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3부 2권) (11/21)

기만 혹은 사랑 (2)

“킹쉴드 선수!! 미르 킹쉴드!!!”

오늘부터 웨스트이글도 본격적인 합숙 훈련에 들어갔다. 웨스트이글의 홈구장 <게헨-세나> 앞에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며 서 있었다. 웨스트칙과 취재진들이었다. 저쯤에서 야구 모자를 쓴 스튜어트 감독이 인터뷰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인터뷰는 그날그날 감독이 정해주는 선수만 할 수 있다.

메트로서울에 위치한 TFC 게헨-세나 돔과 바로 옆에 위치한 TFC 웨스트이글 센터는 마치 그들만을 위해 꾸며놓은 작은 도시 같았다. 센터는 크게 시청각실, 훈련 시설, 기기실, 강도 및 재활실, 기자 회견실, 인터뷰실 등 다양한 시설이 모여 있는 구역과 선수와 관계자들이 앞으로 숙식할 거주 구역으로 크게 나뉘었다. 주거 시설은 각 선수들을 위한 침실과 거실, 영화 관람실, 식당, 휴게실, 수영장 등을 갖추고 있었다.

“비켜주십시오. 네, 비켜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미르 킹쉴드는 심플하고 멋진 선글라스를 낀 채 매니저 박샘과 다른 매니지먼트 사람들이 뚫어주는 길을 따라 게헨-세나로 들어갔다. 걸즈를 줄줄이 단 다른 선수들과 다르게 단출하게 혼자만 나타나서 구장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하나둘 경기장 바깥에서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잔디밭은 미리 스프링클러를 돌려놓아 촉촉했다. 돔 밖과 다르게 안쪽은 조용하고 쾌적하기 그지없었다. 미르 킹쉴드도 펄쩍펄쩍 뛰어 온몸의 근육을 풀었다. 시 코치와 박샘이 옆에 서서 스크린을 띄우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 코치가 투덜거렸다.

“이스트드래곤은 합숙을 5개월이나 했단다. 변태 새끼들 아냐?”

“흐엑, 돌았네요. 선수들이 그걸 다 따랐대요? 분명히 탈출하고 그럴 텐데.”

“주중에 5일은 합숙하고 주말은 쉬게 해주고. 이번 주부터는 일주일에 하루만 휴일 준단다.”

“이스트드래곤 대단하네요…. 기필코 3연승 하겠다 이거구나.”

박샘이 혀를 내둘렀다.

“안 그래도 사장님이 내년부터는 우리도 두 달 정도 늘지 모른다고 선수들 개인 스케쥴 미리 조정하라고 하시더라구요.”

“미친 거 아니냐. 다른 클럽들도 갈수록 좋아지고. 아~ 진짜 먹고 살기 힘들다.”

“설마 작년만큼 대진운이 안 좋겠어요? 올해는 작년보다 쉬울 거예요.”

“그렇겠지? 아~”

디펜스 코치 중 하나인 시련제는 곧 수석 코치의 부름을 받아 그쪽으로 갔다. 리저브 팀 30명도 다 같이 합숙이었다. 물론 딸려오는 관련자도 마찬가지였다. 매니지먼트, 정형외과 교수팀, 물리치료사들도 보인다.

주전 30명과 리저브 30명까지 60명이나 되는 선수들이 있었다. 디펜스 23명, 미드필더 30명, 오펜스는 단 7명뿐이다. 성별은 전부 남성이었다. 디펜스와 미드필더는 전부 소드마스터들이었고 오펜스는 당연히 전원 마도사다. 소드마스터의 90%가 남자고 마도사의 90% 정도가 여자이니 오펜스 중에 간혹 여자 마도사를 선수로 쓰는 클럽도 있었다. 하지만 마도사 중에 머리가 제법 돌아간다 하는 이들은 죄다 마도의사나 마도공학자, 마도물리학자가 되려고 하는 법이다. TFC에서 뛰는 마도사들은 주로 마도사병이나 마도사 용병으로 뛰었던 남자들로 높은 연봉과 다른 선수들에 비해서는 매우 낮은 사망률을 보고 업계로 들어온다.

평소의 훈련과 합숙 훈련의 차이점은 아침, 저녁으로 하는 세뇌에 가까운 정신교육과 급격히 늘어난 체력 훈련이다. 어차피 시즌에 들어가면 당장 누구와 붙을지 알 수 없다. 특히나 포틴즈는 토너먼트도 아니고 매 경기 인공지능에 의한 랜덤 추첨으로 결정된다. 평소에도 다양한 전술을 응용한 연습경기를 끊임없이 치르지만 합숙에 들어오면 엘 드라카 12주를 견딜 체력과 정신력을 다듬는 것에 집중했다.

하루는 한계까지 몸을 굴리고 다음 날은 평소의 2배 이상의 식단을 소화하면서 몸을 관리했다. 오라 강화훈련도 근육 강화와 같아서 매일매일 한다고 강해지는 것이 아니니 잘 쉬어줘야 했다. 어쨌든 시키는 대로만 하면 시간은 엄청 잘 간다. 어느새 주중 5일간의 합숙을 마치고 토요일 점심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자유시간이 생겼다. 합숙 첫 주라 선수들 중 반쯤은 그냥 숙소에서 잠이나 잘 모양이었다.

“사고 치면 죽는다? 어? 약 빨고 사고 치지 마라. 인터뷰도 금지다. 그냥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 출전 못 하게 되는 새끼 생기면 내 손에 죽는다. 알았냐?”

스튜어트 감독은 그렇게 경고하며 선수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다들 주차장으로 어슬렁어슬렁 나오니 파파라치들이 얼쩡거렸지만 공식적인 취재 날은 아니라 전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다른 셀레브리티와 다르게 TFC 선수를 따라다니는 파파라치들은 아주 조심성이 많았다. 신경을 거스르기엔 너무 무서운 파파라치 대상들이다.

“아, 또 배고프다.”

“나도.”

훈련 강도가 올라가면 가장 큰 문제는 먹는 문제였다. 그들 모두가 평소에도 보통 사람의 몇 배가 넘는 열량을 먹어야 하는 연비가 매우 나쁜 남자들이었지만 합숙에 들어가면 먹어도 먹어도 내장을 파먹듯이 배가 고팠다. 다들 당 떨어진 당뇨병 환자처럼 주머니에서 소드마스터 선수용으로 만들어진 에너지바를 꺼내 먹었지만 배가 찰 리가 없었다. 분명히 금방 점심 먹고 나왔는데도 이랬다.

“뭐 먹자.”

“고기 먹자.”

배고픔은 다른 모든 욕구를 이기는 법이다. 그들은 근처에 있는 고깃집으로 향했다. 대략 스무 명에 가까운 2m 전후의 키를 가진 선수들이 나른하고 배가 고픈 얼굴로 근처 바비큐 가게에 나타나자 주인은 몇 번 당해(?)봐서 익숙하면서도 또 놀랐다.

“오셨어요.”

“일단 종류별로 20인분씩 줘봐.”

조나단이 다른 테이블이 먹고 있는 음식을 뚫어져라 보며 그렇게 주문했다. 그녀가 자리를 안내했다.

“네, 이쪽으로 앉으세요.”

그녀는 웃는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종업원은 알아서 밖으로 나가 영업종료 문패를 걸었다. 선수들이 와서 먹기 시작하면 그날 공수해온 식재료를 전부 동낼 때가 부지기수였다. 원래 있던 손님은 두 테이블 정도 있었는데 덩치가 산만 한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오니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들을 보았다. 유명인을 보아 놀라고 그들이 실제로 얼마나 큰지에 대해 또 놀랐다. 그들은 앉자마자 주방을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

“빨리 안 나와?”

“잠시만요~”

가게 사람들은 전부 그들의 시중을 드는 데 총동원되었다. 식전 애피타이저가 나오기 전에 주문한 고기부터 나왔다. 5개의 테이블에 나누어 앉은 그들은 익숙하다는 듯이 고기부터 굽기 시작했다. 그리고 샐러드와 다른 디시가 빠르게 나왔다. 고기가 구워지는 걸 기다리지 못한 선수들은 디시부터 박박 긁어먹었다. 그들의 재촉에 몇 번이나 주방을 오가던 종업원 중 하나가 커다란 보울에 샐러드를 산처럼 쌓아 5개 테이블에 돌렸고 주방에서는 그들을 위해 미리 고기를 구웠다. 이럴 때는 다시 사회로 돌아와 그나마 조금 문명에 익숙해진 것이 소용없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들 걸신들린 것처럼 먹었다.

소드마스터 아이도 사춘기 이전까지는 보통 아이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병치레를 거의 하지 않고 유난히 먹성이 좋다는 것 외에는 평범한 어린이와 같았다. 하지만 마도사와 마찬가지로 사춘기가 지나면서 형질이 발현되며 그때부터 엄청난 근력과 체력, 그리고 오라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오감이 날카롭게 발달되고 육감(전류)도 느낄 수 있게 되며 어둠 속에서도 물체를 볼 수 있게 된다. 사춘기 시절은 호기심이 많고 유난히 높은 활동량이 요구되며 대다수 큰 키와 덩치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엄청난 양의 식사가 필요했다. 보통 중산층에서 소드마스터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를 키우다 식비로 허리가 휘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사춘기가 지나고 성숙해지면 식성도 조금 떨어지고 성격이 느긋하고 여유로워진다. 강하지만 활동에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특성상 성격과 행동이 느긋하고 여유로워야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연구 결과는 말한다. 신체조건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많은 이들이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군대와 같은 분야에서 직업을 찾았다. 마인드 스포츠를 제외한 대다수의 스포츠는 소드마스터들이 점령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덩치와 먹성은 양의 상관관계를 가졌다. 그만한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선 그만큼 먹어야 했다. 미르 킹쉴드나 제수스 강, 조나단 훅, 샤샤 부퍼, 가람 리한 등의 디펜스는 전부 나름대로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많이 먹을 수 있는지에 대한 조예가 있었다. 다 같이 소 한 마리를 먹어치웠나 싶을 때쯤 미르 킹쉴드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 이제 살 것 같다.”

그는 그제야 디시로 나온 생크림 메쉬 포테이토에도 손을 댔다. 그리고 탄산음료도 시켰다. 다들 음식 외에는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다가 배가 차자 나른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조나단 훅도 수저를 놓으며 냅킨에 물을 적셔 얼굴과 손을 닦았다.

“아~, 내가 이거 먹으려고 돈 번다.”

“우리 식당 맛있긴 한데 말이야. 풀떼기를 너무 많이 줘.”

“야, 다른 데는 맛대가리 없는 무슨 주스니 뭐니 꼭 먹으라고 한다잖냐. 그냥 음식 주는 게 더 낫다.”

“여기요.”

이런 비용은 선수들 식비 명목으로 법인카드를 긁었다. 미하엘 로드리게스가 자신의 디바이스에 있는 웨스트이글 선수용 법인카드를 주고 하품을 늘어져라 했다. 다들 배부른 고양이처럼 골골 늘어졌다.

오늘 아침에도 훈련이 있었다. 점심을 먹고, 또 이렇게 나와 두 번째 점심을 먹고 나니 다들 딱 나른하고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다. 미르 킹쉴드도 멍하니 습관적으로 음식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우리 도현이 끌어안고 낮잠이나 자고 싶다….’

기분 좋을 것이다. 그녀를 홀딱 벗겨서 알몸으로 끌어안고 자고 싶었다.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손가락에 그녀의 머리카락을 감고 부드러운 피부를 만지며 스르륵 잠이 드는 것이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더니 당장 그러고 싶었다. 바로 집에 가야겠다. 미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 먼저 간다. 우리 도현이 보러.”

“어! 여보세요? 세, 세현아…!”

그때 누가 전화를 받으며 식기를 와장창 떨어뜨렸다. 다들 노곤하게 잠이 오는 상태였기 때문에 짜증부터 냈다. 제수스는 순간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슬그머니 디바이스의 수화기를 막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먼저 간다.”

그는 의자를 뒤로 확 밀고 걸어 나갔다.

“여기 왔다고? 어디? 메리 호텔? 미리 말하면 먼저….”

누가 지 같은 걸 신경 쓴다고 저렇게 호들갑인가. 미르 킹쉴드는 하품을 하며 빠른 걸음으로 먼저 나가는 제수스의 뒤를 따라 느릿하게 걸어 나갔다. 제수스는 문을 확 열고 보도 블럭으로 나갔다. 그러자 저쪽에서 이쪽으로 천천히 달려오던 검은색 대형 세단이 천천히 앞에 멈춰 섰다. 미르 킹쉴드는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자연스럽게 그 차를 보았다. 원래 비싼 건 한눈에 봐도 아는 법이다.

‘나도 스포츠카 말고 저런 것도 한 대 살까?’

그도 종류별로 차가 있었지만 이번에 도현의 빚을 갚으면서 몇 대는 팔았고 그나마도 스포츠카밖에 없었다. 스포츠카가 아닌 차로는 모는 맛이 있는 사륜구동 오프로드용 차 같은 것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도현이 산 차도 그렇고 그 도련님이 타고 다니는 차도 그렇고 주로 저런 게 진짜 비싸고, 있어 보이는 차인 모양이다. 올해는 돈 없으니까 좀 그렇고 내년엔….

아주 비싸 보이고 광이 번쩍번쩍 나는 차 조수석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 하나가 내리더니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뒷좌석에서는 디바이스를 귀에 대고 선글라스를 낀 키가 큰 여자가 하나 내렸다. 그녀는 기다란 정장 바지에 위에는 헐렁한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별달리 눈에 띄는 차림은 아니었지만 딱 봐도 몸매가 진짜 쭉쭉빵빵했다. 미르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뒤돌아.”

그녀가 디바이스에 대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앞서 그 차가 오던 반대방향으로 반쯤 뛰어가던 제수스가 움찔하더니 뒤로 돌았다. 그녀는 디바이스를 주머니에 넣고 손짓으로 그에게 이쪽으로 오라는 표시를 했다.

“아, 그 빅가슴녀….”

미르는 한때 며칠 동안 관중석에서 가슴을 반쯤 내놓고 훈련을 구경하여 나름 웨스트이글 선수들 사이에 화제를 모았던 여자를 기억해냈다. 물론 보통 때 같았으면 지금까지 그걸 일일이 기억하는 일은 없었겠지만 저 빨강 머리가 하도 똥 마려운 개새끼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지금도 꿀단지처럼 숨기고 있었기에 다들 여전히 호기심은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교수니 뭐니 하는 여자라고?’

그래서 정확하게 그게 뭐하는 일이라고? 그냥 선생님인 건가. 미르는 잠시 고심했다.

“세현아….”

제수스는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참 어울리지도 않는 얼굴을 하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나 오늘 쉬는 거 어떻게 알았어? 미리 연락했으면 준비하고 있었을 텐데. 뭐 했어? 이제 안 바빠? 몸은 괜찮아? 병원은? 안 그래도 지금 병원 가려고 했는데. 나 좀 봐봐.”

“일단 좀 놔봐.”

“병원에서도 제대로 못 보게 하고. 진짜 보고 싶었어, 세현아~”

“교수님.”

그녀가 그의 호칭을 지적했다. 제수스는 딱 봐도 무지~하게 질척거리고 있었다. 저 여자의 얼굴에도 성가시다는 표가 팍팍 났다. 그렇게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들을 보고 있는데 뒤에 문이 열리며 나머지 동료들도 어슬렁어슬렁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미르는 아차, 하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이러면….’

“어! 빅가슴녀!”

조나단이 곧바로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동료들도 눈을 크게 뜨고 그쪽을 보았다.

“오오오!!”

그러자 제수스도 헉하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 빅가슴녀도 선글라스 너머로도 확연히 보이게 인상을 찌푸리며 뒤늦게 이쪽을 보았다. 미르는 잠시 고민했다. 그냥 갈까, 조금만 구경할까.

'재미있겠는데.'

*

그는 도현에게 약속했다. 술, 약, 여자, 싸움을 조심하겠다고. 그건 그의 모든 걸 조심하겠다는 약속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주변에는 항상 술, 약, 여자, 싸움이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쯤까지만 해도 그는 이게 별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름.”

“미르 킹쉴드.”

“철자 뭐야?”

“검색해보면 알 거 아냐.”

미르 킹쉴드는 철제 의자에 불량하게 앉아 그렇게 대꾸했다. 그와 같은 선수가 민간인을 대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을 쓰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그들의 말본새를 지적하거나 고치기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감독에게는 거의 반말을 쓰지 않는다.

그의 앞에 앉은 추하게 생긴 늙은 남자 경찰은 불독 같이 늘어진 얼굴로 눈을 치켜뜨고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민간인은 저런 눈빛으로 그를 보지 못하겠지만 역시 공권력을 등에 업은 경찰은 달랐다. 그래도 한국 경찰이 공안보다는 훨씬 낫다.

과천구에 위치한 한 경찰서에는 덩치가 산만 한 남자들이 스무 명 가까이 들어와 있어 제법 넓은 공간인데도 꽉 차 보였다. 그들은 조그마한 의자에 겨우 구겨 앉아 경찰관에게 건성건성 대꾸하고 있었다. 조금 많이 다쳤다 싶은 놈은 소파에 드러누웠다. 미하엘 로드리게스는 전화가 오자 담당 경찰을 뿌리치고 전화부터 받았다.

[야 이 개새끼들아! 니들 오늘 전부 제삿날이다! 씨발, 거기서 1cm도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씨팔놈들, 움직이기만 해봐라! 이 개썅놈들! 내가 사고 치지 말라고 말한 지 3시간도 안 됐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내가 이번엔 진짜 씹창을 낸다, 이 개좆 같은 새끼야!]

스튜어트 감독이었다. 그는 미하엘이 전화를 받자마자 쌍욕부터 했다. 알다시피 미하엘은 올 초에 한 번 사고를 쳐 줄까지 그었다. 재범은 구속 기간이 더 길어지는데 시즌은 이제 고작 한 달 남았다. 그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웨스트이글의 스타 플레이어였다.

“아, 깜짝이야. 조용조용히 말해도 다 알아듣습니다.”

미하엘은 디바이스를 멀찍이 떨어트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는 이마를 다쳤는지 경찰이 준 하얀 수건으로 이마를 곱게 누르고 있었다.

“아니, 도대체 누가 어떻게 연락을 했길래 전화를 받자마자 이렇게 소리를 질러요. 거, 우리는 오늘 아~무것도 안 했다니까? 우리가 일방적으로 맞았다고. 아야~ 이런 건 합의금 얼마나 받을 수 있으려나.”

[뭐?? 이 또라이 새끼가 대가리 깨진 소리 하고 지랄이야!]

“어? 감독님, 내 대가리 깨진 건 어떻게 아셨어?”

여기 있는 남자들이 누구에게 맞고 다닐 견적은 아니었지만 지금 경찰서에 들어와 앉은 이들은 전부 어디 한 곳은 다쳐 피를 흘리거나 눈탱이밤탱이가 되어 있었다. 미하엘 로드리게스는 이마가 깨졌고 조나단 훅은 양쪽 눈이 다 퍼렇게 부은 상태이며 가람 리한이나 샤샤 부퍼도 광대나 턱이 까졌다. 팔이나 다리 등에 타박상을 입은 이들은 수두룩했다.

“와, 내가 지금까지 합의금 물어줄 때는 몰랐는데 받을 생각 하니까 신 난다.”

[이 새끼가 진짜 뭔 개소리야?]

미하엘과 감독의 통화를 듣고 있던 다른 동료들은 잠시 서로의 눈을 보더니 그때부터 단체로 앓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 나 죽겠다!”

“이거 어디 잘못된 거 아냐? 어?”

“사람이 다쳤는데 왜 여기에 붙들고 있어! 의사부터 불러!”

“아이고, 나 죽네!”

“내 얼굴 이거 어쩔 거야? 어? 남자가 얼굴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누가 같은 팀 동료들 아니랄까 봐 아주 죽이 잘 맞는다. 아까까지 몇 놈은 서로 싸우고 있던 게 맞나 싶었다. 젊은 경찰은 입을 딱 벌리고 보고 있었고 나이가 든 경찰은 가지가지 한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어, 근데 이거 뭐야?”

미르 킹쉴드의 소지품을 살피던 앞의 경찰이 뭔가를 꺼내더니 옆에 있는 경찰에게 보여주었다. 미르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거 우리 도현이가 준 거야.”

“이 사람 이거 신원 조회해봐.”

“왜요, 김 형사님?”

“이거 아무나 못 받는 거야.”

응?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미르는 철제 의자에 불량하게 뒤로 기대어 있다가 바로 앉았다.

“아니, 그거 우리 도현이가….”

주변을 빙 둘러서 이 미친 새끼들이 경찰서 안을 시장통으로 만들고 있어 매우 시끄러웠다. 미르만 그걸 따라 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사고 쳐서 경찰서 와본 적은 종종 있었고 예전 같으면 그도 재미있다고 동료들의 장난에 장단을 맞췄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정말 없어 보인다. 게다가 미르의 문제는 지금 그게 아니었다. 경찰은 본격적으로 미르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이 카드, 이거. 어디서 났냐고, 어?”

“와씨, 생각을 해봐라, 이 경찰 할아범아! 아무리 그래도 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런 걸 훔치겠냐?!”

“뭐? 에게, 돈도 10원도 없으면서 입만 살았네. 이거 뭐냐고? 어?”

이 카드가 진짜 대단한 거긴 한 모양인지 경찰은 과천구 인공지능 판사에게 영장을 받아 바로 미르 킹쉴드의 계좌를 털어봤다. 미르도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아니! 내가 몇 번을 말하냐고. 그건 우리 도현이가 나한테 준 거라니까!”

이래서 평소에 행실이 좋아야 하는 것이다. 미르의 목소리도 결국 커지고 경찰서 안은 점점 더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경찰은 전화를 몇 통 돌리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만 어디 전화하는 거야?”

“니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확인을 해봐야 할 거 아냐. 이 양아치 같은 새끼가, 경찰 하는 일에 꼬박꼬박 끼어들고 지랄이야.”

“아니, 이게 뭐 별일이라고…! 도현이한테 전화하지 마.”

“여보세요. 킬스버그 씨 되십니까? 여기 과천경찰서입니다.”

“야!!!”

미르 킹쉴드가 이렇게 경찰과 입씨름을 하고 있을 때 다른 놈들은 같이 경찰서에 온 그 교수라는 여자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어? 빅가슴녀! 너 이거 어쩔 거야? 너 이거 다 물어줄 수 있냐? 엉?!”

“그… 입 조심하십시오. 모욕죄로 고소합니다.”

그녀의 운전사였던 여자가 디바이스에 대고 누군가와 계속 통화를 하다가 마이크 부분을 막고 그렇게 말했다.

“야~ 너 가슴 크다고 단 줄 아냐? 금발도 아니면서! 우리 몸값 엄청 비싸다, 어?”

그러자 화를 내려던 운전사를 옆으로 치운 세현 퀸은 그 말을 한 조나단을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야, 깜뚱이. 너 계속 해봐라. 죽고 싶냐?”

“어! 경찰 아저씨, 들었지? 들었지? 저 여자가 살해 협박 하는 거?”

“어우, 너무 무서워!”

입장이 바뀌니 그들은 아주 능동적으로 공권력에 기댔다. 공권력 앞에 물리적 힘이 강하고 강하지 않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공명정대한 인공지능에 기댄 사법 체계는 시시비비를 정확하게 가렸다. 때린 놈은 나쁜 놈, 맞은 놈은 착한 놈! 그런 것이다.

“아니, 그리고 왜 때린 사람은 저기 앉히고 우린 여기 앉혀? 어? 경찰이 이래도 되는 거야?!”

가람 리한이 경찰 데스크를 발로 찼다. 그들은 몸에도 안 맞는 작은 철제 의자에 앉아 있었고 저기 저 여자는 경찰서에서 제일 좋은 의자에 앉아 커피 대접까지 받으며 기분 안 좋은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아, 진짜 시끄러워서. 쯧.”

앞에 앉은 경찰이 그쪽을 보며 혀를 찼다. 미르 킹쉴드는 어느새 앞으로 몸을 완전히 기울이고 그가 하고 있는 일에 전전긍긍하다가 거기를 확 돌아보며 화냈다.

“씨발! 좀 조용히 해라, 씹새야! 못 배운 티 좀 작작 내라고!”

“아, 씨. 니가 더 시끄럽다, 병신아.”

미하엘이 이마에 누른 수건을 떼었다가 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누르며 그렇게 말했다. 미르는 전전긍긍한 얼굴로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앞에 앉은 늙은 경찰을 보다가 옆에 앉아 있는 미하엘에게 속닥거렸다.

“야, 이거 왜 이러는 거야? 나만 왜 이래?”

“뭐가.”

미하엘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도현이 카드 가지고 왜 나한테 계속 시비 거는 건데? 문제 되는 거야?”

미하엘이 웨스트이글에서 부주장쯤 되는 이유는 그가 그들 중에서 그나마 똑똑한 편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올 초에도 한 번 좆될 뻔 해봤기 때문에 다소 여유로운 태도였다. 경찰서도 한 번 두 번 오다가다 보면 내 집 같고 그런 법이다.

“니가 재수 없어서 그냥 꼬투리 잡는 거다, 븅신아. 꼴 좋다.”

“아, 씨! 그럼 왜 도현이까지 부르는 건데!”

미르는 경찰을 붙잡고 화도 내보고 애원도 해봤지만 경찰은 그대로 도현 킬스버그를 소환했다. 미하엘의 말대로 좆돼 보라고 이러는 것인데, 생각보다도 미르 킹쉴드에게 아주 잘 먹히는 방법이었다. 그는 전전긍긍하며 있다가 결국 체념하고 의자에 늘어져 짜증을 냈다.

'아, 좆됐다… 사고 안 치기로 도현이랑 약속했는데.'

내가 잘못한 건 없는데. 미르 킹쉴드는 억울했다.

*

경찰서 앞이다.

“…….”

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사고를 앞으로 절대 안 치겠다는 남자일수록 그럴 말을 해야 할 정도로 이미 전적이 화려하고 앞으로도 화려할 가능성이 높은 건 당연하지…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이미 진 것인지도 모른다.

'미르 킹쉴드…'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 따끔하게 혼내야겠다. 애교를 잘 부리니 저도 모르게 넘어가게 되지만 한 번씩 꼭 크게 사고를 친다. 예상했는데도 화가 난다. 경찰서 문턱 한 번 밟아본 적 없는 도현을 여기까지 오게 하다니.

도현은 베이지색 H라인 스커트에 연보라색 민소매 블라우스를 입은 시원한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웨이브 져 있었고 주얼리는 다이아몬드가 하나 달린 가느다란 금실 목걸이에 귀에 딱 달라붙는 작은 깨알 다이아 귀걸이, 캐주얼한 시계 정도가 다였다. 급하게 나온다고 잡히는 대로 집어 입고 나왔다. 베이지색 9cm 펌프스를 신고 리니어카에서 내린 도현은 한숨부터 쉬었다. 경찰서라니. 영 연이 없는 곳이다.

안에 들어갔더니 덩치가 산만 한 남자들이 조그마한 의자에 겨우 구겨 앉아 경찰관에게 아니꼬운 태도로 건성건성 대꾸하고 있었다. 누가 들어오자 다들 힐끗 보았는데 그중에 유난히 반짝반짝 빛이 나는 플래티넘 블론드가 눈에 띈다.

“도현아!”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의자에 기대앉아 있던 그는 도현 킬스버그를 발견하자 벌떡 일어났다.

“거…! 앉읍시다! 아직 안 끝났어요.”

“도현아~”

그는 경찰관을 무시하고 그녀에게 달려가 끌어안았다. 그는 도현의 얼굴에 자기 뺨을 누르고 비볐다. 도현은 그가 일단 애교를 부리고 보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아, 무슨 일인데요?”

“도현 킬스버그 씨 되십니까? 여기 앉으시죠.”

“아냐, 도현아. 이건 내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그는 그렇게 말했다. 참 그의 얼굴만 보면 세상에 별일이라는 게 정말 있나 싶다.

“킹쉴드 씨와는 어떤 관계신가요?”

“그게 지금 상황이랑 연관이 있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킹쉴드 씨가 이런 것을 가지고 있어서요.”

도현은 인상을 왕창 찌푸렸다.

“분명히 사용등록을 제대로 해놨을 텐데요.”

경찰의 손짓에 다른 동료가 도현에게 커피를 대접했다. 그는 미르와는 다르게 웃는 얼굴로 도현에게 설명했다.

“아, 네. 물론 그건 확인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이런 노… 아니, 이런 선수들이 전과가 많다 보니 확인차 연락드렸습니다. 혹여나 강제로 빼앗기거나 문서에 사인을 하게 하거나 겁탈을 당하거나 하신 일은 없으시죠?”

“네?”

“야!!”

미르는 소리를 빽 질렀다. 이건 정말로 그녀의 앞에서 그의 망신을 주겠다는 것이다. 거기다 그녀 또한 수모를 겪게 하는 게 아닌가. 그는 열이 받아 으르렁거렸다.

“경찰은 할 만한가 보네, 어? 밤길 조심해라.”

“미르.”

도현은 미르의 손을 잡아당겼다. 미르 킹쉴드는 그대로 그 경찰의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짐승 같은 기운이 풀풀 나기 시작했다. 경찰은 그래도 나이가 많고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이건지 그를 무시하고 도현에게 말했다.

“아니…. 아시지 않습니까. TFC 야만적인 거. 멀리 있을 때나 재미있는 거죠. 모르십니까? 일본에 그 무슨 루카스인가 뭐신가. 혹시나 그런 경우이실까 봐 여쭤본 겁니다. 아니라면 다행이십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전자서류 몇 개를 꺼냈다.

“선수들 사고 치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다음번에도 이런 일 있으면 서에서 확인차 부를 수도 있습니다. 확인증 하나랑 이거랑 사인 좀 부탁드립니다.”

“아니, 이런 건 원래 구단에서 알아서 해주는데 왜 도현이한테 자꾸 지랄이냐고.”

“그럼 이건 전처럼 매니저 오시면 사인받을까요?”

경찰서에 임시 구류된 사실에 대해 본인과 증인 한 명의 구류 사실에 대해 문제없음을 명시하는 종이였다. 경찰은 그 종이는 거둬가고 금융거래와 관련된 경찰서용 확인증 하나만 남겼다.

“사용등록도 제대로 해놨는데 왜 이런 걸 사인해야 하죠?”

“혹시 모르니까요, 혹시. 이래 놓고 사실은 남자한테 꽃뱀 짓을 당한 거니 뭐니 이런 얘기 나오면 저희도 골치 아프거든요.”

미르 킹쉴드는 아주 잡아먹을 기세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도현은 한숨을 쉬고 사인했다. 그리고 다른 확인증도 가져왔다.

“괜찮았죠?”

“…….”

미르의 얼굴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지만 그녀는 그것도 사인했다. 그러자 경찰은 그 종이 두 장을 챙기며 말했다.

“일단 귀가하셔도 됩니다.”

미르는 그가 움직이는 대로 여전히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오는 길에는 별생각이 다 들었는데 막상 와보니 뭔가 그렇게 큰일은 아닌 것 같다. 귀찮기는 했지만. 도현이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아니, 지금 이분들이 멀쩡한 남의 영업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는데 이게 지금 한두 분이 아닌 데다가 협조적이지도 않으셔서요.”

“네? 싸움이 난 건가요.”

“그렇죠.”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또 싸움판이 난 것인가? 다들 기스가 나 있었다. 이번엔 또 뭐 때문에 싸운 것인가. 또 서열 정린가 뭔가를 한 것인가?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의외의 얼굴을 발견했다.

“어… 어어… 저기 저분… 세현 퀸 교수님 아니에요?”

그녀는 깜짝 놀라 앞에 있는 경찰에게 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저런 분이 이런 일에 휘말리셔서…. 큰일 하시는 분이신데요.”

<유니버스>라는 약 5년쯤 전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과학 교양 프로그램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정확하게 우리가 어떤 세상, 얼마나 방대한 우주 속에서 사는지도 모르는 채 죽는다. 대중들의 과학 상식을 함양하고 과학 기술에 대한 인식을 재고하기 위하여 한국, 미국, 중국, 일본, 스웨덴 등의 나라에서 합작, 12개국어로 제작한 12부작 시리즈였다. 학계만이 알던 세현 퀸이라는 천재 과학자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어머. 사인받아야겠다.”

도현은 핸드백을 뒤졌다. 그러자 경찰관이 말렸다.

“안 그러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안 해주시더라구요. 지금 기분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왜요?”

“이놈… 아니, 웨스트이글 선수들이 단체로 껄떡거렸거든요.”

“네?”

도현이 눈을 크게 떴다가 확 미르 킹쉴드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도 경찰을 노려보던 미르가 펄쩍 뛰며 양손과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난 아냐. 난 아냐. 난 말렸어. 말렸어.”

“하여튼….”

도현은 인상을 팍 썼다. 여기 있는 이 남자들은 어쨌든 다 한 번씩 안면은 있는 얼굴들이었다. 같이 사는 사람이 또 TFC 광팬이라 더더욱… 도현은 소 닭 보듯 그들을 다시 한번 보고 미르를 돌아보았다.

“미르.”

“으, 응?”

미르는 살짝 그녀의 눈을 피했다. 도현은 양손으로 그의 양 뺨을 잡고 자신을 바로 보게 했다.

“미르.”

“응….”

“나랑 약속했죠? 사고 안 치기로.”

“아, 아니… 이건 내가 친 사고가 아닌데….”

“미르.”

“…잘못했어… 응? 화내지 마. 앞으로 저 새끼들이랑은 상종도 안 할게.”

“진짜죠?”

“응.”

흠. 도현은 미심쩍은 얼굴로 그의 눈을 똑바로 계속 보고 있다가 한숨을 살짝 쉬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그러자 미르가 잘 말했다는 듯 얼른 티셔츠를 까뒤집었다.

