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만 혹은 사랑 (1)
2128년의 메트로서울은 마천루가 하늘을 찌르는 바벨탑의 도시다. 실제와 같이 선명한 홀로그램 광고가 사람들의 머리 위를 뒤덮는다. 부촌과 빈민촌이 뒤섞인 지저분한 서울도 다 옛말이다. 광대한 메트로서울의 중심을 칭하는 <시티 오브 서울>, 즉 진정한 서울은 한강을 중심으로 한 몇 개의 구로, 아마 과거의 사람들이 막연히 미래를 그릴 때 상상하던 바로 그런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깨끗하고 넓은 거리, 고급 쇼핑 거리, 유명 인사들이 대거 거주하는 고급 맨션 단지, 길거리를 조화롭게 꾸미는 예술품, 명품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세련된 가로등, 넓고 밝은 공원, 밤낮을 가리지 않는 안전한 치안, 상대적으로 깨끗한 공기, 값비싼 옷을 걸치고 여유로운 얼굴로 느리게 걷는 사람들.
여기는 눈에 거슬리는 것이 없는 곳이다. 인류 문명의 발전을 모두 모아 놓아 세련되게 전시한 이 거리를 보면 현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강하게 선망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혹은 그들이 무엇을 모르는지.
햇빛에 반짝이는 유리 빌딩, 그 앞에는 일본식과 프랑스식 정원을 섞어 놓은 정원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작은 테이블과 의자 중 하나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금색 장식이 달린 굵은 굽을 가진 블랙 부티, 아름다운 각선미를 드러내는 블랙진에 포인트로 에메랄드 색 뱀 가죽 벨트를 하고 한쪽 어깨를 드러내는 약간 짧은 기장의 얇고 헐렁한 블랙 니트를 입었다. 왼쪽 손목에는 하얀색 뱀 가죽으로 된 사각형 금장 시계와 다이아몬드 팔찌, 그리고 화려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목걸이는 얇은 골드 체인으로 된 드롭 다이아 펜던트, 머리는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화려한 선글라스를 끼고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아이보리 색으로 포장된 길거리를 걸어가는 군중은 여러 종류의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잔뜩 쇼핑백을 들고 다니는 관광객, 데이트를 하러 온 한껏 꾸민 수컷 공작 같은 남자들, 끊임없이 통화를 하며 서류와 스크린을 동시에 뒤적거리는 여자들.
도현 L. 킬스버그는 그런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일찍 왔네?”
약간 허스키하면서도 많이 낮은, 아주 좋은 목소리였다.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돌아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고개를 돌리니 190이 넘는 키에 아주 짙은 검보라색 슈트를 입은 남자가 시야에 잡혔다.
와인색과 고동색의 중간쯤인 넥타이를 풀윈저 노트로 메고 그것보다 약간 옅은 빛의 베스트를 안에 받쳐입고 셔츠는 약간 청색 빛이 돌았다. 행커칩도 베스트와 비슷한 부드러운 색이다. 머리는 짙은 금발로 볼륨감 있게 완전히 뒤로 넘겼다. 옷차림은 클래식과 세련됨의 중간이고 시계는 아주 클래식했다.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얼굴밖에 안 보일 법도 한데 그와 그의 모든 것이 거리와 거리의 모든 것에 녹아들면서도 눈에 확 튀는 아름다운 남자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도현은 에반 블랙만큼 자신을 꾸밀 줄 아는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일찍 나왔어.”
“많이 기다렸어?”
“아니.”
그는 자신의 슈트 단추를 자연스럽게 풀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도현도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둘 다 분위기가 나는 사람이었다. 함께 하는 순간 묘한 시너지를 냈다. 여자는 세련되고 고급스러우면서도 자태나 표정에서 색기가 흘렀다. 남자는 온몸을 구석구석 감싼 쓰리 피스의 명품 수트를 입고 가벼운 미소를 띠며 교양을 연기하는 얼굴이나 어딘지 퇴폐적인 분위기가 났다.
“집은?”
“오늘 아침에 업자가 견적 내고 갔어.”
취리히에서의 재회, 프라하에서의 짧은 통화. 그걸 제외하면 그와 이렇게 만나는 것은 2년 만이었다.
“그 집 지을 때 카탈로그 많이 봤었지.”
“응.”
그리고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에반도 커피를 한 잔 시키고 물었다.
“왜?”
“인생이 마음대로 안 돼.”
“하하.”
그가 웃었다.
“웃지 마. 난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다고 말한 건 너잖아.”
“내 탓 하는 거야?”
“네 탓이라도 하고 싶어.”
“그 남자들 때문에 그래?”
“그런가 봐.”
에반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을 본 도현은 인상을 약간 썼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야.”
“뭐가?”
그의 커피가 나왔다. 부드러운 플랫 화이트였다. 에반은 커피의 향기를 잠깐 맡고 짙은 속눈썹을 내리깔며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말했다.
“송선호는 언젠가 너한테 매달릴 줄 알았어.”
“그래? 난 걔가 나 좋아했다는 것도 까먹었는데. 진짜 싫어하는 줄 알았어.”
“아름다운 여자를 이유 없이 미워하는 남자는 없어. 알잖아.”
“근데 내가 그때 걔한테 별로 관심이 없었거든.”
“하하. 그 말 꼭 송선호한테 해.”
“벌써 몇 번 했어.”
“재미있었겠네.”
“재미있었지.”
도현도 결국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자 에반도 한 번 웃고는 물었다.
“나머지는 뭐야? 전혀….”
“내 스타일 아니라고?”
도현이 에반의 말을 끊고 그렇게 받아서 말했다.
“어떻게 만났어?”
“어쩌다가 만났어.”
“어디가 좋아?”
“특이해.”
“하긴, 다르다는 건 다르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때가 있지.”
“로웰 선생님은 뉴페의 법칙이라고 하던데.”
“그게 무슨 말이야?”
“남자는 뉴페이스.”
“하하하.”
“둘 다 내가 한 번도 안 만나본 스타일이라서 신기했어.”
“즐거웠겠어.”
“…응.”
그렇게 대답하고 도현은 살짝 인상을 썼다. 앞서도 말했지만 제대로 이렇게 대화를 하는 것은 2년 만이다. 그런데 마치 그녀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이 남자는 도대체 뭔가. 그리고 그와 이렇게 있는 게 이렇게 편안한 자신은 또 뭐고. 그리고 그렇게 느끼는 이 감정이 생소해서 다시 불편해졌다.
“왜 그래?”
에반이 그렇게 물었다. 도현은 자신의 기분에서 잠시 신경을 껐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재미는 있는데 전부 다 사고를 계속 쳐. 남자한테 휘둘리는 건 딱 질색이야.”
“네가? 휘둘린다고?”
“몰라…. 셋이나 되니까 그런가. 셋 다 말 안 들어.”
“그건… 이상하네.”
“지금까지는 말 잘 듣는 스타일만 만났나 봐.”
그러자 에반이 살짝 웃었다. 도현이 ‘왜?’라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럴 수도 있지만, 글쎄. 확실히 남자 때문에 인생이 마음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 너답지 않긴 해.”
“그렇지.”
도현은 짧게 한숨을 지었다. 어쨌든 과거의 연인이다. 현재의 연인들(그들도 과거의 연인이 되기 직전이긴 하지만)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으로 좋을 것이다. 그녀는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넌? 일은 잘돼? 나 만날 때도 그쪽 일 한 거야? 난 철석같이 어디 부잣집 도련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가만히 예전의 그를 떠올려 보았다. 그는 격식 있는 슈트보다는 잡지 속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처럼 세련된 옷차림을 주로 입었다. 예전보다 분위기가 상당히 얌전해졌다. 그런 느낌이다. 머리를 잘라서 그럴까. 나이가 좀 더 먹어서 그럴까. 자신도 그간의 일 때문에 조금은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앞에 있는 이 남자가 변했다고 느껴지니 도리어 지나온 시간이 선명해진다. 그와 헤어지고도 꽤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가 웃었다.
“하하. 하긴 그때 내가 좀 한량 같이 다니긴 했지.”
“그때도 가끔 어디 혼자 갔다 오곤 했잖아.”
“그때도 이쪽 일은 하고 있었어.”
“명함 없어?”
“줄까?”
“응.”
그는 품에서 단정한 명함 케이스를 꺼내 그녀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디바이스로 전자 명함을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물이 나와서 좀 놀랐다. 도현은 명함으로 가볍게 디바이스를 탭 해서 전자 명함도 받고 가만히 그의 종이 명함을 보고 있었다.
EB Bank>
그의 명함에는 이 두 줄 밖에 안 적혀 있었다. 도현이 물었다.
“이 은행 네 거야?”
“음…. 다른 주주도 많이 있어.”
나중에 검색해봐야겠다. 송선호의 회사와 금전적 거래를 할 정도면 상당히 규모가 있는 은행일 것이다. 도현은 명함을 가만히 보면서 말했다.
“넌 나에 대해서 전부 아는데 난 너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구나.”
“안 물어봐서.”
“물어봤으면 말해줄 거였어?”
“응.”
그리고 에반이 말을 이었다.
“나도 너에 대해서 전부 아는 건 아니었잖아.”
“네가 안 물어봐서.”
“물어보면 말해줬을 거야?”
“글쎄.”
도현은 명함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여자는?”
“누구?”
“취리히에서.”
“아.”
“그런 타입도 취향이었어?”
“일단은 일 때문에 만난 건데…. 내 취향보다는 네 취향이지.”
“…나 그때 취리히에 있는 거 알고 있었어?”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반은 어깨를 으쓱했다.
“송선호 때문에. 혹시나. 오면 슐로스겠지, 싶어서.”
“…….”
도현이 잠시 가만히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 그가 미소를 지었다.
“사랑한다고 했잖아. 보고 싶었어.”
*
“여기요.”
도현은 홀로그램 문서를 하나 내밀었다. 언제까지 이자 얼마로 갚겠다는 차용증이었다. 마주한 남자는 기가 죽은 얼굴로 그걸 보고는 ‘아~’ 하고 발을 몇 번 굴렀다.
“진짜 이렇게 해야 해? 응? 안 갚아도 된다니까.”
“안 되겠어요.”
“진짜, 응? 안 갚아도 돼.”
“그래서 뭐요? 그냥 넘어 가자구요?”
“…그러면 안 돼? 나 이제 진짜 사고 안 칠게. 응? 응?”
미르 킹쉴드는 눈앞에 있는 홀로그램을 옆으로 치우며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응?”
“그만 해요.”
“응~?”
도현이 시선을 피하니 그대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가 다른 손으로 도현의 무릎도 하나 잡았다. 그녀는 시선을 멀찍이 돌리고 있다가 그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손 떼요.”
“이제 정말 안 그래, 응? 이제 그 마도사 새끼가 아무리 시비 걸어도 가만히 있을게. 네가 뭐 싫어하는지 이제 안다니까. 내가 잘 몰라서 그랬어. 다시는 안 그럴게. 정말이야. 믿어줘.”
“…….”
도현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왔다. 미르 킹쉴드는 간절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밑에서 올려다보았다.
빛나는 플래티넘 블론드에 아이스블루의 눈동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반짝반짝 빛이 나는 남자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전부 그를 돌아보았다. 흰 셔츠에 짙은 색 바지를 입고 팔을 걷고 있었다. 그 팔만으로도 눈길을 끈다. 그런 남자였다.
여자를 속이지 않는 남자는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것이 미르 킹쉴드의 형상을 하고 있는 남자라면 그가 악마라도 넘어갈 만하다. 다만 그가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너무나 많은 사고를 달고 다니는 남자라는 게 문제였다. 이렇게 생겨 먹은 남자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그를 질투하겠는가. 그때 그를 다시 받아줄 때도 알고 있었다. 그는 어리고 무지했고 그렇기에 본인이 자초하는 사고도 잘 인지하지 못했다. 예전엔 이런 남자 같은 건 대번에 버렸다. 멍청한 남자는 딱 질색이기 때문이다.
‘멍청해서 귀여운 남자라니….’
멍청하기 이전에 타고 태어난 게 너무 많아서 주변에 신경을 안 써서 이런 것이었다. 승자의 무지랄까…. 도현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는 못마땅한 얼굴로 미르 킹쉴드의 양 뺨을 잡았다.
“미르.”
“응.”
“미르 킹쉴드.”
“응….”
“정말 마지막이에요. 한 번만 더 사고쳤다, 그러면 그날로 영영 안녕이에요. 알겠어요?”
미르가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응! 이제 진짜 사고 안 쳐. 진짜로.”
“다니엘 씨한테도 사과 안 했잖아요. 미르가 오해한 거니까 꼭 사과해요. 다니엘 씨 아니었으면 죽었어요. 그럼 미르도 지금 나랑 이렇게 못 있는 거라구요.”
“…알았어.”
일단은 이런 미르의 성격을 이용해 시비를 걸었던 다른 두 남자부터가 문제였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도 많다는 걸 안다. 도현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두 남자와 다르게 미르는 언제나 도현을 믿고 본인의 두려움을 전가하지(애초에 그런 것 따윈 없는 남자다) 않았다.
‘송선호랑 다니엘이 어른스럽지가 못하지…. 미르가 제일 어린데.’
정신적으로도 그렇고 실제 나이도 그렇고. 도현은 한숨을 쉬면서 그와 눈을 마주쳤다.
“미르가 부러우니까 다른 남자들이 자꾸 시비 거는 거예요. 미르 잘생겼고 몸도 좋고 목소리도 멋지고 여자한테 인기도 많으니까요. 일일이 그런 거 상대하지 말아요. 그런 건 상대를 안 하는 게 훨씬 있어 보이는 거예요.”
“응? 그런 거야? 싸움 걸어오는 새끼들은 작신작신 밟아야 하는 거 아니었어?”
“음….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그냥 무시해요.”
“내가 싸우는 거 그렇게 싫어?”
“당연히 싫죠. 미르 싸움에 눈 돌아가면 내 말도 안 듣잖아요. 집도 막 부수고, 사람도 다치게 하고. 앞으로도 계속 그런 식으로 살면 나랑 같이 못 살아요.”
“응…. 미안해.”
그는 순순히 그렇게 사과했다.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어 서로의 얼굴이 가까웠다. 도현은 턱을 괸 채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말없이 그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덩치는 세상 제일 크고 뭐든 제멋대로인 남자가 도현의 앞에서는 이렇게 고분고분하니 미르 킹쉴드라는 남자에게 자꾸 미련이 생기는 거 아닌가.
도현은 그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르.”
“응.”
“나 미르 진짜 좋아해요. 같이 있으면 기분 좋아요. 보기만 해도 좋아요.”
“나도. 나도 진짜 좋아해.”
“헤어지면 슬플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함께 있고 싶어요.”
도현이 그렇게 속삭이듯 말하니 미르 킹쉴드가 아주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계속 같이 있으면 되잖아.”
“그럼 사고 안 치겠다는 약속 꼭 지키는 거예요?”
“응.”
남자를 꼬드겨서 무언가를 하는 건 사실 쉽다. 그들은 항상 여자에게 의지하고 싶어 했다. 다만 그런 노고를 들이고 싶은 남자가 잘 없을 뿐. 도현 같은 여자도 어렸을 때는 뭣 모르고 남자를 사귀었다. 지금은 다르다. 도현은 그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믿어요.”
미르는 자신의 뺨을 감싼 그녀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덮고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왠지… 더 좋아지는 거 같아.”
“왜요?”
“모르겠어. 좋아.”
그가 도현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고난에 도움을 주었듯이 도현도 그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어도 좋을 것이다. 역시 그를 다른 남자들과 같은 취급을 하기엔 그가 많이 억울했다. 그가 최고라고 했던 게 빈말은 아니니까.
“집 고치는 건 어떡해? 나도 도와줄 수 있는데.”
“어떻게요? 돈도 없으면서.”
“응? 나 진지 공사도 많이 해봤어.”
“하하.”
그의 말에 도현이 웃었다. 그러니 미르도 웃었다. 솔직히 도현은 남자들에게 오만 정이 떨어진 상태라 다들 어떻게 나와도 뿌리칠 생각이었다. 미르 킹쉴드는 빚을 갚아준 것도 있고 그가 억울한 점도 있다는 것도 참작했지만 그래도 떨어진 정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면 어느새 마음이 풀린다. 그에게서 도현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런 남자는 정말 처음이다.
남자들이란 언제나 그녀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 가고싶어 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녀를 조종하고 싶어 했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다니엘 스톤하츠, 송선호, 아빠…. 이렇게 무엇이든 주어도 아깝지 않아 하는 남자라니. 수많은 열등한 남자들의 덕을 보아 최고의 남자는 또 이렇게 주가를 올리는 것이다.
“그럼 지금 어디서 지내? 일단 내 집으로 와.”
미르가 도현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입술에 댄 채 그렇게 말했다.
“일단은 호텔에 있는데요. 솔직히 미르 집은 영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것 같아요. 미르도 와요.”
“정말?”
“네.”
그러자 미르는 도현과 마주 본 자세로 턱을 괴더니 도현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다른 손으론 여전히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뭔가 신기하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정말 나 안 버리는 거구나.”
“…미르가 나 보고 책임감 없는 여자라고 하는데 약간 찔리더라구요.”
도현이 약간의 뜸을 앞에 두고 그렇게 말했다. 그런 말을 하는 자기 자신도 이상한 모양이었다.
“아침엔 안 버리겠다고 해놓고 오후엔 버리겠다고 해버렸잖아요. 나도 본의는 아니었는데.”
“나도 일부러 사고 치는 건 아니야.”
“그래서요. 한 번은 더 봐줘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응….”
뭘까…. 미르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동그랗고 깨끗한 이마, 단정하고 예쁜 눈썹, 속눈썹이 짙고 깊어 분위기가 있는 눈매, 오똑한 코, 도톰하고 혈색이 도는 글래머한 입술, 여성스러운 얼굴형. 부드럽고 어쩐지 섹시한 머리카락.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 어떤 사람도 미르 킹쉴드를 책임져주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살아남았고 강해졌고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남자가 되었다. 원래 인생은 홀로 사는 것이다. 그런 건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별 유감도 없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그는 강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생기고 그녀가 자신을 싫어하게 된다면 사실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싫다는 여자에게 자신을 강요하는 건 없는 놈들이나 하는 짓이다. 좋아하는 여자라면 더더욱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역시, 그래도 그녀가 싫어한다면 굉장히 낙심하겠지. 그래서 지금 그녀가 자신을 책임져준다는 게 기뻤다.
“있잖아.”
“네?”
“왜 이렇게 예뻐? 세상에서 제일 예뻐.”
미르 킹쉴드가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도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뭐예요, 뜬금없이.”
“아니, 진짜 예뻐서. 가만히 있어 봐, 좀.”
그대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도현은 가볍게 미소를 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미르는 커다란 손으로 살살 도현의 기다란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잘 못해서 몇 번 쓸어 넘겨야 했다. 그렇게 세상에 둘밖에 없는 것처럼 서로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이게 뭐라고. 그날 새벽처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대로 새로 살 가구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로웰과 다른 식구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간 구단에서 일어난 일, 도현의 일이나 친구의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했다. 데이트를 이어 저녁 식사도 하고 메트로서울의 화려한 야경을 즐길 수 있는 호텔 바에서 또 느긋하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데이트할 땐 언제나 남자가 계산했는데 이번은 자연스럽게 도현이 계산했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받던 사람이 의외로 엄청 부러운 얼굴로 도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뺨에 입을 맞추는 미르 킹쉴드가 지금 그녀가 끼고 있는 송선호의 프러포즈 링보다 비싸 보이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들은 도현이 잡아 놓은 호텔로 갔다. 메트로서울 한복판에 있는 5성급 호텔의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이었다.
“로웰은?”
“잘 거예요.”
방이 여러 개 있었다. 그들은 그 중 하나에 들어갔다. 도현의 물건이 좀 보였다.
‘카드 썼나?’
이런 데 비쌀 텐데. 그 도련님이 해줬나. 아, 돈 없으니까 이런 것도 내가 못 해주네. 역시 가오 빠진다. 그는 씻으러 들어가는 도현을 따라갔다. 서로의 얼굴에 도현의 클렌징크림을 바르며 장난을 쳤다. 같이 샤워를 하고 나와서 사랑을 나누고 잠들었다.
아침이 되자 미르는 알람을 끄고 부스스 일어났다. 씻고 이를 닦고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다시 침실로 돌아와 하얀 침구에 푹 파묻혀 있는 도현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으응…. 벌써 나가요?”
“응.”
“아침 먹고 가요. 같이 먹어요.”
“그럴까?”
도현도 일어났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기고 웃으니 미르도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체취를 맡았다. 도현은 씻고 나왔다. 회색과 베이지색 중간쯤 색감에 은은하게 광이 나는 원피스를 입었다. 피부를 정돈하고 립스틱을 바른 후 같이 나가려고 하는데 도현이 아차 하고 침실로 돌아갔다.
“뭐 잊어 먹었어?”
“네. 잠깐만요.”
침실에서 서랍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뭐야?”
“커프스 버튼이요.”
“누구 건데?”
“그때….”
똑똑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왔나 보다.”
“누구?”
미르는 그녀를 따라갔다. 커다란 문을 여니 그때 봤던 에반 블랙이라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가 도현의 얼굴을 보더니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일찍 일어났네.”
“응.”
“미안. 놔두고 가서.”
도현은 그에게 커프스 버튼이 든 상자를 내밀었다. 그녀가 답했다.
“아니야. 나야 고맙지.”
“방은 마음에 들어?”
그는 곧바로 커프스 상자를 열어 그 중 지금의 옷차림에 가장 어울리는 것을 골라 손목에 달기 시작했다. 도현은 가만히 그걸 보고 있었다. 이런 미남이 자신을 치장하는 것을 보는 것은 역시나 눈의 호사다.
“응. 그럼 넌 어디서 지내?”
“서울에 호텔이 몇 갠데.”
그들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분위기가 묘~하게 세상 둘만 있는 것처럼 그쪽만 화사하다. 미르 킹쉴드는 어슬렁 다가와 도현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뺨을 비비면서 시선은 곧장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뚫어져라 보았다.
“밥 먹으러 가자.”
“아, 미르. 전에 봤죠?”
그제야 도현은 아차 하고 그를 에반에게 소개했다. 그는 전에 이 번드르르한 지골로 같은 새끼를 보던 그 부잣집 도련님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뭐겠는가?
금발! 녹색 눈! 백인 남자! 키 크고 몸 좋고 잘생겼음! 옷 잘 입음! 왠지 돈도 많을 것 같음! 여자들이 좋아하는 조건을 두루두루 갖췄다.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미르 킹쉴드도 그 조건을 두루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길 이 새끼가 해줬다고?'
그런데도 그는 다른 놈들과 다르게 미르에게 적대적인 눈빛 한 번조차 보내지 않았다. 드디어 다른 새끼들을 다 꺾고 이 여자를 차지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이 번질번질한 새끼는 뭔가? 타이밍이 좋다. 본능적으로 경계할 수밖에 없는 남자였다.
“뭐하는 놈이야?”
“미르….”
도현은 그를 돌아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미르는 뚫어져라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또 맹수 같은 분위기가 풀풀 난다.
“반갑습니다. 저번에는 인사를 제대로 못 했네요. 미르 킹쉴드 씨죠? 작년 경기는 잘 봤습니다. 아깝게 됐습니다.”
에반은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오른손을 내밀며 악수를 신청했지만 미르는 당연히 그의 악수를 받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저 손을 안 친 게 어딘가. 에반은 그런 미르를 보며 가만히 웃고는 손을 거뒀다. 그리고는 도현을 다시 보았다.
“나중에 봐.”
“응, 미안.”
도현과 에반은 가볍게 뺨에 입을 맞추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는 돌아갔다. 도현은 미르의 코를 꼬집었다.
“좀.”
“왜. 저 새끼 뭐냐니까?”
미르는 여전히 그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도현은 그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와 가방을 챙겼다. 에반이 내려가고 나가야겠다.
“전에 사귀었던 남자예요.”
“그럴 줄 알았어!”
다른 수컷에게 영역을 침범당한 수컷 사자는 으레 신경질적으로 되는 법이다. 그는 조식을 먹으러 호텔 레스토랑에 가는 내내 도현을 가만히 놔두지 못했다. 꼭 끌어안고 만지며 그녀가 자신의 여자라는 것을 사방팔방에 티 냈다.
“미르….”
도현은 그의 입에 음식(먹이)을 한 점 넣어주며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앞으로 사람들 앞에서 가슴 만지는 거 금지.”
“왜?”
“절대 안 돼요.”
“쳇.”
상식적인 선에서 알아서 할 만한 건 알아서 하기를 바라며 놔두었지만, 지금까지 몇 개월 동안 이 남자랑 살아보니 그건 상당히 안 좋은 전략이었다. 어차피 그에게 빌린 돈을 갚을 때까지 이러거나 저러거나 계속 얼굴을 보게 되는 거라면 좀 더 확실하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말하면 잘 듣는다.
‘그리고 귀엽고.’
정이 들어버렸다. 어쨌든 식사하는 내내 주변 사람들이 부러운 표정을 하거나 눈꼴시다는 표정을 했다. 도현도 도현이지만 미르 킹쉴드는 어디 놔둬도 눈에 띄는 남자였다.
“갔다 와요.”
“응.”
호텔의 앞에서 미르는 그녀를 끌어안고 한참을 지분거리다가 게헨-세나로 떠났다. 도현은 그를 배웅하고 근처 커피숍에서 글을 쓰다가 시간이 되자 멀티스크린을 가방에 넣고 가만히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자 얼마 후 사람들의 시선이 어딘가로 쏠리는가 싶더니 조각 같은 미남 하나가 나타났다.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도현 씨.”
표정을 관리하는 근육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처럼 표정에 변화가 없는 그였으나(하지만 미르 킹쉴드를 벌레처럼 내려다보는 표정은 다양한 버전으로 실행할 수 있다) 도현의 얼굴을 보자 화색이 퍼졌다. 도현의 시선은 그냥 그런 그의 얼굴을 가만히 따라갈 뿐이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계속 연락을 드렸는데 바쁘셨나 봅니다. 저는….”
도현은 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디바이스로 서류를 띄워 그의 앞에 내밀었다. 그걸 본 다니엘의 표정이 확 굳었다.
“당장 다음 달에 갚아드릴게요.”
“이러지 마십시오, 도현 씨. 저는….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일단 사인해요.”
“도현 씨….”
다니엘은 쩔쩔매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도현은 심드렁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크고 새카만 개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낑낑거리는 것 같다. 다니엘이 말했다.
“못합니다.”
그 말을 듣자 도현은 테이블 아래로 그의 발을 콱 밟았다. 힐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꽤 아플 것이다. 그가 윽 하고 몸을 움찔했다.
“사인해요.”
“…싫습니다.”
도현은 그의 발등을 더욱 짓눌렀다. 다니엘이 고통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이윽고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저는 그동안 도현 씨의 가장 가까이서 가장 힘이 되어 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저는 도현 씨에게 가장 의지가 되는 남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저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까? 다른 어떤 남자들보다도 우리 둘만이 진정으로 사랑을 나눈 것 아니었습니까? 다시 한번만 생각해주십시오. 저는 도현 씨가 아니면 안 됩니다.”
도현은 그의 발을 밟은 다리 위로 다른 다리를 꼬았다. 도현이 나른한 어조로 물었다.
“정말요? 다니엘 씨는 자꾸 나한테 뭔가 숨겨요. 미르랑 송선호 건드리고 로웰 선생님한테도 수작 부렸잖아요.”
“그건 제가 도현 씨에게 더욱 사랑받기 위해서 한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잘못한 게 없다구요?”
“잘못했습니다. 그래도 모든 게 당신에게 더 사랑받기 위해 한 일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
“지금까지의 제 모든 게 거짓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니엘은 천천히 그녀의 손을 감싸 잡았다.
“질투가 나지 않는 척했습니다. 도현 씨의 마음에 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전… 정말 질투가 많은 남자였습니다.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당신을 볼 때마다 가슴 속에서 불이 치밀어 오르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는 다니엘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애절했다. 그의 보석 같은 눈동자가 살아있는 듯 일렁이며 그에 따라 그가 가진 특유의 색기가 흘렀다.
“저는 무정한 남자입니다. 다른 사람 같은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처음 도현 씨와 만날 때 도현 씨와 아이를 구해준 것도 그저 저 같은 남자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그런 연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이 제 모든 걸 알면 분명히 절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없을 고백을 하는 것처럼 침통한 표정이었다. 도현은 그런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티가 안 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네?”
“다니엘 씨 처음에 나 만날 때 어땠는지 기억 안 나요? 그때는 울컥해서 미르한테 마법 쓰고 그랬잖아요. 그 뒤로 내가 혼내니까 내 눈앞에서만 안 하게 된 거지.”
애초에 사람을 십 만 단위로 죽인 남자의 멘탈이 멀쩡할 거라고 기대하는 게 이상한 것이다. 도현의 말에 다니엘은 도리어 약간의 감동(?)을 받은 듯 그녀의 손을 좀 더 힘주어 잡았다.
“역시… 도현 씨는 그래도 절 사랑하셨던 거군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단지 제가 믿음이 부족했을 뿐이라는 걸요.”
어쩐지… 갈수록 기분이 좀 나빠진다, 이 남자는. 처음에는 이래도 잠잠, 저래도 잠잠해서 도대체 뭘 괴롭히고 지배해달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역시나 배움이 빠른 남자다. 간혹 이렇게 매섭게 혼내고 싶을 때가 있었다.
“믿음의 문제인가요?”
도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도현은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가만히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여기에 있는 모두를 죽이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는 그런 것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나 도현은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랬더라면 그는 그 당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평범한 인간과는 매우 동떨어진 존재처럼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녀가 봤을 때 그나 미르 킹쉴드나 수준이 비슷비슷했다. 다만 머리가 매우 좋을 뿐이다. 어느 면에서 자기 확신도 너무 강하고….
“그래서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
도현은 일단 말을 돌렸다.
“세계물리학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올해 엘 드라카가 끝나면 은퇴할 예정입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도현에게 뺨을 맞고 난 후 회개(?)하여 한민유에게 말을 바꿨다. 다행히 한민유가 위에 보고를 하지 않은 상태라 그대로 넘어갈 수 있었다.
“학회라는 곳이 그런 정치적인 힘이 있는지는 몰랐어요. 그것도 국제적으로.”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중력 마법이 완성되고 나서는 스스로를 지켜야 했을 테니까요.”
“흐음.”
“학회장인 캘리 박 교수님이나 세현 퀸 교수님은 혼자서 지구를 땅콩만 한 인공 블랙홀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국가나 조직이 그들을 노리겠습니까. 선수를 친 학회장님이 현명하시다고 생각합니다.”
“만나 뵙고 싶네요, 두 분 다.”
도현이 흥미로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호기심이 많으니까.
“그럼 다니엘 씨는 이제 도쿄가 아니라 북경으로 출퇴근하는 거예요?”
“도현 씨가 허락해주신다면요.”
다니엘이 그렇게 말하자 도현은 살짝 인상을 썼다가 그의 손을 떨쳐내고 팔짱을 꼈다. 그리고 그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는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미동도 없다가 침을 한 번 삼켰다. 그답지 않게 한 번 느물거려봤는데….
“일단은… 생각해볼게요.”
“도현 씨.”
“어쨌든 앞으로 폭력 금지예요. 다들 왜 계속 힘으로 어떻게 하려고 해요?”
고분고분했던 미르와 달리 다니엘이 살짝 정색을 했다.
“그건 도현 씨의 탓입니다.”
“제 탓이라구요?”
“남자를 셋이나 한 곳에 몰아넣고 알아서 하라는 건 결국 싸우라는 거 아닙니까. 사태를 방조한 건 도현 씨입니다.”
“…….”
이제 할 말은 전부 하겠다더니…. 도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눈을 바라본 채 잠깐 말이 없었다. 도현은 어쩐지 살짝 미소를 지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니엘은 당황해서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현 씨….”
실수한 건가? 하지만 뭐든 숨기지 말고 말하기로 했다. 도현은 가까이 다가와 그의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다니엘은 그녀의 허리를 살짝 감싸 잡았다. 그렇게 가까이에서 아름다운 여자와 남자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할 말은 많지만…. 다니엘 씨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좀 더 생각해볼게요.”
“도현 씨….”
다니엘은 그녀의 귓가에 잠깐 얼굴을 묻으며 그렇게 속삭였다.
“얌전히 기다려요.”
도현은 그렇게 말했다. ‘기다려’라는 명령을 들은 다니엘은 가만히 멀어지는 주인님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그리고 정리해야 할 남자는 하나만 남은 상태다. 이제 사장이 됐다 이건지 원고를 관리하는 것도 그 이후로 쭉 다른 직원에게 맡겨 놓은 상태다.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싶을 때쯤 전화가 한 통 왔다.
[도현 킬스버그 님 되십니까?]
“네, 누구세요?”
밤이 늦었다. 낯선 이에게서 전화를 받기에는 상당히 늦은 시간이다. 상대편에서 작게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여긴 쉐라톤 호텔의 라운지바입니다. 송선호 님께서 많이 취하셨는데 킬스버그 님 성함만 부르셔서 연락 드립니다. 혹시….]
도현은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하던 일을 마저 했다. 글을 쓰고 원고를 넘기고 미르와 함께 호텔의 욕조에 몸을 함께 담갔다. 향초를 여럿 켜니 향기가 은은하게 코를 간지럽혔다. 거품이 몽글몽글 올라온다. 부드러운 물살이 몸을 마사지해주었다. 도현은 가만히 미르의 태평양 같은 가슴에 등을 기대고 있다가 몸을 돌렸다. 그의 코에 거품을 묻히며 입을 열었다.
“미르는 걸즈 어떻게 관리했어요? 많을 땐 꽤 많았잖아요.”
“응? 글쎄, 관리라고 할 것까지야.”
“그렇죠? 걸즈끼리 싸우거나 하지도 않았을 거 아니에요, 미르처럼.”
도현이 그의 코끝을 검지로 꾸욱 누르자 그가 앙 하고 손을 깨무는 시늉을 했다.
“글쎄. 걸즈끼리 싸울 일이 있나?”
무지함은 승자의 권리라는 말을 앞서도 한 것 같다. 미르는 약간 고개를 갸웃하더니 역시나 어깨를 으쓱했다.
“같은 걸즈 내부에서 난 싸움이면 그 여자들 가진 선수가 해결하겠지. 다른 선수 걸즈랑 문제 생긴 거면 남자들끼리 주먹다짐을 좀 하든가.”
여자의 문제를 남자가 해결한다는 건가? 그럼 도현도 이 남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전부 그녀가 조정했어야 했다는 말인가? 그녀는 그런 것에 사인한 적이 없었지만 결국엔 그렇게 되었다.
“음….”
“그래도 웬만해선 걸즈에게 손을 들진 않아. 마음에 드는 걸즈가 다른 선수랑 바람이 나면 그 새끼를 족치는 게 관례고. 요새는 대부분 계약서 써. 보통 6개월이나 1년 단위로 갱신. 갱신될지 안 될지는 걸즈가 알아서 가늠하고 안 될 거 같으면 알아서 다른 선수 물어.”
“그런 규칙은 누가 만든 거예요?”
“글쎄? 전통? 어쨌든 보통 창녀들보단 훨씬 조건이 좋다는데? 나 보고 신사적이래.”
“돈 받고 하는 말을 믿어요?”
도현이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미르는 뭐 어떠냐는 표정이었다.
“내가 봐도 내가 딴 새끼들보다 낫던데? 치엔이 루카스 몰라? 그 새끼는 진짜 쓰레기야.”
여기까지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 그렇게까지 해야 돼?’라는 것이었다. 셋 다 데리고 있는 것은 어쩐지 으쓱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수고를 다 겪고도 꼭 쥐고 있을 만큼 절실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이런 거 보면 남자들은 참 좋겠다. 유구한 역사가 있다 보니 자기들이 어떻게 하지 않아도 창녀들 사이에 알아서 규칙과 기강이 잡혀 있다는 소리 아닌가. 미르 킹쉴드 정도만 해도 신사라는 소리를 듣는 모양인데 과연 그들은 도현을 숙녀라고 칭할 것인가? 어떤 성기를 가지고 태어나는 걸로 이런 게 결정되다니. 불공평하다.
‘내가 방조했다고? 싸우지 말라니까.’
알아서 잘하면 데리고 살까 한 것뿐인데. 도현은 한숨을 쉬며 바로 앉았다. 그녀는 투덜거렸다.
“남자들은 왜 이렇게 피곤한 거예요?”
“응? 왜? 나?”
“그냥 사이 좋게 지내면 되지, 걸즈처럼.”
아마 이런 말을 하면 송선호는 치를 떨었을 것이다. 미르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뺨에 입술을 대고 말했다.
“좋아서 그런 걸 어떡해. 이렇게 둘만 있으니까 얼마나 좋아?”
“…….”
도현은 과연 돈 때문이 아니라면 그녀가 미르 킹쉴드를 다시 받아주었을지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역시 물음표다. 돈이란 가끔 이렇게 섬뜩할 정도로 중요한 요소다.
‘그냥 떼먹을까?’
도현은 잠시 미르 킹쉴드의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어차피 차용증도 뭐도 안 썼는데 확 떼먹어버릴까?
“응?”
미르 킹쉴드가 아무것도 모르는 해맑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도현은 그의 잘생긴 얼굴을 살짝 못마땅하게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실소가 나왔다. 그의 코를 깨물었다.
“예쁘니까 봐주는 거예요.”
“뭘?”
“이렇게 잘생긴 미르도 영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아파요. 나이 들지 말아요.”
그녀는 말을 돌렸다.
“뭐 그런 걸 걱정해? 난 나이 안 먹어.”
미르가 정말 웃긴 말을 들었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도현도 그의 말에 웃었다. 다음 날엔 로웰과 함께 집으로 갔다. 공사가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외벽은 3일 정도면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인테리어까지 완료하는 데는 사흘이나 나흘이 더 소요될 것 같구요.”
현장 감독이 그렇게 말했다. 로웰과 도현은 가만히 정원에서 그걸 보고 있었다. 둘 다 팔짱을 끼고 비슷한 표정으로 공사판을 보고 있었는데 이윽고 로웰이 입을 열었다.
“…빚을 갚자마자 또 빚을 지네요….”
“…그러니까요. 참….”
세상일이라는 게 참 웃기다. 좀 소름이 끼치기도 하고 말이다. 한 번 빚을 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채무자가 될 줄이야.
“그래도 이건 빨리 갚겠죠?”
“전에 비하자면 푼돈인 수준.”
“스톤하츠랑 킹쉴드가 준 돈에서 제하죠, 작가님. 부순 놈이 돈 내야지.”
“네, 선생님.”
약간 해이해질 뻔 했는데 정신이 번쩍 든다. 해외 부동산이라도 하나 깔끔하게 팔리면 좋을 텐데. 요즘 같은 불경기엔 고가의 주택이 잘 팔리지 않았다. 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아, 정말 싫다. 미래 때문에 현재를 저당 잡히는 거 참 싫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빚을 다 갚아도 전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그건 과거에 현재를 저당 잡히는 건가?”
“우리는 앞으로 투자만 조심하면 돼요. 무리하게 더 벌려고 하지 말고 번 걸 지켜야죠.”
로웰의 말에 도현이 ‘아으’ 하고 두 주먹을 쥐었다.
“적어도 전에 제가 벌었던 거 5배는 있었으면 저도 그렇게 생각했을 텐데. 서울에 있는 집 빼고 팔리면 미르랑 송선호한테 돈 갚아야 하고. 아, 갑갑해.”
“그건 그냥 먹고 쨉시다, 작가님.”
“저도 그런 생각이 아주 많이 드는데…. 그랬다간 언제라도 팔려 갈 물건같이 되는 건 아닌가 묘하게 불안한 게. 이래서 엄마가 남자한테 돈은 받지 말라고 한 거구나 싶기도 하고.”
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이럴 때는 송선호가 진짜 부러워요. 빚 앞에선 어떤 우아함도 없었어요.”
로웰이 웃으며 도현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지 마요. 고생을 합리화하는 건 나도 싫어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작가님이랑 이렇게 둘도 없는 사이가 된 건 좋아요.”
“선생님….”
역시 도현은 로웰 리라는 사람에게 매 순간 반하고 있었다. 이렇게 작은데도 이렇게나 큰 사람이다. 그녀는 미르 킹쉴드보다도 커다란 가슴을 가졌다. 도현은 로웰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전 왜 선생님 앞에서 항상 우는 소리를 할까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안 그러는데.”
“신뢰와 우정과 사랑이 있기 때문이죠.”
“하하하.”
날도 따뜻하겠다, 둘은 풀장 앞에 화려한 선베드를 놓고 집이 고쳐지는 것을 보며 선탠을 했다. 차곡차곡 메꿔지는 외벽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말 그대로 건설적인 기분이 옮아온달까.
“기왕 새로 쌓는 거 밖에다 우리 이름이나 크게 박아 놓을까요?”
“나쁘지 않네요. 조명도 달까요?”
“이제 여름인데. 디제잉 스테이션 하나 여기다 세우면 좋을 것 같아요.”
“아… 끌리네요.”
도현 킬스버그와 로웰 리의 스윗홈은 세련된 모던 대저택이었다. 디제잉 바를 밖에 설치하면 저택의 분위기랑 안 맞을 것 같기도 하지만 분명히 재밌을 것이다. 그렇게 둘은 시원한 칵테일을 하나씩 만들어 먹으며 선탠과 수영을 하다가 호텔로 돌아갔다. 저녁은 미르와 셋이서 먹었다. 어쨌든 미르 킹쉴드가 끼면 자리가 매우 화사해진다. 웃음이 끊이질 않고 식사를 하다가 프레지덴셜 스위트 룸으로 돌아갔다. 잠들기 전 테라스에 앉아 책을 가만히 읽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
송선호였다. 저녁 시간이 좀 지났을 뿐인데 벌써 취한 건가? 성가시다는 생각에 받지 않을까 싶었다. 전에 바하마와 푸에르토리코로 여행갈 때 저지른 그의 진상 짓을 기억해보자면 벌써부터 심히 귀찮았다.
게다가 미르 킹쉴드의 돈은 좀 찝찝해도 묘하게 송선호의 돈은 입 싹 닦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미르는 있는 거 없는 거 다 털어서 도현의 빚을 갚아준 것이었고 그는 본인에게 크게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도현의 빚을 갚아준 것뿐이다. 술 먹고 전화는 해도 다시 돈을 돌려내라고 할 것 같진 않았다. 그는 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부유한 집안의 출신이니까.
