을 하니 도현이 빵 터져서는 웃었다.

“잘 보면 진짜 겁쟁이라니까.”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너, 너 원래 이런 취향 아니라고 했잖아…! 그, 그래서 마, 마음의 준비가….”

“뭐, 어때. 마음의 준비는 원래 차차 하는 거야. 누나가 살짝 엉덩이만 맴매해줄까? 우리 겁 많은 송선호 어린이~”

“아니!! 그렇게 말고!”

굳이 안 때려도 놀려 먹는 재미가 아주 쏠쏠한 남자다. 이러고 놀고(?) 있는데 시야에 뭔가 스쳤다. 그가 고개를 홱 돌려보니 다니엘 스톤하츠가 조용히 보랏빛 눈동자를 빛내며 현관에 서 있었다. 그와 눈을 마주친 송선호는 뭔가 섬뜩함을 느꼈다.

‘저 새끼….’

굳이 설명하자면 고깃덩어리라도 내려다보는 눈빛이랄까. 태어나 그 누구도 그에게 저런 눈빛을 보낸 적은 없었다. 송선호는 곧바로 불쾌해져 그의 눈빛을 그대로 받아쳤다. 도현이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가 곧바로 미소를 띠며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도현 씨.”

“아, 다니엘 씨. 왔어요?”

도현이 활짝 미소를 지으며 바로 송선호의 품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집에 돌아온 그를 맞이하러 현관으로 갔다. 그녀는 다니엘을 포옹하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

송선호는 정면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찌푸린 자신의 미간을 인식하고 엄지로 문질렀다. 이제부터 여기서 살 건데 이런 식이면 정말….

‘내가 들어올 때는 그냥 앉아 있었으면서 저 새끼 들어올 때는 저렇게 간단 말이야. 씨발….’

뭔 차이냐고. 그녀에 대해서는 항상 피해의식 비슷한 것에 사로잡혀 있긴 했지만, 그래도 분명히 그녀가 그들(아, 묶어서 말하기 싫다)을 대하는 태도는 각기 달랐다. 눈에 별로 띄지는 않는 것 같아도 다니엘 스톤하츠에게는 항상 저렇게 살갑다… 가장 오래 같이 있어서일까?

‘더 빨리 들어왔어야 했다….’

송선호는 그렇게 후회했다. 그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불편했다. 여기 사는 남자들 중에 가장 오랫동안, 빈번하게 이 집에 왔던 그였지만 그녀와 같이 사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송선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짐 정리할게.”

“응.”

도현이 그를 보며 그렇게 대답하고 다니엘 스톤하츠는 가볍게 묵례했다. 그가 그러니 더 배알이 뒤틀렸다. 미르 킹쉴드처럼 대놓고 싸움을 걸어도 열 받지만 저것도 열 받았다. 아니, 그녀의 곁에 다른 남자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열 받는다.

방에 들어온 송선호는 욱하고 의자의 등받이를 주먹으로 쳤다. 그들의 앞에서는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질투가 나는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씩씩거리고 있는데 잠시 뒤 밑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킬스버그~~ 나 왔어~!”

미르 킹쉴드였다. 도현이 비명 같은 탄성을 지르고 이내 까르르 웃었다.

그렇게 그날 저녁은 도현 킬스버그, 로웰 리, 어시스턴트 2명, 다니엘 스톤하츠, 미르 킹쉴드, 송선호까지 함께했다. 이 집에 이렇게 사람이 바글바글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어쩐지 배를 타고 여행을 다닐 때가 생각나기도 했다.

“건배할까요?”

“송 편집장의 입주를 축하합니다.”

도현의 말에 로웰이 그렇게 답했다. 다들 와인잔을 살짝 들었다. 그리고 식사를 시작했다. 로웰이 슬쩍 도현의 귀에 속삭였다.

“안 싸우네요.”

“그러니까요. 걱정했는데.”

다니엘이야 안 그럴 것이고 미르는 조금 아슬아슬했고 송선호는… 도현은 와인잔을 입술에 대며 남자들을 쭈욱 둘러보았다. 송선호는 표정이 좋지 않긴 했지만 품위 있게 식사를 하고 있었고 다니엘은 언제나처럼 술은 멀리하고 칼질을 하고 있었으며 미르는 식탁 밑으로도 현의 다리를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걸고 있었다.

“올해 엘 드라카도 4개월밖에 안 남았는데 우리 매출도 오르겠죠?”

“재작년부터 엘 드라카 시청률도 많이 올랐고 올해도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할 거라고 하더군요. 이슈도 많구요.”

로웰의 질문에 송선호가 그렇게 답했다. 그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이스트드래곤이 3연패를 하느냐, 웨스트이글이 드디어 우승을 하느냐, 아니면 다른 새로운 강호 팀이 떠오를 거냐….”

도현의 빚에 대해서는 도현 본인보다도 로웰이 훨씬 걱정하고 있었다. 도현은 어쨌든 이자를 막을 수 있으면 팔려가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돈을 좀 차고 있는 남자가 셋이나 있기도 했고….

“너무 걱정 마세요, 선생님. 올해 엘 드라카 끝날쯤에는 선생님 사고 싶어 했던 차도 사고 우리 여행도 마음 편하게 갔다 올 수 있을 거라니까요?”

도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런 긍정적인 사람 같으니….”

로웰이 ‘아흑’ 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도현은 정감있게 그녀의 팔짱을 꼈다.

“에이, 걱정하지 말라니까요.”

도현이 그렇게 말했다. 한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온 세상을 부정하며 누구 한 명이라도 대신 뒈지라고 염불을 외는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배짱 좋고 호~쾌하게 몇 년 만에 천억이 넘는 빚을 지는 사람이었으니 성격적으로 대척점에 있다고 봐도 좋았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로웰은 마감을 부르짖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도현도 로웰 팀을 돕기 위해 1시간 정도 2층에 있다가 그들과 술까지 한 잔 더 하고 1층으로 내려왔다.

‘아, 이제 씻고 자야지.’

도현이 그렇게 어깨를 주먹으로 툭툭 두드리며 계단을 내려오는데 카우치에 두 명의 남자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도현이 2층에서 내려오자 움찔하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한 명은 다니엘 스톤하츠였고 한 명은 송선호였다. 둘 다 목욕재계를 한 것인지 옷차림이 달라져 있었다.

송선호는 빳빳하게 다림질이 된 고급스러운 셔츠에 짙은 네이비색 바지와 벨트를 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단추를 두 개 풀고 소매를 팔뚝까지 걷었다. 머리도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안경은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그는 운동을 꽤 열심히 했기 때문에 다니엘보다도 조금 더 근육이 큰 편이었다. 글래머러스하고 예쁜 몸에 잘생긴 얼굴을 한 그였다. 약간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검은색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그의 모델같이 늘씬한 몸매가 은근한 실루엣을 드러냈다. 새카맣고 매끄러운 그의 머리카락과 함께 흑표범처럼 윤기가 흘렀다. 미의 신이 심혈을 기울여 조각한 듯한 얼굴이 몹시도 아름답다. 책을 읽고 있던 그의 보석 같은 눈동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마력을 머금은 그의 자안(紫眼)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요요한 기운까지 느껴졌다.

그들이 오늘 밤의 간택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도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엄마가 지금 날 보면 뭐라고 하실지 궁금하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아리송한 미소를 지었다. 아, 누구 데리고 갈까. 그녀는 그대로 허리에 한쪽 손을 댄 채 둘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서로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잘 빠진 두 남자의 명과 암을 비교하며 잠깐 그렇게 서 있었다.

“음, 그럼….”

도현의 목소리가 고요함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때 누가 2층에서 잽싸게 내려왔다.

“엇.”

사태를 파악한 그는 얼른 도현의 허리를 낚아챘다. 빛나는 플래티넘 블론드, 환한 아이스블루의 눈동자, 신이 빚어주신 끝내주는 몸매! 미르 킹쉴드였다. 그는 목에 수건을 두른 채 상체가 다 드러나 있었다. 그는 씨익 웃으며 도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매일 나랑 같이 자기로 했지?”

“앗, 미르…! 잠깐만요.”

“으으응.”

그는 한 팔로 도현의 엉덩이를 받쳐 안아 들고 도현의 가슴에 얼굴을 마구 비볐다.

“하하하. 간지러워요, 미르!”

그리고는 그는 그녀의 입술에 쪽쪽 입을 맞추며 침실로 빠르게 걸어갔다. 쾅. 그녀의 침실문이 닫혔다. 그녀는 그대로 미르 킹쉴드라는 바람에 휩쓸려 가버렸다.

“…….”

“…….”

목이 빠져라 그녀를 기다렸던 남자 둘의 고개는 도현을 따라가다 닫힌 침실문에 고정되었다. 송선호는 ‘으윽’ 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대로 뚫어져라. 침실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씨발. 씨발 씨발 씨발! 빨리 저 새끼부터 제쳐야 돼!!’

‘…미르 킹쉴드를 지금 죽이면 왜 안 되는 거였지?’

*

“으음~ 하, 냄새 너무 좋아. 나 오늘 그냥 빠져버릴까?”

“하하하. 안 돼요. 열심히 일해서 내 빚 다 갚아준다더니.”

“아, 그건 그럴 건데~ 그만큼 내가 너랑 같이 있고 싶다는 거지~”

“하아, 저두요~”

도현은 너무 웃어서 머리가 멍했다. 배와 가슴도 뻐근하다. 미르가 도현의 어깨와 데콜테에 얼굴을 비비며 내려가 그녀의 배에 바람을 불었다. 도현이 또 까르르 웃었다. 그는 더 내려가서 그녀의 배와 허벅지 사이를 자신의 코끝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녀의 미끈한 다리를 한 손으로 쓱 세우고 허벅지 안쪽에 입을 맞췄다.

아침에 같은 침대에서 깨어 같이 침실에서 나오다가 미르 킹쉴드가 도현을 카우치에 쓰러뜨렸다. 예쁘고 섹시한 슬립을 입고 있는 그녀가 너무 예쁘다면서 말이다. 도현은 그가 좋았다. 그는 작게 잘라놓은 딸기타르트 같은 남자였다. 딸기타르트는 도현이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로 한입에 쏙 넣으면 너무 맛있어서 금방 기분이 좋아진다. 그는 부담스럽지 않았고 눈치가 빨랐다. 가볍게 장난을 걸어오면 넘어가게 됐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남자가 어떻게 하면 여자의 기분을 더 좋아지게 하는지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으….”

도현은 미르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눈을 감았다가 천장을 보며 눈을 떴다. 아까 전엔 없었던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식사하시죠.”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미르 킹쉴드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도현은 ‘으응…’ 하고 신음을 또 흘렸다가 미르의 어깨를 발로 밀어내었다.

“아, 그만… 나중에 해요.”

“쓰읍. 뭐, 아쉬운 건 너지.”

미르는 고개를 들고는 도현을 향해 도발적으로 씩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가뿐하게 일어나서 맹수처럼 기지개를 켰다. 그는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니 확실히 아쉬운 건 도현 킬스버그가 되었다. 도현은 슬립을 내리며 살짝 입맛을 다셨다. 몸을 일으켜 카우치에 앉으니 저쯤에 얼굴이 퍼레진 송선호도 보였다. 그는 도현과 눈이 마주치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난… 출근할게.”

그는 아침도 먹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로웰이나 어시들은 여전히 자는 것 같았고 도현은 여느 때처럼 남자 둘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

퇴근은 보통 미르 킹쉴드, 송선호 순이었다. 이스트드래곤은 요새 주 5일 단기합숙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월요일에 도쿄로 날아간 다니엘은 금요일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송선호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다행이 아니었다.

“나 왔….”

현관으로 막 들어온 송선호는 곧바로 보인 광경에 굳어버렸다. 미르 킹쉴드가 또! 도현을 카우치에 깔아뭉개고 딥키스를 하고 있었다. 둘은 송선호가 집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때 로웰이 2층에서 배를 긁으며 내려와 송선호의 등을 한 대 툭 쳤다.

“적응해요. 맨날 저래요.”

그리고 그녀는 먹을 걸 가지러 부엌으로 갔다. 그러자 로웰의 기척을 알아챈 도현이 미르의 얼굴을 잡아떼며 말했다.

“배고프세요? 금방 제가 뭐 가져가려고 했는데.”

“괜찮습니다~ 하던 거 마저 하십쇼~”

그러자 미르가 그녀의 귀를 깨물며 속삭였다.

“계속하자. 하던 거 마저 하라잖아.”

“하아, 집에만 들어오면 진짜. 나 일해야 해요.”

“으으응. 하지 마. 하지 마. 나랑 있자, 응?”

“하하하. 아, 미르… 으음.”

그러다가 도현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누군가 있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녀와 송선호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턱에 입술을 비비던 미르도 고개를 들었다. 두 쌍의 눈이 송선호를 향했다.

“퇴근했어? 왜 그러고 있어?”

“…….”

…다니엘 스톤하츠 이 새끼는 도대체 이걸 어떻게 견디고 살았단 말인가. 아니, 클럽에서 합숙하는 새끼는 일주일에 이틀만 이 꼴을 보면 되지만 송선호는 앞으로 일주일, 7일을 매일매일 이 꼴을 봐야 한다는 말일까.

‘…나랑 함께 없었을 땐 항상 이러고 있었다는 거지….’

그 사실을 외면하고 싶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 집에 들어오지 않은 거겠지.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래도 양심과 예의가 있는 놈이었다. 미르 킹쉴드는 얌체같이 선수를 쳐서 밤낮으로 도현을 낚아가곤 했다. 송선호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항상 그렇게 일찍 집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집에 들어오면 그녀는 이미 그 새끼의 품에 있었다. 그의 품에서 웃고 있는 그녀를 어떻게 끌어낼 수가 있겠는가. 그녀가 싫어할 것이고 화를 낼 것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집에 들어온 지 고작 며칠, 송선호는 위염이라도 걸릴 것 같았다.

이틀 뒤 그녀의 마감날 집으로 외근을 왔다. 대낮이라 미르 킹쉴드는 게헨-세나에 있어서 집에 없었다. 그녀는 송선호가 온 걸 보고 멀티스크린에서 눈을 뗐다.

“다 했어. 보냈는데 봤어?”

“응… 그냥 말로 설명할게.”

송선호는 이번에 업로드 할 연재분에 대해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매출 통계에 대해서도 잠깐 얘기했다.

“역시 엘 드라카 푸쉬가 없으니까 매출 유지하기가 힘들긴 하구나.”

“그렇지….”

그리고 도현은 멀티스크린을 옆으로 밀고 기지개를 쭉 켰다. 송선호는 울렁거리는 얼굴로 그런 도현을 보다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송선호?”

“…나 사랑해?”

도현은 송선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피식 웃고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사랑해.”

송선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는 좀 괴로운 표정으로 다시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송선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밤엔… 같이 자도 돼?”

“아… 미안. 미르가 좀….”

도현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싸우지 않기로 했으니 미르는 송선호나 다니엘에게 더 이상 시비를 걸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스킨십이 더 잦아졌다. 원래도 잦았는데 훨씬 잦아졌다. 예전에 로얄팰리스 파티에서도 그랬듯이 다른 수컷들이 있으니 더더욱 과시를 하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것이라고.

“오늘 같이 자자.”

도현이 그렇게 말했다. 누누이 말했다시피 남자를 셋이나 건사하고 살려면 도현도 나름대로 신경 써야 했다. 역사책을 봐도 알겠지만 왕이 처첩에게 적당히 총애를 나눠줘야 서로 분란이 없는 법이다.

도현이 그렇게 말해줘서 송선호는 마음이 조금 놓였다. 송선호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을 느끼며 다시 물었다.

“솔직히… 누가 제일 좋아?”

“셋 중에?”

“어….”

“네가 제일 좋다고 말해줄까?”

“…어.”

“하하하.”

도현은 웃었지만 송선호는 심각했다. 고개를 든 그의 표정이 제법 심각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니까.”

도현은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유들유들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송선호도 결국 한숨을 쉬며 표정을 풀 수밖에 없었다.

“난 왜 널 좋아하는 걸까.”

그는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네가 본 여자들 중에 내가 최고니까.”

그녀가 말했다. 송선호는 약간 놀라서 그녀를 다시 보았다. 그녀는 씨익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넌 네가 나한테 최고의 남자라고 생각하니까 나 보고 자꾸 너 선택하라고 하잖아.”

도현이 말했다.

“네가 날 그렇게 생각하니까 날 선택한 거구나, 싶었어.”

“…….”

“내 말이 맞지?”

도현이 그의 목에 양팔을 걸쳐 손가락이 성기게 깍지를 꼈다. 그리고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그의 눈을 올려다보니 송선호는 미간을 살풋 찌푸렸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점점 송선호를 잘 파악해갔다.

‘…전부 다 꿰뚫어 보면 내가 시시해지는 게 아닐까.’

그런 걱정마저 들 정도였다. 지금까지 그녀가 남자와 사귀고 헤어지는 패턴을 뒤돌아보면…. 송선호는 살짝 헛기침을 하고는 인상을 팍 썼다.

“아니야.”

“아니긴.”

그녀가 먼저 입을 맞췄다. 송선호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입맞춤에 응했다. 그렇게 30분 정도 더 있다가 그는 회사로 돌아갔다. 그리고 퇴근할 즈음엔 회사를 나설 때부터 심기일전하여 마음을 다잡았다.

‘해달라는 건 다 해주자. 기분 좋게. 확실하게.’

송선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신음을 흘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기대와 불안과 흥분이 마구 교차했다.

‘아… 진짜… 태어나서 엄마한테도 맞아본 적 없는데….’

그리고 집에 도착했다. 집안은 조용했다. 송선호는 도현의 침실 앞에서 옷매무새를 바로잡고는 심호흡을 한번 했다. 그리고 똑똑 노크를 했다.

“도현아.”

한 번 더 노크를 했다. 답이 없었다. 어디 나갔나? 송선호는 살짝 그녀의 방문을 열었다. 아직 저녁 7시밖에 안 됐는데 그녀는 이미 자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침대 위엔 미르 킹쉴드가 같이 누워있었다. 송선호가 문을 열자 언제 잤냐는 듯 눈을 뜬 미르는 도현을 껴안은 팔에 힘을 주며 씨익 미소만 지었다.

“…….”

도현이 그와의 약속을 잊어버렸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대체로 미르 킹쉴드가 송선호보다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빨랐다. 그가 오늘 도현과 송선호의 약속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의 미소에서 그가 자신과 도현 사이를 훼방 놓기 위해 귀신같이 그녀를 가로챘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죽여버리고 싶다.’

송선호는 때때로 그녀가 만나는 남자들에게 살의를 느끼곤 했지만 정말 저 걸레 새끼는 지금 당장 죽여버리고 싶었다.

*

잠깐씩 다른 놈들과 마주치는 것만 해도 신경질이 뻗치곤 했는데 같이 살기 시작하니 돌아버릴 것 같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저 개 같은 걸레 새끼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송선호는 디바이스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전화 한 통, 아니, 문자 한 통이면 됐다. 그러면 미르 킹쉴드에 대한 추악한 과거가 낱낱이 밝혀질 것이고 덤으로 다니엘 스톤하츠도 날려버릴 수 있었다. 도현이 아무리 배포가 큰 여자라 하더라도 자기가 만나는 남자들에게 그런 과거가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불쾌한 마음이 안 들 수 없을 것이다.

그녀와 사귀게 되고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국내외의 여러 회원제 레스토랑을 같이 즐기고 여행을 가고 사랑을 나누고… 그녀와 단둘이 시간을 보낼 때마다 구름 위에 둥둥 뜬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행복했다. 다른 것은 모두 잊을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말대로 그에게 도현 킬스버그는 최고의 여자였다. 그 어떤 누구와 함께 있더라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이 많은 남자들 중에서도 최고로 인정하고 선택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 선택은 도현이가 하는 건데. 그건 맞는데. 맞긴 한데. 그래도… 그래도!!’

그 망할 걸레 새끼가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송선호는 말끔한 자기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책상 위에 둥둥 떠 있는 스크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갈등에 휩싸인 눈빛으로 그걸 한참 보고 있다가 결국 또 화면을 껐다.

그렇게 금요일이 되니 다니엘 스톤하츠가 돌아왔다. 솔직히 송선호는 미르 킹쉴드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에 대한 생각을 전혀 못 하고 있었다.

“도현 씨.”

“다니엘 씨, 왔… 미르! 떨어져요!”

그녀는 엉겨 붙어오는 미르를 단박에 밀어냈다. 미르가 발끈했다.

“왜!”

“다니엘 씨 왔잖아요. 인사 좀 하게 비켜요.”

그래도 그가 들러붙으려고 하자 도현이 눈빛으로 경고했다. 그제야 미르는 쳇 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다니엘과 다정하게 해후했다.

“고생 많았어요, 다니엘 씨.”

그리고 둘은 무슨 데이트를 하는 것인지 그대로 이틀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송선호는 일주일도 되지 않아 그녀의 집에 들어온 것을 절절히 후회했다.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속이 쓰렸다. 송선호는 집에 들어오면 식음도 전폐하고 자신의 방에 있는 비싼 의자에 늘어져 누워 끙끙거렸다.

‘일단 도현이 데리고 어디 나가자. 어디 가자고 하면 갈까….’

역시 최대한 이 집에서 멀리 떨어뜨려야 했다. 일주일에 5일은 미르 킹쉴드가, 주말은 다니엘 스톤하츠가 그녀를 거의 24시간 독점하고 있었다. 이미 송선호보다 먼저 이 집에서 살기 시작한 그들은 나름대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다 보니 올드뉴비(?)로 도현 킬스버그 스윗홈에 데뷔한 송선호는 속앓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일도 손에 안 잡힐 지경이었다.

그래서 송선호는 이를 갈며 벼르고 벼르다가 일요일 오전 그녀가 다니엘 스톤하츠와의 2박 3일(씨발) 데이트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녀에게 비장의 카드를 내밀었다.

“프라하 가자.”

그는 여행 책자를 한 손에 들고 부채처럼 펼쳤다. 그림으로 그려도 이보다 못할 아름다운 체코의 수도가 찍힌 사진들이 보인다. 도현은 ‘어머’ 하며 그의 손에서 책자를 하나 빼 들었다.

“너무 예쁘다. 프라하는 한 번밖에 못 가봤는데.”

“진짜? 그럼 가자.”

도현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예쁜 갈색 눈동자로 가만히 책자를 넘겨보았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캐리어를 들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가다가 그걸 발견하고 가만히 그들을 보고 있었다. 도현이 빠르게 책자를 넘겨보면서 카우치에 앉았다. 그녀는 귀 뒤로 남색 머리카락을 넘기며 여행 책자를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송선호는 얼른 그녀의 옆에 딱 붙어 앉았다. 오늘따라 또 예쁘기는 왜 이렇게 예쁜지. 송선호는 초조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유럽 도시들 중에 제일 예쁘다잖아. 구시가지는 걸어서도 전부 돌아볼 수 있고 맥주도 맛있대.”

그녀나 그나 맥주보단 와인이나 양주파지만. 송선호는 등받이에 팔꿈치를 대고 그녀를 팔로 약간 감싸듯 했다.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얼굴을 대고 그러고 있으니 그녀가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한숨처럼 말했다.

“가고 싶다… 꼴레뇨 맛있게 하는 집 아는데….”

그녀의 긴축재정이 시작된 지 어언 2년…. 저번에 배를 타고 3주 여행을 간 것도 사실 전과 비하자면 매우 검소하게 다녀온 것이었다. 그녀는 송선호가 한국이나 일본, 스위스의 회원제 레스토랑에 데려가 줄 때마다 정말 좋아했다. 그런 곳은 도현이 아주 많이 벌 때도 그렇게 갈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다 알아놨어. 내일 가자. 어때?”

그러자 도현이 확 하고 흔들리는 얼굴로 송선호를 보았다.

“마감은 어떡해?”

“지금 하면 되지.”

“아, 빨리해야겠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송선호가 작업용 멀티 스크린을 찾으러 서재로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덧붙여 말했다.

“예약한다? 2박… 아니, 3박 4일?”

“응!”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바로 앉는데 다니엘 스톤하츠와 눈이 마주쳤다. 훗. 송선호는 드디어 웃었다.

“짐 싸러 가야겠다.”

송선호도 카우치에서 일어났다. 그가 암만 바쁘다고 해도 그는 계열사를 몇 개나 거느린 큰 플랫폼 회사의 사장이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나는 재벌 3세, 저 새끼들은 월급쟁이!’

사회적 계급이 하늘과 땅 차이다. 그들이 송선호만큼 운신과 금전에 자유로울 리가 있겠는가. 그는 드디어 여유롭게 코웃음을 치며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캐리어를 챙겨야 했다.

도현은 간신히 수요일 마감을 미리 끝내고 프라하로 날아갔다. 일요일도 마감이었기 때문에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의 프라하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예쁘다.’

언제든 아름다운 걸 볼 수 있고 그걸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삶… 그런 삶과 그러지 못했던 삶을 다 살아본 도현은 그래서 이 순간이 더더욱 마음에 와닿았다. 언젠가처럼 그녀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그런 아름다운 광경이다. 서서히 내려오는 석양에 휩싸인 프라하 성을 보며 도현 킬스버그는 홀로 카를교에 서 있었다.

요즘 너무 주변이 부산했다. 지나다니는 행인들은 어차피 풍경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렇게 혼자 고요히 프라하를 즐기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송선호는 금방 체코의 명물이라는 맥주를 사러 갔다. 붉은 낙조 속에서 환한 조명이 새하얀 프라하 성을 환상처럼 꾸몄다. 도현은 가만히 그것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 전에 봤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2년 전 프라하.

[네가 어디에 있어도, 어떻게 살고 있더라도… 난 평생 널 사랑할 거야.]

얼마 전 스위스.

[오랜만이야.]

그 순간 도현은 홀린 듯이 디바이스를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연락처를 찾았다. 연락처에 등록된 사진 속의 남자가 그녀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디바이스를 귀에 댔다.

마음을 준비할 적당한 시간을 맞춘 듯 적절한 때 연결음이 끊기고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상대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도현은 서늘한 바람 속에서 프라하 성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나 지금 프라하야.”

[…카를교?]

그는 그렇게 대꾸했다.

“응. 그때 거기.”

도현이 살짝 웃었다.

“여긴 여전하네.”

[난 그때 이후로 한 번도 못 갔어.]

도현도 그랬다. 그래서 물었다.

“왜?”

[글쎄… 왜일까.]

도현은 난간에 팔꿈치를 대고 약간 몸을 기댔다. 전화 너머의 남자, 에반 블랙이 부드럽게 웃음소리를 냈다.

[취리히에선 인사가 너무 짧았지. 2년만인데.]

“맞아.”

각자 다른 상대를 데리고 왔는데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를 본 순간, 생각보다도 많은 감정을 느껴 깜짝 놀랐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한 게 신기할 정도로.

“2년이나 만났는데 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구나, 싶었어.”

[왜?]

“스위스에서 은행일 하는 줄은 몰랐지.”

그러자 에반이 전화기 너머에서 부드럽게 웃음소리를 냈다.

[생각보다 시시한 일 한다고 할까 봐.]

“하하.”

도현도 웃었다. 그녀는 살짝 추억에 잠겨 나른하게 말했다.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너랑 다녔던 데가 너무 많아. 같이 했던 것도 많고.”

에반이 또 웃었다. 그가 대꾸했다.

[거울 보면 네 생각이 나. 내 눈동자가 제일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 칵테일을 마실 때도 그래. 스위트 마티니 안 마셨는데 이젠 스위트 마티니 밖에 안 마셔.]

“정말?”

[응.]

“그런데 왜 우리 그 이후로 한 번도 안 봤을까?”

[글쎄….]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좋은 목소리, 여유로운 말투….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그가 어떤 얼굴로 그녀를 보며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는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도현이 물었다.

“나 아직도 사랑해?”

에반이 답했다.

[영원히.]

이런 걸 어떤 기분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이 남자는 때때로 도현에게 이런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남자였다. 말로 설명하기 어쩐지 벅찬 그런 느낌. 그대로 서로 아무 말없이 전화기 너머에 존재하는 머나먼 서로를 느끼면서 잠깐 시간을 보냈다. 도현은 프라하 성을 다시 보았다. 그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도현은 아무 말없이 그대로 통화를 종료했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앞에 맥주캔을 따서 놔주었다. 송선호가 돌아온 것이다.

“전화하고 있었어?”

그의 표정을 보니 그녀가 누구와 통화를 했는지는 짐작 못 한 모양이었다. 도현은 캔을 들어 정말 부드러운 맥주를 한 모금 하며 송선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관찰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약간의 기대감도 섞였을까.

아직 4월, 저녁이 되니 좀 쌀쌀해졌다. 송선호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도현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걸쳐주었다. 오늘 도현은 전에 송선호가 사준 봄나들이용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옷은 화사하고 머리 스타일은 차분해서 더 고급스럽다. 그녀는 송선호의 코트를 살짝 여미며 물었다.

“넌 내가 앞으로 뭐 하면 좋을 것 같아?”

“앞으로?”

“응.”

송선호는 대답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답했다.

“빚부터 갚아야지.”

“그 뒤엔?”

“…나랑 결혼하면 좋고.”

도현은 살짝 인상을 썼다가 못 말린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몸을 살짝 돌려 그의 쪽을 보며 한쪽 팔을 난간에 기댔다.

“결혼 안 해주면 어쩔 건데?”

“…몰라.”

송선호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가 그녀의 눈을 다시 보았다.

“그래도 같이 있고 싶어.”

도현은 미소를 지으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오늘의 송선호는 고급스러운 윤이 나는 새카만 셔츠에 새카만 슈트 바지에 벨트도 검은 가죽에 어두운 금색 금속으로 된 것이었다. 머리도 약간 짧게 잘라 깔끔하면서도 섹시한 느낌이 났다. 그는 약간은 불만스러우면서도 초조한 듯이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넌?”

“아, 남자가 계속 그렇게 초조해하면 매력 없다.”

도현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프라하 성을 보았다. 당연히 송선호는 더 초조해했다. 그는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같이 프라하 성을 보았다. 그리곤 못 참고 다시 말했다.

“사랑한다며?”

“넌?”

“…사랑해.”

그리고 말없이 석양빛을 받는 프라하 성의 첨탑과 강을 보다가 호텔로 돌아갔다. 그녀가 취리히에서 말한 유럽의 낭만을 즐기며 발길이 닿는 대로 다녔다.

“…미안. 이번엔 내 잘못이다, 진짜.”

그러다 결국 일요일 마감을 펑크 내고 말았다. 송선호가 사과했다. 그가 호승심을 참지 못하고 그녀를 유럽까지 또 데리고 간 것이었다. 휴재 공지를 내고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도 들떠서.”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닌데.”

“아니….”

송선호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는 실수했다는 생각에 엄청 불안해졌다. 그녀는 휴재 공지를 앞에 띄우고 난 뒤 글을 쓰기 위해 작업창도 켰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받는 상태라 그런지 슬럼프 때처럼 글이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송선호는 잘하고 있던 그녀의 리듬을 자신이 괜히 망친 것 같아 더욱 마음이 불편해졌다. 송선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억지로 하지 말고 차라리 다음 수요일 것도 쉬자. 건강 문제라고 하고… 너 1년 동안 열심히 했잖아.”

“아냐, 써야지.”

도현은 그렇게 멀티스크린 창을 보며 골몰하고 있었다. 송선호는 점점 표정이 심각해지다가 불쑥 말했다.

“빚 남은 거 일단 다 갚자.”

“응? 무슨 말이야? 돈 없다며.”

“만들면 돼.”

“또 빚져서 빚 갚게? 그러다 나 입 싹 닦으면 어떡하게?”

도현은 대수롭지 않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드디어 좀 뭔가 떠오르는지 간단하게 아이디어를 적기 시작했다. 송선호는 심각하게 말했다.

“너 고생하는 거 싫어. 지금처럼 타이트하게 일 안 해도 돼. 이자도 훨씬 줄 거고… 아니, 그냥 신경 쓰지 마.”

송선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현이 그를 올려다 봤다.

“야, 하지 마. 괜찮아. 이럴 때도 있는 거지.”

“신경 쓰지 말라니까.”

“야, 뭘… 야!”

그가 그대로 현관으로 향하자 도현이 그를 따라갔다.

“네가 갚아줘도 어차피 너한테 갚아야 하는 건 똑같아. 괜히 부담될 정도로는 하지 마.”

“나한테 안 갚아도 돼.”

“뭐?”

“안 갚아도 돼. 내가 진짜 너보고 갚으라고 할 줄 알았어?”

송선호가 명품 구두를 신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인상을 썼다.

“선물은 얼마든지 받아도 너한테 돈은 안 받아.”

“그럼 천천히 평생 갚아.”

“너한테 팔려가기 싫다니까.”

“내 여자가 돈 때문에 고생한다는 게 말이 돼? 평생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우아하게 다이아몬드나 모아. 나간다.”

“송선호!”

그는 뭔가에 꽂힌 모양이었다. 도현이 붙잡는데도 그대로 나가버렸다.

도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온 송선호는 곧바로 집에 주차된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아 아버지의 회사를 목적지로 입력하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세 번쯤 전화를 했는데도 아버지는 전화를 받지 않으셨다. 송선호는 곧바로 비서에게 연락을 했다.

“김 비서, 지금 아버지 미팅 중이신가?”

[아닙니다. 오늘 스케쥴 없으신대요?]

“뭐? 회사에 출근은 하셨지?”

[아뇨. 자택이십니다.]

비서가 있으니 좋은 점은 원래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말 한마디만 하면 바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송선호는 번쩍번쩍한 아버지의 회사 건물에 거의 다 왔다가 다시 돌아갔다.

‘아버지가 출근도 안 하시고 왜 집에 계시지?’

송선호는 자신의 디바이스로 자신의 자산 현황을 확인하며 집으로 향했다. 송선호는 현재 쓸 수 있는 현금이 거의 없었다. 저번에 도현의 빚 4분의 1가량 갚아준 것도 주식담보대출을 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제 주식담보대출을 하려고 하면 송선호가 5% 이상을 확보하고 있는 주식을 건드려야 했는데 그러면 공시가 뜬다. 저번엔 그냥 넘어갔다 해도 그런 공시가 뜨게 되면 정말 아버지가 죽이려고 들지도 모른다. 벌써 4월 중순이라 배당금이 들어온 상태였지만 그걸 전부 쓰려면 아버지랑 상의가 필요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아버지의 서재로 갔다.

“아버….”

검게 칠을 한 향기로운 마호가니 나무로 만든 클래식하고 커다란 책상 위에는 맥칼란이 세 병이나 비어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도 책상에 얼굴을 처박고 계셨다.

“아버지!”

그는 깜짝 놀라서 송영제에게 다가갔다.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다행히 그는 잠든 것뿐이었는지 술 냄새를 잔뜩 풍기며 눈을 떴다. 그는 며칠이나 면도를 하지 않은 것인지 얼굴이 까끌까끌했다.

“아버지 여기서 주무신 거예요?”

송선호는 황당하기까지 한 어조로 그렇게 물었다.

“선호야… 언제 왔냐….”

송영제는 숙취 때문에 괴로워하며 머리를 붙잡았다. 송선호는 인공지능을 이용해 사용인에게 숙취해소제를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송영제는 그것보다 더 빠른 숙취해소법을 택했다. 그는 맥칼란 스카치를 한 모금 마셨다.

“아버지… 무슨 일 있으셨어요?”

설마 할머니한테 밉보이셨나…. 아버지가 빈 잔에 40도짜리 양주를 콸콸 부으니 송선호가 그의 손에서 병을 빼앗았다. 그는 양 손바닥으로 두 눈을 꽉 눌렀다. 송선호는 손에 양주병을 든 채로 다시 문으로 다가가서 집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돌아봤다.

“엄마는요?”