“여기… 여기 봐.”

“어머, 사람이 다쳤는데 병원부터 안 보내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도현은 디바이스를 꺼내 그의 조각 같은 몸에 난 피멍을 먼저 찍었다. 이런 건 증거가 생명이다. 약간 피도 났다. 도현은 속상해서 이리저리 그의 상처를 살폈다.

“아, 어떡해. 흉 지진 않겠죠?”

“응, 뭐….”

사실, 이런 건 오라만 몇 번 돌려도 낫는다. 도현은 그의 몸에 상처가 난 게 더 속상한 듯했다. 아깝게… 도현은 고개를 돌렸다.

“누구예요? 누가 이랬어요? 누가 친 사곤데 미르가 이러고 있는 거예요?”

도현이 주변을 휙 노려보았다.

“어…….”

미르는 슬쩍 눈만 돌렸다. 거기엔 그 교수라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저 여자한테 발렸다고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미르는 살살 도현의 눈치를 보며 다시 그녀의 허리를 슥 끌어안았다. 어쨌든 금방까지 저 망할 퇴물경찰 때문에 기분이 엄청 더러웠는데 갑자기 좋아졌다. 그녀가 이렇게 걱정해주고 화도 내주는 게 어쩐지 좀 좋다. 뭔가… 미르가 지금껏 가져보지 못한 걸 가진 느낌이었다. 기분이 좋다.

“아파.”

“많이 아파요? 진짜….”

도현은 인상을 팍 쓰고 경찰과 주변의 사고뭉치들을 다시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를 자리에 앉히고 구급상자를 찾았다. 경찰 하나가 가져다주었다.

“이럴 때 구단에서 변호사 불러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오고 있대.”

미르가 자신의 티셔츠를 끌어올리고 도현이 그의 상처에 소독솜을 댔다. 미르가 움찔했다.

“아야.”

“참아요.”

미르는 그녀의 말대로 참았다. 아픈 건 싫은데 아프거나 다치면 그녀가 더 상냥해진다. 다른 놈들에게 이럴 것 같진 않다. 그래서 더 좋다. 그는 그녀의 단정하고 깨끗한 이마에 입술을 대고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약간 상기된 얼굴로 그녀가 좋아서 가만히 그녀가 하고 있는 걸 보고 있는데 그걸 유심히 보고 있는 다른 새끼들이랑 눈이 마주쳤다. 미르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보지 마. 내 거야, 이 씹새끼들아.

그때 누가 경찰서로 들이닥쳤다.

“세현 퀸…!!”

말 그대로 들이닥쳤다. 그의 몸에 부딪쳐서 열리고 있던 자동문이 빠졌다.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던 그는 깜짝 놀라 유리 문짝을 얼른 잡았다가 테이블에 멀쩡하게 앉아있는 세현을 발견하고는 숨을 멈추었다. 그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문짝을 옆에다 두었다.

“아! 아까 부서진 거 겨우 끼웠는데!”

순경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하나가 징징거렸다. 지루한 얼굴로 의자에(여기 서장이 직접 어디서 가지고 나온 의자였다)에 앉아 있던 세현이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온 빨강 머리를 돌아보았다.

그는 팔이 부러져서 깁스를 하고 있었고 눈 한쪽도 거즈를 대서 안대를 했다. 입술은 터져서 의료용 테이프로 고정을 해 놓은 상태였다. 아래는 환자복에 위에는 신이 빚어준 그 잘난 상체도 테이핑이 잔뜩 되어 있었다. 그는 분명히 여기 있는 남자들 중에 제일 많이 다쳤다. 그는 세현의 곁에 다가갔다. 그녀는 심드렁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는 가까이 다가갔지만 손가락도 하나 대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다, 다친 데는 없어? 괜찮아?”

그리고 그는 뒤를 돌아 이 모든 일의 주범인 조나단 훅(다 씹새끼들이지만 이 새끼가 제일 씹새끼다)을 발견하고 화악 털을 세웠다. 그가 곧장 조나단에게 달려들자 이번엔 다행히도 말리는 놈들이 나왔다.

“야, 야. 여기선 하지 마라.”

“넌, 씨발, 내가 진짜 죽여버린다, 어? 이 개새끼야!”

“나한테만 지랄이야, 병신이.”

조나단도 퉁퉁 부은 눈으로 그렇게 투덜거렸고 제수스는 씩씩거리면서 겨우 물러났다. 그리고 여전히 감흥 없는 얼굴로 그 쇼를 보고 있는 세현을 발견했다.

“…….”

그는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경찰이 그에게 다가왔다.

“어, 병원 가셨던 제수스 강 씨죠? 조서 쓰시죠. 일단 먼저 폭력을 행사하신 게 제수스 씨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는 세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세, 세현….”

그녀는 무표정하게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교, 교수님….”

“너 나 아냐?”

그녀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제수스는 바로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무릎과 손을 덥썩 잡았다.

“세, 세현아, 잘못했어. 진짜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어. 어떻게 할까? 어? 미안해. 갑자기 저 새끼들이 나올 줄은 몰랐어. 그러니까 미리 얘기해줬으면 좋았잖아. 아, 아니, 아니야. 내가 다 미안해. 응? 화 풀어. 응? 응?”

그는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간절하게 말했다. 세현이 물었다.

“뭘?”

“어, 어?”

“뭘 어떻게 할 건데? 니가 뭘 할 수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게…! 뭐 사고 싶은 거 있어? 먹고 싶은 건? 내가 어떻게 할까? 말하는 대로 다 할게.”

“니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다고 뭘 해준다고 함부로 말해? 니가 내가 원하는 게 뭔지나 알아? 이해는 하냐? 어? 너 같은 수준으로 할 수나 있는 건 줄 알아? 너 오늘 내 시간 뺏은 거 어쩔 거야? 내 시간 일분일초가 이것들 산소 낭비하는 거랑 같은 줄 아냐? 어?! 멍청하다고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확 이걸 그냥!!”

세현 퀸은 제수스의 이마를 검지로 몇 번이나 세게 찌르며 을렀다. 그는 그녀의 꾸짖음에 깨갱 하고 움츠렸다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빌었다. 다른 동료들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정말 볼썽 사나울 정도로 싹싹 빌었다.

그리고 그는 곧 경찰에게 끌려갔다. 마지못한 듯했지만 아마도 그녀를 상대하는 것보다 경찰을 대하는 게 심리적으로 더 낫기 때문일 것이다. 세현 퀸 교수는 지루한 얼굴로 거기에 계속 앉아 있다가 곧 변호사가 오고 사람이 더 오자 쌩 하고 가버렸다. 변호사가 다섯이나 왔고, 그쯤을 기해 웨스트이글 사람들도 우르르 왔다. 그들은 선글라스를 끼며 서를 나가는 세현 퀸 일행을 돌아보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세현 퀸 교수의 변호인단이 웨스트이글 매니지먼트 쪽에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세현 퀸 교수님의 변호를 맡게 된 변호인단입니다. 저희 퀸 교수님은 성희롱, 성추행, 폭행 등의 일방적 피해자로 여기 있는 전원을 형사 및 민사 고발하실 생각입니다. 합의는 없습니다.”

“…아니, 잠깐만….”

선수들을 데리러 온 매니저들이 엄청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한 명이 상부에 전화를 하러 나갔다. 미하엘도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중얼거렸다.

“어, 이거 우리 좆된 거 아니냐.”

“왜? 왜?”

가람이 그에게 물었다. 미하엘이 옆에 앉아서 데스크에 이마를 박고 있는 제수스의 등짝을 잡고 흔들었다.

“야, 뭐야? 저 여자 뭐하는 여자야?”

“아, 몰라. 말 걸지 마, 이 개새끼야.”

그 꼴을 찬찬히 보고 있던 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들 언젠가 큰 코 다칠 줄 알았어요.”

“왜? 왜?”

미르는 도현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 2m가 넘는 덩치가 산 만한 남자가 키는 커도 자기 반도 안 되는 날씬한 여자에게 매달려 있는 것을 보니 퍽 웃기다.

“미르는 확실히 크게 연관 안 된 거 맞죠? 맞죠?”

그녀는 미르에게 물었다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경찰에게 물었다. 경찰이 조서를 보며 대꾸했다.

“일단 누구 때리지도 않았고 교수님께 집적거리지도 않았구요. 굳이 따지자면 방조죄가 좀 걸리는데 나중에 싸움 나니까 말리는 제스처는 보여서 형사 쪽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퀸 교수님 변호인단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웨스트이글도 변호사들은 많을 테니 괜찮겠죠.”

“아니, 그러면 이번 시즌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지장 있지 않나요?”

“뭐… 그렇겠죠? 시즌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싹싹 비는 게 나을 걸요.”

그렇게 말하고 경찰은 다른 선수에게서도 조서를 받으러 가버렸다. 도현과 미르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거참, 괜히 겁주네.”

미르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도현의 손을 잡고 활짝 웃었다.

“어쨌든 난 문제없는 거네. 집에 가자, 도현아. 안 그래도 바로 집에 가려고 했어. 같이 낮잠 자고 싶어서.”

“뭐라구요?”

그의 태평한 말에 도현이 그렇게 반문했다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시즌 못 나가면 어떻게 하려구요?”

“음, 뭐. 아쉽긴 한데 어쨌든 내 탓은 아니니까.”

그는 씨익 웃었다. 도현이 물었다.

“다른 동료들은요?”

“저 새끼들은 언젠가 큰 코 다칠 줄 알았어.”

“하하하. 정말, 미르는….”

아, 따끔하게 혼내려고 했는데. 너무 예쁘네. 그녀는 그의 코를 한 번 꼬집고는 밖으로 함께 나갔다.

*

GPA 4.22/4.3. 성적을 확인한 왕리밍 교수는 인상을 왕창 구기고 있었다.

“아니, 내 랩이 장난도 아니고 만점도 아닌 놈이 들어온다는 게 말이 돼? 그것도 이렇게 날로 학부 끝낸 놈을? 그것도 내가 받아? 우리 랩이 장난이냐, 어?”

GPA를 4.2 이상 맞으면 베이징대 물리학과 학부 졸업장을 받고 왕리밍의 랩에 들어오기로 한 조건이었다. 성적을 못 맞추면 캘리 박은 그에게서 손을 뗀다고 했고 그러면 그는 공안이든 전범재판소든 끌려가야만 했을 것이다. 다니엘로서도 그렇게 마음에 드는 성적은 아니었지만 많은 악재가 그의 발목을 잡으려고 도사리고 있는 와중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만으로도 잘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이런 타협을 제시하는 것은 처음이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의 앞에 선 매끄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렇게 말했다. 애초에 대답도 제대로 안 하고 이래도 흐느적, 저래도 흐느적 하던 그를 몹시나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왕리밍은 그가 처음으로 그런 말을 제대로 하자 그의 얼굴을 똑바로 주시했다.

“그 말 진심이냐?”

그가 물었다.

“진심입니다. 그간 바르지 못한 태도를 보여 죄송합니다, 교수님. 다시 공부에 정진하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다니엘은 그에게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현했다. 왕리밍은 그런 다니엘은 아래위로 한참 훑어보더니 대꾸했다.

“너 이게 끝 아니다? 어? 석사 수료도 못 찍고 나간 애들이 부지기수다. 알기는 하냐?”

“압니다. 저에게는 예전에도 지금도 이 길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교수님을 언제나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표현이 부족해서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점 사죄드립니다.”

처음에는 벙어린가 싶었는데 이럴 때는 또 말이 청산유수네. 왕리밍은 그를 계속 관찰했다. 알다시피 연구라는 것은 교수가 방향을 가리키고 밑에서 영차영차 굴리는 것은 다 이런 시다들이 하는 것이다. 왕리밍은 그가 풀어놓은 시험지들을 슬렁슬렁 확인하면서 생각했다.

‘하는 짓거리 보니 멘탈은 튼튼한 거 같고, 혼자서 독학으로 중력 증폭이랑 고질량점 중력 마법을 할 수 있다는 건 이쪽으로 제법 이해가 있다는 소리고…. 나이는 스물넷이니 딱 석사 들어올 때고, 치엔위 얘기 들어보니 제대로 할 마음은 확실히 생긴 모양이고….’

왕리밍은 그가 오답을 낸 문제를 보며 인상을 왕창 쓰고 저도 모르게 그 위에 문제를 다시 풀었다. 멋진 필기체로 끄적거리며 계속 생각했다.

‘어차피 관리하는 거야 치엔위가 할 거고, 저 새끼가 못해도 내 책임은 아니고, 잘하면 내 공이고. 요즘 같은 때에 내 밑에 하나라도 제대로 된 놈 더 있으면 좋은 거고. 학부 때부터 안 굴려서 반항기가 좀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어떻게 해야 하지? 전에 교수님이 루소 선배님이랑 비슷한 캐릭터라고 했는데 교수님께 물어볼까. 이 새끼한텐 뭘 맡겨볼까? 연구주제 몇 개 던져보고 어떻게 하는지 보자.’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다니엘의 시험지와 과제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뒤, 앞에 서있는 다니엘의 얼굴을 시원찮다는 듯이 올려다보았다.

“가을 입학으로 하고 석사 수업 착실하게 듣고 연구 주제는 이 중에서 골라봐라.”

왕리밍은 본인에게 필요하지만 직접하기엔 귀찮은 그런 연구주제들이 적힌 종이를 그에게 내밀었다. 앞에 열중쉬어 자세로 있던 다니엘이 말했다.

“저는 다음 봄학기부터 입학할 예정입니다.”

“어, 아는데. 그래도 이번 학기부터 그냥 해. 그럼 그동안에 놀 거냐? 어? 빠져 가지고.”

“곧 시즌이 시작이라 제대로 하지 못하면 계약위반으로….”

“야, 너 지금 나랑 장난하냐? 자꾸 말대꾸 할래? 어? 내가 뭐라고 했냐? 넌 앞으로 내가 꿇으라고 하면 꿇고 기라고 하면 기고! 너 고작 그런 자세로 공부하겠다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 지랄한 거냐? 어?”

다니엘은 인상을 약간 썼다.

“그래도 안 됩니다. 교수님께서 정 제가 가을에 입학하기를 원하신다면 입학하고 바로 휴학계를 쓰겠습니다.”

“휴….”

왕리밍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 새끼가 뭐라고 지껄인 것인가. 휴하아악?! 그딴 건 그의 사전에도 없었고 따라서 자기 밑에 있는 인간들의 사전에도 영원히 등재되지 않을 단어였다. 왕리밍이 머리에 핏대를 세우고 버럭 했다.

“이 새끼가 진짜 돌았나!!”

다니엘도 정색했다.

“교수님의 말씀이나 태도는 이해가 됩니다. 우리 쪽 실험은 도시나 나라의 존망이 오가니 느슨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이해합니다.”

그저 그런 사람이 되려면 남들만큼만 하면 된다. 남들이 하는 것만큼 멍청하고 게으르고 부화뇌동하면 된다. 최고가 되고 싶으면 당연히 그 값을 치러야 한다. 다니엘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시즌은 도현 씨에게 기필코 이길 거라고 호언해놓은 상태라서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한동안 정신을 빼놓고 있어 제대로 준비를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번 시즌에 꼭 죽여야 할 놈도 3명이나 있습니다. 이번 시즌은 제게도 중요합니다.”

“…….”

“그렇게 얘기된 걸로 알고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연구주제는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그럼.”

그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왕리밍의 오피스를 나갔다. 왕리밍은 입을 떡 벌리고 그를 보고 있었다. 진짜 저런 또라이는 난생처음이라는 얼굴이었다. 왕리밍은 ‘악~!’ 하고 짜증을 내더니 곧바로 치엔위를 불렀다.

“치엔 박사!!!!”

그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밖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시끄럽게 나더니 치엔위 박사가 빛의 속도로 오피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교수님의 언성 크기에 따라 그의 내심을 짐작하는 것은 랩장의 기본 스킬이었다.

“네, 교수님. 부르셨습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들어왔다. 다니엘은 그녀에게도 목례를 하며 밖으로 나갔다. 치엔위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잠깐 돌아보았다가 왕리밍을 다시 돌아보았다. 왕리밍은 손을 까딱까딱하며 그녀를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제기랄, 다니엘 스톤하츠….’

저 새끼도 언젠가 죽여버려야겠다. 교수님 비위 하나 못 맞춰서 자기까지 불려 들어오게 한단 말인가! 그것도 저런 뻔뻔한 얼굴을 하고서! 치엔위는 속으로 이를 바득 갈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한 한 시간가량 왕리밍은 치엔위를 달달 괴롭혔다. 그 뒤 컨디션을 완전 망친 얼굴로 나온 치엔위는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흡연실로 불러냈다.

“너 말이야. 아무리 이쪽 분위기에 안 익숙해도 미친 거 아니냐? 교수님이 말씀하시면 니가 할 수 있는 말은 몇 개 없어.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어? 아직도 모르겠냐?”

“저는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한 것뿐입니다.”

“야, 우리 랩에서 정당하고 정당하지 않고를 결정하시는 건 교수님이야. 너 그거 대가리에 안 박혀 있으면 금방 쫓겨난다. 그래도 괜찮냐?”

다니엘은 진짜 조각처럼 잠깐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대꾸했다.

“그럼 제가 다음 학기부터 해야 할 일이 뭡니까? 들어야 하는 수업을 마스터하고 연구를 시작하면 되는 겁니까?”

“그래.”

“그럼 수업은 지금까지처럼 시험으로 대체하겠습니다.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연구도 하겠습니다. 하지만 시즌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야, 니가 생각하기엔 내가 너랑 교수님을 세트로 죽이려면 어떻게 하는 게 제일 효과적일 것 같냐?”

치엔위가 칙칙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다니엘이 대꾸했다.

“그리고 일요일은 무조건 쉬겠습니다. 그건 치엔 박사님이 저를 진짜 죽인다고 하셔도 포기 못 합니다.”

“…….”

사회 생활에서 제일 짜증나는 부류가 뭔지 아는가? 바로 이렇게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놈이다. 치엔위는 머리에 핏대가 솟았다. 어디서 굴렀을지도 모를 이런 근본 없는 새끼가 감히 자신에게 말대꾸를 하는 것이 너무나 열 받았다.

“야!!! 너 진짜 죽고 싶냐?!! 너 내가 교수님한테 매일 네, 네, 하고 굽실거리니까 우습게 보이냐!! 좋게 좋게 말하면 알아 처먹어야 할 거 아냐!!! 내가 너 당장 못 깔 것 같냐, 어?! 이 랩을 누가 돌리고 있는지 감이 안 잡히냐!! 바로 내가 여길 돌리는 거라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치엔위는 당장에 다니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잡아당겼다. 자세나 표정까지도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알다시피 갈굼이란 다 내리갈굼인 것이고 당했던 사람들이야말로 어떻게 하면 확실하게 잘 갈굴 수 있는지를 학습한다. 치엔위는 소리를 지르며 다니엘의 머리채를 잡고 한참을 흔들다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아….”

마음은 항시 평온하게 다스려야 한다. 화가 많아지면 공부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교수님처럼은 절대 안 되고 싶다. 비록 이미 늦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치엔위는 후하후하 몇 번 더 심호흡을 하더니 전자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래, 니가 그렇게 자신 있으면 니 생각대로 해봐. 근데 너 못 하잖아? 내가 제일 먼저 너 자르자고 할 거다. 우리 교수님? 학회장님? 누가 너 지켜줄 것 같냐?”

“…열심히 하겠습니다.”

“알았다. 할 일 해.”

그래도 치엔위가 왕리밍보다는 말이 통한다. 다니엘은 그걸 머릿속에 입력하고 연구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자 다니엘이 바로 말했다.

“셀레나.”

[네, 다니엘. 무슨 일이세요?]

“제가 베이징대를 다니기 시작한 후부터 제 훈련 기록과 학습 기록을 취합해서 시즌 중 스케줄을 만들어주십시오.”

[네? 시즌 중에도 베이징을 가야한다구요?]

“자료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는 잘하는 것을 매우 잘하는 남자다. 그게 뭐든. 그는 무언가에 있어 매우 월등한 우수함을 드러내는 데 요령이 있었다. 4년 동안 자신의 스케줄과 컨디션을 조절해주던 셀레나도 있고 시즌 전까지도 잘 해내던 것을 지금부터라고 못 해낼 리가 없었다. 자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제 도현 씨도 있다.’

전처럼 마음을 앓을 일도 없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세계 최강의 남자가 될 자다. 다니엘은 전화를 끊고 살짝 상한 머리카락을 보았다.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도현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좋아했다. 어떻게 관리하던 것인데. 도쿄로 돌아가면 곧바로 헤어 관리부터 해야겠다. 탈모는 남자의 죽음이다.

사실 물리학이라는 것은 왠만큼 할 수 있는 실험은 다 해놨기 때문에 석사생 수준에서 제대로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보는 게 맞다. 학부나 석사나 일단 책 보고 시험 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박사 2년차나 되어서야 이제 세상에 나온 건 다 공부를 했고 자기 주제라는 것을 생각해볼만 하게 된다. 다음 학기 수강표를 보고 들을 과목을 정해서 셀레나에게 보냈다. 매일의 적절한 학습량, 명상, 훈련량은 셀레나가 알아서 정해줄 것이다.

‘셀레나를 학회로 데리고 와야한다.’

시키는 건 다 잘하는 사람이니까 있으면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쭉 그를 좋아해왔다는 걸 보면 그녀는 확실한 매저키스트다. 그간 필독했던 연애 도서만 수십 권, 셀레나만한 미녀라도 자존감이 낮은 경우가 수두룩하다고 한다. 본인에게 매정하게 대하는 남자에게 이끌리는 여자란 그런 것이다. 겉으로는 다 가진 것처럼 보여도 자신을 소중하게 대하지 않는 사람에게 익숙해 쓰레기 같은 남자들에게 인생을 낭비한다.

다니엘은 그 점을 아주 살뜰하게 이용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녀도 그런 걸 원하는 것 아닌가? 자신을 학대하는 남자를 찾는 것이다. 자신을 매몰차게 대하는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다니엘 스톤하츠만한 남자는 없을 것이다. 좋은 상부상조다.

훈련 성적은 다시 예전 수준으로 올라왔다. 솔직히 다니엘 같은 마도사에게 훈련 성적이라는 것은 손발을 다 묶어놓고 장난감 활을 명중시켜 보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그것마저도 훌륭하게 잘 해냈다. 솔직히 엘 드라카만 아니라면 어떤 클럽이 어떻게 나와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순식간에 다들 자신의 무지만큼이나 무거운 몸무게에 짓눌려 의미 없는 고기덩어리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다. 어쨌든 문명의 세계에서는 제 아무리 의미가 없는 법칙이라도 지키는 것이 좋은 것이며 그러고도 충분히 다니엘은 이번 시즌 중에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우승. 미하엘 로드리게스. 조나단 훅.’

미르 킹쉴드를 죽이는 것이야 도현에게 금지당했다 치더라도 나머지를 죽이는 것은 괜찮을 것이다. 작년에는 웨스트이글이 겨우 결승까지 올라왔는데 올해도 가능하려나? 포틴즈든 세븐즈는 어쨌든 한 번만 만나면 된다. 만나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은 그때 강구해봐야겠다.

연구실로 돌아온 다니엘은 정자세로 전공서적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물리학 학부 과정에서 배우는 15과목과 석사 과정의 일부 과목은 이미 어렸을 때 독파했으나 역시 4년이나 손을 놓아 다시금 연마가 필요했다. 수학 전공 서적도 몇 개 있었다. 물리학 전공 공부에 수학적 지식은 필수다. 그대로 저녁 11시까지 연구실에 있었다.

“그럼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다니엘은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포닥을 제외한 랩원은 총 13명이었는데 그중 모두가 이 시간까지 남아있었으며 그 누구도 다니엘과 같이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들은 전부 여기 기숙사에서 살았다. 왕리밍이 부르면 그게 새벽 3시든 4시든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새카만 밤. 도쿄로 돌아가는 길이다. 서해의 위로 간혹 오가는 비행기나 비행차의 불빛이 보이는 것의 전부다. 그가 자주 가는 명상실의 방처럼 고요하다. 마음이 편하다. 왜 마음이 편한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게 뭔지도 자기 입으로 나오는 게 뭔지도 모르고 배설하는 벌레 같은 인간들이 지금까지 주변에 우글우글했다.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그것이 익숙하면서도 심기가 불편했다. 항상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도현을 만났다.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삶의 이유를 되찾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중러 전쟁 이후 굳이 마도사의 마력과 마법을 철저하게 제한해 놓은 TFC 업계에 발을 들인 것은 아이러니일까, 필연이었을까. 그런 생각도, 의도도 없이 그는 스스로를 강하게 속박했다. 스스로의 가능성과 능력을 제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섬뜩할 정도로. 도현을 만나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적 불구 상태로 평생 살았더라면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는 어떤 결말을 맞이했을까.

4년을 허비했다. 초조했다.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더 줄어들 것 같다. 더 초조하다. 하지만 온몸에 활력이 돌았다. 명상을 할 때보다도 정신이 더 또렷했다. 그의 뇌는 많은 것을 동시에 정확하게 판단해냈다. 이런 순간에도 집중력이 최상치에 달했다. 도현과 함께 있거나 TFC 같은 것을 하며 죽음이나 고통과 가까이할 때나 드는 감각이었다.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이 느낌.

‘기분이 좋아.’

이 마음을 그녀와 나누고 싶다. 다니엘은 디바이스를 들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니엘?]

아아. 달콤한 그녀의 목소리. 그녀가 부르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들린다.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도현 씨.”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친애의 정을 담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도 다니엘의 목소리가 음악처럼 들렸으면 좋겠다.

“저는 행복합니다.”

그가 말했다.

“제가 도현 씨에게서 받은 이 행복을 도현 씨도 전부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다니엘 좋아해요.]

“정말입니까? 정말 기쁩니다.”

[대단한 남자가 자꾸 불안해하고 자신감 없는 것만큼 꼴 보기 싫은 게 없죠. 다니엘이 하는 일 멋져요. 세상을 바꾸는 일이잖아요. 요즘 정말 보기 좋아요.]

“계속 칭찬하시면 제가 우쭐해질지도 모릅니다.”

[우쭐해하는 다니엘도 궁금한데요?]

그녀의 웃음소리에 귀가 간지럽다. 다니엘이 말했다.

“벌은 많이 받았으니 상이라도 주신다면 정말로 우쭐할 것 같습니다.”

[하하. 이 남자가 또 뭔가 꿍꿍이가 있었네. 뭔데요?]

그녀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다니엘은 기민하게 그런 기색을 눈치챘다. 그러자 더 이상 주변의 고요에 매몰될 수 없었다. 세계와 하나가 되지 못하고 한 명의 남자로 돌아온다. 오로지 그녀만이 선명하게 눈앞에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침을 살짝 삼키고 말했다.

“전에 티클러로 장난을 쳤던 것, 기억나십니까?”

다니엘이 치엔이 루카스의 집에서 돌아온 후 그녀와 서재에서 우연히 처음으로 플레이를 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다니엘의 성향에 흥미를 느꼈고(섭이면서 돔이고 M이면서 S인) 간단하게 서로의 사이에 규칙을 정하거나 그녀가 다니엘의 뺨을 때리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때의 그녀는 잘못한 것도 없는 다니엘의 뺨을 때리는 걸 상당히 어려워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도 그렇게 풋풋(?)할 때가 있었던 것이다.

[기억나요.]

그녀가 답했다. 어쨌든 그녀는 다니엘에게 간단한 규칙을 설정해주고 그의 뺨을 때리기도 했지만 다니엘에게도 기회를 줬었다. 아픈 건 싫지만 본인이 할 수 있을 만한 플레이가 있다면 해보겠다며 흥미를 보였다. 그녀는 티클러라면 아프지도 않고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다니엘은 뜻하지 않는 기회에 절제를 잃고 완전히 흥분해버렸고 아쉽게도 그때 이후로 도현은 다니엘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화내지 않으실 겁니까?”

[다니엘도 저 알잖아요. 싫으면 싫다고 말할 거예요.]

디바이스 너머 그녀가 말했다. 다니엘은 다소 상기된 얼굴로 가만히 굳어 있다고 천천히 입을 뗐다.

“도현 씨의 거, 거기를 티클러로 간지럽히고 싶습니다.”

그가 사회로 돌아오며 다소 병신이 된 것이 맞긴 했지만 어째서 그녀의 앞에서는 이렇게 더 병신이 되는 것일까. 다니엘은 무표정한 얼굴 너머로 그렇게 생각했다.

*

벌은 많고 상은 드문 관계였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따금 이렇게 상을 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아니, 나에게 상벌은 차이가 없다.'

그래서 가끔 도현 씨가 싫어하시지.

그녀는 최고를 사랑한다. 최고급 미식, 최고급 럭셔리 드레스, 최고급 다이아몬드. 그래서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 이제는 알 수 있다. 믿을 수 있다.

방은 그녀의 방이 좋다. 정원을 향하는 벽이 전부 유리로 된 방이다. 누가 봐도 상관없다는 듯이 커튼을 다 열어둘 것이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좋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남자이고 그녀는 그런 남자를 가진 여자다. 눈빛만 바라보아도 뿌듯하다. 그녀는 입맞춤을 하려고 하겠지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평소처럼 몸매가 잘 드러나는 단정한 투피스를 입고 있으면 좋겠다. 전에 입었던 하얀 실크 민소매 블라우스와 회색 H라인 스커트.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아 귓가에 얼굴을 묻고 향기를 맡을 것이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얼굴을 천천히 비비다 그녀의 실크 블라우스 채로 속옷을 가슴 위로 올리고 그녀의 스커트를 걷어 올려 그녀의 섹시한 팬티를 엉덩이 밑으로 살짝 내리자. 그리고 그녀를 침대로 쓰러뜨리고 네 발로 엎드리게 하면 뒤에선 내게 그녀의 모든 것이 보일 것이다. 그녀의 얼굴, 그녀의 가슴, 그녀의….

'알몸이 더 좋을까?'

그녀를 홀딱 벗겨서 내가 그녀에게 준 보라색 다이아몬드 반지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걸치지 못하게 한 뒤 똑같은 자세로 침대에 엎드리게 만들자. 상체를 침대에 낮춘 채 나를 돌아보면 그녀의 모든 것이 보일 것이다. 그녀의 얼굴, 그녀의 가슴, 그녀의….

나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채 손에 플로거(Flogger, 가죽이나 말 머리카락으로 만든 스팽킹 도구)를 들… 아니, 티클러(Tickler)를 들고 한 몇 초간 가만히 그녀를 지켜볼 것이다. 그녀가 매우 불편한 긴장감을 느낄 때까지. 그리고 나는 그녀의 동그랗고 탱탱한 엉덩이를 살짝 간지럽힐까 하다가 허벅지를 살짝, 무릎 뒤를 살짝, 허리, 옆구리, 날개뼈, 가슴, 유두를 간지럽힐 것이다. 그녀의 배꼽을 간지럽히고 대망의….

그녀가 간지러움 때문에 온몸이 새빨개질 정도로 괴롭힐 것이다. 그녀는 간지러움과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흥분할 것이고 그녀가 내게 음악 같은 목소리로 애원하면 10분 더 괴롭힐 계획이다. 그리고 잔뜩 젖은 그녀의 그곳을 부드럽고 다정하게 빨아줄 것이다.

완벽한 시나리오다.

도현 씨가 좋아할까?

다니엘 스톤하츠는 두근두근한 마음을 안고 메트로서울로 향했다. 토요일 밤이었다. 그는 치엔위 박사나 왕리밍 교수가 아니라 세상이 그를 가로막더라도 일요일엔 집에 돌아갈 각오를 다지고 나왔다. 다행히 잘 빠져나왔다.

도현의 집은 넓은 정원을 가지고 있어 비행차를 가지고 오기 편리하다. 다니엘은 비행차에서 내렸다. 비행차는 주차타워로 알아서 돌아갔다.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정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평소처럼 다소 느릿하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세상에 그에게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여기뿐이었다. 세상에 그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도현 킬스버그였다. 꿈을 되찾은 이상 전처럼 그녀가 그의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도현이 필요했다.

다니엘은 현관 앞에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늦었습니다, 도현 씨. 아직….”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진짜죠? 안 그런다고 해놓고 또 그러면 진짜 안녕이에요. 알았어요?”

“알았다니까. 응? 이제 얘기는 그만하고 방에 가자.”

“씁. 다음에 그런 일 있으면 꼭 피해자를 도와주라구요. 이번에야 교수님이 원체 대단하신 분이라 큰 피해가 없으셨지만 그런 경우는 드문 거 알잖아요.”

도현은 자신의 무릎을 껴안고 바닥에 앉아 있는 미르 킹쉴드를 혼내고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다니엘은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다. 자신이 똑똑하게 태어나고 싶어서 똑똑하게 태어난 줄 아는가? 그런데도 혼내는 건 저 남자라니. 게다가 저건 금수를 가르치는 것이나 진배없는 짓이다.

집으로 들어온 다니엘을 힐끗 본 송선호는 다시 도현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여자와 아이를 지키는 건 남자의 의무야. 그런 것도 모르는 새끼랑 무슨 대화야, 대화가.”

“뭐?! 내가 못 배운 데 니가 뭐 보태 줬냐!”

“안 보태 줬다. 더 보태 줄 거나 있냐?”

미르는 송선호를 노려보면서 으르렁거렸다. 송선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짐승같은 새끼.”

도현이 경고했다.

“싸우지 말랬지?”

“알았어. 잘못했어, 도현아. 예뻐. 좋아해.”

“하여튼.”

미르의 두서없는 말에 도현이 웃었다. 그의 귓가와 턱을 긁어주며 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다니엘, 왔어요? 늦었네요.”

“…다녀왔습니다.”