“취한 거면 끊을 거야.”
하지만 도현은 전화를 받고야 말았다. 이래서 빚이란.
*
쉐라톤 호텔의 라운지바는 굉장히 근사했다.
도현은 무릎 조금 위까지 오는 블랙 원피스를 입었다. 핏이 딱 맞았고 허리에는 검은색과 금색이 섞인 허리띠를 했다. 허벅지 한쪽이 살짝 트였다. 검은색 샌들을 신고 새빨간 악어 가죽 가방을 들었다. 머리는 볼륨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늘어졌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돋보이는 가벼운 화장만 한 채 라운지바 안으로 들어서니 시선이 모여든다. 어두운 야경에 별 같은 도시의 불빛이 반짝인다. 주변을 돌아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떼자 종업원이 다가왔다.
“일행이 있으십니까?”
그의 질문에 그녀는 바의 한구석에 시선을 둔 채 대꾸하지 않았다. 종업원도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조명의 불빛에 황금빛이 은은히 반사되는 검은 대리석 바 한 곳에는 밝은 회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겉옷은 벗고 넥타이도 풀어서 옆에 두었다. 단추도 두어 개 풀린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머리카락도 약간 흐트러졌다. 몸도 좋고 아주 잘생긴 남자였다. 머리스타일과 자태에서부터 귀족적이고 아주 비싼 남자라는 티가 팍팍 났다. 동시에 상처받고 실연당한 남자 특유의 색기가 흘렀다.
그리고 지금 그의 옆에는 몸매가 훤히 드러나고 가슴도 반쯤 드러난 새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구불구불한 빨강 머리의 여자는 바를 잡으며 몸을 비틀어 자신의 곡선을 극대화했다.
“혼자 오셨어요?”
그녀는 그렇게 그에게 말을 걸었다. 도현은 실소를 지었다.
‘저 남자가 술만 마시면 저렇게 질질 흘리고 다니나. 전에 윤지도 그렇고. 항상 나만 쳐다봤다는 듯이 굴더니 사실 헤픈 거 아냐? 그냥 나 잡아 잡수라고 광고라도 하지.’
그녀는 그가 어쩌나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종업원은 눈치 있게 인사를 하고 다른 곳으로 갔다.
“관심 없으니까 저리 가세요.”
송선호는 돌아 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예전의 일 때문에 술 먹었을 때 다가오는 여자들이 곱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여자는 어이없는 얼굴을 하더니 바로 돌아서서 가버렸다.
‘울고불고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그래도 여긴 메트로서울이니 지니 호에 있을 때만큼 정신줄을 놓지는 않는 모양이다. 사실 그가 여기서 그러고 있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나가버릴 생각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만 마셔. 술도 세지도 않으면서.”
그녀가 말을 걸자 그가 풉 하고 양주를 뿜을 뻔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옆을 돌아보았다. 도현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삐딱하게 섰다.
“말도 안 할 거면서 전화는 왜 해?”
그는 입을 딱 벌렸다. 그녀가 옆에 앉는 것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보다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도현 킬스버그….”
도현은 대답 없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바 뒤에 있는 바텐더에게 말했다.
“잔 하나 주세요. 얼음이랑 소다도.”
바텐더는 그녀의 앞에 큰 잔과 작은 얼음 박스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잔에 큰 얼음을 넣어주고 소다를 따라주었다. 도현은 송선호의 앞에 있는 양주를 자신의 잔에 약간 따랐다. 송선호는 그때까지도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잔에 남은 술을 마저 마셨다. 유난히 써서 미간을 찌푸렸다.
“왜 왔어?”
그가 물었다. 도현은 살짝 어이가 없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전화는 왜 했는데?”
“…실수로 누른 거야.”
“거짓말.”
그는 입을 다물고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도현은 술로 입술을 약간 축였다. 비싸고 독한 술이라 희석을 했는데도 목구멍이 화끈하다. 도현은 디바이스를 꺼내 홀로그램으로 문서 하나를 띄워서 그의 앞에 내밀었다.
“자.”
“…….”
누가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 같았다. 송선호는 술잔을 든 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잠시 그걸 읽어보다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는 차용증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보았다.
“내가 너한테 돈이라도 갚으라고 할 거 같아?”
“갚아야지.”
“됐어. 안 받아.”
“나중에 괜한 원망 듣기 싫어.”
“누가 그런 걸 한다고. 내가 그런 치사한 짓 할 것 같아?”
그는 짜증을 냈다. 도현은 잠시 그를 가만히 보다가 ‘그래라, 그럼’이라는 태도로 홀로그램을 껐다. 도현은 잔을 한 손에 든 채 다른 손으로 턱을 괴고 그를 관찰했다. 그리고는 물었다.
“이제 나 없으면 못 산다더니?”
그는 대답이 없었다.
“이렇게 쉽게 포기할 거면 시작도 안 했을 거라며.”
가볍게 흔들거리던 그녀의 발이 그의 정강이에 살짝 닿았다.
“그만해.”
“아니, 궁금하잖아.”
“…….”
“어제는 네가 취해서 내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던데.”
“뭐?”
“여기 바텐더가 한밤중에 전화했어.”
송선호는 바로 바텐더를 노려보았다. 이유를 알 리 없는 그는 그저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도현은 기다랗고 풍성한 속눈썹을 내리깔며 그의 얼굴을 가만히 관찰했다.
“아까도 '실수로' 전화까지 하셨으면서.”
그가 한숨을 쉬었다.
“자꾸 왜 이래?”
“궁금하다니까.”
그는 일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그걸 불쾌감이나 신경질 비슷한 표정으로 포장했다. 그녀는 멈추지 않고 그를 더 찔렀다.
“이제 내 얼굴은 안 봐?”
그는 술잔을 쥔 손의 엄지로 자신의 찌푸린 미간을 꾹 눌렀다. 그리고는 대꾸했다.
“내가 지금 어떻게 한다고 다시 받아줄 것도 아니면서. 내가 너 없이 살든 못 살든 신경도 안 쓰잖아.”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술을 쭉 들이켰다.
“사랑한다는 말도 다 거짓말인 거 알고 있었어.”
그는 자신의 빈 잔에 술을 콸콸 붓다가 좀 쏟았다.
“젠장….”
그는 자신의 젖은 손을 털었다. 바텐더가 다가와 곧바로 닦을 냅킨을 건네주었다. 그걸 한 손으로 펴서 손을 닦고 옆에 던져 놓았다. 도현은 그런 그의 자태를 물끄러미 보다가 대꾸했다.
“나도 너 나름 좋아한다고 했잖아. 너도 다 동의한 거면서 왜 이래? 처음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니까 받아 달라고 한 게 누군데?”
그녀는 그렇게 그를 추궁했다. 그가 그녀에게 원망의 기색을 내비쳤듯 확실히 도현도 그에게는 쌓인 게 좀 있었다.
“너랑 있으면 좋다가도 불편했어. 나도 너랑 같이 있으면서 즐겁고 행복하고 싶은데 네가 계속 불안해하니까 성가시다는 생각부터 들잖아.”
도현이 말했다. 그의 미간이 펴질 기미를 안 보였다.
“그래, 성가셔서 미안했다.”
지금 그의 태도는 그가 고백하기 전과 비슷했다. 도현은 ‘이것 봐라?’라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너야말로 나랑 있는 게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모르겠어. 날 사랑하기는 하는 거야?”
“그래, 나도 안 하는 거면 좋겠다.”
“송선호.”
“실수로 전화한 건 미안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이러지 말고 미르 킹쉴드든, 다니엘 스톤하츠든, 에반 블랙이든, 아니면 다른 마음에 드는 놈이든… 그 새끼한테 가.”
도현은 픽 웃었다.
“정말 그럴까?”
“그래.”
“진짜 가버리면 울 거면서.”
이번엔 괴로운 표정을 빨리 숨기지도 못했다. 그는 한 손으로 그런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문지르며 가렸다. 그렇게 잠시 상처받은 감정을 추슬렀다. 그가 신음을 흘렸다.
“도대체 나 보고 어쩌라는 건데….”
그는 취기 때문인지 다른 것 때문인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약간 몸을 떨었다.
“나는….”
그가 입술을 뗐다.
“난 그저 그런 네 애인 같은 게 되고 싶은 게 아니야….”
말하기 싫었다. 진짜 말하기 싫다. 젠장. 젠장. 이제 와서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애초부터 미르 킹쉴드 같은 것한테 선수를 뺏기고 그녀의 애정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 저지른 일 아니었던가. 그 일로 그녀가 그를 질색하며 떨쳐낼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시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오로지 그녀의 곁에만 붙어 있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거기에 쐐기를 박듯 그 새끼도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다.
“너에게 특별한 남자가 되고 싶었어. 네가 날…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그냥 즐겁게 놀고 잠자리만 하는 게 아니라, 즐겁지 않고 싫고 힘들어도 함께 있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고 싶었어.”
가장 사랑하는 여자의 앞에서 그는 가장 작아졌다. 그와 같은 남자를 못 알아보는 그녀가 바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곤 했지만 그럴수록 바보가 되어가는 건 그였다. 그 모든 게 돌고 돌아 결국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를 사랑하고, 그런데도 미워하고.
지금 그녀가 이렇게 곁에 있어도 그녀는 송선호의 것이 아니었다. 이런 말을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녀는 처음에도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지금도 사랑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녀를 미워할 게 아니라 이 사실을 스스로에게 되뇌어야 할 시점이었다. 온갖 꼴사나운 짓을 고르고 골라 다 했지만 정말로 지금이 그녀와의 마지막이라면, 너무 바닥까지 보이고 싶진 않았다.
송선호는 떨리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표정을 정리하고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래서….”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술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그러니까 이제 가.”
“…….”
송선호라는 남자는 참으로… 뭐랄까, 도현 킬스버그라는 여자의 가학심을 불러일으키는 남자였다. 잔뜩 상심해서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고 술만 마시는 그 남자를 가만~히 보고 있던 도현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눈이 마주친 바텐더에게 싱긋 웃어 주고는 라운지바의 출구로 나갔다. 송선호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똑같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잔을 바에 두고 잠시 그걸 보고 있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가란다고 진짜 가냐….”
그녀가 있을 동안에는 그래도 모양을 잡겠다고 울지 않았는데 그녀가 가고 나니 바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흐윽. 윽… 흑… 이… 나쁜 년…. 으윽….”
그는 자신의 손목으로 두 눈을 강하게 눌렀다. 흐느끼는 소리를 참기 위해 입술을 씹었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했던 그날부터 그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그녀는 복수라도 하겠다는 것인지 마지막까지도 이렇게 그를 괴롭혔다. 인과응보라고 말해도 좋았다. 그렇지만 괴롭지 않을 리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송선호는 도현 킬스버그를 사랑했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후우. 하….”
송선호는 양 눈을 빠르게 닦고 심호흡을 했다. 눈물을 참기 위해 인상을 왕창 찌푸렸다. 여기는 메트로서울이고 5성급 호텔의 라운지바였으며 충분히 그를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있었다.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었다. 그는 미간을 강하게 주물렀다. 한 번 눈물을 흘렸더니 얼굴에 벌겋게 취기가 올라왔다. 안 그래도 감정적이었는데 또 울컥 올라왔다. 간신히 참았다.
그는 다시금 심호흡 했다. 아까 손을 닦았던 수건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질러 닦고는 디바이스를 꺼냈다. 그녀가 오기 전에 하려고 했던 걸 해야겠다. 그는 갤러리로 들어갔다. 그리고 앨범 하나를 선택했다. 버튼을 하나 더 누르니 <삭제하시겠습니까?>라는 문구가 떴다. 이번에는 바보같이 망설이지 않고 한 번에 삭제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연락처 항목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연락처를 지울 것이다. 정말로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잊으려고 노력이라도 해야 했다. 그녀의 연락처를 찾아 누르는데 작게 그녀의 사진이 떴다.
“…….”
그녀가 직접 찍어 업로드한 사진이었다. 아까 앨범을 지우면서 같이 지워졌을 줄 알았는데. 그의 무릎에 앉아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해서 자세를 잡았더니 활짝 웃으며 자기 얼굴만 찍어서 연락처 프로필 사진에 올렸다. 그녀의 이름을 누르자 사진이 좀 더 크게 떴다. 가만히 그걸 보고 있다가 그 사진을 눌렀다. 그러자 사진이 영상이 되어 움직였다. 사진에 내장된 기능이었다. 소리를 켜니 목소리도 나왔다.
[찍는다?]
그러자 처음에는 살짝 나왔던 송선호의 얼굴도 옆으로 스윽 밀리며 그녀가 예쁘게 웃으며 자기 사진만 찍었다. 그렇게 멈춰진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녀가 정말 예쁘게 나왔다. 아까도 이러다가 실수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디바이스의 화면에서 손을 멀찍이 하고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것도 지우려는 거 아냐? 안 지우고 뭐 해?”
갑자기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좋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디바이스를 하얗고 예쁜 손이 그냥 슥 들고 가버렸다. 도현 킬스버그였다. 그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어쩌나 봤더니 청승이란 청승은 다 떨고 있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그의 디바이스에 있는 자신의 연락처를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의 앞에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녀의 연락처와 함께 사진도 지워져 있었다.
“왜 네 마음대로…!”
송선호는 울컥해서 화를 내려고 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도현은 팔짱을 끼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안 돼? 왜? 나쁜 년이라며.”
아까부터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송선호는 대꾸하지 않고 술을 벌컥 마셨다. 도현은 바에 왼손을 대고 몸을 기대며 오른손에 들고 있는 빨간 클러치백으로 그의 턱을 스윽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사진은 잘만 보더니 왜 진짜는 못 봐?”
“하지 마.”
하지만 도현은 손에 힘을 주어 그의 얼굴이 자신에게 그대로 향하게 하였다. 송선호의 시선은 바 안쪽을 헤매다가 결국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관찰 혹은 감상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송선호는 결국 화를 냈다.
“그래…! 나 너 사랑한다! 너 없으면 못 살 거 같고 너 평생 못 잊을 거 같아서 미칠 거 같아! 그게 너한테 무슨 의미가 있긴 해?! 전처럼 나 같은 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가버리면 될 거 아냐! 가라잖아!”
그는 자신의 얼굴을 누르는 그녀의 클러치백을 손으로 치우고 벌떡 일어났다.
“그래, 내가 간다, 내가 가!”
하지만 양주를 많이 마신 그는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휘청거릴 정도로 취기가 급격하게 올랐다. 그는 간신히 바와 의자를 잡으며 균형을 잡았다. 그녀의 어깨에 그의 가슴이 닿았다. 얼굴이 가까웠다.
“…….”
“…….”
송선호는 표정을 일그러뜨렸고 그런 그의 얼굴을 보던 그녀는 그의 손에서 자기 것처럼 디바이스를 빼앗아 들더니 종업원 중 아무에게 건넸다.
“계산해주세요.”
그녀는 의자에 구겨져 걸쳐져 있던 그의 겉옷과 넥타이를 챙겼다.
“됐어. 내가….”
송선호는 그녀의 손에서 자신의 옷을 빼앗으려고 하다가 그녀의 몸을 거의 껴안다시피 했다. 그러자 그는 결국 다 포기하고 그녀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무거워.”
“도현아….”
그는 의자를 왼손으로 잡고 오른팔로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도현은 그의 등을 잡고 부축하며 종업원에게서 디바이스를 돌려받았다.
“어디서 지내? 본가?”
그는 두 팔로 그녀를 안았다. 그가 우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한숨을 약간 쉬며 그의 뜨거운 뺨을 닦았다.
“그러니까 잘못했으면 그냥 잘못했다고 해야 할 거 아냐.”
도현은 그를 밀어냈다. 그리고 출구 쪽으로 걸어가자 송선호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크고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그녀는 사람들이 내리고 난 뒤 먼저 엘리베이터에 탔다. 송선호가 뒤따라 탔다. 1층으로 내려가니 그의 차가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송선호에게 옷을 돌려주었다.
“가.”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돌아섰다. 송선호는 그녀의 손을 얼른 잡았다.
“가지 마….”
도현은 그를 돌아보았다. 화려한 호텔의 불빛, 어두운 도로. 그렇게 선 여자와 남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 보고 어쩌라는 걸까?”
그녀는 아까 그가 하던 말을 그대로 했다. 송선호가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내가 잘못했어. 질투가 나서 그랬어.”
“그리고?”
“그 새끼들도 똑같이 했으니까 사과는 안 할 거야.”
“또?”
“…너한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도현은 잠깐 시선을 돌리며 생각을 하더니 다시금 송선호의 눈동자를 보았다.
“엉덩이라도 또 맞을래?”
“알았어.”
“묶는 건?”
“마음대로 해.”
“그걸 카메라로 찍는 건?”
“마음대로 하라니까.”
“흐응.”
도현은 송선호의 셔츠를 손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폈다. 그리고 물었다.
“그래도 안 받아준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
그는 괴로운 듯 인상을 쓰다가 그냥 먼 곳으로 시선을 피했다. 도현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또 물었다.
“그래도 나 사랑해?”
그는 그대로 먼 곳을 본 채로 대답했다.
“사랑해.”
“영원히?”
“…영원히.”
도현이 미소를 지은 얼굴로 그의 상심한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녀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울지 말고 이제 나 좀 봐.”
송선호는 떨리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도현은 그의 양 뺨을 잡고 부드럽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관리가 잘된 그의 입술이 참 부드러웠다. 그는 그녀의 양팔을 꽉 잡았다.
“하지 마.”
“왜?”
“너무 힘들어….”
“뭐가?”
그는 일렁거리는 눈빛으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나 사랑하지도 않잖아.”
송선호의 말에 도현이 실소를 했다. 그녀는 그의 멱살을 끌어당겼다.
“사랑한다니까? 몇 번을 말해야 아는 거야.”
그리고 다시 입을 맞췄다.
*
“어머니~”
“도현 씨~”
두 여자는 재회를 기뻐하며 서로 껴안았다. 남자 앞에서는 전혀 애교라고 할 게 없는 도현이었지만 연상의 여자들에게는 이렇게 친애의 정을 드러낼 때가 있었다. 어렸을 때 잃었던 모성에 대한 그리움의 발로일지도 모르겠다고 스스로는 진단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도 사람 나름이다.
“우리 아들 찬 줄 알았는데.”
지연이 얼굴을 떼며 그렇게 말했다. 도현이 웃었다.
“찼긴 찼는데요.”
도현은 그렇게 말하곤 그녀의 방을 살짝 보았다.
“어디 가세요?”
그렇게 물어보자 그녀가 활짝 웃었다.
“응, 여행 가.”
그녀의 뒤로 여행 가방이 여러 개 보였다. 짐을 반쯤 챙긴 것도 보였다.
“진짜요? 어디로 가세요?”
“모르겠어. 발길 닿는 대로 가게.”
“너무 좋겠다. 언제 가시는데요?”
“짐 다 싸는 대로 갈 거야.”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좋아 보였다. 도현은 그녀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송영제에게도 인사했다. 그도 같이 짐을 싸고 있었다.
“같이 가시나 봐요.”
“…….”
반대로 그는 살이 쏙 빠진 것 같아 보였다. 지연이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나 혼자 가고 싶다고 했는데 꼭 같이 가겠대.”
도현은 뭔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지만 말은 꺼내지 않았다. 지연이 그녀에게 작게 속닥거렸다.
“남자들은 왜 이렇게 질척거릴까?”
도현이 소리를 내서 웃었다.
“정 싫으시면 떼어놓고 가세요.”
도현도 속닥거렸다. 그러고 있는데 2층에서 큰 소리가 나더니 뒤따라 발소리가 크게 들렸다.
“도현아…!”
다들 2층을 올려다보았다. 송선호가 고급스러운 디자인을 뽐내는 난간을 잡고 상체를 반쯤 내밀고 있었다. 그는 아래를 보며 누군가를 찾았다. 옷도 헐벗고 머리는 한쪽으로 솟았으며 얼굴도 부었다. 평소의 말끔한 그답지 않았다. 물론, 그가 도현의 앞에서 평소의 그답지 않았던 선례는 매우 많다.
“옷도 안 입고.”
지연이 그렇게 타박했다. 그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왔다. 그리고 다가와서 도현의 손목을 잡았다. 도현이 지연에게 어깨를 으쓱했다. 도리어 그녀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도현이 말했다.
“그래도 전 괜찮아요. 결혼도 안 했는데요.”
“아.”
“도현 씨…! 우리 와이프 앞에서 그런 말은 좀….”
도현의 말에 펄쩍 뛴 것은 송영제였다. 그는 곧 목소리를 확 낮추고 지연 이바노프의 눈치를 보았다. 지연은 도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침 뭐 먹을래요, 도현 씨?”
그녀는 도현을 이끌고 1층에 있는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송영제는 짐을 싸다 말고 나와서 웃통을 헐벗은 아들의 등짝을 때렸다.
“옷 입어라.”
그는 아들에게 화풀이를 하곤 얼른 그들을 따라갔다. 송선호는 2층으로 올라가려고 하다가 임시방편으로 아버지의 캐리어에서 티셔츠를 하나 꺼내 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먼저 부엌에 간 여자들은 좋은 여행지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지연은 도현이 보여주는 사진을 보며 너무 좋아하더니 물었다.
“도현 씨 배 빌릴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빌릴까 봐.”
“그러실래요?”
송영제는 흑백의 비싼 마블 테이블 위로 샐러드 볼과 과일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눈길은 지연 이바노프에게 묶여 있는 상태였다. 그녀가 어디로 도망이라도 갈 거라고 생각하는지 불안한 눈빛이었다. 물론 불안한 눈빛은 그의 아들도 비슷했다. 식사하는 동안에는 지연과 도현만 이야기를 나누고 남자들은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식사를 하고 난 지연과 도현은 환하게 햇빛이 들어오는 창 앞에 앉아 우아하게 차를 마셨다.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사회의 현안이나 예술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서로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일이 잘되고 있다니 정말 다행이네, 도현 씨.”
“한숨 놓은 정도예요.”
“선호가 도현 씨 집이 정말 멋지다던데. 한 번 구경 가보고 싶다.”
“네, 언제 한 번 오세요. 엄청 공들여서 지었어요. 음, 3주 뒤면 되려나?”
“그동안은 바빠?”
“지금은 수리 중이라서 엉망이거든요.”
“어머? 진짜? 무슨 일 있었어요?”
“좀 그런 일이 있었어요. 저기 앉은 누가 사고를 쳐서.”
“어머.”
도현은 고개를 돌려 남자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벽난로 앞에 있는 카우치 두 개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둘 다 신문을 읽고 있었다. 송선호는 뜨끔했는지 움찔하고 그녀의 눈치를 스윽 봤다가 눈이 마주치자 부리나케 다시 신문에 코를 박았다. 도현이 실소하니 지연도 웃었다.
“웃겨. 오늘은 일하러 안 가나? 세상에서 자기 일이 제일 중요한 것처럼 굴면서.”
“여자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 되어야지 집중하는 거죠.”
도현이 딱 적당하게 푹신한 카우치에 등을 기대며 그렇게 나른하게 대꾸했다. 들으라고 한 말이니 들렸을 텐데도 일단은 요지부동이다. 지연은 살짝 인상을 쓰며 첨언했다.
“그리고 또 겁은 얼마나 많은지. 나는 30년을 같이 살았는데도 누가 그렇게 겁이 많은 남자인지 처음 알았다니까.”
“어머~, 역시 유전~”
둘은 역시나 화기애애했다. 반면 신문을 든 채 세상 정색을 하고 있던 부자는 조용히 입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송영제가 발로 아들의 정강이를 찼다.
“빨리 데리고 가. 또 네 엄마한테 이상한 바람 불어넣기 전에!”
그가 작게 윽박질렀다. 그래도 아버지 쪽에게는 결혼이라는, 법과 돈으로 꽈악 묶인 믿을 만한 사회안전망(?)이 아직 존재하고 있었다. 송선호는 기어들어 가듯 대꾸했다.
“가만히 계세요, 아버지. 도현이 화내면 무섭단 말이에요.”
“네 아버지는 안 무섭냐? 어?”
“도현이가 훨씬 무서워요….”
“이게 한심하게 여자한테 꽉 잡혀서는…!”
“아버지가 하실 말씀은 아니실 텐데요….”
그러고 있으니 지연이 고개를 살짝 그쪽으로 돌리고 우아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
“당신 금방 뭐라고 했어?”
“어…?! 아니! 아니아니!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나, 나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여보.”
그는 바로 신문을 팍 접고 그녀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는 신문 너머로 잠깐 자기 아버지를 노려보았다가 그가 뭐하냐는 듯이 협박의(?) 눈짓을 하자 마지못해 덧붙여 말했다.
“네, 그렇대요.”
그리고 때마침 집의 사용인이 다가오더니 송영제에게 속닥거렸다. 그는 화색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오라고 해.”
그리고 그는 거실을 나갔다. 곧 사용인들이 무언가를 줄줄이 들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엄청난 양의 꽃병과 또 엄청난 양의 선물상자였다. 그게 지연을 중심으로 아름답게 배치되었다. 도현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걸 보았다. 참 사치스럽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반짝이는 아침 햇살과 싱그럽게 빛나는 색색의 장미들. 카우치 옆에 줄줄이 쌓인 선물상자보다도 지연은 꽃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분홍색의 송이가 아주 큰 장미를 쓰다듬었다.
도현을 따라간 클럽에서 어떤 젊은 남자가 주었던 꽃도 이것이었다. 그리고 송영제라는 남자가 연애 시절 자주 주던 꽃이기도 했다. 잠깐 추억에 빠진 지연의 옆으로 그가 다가왔다. 그는 직접 포장하기라도 했는지 포장지로 어설프게 감싼 분홍색 장미꽃다발을 들고 그녀의 가까이에 섰다. 그의 뒤로 아까 전의 사용인도 서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킨 그는 겨우 입을 뗐다.
“여, 여보… 지연아.”
“…….”
그는 불쑥 장미꽃을 내밀고는 그녀가 꽃다발을 받자 뒤의 사용인이 홀로그램을 켰다. 아주 예쁘고 세련된 건물 하나가 떴다.
“이건 약속했던 미술관이고….”
사용인이 홀로그램을 하나 더 켰다.
“이건 따로 선물… 아니, 크루즈 가지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뭘 빌려… 말했으면 옛날에 사줬지.”
분명히 도현의 크루즈보다 더 큰 크루즈 사진이 떠 있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꽃과 그것보다 더욱 사치스러운 이 선물들은 모두 애피타이저였나 보다. 그는 멋쩍은 듯 그녀의 눈치를 보다가 그녀가 홀로그램에서 눈을 돌려 그를 보자 시선을 확 피했다.
“내, 내가 돈으로 어쩌려는 게 아니라…! 그, 그냥 당신 기분이라도 좀 풀렸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러니까 음, 시, 싫진 않지? 응?”
그는 중요한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초조해했다. 지연은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송영제는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얼른 첨언했다.
“사, 사실 미술관 말고도… 그러니까 우리 재단을 당신이 운영하면 어떨까… 해서… 당신 정말 잘할 거 같고. 어, 어때? 재단 지분이면 당신이 나 회사에서 자를 수도 있다…?”
“…….”
자기 목에 목줄을 채워 그걸 와이프의 손에 쥐여 주겠다는 거다. 지연은 그대로 자기 남자(아직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현은 ‘어머….’ 하며 그걸 가까이에서 보고 있다가 송선호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도현은 송영제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눈을 크게 떴다. 넌 뭐냐, 이거다.
이런 거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안 드냐. 넌 나한테 이렇게 해줄 수 있냐. 넌 왜 이것도 못 해주냐. 이런 것도 못 해주면서 그 지랄은 한 거냐. 넌 왜 발전이 없냐. 아버지보다는 나아야 할 거 아니냐. 그래서 도대체 이런 건 언제 해줄 거냐.
…라는 말이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은 송선호였다.
'…정말 열심히 일해야겠다…'
아버지, 원망할 겁니다… 송선호는 신문에 얼굴을 다시 박으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 잠시 후 바스락하는 소리와 함께 얇디얇은 보호막이던 신문지가 치워졌다. 송선호는 앞에 선 도현을 겨우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그녀가 왜 이렇게 크게 보이는가.
“뭐해?”
“어… 어?”
그녀가 작게 말했다.
“자리 비켜드려야 할 거 아냐.”
그녀는 송선호의 손을 잡고 당겼다. 그는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들은 지연과 송영제를 두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2층 거실에 딸린 테라스로 나갔다. 기다랗고 단단한 카우치가 하나 있었다. 일자로 길게 되어 있고 양쪽으로만 팔걸이가 있었다. 도현은 거기로 가서 털썩 누웠다. 송선호가 그녀의 발치에 앉았다. 그녀는 한쪽 발로 그의 허벅지를 밟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녀는 정원을 구경했다.
“미국에 있는 대저택 같아.”
그녀는 인테리어를 둘러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송선호는 그녀의 무릎을 보다가 시선을 돌리며 대꾸했다.
“…네 집이 더 비싸.”
“진짜?”
“그렇더라고.”
“크기는 여기 반밖에 안 되는 거 같은데…. 위치 때문인가.”
“거긴 거실 창문부터가 비싸잖아. 그냥 TV를 사지….”
“아.”
도현이 허리를 일으키며 그의 허벅지 위로 쭉 발을 뻗었다.
“다리 아파.”
“구두 때문에?”
송선호는 슬쩍 모양이 예쁜 그녀의 종아리를 손으로 쥐었다. 가볍게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응…. 시원하다.”
그리고 그녀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마저 저택의 정원을 구경했다. 그는 열심히 그녀의 다리를 주무르다가 겨우 입을 뗐다.
“도, 도현아…. 어제는… 그러니까….”
“응?”
“그때는….”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긴장으로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또 이러네. 도현은 한쪽 무릎으로 그의 턱을 자기 쪽으로 밀었다.
“얼굴 보고 얘기해.”
“…그때는 내가 잘못했어…. 미안.”
“흐음.”
“그러니까… 질투가 나서….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러니까… 잘못했어. 미안해. 수리비도 많이 나왔지? 두 개 다 얼마 나왔어? 내가 낼게.”
“그러든가.”
도현은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는 등으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흐르는 걸 느꼈다. 그녀의 눈길이 그의 얼굴을 더듬는 게 느껴졌다. 그는 다시 눈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럴 때 눈을 마주치면 그녀가 자신의 모든 것을 읽어내는 느낌이라 불편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카우치를 짚은 채 가만히 그를 보고 있었다.
“그게 끝이야?”
“어?”
그녀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정원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난 술 먹고 사랑한다는 남자는 참 믿음이 안 가더라.”
“아니…! 그건…! 그런 거 아닌 거 알잖아.”
송선호는 한쪽 손을 카우치에 짚으며 그녀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래?”
“…사랑해.”
“알았어.”
“아니, 진짜…. 사랑해. 알잖아. 나 너 밖에 없어. 사랑해.”
그는 답답함을 느끼고 또 어떻게든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 했다. 아까까지 시선도 마주치지 못했던 것은 본인이면서 지금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그녀가 자신을 돌아봐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드디어 도현이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눈빛이 마주치자 그가 흠칫했다. 그녀의 분위기가, 그녀의 눈빛이 그를 꼼짝 못 하게 했다. 그녀는 언제나 그에게 이런 힘을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송선호는 마른 침을 삼키고 말했다.
“어젯밤에 한 말 중에 거짓말은 하나도 없었어. 사랑해. 앞으로도 계속… 영원히 사랑해. 나만큼 널 사랑할 수 있는 남자는 세상에 없어.”
송선호는 더없이 진지하게 그녀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그대로 흐른 몇 초가 영원같이 느껴졌다. 도현은 그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송선호는 너무 긴장되어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속삭였다.
“그럼 증명해봐.”
송선호는 숨을 멈추었다. 그대로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굳어 있던 그가 홀연히 물었다.
“다른 남자한테도… 그렇게 말한 적 있어?”
“아니.”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었다. 도현은 그런 말을 남자한테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남자에게 자신을 사랑할 것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증명하라고 한 적도 없었다.
왜일까. 등골이 오싹오싹했다. 그녀는 어째서 이럴 수 있는 것일까. 그녀가 가만히 송선호와 눈을 마주치며 소파를 짚고 있는 그의 손가락 마디를 검지로 슬슬 쓸었다. 더 오싹오싹해졌다. 손바닥에는 이미 땀이 흥건하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돼?”
그의 숨이 약간 거칠어졌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에게 이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면, 무언가 바뀔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기대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아. 아무리 그가 발버둥 쳐도 그녀는 그의 머리 꼭대기 위에 있었다. 그녀는 멋대로 그의 마음을 훔쳐 가고 그걸 멋대로 주무르고 또 점점 갈수록 그걸 어떻게 조종해야 하는지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해?”
그는 그런 그녀가 좋았다. 그녀만이 자신에게 그런 힘을 휘두르는 게 못내 억울하고 화가 날 때도 있었지만, 그래서 그녀가 자신을 미치게 했다. 송선호는 마음이 조급해서 도현의 입술을 노리고 얼굴을 숙였다. 그녀가 뒤로 슬쩍 물러났다. 애가 탔다.
“도현아….”
그녀가 카우치에 누웠다. 그가 그녀의 위로 올라왔다. 그는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본능적으로 그녀의 쭉 뻗은 허벅지 사이에 자신의 무게를 실으며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그는 애원했다.
“어떻게 하면 돼?”
그녀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그의 얼굴을 보고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일단….”
그녀가 속삭였다.
“네가 위에 올라오면 안 되지.”
그녀가 손으로 그의 등을 스윽 쓰다듬었다. 송선호가 ‘으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 둘은 눈을 마주쳤다. 마치 이곳에 그들 둘밖에 없는 것처럼, 송선호는 그녀의 눈동자를 열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입을 마주치기 전에 자세를 휙 뒤집었다. 그녀가 그의 위에 올라갔다. 그의 배 위에 올라탄 도현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넌 이렇게 내려다볼 때가 제일 예뻐.”
도현은 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단정한 이마, 깊고 뚜렷한 눈매, 높은 콧대, 귀족적인 광대, 남자다운 턱, 쭉 뻗은 목이 섹시하다. 몸도 탄탄하고 딱 그녀의 스타일이었다. 그녀가 왜 그를 남자로 보지 않았더라? 아, 성격. 송선호는 그녀의 허벅지를 잡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는 애가 달아 표정 관리도 하나 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도현아, 사랑해.”
그녀가 너무나 좋아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르는 얼굴이다. 이런 주제에 비싸게 굴기는 왜 그렇게 비싸게 구는 걸까. 자기가 아무리 잘나고 잘생겨도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그가 뭘 해도 이제 그녀는 다 알았다. 그리고 눈에 빤히 보이는 짓을 하는 아이는 원래 좀 괴롭히고 싶은 법이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손등으로 쓰다듬었다.
“깔고 앉기 딱 좋아.”
*
일단 이혼의 위기는 넘긴 것 같다.
‘당연하지. 같이 산 날이 얼만데.’
나 같은 남자를 그렇게 버릴 수 있는 여자는 없다. 송영제는 그렇게 안도감과 자신감을 재충전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모레면 출발할 것이다. 오늘까지는 회사 일을 정리해야 했다. 요즘 같은 근무환경에서는 원격으로도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으니 괜찮지만 혹시 모르니 일단은 아들에게 사장 대리로서 당부 좀 미리 해놔야겠다.
“선….”
2층으로 올라와 아들을 찾던 그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애들은?”
그대로 뒤에서 지연이 따라 올라왔다. 그는 아내의 눈을 가리고 싶었지만 너무 놀라서 굳은 상태였다. 그제야 인기척을 눈치챈 애들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송선호가 벌건 얼굴로 도현 킬스버그의 스커트 아래에서 눈만 빼냈다. 도현은 그의 잘난 얼굴 위를 깔고 앉아 있었다. 송선호의 부모님을 발견한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얼굴 위에서 내려왔다.
“오셨어요? 죄송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고 송선호는 그제야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송영제는 곧바로 아들에게 뭐라고 하려고 했지만 지연이 웃는 얼굴로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니야. 우리가 미안해. 갈게. 빨리 와. 왜 애들 방해하고 그래, 당신.”
그녀는 남편의 등짝을 때리며 그를 데리고 내려갔다. 송선호는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인상을 팍 쓰며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아오….”
“올라타라고 한 건 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원피스 밑단을 다시금 정리했다. 그는 귀가 벌게져서는 창피함과 당혹스러움을 참았다.
‘나 완전 도현이한테 꽉 잡혔다고 생각하시겠네, 아버지.’
아니, 솔직히 그건 맞긴 한데…. 하여튼 아버지는 자신을 아주 한심하게 볼 게 분명했다. 그는 옷을 정리한 도현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그녀가 눈웃음을 지었다.
“왜?”
“…….”
왜 이렇게 예쁘냐고. 그는 다시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를 마주 보고 그의 무릎에 반쯤 올라탔다. 그동안 상심해서 마음을 앓은 게 거짓말 같다. 이렇게 그녀를 끌어안고 있으니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너무나 부드러웠다. 좋은 냄새가 났다. 누군가 둘의 요철을 딱 맞춰 놓은 듯했다. 마음이 놓인다. 그는 도현의 엉덩이를 더 끌어당겼다.
“으음, 아빠한테 들켰는데 계속하게? 혼나면 어쩌시려고.”
도현이 아이를 어르듯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향기를 맡다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살짝 정색했다.
“벌써 들켰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그녀가 웃었다. 그가 입을 맞추려고 하니까 그녀가 살짝 질색 하며 바로 피했다.
“싫어.”
“왜?”
“금방까지 내 거 핥고 있었잖아.”
“야…! 그래도 키스는 해주는 게 매너이지 않아?”
“아, 싫어.”
그렇게 투닥거리고 있는데 아래층에서 쿵쿵하고 벽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송선호! 적당히 하고 내려와. 일 얘기 좀 해야 할 거 아냐!”
송영제였다. 아내에게는 설설 긴다고 하더라도 아들은 영원히 제 밑이다. 송선호는 도현을 꼭 끌어안고 끙끙거리다가 몸을 떼고 일어났다. 도현은 그런 그가 웃겼다. 도현은 그의 허리를 뒤에서 안으며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슬슬 긁었다.
“너희 집에만 오면 내가 남의 집 귀한 아들을 홀린 요부가 된 것 같단 말이야.”
그녀가 키득거렸다.
“그럼 나는 좋은데….”
그리고 엄청나게 잘 어울린다. 송선호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허리를 안고 1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네가 우리 엄마를 홀리는 게 무서운 거야.”
“어머.”
“재미있어 하지 마. 엄마는 잘못 건드리면 우리 아버지 정말 넘어가신다. 저번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아버지 술 드시는 거 따라간다고.”
“하하. 자기는.”
송선호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묻으며 말했다.
“그래도 엄마가 너 많이 좋아하시니까 난 좋은데…. 아버지는….”
“싫어하셔?”
“그렇다기보단…. 널 경쟁자로 여기시는 게 아닐까. 나한테도 그러시거든.”
“하하하. 그러니까 여행도 굳이 따라가시는구나.”
도현이 말했다.
“어머니를 못 믿는 거야, 자기 자신을 못 믿는 거야? 어느 쪽이든 별로인데.”
“세상 남자들을 못 믿는 거야.”
“너도 그래?”
“난….”
송선호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뭐라고 대답하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불러서 그쪽으로 가야 했다. 송선호가 창밖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송선호는 여전히 좀 쑥스러운지 특유의 제스처로 시선을 돌렸다가 곧 사업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도현은 다시금 아까 전의 카우치에 앉아 그들을 보았다. 잠깐 동안 테이블 위에 있던 데코레이션 용 과일이 교체되어 있었고 꽃이 장식되어 있었다. 사용인 중 하나가 도현의 앞에 새 디저트와 차를 내주었다. 앞에 럭셔리 브랜드 카탈로그가 있어 집어 들었다. 잠깐 성의 없이 휙휙 넘겨보다가 문득 집 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저기서 일 얘기를 한창 하는 송선호가 보였다. 저러고 있으니 또 좀 근사해 보였다. 일하는 남자 특유의 그런 분위기 있지 않은가.
‘남자는 일하고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사치스럽게 살고?’
그게 썩 나쁘지만은 않다는 게 문제다. 이 집만 오면 그런 유한 마담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유롭고 나른하고, 세상사 문제들은 머나먼 것이 된 것 같다. 어느 나라는 전쟁이 한창이고 어느 나라는 몬스터 때문에 엉망인 게 다 무슨 상관인가 싶다. 하긴, 그건 원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빚 문제도 많이 해결되어 그녀도 로웰도 1주 1회 연재로 연재 주기를 늘렸다. 숨통이 확 트였다. 일이라는 것도 일을 해야 하는 사람만 해야 하는 거라는 걸 오랜만에 체감할 수 있었다.
한창 집에 꽃을 배치하고 있던 지연이 돌아왔다. 잡지를 보며 카우치에 앉은 도현을 본 지연이 눈을 반짝 빛내며 다가왔다. 도현이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설마 거절한 건 아니시죠?”
“응? 뭘?”
“아버님이 준다고 한 거요.”
“일단… 생각해본다고 했어.”
“그런 건 받고 생각해 봐야죠.”
지연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가 도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아니, 그것보다도….”
“네?”
그녀는 시선을 돌려 남자 둘이 어디 있는지 도현에게 바짝 다가가 앉았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어 속닥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왜 그러시는데요?”
도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도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까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아까요? 아아.”
하긴, 이혼이라는 건 다 섹스라이프가 만족스럽지 못하니까 하는 것이다. 도현도 송선호랑 하기 전에는 막연히 ‘쟤는 못 할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 이것저것 빠짐없이 잘난 남자란 굳이 여자를 만족시키려고 하지 않아도 그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여자들이 줄줄 붙는 법이니까. 그의 아버지도 비슷해 보였다.
“그런 건 오히려 남자들이 더 좋아해요.”
“정말? 저이는 질색할 거 같은데….”
“송선호도 원래 엄청 비… 아니, 그렇게 굴더라구요. 그래도 결국 좋아했어요.”
도현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여전히 잡지를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 지연은 새삼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딸뻘인 그녀를 보았다.
“그런 걸 어떻게 다 알았어?”