아들의 질문에 그는 잠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렇게 있다가 두 손을 얼굴에서 뗐다. 그리고 크리스탈 잔을 잡고 다시 양주를 크게 한 모금 삼켰다.

“…지연이… 그러니까 너희 엄마… 너희 엄마가….”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가 저러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송선호는 다시 술을 벌컥 마시는 그에게서 잔까지 뺏기 위해 다가갔다. 그리고 송영제가 세상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전하듯 말을 이었다.

“집을 나갔다….”

“네?!”

“이, 이혼하재….”

“네에?!!!”

“선호야… 아빠 이제 어떡하면 되냐? 내가 지연이 없이 어떻게 살아….”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고급스러운 가죽 의자가 뒤로 젖혀지며 끼익 소리를 냈다. 그게 마치 고통스러운 신음처럼 들렸다. 송선호는 예상치 못한 소식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 바람피웠어요?”

“내가 미쳤냐? 그러면 억울하지라도 않겠다.”

아버지는 역정을 내셨다. 송선호는 그런 아버지를 보다가 디바이스를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

“엄….”

지연 이바노프가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송선호는 그녀에게 무슨 얘기를 할 새도 없이 아버지에게 바로 디바이스를 뺏겼다.

“지연아!! 내가 잘못했으니까 일단 집에 와서…!!”

뚝. 지연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송영제는 통화가 끊긴 디바이스의 화면을 보다가 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선호니?]

“지연아, 일단 내 말부터 들어봐. 응? 내가, 내가 다시 잘할 테니까….”

뚝. 다시 그녀는 전화를 바로 끊었다. 그 뒤에는 아무리 전화를 다시 걸어도 받지 않았다. 송영제는 그게 그렇게 믿을 수가 없는지 자꾸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당황한 송선호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네, 네 엄마 설마 바람난 걸까? 어?”

그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송선호는 그의 손에서 디바이스를 뺏어 다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보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손에서 놓지를 않으셨다.

“아버지.”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되잖아. 그게 아니면 왜 갑자기 집을 나가!”

송영제는 그대로 계속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아버지의 상태가 영 아니라서 송선호는 문밖으로 나가 사용인에게서 숙취해소제를 받아서 다시들어왔다. 그는 이미 텅 빈 잔에 숙취해소제를 따랐다.

“아니… 천천히 설명 좀 해보세요. 저 집 나오기 전에는 괜찮으셨잖아요.”

“그랬지? 그랬잖아? 너, 너 다시 집에 들어와라, 어?”

“제가 집을 나왔다고 엄마도 따라 나오신 건 아닐 거 아니에요. 진짜 아버지 뭐 잘못한 거 없으세요?”

“아니… 진짜, 진짜 별거 없었어. 그냥 평소대로, 평소대로 지냈는데….”

“그래도 부부 싸움이라도 하고 나가도 나가셨겠죠. 잘 생각해보세요.”

“선호야, 너도 알잖아. 아빠 요새 바쁜 거… 출장도 많이 다니고… 회장님께도 자주 가고… 갑자기 그제 아침에 보니까 이혼서류 놔두고 집을 나갔어… 연락도 안 받고… 흐윽.”

송영제는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눈물을 확 흘렸다. 아버지가 우는 건 머리털 나고 처음 봤다. 송선호는 정말 당혹스러워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창밖을 보며 그가 감정을 좀 추스를 때까지 기다렸다.

“…….”

“…….”

송영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대고 꼼짝도 못 하고 있었고 송선호는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그 이혼서류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 몇 장과 고급스러운 편지봉투 하나를 주웠다. 찢어진 종이는 아버지 말대로 이혼서류였고 봉투는 열어보니 카드가 한 장 들어있었다.

<이혼부터 하고 얘기하면 좋겠어요.>

송선호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미심쩍은 얼굴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진짜 바람피우신 거 아니에요?”

“아니라니까!!”

그가 버럭 성질을 냈다.

‘배당금의 배 자도 못 꺼내겠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갑자기 어머니가 집을 나가시다니. 송선호는 책상 위에 버려져 있는 자신의 디바이스를 가져왔다.

“제가 전화해볼 테니까 가만히 좀 계세요.”

송선호는 먼저 어머니에게 문자를 남기고 전화를 걸었다. 처음 걸었을 때는 받지 않으셨고 두 번째 걸었을 때야 받았다.

[선호니?]

“네.”

[집이구나.]

“네.”

[네 아빠 옆에 있니?]

“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괜히 우리 아들만 가운데서 입장 난처하게 됐네….]

“갑자기 집은 왜 나가셨어요? 아버지 지금 술 드시고 울고….”

“야…!!”

“엄마도 사정이 있으시겠지만… 그래도 아버지랑 얘기부터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버지 저러시는 거 처음 봐요.”

[…….]

“아무리 그래도 아무 설명도 없이 이러시면….”

[설명을 안 한 게 아니라… 설명해도 너희 아빠는 이해 못 해.]

“엄마… 그럼 저한테라도 말씀해주시면 안 돼요?”

[그냥… 엄마랑 아빠 사이 일이니까 넌 신경 쓰지 마. 너도 다 컸으니까.]

“엄마….”

[밥 잘 챙겨 먹고. 다음에 연락하자.]

“엄마 그럼 지금 어디 계세요? 이모 댁이에요?”

[다음에 통화해.]

그리고 지연은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송영제가 물었다.

“어디래?”

“말씀 안 하시는데요….”

“아!”

아버지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모양이셨다. 송선호는 그를 위로했다.

“아직 이틀밖에 안 됐는데… 집에 계시는 게 답답하셨나 보죠. 얼마 전에 여행도 가고 싶다고 하시던데.”

“여행… 여행 가고 싶으면 가면 되지 이혼은 왜 하자고 하는 거냐고, 왜.”

송영제가 그렇게 말했다. 그는 송선호에게 손짓했다.

“지연이한테 다시 전화해봐, 어? 물어봐. 언제 들어올 건지.”

“…지금요? 엄마 제 전화도 별로 안 반기시는 것 같은데….”

“해.”

송선호는 아버지의 등쌀에 떠밀려 어머니에게 전화를 두 통 정도 더 해야만 했는데 그 뒤부터 어머니는 송선호의 전화도 받지 않으셨다. 통화연결음만 계속 나고 연결되지 않는 디바이스 화면을 아버지에게 보여주니 아버지는 아주 역정을 내셨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란 게 도움이 안 된다, 도움이.”

“죄송합니다….”

송선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지만 저런 상태의 아버지와 무슨 입씨름을 하겠는가. 이 나이가 되어서 싸움 난 부모님 사이에 끼이는 처지가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아니, 애초에 금실 좋기로 유명한 부모님이 이렇게 싸우는 모습을 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어머니는 별로 달라진 것 없이 의연하신데 아버지가 이러실 줄이야.

‘그냥 쓰자… 아버지 신경도 못 쓰실 것 같은데.’

어머니의 태도를 보니 생각보다 오래갈 것 같다. 송선호는 그렇게 혼자 결론을 내리고 슬슬 자리를 일어나려고 했다.

“아버지, 그럼 전 이만….”

“어디 가게?”

“전 제 집 가야죠.”

“가지 마. 네 엄마 돌아올 때까지 집에 있어.”

“네? 저 있다고 엄마가 오실까요….”

송선호는 그대로 아버지한테 붙잡혔다. 아버지는 다음 날도 회사에 병가를 내고 집에 틀어박히셨다. 시간이 갈수록 아버지는 더더욱 괴로워하셨다. 만약 서로 남이었다면 경찰에 잡혀갈 정도로 연락을 시도하고 있었다.

<얘기는 서류에 도장 찍고 해요.>

어머니는 그렇게 문자만 보내셨고 아버지는 그 길로 다시 술을 위에 쏟아 붓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상대하던 송선호는 만 하루 만에 백기를 들었다.

<엄마 저 좀 살려주세요.>

송선호는 밤새도록 아버지와 술을 마시고 서재에서 뻗었다. 일어났다가 다시 술을 마시고 뻗은 아버지와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셀카로 찍어서 어머니께 보냈다. 이쯤 되면 아들이 불쌍해서라도 어머니께서 돌아오시지 않을까 싶었다.

“어, 아버지.”

송선호는 전화가 오기 시작하는 아버지의 디바이스를 보고 아버지를 흔들어 깨웠다. 서재의 고급 가죽 소파 위에 늘어져 있던 송영제는 까끌까끌한 얼굴로 일어났다가 집 나간 아내에게서 전화가 오는 걸 보고 깜짝 놀라 아들 손에서 디바이스를 뺏어갔다.

“지연아…!”

송선호는 슬슬 자기 옷을 챙겼다. 송영제는 목이 쉬어 물을 찾았다. 송선호는 얼른 생수 한 병을 따서 새 잔에 따라주었다. 아버지는 그걸로 목을 축였다. 통화 내용이 살짝 새어 나왔다.

[정말… 당신은 당신밖에 생각 안 하는 남자였구나…]

그리고 어머니는 우셨다! 송선호는 머리카락이 삐쭉 서는 느낌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아버지가 우는 것도 어제 처음 봤지만 어머니가 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송선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아버지를 타박했다.

“좀 제대로 해봐요!”

“아, 아니… 지연아, 내, 내가… 그러니까 내가… 내, 내가….”

아버지도 어머니가 우는 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송선호보다도 훨씬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괜히 내 아들 이용하지 마. 당신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치사하잖아….]

“아, 아, 아니…! 아니! 아니…!! 내가, 내, 내가 선호 이용해서 다, 당신 어쩌려고 한 게 아니라…!”

사실 맞잖아요, 아버지… 그렇게 사이가 좋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이에서 이혼이라는 말이 나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지만, 송선호가 보기에는 이건 그냥 사랑싸움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 없으면 못 살았고 아버지 없이 살 어머니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송선호는 슬금슬금 발을 옮겼다. 송영제는 궁지에 몰린 얼굴로 문으로 살금살금 움직이고 있는 아들을 홱 돌아보았다. 송선호는 움찔했다.

“내, 내가 너한테 엄마 집에 데려오라고 했냐! 안 했잖아!”

“안 했죠, 아버지. 안 했어요.”

송선호는 얼른 그렇게 대답했다.

“드, 들었어? 아니라잖아. 선호가 아니래. 응? 지연아… 울지 마. 나 당신 없으면 못 사는 거 알잖아….”

[정말 나 사랑하면… 일단 이혼서류에 도장 찍어줘. 그리고 얘기해요.]

“지, 지연아… 왜, 왜 그러는데? 머, 먼저 이유라도 말해주면 안 될까?”

아버지가 저러는 거 정말 처음 봤다. 송영제는 큰 결심을 한 듯 덧붙여 말했다.

“만약에… 바람피운 거라도 해도 용서해줄 테니까 이혼만은….”

[…….]

“여, 여보세요? 여보? 지연아?”

송선호는 겨우 문을 열고 반쯤 몸을 비집고 나가고 있었다. 지연 이바노프는 전화를 끊어버린 모양이었다. 도망가고 있던 송선호도 저 말은 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다. 송영제는 망연자실해서 있다가 디바이스를 집어던졌다.

“너 어디 가!!”

그리고 그 역정은 고스란히 송선호에게 떨어졌다. 그는 본가에 돌아온 것을 매우, 매우 후회했다.

*

도현 킬스버그와 로웰 리, 어시들, 지니 호의 크루, 각자의 지인들, 기타 인원을 포함 총 64명의 인원이 참여하는 <메트로서울 오픈>, 도현과 지인들이 주최하는 아마추어 테니스 대회가 오는 6월이다. 이제 5년째 된 친목 동호회였다. 작년은 도현의 일신상 문제로 참여하지 못했다. 아직도 원리금 갚으려고 빠듯하게 살고 있는 그녀였지만 작년처럼 회원비도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참여하기로 했다. 한때 참여 인원이 128명에 이르기도 했다. 한 번은 도현의 크루즈인 지니 호에서 7주간 숙식하면서 파티를 즐기며 스포츠와 아름다운 바다를 향유했었다.

바하마와 푸에르토리코를 거치고 온 올 초의 크루즈 여행을 끝내고 다니엘 스톤하츠의 단기 합숙이 시작되었던 3월부터 도현과 로웰도 테니스 강사를 고용하여 일주일에 두 번, 두 시간씩 맹렬한 연습을 이어가고 있었다.

“선생님, 죽을 거 같아요…!”

로웰의 어시인 윤지호가 안경을 벗으며 얼굴을 닦았다. 신재인은 이미 벤치에 누워있었다. 시원한 미소가 아름다운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 강사와 연습하고 있던 로웰은 날아온 테니스공에 강타를 날리곤 그녀를 타박했다.

“야! 그것밖에 못 해서 그림은 어떻게 그릴래? 어?”

“죄송해요, 선생님. 흑흑….”

벤치에 늘어져 짧은 머리가 산발이 된 신재인이 우는 소리를 냈다. 로웰이 자기 밑에 있는 어시들을 타박하자 도현이 말렸다.

“지호 씨랑 재인 씨는 배운지 얼마 안 됐잖아요. 봐주세요.”

로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어딨습니까, 작가님. 작가님 친구들은 다 엄청 잘할 텐데! 특훈입니다! 기왕 하는 거 이겨야지!”

로웰은 그렇게 투지를 태웠다.

도현을 만나기 전 그녀의 인생에는 일과 엘 드라카 밖에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시 만난 시간>이 대박 치기 전에는 비싼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사용하거나 어시들을 들일 수 없을 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일해야만 했다. 많은 돈을 벌고 나서도 타고 태어난 노동 근성을 버릴 수가 없어 일하는 시간과 휴식 시간을 구분하는 것이 힘들었다. 재능과 노력으로 덕업일치를 이룬 그녀였으나 성공을 누리는 법은 다소 협소했다.

하지만 도현 킬스버그는 그런 것에 아주 빠삭했다. 사치품에 대한 세련된 안목, 여가 시간을 즐기는 다채롭고 재미있는 수백 가지 방법, 예술품에 대한 박학한 지식, 파티, 미식, 스포츠 등등, 세상에 얼마나 누리고 즐길 것이 많은지 로웰은 지금까지 하나도 알지 못했다. 도현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녀의 인생은 어땠을까. 너무 예상이 되어서 도리어 두려울 정도다.

“선생님은 진짜 못하는 게 없으신 것 같아요.”

도현이 감탄하여 말했다. 로웰이 웃었다.

“제가 맘 먹고 하면 또 다 잘하죠.”

엘 드라카를 시청하는 로웰을 보면 알겠지만, 그녀는 승리욕이 어마어마했다. 그 열정을 지금까지 그저 시청자로서만 해소해왔던 모양이다.

과천구에 위치한 에는 10개의 테니스 코트가 널찍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주변에 잘 손질된 넓은 공원이 있었고 멀찍이 게헨-세나 돔이 보였다. 소음을 차단하기 위한 쉴드 기술과 공기를 정화하는 시스템까지 갖춘 고급 테니스장이었다.

테니스 스커트 같은 건 도현의 취향이 아니다. 도현은 카라 안쪽이 고급스러운 금색으로 된 H라인 흰색 테니스 원피스를 입었다. 남색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올려 묶어 시원하게 목을 드러냈다. 테니스 선캡도 착용했다. 늘씬하게 큰 키에 요염한 인상이라 모델 같았다. 그리고 누군가 테니스장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도현과 로웰을 발견하고 인사했다.

“어, 킬스버그 님 오셨네요.”

서연이었다. 도현이 웃으면서 인사했다.

“왔어?”

그녀는 정석적으로 새파란 색 민소매 티와 테니스 스커트, 헤어밴드를 하고 라켓을 들었다. 그녀는 아직 학생이었기 때문에 방학 때마다 지니 호에서 일하곤 했다. 준정규직이랄까. 테니스 라켓을 들고 테니스 웨어를 입고 있으니 10대 소녀 같은 서연이었다.

로웰은 말 그대로 담당 미남 강사와 특훈 중이었고 도현의 강사는 다른 강사와 함께 초보자인 신재인과 윤지호를 가르치러 보냈다. 서연은 준비 운동을 하고 도현과 연습 게임을 시작했다. 도현이 서브를 길게 넣었다.

“이제 시험 치겠네?”

“다음 주요.”

“학교는 다닐만해?”

“그냥 그래요.”

그들은 한 마디 주고받을 때마다 공이 오고 갔다.

“왜?”

“못생긴 멸치 대가리 밖에 없어서요.”

“아.”

도현이 웃었다.

“주드랑 같은 학교였다며? 같이 다녀.”

“아, 주드도 곧 대머리 될 상 아니에요? 싫어요.”

멸치랑 대머리가 제일 싫다. 서연이 요리조리 공을 잘 받아치며 말했다. 운동신경이 좋은 그녀다. 첫 번째 세트를 끝마친 그들은 물을 마셨다.

“…근데 이래도 우리 사라한테는 못 당하겠지?”

“퀸 언니한테두요.”

시큐리티로 지니 호에서 정규 근무를 하고 있는 그들은 도현이 세계 여행을 다닐 때부터 지니 호에 고용되어 도현의 돈이 똑 떨어졌을 때 잠시 다른 곳에서 경호일을 하다가 채석기 사장이 도현의 배로 렌트를 돌리기 시작하자 다시 지니 호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물론 연말과 연초에 도현이 배를 쓸 때를 제외하곤 보통의 시큐리티처럼 일했다.

“아, 좀 부럽다. 사라랑 퀸은 키도 크고 모델 같은데 힘도 세.”

“언니도 키 크잖아요. 퀸 언니가 저 맨날 난쟁이라고 놀리는데.”

172cm 되는 도현에 165cm의 서연이었다. 사라는 185에 퀸도 180이었다.

“크면 클수록 좋은 거야, 뭐든.”

“맞아요… 흑. 왜 우리 아빠는 난쟁이 똥자루야.”

서연이 불평했다. 그렇게 둘이서 대화를 좀 하다가 나머지 두 세트를 끝냈다. 오늘은 도현이 이겼다. 연습이 끝나고 샤워를 하러 갔다. 개인 샤워룸이 잘 나누어 있었다. 그리고 다들 바디 타월을 몸에 두르고 사우나로 들어갔다.

“둘 다 마감은 끝낸 거예요?”

“응. 선생님도 요새 컨디션 다시 좋아지셔서.”

“휴가 생각하며 열심히 일한다. 들어가서도 일해야지.”

휴가 동안 연재할 비축분이 없으면 휴가도 못 간다. 로웰이 그렇게 말했다.

“킬스버그 님, 오늘 뭐 해요?”

“왜?”

“<라 카메라> 알죠?”

“응, 칵테일 바 아냐?”

가본 적은 없지만 들어는 봤다. 장사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제법 잘 만들어놓은 세련된 바라고 들었다.

“요새 알바 하거든요. 아는 사람 데려올 때마다 인센티브 주는데 한 잔만 팔아주면 안 돼요?”

선생님도 시간 나실 때… 서연이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 정도야.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 용돈 안 줘? 왜 이렇게 알바를 많이 해.”

“돈은 있어도 있어도 모자라요.”

“아… 그건 그렇지.”

“정승 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쓸 거예요. 인생은 경제적 독립부터 시작!”

“그래… 빚은 적당히 지고….”

얘도 어린데 참 똑 부러진다. 도현은 집으로 돌아가 글을 좀 쓰다가 시간에 맞춰 드레스룸으로 가서 옷을 골랐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적자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다. 새하얗게 빛나는 다이아몬드와 백금의 술로 된 귀걸이를 하고 화장은 피부를 정돈하고 마스카라와 립스틱만 발랐다. 구두는 홍황색 도로시를 신었다.

“같이 갈래.”

“아는 동생만 잠깐 만나러 가는 거예요. 금방 와요.”

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미르를 떼어내려고 했다. 그가 립스틱을 다 먹어치우고 있었다.

“사회생활은 중요한 거라고요.”

“그래도.”

“미르… 읍.”

그는 도현의 엉덩이 양쪽을 잡고 끌어안은 채 몇 번이고 입을 맞추다가 놓아주었다. 도현은 그의 허벅지에 올라탄 형국이었다.

“진짜… 얌전히 있어요.”

도현은 그의 코를 한 번 꽉 깨물고 그렇게 당부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리니어카를 부르고 차 안에서 립스틱을 다시 덧발랐다. 고급 바가 많은 세련된 거리에 도착하여 차비를 지불하고 내렸다.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로 내려가니 건장한 시큐리티가 있었다. 도현은 그에게 말했다.

“서연이 초대로 왔어요.”

그러자 그는 인이어로 안에 손님이 온 걸 알리고 고풍스러운 나무로 된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천장이 높고 주홍빛이 은은하게 도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드러났다. 각양각색의 술병이 나열된 바가 어둠 속의 오아시스처럼 빛났다. 거기서 글라스를 닦고 있는 서연과 눈이 마주쳤다. 서연이 미소를 지었다.

“킬스버그 님~”

그녀가 입 모양으로 도현을 불렀다. 도현도 미소를 지으며 거기로 갔다. 바는 딱 한 자리 빼고는 만석이었다. 도현의 예약석으로 남겨둔 모양이었다.

“너도 칵테일 만드는 거야?”

“아뇨. 칵테일은 사장님만 만들어요. 어디 대회에서 우승까지 했대요.”

“그래? 그럼 칵테일은 추천으로 해줘. 맛있는 걸로.”

“네~”

그녀는 고급스러운 몰트바의 인테리어를 가만히 감상하며 돌아보았다. 그리고 칵테일을 만드는 걸 구경했다. 생각보다 꽤 큰 바였다. 오랜만이다, 이런 데. 그녀는 한 잔 비울 때까지 서연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올 초에 갔던 바하마여행에 대한 이야기나 연말에 시작될 테니스 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다. 그녀는 테니스 대회에 있을 상품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이번엔 케이지에서 후원해준다면서요? 전신 마사지 코스 1년 치라니… 하, 거기 그렇게 좋아요?”

“좋아.”

케이지는 이번에 송선호가 끊어줘서 다니고 있는 고급 스파 살롱이었다. 도현이 여상히 대꾸하자 서연이 문득 말했다.

“우리 오픈 멤버 중에 부자도 많으니까 그런 데서 후원을 다 해주네.”

“우리야 좋지. 예전에는 회비로 상품 샀잖아.”

도현이 처음 시킨 칵테일을 거의 다 마셔갈 때 검은 유니폼을 멋들어지게 입은 남자 서버가 도현의 앞에 안개같이 흐릿하고 신비로운 칵테일을 하나 내놓았다.

“저쪽 남성분께서 보내셨습니다.”

그는 도현의 옆에 서서 그녀의 오른쪽 뒤를 정중하게 가리켰다. 테이블을 잡고 마시고 있던 두 명의 남자 중 하나가 잔을 들어 올렸다.

“혹시 혼자 오신 거면 합석해도 괜찮을지 여쭤보시네요.”

“감사히 잘 마신다고 전해주세요. 곧 갈 거라 합석은 좀.”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물러났다. 도현은 받은 칵테일을 한 번 흔들어보았다. 낯선 남자가 시켜준 술이었지만 술은 바에서 바로 나왔기 때문에 마셔도 될 것이다. 술은 첫맛은 달콤하고 뒷맛은 짜릿할 정도로 좀 강했다.

“킬스버그 님도 남자들한테 인기 많아서 피곤하겠어요.”

“딱히 뭐. 너도 많잖아.”

“아, 제가 뭐가 많아요? 들이대는 것들은 다 멸치밖에 없는데. 남자라면 미르 킹쉴드 정도는 돼야죠.”

서연이 말했다. 도현은 웃었다.

“저기도 오늘 여자 혼자 오신 손님 계신데… 저분도 참 피곤하시겠어요.”

“응?”

그녀가 눈짓하는 곳에 도현도 시선을 주었다. 그 손님과 도현의 사이에 앉아 있던 손님 둘이 자리를 비우며 그녀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하얀 민소매 블라우스에 기하학적인 무늬가 난 고급스러운 스커트를 입은 여자였다. 베이지색에 가까운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갈색 눈동자의 미인이었다. 그녀의 앞에는 아직 마시지 못한 칵테일 잔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도현은 깜짝 놀랐다.

“어머니?”

송선호의 어머니, 지연 이바노프였다. 수심에 잠긴 얼굴로 이름 모를 붉은색 칵테일을 마시고 있던 지연 이바노프가 고개를 들었다. 도현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이런 곳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도 도현을 알아보았다.

“어머… 도현 씨… 여긴 어쩐 일로….”

그녀도 좀 당황한 모양이다. 도현은 살짝 미소를 지은 얼굴로 서연을 가리켰다.

“아는 동생이 여기서 알바를 해서요.”

“안녕하세요.”

서연이 붙임성 있는 얼굴로 인사를 했다. 지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괜히 내가 자리 불편하게 하겠네요. 다음에 봐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어머니. 앉으세요.”

도현은 자신의 잔을 들고 그녀의 옆자리로 갔다. 도현이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다시 인사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잘 지냈어요. 도현 씨도 잘 지냈어요?”

“네. 이렇게 뵈니까 반가워요. 송선호 본가 가니까 편한지 요새 집에 안 오더라구요.”

“아….”

지연은 다시 약간 고민스러운 얼굴로 잔을 바라보았다. 슬라브 계의 혈통이 짙은, 늘씬하고 고풍스러운 미인이라 참 아름다웠다. 도현이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어머니?”

“…아뇨….”

그런 식으로 대꾸하며 그녀는 예쁜 칵테일을 홀짝 마셨다. 와서 한참 동안 그거 한 잔을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다. 도현과 서연이 눈길을 주고받았다. 누구세요? 송선호 어머니셔. 헉!

“학생도 우리 아들 알아요?”

“아, 네… 킬스버그… 언니 남자친구잖아요.”

‘님’이라고 할 뻔했다. 서연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다채로운 술로 가득 찬 바에서 비치는 조명이 아름다운 여자 둘의 실루엣을 드러냈다. 도현은 경청하는 자세로 지연을 바라보았다.

“전에… 도현 씨가 우리는 아쉬울 거 없다고 했죠?”

“뭐가요?”

“헤어져도 아쉬울 거 없다구요. 말 안 듣는 남자 만날 이유 없다고….”

“아. 그랬죠. 네.”

“정말 그럴까요?”

지연이 한숨을 쉬었다. 도현이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아버님이랑 다투셨어요?”

“다퉜다기보단….”

지연은 그렇게만 말하고 한숨을 쉬었다.

“요새 집안에 좀… 남편이 정말 바빠졌거든요. 해야 할 것도 많고…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집안일에 많이 참여하는 편이 아니라서….”

요새 승계 문제로 송선호의 아버지도, 송선호도 지분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라고 얼핏 들었다. 그 문제 때문에 고민이신 걸까?

“이제는 선호도 다 커서 제법 제 몫을 하죠. 남편은 나한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했거든요. 아니, 하지 말라고 했죠…. 지금 와서 보면 그게 좋기만 한 거였나 싶어요.”

“왜 그러세요… 어머니는 어머니 하실 일 다 하셨는데요. 편하게 누리고만 사세요.”

도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만약에,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만약에 송선호랑 결혼하면… 전 송선호 발끝으로 부리면서 손에 물도 한 방울 안 묻히고 살 건데요.”

결혼까지 해주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받아야지. 도현은 술을 한 잔 더 시키려고 하자 지연이 앞에 있는 칵테일 중에 마음에 드는 걸로 마시라고 말했다. 도현은 그녀의 앞에 다채롭게 진열된 남자들의 호감을 구경하며 그중 하나를 골랐다.

“하하…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을까.”

“왜요? 아버님이 어머님 말 안 들으세요?”

“그렇다기보단… 글쎄. 잘 모르겠네. 요즘 잘 모르겠어요. 우리 참 좋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난 우리 남편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네? 무슨 그런 생각을 하세요. 어머님 이렇게 멋진데….”

지연이 쓰게 웃었다. 그녀가 되물었다.

“우리 아들이랑 결혼할 일 없다고 계속 얘기하잖아요. 도현 씨는 왜 그러는데요?”

도현은 살짝 의표를 찔린 얼굴로 지연의 얼굴을 보다가 빛이 나는 찬장을 보며 이름 모를 파란 색 칵테일을 마셨다. 새콤했다. 지연은 한숨을 쉬었다.

“알 것 같아요…. 보니까 어린 게 똑같아. 자기 아빠랑 편 먹고….”

지연은 속이 좀 상하는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술을 마셨다.

“난 우리 남편이 허락하는 것만 할 수 있고 남편이 원하는 게 내가 원하는 거랑 같아야 하고…. 내가 애 아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만큼 애 아빠도 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까 다 내 착각이었구나, 내가 원하는 건 사실 하나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거구나, 이혼조차도… 남편 허락이 없으면 내 마음대로 못 하는 거더라구요.”

지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일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어느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주변에 점점 없어져서….”

“아니에요, 어머니… 다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못한 사람들이 보았을 때 지연 이바노프란 사람은 다 가진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더더욱 배알이 뒤틀리는 것이다. 그녀가 가진 것이 너무나 부럽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괴로움을 누군가에게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관음증만 느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말을 삼가게 되는 것이다. 도현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연과 도현은 술을 마시며 서로에게 공감하고 배우기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녀 둘이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자꾸 남자들이 합석을 요청해서 귀찮았다. 남자들은 눈치가 없는 것과 예의가 없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더 이상 그런 이야기를 전달하지도 말고 주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사장에게 직접 불쾌감을 전달했다.

“도현 씨는 사람 말을 잘 들어주네요. 이해도 잘 해주고… 참 똑똑하구나 싶어요.”

“이런 딸 있었으면 좋겠다 싶으시죠?”

“하하, 정말.”

지연이 웃었다.

“도현 씨 엄마는 정말 좋겠다.”

그 말엔 도현도 웃었다.

“그럴까요?”

“왜요? 엄마랑 사이 안 좋아요?”

“아뇨… 엄마랑은 어렸을 때부터 헤어졌거든요. 13살 때.”

“어머… 미안해요. 괜한 걸 물어봤네요.”

“아니에요.”

“부모님이 이혼한 거예요?”

“네.”

“이혼해도 애는 볼 수 있는 건데….”

“음, 그렇긴 한데….”

도현은 약간 설명하기 힘든 표정으로 한숨을 짧게 지었다.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 후엔 18살 때 한 번 뵙고 못 뵈었어요.”

“많이 보고 싶겠다.”

“엄마는 잘 모르겠는데 동생은 보고 싶어요. 그때 엄마가 데려가셨거든요.”

“동생도 있었어요?”

“네. 9살 차인데 진짜 귀여워했거든요. 많이 컸을 텐데.”

도현이 말했다. 지연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렇게 도현 씨가 어른스러운 걸까? 선호도 또래보다는 많이 어른스러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하하.”

도현이 웃었다.

“다 기억은 안 나지만 엄마가 참 많이 가르쳐주시려고 하셨어요. 세상 사는 법이랄까.”

“어떤 거요?”

“음… 착하게 살지 마라. 인생은 더 가지기 위해 사는 거다. 아빠가 하는 말은 듣지 마라. 남자가 주는 거에 감사하지 마라. 기왕 받을 거면 당연하게 다 받아라. 하지만 손해 볼 바에야 받지 마라. 남자를 지배하는 게 여자다.”

“어머….”

“전 자기 닮아서 예쁘게 태어났으니까 더 명심하라고 하더라구요.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이것 말고 좀 더 실용적인 버전으로도 많아요.”

성병이라든가, 임신이라든가… 지연은 약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너무 보수적인 걸까….”

“그래도 듣다 보면 당연한 거다 싶죠?”

“그러네…. 젊은 애들일수록 그런 거 잘 알아야지….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도 나한테 그런 거 하나 안 가르쳐주셨네…. 나 선호 가졌을 때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그리고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를 때, 아무것도 모르면서 결혼부터 했구나…. 도현 씨처럼 이것저것 다 따질 수 있을 때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저희 엄마가 그러셨는데… 괜히 옛날 부모님이 딸을 괜찮은 남자한테 시집부터 보내려고 했던 게 아니라고, 정말 괜찮은 남자가 있다면 차라리 그 남자가 지켜주는 세상에서 사는 게 훨씬 더 나을 수도 있다고 했어요.”

사회에 나가 홀로 일하는 여자는 공공재, 잘난 남자와 결혼하여 일하지 않는 여자는 적어도 사유재 혹은 사치재로 보호받는다. 도현의 엄마는 정확하게 그렇게 어린 도현에게 말했다.

“그래도 도현 씨는 결혼 안 할 거잖아요.”

“네.”

도현은 그렇게 대답했다. 지연은 칵테일 잔을 천천히 흔들면서 그 안에 든 체리를 바라보았다.

“항상 딸이 하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보곤 했는데… 없었던 게 더 나은 거일지도 모르겠어요. 난 딸이 있어봤자 딸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못했을 거 같아요. 도현 씨 엄마처럼… 남편은 자기 아들을 딱 자기 같은 남자로 크도록 너무나 잘 가르쳤는데.”

도현은 송선호와 그의 아버지를 떠올려보니 그 말이 수긍이 되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어머니도 잘하셨을 거예요.”

“그럴까….”

“어머니, 자신감을 가지세요. 한 번 사는 인생 원래 깡으로 사는 거죠.”

도현은 자기 잔의 술을 끝까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세요, 어머니. 구질구질한 남자들 얘기 그만하고 놀러나 가요, 우리.”

도현이 미소를 지었다.

도현은 집에서 일하고 있던 로웰, 어시들, 그리고 메트로서울에 들어온 크루들, 친구들까지 잔뜩 불렀다. 유명하고 분위기 좋은 라운지 바에 가서 신청곡까지 전부 그들의 취향으로 점령해 춤을 추고 놀았다. 여자들이 잔뜩 들어오니 남자들도 잔뜩 몰려와서 그렇게 사람이 많지 않던 라운지 바도 꽉 찼다.

처음에는 몹시나 어색해하던 지연 이바노프의 얼굴에도 어느새 웃음이 가득했다. 원래 이런 건 떼로 우르르 와서 놀아야 재밌는 법이다. 도현의 친구들이야말로 다들 노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친구들 아니었던가.

“하하하. 애 아빠는 선호랑만 마시고 있던데.”

춤을 추다가 갑자기 지연이 도현을 끌어안더니 그렇게 귓가에 소리쳤다.

“시시하네요.”

도현이 웃으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다들 춤을 마구 추다가 지연이 지쳐서 자리로 돌아가니 모두 우르르 자리로 돌아가서 스테이지가 비었다. 그러니 동행이 아닌 사람들이 아쉬워하며 그들을 힐끗거렸다. 당연히 합석 요구는 처음부터 안 받았다.

“와, 언니! 비결이 뭐예요?”

서연도 어느새 알바를 마치고 와서 잔뜩 취해서는 지연의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렸다. 지연이 웃으며 답했다.

“에이, 그래도 언니라고 하기엔… 딸 뻘인데.”

“에이! 멋지면 다 언니지!”

“에이! 그럼 기분인데 여기는 언니가 쏜다!”

그러자 다들 휘슬을 불고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대로 호텔까지 잡고 만 이틀을 흥청망청 놀았다. 멤버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지는 않았다. 그들은 매일 밤 내기를 하고 게임을 하고 춤을 추고 마셨다.

“아싸! 킬스버그 님 졌다!”

술 게임 그게 뭐라고 열을 올리다가 결국 도현 킬스버그가 걸렸다. 크리스털로 된 잔에 맥주를 따랐다. 사람의 명수만큼 주르륵 나열하고 그 위에 바카디가 든 샷을 또 일렬로 쌓았다. 그 위에 불을 붙이니 불꽃이 예쁘게 일렁거렸다.

“아, 내가 또 가줘야 하나.”