다니엘은 그녀를 위해 사온 각종 베이징 명물을 가지고 부엌으로 갔다. 북경 오리와 꽃술 등 베이징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다. 도현은 미르 킹쉴드를 떨쳐내지 못하고 멀찍이서 말을 걸었다.

“이렇게 늦은 밤만 아니었으면 먹었을 텐데요.”

“이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원래 키스는 계획에 없었다. 그녀를 안달 나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체로 안달 난 것은 다니엘 쪽이었다. 그는 그녀의 뒤쪽에서 그녀의 고개를 잡고 입을 맞췄다. 그는 입에 달콤한 연유사탕을 물고 있었다. 잘 부서지는 사탕이라 반씩 나눠 가졌다. 입술을 떼자 그녀가 음, 하고 감탄사를 냈다.

“맛있어.”

“악! 둘이 뽀뽀하지 마!”

미르는 버럭 화를 냈다. 도현은 그의 코를 꾸욱 누르자 그가 도현의 손가락을 물었다. 그가 무는 대로 내버려둔 그녀는 다니엘에게 말을 걸었다.

“피곤하지 않아요? 제일 바빠요, 요새.”

“괜찮습니다.”

사춘기 이후부터 스무 살까지 용병으로, 그 이후로는 쭉 운동선수로 지냈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체력이 좋았다. 그는 곧 도현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보고 싶었습니다, 도현 씨.”

다니엘은 그녀의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항상 무표정해 보여도 도현은 그의 미묘한 차이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는 그와 얼굴을 잠깐 부비며 친애의 정을 나타냈다. 역시 사람이 살을 붙이고 몇 달을 같이 살면 정이라는 게 든다.

“나도.”

미르는 도현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그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여서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사고뭉치.”

“이번엔 내가 친 사고도 아닌데?”

“알았어요. 믿는다고 했잖아요.”

“응….”

도현은 잠깐 미르의 얼굴을 보고 그리고 다니엘과 송선호도 보더니 말했다.

“오늘은 다 같이 잘까요?”

“넷이서?”

미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 쩝, 하는 소리를 냈지만 말했다.

“둘이서만 있고 싶은데. 그래도 니가 그러고 싶으면.”

미르는 그렇게 말했고 송선호는 대놓고 한숨을 푹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자러.”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도현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잠깐 보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까칠하기는. 또 삐쳤네.

다니엘은 잠시 정물처럼 굳어서 고민하다가 슬쩍 운을 뗐다.

“그럼 제 상은….”

“그냥 미르랑 둘이 잘까요?”

“진짜? 아싸!”

미르 킹쉴드는 금방까지 혼나면서 그녀의 무릎에 붙어서 바짝 몸을 낮추고 있더니 벌떡 일어나며 그녀를 들어 올렸다. 다니엘은 미르와 장난을 치며 침실로 가는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금방 거기선 도현의 뜻에 따르겠다고 하는 것이 정답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까 집에 오는 길에 너무 기대하는 바람에 입 밖으로 본심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다니엘은 한숨을 짧게 쉬고 자기 방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보통 이러면 도현은 내일 하루 정도는 그에게 온전히 시간을 내줄 것이다. 기다리자.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2층으로 올라가니 2층 거실의 1인 소파에 앉아 있는 송선호가 보였다. 테이블에는 안주도 없이 술병만 덩그러니 올라와 있었고 그가 쥐고 있는 크리스털 잔에는 위스키가 잔뜩 따라져 있었다. 창밖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던 그는 다니엘이 올라오자 깜짝 놀라 눈가를 훔쳤다.

“…그래도 도현 씨를 너무 원망하진 마십시오. 송 편집장님이 그러니까 도현 씨가 더 괴롭히는 겁니다.”

다른 처첩을 잘 관리하는 것도 훌륭한 왕비의 덕목이라던가. 어쨌든 그가 더 괴롭히는 재미가 있는 남자라고 도현이 생각할 것이라 예상하는 것은 퍽 불쾌한 상상이다. 다니엘 스톤하츠, 그는 언제나 한번에 두 가지 이상의 성취를 해내는 남자. 그는 그렇게 송선호에게 조언하고 자기 방으로 갔다. 황당하고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다니엘의 뒷모습을 보다가 술을 벌컥 마셨다. 센티멘탈 할 때가 아니다 싶을 것이다.

*

어두운 침실, 자세히 귀를 기울이면 누군가의 숨소리가 얕게 들린다. 어느 순간 창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자동으로 걷히며 새벽녘의 어스름한 도시의 풍경이 보인다. 그리고 몇 분 후 작은 전자음을 내며 알람이 울렸다. 검은 마호가니 침대, 고급스러운 침구, 그 안에 누워 있던 남자가 스르륵 일어났다. 그는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나온 그는 거울 앞에 섰다.

“…….”

반짝이는 골든 블론드, 조금 자라 앞머리가 눈가에 이르렀다. 똑같은 금빛 속눈썹에 감싸인 비취색 눈동자가 신비롭다. 선명한 붉은색을 띈 글래머러스한 입술에 하얀 피부, 잘 가꿔진 몸매까지 그림으로 그린 듯이 굉장한 미남자다. 잠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던 그는 머리를 닦으며 뒤로 돌았다.

“뉴스.”

목소리마저도 근사한 그가 그렇게 짤막하게 말하자 그의 디바이스에 내장된 인공지능 비서가 곧바로 밤새 온 연락과 메일, 뉴스와 관심 사건의 진행 사항을 정리하여 읊었다.

[…육군 특수전사령부 소속 홉 중위의 폭로로 한국, 미국, 중국, EU를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세계물리학회의 학살을 묵인 혹은 적극 지원한 것으로 드러난 사우디 게이트도 엘 드라카 전야제로 여론의 관심은 급격히 꺼지고 있습니다. 현재 학회는 많은 국가의 검찰 기관에 의해 기소될 방침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한미중은 기소유예 혹은 집행유예로 마무리될 것 같고 다른 나라에서는 학회가 지부를 철수할 것 같습니다. 홉 중위는 군인의 신분으로 국가기밀을 폭로했으니 군법에 의하면 사형도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당장 죽이지는 않겠지 여론이 안 좋아질 테니까.”

그는 혼잣말을 하듯 그렇게 인공지능에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외부의 동요와는 상관없이 학회 내부에서는 아칸소 프로젝트를 무리 없이 추진하고 있으며 빅뱅 실험의 초안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웜홀 생성은?”

[터널 프로젝트는 초안만 마련된 채 여전히 특별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수에즈 프로젝트가 성공, 아칸소 프로젝트까지 성공시키면 고질량원을 사용하여 빅 크런치 실험 후 곧바로 빅뱅 실험을 하겠다는 계획인 것 같습니다.]

“돈을 블랙홀처럼 빨아먹기만 하고 뱉어내지는 않는군. 우리 돈은 세금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지.”

[물리학회는 현재 다른 어떤 과학자들보다도 가치와 활용성이 무궁무진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계속해.”

그리고 인공지능은 다른 주제로 넘어가 계속해서 뉴스를 전했다. 그렇게 에반 블랙은 인공지능의 단조로운 목소리를 계속 들으며 치장을 시작했다. 페닌슐라 호텔의 프레지덴셜 스위트였다. 드레스룸에 들어가며 가운을 벗어 던졌다. 드레스룸에 비치된 커다란 거울이 훌륭한 미남자의 모습을 여과 없이 비추고 있었다. 그는 로고가 허리에 들어간 흰색 드로즈를 입고 정장을 고르고 바지를 입었다. 고급스러운 네이비색 정장이었다. 셔츠는 하늘색을 살짝 띠는 것으로 하고 허리띠는 짙은 고동색, 넥타이는 적갈색을 살짝 띠는 글래머러스한 진회색이었다. 행커칩은 짙은 고동색, 커프스는 사파이어, 구두는 광이 나는 검은색이었다. 베스트에 상의까지 걸치고 나서 매우 클래식하고 비싼 시계까지 찼다. 그는 왁스를 살짝 손에 바르고 머리를 자연스럽게 정리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거울 앞에 섰다. 금방까지 목욕 가운을 걸치고 한량같이 의자에 늘어져 있던 남자라고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퇴폐적인 느낌이 났다. 아무리 수트 안에 꼭꼭 감춰도 섹시하기 짝이 없는 미모라 그랬다. 그는 왜인지 모르게 자신의 얼굴을 보며 잠깐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디바이스와 담배, 선글라스를 챙기며 드레스룸을 나갔다.

호텔 아래로 내려오니 차가 대기해 있었다. 호텔의 문지기가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고 에반은 차에 탔다. 차는 곧 출발하여 메트로서울에 있는 EB뱅크의 지사를 향해 강을 건너 강남으로 향했다.

회사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전화가 왔다.

[회사야?]

“어.”

[팔겠다는 놈들은?]

“있어.”

[얼마나?]

“여기만 하면 10만 정도.”

[얼만데?]

“명당 평균 2~3천.”

[우리가 모자란 건 만 명 정도고…. 그냥 몇 만 사서 다 데리고 와서 풀까? 손해는 안 볼 것 같은데. 중국은?]

“일단 들은 것만 해도 100~200만은 거뜬한 모양이던데.”

[하긴 근 10년 동안 점점 시장이 작아지고 있었지. 딱 맞춰서 게이트가 하나 생겨 주시네.]

전화 속의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스스로도 웃긴지 웃었다. 에반도 그냥 따라서 피식 웃고는 자리에 앉아서 창밖을 보았다. 거대한 메트로서울이 발아래에 있는 것처럼 바쁜 대도시의 정경이 한눈에 보이는 오피스였다.

[근데 너 하고 있는 건 잘 되어가는 거 맞냐? 요새 뉴스 나오는 거 보니까 심상치 않던데.]

에반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이 나올 뻔했지만 참았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전화를 한 것일 테다.

“이런 건 10년, 20년을 보고 투자하는 거다. 조급하게 굴지 마.”

[당장에 돈이 눈에 보이는데 이상한 데로 자꾸 돈이 빠져나가니까 하는 말 아냐.]

“넌 니 할 일이나 잘해. 난 내 일하는 거니까.”

[이번에는 넘어가는데 다음에도 이런 일 생기면 나도 못 넘어간다. 이게 당장 얼마라도 빼서 원금을 회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넌 도대체 뭘 보고 여기다 그렇게 돈을 쏟아 붓는 건데.]

“이미 받을 건 다 받았어. 그 교수님들이 성공을 해야 쓸 수 있다는 게 문제일 뿐이야.”

[하아, 난 모르겠다.]

그리고 그가 막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너 저번에 만나던 그 여자 찬 거냐? 스가르스가? 스가스가르였나? 그 사장 딸? 나한테까지 연락 온다.]

“그렇게 끈질긴 여자인 줄은 몰랐는데.”

에반은 다른 직원이 미리 준비해둔 서류를 읽으며 남의 일처럼 그렇게 대답했다.

[너랑 만나던 여자들은 다 이 모양이었어. 넌 무슨 몸에다 꿀을 처바르고 다니냐? 여자들이 왜 이렇게 죽어라 쫓아다니는 거냐? 비법 있으면 좀 나눠 먹자, 어?]

“그런 거 없다.”

그렇게 답하고 에반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는 몇 장으로 요약된 회사의 하루, 일주일, 한 달, 분기, 1년 거래 장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에반 블랙이 세운 EB뱅크는 현재 스위스에 있는 본사를 기반으로 뉴욕, 런던, 도쿄, 상하이, 메트로서울 등에 진출해 있는 투자은행이었다. 작은 사채 회사로 시작하여 10년 만에 여기까지 큰 경우는 전 세계를 다 찾아봐도 손에 꼽을 정도다.

오전 내내 장부를 확인하고 본사와 연락했던 인신담보채권을 1만 사서 이스라엘로 보낼 운송편을 구했다. 점심때는 누구를 만났다.

“BB.”

“에반~”

전에 파티에서 오랜만에 재회했던 BB였다. 그는 분위기 좋고 맛이 좋지만 캐쥬얼한 식당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다 일어나며 그녀를 맞이했다. 가볍게 서로 뺨을 맞추며 인사했다. 그녀가 웃었다.

“너랑 만나면 사람들이 다 쳐다본단 말이야. 부모님께 감사해.”

“바쁘신데 불러낸 건 아니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하는 일은 어떠세요?”

“왜? 투자 좀 해주게?”

“투자금은 벌써 넉넉하게 받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게 둘은 한참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 일 얘기에서 벗어나 BB가 물었다.

“전에 데리고 왔던 그 여자는 진짜 전에 만났던 여자야?”

‘전’이란 BB의 40살 생일 파티를 말했다. 에반이 대답했다.

“네.”

“그래? 오래 만났어?”

“만났던 여자들 중에 제일 오래 만났어요. 2년 정도.”

“진짜? 그렇게 여자 만날 것 같은 스타일로는 안 보였는데.”

“그런가요?”

BB가 턱을 괴곤 에반을 보면서 여상하게 대꾸했다.

“응.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되는대로 만날 것 같달까. 역시 좀 지골로 같달까.”

“하하하.”

“돈 많은 여자들을 그렇게 만났다며?”

“굳이 그렇게 골라서 만난 건 아니었는데요.”

“그때 본 도현이라는 여자도 돈 많은 집 딸이었어?”

“그 애는 자수성가였죠.”

“그래? 분위기가 여유로운 게 분명히 부잣집 딸이겠거니, 했는데.”

“그렇죠?”

그렇게 말하며 에반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지금도 친구같이 지내는 가봐? 난 사람들이 전 애인이랑 그렇게 지내는 거 신기하더라.”

“완전히 캐쥬얼한 게 아니면 저도 완전히 인연이 끊어지는 편인데…. 그 애는 특별해요.”

“그래? 어떤 점에서?”

“모르겠어요. 그냥 특별해요.”

“다시 잘해봐. 그 여자도 너한테 나쁜 감정 남은 것처럼 보이진 않던데.”

BB는 그렇게 말했고 에반은 자연스럽게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아참. BB, 동경대 엘리야 민 교수 알지 않아요?”

“어, 알지. 왜?”

2시간가량 점심 식사를 끝내고 회사로 돌아갔다. 비서를 경매장에 보내 놨기 때문에 전화를 연결해놓은 채 일을 했다. 5시가 지나갈 때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에반은 도현 킬스버그에게 전화를 걸며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녀에게 선물로 줄 만한 게 있을까? 사무실에는 별게 없었다. 잠깐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으음, 역시 없다. 사람의 환심을 사는 데는 선물 만한 것이 없는 법이다. 에반은 가는 길에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반?]

“응, 뭐해?”

[좀 있다 나가려고.]

“언제?”

[여기선… 한 시간 뒤쯤 출발할 것 같은데? 왜 그래?]

“보고 싶어서.”

에반은 엘리베이터의 앞에 섰다. 버튼을 누르고 가만히 전화를 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그림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그를 관음했다.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시선들이다.

“집으로 가도 돼?”

[응, 와. 같이 갈래?]

“응.”

[하하, 어디 가는 줄 알고?]

에반은 그녀의 웃음소리에 기분이 좋아져 희미하게 미소를 띠고 대꾸했다.

“너랑 있으면 어디든 재미있어.”

[집으로 와.]

그렇게 짧은 통화를 마치고 그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에는 커다란 거울이 양쪽에 달려 있었다. 양 거울이 서로를 반사하여 그의 이미지가 한없이 증가했다. 그는 그걸 잠시 보다가 거울 가까이 다가가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화려한 금발, 비취색 눈동자, 붉은 입술, 깨끗한 피부에 늘씬하고 훤칠한 남자가 서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울을 보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응. 예뻤는데.]

‘진짜 다시 기를까?’

머리를 다시 기르라던 도현의 말이 생각났다. 그녀와 만날 때의 그는 상당히 과도기적인 상황에 있었다. 하던 사업이 본격적으로 궤도를 타 갈고리로 긁듯 돈이 들어오던 시기가 지나고 묘한 회의감에 새로운 것을 이것저것 찾던 시기였다. 그녀도 그런 새로운 것 중에 하나였다. 잠깐 동안 머리를 기를까, 말까 고민하던 에반은 결정을 보류하고 지하 주차장에서 내렸다. 곧 고민의 방향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뭘 사갈까.’

에반은 근처 백화점에서 눈에 띄는 예쁜 것들을 마구 사고 유명 제과 가게에 가서 제일 비싼 케이크와 디저트를 샀다. 그리고 나오는 길에 보인 명품 주얼리 브랜드에 들려서 팔찌를 고르는 중이었다. 직원이 제시한 상품 둘 중에 하나를 고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에반 블랙입니다.”

그는 팔찌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그렇게 대꾸했다.

[블랙! 아, 드디어 받는구만. 자, 자네, 알다시피 우리 회사가 지금은 어렵지만 앞으로 잘 될 분야라는 거 알지 않나. 나를 믿고 신주를 인수해주면 안 되겠나? 지금 회사에서 새 브랜드를 런칭하는데 출시일 반응이 괜찮아. 자료 지금 당장 보내주겠네!]

속사포처럼 말하는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에 에반은 잠깐 디바이스의 화면을 봤다가 다시 전화를 받았다.

“깁슨 사장님.”

[그, 그래. 어때? 자료는 봤나? 어떻나? 잘 될 것 같지? 그렇지?]

“이미 채권은 유동화시켰습니다. 저도 이제 위험한 물건은 빨리 손절하자는 주의라. 그쪽이랑 통화해 보시죠.”

[뭐라고?! 이 개…!]

에반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상점의 점원을 보며 물었다.

“디자인은 이게 좋은데 색깔이… 이런 색깔이 요새 유행이라는 건 알지만 괜찮을까요? 착용할 사람이 안목이 높아서.”

“보시다시피 클래식한 복장과 캐쥬얼한 복장에 상관없이 굉장히 잘 어울리는 아이템입니다. 보시죠.”

터콰이즈 블루와 에메랄드 빛의 중간 정도로 오묘하고 아름다운 빛을 띄는 주얼리였다. 약간 푸른 빛을 띄는 다이아몬드가 메인 보석의 주변을 꾸미고 있었다. 점원은 홀로그램을 통해 여러 잡지 사진을 띄워 주었다. 에반은 흠, 하고 하나하나 보면서 고심했다.

“둘 다 잘 어울릴 것 같긴 한데.”

그는 클래식한 다이아몬드 팔찌도 같이 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전화가 다시 왔다. 그는 전화를 받았다.

“에반 블랙입니다.”

[아, 블랙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통화가 가능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누구십니까?”

[저희는 <월드인베스트먼트>라고 하는 프라이빗 뱅크입니다. 현재 300명 규모의 용병단을 4개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자회사를 5개 더 만들 생각입니다. 획기적인 훈련 시스템을 통해 사망률을 줄이고 실적을 높이는 저희 회사의 자체적인 프로토콜을 적용하여….]

“그러시군요. 알아보고 담당자에게 다시 연락 드리게 하겠습니다. 회사 계정으로 자료를 보내주십시오.”

[그래도 전화로 좀 더….]

“제가 지금 비즈니스 미팅 중입니다. 그럼.”

에반은 전화를 끊었다. 그는 점원에게 말했다.

“둘 다 주세요.”

그는 양손에 잔뜩 쇼핑백을 들고 직원이 끌고 온 자신의 차에 탔다. 백화점의 직원들이 허리를 숙여 그를 배웅했다. 그는 그 길로 내비게이션을 찍지 않아도 외우는 길을 따라 도현의 집으로 향했다.

‘좋아하겠지? 좋아할 만한 걸로만 골랐으니까. 어디 가는 걸까? 같이 가자고 했는데.’

그는 백미러에 자신을 다시 비춰보았다. 이런 차림으로 가도 되는 것일까?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나니 에반은 자신이 지금 제법 들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애는 남자보다 친구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타입이야.’

마음을 좀 가라앉혔다.

*

“정말 그렇게 위험할까요, 선생님?”

도현이 다소 심각한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이번 엘 드라카는 직접 관람하러 가기로 했다. 엘 드라카를 직관하는 건 처음이었다. 로웰 리와 어시스턴트들, 다른 친구들도 함께 가기로 했다. 어쨌든 로웰 리 덕분에 정말 심각한 상황은 해결했고 송선호와 미르가 그녀의 채무를 마저 다 갚아주었으니 이런 여유도 생겼다.

송선호의 돈이야 일단 입 닦기로 결정했지만 미르에게는 그녀의 골드 카드를 주었다. 적어도 내년에 그의 연봉이 나올 때까지는 도현이 그를 먹여 살려야 했다. 그리고 누차 말했지만 그는 매우 연비가 안 좋은 삐까번쩍한 스포츠카 같은 남자다. 유지비가 제법 든다.

그녀는 품이 좀 있는 헐렁한 붉은색 유니폼에 딱 붙은 블랙진을 입고 하얀색 빈티지 스니커즈를 신었다. 머리카락은 날개뼈 어깨선을 약간 넘는 지점까지 다듬어 잘랐다. 머리는 풍성하고 자연스럽게 웨이브 졌다. 선크림만 잘 발랐다.

“음, 뭐 평범한 수준이죠.”

로웰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녀는 금색과 검은색으로 DRAGONS라고 적힌 이스트드래곤의 빨강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도현은 어시스턴트인 신재인의 얼굴에 빨간색 페인팅을 하는 걸 도와주며 약간 한숨을 쉬었다. 도현도 뺨에 드래곤을 그렸다. 그녀가 딱히 이스트드래곤을 응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로웰 리는 신태호의 광팬이었고 어시스턴트들도 이스트드래곤 팬이어서 자연스럽게 묻어갔다.

“도쿄돔은 유독 훌리건도 심하다고 하고.”

송선호도 자꾸 걱정하고…. 도현이 중얼거렸다. 마음이 술렁거렸다. 설렘보다는 좀 강하고 불안감이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잠깐만. 거기 진짜 위험해. 가지 마. 집에서 보지 뭘 거기까지 가? 안 돼.]

도현이 도쿄 TFC 돔을 간다는 소리를 어시스턴트 중 하나에게 듣고 기겁을 한 송선호는 극구 반대했지만 못 가게 하지는 못했다. 그는 차라리 VVIP 박스 티켓을 끊어주려고 했지만 로웰이 거절했다.

도현이야 인생을 화끈하게 살았지만 그러면서도 언제나 자기 자신을 살뜰히 챙기는 사람이었다. 굳이 자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장소로 기어들어가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전에 로웰이 도현의 크루즈쉽 여행에 어울려줬듯 이번엔 로웰에게 어울려주는 것이었다. 로웰은 물건이 잡다하게 쌓여 있는 자신의 방 한구석을 뒤적거리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자. 작가님도 하나 잡아요.”

얼굴을 붉게 칠한 로웰이 도현에게 알루미늄 배트를 건넸다.

“…….”

그녀는 도현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녀는 자신이 훌리건을 일으킬 작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보다 머리 한두 개 정도 높은 위치를 타격하는 시늉을 하며 배트를 휘둘렀다(…).

“걱정도 팔자예요. 우리 작가님 팔자는 그런 팔자가 아닌데? 자, 연습. 연습. 이런 건 일격필살이 중요한 겁니다, 다들.”

그리고 얼떨결에 배트를 휘두르는 연습을 다 같이 하게 되었다. 신재인과 윤지호도 전의를 불태웠다.

“스트레스는! 이럴 때! 날리는 거죠, 선생님?”

“그렇지!”

“도쿄 가는데 우리도 이 정도 준비는 해야 예의죠!”

원래 누군가한테 받은 스트레스는 또 다른 누군가한테 푸는 것이다. 로웰 리를 비롯한 예술가 일동은 암흑의 기운을 흩뿌리며 흐흐흐, 웃었다. 장난이 아니고 진짜 누구 칠 생각인가 보다.

‘생각해보니까 나도 이럴 땐 내가 피해자가 되는 걱정만 했구나.’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현이 말했다.

“이런 것도 좋네요. 누가 시비 걸 일은 없겠다.”

로웰이 그녀를 휙 돌아보았다. 그녀는 검지를 양쪽으로 까딱까딱 흔들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시비는 우리가 먼저 거는 겁니다! 선수필승! 몰라요, 작가님?”

“아.”

“일단 뒤통수부터 갈기고 다구리 치는 거예요.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죠.”

로웰 리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오, 하고 감탄사를 냈다. 역시 선생님은 선생님이다. 언제나 배운다. 몇 개월 동안 무리한 연재 스케쥴로 죽어가던 로웰은 연재 간격이 길어지고 나서도 다소 컨디션이 안 좋았는데 엘 드라카가 시작되니 어디에 이런 활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마네킹이라도 하나 둘까요?”

도현은 한참 배트를 휘두르다가 약간의 부족함을 느끼고 로웰에게 물었다. 로웰이 안경을 번뜩였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연습이 완벽을 만드는 거죠.”

도현이 열의를 보이자 로웰은 기뻐했다. 역시 말이 통한다. 도현은 배트를 휘두르는 연습을 계속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안 오네. 차 막히나?”

“티켓은 한 장 남으니까요.”

저번 메트로서울 오픈에서 결승전까지 올라갔던 신재인은 그때 이후로 얼굴이 아주 좋았다. 운동과 승부는 사람에게 언제나 활력을 준다. 게다가 처음 참여한 대회에서 결승까지 올라갔으니 자기 효능감을 많이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활기찬 얼굴로 말했다.

“그나저나 스톤하츠 씨만큼이나 잘생긴 남자라니. 진짜 깜짝 놀랐어요.”

“맞아요. 잘생겼다, 잘생겼다 말은 많이 들었는데.”

“금발에 초록색 눈이라서 더 화사한 느낌이고.”

역시 능력자…. 둘은 도현을 보며 엄지를 들었다. 도현은 피식 웃었다. 그때 초인종 벨 소리가 울렸다.

“양반은 못 되나 봐요.”

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1층으로 내려갔다. 예전에 그의 생체정보를 지우는 걸 깜빡한 모양인지 그는 여전히 도현의 집 출입이 자유로웠다.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여니 뭔가 잔뜩 들고 있는 그 화사한 남자가 보인다.

“도현아.”

“에반.”

도현은 미소를 지은 얼굴로 그의 허리를 살짝 안으며 뺨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그를 살펴보며 물었다.

“뭐야. 뭘 이렇게 많이 사왔어?”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그대로 1층 거실의 카우치로 자리를 옮겼다. 먹을 걸 발견한 도현은 계단에서 2층을 향해 소리쳤다.

“선생님~ 케이크 드세요~”

그러자 에반이 눈을 좀 크게 떴다가 2층 계단을 보았다. 곧 붉은 옷을 입은 세 명의 사람이 계단을 통해 내려왔다. 예전엔 둘만의 집이었는데 이제는 사는 사람이 많았다. 도현도 붉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에반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엘 드라카 보러 가는 거야?”

“응. 같이 가자.”

그녀가 엘 드라카 같은 것도 본단 말인가. 그녀의 고급스러운 취향은 전부 에반과 함께 만들어온 것이었다. 그녀는 엘 드라카 같은 것을 좋아할 만한 타입이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헤어진 세월이 느껴졌다.

‘변했구나.’

아니, 변한 건 나인가? 그녀는 항상 새로운 것에 흥미를 보였다. 그때 그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아다녔다. 새롭고 좋은 것. 세상을 탐험하는 것은 자신을 탐험하는 것과 같았다. 둘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다녔다. 다이아몬드를 모으고 돈을 펑펑 쓰며 사치향락을 즐기기도 하고 돈을 몽땅 잃고 도박장에서 쫓겨나 본 적도 있었다. 같이 배를 만들고 집을 지었다.

[넌 특별해.]

정말이지…. 그녀는 의도하지 않아도 남자를 잔뜩 홀리는 타입이었다.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았다. 굳이 따지자면 에반도 그런 타입이었다. 도현이 저번에 그가 자신을 닮았다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맞춰서 입어야겠는데?”

에반은 그들이 세트로 입은 붉은색 티셔츠를 보며 자신의 양복 상의를 벗기 시작했다.

“아, 너한테 맞는 사이즈가 없어.”

“가서 사야겠다.”

“굿즈 줄이 무지막지하게 길 텐데요.”

“그래도 다 같이 보려면 맞춰야죠.”

그가 웃으며 말하자 로웰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어쩐지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군요, 블랙 씨!”

“감사합니다.”

비행차를 여러 대 빌려 도쿄돔 앞에서 모이고 보니 30명에 가까운 인원이었다. 그들과 도현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로웰의 엘 드라카 동호회 사람들도 다 같이 갔다. 에반만이 화사하게 청일점이라 인기 만점이었다.

“배우예요? 연예인?”

“아뇨. 작게 회사를 하나 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웃는 얼굴로 여자들의 파상공세같은 질문을 받고 있었다. 지인의 지인이 가장 대하기 힘든 무리가 아닌가. 도현이 못 말린다는 얼굴로 다가와 그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하여튼 너무 예쁜 것도 피곤한 거야.”

그녀는 이스트드래곤의 빨간 DRAGONS 티셔츠를 입고 있는 그의 옷깃을 바로 했다. 그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그는 미묘하게 사람들을 꺼려했다. 그런 느낌이 있었다.

“내 옆에 있어.”

“…….”

도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선글라스를 그의 얼굴에 끼웠다. 에반은 선글라스를 바로잡았다. 도현은 도쿄돔의 지도를 보며 그들의 자리를 확인했고 로웰은 모인 사람들에게 주의 사항과 당부의 말을 전했다.

“이런 건 역시 쪽수입니다.”

다들 손에 알루미늄 배트를 하나씩 들었다. 경험이 몇 번 있는 로웰 쪽 사람들은 미소가 흉흉했다. 어떤 남자도 그들 쪽에 다가오지 못했다. 도현도 배가 아닌 다른 술집이나 클럽에서 놀 때는 인원수를 확 늘려서 놀았다. 안전과 재미를 모두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음? 정말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로웰이 도현의 배를 타고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 것처럼 도현도 미지의 세계에 한 발자국 발을 딛기 시작했다.

“워!!”

다들 도쿄돔 앞에서 기합을 넣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는 경기장 제일 뒷자리. 다른 관객들에게 뒤통수 맞을 걱정은 적으면서 남의 뒤통수는 치기 좋고 경기도 전부 볼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 그곳에 술과 핫도그, 치킨, 피자를 쫙 깔고 먹고 떠들었다. 그들의 앞을 지나가는 남자들은 시비는커녕 전부 땅바닥에 시선을 박고 걸었으며 통로 앞에 앉은 로웰네 동호회 회원은 배트로 지나가는 남자 관람객의 엉덩이만 노려 때리곤 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로웰이 어떤 남자 관객의 엉덩이를 퍽 때렸는데 그가 깜짝 놀라 돌아보는 표정이 너무나 웃겨 다들 낄낄거리며 웃었다. 에반도 웃음이 터져서 웃다가 도현에게 그렇게 말했다. 도현이 똑같이 웃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치? 선생님 진짜 대단하다니까.”

시끄러운 소음 사이로 그녀가 소리쳤다.

“워어~~ 죽여라!! 워어~~ 이스트드래곤!! 워어~~ 이겨라!! 워어~~ 이스트드래곤!!!”

도쿄돔은 관중들이 물결을 이루어 부르는 노래로 가득 차 웅웅거렸다. 도현이 지금까지 보러 간 어떤 경기와도 달랐다. 사람들의 얼굴에 흥분과 광기가 도사렸다. 그들의 눈빛엔 살기가 흘렀다. 이성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내뿜는 체취는 피 냄새를 닮았다. 도현은 살아생전 지금만큼 신체적 위협이 도사리는 공간에 있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손에도 단단한 배트가 들려 있었다. 피부가 따끔따끔했다. 그녀에게도 모두의 야만과 흥분이 옮아오고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워어~~ 죽여라!! 워어~~ 이스트드래곤!! 워어~~ 이겨라!! 워어~~ 이스트드래곤!!!”

술을 몇 잔 걸친 도현도 모두와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불렀다. 간혹 에반과 눈이 마주치며 서로의 당혹스러우면서도 즐거운 감정을 나누었다. 둘 다 이런 것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은 기분이 좋은 일이다.

단정하게 정리된 잔디밭 위에서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관중석 양쪽에는 커다란 전광판이 달려 있었고 간혹 관중석을 포착하곤 했다. 선수들의 머리 위에는 거대한 홀로그램이 떠있었다. 홀로그램은 이스트드래곤의 로고가 뜨고 곧 선수 한 명의 모양으로 변했다. 한쪽 귀에 낀 이어폰에서 설정한 중계팀의 설명이 들렸다.

[센터 포워드 7번 치엔이 루카스!]

[루카스 선수, 네.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듭니다. 음, 이렇게 얼굴을 보니 이스트드래곤 선수들이 확실히 좀더 살벌한 느낌이 나긴 하네요.]

[그렇죠. 루카스 선수도 작년에 두 명의 상대 선수를 죽였으니까요.]

남미계 혈통이 보이는 구릿빛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 나른한 회색 눈동자,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치엔이 루카스는 웨스트이글의 포워드들에 비해 다소 슬림한 느낌이 나는 디펜스였다. 그 덕분에 웨스트이글 포워드보다 훨씬 빠르다.

“루카스! 루카스!!”

사람들은 휘슬을 부르고 북을 쳤다. 홀로그램이 계속 바뀌어 갔다.

[레프트 포워드 9번 카흐 밀란!]

눈을 살짝 가릴 정도로 긴 앞머리를 가진 카흐 밀란이 짧게 카메라를 바라보고 시선을 돌렸다. 그는 정석적인 포워드로 덩치가 컸다. 그는 카메라 워킹에 신경 쓰지 않고 몸을 풀었다.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 13번 신태호!]