“전에 만나던 남자가 그러더라구요. 남자들은 다 자기 얼굴을 깔고 앉아줄 여자를 원한다구요.”
“어머…. 진짜?”
도현은 힐끗 송선호와 송영제가 있는 쪽을 보고는 지연에게 속닥거렸다.
“그냥 확 깔고 앉아버려요.”
“어떻게 그래. 싫어하면 어떡해.”
“뭐 그런 걸 걱정해요. 싫어하면 어때요. 지금까지 한 번도 좋았던 적 없었다고 말하면 충격받아서 막 화내다가도 나중엔 심기일전해서 연구해서 와요.”
“그래도….”
“제가 다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 재산 주겠다는 남자는 그거 진짜 사랑 맞아요. 아버님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원래 종을 막론하고 수컷의 사랑은 물질로 표현되는 법. 입이 어떻게 떠드는지 볼 게 아니라 그의 지갑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면 그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는 아낌이 없었다. 아낀다면 그건 본인이 능력이 없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둘 중 어느 것이든 매우 별로다.
“그럼, 전에 만났다던 그 남자도 좋아했어?”
아까 그게 그렇게 인상적이셨나 보다. 원래 여자란 언제까지고 호기심이 강한 존재다.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지금 물어볼까요?”
“어머…. 아직도 연락하고 그래?”
“연락 안 하고 살았는데 이번에 메트로서울 오면서 인사 겸 연락하더라구요.”
“난 우리 신랑밖에 안 만나봐서…. 전 애인은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네. 괜히 기분 이상할 거 같아.”
“조금 이상하긴 하죠.”
“헤어진 지 오래됐어?”
“2년 정도 됐어요.”
“어때? 잘생겼어?”
“사진 보여드릴까요?”
도현은 사진을 찾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는 금발 머리에 비취색 눈을 가진, 분위기가 아주 근사한 미남이 등장했다. 지연이 ‘어머’ 하며 감탄사를 냈다. 그는 확실히 자랑할 만한 전 남자친구였다.
“엄청 잘생겼네?”
“송선호가 엄청 질투해요. 이름만 나와도 질색한다니까요.”
도현이 웃으며 속닥거렸다.
“둘이 알아?”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어요. 송선호랑 알고 지낸 지는 오래됐으니까요.”
지연은 에반의 사진을 뚫어지게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나도 연애나 좀 해봤으면 좋았을걸.”
그녀가 말했다. 도현이 웃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어머, 어떻게 그래.”
“하하, 사실 거기서 거기 아닐까요?”
“이 남자도?”
“음… 걔는 좀 특별했어요.”
그렇게 둘은 마치 고등학교 학생들이 연애나 남자애들에 대해 떠드는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송영제와 송선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송영제가 다가와서 물었다. 지연이 웃었다.
“재미있는 얘기.”
송선호는 사진을 본 모양인지 잠시 도현의 디바이스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집에 가야겠어요.”
“어머, 벌써? 점심 먹고 가지.”
“요새 수리되는 거 구경하면서 로웰 선생님이랑 점심 먹는 게 일과거든요.”
도현은 짐을 챙기고 나왔다. 송선호는 배웅하기 위해 나와 기둥 중 하나에 몸을 기대고 삐딱하게 섰다. 차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정말 로웰 선생님 만나러 가는 거야?”
“응?”
도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인상을 약간 썼다.
“그 새끼 만나러 가는 거 아냐?”
“누구? 미르?”
“…….”
도현은 씩 웃었다.
“사랑한다니까.”
그녀는 그의 품에 몸을 기대며 그의 뺨에 입을 쪽 맞췄다. 그리고 차가 도착하자 타고 쌩 가버렸다. 송선호는 복잡한 마음에 차의 뒤꽁무니를 계속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
1주에 1회로 연재를 줄인 후에야 두 사람은 비로소 인간적인 생활을 영유할 수 있게 되었다. 위기로 결합하여 시련을 함께 헤쳐 나와 새삼 서로의 소중함을 느낀 둘은 수리가 되어가는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바라보며 샴페인을 들고 있었다.
“일꾼들이 다들 미남 스트리퍼였으면 좋았을 텐데.”
도현이 말했다.
“작가님, 찌찌뽕. 나도 금방 그 생각 했는데.”
벌써 5월 말이다. 그들은 수영복을 입고 수영장의 앞에 선베드를 놓고 파라솔까지 펼친 채 누워 있었다. 집의 외벽은 이제 거의 다 쌓았다. 1, 2층 플로어도 미장이 다 되었다. 다행히 그 난리에도 집 자체가 튼튼해서 다른 부분에 금이 가거나 기울어지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우리 송 편집장이 작가님 많이 좋아하나 보네요. 이것도 선뜻 또 내주고.”
“자기가 잘못해서 이렇게 된 거니까 내야죠.”
“하긴, 어차피 갚을 거에서 까려고 했죠.”
“하하하.”
그녀의 말에 도현이 웃었다. 슬슬 시간이 되니 서연과 어시 중 한 명인 신재인도 놀러 왔다. 오늘은 일이 없는 시즈카도 놀러 왔다. 시즈카는 이번엔 밝은 분홍색으로 머리를 염색했다. 배를 타고 이곳저곳 다니는 그녀다 보니 시차가 항상 안 맞았다. 그녀가 하품을 크게 했다.
“킬스버그 님은 테니스 연습 좀 했어요?”
“응, 완전 특훈 중이지.”
“서연이 너도 거기 테니스장 다니잖아. 맞지?”
“응, 언니도 와.”
“그럴까.”
그들은 선베드를 놓고 사이좋게 서로 선오일을 바르고 누웠다. 그리고 시간이 되자 누가 등장했다.
“아, 이제 더워.”
약간 신경질을 내며 등장한 굵직한 목소리의 남자는 머리를 윗부분만 모양을 내고 까슬할 정도로 깎아버린 미르 킹쉴드였다.
“우리 이쁜 도현이~ 보고 싶었어.”
“왔어요?”
그는 도현을 깔아뭉개고 입술과 뺨에 쪼옥,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일어났다. 그는 우르르 있는 다른 여자들을 발견하고 인사했다.
“오늘은 배 안 타?”
“쉬는 날이에요~”
“머리 다시 했네?”
“어울려요?”
“응.”
시즈카가 그의 한쪽 어깨에 매달리며 뺨에 입을 쪽 맞췄다. 서연도 그에게 인사를 했다.
“미르도 머리했네?”
“어.”
“멋있어~”
“넌 학교 안 가?”
“갔다 왔지.”
둘은 동갑이다. 그보다 연상들은 그에게 존대를 하고 동갑은 반말을 쓴다. 왜일까? 서연도 그의 다른 쪽 어깨에 매달려 그의 뺨에 입을 맞춰 인사했다. 그가 양팔로 가볍게 그들의 허리를 안으니 그들의 몸이 저절로 부웅 떴다. 그들은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고롱거렸다. 그 남자는 어디 세워만 둬도 마음이 꽉 차는 그런 남자니까 말이다. 존재만으로도 세상이 밝아진다. 그는 다시 인상을 쓰더니 두 여자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아, 근데 오늘 왜 이렇게 더워?”
그는 흰 티셔츠를 등부터 끌어올려 휙 벗었다. 모양을 잡아 놓은 머리카락이 좀 흐트러졌다. 신발도 벗고 바지랑 팬티도 그냥 휙 벗었다. 햇빛 아래 당당한 그의 나체는 아주 크고! 우람하고! 근사했다. 반짝이는 플래티넘 블론드, 쭉 뻗은 남자다운 목, 떡 벌어진 역삼각형의 등짝, 완벽 그 이상인 엉덩이, 탄탄하고 기다란 다리. 다른 사람들은 그냥 흐뭇한 얼굴로 그의 뒤태를 감상했다. 그는 그대로 수영장에 입수했다.
“아, 킬스버그 님~ 내가 이래서 이 먼 데까지 놀러 와요~”
그렇게 다른 남자들을 멸치, 대머리라고 매도하는 서연이 도현의 어깨를 흔들며 그렇게 말했다. 시즈카도 팝콘을 우걱우걱 먹으며 미르 킹쉴드의 몸에 시선을 딱 붙이고 덧붙였다.
“아, 잠이 달아난다. 항상 땡큐요, 킬스버그 님.”
그러자 도현이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호호호~’라는 느낌으로 대꾸했다.
“혼자 보기 너무 아깝잖아.”
로웰이 ‘흠’ 하고 다른 이들의 상태를 보더니 눈을 빛냈다. 그녀가 도현에게 말했다.
“돈 내고 보라고 해도 낼 거 같지 않아요? 장사나 해볼까요?”
“…돈은 확실히 될 거 같지만…. 그래도 우리 미르는 소중하니까요. 안 돼요.”
도현이 잠깐 당혹스러워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진짜 돈은 될 거 같다. 저 남자는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이 줄줄 붙어.”
도현은 새삼 감탄한 얼굴로 그를 쭈욱 감상했다.
“확실히 흔치 않은 남자죠.”
같이 살아본 사람으로서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로웰도 물개처럼 시원하게 수영을 하고 있는 미르 킹쉴드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심지어 신재인은 수영을 하고 있는 그를 스케치하고 있었다.
더위가 가실 때까지 차가운 물에서 수영을 한 미르는 곧 머리를 쓸어 넘기며 바닥에 섰다. 그는 멀찍이 관람만 하고 있는 여자들을 돌아보았다.
“뭐해? 수영 안 해?”
“미르 계속해요.”
“들어와.”
“좀 귀찮아요.”
미르는 의아한 듯 도현을 보다가 갑자기 씩 웃었다. 그리고 확 하고 그녀에게 물을 날렸다. 그러니까 수영장 물 전체가 요동을 치며 선베드에 누운 사람들에게 물보라가 확 덮쳤다. 그들이 제각각 비명을 질렀다. 미르는 소리를 내서 크게 웃었다. 여자들에게 장난을 거는 걸 싫어하는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미르!”
그러자 몇 명은 그에게 튜브 같은 걸 던졌지만 타격이 있을 리 없었다. 수영장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오히려 잡혀서 물에 빠지기나 했다. 결국 일 대 다수로 물싸움이 벌어졌다. 도현이 그의 머리를 노리고 확 매달렸다. 다른 사람들도 매달려 그를 물에 빠뜨려 복수를 하려고 했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한 팔로 여자를 둘 셋씩 잡더니 물에 휙휙 던졌다. 워터파크 놀이기구가 따로 없었다.
“꺅! 미르…! 또 던지지 마요! 던지면…!”
“던지면 뭐? 뭐?”
물에 젖은 젊고 아름다운 남자가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에게 허벅지를 안겨 들린 도현 킬스버그는 그게 뭐라고 살짝 마음이 찡한 걸 느꼈다. 아주 잠깐, 이 즐거운 순간이 영원이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많은 즐거운 일을 뒤로하고. 세상에 얼마나 즐겁고 좋은 것이 많은지 생각해보자면 이건 참 드문 일이었다. 이 순간이 다른 누구도 아닌 미르 킹쉴드와 함께 했기 때문에 좋았다. 도현은 이 마음을 그에게 전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거리낄 것이 전혀 없었다. 그와 자신의 사이에는 얇디얇은 수영복 한 장밖에 가로막는 것이 없었다.
“미르, 좋아해요. 정말 좋아요.”
그녀는 미르의 얼굴을 한 손으로 만졌다. 미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가 그답지 않게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했다.
“뭐야… 갑자기.”
“미르가 너무 좋아서요.”
“나도 진짜 좋아….”
미르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가슴 아래에 얼굴을 묻었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때를 노리고 로웰과 시즈카가 미르의 무릎 뒤를 노렸다.
“지금이닷!”
급소를 당한 미르를 그대로 휘청하고 그대로 다른 사람들이 도현 채로 그를 넘어뜨렸다. 시야도, 손도 자유롭지 못했던 그는 결국 물에 빠졌다. 그는 양손에 우르르 여자들을 들고 벌떡 일어났다.
“이것들이…!! 중요한 순간에!!”
그러고 다시 전투가 계속되려는데 서연이 ‘어!’ 하고 큰 소리를 냈다.
“에반 블랙!”
그녀는 아차 하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다들 그쪽을 바라보았다.
수영장의 밖에는 황금빛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한 남자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서 있었다. 회색과 네이비 색의 중간쯤으로 보이는 짙은 색 쓰리피스 정장을 입고 청색 셔츠에 광이 나는 아이보리색 넥타이, 비슷한 색의 행거칩을 했다. 스타일은 세련됐지만 굉장히 격식 있는 차림을 한 남자인데도 짙은 속눈썹과 야살스럽기까지 한 붉은 입술 때문에 분위기가 묘하다.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서 빼고 왼쪽 손목의 시계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도현은 ‘아!’ 하며 약속을 떠올렸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논다고 디바이스도 안 봤으니.
'뭐, 어차피 데리러 오기로 했던 거니까.'
도현이 그를 보고 물었다.
“오페라 시간 언제라고 했지?”
도현은 물을 헤치고 그의 쪽으로 갔다. 수영장 바깥 바닥을 짚고 몸을 들어 올리는데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도와주었다. 훌쩍 물 밖으로 올라온 그녀가 햇빛 때문에 발그레한 피부로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멋진데?”
“휘파람도 불지?”
“불어줄까?”
남자는 살갗 하나 보이지 않게 완벽하게 꾸며 놓았고 여자는 헐벗고 젖었는데, 둘의 분위기가 묘한 시너지를 일으켰다. 닮지 않은 듯 닮았다. 전혀 닮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미르 킹쉴드는 물론이고 그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다시 만나는 거래요, 선생님?”
“글쎄요…. 딱히 별말은 없는데.”
“근데 진짜 분위기 묘~하다….”
미르는 인상을 팍 쓰고 앞으로 척척 걸어갔다. 물의 저항력이 뭐인가 싶다. 그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단번에 그 덩치를 물 밖으로 빼냈다. 에반은 자신의 앞에 위협적으로 선 미르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또 보네요.”
“…….”
그러니까 한 남자는 태초의 모습으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데다가 매우 울끈불끈했고 한 남자는 아주 매끈하고 세련되게 차려입고 있었다. 미르 킹쉴드는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털을 세웠고 에반 블랙은 알 수 없는 미소로 받아치고 있었다.
“미르, 싸우면 안 돼요.”
비치타월을 몸에 감은 도현이 다가와서 에반이 차려입은 걸 한 번 확인하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입은 것과 맞춰서 입을 생각이었다.
“…….”
“…….”
남자 둘은 도현이 나올 때까지 그러고 서 있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물 안에서 혹은 튜브 위에서 팝콘을 씹으며 그걸 구경했다. 남자들이 싸우는 게 제일 재미있다.
“미르 같은 남자가 저러면 무서울 것도 같은데. 안 무섭나 봐.”
“사라 언니가 저 남자도 뭔가 싸하게 무섭다잖아요. 그 사라 언니가.”
“사실 무서운 걸로 따지면 다니엘 스톤하츠가 제일 무서워. 진짜 잘생겼는데! 진짜 내 스타일인데! 무서워…. 으.”
“어허, 인간적으로 스톤하츠 씨는 까지 맙시다. 저와 신태호 선수를 이어주는 착한 메신저입니다. 내가 우리 스톤하츠 씨를 제일 밀어요. 제일 된 사람이야.”
“아니, 그 재벌 3세는 그나마 제일 상식인 같던데 이 개판에서 어쩐대요?”
“응,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번에 보니까 송 편집장이 눈 뒤집어지면 제일 일을 크게 치더라고, 응. 죽는 사람 나올 뻔했다.”
“와…. 킬스버그 님 진짜 고생 많겠다….”
“어쨌든… 둘 다 잘생겨서 보기는 좋네요.”
한 명은 번쩍번쩍한 플래티넘 블론드에 한 명은 정석적인 골든 블론드였다. 둘 다 어디 내놔도 눈이 휘둥그레질 미남들이라 화보 판넬이라도 세워 둔 것 같다. 그대로 조금 있다가 옷을 갈아입은 도현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어두운 금색에 검은 무늬가 주름과 함께 자연스럽게 있는 튜브탑 드레스를 입었다. 머리는 싹 넘겨 높게 포니테일을 했고 화장은 네이비, 그레이, 약간의 골드 섀도우를 칠하고 아이라인을 평소보다 약간 더 그리고 속눈썹에는 길게 마스카라를 했다. 주얼리는 전혀 하지 않고 핸드백도 작고 심플한 미노디에르백을 들었다. 대신에 힐은 크리스탈 장식이 잔뜩 달려 화려하고 높은 샌들을 신었다.
그녀는 미르의 손목을 잡으며 그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미르는 그제야 에반에게서 눈을 떼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야. 왜 이렇게 예쁘게 입었어?”
도현이 웃었다.
“얌전하게 있어요. 빨리 올게요.”
“…진짜 빨리 와야 돼.”
“네.”
“이 새끼랑 이상한 짓 하면 안 돼?”
“하하. 네.”
“여기도 뽀뽀해줘.”
“으음.”
미르 킹쉴드의 얼굴은 도현의 빨간 립스틱으로 도배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에반과 팸플릿을 보면서 밖에 세워 둔 차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가수 한국에 온 지도 몰랐어.”
“예전만큼 기량이 나올지는 모르겠네.”
“시드니에서 봤을 땐 최고였는데.”
그들은 언제나 함께 있었던 연인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들만이 아는 이야기를 하며 걸어갔다. 미르가 그걸 팔짱을 끼고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녀의 것이라고 얼굴에 마구 도장을 찍어 놓고도 좀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의 옆에 서서 구경했다.
“그래도 미르가 1등이야.”
“맞아요. 킹쉴드 씨가 독보적 1등이지.”
“1등이에요.”
그들은 각기 그의 다른 곳(?)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미르는 ‘하아’ 하고 세상 시름을 다 담은 한숨을 쉬더니 비치타월을 허리에 두르고 선베드에 누웠다.
“우리 도현이는 왜 이렇게 예뻐 가지고.”
그가 투덜거렸다.
*
‘도현 씨가 기다리라고 하셨으니 기다린다. 하지만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지? 연락은 해도 되는 건가? 그녀를 만지고 싶어. 목소리를 듣고 싶어.’
그는 경쟁자의 마수에 의해 그를 노리고 있던 세계물리학회에 덜미를 잡히고 구단에도 계약이 잡힌 상태로 베이징과 도쿄를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는 내년에 있을 다음 계약을 아직 갱신하지 않은 상태였고 이스트드래곤과의 계약 기간이 끝나면 자연히 은퇴하게 되었다. 아직 언론에는 엠바고 상태다.
그는 북경대 물리학과에 입학하여 모든 전공과목 학점을 특별 시험으로 취득하고 있었다. 졸업에 필요한 교양 학점은 전부 면제되었다. 대신 전공과목 시험은 특별히 북경대 물리학과 학과장인 왕리밍을 필두로 한 선별된 교수진이 낸 시험 문제로 치르고 있었다. 모두 15개 과목으로 전부 A0 이상을 맞고 GPA가 4.2/4.3 이상이어야 학사 학위를 준다고 한다. 북경대의 자유로운 학풍이 만들어낸 살인적인 월반 제도였다. 주말마다 두 과목씩 시험을 치고 있으며 이스트드래곤의 훈련이 끝나자마자 베이징으로 날아가 왕리밍의 랩에 출근하고 있었다.
이미 고질량점 중력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였으니 역학, 일반상대성이론, 특수상대성이론, 중력마법학, 마도학, 응용마도식작법 등에 뛰어났으나 시험을 위한 공부는 또 다른 법이다. 그는 매일 밤마다 북경대 물리학과 기출문제 데이터베이스에서 무작위로 짠 시험을 세 개씩 풀어야 했다. 그가 아무리 날고 기는 천재라 해도 죽을 맛이었다.
다행히도(?) 오늘은 그의 지도교수인 왕 교수가 스트레스로 쓰러져(많은 사연이 있었다) 감시의 눈길이 사라지자 곧바로 메트로서울로 날아왔다. 그리고 세계 최강의 남자는 정원에 매트를 깔고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주인님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보면서 기다리는 것이다. 이건 기다리라는 명령을 어긴 것이 아니다.’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참을 수 없다니. 역시 이 또한 도현에 관한 것만 그랬다.
이제 집의 외벽은 멀끔했다. 그리고 그녀는 전보다 여유로워 보였다. 항상 마감에 쫓겨 스트레스를 받곤 했던 그녀다. 미르 킹쉴드가 그녀의 빚을 전부 변제해 준 덕분에 한결 마음이 놓인 모양이었다.
‘미르 킹쉴드를 그때 실수로라도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지금도 그녀의 곁에 남아 있는 것도 미르 킹쉴드였다. 그때 선수를 치는 것이 바로 자신이었어야 했는데. 속이 쓰렸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녀는 오늘 어깨 길이를 넘는 그녀의 남색 머리카락을 높게 뭉쳐 묶고 헐렁한 박스티에 요가 바지를 입고 강사를 따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햇빛 아래에 그녀의 미끈한 다리가 쭉 뻗었다.
아아. 그녀의 발가락을 핥고 싶다.
그는 욕망하는 마음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고요히 그녀를 주시했다. 먹잇감을 보는 눈빛 같기도 했고 사랑을 가득 담은 숫된 눈빛 같기도 했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새디스틱한 욕구를 일으키는 처연함을 띄고 있기도 했다.
‘도현 씨….’
세계 최강의 남자는 그렇게 스토커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 며칠 얼쩡거렸더니 경찰에 앞서 디바이스가 먼저 경고를 했다.
[거동수상자로 불심검문에 걸릴 수 있습니다.]
디바이스는 소유주를 경찰에 신고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경고를 해줄 때가 있었다. 스토킹질 좀 그만하라는 것이다. 사실 마법을 좀 쓰면 누구에게도 걸리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러니 저 미르 킹쉴드의 짐승 같은 감각으로도 그가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가장 문제는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들키고 싶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혼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들키지 않아야 하는 것이 그의 숙제였다. 사실 이건 이미 그녀와 자신의 에로틱 플레이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스토… 다니엘 스톤하츠는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 돌리곤 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너 같은 새끼가 공부를 하면 얼마나 했다고. 네가 우리 학교를 우습게 봤지? 어?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번듯하게 넘긴 머리, 미간에 강하게 잡힌 ‘내 천’ 자, 베일 것 같이 빳빳한 랩코트를 입은 남자는 자신보다 10센치가 넘게 큰 다니엘 스톤하츠의 이마를 검지로 콕콕 찔렀다. 몇 주 만에 드디어 A0가 하나 뜬 것이다. 그를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보며 폭언을 뱉고 있는 그 남자는 북경대 물리학과 학과장이자 빛나는 지성으로 이름 높은 세계적 석학, 왕리밍 교수였다.
“학교 들어와서 4년 동안 배워야 할 걸 벼락치기로 어떻게 해보겠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 내가 학회장님만 아니면 너 같이 근본도 모를 버러지를 왜 받아? 어? 용병? 용벼엉?! 또라이 같은 새끼가 뭔 연습을 하겠다고 사람을 몇 만명이나 죽여? 사이코냐? 어? 진짜 사이코야?? 네 부모 따라서 깡촌에서 땅이나 파지 뭔 공부야?”
“…….”
그러니까 다니엘 스톤하츠는 북경대에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었다. 평생 감옥에서 썩느냐, 예전에 버렸던 힘의 길을 다시 걷느냐의 기로에서 그의 선택은 자명할 수밖에 없었다.
“성격 급한 새끼가 무슨 학문을 하겠다고! 이렇게 의욕도 없는 새끼를 데려와서 도대체 나 보고 어쩌라고?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너 같은 새끼 뒷바라지를 해야겠냐? 어? 너 지금 당장 논문 쓰라고 하면 할 수 있냐? 기계 돌리라면 돌릴 수 있어? 어? 아, 스트레스받는다. 야, 그냥 감옥 가라. 어? 감옥 가. 감옥 가서 편하게 콩밥 먹어. 큰일 하는 사람 방해하지 말고!”
왕리밍은 다니엘 스톤하츠의 미끈한 얼굴을 볼 때마다 어쩐지 열을 받는 것 같았다. 가만히 연구실 한 켠에 앉아서 시험을 치고 있던 그를 붙잡고 또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가 잘 적응하는지 살피러 온 세계물리학회 학회장의 비서관 한민유가 치엔위 박사에게 물었다.
“괜찮은 거예요?”
“뭐….”
치엔위에게는 다니엘 스톤하츠가 뜻하지 않는 구원투수가 되어주었다. 물론 랩원이 한 명 더 늘었으니 좀 귀찮기는 했지만, 그는 왕리밍의 주의를 끌어주었다. 다니엘이 주변에 얼쩡거리니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왕 교수의 개 같은 성격을 그녀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빛나는 천재성, 뛰어난 연구실적으로 세계적 명성을 가진 왕리밍 교수는 차후 북경대 총장이나 공산당 간부로도 점쳐지고 있었으나 역시 젊고 아름다운 남자가 자기 영역에 들어오는 것은 본능적으로 신경에 몹시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치엔위는 전보다 얼굴이 약간 좋아졌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의 인질극 이후 그녀는 지도 교수에게 반항하거나 랩출(?)을 감행하는 듯 상당히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거기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왕 교수가 쓰러지기까지 했었다(물론 다니엘 스톤하츠도 한몫 했다).
“학회장님이 치엔 박사님 많이 걱정하시던데요.”
“학회장님께서?”
“네.”
이번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인질로 잡혀 몇 주 고생한 HNU 물리학과의 최이삭 박사나 북경대의 치엔위 박사는 캘리 박 교수의 입장에선 손주와 비슷한 개념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한 단어, 한 단어 심혈을 기울여 폭언을 선택해서 상대를 꺾어보려는 왕리밍과 그 앞에서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 하고 무기력하게 서 있는 현실성 없는 장발의 미남을 가만히 보던 치엔 박사는 한숨을 쉬며 짧은 머리카락을 어수선하게 쓰다듬었다.
“한동안 좀 다 싫었는데…. 공부도 하기 싫고 실험도 하기 싫고 교수님은 그중에서 제일 싫고. 졸업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애초에 졸업논문이라는 게 패스를 할 수 있는 개념인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최 박사보다는 내가 낫지’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정말 사실일까, 내 착각일 뿐인 거 아닐까, 어떻게 이게 더 나은 거일 수가 있냐. 그래도 퀸 교수님이 더 대단한데 내가 왜 북경대에 들어왔을까. 퀸 교수님보다 우리 교수님이 성격도 더 더러운데. 교수님은 졸업도 안 시켜 주실 거야. 시발, 나 같아도 안 시킨다. 나 같은 시다바리가 어디 흔하냐고….”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하던가 하던 그녀는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하소연을 줄줄이 내뱉었다. 영혼 잃은 눈빛은 디폴트 옵션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얼굴로 한민유를 보았다.
“그래도 학위는 받아야지, 좆 같아도. 치사하고 더러워서라도. 그렇지?”
한민유가 미소를 지으며 모두가 바라는 답을 해주었다.
“그럼요.”
“맞아. 내 6년…. 안 주면 진짜 교수님 죽여버릴 거라고.”
치엔위가 잠깐 악한 기운을 두르고 왕리밍을 노려보았다.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깡이 생기기를 바란 사람은 학회 내외로 많았으니 드디어 6년간의 훌륭한 지도(고문) 끝에 그 기미가 약간 보인다.
“그건 좀….”
안 그래도 세현 퀸 교수의 급작스러운 시한부 선고 때문에 세계물리학회의 학회장 정통 라인에 때 아닌 위기가 닥친 상황이었다. 캘리 박이 아직 정정하니 가까운 시일 내에 큰일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인류와 세계를 이끄는 지성들은 그들 말고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가장 멀리, 가장 먼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들이다. 세계물리학회, 캘리 박 교수가 키운 지식, 지혜와 힘의 나무. 치엔위 박사는 그것을 이어가야 할, 이끌어가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다.
“최 박사는 이제 잘못되면 본인이 자살하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 같은데요?”
한민유는 좀 더 나은 예를 제시했다. 최이삭 박사도 한동안 전통에 따라(?) 지도 교수에 대한 살심을 기른 적도 있었지만 그것도 어느새 자연히 소강되어 지도 교수의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신의 미진함에 대한 자괴감을 자아비판과 자살 충동으로 풀고 있었다.
“최 박사는 원래도 퀸 교수님 빠였어. 지가 무슨. 뭐가 어떻게 돼도 퀸 교수님께 손가락 하나도 못 댈걸. 아니, 애초에 반항도 한 번 못 하는 놈이. 아니, 지가 뭐라고 퀸 교수님을 어떻게 해?”
치엔위 박사는 전투적으로 실험 시뮬레이션을 짜면서 말했다. 한민유는 다시금 다니엘 스톤하츠의 자태를 감상하는 일로 돌아가며 대꾸했다.
“하긴…. 그리고 퀸 교수님 성격에 반항해봐요. 최 박사는 진짜 졸업장 못 받아요.”
“잠깐만. 그거 우리 교수님이 퀸 교수님보다 성격이 더 좋다는 말은 아니지? 그건 인정 못 한다. 우리 교수님보다 성격 더러운 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고.”
치엔위는 다니엘 스톤하츠의 머리카락을 뽑을 듯이 잡아당기고 있는 왕리밍을 힐끗 보곤 그렇게 말했다. 한민유는 ‘어떡해~’ 하며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 마음이 아파요. 고난을 겪고 있는 미남이란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거네요. 가서 막 구해주고 싶다.”
“값싼 동정이야.”
“진심인데요?”
“그럼 왜 안 구해주는데?”
“구해 달라고 하지도 않는 놈 구해줘 봤자 버릇 나빠져요.”
그렇게 잠시 시시덕거리다가 치엔위는 자기 일에 곧 매진하고 한민유는 그녀에게 커피를 한 잔 더 타주고 왕리밍의 분노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는 속의 분노를 모두 토해내고 약간 스트레스를 푼 얼굴로 한민유를 돌아보았다.
“또 뭐?”
“아칸소 가는 일 때문에 그러는데요.”
한민유는 그의 연구실로 따라 들어갔다. 다니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아 시험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20분쯤 지나니 시험지를 들고 치엔위에게 왔다.
“다 했습니다.”
“거기 둬.”
치엔위는 그렇게 대충 말하며 중성자별을 만들기 위한 중력 마도식 개량 및 마력 분배 시뮬레이션을 한참 수정하고 있었다. 사고 실험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중력 마법은 일정 이상의 고질량점만 있으면 어디서든 블랙홀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나 슈퍼컴퓨터 인공지능의 도움 없이는 실험을 위한 마력 분배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즉, 어떤 상황에 있든 너무 쉽게 중력 붕괴를 일으킬 정도로 마도식이 불안하다. 보통의 마법이 마도식만으로도 정확히 마력이 분배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점이다. 중성자별은 중력과 중성자 축퇴압이 균형을 이룰 때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각각의 고질량에 대하여 중성자별을 만들 수 있는 일반 마도식을 만들어 현 중력 마법의 불안정성을 해소하려고 하는 것이다. 졸업 논문용이다.
치엔위는 자신의 시뮬레이션에 거의 코를 박은 채 계수를 조정하며 디바이스를 툭툭 쳤다.
“채점해.”
그러자 전자종이가 저절로 채점을 시작했다. 점수란에 점수도 떴다. 다 맞았다. A+.
“가.”
그녀는 그렇게 성의 없이 말하며 커피를 마셨다. 벌써 밤 10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평일 낮에는 훈련, 저녁에는 주말 시험을 위한 벼락치기를 해야 했고 주말에는 그 시험을 쳐야 했다. 시험을 치는데 주어지는 시간은 일단 24시간이었는데 보통 7~8시간은 걸렸다. 아무리 다니엘 스톤하츠라도 주말 이틀 동안 이런 시험을 치면 머리가 텅 비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그의 매일매일이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노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알다시피 마도사의 정신력이라는 것은 보통 사람의 정신력과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그녀의 곁에 있기 위해서라면.’
그는 머나먼 곳에 있는 그녀는 전혀 알아주지도 않을 노력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그녀가 없으면 안 되는 쪽은 그였다. 보고 싶었다. 정말 보고 싶었다. 다니엘은 랩을 나가 휴게실 의자에 앉았다. 깊은 한숨이 나왔다.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왕 교수님. 치엔 박사도 다음에 봐요.”
한민유가 나왔다. 그녀는 디바이스로 문자를 쓰며 구두 소리와 함께 어두운 복도를 걸어왔다. 다니엘은 눈을 뜨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머, 다니엘.”
그녀는 그를 발견하고 친근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많이 피곤하시죠? 베이징 쉐라톤에서 지내고 계시죠? 데려다 드릴까요?”
“…네, 부탁드립니다.”
다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민유는 그를 감상했다. 약간 지쳐 보이는 게 그를 좀 더 인간적으로 보이게 했다. 뭐랄까.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미인에게 약간의 틈이 보인달까. 매력적이다. 건물 밑에 대기하고 있던 검은색 세단에 올라타자 차는 자율주행을 시작했다.
한민유는 디바이스로 캘리 박에게 오늘의 일을 간단하게 보내고 내일 일정과 브리핑 파일을 보낸 후 디바이스를 가방 안에 넣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턱 하고 다니엘의 허벅지 위에 올라왔다.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왕 교수님 연구실에는 있을 만한가요? 많이 힘드시면 학회장님께 말씀드려줄게요.”
그녀가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그는 자신의 허벅지를 느리게 쓰다듬는 그녀의 손을 잠깐 내려다보았다가 내버려 두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최근에 알게 된 미남들은 안타깝게도 이미 강력한 누군가의 것이거나 아니면 미성년자들이었다. 24살, 너무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젊음이 사그라들지도 않은 절정기의 나이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예쁘네요…. 눈동자, 진짜 보라색이야.”
그녀는 그의 외모를 칭찬했다. 물론, 다니엘 스톤하츠는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여자들을 질색했다. 그에게 접근하는 여자라고는 그의 돈과 명성을 원하여 접근하는 이들뿐이었다(그의 생각엔). 그들은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가 어떤 남자이고 어떤 일을 했던 남자이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남자인지 안다면 제일 먼저 손가락질을 할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한민유는 그의 외모가 마음에 든 케이스에 해당하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니엘에 대해서 생각보다 잘 알 것이다. 게다가 예전 그런 여자들에게서 보이는 광기랄까, 환상에 취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남자가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고 자신을 사랑으로 지배해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어린 나이인데도 굉장히 차분하네요. 어른스러워요. 마음에 들어요.”
“칭찬은 감사합니다.”
일이 잘못되면 오히려 그녀 쪽이 돈이나 힘으로 일을 해결할 것 같다. 캘리 박이나 왕리밍을 제외하자면 이쪽 학계 사람들은 학자 특유의 인간과 세상에 대한 나이브함이 존재했다. 아니, 심지어 그 둘도 어느 면에서는 그런 점이 있었다. 하지만 한민유는 학자도 아니고 마도사도 아니었다. 그녀가 학회에 충성하는 것은 그녀가 그 길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의 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 밤에도 혼자시죠?”
한민유는 다니엘 스톤하츠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안력이 느껴졌다. 매력, 힘, 권력.
‘도현 씨와는 달라.’
그녀는 젊고 여성스럽고 아름답고 스스로 욕망하고 남자에게 성적으로 관심이 있으며 동시에 그를 휘두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도현 킬스버그와 일견 비슷해 보였으나, 역시나 도현과 같은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그러기엔 한민유의 부드럽고 상큼한 눈동자에는 살인자의 것과 비슷한 서늘함이 강렬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종류는 달랐지만 같은 살인자로서, 스스로에 대한 염증이 있는 다니엘의 입장에서는 조금 거북스러웠다. 그는 점차로 거리를 좁혀오는 그녀의 손을 허벅지에서 떼어냈다.
“이스트드래곤 선수 중에서 마음에 드시는 남자가 있습니까? 비서관님이라면 목을 맬 만한 놈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니엘 본인의 인상과는 별개로 그녀는 남자를 종류별로 울릴 것 같은 여자였다. 그가 그렇게 제안하자 한민유가 미묘하게 웃었다.
“지금은 다니엘이 좋은데요?”
“저는 주, 애인이 있습니다.”
“어때요. 지금 곁에 없는데.”
“저는 그 사람에게만 충, 아니, 그 사람만을 사랑합니다.”
누구에게 마음이 있든 없든, 누구의 것이든 아니든, 당하는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든 그딴 건 전혀 관심 없었다. 관심이 있는 건 그의 몸이고 그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쾌락이었다. 애초에 다른 여자를 생각하면서 엉망으로 당하는 미남이라는 것도 꽤 별미일 것 같고…. 업둥이 같은 존재이긴 하지만 이제 다니엘 스톤하츠도 그들의 일원이 되었으니 억지로 손을 대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은 짓이다. 한민유는 그렇게 가볍게 마음을 접고 다른 옵션으로 관심을 옮겨갔다.
“흠…. 이스트드래곤….”
한민유는 잠깐 생각을 해보며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녀가 ‘아’ 하면서 그를 돌아보았다. 역시 고르려면 제일 좋은 걸로 골라야지.
“신태호가 몇 살이죠?”
“열여덟 살입니다. 며칠 전에 생일은 지났습니다.”
“아, 그럼….”
“신태호로 하시겠습니까?”
다니엘이 곧바로 그렇게 묻자 한민유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이스트드래곤에서는 선수가 포주 짓도 하나요?”
“…….”
이제껏 여기저기에 신태호를 많이도 팔아먹었던 다니엘이라 반박하지 못했다. 한민유는 흥미로운 눈길로 다니엘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래서 난 그 열여덟 살짜리 값으로 뭘 지불하면 되나요?”
“…어떤… 남자에 대해서 조사를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누군데요?”
“해주실 겁니까?”
“신태호에 카흐 밀란, 치엔이 루카스도 끼워 주세요.”
“알겠습니다.”
“정말 되는 거예요?”
“신태호는 제 말이라면 다 듣고 밀란이나 루카스는 여자라면 눈이 돌아가는 놈들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덧붙였다.
“근데 루카스는 여자에게 손버릇이 나쁘기로 유명합니다. 괜찮겠습니까?”
“그런 건 제가 알아서 해요. 그래서 누구를 조사해달라구요?”
한민유는 그깟 거 별거 아니라는 투로 다니엘의 경고를 무시했다. 그도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다니엘은 디바이스를 켜서 사진을 띄웠다. 세련된 모던 대저택의 앞에 서 있는 꿀 같이 탐스러운 금발을 가진 미남이었다. 한민유가 감탄했다.
“이 남자를 초이스하고 싶은데요?”
“이름은 에반 블랙입니다.”
스토커는 몰래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그렇게 말했다.
*
“…….”
티끌 하나 흐트러지지 않게 묶인 구두의 매듭, 칼 같이 다려진 바지선, 셔츠, 베스트, 상의, 글래머러스한 넥타이, 깔끔하게 넘긴 머리, 엘리트적인 느낌을 더욱 강화시키는 안경까지. 거기에 데칼코마니를 찍은 듯 반대편에 앉아 있는 남자도 비슷하게 격식을 차린 옷차림이었으나 검은 슈트를 입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밝은 아이보리 색 수트에 번쩍번쩍한 골든 블론드, 그리고 비취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안경도 끼지 않았다.
“EB 뱅크에서는 최고경영자 리스크에 대해 선진적으로 대응합니다. 한 달 전 회사의 입장에서는 전혀 불필요한 언론전으로 인해 사장님께서 공산당 보위부의 주목을 받은 상태입니다. 차후 중국 시장에서 유무형의 피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알고 계시죠?”
“…설마 일이라는 게….”
겨우 입을 뗀 송선호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맞은편에는 에반 블랙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여기는 송선호의 집이었다. 고급스러운 아이보리 색을 기반으로 한 아름다운 집 내부에 샹들리에, 예술품들. 마치 자기 안방처럼 그에게 어울렸다. 그는 멀티스크린으로 홀로그램을 띄었다. 송선호의 코앞이다. 채무계약서의 한 페이지였다. 유사시 이율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를 나타낸 계약 조항이다. 요즘 은행이란 것들이 얼마나 악랄한 지 생각해보면 이런 건 당연한 것이었다.
“담보도 있고 회사가 연대 보증이 되어 있는 상황이고 개인 자산 상황도 유동성이 부족하긴 하지만 부채보다 자산이 더 많은 상황이니 경영자 리스크에 의한 패널티는 1단계 그칠 예정입니다만 앞으로는 좀더 조심해야 할 겁니다. 그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이율이 0.01% 더 올랐다. 빌린 금액을 생각해보자면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계약 조항에 있는 것이라 어쩔 수 없다. 송선호는 옆에 있는 변호사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가 그가 내민 종이에 사인했다. 그리고 한숨을 푹 쉬었다. 한 장은 변호사가 챙기고 한 장은 저쪽이 들고 갔다. 종이를 받아 들고 확인을 한 에반 블랙은 씨익 웃었다.
“바보 아냐?”
송선호는 이를 꽉 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여행에 출발하기 직전에 EB 뱅크에서 사람이 오자 우뚝 서 버린 송영제가 멀찍이서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지연은 처음엔 그의 등을 치면서 그냥 가자고 했으나 방문자의 얼굴을 보고는 ‘어머’ 하고 멈춰 섰다.
“보위부? 젠장, 얼마 전에 우리 회사도 어디서 해킹 들어왔는데 그것도 저것 때문인 거 아냐?”
송영제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온오프라인 물류회사를 가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얼마 전 생긴 지중해 게이트로 동유럽 및 중동 쪽 지사들이 철수하기까지 했는데 아들이 중국 공산당의 코털을 건드렸다는 거 아닌가.
“어머….”
“…근데 여보는 왜 그래요?”
송영제는 자신의 팔을 잡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아내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곧장 아들의 앞에 앉아 있는 미끈하게 빠진 젊은 금발머리에게 꽂혀 있었다.
“실물이 훨씬 더 잘생겼다. 어머, 어머.”
“왜 그래? 아는 남자야? 어떻게 알아?”
송영제가 추궁했다. 지연이 그의 등을 팍팍 두드렸다.
“도현이 전남친이래.”
“뭐?”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다시 에반 블랙을 보았다. 송영제는 알만 하다는 눈길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결혼부터 해야 한다니까.”
그가 한심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지연이 그를 돌아보았다.
“어머, 당신 왜 멀쩡한 애 발목 잡는 얘기를 해?”
“왜? 도현 씨한테 무슨 문제 있어?”
“아니, 왜 도현이 발목을 잡냐고.”