그리고 도현 킬스버그가 테이블 위로 훌쩍 올라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낮추며 아주 섹시한 얼굴을 하며 섹시한 춤을 췄다. 그러자 일행이 ‘와아!’ 하고 소리를 지르며 호응했다. 그리고 호응이 극에 이르렀을 때 휘릭 한 바퀴 돌고는 톡 하고 하이힐 끝으로 맨 끝에 있는 바카디 샷을 건드렸다. 촤르르륵. 맥주가 마구 튀며 폭탄주가 20잔 넘게 만들어졌다.

세상 호탕하게 놀 줄 아는 아들 여자친구를 보면 제법 기분이 복잡할 법도 한데 또 그렇지가 않았다. 지연 이바노프는 새 세상을 본 얼굴이었다. 그녀는 재벌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류층 출신에 돈도 많고 지위도 있는 사람이었다.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아왔기에 감사하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억누르고 살았던 게 아닌가. 아니, 놀고 즐기는 문제보다도… 나이도 생김새도 각양각색인 여기 있는 모두가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보고 있으면 마음에 날개가 달린 듯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사흘째, 또 다른 고급 라운지 바를 점령하고 지연은 자신의 친구들도 몇 불러서 다 같이 어울려 놀았다. 젊은 애들이랑 노는데 지연의 친구들이라고 마다하겠는가. 정말 재미있고 즐거웠다. 분명히 그녀에게 이건 지금까지 상상도 못 해봤던 일탈이고 즐거움이었다. 그녀는 그 가운데 홀로 서서 시끄러운 음악을 틈타 소리를 크게 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걱정도 불안도 없이 시끌벅적하게 놀았다. 이 나이에 새벽까지 놀 체력이 어디 있냐고 손사래를 치던 친구들도 가장 늦게까지 쌩쌩하게 춤추는 것을 보고 지연은 마치 고등학생 때처럼 까르르 웃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배가 아플 정도로 웃고 얘기했다. 기억이 나지 않아도 좋았다. 술도 잔뜩 마셨다.

“이거 그쪽 거죠?”

지연은 화장실을 갔다가 자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떤 젊은 남자가 그렇게 말을 걸었다. 그는 지연에게 꽃을 건넸다.

“네? 제 거 아닌데요.”

그는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맞아요. 아까 춤추시는 거 봤는데 너무 예쁘셔서 금방 밖에 가서 사 왔거든요. 그러니까, 그쪽 거 맞아요.”

그의 말에 지연이 웃었다. 장미꽃이었다. 지연은 거기에 코를 대고 잠깐 향기를 맡았다.

“…….”

꽃… 지연은 가만히 그걸 보고 있다가 그의 얼굴을 보았다. 제법 잘생기고 훤칠한 남자다. 그녀는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장미꽃 좋아하셔서 다행이네요. 싫어하시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가 과장되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연이 웃었다.

“꽃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예쁘고 비싸고.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거다. 지연은 그가 상기된 얼굴로 하는 말을 반쯤 흘려들으며 꽃을 보며 잠깐 생각에 빠져 있었다. 곧 그녀는 그의 말을 끊었다.

“근데 제가 남편이 있거든요.”

그리고 미소를 남기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일행에게 먼저 술을 권하고 잔을 들어 올렸다.

“짠!”

사흘째가 되니 다들 빨리 취했다. 도현도 그렇게 술이 강한 편이 아니라서 고급스러운 소파에 푹 기대어 앉아 로웰과 말도 안 되는 농담 따먹기를 하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지연도 이렇게까지 취한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래… 얘기부터 안 하면 안 되겠지.’

술에 취한 정신으로도 지연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구석에 한 무더기 쌓여 있는 가방 사이에서 자신의 것을 찾아내 디바이스를 꺼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지연아?!]

“나 지금 <파파야>라는 곳인데. 데리러 와요!”

[뭐라고? 지연아? 지금 어디야?]

“파파야!”

그러자 도현이 옆에서 덧붙였다.

“어딘지 송선호가 알아요~”

그리고 지연은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들아 춤추자!”

그러자 또 다들 우르르 나가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들 춤, 술, 게임, 내기 이런 단어에 맞춰 충동적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또 한참 리듬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지연아…!”

그러자 어떤 남자가 기겁한 얼굴로 지연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는 그의 그런 얼굴을 보자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당신 얼굴 좀 봐.”

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그의 목에 두 팔을 걸치며 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런 데서 뭐 하는 거야….”

그는 아내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게다가 아내의 친구로 보이는 여자들이 그를 툭 치며 인사했다. 이 여자들이 아주 늦바람이 불어서…. 송영제는 안도의 한숨인지 뭔지 모르는 숨을 내뱉었다.

“일단 집에 가자. 가서 얘기하자.”

“후후.”

지연은 그저 웃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그 사이, 그들의 아들인 송선호는 여기가 매우 익숙한 눈치로 한숨을 푹푹 쉬며 자기 여자를 찾아냈다.

“도현 킬스버그….”

“어, 송선호잖아.”

도현은 활짝 웃으며 송선호의 셔츠를 잡고 확 끌어당겼다. 그녀도 반동으로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송선호의 어깨에 나른하게 두 팔을 걸쳐 깍지를 꼈다. 딱 봐도 엄청 취했다. 송선호는 인상을 썼다.

“아, 술 냄새.”

“흐응. 좋으면서 또 그런다.”

그녀가 즐거움과 색기가 넘치는 눈빛으로 송선호의 눈을 지그시 보니 그가 더 인상을 쓰며 시선을 돌렸다.

“넌 우리 엄마를 이런 데 데리고 오면 도대체 어쩌자는 거냐….”

“응? 왜? 어머니 엄청 좋아하시던데?”

“그게 문제 아냐. 우리 엄마 없으면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살라고.”

“아, 아들 키워봤자 하나~도 소용없다더니. 넌 어머니 생각은 안 해?”

“…왜? 엄마가 뭐라고 하셔?”

“쯧쯧.”

도현은 혀를 크게 찼다. 그러는 동안 송선호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술김에 송선호를 툭툭 치며 인사를 했다.

“오~ 남자친구~”

“셋 중에 누구야? 어?”

“…….”

송선호는 마지막 말을 한 사람을 노려보았다. 도현의 일행이 많아서 다행이지 멀찍이서 그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늑대 같은 새끼들도 꽤나 있었다. 이래서 그가 도현이 노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 나가자. 너 많이 취했다.”

“으으응~ 싫은데. 더 놀고 싶은데. 너도 춤 좀 춰봐.”

그러면서 그녀는 송선호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그리고 갑자기 다른 사람도 누가 송선호의 엉덩이를 때렸다. 깜짝 놀라서 확 돌아보니 지연 이바노프였다.

“우리 아들~ 그래도 우리 아들은 좋아.”

그녀는 애가 타는 얼굴을 한 남편을 버리고 송선호의 허리를 안고 기댔다. 양팔에 술에 취한 미녀를 둘이나 안고 있으니 아버지뿐만 아니라 수컷들은 전부 노려본다. 이런 게 양손의 꽃인가. 송선호는 그들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아, 내가 다 지켜야지. 그는 송영제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계산하시죠. 제가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

그는 칙칙한 얼굴로 아들을 잠깐 보다가 카운터로 갔다. 송선호는 로웰에게 인사하고 카드도 하나 주고(그녀는 환호했다) 거의 인사불성이 된 여자 둘을 부축해서 밖으로 나갔다.

“아니, 둘 다 술은 왜 이렇게 많이 마신 거예요?”

“으응… 너도 네 아빠랑 마셨잖아. 그래서 나도 도현 씨랑 마신 건데.”

“그래.”

“그래도… 적당히란 말이 있잖아요.”

“적당히 못 마셔서 살려달라고 엄마한테 문자 했으면서.”

“그래.”

“아니, 그래도….”

그러자 이번에는 도현이 먼저 말했다.

“그래도는 뭐가 그래도야. 이럴 땐 고분고분하게 네, 네, 해야지 말대꾸는.”

“그래. 도현 씨 말이 맞아.”

“네….”

두 사람은 송선호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두 분이 원하시면 제가 재주라도 부려야죠….”

“어머, 내 아들 이러는 거 처음 봐. 도현 씨 정말 용하다니까.”

“가끔 기 꺾이는 거 보는 맛에 만납니다~”

“우리 아들이 송영제보다는 낫구나.”

지연이 웃었다. 그러고 있으니 아버지가 계산을 끝내고 올라오셨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집에 가자.”

차는 송선호의 차를 타고 왔다. 그의 네비게이션에는 도현 킬스버그가 자주 가는 술집이 전부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송선호는 약간 고민을 하다가 도현에게 물었다.

“우리 집에 갈래?”

“응… 너희 집?”

“어… 어머니랑 아버지만 집에 보내기 좀 그래서.”

그가 도현의 귀에 속삭였다. 그녀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그럼 난 더 놀 테니까 넌 엄마아빠랑 집에 가.”

“아, 안 돼. 그럼 나도 더 놀래.”

들렸던 모양이다. 지연은 자신이 남편이랑 아들을 불렀다는 것도 까먹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송영제가 그들을 홱 돌아보았다. 송선호는 아버지의 눈치를 슬쩍 봤다가 말했다.

“더 놀지는 마. 일 안 할 거야? 그럼 우린 너희 집에 가자.”

“아, 도현 씨~ 나 버리고 갈 거야, 응?”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어머니, 우린 영원히 가는 거죠.”

“그치.”

“저 송선호랑 헤어져도 우린 계속 만나요.”

“당연하지.”

도현과 지연은 송선호를 버리고 서로 껴안았다. 송선호는 도현을 설득하려고 노력하다가 두 손 들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가만히만 계시면 어떡해요? 와서 엄마 좀 어떻게 해봐요. 도현이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싫어하면 어떡해.”

“아버지….”

며칠 동안 아버지는 완전히 겁쟁이가 되셨다. 그는 가만히 굳어서 서 있다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여보… 데리러 오라고 해서 왔잖아. 집에… 안 갈 거야?”

그러자 지연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송영제가 움찔했다) 포옹을 풀었다.

“가. 갈게, 도현 씨.”

“괜찮겠어요?”

“괜찮아. 괜찮아. 너무 재밌었어. 고마워. 연락할게.”

“네.”

송선호는 차문을 열어주었다. 지연이 차에 탔다. 문을 닫아주었다. 송영제는 차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아버지, 잘해요.”

“…….”

그리고 송영제도 긴장한 얼굴로 뒷좌석 문을 열고 탔다. 차는 자율주행으로 송선호의 본가로 향했다. 송선호는 짧게 한숨을 짓고는 도현에게 말했다.

“미안… 며칠 연락도 못 했는데 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다. 괜히 엄마 때문에 안 불편했어?”

“하하. 우리 노는 거 못 봤어?”

도현이 웃었다. 송선호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보았다. 그녀에게서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술 마셔도 좋은데 적당히 좀 마셔라. 몸 상하면 어떡해.”

“그러니까 네가 내 몸에 좋은 거 많이 해서 바치면 되겠네.”

“말이나 못 하면.”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술기운에 그녀의 피부가 뜨거웠다. 역시 안달이 난다. 초조하다.

‘얘는 애인이 며칠 동안 연락이 없어도 전화도 한 통 안 해.’

송선호가 한숨을 쉬었다. 그것도 자기 빚 갚아주겠다고 나간 남잔데. 그녀는 정말 송선호가 없어도 너무나 잘 살았다.

“언제쯤이면 넌 내가 진짜 좋아질까….”

“응? 지금도 충분히 좋아~”

“…….”

“흐응. 욕심이 많아, 욕심이.”

“읍…. 야, 술 냄새….”

“튕기지 마라.”

도현은 그의 엉덩이를 만지면서 음흉하게 웃었다. 송선호는 어이없는 듯한 표정이 지었다가 결국 웃었다.

“하아… 도현아.”

그는 도현 킬스버그의 코와 자신의 코를 부비며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는 그녀의 뺨에 입을 쪽 맞추고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도현이 웃었다.

“며칠밖에 안 됐는데?”

“며칠이라도.”

“뭐 하려고 집에 간 거야?”

“아버지랑 얘기 좀 하려고 갔다가 잡혔다…. 어머니랑 싸우신 지는 몰랐지.”

“너랑 아버님이랑 편 먹었다고 엄청 섭섭해하시던데.”

“뭐? 아니야.”

“뭐가 아니래. 아버지 말만 줄줄 읊었다는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무 말도 없이 나가시는 건 아니잖아. 그래서 그렇게 말한 것뿐인데….”

“넌 그게 문제야.”

“뭐가.”

“아, 들어가자. 좀만 더 놀자.”

“야, 야. 그만 마시라니까.”

“그럼 춤만 좀 더 추자, 응?”

그녀가 송선호의 얼굴에 좀 더 얼굴을 들이밀며 그렇게 속삭였다.

“…….”

그녀가 ‘이렇게’ 조르면 그는 그게 뭐든 들어주고 싶어졌다. 그녀는 조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가끔 마치 송선호가 그녀에 대해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남자인 것처럼 대해주면 가드가 확 내려갔다. 이런 그녀를 품에 안고 있으면 정말로 그녀를 가질 수 있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그럼 조금만….”

송선호는 마지못한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도현은 그의 셔츠를 붙잡아 끌고 바로 다시 파파야로 내려갔다.

‘다 알고 이러는 거지, 진짜….’

송선호는 그렇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는 그 결정을 곧 후회했다. 많은 여자들 사이에서 청일점이 된 송선호는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또 남아있는 엄마 친구들에게 떡 주물러지듯 주물러지며 분위기를 살려줘야 했다.

*

“으음….”

그리고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숙취 속에서 잠을 깨고 보니 집이었다. 그러니까 본가에 있는 그의 방이었다. 언제 왔지…. 송선호는 눈이 뻑뻑해서 눈살을 심하게 찌푸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의 배를 베고 도현 킬스버그가 쿨쿨 자고 있었다.

“도현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어깨가 저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의 두 손목이 그의 명품 셔츠에 의해 머리맡에 묶여 있었다.

“…….”

하얀색을 기조로 한 벽지에 모서리는 어두운 금색 몰드로 장식하고 깔끔하고 비싼 가구로 이루어진 송선호의 방에 아침 햇살이 그득하게 들어오고 열린 창문으로는 상쾌한 공기가 들어왔다. 하얀 커튼이 날린다. 송선호는 어젯밤을 기억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묶인 손목을 비틀어보다가 도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야, 도현 킬스버그….”

조금 겁먹은 목소리라고 하면 오버려나. 몇 번 그녀의 이름을 부르니 그녀가 움찔하며 서서히 눈을 떴다. 속눈썹이 짙은 눈꺼풀 사이로 밝은 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밝게 미소를 지었다.

“일어났어?”

같이 밤을 보내고 당연하게 함께 맞는 아침, 그가 너무나 원했고 사랑하는 여자는 그의 침대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에 이불을 휘감고 있었다. 몇 달 전만 해도 꿈도 못 꾸던 상황인데….

“어….”

도현이 아침 햇살처럼 웃으며 송선호의 빵빵한 가슴 위를 손끝으로 살살 긁었다. 그러며 상큼하게 말했다.

“어제 진짜 좋았어.”

“뭐…가….”

요…? 도현은 대답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으응~”

그녀는 새하얀 시트를 드레스처럼 몸에 두르고 기지개를 쭉 켰다. 송선호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갔다.

“와, 이 브랜드로 가구 다 맞췄네.”

도현은 감탄하며 그의 방을 구경했다. 그녀는 약간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넘기며 방을 둘러보았다. 막 일어나도 너무 예쁜데….

“도, 도현아… 일단 나 좀 풀어줘야….”

도현은 어느새 창가로 가서 바깥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나풀거리는 하얀 커튼이 그녀의 모습을 가렸다가 다시 보여주었다 희롱했다.

“응?”

그녀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잡으며 그렇게 되물었다. 이 상황에, 오늘따라 그녀가 왜 이렇게 예쁘게 보이는 걸까. 그녀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송선호는 당황했다.

“풀어달라니까.”

“풀어주세요, 라고 한다며.”

…도대체 어젯밤에 무슨 짓을 한 거지? 송선호는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지만 정말 티끌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근데 뭔가 묘하게 불안한 게 식은땀이 슬슬 나기 시작한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도현은 그의 얼굴을 보자 피식 웃었다. 그녀는 다시 다가와 침대에 앉아 그의 몸 위로 몸을 기울였다.

“…어제 도대체 뭐한 거야? 풀어줘.”

도현은 그의 코끝을 검지로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후후. 너 이제 장가는 다 갔다.”

“…그러니까… 왜….”

별거 아니겠지. 기억 못 하는 것 같으니까 괜히 더 이러는 거겠지…. 송선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답답했다.

“일단 좀 풀어줘.”

이 정도 되는 남자는, 미르 킹쉴드도 그랬지만, 몸이 속박당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다(아니, 모두가 그랬다). 강한 남자들은 자신을 부풀리는 것에 익숙하니 더더욱 이런 것에는 질색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다니엘 씨는 참 신기하단 말이야.’

도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웃는 얼굴로 송선호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내려갔다. 송선호가 헉하고 놀란 표정에서 겁을 먹은 건지 기대가 되는 건지 헷갈리는 얼굴을 했다. 자기는 묶여 있고 그녀는 너무 예쁘고….

“도, 도현아….”

그리고 입을 맞췄더니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얼굴을 붉혔다.

“으응….”

송선호는 그녀의 입맞춤에 따라가며 점점 빠져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저항할 수가 없었다. 도현 킬스버그였다. 원래도 그는 그녀에게 홀딱 빠져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그의 뺨과 턱에 입술을 문지르자 저절로 신음이 나왔다.

“도현아… 헉….”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그의 복부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내려다보는 그녀의 요염한 눈빛과 마주하자 송선호는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흥분해서 그녀의 입술을 다시 훔치려고 했다.

“풀어줄까?”

“응… 하아, 빨리….”

그녀와 입술이 살짝 스쳤다. 마음이 애달아 심장만 쿵덕거렸다. 몸이 절로 꿈틀거렸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에 도현의 엉덩이가 스쳤다. 도현이 섹시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풀어주세요~ 라고 해봐.”

“…….”

잠깐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도현이 씩 웃고는 일어났다.

“말 안 할 거면 난 먼저 씻는다.”

도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어머.”

욕실 타일에 발을 대는 순간 깜짝 놀랄 정도로 느낌이 좋았다. 그녀는 맨발로 바닥을 슬슬 쓸어보았다. 분명히 돌로 된 타일인데 너무나 부드러웠다.

“송선호~ 나도 집에 이거 깔고 싶어~”

“아, 아니… 도현아, 일단 나 좀 풀어주고….”

그리고 물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송선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아….”

송선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베개에 뒷머리를 꾹 눌렀다. 어중간하게 열기를 받은 몸은 아침 햇살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어찌하여 그의 본가에서, 그것도 자신의 침대에서 이러고 꼼짝도 못 하고 있어야 하는가.

항상 딱 떨어진 듯 깔끔하게 하고 다니는 송선호였으나 지금은 실오라기 한 올도 걸치지 않고 머리도 잔뜩 흐트러져 인상을 쓰고 있었다. 명품 정장 안에 고이 숨겨져 있던 그의 육감적인 몸매가 여과 없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말리지 말자. 어제도 말렸는데 오늘도 또 말리면 어쩌려고. 안 그래도 나 완전 손에 꽉 쥔 줄 아는데.’

아버지를 봐라. 그렇게 서로 없으면 안 될 것처럼 살았어도 어머니 같은 여자는 그렇게 쉽게 떠나서 잘 산다. 도현 킬스버그는 어떨지 안 봐도 훤했다.

‘나 없으면 못 살게 해야 돼….’

어떻게든 손목을 풀어보려는데 갑자기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똑똑똑.

“얘들아, 일어났니?”

“…!”

“들어간다.”

“아, 아뇨…!!”

바로 답을 못해서 문이 열렸다. 송선호는 얼른 몸을 비틀어 몸의 앞쪽이 문에서 보이지 못하게 했다. 송선호의 어머니, 지연 이바노프는 아침부터 우아한 차림새로 아들의 방에 왔다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아들을 홱 돌아보았다.

“선호야…!”

그녀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그의 등을 보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의 엉덩이를 보았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그가 아직 침대에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약간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이것만 두고 갈게. 도현 씨 쓰라고 해.”

그녀는 가져온 물건들을 문가에 두고 얼른 다시 문을 닫았다.

“미안… 좋은 시간 보내.”

“아, 아, 아, 아뇨…!! 엄마!!!”

송선호는 깜짝 놀라서 말을 더듬었으나 지연은 이미 가버렸다. 송선호는 자신의 등 뒤를 보려고 노력했다.

“!!!!!”

‘도현 킬스버그!!!!!’

어제따라 유달리 엉덩이만 노린다 싶더니…! 글래머러스하게 각이 딱 잡혀 보기 좋은 송선호의 육감적인 엉덩이는 지금 벌겋게 퉁퉁 부어있었다.

“야…!!!”

송선호가 욕실을 향해 소리쳤지만 욕실에서는 그녀가 콧노래를 부르는 소리만 울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욕실이 마음에 드는지 한참 있다가 바스 타월로 몸을 감싸고 머리도 수건으로 감싸 틀어 올리고 밖으로 나왔다.

“나 화장품 쓸만한 거 있어?”

도현은 숙취도 별로 없는지 사뿐하게 걸어 나오더니 문 앞에 있는 바구니를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숙취해소제와 화장품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도현은 그 자리에서 숙취 해소 음료를 한 병 다 마시고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이것저것 온몸에 바르고는 머리카락을 말렸다. 그녀가 머리를 다 말리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송선호가 아주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풀어라, 빨리.”

“응?”

도현은 그의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빗으로 머리를 빗었다. 화장대 앞에 앉은 그녀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송선호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풀라고.”

“풀어주세요.”

“…….”

도현은 차분하게 자신의 모습을 살피며 머리를 빗었다. 송선호는 갈등했다. 한참을 그대로 거울 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송선호는 치기 어린 자존심을 놓기로 했다. 이건 그저 그녀에게 잠시의 재미일 뿐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아니다. 아니, 지는 게 이기는 거다. 송선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풀어주세요….”

“응? 뭐라고?”

“…풀어주세요.”

“다시 말해봐.”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을 보니 기분이 미묘해졌다. 그냥 그녀의 말대로 하고 넘어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서도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말라고 벌컥 화를 내고 싶기도 했다.

“풀어주세요, 도현 킬스버그 님. 됐냐?”

그녀는 의자에 앉아 거울 속으로 그런 송선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살짝 미소 짓는가 싶더니 슥 일어났다. 그녀는 허술하게 헐렁이는 바스 타월을 손으로 잡은 채 그에게 걸어갔다. 그는 도현과 눈을 마주친 채로 약간 초조해하다가 불쑥 물었다.

“풀어줄 거지? 시키는 대로 했잖아.”

그녀는 아무 말없이 천천히 다가와 침대에 앉았다. 송선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몸을 두른 커다란 바스 타월을 가슴 위로 헐겁게 잡고 있어 그녀의 등이 많이 드러나 있었다. 가슴도 살짝 보일 것 같고….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그녀의 몸을 보고 있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눈을 멀리 돌렸다. 그리고 다시금 도현과 시선을 마주쳤을 때는 피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송선호의 코에 쪽 입을 맞췄다. 그녀가 칭찬했다.

“참 잘했어요.”

“…….”

…도대체 다니엘 스톤하츠 그 변태랑 무슨 플레이를 하는 것인가. 잘했다는 말을 듣는데 진짜 기분이….

‘내가 개냐….’

그녀는 송선호의 손목을 풀어주었다. 어깨가 찢어질 것만 같은 통증에 그는 신음을 흘리며 일어났다. 어깨를 돌리며 근육을 풀었다. 그동안 그녀는 지연이 가져다준 옷을 입기 시작했다. 톤 다운된 분홍색에 검은색 레이스가 달린 속옷을 입고 허리를 조이는 벨트가 달린 화려한 플로럴 패턴 원피스를 입었다.

“어머, 어머니 취향이 예전에는 꽤 화려하셨나 봐?”

도현은 거울에 자신이 입은 옷을 이쪽저쪽 비춰 보았다. 구두를 신고 화장대 앞에 앉아 가볍게 기초화장을 하고 자신의 입술 색보다 옅은 분홍색 립스틱을 발랐다. 송선호는 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왔다. 도현은 주얼리를 착용하고 있었다. 모양을 보아하니 사용인에게 부탁해 소독이라도 해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귀걸이를 했다. 밤놀이용 화려한 장신구가 어머니의 옷에도 썩 잘 어울렸다. 송선호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머리를 닦고 있자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돌아보았다. 어젯밤 술을 잔뜩 마셔 칙칙한 그의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숙취 약부터 마셔. 남자가 아침부터 과음한 티 내는 거 제일 별로야.”

“누구 때문인데.”

그녀는 그대로 송선호의 방에 연결된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와….”

물론 도현도 으리으리한 드레스룸을 가지고 있었지만(물론 다 팔아서 내용물은 빈약하다) 이렇게 큰 남자 드레스룸을 본 것은 처음이다. 이때까지 만난 남자들도 대부분 드레스룸 정도는 따로 있는 남자들이었지만 역시 송선호의 것은 차원이 달랐다. 그의 커다란 드레스룸에는 각양각색의 명품 양복들이 가득 차 있었다. 셔츠, 상의, 베스트, 바지, 벨트, 커프스, 넥타이, 넥타이핀, 구두… 이렇게 보고 있으니 눈이 다 호화롭다.

“이 키톤 우리 집에도 있는 거 아니야?”

똑같은 걸 도현의 집에 있는 송선호의 방에서도 본 기억이 났다. 초고가의 명품 정장을 살펴보며 그렇게 물으니 송선호가 답했다.

“자주 입어서 세 개 샀어.”

본가, 도현의 집, 맨션용으로 각각… 송선호는 숙취해소제 한 병을 다 비웠다. 도현은 새삼 그를 돌아보았다.

‘역시 재벌 3세….’

재벌 1세나 2세는 사실 재벌이 아닌 인생도 살아본 적이 있다지만 재벌 3세야말로 구름 위에서 태어나 구름 위에서 죽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는 도현에게 금전 감각을 기르라고 잔소리를 하곤 했다. 도현의 집이나 배를 보고는 자기도 이렇게 돈을 못 쓴다면서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가 바쁘다 보니 사치를 크게 안 한다뿐이지 씀씀이가 작다는 게 아니다. 사고 싶은 거라면 그게 억 단위 옷이라도 똑같은 걸 세 개나 산다.

송선호가 서랍을 열어 속옷을 찾았다. 도현은 그의 옷을 구경하다가 그걸 발견하고 앗 하며 얼른 참견했다.

“그거 말고 검은색. 옆에.”

“…이거?”

“응. 남자는 삼각이라니까.”

“됐어.”

송선호는 그냥 그 옆에 있는 사각을 입으려고 했다. 도현이 그의 셔츠를 고르면서 말했다.

“삼각 입어.”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러기 싫었다. 별게 아닌데도…. 송선호가 주저하며 한숨을 쉬자 도현이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그를 돌아보았다.

“너 진짜 이상해. 내가 옷 골라주는 게 싫어? 다른 남자들은 골라 달라고 조르는데.”

“…….”

그렇게 무심히 그의 분노 버튼을 눌렀더니 그가 서랍을 쾅 닫고 그녀가 골라준 삼각팬티를 입었다.

“바지는 이거, 벨트는 이거, 셔츠는 이거… 양말은 음… 구두는 이걸로.”

그렇게 도현은 송선호를 자기 취향으로 착착 입혔다. 그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가 단추를 채우기 시작하자 다가가서 그의 셔츠를 끌어당겼다.

“넌 하얀 셔츠도 잘 어울리는데 파란색도 잘 받는단 말이야.”

“일하는데 파란 건 좀….”

그녀가 자신의 단추를 채우기 시작하니 뭔가 또 기분이 풀어지는 모양이다. 하여튼 까다로워.

“요즘 세상에 그런 걸 누가 따져. 너같이 젊은 CEO일수록 좀 세련되게 입어도 되는 거 아냐?”

“어리게 보이는 건 싫어.”

원래 남성복의 기준은 35살. 35살보다 어려 보이면 더 들어 보이게, 많으면 어려 보이게 입는다. 송선호가 입고 다니는 옷차림을 보면 각 잡힌 클래식한 정장이 많았다. 잘생겨서 뭘 입어도 태가 나지만….

도현이 위에 하나만 풀고 셔츠 단추를 다 채우자 그가 바지 안에 정돈해서 넣고 소매에 도현이 고른 커프스를 달았다. 도현이 그의 목깃을 올리고 넥타이를 둘렀다.

“…….”

오늘따라 그녀가 예뻐 보이는 게 거짓이 아니다. 원래 미워 보일수록 예뻐 보이는 건지. 그녀가 그의 어머니인 지연 이바노프의 옷을 입고 그의 드레스룸에서 그가 입을 옷을 고르고 넥타이까지 매주고 있었다. 너무 예뻤다.

넥타이핀을 하고 베스트에 상의까지 입고 도현이 살짝 머리를 만져주자 당장 패션지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스타일의 젊은 남자가 딱 서 있었다. 새파란 셔츠, 자줏빛에 글래머러스한 넥타이, 밝은 회색의 정장. 커프스는 시안색에 넥타이핀은 검정이었다. 항상 머리를 넘기고 다니는 그였으나 오늘은 볼륨감 있게 세워서 앞으로 살짝 내렸다. 그의 클래식한 느낌과 세련된 옷차림이 어우러져도 고급스러운 느낌은 없어지지 않았다.

“예쁘다.”

도현이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는 인상을 약간 썼다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네가 더 예뻐.”

아름답게 차려입은 남녀가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눈의 사치다. 둘은 손을 잡고 드레스룸을 나갔다. 도현은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전에 다시 입술을 덧발랐다.

“아까 엄마가 나 묶여 있는 거 봤는데. 그냥 빨리 출근해야겠다.”

송선호는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디디자 아까 전의 일이 떠올라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하하.”

도현이 웃었다. 그렇게 성 같은 집에서 공주와 왕자처럼 유리로 만든 계단을 내려와 풍요로운 음식이 가득한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송선호가 도현의 손을 잡아당기니 마치 춤을 추듯 그의 품에 안겼다. 아침에 침실에서 일어났던 줄다리기는 잊어버렸는지 송선호는 그녀가 너무 좋아서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배 안 고파?”

“고파.”

“뭐 먹고 싶어?”

“뭐 있는데?”

사용인이 잔뜩 있을 줄 알았는데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잘 조정되어있는 모양이었다. 블랙 앤 화이트가 신비롭게 마블링 된 대리석 식탁에는 은쟁반에 과일이 잔뜩 올라가 있었고 금방 내린 커피의 고소한 향기가 가득했다. 접혀 있는 신문, 싱싱한 샐러드, 호밀빵과 버터. 그의 아침 식사는 이렇게 간결하고 우아했다.

“으음….”

쪽쪽. 그녀는 호화로운 식탁에 기대어 그의 넥타이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그가 도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열렬히 응해왔다.

“으응… 하하하…!”

그대로 끌어안고 스킨십을 잠깐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의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평소에도 이렇게 말 잘 들으면 얼마나 좋아?”

그러고 있으니 ‘으흠흠’ 하고 크게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려 둘 다 그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송영제가 못 본 척 다이닝룸으로 들어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도현이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흠흠… 도현 씨도 잘 잤어요?”

“네.”

그리고 그를 따라 지연 이바노프도 들어왔다. 그녀는 검은색의 쉬스 드레스에 베이지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서로를 발견한 여자들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에게 다가갔다.

“잘 잤어?”

“네.”

“안 맞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다.”

“옷 너무 예뻐요.”

“나보다 훨씬 잘 어울린다. 줄까?”

“정말요?”

나쁜 짓(?)을 같이 하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더니. 둘은 연령을 뛰어넘은 우애를 쌓고 있었다. 송선호는 그걸 보고 피식 웃고 말았는데 아버지는 커피를 가지러 오면서 송선호를 신문으로 툭 쳤다.

“얼굴.”

“네?”

“얼굴이 그게 뭐냐.”

아버지의 못마땅한 목소리에 송선호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당연히 도현 킬스버그의 분홍색 립스틱이 잔뜩 묻어있었다.

“아….”

송선호가 닦을 걸 찾아 주변을 둘러보니 지연이 그걸 발견하고 키친 타월을 한 장 뜯어 물을 살짝 묻혔다.

“좋을 때야.”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송선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송선호는 약간 민망해서 웃었다. 도현도 같이 닦아주었다.

“오늘 옷 도현 씨가 골라준 거지?”

“네.”

“이렇게 입어도 멋있네. 매일 무채색만 입는 것보다.”

“그죠?”

또 자연스럽게 양손의 꽃이다. 아버지가 무섭게 송선호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송영제가 상석에 앉고 송선호와 지연이 그의 양쪽에 앉았다. 도현은 송선호의 왼쪽에 앉았다. 간단하게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이야기는 지연과 도현이 나누었다.

“올해 말에는 어디로 여행 갈 거야, 도현 씨?”

“파푸아 뉴기니 거쳐서 인도네시아, 호주, 셰이셀 이렇게 가보려구요.”

“와, 너무 좋겠다.”

그러자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송영제가 물었다.

“그쪽은 아직 위험하지 않나요? 남중국해랑 너무 가까운데.”

“팔라우 해 쪽으로는 지금도 크루즈 많이 다녀서요. 괜찮아요.”

“그래요….”

그리고 도현은 지연에게 상큼하게 웃으며 권했다.

“어머니도 같이 가실래요?”

그러자 지연이 답하기도 전에 남자 두 명이 반사적으로 반대했다.

“그건 안 되지…!”

“야, 우리 엄마는….”

“…….”

그러자 지연이 두 남자를 잠시 돌아보더니만 수저를 내려놓았다. 냅킨으로 입가를 닦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날게요.”

“지연아…!”

송영제도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를 따라갔다. 남은 두 사람은 그 모습을 보다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도현은 다시 앞을 보며 커피를 조금 마셨다.

“…….”

“…….”

송선호는 그대로 도현을 보고 있는 채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송선호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난… 저렇게 안 할게.”

“뭘?”

도현이 되물었다.

“…….”

뭔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송선호가 싫어하거나 난감해할 만한 걸 귀신같이 시키거나 마구 휘두르고 난처한 상황에 있도록 만들고…. 오늘 아침만 해도 그랬다. 그녀는 송선호를 ‘지게’ 만들려고 했다. 그녀가 시키는 것을 따르도록, 그녀의 말에 고분고분하게 굴도록.

그러니까, 그게 송선호가 도현 킬스버그에게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야.’

아니다. 그건 송선호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게 아니다.

“사랑해…. 난… 그냥….”

그는 그저 그녀도 자신을 이렇게 사랑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뿐인데 어째서 이토록 전달하기 힘든 것일까. 도현은 송선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그게 웃겼던 건지 도현은 피식 웃었다. 그녀는 취향대로 잘 꾸민 한 마리의 수컷 공작 같은 송선호를 가만히 보다가 부드럽게 그의 양복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럼… 말 잘 들어?”

그녀가 요염한 기운을 풍기며 그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송선호는 내면의 갈등과 본능적인 저항감에 맞섰다. 그녀의 등받이를 꽉 잡고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침을 꿀꺽 삼키고 눈을 감았다.

“네….”

그러니 그녀가 밝게 웃으며 입을 맞췄다.

*

<1:32 PM, Saturday, April 28, 2128

도현 씨는 어제도 집에 들어오시지 않았다. 현재도 출타 중이시다. 송선호의 집에 있다고 한다. 테니스 연습을 하러 갈 시간까지는 돌아오신다고 했으니 약 2시간이 남은 것이다. 기다리기가 힘들다. 원래라면 어젯밤부터 함께 있을 수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 억울하다는 감정도 든다. 왜일까.