홀로그램이 신태호의 모습으로 바뀌자 관중들이 고막이 터질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도현도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며 웃었다. 나중에 목이 쓰릴 것 같은데도 소리를 지르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에반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가 왜 그런 눈으로 보는지 알 수 있었다. 군중 심리, 몰개성화, 혼돈, 모두 도현이 지양하는 점이었다. 다른 곳에 있었으면 아마 도현은 몹시 불쾌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곁에 로웰이 있었다. 모두가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괜찮았다. 즐거웠다. 에반에게도 소리를 지르라고 종용하니 그도 크게 소리를 질렀다. 재미있었다.

중계진이 다음 선수를 소개했다.

[네, 그리고 1번, 오펜스 다니엘 스톤하츠가 있습니다.]

“와아아아아!!!”

다니엘 스톤하츠의 이름을 연호하며 도쿄돔이 들썩거렸다. 도현은 순간 함성을 멈추고 홀로그램을 바라보았다. 카메라를 잠깐 바라본 그의 보랏빛 눈동자와 도현의 눈이 마주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다니엘.’

그와는 볼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적어졌다. 같은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작년의 그는 미르와는 달리 시간을 잔뜩 내서 그녀와 데이트를 하러 서울로 오고는 했다. 현재 그는 몸이 백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바쁜 남자였다. 베이징, 도쿄, 메트로서울을 오가며 시즌과 학업을 전부 소화하고 있었다. 그래도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잠깐 시간이 날 때는 꼭 도현과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그는 이제 도현을 통해서 자신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온전히 도현만을 보고 있었다. 사랑을 말하는 목소리에 힘이 생겼다. 죽은 생선처럼 빛이 없던 그의 눈동자에는 지성의 빛이 돌아왔고 자기 확신과 자신감으로 다시 걷기 시작한 그는 정말 멋있었다. 정말 비싼 다이아몬드는 질리지도 않는다. 그는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그가 가진 가치로 빛났다.

‘그리고 내 거란 말이지.’

도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도쿄돔의 흥분 때문일까. 도현은 그의 무뚝뚝한 얼굴이 쾌락에 헐떡이는 모습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

보통 엘 드라카가 시작되면 대부분의 선수들이 흥분과 기대로 생기(?)가 돌지만 반대로 죽을상이 되는 소년이 딱 하나 있었으니, 바로 올해 18살이 된 신태호다.

“또 토할 거 같냐?”

“막 메슥거려?”

치엔이 루카스와 같이 센터 포워드인 제시 팔마와 레프트 포워드인 카흐 밀란이 그의 어깨에 턱턱 팔을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무게였다. 둘은 신태호의 룸메이트였다. 쥐콩만 한 신태호는 올해 겨우 3cm가 자라 170cm를 겨우 넘었다. 신태호는 마음을 다잡았다.

“감독님이 평가전 하듯이 마음 편하게 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그는 안색은 썩 안 좋았지만 씩씩하게 답했다. 이번 퍼스트 포틴에 이스트드래곤의 주전이 전부 출전하는 것은 순전히 신태호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실전에서 필요 이상으로 긴장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살인율이 급격하게 높아지는 것이었다. 이스트드래곤의 입장에서야 그가 폭주하면 승리는 떼놓은 당상이니 크게 거리낄 게 없었지만 선수 본인이 경기 앞뒤로 구역질을 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하니 문제였다. 좋은 선수는 멘탈 관리도 제법 해줘야 하는 법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아직 어린데다가 많이 순진한 편이라 여자들의 가슴에 묻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도 몰랐고 약도 하지 않았다. 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감독의 배려가 이번 첫 출전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어쨌든 작년보다는 얼굴이 괜찮았다.

“그래, 사이공 뭐시기니 난 듣도 보도 못했다.”

“그래, 설렁설렁해. 너 있는 데까지 걔들이 갈 수나 있겠냐. 다 이 형들이 막아주지~”

“아, 잠깐만…. 아, 형…! 무거워! 악!”

그대로 제시와 카흐가 그에게 매달렸다. 그러자 잔디밭으로 나가기 전에 잠깐 긴장감을 풀고 있던 다른 선수들이 그걸 발견하고 그에게 전부 매달렸다. 작은 신태호의 위로 덩치 큰 남자들이 겹겹이 올라탔다. 한 명당 100kg은 족히 넘는다.

“오올, 우리 꼬맹이~”

강력한 소드마스터는 근거리에서 바주카포로 맞춰도 티끌 하나 안 다친다. 신태호야 사상 최강의 소드마스터로 꼽히는 소년이었으니 열댓 명 올라타도 용케 균형을 잡고 버텼다.

“악! 무거워! 내려와!”

하여튼 다들 신태호를 괴롭히는 게 낙이다. 그들은 신태호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리며 긴장을 풀어주었다. 머리가 까치집이 된 신태호는 머리를 손으로 막 누르며 형들에게 화를 내고 있다가 벤치에 앉아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하고 멈췄다.

사실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 것은 신태호가 아니라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아니, 좋은 것인가? 그는 이전과 다르게 이번 훈련 기간 동안 슬럼프가 꽤 있었다. 요즘은 그때처럼 안 좋아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평소 같아 보이진 않았다. 뭔가, 들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기분 나빠.”

치엔이 루카스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다니엘을 보며 그렇게 툭 말했다.

이스트드래곤은 이번 엘 드라카를 위해 5개월이 넘게 합숙 훈련을 했다. 최강의 클럽이 챔피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더더욱 뼈를 깎는 노력을 한 것이다. 실제로 지금 이스트드래곤의 전력을 이길 수 있는 클럽은 아무도 없다고까지 말하는 전문가도 있을 지경이었다.

“그러게. 쟤는 저러니까 더 무섭다.”

제시 팔마가 신태호의 어깨에 자신의 무거운 팔을 얹고 무게를 실었다.

“음….”

애매하게 반응한 이는 카흐 밀란이다. 그들은 멀찍이서 다니엘 스톤하츠를 보고 있었다.

“원래 마도사랑 소드마스터가 서로 상성이 안 좋은 건 맞지만, 그래도 그렇잖아, 궁금하잖아? 진짜 얼마나 강한지? 우리가 같은 클럽이라서 서로 붙을 일은 없지만.”

카흐가 말했다. 제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사실 다른 마도사 놈들은 다 잡아 봤잖아? 카알도 뒤치기해서 한 번 기절시켰고 아서는 병원 보냈지.”

“생각해보면 그 새끼들은 참 착해. 복수도 안 하고. 그래도 좀 배운 놈들이라 그런가.”

“야, 장난에 욱하면 그게 뭔 재미냐.”

“아, 다이키는 복수했지. 우리 다 공중부양 마법 걸려서 쪽도 못 쓰고.”

“인간 핀볼이 됐었지. 킥킥.”

그들이 추억이 되새기며 그렇게 키득거렸다.

약한 놈들은 괴롭혀 봤자 재미도 없다. 원래 강한 남자를 보면 시비를 걸어보고 싶은 게 강한 남자의 본능 아니겠는가. 자웅을 겨루어 보고 싶다. 누가 더 강한지 알아보고 싶다. 그들이 신태호에게 주야장천 장난을 치는 것도 다 그런 무의식적인 치기 어림의 일환이었다. 이스트드래곤에는 세계 최강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도 부족함이 없을 남자들이 득실거렸고 그들은 원래 웨스트이글보다 더 치열하게 서열 경쟁을 하곤 했었다. 치엔이 루카스도 어느새 다가와 신태호의 정수리에 턱을 올렸다.

“저 새끼는 건드리면 죽어.”

“응? 건드려 봤냐?”

“저 새끼는 장난치려고 하면 바로 귀신같이 쉴드 치던데.”

다니엘 스톤하츠가 이스트드래곤에 입단한 지 4년, 당연히 그에게도 그들 식으로 장난을 쳐보려는 시도는 많이 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를 강자로 인정하고 있던 선수들이었다. 분야가 다르니 마도사들은 언제나 장외로 치기는 했지만.

“몰라. 전에 셀레나한테 인사했다고 무슨 이상한 마법 먹이더라고. 꼼짝도 못하겠더라.”

“엥? 왜? 인사도 못해? 셀레나 짱 예쁜데? 치사하게.”

제시가 그 부분에서 발끈했다.

“그러니까. 같은 식구끼리 인사 좀 하고 살 수도 있지.”

루카스도 투덜거렸다. 신태호는 인상을 약간 쓰더니 대꾸했다.

“또 형이 이상한 짓 했겠지.”

“아니거든?? 넌 내 편이냐, 스톤하츠 편이냐?”

“나? 스톤하츠 씨….”

“와! 배신감! 야! 우리가 너 이렇게 귀여워 해주는데!”

“악! 잠깐만…!!”

그들이 그러고 있거나 말거나 다니엘은 잠시 소란을 뒤로하고 눈을 감은 채 깊게 호흡했다. 요즘은 컨디션이 날아갈 듯이 좋다.

‘도현 씨….’

그녀가 보러와 준다고 했다. 도쿄까지, 자신을 보러. 기뻤다. 관중이 너무 많아서 여기서는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녀를 믿었다. 그녀는 여기에 있었다.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번 시즌도 이기겠습니다. 도현 씨의 복수를 해드리겠습니다. 도현 씨가 더욱 자랑할 만한 남자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

“빨리 왔네.”

누군가 도현의 허리를 손으로 잡았다. 어떤 겁도 없는 놈이… 라고 생각하며 돌아보니 송선호였다.

“응? 송선호? 왜 왔어?”

“내가 여길 너 혼자 어떻게 오게 해.”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변을 보았다. 송선호도 따라서 주변을 보았다. 다들 송선호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는 잠깐 당황했다.

“안녕.”

“…….”

거기에 에반 블랙이 웃는 얼굴로 그에게 인사했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도현이 키득키득 웃었다.

“또 그런다.”

송선호는 다소 기분이 상한 얼굴로 도현의 옆에 앉으니 그녀가 미소를 띤 얼굴로 송선호를 훑어보았다. 그도 이런 곳엔 한 번도 안 와본 것이 분명했다. 이런 야만적인 장소에 있기엔 너무 단정한 모습이다. 짙은 청색의 카라 티에 세로로 된 줄무늬가 잘게 들어간 하얀 바지를 입었다. 항상 TPO에 딱 맞게 옷을 입는 그였지만 그가 입는 스포츠웨어는 거의 골프웨어 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선생님, 남는 유니폼 없나요?”

“아, 싫어. 안 입어.”

송선호는 그녀가 뭘 하려는지 알고 먼저 거절했다. 도현이 마땅치 않은 얼굴을 하고 그를 앞뒤로 살폈다. 로웰이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그냥 벗겨요. 남자는 벗어야지.”

“아.”

“안 돼. 싫어!”

송선호는 단호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지만 이미 술이 한 잔 된 도현은 그의 티셔츠 안에 손을 은근히 넣으며 그의 허리를 만졌다.

“니가 안 돼요~ 싫어요~ 하면 내가 안 할 거 같아?”

“아, 싫다니까. 윽. 야! 아니, 자, 잠깐만…!”

벗겼다. 단정하던 남자가 티셔츠 하나 벗겼다고 바로 야성미가 난다. 몸이 굉장히 좋아서 벗겨 놓으니 보기는 참 좋다. 송선호는 조신하게 잠시 두 팔로 몸을 가리며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서.”

“왜? 내 앞에서 옷 벗는 거 좋아하면서.”

“…옷 줘.”

“에이. 저기 봐. 남자들은 다 벗었잖아.”

도현은 그의 상의를 본인의 등에 걸쳐 놓았다. 술에 취한 로웰 동호회 회원 하나가 벌건 얼굴로 그녀는 도현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와아~ 또 미남이다~ 가슴 쩌네요. 한 번 만져봐도 돼요?”

그녀의 물음에 도현은 웃었고 송선호는 질색한 얼굴을 했다. 도현이 말했다.

“안 돼요. 제 거예요.”

“에이, 아쉽다.”

“…….”

예전 도현은 송선호를 이런 들개 같은 여자들 사이에 방치, 아니, 먹이감으로 던져주곤 했었다. 지금 그런 걸 느꼈다고 한다면 굉장히 웃기겠지만… 송선호는 그녀와 자신의 사이가 전과는 많이 달라진 걸 느꼈다.

‘이제 자기 남자라고 생각하긴 하는구나….’

송선호는 경기장에 시선을 고정한 그녀의 단정한 이마를 잠깐 내려다보았다. 오늘도 또 엄청 예쁘다. 에반을 의식하자 역시나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그녀를 향한 애정을 다시금 확인하며 그녀의 광대에 입술을 댔다.

“그래도 옷은 좀….”

큰 소리를 낼 기분은 안 들었다. 얌전히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속삭였다. 도현이 웃는 얼굴로 그를 계속 희롱했다.

“왜 그래? 보기 좋은데? 그렇게 자신 없어?”

“내가 자신이 없기는 뭐가. 그런 게 아니라, 그래도, 너만 보는 게 좋잖아.”

송선호는 살짝 발끈하면서 말했다. 도현이 씨익 웃으면서 옆에 앉은 에반에게 물었다.

“어때? 같은 남자가 봤을 땐?”

그러자 송선호가 눈을 크게 뜨고 에반을 쳐다보며 약간 긴장했다. 그는 하~나도 거리낄 것 없는 얼굴로 송선호를 스윽 보더니 도현과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칭찬했다.

“보기 좋은데? 운동 열심히 했네.”

“송선호가 은근히 노력파라니까. 뭐든 다 열심이야.”

“그래? 대단하다.”

저 양아치 같은 게 또 무슨 꿍꿍이인가. 송선호는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칭찬하는 것이 더 배알 꼴렸다. 그는 도현의 허리를 한 팔로 단단히 안았다.

“시작한다.”

“어, 진짜.”

도현도 송선호를 놀리는 걸 멈추고 경기장을 보았다. 경기장에서 대포 쏘는 소리가 났다. 쾅!! 오늘 이스트드래곤과 사이공FC의 엘 드라카 첫 경기가 시작된 것이다.

[크러쉬!!! 아, 루카스! 상대편 센터 포워드와의 크러쉬를 피하고 뒤에서 양 겨드랑이를 잡고… 아! 17번 제시 팔마! 그대로 어퍼컷! 헤드기어가 날아갑니다!]

중계진의 목소리가 관중에게 전달되었다. 제시 팔마는 약속한 대로 상대편 헬멧을 벗기고 그대로 앞으로 달려갔다. 치엔이 루카스는 카메라를 보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그대로 무방비 상태의 상대편 센터 포워드의 목을 오라의 검으로 그었다. 높은 심박 수와 혈압으로 피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이런 말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카메라에 잡힌 그 모습은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치엔이 루카스의 탄력 있는 구릿빛 피부와 나른한 회색 눈동자, 그리고 그의 예쁜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적의 낭자한 핏물 뒤로 사라졌다. 이 살육제는 비정하고 잔혹할수록, 참여하는 남자들이 강하고 아름다울수록 사람의 본능적인 욕망을 이끌어냈다.

이 거대한 콜로세움의 가운데,

저 젊음과 아름다움이 단 한 순간에 끝을 고한다.

바로 ‘우리’의 함성(욕망)에 의해.

사이공FC의 센터 포워드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바닥을 짚었다. 한 손으로 목을 감싸며 피를 토했다. 도쿄돔에는 우레와 같은 함성이 가득 찼다.

[비기닝 포틴 퍼스트 먼데이! 개막전!! 이스트드래곤 7번!!! 7번 치엔이 루카스!!!! 크러쉬에서 사이공FC 3번 로날드 휴의 목을 오라의 검으로 베었습니다!!! 피 한 방울 맞지 않고 다시 달려갑니다!!!]

[이건…!! 정말 역사에 남을 크러쉬입니다!!!! 치엔이 루카스!!!! 우리 웨스트이글도 이건 배워야 합니다!! 저 깔끔함 좀 보십시오!!!]

[2128년 엘 드라카!!! 바로 이렇게 시작합니다!!!]

중계진도 관중도 모두 일어나서 광기 서린 고함을 질렀다. 오펜스의 마법 및 마력 제한과 선수 살해를 자제하는 분위기 속에서 팬들이 욕구불만을 토로할 때 바로 엘 드라카 역사상 첫 2연패에 빛나는 챔피언은 올해 첫 경기의 제물로 기꺼이 적의 목을 베었다.

*

도현은 왜 사람들이 엘 드라카를 보러 오는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위험하고 잔인한데도. 게다가 경기만 위험한 것도 아니었다. 광기에 휩싸인 대중만큼 무서운 것도 없었는데도. 세상에 죽음만큼 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이 따로 없는 것인가.

치엔이 루카스가 격발시킨 경기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타격 포인트 하나 뜨지 않은 센터 포워드를 그대로, 그것도 무참하게 잃은 사이공FC 선수들의 눈에 불이 붙었다. 선수의 목소리는 마이크로 잡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입 모양만 보일 뿐이었지만 그들이 얼마나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내뱉고 있을지 유추하는 것은 그리 큰 상상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대로 눈이 돈 사이공FC의 미드필드 진이 개떼 같이 몰려와 치엔이 루카스를 덮쳤다. 쾅!!! 그대로 궤적이 휘며 루카스와 사이공FC의 미드필더 3명은 북쪽 관중석 벽에 처박혔다. 끼이이잉, 하고 오라가 부딪치는 불길한 소리가 퍼져 나갔다. 북쪽 관중석에 앉은 사람들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이 크게 뜨고 앞으로 우르르 몰려나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입 모양을 봐선 ‘죽여!’ 아니면 ‘안 돼!’ 둘 중 하나였다.

치엔이 루카스는 그 와중에도 웃고 있었다. 아드레날린이 너무 돌아서 그런지, 약을 이미 빨고 온 건지, 이상 성벽을 가진 남자라서 그런지, 그는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누누이 말하지만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삐이익! 휘슬이 울렸다. 치엔이 루카스 아웃이었다. 흥분한 사이공FC 미드필더들은 전혀 멈추지 않았다. 당장 그의 내장이라도 꺼낼 기세였다.

“으아…!! 이스트드래곤 미쳤나!!! 루카스를 벌써 이렇게 써먹고 끝낸다고?!”

로웰의 목소리가 함성 속에서 겨우 들렸다. 그리고 중계진의 설명도 잇달았다.

[스즈키 감독이 미쳤나 봅니다!! 치엔이 루카스…! 저 정도면 최소 3급 부상은…!! 아… 스즈키 감독 표정 보십시오. 이스트드래곤 7번 치엔이 루카스 선수의 독단 선공!! 사이공FC 3명의 미드필더가 치엔이 루카스 선수에게 잡힌 사이 이스트드래곤의 좌우중앙 공격형 미드필더가 사이공FC의 마지막 남은 수비형 미드필더에게 돌진합니다!]

중계 방송이 들릴 리도 없는데 그 순간 루카스를 족치고 있던 사이공FC 세 명의 미드필더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한 명은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입 주변이 피투성이였다. 그들의 눈에는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야만이 가득, 아니, 바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야만이 돌고 있었다. 대낮인데도 잠깐 그들의 눈동자 가운데 안광이 번뜩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막아야 할 이스트드래곤의 미드필드를 잡기 위해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이스트드래곤의 오펜스 쪽으로 달렸다. 그들이 루카스에게서 떨어지자 겨우 대미사일 보호 쉴드로 감싸인 의료진과 공중부양 들것이 들어갔다. 그들은 걸레짝이 된 치엔이 루카스를 데리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뭐, 원래도 걸레같은 남자이니. 이스트드래곤의 코치진이 우르르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가 얼마짜리 선수던가. 비기닝 포틴부터 재기불능이 되면 곤란했다.

세계에는 몇몇의 전투민족이 존재하고 있었다. 제국의 무덤이라 불리는 것은 아프가니스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베트남 또한 세계열강을 전부 물리친 전투민족으로서의 파이팅과 근성은 유명했다. 이스트드래곤의 오펜스가 그들을 향해 펀칭 마법을 대거 쏘기 시작했다. 마법이 빗나가 바닥을 치면서 잔디밭이 중기관총 세례라도 받은 듯 구멍이 숭숭 났다.

[사이공FC의 중앙 미드필더 11번 트란 누 즁 선수! 그대로 점프!! 북쪽 관중석 쉴드를 박차고 그대로…!!]

[우오!! 빠릅니다! 엄청 빠릅니다!! 사이공FC의 수비형 미드필더 18번 응웬 선수가 이스트드래곤의 미드필드진을 오래 버텨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겠죠?]

[저건 본능입니다. 소드마스터가 이성을 잃으면 그 순간에는 짐승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스트드래곤 오펜스의 마법이 하나도 맞지 않습니다. 귀신같이 피합니다!]

[이러면 이스트드래곤에게 남은 것은 신태호뿐…!! 누가 먼저 상대의 오펜스에게 닿느냐!]

[유례없는 속도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도쿄 TFC돔, 거대한 콜로세움은 순간 최고속도가 치타의 최고속도도 뛰어넘는 소드마스터 때문이라도 엄청나게 컸다. 모두가 경기 전체를 관람할 수 있도록 관중석의 기울기가 아주 가팔랐다. 관중이 모두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경기가 시작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소리를 지르는 관중들의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두 팀 다 서로의 가장 강한 방패를 제거했다. 이스트드래곤은 원래도 공격력이 강한 팀이고 이제 보니 사이공FC도 마찬가지였다.

[사이공FC가 더 빠릅니다!!]

신태호의 당황한 표정이 그대로 카메라에 잡혔다. 두 명은 그대로 신태호를 덮치고 굴렀다.

[나머지 한 명은 이스트드래곤의 영원한 1번!! 다니엘 스톤하츠를 노립니다!!!]

[이스트드래곤!!! 사상 최초 엘 드라카가 2승!! 2연패에 빛나는 이스트드래곤!!! 비기닝 포틴!! 퍼스트 먼데이!!! 설마 바로 여기서 격침입니까?!!! 사이공FC는 올해 첫 출전인 신생 팀!!! 2연패에 빛나는 이스트드래곤! 챔피언을 잡는 겁니까?!!]

중계위원도 이미 목이 다 쉬었다. 이스트드래곤을 상대하던 팀이 이렇게 빠르게 다니엘 스톤하츠에게 쇄도했던 적이 있었던가? 참고로 2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이스트드래곤의 2연패가 가능했던 것이다.

[와, 이러면 안…! 이스트드래곤 미드필더 한 명은 돌아와야 할 것 같은데요? 아니면 디펜스라도…!]

[사이공FC는 마치 이럴 걸 대비라도 한 것 같습니다!]

[아니, 루카스 선수 독단 선공으로 당황한 건 지금 이스트드래곤입니다. 이스트드래곤 미드필더 두 명은 펀칭 마법에 맞아 중앙으로 밀려납니다. 제시 팔마 선수는 응웬 선수가 맡습니다.]

[신태호는…!! 아, 주짓수인가요, 저거? 관절을 꺾어 바닥에 눌러버렸습니다!!]

[아!! 여기서 체격 차가…! 신태호! 빠져나오지를 못합니다!!]

[사이공FC가 공부를 많이 했네요! 솔직히 우리는 이스트드래곤에서 이번에 신태호를 내보낼 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데!!]

[아, 신태호는 위기에서 언제나 힘을 발휘하는 선수입니다만 지금은….]

[아…! 이스트드래곤의 오펜스는 공격을 멈추고 지금 쉴드를 칩니다. 저거 뚫는데…!]

[30초에서 최대 1분!]

다니엘 스톤하츠를 잡기 위해 그가 친 쉴드를 주먹으로 쾅쾅 치며 트란 선수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병에 든 먹이를 꺼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맹수 같아 보였다. 마력 리미트는 고작 5만. 벌써 쉴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도 무뚝뚝하게 서 있는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저러면 이스트드래곤의 오펜스진이 정말 위험하겠는데요…. 루카스 선수나 판 선수야 소드마스터니까 지금 목숨 붙이고 있는 거지 마도사나 일반인은 저런 주먹에 한 방 맞으면 그냥 죽습니다.]

[그러면 차라리 이스트드래곤은 올해 엘 드라카를 포기하고 스톤하츠 선수를 보호하는 게 맞습니다. 감독 쪽에서 마력 리미트를 해제해도 된다고 지시를 내리는 게 맞을 것 같은데요. 아직 사이공FC는 안 뚫렸습니까?]

[팔마 선수! 잡혔습니다!! 아웃!! 저러면 사이공FC의 오펜스와 미드필더 한 명만으로도 나머지 두 명의 선수를 상대할 만해집니다…!!]

경기 시작 12분, 벌써 중계진은 이스트드래곤의 패배를 점치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신태호를 비추고 있던 카메라의 영상이 홀로그램에 잡히며 그를 억누르고 있던 두 명의 미드필더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들을 떨쳐낸 신태호는 한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자세를 바짝 낮췄다가 튕겨나듯 앞으로 달렸다. 그가 순간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신태호는 순식간에 다니엘 스톤하츠를 노리고 있던 트란에게 돌격했다. 쿠우웅!!! 동쪽 관중석 쉴드에 부딪치며 경기장을 감싸고 있던 쉴드 전체가 흔들렸다.

[아…!!! 한방에!!]

[트란 아웃!! 아웃입니다!!! 역시 신태호!!! 이스트드래곤을 위기에서 구해냅니다!!]

[신태호!! 엄청난 괴력!!!]

도쿄돔이 들썩거렸다. 작년 이스트드래곤의 엘 드라카는 피날레 빼고는 그다지 볼 게 없었다는 게 사람들의 평이었다. 그 외엔 샌프란시스코 레드불과의 경기 정도일까. 이스트드래곤을 상대할 만한 강팀이 그들의 앞을 막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폭발하듯 퍼진 콘크리트와 흙먼지의 사이로 신태호가 걸어 나왔다. 관중들은 울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웃고 있었다. 그들은 들고 있는 것으로 쉴드나 통로의 난간을 부서져라 두드렸다.

[와, 정말 신태호는…!! 세상에 어떤 남자가 있어!! 신태호를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저기 서있는 저 소년은 가히!!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라고 칭해야 할 남자입니다!!!]

한 중계위원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관절기를 도대체 어떻게 푼 거란 말입니까? 오라를 쓴 걸까요?]

[영상을 돌려봐야 알 것 같습니다…. 와…. 역시 신태호가 활약하면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냥 넋을 빼놓고 보고 있게 됩니다.]

[어어? 루카스 선수 괜찮은 모양입니다. 응급처치를 받고 경기를 보고 있는 치엔이 루카스.]

[주전 센터 포워드가 관람객 포스네요.]

[아, 트란 선수! 2급 부상입니다. 갈비뼈가 다 으스러졌습니다. 빨리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겠군요.]

[치엔이 루카스! 신태호를 향해 손을 흔듭니다.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요?]

코치진을 잡고 있던 카메라가 치엔이 루카스의 엉망이 된 얼굴을 잡았다. 신태호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신태호에게 묻고 있었다. 기분 좋지? 일그러진 그의 얼굴 중에서 그 입 모양만이 선명하게 영상에 잡혔다.

죽음이 거세된 세계는 정화가 거세된 세계나 다름이 없었다. 힘을 가진 자는 응당 그 힘을 누리고자 하는 본능이 있었다. 힘은 어떤 보석보다도, 어떤 마약보다도 기분이 좋은 것이다. 신태호가 그 힘을 가졌다면 응당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신태호는 전에 보지 못한 표정으로 치엔이 루카스를 한 번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자신에게 덤벼오는 두 명의 상대편 미드필더를 보았다. 그대로 신태호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그 두 선수를 상대해야 했다.

양팀 다 오펜스진의 코앞까지 닥친 상대편의 미드필더들 때문에 다른 선수들을 지원해줄 수가 없었다. 각자가 개인 역량으로 앞에 있는 상대 선수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양팀의 센터 포워드 아웃, 중앙 미드필더 아웃, 머릿수도 똑같았다. 각개전이 전 경기장에 걸쳐 펼쳐졌다. 양팀 감독들이 생각한 전술이나 전략은 하나도 소용이 없는 난전이었다. 관중들은 바로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각개전에 정신이 팔려 소리를 질렀다.

그대로 200초, 가장 먼저 상황을 바꾼 것은 카흐 밀란이었다. 그가 사이공FC의 라이트 포워드를 먼저 잡은 것이다. 그는 곧바로 달려가 상대편 오펜스의 마법을 몸빵으로 맞고 나머지 두 미드필더가 응웬을 잡았다. 신태호는 그 와중에 홀로 무쌍을 찍었다. 이스트드래곤의 오펜스가 돌아왔다. 그러니 자연히 사이공FC의 디펜스가 먼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스트드래곤의 승리였다.

[오늘의 경기는 마치 양 팀이 서로에게 칼을 깊숙이 꽂고 시작하는 모양새였습니다.]

[2연패에 빛나는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클럽 이스트드래곤, 그리고 올해 첫 출전인 사이공FC. 이스트드래곤이 승리했습니다만 둘 다 출혈이 심각합니다.]

[오늘 이스트드래곤과 사이공FC, 사이공FC와 이스트드래곤의 매치. 판 선수와 트란 선수의 2급 부상, 루카스 선수의 3급 부상, 응웬 선수의 3급 부상, 팔마 선수의 4급 부상, 밀란 선수, 르 선수, 하 선수의 5급 부상 등 부상자가 대거 속출했습니다만 다행히 죽은 선수는 없었습니다.]

[전 판 선수가 죽는 줄 알았습니다.]

[오라가 조금만 약했으면 죽었겠죠. 루카스 선수가 어디 그런 거 봐주는 남자입니까?]

[사이공FC…. 신생 클럽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의 임기응변, 파워, 순발력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까지 덤벼드는 집념이…. 무섭습니다. 세상에 매년 이렇게 눈부시게 발전해 나가는 스포츠가 어디 있습니까? 엘 드라카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캐스터는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이민아 해설위원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 눈에 띄는 선수는 단연 신태호를 상대했던 두 미드필더였습니다. 등번호 15번 르 퀑 둥 선수, 13번 하 옌 안 선수. 세상에. 작년 피날레에서 신태호 선수를 웨스트이글 미드필더 셋, 그 중 하나는 아웃, 주력 오펜스 선수인 소강재의 마력리미트 아웃, 그리고 포워드인 미르 킹쉴드까지 가세하여 겨우 아웃시킨 신태호를 끝까지 아웃되지 않고 상대한 두 선수, 올해는 운이 안 좋아 이스트드래곤부터 상대했지만 벌써부터 내년이 기대됩니다.]

[트란 선수는 어떻습니까. 다니엘 스톤하츠의 아이스 애로우를 전부 피하는 엄청난 순발력! 영 점 몇 초를 간격으로 사방으로 난사하는 걸 도대체 어떻게 한 방도 안 맞고 피하는 겁니까.]

[앞으로 베트남 선수들 불티나게 팔리겠는데요?]

비기닝 포틴부터 엄청난 경기가 나왔다. 다들 흥분 상태가 잦아 들며 경기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나저나 엘 드라카 공식 보호장비인 헤드기어, 작년부터 말이 많았습니다만 올해도 말이 나오겠습니다. 이전 헬멧은 그래도 벗겨지는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건 마음만 먹고 노리면 바로 벗겨지니. 작년 이스트드래곤 신태호도 거기에 당했죠?]

[그렇습니다. 원활한 경기를 위해서라도 보호장비는 아주 중요한데요.]

[그나저나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상대편 선수의 목을 긋는 건 몇십 년 전 엘 드라카 초기 시절이나 유행했던 건데 요즘 같은 영상 화질로 보니 정말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했습니다.]

[치엔이 루카스…. 그의 기행은 유명했습니다만 경기 초반부터 이렇게 크게 한 건 치는 건 처음 보네요. 2128년 이스트드래곤의 3연패가 과연 가능할지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가운데 이스트드래곤이 이 흥행도 계속 가져갈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도쿄돔은 이스트드래곤의 응원가로 가득 차있었다. 붉은 물결, 거대한 깃발이 혈전 끝의 승리를 축하하며 휘날렸다. 중계진이 관중석 영상을 보았다.

[들리십니까, 여러분? 올해의 축제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저기 보십시오! 이스트드래곤의 응원복을 입은 팬 하나가 돈을 뿌렸습니다!]

금발에 삐삐 머리를 한 사람이 난간 위로 기어 올라가 신태호의 이름을 목청 터져라 부르며 1만 엔짜리 지폐 100장을 아래로 확 뿌렸다. 승리에 취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던 그 아래 관중석에 혼란이 가중되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그 모습이 거대한 전광판과 홀로그램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곧바로 뒤에 있는 남색 머리카락을 한 여자에게 폴짝 안겨서 마구 팔을 흔들었다. 둘은 전광판에 자신들이 나오는 걸 보며 손을 마구 흔들었다.

로웰과 도현은 한창 손을 흔들다가 화면이 바뀌자 하하 웃으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진짜 재밌네요, 이거!”

“그렇죠?!”

둘은 양손으로 하이파이브 했다. 양 클럽의 감독이 서로 인사를 하고 경기 결과가 뜨고 선수들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도쿄돔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술이 없어도 취하는 기분이었다. 소리를 너무 많이 질러 목이 아픈데도 즐겁다. 모든 것이 끝나고 물결에 휩쓸리듯 다 같이 경기장 밖으로 나갔다. 경기장 밖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고 도현과 로웰처럼 야구 배트를 든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보여 야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배가 고팠다. 다 같이 뒤풀이를 하러 가게 하나를 빌리고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 치웠다. 미식을 즐기는 도현은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휩쓸려 웃으며 먹고 마시니 싸구려 음식에 싸구려 술이라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맛있었다. 에반마저도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지금까지 이름 한 번 들어보지 못한 맥주 상표를 보면서 말했다.

“나 앞으로 맥주는 이것만 마실 것 같아.”

“하하하.”

도현이 웃었다. 겉으로 보기엔 일견 가벼워 보이는 면도 있지만 그는 은근히 일편단심파다. 그러자 그도 웃으며 말했다.

“나 엘 드라카는 잘 모르거든. 그래도 재밌었어. 잔인하다는 말은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잔인할 줄은 몰랐네.”