“응? 왜? 우리 선호가 뭐가 어때서?”
지연은 대문 밖으로 나갔다. 사용인들이 캐리어를 들고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송영제는 얼른 그녀를 따라갔다.
“설마 당신도 나한테 발목 잡혔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계속 그랬던 거야? 응? 왜? 내가 그렇게 잘못했어?”
“빨리 차에나 타.”
그렇게 지연과 송영제는 여행을 떠났다. 송선호는 거기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저 양아치 새끼가 다시 도현을 만나러 온 것뿐만 아니라 지금 송선호의 집까지 쳐들어온 상황인데, 그게 다 송선호 본인이 자초한 상황이라는 거 아닌가. 그 일 때문에 도현에게 뺨까지 맞았는데 이렇게 두고두고 그를 괴롭히게 될 줄이야.
해야 할 일을 처리한 에반은 시선을 돌려 집을 한 번 둘러보았다.
“좋은데? 도현이가 좋아하겠네.”
“그래서, 언제 돌아가는데?”
“어딜?”
“언제 한국 나가냐고.”
송선호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에반은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재미있다는 듯이 그를 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도현을 떠올리게 해 송선호를 매우 심란하게 했다.
“글쎄.”
‘’글쎄’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언제 꺼지냐고, 이 양아치 새끼야!’
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구겨진 인상이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송선호는 손짓을 해서 변호사를 내보냈다. 그는 일단 마음을 차분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양복 상의의 단추를 풀며 카우치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그는 바뀐 것 같으면서도 전혀 바뀌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조금 어른스러워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전에는 클래식한 정장을 입고 다니는 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저러고 있으니 좀 일을 하는 남자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점이 좀 더 송선호의 마음을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꿰뚫어 본 것처럼 에반이 물었다.
“염원대로 도현이랑 사귀니까 어때? 행복해?”
“넌 신경 꺼.”
털을 확 곤두세울 뻔했던 송선호는 그렇게 겨우 목소리를 깔았다.
“안 그래 보이던데.”
에반 블랙이 메트로서울로 와서 도현을 만나러 왔을 때 하필이면 집 안은 난장판이고 그 가운데 송선호는 울고 있기까지 했다. 송선호는 인상을 쓰며 시선을 돌렸다. 몇 초 뒤 에반이 먼저 말을 걸었다.
“어떻게 하면 도현이가 좋아하는지 가르쳐줄까?”
“시끄러. 네가 뭔데….”
송선호가 발끈해서 그를 노려보았으나 에반은 테이블 위로 상자 하나를 올려서 송선호 쪽에 밀었다. 송선호는 그것이 테이블에서 떨어지기 전에 잡았다.
“뭐야?”
“그거 주면서 그녀에게 ‘넌 다 가질 수 있어’라고 속삭여 봐.”
에반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대문으로 걸어갔고 송선호는 그와 검은 상자를 번갈아 보다가 상자를 열어보았다. 물방울 모양으로 커팅된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달린 목걸이었다. 경매소 보증서, 감정 보증서까지 딸린 착실한 진품이었다.
송선호는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그를 쫓아갔으나 그는 이미 차를 타고 가버린 후였다.
*
도현은 6월 하면 테니스 대회부터 생각이 났다. 도현 킬스버그와 로웰 리, 어시들, 지니 호의 크루, 각자의 지인들, 기타 인원을 포함 총 64명의 인원이 참여하는 <메트로서울 오픈>, 도현과 지인들이 주최하는 아마추어 테니스 대회가 2128년 6월 둘째 주 토요일부터 시작한다. 토요일에 16경기, 일요일에 16경기를 치룬다. 경기장은 도현과 메트로서울 오픈 멤버 여럿이 다니는 과천구에 위치한 A파크 테니스장이다. 코트가 16개 이상이라 적격이었다. 멀리 게헨-세나가 보인다. 도현은 이번 주부터 주말을 모두 테니스 치는 데 소요할 예정이었다.
“언니~ 오랜만이에요.”
“도현~ 오랜만이야.”
“오늘 잘 부탁해요.”
“안 봐줄 거야.”
“하하하.”
도현은 어떤 사람과 포옹하며 인사했다. 짧은 투블럭 헤어스타일에 그녀보다 키가 좀 더 큰 까무잡잡한 피부의 여자였다. 사람이 32명이나 모이니 바글바글했다. 거기에 그들의 지인이나 코치, 심판, 볼키즈까지 합치면 200명에 가까운 규모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오늘 16게임, 내일 16게임으로 64강을 치르고 다음 주는 32강, 이런 식으로 토너먼트를 한다. 테니스 케이블 채널에서 취재를 하러 오려고 했지만 거절했다. 하지만 재정 상황이 넉넉한 메트로서울 오픈 동호회 회원들에게 광고를 하기 위해 몇몇 부동산 광고, 운동 회원권, 크루즈쉽 광고, 마사지샵 광고 팸플릿이 도처에 쌓여 있었다.
사라나 퀸은 벌써 저쯤에서 연습 삼아 공을 치고 있었다. 도현은 오늘 짙은 네이비색에 목 칼라에는 빨강색 줄이 있는 H라인 테니스복을 입었다. 테니스 선캡도 착용하고 머리를 높게 묶었다. 아까 인사한 사람은 나오미라는 사람으로 오늘 그녀의 상대였다. 몇 년 전 발리인가 홍콩에서의 파티에서 만나 친해지게 되었다.
“연습한 대로만 하면 됩니다, 킬스버그 씨. 나오미 씨는 위기 상황에서 더 실력이 좋아지시니까 이기고 있다고 방심하지 마시구요. 나오미 씨가 키가 더 크고 팔도 길어서 방어 면적이 더 넓은 것도 유념 하시구요.”
도현의 테니스 강사인 짙은 갈색 머리에 밝은 미소를 가진 미남이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선캡이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다시 세심하게 조정해주었다.
“몇 달 열심히 해서 그래도 체력은 좀 좋아졌는데. 그래도 작년에 쉬어서, 참. 바로 지는 거 아니야?”
도현이 걱정스러운 한숨을 쉬며 준비 운동을 했다. 미남 강사는 그녀의 스트레칭을 도왔다. 그녀의 몸 여기저기를 누르고 당겨주며 브루넷의 미남 강사는 미소 지은 얼굴로 대꾸했다.
“아니에요. 킬스버그 씨 정말 잘하시는걸요. 특훈의 효과가 있을 거예요. 우리 정말 열심히 했잖아요.”
“그렇겠지?”
그들은 아까 전부터 저~기에서 레이저 빔이라도 나올 것처럼 노려보고 있는 남자들을 무시한 채 준비 운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우리? 우리이~?! 언제부터 저런 싼 티 나는 새끼랑 ‘우리’ 소리가 나올 짓을 한 거냐고, 어?!’
그녀가 예전부터 테니스에 미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주최하는 일명 <메트로서울 오픈>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한국에서도 테니스는 생활 체육으로 인기가 높았다. 그래도 TV 중계나 관람이 크게 인기 있는 것은 아니라 큰 테니스 대회가 열리거나 할 때는 잘 없으니 그대로 이름도 등록했다고 한다. 와보니 의외로 규모도 커서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역시 그녀가 한때 아주 잘나갔다는 티가 이렇게 난다.
출근했다가 온 것인지 반듯한 머리에 얇은 테의 안경을 쓰고, 각이 딱 잡힌 흰색 셔츠, 그 위에 억대를 호가하는 키톤의 회색 쓰리피스 정장을 입고, 고급스러운 남색 하프윈저 넥타이, 금색 넥타이핀, 살짝 드러나는 깔끔한 행커칩, 금색 테두리를 가진 진주색 커프스링크를 하고, 또 억대를 호가하는 시계를 차고, 반짝이는 검은색 남성 구두를 신은 송선호는 관중을 위해 마련된 플라스틱 의자의 팔걸이에 한쪽 팔과 몸무게를 기대고 삐딱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저 남자는 처음부터 제거했어야 했다. 저 남자는 처음부터 죽여버렸어야 했어.’
그는 처음부터 저 강사를 싫어했다. 도현의 테니스 연습을 저 강사만큼이나 도와줬던 다니엘 스톤하츠는 당연히 메트로서울 오픈의 스케줄을 훤히 꿰고 있었다. 그녀에게 ‘기다려’라는 명령을 들은 지 3주가 다 되어간다. 다니엘은 숱한 자기합리화 끝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도현을 보고 싶은 것은 부정하지 않겠지만 그는 도현뿐만 아니라 로웰과 어시들의 테니스 연습도 잘 도와주었다. 다니엘이 도현을 보고 싶은 건 맞지만! 오늘은 그들을 보러 온 것이다. 그러면 그건 괜찮은 거 아닌가? 들어오는 길 내내 안면이 생긴 사람들과 인사하면서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다. 도현 킬스버그도 그가 들어오는 것을 봤지만 그다지 쓸데없는 주목을 끌고 싶지는 않은 것인지 무시했다.
매끄럽고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 미켈란젤로가 세심하게 깎아내린 것 같은 아름다운 얼굴, 도톰한 입술, 보석 같은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미남, 다니엘 스톤하츠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속에 부정할 수 없는 정념을 품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니엘이 있는지도 몰랐던 송선호였지만 이윽고 그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조금 놀랐지만 도현에게 무시를 당하는 것을 보며 은근한 우월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현재 두 남자 모두 도현이 움직이는 대로 시선을 옮기면서 못마땅한 기색을 팍팍 내거나 아니면 그걸 겨우 숨기고 있었다.
“좀 더 숙이시구요.”
“으음.”
도현이 바로 선 채로 앞으로 몸을 숙여 땅에 손을 대는 자세를 하니 그녀의 테니스 원피스가 딸려 올라가며 매끈한 허벅지가 스르륵 드러났다. 거기에 그 브루넷의 미남 강사는 그런 그녀의 허리를 잡고 등을 눌러주고 있었다.
‘야, 이…!!’
‘죽여 버린다….’
그때 그런 두 남자 사이에 있는 통로로 누군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손을 흔들었다.
“도현아~~ 스트레칭 내가 도와줄게~!”
빛나는 플래티넘 블론드! 환한 아이스 블루의 눈동자! 흰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어도 쭉쭉빵빵인 그 남자, 미르 킹쉴드가 나타났다. 그제야 도현이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미르~”
그는 난간을 훌쩍 뛰어넘어 그녀에게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의 허리를 번쩍 들어서 공중에 한 바퀴 휘 돌렸다가 껴안았다. 사람들이 전부 그들을 쳐다보았다.
“하하하하, 미르~ 오늘 시간 안 되는 거 아니었어요?”
“응? 우리 도현이 내가 응원 안 하면 누가 해? 당연히 와야지.”
“잘했어요.”
그녀는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도현은 미르 킹쉴드의 단단한 팔에 들린 채 그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그러니 스트레칭은 고사하고 그들에게 사람들이 우르르 모였다.
“미르~”
“어, 너도 오늘 하냐?”
“응~”
서연이 폴짝 뛰어 그의 다른 쪽 어깨에 매달려 뺨에 입을 맞췄다. 시즈카나 신재인이나 아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호기심과 호감을 잔뜩 담은 눈빛으로 다가오는 다른 여자들도 많았다.
“와, 미르 킹쉴드…. 직접 보니까 더 잘생겼네요.”
“어깨 좀 봐.”
“나? 이거? 당연하지!”
“어쩜~”
그대로 거기만 아주 꽃밭으로 웃음꽃이 만개했다.
“…….”
“…….”
그녀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관중석에 얌전히 앉아 기다리고 있던 남자 둘의 인상이 몹시나 칙칙해졌다.
“응원 열심히 해요?”
“응~ 알았어.”
도현은 미르의 뺨에 입을 쪽 맞춰주었다. 그도 도현의 입술에 쪼오옥 입을 맞추고는 관중석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다니엘 스톤하츠와 송선호를 발견한 미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왔었냐? 너도?”
그는 다니엘 스톤하츠를 한 번 더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때 그날 이후로 얼굴 한 번 마주친 적 없는데 참 유감 하나 없는 표정이다. 더 배알이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미르는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도현과 눈이 마주치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 도현도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들어주었다.
곧 경기가 시작했다. 도현의 코트에는 볼키즈 두 명과 인공지능 심판이 붙었다. 동전 던지기를 하여 선공은 도현이 잡았다. 3세트 2선취, 1세트는 6게임을 먼저 따는 사람이 가져갔다.
아까 인사했던 도현의 상대는 간단하게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도현보다 면적이 좀 더 넓은 라켓을 쥐고 있었다. 그녀는 라켓을 휘리릭 한 번 손 위에서 굴렸다. 도현은 베이스라인 바로 바깥에 서서 서브를 하기 전에 한 번 공을 바닥에 튕겼다.
“도현아, 잘해~!”
미르 킹쉴드가 응원했다. 도현이 그를 돌아보며 ‘쉿’ 하고 검지를 입 앞에 댔다. 미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송선호를 돌아보았다.
“떠들면 안 돼?”
“테니스는 귀족 스포츠야. 엘 드라카랑 같은 줄 알아? 조용히 해.”
송선호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 미르는 의아한 눈으로 가만히 난간에 양팔을 대고 거기에 얼굴을 올리고 구경했다. 테니스라는 걸 접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경기 규칙도 모른다. 관중이라는 건 항상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불러서 선수들의 기세에 보탬이 되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도현이 왼손으로 공을 위로 올리며 서브를 넣었다. 나오미가 받아치며 공이 약간 높게 뜨자 도현은 한 번 그라운드에 튕기고 천천히 떨어지는 공을 빠르게 왼쪽 구석으로 찔러 넣었다. 상대는 훌쩍 뛰어 그것을 방어했다. 다시 공이 좀 떴다. 도현이 그걸 스매시로 강하게 오른쪽 구석에 찔러 넣었다. 나오미가 그것 받지 못했다. 스코어는 15:0.
“Yes!”
도현은 큰 소리는 내지 않고 주먹을 쥐며 기뻐했다. 송선호와 다니엘이 천천히 박수를 쳤다. 그러니 미르도 그걸 보고 따라서 박수를 쳤다.
그때 통로에서 꽃다발을 하나 든 남자가 들어왔다. 내일 경기를 할 회원들, 구경을 하러 온 지인들, 테니스 강사 등등의 눈이 저절로 돌아갔다. 안 그래도 눈에 확 뛰는 남자 셋이 앉아 있는 곳 주위를 훤히 비워 두고 다들 멀찍이 앉아 있었는데 그 한 가운데로 화려한 남자 하나가 나타난 것이다.
밝은 베이지색 바지, 고급스러운 벨트, 가슴까지 단추를 푼 예쁘게 모양이 잡힌 셔츠를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도 별다른 걸 하지 않았는지 바람에 자연스럽게 흔들렸다. 그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고 잠깐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에반 블랙이 나타나자 송선호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고 다니엘 스톤하츠는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였으며 미르 킹쉴드는 미간을 좀 찌푸렸다. 에반은 미소로 그들의 시선에 대꾸하고는 다니엘 쪽 의자 중 하나에 앉았다.
‘아, 저 새끼 마음에 안 들어. 아~ 왠지는 모르겠는데 존나게 마음에 안 들어~’
‘씨발…. 저 양아치 새끼가 여기까지…. 설마 다시 만나는 거야? 그런 건 아니겠지? 아니지?!’
‘한 비서관이 보낸 파일에서 본 게 사실이라면… 저 남자도 도현 씨에게 그다지 좋은 남자는 아니다.’
‘예전엔 분명히 나오미가 더 잘 쳤는데. 이기면 꽃다발만 주고 지면 다른 것도 같이 줘야겠다.’
미르 킹쉴드, 송선호, 다니엘 스톤하츠, 에반 블랙 순으로 좌에서 우로 나란히 앉아 있었다. 도현 킬스버그를 응원하기 위하여 드디어 한자리에 모인 네 남자였다.
*
6게임을 먼저 선취한 도현이 1세트를 따냈다. 도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땀이 주르륵 흘렀다. 도현은 예의 미남 강사가 건네주는 새하얀 수건으로 얼굴을 눌러 닦고 이온 음료로 살짝 입을 축였다.
“잘 하네. 잘 한 거지?”
미르가 난간에 기대어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도현이 웃었다.
“응원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아요?”
“당연하지.”
로웰은 옆 코트에서 다른 사람과 붙고 있었다. 테니스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첫 게임에서 광탈 할 것 같다면서 걱정했으나 현재 게임을 4:3, 스코어는 30:15로 리드하고 있었다. 잠깐 그것을 보던 도현은 90초의 쉬는 시간이 끝나고 다시 경기로 돌아갔다. 라켓과 볼을 새 걸로 바꿨다.
1세트에서 10게임을 한 도현과 나오미였다. 도현이 서브권을 다시 가져갔다. 도현은 오른편 베이스라인 뒤에 서서 그대로 서브를 넣었는데 라인을 밟아 폴트가 선언되었다. 도현은 다시 심기일전하여 서브를 날렸다. 왼쪽 서비스 코트에 정확하게 들어갔다. 나오미가 그라운드에 바운스 된 볼을 다시 도현의 코트로 넘겼다. 초반에는 서브를 넣은 사람이 게임을 주도한다. 도현은 다시 그 공을 받아 쳤다. 볼은 상대편 코트의 중앙으로 들어가고 나오미는 정확히 그것을 도현의 왼편 사이드라인에 꽂았다. 도현이 서브한 게임을 나오미가 따낸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은 나오미의 서브로 엄청난 속도로 도현의 오른편으로 꽂아서 받아 쳤지만 네트를 넘지 못했다. 2세트는 순식간에 30:0으로 나오미의 리드였다. 나오미는 1세트를 끝내고 몸이 풀린 얼굴로 잠깐 폴짝폴짝 뛰었다.
“케이지라고? 마사지 같은 거 안 받는데? 그거 얼마짜리야?”
나오미가 물었다. 프로 경기면 서로 이야기는 엄금이겠지만 아마추어니 크게 문제 될 건 아니다. 도현이 공을 치며 대꾸했다.
“3천만 원 넘는 거예요…!”
다시 도현의 서브였다. 근데 이번에는 힘이 좀 약하게 들어갔는지 바로 읽혔다. 가운데로 들어간 공을 나오미가 도현의 왼편으로 빠르게 꽂았다. 못 따라갔다. 그대로 2세트는 6:2, 나오미의 리드로 끝났다.
“와…! 언니 연습 안 했다고 했으면서!”
도현은 나오미의 공격을 따라간다고 이리저리 뛰다가 체력이 벌써 방전되었다. 그녀는 무릎을 짚고 잠시 숨을 골랐다. 나오미가 씨익 웃었다.
“이런 건 타고 나는 거야.”
“아! 진짜!”
사라도 퀸도 그렇고 그녀보다 키도 크고 체격 조건이 좋은 사람들은 이길 때마다 항상 그렇게 그녀를 놀렸다. 내가 진짜 운동 더 한다! 그녀의 미남 강사가 다가가서 도현에게 코칭하기 시작했다.
“백핸드를 노려야 해요, 백핸드. 서브 넣을 때는 무조건 오른쪽 멀리로 꽂고 받아칠 때도 최대한 오른쪽으로 꽂아요. 라인 걱정하지 말고. 알았죠?”
“알았어.”
여기서 질 순 없다. 동호회는 언제나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서 회원별로 실력이 천차만별이었다. 운동을 많이 할 수 있는 여건의 사람들이 많았지만 간혹 그들도 일이 바빠지면 빠지거나 해서 연습을 많이 하지 못하고 경기에 출전하기도 한다. 나오미는 한동안 사업에 바빠 연습을 거의 못 했다고 들었는데도 원래 잘 치고 체력도 좋다 보니 잘했다. 도현도 작년은 대회를 빠지고 얼마 전까지 연재한다고 바빠서 연습에 열중하지 못했다.
“지는 거야?”
룰은 잘 몰라도 누가 이기고 지는지는 눈에 훤히 보이는 법이다. 미르가 그렇게 중얼거리니 에반이 대꾸했다.
“어쨌든 눈 마주치면 웃읍시다.”
안 그래도 지고 있는데 남자들까지 칙칙하게 울상이면 보기 싫을 것 아닌가. 그때 귀신같이 도현이 한 번 관중석을 돌아보니 에반은 미소를 지었고 송선호는 말없이 복잡한 표정이고 다니엘은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미르는 난간에 붙어서 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지는 거 싫어. 이겨.”
“이길 거예요.”
도현은 심기일전에서 3세트에 임했다. 강사 말대로 열심히 오른쪽 코트로만 볼을 치니 나오미의 라인 아웃이나 실수가 많아졌다. 그대로 5:5까지 갔고 나오미가 1게임을 먼저 얻어 5:6, 그 다음에 도현이 다시 이겨 6:6, 타이 브레이크로 들어가 마지막 게임에서 도현이 8:6 스코어로 겨우 이겼다. 그러자 나오미는 아쉬워서 ‘3천만 원!’이라고 소리치며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고 도현은 힘들어서 죽으려고 했다.
“아, 더는 못 해.”
“오! 작가님 이겼어요!”
1세트는 서로 비등비등하게 했지만 단기간의 특훈으로 폼을 확 올린 로웰이 비기너를 상대로 2세트를 내리 따내 승리했다. 그녀는 쉬면서 도현의 경기를 보고 있었다. 로웰은 기뻐하며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박수 소리가 들리면서 응원을 하던 남자들도 내려왔다.
“축하해.”
에반이 웃으면서 그녀에게 꽃다발을 안겼다.
“토할 것 같아.”
“이길 줄 알았어.”
“고마워. 오늘은 안 바빠?”
“주말이잖아.”
도현은 진이 다 빠진 얼굴로 꽃다발을 받았다. 송선호는 강사에게서 새 수건을 빼앗아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물부터 마셔.”
“오! 이겼어.”
미르와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남자들이 다들 한 덩치를 해서 시야가 확 좁아졌다. 도현은 이온 음료를 마시며 시선을 돌리다가 다니엘을 발견했지만 그냥 입을 다물 뿐이었다. 그도 섣불리 다가오지는 않고 로웰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그는 로웰에게 음료를 건넸다. 그녀도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스톤하츠 씨가 가르쳐준 스킬 잘 먹히더라구요. 역시 못 하는 게 없어.”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대단하신 거죠. 이렇게 단기간에 이 정도로 잘 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가? 아하하하!”
“대단하십니다. 어렸을 때부터 배우셨으면 프로를 하셔도 됐을 겁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살뜰하게 로웰을 치켜세웠고 그녀는 아주 좋아했다. 도현은 잠시 그런 그를 보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마치 딸을 얻어 가기 위해 장모님에게 점수를 따려는 남자 같지 않은가. 어쨌든 그가 로웰이나 다른 식구들에게도 헌신적이었던 건 사실이다. 저런 그를 매몰차게 대하는 것은 로웰이나 다른 어시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 것이다. 도현은 그를 무시하기로 했다.
“이겼는데 파티 안 해?”
도현을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미르 킹쉴드였다. 에반 블랙까지 나타나니 그는 또 본능적으로 다른 수컷들을 경계하는 배타성을 드러냈다. 벌써 송선호나 다니엘에게는 이긴 지 한참이라고 여기고 있는 그였으니 결국 새로운 수컷만 경계하면 되는 것 아닌가? 무엇보다도 에반 블랙이라는 놈은 금발에 백인 남자이고 잘생겼고 몸 좋고 돈도 많아 보이고 옷도 잘 입고 여자에 대해서도 잘 아는 것 같았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건 여자들이 아주아주 좋아하는 스펙이다. 미르 킹쉴드도 아주아주 흡족하게 만족시키는 조건들이라 잘 알았다. 그렇게 관찰하고 있으니 에반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고 미르는 그런 그가 껄끄럽다고 생각했다. 그는 도현에게 눈길을 돌렸다.
“나도 뭐 사 올 걸 그랬나? 빨리 온다고 아무것도 못 사 왔어.”
미르가 그렇게 말하니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미르가 이렇게 와준 것만으로도 기뻐요.”
“정말?”
“네.”
미르는 기분이 좋아졌다.
‘뭐, 당연히 내가 더 힘도 셀 거고. 내가 더 어리고!’
그리고 그는 곧장 자신이 저 미끈하게 생긴 놈보다 나은 조건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역시 자신이 최고인 것이다. 그는 도현의 허리를 끌어안고 싱글벙글 웃으며 바비큐장으로 함께 갔다. 자연히 다른 여자들도 주변에 줄줄 달렸다.
송선호는 그걸 보고 한숨을 한 번 쉬더니 그냥 도현의 짐을 챙겼다.
“이게 답니까?”
“아, 여기 도현 씨 지갑이랑 디바이스요.”
송선호는 강사가 챙기고 있는 것까지 싹 빼앗았다. 그는 자신의 디바이스를 보며 경기중에 온 메시지를 확인하며 도현을 따라갔다.
“에반, 오랜만이야. 도현이랑 다시 만나는 거야?”
잠깐 그 모든 걸 가만히 보고 있는데 누군가 에반에게 말을 걸었다. 나오미였다. 그녀는 자신의 짐을 챙기고 바비큐 장소로 향했다. 에반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을 걸었다.
“도현이는 전남친이라고 말하던데요. 아쉽게 졌어요.”
“아, 그렇지. 3천만 원 아깝다.”
나오미가 쩝 하고 한 번 입맛을 다셨다. 무리를 따라 테니스장 밖으로 나갔다. 나오미가 말했다.
“확 뺏어버려. 너랑 도현이 꼭 맞춘 것처럼 잘 어울렸는데.”
“도현이 마음이죠.”
“음, 뭐 저기 양복 입은 남자야 몰라도 나머지는 그, 엘 드라카 선수? 야만적이잖아. 도현이랑 만나기엔 너무 격이 떨어지지 않아? 보기는 좋아도?”
그녀는 에반의 기분을 신경 쓴 것인지 그렇게 말했다. 그는 짧게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그렇지만도 않아요. 저기 긴 머리는 다니엘 스톤하츠라고 하는데, 좀 있으면 베이징 대학 졸업하고 물리학 대학원으로 들어가요. 똑똑하더라구요.”
그 얘기는 어디서 들었는지 에반이 술술 말했다. 그러자 나오미가 로웰과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고 있는 다니엘 스톤하츠의 매끈한 뒷모습을 보면서 탄식 비슷한 소리를 냈다.
“아, 마도사야? 마도물리학자였어? 그러면… 무섭지. 이번에 사우디 일 봤잖아. 이번에 그 학회 미국지부랑 경호업체 연결해준 거 나거든. 과학기술국 아는 사람이 경호업체 입찰하고 싶다고 하길래 밑에 있는 용병단 중에서도 잘 하는 곳으로 붙여줬는데 완전 큰일 날 뻔했어. 원망 들을 뻔했다니까.”
“이스라엘에 용병 보내준다고 미국에서 많이 샀을 텐데. 돈 좀 버셨겠네요?”
“아, 뭐. 그것 때문에 좀 바빴지. 넌?”
“은행일 때문에 바빠서 직접 챙기지는 못했는데 남유럽이랑 북아프리카 쪽으로 해서 2~3만은 팔았어요.”
“그래, 너희 은행은 이제 빨리 빨리 팔아버리는 게 더 낫지. 가까운 데 게이트 생겨서 채권 유동화하기는 딱이겠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응? 너 수에즈 프로젝트에 연구비 대주지 않았어? 난 또 알고 한 줄 알았네.”
“하하.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 학회 사람들도 몰랐을 텐데.”
“에이, 그 사람들은 그냥 자기 연구밖에 관심 없잖아. 다른 게이트 하나 더 생기든 말든 뭔 상관이냐 할 텐데.”
“아, 그 사람들 그런 건 무섭죠. 여차하면 도움받게 EU도 줄 좀 잘 대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 또 난민 때문에 골 터지겠네.”
그렇게 에반은 나오미와 얘기를 나누며 바비큐 장소로 갔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가서 보니 송선호는 차라리 일하자는 마인드인지 체념한 얼굴로 요리를 해서 접시를 나르고 있었고 미르는 여느 때와 같이 도현에게 딱 붙어 여자들에게 둘러싸여서 먹고 마시고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도현을 차마 보지도 못하고 로웰하고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에반은 나오미와 헤어져 도현의 테이블에 남은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이 큰 데다가 사람도 많아서 굳이 그녀와 이야기를 하겠다고 번잡하게 굴지는 않았다. 그는 와인을 따랐다. 이런 자리이니 최상급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마실 만한 와인이 있었다. 부르고뉴 레드 잔에 담긴 빨간 와인을 잠시 흔들었다. 곧 송선호가 옆에 앉았다. 그는 앉으면서 자연스럽게 상의 단추를 풀었다. 에반은 굳이 그에게 눈을 돌리지는 않았다. 송선호는 온더록 잔에 브랜디를 한 잔 따라 가져왔다. 그는 신경질적인 얼굴로 에반에게 말을 걸었다.
“도대체 뭐야?”
“뭐가?”
“그 목걸이.”
“도현이 거야.”
“그걸 왜 나한테 줘? 직접 주던가.”
송선호는 목소리가 높아질 뻔한 걸 참으며 그렇게 말했다. 에반이 웃었다.
“내가 직접 줘도 괜찮겠어?”
그 말에 송선호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에반은 뭐가 그렇게 웃긴 것인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었다. 마치 그녀처럼. 그녀가 송선호를 곧잘 관찰하고 속을 읽어내는 것처럼 이 새끼도 그에게 그러는 것 같았다. 감히….
“미련이 남은 건 너지.”
송선호는 그렇게 말했다. 에반이 물었다.
“그래 보여?”
“안 그러면 여기까지 왜 와?”
“…맞는 말이네.”
에반이 순순히 그렇게 대꾸하자 송선호는 어쩐지 더 부아가 치밀었다. 그는 아주 부드러운 눈길로 도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르 킹쉴드와 함께 음식을 먹으며 웃고 있던 도현이 우연찮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에반은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송선호는 웃지 못했다.
“다시 도현이에게 수작 부릴 셈이야? 나쁜 거나 알려주면서?”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송선호는 그렇게 물었다. 에반은 또 웃었다. 그의 말이 뭐가 웃기다고 계속 웃는단 말인가? 짜증이 난다.
“너 같은 양아치 새끼 잘 알지. 근본도 없고 철 따라 여자나 바꾸고 책임감 같은 거야 하나도 없겠지. 너랑 헤어지고 도현이가 어떻게 됐는지 알기나 해?”
“…….”
“도현이한테 다시 헛바람 넣으면서 꼬드길 생각 꿈에도 꾸지 마라. 예전이야 모르겠지만 이제는 절대 못 하게 할 거니까.”
에반은 잠시 도현에게서 눈을 떼고 송선호를 쳐다보았다.
“네가 그렇게 발 동동 굴리면서 걱정하는 거 도현이는 알아?”
그리고 그는 송선호가 대꾸하기 전에 자문자답했다.
“음, 도현이는 그런 거 알아주는 스타일은 아니지. 그랬으면 지금 도현이 옆에 앉아 있는 건 저 금발 머리가 아니라 너였겠지.”
송선호는 입을 다문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원하는 걸 해줘. 가르쳐줬잖아? 가르쳐줬는데도 왜 못해?”
송선호는 부글부글한 얼굴로 이를 갈았다. 가르쳐주기는 뭘 가르쳐줘, 이 개 같은 새끼가…! 게다가 저 말은 언젠가 도현이 했던 말과 거의 똑같아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송선호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를 전혀 바꿀 수가 없었는데 이 남자는 그녀에게 그렇게나 큰 영향을 끼쳤단 말일까? 화가 난다. 입을 열면 큰 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참았다. 여기는 공적인 장소였다. 도현에게 피해를 끼칠 것이고 자신의 평판에도 좋지 않았다.
“그럼 네가 해주지 왜 그걸 나한테 주냐고.”
송선호는 한 자 한 자 끊어 말했다. 에반은 한숨을 쉬었다. 그것도 모르냐는 투였다.
“그녀가 부담스러워할 거야.”
“그러면 그냥 가만히 있지 왜 나한테 그걸 떠넘겨?”
“그래도 주고 싶은 걸 어떡해. 네가 주면 받을 거 아냐. 어디서 주웠다고 하든가. 그런 거 잘할 거 같은데. 좋아할 거야.”
“…그런 짓을 왜 해?”
송선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에반은 다시 도현을 바라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사랑하니까.”
*
과로, 스트레스, 피로 등의 이유로 탈이 난 다니엘 스톤하츠는 결국 훈련에서 제외되어 요양에 들어갔다. 그는 링거를 맞고 도쿄돔의 의무실에 누워 있었다.
다니엘은 실연과 상사병으로 마음을 끙끙 앓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절망감만 깊어질 뿐이었다. 자기합리화나 정신승리도 하루 이틀이다. 매정하게 무시하는 눈길을 받을수록 마음을 다쳐갔다. 그는 저번 주말에도 메트로서울 오픈에 로웰을 만나러(그러니까 도현을 보러) 갔으나 도현은 그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분명히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전처럼 그녀가 꾸짖어주고 화라도 냈으면 좋겠다. 그녀는 정녕 그를 잊은 것일까. 그에게서 마음이 영영 떠난 것일까? 그라는 존재는 그녀에게 단 한 톨의 아쉬움도 불러일으키지 못할 만큼 하찮은 것이었나? 그때 그녀의 탓이라고 한 것이 그녀에게는 비난으로 들렸던 것일까? 앞으로는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해지겠다고 그녀에게 말했기에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 생각했다. 분명히 그녀는 ‘알겠다’고 했다. 그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말이었을까?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이대로 영영 안녕이 되는 것은 아닐까? 계속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끔 속에서 무언가 울컥 튀어나올 것처럼 초조해졌다. 다니엘은 링거를 맞은 채 마네킹처럼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다가 드디어 손을 움직여 디바이스를 들어 올렸다. 그는 화면을 켜고 몇 번 조작한 뒤 다시 가만히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려’라는 말을 들은 개처럼 꼼짝도 안 하고 그녀의 연락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손가락을 뻗었다.
‘기다리는 것은 이제 충분하다. 몇 번 얼굴을 봤을 때도 크게 꾸짖지는 않으셨으니까 먼저 연락하는 것 정도는 괜찮을 거야….’
다니엘은 그렇게 자의적으로 그녀의 의도를 해석하며 그녀에게 먼저 연락하려고 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답지 않게 화들짝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셀레나 카토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니엘….”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도 순간 도현이 걸어 들어오는 줄 알았다. 논리도, 근거도 없는 비약적인 망상까지 하는 자기 자신에게 다니엘 스톤하츠는 더더욱 절망했다. 그녀는 이렇게까지 망가져 버린 자신을 알기나 할까.
“괜찮아요, 다니엘?”
“…안 괜찮습니다.”
다니엘은 무뚝뚝하게 그렇게 말하며 다시 디바이스로 시선을 돌렸다. 셀레나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다니엘은 근 한 달 동안 베이징과 도쿄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아직 엠바고 상태지만 올해가 그의 마지막 시즌이다. 그는 학자가 될 것 같다. 어울리지 않는 것도 같고 어울릴 것도 같다. 아니, 그가 뭘 하든 어울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잘은 모르지만 그가 속하게 될 그 ‘학회’라는 것도 그냥 보통 학자들의 모임은 아닌 것 같고….
‘그럼 올해가 마지막….’
슬펐다.
“베이징대에서의 일이 많이 힘든가요, 다니엘?”
셀레나는 천천히 그가 누운 침대 옆에 앉았다. 다니엘은 디바이스를 놓고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힘듭니다.”
“많이요?”
“네.”
무엇을 할 때 우는소리를 하는 법이 없는 그가 이러는 것이 당황스러울 법도 한데, 셀레나는 그가 떠날 것이 벌써부터 슬펐기에 기운이 없었다.
“그렇게 힘들면 가지 않으면 안 되나요?”
셀레나가 그렇게 말하자 다니엘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말했다.
“그러면 감옥에 가야 합니다.”
“…….”
그는 다시 한숨을 쉬고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아니… 사실은 북경대 때문이 아닙니다.”
“네?”
“도현 씨 때문입니다.”
“아….”
그 삐삐 머리…. 셀레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것도 셀레나 뿐인 것이니 아무렇지도 않게 저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셀레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분명히 그가 다른 이들보다 셀레나를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는 셀레나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니까.
‘우울해질 것 같아….’
그에게 셀레나와의 헤어짐은 아무것도 아닐까? 많은 것에 무감각한 그이니 아무런 아쉬움도 보이지 않고 뒤돌아 설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사람이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왜 연락을 안 해주시는 걸까요?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아니면 이것이 끝이라는 것일까요?”
다니엘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셀레나는 시선을 돌리고 있다가 움찔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헤어진 것일까?
“계속 컨디션이 안 좋았던 건 실연 때문이었나요?”
셀레나는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다니엘이 그답지 않게 발끈했다.
“실연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저에게 기다리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래도… 벌써 한 달이나 만나지 못한 거죠?”
셀레나가 그의 지난 스케쥴을 떠올리고 그렇게 다시 물었다. 다니엘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런 게 아닙니다. 분명히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다니엘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그는 처음이었다. 분명히 무언가를 외면하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이전 치엔이 루카스 집에 갔던 일을 생각해보자면 그와 그녀의 관계는 분명히 삐걱거릴 여지가 많긴 했다. 그녀가 패션 테러리스트 삐삐 머리라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셀레나는 고개를 돌린 그의 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한숨이 나왔다.
‘다니엘만큼 어른스러운 남자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진지하고 진중하고, 쉽게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큰 바위 같은 남자다. 어린아이 같은 남자들이 천지인 이 세상에서 이렇게까지 무겁고 아름다운 남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셀레나는 감동마저 느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4년이나 그에게 제대로 대시하지 않은 건 그런 자신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에 고민하는 그는 결국엔 한 명의 남자였을 뿐이다.
“어쩐지… 귀엽네요, 다니엘….”
셀레나 카토는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의 앞에 섰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상기되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을 한 손으로 잡아 그녀를 올려다보게 했다.
“셀레나?”
“다니엘… 저 정말 오랫동안 다니엘을 좋아해 왔어요. 저는 어떠세요?”
셀레나는 떨지 않도록 노력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그의 양 뺨을 붙잡고 그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좋은 주인님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서로의 얼굴이 가까웠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 파란색, 녹색, 갈색이 오묘하게 섞인 아름다운 눈동자, 셀레나 카토는 순정적인 눈빛으로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고 다니엘 스톤하츠의 보석 같은 보랏빛 눈동자도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셀레나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그의 예쁜 입술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
“싫습니다.”
다니엘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키가 195cm에 달하는 그의 눈높이가 쑥 올라갔다. 그는 셀레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런 그에게서 약간의 위압감을 느껴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물러나지 않았다. 다니엘의 무기질적인 보랏빛 눈동자가 셀레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사악 훑었다. 셀레나의 가슴이 두근했다.
‘아, 맞다…! 다니엘은 둘 다 된다고 했지…!’
노예 지망뿐만 아니라 주인님 지망이기도 했다. 지배받고 싶은 것뿐만 아니라 지배하고 싶다고. 그걸 떠올리자 셀레나의 심장은 미친듯이 뛰며 폭주했다.
“저, 저, 전…! 아, 아픈 건 싫지만 그래도 다니엘을 위해서 노력해볼게요…!”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그렇게 외쳤다. 다니엘의 커다랗고 멋진 손이 그녀의 턱을 잡았다. 그녀는 더 이상 그의 칼날 같은 눈빛을 피할 수 없었다.
‘어떡해!’
그는 셀레나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그녀는 다니엘의 눈동자를 보다가 처연히 시선을 피했다. 얼굴이 뜨끈뜨끈했다.
어떤 걸 하게 되는 것일까?
전부 다 벗겨진 채로 안대를 하고 온몸을 묶이게 될까? 목에 개목걸이를 하고 바닥에 흘린 물을 핥게 될까? 애원할 땐 그를 주인님이라고 불러야 할까? 가슴을 꼬집히고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 당겨질까? 등 뒤로 손이 묶인 채 마구 박히게 되는 건 아닐까!
셀레나는 무릎을 붙이고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전신의 피부가 짜릿했다. 그가 셀레나의 머리카락을 잠깐 쓰다듬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셀레나.”
“…네….”
사실 셀레나 카토는 주인님보단 노예가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부름에 그녀는 그의 얼굴을 홀린 듯이 올려다보았다. 그가 저런 눈빛으로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무려 4년이나 좋아한 남자와 처음으로 이런 섹시한 분위기 속에 있는 것이다.
“셀레나는 정말 미인이군요. 머리카락도, 피부도….”
다니엘이 그녀의 뺨을 엄지로 한 번 만졌다. 그녀는 심장이 입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특히 눈동자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셀레나의 눈동자만큼 신비로운 눈동자는 본 적이 없습니다.”
“다니엘….”
수많은 남자들에게 들은 칭찬이지만 그게 바로 다니엘 스톤하츠의 목소리로 듣는 것이라 가슴이 떨렸다. 다니엘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완벽한 도현 씨의 취향입니다.”
“…….”
“셀레나, 저 좀 도와주십시오.”
다니엘이 말했다
*
오늘은 메트로서울 오픈의 16강 B매치 날이었다. 토요일에 8명이 경기를 해서 승부를 가렸고 이번엔 도현을 포함한 8명이 또 테니스 경기를 펼쳤다. 로웰은 어제 상대를 이겨 무려 8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송선호는 KP그룹의 회장인 리자 송, 즉 자신의 할머니를 뵙고 오느라 늦고 말았다. 도착할 쯤엔 경기가 다 끝났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여행을 떠나버려 졸지에 집안 대소사에서 전부 아버지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 회사에도 상무보로 꽂혀 아버지의 원격 업무를 보좌하게 되었다. 갑자기 회사를 두 개나 운영하게 된 것이다. 7년 전쯤 아버지 회사에서 전략기획팀 인턴을 1년 정도 한 것을 빼면 사실 송선호는 자기 사업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회사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아무리 다른 사업을 직접 일으켜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지만 사장이 임원급으로 자기 아들을 갑자기 꽂았으니 눈초리가 제법 따갑다.