그녀는 일주일에 두 번씩 테니스 수업을 받았다. 저번 주부터 주말 레슨은 나와 함께 하기로 했다. 원래 그녀를 가르치던 강사는 브루넷에 잘 웃는 젊은 남자다. 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기합숙만 하지 않았더라면 수요일 레슨도 함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계약 조항 중에 훈련 프로그램에 대한 예외 조항이 있을 줄이야.>

<10:17 PM, Sunday, April 29, 2128

그녀가 샤워를 하고 있다. 짧게 쓴다. 그녀는 예전에 잠깐 강아지를 키웠다고 했다. 강아지를 훈련하는 법은 아주 간단하다고 한다. 적절한 상과 벌. 그녀가 어제오늘 송선호를 대하는 것을 보니 그 말이 기억났다. 그녀는 송선호에게도 상과 벌을 주고 있는 것일까. 질투가 난다.>

그리고 2128년 4월 30일 월요일. 다니엘 스톤하츠는 도쿄에 있는 <도쿄 TFC 돔>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는 현해탄 위를 날아가는 비행차 안에서 자신의 저널을 꺼내 손으로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8:12 AM, Monday, April 30, 2128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내 심장이 천천히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가만히 얼굴을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넘겨주면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 그녀를 당장 깨우고 싶어진다. 눈을 떠서 온종일 나만 바라봐주길 바라게 된다. 싫다는 그녀를 계속해서 흔들어 깨우는 것도 즐거울 것이다.

그녀를 두고 침대에서 일어나는 일이 가장 힘들다. 게다가 앞으로 5일 동안 나는 도쿄에 있고 그녀는 서울에 있을 것이다. 이런 게 주말 부부라는 것일까. 슬픔이란 아마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기분일 것이다.

송선호가 이사를 들어온 지 20일이 되었다. 하지만 저번 주는 내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현 씨의 낌새로는 그녀의 빚을 갚기 위해 무리를 하는 것 같다. 어떻게 선수를 치지?

조사해본 바로 KP그룹은 2055년 리자 송이 창업한 <킹앤폰>이란 콘텐츠 퍼블리싱 업체에서 시작하여 음악, 게임, 드라마, 소설, 만화 등의 콘텐츠 생산 및 유통사와 혁신적인 종합물류, 무역, 산업 B2B 등을 담당한 계열사를 가지고 있는 전천후 물류 플랫폼 기업이었다. 근래에는 마도-의학 제약 분야에 대거 투자한 거대 기업이다. 그중 송선호는 이번에 합병된 콘텐츠 생산 및 유통사업을, 그의 아버지는 유라시아를 시장으로 하는 종합물류회사 의 사장이다.

현재 신사업 투자, 지분 확보 등의 문제로 가지고 있는 자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들었다. 그것만 아니라면 사실 그가 큰소리치는 대로 도현의 빚을 갚아주고 후에 그녀가 원하는 대로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해주는 데 크게 무리가 없는 남자일 것이다. 확실히 조건이 좋은 남자다. 미르 킹쉴드야 엘 드라카에서 죽이면 된다 치더라도 송선호는 도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그 정도까지 쓰고 다니엘은 저널을 탁 덮었다. 도쿄 TFC 돔에 도착했다. 다니엘은 평소와 같이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비행차에서 내렸다.

“저번 주와 같이 9시부터 2시간 근지구력 훈련 후 30분 휴식, 11시 반부터 1시까지 근력 운동 후 점심시간, 3시부터 5시까지 연습경기가 있습니다. 저녁 먹고 나서는 1시간 동안 상황별 시뮬레이션 훈련이 있구요. 자유시간 후 10시 취침입니다.”

셀레나가 디바이스로 스케쥴을 확인하고 그렇게 말했다. 셀레나는 그의 짐을 확인하며 물었다.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건의사항이 있으시면 바로 훈련 스케쥴에 반영해주겠다고 스즈키 감독님이….”

“괜찮습니다.”

그리고 기숙사를 향해 걸어가다가 다니엘이 ‘아’ 하고 물었다.

“제 식단 말입니다. 변경할 수 있습니까?”

“네? 식단이요? 왜요?”

같이 살다 보니 알게 된 것인데 미르 킹쉴드는 식단을 선정하는데 아주 자유로운 것 같았다. 본인이 먹고 싶은 것만 먹고 나머지는 영양제로 때웠다. 어쨌든 그는 육식주의자였다. 다니엘은 의심 없이 먹던 자신의 식단에 의문을 가지게 된 차였다.

“근육을 좀 더 키우고 싶어서요.”

“네?!”

셀레나가 깜짝 놀라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흑단같이 새카맣고 긴 머리카락,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보석같은 보랏빛 눈동자, 그리고 조각 같은 몸매! 더 이상 빼고 더할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이대로 그저 완벽할 뿐이다!

“왜, 왜요? 스즈키 감독님이 키우라고 하세요? 그런 말씀은 없으셨는데….”

“아뇨. 제가 지금 만나는 여성분이 이것보다는 더 큰 근육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

삐삐 머리가!! 셀레나는 분노했다. 키, 몸무게, 쓰리 사이즈까지, 다니엘 스톤하츠의 미모란 지금 이 상태에서 가장 빛난다는 걸 어째서 모르는가! 심미안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세계 평화에 대한 반역이다!!

“다시 한번만 생각해보면 안 될까요? 그런 건 자존감의 문제에요. 스스로는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죠.”

셀레나 카토가 세상 진지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비록 그를 그 삐삐 머리에게 빼앗기고 말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로, 이건 다년간 그를 보필하면서 쌓아온 셀레나의 업적을 무너뜨리겠다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그때 누군가 걸어왔다.

“여! 셀레나 짱~”

치엔이 루카스였다. 그는 기숙사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적갈색 광택이 나는 연습용 전투복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셀레나는 곧바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루카스… 하하. 좋은 아침입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사람 맘 상하게.”

“아뇨. 제가 요새 좀 바빠서….”

셀레나는 슬금슬금 다니엘 쪽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바빠? 평생 안 바쁘게 해줄까? 나 돈 많은데?”

“아뇨…! 전 제 일이 좋아서….”

전에 다니엘을 따라 치엔이 루카스의 집에 간 것은 생각보다 큰 충격이었다. 그녀는 이스트드래곤의 선수들을 관리하는 매니지먼트에 문제를 제기하는 보고서를 올렸지만 가벼운 권고 정도로 끝났다. 애초에 선수와 GAS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누가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주의라… 일반인을 건드리는 건 조심하라는 정도로 여느 사창가와 별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거기서 매니저의 입지라는 건 문제 상황이 생겼을 때 이쪽 업계에서의 모든 커리어를 포기할 각오를 하고 나서나 경찰에 신고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셀레나는 그날 이후로 묘하게 친한 척을 해오는 치엔이 루카스가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다. 아니, 솔직히 무서웠다.

“흐응~”

루카스는 짖궂게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장난스럽게 다가갔다.

“왁!”

“꺅!”

그가 한 걸음 내디디며 놀라게 하자 셀레나는 곧장 다니엘에게 안기며 소리를 질렀다. 다니엘이 그녀의 등을 안으며 입을 열었다.

“뭐 하는 거냐, 루카스.”

“킥킥. 재밌잖아.”

“안 재밌어요…!”

셀레나는 정색하고 외쳤다. 다니엘은 그녀의 등을 안은 채 물끄러미 루카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개구진 소년처럼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어떤 여자를 우습게 보는 것은 그 여자를 ‘소유’하고 있는 남자를 우습게 보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특히나 그것이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이 TFC의 세계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런 미개하고 야만적인 세계 속에 있다고 해서 그 룰을 따르는 것도 아니었고 자신이 그녀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런 그에게도 셀레나 카토는 특별했다. 없으면 엄청 불편하다. 다니엘이 경고했다.

“앞으로 셀레나에게 접근하지 마라.”

“뭐? 네가 어쩔 건데?”

그는 셀레나의 머리카락을 만지려고 했다. 그녀가 기겁하며 다니엘의 품에 파고들었다.

“야, 그러지 말고 한 번….”

루카스는 또 그렇게 셀레나에게 추근거렸다. 다니엘은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월요일의 다니엘은 그다지 심기가 좋지 않다.

“응?”

루카스는 잠깐 헛디딘 듯 휘청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서 피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무릎을 쾅 찍으며 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야…! 야야야! 잠깐만!! 스톤하츠…!!”

퍽! 루카스는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지만 그대로 팔꿈치를 콘크리트 바닥에 찧었다. 언제나 유유자적한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핏줄이 강하게 섰다. 그가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했지만 애꿎은 바닥 타일만 깨졌다. 곧 얼굴도 쿵 찍더니 파직 소리가 나며 콘크리트 바닥이 둥글게 움푹 팼다.

다니엘은 그를 발밑을 기어가는 개미만도 못하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이 짐승들은 사람 말로 해봤자 통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통하는 것이라곤 결국 힘이라는 언어뿐.

“야…!! 윽! 으읍….”

그는 콘크리트 바닥에 얼굴이 짓눌린 채로 온몸의 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려 힘을 주는데도 미동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대로 납작 바닥에 붙었다.

“다, 다니엘….”

셀레나는 그걸 보고 있다가 살짝 겁이 나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치엔이 루카스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습관적으로 재미없는 TV 프로그램이라도 보는 듯 무심하고 단조로운 얼굴이다. 그래서 더 잔혹해 보였다. 그리고 한 번 더 쿵 하는 소리가 나더니 치엔이 루카스에게 가해지는 중력이 더욱 강해졌다. 그는 아예 뻗어버렸다. 그리고 몇 초 뒤 다니엘이 품에 있는 셀레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마음이 좀 풀리셨습니까?”

“네? 네….”

“그럼 그만할까요?”

셀레나는 약간 당황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약간 무뚝뚝하면서도 예의가 깍듯했다. 그녀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가 몇 번 더 빠르게 끄덕였다. 그러자 거짓말 같이 중력 이상이 사라지고 치엔이 루카스가 커헉하며 숨을 내뱉었다. 죽진 않은 모양이다. 그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괴물 새끼….”

그는 그리고 콘크리트 가루를 뱉었다. 셀레나는 그대로 다니엘의 얼굴을 넋 놓고 올려다보고 있다가 깨달았다. 그녀는 다니엘 스톤하츠와 포옹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펑하고 빨갛게 되었다. 다니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괜찮습니까, 셀레나? 얼굴이 갑자기 빨개졌습니다.”

“아…! 아뇨…!”

셀레나는 후다닥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후회했다. 좀 더 안겨 있어야 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콩닥거렸다. 다니엘은 바닥에서 미물처럼 꿈틀거리는 루카스를 무심히 버리고 다시 갈 길을 재촉했다.

“…….”

셀레나는 다니엘의 짐을 품에 꼭 앉은 채로 여전히 긴장해서 걷고 있었다. 그녀는 앞을 보다가 다니엘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다니엘 스톤하츠, 24세. 마도사 용병 출신. 대인전 전문으로 3차 중러 전쟁 등에서 혁혁한 전공. 마도의사 라이센스 소지. 최신 마도 과학에 정통하여 다수의 국가 및 대형 병원, 연구소, 기업에서 러브콜이 쇄도하는 전천후 천재 마도사.

거기에 그의 아름다운 용모는 수많은 여성들을 밤잠 못 이루게 할 정도다. 말수가 적은 것도 남자답고 멋있기만 하다. 아니, 남자란 원래 말수는 적어야 한다. 그는 이 야만스럽기 그지없는 TFC 세계, 아니, 이 야만스럽기 짝이 없는 세상 남자들 중에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DNA를 타고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세계 최강의 남자였다.

그리고 이웃 나라 모 클럽의 모 선수가 언급했듯, 본디 여자란 최고의 알파 메일에게만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다니엘….’

야만이 상식처럼 통하는 이 업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신사였다. 아니, 다니엘 스톤하츠가 진정으로 대단한 점은 그가 야만의 세계와 문명사회 모두에 깊은 이해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치엔이 루카스 같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남자와도, 현대 문명 사회를 이끌어가는 선진 과학자와도 적절하고 유익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

다니엘은 탈의실로 들어갔다. 셀레나는 탈의실의 밖에 서서 그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늘도 너무 멋져!’

귀가 밝은 소드마스터 투성이니 그녀는 입을 막고 속으로 환호했다.

*

“어, 스톤하츠 씨!”

옷을 갈아입고 잔디밭으로 나가니 먼저 나와 체조를 하고 있던 신태호가 반가운 얼굴로 말을 걸었다.

“오셨어요?”

“그래.”

신태호가 강아지처럼 뛰어오자 다니엘이 자신보다 23cm나 작은 그의 머리 위에 턱 하고 손을 올렸다.

“저번 주 제 성적 보세요. 13등 했어요.”

“그래.”

“2주 전보다 2등 더 올랐어요.”

“그래.”

“전에 주신 과자 너무 맛있어서 도현 누나한테 물어봤더니 100박스나 보내주셨어요. 감사하다고 꼭 좀 전해주세요.”

그건 로웰 리가 보낸 것이다. 다니엘이 대꾸했다.

“그래.”

다니엘은 여느 때처럼 무뚝뚝했지만 신태호는 그것만으로도 기쁜지 밝게 웃었다. 원래도 어린애지만 정말 어린애 같다. 그는 한참 재잘거렸다.

시즌 중만 아니라면 신태호는 기본적으로 활기찬 편이었다. 그는 사회로 돌아와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했다. 사이즈는 작아도 기본이 소드마스터라 에너지가 넘친다. 게다가 주변에는 철 안 들고 사고만 치는 맹수 같은 형들이 우글거리니 주변도 에너지가 과부하 되어있었다.

“자.”

코치들이 휘슬을 불며 선수를 불러 모았다. 신태호는 귀를 쫑긋 세우며 돌아보았다. 그는 뛰어가고 다른 선수들은 어슬렁어슬렁 모였다.

“오늘은 F 코스다. 디펜스랑 미드필더는 9바퀴.”

오펜스는 1바퀴다. 2시간 이내에 보통 사람이 코스 하나를 도는 것도 사실 초인적인 것이다. 다들 가볍게 몸을 풀었다.

“먼저 들어오는 대로 휴식한다.”

코치들은 각각 차에 올라탔다.

“내가 오늘도 일빠다.”

카흐 밀란이 쭈욱 몸을 늘이며 동시에 하품을 했다. 치엔이 루카스는 아까 전의 봉변에도 큰 문제는 없었는지 좀 컨디션이 안 좋은 얼굴로 목을 돌릴 뿐이었다. 신태호도 심기일전했다.

“오늘은 10등~!”

아침 마라톤에서 그는 언제나 14등에서 18등 정도를 했다. 오펜스까지 합쳐도 2m 전후의 근육질에 훤칠한 선수들 가운데 있는 신태호는 말 그대로 쥐콩만 했다.

그리고 양복을 빼입은 스즈키 감독이 곧 신호했다. 카흐 밀란은 신태호의 몸을 뒤로 확 밀어내며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선수를 따라 차가 달렸다. 신태호는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스타트 라인보다 뒤로 몇 미터나 쳐졌다. 신태호가 허리를 튕겨 바로 섰다.

“카흐 혀엉…!”

신태호가 그대로 잔디밭을 헤집으며 두다다다 달려갔다. 바람을 확 일으키며 오펜스진을 지나 앞으로 달려가는 신태호였다. 어차피 차로도 못 따라잡는다. 돔을 빠져나간 소드마스터들의 순간 최고 속도는 치타의 그것도 가뿐히 뛰어넘고는 했다. 게다가 지구력은 당연히 치타랑 비할 바가 아니었다.

1시간 50분쯤이 되어 다니엘 스톤하츠가 TFC 돔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거의 모든 소드마스터들이 돌아와 있었다.

“아, 형만 아니었어도 이번엔 10등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너랑 우리랑 다리 길이 차이를 봐라. 아직 한참 멀었다.”

“어… 그런가…?”

그런 문제인가…. 잔디밭에 늘어져 앉아 휴식을 취하던 신태호가 순진하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대로 카흐가 그의 이마를 잡고 바닥에 눌렀다.

“형들이 키 키워줄까?”

“오.”

“으…! 아악! 혀어엉!!”

카흐 밀란이 그의 머리를 잡고 루카스가 그의 두 발을 잡고 잡아당겼다. 말하지 않아도 트러블메이커 둘은 쿵짝이 맞았다. 곧 미드필더인 제시 팔마가 신태호의 오른팔을, 레프트 포워드인 카알 아이젠이 왼팔을 잡았다.

“자, 잠깐만…! 아악! 아파!! 놔줘!!”

“킥킥.”

그들이 훈련을 하거나 저렇게 장난을 칠 때 보면 고양잇과 맹수들이 노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보통 덩치가 큰 다른 소드마스터들이 신태호를 툭툭 치며 장난을 걸었다. 신태호는 그런 장난에 매일같이 엄청 당했다. 그리고 때로는….

쿵! 쿵콰광! 콰광!!

그대로 관중석 벽에 다섯 명의 소드마스터들이 대포처럼 날아가 부딪쳤다.

“헉… 허억. 주, 죽을 뻔했다….”

말 그대로 능지처참을 당할 뻔했다. 신태호가 욱신거리는 팔다리를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같은 소드마스터들끼리라지만 사람 팔다리 정도는 당근 뽑아내듯이 뽑아낼 수 있는 남자들이다. 사지가 멀쩡한 걸 확인한 신태호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 어… 카흐 형…!”

신태호는 날아간 형들을 챙기러 총총 뛰어갔다. 그는 기절한 카흐 밀란을 발견하고 ‘어…’ 하면서 스즈키 감독을 돌아보았다. 스즈키 감독은 인상을 쓰더니 손짓했다. 들것이 다섯 개 들어왔다. 게다가 쉴드를 켜지 않아 관중석도 망가졌다.

“자자. 집중하고. 수분 섭취하고 스트레칭 후 마사지 받는다.”

다들 이런 일은 익숙했다. 코치들이 박수를 치며 매니저와 함께 각자의 선수들에게 다가갔다. 다니엘도 숨을 고르고 자리에 앉았다. 코치와 매니저가 다가왔다. 셀레나가 홀로그램을 띄우고 다니엘의 몸 상태를 확인하며 그의 입가에 텀블러 빨대를 댔다. 적절한 양의 전해질을 탄 물이었다. 코치는 그가 스트레칭 하는 걸 도왔다. 야마모토 야기라는 이름의 코치는 잔디에 누운 다니엘의 다리를 한쪽씩 들어 스트레칭 했다.

“거참, 태호도 계속 저럴까요?”

야마모토 코치가 물었다. 셀레나가 다니엘의 바이털 수치를 확인하며 대꾸했다.

“글쎄요. 그래도 좀 나아진 거라고는 하는데….”

셀레나는 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다니엘에게 음료를 주었다.

“저쪽 매니저들한테 물어보니 아직 나이가 어려서 더 그렇다고 하더라구요. 아마 나이가 더 들면 괜찮을 거라고 해요.”

“그럼 다행인데… 거참, 태호 저러는 거 보면 가끔 무서워서.”

셀레나는 들것에 실려 나간다는 선수들을 따라가다가 코치에게 붙잡히는 신태호를 바라보았다. 그 뒤 근력 및 순발력 훈련을 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셀레나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다니엘에게 신태호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같이 먹어도 돼요?”

“앉아요, 태호 군.”

셀레나가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다니엘도 별말이 없었다. 아침만 해도 활기찼던 신태호는 아까 전의 일 때문인지 좀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태호 군, 너무 그러지 마요. 다들 튼튼해서 다치지도 않았잖아요. 쉰다고 엄청 좋아하던데.”

“그래도….”

“태호 군….”

셀레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다니엘을 힐끗힐끗 보았다. 다니엘은 그것을 눈치채고 셀레나를 보았다가 옆에 앉은 신태호를 보았다. 그는 신태호의 머리에 조각 같은 자신의 손을 턱 하니 올렸다.

“괜찮아. 더 좋아질 거니까.”

그 남자들은 언제든 아무 이유 없이 맞아도 싼 놈들이었다. 그건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스톤하츠 씨….”

신태호는 그를 동경하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나도 스톤하츠 씨처럼 무겁고 멋있어질 수 있겠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의연하게….’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의 마음속 멘토였다. 옆에서 뜬금없이 폭탄이 터져도 눈 하나 깜박 안 하는 남자였다. 그 정도의 의연함을 신태호도 가지고 싶었다. 다니엘은 그의 머리를 토닥토닥 몇 번 더 두드렸다. 그리고 식사를 다한 다니엘은 먼저 일어났다. 셀레나는 그 모습을 웃는 얼굴로 배웅하고는 계속해서 그의 모습을 감상했다. 그리고 신태호에게 말했다.

“보기 좋네요. 다니엘이 이렇게 누구 챙기는 거 본 적이 없는데…. 태호 군이 다니엘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요.”

“정말요?”

신태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셀레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태호를 대하는 다니엘 스톤하츠의 태도는 다른 동료 선수들을 대하는 것과 매우 달랐다. 애초에 대꾸를 해준다는 것부터. 다니엘은 원래 해야 할 훈련만 하고 동료들과는 거의 교류가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도쿄 TFC 돔 파파라치 사진을 보면 동료들은 그에게 친근하게 굴지만 본인이 동료들을 철저하게 왕따시키는 것을 곧잘 볼 수 있었다. 그는 조각처럼 아름다운 만큼 인간미가 없었다.

“스톤하츠 씨….”

그 말은 자신이 특별하다는 말일까? 신태호도 식당을 나가는 다니엘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셀레나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두 천재는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분명했다.

다니엘은 식당을 나가며 디바이스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문자를 보냈다.

<로웰 선생님, 신태호와의 팬미팅 자리는 조만간 마련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옛말에 장수를 잡으려면 말을 쏘라고 했다.

*

신태호가 이스트드래곤에 입단한 지도 어언 1년 반이 넘었다. 다 커도 이렇게 잔뜩 모여서 합숙 생활을 하면 생각보다 꽤 추억거리가 쌓이는 법이다.

“태, 태호야!”

“으악! 꼬맹아! 저, 저기!”

앞머리가 살짝 긴 새카만 머리카락에 새카만 눈동자를 한 카흐 밀란과 미드필더인 회색 머리의 제시 팔마가 룸메이트인 신태호의 작은 등 뒤에 숨어서 호들갑을 떨었다. 둘 다 키가 2m 전후였다. 그들은 신태호를 두 손으로 잡고 마구 흔들었다. 힘이 장사라 덩치가 작은 신태호가 종잇장처럼 흔들렸다.

“알았으니까 좀 놔봐.”

신태호는 덩칫값 못 하는 형들을 한심한 얼굴로 돌아보고는 슬리퍼를 집어 들었다.

“바퀴벌레가 뭐가 무섭다고.”

22세기에도 바퀴벌레의 완전박멸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신태호는 벽을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를 보고는 슬리퍼를 정조준했다. 곧바로 슬리퍼가 무슨 강속구처럼 날아가 바퀴벌레를 처치했다.

“악!!”

“씨발!!”

끔찍해! 바퀴벌레가 찌그러지는 소리를 듣고 두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신태호는 슬리퍼와 바퀴벌레의 시체를 수거하러 티슈를 뽑아 다가갔다.

“깨, 깨끗이 닦아? 어?”

카흐가 싫다면서도 신태호의 티셔츠를 잡고 뒤를 따라오며 당부했다.

“형들이 방에서 뭐 안 먹으면 안 나온다고.”

“알았으니까 더 봐봐. 더 있나 봐봐.”

카흐는 신태호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머리가 울린다. 신태호는 매우 심드렁한 얼굴로 바퀴벌레의 시체를 처리했다. 그리고 휴지통에 버리려고 하니 제시가 소리쳤다.

“밖에다 버려, 밖에!”

바퀴벌레가 사망한 걸 확인한 그는 자기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러고 있었다.

“네, 네.”

신태호는 밖으로 나가 공용 휴지통에다 죽은 바퀴벌레 시체를 버리고 손을 씻고 돌아왔다. 그간 카흐 밀란은 제시 팔마가 올라가 있는 침대를 번쩍 들어서(…) 바퀴벌레가 더 있나 확인해보고 있었다.

“어, 없어?”

“없다….”

카흐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그 모습을 신태호가 아까보다 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셀레나나 구단은 아직 어린 신태호가 다른 동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종종 걱정하곤 했지만 신태호는 동료들이 좋았다. 그들은 강한 남자들이었다. 강한 사람들은 언제나 신태호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쉽게 죽지 않을 거니까. 처음 이스트드래곤에 영입되어 그들을 보게 되었을 때의 느낌이 생생하다. 쟁쟁한 강자들의 냄새. 태어나 처음으로 안전한 곳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에휴….”

신태호가 대놓고 한숨을 푹 쉬자 카흐 밀란이 턱 하고 침대를 밑에 내려놓았다.

“버리고 왔어?”

“어….”

“손 씻고 왔어?”

“씻고 왔어.”

“태호야, 방 한 번만 더 살펴봐라, 어?”

“없다고. 소리도 안 들리잖아.”

“그, 그래도!”

그렇게 강하면 뭐 하나.

기본적으로 형들은 바보였다.

‘저런 남자는 안 되어야지.’

오늘도 그렇게 결심했다. 신태호는 자기 침대로 올라가서 얌전히 이불을 덮고 읽던 책을 펼쳤다. 카흐 밀란은 그의 침대 위로 올라와 그의 옆에 누웠다. 머리를 손으로 괴고 그가 읽고 있는 것을 훔쳐보았다.

“이런 게 재밌냐?”

“아니… 전에 스톤하츠 씨가 읽으셔서 샀는데….”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자요… 사전도 찾아보고 몇 번이나 다시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책을 꾸역꾸역 읽고 있었다. 두 장도 채 읽기 전에 꾸벅꾸벅하더니 신태호는 곯아떨어졌다. 훔쳐보던 카흐 밀란은 한 장을 읽던 시점에서 이미 잠들었다. 온몸의 근육통이 기분 좋게 수마를 끌어들였다. 그대로 다들 미동도 없이 잤다.

그리고 8시간 뒤, 기상 방송이 울리자 모두들 괴로워했다.

“아, 씨팔… 노래 좀 바꾸라니까.”

신태호의 침대에서 같이 잠들었던 카흐가 베개로 양쪽 귀를 막으며 신음을 흘렸다. 신태호는 노래가 울리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비몽사몽 한 얼굴을 했다.

‘밥….’

배가 고팠다. 어째서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것일까. 제일 궁금하다. 신태호는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일어나서 식당으로 향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냄새로 따라갈 수 있다. 식판에 오늘 준비된 모든 음식을 가득 올리고 먹기 시작했다. 곧 다른 선수들도 어슬렁어슬렁 나왔다. 보통 제일 늦게 나오는 것은 오펜스진인 마도사들이다. 소드마스터의 체력, 근력, 소드오라 등은 모두 밥심에서 나오는 모양이라 다들 기상나팔이 필요 없었다. 배가 고파서 어쨌든 다 기어 나온다.

신태호는 1차로 밥을 한 번 먹고 다시 배식을 받으러 갔다. 아까보다 더 음식을 쌓고는 돌아왔다. 다 먹고 한 번 더 먹었다. 그리고 샤워실로 향했다. 씻고 양치하고 방으로 돌아왔더니 침구가 새 걸로 다 바뀌어 있었다. 신태호는 다시 침대에 퍽 쓰러졌다. 그리고 그대로 1시간을 다시 잤다. 또 기상나팔이 울렸다. 소화를 겸해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선수들이 다시금 흐리멍덩한 얼굴로 일어났다. 이제 훈련시간이다. 신태호는 다시 벌떡 일어났다. 또 눈도 제대로 못 떴다.

‘오늘은 10등….’

그는 발을 움직여 운동장으로 나갔다.

“신태호.”

196cm에 기다란 머리카락, 조각 같은 얼굴과 몸매, 다니엘 스톤하츠가 그를 불렀다. 신태호는 이름이 불린 강아지처럼 그에게 다가갔다.

“네.”

“인사해라.”

“어, 도현 누나.”

[안녕, 태호야.]

[신태호 님!!!]

신태호는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한 얼굴로 화면 속의 두 여자에게 인사했다. 잠깐 그렇게 스몰토크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니엘은 화면을 끄고 도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 네… 저도 보고 싶습니다.”

평소와 같이 무표정했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만큼은 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신태호는 그런 다니엘이 낯설기도 하고 신기해서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화요일도 열심히 훈련을 했다. 저녁 시간이 되었을 때쯤 어쩐지 매니저들이 웅성웅성거렸다.

“와, 진짜 큰일 났다. 그쪽 나라들은 어떡해.”

“저렇게 큰 건 처음 봐요.”

뭘까? 신태호는 잠깐 고개를 갸웃했지만 장난을 거는 카흐 밀란 때문에 곧바로 정신이 산만해졌다.

“뭐하냐, 땅꼬맹이!”

“악! 형!!”

신태호는 그를 마구 쫓아갔다. 선수들은 대체로 훈련이나 본인 일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인생 초년을 대체로 막장으로 보낸 이들이 많아 대부분이 남 일이나 미래에는 다소 신경을 쓰지 않는 쾌락주의자인 것이다.

다니엘도 저녁을 먹고 시뮬레이션 훈련을 하고 있었다. 기계에 들어가 VR을 이용한 훈련에 집중하는데 갑자기 다니엘 스톤하츠의 시뮬레이션이 꺼졌다.

“스톤하츠.”

그리고 누가 다니엘이 들어가 있는 기계의 겉면을 손등으로 쳤다. 기계에서 나오고 보니 스즈키 감독이었다. 그는 디바이스를 귀에 대고 통화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시뮬레이션 훈련도 낮에 하는 모의 시합과 같이 다른 선수들과 합을 맞춰서 하는 것이라 다른 일이 있어도 한 선수만 빼내거나 하는 일은 없다.

“이거 받지.”

“?”

다니엘은 그에게서 디바이스를 건네받았다.

[다니엘 스톤하츠 씨?]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다니엘이 대꾸했다.

“누구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스톤하츠 씨. 세계물리학회 비서관 한민유라고 합니다. 통화 가능하십니까?]

아니, 훈련 중인 선수를 이미 불러 내놓고 지금…. 다니엘은 당황했지만 세계물리학회가 어떤 조직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이제와서….’

다니엘은 ‘아주 약간’ 긴장했다.

“네.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 학회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다고 생각됩니다. 전화상으로는 좀 그렇고… 지금 만나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지금 말입니까?”

[예, 거의 다 와갑니다.]

다니엘은 VR 시뮬레이션 기계에서 나와 일단 샤워를 하러 갔다.

“그냥 가지? 바쁜 모양이던데.”

스즈키가 말했다. 다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씻겠습니다.”

다니엘이 샤워실에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감독실에 아까 통화를 한 걸로 보이는 여자가 하나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각이 딱 떨어지는 정장을 입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 스톤하츠 씨. 통화한 한민유라고 합니다.”

“…….”

다니엘은 그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한민유라는 젊은 여자는 미인으로 갈색 머리카락에 단정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원래 팬이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네요.”

그녀가 웃는 얼굴로 그렇게 대화를 시작했다.

“그럼 실례가 안 된다면 감독실 전체에 전파와 소리가 차단되는 쉴드를 씌워주실 수 있을까요?”

“…….”

다니엘은 그 말대로 했다.

“본론부터 말씀드리죠. 이번에 지중해 게이트 발생과 관련하여 우리 학회 박사님 한 분이 납치되는 사고가 일어나서요.”

지중해 게이트? 그런 게이트도 있었나. 다니엘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하지만 마도물리학자가 납치되었다는 부분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큰일이군.

“몸값으로 마도물리학자를 보내 타이탄을 처리해달라는데, 그건 학회 방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용병이 필요하다는 겁니까?”

예전에도 능력 있는 마도사들이 납치되는 일은 종종 신문을 타곤 했다. 그리고 그에 대하여 많은 나라들은 테러와는 협상을 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했다. 러시아의 마도물리학자를 납치했던 테러 단체가 결국 어떻게 됐는지는 다들 알 것이다.

“네. 가볍게 아르바이트로 생각해주시면 좋죠.”

다니엘은 입을 다물었다. 표정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탐탁지 않았다.

“타이탄을 처리하려면 중력 마법을 써야 할 텐데, 원래 학회는 마도사들이 연구 외 용도로 중력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민유는 그의 질문에 눈을 한 번 깜박했다가 미소를 지었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 그리고 스톤하츠 씨는 아직 우리 학회 소속이 아니시니까요.”

다니엘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보수는 넉넉하게 드릴 수 있습니다. 요새 돈 필요하시다고 들었습니다. 기업이나 연구소 쪽에서 용역을 많이 하신다구요?”

이때는 정말 인상을 찌푸렸다. 다니엘이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지금 제 뒷조사를 하셨다는 말입니까?”

그녀는 웃는 얼굴로 두 손을 가로저었다.

“뒷조사라기보단 그저 물어보고 다닌 거죠. 저희 학회장님께서 다니엘 스톤하츠 씨를 예전부터 눈여겨 보고 계셨거든요.”

“…지금 학회장이면 캘리 박 교수님 말씀이십니까?”

“네.”

다니엘은 살짝 할 말을 잃었다. 예전에는 그녀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되어 그들의 앞에 설 수 있을 줄 알았다. 예전부터 날 알고 있었다고? 세계물리학회가 다른 학회와는 전혀 다른 조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다니엘 스톤하츠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사회에서의 그는 그저 한 명의 시민일 뿐이었다. 인간들의 세계에서 조직은 조직이기 때문에 무서운 점이 있었다.

‘세현 퀸 교수가 납치된 건가? 그럼 이런 분위기가 아닐 텐데.’

어렸을 때 닳도록 읽었던 게 캘리 박 교수와 세현 퀸 교수의 중력 마법 논문과 4대 힘 변환 논문이었다. 그 당시의 다니엘 스톤하츠는 말 그대로 신이 되고 싶었다.

우주에는 4가지의 힘이 존재했다.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 그중 뒤의 세 가지는 한때 하나였다. 이를 초강력이라 부르는데 이 상호작용이 태초에 우주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억겁의 시간이 지나 4가지의 힘 중 가장 약한 중력이 모든 것을 수축시켜 다시 하나의 점으로 되돌릴 것이다. 4가지 중 중력은 이미 그 비밀을 파헤쳐져 마도로 해석, 구현까지 성공한 시점에 와있었다.

어릴 적 다니엘 스톤하츠는 지금과 달리 성격이 ‘매우’ 급했다. 보통의, 그것도 머리가 아주 좋은 마도사가 걷는 정석적인 길을 따라가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개척했다. 10대 후반, 그는 전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들 중 극소수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전부 그의 생각대로 되어가는 것 같았다.

물론 결과는 대량살인마의 탄생일 뿐이었지만.

“인질극을 벌이는 국가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동시에 인질을 구출해야 하는 복잡한 작전입니다. 능력이 출중하시고 전적이 훌륭하시니 이렇게 의뢰를 드리는 겁니다.”

한민유가 디바이스로 홀로그램을 띄웠다. 국가기밀정보라는 표지부터 떴다. 다니엘은 가만히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750억.”

“…네?”

“750억 주면 하겠습니다.”

그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간 과거였지만 후회는 없다. 다시 예전처럼 벌레 죽이듯 사람을 죽이라고 해도 다니엘 스톤하츠에게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할 생각이었다. 그는 우선 송선호를 제쳐야 했기 때문이다.

*

5월 4일 금요일 저녁, 다니엘 스톤하츠는 메트로서울로 돌아왔다. 비행차를 타워에 주차하고 거기에 있는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차는 곧 메트로 서울의 외곽순환로에 진입했다. 그것만으로도 어쩐지 기분이… 뭐랄까. 지금까지도 한국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러시아든 먹고 자고 지내던 곳은 있었지만 이처럼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을 가지게 된 건 어렸을 적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다른 사람이 집이라는 것에 어떤 감정을 가지는지는 모르나 다니엘 스톤하츠에게 집이란 도현이 있는 장소였다. 곁에 있으면 그가 한 명의 남자가 될 수 있는 곳이다.