“나도 작년에 처음 보기 시작했을 땐 엄청 놀랐다니까. 근데 이렇게 와서 보니까 진짜 재밌어.”

“얼굴 빨개졌어.”

에반은 흥분으로 붉어진 도현의 뺨을 손등으로 살짝 만지며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양손으로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뻐.”

“다니엘 스톤하츠가 예뻐, 내가 예뻐?”

에반이 농담을 던졌다. 도현은 씨익 웃으면서 대꾸했다.

“둘 다 예뻐.”

둘은 연인인 듯 친구인 듯 애매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옆에서 같이 식사를 하고 있던 송선호가 식기 소리를 좀 크게 냈다. 심기가 불편한 걸 숨기지 못하는 그다. 그걸 본 도현이 소리를 내서 웃더니 그의 팔짱을 꼈다.

“왜? 농담도 못해?”

“…….”

“어? 진짜 화났네?”

“…아니야.”

그렇게 심통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도현은 절찬리에 더 놀렸다. 집에 돌아갔을 때쯤엔 그가 완전 삐친 얼굴로 먼저 집에 쏙 들어가버렸다. 도현은 그런 그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아, 진짜!”

“왜. 오늘 수고했다고.”

그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노려보며 뭐라고 하려다가 씩씩거리며 부엌으로 가버렸다. 그 모습을 본 도현은 키득키득 웃었고 에반은 송선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도 좀 바뀐 것 같다. 예전 같으면 자존심이 상해서 아까 전에 박차고 나갔을 텐데.

“대단한데.”

“응? 뭐가?”

도현이 현관 앞에 서 있는 에반을 돌아보았다. 그가 말했다.

“쟤는 절대 안 바뀔 줄 알았어.”

“하하. 좀 바뀌었지? 귀엽다니까.”

에반은 속눈썹을 내려뜨려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기분이 이상해. 예전에 여기 서 있는 건 쟤였는데.”

그렇게 말하자 도현이 눈을 크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잠깐, 묘한 침묵이 흘렀다.

이 집은 도현 킬스버그와 에반 블랙이 함께 지은 집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의 땅을 샀다. 함께 건축과 인테리어를 공부하고 막연히 생각했던 이상적인 집에 대해서 연구했다. 덜컥 땅부터 사서 아무것도 없는 땅에 매트리스를 깔고 누워 건축 잡지를 잔뜩 쌓고 읽었다. 어떤 집을 지을지 구상도 안 잡힌 상태에서 가구나 미술품부터 잔뜩 사기도 했다.

[이거 어울리지 않을까?]

[아, 정말. 별 같아. 이건 어때? 네 눈동자 색이랑 똑같아.]

[예뻐.]

건축업자, 인테리어 디자이너, 가구 전문가를 고용하고 자르기도 하며 직접 조명을 달고 벽지를 바르고 페인트칠을 했다. 유명한 가구 브랜드를 전부 외울 정도로 가구를 보러 다니고 인테리어 트랜드에 대해 빠삭해졌다. 막 공사가 시작한 공사장 옆에 값비싼 가구와 인테리어 제품을 보관하기 위해 컨테이너를 따로 구비해 놓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짓는다는 건, 그리고 그것을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건,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다시 하기 힘든 경험이었다. 그때는 하루하루가 즐거웠지. 얼굴에 페인트를 묻히고 눈만 마주쳐도 웃었다. 많은 걸 찾아 많은 걸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도 가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이렇게 눈만 마주쳐도 마음이 충족되던 시간들. 무엇을 했을 때도 느끼지 못하는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어쩌면 자신은 그때, 이 집을 지을 때, 도현과의 미래를 꿈꿨던 것일까?

우리가 왜 헤어졌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밤이면 이상하게도 잠을 못 이루곤 했다. 너무 쉽게 만나기 시작해서 너무 쉽게 헤어지게 된 걸까. 그렇게도 생각했다. 둘 다 연인이 아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누구를 만나도 즐겁게 지낼 수 있으니 별게 아니라고 생각하려고 했을까? 즐겁기만 하면 누구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가벼움이 에반에게는 있었다. 도현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든 결국 똑같다. 적어도 에반은, 그 시절 그 당시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도.

[미련이 남은 건 너지.]

송선호가 한 말이 기억났다. 그의 말이 맞을 것이다. 에반은 처음 봤을 때부터 송선호를 싫어했다.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걸 다 가지고 태어난 남자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에반은 여느 때처럼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아무것도 아니야. 잊어버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도현도 어쩐지 기분이 복잡해졌다.

그를 잡고 싶은 걸까?

그때도 그랬을까?

그와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 무엇과 비교해도 견줄 수 없는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도현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 집을 지은 것도, 처음으로 정말 만족스러운 섹스를 한 것도, 처음으로 파티를 벌이고, 처음으로 카지노를 가보고, 처음으로 다이아몬드를 사고, 처음으로 배를 만들고, 처음으로 모험 같은 여행을 떠나고, 처음으로 아쉬운 이별을 하고.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예전 연인들을 뒤로 한 채, 옛 연인이라고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제일 먼저 기억나는 남자. 그녀가 가진 모든 것들에 여전히 강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 남자.

그와 다시 함께하면 그때처럼 걱정 없이 재미있고 즐거울 수 있을까? 그를 그리워하는 것인지 그때를 그리워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도현은 로맨스 작가였지만 원래부터 사랑이라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아마 오래도록 연구해봤기 때문에 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정이 붙고 좋아하고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는 감정은 알았지만 어떤 남자를 사랑해서 잊지 못하고 없으면 죽을 것 같이 되는 감정은 결국 자아도취라고 생각했다. 자기연민, 자의식과잉. 그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랑은 자기기만일 뿐이다.

그렇다면 도현이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어쩐지 허전하다. 그와 다시 한 번 눈을 마주치고 바라보고 싶다. 그러면 말하지 않아도 다 통하지 않을까? 도현이 설명할 수 없는 이 감정도. 여전히 사랑이라고도, 아니라고도 말하기엔 껄끄러운 이 불편함.

“역시… 넌 특별해.”

도현이 툭 말했다. 주차장으로 걸어가고 있는 그를 여전히 지켜보고 있었다. 둘의 사이는 5m쯤 떨어져 있었다. 그가 도현을 올려다보았다. 도현은 현관에 몸을 기댄 채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는 한때 도현의 가장 큰 이해자였고 그녀의 인생과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친 네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헤어질 때 왜 헤어졌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웬일로 사소한 문제로 잠깐 다투었던 것 같은데 어쩐지 거기에 배신감을 느꼈다. 서로 멀어졌고 그는 잡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여유롭고 다른 남자들처럼 도현에게 조바심을 내지도 않았다. 도현도 남자 따위 아쉬워할 일이 없는 인생이었다. 자연스럽게 그걸로 안녕이었다. 그때는 정말 어렸던 것이다.

“우리 지금 뭐야?”

도현이 물었다.

“…친구?”

그가 대답했다. 도현이 바로 대꾸했다.

“그건 아니지.”

“맞아.”

“2년 전에 헤어질 때 날 평생 사랑하겠다고 한 말, 솔직히 너답지 않은 말이라고 항상 생각했어.”

“왜?”

“몰라. 네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이 아닌 것 같아서.”

“못 믿겠어?”

“그것보다는….”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상했다. 너무 멀어서 눈을 마주치고 있는데도 그의 눈동자를 제대로 보고 있는 기분이 아니었다. 가까이서 보고 있으면 저 비취색 홍채의 줄무늬마저 셀 수 있을 것 같다는 걸 도현은 알고 있었다. 바다, 하얀 배, 눈부신 하늘, 나와 이 남자. 언제나 그런 풍경을 단번에 기억해낼 수 있다.

“…조심해서 가.”

다시 만날 약속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매일 같이 함께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도 헤어질 때 다시 만날 약속은 하지 않았다. 에반은 잠깐 더 그녀를 보다가 가버렸다.

‘저렇게 가버린단 말이야.’

평생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저렇게 가버리는 남자다. 도통 생각을 알 수가 없다. 도현은 설명할 길 없는 기분 속에서 그의 차가 정문으로 나가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

<우리 사회 이대로 괜찮은가.>

신문에 뜬 사설이다. 꽤나 사회적으로 저명한 지식인이 적었다.

<인공지능이 사법주체로 삼권 중 한 축을 담당하며 22세기의 민주주의 사회는 진정한 삼권분립이 가능하게 되었다. 시민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만이 시민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도래한 것이다. 억울한 판결도 없고 빠져나갈 수 있는 범죄자도 없다. 우리 사회는 유사 이래 가장 안전해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21세기 초, 한반도는 범죄의 천국이었다.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전과자였으며 전체 남성 인구의 14% 이상이 강력범죄전과를 가지고 있었다. 가정 폭력과 성범죄 피해자를 침묵시키던 미개한 사회 풍습에 따라 처벌은 고사하고 경찰 신고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숨어있는 강력범죄자의 수는 더욱 많았을 것이다. 한 해 일어나는 강력 범죄 중 절반 이상이 재범일 정도로 공권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던 시절이다.

21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한국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높은 범죄율은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치고 사회 불안을 가중하며 경제 성장을 저해한다. 뉴욕 시를 롤모델로 삼아 경범죄 단속을 강화하면 중범죄가 감소한다는 깨진 유리창의 법칙(Broken Window theory, 제임스 윌슨-조지 켈링, 1982)을 적극 적용하고 선진국의 수준에 맞게 형사 처벌의 수위를 높였다. 5대 강력범죄자의 원스트라이크 아웃(One-Strike Out) 제도를 도입하여 강력범죄 또한 90% 이상 급감했다. 95% 이상의 국민들이 인공지능 비서 사용하고 인공지능 사법부 시스템이 제 자리를 잡은 후부터 이 땅에서 강력범죄 사건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처벌받지 않는 불법 폭력과 성 착취를 매일 같이 목격하고 있다. 바로 TFC 세계다. TFC 선수가 여성을 학대하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착각하고 있지만 팔려간 사람들은 치외법권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21세기와는 다르게 인신매매를 제도권 안으로 수렴하고 공명정대한 인공지능에게 판결을 맡겨 불법 인신매매, 성인 및 미성년자 성 착취를 95% 이상 줄인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빚을 져서 팔려갔다는 딱지, 강요된 합의, 사회의 외면으로 말미암아 TFC 선수들을 만나는 소위 ‘Girls and Sisters’는 팔이 뽑혀 살해당하고(2112년), 윤간을 당해 살해당하기도 하며(2125년), 여전히 14세 미만의 미성년자가 팔리기도(2111년) 한다. 지금 사회에서도 간간이 이런 일은 일어난다. 하지만 검거된 모든 범죄자에게 무기징역 혹은 사형을 선도하여 우리 사회를 지켰다(2127년 본지 기사, ‘빠져나갈 수 있는 강력범죄는 없다.’). 하지만 TFC 선수들은 어떠한가. 현재의 TFC는 우리 사회에 남은 마지막 깨진 유리창이다.

미하엘 로드리게스는 연초에 준우승 파티에 참여한 일반인을 추행하여 수감되기까지 하였다. 한 달 전 웨스트이글 선수들이 세계적인 천재 물리학자 세현 퀸 교수에게 저지른 만행은 예견된 것이었다.

세현 퀸 교수가 누구인가. 우리 인류에게 지구 이외의 무수한 행성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심지어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 인류를 신에 버금가는 존재로 만들어줄 과학자다. 당장 전 인류가 전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없을, 인류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중병으로 와병 중인 세현 퀸 교수조차도 지키지 못한다는 말인가. 우리 사회가 아직도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통탄하고 또 통탄한다.>

작년 웨스트이글은 뽑기 운이 몹시 안 좋아 최고로 힘든 시즌을 소화해야 했다. 원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TFC 클럽이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지뢰를 밟았다. 아니, 지뢰가 아니라 핵폭탄 수준이었다.

미하엘 로드리게스를 비롯하여 웨스트이글 선수들은 전부 다 억울해했다. 주요 논지는 치엔이 루카스도 안 받는 비난을 왜 우리가 받아야 하냐는 것이다.

“이런 개좆 같은 새끼들아!! 그 새끼는 똑똑하기라도 하니까 여자를 죽도록 패도 경찰서 한 번 안 가는 거 아니냐!! 사람을 보고 건드려야 할 거 아냐!!! 이 돌대가리들아!!!”

아마도 이 정도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자정 작용인 모양이다. 원래 이런 종류의 범죄는 다른 남자들도 하니까 나도 해도 되겠지 정도의 범용성이 존재할 때, 피해자들도 너도 당하고 나도 당하니까 어쩔 수 없지 정도의 체념이 있을 때 만연할 수 있는 것이다. 예로 21세기가 그랬지 않은가.

올 시즌은 다 날아가겠다. 정말 다 잡혀가는 거 아닌가. 주전 30명은 이미 전부 다 출전선수로 등록된 상태였다. 이 중에 몇 놈이라도 시즌 중간에 철창행 가게 되면….

“아, 뒷골이야.”

기사를 보고 또 한바탕 소리를 지른 스튜어트 감독은 뒷목을 잡았다. 스튜어트도 소드마스터다. 소드마스터는 정말로 병치레를 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혈압이 올라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스트레스를 엄청 받고 있었다. 사태가 심각했다. 상태가 어느 정도냐면 진성 팬들도 외면할 정도다. 한국도 이제 정말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었고 선진국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범죄에 대한 자세가 이 정도까지 확고했다. TFC 매니지먼트 회사가 선수들에게 일일이 매니저를 붙여서 사생활까지 관리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대놓고 GAS라는 빚으로 팔려온 여자들을 잔뜩 데려다 놓은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무지는 그 자체로 죄가 될 때가 있다. 여기 있는 놈들의 무식함을 따지자면 세계적으로도 상위권을 차지할 것이다.

“보석 안 돼요? 솔직히 손가락 하나도 못 댔는데….”

조나단이 살짝 풀이 죽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미르 킹쉴드는 일찌감치 무혐의를 받아 놓은 상태라 별생각이 없었다. 자기 일 아니라는 얼굴로 디바이스를 잡고 누군가와 시시덕거리고 있을 뿐이다. 스튜어트 감독이 제수스 강과 미르 킹쉴드의 뒤통수를 스크린과 손바닥으로 동시에 퍽 쳤다.

“난 왜!!”

미르가 발끈해서 뒤통수를 잡고 그를 노려보았다. 스튜어트 감독은 박살 난 스크린을 옆으로 던지고 껌도 옆에 뱉었다.

“니들이 제일 문제다, 이 개새끼들아. 분수에 맞게 놀아. 왜 그런 여자들을 건드려? 그러니까 다른 새끼들도 따라 하잖아!”

“내가 능력이 돼서 그런 여자 만나겠다는데 씨발, 넘보는 병신들이 병신인 거지! 이 새끼들이 따라 하긴 뭘 따라 해?! 제대로 따라 하지도 못하니까 일이 이렇게 된 거 아냐!!”

미르는 그렇게 소리쳤다. 곧바로 스튜어트가 다시 손을 치켜들자 팍 하고 재빨리 방어 자세를 취했다. 제수스는 몹시 억울한 얼굴로 해명했다.

“내가 먼저 건드린 거 아닌데요. 세현이가 먼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스튜어트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제수스는 더 억울한 얼굴을 한 채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일단 도로나 건물 부서진 것부터 사고 보험처리 했고 최대한 보석으로 처리할 수 있게끔 그 교수라는 여자 변호사들이랑 얘기 중인데 암만 금액 불러도 영 시큰둥하단다. 교수가 돈을 그렇게 잘 버냐? 그런 직업이 아닐 텐데. 원래 집이 잘 사나….”

스튜어트가 야구 모자를 벗고 머리를 검지로 긁적거렸다.

“잠깐만요. 도로랑 건물은 다 그 여자가 부쉈는데요? 다친 건 우린데요?”

스튜어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미하엘이 말했다. 감독이 대꾸했다.

“예전에는 일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니들 좋아하니까 대충대충 일이 잘 풀렸지? 이번엔 입장이 반대다. 지금 나한테 전화가 얼마나 오는 줄 아냐? 어? 난 듣도 보도 못한 높으신 분들 전화도 받았다. 전화를 끊을 수가 없다고. 사람들은 지금 우리 클럽 망할 줄 알어.”

“…….”

“…가서 무릎 꿇을까?”

가람 리한이 잠깐 고민하더니 그렇게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자 다들 서로의 얼굴을 스윽 봤다. 미하엘은 자신의 머리 모양을 한 번 잡으며 쩝 하는 소리를 냈다.

“뭐, 무릎 꿇어서 될 것 같으면 한 번 꿇으러 가는 것도 괜찮지.”

“진짜 그럴래? 니들 이런 건 진심이 중요한 거다.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잘해야 한다.”

그러자 스튜어트가 말 한번 잘했다는 듯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일단 그렇게 가닥을 잡자 스튜어트가 약간 나아진 표정으로 손바닥을 짝 쳤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나나 코치들도 반성 많이 했다. 우리가 돈 좀 벌었다고 헝그리 정신이 빠진 거야. 우리 다 어렸을 때 팔려 가서 죽도록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자기 관리 똑바로 못 해서 다 잃으면 도대체 지금까지 한 게 무슨 소용이냐. 이 일은 니들도 크게 반성하고 앞으로 하지 마라. 매니지먼트 쪽은 이미 무릎이 갈려라 꿇고 있다니까. 세상은 원래 항상 더 위가 있는 거다. 그래서 겸손해야 하는 건데 우리가 그러지는 못했지. 걸즈한테도 함부로 손대지 마라. 여기서 사건 하나라도 더 터지면 정말 감당 안 된다.”

스튜어트가 말을 이었다.

“이런 마당에 시즌 성적도 거지 같이 나오면 정말 살아생전 먹을 욕은 다 먹는다. 자, 정신 차리자. 작년보다 시즌이 더 빡세질 수도 있어. 중간에 몇 놈 감옥 가면 진짜 죽는 놈 나온다. 결국 엘 드라카는 정신력 싸움이다. 우리는 할 수 있다.”

비기닝 포틴 2주차 수요일이 첫 경기 날이다. 상대팀은 약팀이라 분류될 정도였기 때문에 스타 플레이어들은 거진 빠지고 스페어 선수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게헨-세나의 운동장으로 가서 포지션에 따라 코치들의 세뇌에 가까운 구령에 맞춰 체력 훈련부터 시작했다. 오전에는 체력 훈련, 오후에는 연습 경기를 했다. 다들 배가 터질 정도로 먹고 휴게실이나 침대 위에 늘어졌다. 선수들 컨디션 관리를 위하여 선수들을 합숙소 밖으로 보내주지 않고 있었다.

미르 킹쉴드는 휴게실 카우치에 엉덩이를 대자마자 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르~]

“도현아~”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애교 있게 전화 통화를 시작하니 ‘저게 또 시작이다’ 하는 얼굴로 주변에 있던 동료들이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밥 먹었어?”

[밥 먹었어요~]

“뭐 먹었어?”

[송선호가 은어찜 해줬어요.]

“이야, 걔는 진짜 별걸 다 할 줄 아네. 맛있었겠다.”

[그러니까. 송선호도 나날이 음식 솜씨가 일취월장한다니까요. 요리 대회 내보내도 되겠어요.]

“로웰은 스톤하츠가 하는 거 더 좋아하지 않아?”

[로웰 선생님은 특이하고 새로운 맛을 좋아해서 그런가 봐요. 둘 다 맛있죠. 미르는 어느 쪽이 좋아요?]

“뭐…. 나도 둘 다 그럭저럭.”

그렇게 대답했다가 미르가 물었다.

“나도 요리 배울까? 요리해줄까?”

[진짜요? 미르가 요리? 왠지 잘 어울릴 것 같아.]

“나야 뭘 해도 쩔지~”

[정말이요~]

“사랑해~”

귀가 밝은 동료들을 전혀 고려해주지 않는 염장질이었다. 그때 휴게실로 오는 복도 쪽이 약간 소란스러워졌다.

“야, 니 여자면 니가 알아서 해. 지금 이게 뭐냐? 어?”

“씨팔, 니들이 사람 잘못 건드려서 이렇게 된 거잖아. 나야말로 니들 때문에 지금 세현이랑 연락도 안 된다고.”

“그러게 왜 앞에서 얼쩡거려? 진짜 이렇게 될 줄 몰랐냐? 그 개같은….”

“이 좆같은 새끼야, 세현이 욕하기만 해봐!!”

어어, 싸운다…. 미르도 잠깐만, 이라고 말하고 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안마 의자에 앉아 있는 미하엘에게 눈짓했다.

“아, 몰라. 나한테 이제 묻지 마, 이 멍청한 것들아.”

사태 파악을 제대로 못 하는 이 바보들이 그나마 머리가 돌아간다는 그를 붙잡고 얼마나 질문을 해댔던지 그는 이제 진력을 냈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미르는 곧 소란에서 신경을 끄고 다시 전화에 집중했다.

“지금 뭐 해?”

[마사지 받고 집에 왔어요. 일해야죠.]

“지금 뭐 입고 있어?”

[미르는 뭐 입고 있어요?]

그러자 미르는 바로 디바이스를 멀리해서 사진을 하나 찰칵 찍어 보냈다. 사진을 봤는지 도현이 웃었다.

[뭘 입어도 멋지다니까.]

“흐응.”

그녀의 칭찬에 미르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세상에서 니가 제일 좋아.”

[저두요~]

하여튼 그렇게 염장질을 이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쾅!! 하고 큰 소리가 나며 휴게실까지 콘크리트 먼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으악, 뭐야?”

미르는 펄쩍 뛰며 콘크리트 조각들을 피해 멀리 피했다. 미르 킹쉴드의 염장질을 피해 명상 음악을 들으며 안마 의자에 누워 있던 미하엘은 직통으로 먼지를 다 뒤집어썼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더 나더니 결국 싸우던 놈들이 휴게실까지 들어왔다. 역시나 개싸움이다. 미르는 살짝 정떨어진 표정을 지으며 전화기를 귀에 댄 채 다른 쪽 문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좋은 건 보는 순간 아는 것이고 덜떨어진 것은 알아차린 순간부터 싫어진다. 저런 건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피하는 게 상책이지. 다른 쪽 복도로 나가니 코치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미르를 발견하고 물었다.

“뭐야? 뭔 일이야?”

미르는 마이크를 막고 말했다.

“싸움났어.”

“아, 이 미친 새끼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어!”

그들은 얼른 휴게실로 쫓아갔다.

*

매년 8월부터 12월까지 열리는 엘 드라카. TFC 연맹과 엘 드라카 위원회가 창설되고 엘 드라카가 개최된 지 이제 45년이 되었다. 그간 전 세계에 4,500개에 달하는 클럽이 생기고 주요 도시에는 훗날에 길이 남을 거대한 콜로세움이 건설되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역사를 일으킨 돈은 다 어디에서 오는가.

연맹이 벌어들이는 TV 및 인터넷 중계권료, 공식후원료, 티켓판매, 라이선스료, 접대료, 그리고 스포츠복권 수익이 한 해 수십조 원에 달했다. 비영리 단체라 세금도 떼지 않았다.

로웰 리는 어젯밤도 밤새도록 엘 드라카를 보았다. 비기닝 포틴 때는 매분마다 새로운 경기가 시작된다고 봐도 무방했다. 엘 드라카가 끝나고 나서 다 챙겨본다고 해도 다 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그래도 팬이라 자칭할 정도면 주요 클럽이 하는 건 다 봐줘야지.

‘올해도 이스트드래곤이다!’

로웰은 저번 이스트드래곤과 사이공FC의 퍼스트 먼데이전 때 도현과 함께 엘 드라카 직관을 하러 갔다. 역시 이스트드래곤! 작년엔 너무 강해서 오히려 재미가 없었다는 평을 의식한 것인지 처음부터 화려하게 개막전을 장식했다. 촉이 확 와서 이미 이스트드래곤 우승에 돈을 꽤 걸고 말았다. 엘 드라카 복권은 시즌 중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참여할 수 있으며 배율도 천차만별이다. 시즌 초기지만 여전히 아직 투기금이 다 안 들어왔다고 보면 된다. 예전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다크호스가 의외의 챔피언이 되었을 때는 무려 1만 배당까지 올랐다.

‘만원 걸면 1억, 10만 원이면 10억이고 100만 원이면 100억…!’

물론 당첨금은 스포츠복권 매출의 70% 정도로 제한되어 있으니 말도 안 되는 단위까지는 올라가지 않겠지만…. 역시 인생 하면 도박이고 도박하면 인생이지! 로웰은 일확천금의 환상에 부풀어 어젯밤도 승패에 열을 올리다 늦잠을 잤다. 오후가 되어서야 1층으로 내려갔다.

“이런 건 또 어디서 봤대?”

“아니… 여름이고. 너 수영하는 것도 좋아하니까.”

“진짜 은근히 밝혀.”

“아, 아니라니까…! 싫으면 하지 말든가.”

“줬다 뺐는 게 어디 있어?”

사장되더니 이제 일을 안 하나, 저놈. 로웰은 부엌에 가서 레몬 물을 한 컵 따라 들고는 거실의 훤한 창 너머로 도현과 송선호를 구경했다. 어제도 아주 헐벗고 서로 껴안고 있더니 오늘도 그랬다. 도현은 고급스러운 청록색 브라질리언 팬티, 튜브탑 비키니를 입고 있었고 그 위에 못 보던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겹겹이 목을 감싸고 허리도 한 바퀴 감싸는 비치웨어 용이었다. 섹시한 아이템이다. 송선호는 하얀색 트렁크를 입고 하늘색 비치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의 옷차림에서 약간의 반항이 느껴졌다.

‘아니, 저렇게 푹 빠졌으면서 도대체 왜 말을 안 듣냐?’

어쨌든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주인이라더니. 미르 킹쉴드는 요새 시즌 중에다가 사고도 하나 터져 집에 거의 못 오고 있었고, 다니엘 스톤하츠는 시즌 중인데도 베이징과 도쿄를 왔다 갔다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고 하고, 에반 블랙이라는 놈은 묘하게 겉도는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그녀를 독차지하고 귀여움을 받는 남자는 저 남자가 되고 말았다. 로웰은 레몬 물을 마시며 창문을 열었다.

“요즘 안 싸워요? 왜 이렇게 사이가 좋아?”

로웰이 말을 거니 도현이 송선호의 양 뺨을 손으로 꼬집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그녀의 정감 있는 목소리에 로웰은 손을 한 번 흔들어 주었다. 송선호도 로웰을 발견하고는 말했다.

“배고프시면 식사 바로 하세요. 밥도 있고 시리얼도 종류별로 채워 놨고 과일 샐러드랑 요거트도 다 해놨습니다.”

“예, 오늘도 수고하십니다.”

예전 도현과 송선호가 사귀지 않을 적에도 그의 가사 스킬은 필요할 때마다 빛을 발하곤 했다. 그런 남자를 집에 들여놓으니 식사 생활이 풍성해졌다. 로웰은 굳이 따지자면 다니엘 스톤하츠의 요리가 더 입맛에 맞았지만(그 남자는 들이는 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송선호의 깔끔하고 담백한 요리도 당연 수준급이었다. 게다가 무슨 고래같이 처먹는 미르 킹쉴드가 집에 없으니 언제나 냉장고가 빈틈없이 꽉꽉 차있었다. 로웰은 수면부족 때문에 칙칙한 얼굴로 부엌으로 갔다. 도현은 하늘하늘하고 안이 비치는 비치 스카프로 허리를 둘렀다.

“나 선생님한테 좀 갔다 올게.”

“응.”

도현은 송선호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추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송선호는 그녀의 늘씬하고 예쁜 뒷모습을 얌전히 보고 있다가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니 ‘어우’ 하고 잠깐 신음을 흘리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

‘너무 좋아…!!!’

엘 드라카가 시작하면 그래도 빡칠 일은 좀 줄어들겠거니, 하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때 다니엘 스톤하츠와 미르 킹쉴드가 싸우고 집을 나갔을 때도 그녀와 하루 종일 같이 있을 수 있었지만 마음이 불안해서 채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는데 이번은 완전히 달랐다. 너무 좋았다. 너무너무 좋았다.

원래 임원은 평일 주말이 따로 없다. 리엔이야 송선호가 차린 회사에 제임스 윤도 있으니 그렇다고 쳐도 아버지 회사는 아무래도 어렵다. 회사 가야지, 하고 다 챙겼는데 어느새 벗고 수영장에 퍼져버렸다. 그녀는 오늘도 그를 천국에 보냈다가 지옥에 처박고 지옥에 처박았다가 다시 건져내 천국에 올려주었다. 그녀가 귀에다 간지럽게 속삭이는 게 사랑이면 밑도 끝도 없이 행복감이 밀려와 견딜 수가 없었고 그녀가 자신을 깔아뭉개고 추궁하고 질책하면 마음이 안절부절못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원래도 그녀에게 휘둘리는 인생이었지만 지금은 그녀가 눈빛만 한 번 까딱해도 휘청거렸다.

‘이렇게 둘만 있으니까 너무 좋다. 진짜 좋다. 행복해. 결혼하면 얼마나 더 좋을까? 미칠 것 같다. 소리 지르고 싶다.’

행복한 남자는 또 마음이 몇만 리나 앞서 가버렸다. 송선호는 주먹을 불끈 쥐고 행복감을 만끽했다. 그러다 도현이 나오니 곧바로 자세를 바로 하고 책을 읽는 척했다. 도현은 다시 송선호의 위에 올라탔다.

“아, 좋다.”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깔고 앉기 좋다는 게 정말 문자 그대로 깔고 앉기가 편하다는 말일까? 송선호는 약간 긴장했다.

“으흠, 어, 로웰 선생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

“응, 연말에 어디 갈지 잠깐 상의했어.”

“세이셸 가고 싶다며?”

“응.”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도현이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참, 어머님이랑 아버님은 어디 다니고 계신데?”

“몰라…. 어머니 빙하 처음 보셨다고 사진 막 보내신다.”

“진짜? 어디?”

송선호는 책을 내려놓고 디바이스를 꺼내 메시지 함을 열었다. 각종 풍경 사진과 지연 이바노프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잔뜩 있었다. 차례대로 보니 사진사의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것이 보인다.

‘의외로 시키면 다 잘하는 남자들이란 말이지.’

도현은 송선호의 잘~생긴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자연스럽게 그의 아버지의 얼굴도 떠올렸다. 그의 아버지는 역시나 그보다 좀 더 권위적일 것 같고 좀 더 보수적일 것 같고 좀 더 말이 안 통할 것 같은데도 은근히 여자가 하자는 대로 다 하고 선물 같은 거 하는 수준은 매우 통이 크고…. 흐음, 도현은 그의 턱밑을 검지로 살살 긁으며 말했다.

“이래서 남자는 집안을 봐야 하는 걸까?”

“응? 뭐? 왜?”

그녀의 말에 그가 깜짝 놀라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이 웃겨서 도현은 웃었다. 뭐가 불안한 게 있는 것인가.

“너 아버지랑 정말 많이 닮았구나 싶어서.”

“얼굴 말이야?”

닮았다는 소리는 많이 듣긴 했지만…. 부모와 많이 닮았다는 소리는 어쩐지 양가적인 감정이 들게 했다. 송선호는 약간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래도 내가 아버지보단 나아.”

“진짜?”

“당연하지.”

“어떤 점에서?”

“…내가 더 잘생겼지 않아?”

“하하하.”

귀엽다. 도현은 그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눈살을 좁혔다가 그녀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넌? 부모님 중에 누구랑 더 닮았어?”

그는 그녀의 부모님에 대해선 거의 들은 바가 없다. 어렸을 때 헤어졌다는 얘기만 얼핏 들었다. 그의 질문에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

“그래? 어머니도 정말 미인이셨겠다.”

“10대 때는 유명 패션지 모델도 했었다는데 이제는 찾아봐도 안 나오더라고. 사진 못 쓰게 했나 봐. 아마 지금도 엄마가 나보다 키도 더 클 거야.”

도현의 말에 송선호는 상상이라도 해보려고 했지만 마땅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도현은 오른손으로 손짓을 하며 설명했다.

“엄마는 진짜 이렇게 화~ 하고 아우라가 있었어. 어렸을 때 학교에 엄마 오면 다들 부러워했다니까.”

“뵙고 싶다. 어머니 많이 좋아했구나.”

그러자 도현이 눈을 몇 번 깜박하더니 대꾸했다.

“그런가.”

“그렇지. 자기 엄마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안 그래도 작년에 바하마 갈 때 엄마 생각나서 연락 좀 해보려고 했는데 연락처를 찾을 수가 없었어.”

“그래? 아버님은 연락처 없으시대?”

“아빠랑도 연락 안 한 지 꽤 돼서 그런 거 물어보러 연락하기도 좀 그렇고.”

도현이 그렇게 대답하자 송선호가 말했다.

“왜 그래. 아버지한테도 자주 연락드리고 그래. 아버진데.”

“으음, 몰라. 우리 아빠 말 안 통한단 말이야.”

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송선호의 어깨에 다시 얼굴을 기댔다. 송선호는 약간 더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중에 그녀와의 사이에 딸이 생긴다면, 그런데 그 딸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싫어하게 된다면 정말 마음이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애들 좋아. 잔뜩 있었으면 좋겠어. 딸이 잔뜩 있었으면 좋겠어.]

전에 도쿄에서 그녀와 그런 얘기를 한 것까지 기억이 났다. 그러니 마음이 뭉게뭉게 부풀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진짜 귀엽겠지….”

“뭐가?”

“어? 어? 어흠, 어, 흠, 그게…. 전에….”

“응?”

“전에 도쿄 갔을 때 있잖아…. 니가 나랑 딸 많이 낳고 싶다고….”

“응? 내가 그런 소리도 했나?”

도현은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을 했다. 그러자 송선호는 깜짝 놀라서 설명했다.