‘물론 이제 아버지 회사도 다 내가 물려받을 거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부모의 회사를 물려받는다는 것은 길고 긴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한 일이었다. 결국 아버지 회사일도 확실하게 배워 둬야 한다는 것이다. <리엔>의 매출성장률은 평균 연 20%를 웃돌고 흑자전환한 이후로는 마케팅, 광고 비용이 줄어 영업이익률도 높았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버지의 회사가 훨씬 더 규모도 크고 자회사나 계열사도 많았다. 아마 리엔을 상장시킨 후에 주식스왑으로 아버지의 회사인 KP글로비스의 지분을 확보하고 아버지의 회사에 자리잡을 생각을 하면… 20년은 실적을 내서 제대로 된 후계자감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리엔도 잘 될 거니까. 아버지 회사야말로 시장을 더 넓히는 건 불가능하고. 투자처를 더 찾아야 하는데.’
아버지는 요새 마도의학 쪽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 10년 전에 이미 한 번 바이오 거품이 팡 터지고 가라앉은 소재였다. 마도의학을 접목한 제약이라는 소재는 언제나 투기꾼을 끌어 모았다. 직접 시전하는 마도사가 없는 마법은 존속하기 매우 힘들다. 잘 모르는 보통 사람들이 보았을 때 마도사들은 간혹 신이나 만능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마도의사들은 숫자도 적고 이미 엄청난 돈을 벌기 때문에 존속 마법에 대한 관심이 극히 떨어졌다. 마도의학계 내에서 카니발리즘을 일으킬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제대로 된다면 정말 대박인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SS그룹에서 영구부양 스크린을 내놓은 후부터 마도의학 관련한 제약 회사들이 다시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했다.
‘역시 다 뜬구름 잡는 소리로 보인단 말이야. 사기꾼이 좀 많아야지.’
마도의학 교수도 몇 명 만나봤지만 다들 자기 분야에만 깊이 파고 들고 있었기 때문에 사업가적 시각을 기대할 순 없었다. 그게 된다, 안 된다는 판단도 다들 제각각이었다.
거기다 몇 명은 참고인으로 다니엘 스톤하츠를 추천하기도 했다. 그 새끼가 마도사 관련 업계에서는 진짜 꽤 하는 모양이다. SS그룹 영구부양 스크린도 그렇고….
“으음….”
마음에 안 든다. 그는 A파크 테니스장에 도착했다. 그는 수행비서, 기사와 함께 비싼 스포츠음료 박스와 간식, 선물을 날랐다.
‘사랑? 웃기고 있네.’
저번에 그 새끼는 사랑한다면서 고작 꽃다발이나 한 다발 들고 왔다. 송선호는 그녀가 다른 친구들에게 어깨를 으쓱할 수 있도록 크게 한턱 쐈다.
“어머, 이런 걸 다….”
“우승 상품밖에 없다고 해서요. 작은 성의입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음료나 간식은 이름난 유기농 업체와 파티셰에게 의뢰하여 만들었고 선물은 16명의 선수들에게 돌릴 것으로 각각의 취향을 파악해 준비하고(비서들이 준비했다) 카드까지 직접 썼다.
“어머.”
이번 메트로서울 오픈의 총무는 송선호의 선물을 받고 아주 기뻐했다. 경기가 끝난 선수들이 다들 모여들어 선물을 뜯어보며 좋아했다. 그들의 감사 인사를 들으며 송선호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는 이렇게 사랑하는 여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주, 아주 많은 남자였다.
송선호는 도현에게 줄 것을 직접 들고 그녀를 찾았다.
“하하하! 넌 아직도 그렇게 산단 말이야?”
“왜? 어때서? 재밌잖아?”
“아, 그건 인정. 가끔은 그런 것도 필요한 건데.”
“오픈 끝나면 파티 안 해?”
“이번엔 소소하게 하지 않을까 싶은데….”
“거기 쓸래? 빌려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진짜?!”
음료가 놓인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운동복을 입은 여자와 화려한 남자가 서 있었다. 둘은 만면에 웃음꽃이었다. 마치 세상에 둘밖에 없는 것처럼. 다들 송선호의 선물에 정신이 팔려 우르르 몰려가 있었는데 그들만이 어질러진 코트 위에 남아 이야기 삼매경이었다.
당연히 송선호는 곧바로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그는 인상을 팍 썼다가 약간의 한숨을 쉬고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도현아.”
그가 도현의 이름을 부르자 그들이 돌아보았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못 온다며?”
“겨우 왔어.”
“바쁜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아니야.”
도현은 그의 포옹을 받아주었다. 송선호는 그녀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고 복잡한 표정으로 잠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선물을 내밀었다.
“자.”
“응? 이게 뭐야?”
도현은 하얗게 빛나는 고급스러운 종이가방을 받아 들었다. 그 안에는 진줏빛 가죽으로 된 상자가 들어 있었고 그걸 열어보니 짙은 에메랄드빛 가죽으로 된 전자키가 들어있었다. 도현이 응?! 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차?!”
송선호는 어쩐지 살짝 쑥스러워서 시선을 돌렸다.
“아니… 이제 빚도 다 갚았고…. 있어도 되지 않나 싶어서….”
“송선호~!”
도현은 엄청나게 기뻐하며 폴짝 뛰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송선호는 그녀의 허리를 껴안아 그녀를 들어주었다.
“나 맨날 차 불러서 타고 진짜 서러워서~!”
송선호도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는 만면 웃음을 띤 얼굴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웬일로 이렇게 예쁜 짓이야?”
“…난 원래 예뻤어.”
“하하하!”
그의 말에 그녀가 크게 웃었다. 그녀는 그대로 송선호의 손을 잡고 코트를 빠져나갔다. 선물 받은 차를 보러 가기 위해서다. 에반은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눈을 살짝 크게 뜨고 있다가 좀 실소했다. 도현이 흥분해서 그렇게 나가자 몇몇 사람들이 그걸 눈치채고 같이 나갔다. 그리고 밖에서 조금 소란이 있었다. 엄청 좋은 걸로 해준 모양이다. 에반은 그동안 와인을 찾았다. 마실 만한 걸 발견해서 코르크를 따는데 문득 그 소란에 참여하지 않는 다른 인간들을 발견했다.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기다란 머리카락, 아름다운 얼굴, 무뚝뚝한 표정. 그는 한쪽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도현이 나간 자리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세상 좌절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쉬고 있는 셀레나 카토도 있었다.
“내가 도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걸까….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셀레나가 실의에 빠져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니엘은 이것을 <1+1 작전>이라고 말했다. 도현 킬스버그란 여자는 미남도 미녀도 좋아하고 기왕이면 다다익선이라 절대 거절할 리가 없다고 말했다. 도대체 그게 말인가 방귀인가.
‘그러면 내 고백은?! 듣기나 한 거야, 이 남자!? 이 싸이코!’
다니엘을 좋아하는 셀레나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 ‘다다익선’이라는 게 싫어서 그렇게 일을 쳐놓고 이제 와서 그걸 이용해 다시 그녀의 곁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는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여전히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도 방법도 전혀 가리지 않는 남자다.
“도색도 너무 예쁘게 잘 됐다. 옵션도 싹 다 하고. 얼마나 줬어?”
“그런 걸 왜 물어. 신경 쓰지 마.”
“흐응.”
도현은 매우 기분이 좋은 얼굴로 그의 뺨에 코를 비볐다. 송선호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요새 바빠서 미안해. 더 같이 있고 싶은데.”
“그거 너희 집 가풍 아냐? 남자는 열심히 일하고 여자는 사치스럽게 살고. 난 좋은데.”
“그래도 나 좀 보고 싶어 해. 난 매일 같이 있고 싶단 말이야.”
“그럼 오늘도 늦어?”
“…일찍 들어가면?”
그녀가 그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가서 뭐라고 속삭였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도현은 웃었고 송선호는 싫지는 않은 얼굴로 흠흠 헛기침을 했다.
“알았어. 일찍 들어갈게.”
도현은 송선호의 넥타이를 바로잡아주며 그의 입가에 입을 쪽 맞췄다.
“다녀와, 자기.”
그러며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니 그는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그는 이제 좋아하는 티를 숨기지 못하고 그녀의 허리를 안고 깊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는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잘난 남자는 원래 바쁜 법이지. 그녀는 그를 배웅하고 돌아섰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에게 돌아가려다 누군가가 시야 내에 어물쩍하게 서 있자 눈을 약간 크게 떴다.
가볍게 웨이브 지는 풍성하고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그 사람은 하얗고 깨끗한 피부에 오똑한 코와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어쩐지 처연한 분위기가 있어 눈길을 사로잡았다. 분명히 오픈 멤버는 아니었다. 도현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시게 되었는지….”
역시 뉴페이스. 뒤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다니엘은 슬쩍 끼어들어 그녀의 앞에 섰다.
“제 매니저입니다. 셀레나 카토라고 합니다. 함께 응원을 하러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셀레나가 인사했다. 도현을 찾아온 로웰은 휴가 때 그녀와 영상통화를 한 기억이 나서 ‘엇, 그때 그 미녀!’ 하고 아는 체를 했다. 로웰을 발견한 그녀는 더욱 침울한 얼굴을 했다. 도현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보다가 다니엘을 한 번 보고는 살짝 헛웃음 지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셀레나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테니스 관심 있으세요?”
“네, 조금….”
“입회하시고 싶으면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회비가 조금 있긴 한데 그렇게 비싸지는 않아요.”
“아, 네….”
“배우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셀레나. 저도 가르쳐드릴 수 있습니다. 도현 씨와도 연습 많이 했거든요.”
“맞아요. 다니엘은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진짜 잘 친다니까요. 운동 선수는 운동 선수예요.”
“그렇죠…. 사실 다니엘은 뭘 시켜도 잘 하니….”
“그렇습니다.”
“엇, 전에 저랑 통화하신 건 기억 나시죠?”
“…네…….”
셀레나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니엘은 로웰에게 찰싹 붙어있었다.
“선생님, 셀레나도 신태호와 친합니다.”
“오!”
그는 그녀를 사적으로 선생님이라고도 부르는 것일까? 이것도 플레이의 일부분인가. 도대체 자신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셀레나는 자괴감을 느끼며 그들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갔다.
오늘 경기도 다 마무리되었으니 곧 자리를 바깥으로 옮겨 공원에서 바비큐를 할 것이다. 요리사들과 지인들이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도현의 마음에 다시 들기 위해 로웰을 동아줄처럼 붙잡고 졸졸 따라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셀레나는 여전히 그의 ‘도현 씨’가 로웰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도현은 그를 관리하는 매니저가 이런 미녀인 줄 처음 알았다. 미르처럼 남자 매니저일 줄 알았는데. 도현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셀레나에게 말을 걸었다.
“셀레나도 고생이 많겠어요. 안 그런 척하면서 너무 제멋대로지 않아요?”
그녀는 도현의 질문에 단번에 억울한 얼굴이 되어 다니엘을 흘겨보았다.
“맞아요. 4년 동안 한 번도 그런 생각 한 적 없었는데 요새 깨달았어요. 이전까지는 그냥 입 다물고 있으니까 멋대로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했구나, 하구요.”
“셀레나.”
“얌체같이 아닌 척하면서 주변 사람들 조종하려고 들죠.”
“제 앞에선 아닌 척도 안 하던데요.”
“그런 게 아닙니다. 셀레나…!”
다니엘은 도현에게는 불쌍한 얼굴을 하고 셀레나에게 ‘도와줘야죠!’라는 눈빛을 마구 발사했다. 그는 여전히 도현에게는 직접 말도 걸지 못하고 있었다. 바비큐로 앉아서 음식을 먹는 사람도 있고 서서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도현도 음식을 덜어 먹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많고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도 많아서 서로 근황을 묻느라 시간이 술술 지나갔다.
“별로 소용없는 거 아닌가요?”
셀레나는 음식은 손도 대지 않고 맥주만 홀짝거렸다. 그녀는 여전히 로웰에게 시선고정 중이었고 다니엘은 도현을 따라서만 시선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멋대로 나타났다고 혼내지도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아는 사람들이 많으니 당연히 큰소리는 못 내겠죠. 그걸 노리고 ‘도현 씨’의 공적인 자리를 찾아온 거 아닌가요? 새로운 사람을 데리고 와도 괜찮고. 흥.”
그러자 다니엘은 이상하다는 얼굴로 셀레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미미하게 인상을 쓴 채로 맥주를 마셨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합니까? 셀레나는 저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풉! 콜록…!”
“그럼 저를 도와주셔야죠. 저를 기쁘게 해주고 싶지 않습니까?”
진짜 이 남자가! 셀레나는 그를 노려보았다가 순간 눈물이 글썽했다. 저 삐삐 머리에게 밀린 것도 서러운데 그가 이렇게 자신을 이용해 먹는 것에도 결국은 따르며 자괴감을 느끼고 있는 그녀에게 지금 이게 할 소린가?
“이제는 싫어해요.”
셀레나는 시선을 돌리며 눈물을 꾹 참았다. 다니엘은 다소 정색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좋아해도…! 상대가 요구하는 걸 다 해주는 건 아니에요.”
“어째서입니까? 사랑한다면 모든 걸 다 들어주어야죠.”
“그래서 다니엘은 그렇게 하나요? 도현 씨가 기다리라고 했으면서도 이렇게 쫓아왔잖아요.”
“그래도… 저는 최선을 다해 노력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합리화하는 건 아니구요? 어차피 자기도 다 하지 못하면서 자길 좋아한다는 사람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하는 거 정말 최악이에요!”
다니엘은 조금 당황하더니 물었다.
“셀레나는 제가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까?”
“바라요…!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불행하기를 바라진 않아요.”
셀레나는 그렇게 말하고 덧붙였다.
“왜 그 사람이 다니엘을 떠났는지 알 것 같아요. 다니엘은 자신의 성적 취향이나 기호를 저분한테 강요한 거잖아요. 저분이 다니엘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금방은 조금 당황했던 다니엘이었지만 지금의 말엔 몹시 당황했다.
‘내가… 내가 도현 씨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을 이용했다고? 나는 도현 씨가 나에게 그 '좋아하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한 것이었다. 내 성적 취향…. 그것도 결국 도현 씨가 나를 더욱 좋아할 수 있는 수단이 된 것 아닌가? 그걸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 분명히 그랬다.’
다니엘은 입을 열었다. 다소 말을 더듬거렸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는, 저는 그 사람이 저를 좋아하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질투로 사고를 친 것도 많이 반성했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그녀의 말대로 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저는 도현 씨가 원하는 대로 되었습니다. 그, 그런데도 도현 씨가 받아주지 않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셀레나는 바로 뭐라고 반박하려고 했다. 하지만 혼란스러움을 느낀 다니엘은 셀레나의 말을 기다리지 못하고 곧바로 도현에게 걸어갔다. 갑자기 키가 커다란 남자가 도현의 옆에 서자 그림자가 졌다. 그녀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그를 의식하고 돌아봤다. 다니엘은 무뚝뚝한 얼굴로, 하지만 몹시 혼란스러워하며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은 무려 33일 만이다.
“도현 씨, 제가 도현 씨에게 제 마음을 강요한 적이 있었습니까? 제가 도현 씨에게 제 뺨이나 엉덩이를 때려 달라고 부탁했던 게 그렇게 부담이 되셨습니까?”
“…….”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쳐다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셀레나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가 경악했다.
‘삐삐 머리가 아니었어…!’
잠깐, 아까 저 여자는 분명히 애인이 있었는데?! 도현은 미소를 짓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요.”
“화가 나시면 차라리 벌을 주십시오.”
“하하.”
도현은 웃었다. 그녀는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다니엘은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그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녀의 말을 차분히 기다리지 못하고 다니엘이 먼저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다니엘 씨에 대해서요. 항상 묘하게 위화감이 들었거든요.”
“어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 게 부담스럽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아마 그저 당당한 것일 테다. 그녀는 무뚝뚝한 얼굴에 반항적인 눈빛을 띠고 있는 다니엘 스톤하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다니엘 씨는 단 한 번도 날 사랑한 적이 없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잘 생각해봐요. 왜 그런지 알겠으면 연락해요. 가요.”
“…….”
그리고 도현은 다니엘 스톤하츠를 두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한동안 정물처럼 굳어 서 있던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 간단한 행동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큰 혼란에 휩싸여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애초에 그녀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에는 무감각하기 짝이 없는 그였다. 셀레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한숨을 쉬고 그에게 다가갔다.
“다니엘.”
“…셀레나….”
그제야 셀레나가 다가온 걸 알아차린 그를 데리고 일단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시동을 켜고 말했다.
“베이징으로 갑니다.”
“…….”
다니엘은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가만히 있었다. 셀레나는 운전석에 앉은 채 별말이 없었다. 하지만 슬그머니 걱정되었다. 얼마전까지 평생을 감옥에서 썩냐, 마냐 하는 문제도 있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대중들의 눈먼 비난을 듣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사고가 많은 TFC 세계였지만 그 중에서 꽤나 이례적인 스펙을 가진 그였다. GAS도 없고 방탕한 생활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시기에 존속살해에 스캔들이 뜬 미르 킹쉴드보다 훨씬 더 많은 비난을 들어야만 했다. 단순하게 비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기는 했지만….
‘아무리 뭐든 잘하고 똑똑해도 다니엘도 고작 24살이고….’
셀레나와 동갑이었다. 그의 짧은 인생은 보통 사람들은 절대 겪어보지 못할 경험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이해를 받기도, 공감을 받기도 힘들다. 그에게는 부모가 있어도 그가 기댈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고 TFC 세계에서는 여전히 붕 뜬 존재였으며 이번에 학회에 들어가게 된 것도, 그런 곳이 중간에 이렇게 들어가서 그냥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곳도 아닐 것이다.
그는 어디에 있어도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는 무거운 남자였지만 공허한 남자이기도 했다.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해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유일하게 의미를 두었던 아까 그 여자마저 그를 버린다면….
“다니엘, 나로 해요. 나는 다니엘에 대해서 잘 알아요. 다니엘이 바라는 것도 전부 들어줄게요.”
셀레나는 마음을 다 잡았다. 역시 그녀는 그의 뿌리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의 의미가 되어주고 싶었다.
“…셀레나는… 제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니엘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셀레나는 굳은 결심을 하고 대꾸했다.
“어떤 아픈 것도 괜찮아요. 아니, 괜찮을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아무리 마니악한 거라도 공부해서 따라잡도록 해볼게요.”
그러자 다니엘이 고개를 돌려 셀레나를 보았다. 정확하게는 백미러를 통해 눈을 마주쳤다. 다니엘이 입을 열었다.
“이런 기분은 4년만입니다.”
“…네?”
그는 전혀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잦아드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카페 라떼? 우유 많이.”
“…네? 네? 네? 뭐, 뭐라고 하셨죠?”
“카페 라떼. 우유 많이 넣어주라고.”
“아, 아, 네. 네. 우, 우유 많이 넣어서…. 더,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요? 오, 오늘 새로 들어온 케, 케이크는 어떠신가요? 마, 맛있습니다.”
음, 혹시 이런 게 우리 도현이가 말한 사회적 기업이라는 걸까? 말더듬이도 고용해서 쓰는 모양이다. 미르 킹쉴드는 카운터에 한 손을 짚고 가만히 디저트가 들어있는 진열장을 보다가 무언가 발견했다.
“어, 저거. 저거 맛있더라. 세 개.”
“네, 네. 티라미슈 조각 3개…. 더,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요?”
“됐어. 카드 되지?”
미르는 짠! 하고 번쩍번쩍한 골드 카드를 꺼냈다. 카드의 원주인 이름이 예쁘게 양각되어 있었다. 자랑을 할 요량이었지만 그녀는 카드를 보지 않았다. 좀 머쓱했다. 그는 슬쩍 덧붙였다.
“도현이가 나한테 준 거야. 신분증도 보여줄까?”
“네…?”
“도현이가 준 거라고.”
“네…….”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직원은 몇 번이나 계산을 실수했다. 인공지능이 주문을 받지 않는 곳은 으레 이런 법이다. 미르 킹쉴드는 급하게 굴지 않고 기다렸다. 이런 게 매너라는 것이다. 동료들은 모른다. 결제를 하고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뒤를 돌아보니 사람들이 제법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싱긋 웃으며 뒷사람에게 양해의 말을 건넸다.
“많이 기다렸죠?”
“아, 아, 아뇨…! 전혀! 아니요! 더, 더 주문하셔도 되는데요! 영원히 하셔도 돼요!”
“하하.”
참 요즘은 세상이 좋아. 미르가 어렸을 적 살던 동네엔 말더듬이들은 이런 멀끔한 가게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미르는 남은 자리가 있나 찾아보았다. 인기가 있는 가게인지 남는 자리가 없어 보였다. 미르의 앞에서 주문을 받았던 남자도 아직도 자리를 못 찾았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흠….”
“아! 혹시 자리 찾으시는 건가요? 저, 저희 곧 갈 건데! 자, 잠시 여기 같이 앉으실래요?”
미르가 자리를 본격적으로 찾아보려는 찰나 어떤 여자가 말을 걸었다. 여자 셋이 앉아 있는 자리였다. 그들은 다들 반짝반짝한 눈으로 미르를 올려다보았다. 미르는 그들을 보며 물었다.
“그래도 괜찮아?”
“그, 그럼요!”
“그럼 땡큐.”
미르는 남은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의 행동을 따라 여자 세 명의, 아니, 그 주위에 앉아 있는 남녀노소 모두의 눈동자가 따라왔다.
‘뭐가 묻었나?’
미르는 잠시 자신의 옷을 살펴보았다. 간단하게 밝은 회색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었을 뿐이다. 뭐가 묻었나 싶어서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다. 딱히 눈에 띄는 거라면 왼쪽 손목에 찬 가죽 시계뿐이다. 음! 역시 비싸고 좋은 거라 눈에 확 튀는구나! 미르는 자신을 보고 있는 옆자리 여자에게 시계를 흔들어 보여주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어머어머!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도현이 말처럼 좋은 건 다들 알아보는 법이지. 미르는 으쓱한 기분으로 다시 자기 자리에 있는 여자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미르의 각기 다른 부위를 보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그의 얼굴을 보았다.
“오, 오, 오늘 날씨가 참 좋죠?”
그중에 미르에게 자리를 앉으라고 권했던 갈색 머리가 그렇게 물었다. 또 말더듬이다. 미르는 역시나 이런 걸 지적하지 않을 만큼은 이제 배웠다고 자부하며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러게.”
“으, 음료는 시키셨어요? 제가 한 잔 사드릴까요?”
“응? 시켰는데?”
“그, 그래도 한 잔 더 드세요! 여기 이것도 맛있어요! 잠시만요…!”
그녀는 미르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줄이 길게 늘어져 있는 카운터로 가서 섰다. 미르는 괜찮다고 다시 돌아오라고 손짓했지만 그녀는 굳건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기다리라고 했다. 자기가 먹고 싶은 게 있는 건가. 결국 미르는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돌렸다.
다른 여자 둘 중 하나는 새카만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에 꽃받침을 하고 꿈꾸는 것 같은 눈길로 미르 킹쉴드를 보았다. 그러다가 미르가 그녀를 보자 화들짝 자세를 바로 했다. 옆에 앉아서 기회만 노리던 단발머리가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누구 기다리시나 봐요?”
왜 자꾸 말을 걸지? 간다면서? 하지만 이런 게 바로 도시의 스… 스모토크? 하여튼 그런 것일 테다. 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호, 혹시 여자분이세요?”
“아니, 예전에 알던 놈.”
하여튼 못 배운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자꾸 말을 더듬고 바보 같은 말만 하는 그 여자들과 잠깐 시간을 때웠다. 그들은 미르가 무슨 말을 해도 그게 너무나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민간인들을 상대할 기회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역시 민간인들은 참 밝네. 그들은 미르에게 음료와 디저트를 잔뜩 사주고 몇 번이나 인사를 다시 하며 자리를 떠났다. 직접 가지러 가야 하는 셀프서비스 가게였는데도 종업원이 직접 주문한 것을 가지고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서비스가 좋은 가게다.
“뭐 한다고 사람을 불러 놓고 늦어?”
미르는 투덜거리며 디바이스를 들어 올렸다. 전화를 하려는 것이다. 막 통화 버튼을 누르고 상대가 받기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앞에 어떤 사람이 섰다. 미르는 시선을 들어 그 사람을 보았다. 대략 60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였다.
“자네, 섬 하나 사줄까?”
[간다.]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미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통화 상대가 전화를 받자마자 그렇게 말하자 시선을 돌리며 그녀에게 가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디야?”
[다 왔다니까.]
상대방은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참내,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미르는 카페 라떼라는 것을 쪽쪽 빨아먹었다. 커피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언젠가 도현이 시키는 것에 우유가 들어간 것을 보고 이번에 시켜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음료만 세 잔에 디저트가 다섯 접시나 있었다. 그의 먹성을 보았을 때 충분히 다 먹고도 남을 양이니 별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지루하게 약속 상대를 기다리는데 아까 전의 그 중년 여성이 다시 다가왔다. 그녀는 진지한 눈빛으로 미르를 보며 말했다.
“마음에 안 드는 놈 있으면 깔끔하게 죽여줄 수도 있는데.”
“마음에 안 드는 놈은 저도 잘 죽입니다. 가세요~”
미르는 다시 가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실망한 얼굴로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접시를 세 개 해치우고 음료도 두 잔째 먹고 있을 때쯤 누군가 아는 체를 했다.
“어? 미르?”
구릿빛으로 태닝한 피부, 짙은 스모키 화장에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르고 20cm에 가까운 힐을 신은 여자들이 넷이나 들어왔다. 미르도 그들을 알아보았다.
“니들이 여긴 웬일이냐?”
“미르~~!”
웨스트이글의… 하여튼 누군가는 만나고 있는 GAS들이었다. 그들은 미르의 자리에 대거 몰려왔다.
“미르가 이런 곳은 어쩐 일이야?”
“파티도 잘 안 오고~! 다음 주에 내 생일인 건 기억해?”
“요즘은 어떻게 지내? 다들 궁금해해.”
“혼자 왔어? 누구 만나러 온 거야?”
그들은 육감적인 가슴 사이에 미르의 양팔을 끌어안고 상기된 얼굴로 말을 걸었다. 여자들에게 양팔이 묶였다. 앞에 앉은 여자가 자연스럽게 그의 입술에 음료를 대주었다. 미르가 대꾸했다.
“한 명씩 물어라, 한 명씩. 뭐 안 시키냐? 자.”
그는 자신의 디바이스를 그들에게 넘겼다.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음료를 시키러 가지 않았다. 미르의 오른팔을 안고 있는 금발로 염색한 여자는 우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내가 미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그래도 얼굴은 보여줘야 할 거 아냐.”
“야…. 누구야, 너 만나는 놈. 그 새끼가 들으면 어쩌려고?”
“나… 처음 봤을 때부터 미르 좋아했어…. 몰랐어?”
그녀는 왼팔로 그의 오른팔을 꽉 껴안고 다른 손으로 그의 빵빵한 가슴을 손톱으로 살살 긁었다. 앞에 앉아 있는 검은 생머리의 GAS가 그녀의 정강이를 찼다.
“야…! 너만 미르 노…! 아니! 좋아한 것도 아닌데! 선수 칠래?”
“시끄러.”
금발 머리 여자는 그렇게 앞에 앉은 동료를 노려보고는 다시 미르를 애틋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미르는 으음~ 하고 성가신 얼굴로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항상 여자들은 좋지만 말이다. 이럴 때는 좀 피곤하다. 그는 양팔을 여자들에게서 빼고 그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래, 그래. 나도 니들 좋아해. 나 만날 사람 있으니까 다음에 얘기해. 니들 볼일 봐.”
그는 그들의 엉덩이를 두드려 일으켜 세워 자리에서 내쫓았다. 앞에 앉은 여자 둘이 자신들의 엉덩이도 내밀자 그는 피식 웃고는 그들의 엉덩이도 때려주었다. 그들은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물론 그러고도 멀찍이서 그를 보고 있었다. 뭐라고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저런 상태이니 십중팔구 미르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뭐, 익숙한 일이라 그는 그들에게서 신경을 끄고 디바이스를 보았다. 오. 드디어 그녀에게서 답장이 와있었다.
<그럼 오늘 늦어요?>
미르는 얼른 답장을 썼다.
<응, 그럴 거 같아. 예전에 말했던 나 도와줬다던 그 용병. 7년 만에 보는 거야>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가 바로 답장을 보냈다.
<맛있는 거 사줘요. 그때 미르 도와줘서 감사하다고 꼭 전해줘요>
미르는 절로 미소를 지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이렇게 말해줘서 기뻤다. 미르는 그 뒤로도 열심히 그녀와 문자를 나눴다. 그때 누군가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미르는 고개를 들었다.
“응? 너 맞아?”
미르는 엉거주춤 일어났다. 상대는 미르만큼이나 키가 크고 덩치가 컸다. 속은 갈색에 가까운 금색인데 겉으로 갈수록 짙은 금발로 차분하게 뒤로 넘겨 정리했고 연한 파란색 셔츠에 베이지색 쓰리피스 정장을 입고 구두까지 신고 있었다.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다. 미르가 그렇게 아래위로 그를 보자 그는 피식 웃었다. 미르는 놀란 목소리를 냈다.
“늙었네.”
“…넌 나이 안 먹을 것 같냐.”
그는 미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다, 킹쉴드.”
“…마이어.”
미르는 바로 서서 천천히 그와 악수했다. 아담 마이어, 미르 킹쉴드가 자신의 부모에게 뒤통수를 맞았을 때 도와줬던 그 용병이었다.
*
‘미남이 하나 더 추가됐어!’
직원은 손을 덜덜 떨며 그의 얼굴을 보면서 디바이스를 받아 들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주문했다.
“에스프레소로 부탁합니다.”
웃는 얼굴이 참 예쁘다…. 금발 미남이라는 건 다 이런 건가…. 환상적이다…. 그녀는 가장 간단한 주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하며 주문을 받았다. 그는 자리로 돌아갔다. 미르는 주머니 양쪽에 손을 넣은 채 그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아담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돈 좀 벌었으면 좋은 곳에 불러라.”
“좀 있다 마시러 가자. 벌써 연 곳은 없다고.”
미르 킹쉴드가 아는 좋은 곳이라고 해봤자 술집밖에 더 있겠는가. 그렇게 말하니 그가 단조롭게 대꾸했다.
“시간 없어.”
“엥? 술 안 마시면 뭐하자고?”
“다음에.”
아담은 그렇게 답했다. 미르는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그를 잠시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빨대로 음료를 휘저었다.
“죽었을 줄 알았는데.”
“하하.”
아담이 웃었다. 아담 마이어, 8년 전 미르가 15살 때 체첸에서 만났던 용병이었다. 후에 남중국해에서 일을 같이하기도 했다. 아마 그보다 12~3살은 많았던 걸로 기억했다. 거기를 구르는 소드마스터들이 나이에 상관없이 으레 어린애 같기만 했던 것에 비해 그는 굉장히 어른스러웠다. 많은 동료들이 그에게 의지했다. 그가 없었다면 죽을 뻔했던 적도 꽤 있었다. 은인이라면 은인이다. 미르는 빨대를 입에 물었다.
“그렇잖아. 나올 수 있는데도 그 판을 왜 안 나와? 죽으려고 용 쓴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때가 있는 거야. 난 그때도 이미 늦었었지.”
“그래도….”
미르는 그렇게 말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등받이에 등을 대며 창밖을 잠시 바라보았다. 따뜻한 햇살과 그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현대식 건물이 보인다.
“그래, 다들 지 인생 지가 알아서 사는 거지.”
“그렇지.”
“그럼 다들 살아있는 건가?”
“빅캣팀? 글쎄, 내가 기억하기론 너….”
그는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진짜 나이 든 티라도 내는 것인가. 미르가 이름을 하나 댔다.
“샘은?”
“걔는 죽었고.”
“피터?”
“걔도 죽었고.”
“루한?”
아담은 잠시 골몰했다. 그리고 답했다.
“아, 3년 전에 죽었지.”
“뭐야. 그럼 다 죽었네.”
아담은 웃었다.
“난 안 죽었다. 너도 안 죽었고.”
“하아, 그래….”
“하하하, 어린애가 벌써부터 그렇게 한숨 쉬는 거 아니라고.”
아담이 예전처럼 말하자 미르가 발끈했다.
“나도 벌써 스물셋이라니까.”
“와, 아직도 스물셋밖에 안 됐냐. 키는 많이 컸다.”
미르는 흥, 하고 턱을 괬다.
“어쨌든 좋아 보이네. 그래서 아직도 용병 짓하고 산다고?”
“이제는 나도 밑에 많이 데리고 일하고 있지.”
“뭐 하는데?”
“남중국해 최전선 같은 데는 이제 안 가. 요인 경호나 러시아 분쟁지역이나 남미 쪽?”
“음, 죽진 않겠네.”
“뭐, 그렇지. 얼마 전엔 정말 죽을 뻔했지만.”
“진짜?”
“응.”
“왜?”
“이번에 게이트 생긴 데, 하필 그때 거기 있었거든. 그리고도 이것저것 있었어.”
“흐음.”
미르는 다시 한번 그를 보았다.
“그래도 때깔은 엄청 좋아졌는데? 그런 것도 입고 다니고?”
“어떠냐? 어울리냐?”
“괜찮은데?”
아담은 잠시 자신의 차림새를 살폈다. 장식용으로 세워져 있는 커다란 거울에도 한 번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그가 손목 부분을 다시 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 사람도 좋아하면 좋을 텐데.”
“누구?”
“있어.”
“여자?”
미르가 귀신 같이 눈치채고 그렇게 물었다. 아담은 시계의 위치를 바로잡고 넥타이의 위치도 다시 보았다. 미르가 조언했다.
“여자는 이거지. 선물 잔뜩 사줘. 좋아할걸?”
미르는 엄지와 검지를 붙여 비볐다. 아담은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저었다.
“나보다 훨씬 부자야.”
“응? 진짜? 드디어 직업전환?”
“이놈의 새끼가.”
그는 여전히 양복의 구김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미르를 한 번 슥 보더니 화제를 돌렸다.
“너야말로 얼굴 폈다.”
“뭐, 나야.”
미르는 씨익 웃었다. 벌써 7년… 8년은 되었나? 하여튼 이놈은 그때도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법이니까. 그는 그대로 자랑을 시작했다. 그는 물건(시계, 카드 등)과 사진을 늘어놓았다.
“야, 너 진짜 출세했네. 이런 여자도 다 만나고.”
“쩔지? 난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미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세상에 우울할 게 뭐가 있냐는 얼굴이었다. 한창 가십지에 그때 그의 이야기가 오르내려 조금 걱정했는데 별 충격은 없었나? 하긴, 그렇게 섬세해서야 살아남지도 못했겠지만. 아담은 새삼 감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나도 니 나이 땐 이랬으려나. 좋냐?”
“어, 짱 좋아.”
“너도 여자 한둘 만난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러냐?”
“이 아저씨가 나이 먹은 값을 못 하네. 사랑이라고 사랑.”
“사랑?”
아담은 웃음이 나왔다. 이런 놈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그러다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아담이 물었다.
“…진짜 좋아?”
“좋다니까? 짱 좋아. 완전 좋아. 보고만 있어도 좋아. 다 해주고 싶어.”
“어떻게 꼬셨는데?”
“뭐랄까. 운명이랄까.”
미르 킹쉴드는 실실 웃으며 몇 가지 쪽팔릴 일만 빼고 그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아담은 그가 어린애처럼 신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적당히 호응하며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 빚을 딱 갚아주면서 우리 도현이도 내가 얼마나 좋은 남자인지 깨닫게 된 거지. 물론 원래도 도현이는 내가 최고라고 말했지만 정말, 진짜, 짱 최고가 된 거지!”
아담은 웃는 얼굴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역시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달라도 이유는 똑같다. 잘난 여자들이 본의 아니게 인생을 잠시 삐끗할 때 우리 같은 놈팽이들이 기회를 잡았다, 라….’
그게 아담이나 미르에게 행운이라면 상대방에게는 불행일까? 적어도 미르 킹쉴드 쪽은 불행까진 아닌 것으로 보인다. 꽤 귀여움 받는 것 같고.
“그래, 진짜 좋아 보인다.”
“어, 큭큭. 도현이도 내가 최고라잖아. 우리 둘 다 좋아.”
“근데 이런 집은 얼마나 하는 거냐?”
“배도 봐, 배.”
그렇게 서로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둘 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르 킹쉴드는 기지개를 쭉 켰다.
“그래도 너도 잘살고 있다니까 다행이네. 또 서울 오면 연락해. 진짜 크게 한턱 쏠게.”
“올해는 돈도 없다며?”
“우리 이~쁜 도현이가 너 밥 크게 사주란다, 이 카드로!”
“그래, 알겠다. 알겠어.”
그렇게 가게를 나가니 슬그머니 GAS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미르의 팔짱을 끼고 아담을 올려다보았다.
“미르~ 우리 데려다 줘.”
“근데 이 남자는 누구야?”
그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아담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아담은 웃고 말았다. 그들은 그가 어떤 계급의 남자인지 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맞고.’
자기 앞가림도 하기 힘든 세상에 일부러 짐을 이고 갈 생각이 아니고서야. 아담은 그대로 미르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간다. 다음에 보자.”
“어디 가는데? 데려다 줄게.”
“바로 앞이야.”
“그래. 연락해!”
“오냐.”
미르는 그의 뒷모습을 잠깐 보고 있다가 양팔에 매달린 여자들을 보았다.
“뭐? 어디 가는데?”
“집에 가게.”
“아크로폴리스로 가면 되냐?”
“응~”
미르는 자신의 차를 주차장에서 불렀다. 그가 투덜거렸다.
“인간적으로 니들이 만나는 놈을 불러라. 왜 나만 보면 맨날 태워달라, 뭐 해달라 이래?”
“미르가 잘 해주잖아. 화내지도 않고. 짐은 가끔 무섭단 말이야.”
“가람도.”
“조나단도.”
“왜? 그 새끼들 손 드냐?”
“으음…. 가끔? 기분 안 좋으면.”
“그래…. 앤, 넌 원래 제수스 만나지 않았냐? 왜 샤샤로 갈아탔냐?”
“몰라. 요새 제수스 영 딴 데 정신 팔려서. 내년엔 안 만나줄 것 같길래. 샤샤도 좋아.”
금발로 염색을 한 앤이 말했다. 미르가 차 문을 열며 대꾸했다.
“니들도 참 먹고 살기 힘들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앤이 미르를 끌어안았다.
“역시 미르도 좋아.”
“그래, 그래. 이제 놓고 타라.”
미르는 그녀의 말을 흘려들으며 걸즈를 차에 태웠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어쨌든 시간을 확인해보려고 본 것이다. 3시…. 이것들을 내려다 놓고 바로 가면 아직 경기 중일 것이다. 내가 가서 응원해주지 않으면 우리 도현이를 누가 응원해줄 것인가! 바로 가야겠다. 못 간다고 하고 가는 것이니 더 좋아해 줄 것이다.
‘나도 꽃이라도 사서 갈까?’
먹을 것도 사야겠다. 잔뜩 사가야지. 미르는 룰루 콧노래를 부르며 운전을 했다. 자율주행으로 해도 좋았지만 예전 용병 시절 때도 차 모는 것은 좋아했기 때문에 이렇게 직접 운전하곤 했다. 뒤에서 걸즈 하나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미르… 진짜 요새 좋은가 봐?”
“응~ 좋다니까? 몇 번을 물어보냐?”
“제시카는 결국 조나단이랑 만나고 샐리도 가람이랑 만나던데.”
“그래? 잘됐네.”
“미르 얘기 많이 해.”
“흐응, 원래 나 같은 남자는 항상 화제의 주인공이지.”
걸즈가 미르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응…. 그래도 가끔 얼굴은 보여줘. 미르가 잘 지내서 기뻐.”
그러자 미르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의아한 얼굴이었다.
“근데 내가 너랑도 한 적 있었나? 기억 안 난다.”
“하하하.”
아크로폴리스에 도착했다. 여자들을 우르르 내려주고 인사를 할 겸 미르도 내렸다. 그러니까 이런 게 매너라는 것이다.
“잘 가라.”
미르가 인사했다. 그러니 GAS 네 명은 미르의 태평양 같은 품에 다들 안겨서 그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응~ 미르도 잘 가. 또 봐.”
“다음에 맛있는 거 사줘.”
“생각 있으면 연락해.”
“사랑해~”
미르도 인사 겸해서 그들을 한꺼번에 꼬옥 끌어안아 주었다. 다들 미르의 얼굴에 쪽쪽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남겼다.
“…뭐하냐?”
웨스트이글 미드필더 짐이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상황을 보고 있었다. 미르가 껴안고 있는 여자들 중에는 그의 걸즈도 있었다. 미르는 아, 하고 포옹을 풀었다.
‘음, 저 새끼….’
하여튼 남자의 질투란. 짐의 걸즈는 곧바로 그의 품에 안겨 아양을 부렸고 나머지도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갔다. 짐은 잠시동안 미르를 노려보았다. 미르는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그들도 곧 가버리자 그는 잠깐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그리고 다시 차를 타려는데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큰 키, 큰 덩치, 짧게 깎아 놓은 화려한 빨강머리를 한 어디서 많이 본 놈이 한숨을 푹푹 쉬고 걸어가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술이라도 사서 들어가는 모양새였다. 미르 킹쉴드야 언제나 화제의 주인공이었지만 요새 저 새끼도 말이 많았다. 물론 그는 잘나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이고 저 새끼는 못나서 그런 것이었다.
“여.”
미르는 그렇게 그를 불렀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어….”
“찌질이 새꺄, 얼굴 들고 걸어라, 얼굴 들고. 병신 티 내냐?”
“이 개새끼가…!”
그가 발끈해서 표정을 구겼으나 약간 찔리는 구석은 있는지 표정이 다소 억울하면서도 역시나 병신 같았다. 미르는 상당한 우월감을 느끼며 그를 놀렸다.
“아직도 그 교수라는 여자는 연락이 없냐? 어?”
“그건…!”
“니가 얼마나 별로였으면, 어? 그렇게 애걸복걸 잘해줘도 차이냐, 빙~신아.”
“너, 넌…! 너도 몇 번 차였잖아!”
“그래도 항상 우리 예쁜 도현이가 나 못 잊고 찾아왔다, 어? 기억하냐? 킥킥. 그런 기사가 떠도! 어! 날 찾으러 왔다는 거 아니냐! 나 못 잊겠다고! 킥킥킥. 넌 그런 적 있냐? 없지? 없지~?”
“나, 나도….”
“뭐? 너도 뭐? 뭐?”
“그래도…! 세현이도 나한테 마음이 있으니까 마, 만나준 거일 거 아냐!”