그가 차에서 내리자 차는 저절로 주차장에 들어갔다. 그는 조수석에서 꽃을 한 다발 들고 내렸다. 도현은 꽃을 좋아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옷이나 다이아몬드처럼 값비싸지도, 미식처럼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그리고 그녀가 새하얀 꽃을 껴안고 웃는 얼굴을 보면 딱딱한 그의 심장도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남자는 한 다발의 꽃을 손에 쥐고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거실은 비어있었다. 바로 침실로 향했다. 없다. 2층으로 올라갔다. 거실에 작업실을 차린 로웰이 어시들과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선생님.”

“어… 스톤하츠 씨….”

로웰이 칙칙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데리고 사는 사람이 빚이 많으니…. 도현이야 전이든 지금이든 대체로 상큼한 컨디션이었지만 로웰은 죽어나갔다.

“도현 씨는 어디 계시는지 아십니까?”

“3층에 있을걸요….”

로웰은 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리켰다. 다니엘을 계단을 더 올라갔다. 3층 테라스로 가니 공중에 매달려있는 의자가 흔들거리는 게 보였다. 다가가니 그 안에 도현이 잠들어 있었다. 글을 쓰다 잠든 모양이다.

“도현 씨.”

다니엘은 그녀를 불렀다.

“도현 씨.”

도현 킬스버그는 다니엘의 목소리에 설핏 잠이 깨었다가 잠결에 중얼거렸다.

“기다려요….”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잠들었다. 다니엘은 그대로 거기 선 채 그녀의 말대로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다리가 욱신거렸다. 다니엘은 그녀를 한 번 더 깨워도 될지 안 될지 몹시 고민하고 있었다. 그쯤 드디어 도현이 깨어 하품을 크게 하면서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서 있는 다니엘을 발견했다.

“그렇게 서서 뭐하고 있어요?”

“…….”

그녀는 자신이 서 있으라고 다니엘에게 ‘명령’한 걸 까먹은 모양이었다. 다니엘의 마음속 걸쇠가 잠시 꿈틀했다.

때때로 그는 그녀를 적절하게 ‘교육’시키고 싶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게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가진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 남자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건 다니엘이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가르쳐주고 싶었다.

하지만 가르쳐주고 싶지 않았다.

“으음~ 요새 날씨가 좋으니까 자꾸 잠이 오네요.”

도현이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다니엘은 그녀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석고처럼 무기질적이고 아름다운 얼굴이다. 오로지 보석 같은 그의 보랏빛 눈동자만이 빛났다. 그의 손이 그녀의 눈 밑에 닿았다가 천천히 그녀의 뺨을 감싸 잡았다. 그러자 그녀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허락도 없이?”

도현은 부드러운 나무를 엮어 만든 커다란 열매처럼 생긴 의자 속에 앉아 손을 뻗어 작은 테이블 위에 있던 음료가 든 잔을 잡았다. 그녀는 그것을 바닥에 천천히 쏟았다. 음료는 그녀의 발 바로 아래쪽으로 흘렀다.

“다니엘 씨, 칠칠치 못하게 흘리면 어떡해요.”

그리고 도현은 그렇게 말했다.

“깨끗하게 치워요.”

다니엘은 아까 전부터 서 있어 아픈 다리를 굽히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의 발 아래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바닥에 쏟아진 음료를 핥았다. 도현의 발이 그의 뒤통수를 밟았다. 그는 더욱 납작 엎드려야 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도현의 부드러운 발가락이 그의 멋진 턱을 쓸며 훅 들어 올렸다. 이런 건 역시 설렌다. 처음의 그녀라면 이런 건 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도현은 잠깐 그의 보랏빛 눈동자와 아름다운 얼굴을 감상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뭐든지 괜찮습니다.”

“나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그러자 다니엘이 곧바로 답했다.

“예뻐서 좋습니다.”

그러자 도현이 소리를 내서 웃었다.

“하하하. 이 남자 또 어디서 뭐 배워왔어.”

그녀가 웃었다. 잘한 모양이다. 다니엘도 약간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는 항상 옳았다. 도현은 다니엘의 어깨에 허벅지를 걸치며 그의 등을 끌어당겼다.

“웃지 말아요. 웃어도 된다고 안 했잖아요.”

다니엘은 다시 뚝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도현은 그의 쭉 뻗은 목을 쓰다듬다가 셔츠 속으로 쑥 손을 집어넣었다.

“오늘은 뭐 하고 싶어요?”

그녀가 물었다.

“도현 씨가….”

도현이 하고 싶은 거라고 대답하려고 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저번에 이 말은 금지당했다. 다니엘은 곰곰이 생각했다. 뭔가 떠올랐다. 약간 주저했다. 말하면 그녀가 싫어할 것 같다. 그런 고민을 하는 다니엘의 얼굴은 어쩐지 평상시와는 다르게 생기가 있고 인간적이다. 도현은 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베베 꼬며 그를 감상하고 있었다.

“역시… 제대로 뺨을 맞아보고 싶습니다….”

다니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현이 눈을 한 번 깜박했다.

“정말 맞고 싶나 보네.”

“…….”

맨 처음에 말했던 것도 결국 그거였다. 말 좀 해보라고 하면 항상 이거다. 도현은 손을 들어올렸다. 다니엘은 언제나처럼 기대로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연습이 완벽을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선은 확실히 된다. 그녀는 전처럼 많이 주저하지 않고 곧 그의 따귀를 때렸다. 그의 하얀 피부에 벌건 자국이 생겼다. 다니엘의 고개가 돌아갔다가 다시금 바로했다. 이번에는 제법 아파서 맞는 순간 짜릿했다가 화끈거린다.

“어때요?”

확실히 나아졌다. 하지만 다니엘은 약간 정색했다.

“이런 게 아닙니다. 감정을 힘껏 담아야 합니다.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어서 욱하고 때리는 게 좋습니다.”

“음… 그럼 이렇게요?”

“윽… 이것도 아닙니다.”

이제 다니엘 스톤하츠는 능숙한 매저키스트…는 아니더라도 ‘좀 더’라는 말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욕망에 당황했던 그였지만 차츰 자신을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도현의 덕이 절대적이었다.

다니엘은 그녀의 자유로움이 좋았다. 자유로운 것은 그녀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음에도 그늘이 없다. 남은 것은 이제 그림자뿐인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에게 그녀는 빛이고 소금이었다.

“이것도… 아닙니다.”

뺨이 퉁퉁 부을 정도로 맞았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가 계속 부정만 하자 도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라면서 이건 뭐예요?”

도현은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그의 다리 사이를 콱 밟았다.

“윽….”

다니엘의 청순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색기가 어리며 인상을 약간 썼다. 그녀는 다니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변태.”

아팠다. 온몸이 저릿했다. TFC 선수였지만 그는 아픔에 무뎠다. 세상에 무감각한 그는 자기 자신에게도 무감각했다. 하지만 그녀와 같이 있을 때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맨발 그대로 다니엘의 급소를 발로 밟고 있는 채다.

“이런 게 좋은 거잖아요. 사실 돔보다 섭이 더 좋은 거였어. 요구하는 게 많은 건 결국 다니엘 씨야. 자긴 잘 모르겠다고만 하면서. 비겁해요.”

도현은 그렇게 불평했다. 남자만 좋은 일을 하다니. 다니엘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발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제가 할까요?”

다니엘은 그리고 그대로 도현의 발을 들어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대로 올려다보는 그의 보랏빛 눈동자의 기운이 형형하다.

“상냥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도현은 잠깐 아무 말없이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채 몇 초의 시간이 흘렀다.

“뭔가 무서울 것 같아서 싫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도현은 발을 뗐다. 다니엘은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아쉬움이 동시에 들었다. 그가 일어섰다.

“제가 무서우십니까? 전 무섭지 않습니다. 도현 씨에게는 더더욱… 도현 씨가 원하는 대로 정말 상냥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도현 씨 말 대로만….”

“아픈 건 싫다니까요.”

다니엘은 돌아선 그녀를 뒤에서 살며시 안았다. 도현은 그의 머리채를 콱 잡아당겼다.

“싫다니까.”

“…네.”

그녀는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또 좀 인상을 썼다.

“왠지… 조금 알 것 같아요.”

“뭘… 말씀이십니까?”

“다니엘 씨.”

“저에 대해 무엇을 알게 되셨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들떠 있었다. 도현은 그게 약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미묘한 괴리감. 다니엘 스톤하츠는 도현이 지금까지 만나본 남자들 중에서 도현에게 가장 헌신적인 남자였다. 같이 있으면 새로운 일도 많고 배우는 일도 많고 재미있는 일도 제법 있다. 그런데도 그와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기분이 이상해진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뭐랄까. 손해를 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 근데 잘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일까? 도현은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아했다. 아직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를 잘 알 수 없기 때문일까.

자신이 가질 수 있을 만한 기호는 대부분 탐색해봤다고 생각했다. 아픈 것도 싫고 아프게 하는 것도 꺼림칙하다. 누군가에게 명령을 하면서 쾌감을 느낀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남자에게 장난을 치는 것은 고양이에게 강아지풀을 흔드는 정도의 놀이다. 애초에 도현은 남자에게서 갈구하는 것이 많은 타입이 아니었다.

하지만 송선호 같은 남자를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것은 흥미진진했다. 미르 같은 남자를 기르는 것도 재미있고 한켠으로 뿌듯한 마음까지 들 때도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맹렬히 학습하여 어느새 도현의 취향을 전부 파악하고 시중을 들었다. 도현이 어떤 말을 해도 예스라는 대답밖에 하지 않고 시험 삼아 플레이랍시고 해봐도 이래도 좋다, 저래도 좋다….

그는 도현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알아내려는데 도현은 그를 파악하기가 불편했다. 파악했다 싶어도 어느샌가 바뀌어 있기도 했다. 보통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데 그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 근본에 무엇이 있는지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이 그녀의 관심을 끌기는 하는데…. 무엇보다도 그는 그 모든 것을 즐기는데 도현은 좋을 때도 있었고 그저 그럴 때도 있었다. 그럼 역시 수지가 안 맞는 거다.

정상적인 돔섭(Dominant-Submissive) 관계는 철저한 상호동의 하에 행하는 섬세한 작업이라고 한다. 애초에 도현은 남자의 쾌락을 채워주는데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딱히 그런 섬세한 작업에 관심이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도현은 어느샌가 자신의 헐렁한 실내용 원피스 안에 얼굴을 박고 열심히 구음 중인 남자의 머리카락을 다시 잡아당겼다. 그리고 말했다.

“너무 못해.”

그녀의 말에 다니엘이 깜짝 놀랐다.

‘내가 못한다고? 그럴 리가 없다. <혀로 여자를 만족시키는 방법 31가지>를 터득한 지가 언젠데. 적어도 송선호나 미르 킹쉴드보다는 확실히 잘할 거다. 근데 도현 씨가 못한다고, 그것도 너무 못한다고….’

그리고 그녀는 그를 내버려 두고 돌아서 걸어갔다. 기지개를 다시 켰다.

‘저 남자, 자기가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단 말이야.’

원래 사람이란 게 너무 고분고분하게 굴기만 해도 속이 시커메 보이는 법이다. 원래 주방을 책임진 사람은 천천히 배우자를 죽일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는 그만큼이나 도현에게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남자였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그녀의 생활 전반에 깊숙이 관여하는 남자는 처음이다.

도현은 아픈 것도, 아프게 하는 것도, 명령하는 것도, 명령받는 것도 지금까지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조종하려고 들고 가지려고 드는 남자들을 누르고 명령하는 것은 어쩐지 재미가 있었다. 역시 괴롭히고 명령하는 건 상대가 싫어하는 걸 당연하게 할 수 있을 때 가장 큰 권력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어쨌든 다니엘 스톤하츠는 뭐든 시키면 수준급으로 잘하는 사기 캐릭터였지만…. 도현이 그를 잘 파악할 수 없는 건 그 자신이 그를 잘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도현 외에 지금까지 무언가를 원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도현이 볼 때는 그게 아니다. 그는 욕심이 엄청 많은 남자다.

‘숙맥 같을 때는 지금도 귀엽긴 한데.’

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 모르겠다. 일이나 다시 하자.

*

다니엘은 그녀의 취향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자신을 만들고 있었다. 뭔가를 잘하는 것만큼 그가 잘하는 게 없었다. 그녀에게서 매도하는 말을 들으니 괴로웠다. 하지만 동시에 호승심과 질투심이 확 올라왔다. 이기고 싶었다. 이런 기분은 정말 처음이다.

그때 세계물리학회에서 내건 조건이 확실치 않아 다시 용병 일을 하는 것에 대해 조금 고민하던 다니엘은 그 제안을 결국 받아들였다. 그는 작전 회의에 얼굴을 내밀기 위해 잠실로 왔다.

법적으로 허용되는 폭력을 행사하는 국가 기관이나 군대에 소속되어 있으면 그곳에서만 도는 묘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몇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직접 죽였다. 그들은 그것보다 더 많은 몇백, 몇천만 명의 생사를 숫자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인간성을 잃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도 인간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그 속에서 그 인간의 가치는 무엇으로 정해지는가.

‘실재, 또는 믿음.’

주변이 분주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그를 힐끗거리고 있었다(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는 주변의 이목을 끄는 외모를 가졌다).

“오늘 한국 시각 오후 12시, 현지 시각 오전 6시에 2차 원조 물품 보냈습니다. 소이탄 계열 폭탄 1천 톤, 미군 협조받아 전투기 50대 보냈구요. 아직은 언론 통제하고 있지만 요즘 지중해 게이트 정보에 목말라해서 오래가긴 힘들 겁니다.”

회의실 안에서는 마이크로 증폭된 낮은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일단 우리 정부의 최우선 목표는 최이삭 박사가 무사 생환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목표가 알렉스 킴 군과 유리 라자레프 군의 생환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얘기를 나누는 동안 다니엘 스톤하츠는 한민유라는 사람에게서 받은 자료를 보고 있었다. 지중해, 포트사이드 근해 나타난 몬스터 게이트는 역사상 존재했던 몬스터 게이트 중 가장 컸다는 동해 게이트보다도 30%가 더 큰 특대형 게이트였다. 뉴스를 봤을 땐 으레 새 게이트가 생겼구나, 하고 넘겼는데 상황은 그때 받은 느낌보다 심각했다. 게다가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의 물량 또한 현재 제일 활성화된 남중국해 게이트보다 더 많다고 한다. 현재 대형급 타이탄이 적어도 10기 이상 출현했다.

그 근처에서 실험을 수행하던 유명 마도 물리학자 세현 퀸 교수의 수에즈 게이트 프로젝트팀이 탈출 도중에 사우디아라비아에 추락했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를 두려워한 사우디는 마도물리학자들에게 몬스터의 처리를 요구했으나 용병도 아닌 그들이 그걸 들어줄 리 만무했고 사우디는 프로젝트에 소속된 박사 중 하나를 인질로 잡았다.

수에즈 프로젝트에 연관된 유명인사로는 중력 마법을 개발하고 HNU 총장, 세계물리학회장, 한중 과학부 장관 등의 자리를 역임한 캘리 박, 그녀의 제자이자 세계 최고의 천재 세현 퀸, 중국이 밀어주는 학자인 왕리밍 등이 있었다. 납치를 당한 건 세현 퀸의 밑에 있는 학생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다른 인질들이 몇 명 더 있었지만 박사를 탈출시키는 것이 최우선 순위였고 그다음이 한국 국적의 소년, 다음이 러시아 국적의 소년을 구하는 것이었다. 용병도 하나 더 있다는데 그는 죽어도 상관없다고 한다.

다니엘은 열의 없는 눈빛으로 자료를 읽다가 접었다. 군대 시절이 생각났다. 용병으로 뛰는 시절의 그는 하루가 다르게 강력해져 갔다. 그는 전장에서 중력 마법을 연습했다. 전역하기 전엔 고질량점(지구)을 중심으로 하는 중력 증폭 마법을 주로 했다. 아군도 참 많이 죽였다. 그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아는 작전가는 아군의 피해는 하나도 내지 않고 전투에서 이기곤 했다. 후에는 전쟁의 판도를 바꿔버리기도 했다. 피와 눈물이 처절하게 흐르는 전투? 그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면 피도 눈물도 처절함도 없이 전투가 끝났다. 오로지 공허함만이 남을 뿐. 그리고 그것이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를 좀 바꿔놓았을 뿐이다.

여기 사람들이 목에 걸어준 방문증이 마치 개목걸이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미미하게 불쾌감이 느껴졌다. 도현 킬스버그가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걸어준 거라 생각하니 좀 더 불쾌해졌다. 며칠 전부터 이 일과 관련하여 그가 느끼고 있는 불쾌감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왜일까.

“스톤하츠 씨.”

그렇게 가만히 마네킹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데 한민유가 미팅실에서 나와 그를 불렀다. 미팅실 안으로 들어가니 복도와는 다르게 한 줌도 안 되는 사람들이 넓은 책상에 일정한 간격으로 앉아 있었다. 등 뒤에 무궁화로 된 홀로그램을 등지고 앉아 있는 사람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다니엘 스톤하츠?”

그가 누군지 아는 사람들이 한차례 술렁했다. 보니 중국에 있는 TFC 클럽 관계자도 보인다. 인질 중에 미성년자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중국에서 실험적으로 훈련시키고 있던 유소년팀 선수들이었나 보다. 누군가 상석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귓속말로 설명을 잠깐 했다. 그것만으로도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지 상석에 앉은 사람, 안보수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은 이것만 준비하지.”

안보수석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사람이 그렇게 말하며 엄지와 검지를 비볐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녀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캘리 박 교수였다. 이렇게 실물을 보는 날이 올 줄이야. 그렇게 다니엘이 그녀를 묵묵히 보고 있는데 앉아 있던 제복을 입은 군장성이 일어났다.

“공군 수송기는 대기 중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몬스터전 원조 계획안은 6시간 내에 수정해서 24시간 내에 실행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러시아 대사가 첨언했다.

“한국 정부는 지금 최이삭 박사를 구출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는데 지금 다른 인질들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거 맞습니까? 우리 러시아의 유리 라자레프 군은 고작해야 17살입니다, 17살.”

“최 박사를 구하는 게 나머지를 구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알렉스 킴 군도 이제 19살이 된 한국의 젊은 청년입니다. 우리 정부와 우리 군은 그들 모두를 구출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안보수석은 볼펜으로 데스크를 치면서 어르듯 그렇게 말했다. 좀 더 의미 없는 이야기가 잠시 진행된 뒤 미팅이 끝났다. 캘리 박, 그리고 그녀의 옆에 앉은 젊은 여자가 일어나서 다니엘 쪽으로 왔다.

“독학? 웃기고 있네.”

복도로 나가자마자 미심쩍은 의심이 꽂혀왔다. 다니엘이 대꾸했다.

“세현 퀸 교수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교수님과 박 교수님 논문은 어렸을 때부터 종이가 닳도록 읽었습니다.”

정장이 답답한지 셔츠 단추를 몇 개나 풀고 우월한 육체미를 뽐내고 있는 이 사람이 바로 세계 최고의 천재, 세현 퀸 교수다. 그녀는 다니엘 스톤하츠를 아래위로 한 번 노골적으로 훑어보더니 물었다.

“뭐 뭐 할 수 있는데?”

“중력 증폭 마법과 고질량점 중력 마법은 가능한데 무질량점은 아직….”

“진짜 그걸 독학했다고?”

세현이 영 믿기지 않는 얼굴로 자꾸 그를 보자 캘리 박이 말렸다.

“그래. 확인했다, 내가.”

그러자 세현이 그를 한 번 더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

“그래서 지금 뭐한다고? 학교는 안 들어오고 뭐 해?”

세현은 다니엘이 뭐 하는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하긴, 그녀 같은 사람이 TFC 같은 것에 관심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캘리 박도 첨언했다.

“그래, 우리 학교 들어와. 좋아.”

캘리 박도 거들었다. 다니엘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지금 연구보다도… 돈을 벌고 싶습니다.”

캘리 박이 고개를 저었다.

“그릇 작은 소리. 못 배워서 그런 건가.”

나이가 70이 넘은 대학자의 앞에서야 다니엘 스톤하츠도 ‘못 배운’ 축이다. 그녀가 다니엘을 가르치듯 말했다.

“사람이 큰 걸 봐야지, 큰 걸. 돈 그런 거 아무것도 아니야. 너 우리 쪽에 들어와봐. 매년 연구비 몇천억은 우습게 쓸 수 있다?”

예전 같으면 혹했을지도 모르지만… 모르겠다. 다니엘이 심심하게 답했다.

“제가 개인적으로 유용할 수 있는 돈은 아니지 않습니까. 개인적으로 쓸 돈이 필요합니다.”

“아, 요새는 그게 좀 어려운 게 흠이긴 하지….”

캘리 박이 자신의 턱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그것이 그녀도 몹시 아쉬운 투였다. 그녀는 가볍게 제안했다.

“그럼 너도 얼굴 반반한데 TV 같은 데 출연도 시켜주고 할게.”

“제 연봉보다 많이 나올까요?”

“얼마나 버는데?”

“천 정도는 됩니다.”

그러자 세현과 캘리 박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연에 천…은 좀 무리지 않을까요, 교수님?”

“그건 그렇겠다… 아니, 네가 부양할 노모와 처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뭔 돈이 그렇게 필요하냐. 빚 있냐?”

캘리 박이 물었다.

“제 주… 제 애인이 빚이 좀 있습니다.”

다니엘이 답했다.

“그래서 도대체 독학을 어떻게 했는데? 책은 뭐 뭐 봤냐?”

“기본서는….”

그 뒤로도 세현 퀸과 캘리 박은 다니엘 스톤하츠의 호구 조사를 계속했다. 한참을 그렇게 팬티 속까지도 탈탈 털 기세로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대충 알겠다는 얼굴로 심드렁하게 다니엘을 치우고 그들은 안보수석이라는 사람과 따로 이야기를 하러 방으로 들어갔다. 다니엘은 잠깐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무질량점 중력 마법까지 배울 수 있을까?’

고질량점 중력 마법은 질량 당 가중할 수 있는 중력에 한계가 있지만 무질량점은 달랐다. 고질량점 중력 마법은 질량원이 있어야 하고 크게 일으켜봤자 이미 우주상에 존재하는 블랙홀이나 만들어지지만 무질량점 중력 마법은 부분 우주(공간)를 소멸시키는 소형 빅 크런치를 일으킬 수 있었다. 아주 잠깐, 우리가 실재하는 공간 너머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스톤하츠 씨, 이쪽으로.”

아까 안에서 작전을 설명하던 군장성이 그를 불렀다. 다니엘은 그쪽으로 갔다. 같이 차를 타고 성남으로 이동했다. 공군 수송기에 타기 전에 잠깐 도현 킬스버그에게 연락할 짬이 났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는데 용무 중인지 받지 않았다. 그래서 간단하게 메시지를 남겼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녀에게는 일주일 정도 집을 비우고 일을 해야 한다는 언질은 해놓은 상태였다. 기밀이었기 때문에 그 이상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다녀왔을 즘엔 언론 통제도 먹히지 않을 것이고 작전 내용도 신문을 탈 것이다. 어차피 남의 나라가 게이트 때문에 망하든 말든 많은 사람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는데도 나랏일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게 아닌 모양이다.

다니엘은 같이 움직이게 된 중대와 인사를 했다.

“이쪽은 인질구출, 대테러 대응 전문인 우리 특수부대 대원들입니다. 구성원들 중에 소드마스터 대원들만 모아서 12명밖에 안 되는 것이니 숫자가 적다고 너무 걱정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도강진 준위라고 합니다.”

“…….”

다니엘도 전쟁이나 TFC에 몸을 담으면서 많은 소드마스터들을 보았지만 이런 느낌은 또 처음이었다. 대체로 용병이나 TFC 선수들은 고양잇과 맹수 같은 느낌이 났다. 필요하면 무리를 짓지만 개인적이고 즉흥적이고 낙천적이고 어린애 같다(곧잘 약에 취해 늘어져 있기도 하고). 착실하게 사회의 교육을 받은 느낌은 잘 안 난다. 하지만 여기 서 있는 이남자들은 다들 엄격하게 교육받은 커다란 도베르만 같았다. 각이 잡혀 있었다.

‘신선하군….’

도현 씨에게 말해주면 좋아할 것 같다. 그들은 준비를 하고 곧 수송기 앞으로 집합했다.

“여기 있는 대원들은 다니엘 스톤하츠 씨와 최이삭 박사를 지키기 위해서 가는 겁니다. 호위는 도강진 준위에게 맡기고 스톤하츠 씨는 임무에만 집중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야전사령관이라는 그는 어깨에 별을 몇 개 달고 있었다. 예전에 마도사병으로 뛸 때라면 아마 만날 일도 없는 계급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역시 민간인이 제일이군. 그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확실히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오랜만이다. 이것이 또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일까? 모르겠다. 러시아 이후로는 그래도 조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도 역시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았다. 이제 그라는 남자는 되돌이킬 구석이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일까?

‘아니야… 나에겐 도현 씨가 있으니까.’

그리고 다니엘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났다.

*

그렇게 다니엘 스톤하츠는 이역만리 타국으로 노역(?)을 하러 떠났다. 벌써 5월 중순이다. 송선호는 가지고 있는 주식의 배당금을 모두 받은 상태였다. 그는 아버지에게 한 소리를 듣더라도 그냥 깔끔하게 그녀의 돈을 갚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마음이 가벼웠다. 그래도 최대한 손해를 줄이기 위해서 중도상환수수료나 다른 비용을 줄이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다. 도현에게는 아직 비밀이다.

‘그럼… 내일 딱 갚고 <스카이라인>에 가서 말해야겠다.’

송선호는 유명 레스토랑의 예약을 미리 잡아 놓았다. 이런 건 잘했다는 티를 내지 않으면 무용이다.

다니엘 스톤하츠가 무슨 일 때문인지 해외에 가는 바람에 메트로서울에도 도쿄에도 없는 상태였다. 덕분에 주말은 오롯이 도현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정말 좋았다. 항상 집 밖으로 그녀를 데리고 나갔는데 그렇게 함께 집에서 편안히 시간을 보내는 것도 행복했다. 항상 꿈꾸던 그녀의 침대에서 품에 안겨 잠든 그녀를 보면 이게 현실인가 싶을 때가 있다. 그녀와 점점 더 가까워져 갔다. 꿈만 같은 진전이다.

퇴근을 하고 본가에 들렀다가 집에 갈 생각이라 차는 본가로 향하고 있었다. 고급 세단에 타서 습관적으로 홀로그램 TV를 틀었다. 요새 세계적으로 시국이 어지러워서….

[아! 지금 나옵니다. 네, 인질들 모두 무사 생환한 모양입니다.]

미디어에서 몇 주 동안 떠들썩하게 보도하던 사우디아라비아인질극 사건에 대해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한국 국적의 남자 2명, 러시아 국적의 미성년자 1명, 또 다른 남자 한 명이 인질이었다. 각국 정부는 인질을 되돌려받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의 요구를 전부 들어주며 끌려다니기만 하는 것으로 보여 비판이 심했다. 이전 정권의 그런 모습 때문에 보수당이 집권하게 된 것이었는데 아까부터 속보가 계속 뜨더니 그간 구출 작전이 진행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테러 위험만 커지겠네.’

송선호는 그것을 보면서 가만히 그렇게 생각했다. 아버지 쪽 일은 타격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송선호의 회사는 아시아, 남미, 북미, 유럽, 오세아니아 정도가 시장권인데, 약간은 피해가 있을 수도 있겠다. 남유럽 쪽이 아무래도…. 가장 큰 시장은 동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들이라 큰 피해는 아니겠지만.

군인들이 막고 있는 틈으로 취재진의 취재 열기가 엄청났다. 아마 기자들의 출입을 막고자 했다면 철저하게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중들은 이런 영웅 서사를 좋아하니 이렇게 이야깃거리를 던져주는 모양이다. 대중들이란 그저 눈앞에 있는 자극에만 이리저리 휘둘리는 존재들이다. 금방까지 욕했던 건 잊고 칭송하다가 나중에는 그것도 잊고 또 비난하고….

[사우디아라비아를 위해 처리해준 타이탄이 총 몇 기인가요?]

[6기입니다.]

…응? 심드렁하게 뉴스를 보고 있던 송선호가 눈을 크게 떴다.

[사우디아라비아 측에서 거금을 제시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받으셨습니까?]

대답도 하기 전에 다른 기자가 질문했다.

[작전은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사상자는 없습니까?]

[그건 제가 대답하겠습니다. 인질은 모두 무사 생환했습니다. 구출 당시의 혼란으로 다들 약간의 타박상이 있고 오랜 인질 생활로 심신이 피폐해져 있는 상태….]

분명히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그는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자리를 빠져나갔다. 밑에 <곧 WBS에서 리야드의 영웅, 다니엘 스톤하츠 독점 인터뷰>라는 자막이 흘러나왔다.

“…….”

송선호는 입을 딱 벌리고 그것을 보고 있다가 슈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디바이스를 꺼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그래, 선호야.]

아버지는 요새 심기가 몹시 안 좋으셨다. 목소리가 좋지 않으시다. 며칠은 정신을 못 차리시더니 지금은 아예 회사일에만 열중하고 계셨다. 하지만 송선호는 그런 아버지의 심사를 살필 여력이 없었다.

“아버지, 저 오늘 3백억만 빌려주세요.”

송선호가 타이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거 하나 처리하기 위해 수십, 수백억이 들고 그걸 처리하지 못 했을 때는 수천, 수조 원이 든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저 새끼가 선수를 칠 생각이다. 그는 차를 돌렸다. 바로 도현의 집으로 향했다. 그는 문을 열고 집을 들어가며 도현을 찾았다.

“도현아! 나 할 말이…!”

송선호는 말을 멈추었다. 거실 한복판에 얼음에 재운 비싼 술병, 한쪽에는 무슨 아랍의 하렘 같은 쿠션들이 널브러져 있고 술잔, 화려한 안주, 흥겨운 노래, 어디선가 돌아가고 있는 미러볼, 가득 찬 사람들. 집이 완전 클럽이 되어있었다.

‘이게 또…!!’

송선호는 이게 뭔지 알고 있었다. 돈 없어서 한동안 잠잠하더니!! 어디서 돈이 나서 이 지랄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이게 전에 말 잘 들으라고 협박하더니 다 이러려고 수 쓴 거야?’

지금 그는 이렇게 마음이 초조한데. 그는 화가 나서 사람들을 마구 헤치고 그녀를 찾았다.

“도현 킬스버그!”

그녀의 와인 셀러와 양주 컬렉션을 모두 턴 것이 분명했다. 거실에는 술병과 여자와 남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소돔과 고모라가 딱 이럴 것이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는 바로,

“하하하! 마셔. 마셔. 오늘은 내가 쏜다~!”

빛나는 플래티넘 블론드, 아이스블루 아이, 남자답고 호쾌한 미소. 미르 킹쉴드가 있었다. 그의 양팔에는 여자들이 아주 한가득이다. 거기에다 그의 무릎엔 도현 킬스버그가 앉아 있었다.

“미르, 정말 멋져요.”

미르 킹쉴드는 오늘 어두운 네이비색 셔츠를 명치까지 시원하게 단추를 풀고 머리도 멋지게 다듬어서 앉아 있었다. 우월한 수컷의 육체가 과시하듯 드러나 있었다.

“그치? 내가 최고지?”

“응, 진짜 최고.”

그러면서 도현은 그의 입에 체리를 넣어주며 쪽 하고 뺨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다른 남자(송선호 외)에게는 절대 안 그러면서 저 새끼에게만은 꼭, 꼭! 저렇게 치켜세워주는 말을 하곤 했다. 미르 킹쉴드는 싱글벙글하며 그녀의 허벅지를 주물렀다. 송선호는 이를 빠득 갈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는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술에 취한 도현은 오늘 유난히도 섹시한 옷을 입고 있었다. 짧은 기장에 몸에 딱 달라붙는 얇은 블랙 원피스였다. 슬리브리스라 검고 얇은 어깨끈이 무늬만 달려 있었는데 이미 한쪽은 슥 흘러내려 있었다. 그녀가 미르와 키스를 하면서 슥 송선호를 눈으로만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키스에 열중했다.

“그만해. 나와. 옷 입어!”

송선호는 고분고분해지기로 약속했지만 그건 그거고! 그녀는 저런 옷을 입으면 안 됐다. 절대 안 된다! 그것도 다른 남자 앞에서!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송선호는 당장 자기 슈트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는데 미르 킹쉴드의 오른편에 있던 로웰 및 어시들이 송선호를 말렸다.

“에잇, 오늘 정도는 봐줘요. 경사스러운 날인데.”

로웰은 이미 뭔가에 취해(이년들이 단체로 머리가 돈 게 분명하다) 깔깔 웃고 있다가 말했다.

“도대체 뭐가 경사라는 겁니까, 지금!”

송선호는 화가 나서 도현의 허리를 잡아 미르에게서 강제로 떼어냈다.

“아, 싫어. 저리 좀 가.”

그녀는 다시 미르에게 들러붙으려고 했다. 송선호는 황당하고 화나고 배신감이 들고 억울하고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가 그녀의 빚을 갚아주려고 얼마나 동분서주하고 있었던가. 그녀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녀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평소에는 중도(?)를 지켜 세 남자 사이에 크게 불화가 없도록 조정은 하는 편인 그녀였다. 완전히 삼등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싸움이 나지 않을 정도로 시간을 분배해서 셋과 지내곤 했다.

하지만 지금 이건 도현식 파티라고 보기에도 좀 분위기가 달랐다. 약도 너무 많고 시끄럽고 좀 상스럽고…. 이건 완전히 미르 킹쉴드의 스타일에 맞춰진 그를 위한 파티였다. 여긴 도현 킬스버그의 집이고 그녀가 왕인 곳인데 이렇게까지 그녀가 기울여 주진 않는단 말이다.

평소 같으면 대번에 열이 올라 상대를 위협했을 미르 킹쉴드가 여유롭게 카우치 등에 양팔을 걸치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오른편에는 로웰과 어시들, 그리고 그의 왼편에 있는 아주 쭉쭉빵빵한 여자들 네 명이 그에게 안겨 있었다.

마치 그가 이곳의 왕인 것처럼.

그중 화려한 금발 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굉장한 미녀가 그의 뺨에 쪽 입을 맞추었다. 제시카는 갑자기 들이닥친 비싼 슈트를 걸친 남자를 한 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얘는 도대체 이런 남자들을 어디서 덥석덥석 물어오는 거지?’

딱 봐도 돈 많아 보인다. 좀 배워야겠는데? 질투와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송선호는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려는 도현을 꽉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의 몸을 자신의 옷으로 꽁꽁 감쌌다. 잘 배운 티가 나는 왕자님 타입의 그에게 제시카가 선의를 베풀듯 툭 말했다.

“미르 연봉 나왔어.”

그리고 도현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걔 빚 다 갚아줬잖아. 그거 축하 파티야.”

“…!!”

송선호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

“흐흥.”

반해 미르 킹쉴드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승리의 미소였다. 도현이 송선호의 팔을 퍽퍽 쳤다.

“아! 좀 놔. 뭐 하는 거야. 너도 놀든가!”

그녀는 아주 기분이 좋은 모양으로, 그렇게 송선호를 떨치고 다시 미르의 무릎에 털썩 앉았다.

역시 미르 킹쉴드. 그는 라이벌들이 치고 나갈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항상 한발 먼저 치고 나가는 남자다. 그의 왼편에 앉아 있던 타냐도 자연스럽게 미르의 왼쪽 무릎에 앉았다. 전에 제일 먼저 도현의 머리채를 잡았던 여자였다.

“야, 너 이러면 우리는 뭐 먹고 살라고.”