“니, 니가 그랬잖아! 애들 좋다고, 잔뜩 있었으면 좋겠다고…! 딸 잔뜩 있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그랬나….”

도현이 중얼거렸다. 송선호가 물었다.

“애는 좋은 거 맞지?”

“응, 그렇긴 한데…. 몰라. 지금은 별 생각 없어.”

송선호는 잠깐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마음을 다스렸다. 그래, 당장 애가 생기는 건 나도 싫다. 이렇게 좋은데. 둘만 있고 싶다. 하지만 어쩐지 약간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사실 아이는 여자를 곁에 붙잡아 두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다. 송선호는 그녀의 입술에 조심스럽게 쪽 입을 맞췄다.

“응? 하하. 갑자기.”

그녀는 웃으며 그의 양 뺨을 손으로 잡았다.

“응… 으응…. 하.”

도현은 그의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맞추며 그의 잘생긴 광대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그의 입술이 부드러웠다. 송선호의 손이 도현의 허리와 허벅지를 매만지더니 잠시 입술을 떼고 서로 가까이서 눈을 마주치고 바라보았다. 이번엔 도현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곤 그의 입속에 혀를 쑥 넣고 입천장을 긁었다. 그가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이 확 상기되었다. 도현은 그의 셔츠 단추를 더 풀고 그의 가슴에 쑥 손을 넣었다.

“으응….”

그녀가 그의 입천장을 살살 간지럽히니 귓속까지 간질거렸다. 맞닿은 배가 부드러웠다.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손길이 간지러웠다. 그녀가 혀를 빼고 그의 입술에 쪽쪽 입술을 부딪쳤다 뗐다 하니 기분이 둥둥 뜨는 것만 같았다. 몸에 열이 화끈하게 돌아 물에 젖은 그녀의 차가운 피부가 더 좋아서 손을 내려 그녀의 탱글탱글한 허벅지까지 쓰다듬고 주물렀다. 아랫배가 꽉 뭉치고 뒷골이 오싹거렸다.

“입 벌리고 혀 내밀어 봐.”

입술이 또 쪽 떨어지고 그녀가 가까이에서 송선호의 눈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는 얼굴이 벌게져선 또 그녀에게 확 홀려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그녀의 눈동자를 계속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서 그녀에게 끌린다. 그가 요새 그녀의 눈을 많이 피하는 것은 그가 계속 그녀에게 이끌려 들러붙는 것을 그녀가 싫어하는 것 같아서였다(미르 킹쉴드는 된다. 천불이 날 일이다). 그녀를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면 그녀는 꼭 그를 놀렸다. 그건 그가 싫어했다.

“내밀어 보라니까. 내가 핥아 줄게.”

도현이 속삭였다. 귀뿐만 아니라 온몸이 근질거렸다. 젠장…. 도대체 어떻게 그녀의 유혹을 참으란 말인가. 이럴 때 그녀가 리드하는 대로 움직이는 건 천국에 간 듯 기분이 좋지만 그래서 조금 불안하다. 송선호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어쩐지 살짝 부끄러움을 느끼며 입을 벌리고 그녀에게 혀를 내밀었다.

“잘했어.”

그러니 그녀가 칭찬했다.

‘제기랄….’

그녀의 이런 칭찬이 기분이 좋다니. 그녀가 좀 더 몸을 기대와 서로 더 밀착한 느낌이 들며 그녀가 각도를 바꾸며 그의 혀끝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의 뺨을 한 손으로 잡고 혀끝부터 뿌리까지 부드럽게 핥아 올렸다.

“윽…! 으응…. 하…. 도현아…. 으….”

그녀의 손이 그의 가슴을 주무르다가 겨드랑이 밑부터 허리까지 근육을 하나하나 세 듯 손끝으로 문질렀다. 미칠 것 같았다. 그녀가 그의 혀를 살살, 그리고 질척질척하게 핥았다. 그녀의 타액이 매끄럽고 달게 느껴졌다. 송선호는 그녀의 허벅지를 주무르다가 결국 못 참고 그녀의 수영복 안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엉덩이를 가득 움켜쥐었다. 그녀의 엉덩이를 눌러 그의 팽팽해진 바지 앞섶이 다리 사이에 닿게 했다. 그녀가 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애 얘기는 왜 하는가 싶었더니.”

“아…! 으윽…!”

그녀가 허벅지에 힘을 주며 그의 것을 옷 위로 꾹 누르자 겨우 참고 있던 그는 펄쩍 뛰었다. 그는 눈을 질끈 헐떡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평소엔 세상 도도한 태도이지만 이럴 때는 잔뜩 흐트러져서 야하고 섹시하고, 그리고 좀 귀엽다. 등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이 미끌미끌할 정도로 땀이 배어 나왔다.

“하고 싶어…. 그래도 네가 싫으면 안 해.”

이렇게 보면 그래도 좀 나아진 점도 보이긴 하고. 도현은 그의 콧잔등에 코를 비볐다.

“진짜?”

“어…. 젠장, 그럼 내가 억지로 할까 봐? 넌 도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그가 신경질을 냈다.

“그냥 아니라고 하면 되지. 짜증은.”

“으윽…. 하아…. 도현아….”

그가 눈을 떠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뭔가 좀 포기한 듯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계속해줘, 도현아…. 기분 좋아.”

“흐응.”

도현은 기분이 좀 더 좋아졌다. 뭐랄까. 그녀는 송선호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6년이나 알고 지냈기도 했고 그의 까칠한 성격이나 보수적인 가치관이나 다 꿰뚫어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의외의 모습이 색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고분고분하면 기분이 좋았다. 정말로 이런 게 꺾는 맛인가 보다. 그녀는 다시 입을 맞출 듯 말 듯 장난을 쳤다. 그는 애간장이 닳아 하다가 그녀가 자꾸 장난을 치자 또 삐쳤다가 그녀가 또 살살 달래니 다시 홀딱 넘어왔다.

“이제 그냥 해줘. 으윽…. 진짜. 죽을 것 같아. 장난 안 칠 거지? 어?”

그가 죽는소리를 냈다. 불안한지 그렇게 캐물으며 도현을 꽉 끌어안았다. 그녀는 그를 놀리는 게 너무 재미있어 그냥 그의 위에서 일어나버릴까 했는데 그가 허리를 꽉 끌어안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어? 안 놔? 놔.”

“아, 진짜…!”

그래도 그는 손에 힘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진짜 삐쳤다.

“그래. 가라, 가! 항상 나만…!”

그는 부글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꾹 누르며 화를 참았다. 그녀가 소리를 내서 웃었다.

“하하하, 진짜~”

도현은 한참을 그가 웃기고 귀여워서 웃다가 고개를 홱 돌리고 있는 그의 뺨에 입을 맞추자 그가 밀어내려고 했다.

“가라고.”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얼굴에 입술을 댔다.

“진짜 가?”

“가.”

“내가 네가 가라면 가고 그러는 사람이야?”

도현은 그대로 그의 단단한 복부 위에 올라탄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의 셔츠를 마저 풀어헤쳤다. 그녀는 자신의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한쪽으로 정리해서 앞으로 내렸다. 송선호가 괜히 먼 곳을 보고 있다가 그녀가 그의 바지와 팬티까지 쓱 내리자 그녀의 손을 잡았다.

“싫다니까…!”

“응? 거짓말. 벌써 완전 딱딱….”

송선호가 얼굴을 확 붉히며 입을 뻐끔거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이렇게 당혹스러워하면 왜 이렇게 재미가 있을까. 도현이 능글능글 웃으며 그의 골반을 잡고 치골을 엄지로 살살 쓰다듬었다.

“내가 이렇게 귀여워해 주는데 고맙습니다, 하지는 못할망정.”

“도현아….”

그녀가 탱탱하게 올라붙은 그의 짙은 붉은색 남성기 뿌리를 엄지와 검지 사이로 살짝 죄었다. 도현이 웃었다.

“제모한 거야?”

“…하라며.”

수영복을 입혀 놓으면 그의 배렛나루가 제법 섹시했는데 어느샌가 정리를 해놓았다. 에잇팩까지 올라온 그의 복부에 빵빵한 가슴, 크고 글래머러스한 팔과 다리, 쭉 뻗은 남자다운 목과 귀족적인 얼굴이었다. 클래식한 슈트로 이런 몸을 꽁꽁 싸매고 다니는 남자였지만 풀어헤치면 비싼 포장을 뜯는 것처럼 설렘이 있었다.

서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인상을 좀 찌푸리고 있었고 그녀는 유유자적이었다. 그러다 순간 기 싸움을 멈추고 그가 입을 다시 맞췄다. 도현이 웃었다.

“넘어올 거면서 꼭 비싼 척은.”

“야.”

송선호는 그녀의 비키니 상의를 천천히 풀어서 벗겼다. 그녀의 수영복을 옆에 두고 다시 입술을 떼고 눈을 떠 그녀의 몸을 보았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그녀의 오른쪽 어깨 앞으로 흘렀다. 사슴같은 목덜미에 가녀린 느낌이 드는 어깨와 팔, 하지만 모양이 예쁘고 볼록한 가슴은 흡족할 정도로 글래머러스했다. 허리 라인은 팽팽하게 힘이 있었고 골반은 둥글게 그리며 나왔다. 그 밑으로 뻗은 다리도 탄력 있게 쭉 뻗어서….

“얼굴 빨개졌어.”

도현이 웃었다. 송선호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가슴의 밑부분을 손으로 감싸 한 번 천천히 주물렀다.

‘아, 그 개새끼….’

미르 킹쉴드 그 망할 놈은 도대체 이걸 어떻게 그렇게 마음대로 주물러댄단 말인가. 다치면 어쩌려고, 개새끼. 그도 도현과의 스킨십이 이제 자연스러울 정도는 되었고 섹스도 그간 몇 번 해봤지만 제대로 만나기 시작한 지는 이제 고작 반년. 중간중간에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그녀를 기분 좋게 해주고 싶었다. 다른 어떤 남자보다도 더, 훨씬 더 기분 좋게….

송선호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가 자신이 먼저 그녀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는 엄지로 그녀의 왼쪽 가슴살을 살살 쓰다듬다가 가슴 전체를 손으로 덮었다. 그녀의 젖꼭지가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부드러웠다. 신음을 흘리며 그녀의 핑크빛 유두를 검지로 살살 쓰다듬으니 그녀가 민감하게 반응하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으음…!”

그녀의 신음소리가 가슴을 찌르르 떨리게 했다. 송선호는 급격히 흥분하여 그녀의 입에 혀를 넣고 입안을 핥았다. 흥분한 숨이 서로의 얼굴을 스쳤다. 송선호는 두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애무하다가 오른손으로 그녀의 배를 쓰다듬고 내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수영복 팬티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곧 그녀의 허리가 송선호의 쪽으로 확 붙으며 움찔했다.

“하아…. 송선호….”

송선호는 그녀의 뺨과 귓가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그의 머리를 한 팔로 끌어안자 그는 그녀의 사슴같이 쭉 뻗은 목에 얼굴을 묻었다. 착 안겨오는 그녀가 너무나 좋았다. 너무나 부드러웠다. 물 냄새가 섞인 그녀의 살 냄새도, 피부도, 머리카락도, 손도 전부 정말, 정말 부드러웠다.

‘사랑해…. 너무 좋아. 제일 좋아. 사랑해. 사랑해.’

그는 몹시 열중해서 그녀의 목덜미, 어깨, 쇄골, 가슴에 천천히 입술을 누르며 소리 없이 마음을 전했다.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부푼 소음순 사이와 클리토리스를 문질렀다. 미끌거리고 너무 부드러워서 세게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몸이 점점 뜨거워졌고 그녀의 심장도 빠르고 강하게 뛰고 있었다. 송선호는 그녀의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신음을 흘렸다. 이것만으로도 터질 것만 같았다.

지금도 미칠 것 같은데 넣기라도 하면 정말 죽는 것 아닐까. 정말 넣고 싶었지만 살짝 겁이 나기도 했다. 그래도 넣고 싶었다. 이렇게 부드러운데, 정말 기분 좋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도 함께 기분 좋게 하고 싶었다. 그래도 그녀가 싫으면 안 할 것이다.

“기분 좋아…. 으응…. 하아, 송선호….”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들어 취한 것만 같은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흥분한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예뻤다. 그녀는 송선호의 이마에 입을 쪽 맞추며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대로 그의 머리채를 잡고 아래로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송선호의 심장이 아래위로 크게 뛰었다. 눈높이가 훨씬 올라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빨고 싶지?”

“…….”

전에도 한번 말했던 것 같은데….

좋아하는 여자가 너무 섹시하면 몹시나 심란해진다

송선호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그녀의 부드러운 배에 입을 맞추면서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두 번째 해보는 거지만 묘하게 배 속이 뜨겁게 흥분했다. 심장이 마구 뛰어서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야외라서 그럴까. 불안, 설렘, 긴장, 초조 등으로 손에 땀이 가득 잡혔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비키니 팬티를 내렸다. 뜨거운 콧김이 훅 나왔다.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다리 사이를 바라보았다. 저번은 치마 속이라 어두워서 제대로 못 봤다. 이렇게 밝은 곳에서 그녀의 것을 보는 건 처음…. 하얀 그녀의 피부 사이로 부푼 클리토리스와 분홍색 소음순이 살짝 보였다. 그녀가 그의 뒷머리를 손가락으로 비비 꼬았다. 그의 뒷덜미가 오싹오싹해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살짝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젠장….’

물인지 땀인지, 그는 촉촉한 그녀의 양 엉덩이를 양손으로 꽉 잡고 끌어당겼다. 그의 도톰한 입술에 그녀의 여성기가 닿았다. 그녀의 치골에 코를 묻었다. 그녀의 향기와 야한 냄새가 섞여서 취할 것만 같았다. 관자놀이부터 땀이 주르륵 흘렀다. 그는 그녀의 음핵을 입술로 살짝 물고는 한숨을 약간 쉬었다가 혀를 내밀어 살짝 핥았다.

도현은 그런 송선호의 상기된 예쁜 이마를 내려다보았다. 손으로 그의 이마를 쓰다듬고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진짜 못해.”

그러자 열중하고 있던 그가 인상을 팍 쓰고 그녀의 눈을 노려보았다. 뭐라고?!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도현이 그 눈빛을 맞받아쳤다.

“그럼 잘 해보든가.”

그는 더 부글부글한 얼굴로 그녀의 허벅지를 잡아서 확 벌렸다. 그녀가 꺅하며 살짝 휘청하여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웃었다. 그녀는 그 다리를 그의 어깨 위에 올리고 몸무게를 실었다. 그의 등을 발꿈치를 꽉 누르며 그의 입술에 다리 사이를 강하게 눌렀다.

“으응…! 하아…. 송선호, 읏, 거기 좀 더 세게 빨아 봐. 응?”

도현은 그의 귓바퀴를 검지로 간지럽게 긁으며 그렇게 속삭였다. 송선호는 얼굴과 귀, 목덜미까지 빨개진 채 그녀의 말대로 했다. 그녀의 허벅지를 잡은 채 열심히 구음하다가 손으로 천천히 그녀의 다리를 쓰다듬고 그대로 그녀의 다리 사이를 엄지로 벌리고 입술을 미끄러뜨려 그녀의 여성기 입구에 혀를 대고 핥았다. 강렬한 여성의 향기와 맛이 달큰하다.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엄지로 꾹꾹 누르며 그녀의 질 입구를 느릿하게 핥았다.

“으으응…. 아…! 싫으면 안 한다며…?”

그가 웅얼거리듯 뭐라고 대꾸했는데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뭐, 자기 딴엔 또 뭐라고 변명했겠지. 도현은 입술을 핥으며 턱을 약간 들며 그의 탄탄한 뒷목을 손으로 꽉 잡았다. 기분 좋았다. 그가 고양이처럼 핥고 있었다. 귀엽기는. 간질간질하면서도 꾹꾹 눌리는 압박감이 아찔했다. 뭔가 나올 것처럼 아래가 불편하고 긴장되었다.

“아으…. 송선호…. 아, 거기…. 흐읏, 아, 가, 갈 것 같아. 하으… 으… 아! 으으응…!!”

도현이 점점 헐떡거리더니 곧 그녀의 여성기가 강하게 수축했다. 그리고 경련하며 오르가슴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하얀 피부가 전부 빨개지며 뜨거워졌다. 그는 마지막에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쪽쪽 빨았다.

“아앗! 아…! 송선호…! 으응… 하…!”

그는 한참 더 그녀가 잔뜩 느끼게 하고 멈추었다. 그는 한쪽 허벅지에 말려 있는 비키니 팬티 말고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고 허리를 잡았다. 그는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그녀의 얼굴을 좀 의기양양하게 보았다.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숨을 계속 헐떡거리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얼굴은 좀 마음에 안 든다. 그녀는 그의 자지를 악력기를 잡듯 꽉 잡았다.

“자기도 했으면서.”

“윽! 야…!”

*

“사오라고 한 건 어디 있습니까.”

으리으리한 한 건물에서 빠른 걸음으로 나온 다니엘은 셀레나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셀레나는 약간 빨개진 얼굴로 대꾸했다.

“뒷좌석에 있어요.”

그 말에 다니엘은 얼른 차 문을 열고 탔고 셀레나도 마찬가지로 운전석에 올랐다. 그녀는 백미러로 그의 모습을 살폈다. 다니엘은 그녀를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출발 안 합니까?”

“…메트로서울로 갑니다.”

비행차는 바로 하늘로 떠올랐다. 그 사이 뒷좌석의 다니엘 스톤하츠는 셀레나에게 심부름시킨 것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마법으로 불태워 셀레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아마도 소독 비슷한 것을 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는 예리한 눈으로 물건을 하나 들어 올렸다. 새하얗고 몽실몽실한 털이 끝에 달려 있는 막대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는 젓가락 정도의 길이에 끝에 탁구공만 한 하얀 털 뭉치가 달린 것을 포장에서 꺼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이 손등을 문질러 감촉을 확인했다.

‘완벽하군…!’

이 부드러움! 그리고 그는 그걸 다시 포장지에 고이 넣고 이번에는 검은 깃털이 달린 티클러를 꺼냈다. 원래 도현이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사이즈는 좀 작았다. 그리고 그것도 제대로 손등에 문질러 감촉을 확인했다. 이건 도현 씨의 등에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 그는 셀레나로 하여금 베이징 시내에 있는 가장 큰 섹스토이 샵에 있는 모든 티클러를 사오게 했다. 그는 20개에 가까운 티클러를 모두 시험해보고 그다음엔 안대로 넘어갔다. 안대도 종류별로 있었다. 그리고 그 중 마음에 드는 것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세게 하면 조금 아플 수도 있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매우 무표정한 그라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그것도 저런 것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것은 어쩐지 지켜보는 사람의 기분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묘한 상상이 들었다.

‘저걸로 그 여자랑 뭔가 할 생각인 거겠지?’

그가 안대를 하고 간지럽힘을 당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여자가 안대를 하고 간지럽힘을 당하는 것일까?

커다란 침대 기둥에 양팔과 양다리를 묶인 그가 안대까지 해서 시야까지 차단되었다. 그렇게나 강한 남자가 무방비한 순간이다. 잘 빚어진 근육질의 몸매, 윤기나는 검은 머리카락. 어쩐지 그의 예쁜 보라색 눈동자를 볼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쉽다. 하지만 안대를 벗기면 그런 구속 따위 순식간에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는 남자다. 그의 마음에 든 거미같이 생긴 조형물이 달린 막대기로 그의 섹시한 목젖부터 살살 간지럽히면 얼마나 즐거울까? 어떤 목소리로 웃을까? 어떤 목소리로 애원할까?

‘아, 아니야. 안 돼. 안 돼. 이런 생각하면. 어차피 날 안 좋아하는 남자잖아.’

그녀는 겨우 그런 상상을 멈췄다. 그러자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그 다음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녀는 양쪽 손목을 각각 발목과 묶은 채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안대와 족쇄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다. 그녀가 느낄 수 있는 건 오직 가끔 서걱거리는 그의 구두 소리뿐. 그나마도 너무 긴장되어서 심장 소리를 넘지 못한다. 그가 새카만 깃털이 달린 티클러의 손잡이 부분으로 그녀의 턱을 치켜들었다. 그가 바로 코앞까지 걸어와 있는 게 느껴진다. 그 긴장감만으로도 젖을 수 있었다.

‘아악! 안 돼! 상상은 이제 금지!!’

하지만 한 번 들기 시작한 야한 상상을 끝도 없이 이어졌다. 저런 미남을 매일같이 보고 살면서도 손가락 하나 못 댔으니 상상력만 박차를 가한다. 셀레나 카토가 메트로서울에 위치한 도현 킬스버그의 집에 그를 데려다 주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양손 가득히 짐을 들고 차에서 내려 현관으로 걸어갔다. 셀레나는 당연히 오는 내내 한 상상들이 한심해 한숨을 쉬었다. 매정한 남자다. 자기를 좋아한다는 여자에게 이런 심부름이나 시키고. 오히려 좋아하는 걸 알고 나니 더 홀대하는 것 같이 느껴지는 건 착각인가. 셀레나는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다시 비행차를 출발시켰다.

“도현 씨!”

현관을 들어가자마자 다니엘이 도현의 이름을 큰 목소리로 불렀다. 어지간히 마음이 급한 모양이다. 저번에 분명히 도현은 상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다니엘 본인이 바쁘고 타이밍을 못 맞춰 차일피일 미뤄지고 말았다. 그렇게 어느새 한 달이 훌쩍 지났고, 이제는 정말 기다리기 힘들다. 그는 그대로 짐을 든 채 저택 뒤편에 위치한 정원을 찾아갔다. 수영장이 있는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로웰과 물놀이를 하고 있는 도현 킬스버그가 보인다. 모든 계절을 다 즐길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에너지와 생기가 넘치는 여름을 가장 사랑했다.

“도현 씨!”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자 도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짙은 푸른색 튜브탑 비키니를 입고 튜브를 잡고 있었다. 그녀가 다니엘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니엘.”

어젯밤에 못 들어온다길래 이번 주는 못 보는 줄 알았다. 그가 어울리지 않게 쇼핑백을 잔뜩 들고 있는 게 어쩐지 웃기다. 그녀는 물의 저항력 때문에 느릿하게 걸어 그에게 다가갔다.

“오늘 못 볼 줄 알았어요.”

“일요일은 무조건 도현 씨와 같이 있을 겁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조금 기특하다. 그녀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도현 씨….”

그는 얼굴이 상기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아아. 왜 이렇게 그녀가 좋을까?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비키니를 당장 벗기고 싶었다. 거칠게 잡아당겨서 단번에 그녀의 예쁜 가슴을 드러내고 싶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말했다.

“벌써 한 달이나 지났습니다. 약속대로 오늘은 도현 씨 XX을 간지럽힐 겁니다.”

“아, 벌써 그렇게 됐나.”

도현이 깜박하고 있었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로웰은 진지한 얼굴로 망측한 말을 하는 다니엘에게 웃음이 빵 터져 저쪽에서 킬킬거리고 있었다. 다니엘은 긴장했다. 혹시나 ‘그래도 오늘은 별로 기분이 안 난다’라고 도현이 말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또 일주일을 마음 졸이며 기다려야 할까.

“가요.”

하지만 그녀는 쉽사리 승낙의 말을 했다. 그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도현은 손으로 수영장 바깥 바닥을 짚고 한 번에 올라왔다. 매미가 시끄럽게 운다. 더웠다. 다니엘은 자신의 앞에 반라로 선 그녀를 보았다. 침을 꿀꺽 삼키고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건강하고 여성스러운 그녀의 몸…. 그녀는 다가와서 그의 입가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리고 긴장하고 있는 그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웃었다. 다니엘의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드디어….’

긴장과 기대, 흥분으로 속이 울렁거린다. 그는 그녀를 졸졸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그건 다 뭐예요?”

“선물입니다.”

“진짜요?”

도현이 기뻐하며 쇼핑백을 받으려고 하자 그가 손을 물렸다.

“방에 가서 드리겠습니다.”

“이 남자가 대낮부터 야한 생각밖에 안 하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다니엘은 귀가 좀 빨개졌지만 그래도 그녀의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갔다.

“정말 제가 해도 되는 거죠?”

“천천히 맞춰 가기로 했잖아요. 싫으면 싫다고 할 거예요. 그러면 멈춰요.”

“어, 어떻게 하는 걸 좋아하실까요? 어떤 게 싫으실 것 같습니까?”

“으음.”

그녀는 잠깐 고민하더니 욕실로 들어갔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다니엘이 처음 말을 꺼낸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그런 걸 하나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일까. 아니다. 인내심을 가지자. 처음의 그녀는 다니엘의 뺨을 때리는 것도 무척 망설였다. 하지만 이제는 능숙하게 그의 뺨을 때렸다. 그를 매도하는 말도, 애원하게 만드는 것도 자유자재였다. 그것은 원래 그녀가 남자를 유혹하는 데 능숙하기 때문이다. 다니엘도 그녀를 유혹하고 싶었다. 다니엘에게 마음이 끌려서, 다니엘을 믿고 싶고, 그래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겨도 안심할 수 있게 만들고 싶었다. 가끔은 괜찮지 않은가? 사람은 자유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모든 걸 의탁하고 싶을 때가 있다. 편하고 마음이 놓일 것이다.

다니엘은 그녀가 욕실에 들어가 있는 사이 쇼핑백에 든 물건들을 꺼내 미학적인 측면을 충분히 고려하여 침대 위에 종류별로, 크기별로 늘어놓았다. 그는 온갖 티클러들을 앞에 두고 서서 마른침을 삼켰다.

‘무엇이 그녀의 마음에 가장 들까?’

역시 저 하얀 솜뭉치가 좋을까? 검은 깃털? 그녀가 얼마나 간지러워할까? 그녀는 민감하고 잘 느껴서 전에 집에 있던 커다란 깃털로 간지럽힐 때도 웃음을 참지 못하셨지. 아아. 그녀의 웃음소리는 너무나 듣기가 좋다. 그녀의 비명소리도.

‘그녀의 XX 안에 넣어도 될까? 그녀가 기뻐할까?’

두근두근두근…! 손아귀에 땀이 잡힌다. 어떻게 하면 그녀가 즐길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녀도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 다니엘이 느끼는 기쁨을. 극상의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온전히 지배당하는 쾌감!

다니엘 스톤하츠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에로틱 망상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조각같이 굳은 채로 서 있었다. 도현이 간단하게 샤워를 끝마치고 머리에 타월을 두르고 바스 타월로 대충 몸의 앞면만 가린 채 욕실에서 나왔다. 다니엘은 기뻤다.

“도현 씨….”

빛이 나는 것 같이 화사한 피부, 촉촉하게 젖어서 너무나 예쁘다. 다 깨물어서 먹어버리고 싶다. 그녀의 온몸에 자신의 이빨 자국을 남기고 싶다. 도현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도현과 만나서 너무나 반가워하고 기뻐한다는 게 보였다. 물론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다려’ 라고 명령에 얌전하게 기다리면서도 맹렬하게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았다.

“이게 다 뭐예요?”

“도현 씨는 어떤 게… 마음에 드십니까? 뭐든 골라보십시오. 도현 씨를 위해서 준비했습니다.”

그는 기대감에 가득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그런 그를 못 말린다는 눈을 보며 바스 타월을 몸에 단단히 둘렀다. 그리고 허리에 양손을 대고 가만히 물건들을 내려다보았다. 다니엘은 그녀의 뒤에서 양손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녀를 만지고 싶었는데 아직 묻지도, 허락을 받지도 못했다. 자신도 미르 킹쉴드처럼 언제든 그녀를 마음대로 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항상 생각했다. 마치 그녀가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만진다면 괜찮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그래, 미르 킹쉴드처럼 자연스럽게, 정말 그녀가 자신의 것처럼,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그냥 슬쩍 엉덩이를….

“뭐해요?”

그의 음흉한 생각이 티가 나기라도 한 것일까? 그녀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다니엘은 재빨리 차렷 자세로 돌아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현은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가 다시 물건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연분홍색 강아지풀처럼 생긴 흐늘흐늘한 티클러를 들어 올렸다.

“이게 예쁘네요.”

다니엘은 콧김을 훅 뿜었다. 드디어 그녀를 교육, 아니, 간지럽힐 수 있게 된 것이다.

*

누차 말하지만 다니엘 스톤하츠는 스스로를 변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뭇 사람들이 자신을 변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역시 그는 변태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상상력이 풍부한 것뿐이다.

검은색 바지, 빳빳한 검은색 셔츠를 입고 기다란 검은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는 그는 언뜻하면 몹시 더워 보일 법도 했지만 새하얗고 창백한 피부는 어쩐지 서늘해 보였다. 눈동자는 빛을 반사한 보랏빛 다이아몬드처럼 반짝거렸다. 생긴 것도, 하고 다니는 것도 평범한 인간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인간다웠다. 그게 다니엘 스톤하츠다.

“각오는 되신 겁니까?”

“네.”

미의 신이 심혈을 기울여 조각한 듯한 그의 아름다운 손에는 무언가 들려 있었다. 그와 똑같이 새카만 색의 가죽 채찍…이 아니라, 그에게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듯 연분홍색 보들보들한 강아지풀 티클러를 들고 있었다. 다니엘은 신신당부했다.

“조금은 참겠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조금은요.”

그녀는 다니엘이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색에 같은 재질의 보들보들한 안대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젖은 머리카락을 보송보송하게 말리고 아이보리색 실크 가운을 입었다. 그리고 손가락에는 오직 다니엘이 준 바이올렛 스타만을 끼고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 언제나처럼 똑바로 다니엘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중간한 곳을 보고 있었다. 다니엘은 다소 긴장한 얼굴로,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땐 여전히 냉철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시작합니다.”

그가 말했다. 그는 침대의 발치에 앉아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살짝 만졌다. 그녀가 움찔했다.

“눈이 안 보인다는 게 생각보다 불안하네요.”

“불안한 감정이 아닙니다. 기대입니다.”

다니엘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그녀에게 속삭이니 그녀는 또 살짝 움찔했다. 근사한 목소리였다. 눈을 가리니 다른 감각들이 더 예리해진다. 그의 목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아름답게 들린다.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 남자인지 떠올리게 했다. 도현은 그가 그 이후로 뭘 하는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말도 걸지 않았다. 몇 초가 지났을까. 아니, 몇 분이나 지난 것 같았다. 자신의 심장 소리를 세지 않으면 얼마나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지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도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다니엘?”

그녀가 다니엘을 불렀다. 다니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요, 다니엘.”

그래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니엘!”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니엘이 말했다.

“제 이름을 부르는 도현 씨는 언제나 보기 좋습니다.”

도현은 살짝 인상을 썼다. 이 남자가 오늘을 벼르고 벼렸구나. 어디부터 그가 시작할지 모르겠다. 대놓고 그녀의 성기를 간지럽히고 싶다고 말했던 그다. 거기부터 덜컥 만져올까 봐 다리가 절로 오므라들었다.

“제 질문에 답해주십시오. 거짓말을 하면 벌을 줄 겁니다.”

“그냥 간지럽히기만 하는 거 아니었어요?”

도현이 물었지만 다니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메일 도미넌트(Male Dominant)로서의 스위치만 커져 있는 모양이었다. 평소에 도현의 말이라면 해든 달이든 따올 것 같이 구는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러자 도현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건방지고 섹시할 것 같다. 도현이 저도 모르게 바로 안대로 손을 뻗자 다니엘이 말했다.

“아직 벗으면 안 됩니다.”

“아.”

도현은 다시 손을 내렸다. 약간의 침묵이 더 이어졌다. 하지만 아까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만큼 불안한 마음은 없어졌다.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 불안감을 일으키곤 한다. 이건 그와의 게임이다. 도현과 다니엘의 사랑이 담긴 에로틱한 놀이. 그 후로 몇 초 더 그 긴장을 이어간 그가 천천히, 근사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도현 씨는 제가 좋으십니까?”

도현은 미소를 지었다.

“좋아해요.”

그녀가 답했다. 그러자 약간 한숨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코끝에 부드러운 털이 닿았다. 그녀는 살짝 기침을 했다. 다니엘이 말했다.

“거짓말입니다.”

“응? 거짓말 아닌데요?”

안대 속에서 도현이 눈을 크게 뜨고 말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올려다보았다. 다니엘이 말했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요’ 라고 말해야죠.”

도현은 풉, 하고 웃었다. 그녀에겐 보이지 않겠지만 다니엘은 진지했다.

‘귀여운데?’

도현은 생각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진심을 담아서 다시 말해보십시오.”

“사랑해요.”

“…….”

그는 잠시의 침묵을 가진 후 대꾸했다.

“저도 사랑합니다, 도현 씨.”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도현은 역시나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어떤 얼굴로 사랑의 말을 전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다니엘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저와 미르 킹쉴드 중 누가 더 좋습니까?”

송선호는 아예 고려 대상에서 제외인 것일까. 도현은 잠깐 그런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둘 다 좋아요.”

“앗!”

도현의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인지 그녀가 대답하자마자 다니엘은 곧바로 그녀의 쇄골을 간지럽혔다. 좋아한다는 대답과는 다르게 이건 벌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잔뜩 든 모양이다.

“꺅! 하하! 아, 잠깐만!! 왜요! 거짓말한 건 아닌데!”

“누가 더 좋냐는 질문이지 않습니까. 대답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그가 다니엘의 손목을 잡으며 몸을 뒤로 빼려고 했다. 그는 손을 바꿔 그녀의 쇄골과 목덜미를 계속 간지럽혔다. 그러자 도현이 꺅 소리를 내며 뒤로 털썩 드러누웠다. 그녀의 늘씬한 허벅지가 드러났다. 다니엘은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침대가 출렁거렸다. 그녀는 너무 웃어서 얼굴이 상기되었다.

“아, 알았어요. 알았어요. 다니엘이 더 좋아요.”

“또 거짓말.”

“꺅!”