“엥? 에엥?? 그래? 그랬냐? 그런 소리 처음 듣는데? 그런데 지금 왜 이러냐? 어? 그래서 그 여자한테 연락은 오고?”
“그, 그건….”
역시 병신 같은 놈들을 괴롭히는 건 참 즐거운 일이다. 가령 그 재벌 집 도련님이라든지, 그 마도사 샌님이라든지, 미르 킹쉴드에게 열등감을 느껴 부글부글한 얼굴을 하는 걸 보면 역시나 나는 잘난 놈이구나! 하고 으슥하게 되는 것이다.
“좋아하는 여자면 그 여자가 좋아하는 걸 잘 알아차리고 딱 해줘야 할 거 아냐. 쯧쯧. 그런 것도 못 해주면서 차였다고 병신짓하는 병신들이 세상에서 제일 병신 같더라.”
제수스는 억울한 얼굴로 뭐라고 반박하려고 했으나 미르는 검지를 하나 들며 그의 말을 막았다.
“아, 물론! 내가 본 새끼들 중엔 니가 제일 등신이다. 혼자서 술이나 많이 빨아라, 병신아. 난 우리 도현이 만나러 간다.”
“…….”
미르 킹쉴드는 그에게 씨익 웃어주고 차에 탔다. 차는 엔진음을 내며 곧바로 호쾌하게 달려갔다. 제수스는 그의 꽁무니에다 대고 가운뎃손가락을 날렸다.
‘하, 난 참 잘난 놈이야.’
미르 킹쉴드와 같이 생긴 남자라면 누군들 그에게 혼을 팔지 않겠는가. 언제나 숱한 여자들의 사랑과 숱한 남자들의 질시를 가득 받는 예쁜 남자는 오늘도 너무나 익숙하고 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
“어….”
미르 킹쉴드는 메트로서울 오픈 8강 경기가 한창인 과천구 A파크 테니스장에 도착했다. 양손엔 그녀를 위한 먹을거리가 한껏 들려 있었다. 도현이 미르를 먹이는 걸 즐거워하듯이 미르도 도현을 먹이는 게 좋았다. 그녀가 보고 싶은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와 보니 테니스 룰을 잘 모르는 미르가 보아도 이건….
“아!”
도현이 서브가 라인 밖으로 나가자 짜증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녀의 상대는 지니 호에서도 보았던 흑인으로, 이름은 사라라고 했던가. 그녀가 씨익 웃었다.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니까요.”
“넌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이런 건 다~ 타고 나는 겁니다.”
점수판을 보아도 분명히 도현이 지고 있었다. 어쩌지? 그녀를 기분 좋게 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으나 그녀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푸는 것은 좀 자신 없었다. 옆에 로웰이 도현의 경기를 보며 같이 답답해하고 있었다. 미르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돼가는 거야? 지는 거야?”
“아…. 그럴 거 같은데요? 사라는 진짜 배운 지 몇 달도 안 됐다는데 완전 우주방어야. 체력도 쩔고.”
“아~ 그러니까 내가 많이 먹어야 한다니까. 우리 도현이는 너무 적게 먹는다고. 그래서 지는 거라고.”
모든 건 다 밥심인 법이다. 미르가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결국 한 세트라도 따보려고 용을 썼던 도현이나 지고 말았다. 3:0으로 완패였다. 사라는 기뻐하며 퀸과 하이파이브를 했고 도현은 울상을 지었다.
“아~!”
지는 건 누구나 기분 나쁜 법이다. 로웰이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작가님, 괜찮아요. 내년이 있잖아요. 열심히 연습하면 돼요.”
“그래도 8강까지밖에 못 올라오고…. 아, 상품.”
“상품은 내가 따서 줄게요, 응?”
로웰은 그렇게 도현을 위로했다. 테니스 경력만으로 보면 로웰은 이게 갓 시작한 비기너인데도 엄청난 운빨로 같은 비기너들만 만나 모두 척살하고 4강까지 올라갔다. 미르는 지금 꽃을 줘도 될지 안 될지 고민하다가 도현의 앞에 섰다.
“다음에 이기면 돼. 기분 많이 안 좋아? 응? 내가 어떻게 해줄까?”
도현은 지치고 실망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가슴 만지게 해줘요.”
“응? 그거면 돼?”
미르는 얼른 자신의 가슴을 까주었다. 도현은 양손으로 그의 빵빵한 가슴을 만지며 그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아.”
“좋아?”
“네….”
세계 평화란 이 가슴에 있는 것이었다. 신이 내려주신 그의 빵빵한 바디는 어딜 어떻게 하고 있어도 훌륭했다. 지금도 그는 양손에 잔뜩 뭘 들고 겨우 티셔츠를 끄집어 올리고 있는데도 그의 움푹 파진 넓고 건장한 쇄골과 어깨, F컵은 훌륭하게 넘는 빵빵한 가슴, 에잇팩이 올라온 훌륭한 복근, 온몸을 잇는 이 훌륭한 라인! 도현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원기를 회복하고 있었다.
“기운 내. 너 먹으라고 맛있는 것도 사 왔는데?”
“정말요?”
도현은 그가 가져온 봉투에서 맛있어 보이는 디저트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하나 먹었다. 미르는 그녀의 뺨에 입술을 누르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오늘 못 온다면서요?”
“그냥 빨리 보내고 왔어. 보고 싶어서.”
“잘 왔어요. 미르 보니까 기분 좋아요.”
“그치?”
미르 킹쉴드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뺨에 입술을 누른 채 그녀의 냄새를 맡았다. 땀 냄새도 향기가 난다. 미르는 그녀에게 마구 얼굴을 문질러 자신의 냄새를 그녀에게 묻혔다.
“졌어?”
에반 블랙도 이제 막 도착했는지 선글라스를 벗으며 점수판을 보았다. 도현은 고개를 돌렸다.
“에반.”
“넌 사라랑 붙으면 꼭 지더라.”
“사라보다 피지컬이 안 좋아서 그럴까? 역시?”
“뭐…. 그런 점이 없진 않겠지.”
“하….”
도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에반은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미르 킹쉴드는 그녀의 허리를 꽉 껴안고 그녀의 머리에 턱을 대고 감싼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에반은 선물상자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응? 이게 뭐야.”
“봐봐.”
도현은 먹던 건 옆에 내려놓고 그가 준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았다. 테니스 라켓이 나왔다.
‘뭐, 이런 걸…. 도현이도 몇 개나 가지고 있는 건데.’
미르는 심드렁하게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도현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이거….”
“응, 전에 보고 갖고 싶다고 했잖아.”
“이거 진짜 그때 봤던 거 맞아? 세레나 윌리엄스 마지막 윔블던 우승 기념으로 만든 거?”
에반은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도현은 미르의 품에서 빠져나와 에반과 포옹했다.
“이런 거 이렇게 막 받아도 돼?”
“축구도 8강까지 올라오면 상금이 꽤 있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좀 그렇잖아.”
“테니스도 너랑 같이 배워서 이렇게 잘 하고 있는 건데. 고마워.”
“다음에 한 번 같이 쳐.”
“너도 계속 했어?”
“연습은 많이 못 했는데.”
그렇게 둘은 또 둘만이 아는 얘기를 이어갔다. 미르는 그걸 가만히 보고 있다가 도현을 등 뒤에서 껴안았다.
“나도 가르쳐주면 잘 할 수 있어.”
“응? 미르도 배우게요?”
근데 이 남자가 보통 사람이랑 경기라는 걸 할 수 있는 남자인가? 도현이 웃었다.
“누가 미르한테 이길 수 있어요.”
“그래도. 둘이서만 놀지 마.”
“하하하.”
그렇게 얼추 로웰까지 해서 넷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반과 로웰이 제대로 인사를 하는 것은 처음이라 서로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미르~ 나 졌어!”
“나도 졌어요~”
그러고 있다 보니 서현과 시즈카가 오더니 미르 킹쉴드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미르는 자연스럽게 그들과도 대화를 시작했다.
“니들도 많이 먹어야 이길 거 아냐, 어? 이렇게 말라빠져 가지고 어떻게 이기냐고.”
“맞는 말이야. 아, 아까워! 3천만 원!”
“연습도 많이 했는데, 흑.”
“이기려면, 어? 밥심, 밥심이야. 상대보다 더 많이 먹어야 한다고.”
“그래? 어떻게 해야해요?”
“미르가 말하는 대로 할게~”
메트로서울 오픈 멤버들이 자연스럽게 미르를 끌고 갔다. 도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잠깐 웃었다가 그냥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전에 미르 킹쉴드에게도 직접 말했지만 원래 저만한 남자한테 여자가 따르는 건 좀 이해해줘야 한다. 뭣도 없는 놈들이 여자를 속여서 바람을 피우는 거야 모두에게 배신이고 피해를 주지만 저 남자는 미르 킹쉴드이지 않은가. 저렇게 태어난 남자는 저렇게 살라고 저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보아라.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가. 에반이 말을 걸었다.
“정말로 저 남자 좋아하나 보네.”
“응?”
도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미르 킹쉴드를 눈짓했다. 도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물었다.
“그래 보여?”
“그래 보여.”
도현은 에반의 말에 잠깐 놀랐다. 그런가? 도현은 자신이 정말로 미르 킹쉴드를 좋아하는 건지 생각해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에반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그렇게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자 순간 전에 다 같이 집에서 물놀이를 할 때 웃는 그와 껴안고 느꼈던 감정이 생각났다. 그의 어린 시절 스캔들이 뜨고 나서 그의 집으로 그를 찾으러 갔을 때 느꼈던 감정도.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확실히….’
미르 킹쉴드는 특별하다. 심지어 그런 감정이 부담스럽거나 꺼려지지 않을 정도로. 도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당연히 좋아하지. 미르 같은 남자를 싫어하는 여자가 어디 있어?”
도현이 말했다. 에반은 고개를 기울인 채 그녀를 보고 있다가 물었다.
“그런가? 저런 게 여자들이 이상형으로 꼽는 남잔가?”
“그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마 저런 남자가 여자에게 가장 좋은 남자일 거야.”
“왜?”
“숨기는 게 없거든. 숨기는 게 없어도 멋지고.”
도현이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미르를 잠시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에반이 피식 웃었다.
“좋은 건 처음 봐도 아는 법이니까?”
“그렇지.”
이러는 그녀는 처음 본다. 그녀는 남자에 대해 그다지 미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남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남자에게 큰 의미를 두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에게도. 에반이 말했다.
“나도 너에게 숨기는 건 없었는데.”
“그랬어?”
도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응.”
둘은 가까이 서 있었다. 도현은 하얀 테니스복을 입고 있었고 에반은 가벼운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다. 날이 따뜻해지고 있었다. 늦봄의 햇살이 둘을 비췄다. 화보 속 한 장면처럼 근사했다. 눈빛을 마주친 채로 가만히 서로를 보고 있었다.
“널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
그 잠깐의 침묵을 깬 것은 도현이었다. 도현이 천천히 그렇게 말했다. 에반이 물었다.
“왜?”
“모르겠어. 이젠 다를 줄 알았는데.”
“뭐가?”
“이런 기분이 안 들 줄 알았어.”
에반 또한 불가해한 얼굴로 도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무슨 기분?”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은 기분.”
“나랑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도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너 우리 엄마 닮았다고 한 거 기억나?”
“응.”
“그게 아닌가 봐.”
도현이 말했다. 에반이 가만히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눈빛을 보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로 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때가 있었다. 마치 그가 가끔 도현의 말을 듣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알아내는 것처럼. 도현은 천천히 그 눈빛에 대답했다.
“나랑 닮은 거였어.”
“…….”
그 말을 듣자 에반은 언제나처럼 가볍게 띄고 있던 미소가 살짝 사라졌다. 그는 잠시 짧게 숨을 내뱉었다. 지금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옛날에도 그의 이런 얼굴을 가끔 볼 수 있었다. 항상 여유롭기만 한 그에게서 여유가 사라지는 순간. 그럴 때마다 그가 궁금했다. 에반 블랙이라는 남자가.
에반이 물었다.
“나 사랑해?”
도현이 대답했다.
“모르겠어….”
그들은 그대로 서로의 눈을 보고 있었다. 천천히 서로의 간격이 좁혀져 갔다. 주위에 아무것도, 아무도 없다는 듯이. 서로의 눈빛만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무언가 통하는 것처럼.
세상에, 온전히, 둘만이 있는 것처럼….
도현은 눈을 감으며 가까이 다가온 그의 숨결을 느꼈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키스 같은 게 처음도 아니고 이 남자와 하는 게 처음도 아닌데도.
“잠깐만…!”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누군가 도현의 손을 잡아당겼다. 도현은 조금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달려왔는지 흐트러진 숨결,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 표정을 한 송선호였다.
“송선호….”
도현은 살짝 상황을 잊어버려 주변을 돌아보아야만 했다. 아, 테니스 경기. 송선호는 넥타이 죄임을 좀 풀고 무섭게 에반을 노려보고 있었다. 에반도 진지한 눈길로 도현의 얼굴을 보다가 순간 정신이 든 것처럼 송선호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피식 웃었다. 송선호는 다소 화가 난 어조로 말했다.
“난 여기에 사인한 적 없다. 이 새끼는 아니야.”
송선호는 도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도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그의 세상 심각한 얼굴을 보고 웃고 말았다.
“왜 그래?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해도 되는 거 아니었어?”
“적어도 상의는 해.”
“요새 엄청 바쁘면서 또 어떻게 왔어?”
“네가….”
이 새끼가 그녀의 주변을 얼쩡거리는데 그가 어떻게 편히 일을 하겠는가! 이 새끼는 오픈 멤버들 중에 아는 사람도 많아서 주말에는 꼭 왔다. 부자 회원들 상대로 영업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이 양아치 새끼. 송선호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그녀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을 바꿨다.
“보고 싶어서 왔어.”
“아닌 것 같은데.”
“맞아.”
그렇게 도현과 송선호가 얘기를 나누니 에반이 소리를 내서 웃었다. 도현은 그를 돌아보았다. 에반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니 송선호는 거의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는데 에반은 웃는 얼굴로 그를 타일렀다.
“인사하려는 거야.”
“가려고?”
도현이 물었다. 에반은 송선호의 품에 안겨 있는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정말 재미있게 잘 지내는구나. 다행이야.”
“응? 갑자기? 하하.”
도현이 웃었다. 그리고 에반은 송선호에게도 눈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그가 가자 한참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던 송선호는 잠깐 자신의 명치 부근을 누르며 큰 숨을 내쉬었다.
“하아….”
속이 다 쓰리다…. 도현은 그런 그를 보고 또 웃었다.
‘분명히 에반도 얘 놀리는 게 재미있을 거야.’
도현은 생각했다. 그녀는 그의 넥타이를 풀어주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회사는 어땠어, 자기야?”
“똑같지…. 요샌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해서 시간이 있어도 있어도 모자라.”
그는 양복 단추를 풀었다. 그의 베스트가 드러났다. 하여튼 양복 차림이 참 멋진 남자다. 도현이 말했다.
“오늘 졌어.”
“그래? 누구랑 했는데?”
“사라.”
“누구더라?”
그는 분명히 지니 호에서 그녀를 봤는데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왜. 흑인 친구 있잖아. 지니 호에서.”
“아아, 키 큰?”
“응.”
“아마추어 대횐데 어때. 8강도 잘한 거지. KG는 내가 끊어줄게.”
그건 좋지만…. 도현은 웃는 얼굴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가끔 이 남자는 참 사람의 노력이나 감정을 우습게 보는 것 같단 말이지. 시합이나 경기라는 게 꼭 상품을 받아야 한다거나 1등을 해야만 한다는 게 아니라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이기고 지는 것에 느끼는 감정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자기가 그걸 거뜬히 해줄 수 있다고 그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 아닌데 말이다.
‘세상을 0과 1로밖에 못 보는 남자 같단 말이야.’
가치관이 뚜렷하고 사리판단이 빨라서 그런 거겠지만. 잘난 남자라 이거지. 그 값을 톡톡히 할 거라 이거지….
“자꾸 왜 그렇게 봐?”
도현이 그의 귀를 만지면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송선호가 그렇게 물었다. 도현이 대답했다.
“잘생겨서.”
“…음…. 그건….”
크흠. 그가 헛기침을 잠깐 했다. 좋은 모양이다. 그때 누군가 도현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내가 더 잘생겼어.”
미르 킹쉴드였다. 도현이 웃었다. 그녀도 기분이 좋아졌다.
“미르~ 서연이랑 시즈카한테 가버리더니?”
“가고 싶어서 간 거 아니야. 정신 차려보니까 저기 가있더라니까. 도현아~ 보고 싶었어~”
“하하하. 정말. 귀여워.”
“사랑해, 도현아.”
“저두요.”
도현은 미르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이젠 좀 익숙해졌으니 괜찮을 법했는데도 울컥한다. 송선호는 인상을 팍 쓰며 미르를 노려보았다. 미르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 씨익 웃었다. 송선호는 잠시 이를 갈았다.
‘세상 금발 놈들은 다 없애 버리고 싶다….’
분명히 그가 금발을 좋아할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송선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
쿠콰과과과광!!
“으아아악!!!”
“끄아아악!!!!”
도쿄 TFC돔이다. 다니엘은 잠깐 정신을 판 사이에 저도 모르게 하늘에서부터 바닥으로 아이스 애로우를 수직 난사하고 말았다. 경기장에 있던 소드마스터들이 깜짝 놀란 고양이처럼 사방으로 도망갔다. 국지성 소나기처럼 갑자기 우르르 소리를 내며 공중에서부터 얼음 칼날이 쏟아져 바닥이 중기관총 세례를 맞은 것처럼 엉망이 되었다. 저거 그대로 맞았으면 다 뒈졌다. 스즈키 감독도 깜짝 놀라 입을 벌리고 다니엘을 보았다. 그는 오펜스 코치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마력 리미트를 측정하고 있던 코치도 토끼 눈을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미트 측정기에 걸리지 않았다.
“이거 들키면 바로 마법 제한조항이 하나 더 생기겠군.”
생각하지 못한 필살기가 하나 더 생겼다. 신태호는 조절이 안되지만 다니엘은 조절이 되니…. 아니, 그것도 아닌가. 다니엘은 무뚝뚝한 얼굴로 스즈키를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뭐…. 아무도 안 죽었으면 됐다.”
다들 용케도 피했다. 다니엘 스톤하츠의 미약한 살기 변화랄까, 심전도 변화를 그래도 다들 잘 캐치한 모양이었다. 감독은 그 정도 반응으로 끝이었으나 저 멀리서 다른 동료 선수들이 아우성쳤다.
“깜박이는 켜고 들어와라, 이 미친 새끼야!!!”
“죽고 싶냐!!!”
다니엘은 그대로 벤치로 나가고 후보 오펜스 선수가 나가서 다시 연습 경기를 속행했다. 다들 중간중간에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다니엘은 제법 뛰어다니느라 열이 오른 이마 위에 차가운 수건을 올렸다. 코치는 그를 잔디밭 위에 눕히고 다리를 스트레칭 해주었다.
“요새 컨디션이 영 아닌가봐?”
“…….”
다니엘은 아무런 대답 없이 이마와 눈을 덮은 차가운 수건의 감촉을 느끼고 있다가 손을 뻗었다. 셀레나는 스크린 위를 보고 있다가 그의 손을 보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다니엘의 디바이스를 그의 손에 올려주었다. 다니엘은 그대로 눈을 가린 채 디바이스를 조작해서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자마자 입을 열었다.
“제가 예전에 인체실험을 하거나 사람들을 많이 죽인 게 많이 기분 나쁘십니까?”
[아니에요.]
뚝. 전화가 끊겼다. 다니엘은 디바이스를 쥔 채 손을 바닥에 떨궜다.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실망감이 깊은 모양이었다. 이전에도 그랬듯이. 그걸 본 셀레나는 자신이 다 답답해서 그를 타박하는 말을 하고 말았다.
“계속 그런 식이면 어떡해요. 안부 인사는 먼저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자기 할 말만 하고. 그러니까 킬스버그 씨도 그런 거 아니에요.”
“…….”
그런가…. 다니엘은 점점 자기 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왜 그녀가 그런 말을 했는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이유를 알면 연락하라고 하셨다. 연락을 다시 하는 것을 허락해준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말할 만한 이유가 떠오를 때마다 그녀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라고만 했다. 그 부정이 마치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만 같았다.
예전 다니엘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숙맥일 때 그녀는 오히려 상냥했다. 그를 귀여워하며 자연스럽게 리드 하곤 했다.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열심히 했다. 그래서 그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졌다. 그러니 그녀는 다니엘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넌 또 실패한 것뿐이다
머릿속 한구석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한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모두가 너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그건 네가 이상하기 때문이다. 네가 다르기 때문이다. 네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네가 살인마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불량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너 같은 사이코패스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와 준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너는 그녀를 실망시키기만 했다. 너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너는 어정쩡한 놈이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는 이제 너를 싫어한다. 그러니 네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도 도현 씨는… 내가 대단한 남자라고 말해줬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생각해주지 않는 것일까? 별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걸까? 이제 다니엘이 어떤 남자인지 알게 되었으니까?
‘알고 있었다. 그녀가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되면 분명히… 싫어할 거라고….’
갑자기 가슴이 욱신거렸다. 심장 부근이 우릿우릿하게 아팠다. 손을 들어 가슴을 문질렀다. 그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왜 그래, 스톤하츠?”
“다니엘, 어디 아파요?”
다니엘은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랬다. 그는 몰랐다. 그녀가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도 자신이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도. 그가 그러고 있는 동안에 멀리서 이스트드래곤 감독진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스톤하츠 컨디션이 영 안 좋네요, 요새.”
“뭐, 그럴 수밖에 없겠지. 까딱하다가 평생 감옥에서 썩을 뻔했는데.”
스즈키 감독이 양복 상의 단추를 풀면서 그렇게 말했다. 각 수석코치들이 모여서 선수들에 대한 정보가 정리된 홀로그램 화면을 보았다. 다니엘 스톤하츠의 것도 있었다.
“흠, 올 시즌에선 괜찮을까요? 이제 40일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이스트드래곤은 명실상부 세계 최강의 TFC 클럽이었다. 디펜스면 디펜스, 오펜스면 오펜스 빠지는 곳이 없었고 미드필드진도 훌륭했다. TFC 역사상 첫 2연승이라는 기록은 아무나 이룰 수 있는 성과가 아니다. 1승 정도야 운이 따랐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2연승은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챔피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왜 챔피언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신태호 심리 상담받는 건 좀 어때? 성과가 있나?”
“원래 태호도 시즌 중 아닐 때는 괜찮잖아요. 상담사나 의사는 그렇게 걱정할 만한 상태는 전혀 아니라는 말만 합니다. 벌써 의사를 열 명이나 갈아치웠는데.”
“시즌 중에도 계속 상담받게 해보자고. 신태호는 그것만 아니면 완벽한 선수다.”
“그래도 태호는 괜찮죠. 우리 애들이 핀치에만 안 몰리면 수비형 미드필더로 제 역할 잘합니다. 지금은 스톤하츠가 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올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한다고 너무 빠진 것 아닙니까?”
디펜스 수석코치가 그렇게 말했다. 오펜스 수석코치는 고개를 저었다.
“낮에는 훈련하고 저녁에는 그 북경대 어쩌고 과제 하고 주말에는 시험인가 뭔가 치고 하루에 평균 4시간도 못 자고 있습니다. 직접 가보니까 그 교순지 뭔지 완전 또라이 새끼던데요? 애를 완전 쥐 잡듯이 잡던데. 우리도 안 그러는데. 아니, 배운 인간들이 그래도 되는 겁니까?”
스즈키는 팔짱을 끼고 잠시 한숨을 쉬었다. 그는 만년필로 눈썹 부근을 누르며 홀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오펜스 수석코치가 의견을 피력했다.
“지금 스톤하츠 컨디션이 완전히 망가지고 있어요. 스톤하츠를 꼭 거기에 보내야 하는 겁니까? 이제 24살이고 오펜스니까 10년은 더 선수 생활할 수 있는 놈인데….”
“거긴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저번 인체실험 스캔들 때문에 당장 국제전범재판소에 끌려가서 감옥살이하거나 중공 보위부에 끌려가거나…. 올해라도 시즌 끝마칠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상황이다.”
다들 한숨을 쉬었다. 경기에서 오펜스의 역할은 아주 중요했다. 화려하게 경기를 띄우는 것은 당연히 디펜스나 미드필드진을 이루는 소드마스터들이었지만 경기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마도사다. 괜히 마법 제한조항 하나하나에 팬덤이 들썩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세계 TFC 선수 랭킹 1위였고 이스트드래곤 승리의 주역 중 하나였다.
“다른 오펜스들은 어때?”
“나쁘진 않습니다.”
“그래….”
스즈키는 그대로 화면을 계속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 다른 오펜스들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올해도 이기려면 스톤하츠는 꼭 있어야 한다. 컨디션 조절 좀 잘 해봐. 매니저는 뭐라고 해?”
“개인사적으로도 문제가 좀 있다더군요. 애인과 헤어졌다는데요?”
그 말을 듣자 감독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뭐? 그런 거 신경 쓰는 놈도 아니면서 왜 유난이야?”
“빠졌다니까요.”
디펜스 수석코치가 슬쩍 덧붙였다.
다니엘은 그대로 벤치에 있다가 간단히 체력 훈련만 더 하고 휴식을 취한 후 베이징으로 날아가야 했다. 금요일이었기 때문이다. 차 안에서도 다니엘은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제가 이상한 놈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 쓸모없는….”
[아니에요.]
그녀는 그러고 또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니엘은 그대로 조금 더 가만히 있다가 팔을 떨궜다. 그는 그대로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야…. 너 머리 이거 좀 어떻게 안 되냐? 어? 너는 이게 답답하지도 않냐? 뭔데 머리를 이렇게 쳐 길러? 니가 모델이냐? 니가 배우야, 뭐야? 머리 안 잘라?! 어?!”
“…….”
“하, 이게 또 지도교수 말을 거지 같이 듣네. 대답 안 하냐? 대답 안 해? 어? 야, 넌 내가 서라고 하면 서고! 내가 기라고 하면 기고! 그래야 하는 놈이라고, 어? 그게 아직도 이 대가리에 입력이 안 되냐? 어? 어?!”
베이징 대학 물리학과 학과장 왕리밍 교수는 또 다니엘 스톤하츠의 머리채를 잡고 그의 이마를 검지로 찌르고 있었다. 누가 당해도 굴욕적일 일이었다. 언제나 왕리밍이 어떻게 하든지 아무런 반응이 없던 다니엘이었다. 매일 인형처럼 그냥 흐느적거리기만 했다. 그의 보석 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움직여 왕리밍의 얼굴을 보았다.
“뭐? 뭐, 새끼야? 니가 보면? 니가 보면 뭘 어쩌려고?”
죽여버릴까
다니엘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뜯을 듯이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대로 눈을 마주치고 몇 초 있었다. 왕리밍은 대단히 당황하더니 그의 손목을 뿌리쳤다.
“이게 미쳤나!”
그는 그러고도 몇 분을 더 화를 버럭버럭 내더니 자신의 연구실로 들어가 버렸다. 다니엘은 가만히 그가 들어간 연구실 문을 보고 있었다.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그를 불렀다.
“스톤하츠.”
치엔위 박사였다. 머리를 더벅머리로 마구 잘라 놓은 그녀는 안경을 랩코트로 대충 닦으며 다니엘을 불렀다.
그녀는 이 랩의 랩장이었다. 사실 다른 곳에서 잠깐 왔다 가는 포닥들 몇 명은 아무것도 아니다. 어차피 이 랩에서 학부생부터 굴렀던 사람들이 아니라서 다들 취급해주지 않았다. 여기서 그녀가 왕리밍 교수의 바로 다음 위치인 것이다. 애초에 마도사는 거의 여자들밖에 없었고 여기서도 왕리밍과 다니엘을 제외한 랩 식구들은 전부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잠깐 랩밖으로 나갔다. 흡연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하나 뽑으며 액상 담배기계를 입에 물었다.
“그… 마음은 이해하겠는데 그래도 교수님은 죽이면 안된다, 어?”
다니엘은 대답 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꺼내 하나를 마시며 버튼을 다시 눌렀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나 졸업해야 한다. 죽이고 싶으면 나 졸업하고 죽여라.”
“…….”
그녀는 새로 나온 커피를 다니엘에게 넘겨주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니가 원래 우리 쪽 공부를 하다가 관뒀다가 다시 하게 된 거라며?”
그녀는 다니엘 스톤하츠가 들어온 지 한 달 가까이 되었는데도 그냥 누가 왔나 보다, 하고 소 닭 보듯이 그를 대했다. 그녀는 액상 담배를 한껏 빨아 도넛 모양을 뭉게뭉게 만들며 말했다.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았는데. 그걸 때려치우고 나갔는데 이렇게 다시 들어오게 됐으니 얼마나 빡치겠냐. 충분히 이해하지. 충분히 이해해.”
그녀는 신문도 보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그의 인체실험 스캔들 뉴스가 나오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아마 그가 TFC 선수짓을 하고 있다거나 예전에 용병을 했다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학회장님이 이렇게 꽂아주신 걸 보면 너도 꽤 재능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조금만 더 의욕 있게 해봐라. 그러면 교수님도 저 정도로 갈구시진 않을 거다.”
원래 랩을 관리하는 것은 교수가 아니라 랩장. 그녀는 그렇게 다니엘에게 당부했다. 그리고 그녀는 뭐라고 그에게 주의사항에 대한 것을 더 알려주려고 했으나 전화가 왔다. 그녀는 누가 건 것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바로 받았다.
“네, 교수님!”
[어, 치엔 박사냐.]
“어… 어?”
치엔위는 다시 디바이스 화면을 보았다. 왕리밍이 걸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학회장님이었다. 그녀는 다시 전화를 받았다.
“아, 예. 학회장님, 어쩐 일이세요?”
그녀가 다시 담배를 입에 물고 티 나지 않게 약간 뿜어냈다.
[요새 바쁘냐?]
“네? 그냥… 졸업논문 준비하는 만큼 바쁩니다.”
[아칸소 갈 때 같이 갈 수 있겠냐? 시간 좀 내봐라.]
“어?! 진짜요? 저도 가요!?”
[왜. 리밍이 안 간다냐?]
“말씀을 안 해주셔서….”
[마력은 15까지 모아놔라. 아니, 웬만하면 최대로. 실험실에서 연습은 좀 해놔. 알겠지? 고질량점, 무질량점, 중력증폭 전부 다 해라. 저번에 한 번 해보니까 의외의 상황이 많이 생겨서 마력은 넉넉하게 있어야겠다.]
“이번이 더 규모가 큰가 봐요?”
[아무래도 그렇지. 석세스 교수는 불참이다.]
“어, 왜요?”
[그냥 뺐다. 몸 관리, 멘탈 관리 잘 하고.]
“네, 넵!”
[그리고 졸업논문 잘 쓰고. 기대하고 있다.]
“알겠습니다, 학회장님. 감사합니다, 학회장님.”
[오냐.]
전화를 끊자 치엔위는 어린애처럼 흥분한 얼굴로 기뻐했다.
“아싸.”
“…무슨 일 있으십니까?”
다니엘은 가만히 그런 치엔위를 보고 있다가 물었다. 그녀가 디바이스에 저장된 스케쥴 표를 보면서 대꾸했다.
“어? 어. 아칸소 간다.”
“웜홀 축퇴 실험하는 거 말이죠? 저번에 수에즈 가서 했던….”
“어, 이번엔 회전 웜홀이야. 일반 웜홀 중력방정식도 나오겠지.”
“정확하게 어떻게 웜홀이 없어지는 겁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어? 그래? 봐봐.”
치엔위가 디바이스로 홀로그램을 띄웠다.
“사실 웜홀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공간을 실존점 이하로 줄여서 소멸시키는 거야.”
“플랑크 길이 이하로 줄이기 전에 블랙홀이 되지 않습니까?”
“야, 이거 봐봐라. 이게 천체처럼 보인다고 천체냐?”
잠깐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치엔위가 퍼뜩 시간을 확인하며 말을 끝맺었다.
“너도 무질량점 중력 마법을 할 수 있게 되면 할 수 있을 거야. 뭐, 운전 기계나 인공지능 시스템에 익숙해지긴 해야겠지만. 야, 근데 우리 랩 너무 오래 비웠다. 들어가자.”
“…….”
다니엘은 어쩐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아까부터 느끼고 있었다. 이 느낌을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너무 오랜만에 느껴서 모호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럼 전 언제 무질량점 중력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겁니까? 당장 배울 수 있습니까?”
“글쎄…. 나도 박사 들어와서 배웠거든. 너도 박사 들어오면 배우지 않을까? HNU 퀸 교수님 랩에 있는 석사 하나는 석사인데도 퀸 교수님이 가르쳐 주셨더라고. 아무래도 우리 교수님은 중력 마법을 직접 하시진 못하시니까.”
“그럼 치엔 박사님이 가르쳐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가 그렇게 말하자 치엔 박사가 웃었다.
“왜? 배우고 싶어? 싫은 거 아니었어?”
“…….”
무언가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가치 있는 것을 습득하는 이 충족감…. 이 잠깐의 대화는 사실 그렇게 많은 지식을 담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처음으로, 정말로 처음으로 누군가와 말이 통한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와 언어가 통하는 사람과 대화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걸 깨닫자 다니엘은 멈춰 서고 치엔위는 서둘러 연구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 가자마자 안에서 약간 큰 소리가 났다.
다니엘은 디바이스를 꺼냈다. 전화를 걸었다.
“제가 뭔가 잘못 판단한 게 있습니까? 도현 씨가 보기에도….”
[…많죠. 그런데 제 말은 그게 아니었잖아요.]
그리고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다니엘은 이전과 같이 똑같이 실망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도통 그런 자기 자신의 감정을 해석할 수가 없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다니엘은 자기 자신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뭘까…. 도현 씨는 나에게서 무엇이 보이는 것일까…. 나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거지?’
그렇게 또다시 열심히 고민을 하고 있는데 연구실 문이 벌컥 열렸다.
“뭐 하냐? 안 들어오냐?”
치엔위였다. 그녀는 그렇게 다니엘에게 말하고 다시 랩으로 들어가려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야… 근데 너 진짜 교수님 죽일 생각 있는 거냐? 아까 살벌하던데.”
“…….”
“만약 진짜 할 거면 최대한 고통스럽게 부탁한다.”
그녀가 말했다.
*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런 느낌을 받은 것은 4년 만이었다. 4년 전의 다니엘 스톤하츠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아주 성실하게 추구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비난했다. 그리고 그 비난은 4년을 이어왔다. 그들의 말에 일리를 느끼면서도 마음 깊이 공감할 수는 없었다. 죄책감을 느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정상인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남들이 시키는 대로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틀린 것일까? 무지렁이 같은 타인들의 말도 어느샌가 다니엘에게 그만큼의 영향을 끼쳤다. 그녀의 말은 비수가 되어 심장에 박혔다. 그런데도 여전히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똑똑하고 영리한 남자가 아니었던가? 모든 것이 의심된다.
월요일 새벽이었다. 도쿄로 가야 했다. 이런 생활을 지속한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다니엘은 그저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니엘.”
셀레나 카토가 호텔 문을 열며 들어왔다. 다니엘은 입맛이 없었다. 그녀는 객실의 테이블에 그가 먹을 식단을 차려 두었다. 다니엘은 그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매일 같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던 식단이었다. 매일 같은 것을 먹어도 단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었다. 무지렁이 같은 인간들을 혐오하던 그다. 자신이 입에 들어가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먹는 개나 돼지와 뭐가 다를까 생각했다.
“먹기 싫습니다.”
다니엘이 말했다. 그러자 셀레나가 그를 달래듯 말했다.
“그래도 먹어야죠. 오늘도 훈련은 힘들 텐데.”
“가기 싫습니다.”
“다니엘….”
그는 억지로 수저를 들었다.
“셀레나에게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겠죠.”
그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셀레나는 복잡한 얼굴로 그런 그를 내려다보았다. 다니엘은 식사를 하고 곧바로 샤워실로 향했다. 그는 옷을 훌렁 벗으며 샤워실로 들어가서 평소보다 오래 있더니 머리를 닦으며 밖으로 나왔다.
“다 씻었어요? 옷은….”
셀레나는 그의 옷을 준비해놓고 있다가 그가 알몸으로 걸어 나오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물론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늦은 것은 본의가 아니었다. 본능이랄까…. 다니엘은 머리를 닦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 자르는 게 좋을까요?”
“네, 네?”
“별로 남자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까?”
그의 기다란 머리카락에선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분명 미의 신이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선을 땄을 아름다운 얼굴, 보석 같은 보랏빛 눈동자,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완벽한, 조각 같은 몸매…. 어느새 셀레나는 상기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세상에 그보다 완벽한 피조물이 있을까.
“셀레나?”
“네…. 네?”
“잘라야겠습니다.”
다니엘은 어느샌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는 속옷을 챙겨 입었다. 그제야 셀레나는 약간의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 정말! 저 남자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데…!’
그의 알몸에 침을 질질 흘리다니. 스스로에게 배신감마저 들었다. 옷을 챙겨 입은 그와 같이 호텔을 나왔다. 선글라스를 씌워도 그의 미모는 눈길을 끈다. 이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 으쓱한 기분까지 들었다. 단지 그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랑거리가 생기는 것 같은 기분이니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비행차에 태웠다. 그는 뒷좌석에 타자마자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셀레나는 같이 뒷좌석에 타며 말했다.
“그래도 학부 과정까지 빨리 끝내고 시즌에 들어가면 그나마 낫지 않을까요? 그때까지만 참아봐요.”
시즌에 들어가면 훈련량이 줄어드는 편이다. 게다가 부상 위험이 높은 소드마스터들과 다르게 마도사들은 부상 위험도 적었고 주전 중 누가 다쳐서 병원에 누워 있으면 당연히 훈련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전처럼 아무런 고민도, 의심도 없이 일하고 먹고 잘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입에 들어오는 게 뭐든 상관이 없고 사람들이 어떻게 쳐다보든 자신이 뭘 하든 아무것도 상관없어졌으면 좋겠다. 다니엘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의심해야 하는 이 상황이 생각보다도 너무나 괴로웠다. 도현은 어째서 다니엘을 이토록 고통스럽게 만들까. 이것이 분명 무언가의 시험임을 알면서도 힘들었다.
쿠웅! 쩌적! 콰직!!!
“윽!!!”
이번에는 피하지도 못했다. 순간적으로 모두가 바닥에 납작 짓눌렸다. 뭐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리미터를 들고 있던 오펜스 코치들이 얼른 경기장으로 뛰어 들어가 다니엘 스톤하츠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야…!!! 야야!!”
“얘 이거 큰일 내겠네!!”
마도사들은 전부 능력이 발현되는 청소년기 시절 무의식적으로 마법을 쓰지 않도록 훈련을 받았다. 마도사의 마법은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매우 위험한 상황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령 흔한 공중부양 마법이라든가, 쉴드, 일루젼 마법도 잘못하다간 사람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 옛날, 아니, 현재도 문명화되지 않은 인간 집단에서 마도사가 태어나면 곧잘 악마의 아이라고 죽여버렸던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의료 마법이면 의료 마법, 전략용 공격 마법, 전술용 공격 마법, 대인 공격 마법, 거기에 중력 마법까지 쓸 수 있는 전천후 천재 마도사다. 그의 생각과 상상에 절제가 없어지고 의식이 혼미해진 상태에서 저도 모르게 마도사병이나 쓸 수 있는 지대지 미사일 마법을 떠올리기만 해도, 그대로 도쿄에 있는 고층 빌딩 하나가 날아갈 수 있었다.
“감독님, 청소년 마도사 훈련사라도 써야겠는데요?”
코치가 인이어를 통해 감독에게 보고했다. 지혜열이라도 나는 것처럼 얼굴이 벌게진 다니엘을 바닥에 눕히고 머리에 차가운 습포를 올려주었다. 다행히 경기장 라인 안쪽에만 마법이 펼쳐져 도쿄돔이 무너지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매니지먼트에서 보험사와 건설 업체에 전화를 하고 있었다. 감독은 경기장 안에 들어와서 선수들을 살폈다.
전에 치엔이 루카스를 제압할 때 썼던 중력 마법보다도 약했기 때문에 누가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소드마스터들이니 몸 하나는 다들 튼튼하다. 매니저와 의사도 라인 내로 들어와 선수들을 살폈다. 다들 굉장한 운동량을 내다가 바닥에 갑자기 처박히는 바람에 담에 걸리거나 구토를 하는 선수도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있던 선수들도 나와 동료 선수를 부축했다. 스즈키 감독은 고개를 휙휙 돌리며 선수들을 확인했다.
“신태호!”
신태호가 없었다. 스즈키 감독은 고개를 휙휙 돌리다가 관중석을 보았다. 이번에는 신태호만 가까스로 도망친 모양이다. 그는 관중석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기둥 가장 윗부분에 딱 붙어 있었다. 어떻게 도망갔지? 대미사일 쉴드가 꺼지고 난 후엔 저기까지 더 도망친 모양이었다. 그를 발견한 그의 매니저와 다른 선수가 그를 데리러 관중석으로 올라갔다.
“이런 마법은 듣도 보도 못했는데 도대체 뭐지?”
오펜스 코치 중 하나가 그렇게 다니엘의 상태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공중부양 마법은 마법의 힘으로 물체를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 방향을 달리하면 땅에 짓누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 건물이나 지반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하지만 금방은 분명히 도쿄돔의 바닥이 내려앉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아마 스톤하츠가 베이징에 가서 배우는 것 중에 하나겠지….”
다른 코치도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니엘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셀레나가 그들 사이를 파고 들어왔다.
“다니엘? 괜찮아요?”
그는 습포를 치우고 다니엘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몸을 일으키고 전해질이 든 음료를 마시게 했다. 그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훈련은 못 하겠습니다….”
셀레나가 고개를 들고 스즈키 감독을 보았다. 그는 인상을 약간 찌푸렸다가 고개를 돌려 벤치를 가리켰다. 사람들이 다니엘을 부축해서 벤치로 데려갔다. 준비된 들것에 누워 잠시 컨디션을 회복한 그는 곧 일어나서 샤워실로 갔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감독의 허락을 받아 밖으로 나갔다. 셀레나와 오펜스 코치 둘을 대동해야 했다. 그는 전에 없이 울적한 얼굴로 차에 탔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나요, 다니엘?”