그녀가 말했다. 도현은 후후 웃으면서 미르를 쓰다듬고 있었다. 기특하다.

“왜요? 그래도 미르가 위자료 겸으로 집은 줬다면서요?”

미르 킹쉴드라는 남자는 참 여자에게 통이 큰 남자다. 그가 TFC의 세계에서도 여자에게 꽤 관대한 남자로 이름이 나 있었다는 게 정말 이해가 되었다. 내쫓겠다더니 결국 그냥 집을 줘버렸단다.

“설마 아직도 생활비 줬어요?”

도현이 미르를 돌아보았다. 미르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얼른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아니, 돈은 안 줬어. 돈 있었으면 더 빨리 빚 갚았지.”

“근데 미르 연봉이 제 빚 다 갚아주기엔 좀 부족하지 않았어요? 근데 어떻게 이렇게 한방에 갚았지?”

도현은 낮은 신용등급 때문에 이자율이 엄청 높았다. 한때 사채까지 썼으니 어느 정도일지 알 것이다. 그것을 로웰이 대환 대출을 해서(로웰 당신은…) 평균 이자율을 많이 낮췄는데도 1년에 이자만 백억이 넘었다. 미르 킹쉴드의 연봉은 6백억 정도로 전에 송선호가 갚아준 것과 이자를 제하더라도 750억이나 남은 그녀의 원금을 다 갚기에는 부족했다.

“다 방법이 있어.”

집을 팔까도 싶었지만 모자란 부분은 그냥 동료에게 빌렸다. 내년에 연봉을 받으면 바로 갚는다고 했다. 빚 때문에 인생을 크게 데여 본 남자들이라 다들 그래도 빚에는 민감했지만 빌려줄 만한 놈은 있었다.

어쨌든 미르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는 도현의 원피스를 내리며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려고 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 평소 같으면 질색했을 텐데도 도현은 까르르 웃으며 자신의 옷을 잡았다.

“안 돼요. 이렇게 사람들 많은데.”

“뭐 어때.”

“꺅, 안 돼. 진짜로. 앗. 미르~”

그는 결국 도현의 원피스를 좀 내려버렸다. 한쪽은 미르 킹쉴드가 손으로 잡았고 한쪽은 도현이 얼른 손으로 가렸다 그사이에 얼굴을 묻고 그는 실실 웃었다. 그 큰 거금을 쓰고도 그는 아주 기분이 째졌다.

역시 자신이야말로 최고의 수컷이었다. 그러니까 그녀와 같은 잘 만들어진 암컷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저기 벙쪄서 부들거리고 있는 도련님을 봐라. 흥. 미르는 그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아, 그래도 아직 너무 방심하면 안 돼요, 우리. 작가님.”

로웰이 거나하게 취해서 도현의 등을 두드렸다. 거대한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은 남자라 이렇게 자꾸 어리광부리고 부대껴오면 그것만으로도 좀 힘들다. 도현이 그의 얼굴을 겨우 떼내고 가슴을 가린 채 원피스를 끌어 올렸다.

“그렇죠. 이자만 안 나간다 뿐이지 미르랑 송선호한테 원금은 다 갚아야죠.”

선물은 받아도 돈은 역시 좀…. 도현은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상큼하게 말했다.

“그래도 이자 안 나가는 게 어디에요. 역시 이건 다 로웰 선생님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도현은 로웰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미르가 도현의 허리를 다시 슥 끌어당겼다.

“안 돼! 오늘은 나만 신경 써!”

도현은 웃었다. 어쨌든 이자만 안 나가도 지금처럼 쪼들리고 살지 않아도 될 거니까 말이다. 미르 킹쉴드, 너무 짐승 같고 단순한 남자에 사고도 많이 치는지라 이런 걸 준비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기특하다. 역시 잘 기른 거 같다. 도현은 그가 또 부대껴 오자 웃으면서도 약간 버거워하다가 주문했다.

“아까 그거 다시 해봐요. 재미있어요.”

“이거?”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준비하고 그에게 매달렸다. 그는 양팔, 양어깨 등에 여자를 둘씩 달고 번쩍 일어났다. 이리저리 그들을 흔들었다.

“꺄악!”

“하하하하!”

“진짜 힘 세…!”

“멋져요, 미르~”

“역시 미르가 최고야.”

다들 즐거워했다.

물론 송선호만 빼고.

‘난….’

그는 분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것만큼은 다른 놈보다 먼저 선수치고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다니엘 스톤하츠나 미르 킹쉴드의 연봉 수준으로는 절대 한방에 그녀의 빚을 갚아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송선호는 이미 그녀가 가진 빚의 4분의 1을 연초에 갚아주었고 나머지도 금방 갚아줄 자신이 있었다. 그러면 그녀도 분명히 그를 다시 봐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이제 난….’

송선호는 도현 킬스버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언제나 눈을 돌리고, 돌리고 싶었던, 다른 남자의 품에 있는 그녀를 말이다.

“도현아….”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옮겨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디며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도현아.”

이렇게 그녀는 미르 킹쉴드의 것이 되는 것일까? 이렇게 쉽게? 내가 다 갚아준다고 했을 때는 처음부터 싫어했으면서.

원래도 도현은 미르 킹쉴드와 가장 자연스럽게 잘 지냈다. 무식하고 항상 바보 같은 짓만 하고 머리까지 근육으로 차 있는 것 같은 몰상식한 놈인데도, 무슨 수를 쓰는 것인지 그는 항상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있는 그녀는 항상 즐거워 보였다. 일주일 중 그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도현아….”

그는 애타게 도현의 이름을 불렀지만 주변은 너무 시끄럽고 그녀는 그런 주변에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송선호는 그런 주변의 일부였다. 그녀는 그저 미르 킹쉴드와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걸 즐기고 있을 뿐이다.

“도현 킬스버그….”

처음에 왜… 그녀에게 제대로 대시하지 못했었지?

갑자기 이 소란스러운 와중에 머릿속으로 그런 질문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까지 6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되돌아보니 그 답이 너무나 명확하게 보였다.

그녀는 송선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서 송선호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송선호는 그 순간 뭐라고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가슴이 짓눌린 듯이 아팠다. 그대로 더 있다간 꼴사납게 눈물을 흘릴 것 같아서 몸을 돌렸다. 현관 밖으로 나왔다.

“윽….”

아니야. 아니, 우리도 좋았잖아. 우리도 괜찮았어. 도쿄에서도, 취리히에서도, 프라하에서도… 둘이 있을 때는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다. 맞지 않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게 아니다.

‘쟤가 한두 번 저러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한두 번 이런 거 본 것도 아니고. 괜찮아… 이것만 지나가면….’

지나가면? 지나가면, 뭐. 어쩔 건데, 씨발. 앞으로도 이럴 때마다 질투하고 화내고 싸우고 그래서 엇갈려버리면 결국… 버림받는 것은 그가 될 것이다. 상처받는 것은 그뿐일 것이다. 그리고 송선호는 그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는 원래도 그를 남자로 봐주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난… 왜….’

그를 봐주지 않는 그녀가 밉고 미워져도, 그래서 그녀를 괴롭히게 되어도 절대 이 마음만큼은 들키지 않으려고 했다. 그게 송선호의 바보 같은 자존심이었다. 그녀에게 들킨다면, 그리고 거절을 당한다면 도저히 다시 일어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그 순간인 것 같았다. 또다시 그녀를 포기해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흐윽….”

눈물이 울컥 터져나왔다. 아오, 씨발. 병신같이. 그는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다가 그 비싼 셔츠까지 얼굴에 문질렀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숨이 가빠와 넥타이의 조임을 풀었다. 결국에는 그냥 펑펑 눈물을 흘렸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 걸 그랬다. 그런 바보 같은 고백도, 프러포즈도, 전부 하지 말 걸 그랬다. 그녀가 찼을 때 깔끔하게 포기할 걸 그랬다. 그냥 박예나랑 결혼할 걸 그랬다.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에 가장 떠오르는 것은 그녀와 행복했던 기억뿐이었다. 그녀에게는 시간이 지나면 쉽게 잊혀지는 수많은 남자들과 나눴던 별것 아닌 시간일뿐이다. 분명히 송선호는 그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병신같이 질질 짜며 여기에, 이렇게 서 있었다. 누군가에게 속은 기분이다. 너무나 분했다. 억울했다. 슬펐다.

‘나 이제 어떡하지… 나 이제 진짜 어떡하지….’

이렇게 꼴사납게 또 저런 별것도 아닌 새끼한테 밀려서 그녀를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그리고도 계속… 그녀를 잊지 못한다면… 평생 그럴 거라면… 도대체 송선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렇게 헤어지면 앞으로 다시는 못 보게 될 것이다. 최선을 다해 도전했는데도 실패했으니 전처럼 그녀를 꿈꾸며 잠깐의 위안을 얻는 것조차 못할 것이다. 불현듯 그녀를 떠올리면 나쁜 년이라고 욕하면서도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추억할 것이다.

“…죽어도 싫어… 씨발.”

송선호는 주먹으로 눈물을 마구 훔쳤다. 욕지거리를 하는 그의 목소리가 마구 떨렸다. 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주머니를 뒤져 디바이스를 찾아냈다. 손도 덜덜 떨린다. 그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사장님.]

“그거… 그거 있지… 내가 전에 말한 거….”

[사장님?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목소리가 왜 이러세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젠장… 전에 내가 말한 거 있잖아. 미르 킹쉴드.”

[아, 네… 네.]

김 비서는 약간 당황한 것 같았지만 잘 대꾸했다. 송선호는 머리가 아파서 눈썹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당장 터뜨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김 비서가 잊을 뻔했다는 듯이 덧붙였다.

[다니엘 스톤하츠는요? 오늘 완전 영웅이라고 난린데.]

송선호가 정원에 있는 분수를 노려보았다.

“말이라고 물어? 다 터뜨려.”

*

다니엘 스톤하츠는 늦은 시간까지 인터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를 탔다. 경호를 위해 있던 이들도 거기까지가 임무의 끝이었는지 물러났다.

‘볼일은 끝났다는 거군.’

조심해야겠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이제 이번 인질극에 관여했던 주요 인물들뿐만 아니라 다니엘 스톤하츠도 있었다. 그는 리야드에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왕궁을 반파시키고 탈출했다. 다니엘 외 마도물리학자들에게는 국내외를 불문하고 경호가 삼엄하게 붙은 상태다. 테러의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마도물리학자들은 대체로 안전할 것이다. 그들의 뒤에는 캘리 박과 세계물리학회가 있었다. 일반인들은 전혀 모르는 사실이지만, 중동 이슬람근본주의 테러리스트보다, 미국 CIA 또는 중국의 국가안전보위부보다도 더 무서운 게 세계물리학회다. 만약 학회 소속의 마도사에게 테러를 한다면 학회는 반드시 보복할 것이다. 절대 보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도 반드시 보복했다. 그리고 그 보복의 단위는 테러 단체나 인질범의 단위가 아니라 도시 단위다. 세계물리학회장이 캘리 박이 된 이후, 전 세계에서 마도사를 대상으로 한 조직적 범죄가 급감하게 된 것은 별로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캘리 박은 학계로 들어오면 지켜주겠다고 말했지만, 대답은 일단 보류했다. 그러니 경호부터 싹 빼버렸다. 애초에 사우디로 그를 보낸 것부터가 그가 거기서 죽임을 당한다 해도 그녀에겐 부담이 적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집 주위에다가 영구 쉴드를 쳐야겠군… 저택 시큐리티도 전부 체크하고… 경비를 고용할까? 소드마스터로 된 용병들로….’

단 몇 주 만이라도 병가라도 내서도 도현의 곁에 바짝 붙어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다니엘은 자신과 도현을 지킬 방법을 강구했다. 메트로서울도 비공식적으로 대테러 진압부대 운용, 위험인물색출, 공항 검문, 밀입국 단속 등 테러 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지만 만에 하나….

‘학회는 곧 사우디아라비아에 보복공격을 할 것이다.’

글쎄…. 보복의 규모에 따라 테러가 더 빈발하거나 아니면 아예 끊기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어쨌든 다니엘 스톤하츠는 학회가 사우디와 볼일을 끝날 때까지만 버티면 되었다. 그 이후에 그들은 다니엘 같은 건 새까맣게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피곤하군….’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시트에 등을 기댄 다니엘은 드물게 그렇게 생각했다. 마도사는 대체로 운동부족인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그는 TFC 선수였고 체격 조건도 우수했기 때문에 근지구력은 나쁘지 않았다. 미르 킹쉴드를 일주일 넘게 상대할 수 있었던 것에서도 그런 점이 잘 드러났다.

하지만 적지에서 10일 가까이 잠도 못 잤다. 피곤할 만했다. 경호로 온 소드마스터 같은 건 다니엘에게 아주 성능 좋은 경보기 같은 것이었다. 일정 규모 이상의 조직과 상대할 때는 다니엘 같은 남자도 조심 또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적당한 실력의 마도사가 마음먹고 기습을 한다면 소드마스터 군인이고 나발이고 단번에 목이 날아간다. 군인들이 항상 다니엘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다니엘도 그들 모두를 지켜야만 했다. 이렇게 말하면 짐짝 같아도 필요했다. 홀로 남은 마도사병은 살해당하기 쉽다. 대체로 맷집도 멘탈도 평범한 인간 수준으로 소드마스터에 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살인은, 역시나랄까. 별 감흥이 없었다. 이래서 마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인간성을 해친다. 사람이 그저 사물처럼 느껴진다. 아이들 장난처럼, 날아오는 비눗방울을 손가락으로 터트리는 것만 같다.

하지만 오히려 기대도 하지 않았던 부분에서 이상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어릴 적 가장 흠모하던 마음속 스승들을 만난 것은, 생각보다도 신선했달까. 옛날에 가졌던 환상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어릴 적 책과 논문으로만 만났던 그들이 온화하고 선한 인상의 학자일 거라 은연중 상상했던 것 같다. 마치 동화 속 상아탑의 현자처럼.

하지만 직접 만난 그들에게선 의외로 다니엘 스톤하츠와 같은 비인간성이 느껴졌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평범함이란 변명으로 무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반인들을 자연스럽게 경멸했다. 특히나 캘리 박은… 그녀는 인류역사상 지금까지 단신으로 다니엘 스톤하츠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이 수준에서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지만, 그녀는 그보다 더 강대한 마도사였다. 중력 마법도 마법이지만 벌레 죽이듯 대규모의 인원을 학살하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제와 그런 학살은 미미하게 거리끼는 다니엘과는 달리 또다시 그러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세상에 그녀보다 더 강력하고 대단한 마도사는 없었다. 어느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을 신의 형상을 본 따 만들었다는 게 사실이라면, 세상에 그녀보다 신에 가까운 인간은 없었다. 그녀는 신과 같은 권능으로 그녀의 뜻에 반하는 자가 포함된 무리를 노인부터 갓난아이까지 자비 없이 도륙하여 자신의 정의를 관철하는 구약성서의 신과 같았다.

그리고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런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걷는 길은 저토록 잔인무도한 것이고, 그 위대함은 모든 희생을 뛰어넘는 가치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다니엘이 가장 처음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신이 말한 것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를 뛰어넘는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다 지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정신과 능력은 뭇 사람들이 상상하는 부분조차도 뛰어넘었을 것이다. 현실은 언제나 미미한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법이다. 그리고 다니엘 또한 바로 그녀가 근접한 바로 그곳, 그것을 목표로 했었다.

‘이것도 도현 씨 덕분일까….’

한때 그를 지배했던 거대한 열망의 재가 바람에 날린다. 도현 킬스버그 덕분에 인간성을 조금씩 되찾기 시작한 그는 다시금 그들이 걷는 위대한 여정에 동참하고 싶어진 것일까. 그런 욕망을 다시 느끼게 되는 것일까.

힘과 진리의 추구

앎에 대한 내장을 갉아먹는 듯한 갈증

다른 것은 아무것도 돌아볼 수 없는 강렬한 맹신

그렇다면 그는 그녀가 조금 두렵기까지 했다.

‘보고 싶다.’

다니엘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의 곁에 있으면 조용히 미소 지을 수 있는 자신도 함께.

그리고 다니엘은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한밤중이었다. 계단에는 송선호가 엉망인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를 가만히 보며 걸어갔다. 현관을 열자 곧바로 큰 노랫소리와 발작적으로 웃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로 도현 킬스버그와 미르 킹쉴드도 보였다. TFC 선수들이 곧잘 벌이는 환락 파티 같은 광경이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모습이다.

‘고작 이 정도에….’

다니엘은 가만히 송선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원래도 그가 가장 먼저 무너질 줄 알았다. 다니엘은 안으로 들어갔다.

“어? 다니엘 스톤하츠다.”

보니까 미르 킹쉴드의 옛 걸즈도 와있다. 그들이 다니엘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미르 킹쉴드….’

도현 킬스버그가 미르 킹쉴드에게만 유달리 관대한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다니엘은 항상 그것이 궁금했다. 어쨌든 도현이 몇 주 만에 본 다니엘을 모르는 척하진 않을 것이다.

“야, 너 진짜 능력 쩐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GAS 안 모으기로 유명한대.”

어느새 친구가 되었는지 금발 머리 GAS 하나가 도현에게 그렇게 말했다. 둘 다 미르 킹쉴드의 가슴팍에 안겨 있었다. 도현이 고개를 들어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다니엘 씨~”

그녀는 좀 취한 게 보였다. 다니엘도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었다.

“도현 씨, 다녀왔습니다.”

“어딜 그렇게 다녀온 거예요? 말도 안 해주고.”

오늘 뉴스를 못 보신 모양이네. 하여튼 미르 킹쉴드는 한시라도 빨리 없애야 한다.

“별거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술이 깨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니엘 씨도 앉으세요.”

“아, 싫어! 오늘은 내 전용이야.”

미르가 버럭 했다. 그는 도현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다니엘은 그녀가 평소처럼 미르를 꾸짖으며 밀어낼 것이라 생각했다. 도현이 약간 난처한 기색을 띠며 말했다.

“미안해요, 다니엘 씨. 오늘은 좀… 오랜만에 들어왔는데.”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그제야 다니엘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위화감이 느껴졌다. 도현이 기쁜 얼굴로 뭐라고 하려고 했지만 취한 미르의 지분거림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 간지러워요! 하하!”

“…….”

덩치는 산만한 짐승 같은 게 자꾸 어린애처럼 애교를 떠는 게 아주, 상당히, 몹시 배알이 꼴린다. 다니엘은 그를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음속으론 벌써 수백 번도 벌레처럼 눌러 죽였다.

“다니엘 씨도 앉아요. 같이 놀아요.”

그녀는 다니엘의 질문을 잊어버린 것 같다.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그는 그녀의 최측근에서 그녀의 가장 충실한 이해자를 연기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그 포지션을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비록 지금은 마음에 안 들더라도 결국에 승리하는 건 바로 자신….

다니엘은 한숨을 가까스로 참으며 그녀의 옆에 앉으려고 했다. 그 순간 디바이스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다니엘은 디바이스를 들어서 상대를 확인했다. 셀레나 카토였다. 받아야겠다. 그녀도 이번 일을 뉴스로 처음 접했을 것이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잠깐 옮기는데 미르 킹쉴드에게도 연락이 와 그의 옛 걸즈 중 하나가 그의 디바이스를 귀에 대주는 것이 보였다. 다니엘은 3층으로 올라갔다. 테라스로 나가니 집안의 소음이 멀게 들렸다.

“네, 셀레나.”

[다, 다니엘 씨, 지금 뉴스 보셨어요?]

다니엘은 그런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사우디 일은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합니다. 기밀이라 셀레나에게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감독님이랑 매니지먼트 사장님은 알고 계셨는데….”

[그거 말구요! 다니엘, 도대체 러시아에서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냥 용병으로 뛰었던 거 아니었던 거예요? 지금 다니엘 국제전범재판소에 끌려가게 생겼어요!]

“…네?”

이게 지금 무슨 소린가. 다니엘은 그녀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잠깐 그대로 목석처럼 서있었다. 그리고 셀레나와 연결이 되어있는 채 디바이스로 뉴스 기사를 검색했다. 지금 인터넷은 사우디에서 벌인 그의 활약상으로 도배가 되어 있어야 맞았다.

[중국의 묵인하에 자행된 반인륜적 인체실험…! 아니죠, 다니엘? 거짓말이죠?]

셀레나는 같은 기사를 읽고 있었는지 기겁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다니엘은 굳은 얼굴로 그 기사를 계속 읽어내렸다. 인체실험이라니. 그가 실험한 것은 중력 마법이었다. 인체실험 같은 것엔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기사엔 언급한 인체실험에 관한 자세한 기밀문서까지 나와 있었다. 그런데 읽어가다 보니 어쩐지 기억에 있는 장소에 실험내용이었다. 분명히 다니엘은 중력 마법을 실험한 것이었는데….

‘…그거군.’

그때 알던 중국 장성 중 하나가 시체 몇 구를 가져와 중력 마법을 이용해 다이아몬드를 만들게 한 적이 있었다. 다니엘은 정말 별 생각 없이 그들의 말대로 해주었다. 그가 용병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이래 하인델토크까지 수십만 명의 사람을 죽인 것은 어떤 곳에서도 죄를 묻지 않았는데 고작 시체를 가지고 보석을 만든 것은 죄가 된단 말인가. 아니, 기사에서는 죽지 않은 부상자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긴 하는데, 그게 그렇게 큰 차이가 있나?

‘어떻게 된 거지? 누가 알아낸 거지? 그 일에 관련된 사람들은 전부 중공군 소속이거나 관련자들이었다. 국가기밀을 누설하면 사형일 텐데….’

다니엘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천천히 입을 뗐다.

“저는 관련 없는 실험입니다. 용병으로서 당시 실험내용에 대해 고지 받지 못하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한 것뿐입니다.”

[…다니엘 스톤하츠, 나다.]

그때 누군가 셀레나의 전화를 바꿔 받았다. 스즈키 감독의 목소리였다.

[매니지먼트에서 변호사 선임부터 할 테니까 당장 도쿄로 돌아와라.]

“이상합니다. 이런 걸 일개 기자가 팔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보위부에서 살해위협을 받을 텐데….”

국제 사회의 힘이 크게 넷으로 나눠진 지금 같은 때에 국제재판소의 판결 같은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저 서로의 위신을 깎아내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전쟁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전쟁이란 없다. 그 전쟁은 중국이 승리한 전쟁이었고 러시아의 전범만 중국의 요구에 의해 처단 받았을 뿐이다. 중국은 자국인에 의한 어떤 전쟁 범죄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잠깐 소란스럽다가 끝날 것이다.

하지만 다니엘은 사정이 달랐다. 그는 용병이었다. 그것도 중국 국적이 아닌. 지금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개인이다. 구단은 그를 지켜주지 못한다. 국제전범재판소나 여론은 그것보다는 더 강력한 존재였다. 국적이 한국이라는 이유로 한국 정부가 당사자도 아니었던 전쟁에서 자국민이 저지른 전쟁 범죄를 정당화해주진 않을 것이다.

당시 중공군이 다니엘에게 국적을 부여하고 중공군에 편입시키려고 대단히 노력하였으나 다니엘은 끝까지 용병의 지위를 버리지 않았다. 중국에게 자국의 군인도, 심지어 자국민도 아닌 다니엘을 지켜줄 의리는 없었다. 이건 문명사회에서 다니엘 스톤하츠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시킬 사건이었다.

‘누가….’

다니엘이 채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굉장한 소란스러움이 들렸다. 소닉붐이 들렸다면 착각일까.

“너지!!”

다니엘 스톤하츠는 미르 킹쉴드의 주먹에 머리가 터지기 전에 가까스로 머리를 보호하는 쉴드만 칠 수 있었다. 십 수 시간 전까지 전장에 있었던 것이 다행이다. 그의 감각이 평소보단 날카로웠던 것이다. 그의 몸은 난간을 부수고 정원의 가운데 있는 분수까지 날아가 퍽 부딪쳤다.

“…으….”

온몸이 으스러졌다. 간신히 목숨은 붙어 있었다. 전투복도 없이 저 무식한 주먹에 맞다니… 피를 울컥 토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생명에 직결된 상처부터 의료 마법으로 감지하여 수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르 킹쉴드는 그럴 시간을 주지 않을 작정인지 곧바로 3층에서 날아오듯 돌진해왔다.

‘쉴드….’

이런 의식으로는 제대로 된 쉴드를 칠 수가 없었다. 눈도 보이지 않았다.

“이 개새끼가! 그때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이 씨팔 새끼가 더럽게 이렇게 뒤통수를 쳐!!! 내가 그 잘난 대가리부터 으깨주마!!!”

전범 혐의가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죽게 생겼다. 미르 킹쉴드 정도라면 이런 엉성한 쉴드는 곧 깨버릴 것이다. 다니엘은 분수의 난간에 대충 걸쳐진 채 꿈틀거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다니엘 씨!!!”

도현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미르 킹쉴드가 멈칫했다. 다니엘은 겨우 심장과 폐 손상을 약간이나마 회복했다. 다니엘은 쉴드를 포기하고 분수 주위를 머릿속으로 대충 가늠하여 중력 마법을 시전했다. 잘못 가늠해서 팔다리 하나 정도는 잘려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

미르 킹쉴드는 그대로 퍽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씨발…!”

그는 한쪽 팔로 바닥을 짚고 겨우 버텼다. 그는 자신이 이걸 버틸 수 없을 거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지금도 회복하고 있을 것이다. 미르는 오른손을 겨우 움직여 옆에 있는 작은 돌을 손에 쥐었다. 이런 거 하나만 있어도 저런 빌빌거리는 마도사 따위 손쉽게….

“윽!”

쿵! 그대로 그에게 가해지는 힘이 본격적이 되더니 미르는 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다니엘은 겨우 의식을 잃지 않고 눈까지 회복했다. 그리고 나니 다행히 좀 더 정신이 명료해졌다. 부러진 팔다리는 내버려 두고 몸통과 뼈, 머리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미르 킹쉴드는 첫 일격에 다니엘 스톤하츠를 죽였어야 했다.

겨우 고개만 들 수 있었을 때는 도현이 붙잡는 사람을 뿌리치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다니엘은 깜짝 놀라 중력 마법을 멈췄다. 그녀가 한 발만 더 들어왔으면 그녀를 죽일 뻔했다.

“미르!!”

도현은 끙끙거리며 미르를 겨우 뒤집었다. 미르 킹쉴드의 코에서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정신을 잃은 것인지 죽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니엘은 그제야 확실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의 몸에서 본격적으로 초록색 빛이 번쩍번쩍 돌았다. 도현은 침착하게 미르의 가슴에 귀를 대보았다. 잘 모르겠다. 그때쯤엔 다니엘 스톤하츠가 피칠갑이 된 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대량의 실혈로 빈혈이 돌았다. 타인에게 쓰는 의료 마법은 아직 미숙한 수준이지만 스스로에게 쓰는 것은 꽤 수준급이다. 용병으로 일할 때의 그는 적군의 최우선 타격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

오랜만에 죽을 뻔했다. 다니엘은 코 밑과 귓가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바로 섰다. 한쪽 팔은 아직 치료가 덜 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도현은 그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둘이서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갑자기…!”

그녀는 경악한 얼굴이었다. 지금까지처럼 그냥 서로 툭툭 치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건 정말 서로 죽이려고 한 것이다. 다니엘이 대꾸했다.

“정당방위입니다. 갑자기 먼저 달려든 건 미르 킹쉴드입니다.”

“다니엘, 치료 마법 쓸 수 있다고 했잖아요. 미, 미르 지금 괜찮은 거예요? 죽은 거 아니죠?”

“…저 보고 지금 절 죽이려고 한 놈을 살리라는 말씀이십니까? 이대로 미르 킹쉴드가 죽어도 저에겐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상당한 물리적 상해를 가한 상대를 정당방위로 살해하는 것은 이제 처벌받지 않는다. 다니엘은 미르 킹쉴드의 치료를 거부했다. 그러자 도현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장 고쳐요!”

“…싫습니다.”

“당장!!”

“…….”

무표정했던 다니엘 스톤하츠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원래도 미르 킹쉴드를 죽일 생각이었다. 어차피 죽일 거였다면 한시라도 빨리 죽는 게 그에게 좋았다.

그는 잠깐 그대로 멈춰 있다가 도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미르 킹쉴드의 이마와 가슴팍을 양손으로 짚고 의료 감지 마법을 돌렸다. 심장은 미약하게 뛰고 숨은 안 쉰다. 과중력으로 인해 혈액순환이 막히며 혼절하고 쇼크가 온 것이다. 갈비뼈가 다 부러져 있었다.

“떨어지십시오.”

도현은 그의 말대로 미르에게서 손을 뗐다. 다니엘은 그의 부러진 뼈를 대충 맞추고 그의 심장에 강한 전기 충격을 가했다.

“허억…!!”

그러자 미르 킹쉴드가 벌떡 일어나며 숨을 들이켰다. 눈을 번쩍 뜬 그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다니엘 스톤하츠를 발견했다. 그가 곧바로 살기를 뿜어내며 손을 뻗었는데….

“그만해요.”

도현이 다니엘의 얼굴을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한밤중에 샛노란 안광이 번쩍이는 미르 킹쉴드의 눈빛은 야수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로 그대로 도현의 어깨 위로 자신을 보고 있는 다니엘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이지가 사라지고 본능만이 남은 눈동자는 그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도현은 분위기를 보다가 얼른 미르 킹쉴드의 시선을 막으며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그녀가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가 데리고 살던 남자 둘이 한날한시에 같이 죽을 뻔했다. 그대로 잠시 몇 초가 지났다.

“으윽… 씨발….”

그제야 미르는 옆구리를 붙잡으며 신음을 흘렸다. 누가 해머로 계속 머리를 빠르게 내려치는 것 같았다. 그가 사람의 소리를 내자 도현은 그의 양 귀를 붙잡고 품에서 떼어냈다.

“미쳤어요! 내가 싸우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다짜고짜 다니엘 씨를 죽이려고 들어요?! 미르 정말 나랑 끝내고 싶어요?!”

도현이 화를 냈다. 미르는 다니엘이 건 마법의 여파로 온몸이 으스러진 것 같은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다시 도현의 품에 얼굴을 박으며 신음처럼 대꾸했다.

“저 새끼는 전부터 나 죽이려고 했어….”

미르의 말에 다니엘을 홱 돌아본 도현이었다. 다니엘은 그 순간 실수했다. 바로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한 것이다. 미르 킹쉴드가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듯 다니엘 돌하츠도 그를 벌레처럼 내려다보며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현의 표정이 일순 딱딱해졌다가 두 남자를 번갈아서 보았다.

“지금은 왜 싸운 건데요.”

“저는 모릅니다.”

다니엘이 그렇게 말하자 도현은 미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미르는 고통이 몰려오는지 끙끙거리며 대꾸했다.

“누가 인터넷에다 내 얘기를 뿌렸는데… 씨팔, 저 새끼 말고 그런 더러운 짓을 누가 해.”

“…뭐?”

다니엘이 그렇게 대꾸했다. 도현이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전 아닙니다. 오히려 저도 지금….”

다니엘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중력 마법에 의해 움푹 내려앉은 정원의 테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송선호를 발견했다. 그는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설마… 그에 대한 다니엘의 감상은 두 가지였다.

‘미르 킹쉴드가 알았다간 송선호를 죽이겠지.’

그리고

‘내가 틀렸군.’

다니엘은 그가 끝까지 그녀에게 선택받지 못할 거라는 판단을 하게 되면 먼저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에고가 강한 남자였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미르 킹쉴드와 다니엘 스톤하츠는 병원에 가야 했다. 집에 손님들이 많았기 때문에 도현은 조금 뒤따라가려고 했으나 곧 둘 모두에게서 오지 말라는 연락을 받았다.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단다.

“휴….”

사람들은 일단 전부 집에 보냈다. 인터넷 기사들을 쭉 읽어보던 도현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 남자들, 당분간 집에 못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괜찮아요?”

로웰이 도현의 등을 슬슬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네… 전 괜찮은데.”

“참…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래요?”

이 경사스러운 날에… 로웰도 놀라서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정원만 보면 완전 전쟁통이다.

“누가 악의적으로 미르랑 다니엘에 대해서 퍼뜨린 걸까요?”

“도대체 누가….”

그러고 있는데 송선호가 다가왔다. 도현은 초췌한 얼굴의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괜찮아? 혹시 아까 다치기라도 했어?”

“…아니….”

그는 쉰 목소리로 그렇게 대꾸하며 도현에게 천천히 안겼다.

*

“너 일 안 가?”

도현은 다른 스크린에 뉴스 기사 알림 설정을 해놓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등 뒤에서 끌어안고 가만히 타자를 치는 그녀의 손가락을 보고 있는 송선호에게 그렇게 물었다.

“안 가.”

“어디 아파?”

“아니.”

“근데 왜?”

“같이 있고 싶어서.”

송선호는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영 이상하다는 얼굴이었다.

“너 좀 이상해…. 가까이에서 그런 싸움 나서 놀랐어?”

“그런가 봐.”

“…진짜 이상한데.”

“도현아.”

“응.”

“사랑해.”

뜬금없는 말에 도현이 피식 웃었다.

“참, 자꾸.”

“…그 남자들 걱정돼?”

“걱정되지.”

“왜? 그런… 놈들인데. 싫지는 않아? 범죄자잖아.”

“모르겠어… 일단 각자 입으로 변명 정도는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들을만 하면 계속 사귀려고?”

그러자 도현이 송선호를 돌아보았다.

“왜 이상한가 싶었더니. 옛날옛적에 그런 놈들이랑 헤어지라고 노발대발해야 할 남자가 화를 안 내네.”

“…….”

송선호는 그녀의 어깨에 그대로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이대로 영원히 너랑 같이 있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하하. 요새 로맨틱 주간이야? 아니면 나 위로해주려고?”

“그냥… 진심이야.”

그대로 송선호는 하루종일 그녀와 같이 있었다. 그 날도,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쭉 그랬다. 금붕어 똥처럼 그녀에게 붙어 다녔다.

그녀는 미르 킹쉴드와 다니엘 스톤하츠를 걱정하기는 했지만 일단 그들에게 직접 말을 들을 때까지 판단을 보류하고 있었는데 상황이 흘러가는 걸 보니까 둘 다 이대로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다니엘은 지금 국제전범재판소를 상대로 비싼 변호인단을 꾸리고 있었고 미르 킹쉴드는 원래 자신의 펜트하우스에 은거하는 수준이다. 취재진이 도현의 집에 오지 않도록 배려한 것 같았다.

“후우….”

도현은 며칠을 고민했지만 역시 미르만큼은 좀 만나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객관적인 상황은 다니엘이 훨씬 심각했지만, 심리적 타격은 미르가 심할 것 같았다. 미르의 펜트하우스 건물이 있는 근처는 파파라치들이 상주 중이라고 하긴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라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상황을 살펴본다는 핑계로 바로 행동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로부터 며칠 뒤, 도현은 눈을 뜨자마자 미르 킹쉴드에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참….’

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평생 자신이 남자 때문에 마음고생 하는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를 아무리 만난다고 해도 말이다. 도현 스스로만 조심한다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그게 아니구나. 하긴, 그랬다면 엄마도 그러시진 않았겠지.’

기분이 좀 복잡해지는 요즘이다. 도현이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도현의 손을 잡았다.

“어디 가?”

송선호가 엎드린 채로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헐벗은 그의 멋진 등이 아침 햇살에 드러났다. 항상 각 잡힌 멋진 모습으로만 다니는 남자라서 오히려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이 매력있다. 안경을 벗은 맨 얼굴은 남자답고 잘생겼다. 역시 멋있는 남자다. 도현이 대답했다.

“좀 나갔다 오게.”

“…….”

“너 요즘 왜 이래. 왜 이렇게 풀이 죽어 있어?”