그녀가 침대 위에서 몸을 굴리며 다니엘의 손을 피하려고 했다. 다니엘은 그녀의 실크 가운을 끌어내려 그녀의 날개뼈가 드러나게 했다.

“감각에 집중하고 가만히 있어 보십시오.”

“으… 으응…. 너무 간지럽단 말이에요.”

그가 그녀의 오른쪽 날개뼈를 분홍색 강아지풀로 계속하여 살살 간지럽히니 그녀가 신음을 흘렸다. 다니엘은 엎드려 있는 도현의 등 위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그녀의 귓바퀴를 입술로 문질렀다.

“그래서요?”

“하아… 미르 킹쉴드.”

“왜 미르 킹쉴드 같은 게 저보다 더 좋습니까?”

“으응, 하는 짓이 귀엽잖아요.”

“그게 도대체 왜 귀엽습니까? 제가 훨씬 귀엽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더 좋다니까.”

“그건 거짓말입니다.”

“이게 왜 거짓말이에요?”

다니엘은 그녀가 입은 실크 가운 아래로 손을 불쑥 집어넣어 그녀의 엉덩이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저도 어디서든 도현 씨를 마음대로 만지고 싶습니다. 저도 도현 씨에게 귀여움을 받고 싶습니다. 하지만 도현 씨는 그런 걸 킹쉴드에게만 허락하지 다른 남자에게는 허락하지 않지 않습니까.”

“정말. 그런 걸로 질투하지 말아요. 그냥 드러나는 형태가 다른 것뿐이라는 거 다니엘은 알잖아요.”

“그래도 질투 납니다. 도현 씨가 제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만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아. 앗…. 아, 정말. 거짓말 안 했는데. 아. 아아. 다니엘이야말로 거짓말쟁이잖아요!”

그는 도현을 엎드리게 했다. 그가 열심히 망상했던 것처럼 예쁜 실크 가운을 허술하게 걸친 그녀를 엉덩이를 세워 엎드리게 했다. 그녀의 옷깃 사이로 그녀의 예쁜 가슴이 은근슬쩍 드러나고 그녀의 아래는 전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예뻤다. 안대를 한 도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다니엘은 앞섶이 터질 것 같이 부풀었다.

“변태라니까.”

그녀가 그렇게 매도하자 다니엘의 가슴이 쿵덕 하고 한 번 뛰었다. 침대를 짚은 다니엘의 조각 같은 왼손에 핏줄이 파랗게 섰다. 그는 바이올렛 스타를 낀 그녀의 왼손을 살짝 잡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아 내리고 그녀의 목덜미를 티클러로 쓰다듬었다.

“으응….”

그녀가 신음을 흘렸다. 다니엘이 물었다.

“기분 좋으시죠?”

“모르겠어요.”

다니엘은 그녀의 등에 뜨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녀의 날개뼈에 부드럽게 입술을 비볐다. 그가 티클러를 든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주무르자 그녀의 피부가 뜨거워졌다. 그녀는 분명히 즐기고 있었다. 다니엘은 그렇게 믿었다. 티클러로 그녀의 허벅지를 간지럽히자 그녀가 민감하게 몸을 떨었다.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앞으로 도망가려고 했다.

“앗!”

그는 그녀의 왼손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벌써 이렇게 젖었는데 또 대답을 회피하시는군요.”

다니엘은 그녀의 여성기를 손으로 만졌다. 간지러움에만 신경을 쓰다가 남자의 손이 그곳에 닿자 도현은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그는 도현의 살을 가르고 그 가운데를 검지와 중지로 쓰다듬었다. 미끌거렸다.

“으응. 하아, 거짓말.”

“거짓말이 아닙니다.”

다니엘이 그녀의 뺨에 체액을 바르자 그녀가 진저리쳤다. 다니엘은 다이아몬드 반지가 끼워져 있는 그녀의 왼손을 들어 자신의 앞섶을 꾹 눌렀다. 그의 남성기도 묵직하게 질량을 더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하겠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 뭘? 이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티클러가 그녀의 성기에 닿았다. 그것이 클리토리스 근처의 살에 닿는 순간 도현은 깜짝 놀라서 몸을 바로 움츠렸다. 그리고 그가 정성스럽게 간지럽히기 시작하자 그녀는 곧바로 다니엘의 얼굴에 정통으로 팔꿈치를 날렸다.

“윽!”

그는 바로 나가떨어졌고 도현은 오른손으로 안대를 벗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거리며 가운을 바로잡았다.

“못 하겠어….”

도현도 흥분하긴 했지만 역시나 그녀가 섭인 플레이는 그렇게 맞지 않다고 느꼈다. 위축되는 기분 자체가 싫다. 기억해두고 글을 쓸 때 써먹어야겠다. 그녀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눈물이라도 찔끔 난 것일까. 보랏빛 눈동자는 열기를 머금고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예뻤다.

“많이 아파요?”

“…아닙니다.”

“거길 간지럽히는 건 안 되겠어요. 견디기 힘들어요.”

“네….”

그는 살짝 풀이 죽은 것 같았다. 아쉬운 모양이다. 그런 그의 얼굴이 좀 귀여웠다. 그가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간지럽히고 핥아줄 생각이었는데.”

“뭐라구요? 하하.”

그녀가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핥아주는 건 좋은데.”

“그럼 조금만 더 간지럽혀도 되겠습니까? 금방 그건 진짜 너무 순식간이었습니다.”

“음, 그럼.”

도현은 침대 위에 바로 앉은 자세에서 무릎을 세우고 다리를 벌렸다. 다니엘은 침을 꿀꺽 삼키고 그녀의 허리끈을 천천히 풀었다. 그녀의 실크 가운이 저절로 양쪽으로 흘러내렸다. 분홍빛이 도는 예쁜 피부. 다니엘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도현과 눈을 마주쳤다가 그녀의 한쪽 무릎에 입을 맞췄다. 그의 눈이 그녀의 다리 사이에 고정되었다. 매끈한 그녀의 허벅지를 티클러를 든 손으로 쓰다듬었다.

“너무 간지러울 것 같아서 긴장돼요.”

“그 느낌을 즐기는 겁니다.”

“다니엘은 즐겼어요?”

“도현 씨와 함께 있을 때면 항상.”

“흐음, 그러면서 자꾸 바라는 게 많아.”

도현은 그의 귀를 잡아 살짝 흔들었다. 그는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그녀의 눈을 힐끗 보았다가 다시 집중했다. 그가 다리 사이의 접힌 부분을 살짝 티클러로 쓰다듬자 그녀가 인상을 쓰며 ‘으응’ 하고 신음을 흘렸다.

“여긴 괜찮습니까?”

“간지러워요.”

그리고 그는 그녀의 도톰한 대음순을 살짝 쓰다듬었다.

“아!”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도현의 눈치를 빠르게 한 번 봤다가 그녀의 손을 먼저 잽싸게 잡았다. 그녀도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의 여성기 주변으로 둥글게 그렸다. 그녀는 티클러가 클리토리스 근처의 살을 건드리자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다니엘!”

이번엔 그녀의 발이 다니엘의 얼굴로 날아왔다. 고개를 피해 그녀의 발을 피하고 그녀의 다리를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그는 티클러를 옆으로 집어 던지고 달큼한 향이 풀풀 나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아…!”

그의 혀가 그녀의 소음순을 가르고 그 사이를 핥았다. 그녀의 질에서 나오는 체액을 일부러 소리를 내어 빨아먹었다. 그녀가 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천천히 휘감았다. 그녀와 그의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 위력 관계, 물리적인 접촉으로 인해 몸이 긴장과 흥분을 왔다 갔다 했다. 도현은 그의 혀가 클리토리스에 닿자 평소보다 자극이 강하고 기분이 좋아 녹을 듯한 신음을 흘리며 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그의 혀가 팔 자를 그리며 음핵 주변을 자극했다.

“아아. 앗. 아으… 아으으….”

그녀의 발이 갑자기 그의 등을 퍽 하고 쳤다. 다니엘이 윽 하고 신음을 흘리며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입술을 꾹 눌렀다.

“하아….”

굉장히 흥분되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당하면서 이렇게 흥분하다니. 그는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그녀의 다리 사이를 느릿하게 계속 핥았다. 그녀가 금방 갈 것 같았다. 그래서 입술을 뗐다가 그녀의 물기 어린 여성기가 차가워지면 다시 자신의 뜨거운 혀를 댔다. 그녀가 몸을 흠칫흠칫 떨었다.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녀를 빠는 것도 너무나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이렇게 그녀를 아래에 깔고 덮치는 것도 너무나 좋다. 그는 그녀의 다리를 양쪽으로 쫙 벌리게 했다. 도현은 자신의 허벅지에 늘어진 다니엘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다니엘은 그녀의 손짓이 섹시하게 느껴졌다. 마치 느릿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손짓 같다. 그는 그녀의 지휘에 맞춰 혀를 움직였다. 그녀가 만지는 머리카락에 연결된 두피가 찌릿찌릿했다.

“이리 올라와요. 얼굴 보고 싶어.”

그녀가 다니엘의 머리카락을 끌어당겼다. 그녀의 여성기와 그의 예쁜 입술 사이에 찐득찐득한 체액의 실이 연결되었다. 떨어졌다. 그는 자신의 입술을 핥고 위로 올라갔다. 도현은 그와 눈을 마주쳤다. 늘어지는 그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겼다. 도현의 손이 그의 묵직한 앞섶을 만졌다. 다니엘은 인상을 약간 썼다.

“벌써 더럽혔어요? 얼굴만 예쁘면 뭐해.”

“아닙니다. 아직입니다.”

“진짜?”

“만져보십시오.”

그가 자신의 허리띠를 풀었다. 그녀가 웃었다.

“남자가 이렇게 쉽게 허리띠 푸는 거 아니에요. 쉬워 보이게.”

“다른 여자 앞에서는 절대 안 이럽니다.”

“거짓말.”

“정말입니다. 저는 미르 킹쉴드처럼 난봉질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흐응.”

도현은 미소 지으며 그의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의 뺨을 꽉 깨물자 그녀의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그의 볼이 뜨거워졌다.

“아팠어요?”

“조금.”

그의 볼을 깨물자 그의 것이 더 딱딱해졌다. 하여튼 변태다. 도현은 자세를 바꾸어 그를 아래에 깔았다. 그의 바지와 속옷을 좀 더 내리고 팽팽하게 선 그의 남성기 위를 엉덩이로 깔아뭉갰다.

“윽!”

다니엘은 고통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대로 고통과 쾌락을 넘나드는 섹스를 계속했다. 그가 아까 도현의 얼굴에 체액을 바른 것에 대한 복수로 도현은 오르가슴이 올 때 그의 얼굴을 깔고 앉았다.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체액이 전부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묻었다. 그의 붉은 얼굴에 끈적한 자신이 체액이 묻어 흘렀다. 눈을 감고 쾌락을 느끼고 있는 그는 예뻤다. 그의 옷도 전부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를 더럽히는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이만한 남자를 이만큼이나 함부로 취급할 수 있다는 건 기묘한 우월감이 들게 한다.

“기분 좋으셨습니까?”

다니엘이 눈을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도현은 그의 얼굴에 묻은 자신의 체액을 검지로 문질러 미끌미끌한 감촉을 즐겼다.

“뭔가 당하는 것 같다가 이렇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네요. 처음엔 그냥 그랬는데.”

도현이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다니엘은 살짝 볼멘소리를 냈다.

“처음에도 기분 좋으셨으면서.”

“난 다니엘처럼 변태가 아니란 말이에요.”

도현은 다니엘의 벌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그의 완벽한 몸매를 손으로 슥슥 쓰다듬다가 그의 가슴을 주물렀다. 미르만큼 큰 가슴은 아니었지만 손에 적당하게 들어오는 예쁜 가슴이었다. 탄탄한 듯하면서도 푹신푹신해서 촉감이 좋았다. 그의 젖꼭지를 손톱으로 긁었다.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오래도록 오르가슴을 느끼면 그 후로도 노곤노곤하게 기분이 좋다. 여전히 아까의 열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도현은 그의 탄탄한 몸에 몸을 기댄 채 그 느낌을 즐겼다. 다니엘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다음에는 도현 씨의 엉덩이를 때려보고 싶습니다.”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다니엘은 얼른 말을 이었다.

“세게 때릴 건 아닙니다…! 그냥 살짝… 한 대, 아니, 두 대만…. 저… 도현 씨가 글을 쓰는 데도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엉덩이를 맞는 건 생각보다 기분이 좋습니다. 저도 도현 씨가 제 엉덩이를 때려 주셨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다니엘은 혹시나 도현이 싫다고 할까 봐 급한 마음에 두서없이 말했다. 그때 이후로 벌써 4개월이나 흘렀다. 이제 뺨이야 제법 잘 때리는 도현이다. 놀리는 것이야 원래도 잘했고 매도하는 말도 잘했다. 밧줄로 묶는 건 이전에도 사진을 찍으며 해봤기 때문에 금방 해보았다. 무릎을 꿇은 채 그녀에게 허벅지나 자지를 밟히는 건 자주 하는 레퍼토리였다. 뺨 이외의 신체 부위를 때리는 건 잘하지 못했다. 원래는 손으로 때리는 것이 기구를 이용해서 때리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하는데 도현은 따귀를 때리는 것부터 연습해서 그런지 손으로 때리는 것보다 훨씬 아플 스팽킹 도구를 사용하는 건 아직 저어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자 도현은 잠깐 다니엘과 눈을 마주친 채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럼 다니엘부터 해요. 엉덩이 때려줄게요.”

역시 내가 아픈 것보다는 남이 아픈 게 낫지. 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다니엘은 그녀의 말이 기뻤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쉬웠다. 먼저 그녀의 엉덩이를 때려보고 싶었다. 그녀의 통통하고 글래머러스한 엉덩이를 무거운 검은색 패들(Paddle)로 짝 소리가 나게 치는 것이다. 그녀의 하얀 피부가 빨개질 정도로.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엉덩이를 때리는 것도 기대되었다. 아아, 어째서 자신은 둘이 아닐까? 그렇다면 동시에 할 수 있을 텐데. 주저하는 그녀의 엉덩이를 때리면서 재촉하여 다른 자신의 엉덩이를 때리게 만들고 싶다.

“도현 씨라면 분명 잘하시겠죠.”

“음, 송선호 엉덩이는 보일 때마다 자주 때리는데.”

“윽…! 왜 저는 안 때려주십니까? 저도 때려주십시오.”

다니엘이 발끈했다. 그런 그가 웃겨서 도현이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진짜 이상한 데서 화를 낸다니까. 웃겨.”

“앞으로도 제 엉덩이가 보여도 꼭 그렇게 때려주십시오. 송 편집장은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때려주는 겁니까?”

“그게 좋은 거잖아요.”

도현은 그의 코를 검지로 살짝 누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뉘었다. 앞으로 언제 자신의 엉덩이를 때려줄까 안절부절못하는 이 남자를 감상하는 것도 재미일 것이다.

*

“으음~~”

세상에 만고불변의 법칙이 있다면,

“아아~~”

“왜 그래, 미르? 무슨 일 있어?”

그것은 바로 미르 킹쉴드와 같은 남자는 인종과 나이를 불문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만발할 것이라는 법칙이다.

화려한 플래티넘 블론드, 환한 아이스블루 아이, 2미터가 넘는 키, 신이 내린 끝내주는 몸매! 느긋한 성격까지 합쳐 그는 과히 완벽한 수컷이라 칭해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그는 셔츠 단추를 잔뜩 풀어 섹시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뭇 여성들의 손길을 받고 있었다. 게헨-세나 숙소의 휴게실이었다.

웨스트이글 선수들은 저번의 사건 이후로 취재를 피하고 외출도 자제하고 있었다. 자연히 주말에는 GAS가 합숙소로 응원하러 왔다. 휴게실에 비치된 놀잇거리를 가지고 놀고 있는 여자나 카우치에 늘어져 있는 자기 선수들 품에서 아양을 떠는 여자들이 한가득이었다. 미르 킹쉴드의 양쪽에도 당연하다시피 안면이 있는 여자들이 잔뜩 앉아서 그의 시중을 들고 있었지만 그는 컨디션이 안 좋았다.

“아, 짜증 나~. 왜 집에 가면 안 되는 거냐고. 우리 도현이 보고 싶다고.”

그답지 않게 불평불만을 하는 것은 죄다 그 거만한 여자 때문이었다. 제시카는 칵테일 잔에 담긴 올리브를 꺼내 먹으며 물었다.

“아직도 걔랑 잘 지내?”

“엉~”

“그렇게 좋아?”

“엉~”

“그럼 여기 오라고 해.”

“싫어~”

저번에 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여기에 도현을 부르겠는가. 그건 도현을 호랑이 아가리로 끌어들이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진심 어린 사과도 소용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래도 미르 킹쉴드는 도현 킬스버그가 보고 싶었다.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그녀의 기분 좋은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다.

‘아, 진짜 도현이 보고 싶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 누군가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마음. 지금 당장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자꾸 바라고 마는 마음. 이런 건 전부 그녀를 만나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녀는 미르 킹쉴드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이었다. 얼마나 좋은 것인지 설명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마음만 벅차오르는 그런 상대. 분명히 도현도 그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보고 싶은 마음을 견딜 수가 없어 미르는 당장 전화를 걸었다. 전화 연결음이 얼마 가지도 않았다. 상대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앗, 미르!]

“도현아~!”

그녀가 전화를 받자 미르는 바로 카우치의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전화기를 귀에 꽉 댔다. 저도 모르게 우는 소리를 냈다. 가슴이 아팠다. 이런 전화로밖에 만날 수 없는 처지가 싫었다. 도현도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미르, 언제 와요? 보고 싶어요.]

“나도. 나도 너무 보고 싶어.”

[미르가 집에 없으니까 가슴도 같이 텅 비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도현아….”

역시 그녀도 그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가슴이 텅 비는 것만 같다. 그녀를 못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그런 말을 먼저 하니 더 마음이 찡해졌다. 그가 애달픈 표정을 지으며 죽는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시작하자 사정을 잘 모르는 다른 GAS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고 그 꼴을 요새 계속 보았던 다른 동료들은 제각각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대로 시즌 끝날 때까지 못 보는 건 아니겠지? 그렇겠지?”

[설마요…. 그런 거 싫어요.]

“나도 싫어.”

[어떡해요, 그럼? 아예 숙소 밖으로 못 나오는 거예요? 만나러 가는 것도 안 돼요?]

“일단 당분간은…. 여기도 오지 마. 위험해.”

미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용한 곳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아, 정말…. 미르가 없으니까 집 안도 침침해지는 것 같고 컨디션도 안 좋아지는 것 같고.]

그녀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징징거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미르가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미르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안 돼. 아프지 마. 아프면 안 돼.”

[미르랑 지금 포옹 한 번만 하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아요.]

“으~~, 지금 당장 달려가서 안아 주고 싶어!”

[미르~~]

“뽀뽀하고 싶다….”

그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도현은 바로 수화기에 입을 쪽 맞춰주었다.

“도현아… 나도 쪽.”

그러자 도현이 웃었다. 미르도 웃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약간의 소란이 들렸다. 도현이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앗, 미르 잠시만요. 바로 다시 전화할게요.]

“응, 알았어~ 나도 지금 숙소 가는 중.”

숙소로 돌아간 그는 불도 켜지 않고 침대에 털썩 쓰러졌다. 잠깐 통화했다고 그녀가 더 보고 싶었다. 그녀의 허리를 안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에 감은 채 가만히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눈을 마주치고 그녀를 웃게 하고 그렇게 가만히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너무나 행복할 것이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바로 받았다. 미르가 칭얼거리듯 말했다.

“뽀뽀….”

[쪽.]

미르가 그렇게 말하자 도현이 다시 수화기에 대고 입을 맞췄다. 미르는 어쩐지 살짝 기분이 좋아져 웃음소리를 냈다.

“도현아….”

미르 킹쉴드는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섹시한 목소리로 졸랐다.

“하고 싶어.”

[집에도 못 오면서 뭘 해요.]

그녀도 욕구불만인 걸까. 볼멘소리를 냈다. 미르는 자신의 침대 위에서 마구 펄떡펄떡 뛰다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도현아…….”

[뭐… 입고 있어요?]

도현이 물었다. 미르는 침대에 얼굴을 박고 가만히 있다가 디바이스를 멀리하고 자신의 모습을 찍었다. 어쩐지 풀이 죽은 모습이라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녀에게 보냈다. 그녀가 사진을 봤는지 중얼거렸다.

[미르는 정말 섹시해요….]

“정말?”

[네.]

“니 사진도 보내 봐.”

그러자 화면에 영상 통화 신청이 왔다. 미르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오랜만에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뭐야. 벌써 자려고?”

도현이 헐렁한 검은색 박스 티를 입고 있었다. 그녀도 살짝 울상이다. 정말로 자신이 그렇게 보고 싶은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놓인다. 미르는 자신의 팔을 베고 바로 누워 카메라를 멀리 떨어뜨렸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불빛이 전부인 어두운 침실, 셔츠 단추를 잔뜩 풀어 몸을 드러내고 홀로 누워 있는 그는 무방비하고 섹시해 보였다. 도현은 소리 내어 웃었다.

[뭐야. 미르는 잘 놀고 있었어.]

“아니, 우리가 밖에 못 나가니까 다들 와서. 그래도 너 부르긴 싫고….”

[다들 잘 지냈대요?]

“몰라. 잘 지내든가 말든가. 내가 못 지내는데.”

[왜요? 왜 못 지내요?]

“너 보고 싶어서.”

그는 원래도 여자 없이는 못 사는 남자였다. 도현을 만나고, 그는 도현이 없으면 평소와 같을 수가 없었다. 하루나 이틀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면 기쁘게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건 싫었다. 기운이 빠진다.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전에 그녀와 헤어져 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저도 미르 보고 싶어요.]

둘은 언제나처럼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부드럽고 애정이 가득했다. 미르는 상기된 얼굴로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역시 하고 싶다….”

[하하하.]

“넌 하기 싫어?”

[미르랑 하고 싶어요.]

“할까?”

그가 말했다.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눈웃음을 지었다.

*

다니엘 스톤하츠, 아름다운 칼과 같은 남자다. 예쁘고 딱딱하고 날카롭다. 제대로 손잡이를 쥐지 않으면 손을 베는 그런 위험함이 있었다. 송선호, 그는 보이는 그대로 왕자님 같은 남자다. 그는 자신이 권력과 부를 모두 쥔 비싸고 비싼 남자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에반 블랙? 모르겠다. 도현에게 그는 여전히 베일에 싸인 남자다.

그래서 미르 킹쉴드는 특별했다. 모든 것을 숨김없이 드러내도 훌륭한 남자. 만들어진 그대로 아름답고 강한 남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아도 부끄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남자.

“앗, 미르!”

도현은 서로를 견제하며 그녀의 양편을 지키고 있는 남자 둘 사이에서 허리를 벌떡 일으키곤 디바이스를 귀에 바짝 갖다 댔다. 다니엘 스톤하츠와 송선호는 그녀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자 서로 노려보던 것을 멈추고 그녀의 디바이스를 쳐다보았다.

[도현아~!]

“미르, 언제 와요? 보고 싶어요.”

서로의 목소리엔 애정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둘은 그녀가 이런 목소리를 내는 걸 처음 들어보았다. 마치 주변 사람의 이목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염장을 지르는 어린 커플처럼 애정을 잔뜩 담아 그와 통화하고 있었다.

‘왜?! 도대체 왜?! 내가 그 걸레 새끼보다 못한 게 뭐라고! 왜 그 새끼는 그렇게 챙기고 난… 난…! 난 떨어져 있어도 전화 한 번 먼저 안 해주면서! 나도, 나도 항상 보고 싶은데…!’

‘미르 킹쉴드…. 죽인다…. 죽여 버린다…. 이번에는 반드시 죽여 버린다….’

이 태도의 차이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거란 말인가! 두 남자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둘 다 자신이 미르 킹쉴드보다 훨씬 좋은 남자라고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선호는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이고 다니엘은 표정이 어두워지며 암적인 기운을 풍기기 시작했다.

[나도. 나도 너무 보고 싶어.]

“미르가 집에 없으니까 가슴도 같이 텅 비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도현이 가슴 아픈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송선호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전화기를 뺏고 싶었다. 눈이 마주쳤지만 도현은 금방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설마 이대로 시즌 끝날 때까지 못 보는 건 아니겠지? 그렇겠지?]

“설마요…. 그런 거 싫어요.”

[나도 싫어.]

“어떡해요, 그럼? 아예 숙소 밖으로 못 나오는 거예요? 만나러 가는 것도 안 돼요?”

[일단 당분간은…. 여기도 오지 마. 위험해.]

“아, 정말…. 미르가 없으니까 집 안도 침침해지는 것 같고 컨디션도 안 좋아지는 것 같고.”

도현이 그렇게 말하자 다니엘도 그녀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송선호는 부글부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있잖아.”

“저도 있습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징징거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정말로 미르 킹쉴드같은 게 보고 싶은 것인가? 그래서 이러는 것인가. 이건, 이건 마치 좋은 집안에 흠잡을 것 없는 부인이 있는 주제에 근본 없는 첩실이나 창녀에게 더 애정을 주는 남자의 행동이나 다름없다. 어리고 편하고 손쉽다고 본부인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그런! 다른 두 남자 모두 집을 떠나 있을 때가 제법 있었지만 이런 애틋한 통화는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안 돼. 아프지 마. 아프면 안 돼.]

수화기 너머의 그 남자는 굵직한 목소리로 한없이 애교를 떨었다. 도현은 다른 두 남자의 불안한 표정이 안 보였다. 정말 미르가 보고 싶으니까 말이다.

“미르랑 지금 포옹 한 번만 하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아요.”

[으~~, 지금 당장 달려가서 안아 주고 싶어!]

“미르~~”

[뽀뽀하고 싶다….]

그러자 도현은 망설이지도 않고 수화기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러자 미르 킹쉴드도 냅다 수화기에 입을 맞추는 소리가 들렸다. 송선호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 새끼 그거 하나 없다고 니가 아프다고? 거짓말하지 마!”

“도현 씨는 하나도 아프시지 않습니다. 제가 보장할 수 있습니다.”

하도 그들이 손과 옷깃을 끌어당기니 도현이 드디어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대꾸했다.

“뭔가 부족해.”

“내가 부족하다고?! 내가 뭐가 부족한데? 그런 걸레 새끼보단 백 배 나아! 아니, 천 배 나아!”

송선호가 발끈했다. 주변이 시끄러워지자 도현이 한숨을 쉬며 통화 너머의 상대에게 말했다.

“미르 잠시만요. 바로 다시 전화할게요.”

전화를 끊고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양 허리에 손을 얹고 두 남자를 돌아보았다.

“사람이 전화를 하고 있잖아. 근데 왜 이래?”

“그 새끼 하나 없다고 사람이 아프고 그러진 않는다고!”

송선호는 질투가 나서 죽을 것 같은 모양이다. 도현은 똑같이 벌떡 일어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도현은 팔짱을 끼더니 시선을 돌려 로웰과 다른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그녀의 눈빛에 호응했다.

“요새 무릎이 쑤셔요, 작가님.”

“저도 등이 무거워요.”

“전 수족냉증이 도졌어요.”

이것 봐, 라는 눈빛으로 도현이 다시 송선호를 보았다. 송선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돌아보았다가 도현을 다시 보았다. 당황한 어조로 물었다.

“지, 진짜? 어디 아파? 어디가? 왜?”

“도현 씨, 어디 아프시다구요? 정말이십니까?”

다니엘도 벌떡 일어섰다.

“흠….”

도현은 앞에 선 두 남자를 번갈아 보고는 잠깐 숨을 내뱉었다. 로웰과 신재인, 윤지호도 그녀의 뒤로 와서 두 남자를 가만히 보았다. 그들은 서로 알 수 없는 말을 나눴다.

“역시… 선생님.”

“역시 그렇죠, 작가님.”

“뭐가 그렇다는 말씀이십니까?”

다니엘이 물었다. 도현이 대답했다.

“조금… 양기가 부족하달까.”

“뭐?”

송선호가 인상을 썼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치만….”

도현은 애매한 반응을 하며 송선호를 이모저모 살펴보다가 갑자기 와락 껴안았다. 송선호는 짜증 가득한 얼굴에서 약간 의아한 얼굴로 바뀌며 그녀의 허리를 안을까 말까 고민했다. 그 사이 그녀는 다시 뒤로 물러나 떨어졌다. 그녀는 양팔을 벌리며 무언가의 부피를 가늠했다.

“역시 뭔가 부족해.”

“저는 전혀 부족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이 끼어들었다. 도현은 다니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니 도현은 그럼, 하고 그를 껴안았다. 다니엘은 그녀의 포옹에 열렬히 응해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도현은 기분 좋은 얼굴로 떨어졌다.

“그래도 역시 부족해요.”

“…….”

뒤에서 로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랄까. 질량감이 부족하죠. 컵이 작달까.”

“음, 역시. 그 문제일까요?”

“야!!”

송선호가 버럭 화를 냈다.

“내가 뭐가 어때서!!”

“뭐가 어떻다는 건 아닌데….”

도현은 다시 그를 가늠하기 위해 껴안았다. 송선호는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해서 아예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밀어냈다.

“놔!”

“남자가 화가 많다.”

도현이 그렇게 지적했다. 로웰이 흠, 하고 두 남자를 다시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그럼 그 에반 블랙이라는 남자는 어떨 것 같아요?”

사실 그는 넷 중에선 제일 마른 편에 속했다. 도현은 ‘어….’ 하고 의뭉스러운 소리를 내더니 로웰을 돌아보았다.

“왠지 괜찮을지도…?”

뭣? 왜? 컵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며! 송선호와 다니엘이 대조적인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로웰이 ‘아!’ 하며 뭔가 깨달았다는 듯 양팔을 짝 벌렸다.

“금발이 부족한 거군요!”

“앗.”

둘은 눈을 마주쳤다. 로웰은 팔을 벌린 채다. 도현은 로웰을 끌어안았고 그녀도 도현을 마주 끌어안았다. 도현이 말했다.

“진짜 좀… 충전되는 느낌.”

“역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로웰 리의 샛노란 금발 머리가 도현의 뺨을 간지럽혔다. 도현은 그녀와 몸을 조금 떼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전 원래 금발 별로 안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요.”

“사람의 취향이란 바뀔 수 있습니다. 좋은 건 보는 순간 아는 거라고 작가님이 항상 말했잖아요.”

“아.”

“요새 우리에게 금발 미남의 트윙클트윙클, 키라키라, 반짝반짝 래디에이션이 부족했던 겁니다!”

“그런 건가…!”

도현은 뭔가를 깨달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송선호는 어이가 없고, 또 화가 났다.

‘금발…? 고작 머리색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장난해?’

다니엘은 정물 같이 굳어 생각했다.

‘나에게 금발이 어울릴까…. 셀레나한테 물어봐야겠다.’

“앗, 전화 온다. 잠시만요.”

다시 미르 킹쉴드에게 전화가 오자 이번엔 방해를 받기 싫은 모양인지 그녀는 디바이스를 들고 자신의 침실로 쏙 들어가버렸다. 두 남자는 그녀를 잡지 못했다. 침실문을 보며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던 둘은 로웰을 홱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도 남자가 금발은 아니지 않나요, 선생님?!”

“제가 금발이 어울리겠습니까, 선생님!”

*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으니 그걸로 고요해졌다. 도현은 약간 한숨을 쉬었다. 정원에서 들어오는 불빛만이 고즈넉하다. 집 안은 선선하지만 밖은 더울 것이다. 도현과 미르는 그대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통화를 하다가 어느새 영상통화로 전환하고 서로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침대 옆에 있는 조명을 틀고 도현도 침대맡에 기대앉았다.

“폰섹스 같은 거 어쩐지 쑥스러운데.”

[나랑 하는 건데 왜 부끄러워? 더 대단한 것도 막 하면서.]

미르가 말했다. 빛이 나는 것 같이 환한 미소를 짓는 금발 미남이다. 로웰이 언급한 그 래디에이션이라는 것이 화면 너머로 조금 전해지는 느낌이다. 그와 같은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건 언제나 뿌듯한 일이다. 이렇게 잘 따르는 것을 보면 귀엽다. 가끔 여우 짓을 해도 웃음이 나온다. 곁에 두면 언제나 여자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남자다.

“하아.”

도현은 화면 너머로 교태를 부리는 미르를 보며 약간 흥분했다. 미르가 웃었다.

[너도 하고 싶잖아.]

“미르… 목소리가 너무 좋아요.”

[너도…. 옷 벗어봐? 응? 보여줘.]

“흐음.”

[나부터 벗을까?]

그는 금방 셔츠부터 휙 벗었다. 그의 울끈불끈한 상체가 화면에 꽉 찼다. 도현은 아랫입술 끝을 살짝 이로 물며 집중해서 그의 아름다운 몸을 관음했다. 만지지도 않았는데 아래쪽이 긴장되었다. 섹시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게 씨익 웃으며 카메라를 머리 위쪽으로 가져가 얼굴부터 아래까지 전부 화면에 들어오도록 했다. 그는 자신의 바지 버클을 풀고 안에 오른손을 넣었다. 그리고 도현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

“보여줘요.”

도현이 말했다. 그는 시선을 살짝 내렸다가 카메라를 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카메라 앵글을 내리고 자신의 눈 아래쪽만 화면 안에 들어오게 했다. 그러자 마치 그의 몸이 누군가의 만족을 위한 도구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분명 도현 킬스버그였다. 그는 자신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당당하게 꺼냈다. 거짓말 안 하고 정말 팔뚝만 했다. 그가 자신의 입술을 핥는 것이 정말 음란했다. 저 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잘 알았다. 그가 느낄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았다. 예쁘고 당당하고 섹시하다.

‘정말 보고 싶네.’