“…조용하고 사람이 없는 곳이면 좋겠습니다.”
셀레나와 코치들은 잠시 의논을 한 후 장소를 정했다. 그대로 차 안은 침묵이었다. 곧 차는 달려 작은 바닷가 마을에 도착했다. 바다를 꽤 넓게 볼 수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그는 선착장으로 홀로 걸어가 버렸다. 셀레나와 다른 사람들은 차 근처에 남아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너무 위험한 거 아냐? 스톤하츠 정도의 마도사가 저렇게 통제 불능이 되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어떻게 하지? 어디 신고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야, 우리 시즌은 어쩌자고 신고 타령이냐.”
오펜스 수석코치가 다른 코치를 나무랐다. 셀레나도 심각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노쇠한 마도사가 치매라도 걸려 주변에 큰 피해를 입히면 사법당국과 관련 기관이 안락사를 시키기도 했다. 마도사 본인들도 그런 경우를 대비하여 ID카드에 관련 서명을 추가하기도 했다.
“잠시 저런 것뿐이에요. 다들 다니엘 알잖아요. 평소에는 괜찮고.”
셀레나가 말했다. 어떤 구단이든 매 시즌은 중요한 법이지만 이스트드래곤은 사상 최초로 3연승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들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다니엘의 변모에 전전긍긍하는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걱정을 뒤로하고, 다니엘 스톤하츠는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와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적에 그녀와 함께 바다를 보러 갔던 적이 있었다.
[…제가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요?]
[분위기랄까…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말해봐요.]
그녀에 대해서는 여전히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한 발자국 물러나 그녀와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면 자신이 이렇게까지 그녀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그 자신도 그럴듯하게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그녀만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최선을 다했다. 그것만이 자신의 존재 가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에게 지배받고 싶었다. 그녀의 것이 되고 싶었다.
‘이제는 전부 틀린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다시 가슴이 욱신거렸다. 다니엘은 더 이상 그녀에게 댈 이유도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도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
[다니엘 씨?]
“목소리가… 듣고 싶었습니다.”
[…….]
이렇게 한 사람만을 갈망하는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이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다니엘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런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믿어줄 것 같지가 않았다. 가슴이 아팠다.
“잘 지내고 계십니까?”
그래서 언젠가 셀레나가 말한 것처럼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약간의 한숨 소리가 들리고 도현이 대꾸했다.
[다니엘은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목소리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풀이 죽어 다니엘은 말을 머뭇거렸다. 그녀가 이런 자신을 얼마나 등신 같이 볼까? 그녀는 언제나 능숙하고 그녀에게 잘해주는 남자들만 만났을 것이다. 그와 같이 아무것도 잘 해내지 못하는 남자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목소리가 안 좋아요. 밥은 잘 먹고 있어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그냥 도현 씨가 잘 지내고 계신 지 궁금해서….”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그렇지…. 그녀는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안부 인사 같은 건 안 한 것이다. 그녀가 고작해야 남자 하나를 버렸다고 해서 마음을 쓰고 힘들어하는 사람도 아니고…. 다니엘은 또다시 상실감을 느꼈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닙니까?’
갑자기 그렇게 불쑥 따져 묻고 싶기도 했다.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풀이 죽어 있기도 하고, 때때로 벌컥 화가 나기도 하고, 이건 맞을지도 모른다고 기묘한 기대를 하면서 초조해하다가 그녀의 답을 들으면 실망해서 자학하고…. 다니엘은 자신이 이럴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또 못내 실망스러웠다. 다니엘은 그대로 전화를 종료했다.
*
그대로 주중은 훈련, 과제, 훈련, 과제, 훈련, 과제를 하다가 시간이 다 갔다. 쉬어도 쉰 것 같지 않고 자도 잔 것 같지 않았다. 악몽을 꿔도 기억이 나지 않았고 훈련 중에 실수도 많이 했다. 과제의 점수도 점점 떨어졌다. 이런 살인적인 월반 제도로 학점을 4.2/4.3을 채우라는 게 애초에 비현실적이었지만 정말로 못 채우고 떨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다니엘은 어떻게 될까? 선수짓이고 공부짓이고 전부 실패하고 감옥이나 끌려들어 가면 끝나는 것일까? 별로 신경도 쓰지 않던 주변 사람들의 은근한 기대나 눈초리가 짜증 난다. 역시 전부 죽여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상상하는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라는 남자의 인성이 치엔이 루카스 이상이 되기는 그른 모양이다.
실수가 많아지긴 했어도 오랜만에 물리 문제를 풀어보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이것은 답이 있는 문제였다. 잘 풀어내면 온전하고 확실한 답이 나오는 것.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때 치엔위가 왕리밍 교수의 오피스에서 얼굴을 내밀며 손가락을 튕겨 주의를 끌었다. 다들 그들의 랩장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누군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리 오라고 신호했다. 그 손가락은 다니엘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니엘은 시험지를 그대로 책상에 두고 일어났다. 그는 왕리밍의 오피스로 들어갔다.
오피스에는 왕리밍이 자신의 비싼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고 정면엔 홀로그램 영상이 떠 있었다. 그는 다니엘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치엔위는 왕리밍의 뒤에 서서 입가에 검지를 세우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자신의 옆으로 그를 불렀다.
왕리밍이 눈썹을 검지로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이게 어디서 건방지게 한숨이냐.]
캘리 박의 말에 왕리밍이 입을 다물었다. 커다란 홀로그램 화면엔 캘리 박의 얼굴이 떠있었다. 화상 통화 중이었다. 캘리 박은 전에 감옥에 들어갈 생각 아니면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다니엘을 반협박할 때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다.
[아칸소 건은 우리끼리만 하는 거다. NASA도 빠진다.]
“그렇게 해서 되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미국 본토 내에서 하는 건데 미국 영향력을 전부 컷할 순 없을 거 아닙니까.”
[이 새끼들이 지들 본토에 있는 게이트 없애준다고 하면 감사합니다, 하고 납죽 엎드려도 모자랄 판에 큰일에 계속 끼어들려고 하고 지랄이잖아.]
“프로젝트 비용은요?”
[다시 구하고 있다. 리이펑 장관이랑 얘기 좀 해봐라. 난 러시아 간다.]
“너무 까칠하게 하시는 거 아닙니까, 교수님? 그래도 미국이 최소한의 협조는 해줘야….”
캘리 박은 계속해서 다른 서류를 검토하면서 대꾸했다.
[아니야. 더 강하게 나가야 돼. 저번 사우디 건 이후로 이것들이 우리를 멋대로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또 착각하는 모양인데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기선제압 해야 한다.]
“교수님….”
왕리밍은 잠깐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이 통화는 분명히 도청되고 있을 것이다.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캘리 박이 카메라를 보았다.
[다니엘 스톤하츠.]
다니엘이 어물쩡거리자 왕리밍이 그를 돌아보며 눈을 부라렸다.
“…네.”
[너도 간다. 저번에 같이 움직였던 애들이랑 손발은 잘 맞았냐?]
이것 때문에 다니엘도 들어오라고 한 것일까. 근데 어딜 간다는 것인가? 아칸소 프로젝트를 말하는 것인가? 저번 일은 사우디 일? 근데 그게 뭐? 설명을 똑바로 안 해준다. 그래도 다니엘은 대답했다.
“괜찮았습니다만….”
[알겠다.]
캘리 박은 그의 말을 듣고 몇 개의 서류에 빠르게 서명해서 한민유에게 넘겼다. 왕리밍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너무 자극하는 건 좋지 않을 겁니다, 분명히…. 교수님도 성격이 너무 불같으실 때가 있으세요.”
[니가 나한테 훈계질 할 군번은 아닐 텐데.]
“차라리 정부 관료들은 상대할 만한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대중들이 떠들기 시작하면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자기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왜 못 막아?]
“모든 일을 코카서스나 리야드처럼 처리할 순 없습니다, 교수님.”
[하아….]
캘리 박은 만년필로 책상을 두 번 두드렸다. 왕리밍이 첨언했다.
“석세스 교수를 시현자로 참여시키지는 않더라도 프로젝트 연구원으로 데리고 오세요. 아무리 그래도 석세스 교수는 우리 쪽 사람입니다.”
[그래…. 그건 네 말대로 하마.]
그 뒤로도 캘리 박과 왕리밍은 얘기를 좀 더 나누었다. 아무래도 수에즈 프로젝트 때 지중해 한가운데 세계 최대의 몬스터 게이트를 열어버린 전적과 사우디아라비아 멸망 때문에 학회가 마주한 문제가 복잡해졌다. 전자의 결과는 확실히 짐이 되었고 후자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로마가 카르타고를 흔적도 없이 파괴시키고 얻은 것은 지중해의 패권이었다. 로마의 힘과 단호함을 확인한 지중해 인근국들은 그들을 인정하고 그 패권 아래로 들어갔다. 코카서스에서의 일은 분명히 학회에 그런 효과를 주었다. 모두가 그들을 경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천 년 전 로마의 문제는 그들의 문제이기도 했다. 로마는 완벽하지 않았고 그들도 완벽하지 않았다. 그들의 실수는 그들의 우산 아래에 있는 나라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이번에도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은 폭력이었다. 불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학생을 많이 받아줘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사람으로 만들면 되는 겁니다.”
[난 많이 받아줬다. 대가리 안 돌아가서 몇 명 제대로 못 배운 게 내 탓이냐? 너야말로 지금 너무 중국 쪽으로 기울었잖아.]
“중국이 사람이 많아서….”
[일단 니가 짱구 좀 열심히 굴려봐라. 석세스 교수도 한 번 만나보고.]
“네, 알겠습니다.”
그대로 왕리밍이 잠깐 생각에 잠기니 캘리 박이 피식 웃었다.
[왜. 쫄리냐?]
“…….”
[다 우리가 잘하고 있다는 증거다. 민유야, 이제 퀸 교수 연결해라.]
“…….”
다니엘은 잠깐 왕리밍의 얼굴을 보았다. 언제나 그에게 바락바락 화만 내던 그였다. 다니엘뿐만 아니라 그의 밑에 있는 학생들 중 그에게 머리채를 안 잡혀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남자인 것처럼 행동하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캘리 박의 앞에서는 말을 존대하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왜?’
그도 그저 안하무인인 인간이 아닌가? 예전 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물론 다니엘은 누군가의 머리채를 잡으며 감정을 토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 다니엘이 안하무인이 아니었던 건가. 모르겠다.
한민유 비서관은 다른 화상 미팅을 연결했다. 벌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어, 리밍이~]
그중 하나로 보이는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왕리밍에게 그렇게 인사했다. 왕리밍도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필리페 선배님.”
[어~ 잘 지냈냐? 얼굴 보기 힘들다?]
“저도 바빠서요.”
[그래도 니가 우리 청일점인데 얼굴 좀 비춰라.]
[하던 얘기나 마저 합시다.]
짧은 갈색 머리카락에 무뚝뚝한 얼굴을 한 스위스의 루소 교수가 그렇게 말을 잘랐다. 다니엘은 자신이 여기 있는 모두의 얼굴과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원래 사람 같은 거엔 관심도 없던 그가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여기 있는 모두의 이름을 알고 있다니?
‘갑자기 기분이 이상하다….’
다니엘은 잠깐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스웨덴의 이예프 교수는 미간을 무섭게 찌푸린 상태로 신경질을 냈다. 지금 상황에선 캘리 박 교수가 학회장 자리에서 물러나면 그녀가 다음 세계물리학회장이 될 것이다.
[아니, 우리가 아직 장비도 못 가져왔는데 여기서 아칸소 이상으로 뭘 더 하자는 거냐고, 어?]
그녀는 그 말을 하며 다른 젊은 교수 한 명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을 받은 젊은 교수는 ‘뭐, 어쩌라고?’ 라는 매우 불손한 표정으로 선배에게 큰 소리 쳤다.
[거,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니까요. 긍정적으로, 어? 내가 그거 다 가져와 준다니까!]
[자자, 리밍이랑 나는 얘기 끝났고. 우리 빅뱅 실험은 어떻게 설계할지 같이 머리 좀 굴려보자.]
둘은 계속해서 서로를 노려보았으나 자신들의 스승의 말에 동시에 서로의 반대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예프 교수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한 고질량점을 어디서 구하느냐는 거잖아요. 지구를 블랙홀로 만들 생각이 아니고서야.]
[달은 어때?]
[나쁘지 않은데? 없어져도 뭐…. 지구가 블랙홀 되는 것보단 사람도 덜 죽을 거 아냐.]
[어, 그 정도면 아주 쬐끔이다, 쬐끔.]
[좀 죽으면 어때. 우리가 천년만년 우주선 타고 떠돌아다닐 수도 없고.]
[질량이 얼마 이상이어야 한다고?]
[1E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합격.]
[그럼 달은 택도 없잖아?]
교수들은 다소 심드렁한 얼굴로 혹은 열띤 얼굴로 토의를 계속했다. 왕리밍도 어느샌가 아까의 걱정은 접어두고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치엔위도 평소의 찌든 얼굴은 가시고 반짝반짝한 눈으로 선진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가끔 손을 들고 질문을 하기도 했다.
“…….”
다니엘은 홀로그램만이 빛나는 어두운 오피스 안의 그늘에서 입을 다문 채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저번 사우디의 일로 학회와 연관되게 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원하던 대로 도현 킬스버그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이렇게 덜미까지 잡혀 안 해도 될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여겼다. 아니,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는 과거의 일에 마모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고 절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과거 4년 전, 그는 커다란 실패를 맞이했다.
그는 신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많은 이들의 괄시를 받으면서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많은 이들을 죽여가면서 이뤄야 할 힘과 지식 같은 것은 없는 것이었다. 그만한 가치를 지닌 것은 없었다. 그걸 바보같이 그만 모르고 있었다. 사람은 그저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까부터 기분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손이 떨렸다. 심장이 떨렸다. 마치 도현의 곁에 있는 것만 같았다.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점점 무디어져 가기만 하던 뇌가 수많은 전기 자극을 내며 돌아갔다.
“…중성자 극미 블랙홀을 만든 후 증발하기 전에 바로 플랑크 길이 이하로 줄인 후 결과를 보면 어떻습니까?”
자신이 말한 것인가?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것이 느껴졌다. 다니엘은 눈을 크게 떴다가 화면을 올려다보았다. 다들 그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 4년 전에 모두가 그를 보던 눈빛과는 전혀 달랐다.
[쟤 뭐랬죠?]
필리페 교수가 묻자 캘리 박 교수가 대꾸했다.
[아직 학부생 같은 거다.]
[공부는 좀 했나 보네. 음, 고급 중력마법학은 아직 안 봤냐? 미시세계에서는 중력마법이 잘 안 먹혀. 중성자 블랙홀 증발을 막을 수가 없다. 그래서 빅뱅 실험엔 고질량점이 필요한 거야.]
그녀는 그렇게 잘 설명해주었다. 다니엘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대답했다.
“…네….”
[언젠가는 그런 것도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
다니엘은 움찔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 말을 한 젊은 교수를 올려다보았다. 세현 퀸 교수였다. 전에 잠시 스치듯이 보았다. 그때 그녀는 다니엘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얼굴로 뜯어보았다. 그녀는 금세기 최고의 천재로 캘리 박이 가장 아끼는 제자이자 제일 최전선에서 인류를 미래로 이끌어 나가는 일류 과학자였다. 그녀는 분명히 이번에 사우디에 보복을 감행한 당사자일 것이다. 그는 캘리 박도 보았다. 그녀 또한 코카서스에 신벌(神罰)을 내린 장본인이다.
“교수님들은 후회하신 적 없으십니까?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응? 갑자기 뭔 개풀 뜯어먹는 소리냐?]
한참이나 짬밥이 낮은 다니엘이 또 이야기를 툭 끊고 들어오자 필리페 교수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퀸 교수는 성가신 얼굴로 말했다.
[집중 못 할 거면 나가라.]
그녀가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틀릴 리가 있냐?]
“…….”
저번 주 치엔위와의 짧은 대화를 통해 처음으로 말이 통하는 누군가와 같은 언어로 이야기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태어나 단 한 번도 그런 대화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없었다는 것도 해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저들이 하는 말을 듣는 것이 마치 언어의 세례를 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사고방식, 그들의 언어, 모든 것이 다니엘 스톤하츠의 것과 같았다. 그들은 다수를 하찮게 보았고 힘과 지식을 신으로 믿어 스스로를 이가 형상화된 화신으로 여기며 그들이 걷는 길을 성전(盛典)으로, 그 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없애버렸다. 그것이 정의든 도덕이든 사람의 목숨이든.
‘…나는 틀리지 않았다.’
그는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실패는 그렇게 생각했을 때 멈춰버린 것 그 자체였다! 고작해야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들이 그를 이상하게 본다고 스스로를 의심해버리고 말았다. 고작해야 그따위 벌레들이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있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4년 전, 그는 도망쳤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래서… 그래서!
그가 방황할 사이 이들은 여기까지나 와있었다. 그와 같은 곳을 추구하던 이들이 이렇게나 많았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다니엘은 그대로 그 방을 나왔다. 전화를 걸었다.
“사랑합니다, 도현 씨.”
그녀가 전화를 받자 다니엘은 곧장 말했다.
“정말로 사랑합니다, 도현 씨. 저는 앞으로도 영원히 도현 씨를 사랑할 겁니다.”
그리고 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사랑만을 위해서 살 수 없는 남자입니다. 그렇게 해서도 안됩니다. 저는 이루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걸 외면하고 사랑 타령만 했으니 도현 씨가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다니엘은 긴장했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가 답했다.
[맞을 거예요. 맞아요.]
다니엘은 신음을 흘렸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다니엘 씨 같은 남자는 휘청거리면 안 돼요. 자꾸 나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는 게 불편했어요. 그게 강요처럼 느껴졌구요. 다니엘 씨가 원하는 건 나를 통해 이룰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도현 씨….”
[지금이라도 깨달아서 다행이에요. 잘 지내요, 다니엘 씨.]
“제가 정답을 찾았어도 끝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다니엘 씨는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남자잖아요. 독선적인 남자예요. 그런 남자를 저 보고 만나라구요?]
“저는 이제 깨달았습니다. 도현 씨에게 독선적일 이유가 없습니다.”
[스스로를 의심해서 느끼는 공허함을 여자에게서 보충 받으려고 하는 남자는 딱 질색이에요.]
“이제 그러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유례없이 큰 목소리를 내며 자기주장을 했다. 도현이 물었다.
[그러면 다니엘 씨는 도대체 제가 왜 좋은 건데요?]
다니엘이 답했다.
“도현 씨의 말대로 나는 당신을 이용한 것뿐일지도 모릅니다. 도현 씨는 사람을 잘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 눈으로 나를 봐주고 그래서 내가 어떤 남자인지 말해주기를 바란 것일지도 모릅니다. 도현 씨가 말하는 대로 하면 뭐든 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가 도현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필요와 사랑은 같은 겁니다.”
[…….]
“도현 씨는 어떻습니까? 그래서 제가 미워지신 겁니까? 제가 이제 싫으신 겁니까? 제가 꼴도 보기 싫습니까? 도현 씨는 제가 필요 없으십니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마음속에 다시금 강한 신념이 뿌리내리기 시작한 상태였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다. 사랑도 아니었다. 전과 같이 눈을 가린 헛된 광신이 아니었다.
멈추면 안되는 남자가 멈춰서 있었다. 그가 이제 스스로의 다리로 서서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객관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해왔다고 여겼던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깨달았다. 누군가에게 의존한 사고와 판단에 합리가 있어도 자신의 것이 아니고 객관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그가 그렇게나 혐오하던 무지렁이들이 하는 짓과 무엇이 달랐단 말인가.
그렇게 다니엘은 드디어 자신을 똑바로 보고, 그래서 그녀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도현 씨가 절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요?]
그녀의 질문에 다니엘의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왜 그 사람이 다니엘을 떠났는지 알 것 같아요. 다니엘은 자신의 성적취향이나 기호를 저분한테 강요한 거잖아요. 저분이 다니엘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결국 그래도 제일 나은 놈이랑 하게 돼있어.]
[그만큼 대단한 남자가 없었을 뿐이에요.]
이윽고 다니엘 스톤하츠는 답했다.
“저는 도현 씨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도현 씨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나를 똑바로 봐준다면, 당신에게 저를 주겠습니다. 세계가 멸망해도 저는 당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저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남자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런 남자를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
보고서에 적시된 사실만 읽듯이 어조에 높낮이가 없었다. 그는 지금 도현이 어떤 얼굴로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지 궁금했다. 당황했을까? 건방지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사랑스러운 눈길을 하고 있을까.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얼굴이 너무 취향일뿐이에요.]
그녀의 대답에 다니엘은 처음으로 마음을 놓고 미소 지었다.
*
“어쩐지 더 건방져졌어….”
전화를 끊은 도현은 디바이스를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잘생긴 마사지사 둘이 족욕을 끝낸 그녀의 발을 하나씩 주무르고 있었다. 로웰이 고개를 홱 돌려 도현을 보았다.
“스톤하츠 씨입니까, 작가님?”
“네.”
“스톤하츠 씨 다시 오는 거면 와서 애플파이 좀 구워달라고 해줘요. 스톤하츠 씨 특제 애플파이! 진짜 맛있는데. 아, 살림하는 사람 하나 없다고 삶의 질이 떨어진다.”
로웰이 푸념했다.
“맛있는 데 아는데 사올까요, 선생님?”
“하…. 그래도 집에서 직접 만든 맛이 또 있어요.”
“송선호 시킬까요?”
“안 그래도 송 편집장한테 한번 말해봤는데 단 거 너무 많이 먹는다고 빠꾸 먹었어요. 거기다 잔소리를 얼마나 하던지. 하아. 스톤하츠 씨가 참 시키는 건 군말 없이 척척하고 남자가 참 참했는데. 송 편집장은 그런 맛이 없어요. 하기 싫으면 그냥 하기 싫다고 하든가.”
아우, 잔소리. 로웰이 치를 떨었다. 도현이 웃었다.
“송선호가 작은 거엔 잔소리가 심하고 큰 거엔 통이 크더라구요.”
“와, 송 편집장이 차 사줬다고 평이 후해졌네요?”
“후후후.”
“아, 근데 차가 좋긴 좋더라. 그런 건 아무나 못 사는 거라던데.”
마사지사는 총 네 명으로 다갈색 머리, 검은 머리, 금발 머리, 빨간 머리가 있었고 다들 웃는 얼굴이 능숙한 미남들이었다. 거기에 매니저로 두 명의 여자가 와있었다. 어시 두 명은 자쿠지에서 몸을 덥히고 있었다. 매니저들이 준비한 음료를 들고 도현과 로웰에게 다가왔다.
“이건 예전 마릴린 먼로가 아침마다 먹던 음료입니다. 날달걀에 따뜻한 우유를 섞었습니다. 달걀은 오늘 아침에 갓 나온 신선한 달걀이고 우유도 갓 짜낸 흑염소 우유를 처리하여 만들었습니다.”
로웰과 도현은 음료잔을 쨍하고 부딪치고 난 후 천천히 마셨다. 생각보다 역하지도 않고 먹을 만했다.
“맛있다. 달걀을 여기서 시킬까요?”
“음, 그래요. 고소하네.”
그리고 두 매니저는 보울에 이것저것 섞어서 준비하기 시작했다. 마사지사들이 그들을 마사지 베드에 눕혔다. 이들은 모두 송선호가 끊어준 케이지라는 고급 뷰티살롱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 이번에 도현과 로웰이 통 크게 어시들 것까지 쐈다.
몸을 먼저 덥혀 놓았던 로웰과 도현의 온몸을 부드러운 거품으로 마사지하고 닦아낸 후 그들이 준비한 특제 마사지 팩을 얼굴부터 천천히 전신에 올리며 설명했다.
“예전에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즐겨했다는 팩을 전신에 올립니다.”
“음~”
느낌이 너무 좋다. 시원하다. 아직 금전적으로 완전히 괜찮아진 것은 아니지만 역시 이런 호사도 가끔 필요하다. 스트레스가 풀린다…. 로웰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아, 정말 이겨서 케이지 1년 회원권 따야겠는데요? 이거 너무 좋다.”
로웰은 4강에 올라갔다. 일요일이면 경기다. 이틀을 앞두고 있었다. 도현이야 쓰던 가락이 있으니 예전에도 이런 고급 마사지를 많이 받아봤지만 로웰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도 어깨나 허리 통증 때문에 받던 중저가의 마사지보다 케이지가 더 좋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렇죠…? 저도 케이지는 송선호가 끊어줘서 처음 받아봤는데 진짜 비싼 값 해요…. 으음.”
극락이다. 역시 이런 게 돈 쓰는 맛이지. 도현과 로웰은 그렇게 아침 세 시간 동안 극락을 체험하며 보냈다. 로웰의 일요일 경기 응원 겸 마감을 끝낸 기념 겸으로 하루 크게 쓰기로 한 것이다. 점심부터 제법 유명한 요리사를 불러 저녁까지 음식을 하게 했다. 예전에는 있는 대로 먹고 살던 로웰도 도현을 따라다니며 제법 입맛이 고급이 되어 재료를 가려내거나 좋고 나쁜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평생 이렇게 살면 소원이 없겠네요, 작가님.”
로웰은 풍족하게 먹고 마시며 3층 테라스에 앉아 지는 노을을 보다가 문득 말했다. 도현이 그녀의 잔에 와인잔을 살짝 부딪치며 말했다.
“열심히 벌어요, 우리.”
그렇게 금요일은 호사를 누리고 다음 날 로웰은 그 다음 날 있을 4강전을 대비하여 연습을 하러 갔고 도현은 같이 갔다가 다른 4강전 팀의 경기를 잠깐 구경하고 약속을 나갔다.
송선호가 사준 차는 R사의 진주색 대형 세단이었다. 음악가와 음향 전문가를 고용하여 배기음 소리마저 예술적으로 조율한 차다. 유지비는 제법 들지만 누차 말했듯 원래 비싼 차는 유지비가 빵빵하게 들어야 의미 있는 것이다. 싸구려는 취급 안 한다.
도현은 뒷좌석에 앉아 자동으로 주행하는 차 안에서 창밖을 구경하며 시내로 들어갔다.
‘아람이는 이런 좋은 걸 경험해본 적이 없단 말이야. 좋은 거, 뛰어난 거, 훌륭한 거…. 그런 클래스의 사람들을 만나본 적도 거의 없고. 그나마 만나본 사람은 적대하고 있고. 너무 이상주의적이라, 아니, 그건 이상주의도 아니지. 철없어 보이기만 하는 것 같다. 상대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인데 도대체 아람이가 어떻게 그 사람을 이길 수가 있냐는 거야.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하나.’
천재는 바보를 연기할 수 있어도 바보는 천재를 연기할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의 능력과 경험은 그 사람의 시야와 사고의 크기를 결정한다.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의 주인공 아람 첸은 현재 세계관 최종 보스급의 사람과 적대하며 사회정의구현을 위해 힘쓰고 있으나 원체 그 최종 보스가 사람과 사회의 본질을 꿰뚫고 세계를 질서 있게 다스리고 있는지라 사실 아람 첸이 추구하는 그 정의라는 것이 굉장히 얕아 보이기까지 하고 있다. 열린 결말로 갈 수밖에 없을까.
도현은 차를 타고 가는 중에 문득 작품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를 연재하기 시작한 지도 어언 1년이다. 작품 내의 일은 물론이고 도현의 일신상에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7살 때의 도현은 매일매일 너무나 재미있어 미래에 대한 생각은 거의 해본 적이 없었다. 어린아이다운 천진함으로 하루하루 넓어져 가는 세계를 탐험했다. 어린이는 잘 크는 것이 본분이었으니 그 본분을 지키며 잘 살았다. 17살 때의 도현은 이제 자신은 다 자라 더 이상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 이미 다 정해졌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물론 27살의 도현 킬스버그가 생각하기에는 철없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내가 돈을 그렇게 벌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못 해봤고 내가 그렇게 빚을 질 거라는 것도 몰랐지. 그리고 그 빚을 이렇게 다 갚을 거라는 생각도 못 했고.’
지금 이렇게 뒤를 돌아보면 그때 이랬으면 좋았을 걸, 혹은 저랬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고민하기도 했다. 엄마가 했던 말들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에반이 말했던 것처럼 살아야 하는 걸까, 역시 로웰이 한 말이 맞을까. 현명해지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현명해지는 것은 오히려 겁쟁이가 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만 같기도 했다. 어떤 경우라도 당당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역시 이렇게 젊은데 벌써부터 늙은이처럼 현명이니 뭐니 생각하는 게 이상한 거야.’
도현은 이미 충분히 똑똑했다. 젊은 시절에는 성공도 실패도 경험인 거겠지.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고 이렇게 지나고 보니 피식 웃음을 나올 정도로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이었다. 또래의 많은 사람들처럼 아무것도 도전해보지 못하고 그래서 아무것도 경험해보지 못한 채 지나가는 시간에만 전전긍긍하며 살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을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았으니 억울할 일도 없었다. 내가 사랑받는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다. 어차피 나를 가장 사랑하는 것은 나였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택하고 실증나면 버렸다. 세상에는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아주 많다.
‘실수하고 실패하는 것을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하지 말자….’
도현은 그렇게 결론 내렸다. 좋은 차는 중후한 엔진음을 부드럽게 내며 시내를 질주했다. 곧 층수가 177층에 달하는 거대한 유리 건물 앞에 섰다. 노을을 받아 크리스탈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시큐리티 중 하나가 문을 열어주었다. 도현은 차에서 내렸다.
“몇 층으로 가십니까?”
“117층.”
그렇게 도현이 대답하자 시큐리티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주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층수까지 눌러준 뒤 물러났다. 이런 건물을 가질 정도의 부는 어떻게 이룰 수 있는 것일까? 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177층은 건물의 스카이라운지였다. 창밖으로 메트로스퀘어 위에 뜬 거대 홀로그램이 보였다.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이런 사교 파티는 오랜만이었다. 도현은 잠시 옷차림을 확인하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변을 한 번 돌아보았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부터 보통 사람과는 생김새부터 다른 사람들.
“도현아.”
도현 킬스버그는 낮으면서도 허스키한 울림이 있는 그 목소리를 듣자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화려한 골든 블론드, 깔끔하게 잘라 놓아 단정하다. 아름다운 비취색 눈동자에 짙은 금색 속눈썹이 예쁘다. 시원하게 큰 입매에 붉은 입술이 섹시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덜컹하는 미남이었다.
“에반.”
도현이 그렇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에반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의 이런 차분함이 좋았다.
177층에 달하는 고층 빌딩의 스카이라운지에서는 지금 누군가의 생일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에반이 파트너로 같이 와줄 수 있냐고 해서 흔쾌히 응했다. 예전에도 그의 모임에 참여하면 참 좋은 경험을 많이 했다. 파티장의 가운데 아라비아 숫자 40을 나타내는 황금 나무가 크게 자라나 있었다. 마흔 살 생일을 도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것일까. 그리고 그 황금 나무에서 난 황금 사과를 들고 온몸에 황금색 칠을 한 젊은 남자들이 서빙을 하고 있었다. 사방이 화려한 크리스털 장식으로 빛났다. 가운데는 선물이 산처럼 가득 쌓여 있었다. 에반과 도현도 선물을 두고 왔다. 볼거리가 많았다. 눈에 익은 유명 인사들도 꽤 있었다.
“어떻게 알게 된 사람이야?”
“일하다가. BB파머시 사장이야. 마도의사인데 제약회사를 차렸어.”
“잘 돼? 마도제약 같은 건 다 헛소리라던데.”
“실력은 그럭저럭 있는 의사였어. 몇 년 전엔 약학 박사도 땄다고 하고 밑에 사람들도 제법 있고. 요새 제일 각광 많이 받는 제약 스타트업이야.”
“투자했어?”
“생각 중.”
“친해?”
“예전에 두바이에서 두세 번 만나봤어.”
“흐음.”
도현도 눈을 돌려 이 파티의 주인공이 누군인지 찾기 시작했다. 에반과 다니는 건 이런 것이 재밌었다. 도현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대다수 사회의 상류층을 이루며 부와 지식을 이끄는 사람들이다. 도현이 한창 벌 때 이런 것에 좀 더 집중했으면 오히려 빚을 갚는 것이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때의 인맥이 제법 이어져 오고 있었지만 언제나 또 새로운 사람은 나타나는 법이다.
“에반 블랙! 이게 얼마만이야~”
사람들의 중심에 있던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에반을 알아보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생일 축하합니다, BB.”
그녀는 머리를 짧게 자른 흑인으로 에반과 서로 뺨에 입을 맞추며 가볍게 인사했다. 도현도 그녀와 인사했다.
“남자친구가 너무 잘생겨서 피곤하겠어요.”
“전 남자친구예요. 반가워요. 도현이라고 부르세요.”
도현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오늘 생일인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BB라고 해요. 그럼 도현 씨는 제 선물 뭐 가져왔어요?”
BB가 뜬금없이 물었다. 도현이 웃었다.
“에반이 오자고 해서 따라온 거라서요. 특별히 준비한 건 없는데 혹시 가지고 싶은 거 있으세요?”
“네, 옆에 남자요.”
BB가 냉큼 말했다. 도현도 냉큼 대답했다.
“가져가세요.”
도현이 그의 엉덩이를 밀었다. BB는 진짜 좋아했다.
“진짜?”
“오늘 생일인 사람이 왕이죠. 잘 모셔.”
“어떻게 모실까요, ma’am?”
그렇게 셋이서 잠깐 얘기를 나누었다. 언뜻 KP글로비스의 얘기도 들리는 걸 보니 송선호의 아버지 회사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참 좁은 세상이다. 송선호는 그녀를 만난 적이 있을까? 그렇다 해도 그는 도현에게 일 얘기를 거의 하지 않으니 몰랐을 것이다.
부가 오가는 곳에는 퀄리티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비율이 올라간다. 그런 사람들은 만나는 것만으로 행운이고 말을 섞어보면 그들이 얼마나 미래에 대한 안목과 의지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미래를 자기 실현적 예언할 정도의 개척가이기도 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이쪽도 기운을 받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되었고 도현은 자신의 세계를 조금 더 넓혔다. 즐거운 일이었다.
“그럼 오늘 파티 잘 즐겨요, 도현 씨.”
“고마워요, BB.”
BB는 자리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 도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다소 선망 어린 표정으로 보다가 문득 물었다.
“역시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하구나. 기운이 달라.”
“네 글 보는 독자들이 몇 명인데. BB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걸.”
“내 글은 사람들이 보고 싶은 환상을 그럴듯하게 그려 놓은 것뿐이야. 없는 걸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환상을 강화시키거나 대리만족만 줄 뿐이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지는 모르겠어.”
“그렇게 치면 BB도 마찬가지야. 아직 만들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BB를 보러 오게 만들었잖아. 그게 힘이야. 네가 사람들이 네 글을 볼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야.”
에반이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넌 참 플러팅을 잘 한단 말이야.”
“사실을 말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으니까.”
야외로 나가니 신나는 노래와 함께 풀 파티가 한창이었다. 오페라를 보러 갈 땐 둘 다 세련되어도 격식 있게 차려입었던 둘이나 이번엔 에반도 머리와 단추를 풀어헤쳤다. 검은 셔츠의 단추를 가슴까지 풀고 몸을 드러냈다. 도현은 머리카락을 너울지게 세팅하고 빛이 반짝거리는 스팽클이 촘촘하게 달린 로즈골드 색 파티 드레스를 입었다. 그대로 사람들 속에 파묻혀 그들을 따라서 혹은 그 속에서 둘이서만 춤을 췄다. 옆에서 재간을 떠는 황금 칠을 한 스트리퍼의 엉덩이를 너도나도 때리고 있었다. 신나게 놀다가 어느 순간 둘 다 열기에 얼굴이 상기된 채 빠져나왔다.
“아, 재밌어.”
어느새 도현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아찔할 정도로 높은 층수가 그대로 느껴지는 유리 바닥 위였다. 도현은 난간에 등을 기댔다. 잠깐 오싹했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하하. 아직도 파티 보이구나? 멀끔하게 입고 다녀서 이제 다 청산한 줄 알았는데.”
“재밌잖아. 넌? 청산했어?”
“나야 이제 소소하게 아는 사람들끼리만.”
에반이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그때 어렸구나.”
“아, 나도 지금 같은 생각 했는데.”
도현이 잠깐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순간 모든 게 사라진 듯, 소란스러움도 번잡함도, 고민도 멀리 가버리고 둘만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눈빛을 마주치고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충만함이 있었다. 거울 속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존재감이었다. 도현은 손을 올려 그의 짧은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었다.
“자른 거, 아까워.”
“다시 기를까?”
“응. 예뻤는데.”
이 이상한 기분. 심장이 뛰었다. 그 어떤 남자와 함께 있어도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은데도 뭔가 안타깝고 헤어지면 허전하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로의 머리카락을 만지다가 문득 도현이 물었다.
“기억나?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지.”
에반이 답했다.
아직 추운 봄날이었다. 도현은 그때 대학생이었다. 일이 몹시 바빴을 때다. 일주일에 4일이나 마감이 있었다. 봄학기 수업을 들으며 일도 해야 했다. 빚을 갚겠다고 로웰과 용을 쓸 때보다도 훨씬 빡빡하게 살았는데도 그렇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꽃샘추위가 극심할 때였지만 마이바흐를 끌고 다니던 남자친구가 꼬박꼬박 그녀를 데리러 오고 데리고 갔기 때문에 편하게 다녔다. 그는 얼굴도 제법 생기고 과에서 인기도 있는 남학생이었다. 사귀기 전까지만 해도 도현에게 크게 호감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사귀자고 했을 때는 의외라 호기심이 들어 사귀게 되었다.
하지만 그도 곧 도현이 만났던 남자들이 으레 그랬듯 그녀의 앞에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허둥지둥거렸다. 그래서 금세 질렸다. 전 같으면 금방 찼을 텐데 바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그냥 두었다. 약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남자들이란 결국 이렇게 다 똑같은 것일까. 매력 없고 재미없고 바라는 것만 많고. 비슷한 데이트 코스. 거기서 거기인 대사. 어딘가 핀트가 나간 듯한 사랑 고백. 결국 바라는 건 스킨십과 섹스뿐인 것만 같은 남자들. 차라리 그들이 섹시하기라도 했다면 말을 않겠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도 뭘 바라는 지 아직 알 수 없던 때였다.
수업이 끝나고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흥분된 어조로 마구 묻던 시끄러운 남자친구를 달고 잎사귀가 파릇하게 올라오는 캠퍼스를 걸어가고 있었다. 수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저 옆을 스쳐 가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새카만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눈에 띄는 짙은 블론드, 붉은 입술, 큰 키에 멋진 옷차림. 오른손에 담배를 든 그는 천천히 담배를 빨면서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어째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그를 따라서 시선을 돌렸다.
[‘분위기가….’]
그의 주변을 머문 공기만이 어쩐지 미묘한 흐름을 가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도 동시에 도현을 돌아보았다. 서로 말없이 그렇게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선글라스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의 눈동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고 생각했다.
[누구…? 아는 남자야?]
도현이 그렇게 우뚝 멈춰 서자 옆에서 재잘거리던 남자친구가 그렇게 물었다. 도현은 여전히 선글라스를 낀 그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아니.]
도현은 다시 가던 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심장이 뛰었다.
[‘이상한 기분….’]
이런 기분은 난생 처음이었다. 약간 소름이 돋았다. 도현은 다시 그 남자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선배, 잠깐만….]
도현이 남자친구에게 뭐라고 하려고 했을 때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고개를 돌렸더니 그가 아주 가까이 서 있었다. 그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가 왜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는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남자였다. 비취색 눈동자… 짙은 속눈썹…. 도현은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점심… 아직 안 먹었어?]
그는 다짜고짜 반말로 물었다. 그는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고 도현의 눈동자만을 바라보았다. 도현도 그랬다.
무언가 알고 싶다는 듯이,
알아내고 싶어서
[응. 아직 안 먹었어.]
도현도 자연스럽게 그에게 그렇게 답했다. 그가 가까이 있으니 이상한 기분이 몇 배로 증폭되었다. 그에게서 체취와 섞인 달콤한 향수 냄새가 났다. 왜일까? 취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도현의 손을 잡고 다른 쪽 손을 잡고 있는 남자를 힐끗 보았다가 다시 도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선배, 점심은 다음에 먹자.]
도현은 남자친구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멍청하게 있던 그는 그제야 바락 소리를 질렀지만 도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한 번 더 보곤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대로 그날, 그때 처음 본 남자랑 점심을 먹으러 갔다. 하루 종일 같이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에 바로 남자친구에게 헤어지자고 하고 그 남자와 만나기 시작했다.
“그때 그거 뭐였을까? 난 아직도 모르겠어.”
웃기다는 듯이 도현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늘로 시선을 돌려 별을 찾았다. 에반은 그녀가 기댄 아찔한 난간 양쪽을 잡으며 몸을 가까이하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그가 답했다.
“그래? 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는데.”
*
이번 메트로서울 오픈 테니스 대회에서 도현 킬스버그는 8강까지 올라갔다. 로웰 리는 4강까지 올라와 한 시간 뒤면 경기를 치를 것이다. 승자독식이라는 저명한 법칙에 따라 상품은 1등밖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으나 도현의 남자들이 이것저것 많이 사서 나른 덕분에 이번엔 아주 풍족한 친목 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죽을 것 같아….’
결국 송선호는 앓아누웠다. 그는 물수건을 눈 위에 얹은 채 카우치에 누워 있었다. 아이보리 색 고급 마감재가 환히 빛나는 그의 본가 맨션이었다. 그가 누운 럭셔리 카우치 쪽 벽에는 커다란 명화가 걸려 있었다. 수행비서가 물 한 잔과 아스피린을 가져왔다.
“오늘 스케쥴은 취소할까요, 사장님?”
“고마워요….”
그때 그녀에게 차를 선물하고 그녀의 지인들에게 선물을 돌렸을 때는 분위기가 참 좋았다. 그날 밤에는 일찍 그녀의 집으로 가서 그녀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너무나 행복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송선호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환상적이고 행복한 밤을 함께 보냈던 그녀가 다음 날이면 다른 남자에게도 환하게 웃어줄 때마다 어찌할 수 없는 상실감과 질투로 속이 아팠다. 다른 놈들은 도대체 무슨 신경줄인지 모르겠다. 그녀의 근처에는 항상 많은 남자들이 얼쩡거리는데 어째 스트레스를 받고 죽을 것 같은 건 송선호뿐인 모양이었다.