평소엔 기가 하늘로 뻗치는 남자다. 이상하네. 도현은 허리를 숙여 그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추고 완전히 일어났다. 송선호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갔다. 도현은 샤워를 하고 바스 타월을 몸에 두른 채 1층 거실을 지나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옅은 회색에 블랙과 화이트 비즈가 달린 예쁜 속옷을 입었다. 눈에 확 띄진 않지만 플로럴 패턴이 있는 실크 아이보리 스커트에 골드 체인으로 된 벨트를 하고 하얀 블라우스, 골드로 가장자리를 마무리한 아이보리 트위드 자켓을 입었다. 구두는 그녀의 피부 색깔과 비슷한 펌프스를 신었다. 뷰러와 투명 마스카라로 속눈썹을 올리고 짙은 분홍색 립스틱을 발랐다. 옷은 단정한 만큼 머리카락은 왼쪽으로 많이 쏠리게 해서 아주 글래머러스하게 굵은 웨이브를 줬다. 요즘은 기계가 좋아서 집에서도 모양이 잘 잡힌다. 원래는 미용실을 가서 직접 하는 일은 별로 없다.

클래식한 사각형 시계를 고르고 목걸이와 귀걸이를 골랐다. 반지는 역시나 송선호가 준 반지를 꼈다. 그게 지금 그녀가 가진 다이아몬드 쥬얼리 중에 가장 크고 화려하다 보니 볼 때마다 눈에 띄었다.

가운데 있는 20캐럿이 넘는 최고급 다이아몬드를 중심으로 꽃잎이 피듯 주변으로 겹겹이 1~2캐럿 다이아몬드가 장식되어 있었다. 링 자체도 작은 다이아몬드가 3겹, 2겹이 되는 식으로 약간 가늘어지며 손가락을 둘러 두어 번 꼬였다. 링 자체도 디자인이 특이했다.

‘처음에는 너무 화려하다 싶었는데.’

예쁘다. 보다 보니 눈에 익는 것인지, 볼수록 매력이 있는 반지였다. 이거 보다가 다른 거 보면 시시해 보인다. 사람들이 볼 때마다 몇 번이고 다시 보며 반지에 대해 묻고 싶어서 안달이 난 얼굴을 할 때마다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역시 비싸고 예쁜 게 최고다.

도현은 반지를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에 꼈다. 잠시 햇빛에 또 반지를 비추어 보다가 시간을 확인하고 드레스룸에서 나왔다. 침실로 돌아가니 송선호가 베개에 얼굴을 박은 채 눈을 감고 있는 게 보였다. 다시 자는 걸까? 그가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는 건 본 적이 없었다. 도현은 그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일이 생기려면 한꺼번에 생기는 것인지 나머지 둘도 지금 문제가 심각한데 얘까지 이러고 있다. 송선호가 다시 부스스 눈을 떴다. 도현의 얼굴을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

“예쁘다. 어디 가?”

오늘은 머리 스타일이 화려해서 옷을 고급스럽게 입어도 많이 섹시하다. 정말 예쁘다. 그녀는 갈수록 예뻐지기만 한다. 송선호는 근래 기분이 꽤 안 좋았지만 이런 그녀를 보니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누며 그냥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질 것 같다.

“미르한테 가보려구.”

송선호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몸을 반쯤 일으켰다.

“…왜?”

“힘들어 할 것 같아서.”

“근데 네가 왜 가.”

도현은 시계를 보았다.

“TFC 선수들 어렸을 때 대부분 힘들게 산 거 알잖아. 사정이 있었을 거야.”

“어떤 사정이 있으면 그럴 수가 있는데? 너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어? 그런 놈 무섭지도 않아?”

도현도 약간 고민이 되는 얼굴이 되었다.

“그래도….”

“남 사정 같은 거 네가 언제 신경 썼다고.”

하긴 엄마도 항상 남자의 사정 같은 건 신경 쓰지 말라고 가르쳤다. 송선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는 자리에 제대로 앉고 그녀를 마주했다.

“가지 마.”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나도 다른 사람 같으면 안 갔어.”

“미르 킹쉴드가 왜 그렇게 특별한데?”

송선호가 물었다.

“너 그런 스타일이랑 만난 적 한 번도 없잖아. 어린애 같은 남자도 싫어하고 사고 치는 놈도 싫잖아. 근데 그 새끼는 왜 만나는데?”

“너 잘 안다?”

도현이 의외라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송선호는 약간 흠칫하더니 눈을 돌렸다. 그녀가 살짝 웃었다. 그녀의 얼굴을 봤더니 또 뭔가 다 알겠다는 표정이다. 그러자 송선호는 좀 더 초조해졌다.

“너도 특별하다고 말해줄까?”

“…나만 특별하다고 말해.”

“하하하.”

도현이 웃었다. 그녀는 송선호의 어깨를 밀어 눕혔다. 그리고 그의 위에 올라탔다. 뭔가 못마땅한 그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슬슬 쓸며 내려다보았다.

“왜 넌 말해주지 않으면 모를까.”

“…뭘?”

“너도 내가 상당히 특별취급 해주는 건데.”

“…….”

도현은 천천히 허리를 숙이며 그와 계속 눈을 마주치다가 쪽 하고 그의 입가에 입을 맞추었다.

“갔다 올게.”

도현은 일어나서 그를 떠났다.

도현은 차도 팔았기 때문에 주로 리니어카를 이용했다. 그녀도 한때 고급차가 12대나 있었지만 전부 반값 정도에 처분해야만 했다. 덕분에 집 차고에는 남자들 차만 잔뜩 주차되어 있었다. 호출한 리니어카가 집 앞에 도착했다. 자율주행으로 운행되는 리니어카는 당연히 무인 택시다. 디바이스의 앱을 이용해 부른 리니어카는 도현을 태우자 곧바로 미르 킹쉴드의 펜트하우스로 향했다. 차는 곧 메트로서울 중심가로 진입했다.

하늘 높은지 모르고 들어선 유리탑들을 지나 강을 건넜다. 대규모 주거 단지가 나왔다. 그중 매끈하고 세련된 종합주거단지 하나 앞에 차가 섰다. <아크로폴리스>라고 적혀 있었다. 글을 쓰기 위해 사전 조사를 할 때 웨스트이글 선수들이 많이 거주하는 고급 맨션 단지라고 이야기는 얼핏 들었다. 미르도 원래 여기 살았었다. 다행히 정문 밖에는 기자들이나 방송차가 좀 있는데 안에는 없는 것 같았다. 경비들도 계속 기자들을 쫓아내고 있었고…. 리니어카는 자연스럽게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증을 미리 받아둬서 다행이었다.

미르 킹실드의 펜트하우스는 77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리니어카에서 내려 맨션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안에 타서 디바이스를 대니 중간에 멈추지 않고 바로 펜트하우스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바로 널찍한 공간이 나온다. 멀리 한강까지 보이는 근사한 펜트하우스였다. 좀 많이 지저분했지만.

도현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옷가지와 술병들을 뛰어넘었다. 안면이 있는 걸즈도 있었고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아직 그들의 기상 시간은 아닌지 다들 잠들어 있었다. 주말이라 미르도 훈련을 가지 않았을 것이다. 도현은 이 방, 저 방 문을 열어보았다. 사람이 없거나 혹은 모르는 사람들이 자고 있었다. 집 구조를 가늠해보며 발을 옮겼다.

그녀는 미르 킹쉴드의 침실을 찾아냈다. 걸즈 두 명이 그의 양옆에 누워있었고 다른 하나는 발치에 누워 자고 있었다. 미녀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게 저렇게 자연스러운 남자라니. 도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고는 다가갔다. 도현은 그의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그의 이마를 쓸었다.

언제 봐도 환하게 빛나는 머리카락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부드럽다. 도현은 가만히 그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리 봐도 어린애로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어딜 어떻게 봐도 완벽하게 남자다운 골격이라 그녀나 옆에 늘어져 자는 다른 여자들과 완전히 다른 인종이라는 게 느껴졌다. 다행스럽게도 딱히 얼굴이 안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렇게 가만히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가 움찔했다. 인상을 설핏 찌푸렸다가 그의 눈이 떠졌다. 성가시다는 듯이 도현의 손을 잡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일어났어요?”

“…응….”

그는 애매한 소리를 내다가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그의 밝은 회청색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도현은 미소를 지었다.

“잘 잤어요?”

“어떻게….”

“전에 미르가 방문증 줬잖아요.”

예전에 미르가 도현을 처음 꼬시기 시작했을 때 언제든 오라며 줬었다. 미르는 한쪽으로 솟은 머리를 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의 침대가 출렁거렸다. 같이 자고 있던 걸즈 중 하나가 뒤척거렸다. 도현에게는 그의 떡 벌어진 뒷모습만 보였다. 미르는 그대로 도현을 돌아보지도 못한 채 말했다.

“…나 바람 안 피웠다.”

그게 먼저 할 말인 걸까. 도현은 웃었다.

“하하하.”

그러자 미르가 그녀를 홱 돌아보며 소리쳤다.

“진짜야!”

“알았어요.”

미르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씻고 나올게.”

도현은 부엌으로 갔다. 그녀의 집에서도 그는 부엌은 자주 썼다. 그래서 그런지 영 더럽지는 않았다. 도현은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음, 냉장고 안은 엉망이다. 도현은 이것보다도 더 집안일에 손을 안 대는 편이었기 때문에(그녀는 고급 도시락 가게에서 그냥 시켜 먹는다) 그중에서 대충 먹을 만한 걸 꺼냈다. 아마 샤워를 다 하고 나오면 그는 먹을 걸 찾을 것이다. 그는 항상 배고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주 예쁘고 화려한 고급 스포츠카였다. 그러니까 연비가 안 좋은 것도 당연하다.

간단하게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나니 그가 바지만 입은 채 머리를 닦으며 부엌으로 왔다. 도현은 식탁 위에 접시를 하나 놔두며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뭐….”

도현은 수건을 받아 그의 머리카락을 닦아주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항상 호쾌하고 자신만만한 남자라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약간 어색하다.

“미르가 안 웃으니까 이상해요.”

“아니….”

미르는 약간 설명하기 어렵다는 태도로 말했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어.”

“하하. 왜요.”

“…….”

생각보다는 상태가 괜찮은 것 같다. 도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 사는 사람이 원래 이렇게 많았어요?”

그녀가 그렇게 묻자 미르가 관심 없는 투로 대꾸했다.

“몰라. 쟤들 여기 방 장사 하나 봐.”

“방 장사요?”

미르는 화려한 크리스털 의자에 앉았다. 도현도 다른 의자에 앉았다. 도현은 그의 입에 자연스럽게 고기 한 점을 넣어주었다. 그가 대꾸했다.

“선수 만나는 여자들 중에 갈 곳 없는 애들 얼마 받고 자게 해주나 봐. 와보니까 집이 개판이더라고.”

도현은 그의 말에 호응하여 살짝 미소를 지었다. 미르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잠깐 보더니만 중얼거렸다.

“너… 좀 별나긴 한 거지.”

“뭐가요?”

“보통 사람들 중에서도.”

“하하. 보통 사람들은 뭔데요?”

도현이 반문했다. 미르는 설명하지 못했다. 그는 말을 돌렸다.

“왜 그런 게 신문에 났는지 잘 모르겠어. 우리 쪽에선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닌데.”

뭐, 굳이 우리 쪽이 아니더라도. 미르 킹쉴드는 확실히 괜찮아 보였다. 그는 스스로를 잘 숨기지 못하는 남자였다. 숨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이 만들어주신 그대로 완벽한 수컷이었고 그렇기에 아주 매력적이다. 가만히 둬도 여자들이 자석처럼 끌려갈 수밖에 없는 알파 메일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가 평소보다 약간 침착해 보이는 수준으로 괜찮아 보인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겨야 할지, 무서워해야 할지, 더 걱정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도현은 사실 미르에 대한 기사를 읽고 상당히 많이 놀랐다. 다니엘에 대한 것보다 더 놀랐다(그 남자는 자기 입으로 수십만 명의 사람을 죽였다고 데이트 초창기에 고백했던 남자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남자를 걱정하는 것 따위 그녀의 인생에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것일 텐데도.

도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사실이란 말이네요.”

“뭐, 그렇지.”

그는 산뜻하게 인정했다. 도현은 그에 대한 기사를 머리에 떠올렸다. 미르 킹쉴드, 그는 15살 때 그의 양친을 죽였다고 한다.

*

“흔한 얘기야. 내 부모는….”

“잠깐만요. 굳이 말하기 싫으면 자세하게는….”

미르가 선뜻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자 도현이 그렇게 말했다. 미르는 눈을 한 번 깜박했다.

“이유 들으려고 온 거 아니야?”

“그렇긴 해도… 그래도 말하기 싫을 수도 있잖아요.”

미르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고 도현의 얼굴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또 나 불쌍하다고 생각해?”

이렇게 남자답고 건장한데… 참, 어린애 같은 남자다. 도현이 약간 한숨을 쉬었다. 걱정했는데.

“그럴지도요.”

“들으러 온 건데 들어.”

“나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면서요.”

그제야 미르가 씨익 웃었다.

“보러 왔잖아.”

“…그러네요.”

오히려 도현이 약간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도현은 손을 뻗어 살짝 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그리고 슥슥 쓰다듬으니 미르가 애교를 부리듯 거기에 뺨을 부볐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는데, 그의 미소를 보니 그래도 좀 생겼던 마음의 벽이 사라진다.

‘…물건은 물건이야, 이 남자.’

미르 킹쉴드, 그를 보고 하나 깨친 게 있다. 남자는 날 때부터 이렇게 나야 하는 거라는 걸. 아무리 죽자사자 노력해도 원래부터 이렇게 난 남자를 이길 수 있는 남자는 없었다. 어리광부리고 어린애 같은 남자는 질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냥 그 정도 남자들이 어린애같이 구는 게 싫었던 것뿐이었다. 이런 남자가 애교까지 많으면 그냥 좋다.

“말해봐요.”

도현이 말했다.

“음… 근데 말했다시피 엄청 흔하다니까? 우리 클럽에서도 셋인가, 넷인가 더 있어.”

“…….”

“내 프로필엔 메트로서울에서 태어났다고 되어 있는 거 보니까 서울 출신이긴 한가 본데. 일단 대부분 중국에서 지냈어. 양쪽 다 등록 같은 건 안 되어 있었던 것 같아. 14살 때 처음으로 서류 같은 거 만들었으니까.”

미르가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기억날 때부터 엄마는 몸이 안 좋았고 아빠는… 뭐 놈팽이였지. 친아빠는 아니었던 것 같아. 일단 아빠라고 불렀던 놈은 동양 남자였는데 보다시피 난.”

미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도현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확실히… 그의 덩치나 외모나 피부색을 보았을 때는 코카서스 인종의 피가 가장 짙게 보이고(특히 북부 게르만) 의외로 위쪽에 흑인의 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는데 바로 직계로 동양인의 피가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뭐, 손님 애였던가 그랬겠지. 일단은 상하이에서 살았고 엄마는 돈은 없고 빚은 많은데 예뻤으니까.”

도현은 약간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인생에도 상하이라는 단어가 오르락내리락했던 때가 있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딱히 내 부모가 어떤 인간들이었는지는 모르겠어. 별로 얘기도 해본 적 없고. 어렸을 때는 배고팠다는 기억밖에 안 나.”

“그런데 이렇게 잘 컸네요.”

못 먹어서 못 컸다는 소리는 다 거짓말인가 보다. 클 남자는 다 크는구나. 도현은 또 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어쨌든 빚이 잘못 됐나봐. 남자들이 막 들이 닥치더라고. 아빠가 어떤 서류에 사인을 하라고 해서 그냥 했어. 그대로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지고….”

“잠깐만요. 그냥 사인을 하라고 했다구요? 설명도 안 하고? 그거 거부하면 안 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요?”

“뭐… 나도 한국 와서 찾아보니까 그렇긴 했는데. 어쨌든 그랬어.”

미르는 잠깐 하품을 했다.

“처음엔 그래도 그나마 괜찮은 데로 갔어. 미국 갔거든. 거기 게이트는 확실히 미국 안에 있는 게이트라서 그런지 체계가 잘 잡혀 있었어. 잘 배웠지. 아마 처음부터 남중국해에 갔으면 첫날에 죽었을 거야.”

“…….”

“한 1년쯤 있었나? 내 채무 잡고 있던 회사가 갑자기 이곳저곳 보내기 시작하더라고. 동해에도 2달 정도 있다가 체첸에도 4달 있고 그다음에는 남중국해로 갔는데. 처음에는 별로 이상하다고 생각 안 했지. 그때 나보다 나이 많은 용병 하나랑 자주 마주쳤는데 나보고 왜 이렇게 많이 돌아 다니냐고 물어보더라고. 난 모르겠다고 했지. 잠깐 알아보니 내 빚이 두 배나 늘었더라? 이상해서 보니까 아빠랑 엄마가 내 이름으로 빚을 더 얹고 있었던 거지.”

미르는 예전에 소설을 위한 인터뷰랍시고 도현에게 열심히 용병 생활을 얘기했던 것처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녀는 역시나 잘 들어주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 좋은 경청자였다.

“요령 붙으니까 빨리 빚 갚고 끝내고 싶어서 1년 반 동안 휴가도 안 가고 일했는데 휴가 써서 집에 갔어. 몰랐는데 소드마스터 아이가 있으면 부모들이 돈을 더 빌릴 수 있더라. 화가 날 줄 알았는데 화가 나기보단 이대로 둘이 있으면 내가 앞으로 살기가 너무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일단 빚을 지고 있었던 건 아빠였는데. 엄마도 아빠가 그러고 있었는데도 가만히 있었던 데다가 아빠도 없고 나도 없는 상황에서는 어차피 죽겠더라고. 그래서 그냥 둘 다 죽였어.”

“…괜찮았어요?”

“안 괜찮았지. 아니, 부모가 자식 팔아 치울 때는 거들떠도 안 보던 공안이 바로 들이닥치더라니까?”

미르가 한숨을 쉬었다.

“뭐, 남중국해보다는 감옥이 낫겠지 싶었는데 중국은 그냥 사형이야, 사형. 어째야 하나, 하고 있었는데 그때 도와줬던 용병이 좀 도와줬어. 변호사도 붙여주고. 그때는… 그 뭐더라. 인공지능 비서 동행 제도 이전이고 내가 팔려간 것도, 그때 일도 부모의 강압에 의한 거라 정당방위로 판결 났어.”

그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던 도현이 물었다.

“…그래도 돈은 갚아야 했죠?”

“그래도 돈은 갚아야 했지.”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의 무릎에 앉았다. 가만히 그의 머리를 안았다. 미르는 웃었다.

“다른 사람이 이랬으면 기분 나빴을 거 같은데 네가 이러는 건 좋아.”

그는 도현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힘들었겠어요.”

“그런가. 그랬지.”

그러고 있는데 타냐가 하품을 하면서 부엌으로 왔다.

“어… 너 언제 왔냐.”

“오랜만이야.”

그녀는 부스스한 자신의 금발을 쓸어넘겼다. 속옷만 입은 채로 부엌을 활보했다. 타냐가 냉장고에서 먹을 걸 찾으며 묻지도 않았는데 바로 말했다.

“야, 부모 죽이는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나도 우리 아빠 죽였는데, 뭐.”

진짜 흔한 일이란 말인가. 도현이 살짝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더니 통째로 벌컥벌컥 마시고는 그녀의 시선을 깨달았다.

“뭐? 그 새끼가 나 9살 때부터 강간했다고.”

도현의 가슴 사이에 뺨을 댄 채 기분 좋게 위로 받고 있던 미르가 대신 대꾸했다.

“그런 개같은 새끼는 죽어도 싸. 잘했어.”

“그치? 미르도 잘했어.”

“…그치?”

“뭐라고 하는 사람들이 병신들이지. 알지도 못하면서.”

사회의 통념이란 얼마나 잔인한가. 아이를 해치고자 하는 부모를 막을 수 있는 건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자식을 죽이는 부모보다 부모를 죽이는 자식이 더 무거운 형벌을 받는 것은 사회가 강자와 약자,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뉘는 계급이 전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전통적 강자와 가해자들이 피해자들보다 더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문명이 아무리 발전해도, 세상이 뭐라고 떠든다 해도. 인류 문명의 정수를 담은 세계의 거대 도시에도, 세상 어디에도 야만인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폭력이 숨겨져 있다.

도현은 자신과 그가 살아온 세상이 얼마나 다른지 사실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매력적인 남자였고 그래서 그가 좋았다. 보기보다도 편견이 적고 생각보다 말도 잘 듣고 가끔 엉뚱하기도 하고 그래서 함께 있으면 재밌고.

전에 로얄팰리스에서 한 웨스트이글 준우승 파티 때와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도현은 강렬한 이질감을 느꼈고 동시에 모호한 느낌도 받았다.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고 없을 것도 같았다. 그리고 타냐를 한 번 더 보았다가 품에 안겨 커다란 고양이가 기분이 좋아서 그르릉거리는 것 같은 미르를 한 번 보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과 같은 입장에 있었을 때 이렇게 강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피해자로 만드는 가해자들에게 저항했고 복수하고 이겼다. 그는 스스로를 지킨 것이다. 그가 오직 육체적인 강함만 가졌다면 그가 강한 남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것 같다.

그는 솔직했다. 그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굳이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숨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헨-세나에서 그는 도현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래도 위협이 느껴지니 그녀를 지켜주려고 했다. 그는 도현의 빚을 다 갚아주고도 그녀를 다시 못 볼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확실히 배운 티는 나지 않았고 그래서 어린애 같기도 했지만 오히려 가장 도현의 의사를 존중했다.

‘보이즈 얘기를 처음 꺼낸 것도 미르고….’

미르 킹쉴드라는 남자는 어디에 던져놔도 살아남을 남자였다. 스스로에 대해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는 남자였다. 만들어진 그대로 강하고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가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여자는 가장 강한 남자에게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존재였다. 도현은 그런 스스로에게 솔직히 깜짝 놀랐다.

“미르….”

도현은 그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집에 돌아와요.”

“응? 아직 기자들 많은데.”

“괜찮아요. 와요. 안 보이니까 자꾸 보고 싶어요.”

“진짜?”

미르가 기뻐하며 도현과 얼굴을 바로 마주했다. 역시 웃는 얼굴이 참 잘 어울리는 남자다. 그녀는 그의 웃는 얼굴에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걸 느꼈다. 이렇게 예쁜데 잘 웃기까지 하니. 남자의 미모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미르, 근데 이제 어떡해요?”

“뭘?”

그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어 도현의 맨살에 얼굴을 비볐다. 참 어지간히도 가슴 좋아한다. 그의 이런 점은 약간 포기했다.

‘물건이야….’

남자와의 관계에서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그녀가 굳이 양보하게 만든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매력적인 남자란 말이다. 그의 커다란 손이 도현의 치마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허벅지를 주물렀다.

“내 빚 갚아준다고 그렇게 한꺼번에 돈 다 쓰면 앞으로 미르는 어떡해요? 남자는 돈 없으면 가오 떨어진다더니. 내년까지 어떻게 살려고?”

생각이 없는 만큼 걱정도 없는 남자지만 그래도 이번은 너무 앞뒤를 안 본 것 아닌가. 예전엔 50억은 괜찮고 500억은 비싸다고 생각했던 남자였다. 이런 거 보면 정말 많이 바뀌었다. 미르가 눈을 가만히 감은 채로 도현의 가슴에 턱을 올린 채 대꾸했다.

“그러니까 이제 나 버리면 안 돼.”

“하하하.”

도현이 웃었다.

“어휴, 쌍으로 지랄을 해라.”

타냐는 그렇게 욕을 하며 부엌을 나갔다. 도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용돈 줘야겠다.”

그녀는 미르의 머리카락을 한 가닥, 한 가닥 쓰다듬었다.

“용돈?”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는지 그렇게 반문했다.

“응. 미르 같은 남자가 얌전히 나한테 용돈 받아갈 거 생각하니까 또 귀엽네.”

도현은 그의 콧등에 쪽 입을 맞췄다. 미르가 물었다.

“역시 내가 최고지?”

“네, 그러니까 내가 계속 데리고 살아야겠어요.”

도현이 답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말 잘 들어요? 사고 치지 말고. 주먹부터 나가지 마, 좀.”

도현이 지금 생각났다는 듯이 그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미르가 움찔했다가 툴툴거렸다.

“그건 내가 먼저 그런 거 아닌데.”

“어쨌든.”

“알았어.”

“다니엘 씨한테도 사과하구요. 미르가 오해한 거였잖아요.”

“…알았어….”

그는 꿍얼거리듯 작게 대답했다. 잠깐 그대로 서로 스킨십을 하면서 장난을 쳤다. 마음이 뿌듯할 정도로 예전 그대로였다. 아니, 어쩐지 더 좋아지는 것 같다. 미르는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너무 좋아.”

“저두요.”

미르는 그대로 그녀의 스커트 안으로 손을 슥 더 넣었다. 그녀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신음을 흘렸다. 예쁘다. 미르는 상기된 얼굴로 그녀의 거기를 잠시 뚫어져라 보다가 고개를 들어 도현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음… 역시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넣고 싶은데.”

미르가 눈치를 보더니 슬쩍 물었다. 도현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답했다.

“으응… 안 돼.”

“싫어?”

“싫어요.”

“안 아프게 잘 할 수 있어. 애도 나오는 구멍인데.”

“아니라니까요, 진짜. 미르 건 흉기 수준이라구요.”

“너무 성급한 판단일 수도 있겠다 싶지 않아?”

“그럼… 어디 봐요.”

도현은 검지로 그의 명품 팬티를 쭈욱 잡아당겼다. 그녀가 바로 대답했다.

“아, 역시. 안 돼. 안 되겠어요.”

“인생 화끈하게 사는 여자 마인드가 왜 이래? 높은 산을 보면 정복하고 싶다는 생각부터 해야지.”

미르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것도 정도가 있죠.”

“원래 작은 게 더 아파. 들어오는 느낌도 안 나서 여자들이 못 느끼니까 뻑뻑해서 더 다친다니까? 남자는 클수록 좋은 거야. 어?”

미르가 열심히 설득했다. 도현이 대꾸했다.

“남자는 클수록 좋은 건 맞는데 그래도 안 해요.”

“쳇.”

“하하.”

다른 남자들이 이러면 짜증 났을 것 같은데 그는 빤히 보여도 귀엽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냐고 말하는 놈만큼 멍청한 것도 없다. 당연히 그 사람에게 특별한 남자만이 어리광도 조름도 용인받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미르 킹쉴드, 눈치도 이 정도면 범상치가 않다. 안 될 것 같으면 적절하게 포기가 빠르다. 그는 자신이 어디까지 해도 되는지 잘 알았다.

“여우짓 해도 귀여워.”

도현은 웃으며 미르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

“어디 원한을 졌군.”

아마 이런 게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캘리 박은 한 장으로 간략하게 축약된 다니엘 스톤하츠의 현 상황을 슬쩍 한 번 보고는 그렇게 말했다.

“하긴 사람을 그 정도로 죽이면 원한 안 사기가 더 힘들지. 나도 웬만한 일 아니면 코카서스 쪽은 안 간다.”

그녀는 어깨를 잠깐 스트레칭 하고는 의자에 넉넉하게 등을 기대앉았다. 도쿄였다. 그냥 흔한 커피숍이었다. 여기저기 검은 양복을 입은 어깨들이 앉아 있다는 것만 빼면 아주 평범하다. 물론 평범하지 않은 것은 어깨들 말고도 더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가 있었다. 그 정도 되는 미남은 어디서도 보기 힘들다.

그녀는 종이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마치 ‘오늘 날씨가 참 좋네’라는 투로 말했다.

“너 이거 완전 인생 좆된 건 알지?”

“…….”

“내 말대로 내 밑에 들어왔으면 이런 기사 뜨기 전에 막아줬을 거 아냐.”

“그래도 떴을 겁니다. 폭로한 사람이 사회에서 꽤 힘이 있는 남자입니다.”

“뭐? 그래? 뭐 하는 놈인데? 그런 놈이랑도 척을 졌어? 뭐 하다가?”

“치정 문제입니다.”

“…야….”

그녀의 얼굴에 대놓고 ‘이 새끼가 정녕 또라이인가…’ 라는 의문이 천천히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하긴 또라이가 아니고서야 혼자서 독학하겠다고 전쟁터에 가진 않지.”

그녀가 말했다. 나이가 70이 넘은 세계적 유명인사에다가 굉장한 권력가이기도 한 그녀다 보니 다니엘을 처음부터 아랫 사람 취급했다.

“야, 너 자꾸 뭐가 중요하고 뭐가 안 중요한지 까먹는 거 같은데. 큰일 할 수 있는 애가 왜 계속 별거 아닌 일에 목숨을 거냐? 어? 연애, 돈, 이런 거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알잖아.”

그녀가 말했다.

“당장 학교부터 들어와라. 중국 가자. 왕리밍 밑으로 들어가. 그러면 나도 대충 네 일은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기초부터 착실하게 다시 배워라.”

“…….”

“야, 네가 내 랩에 있었으면 벌써 귀싸대기 한 대 맞았다. 대답 안 해?”

“학회장님… 아직 다니엘 스톤하츠 씨는 외부 인사잖아요. 말씀을 좀….”

뒤에 앉아 있던 그녀의 비서인 한민유가 그렇게 캘리 박에게 속삭였다.

“아, 난 내 밑에 있는 애들이 멍청한 짓 하는 걸 그렇게 못 참겠더라고.”

“그러니까 아직 다니엘 스톤하츠 씨는….”

“내가 만든 중력 마법 쓰는 거면 다 내 밑이지. 야, 너 진짜 지금 대가리 안 돌아가서 이러는 거 아니지? 너 지금 내 밑에 안 들어오면 남은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 한다, 어?”

알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뭔가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현 씨가 아닌 사람이 내게 명령을 내리는 게 이렇게 기분 나쁜 일이었군….’

폭언도, 폭력도, 명령도 전부 그녀가 할 때만 쾌락이 될 뿐이다. 다른 사람은 아무리 그래 봤자 불쾌감만 느껴질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캘리 박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정말 남은 평생 그녀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녀가 아닌 사람의 말은 듣기 싫다.

그런 내적갈등 속에 다니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제 주… 애인에게 먼저 물어보겠습니다.”

“이 새끼 진짜 또라이 아냐.”

캘리 박이 어이가 가출한 얼굴로 그렇게 면박을 줬지만 다니엘은 침착하게 디바이스를 꺼내서 도현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이런 캐릭터는 또 처음이네요….”

“아니, 옛날에 루소가 비슷하긴 했는데. 리밍이가 감당할 수 있겠냐, 이거.”

“퀸 교수님이 낫지 않겠어요?”

“안 돼. 걔한테 맡기면 1년도 못 배울 텐데. 리밍이가 낫지.”

“아.”

그들이 그렇게 서로 얘기를 나눌 동안 다니엘은 약간 긴장했다. 병원에 있을 때나 잠깐 연락할 수 있었다. 그 이상은 다니엘이 오히려 대화를 피하려고 했다.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무서웠다.

처음 그녀에게 과거에 대해서 말할 때, 그때는 지금보다도 뭘 모를 때였는데도 그녀에게 마치 이게 별것이 아닌 것처럼 말했다. 그가 중요한 실험을 하다가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그것이 흔히 일어날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사람을 한 명 죽였다고 하면 그 사람은 인면수심의 살인자에 상종 못 할 인간이지만 그 단위가 몇 십만이 되면 그 죄에 대해 가늠하기가 힘들어진다. 애초에 세상에 단신으로 몇십만이나 되는 사람을 죽인 사람은 지금 이 커피숍 안에 있는 사람들 빼고는 없다.

다니엘은 언제나 그녀에게 자신에 대한 선별적인 정보만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모든 것을 알아주길 바라면서도 그랬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사실 스스로가 잔인하고 흉포하며 모든 것을 쉽게 경멸하는, 누구에게도 사랑받기 힘든 남자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니엘 씨?]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에서 걱정이 묻어나온다. 다니엘은 그것이 미안했다.

“도현 씨… 자주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다니엘은요? 괜찮은 거예요?]

“네, 전 괜찮습니다.”

[거짓말하지 말구요.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기사 볼 때마다 다니엘 씨 정말 어떻게 될까 봐 걱정돼요.]

“도현 씨….”

다니엘은 뭘 어떻게 말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을 끝내고 간략하게 말했다.

“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겼는데… 세계물리학회 쪽에서 도와줄 수 있다고 합니다. 전에 사우디에 갔다 온 것 때문에 연이 생겨서요. 도움을 받는 게 좋을까요?”

[일단 급한 불은 꺼야 하니까…]

도현은 말을 흐렸다.

[그런데 그렇게만 말하면 제대로 판단하기가 힘드네요.]

“…….”

[그것 말고는 할 말 없어요?]

“그때는 정말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한 거라서요. 불쾌감을 드렸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다니엘은 곧바로 그렇게 답했다.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일단… 집에 와요. 얘기 좀 해요.]

“…알겠습니다. 당장 돌아가겠습니다.”

어쩐지 그녀는 다니엘의 거짓말을 조금씩 눈치채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아마 느낌뿐만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다니엘 스톤하츠는 죄책감이란 것이 메마른 지 오래라 그런 것으로 피해망상을 펼치지 않는다. 그는 이 감점을 벌충하기 위해 얼른 가점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집에 가면 드릴 게 있습니다.”

[뭔데요?]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아하실 겁니다.”

다니엘은 그렇게 통화를 종료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캘리 박이 키가 쑥 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뭐?”

“집에 다녀와서 확답을 드리겠습니다.”

“허….”

그녀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다니엘은 꾸벅 인사를 하고 뒤로 돌아섰다. 그녀는 한민유에게 대놓고 말했다.

“그냥 쟤 버리자.”

“어쨌든 모두가 원 배너 아래에 있는 게 중요한 거라면서요.”

“이건 이런 거 하나 제대로 관리 못 한 네 잘못이다. 쟤가 몇 년 동안 내가 만든 마법 쓰고 다닐 때 넌 뭐 했냐? 왜 몰랐어? 너 내 밑에 들어온 지 몇 년이냐? 어?”

“그, 그건… 죄송합니다, 학회장님.”

“하여튼 마음에 안 든다.”

캘리 박은 그렇게 혀를 차고 다니엘의 뒤통수에 대고 최후통보 했다.

“하루 준다. 하루 안에 대답해라.”

“…….”

저런 명령조에 정말 대답하기 싫었다. 다니엘은 잠깐 그녀를 돌아보았다가 커피숍을 나갔다. 주인님의 소환 명령을 받은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대로 부리나케 비행차에 올라탔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로 아르바이트를 다녀오면서 한국정부에게서 20억 정도를 받았다. 만약 다니엘 없이 구출 작전을 실행했다면 실패할 확률과 돈이 더 들 확률이 지극히 올라갔을 테지만, 어쨌든 그가 원하는 것이 돈이라는 걸 아니 오히려 가격을 후려쳤다. 그는 정확하게 750억이 필요했기 때문에 당연히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대신 가서 얼마나 벌어오든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캘리 박 뒤에 앉아 있던 여자가 그때 다니엘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녀의 말은 캘리 박의 보증이 달린 말이다. 즉, 한국 정부가 다니엘 스톤하츠에게 사우디 왕궁을 약탈해도 좋다는 비공식 허가를 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750억이 뭐가 그리 큰돈이겠는가. 전쟁에서 약탈이야 왕왕 발생, 아니, 사실 전쟁이란 다른 이를 약탈하기 위해 있는 일이다. 요즘은 전쟁 배상이니 뭐니 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어쨌든 그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국고로 환수하는 것이고 개인의 약탈은 웬만한 나라는 엄금하는 일이었다. 사회 내부 윤리가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망할 나라 사정을 이역만리의 한국이 뭐 하러 봐주겠는가. 어차피 몬스터 게이트는 자연재해이고 그로 인해 국제 정세 및 경제에 피해가 나는 것은 다들 익숙한 일이었다. 그 김에 싸게 용역 하나 부려먹을 수 있으면 자기들도 나은 거겠지.