‘괜찮다. 나는 견딜 수 있다. 나는 괜찮다. 나는 견딜 수 있다. 도현이는 날 사랑한다. 도현이는 날 사랑한다. 도현이는 날 사랑한다….’
송선호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하며 쓰린 속을 달랬다. 원래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받기 시작한 건 당연 그 양아치 새끼가 메트로서울로 오면서부터다. 송선호는 분명히 그가 과거의 남자이고 그녀와 현재 연인관계에 있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비록 3명 중의 한 명일지라도) 그 양아치 새끼가 그녀의 근처에 있는 걸 볼 때마다 심장이 덜컥했다.
미르 킹쉴드, 이 새끼는 멍청이다. 빨아도 못 쓸 걸레 새끼이고 도현과 비하기에는 수준이 한참 떨어지는 놈이었다. 그는 교양도 없고 상식도 부족했다. 고작 있는 거라고 해봐야 몸만큼이나 헤프게 웃고 다니며 질질 흘리는 것뿐이었다. 감히 송선호에게 비할 수나 있는 놈인가. 저런 남자가 좋아 보이는 것도 한때다. 그가 도현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다니엘 스톤하츠는 이미 그녀의 눈 밖에 난 지 오래인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그때의 일로 이 새끼는 완전히 제낄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때 한 일도 그렇게 성과가 없었던 것만도 아니다. 그 새끼는 역사에 대량살인마 사이코패스로 실려도 모자랄 정도의 정신병자다. 당연히 그녀의 곁에서 치워버려야 할 1순위의 남자였다.
‘에반 블랙…. 그 새끼는…. 그 새끼는….’
송선호는 벌떡 일어나 얼굴에서 물수건을 치우고 아스피린을 한 알 입안에 넣고 물을 마셨다. A파크 테니스장으로 가야겠다. 그녀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는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심각한 얼굴로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벌써 7월이다. 그녀와 만나기 시작한 지도 반년에 가까워졌다. 행복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고. 그녀와 함께 있으면 그의 인생이 그렇게 다채로워졌다. 그녀는 송선호라는 남자를 잘 꿰뚫어 보았으며 그것으로 그를 행복하게도 만들었고 불행하게도 만들었다. 그럴수록 그는 그녀에게 더욱 빠져들었다.
모든 걸 다 가지고 태어난 인생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부자가 되는 것보다 부자로 사는 것이 더 힘들다는 말을 누군가 했었지. 사람은 자유 앞에 무력하다. 더 이상 이뤄야 할 것이 없는 사람은 쉽사리 길을 잃는다. 그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재벌 집안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 가풍이 몹시나 보수적이며 지켜야 할 것이 많고 제왕적인 회장님 아래에서 후계자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마도 그녀가 자식들에게 그런 자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녀가 정해 놓은 법칙하에 살지 않고 자유만을 탐닉했던 인척들은 쉽사리 폐인이 되곤 했다. 마약, 섹스, 파티. 이런 것에만 매몰되어 인생을 허비하며 비명횡사하는 것은 몹시나 쉬운 일이었다.
송선호는 그런 인척들이 싫었다.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분명히 특권이었지만 그 운을 가치 없이 소진해버리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세상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이런 클래스에 있는 사람일수록 그런 어려운 문제에 도전해야 하는 것이다. 송선호도 너무나 보수적인 집안의 딱딱한 분위기에 반발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가 제임스 윤을 좋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다르게 싫다면 회피할 게 아니라 도전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면 된다.
‘아니, 그저 힘을 가지는 게 좋은 것뿐일지도 모르지. 그리고 결국 그 힘으로 도현이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니까 지금 함께 있는 것보다 일에 집중하는 것일까? 송선호의 머릿속에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러자 좀 화가 났다.
‘아니, 난 왜 이렇게 도현이한테만 자신이 없는 거냐….’
그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아냐. 도현이는 날 사랑한다. 도현이는 날 사랑한다. 날 사랑한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차는 A파크 테니스장에 도착했다. 송선호는 잠시 차창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 후 안으로 들어왔다.
‘도현이는….’
“선생님~”
송선호는 관중석을 보았다. 새하얀 알렉산더 맥퀸 드레스에 하얀 망사가 달린 커다랗고 하얀 캐플린 모자를 쓴 도현이 보였다. 보는 사람의 눈이 화사해지는 것처럼 예쁘다.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하얀 손수건을 고상하게 흔들고 있었다.
“선생님, 꼭 이겨야 해요~!”
경기가 시작하기 직전인 모양이었다. 도현은 로웰을 응원하고 있었다. 로웰이 저쯤에서 라켓을 흔들었다.
“걱정마요~ 이길게요, 작가님!”
“파이팅~”
역시 사이가 가장 좋은 것은 저 둘이다…. 송선호는 복잡한 얼굴로 로웰 리를 잠시 보고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그리고 도현을 부르려는데 멈칫했다.
“로웰 선생님, 반드시 이기실 겁니다. 선생님은 제가 본 어떤 선수들보다 투지와 열정이 강하신 진정한 투사이십니다.”
“하하하! 그런가! 그런가!”
누군가의 추켜세움에 로웰이 호탕하게 웃었다. 송선호는 입을 딱 벌렸다.
‘다니엘 스톤하츠…!’
송선호는 그대로 도현과 이번 경기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다니엘을 눈이 튀어나올 기세로 쳐다보다가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퍽 치고 지나가자 고개를 돌렸다.
“도현아~ 나 왔어!”
“미르~”
미르 킹쉴드였다. 송선호가 화를 내기도 전에 누군가 또 그의 어깨를 퍽 치고 지나갔다.
“도현아.”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화사한 꽃다발을 들고 나타난 에반 블랙이었다. 송선호가 눈을 부라리며 그를 노려보자 그는 역시나 미소로 응대했다.
“왜 그렇게 얼빠진 얼굴이야? 날도 좋은데.”
“…….”
송선호는 잠시 멈춰선 채 심호흡을 했다.
‘화내면 지는 거다. 화내면 지는 거다. 화내면 지는 거다…!!’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에반을 지나쳐 관중석으로 올라갔다. 미르 킹쉴드와 포옹을 하고 있던 그녀는 송선호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바쁘신 남자가?”
“그래도 선생님 경긴데 와야지.”
“잘 왔어.”
도현은 미르를 밀어내고 송선호와 포옹하고 인사했다. 그는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다니엘 스톤하츠를 노려보았다. 저 또라이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온 것이란 말인가! 다니엘이 입을 열었다.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송 편집장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셨죠? 앞으로 그런 일은 다신 없을 겁니다.”
“…….”
“다니엘 씨가 사과하잖아.”
“…부디 그러길 바랍니다.”
송선호는 한 자 한 자 힘주어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미르도 ‘음?’ 하고 상황을 보더니 다니엘의 등을 손바닥으로 퍽 쳤다.
“아, 그땐 나도 쏘리.”
“…….”
“나도 사과했어, 도현아.”
“잘했어요, 미르. 착해요.”
도현이 칭찬하자 미르가 활짝 웃었다.
“이번 오픈도 이렇게 마무리 되는구나. 다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에반은 도현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그렇게 인사했다. 도현이 그의 뺨에 입을 맞추며 인사했다.
“고마워. 자자, 다들 오늘 로웰 선생님 응원하는 거예요? 알았죠? 싸우면 안 돼요?”
도현은 남자들을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곧 경기를 시작하는 로웰을 만나기 위해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자리에 앉으려고 보니 가운데 자리를 비워 두고 나란히 앉은 남자들이 보였다. 다들 이쪽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하긴, 여기만 딴 세상 사람처럼 신수가 훤한 남자가 넷이나 앉아 있었다.
익숙한 남자와 새로운 남자
능숙한 남자와 숙맥 같은 남자
똑똑한 남자와 멍청한 남자
자존심이 강한 남자와 아닌 남자
잘 웃는 남자와 그렇지 않은 남자
바쁜 남자와 한량 같은 남자
금발과 흑발
남자들이란 건 참 분류하기가 쉬운 족속이다. 잠시 그렇게 그들을 보고 있으니 그들 모두가 도현을 바라보았다. 도현은 잠시 그들을 감상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주얼리 컬렉션을 완성한 기분이다. 도현은 그들의 가운데로 가서 앉았다.
그렇게 도현 킬스버그까지 가운데 앉으니 그곳만 유난히 화사하게 빛났다. 그녀는 로웰에게 손을 흔들었다. 로웰 리는 크게 눈을 뜨며 상대편에게 말했다.
“봤냐? 내 갤러리? 넌 나한테 이기려면 한참 멀었어!”
“선생님….”
오늘 로웰 리의 상대는 바로 신재인. 그녀는 로웰 리의 어시스턴트였다. 로웰 리와 신재인은 무서운 운빨과 괄목하게 성장한 실력으로 이 자리까지 왔다. 참고로 어제 치렀던 다른 4강전의 주인공은 사라와 퀸이었다.
같이 동고동락하며 살았지만 엄연히 도현 킬스버그는 로웰 리의 사람이었다. 따라서 줄줄이 사탕으로 저 낯이 번드르르한 남자들도 딸려갔다. 신재인을 응원하는 사람은 같은 어시스턴트인 윤지호 외에도 얼마 되지 않았다.
“가진 자만 이기라는 법 있어? 재인아, 파이팅!”
윤지호가 코트까지 내려와서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녀의 눈빛에서 커다란 기대가 읽힌다. 살면서 누군가의 기대를 이렇게까지 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엄마도 이렇게 신재인에게 기대를 걸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싸늘하다….’
주변의 흥분이 가슴에 날아와 꽂힌다. 이런 것이 바로 주인공이 된 느낌일까. 긴장되었다. 제 자리가 아닌 듯 불편하기도 하다. 그녀는 로웰 리처럼 유명한 것도 아니고 인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주눅이 들 것만 같다.
합병 전 KP노벨의 삽화 외주를 받곤 하던 프리랜서였다. 송선호의 스카우트로 로웰 리의 밑에 들어가게 되어 도현의 집에서 거의 숙식하게 된 지 벌써 몇 개월 차. 그녀는 간혹 집안 식구들의 그림을 그려 선물하기도 했고 로웰을 따라 이스트드래곤의 열성팬이 되기도 했다. 작년 겨울에 지니 호에 타면서는 로웰과 다른 동료와 함께 신세계를 함께 경험하기도 했다. 그녀는 주어진 상황에 적응을 잘하는 사람이었고 주변 사람들이 하는 대로 잘 따르는 편이었다. 그 말인즉슨 그녀가 그렇게 모나지도 개성이 강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걱정하지 말자. 이것은 테니스 경기…. 로웰 선생님과 나의 관계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와는 전혀 상관없는 정정당당한 승부의 세계!’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네트의 건너편에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한 쌍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당당하게 하늘로 쏟은 짙은 금발 삐삐 머리, 라켓을 꽉 쥔 두 손. 로웰 리, 그 두 손엔 수백만의 독자들을 울고 울렸던 내공이 실려 있었다. 신재인은 그녀를 존경했다. 하지만 오늘의 그녀는 적이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로웰이 선공이다. 그렇게 용호상박을 벌이는 동안 갤러리들은 누군가 점수를 올릴 때마다 우아하게 박수를 쳤다. 미르 킹쉴드만 조금 어색해 보이는 것 빼고는 참 완벽한 갤러리다. 애초에 그는 복장부터 약간 미스매치다.
“선생님은 정말 재능이 있나 봐요. 정말 배운 지 얼마 안 됐는데 폼도 좋고.”
“도현 씨도 정말 잘하십니다. 로웰 선생님도 정말 잘하십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아부하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도현이 웃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많이 바쁜 거 아니었어요?”
“바쁘지 않습니다. 도현 씨를 위해서라면 언제나 시간을 낼 수 있습니다.”
“정말요?”
“…시즌에 들어가면 좀 더 나아질 겁니다.”
다니엘의 대답에 도현은 약간 안타까운 얼굴로 송선호도 힐끗 보았다가 대꾸했다.
“하여튼 능력 있는 남자들은 다들 가만히 안 놔두는 거네요. 바빠.”
“곧 시즌에 들어가니 작년만큼은 만날 수 있습니다…!”
“하하하. 알았어요. 너무 큰 소리 내면 안 돼요.”
“죄송합니다….”
다시 돌아온 다니엘 스톤하츠는 어쩐지 처음의 숙맥처럼 돌아간 것 같았다. 놀리는 재미가 약간 더 생겼다. 송선호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얼굴로 보고 있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한테만 저렇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했더니 뭔가 화가 날 것 같기도 하면서 뭔가…. 뭘 바라겠는가. 이제 여기서 명수가 더 늘어도 전혀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주변에서 이쪽을 구경하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송선호는 시선을 더 옆으로 돌렸다. 저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지는 훤했다. 그녀의 남자들 중에 하나로 취급되어 아마 그녀의 이름을 높이는 데만 쓰일 것이다. 그는 바보로 보이거나 호구로 보이거나 둘 다로 보이거나 그렇겠지. 역시 여전히 자존심이 상한다.
‘오지 말 걸 그랬나.’
“왜 그래?”
도현이 그의 얼굴을 보더니 그렇게 물었다. 송선호는 심장이 두근했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후우. 도현이는 날 사랑한다. 지금도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고. 송선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그머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응?”
도현은 흥미진진하게 로웰의 경기를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미르 킹쉴드가 그걸 눈치채고 자신도 덥석 도현의 허리를 껴안았다.
“미르, 더워요.”
“안 돼.”
“덥다니까.”
“싫어.”
“손, 손.”
도현과 미르는 손을 잡는 수준에서 타협을 보았다. 누군가 점수를 올릴 때마다 그녀가 그들의 손을 꽉 잡았다.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같이 손을 잡고 오래도록 있는 것도. 어쩐지 하루종일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네, 에반 블랙입니다.”
송선호의 옆에 앉아 있던 에반이 전화를 받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양해의 제스처를 취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멀찍이 떨어져서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송선호는 그가 통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도현의 손등을 입술에 대며 경기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다시 돌아왔다. 그는 도현의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가봐야 될 것 같아.”
“그래?”
“응, 미안. 연락할게.”
“알았어.”
그렇게 말하고 그는 정말로 가버렸다. 도현은 잠시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때는 돌아보지 않았지만 송선호는 다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저 새끼는 저렇게 도현이에게 미련이 없는 것처럼 구는데도 왜 그녀에게 특별한 것일까. 저 새끼는 자기 입으로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미련이 남았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송선호는 불안해서 기어코 와버리고 말았던 이 자리를 그는 저렇게 발걸음 한 번 멈추지 않고 가버렸다.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뺏기는 게 정말 불안하지 않은 것인가?
송선호는 조용히 그녀에게 물었다.
“저 새… 에반 블랙이랑은 왜 헤어졌다고 했었지?”
“응? 갑자기 그건 왜?”
그녀가 경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그냥.”
“음….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왜?”
설마 차였나? 송선호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오래 알아 왔고 그녀의 남자친구들도 아는 동안 내내 봐왔지만 그녀가 차이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미련을 남기는 것도 본 적 없었다.
“프라하에서 헤어졌어. 다음에 볼 수 있을 것처럼 인사하긴 했는데 이게 마지막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 걔랑 같이 있는 게 재미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던 때였어.”
“니가 찼어?”
“굳이 따지자면 동시에 찼을까?”
“그럼 지금은… 다시 만나는 거야?”
“다시 만나는 거 보니까 질투 나?”
송선호의 성가신 질문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던 도현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질문을 던졌다. 그는 도현만큼 의연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흐응, 그런 얍실한 놈이 좋은 거야?”
미르 킹쉴드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는 도현의 얼굴 가까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가며 은근히 몸을 부볐다.
“남자는 크면 클수록 좋은 거라니까?”
“그건 맞지만.”
도현은 그가 잡은 손으로 그의 가슴을 만졌다.
“에반도 어디 가서 작다는 말 들을 남자는 아닌데. 참 미르가 많은 남자 마음 아프게 한다니까요.”
“하하하! 내가 좀 그렇지!”
“…….”
“…….”
“박수 좀 치게 이제 손 좀 놔.”
지금 미르 킹쉴드보다 작다고 깐 것인가? 송선호와 다니엘 스톤하츠가 미르 킹쉴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녀는 못 본 체했다.
“선생님~”
1세트를 로웰이 결국 따내자 도현은 웃는 얼굴로 일어나서 기립 박수를 쳤다.
*
다들 박수를 치고 도현과 다니엘은 로웰을 만나러 밑으로 내려왔다. 도현도 도현이지만 다니엘도 메트로서울 오픈 테니스 시합을 위하여 로웰 또한 헌신적으로 보필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아, 땡큐요.”
로웰은 다니엘 스톤하츠가 주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녀는 담당 미남 코치가 주는 전해질 음료를 마시며 말했다.
“재인이가 연습 많이 했네요. 처음 볼 때부터 알았지만 참 크게 될 앱니다.”
“선생님이랑 재인 씨가 제일 실력이 많이 오른 것 같아요. 저도 규모 커지고 나선 4강까지 한 번도 못 올라와 봤는데.”
“아, 힘들어요.”
원래 비슷한 실력끼리 붙는 것이 제일 힘든 법이다. 객관적인 실력은 분명히 도현이 로웰보다 한 수 위였지만 저번 주 도현이 사라와 만나서 경기할 때는 3세트를 내리 져서 경기 시간 자체는 적게 걸렸다. 다니엘은 그간의 시간을 벌충하기 위해서 로웰의 어깨를 열심히 주무르고 있었다. 그는 작은 헛기침으로 도현과 로웰의 관심을 끌고 입을 열었다.
“전에 제가 사우디에 가서 뭘 했는지 궁금하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로웰 선생님?”
“엇! 그랬죠.”
도현을 만나러 오기 위한 핑계로 이번 메트로오픈에서 로웰 리만 붙잡고 늘어졌던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그동안 로웰과는 제법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었다. 원래부터도 로웰은 남자들 중에 유달리 다니엘을 총애하기도 했다.
“이제 일도 다 끝났으니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밀이라 다른 곳에 가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선생님.”
“당연하죠!”
비밀은 사람을 끌어들인다. 도현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보았다.
“지중해 게이트가 발발하고 사우디아라비아가 근처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던 세현 퀸 교수를 비롯한 다국적 학자와 민간인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타이탄과 레어가 된 도시들을 처리해달라는 요구를 해왔죠. 원래 테러에는 불응이 원칙이나 그 학자분들이 원체 중요하신 분들이라 저희 학회에서 저를 캐스팅했습니다. 알다시피 저는 애매한 위치에 있었으니 어떤 기관의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울 게 없었죠. 물론 구단은 펄쩍 뛰었습니다만….”
이제는 학회의 앞에 ‘저희’라는 단어를 붙이는 걸 보니 정말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그의 언어가 달라졌다. 그는 여전히 정동이 없고 무표정하고 반응이 현저히 적었으나 그의 미묘한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일어난 수에즈 프로젝트 팀 인질 사건은 세계적으로 매스컴을 뜨겁게 달궜다. 그냥 민간인이 인질로 잡혀도 크게 문제가 될 판에 유명 마도물리학자 세현 퀸, 왕리밍을 비롯하여 다수의 고급 인재들이 테러 단체도 아닌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의해 인질로 잡혔던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 중 세현 퀸 교수와 왕리밍 교수는 인질극 초기 본국으로 귀환했고 몇몇은 사우디아라비아에 구금되어 한국, 중국, 러시아, 미국 정부가 인질 협상을 위하여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한창 뉴스에서 떠들어댔던 것처럼 한국 정부에서는 다니엘 스톤하츠를 캐스팅하여 소규모 작전팀을 꾸려 사우디아라비아로 보냈고 상대국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다가 기회를 잡아 인질을 구출해서 돌아왔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그 사이 메트로서울에서도 세 차례에 이르는 무차별 테러가 일어나 시민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고 통칭 <지중해 게이트>의 물량은 현재 남중국해 게이트보다도 많은 상황이라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는 거대 몬스터 레어가 되어 미국, 이스라엘, 이란, 중국에 의하여 핵 처리되어 현시점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사실상 멸망했다.
이 남자가 그간 이런 국제적 사건의 한 가운데 있었다는 얘기다.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이렇게 뭐든 할 수 있는 남자가 TFC를 하고 있는 게 이상했지….’
“도시 몇 개는 납작하게 눌러버렸고 타이탄도 여섯 기 정도는 죽였습니다. 중동 쪽은 잘 몰랐는데 참 군대가 엉성하더군요.”
“아니, 스톤하츠 씨가 남도 아니고. 저도 이번에 사우디 일 전후로 뉴스가 하도 뜨길래 검색도 많이 해보고 했거든요?”
원래 마감을 앞두면 뭐든 재미있는 법이다. 로웰이 안경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를 돌아보았다. 다니엘은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야무지게 주무르고 있었다.
“중형이 넘어가면 타이탄은 핵도 안 먹힌다는데 어떻게 죽였어요? MOAB 때리면서 소드마스터 용병들이 급소를 노리는 수밖에 없다던데. 마도사병은 원래 몬스터 상대하기 썩 시원치 않고….”
“중력 마법은 아십니까?”
“이번에 또 찾아봤죠. 캘리 박 교수가 개발한 마법이라면서요? 중력을 만드는 마법이라던데?”
“중력 증폭 마법을 쓰면 해당 면적의 지구중력이 증폭되어서 몸집이 큰 생물일수록 꼼짝 못 하게 됩니다. 더 강하게 쓰면 몸이 뭉게지죠.”
“오오오…. 그걸로 예전에 그렇게 사람을 죽인 건가요?”
로웰이 물었다. 다니엘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대단한 마법 같네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말을 이었다.
“그거 아십니까? 제가 눌러버린 타브크라는 도시는 시체나 몬스터가 대량으로 압축되면서 다이아몬드가 많이 만들어졌을 겁니다. 그 다이아몬드를 채굴하러 많은 도굴꾼들이 사우디아라비아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말요? 몬스터 엄청 많이 나온다던데?”
도현도 놀라서 그렇게 대꾸했다. 그녀도 다이아몬드라면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니 혹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 지옥 구덩이에 들어가는 건 목숨을 버리는 짓임이 틀림없었다.
“사람의 욕심이란 불나방 같은 것이죠. 요새 용병 시장도 제법 활발해졌습니다.”
“아. 미르한테 그쪽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미르 킹쉴드는 어렸을 적 많은 몬스터 게이트를 오고 갔다. 그가 저번 시즌 때 병원에 처박혀 있을 때는 꼭 도현을 불렀고 도현도 그때 한창 캐릭터 구상에 골몰할 때라 그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다.
“은행과 용병단의 중간에서 채권과 사람을 팔아 치우는 뚜쟁이들이 날아다니고 있겠죠.”
“으.”
로웰은 그렇게 반응했다. 여기서 말하는 뚜쟁이란 커플을 맺어주는 그 중매쟁이가 아니다. 개인의 신용 혹은 담보 채권을 가지고 있는 은행과 용병단 사이에서 사람 장사를 하는 인간들을 말한다. 돈을 빌리면 무조건 갚아야 하는 시대이고 못 갚으면 사람이 팔려가는 게 당연한 시대가 되었지만 그래도 이런 사람팔이는 괄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직업에는 귀천이 있다. 제도권 내에 있는 직업을 갖지 못하고 사람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 가야 하는 마피아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할 수는 있을지라도 누가 천하지 않다 여기겠는가. 알다시피 도현과 로웰의 채무 상태가 건전해진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상하이로 팔려가는 거 아니냐고 도현과 서로 손잡고 푸념하던 시절이 엊그제다. 도현도 말했다.
“그런 사람들은 너무 험악하고 야만인 같아요.”
채 사장도 그런 걸 하다가 사채회사 사장이 되었다고 들었다. 그는 입이 거칠고 태도가 험악해도 처자식이 있었고 그들을 제도권 내에 번듯하게 남기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세금을 내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근본은 어디로 가는 게 아니라서 말 한마디, 태도, 자세, 눈빛에서 야만과 무식이 느껴졌다.
도현은 이전 에반과 함께 인류의 건강과 복지를 증진시키는 마도신약을 개발하는 창업자와 그녀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퀄리티 있는 사람들의 다름을 또 한 번 느꼈다. 그들의 다름은 스스로와 인간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다름이다. 그들은 언제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시도하기를 멈추지 않으며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의 이로움을 증가시키는 일을 해냈다. 지금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고 사는 이 과학기술과 문명, 모두 그들의 발걸음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던가.
같은 말을 쓴다고 같은 사람이 아니다. 비슷하게 생겼다고 비슷한 게 아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이런 사람들은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이 차이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원래부터 그렇게 태어날 수도 있고 환경이 만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결과로 존재하는 이상 원인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살아있는 동물이 해야 할 것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옳은 선택을 하는 것뿐이다.
“맞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사람이 왜 그렇게 악랄하게 돈을 벌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누가 악랄하게 돈을 벌든 말든 신경 따윈 1도 쓰지 않을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맨몸으로 태어나도 스스로의 부와 명예를 축적하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을 남자이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도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들도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면 다른 일을 했겠죠?”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다니엘이 물었다. 도현은 로웰을 보았다.
“혹시 채 사장한테 물어본 적 있으세요?”
“어휴, 그런 걸 무섭게 어떻게 물어봐요. 빚도 다 갚았는데 앞으로 평생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얼굴입니다.”
“그건 저도….”
곧 로웰은 다음 세트 경기에 들어갔다. 도현과 다니엘은 관중석으로 다시 올라갔다. 경기는 5세트까지 이어졌다. 신재인이 이겼다.
“젊음의 패기를 이길 수는 없는 것인가…!”
로웰은 벌렁 드러누웠다. 반대편 코트에서는 열광하고 난리였다. 관중은 우아하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로웰은 곧 일어나서 신재인과 악수했다.
“결승전 올라간 거 축하한다. 이렇게 된 거 꼭 이겨라.”
“네, 선생님!”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경기를 마무리 짓고 로웰은 다니엘의 마법으로 들것에 실려 가듯 둥둥 떠갔다. 집으로 돌아가자 애프터 파티는커녕 로웰은 아예 드러누워 요양 모드로 들어갔고 오늘 분전한 그녀를 위하여 부엌에선 요리를 시작했다.
“…….”
“…….”
도현 킬스버그의 대저택 1층에 위치한 세련되고 아름다운 부엌에서 마주친 두 남자는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새로운 원피스로 갈아입고 나온 도현이 그 사이를 지나가며 말했다.
“선생님 뭐 드시려나~”
그녀는 냉장고를 열고 안을 살폈다. 다니엘은 눈싸움을 멈추고 도현을 따라갔다.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으니 단 게 드시고 싶을 겁니다.”
“아, 로웰 선생님이 다니엘이 만들어주는 애플파이 먹고 싶다고 하셨어요.”
“당장 만들겠습니다.”
“미르~ 미르는 뭐 먹고 싶어요?”
“나~? 고기!”
거실의 카우치에 드러누운 미르 킹쉴드가 그렇게 대답했다. 송선호는 잠깐 한숨을 쉬었다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넌? 뭐 먹고 싶어?”
“해주게?”
도현이 냉장고에서 시선을 떼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양복 겉옷과 베스트를 벗어 놓고 팔을 걷었다. 도현은 그의 넥타이를 풀어주며 말했다.
“나 뭔가 진짜 맛있~는 거 먹고 싶어. 새로운 맛이랄까. 입맛이 확 도는 맛? 배부르게 먹어도 안 질리는 맛?”
“주문 한 번 어렵게 한다.”
송선호는 그렇게 대꾸했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메뉴가 있는지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기 시작했다. 도현은 요리를 하기 시작한 두 미남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뿌듯한 모습이었다. 이제 정말 말을 제법 잘 듣지 않는가. 그런 도현을 등 뒤에서 누군가 껴안았다.
“도현아~”
“미르.”
그는 씻고 나온 도현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도현은 그의 굵고 단단한 팔을 잡으며 그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이제 미르도 합숙이죠?”
“응, 한 달 남았으니까.”
2128 엘 드라카가 이제 한 달 정도 남았다. 메트로서울은 온통 파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메트로스퀘어에는 웨스트이글의 승리를 기원하여 매일 같은 시각에 파란색 바탕에 은색 방패, 그리고 그 위에 그려진 독수리 머리가 커다란 홀로그램으로 떠 있었다. 열성 웨스트칙은 거기 가서 웨스트이글 승리 기원제를 매일 지내고 있다는 말도 얼핏 들었다. 도현이 몸을 돌려 그와 마주 보았다.
“몸조심하면서 해요.”
“이기라고 말해줘.”
“이겨요.”
도현이 피식 웃고는 그렇게 말했다. 서로 끌어안고 코를 마주치며 정을 나누고 있으니 묘하게 뒤통수가 따갑다. 그리고 곧 다니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저희가 이길 겁니다.”
평소엔 이스트드래곤에 소속감 같은 것도 전혀 없던 다니엘 스톤하츠였으나 미르 킹쉴드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미르 킹쉴드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 소리를 냈다. 도현이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러게. 이번에도 이스트드래곤이 이길 것 같은데….’
원래는 TFC에 대해서 전혀 모르던 도현이었으나 로웰 리는 엄청난 TFC 덕후에 같이 만드는 작품도 TFC에 대한 이야기였고 만나는 남자들 중 둘이나 현업으로 TFC 선수를 하고 있다 보니 자연히 이제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도현은 메트로서울에 거주하고 있고 미르 킹쉴드와 알게 된 지도 벌써 1년이 넘어가니 과천구에 위치한 게헨-세나 TFC 돔에도 자주 갔다. 전에 웨스트이글의 준우승 파티에도 참가하여 선수들을 직접 만나보기도 했다. 작품 활동을 위하여 자료 조사를 하면서 주요 클럽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웨스트이글 선수들의 기량은 주요 클럽답게 세계 최고급이나 운이나 기세에 따라 승패가 갈릴 때가 많이 보이고 이스트드래곤은 조직적이고 철저하며 다소 잔인하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레드폭스는 막강한 방어력을 자랑해 디펜스, 미드필드, 오펜스 전부 중후하고 무거운 느낌이 강하며 팔라딘은 클럽의 간판선수의 컨디션이 살아날 때와 아닐 때의 차이가 크다. 서던라이온은 트레이딩이 활발하고 기상천외한 전술 전략을 실험하곤 해 매해 기량을 측정하기 힘든데도 묘하게 강하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그 외에도 노던타이거, 두르가, 레드불, 퀸즐랜드, 작년에 큰 인기를 끌었던 하인델토크FC, BAFC 등 쟁쟁한 클럽들 모두가 올 시즌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강팀이라고 꼽히는 팀이 이렇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올해는 벌써부터 이스트드래곤 승리에 몰빵하는 도박꾼이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올 시즌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고 무방할 것이다. 그만큼 이스트드래곤의 기량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스트드래곤의 디펜스는 공수 양쪽에 능한 치엔이 루카스를 센터 포워드로 레프트 포워드인 카흐 밀란도 맷집이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미드필더는 알다시피 슈퍼 루키로 이름 높은 올해 19세 신태호를 필두로 다들 쟁쟁했다. 거기에 게임의 승부를 가르는 것은 언제나 오펜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마도사들의 기량이 중요한 TFC에서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천재 마도사를 가지고 있는 이스트드래곤은 공수 양쪽 어디도 빠지지 않는 자타공인 전 세계 최강의 클럽이었다.
로웰 리는 말이 한하 팬이라고 하긴 하지만 결국 이스트드래곤의 팬이었다. 특히나 신태호가 등장하고 나서부터는 그냥 이스트드래곤 열성팬이 되었다.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 무언가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자신이 고를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최고를 고르는 법이다. TFC의 세계에선 영원한 강자는 없다는 것이 정설인데 그 정설을 깨고 지금 무려 3연패를 낙관적으로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집안의 가장이 팬이니 자연히 다른 식구들도 이스트드래곤을 같이 응원하곤 했다.
[저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남자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런 남자를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
이미 다니엘 스톤하츠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무력을 가진 개인이다. 보통 사람들은 잘 가늠도 하지 못할 것이다. 도현도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고 그에게 들은 것으로 얼핏 유추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더 높은 곳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좋은 건 누구나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다. 도현은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어쩌면 도현이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좋고 훌륭한 것도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어서 좋다고 느끼지도 못하는 게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현조차도 다니엘 스톤하츠가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닌 남자인지 정확하게 표현해내기엔 모르는 부분이 여전히 많았다.
‘그리고 본인도 다 몰라.’
그렇게 도현은 다니엘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
굉장한 살림 능력을 가진 남자 둘이 뚝딱뚝딱 음식을 만들어내어 대가족이 풍족하게 먹고도 남을 만한 훌륭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송선호는 도현을 위하여 랍스터와 킹크랩, 새우 등의 갑각류로 만든 메인 요리를 선보였다. 입맛이 떨어졌을 때는 자주 먹지 않지만 아주 좋은 식재료로 만든 음식이 필요한 법이다. 약간 맵싸하면서도 깊은 맛이 나는 소스와 식초와 레몬과 쪽파 등을 섞은 소스를 곁들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소고기의 부위별로 훌륭한 스테이크를 만들어냈다. 디저트도 잔뜩 만들어 로웰을 흡족하게 했다. 오늘 어시들은 자기들만의 파티를 하러 가서 남은 식구는 로웰과 도현, 송선호, 다니엘, 미르 정도였지만 상다리가 휘어질 것 같이 차린 저녁이었다.
도현은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주얼리를 곁들여 훌륭한 저녁상을 위하여 차림새를 바로 했다. 송선호와 다니엘 스톤하츠도 옷을 갈아입었다. 로웰과 미르는 대대한 차림상에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도현이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박수를 쳤다. 커다란 디너 테이블의 양쪽에 송선호와 다니엘이 각각 서서 박수를 받았다.
“아, 진짜 살림 잘하는 남자는 30년보다 더 데리고 살 만하다니까.”
로웰이 따봉을 들며 다니엘과 송선호를 번갈아 보며 칭찬했다.
“더 드시고 싶은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많이 드십시오.”
둘은 그렇게 인사했다. 도현이 웃으면서 다니엘에게 다가가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인사를 했다. 송선호에게도 가서 뺨에 입을 맞추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알다시피 이 집 여자들은 부엌일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밖에서 사 먹거나 시켜 먹는 것이 아니면 이런 훌륭한 식사는 먹지 못했다.
곧 다들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 로웰 리는 물론이고 미르 킹쉴드도 제법 테이블 매너를 배워 꽤 훌륭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물론 미르의 경우야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새 모이(?)만큼 잘라 먹었다간 몇 시간씩 먹어도 그의 양을 채우진 못할 테니 거의 스테이크의 4분의 1씩을 잘라 한 입에 먹었다.
“많이 먹어요. 내일부터 집에 못 들어오잖아요.”
“그래도 주말엔 오잖아. 걱정 마.”
그는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남자 둘은 잠깐 움찔했다. 원래도 주중, 주말 없이 미르 킹쉴드는 도현에게 마수를 뻗쳤지만 그래도 대체로 주중에는 그가, 주말에는 송선호가 도현과 함께 지냈다. 그나마도 한동안 다니엘이 도현과 사이가 좋지 않아 주말은 온전히 송선호와 함께였다. 물론 그것도 송선호의 아버지가 그에게 일을 떠맡기고 도현도 메트로서울 오픈에 정신이 팔려 그의 입장에서는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한참 부족했지만 또 나름대로 균형을 잡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 미르 킹쉴드도 주말밖에 시간이 없고 다니엘 스톤하츠도 돌아왔으니 치열한 간택전이 예상되었다.
‘벌써부터 머리 아프다….’
아니, 잠깐만. 그럼 당장 오늘은?! 그때부터 송선호는 식사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중간에 잠깐 다니엘 스톤하츠와 눈이 마주쳤는데 저 사이코패스는 언제나처럼 아무~런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그 순간은 곧바로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송선호는 그것이 무척이나 기분 나빴다.
2시간에 걸쳐 풍족하고 훌륭한 서퍼(Supper)를 마치고 함께 그릇을 싱크대로 옮겨 놓았다. 치우는 것은 내일 사람을 부르면 될 것이다. 그 후 도현은 씻으러 들어갔고 로웰은 자러 갔다. 미르 킹쉴드도 별다른 기색 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송선호는 잠시 왔다 갔다 하며 고민하다가 2층 자신의 방으로 갔다. 일단 씻고 준비(?)를 하고 옷을 다시 갈아입어야겠다. 속도전이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던 다니엘 스톤하츠는 잠시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가 약간의 마법의 힘을 빌려 깔끔하게 거듭나고 도현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방문에 노크했다. 물론 욕실에 있는 그녀가 답할 것이라 기대하진 않았다.
“도현 씨, 들어가겠습니다.”
그는 도현의 침실문을 열었다. 모던하고 깔끔한 그녀의 방이었다. 얼마 만인가. 침실에 걸려있는 그림이 바뀌었다. 그는 도현의 침대에 앉았다. 그녀의 베개와 시트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녀는 누차 그에게 변태라고 힐난하곤 했다. 그는 변태가 아니었다. 이렇게 참지 않는가.
조금 있으니 바스타월로 헐겁게 몸을 감싼 도현이 이름 모를 노래를 흥얼거리며 욕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있는 다니엘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니엘?”
“허락 없이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도현 씨. 노크를 했는데 대답이 없기에.”
다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바스타월을 살짝 펼쳤다가 몸을 제대로 감쌌다. 다니엘은 심장이 두근거리며 체온이 올라가는 걸 느꼈다. 그녀는 오늘 낮처럼 우아하게 차려 입어도 색기가 흘렀지만 이렇게 화장기 없이 흐트러져도 섹시했다. 예뻤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는 그녀의 물기 어린 피부에 코를 박고 싶었다. 그녀의 향기를 맡고 싶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킬 뻔했지만 겨우 참았다.
“다른 게 아니라….”
그는 가져온 것을 들어올렸다.
“전에 드리려고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검은색 가죽 케이스였다. 딱히 눈에 띌 만한 상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기억을 못 할 법도 했지만 도현은 그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가로세로 너비가 12cm 정도 되는 정육각형 상자였다. 그때 그가 집을 부숴버렸을 때 도현에게 주려고 했던(사실 도현을 무릎 꿇게 하기 위해 바닥에 일부러 쏟았던) 다이아몬드가 가득 든 상자였다. 도현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녀는 옷을 입을 생각도 저 멀리로 사라져 버리고 그에게 다가왔다.
“이거….”
다니엘은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거기엔 그때 잠깐 보았던 새끼 손톱만한 것부터 엄지손톱만 한 다이아몬드가 가득 들어 있었다. 순백의 다이아부터 노란색이나 파란색도 있었다. 도현의 입이 딱 벌어졌다. 어두운 조도에서도 반짝거림을 잃지 않았다.
“너무 예뻐….”
도현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자 그가 뚜껑을 닫았다. 그러자 도현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처럼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다니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손에 쥐고 있던 것을 그녀의 눈앞에 내밀었다. 도현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그녀의 두 손은 다니엘의 손 근처에서 잠시 머물러 멈췄다. 그녀는 다니엘의 손을 잡고 자신의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족히 50캐럿은 넘을 것이다. 이런 색깔이라니. 이렇게 확실하게 보랏빛을 띠는 다이아몬드는 처음 보았다. 얼핏 기억이 날 것도 같았다. 이건 그 유명한 <바이올렛 스타>였다. 예전에 어딘가에서 엄청난 고가에 낙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이런 다이아몬드가 세상에 둘이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도현은 그 다이아몬드는 모든 집중을 다 하여 보다가 다니엘의 눈을 바라보았다.
“다니엘의 눈동자 같아요.”
“마음에 드십니까?”
“네. 너무 예뻐요…. 반지로 만든 건가요?”
전에는 반지로 세공되어 있지 않았는데 지금은 링이 달려 있었다. 백금으로 된 아주 기본적인 링이었다. 그래서 더욱 이 대단한 다이아몬드가 빛이 난다.
“볼 때마다 항상 저를 생각해주십시오.”
다니엘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왼손을 들어 올려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그제야 도현이 감탄에서 벗어나 미소를 지었다.
“프러포즈예요?”
“그렇습니다.”
“너무 빠른 거 아닌가요? 오늘 겨우 집에 돌아왔는데?”
“그래서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요?”
“저는 언제나 도현 씨와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영원히. 제게 부족했던 것은 용기이지 타이밍이 아니니까요.”
“하하하.”
더 건방져진 것 같다는 건 올바른 인상이었나 보다. 확실히 조금 변했다. 뭐랄까. 자신감이 생겼달까. 도현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 그는 살짝 물러났다.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와 눈을 마주친 뒤 정말로 밖으로 나갔다. 도현은 한쪽 손을 허리에 대며 하, 하고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낮에는 다소 숙맥으로 돌아왔나 싶었더니 또 이럴 때는 얌체같이 플레이를 잘 하지 않는가. 저런 게 낮에는 조신하고 밤에는 요부 같은 남자일까.
도현은 머리를 말리고 온몸에 가볍게 마사지를 하며 값비싼 오일을 발랐다. 도현은 네이비 색깔의 실크 가운을 헐렁하게 걸치고 침실문을 열었다. 그리 길지 않은 복도를 걸어 나오면 바로 1층 거실이었다.
그녀는 벽에 살짝 기대어 예쁘게 배치된 카우치와 소파 위에 앉아 있는 남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도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르 킹쉴드는 그녀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도현아~”
미르가 곧바로 도현에게 걸어왔다. 도현은 그의 커다란 덩치 너머로 다른 남자 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다니엘.”
그때까지도 소파에 앉아 있던 다니엘이 천천히 일어났다. 미르 킹쉴드의 돌발적인 행동에 분한 얼굴을 하고 있던 송선호는 당황한 얼굴로 다니엘 스톤하츠를 돌아보았다. 미르 킹쉴드도 마찬가지였다. 진심이냐는 얼굴로 도현의 얼굴을 보았다. 다니엘은 천천히 걸어서 도현에게 다가왔다. 그동안 다른 두 남자의 눈동자가 뚫어져라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현 씨.”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안고 그녀의 입술에 드디어 입을 맞췄다.
“질투쟁이.”
도현이 말했다. 다니엘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다른 남자들이 있는 가운데서 그를 택했다. 흡족한 상이었나 보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둘은 같이 침실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미르와 송선호는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3부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