한동안 집도 계속 비웠고 그동안 다른 남자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테니 마음이 좀 급하다. 마음이 급하다는 기분도 도현을 생각할 때만 느낄 수 있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그녀가 그사이 자신을 조금이라도 잊었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분명히 좋아하실 거다.’

그는 최상품 다이아몬드가 크기별로 몇 개씩 들어있는 다이아몬드 상자 하나를 받았다. 정확하게, 상자는 한국에 와서 샀다. 다이아몬드는 그냥 그쪽에서 두 줌 정도 집어들어 주머니에 넣고 나왔다. 몇십 캐럿짜리도 들어있었다. 보라색을 띠는 아름다운 보석이었다. 다른 것보다도 이걸 보면 분명히 도현이 기뻐할 것 같다.

그 외에도 다니엘은 달러, 위안화, 스위스프랑, 엔화, 유로 등등 국제 화폐를 종류별로 챙겼으며 금과 각국 채권도 좀 챙겼다. 그녀의 빚은 충분히 해결하고도 훨씬 남을 것이다. 그녀를 걱정과 근심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는 것이 기쁘다. 그녀는 다니엘의 노고를 인정해주고 더욱 사랑해줄 것이다.

다니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

“여기가 어디라고 와?”

송선호였다. 다니엘은 집 현관에서 그와 마주쳤다. 그는 다니엘을 보자마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너 같은 새끼가 도현이 옆에 있는 게 좋을 거 같아? 민폐다, 이 살인마.”

“…….”

“게다가 너 사우디에서 그 지랄하고 왔는데 이러다 도현이한테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 생기면….”

다니엘은 그의 말을 자르고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도현 씨에게 듣기 전까진 누가 뭐라고 해도 도현 씨 곁을 떠날 생각 없습니다.”

“들으면 얌전히 떠나긴 할 거고?”

“당연한 말씀을.”

다니엘은 그렇게 말하고 잠깐 현관의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체크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누구처럼 구질구질하게 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도현 씨가 싫어하실 테니까요.”

그 말을 들은 송선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다니엘은 현관으로 들어갔다. 한 손에는 다이아몬드가 잔뜩 든 검은 가죽으로 된 명품 케이스가 고이 들려 있었다.

‘빚을 전부 변제해 드리고 이런 선물까지 드리면 분명히 칭찬하고 고마워하시겠지. 시간이 걸려도 꼭 돈은 갚겠다고 하실 거고. 선물은 받아도 돈은 안 받는 사람이니까.’

다니엘은 심장이 약간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설레는 느낌이 생소하면서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현은 그가 요구하는 게 많다고 불평했지만 이렇게 되면 그녀는 절대 다니엘을 버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녀와 정말 평생 함께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도….”

다니엘이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도현을 찾았다. 그녀는 바로 거실에 있었다.

“으응, 하하! 아, 미르~”

“이렇게 먹으니까 더 맛있어.”

“정말요? 나도 해볼까?”

“잠깐만! 나 다 먹고.”

머리는 남색으로 어두운데 입은 건 전부 하얀색인 도현 킬스버그와 머리는 하얗게 번쩍번쩍한데 짙은 네이비색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은 미르 킹쉴드가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그는 도현의 블라우스를 풀어헤치고 그녀의 가슴에 케이크를 잔뜩 묻혀 핥아 먹었다. 그녀를 카우치에 쓰러뜨리고 그녀의 가슴살을 쪽쪽 빨다가 그녀가 곧 위로 올라왔다. 그녀도 그의 셔츠를 풀어헤치고 생크림을 잔뜩 바르려는데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다니엘 씨.”

빨리 와서 놀란 모양이었다. 도현은 약간 고개를 기울여 그의 뒤에 얼굴이 새파래져서 서 있는 송선호도 발견했다.

“어디 나갔다 왔어?”

미르는 허리를 일으켜 들어온 경쟁자들을 보다가 그녀의 손가락에 듬뿍 올라가 있는 생크림을 한입에 삼켰다. 그리고 나머지를 핥았다.

“그 새끼는 왜….”

송선호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굳은 얼굴로 그 둘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불길하더니 결국 데리고 들어온 것이다. 자기 부모도 죽인 패륜아를 결국 또 만나는 것이다. 도현은 흐트러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아니, 역시 다 사정이 있었더라고. 어떡해. 데려와야지.”

도현은 미르 킹쉴드의 몸 위에서 내려와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미르가 금방 그녀에게 다시 장난을 걸려고 했지만 결국 얼굴을 손바닥에 눌리며 밀려났다.

“괜찮아요, 다니엘 씨? 정말 해결될 수 있는 거예요? 학회라는 게 원래 그런 정치적인 힘이 있는 곳이었어요?”

“물리학회가 좀 특별한 곳이긴 합니다….”

다니엘은 그녀의 포옹과 걱정을 받으며 카우치 등에 몸을 기대고 의기양양한 태도로 자신을 보고 있는 미르 킹쉴드를 (벌레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니엘이 송선호에 대해서 즉각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일단 미르 킹쉴드를 빨리 처리해준 것을 참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질투에 눈이 먼 바보 같은 남자가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 했단 말인가.

“설명 좀 제대로 해봐요. 전화로는 도저히 모르겠잖아요.”

도현이 약간 꾸짖듯 말했다. 다니엘은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전화상으로는 좀….”

그리고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보다도 기뻐하십시오. 예정보다 빨리 도현 씨의 빚을 다 갚아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네? 아….”

그녀가 아주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현의 반응이 애매하다. 송선호도 묘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왜 이런가? 다니엘에 잠깐 주변을 살피는데 미르 킹쉴드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말했다.

“늦었어, 빙신아.”

“미르.”

도현은 미르에게 경고했다. 한 손에 커다란 케이크를 받쳐 들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미르는 여전히 의기양양하게 다니엘을 보고 있었다. 도현이 설명했다.

“미르가 갑자기 빚을 다 갚아줬다니까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그때 둘이 싸운 날 있잖아요. 이제 다니엘 씨도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

“그래도 저랑 로웰 선생님이 미르한테 원금은 다 갚으려구요.”

“에잇, 괜찮다니까.”

미르가 슬금 뒤로 다가와서는 그렇게 말하며 도현의 뺨을 물고 빨았다. 도현이 웃었다.

“그러다 내가 진짜 떼먹으면 어쩌려구요. 미르 돈도 없으면서.”

“그러니까 나 버리면 안 된다고. 알았지?”

“하하하. 알았어요.”

미르 킹쉴드는 아주 해맑고 속없게 그녀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경쟁자들의 속을 더 뒤집어놓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내가 다 갚아주려고 했어.”

“진짜요?”

“어. 나 짱이지?”

“하하. 정말.”

“내가 최고지?”

예전에 돈을 주는 대신에 걸즈에 들어오라고 했다가 한 번 화끈하게 데였던 남자라서 그런지 이런 거 외에 다른 말이 없다. 그냥 자기가 최고라고 해달란다.

“미르가 최고예요.”

물론 당연히 해줄 수 있었다. 실제로 미르 킹쉴드가 최고였기 때문이다.

“…….”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것을 보고 있다가 디바이스에 진동이 느껴져 잠시 그 화면을 보았다.

<저희 학회장님 성격이 불같으셔서요. 꼭 시간 맞춰서 답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민유의 문자에서 세계물리학회에 이미 목줄이 채워진 자신의 처지를 알 수 있었다. 도현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송선호보다 먼저 선수를 치려고 너무 무리를 했군. 미르 킹쉴드야 멍청이니 이런 생각 같은 건 못 할 줄 알았다. 어차피 엘 드라카에서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사우디 같은 건….’

다니엘은 자신의 패배 요인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냉정하게 분석을 할 수 있는 머리와는 다르게 뭔가 충격을 먹은 게 분명했다. 심장이 이상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짜증 난다. 그녀가 앞으로도 계속 다른 남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별로라고 생각하다 보면 결국엔 자신을 버리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불쾌한 상상이었다. 뭔가 욱 하고 튀어나올 것처럼….

다니엘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툭 떨어뜨렸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케이스가 열리고 다이아몬드가 와르르 쏟아졌다.

“어머!”

도현이 깜짝 놀라 바로 무릎을 꿇었다. 다이아몬드였다. 수십 개는 되는 것 같았다. 도현은 그 중 보랏빛을 띠는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집어 들었다. 진짜인가? 진짜인 것 같다. 이런 건 처음 본다…. 그리고 그녀는 불현듯 고개를 들어 다니엘 스톤하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도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그대로 흘렀다. 도현은 어쩐지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자세로 남자를 올려다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로 일어나려고 했는데 다니엘이 그대로 도현의 턱을 한 손으로 받쳐 감쌌다. 조각처럼 아름다운 그의 엄지가 그녀의 뺨을 매만졌다.

“마음에 드십니까?”

“네?”

“다이아몬드 말입니다.”

“네? 네… 예뻐요.”

도현이 다시 다이아몬드를 보기 위해 시선을 내리려고 했지만 그가 턱을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며 저지했다.

“도현 씨에게 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

“네… 고마워요, 다니엘 씨.”

도현은 약간 불편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 자세는 소위 남자에게 입으로 봉사를 하는 체위와 비슷하지 않은가. 별로였다. 그는 평소와 같이 무뚝뚝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다른 사람에게 향하는 것과는 다르게 약간 부드러운 눈빛으로….

“신이 어떻게 인간을 사랑하는지 아십니까?”

“네?”

“그의 말에 따르는가를 시험하기 위해 인간을 불모지로 보내는 것도, 불모지를 방랑하는 인간이 굶어죽기 직전에 만나를 내려주는 것도, 그의 말에 거역하면 분노하여 벌을 주는 것도 모두 그의 사랑입니다. 드러나는 양상은 정반대로 보이지만, 그 기원엔 사랑이 있는 겁니다.”

“네…?”

갑자기 이런 말은 왜 하는 것일까? 도현은 애초에 종교를 믿지도 않았다. 다니엘은 본인의 입장에서는 아주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송선호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뭐 하는 거야? 놔!”

“저와 미르 킹쉴드에 대해서 기사를 터뜨린 건 송선호입니다.”

다니엘은 송선호를 돌아보지도 않고 빠르게 말했다. 이상하다는 눈길로 다니엘을 올려다보고 있던 도현이 일순 눈을 크게 떴다가 바로 송선호를 보았다. 그는 당황해서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아, 아니… 아니야, 도현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는 다니엘의 갑작스러운 폭로에 대비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도현은 그대로 그의 얼굴을 보고만 있었다. 그 시선에 송선호는 식은땀을 흘리며 한 발자국 더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어디선가 야수 같은 살기가 훅 끼쳐왔다.

“뭐라고….”

미르 킹쉴드였다. 도현은 헉 하고 뒤를 돌아보려고 했지만 다니엘이 손을 놓지 않았다. 미르가 뭘 어떻게 하려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그는 테이블 위에 케이크를 던져놓고 카우치에서 일어나서 송선호에게 걸어갔다. 미르의 목소리가 극도로 낮아졌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이 씹새끼가…….”

“미르…!”

그가 그대로 송선호에게 손을 뻗는 게 다니엘의 옆으로 겨우 보였다. 도현은 기겁해서 비명을 지르려는데 미르가 그의 앞에서 사라졌다.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던 송선호의 얼굴에도 당황한 빛이 역력해지는가 싶었는데….

쾅!!

곧바로 거실의 전면 유리가 박살 나며 미르 킹쉴드가 벽을 뚫고 날아갔다. 정원 한가운데 있는 분수가 포탄에 맞은 듯 뭉개졌다. 전과는 완전히 반대의 입장이다. 다니엘이 말했다.

“송선호가 죽는 건 원하지 않으시겠죠. 기쁘십니까?”

도현이 입을 딱 벌렸다. 집이 부서졌다. 그녀는 그걸 눈을 크게 뜨고 보다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보았다.

“선생님…!!”

그녀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녀의 턱을 잡은 그대로였다.

“이 또라이 새끼가…! 이제 놔! 놓으라고!!”

송선호가 그를 뒤에서 잡아당겼다. 힘으로 뒤로 당겨진 다니엘은 곧바로 송선호의 주먹에 얼굴을 맞았다. 잠깐 휘청한 다니엘은 아무런 온도도 담지 않은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몸을 바로 한 다니엘 스톤하츠는 송선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나에 대해서 조사를 했다면 아실 겁니다. 내가 뭘 할 수 있는 남자인지.”

“…그래. 터뜨릴 게 더 많다는 것도 알지. 아무리 도현이라도 그걸 다 받아줄 것 같아?”

송선호가 물러서지 않고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들이 그러고 있는 사이 도현은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로웰 선생님…! 지호 씨! 재인 씨!”

2층 거실도 조금 같이 날아갔다. 그들이 걱정되었다. 2층으로 올라왔더니 1층이랑 비슷하게 콘크리트 연기가 좀 날리고 있었다. 거실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곧바로 로웰의 침실문을 열었더니 그녀와 어시들이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밤 새웠나 보다.

쿠웅! 쿵! 쾅!

“이 좆 같은 새끼가! 나와!!! 덤벼!!! 이 개새끼! 내가 오늘은 진짜 죽여버린다!!”

도현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보니 송선호가 다니엘 스톤하츠의 멱살을 잡고 있었고 미르 킹쉴드가 어느새 달려와 보이지 않는 벽을 주먹으로 미친 듯이 치며 있는 대로 폭언을 내뱉고 있었다.

“…….”

도현은 세 남자를 가만히 보다가 다가갔다. 그녀는 다니엘의 멱살을 잡은 송선호의 손을 잡았다. 그는 도현이 다시 나타나자 확 당황했다.

“도, 도현아….”

그는 다니엘의 멱살을 놓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도현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사실이야?”

“아, 아니….”

그가 시선을 피하며 뒷걸음질을 치자 그녀는 그의 넥타이를 확 잡아당겼다. 눈이 딱 마주치자 그는 피하지 못했다.

“사실이냐고.”

“…….”

“왜 그랬어?”

그러자 도리어 송선호는 억울한 얼굴을 했다.

“그러면… 그냥 놔두라고…? 네 옆에 부모도 죽이는 패륜아랑 이런 사이코패스가 있는데 그냥 두라고? 내가 어떻게 그래?”

“그럼 차라리 나한테 말을 하지 왜 기사를 터뜨려? 너 요새 계속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해서 내 옆에 있으니까 좋았어? 행복했어? 너 이렇게 치사한 남자였어?”

그녀가 계속 추궁했다. 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녀는 그의 변명도 듣기 전에 그를 밀어냈다.

“도, 도현아… 난, 난 너 사랑하니까. 너 지키고 싶어서 그런 거야. 그, 그런 거라고.”

송선호가 돌아선 그녀의 손을 잡으며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다니엘 스톤하츠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보이지 않는 벽을 깨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미르 킹쉴드가 보였다. 쉴드의 너머는 그의 오라로 인해 전부 날아가 버렸다. 그를 또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

도현은 미르의 쪽으로 다가가서 그부터 진정시키려고 하다가 움찔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니엘이 가만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미르는 저런 짐승이고, 송선호는 내 마음 사로잡을 자신도 없는 찌질이니까 다니엘 씨를 선택하라구요?”

다니엘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이거 풀어요.”

“그럼 전 죽습니다.”

도현은 찌질이 소리를 듣고 충격에 빠진 송선호를 본 채도 안 하고 미르에게 다가갔다. 미르의 앞에 서서 가만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미르.”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이 씹새꺄!”

“미르!”

도현이 크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순간 그가 움찔하며 도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 이지가 돌아왔다.

“저 새끼가 먼저 시작한 거야!!”

그는 그렇게 소리쳤다. 도현은 머리를 짚으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그녀는 몇 초 정도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미르 킹쉴드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송선호의 얼굴과 다니엘 스톤하츠의 얼굴까지 천천히 돌아보았다. 언제는 사고를 치든, 허세를 부리든, 좀 소름이 끼치든, 참 예쁘고 매력적인 남자들이라고 생각했다. 보고 있으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다이아몬드처럼.

‘이제 됐어.’

질렸다. 도현은 성가시다는 걸 숨기지 않으며 세 남자에게 통보했다.

“셋 다 당장 내 집에서 나가.”

*

“아, 어떡해. 이건 어떻게 고쳐?”

도현은 쉴드가 사라지자 폭격이라도 맞은 것같은 1층 거실을 둘러보며 그렇게 걱정했다. 처음에 다니엘이 미르를 날려버리며 스크린 겸용 유리창이 박살 났는데 미르가 들이닥쳐 난리를 치며 나머지도 다 날아갔다. 그녀는 디바이스를 들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네. 도현 킬스버그입니다. 기억하시죠? 전에 저희 집 3층 고쳐주셨잖아요. 지금 거실이 많이 망가졌는데 이런 것도 고쳐주실 수 있나요? 사진 보내드릴게요.”

도현은 난장판이 된 거실과 정원을 찍어서 업자에게 보냈다.

“…….”

“…….”

“…….”

도현의 태도에, 뭐랄까, 충격을 먹은 남자 3명은 그대로 굳어 있는 상태였다. 미르 킹쉴드는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도현 킬스버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중얼거렸다.

“거짓말….”

금방까지만 해도 서로 좋다고 껴안고 쪽쪽 빨고 있었다. 미르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거짓말이지…? 진짜? 진짜 나 나가? 오늘 왔는데 다시 나가라고?”

“네, 나가요.”

“왜? 왜? 왜 나가야 돼? 내가 잘못한 거 아니잖아. 저 새끼들이 먼저 나한테…!”

“네, 알아요. 그래도 나가요.”

도현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녀와 얼굴부터 마주 보려고 했다. 도현은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도, 도현아…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내가 그때, 그때 잠깐 미쳤나 봐. 응? 도현아….”

송선호도 정신을 차리고 얼른 그녀를 붙들었다.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도현은 그를 노려보았다.

“너 말이야. 그렇게 잘난 척은 있는 대로 다 하면서 마음대로 내 주변 치우려고 하고, 그리고 내 앞에서는 사랑한다, 사랑한다, 너 원래 이렇게 철면피였어? 왜 맨날 네 마음대로야? 내 일을 왜 계속 네가 결정하려고 그래? 앞으로 안 그렇겠다고…! 하.”

그녀는 화를 냈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 됐어. 그냥 나가.”

“도현아….”

“나가.”

도현은 그의 손도 뿌리쳤다. 미르 킹쉴드도 계속 끈질기게 굴고 있었다. 도현이 그를 짜증스럽게 보며 화를 냈다.

“아! 그만해요. 나가!”

그녀의 말보다도 그녀의 눈빛에 덜컥 심장이 떨어졌다. 미르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어째서 그녀는 그렇게 사랑스럽다는 눈길을 보내다가도 금방 이렇게,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볼 수가 있는 걸까. 미르는 상처를 받았다. 그녀를 웃게 하고 기분 좋게 하는 일은 정말 쉽다고 했는데 화가 났을 때의 그녀에게는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 때문이잖아….”

송선호의 얼굴이 파래졌다가 벌게지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나라고 이런 짓 하고 싶었는지 알아? 근데 넌…! 넌 내 말 안 듣잖아! 듣는 척도 안 하잖아! 이 개 같은 새끼들 때문에 너한테…! 너한테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해! 너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는 그렇게 소리쳤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이 새끼고 저 새끼고 사고칠 거 눈에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냐고! 너한테 무슨 일 생기면 난… 난…!!”

“그래, 그래서 네가 이번에 제일 크게 사고쳐서 좋겠네. 그만해. 그만하고 나가.”

“도현 킬스버그….”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는 아무것도 참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나 이제 너 없으면 정말 못 산단 말이야…. 제발….”

“질질 짜지 마. 꼴 보기 싫어.”

그녀의 표정은 냉정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간절하게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송선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정말…? 정말 이대로 끝이야? 정말로? 이렇게 끝나는 거야?’

송선호는 믿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그는 그저 그녀에게 온전히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와 단둘이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는 도현 킬스버그를 가질 수 없는 것일까? 이렇게 꼴사나운 짓까지 전부 하고도 안되는 거란 말인가.

미르 킹쉴드도 송선호도 그녀의 냉정한 태도에 충격을 먹어 각자의 형태로 굳어 있다가 일순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그녀를 동시에 붙들었다.

“싫어…. 싫어! 내가 널 어떻게 포기해! 포기할 수 있었으면 진작에 포기했어! 이럴 거였으면 시작도 안 했다고! 내가, 내가 얼마나 힘들게 시작한 건데! 벌써 이렇게 끝낼 순 없다고!”

“나 안 버린다며!! 내가 최고라며!! 나 좋아한다고 했잖아! 금방도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다 거짓말이었어? 다 거짓말이야?!”

송선호도 송선호지만 미르 킹쉴드가 이렇게 매달릴 줄은 몰랐다. 그는 전에 도현에게 얌전히 마지막 인사를 하며 예의를 지키려고 했다. 도현이 당황해서 두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내가 얼마나 널 사랑하는데! 도대체 그걸 왜 모르는데! 내가 이렇게 걱정하는데! 왜 그것도 몰라주는데!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돼? 넌 내 말이라면 죽어도 안 듣고! 난 걱정돼서 미칠 것 같은데!”

“넌 어떻게 된 여자가 이렇게 책임감이 없어! 어! 자기 입으로 한 말은 지켜야 할 거 아냐! 나 데리고 산다며! 나 안 버린다며! 그러니까 끝까지 책임져!!”

그들은 서로를 견제하던 건 까맣게 잊고 도현에게 호소했다. 송선호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고 미르는 평소의 유쾌함이 싹 가시고 정색하고 있었다. 도현은 덩치가 산만 한 두 남자에게 붙잡혀서 그들의 변명을 듣고 있어야 했다.

‘시끄러워….’

그들의 변명이 그저 귀를 스쳐 지나가기만 할 뿐이었다. 에고가 강한 남자들이란 결국 자신이 우선이다. 이런 상황에 있어야 하는 도현의 기분 같은 건 전혀 배려하지 않는 것이다. 더 정이 떨어진다.

‘송선호의 말이 맞네. 애초에 문제가 많을 것 같은 남자들을 만난 내 잘못이지.’

그녀는 고개를 돌려 말이 없는 다른 남자의 상태를 보았다. 그는 아까 도현이 나가라는 말을 했던 그대로 굳어 있었다.

“안 나가요? 다니엘 씨라도 좀 조용히 나가주세요.”

그러자 앞에서 마구 떠들고 있던 남자 둘도 입을 싹 다물었다. 그녀의 태도에서 어찌할 수 없는 단호함을 느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고개만 도현의 쪽으로 돌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전부… 잘못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걸 바란 게 아닙니다. 도현 씨의 기분을 상하게 할 줄 알았어야 했는데…. 제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저는 정말 열심히… 도현 씨의 사랑을 받기 위해….”

그는 약간 말을 더듬었다. 아까 전 현관에서 도현에게 거절당한다면 송선호처럼 구질구질하게 굴지 않을 거라고 말했던 그였다. 그는 도현의 눈빛을 직시했다. 그녀는 이미 그에게서 마음이 떠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이제껏 없었던 충격이었다. 강한 허탈감과 실망, 상실감이 느껴졌다. 모든 것의 상실이다.

‘아….’

그리고 어쩐지,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그것도 도현과 같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자격 따윈 없는 남자였다. 누가 다가와도 그들이 그의 돈이나 보고 접근하는 사람들이라 매도하곤 했었다. 그러니까 그는 처음부터 미르 킹쉴드나 송선호를 제거할 방법에만 골몰했다. 사랑받을 자신 따윈 애초부터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디바이스를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상대가 받자 곧바로 말했다.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도현을 보며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현 씨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버러지 같은 것들은 도현 씨 곁에서 치워드리고 가겠습니다.”

그러자 도현은 자신을 붙잡고 있는 미르 킹쉴드의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기겁해서 도현을 끌어안았다.

“저 또라이 새끼가 저렇다니까! 어! 도현아, 저…!!”

본능적으로 동아줄처럼 도현을 꽉 끌어안은 미르였다. 저건 그의 앞에서만 속내를 내보였지 도현의 앞에서는 얌체도 그런 얌체가 없었다. 드디어 도현의 앞에서도 그 시커먼 속을 드러낸 것이다. 송선호는 실감이 나지 않아서 다니엘과 미르를 번갈아 보았다. 그들은 동시에 헉 하고 자신의 목을 감싸 잡았다. 그리고 동시에 도현에게서 몇 미터나 밀려 떨어졌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의 내용이 맞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하는 건 저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도 몇십만 명을 죽였고 앞으로 더 죽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당장 저 두 사람을 죽여도 전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할 겁니다. 도현 씨 덕분에 약간 후련함을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겠죠. 지금 죽이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둘을 죽여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도현 씨가 저만 바라봐준다면 그런 것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오히려 언제나 당장 죽여버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도현의 주변을 마음대로 결정하려고 했던 것은 송선호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도현의 말에 복종하고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던 다니엘이야말로 물밑에서 많은 걸 조정하려고 했다. 그는 미르 킹쉴드를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를 도발하여 사고를 치도록 유도했고 송선호를 제거하기 위해 미르 킹쉴드를 곧잘 끌어들였다. 그와 동시에 도현이 그들에 비하여 자신을 비교우위에 두도록, 그들과 달리 스스로가 아닌 그녀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처럼 연기했다. 그녀의 기분을 우선시하고 다른 남자들을 질시하지 않고 그녀를 가장 잘 이해하고…. 하지만 그는 한때 신이 되고자 한 남자로, 그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남자였다. 그는 경쟁자들에 대한 풀길 없는 살의와 복수심으로 자신의 인간성을 확인하곤 하였다.

“…왜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저는 항상 도현 씨가 절 알아주었으면 했습니다.”

그리고 몰라주었으면 하기도 했다. 그동안 미르 킹쉴드와 송선호는 산소 공급이 차단된 쉴드 안에 갇혀 천천히 질식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랑합니다. 도현 씨는 이 세상에서 제가 사랑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제가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걸 제 작은 보답으로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다니엘은 말을 이었다. 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그의 무감정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지금까지 의뭉스럽게 생각했던 부분이 한순간에 드러나는 기분이다. 배신감조차도 들지 않는 걸 보면 그녀도 그의 헌신을 꽤나 의심스럽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잠시 실소가 나왔다. 그리고….

“남자들은 왜 하나같이 이렇게….”

그녀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제멋대로야!!!”

드디어 도현 킬스버그가 폭발했다. 그녀는 다니엘 스톤하츠의 머리카락을 확 잡아당겼다. 그는 깜짝 놀랄 새도 없이 세게 뺨을 맞았다.

“…!”

그는 너무 놀라서 마법을 멈추고 말았다. 공중에서 남자 둘이 털썩 떨어졌다. 다니엘은 미르 킹쉴드를 신경 쓸 새도 없이 눈을 크게 뜨고 도현을 돌아보려다가 다시 한번 더 뺨을 맞았다.

“제일 싫어!! 왜 말을 안 들어!! 제멋대로 굴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

쫙. 쫘악. 그의 조각 같은 얼굴에 빨간 손자국이 여럿 났다.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화가 나서 다니엘의 뺨을 치고 있었다. 다니엘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게 바로 그가 꿈에도 바라오던 게 아닌가.

분노한 그녀의 얼굴은 그에게 신과 같았다. 화기를 이기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치는 매만큼 그녀의 모든 걸 담은 것은 없을 것이다. 이 순간,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다니엘 스톤하츠 밖에 없었다. 그에게 사랑이란 다정함만으로는 부족했다. 사랑이란 언제나 분노와 복수가 함께 하는 것이다.

“무릎 꿇어!”

그는 얼른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발로 그의 허벅지를 콱 밟았다. 그리고 그의 머리카락을 뜯어져라 잡아당기며 화를 냈다.

“내 앞에서는 내 말이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할 것 같이 굴면서 뒤에서 그런 더러운 짓이나 해요? 다니엘이 미르랑 송선호 자꾸 건드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그런 짓 하며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도대체 다니엘은 머리가 좋은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어!”

“도현 씨는 호기심이 많으시니까 미르 킹쉴드나 송선호 같은 것도 재밌다고 생각하시지만 사실 저것들은….”

다니엘이 그렇게 빠르게 변명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뺨을 한 대 더 맞았다. 그녀의 손바닥이 빨갛게 부었다.

“말대꾸하지 마!”

그녀는 이렇게 이성을 잃고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우아하고 매력적이고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다니엘은 이것만으로도 지금까지 했던 일들이 모두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이렇게나 사랑받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위하여 이렇게 변해주었다.

도현이 그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꿈틀했다. 그가 지금 이걸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녀는 그를 경멸하듯 내려다보았다.

“이 변태.”

“윽….”

도현은 그의 허벅지를 더욱 힘을 주어 밟았다.

다니엘 스톤하츠에 의해 잠깐 죽을 뻔했던 남자 둘은 그것도 잊고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벌써 달려들고도 남았을 미르 킹쉴드는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도, 도현이 무서워….”

그러자 도현 킬스버그가 귀신같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둘 다 이리 와요!”

그녀가 저렇게 화가 난 건 송선호도 6년 동안 처음 봤다. 대체로 그녀의 성질을 긁는 그라서 많이 싸워도 봤는데도 저런 건 처음 봤다. 그녀는 대체로 누군가에게 화가 날 정도면 그 전에 관계를 끊고 마는 스타일이었다. 아니면 애초에 큰 소리가 나올 정도로 감정을 담아두지도 않았다. 사람에게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춤주춤 다가왔다. 그녀는 다니엘의 허벅지를 한 번 더 콱 밟아버리고 미르 킹쉴드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그의 귀를 확 잡아당겼다. 고개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고 도현이 말했다.

“내가 뭐라고 그랬어요? 싸우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요? 주먹부터 들지 말라고!”

“아, 아니…! 이건 쟤, 쟤가 먼저…!”

“그럼 또 누가 먼저 치면 그 사람 죽으라고 이성 잃고 주먹 휘두를 거예요?! 그러니까 다니엘이 일부러 더 그러는 거잖아! 왜 그걸 몰라! 바보야?!”

그녀는 뭔가에 또 욱해서는 손을 치켜들었다. 미르는 당연히 그걸 피할 수 있을 터지만 그대로 맞았다. 그는 확 하고 표정이 바뀌더니 외쳤다.

“또 때렸어!”

그는 예전 로얄팰리스 파티 때도 그녀에게 뺨을 맞은 전적이 있었다. 그때의 일은 그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크게 남아있었다. 도현은 더 열이 받았다.

“내가 벌써 몇 번이나 봐줬는데! 그렇게 싸우는 게 좋으면 차라리 나한테 맞아!”

그녀는 한 대 더 때렸다. 미르는 두 손으로 맞은 뺨을 꽉 누르며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로 도현을 바라보았다. 도현은 그대로 분노가 가득한 눈길을 돌려 다음 타자를 찾았다. 그는 벌써 뒷걸음질을 쳤다.

“도, 도현아… 나, 난 엄마한테도 맞아본 적….”

도현은 그의 넥타이를 확 잡아당겼다. 거의 넘어질 뻔한 그는 도현의 허리를 잡으며 겨우 균형을 잡았다. 그는 도현의 얼굴을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넌 내가 좋다면서 계속 딴소리 할래? 어? 너 도대체 뭐 하는 남자야? 그렇게 자신이 없어? 그렇게 잘난 척은 있는 대로 하면서!”

그녀는 그대로 송선호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는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그는 말 그대로 태어나 누구에게도 맞아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생각보다도 굉장히 아팠다. 맞고 난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도현을 다시 돌아보았다. 도현은 그의 넥타이를 더 꽉 쥐어 당겼다. 눈을 똑바로 마주친 채로 그를 혼냈다.

“내가 뭐라고 그랬어? 내가 너 충분히 좋아한다고 했지? 그래! 네가 해달라는 대로 사랑한다는 말도 몇 번 해줬잖아. 그럼 사람이 좀 만족할 줄도 알아야지 자꾸 욕심만 내!! 난 너 같은 거 없어도 잘 먹고 잘살아! 그게 그렇게 억울하면 그냥 좀 꺼져!!”

그리고 송선호의 넥타이를 놓았다. 그녀는 ‘하’ 하고 한숨을 쉬었다.

“쟤는 왜 한 대만 때려….”

미르 킹쉴드가 투덜거렸다. 도현이 지친 얼굴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이제 됐어요. 셋 다 조용히 나가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그녀는 이미 반쯤 부서져서 의미가 없는 현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

“…….”

그리고 매일 맞는 남자와 두 번 맞아본 남자와 한 번도 맞아본 적 없는 남자는 각기 반응 속도가 달랐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대로 그녀의 앞으로 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

“도현 씨,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도현 씨가 다 알고 계실 지는 몰랐습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절대 사고 치지 않고 잘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는 도현 씨 앞에서 털 오라기 하나 숨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저에 대한 모든 걸 도현 씨가 결정할 수 있도록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잘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화를 낸다는 것은 찬스였다. 그녀가 정말 정이 떨어졌다면 이렇게 화를 내고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말했다시피 화를 내고 분노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오늘만큼 그녀의 사랑을 강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 뿌듯할 정도로 마음이 떨렸다. 그녀가 자신을 이렇게나 사랑하고 있었다니…!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그녀의 곁을 떠날 수가 있겠는가!

“제가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사실 도현 씨가 다 알아서 하실 수 있는데도 제가 공연히 일을 크게 만들었습니다. 도현 씨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도현 씨가 조금이라도 수고를 덜었으면 해서… 아니, 아닙니다. 사실 전 질투를 했습니다. 저 버러지 같은 것들이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도현 씨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저지르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도현 씨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

도현이 그의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미르 킹쉴드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얼른 도현에게 다가갔다.

“도현아… 화 많이 났어? 응? 화 풀어.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이럴게. 진짜 맞아도 이제 참는다. 한 번, 아니, 두 번 참는다. 내가 잘못했어. 나 이제 진짜 말 잘 들을게. 응? 응? 응응?”

그는 옆에서 도현의 얼굴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녀의 주변을 자꾸 왔다 갔다 하며 말을 걸었다.

“도현아~ 응? 진짜, 진짜 진짜로. 그럼 앞으로 싸움 날 만한 일 있으면 미리 물어볼게. 아니, 아니! 그냥 네 말대로만 할게. 응? 어떻게 할까? 그냥 맞고만 있을까? 죽지만 않으면, 뭐 괜찮겠지. 응, 도현아? 나 좀 봐봐. 나 좀 봐줘.”

미르는 그녀의 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난….”

이윽고 송선호가 입을 열었다. 그는 어깨에 힘이 빠져 있었다. 깔끔하던 모습도 어느새 많이 흐트러졌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난 너 없으면 이제 못 살아…. 윽.”

그는 그대로 자신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싸 가렸다. 그가 다시 눈물을 흘렸다. 아주 난장판이었다. 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돌아버리겠다.

그리고 갑자기 기대하지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집이 왜 이래?”

부서진 거실벽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는 주변을 잠깐 둘러보았다. 새빨간 장미 꽃다발을 든 그는 베이지색 세련된 고급 정장에 짙은 자줏빛 셔츠와 짙은 네이비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에 비취색 눈동자, 색기가 도는 빨간 입술과 요사스러운 미소를 지닌 남자였다. 약간 허스키하면서도 많이 낮은 목소리라,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모두가 그를 돌아보았는데, 그중에 좀 놀란 표정을 지은 것은 도현이었고 경악한 표정을 지은 건 눈물을 질질 흘리고 있던 송선호였다.

“일이 생겨서 서울에 온 김에 들렸는데. 잘못 찾아온 걸까?”

에반 블랙, 그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러블리 빗치 2부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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