이런 작은 화면이 아니라 직접 보고 싶었다. 남자가 이렇게 그리운 날이 올 줄이야. 미르 킹쉴드….

[도현아, 만져줘….]

그가 졸랐다. 정말로 아래가 뻐근해졌다. 도현은 그의 흥분한 얼굴을 보고 천천히 짧은 바지 속으로 손을 넣었다. 속옷 위로 자신의 성기를 강하게 쥐었다. 열기가 느껴졌다. 화면 속의 그가 빠르게 자신의 것을 애무하자 도현이 뜨거운 한숨을 쉬며 제지했다.

“천천히. 급하게 하지 마요.”

[하아… 윽…. 알았어….]

그는 가만히 있어도 기운이 사방으로 뻗치는 남자라 자주 기운을 빼줘야 했다. 집에 있을 때면 자주 도현에게 졸랐다. 그와 함께하면 언제나 기분 좋은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어 도현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함께 있을 때면 항상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도록 딱 붙어있곤 했다. 그는 밝고 웃음이 많고 애교도 많은 남자다. 함께 있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아는가.

[으…. 하아…. 도현아….]

그가 자신의 진분홍색에 거대한 남성기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아래위로 천천히 문질렀다. 귀두에 이르러서는 검지와 중지로 자신의 선단을 능숙하게 쓰다듬고 귀두의 날개 아래도 손가락 마디로 눌러 자극했다. 도현은 그걸 보고 소리를 내서 웃었다.

“완전 발랑 까졌어.”

[내가 까져서 좋은 건 너지…. 하.]

열기를 띤 그의 얼굴이 화면에 들어왔다 나갔다 했다. 그가 자꾸 입술을 핥았다. 도현도 붉어진 얼굴로 속옷 위로 음핵을 긁었다. 얇은 천 한 장을 두고 손톱이 긁는 느낌이 자극적이다. 그녀가 말했다.

“자꾸 입술 핥으면 터요….”

[으윽…. 아니… 하아, 젠장. 이런 것도 습관 되는가 보네. 핥고 싶다.]

“뭘?”

[너…. 다 핥고 싶어. 입술도 핥고 싶고 가슴도 핥고 싶고 거기도 핥고 싶어. 거기가 제일 핥고 싶어…. 다 핥아 먹고 싶어.]

“이제 미르도 진짜 잘하고…. 그러니까 빨리 해결하고 집에 와요.”

[아… 그게 마음대로 안 돼. 짜증 나.]

“가슴도 만져봐요, 미르. 얼굴도 같이 보여줘. 다 보이게.”

미르는 도현이 시키는 대로 자신의 애액이 잔뜩 묻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만졌다. 그의 분홍색 젖꼭지가 번들번들해지며 섰다. 글래머러스한 그의 몸이 옆으로 섹시하게 비틀어져 누가 봐도 탐하게 될 것만 같다. 그의 얼굴도 드디어 화면 안에 다 들어왔다. 눈을 감고 느끼고 있는 그의 얼굴이 예쁘다. 그가 눈을 뜨니 환한 회청색 눈동자가 도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도현은 속옷 속으로 손을 넣고 적당하게 젖은 자신의 성기를 중지로 문질렀다.

[아, 도현아…. 윽… 하아…. 아직 멀었어?]

“왜 이래요? 이렇게 빠르지 않으면서.”

[하아, 오랜만이라서…. 목소리 더 들려줘.]

“좋아해요, 미르.”

[나도…. 나도 사랑해. 좋아해. 제일 좋아. 세상에서… 윽, 제일 좋아. 보고 싶어.]

둘은 그렇게 눈빛과 마음을 나누며 섹스했다. 폰섹스는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흥분되었다. 도현의 숨소리가 고조되어가자 미르가 속삭였다.

[기분 좋아? 내 거 느껴져?]

“하아…. 으응…. 미르….”

도현도 빠져들어 손을 빨리 움직였다. 그리고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둘 다 몸을 심하게 떨었다. 그리고 잠시 뒤 화면 속의 서로를 바라보다가 동시에 풋 하고 웃었다.

[하하, 나도 폰섹스는 처음인데 재밌네. 맨날 하자.]

“아, 그래도 하려면 직접 하고 싶어요. 손목 아파.”

[내가 우리 도현이 손목 지켜주게 빨리 가야겠다.]

“하하하.”

그리고는 서로 애정을 담은 목소리로 근황과 재미있는 얘기를 나누며 2시간이 넘게 이야기하였다.

*

이스트드래곤은 첫 경기부터 화제를 모아 그 이후부터 매회 시청률을 갱신하고 있었다. 강자의 여유를 부리며 부상 위험을 최소화하고 슬렁슬렁 이겼던 작년과는 달랐다. 그야말로 속전속결, 디펜스라는 이름이 우습게도 디펜스와 공격형 미드필더 3명까지 여섯 명이서 상대 진영 깊숙이 파고들어 상대편 디펜스를 밀어붙였다. 혹여 공세를 이기지 못한 상대편 미드필드가 이스트드래곤의 오펜스를 노리려 달려가기라도 하면 신태호가 이를 막으며 무쌍을 찍었다. 무려 7분 만에 이긴 경기도 있어 엘 드라카 레코드를 갱신했다. 이스트드래곤의 3연패! 분명 허언이 아닌 것이다.

그에 비해 예전부터 가까운 지리적 위치 때문에 자주 라이벌로 불리던 웨스트이글 클럽은 2128년 초부터 선수 관리 실패로 연이어 악재가 터지고 있었다. 스타 플레이어인 미하엘 로드리게스가 출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엔 다수의 선수들이 연루된 범죄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 상대는 인류를 이끄는 선진 과학자로 유명한 세현 퀸 교수로 엘 드라카 및 웨스트이글의 팬도 다 등을 돌려 비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가다간 누구도 웨스트이글을 이스트드래곤의 라이벌이라 부르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이스트드래곤은 그런 것 따윈 신경 쓴 적도 없을지 모른다.

전년도 챔피언 이스트드래곤은 비기닝 포틴 퍼스트 먼데이전에서 화려하게 개막을 장식할 수 있었으나 예상치 못한 부상자 속출로 도쿄대학병원 VIP 병동에 거의 전세를 내고 말았다. 오늘은 제법 강한 클럽과 속전을 벌였다. 덕분에 또 부상자가 늘었다. 그래도 시즌 때마다 도쿄대학병원에 신세를 질 수 있는 것은 이스트드래곤으로서 굉장한 메리트가 있었다.

“교수님, 저희 애들은 괜찮겠습니까? 시즌 초반인데 벌써부터 이런 부상이라니. 아무래도 마도수술 받으면 애들 컨디션이 안 좋아지곤 하는데 그 부분을 어떻게 좀….”

하네다 스즈키를 비롯한 이스트드래곤 감독진은 백의를 입은 의사들과 발을 맞춰 걸으며 그렇게 물었다. TFC와 관련된 남자들이야 여자를 우습게 알기 짝이 없었지만 이번 웨스트이글 일을 보면 그것도 사람을 가려가며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건 자명했다. 이 의사들을 보라. 눈빛부터 이 남자들을 깔보고 있었다. 겨울에 한 번 봤을 때와는 달리 엄청나게 살이 빠진 도쿄대 의학부 외과 전임교수가 더벅머리를 볼펜 뒤로 긁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 우리도 하는 방식이 있으니까 그렇게 막 바꿀 수 있는 건 아니구요.”

그녀의 이름은 바로 엘리야 민. 세계 최고의 마도의사이자 도쿄대 의학부를 단기간에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의과대학장, 도쿄대학병원 병원장이기까지 했다. 그녀의 젊은 나이를 생각해볼 때, 아직 보수적인 정서가 남아있는 동아시아 국가의 최고 대학병원이라는 것을 감안해볼 때, 아니, 그런 걸 감안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세기의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녀의 일반 진료 대기 리스트가 50년을 넘는다는 소문이 알만 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자했다.

그때 그녀의 뒤에 있던 고참 레지던트가 손을 들었다.

“교수님, 잠시.”

“왜?”

그녀가 이스트드래곤 관계자를 살짝 눈짓하자 민 교수는 바로 음성이 차단되는 쉴드를 쳤다. 말을 거는 구단 관계자의 얼굴은 쳐다보는 척도 하지 않던 그녀는 자신의 학생은 그래도 심드렁하게 돌아보았다.

“소드마스터 수술할 때 부작용 생기는 걸 제가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소드마스터들 자료 모으다 보니 약간 감이 와서요. 약간 실험적이긴 한데 될까요?”

“어떻게?”

민 교수가 차트에서 눈을 떼고 그녀를 돌아보자 고참 레지던트는 열심히 그녀에게 손짓 발짓을 하며 설명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래서 세이브 퀸 프로젝트에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음…. 그래, 한번 해봐라. 근데 의료사고 나면 죽는다. 얘들이 그래도 우리 병원에는 엄청 큰 물주라고.”

“문제가 생기면 바로 불사의 마법을 쓰겠습니다.”

“음. 근데 너 언제 그렇게 마력 많이 모아 놨냐?”

“포션 만들다 만 거 한 번 써봤습니다. 괜찮던데요.”

“그거 안정성 테스트도 제대로 못 해봤는데.”

“뭐 어때요. 우리가 죽을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케이.”

민 교수는 쉴드를 해제했다. 그리고 초조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의사를 보고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

“우리 레이지 선생이 방법이 있답니다. 마력액 문제도 없고 컨디션에도 영향을 안 미칠 수 있다네요.”

“민 교수님께서 집도하시는 것 아닙니까?”

“레이지 선생이 이쪽으로는 더 전문가입니다. 믿고 맡겨주시죠. 알다시피 도쿄대학병원만큼 실력 있는 의사가 많은 병원은 세상에 없습니다.”

“네….”

“사인하시죠.”

전자 문서가 홀로그램으로 앞에 뜨자 스즈키는 한숨을 쉬었다. 인공지능 비서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니 이전 것과 같은 것이다. 그는 사인했다. 개인이 가지는 지식의 차는 인공지능이 아무리 도와준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아, 나도 그냥 물리학이나 계속 공부할 걸 그랬나.’

엘리야 민 교수는 하품을 했다. 또 이 지긋지긋한 걸 해야 하는 것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돈을 많이 벌고 싶어 마도의사로 전향했는데 막상 돈을 잔뜩 벌고 나니 돈보다 권력이 더 중해 보인다. 아아, 총장님이 부럽다. 이런 것들이 근처에나 갈 수 있겠냐. 요새는 세이브 퀸 프로젝트(Save Quinn Project)에만 매진하고 있어서 일반 진료나 수업도 대충대충 할 명분이 섰는데 이스트드래곤 선수들을 관리하는 건 꼼짝 없이 도쿄로 와서 수술에 매진해야 했다. 도쿄대학병원의 큰 수입원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냥 밑에 애들한테 맡겨 놓으려고 했는데 손이 모자란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다. 고작해야 뼈 좀 부러지고 근육이 망가진 거나 고치고 있어야 한다니.

하품을 쩍쩍하며 자리를 옮기고 있는데 스캔실에 있던 선수가 속옷 위에 환자복만 걸치고 나오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모델 같은 몸매,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 조각 같은 얼굴.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어, 스톤하츠.”

심드렁한 얼굴이던 민 교수가 아는 척을 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니 다니엘이 고개를 들었다. 민 교수를 발견하자 그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민 교수님.”

“어, 그래. 리밍이랑 잘 지낸다며.”

“네, 많은 가르침 받고 있습니다.”

“야, 리밍이가 괴롭혀도 그러려니 해라. 걔는 지보다 잘생긴 남자만 보면 그러더라고. 남자들 그런 거 있잖아.”

“네, 알고 있습니다.”

“원래 이쪽이야 여자밖에 없으니까. 정 외로우면 서울에 있는 최 박사랑 좀 친하게 지내. 걘 좀 착하다, 그래도.”

“네, 최 박사님과는 일전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치엔 박사는 잘 있냐? 걔는 뭐 어디 아픈 데는 없고? 담배 좀 그만 피우라고 해라. 저번에 검사지 받아보니까 끊어야겠더라. 몸 챙겨야지, 큰일 할 애가.”

“네, 걱정하신다는 말씀 잘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니가 수고해라. 이런 건 대충대충 하고.”

고분고분해서 좋네. 민 교수는 그의 어깨를 차트로 툭툭 치고 지나갔다. 스즈키 감독이 따라가려다 말고 다니엘에게 당부했다.

“대충 하면 안 된다.”

“네.”

그리고 민 교수를 따라가려다가 다시 그를 돌아보고 또 뭐라고 하려고 했으나 한숨을 짧게 쉬고 가버렸다. 다니엘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잠깐 보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이제 끝입니까? 옷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 있어요, 다니엘.”

다니엘은 셀레나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가 물었다.

“그래서 미용실은 알아봤습니까?”

“…정말로… 염색하려구요?”

“네.”

셀레나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그를 말리려고 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정말 다니엘… 금발은 안 어울릴 거예요. 다니엘은 분위기가 차분하고 멋있어서 발랑 까지게 금발 같은 거 해봤자 이상하기만 할 거예요.”

“머리 색깔을 바꿔보는 어플로 해보니 그렇게까지 이상할 것 같진 않습니다. 어차피 저는 얼굴이 예쁘게 생겼기 때문에 뭘 해도 잘 어울릴 거라고 도현 씨께서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는 셀레나에게서 옷을 받아 갈아입기 시작하며 거울을 보며 얼굴을 이쪽저쪽 살펴보았다. 격한 경기였으니 아무리 오펜스라도 땀을 많이 흘리고 몸을 많이 움직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 상태를 살피더니 중얼거렸다.

“빨리 씻고 팩이라도 올려야겠군요. 피부가 상하겠습니다. 수분도 섭취하고…. 아, 수분을 섭취하는 게 생각보다 힘드네요. 하루에 2L… 제 머리카락도 금발로 탈색하면 많이 상할 테니 미리 대비를 해야겠습니다.”

연인을 만나기 시작한 다니엘 스톤하츠는 자신의 외모를 극진히 관리하기 시작했다. 셀레나를 시켜 온갖 화장품과 미용 기기에 돈을 쏟아 부었다. 거기에 시간만 나면 거울을 쳐다보고 있으니 요새 구단 내에서 돌고 있는 거울 왕자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았다. 그는 씻고 말끔하게 차려입은 뒤 비행차 내에서는 얼굴에 팩을 올리고 누워 있었다. 그는 오늘 잠깐 집으로 돌아가 쉬고 내일 바로 베이징으로 가서 이틀 정도 밀린 공부를 끝내야 했다.

일은 일대로 완벽하게, 어려운 공부도 착실하게 해내고, 집안일이면 집안일에 외모 관리까지 빼놓지 않았다. 팔방미인도 이런 팔방미인이 없을 것이다. 팩을 내리고 거울을 보며 얼굴을 착착 두드려 팩을 흡수시킨 다니엘은 다시 거울을 보며 머리를 바로잡았다. 차는 이웃 나라의 영공으로 들어갔다. 그가 셀레나에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어떻습니까?”

“평소랑 똑같아요.”

셀레나는 그를 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다니엘이 약간 인상을 쓰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지 말고 성의 있게 보십시오.”

“…….”

잘생긴 남자가 자꾸 자기를 잘생겼다고 말해달라고 하는 게 이렇게 성가실지 몰랐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그 답을 읊으라 이거다. 셀레나는 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무표정하지만 그래서 더욱 조각같이 아름다운 남자다.

“잘생겼어요. 다니엘만큼 미남도 세상에 별로 없는데 자꾸 그래요.”

“남자는 피부이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미르 킹쉴드는 저보다 한 살이라도 연하라 뭔가 달라 보이나 봅니다. 피부 때문인가 싶어서 요새 열심히 관리하고 있는데….”

“왜 계속 킹쉴드 선수 얘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미르 킹쉴드랑 다니엘은 완전히 과가 다르다니까요.”

“제가 미르 킹쉴드보다 양기가 부족해 보입니까?”

“야, 양기요?”

셀레나는 그의 말에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남자가 아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진지했다. 셀레나는 미르 킹쉴드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뭔가 반짝!하고 빛이 나는 스타일이긴 했다. 양팔에는 GAS가 가득할 테고…. 셀레나가 중얼거렸다.

“양기보다는… 헤픔의 차이는 있죠.”

“제가 헤퍼져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도현 씨가 좋아하실 것 같진 않은데….”

다니엘이 중얼거렸다. 셀레나는 으음, 하고 약간 고민하더니 대꾸했다.

“미소 아닐까요?”

“미소요?”

“네, 킹쉴드 선수는 잘 웃죠.”

“미소….”

그러자 다시 거울을 뚫어져라 보기 시작한 다니엘은 갑자기 양쪽 입꼬리를 올렸다. 셀레나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솔직히 약간 무서웠다.

집에 도착하니 아직 저녁때가 되기 전이다. 아직 날은 밝고 매미가 시끄럽게 울었다. 다니엘은 비행차가 정원에 내리자 바로 문을 열고 집으로 걸어갔다. 셀레나는 그의 짐을 들고 따라 내렸다. 셀레나는 2층으로 올라가 그의 방에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다니엘은 도현을 찾아 그녀의 침실로 갔다. 욕실에서 콧노래 소리가 들렸다. 다니엘은 욕실 문에 노크를 했다.

“도현 씨.”

“다니엘?”

그러자 도현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물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다니엘.”

그녀가 작은 타월로 몸을 가리고 나왔다. 그녀가 멋쩍게 웃었다.

“깜짝 놀랐잖아요. 금방까지 경기하는 거 TV로 보고 있었는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네요, 다니엘.”

다니엘은 페이스 타월로 몸의 앞면만 간신히 가린 도현의 모습을 저도 모르게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물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카락, 분홍빛이 도는 건강한 하얀 피부, 예쁜 이목구비, 잘록한 허리…. 물에 젖은 그녀는 언제나 너무나 생기 넘치고 아름다웠다. 콧김이 훅 나왔다.

다니엘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다녀왔습니다, 도현 씨.”

“어서 와요.”

그녀도 다니엘의 뺨에 입을 맞췄다. 다니엘은 다시금 콧김을 훅 뿜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손을 움찔거렸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반드시 자연스럽게…!’

연습만이 완벽을 만드는 법. 그는 그녀의 어깨너머로 그녀의 엉덩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굉장히 날씬한 편이었지만 골반이 둥글게 나오고 엉덩이가 동그랗고 예뻤다. 만지고 싶었다. 무자비하게 자신의 얼굴을 깔아뭉개기도 하지만 너무나 예쁜 그녀의 엉덩이…. 그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 근처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그녀를 마음대로 만지고 싶었다. 미르 킹쉴드처럼. 그녀의 허락은 필요 없다는 듯이. 애초에 내 것이었던 것처럼. 마구… 막 주무르는 것이다. 이 엉덩이를! 탱글탱글하게 손에 쥐고…!

“앗, 옷이 다 젖겠어요. 밥은 먹었어요? 밥 같이 먹어요. 지금 송선호가 밥하고 있는데.”

다니엘은 바로 차렷 자세로 돌아갔다. 그가 빠르게 대꾸했다.

“저도 준비하러 가겠습니다. 도현 씨는 편하게 씻으십시오.”

“네, 오랜만에 다니엘 음식 먹고 싶어요. 수고해줘요.”

“네.”

그녀는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욕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사이로 그녀의 엉덩이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다니엘은 잠깐 신음을 흘렸다. 오늘도 못 만졌다….

다니엘은 터덜터덜 부엌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부엌에서 열심히 제 일을 하고 있는 훤칠한 남자가 보였다. 송선호였다. 평생 부엌에 들어와 본 적도 없을 것 같은 남자가 왜 이런 것까지 몸소 하는가. 짜증 난다. 다니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인기척도 내지 않고 그의 곁에 섰다. 그리고 찬장에서 조리 도구를 꺼냈다.

“제가 하겠습니다, 송 편집장님.”

“…….”

도쿄에 있어야 할 새끼가 벌써 여긴 왜 온 것인가? 미친놈. 송선호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가 대꾸했다.

“됐습니다. 들어가서 쉬시죠.”

“그럼 도현 씨 것은 제가 하겠습니다.”

“본인 거나 하시죠. 여력 남으면 다른 사람들 거나 하든가.”

“싫습니다.”

이 새끼가…. 서로 눈빛이 째릿 마주쳤다. 본디 가정이란 어떤 남자가 부엌의 패권을 차지하느냐에 달린 것…! 둘 다 일이면 일, 사랑이면 사랑, 집안일이면 집안일, 미모면 미모! 모두 완벽하게 하고자 하는 알파보이들이었기 때문에 단 한 가지도 놓칠 수가 없었다.

그대로 1시간 뒤, 부스스한 얼굴로 나타난 도현과 로웰, 어시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 다 못 먹을 텐데.”

모던한 검은색 유리 식탁 위가 아주 휘황찬란했다. 도현이 눈을 한 번 비비며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는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쓰며 딴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고 다니엘 스톤하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남기셔도 됩니다.”

“오, 맛있겠다.”

로웰이 가장 먼저 자리에 앉았다.

“내일 웨스트이글은 호주 클럽이랑 붙던데요? 웨스트이글 이기는 데 걸었습니다. 이스트드래곤은 미국 클럽이랑 붙는 거죠? 당연히 이기겠죠?”

로웰은 한창 엘 드라카 복권에 빠져 있었다. 지금까지는 쏠쏠하게 승패를 맞추고 있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저희가 이깁니다.”

“얼마나 걸었어요, 선생님?”

“한 장 걸었어요. 배당은 크지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먹어야죠.”

다들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두 남자는 도현의 식기가 가는 곳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누가 만든 것을 먹느냐에 따라 둘의 희비가 갈렸다.

피망에 달걀을 넣고 예열한 오븐에 넣어 노른자가 촉촉한 반숙으로 익힌 후 싱싱한 쪽파를 썰어 올린 피망 오믈렛을 도현이 잘 먹자 송선호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도리어 슬쩍 한심해졌다.

‘아, 너무 오버했다고.’

그래도 잘 먹는 걸 보니 다음에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도현은 그다음에 온갖 야채로 속을 채운 찜 요리를 작게 잘라먹었다. 색다른 맛이라 감탄을 하면서 먹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역시 도현 씨는 미식을 좋아하시니까 새로운 풍미를 즐기시지.’

다니엘 스톤하츠는 도리어 자긍심을 가지기도 했다. 도현은 본래 배가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너무 맛있어서 과식하고 말았다. 요리를 한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아, 맛있다…. 근데 너무 힘준 거 아니에요, 둘 다?”

송선호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대답했다.

“먹기 싫으면 억지로 먹지 마.”

“도현 씨가 맛있는 것만 드셨으면 했습니다.”

다니엘은 미리 생각이라도 해둔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식사를 다 하고 로웰은 2층으로 올라가서 어시들과 다른 경기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도현은 남자들이 식기 정리를 하는 걸 도왔다. 다니엘은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넣는 도현의 모습을 발견했다. 허리를 숙여 도드라진 그녀의 엉덩이가 예뻤다. 발목까지 오는 헐렁한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였다.

‘도현 씨의 엉덩이를 만지고 싶다. 아니, 하, 한 대만….’

한 대만 허락 없이 때리는 건 어떨까. 아프지 않게, 그, 그냥 찰싹하고 한 번만 저 탱탱한 엉덩이를…. 그렇게 다니엘 스톤하츠가 자신의 엉덩이에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걸 알 리 없는 도현은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다 넣고 허리를 일으켰다.

“다 끝났어?”

“응.”

핸드 타월로 손을 닦던 송선호는 도현의 손도 닦아주었다. 도현이 미소를 지었다.

“사람 시켜서 해도 되는데 요새 자주 요리하네?”

“내가 해준 거 맛있다며.”

“응, 그렇지만. 바쁜데.”

“괜찮아. 이 정도는 다들 하는 거지.”

“남자답다니까.”

도현은 그의 뺨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그는 너무 좋은 티는 안 내려고 노력하며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받쳤다. 역시 엘 드라카에 들어가니 미르 킹쉴드도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다니엘은 원래도 바빴으니 점점 저 남자와 더 사이가 좋아지는 것 같다. 원래도 오래 알던 사이고 말도 편하게 하고…. 도현 씨….

오래된 남자와 새로운 남자는 각기 장단점이 있는 법이다. 오래된 남자는 오래 알아온 만큼 나름의 신뢰감이 쌓인다. 그 남자의 역사를 알아 그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파악할 수 있고 그래서 큰 문제가 없거나 있더라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대비가 가능하다는 건 장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반대로 새로울 것은 없다. 새로운 남자는 일단 눈에 띈다. 호기심이 가고 새롭고 주위가 환기되는 느낌이 든다. 새로운 자극은 사람의 뇌를 활성화시키고 기쁨을 준다. 더 젊고 더 아름다운 남자는 언제나 새로이 등장한다. 예전에 누가 말했듯 새것은 가끔 새 거라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이다. 그래도 오래된 남자만큼의 신뢰감을 쌓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지금 나이대의 남자들이란 원래 한 살 한 살이 다른 법이다. 송선호는 벌써 28살이고 다니엘은 파릇파릇한 24살이었다. 몇 년만 지나봐라.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도현 씨가 저렇게 봐주겠는가. 금방 꺾인다.

“도현 씨.”

다니엘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엉덩이를(!) 한 손으로 잡고 쫘악 끌어당겨 안았다. 송선호의 품에 있던 그녀를 빼앗았다. 도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하하, 웃었다.

“다니엘, 뭐예요.”

“뭐가 말입니까?”

다니엘은 도현에 대한 예의를 깍듯이 지켰기 때문에 미르 같은 지분거림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자주 그의 이름을 거론하며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러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매일 보지 못하니 같이 있을 땐 이렇게 있고 싶습니다.”

다니엘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화가 난 얼굴로 이를 꽉 깨물고 있는 송선호와 눈을 마주쳤다.

“어차피 한가하고 매일 보는 남자 같은 건 질리지 않습니까.”

“후후.”

도현은 다니엘이 이렇게 대담하게 나오는 것이 색다른 모양이었다. 다니엘은 싱크대 선반에 몸을 기대고 그녀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게 했다. 그녀의 양쪽 엉덩이를 보란 듯이 쥐었다. 도현이 그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싫어하시지 않는군…!’

이 감각을 기억하고 있어야겠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공략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디를 어떻게 만지느냐가 아니라 이 자연스러움인 것이다. 흑심을 숨기고 대담하게 움직여야 한다. 다니엘은 그녀의 엉덩이를 강하게 주무르자 그녀가 신음을 흘렸다.

“요새는 엉덩이에 꽂혔어요? 아직 다니엘 엉덩이엔 손도 못 댔는데.”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은근히 쉬운 남자야.”

다니엘은 오른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살짝 칠까 하고 움찔했다. 자신을 그런 식으로 말한 것을 교정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았다. 아직 그 정도의 용기는 없다. 도현은 가까이에서 그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며 말했다.

“다니엘은 정말 안 다치네요. 피곤하지도 않아요?”

몸이 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바쁜 그였다. 엘 드라카, 베이징, 게다가 용역 계약이 끝나지 않은 각종 기업과 정부 기관 프로젝트, CF 및 잡지 촬영 등등 무시무시한 스케쥴을 소화하고 있는 그였다. 거기에 시간 나면 꼬박꼬박 도현에게 와서 이렇게 수발까지. 완벽한 남자다. 다니엘이 답했다.

“저는 한창때니까요.”

“피부 봐. 완전 투명해. 머리카락도 부드러워….”

도현이 그렇게 속삭이며 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 꼬았다. 눈을 마주치며 그렇게 별다른 의미도 없을 것 같은 말을 속삭이는데 분위기가 섹시했다. 송선호가 그들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너 말이야….”

“응?”

도현은 다니엘의 다리에 올라탄 채로 기분이 좋아 그에게 몸을 붙인 채 그의 입맞춤을 받고 있었다. 그가 집중해서 도현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도현은 송선호를 돌아보았다.

“정말로 어리다고 좋아하는 건 아니지?”

“누굴?”

“이놈이나 그놈이나.”

도현은 다시 시선을 돌려 다니엘의 얼굴을 내리뜬 눈길로 가만히 보면서 얼굴을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어리기만 하나. 완전 예쁘고 똑똑하고 음식도 잘하고 힘도 세고 멋있는데. 못하는 게 없어.”

“감사합니다, 도현 씨.”

“그런 건 나도…!”

“그러면 결국 한 살이라도 더 어린 게 좋은 거죠.”

다니엘의 대꾸에 송선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딴 건 다 노력으로 어떻게 되는 거라도 나이는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억울하다…. 그가 상처받은 얼굴을 하자 도현이 또 소리를 내서 웃더니 송선호의 얼굴을 손으로 잡고 끌어당겼다.

“농담도 못해.”

그리고 그의 뺨에 입을 쪽 맞췄다.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긴 채 자신에게 입을 맞추는 그녀는… 송선호의 기분을 상당히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짜증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입술에도 해줘.”

그렇게 말하며 그가 먼저 고개를 끌어당겨 그녀와 입을 깊게 맞췄다. 하여튼 지금은 자신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자고 마음먹기로 했다. 왜 하필이면 세상 많은 여자들 중에 도현 킬스버그인가. 입술을 떼고 그녀와 눈을 마주치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런데도 역시 그녀였다. 멀어지고 싶어도 그렇게 떨어질 수가 없었는데 이제 와서 되겠는가.

“내가 항상 사랑하고 있다는 것만 기억해라…. 정말.”

고분고분한 남자들은 많았지만 송선호가 이러는 걸 보니 또 기분이 좋다. 도현은 웃으며 그의 눈꺼풀 위에도 입을 맞췄다. 그는 컨디션이 상당히 안 좋은 표정으로 거실로 가버렸다. 요새는 다들 말을 제법 잘 들어서 좋다. 한때는 그냥 다들 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딱히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바보 같은 말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그냥 버리기엔 아까운 남자들이라는 게 문제다.

“저 남자는 왜 좋으십니까?”

다니엘이 물었다. 도현이 자신의 품에 안긴 채 거실로 걸어가는 송선호의 뒷모습을 계속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현은 고개를 돌려 그의 셔츠 깃을 보았다. 그의 셔츠 단추를 풀며 대꾸했다.

“가끔 저러는 걸 보면 귀엽달까. 좀 괴롭히고 싶달까.”

도현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다니엘은 기분이 살짝 언짢아졌다. 그는 미르 킹쉴드가 싫었다. 그는 마치 도현이 자신의 것인 것처럼 마음대로 해도 그녀에게 용인받곤 한다. 그는 송선호를 우습게 보았지만 도현이 그를 괴롭히고 싶어한다는 게 보일 때마다 심란했다. 자신을 보면서 그렇게 해줬으면 하고 항상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그녀의 엉덩이를 더 바짝 끌어당겼다. 서로의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다니엘이 말했다.

“질투가 납니다.”

“흐응, 진짜 다니엘 많이 솔직해졌네요.”

도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그의 잘생긴 코끝에 입을 쪽 맞췄다.

“질투하는 걸 싫어하지 않으십니까?”

“질투를 해서 싸우는 건 싫지만, 질투를 안 할 수는 없겠죠. 만약에 다니엘이 다른 여자랑 이렇게 있는 걸 보면 저도 질투할 거예요.”

“정말입니까?!”

“당연하죠. 다니엘 좋아하니까요.”

도현 씨가 질투…. 도현 씨가 질투를 한다니. 다니엘은 얼굴이 살짝 벌게진 채로 모락모락 망상을 하기 시작했다. 누가 좋을까? 주변에 있는 여자들이라고 해봤자….

‘치엔위 박사? 미친놈이라는 소리나 들을 거고. 셀레나? 그래, 셀레나밖에 없지. 어떻게 해도 군소리는 못할 테니까. 살짝 시나리오를 짜볼까?’

다니엘이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지 알 턱이 없는 도현은 다니엘의 어깨를 껴안으며 푹 기댔다.

“도현 씨?”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서요.”

다니엘도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끌어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분이 좋은가. 상대의 향기를 맡으며 눈을 감고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다니엘도 번잡한 생각이 일순 물러나며 마음이 편해졌다.

‘도현 씨….’

그녀의 향기가 마음이 놓이게 했다. 부드럽고 코끝이 간질간질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냄새다. 그는 도현의 목덜미에 입술을 누르며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사이에 감고 문질렀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 순간만큼은 영원히 자신이 그녀의 것이 된 것 같았다. 대업에 대한 야망도, 배움에 대한 열망도, 경쟁자들에 대한 살의도 사라진다.

“이러고 있을 때면 당신과 하나가 된 느낌입니다.”

도현이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청각을 간지럽혔다. 그녀가 대꾸했다.

“기분 좋아요?”

“너무 좋습니다…. 영원히 이렇게 있고 싶습니다.”

서로의 뺨을 부비며 그렇게 계속 있었다. 다니엘은 그녀와 코를 맞대고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었다.

‘다른 놈들이 없으면 더 좋겠지만. 역시 좋다. 도현 씨가 좋아.’

다니엘은 그녀와 깊이 입을 맞췄다.

*

익숙한 남자가 주는 편안함이 있었다. 송선호는 자주 떽떽거렸지만 그것마저도 익숙했고 이제는 놀리는 맛이 있어 자주 괴롭혔더니 어느샌가 모양새가 꽤 그럴듯한 커플이 되었다. 도현은 정말로 그와는 이런 사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도 못 해봤기 때문에 신기했다. 오히려 송선호가 지나가는 말로 그들이 좋은 커플이 될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물었다.

“당연히…! 나 같은 남자랑 너 같은 여잔데 당연히 어울리지. 그걸 몰라서 물어?”

“그래? 그런가?”

“나는 첫눈에 알았다고. 젠장….”

그리고 그는 다소 삐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도현은 눈웃음을 지으며 그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그게 그렇게 억울하셨어?”

“…몰라.”

나른한 일요일 아침, 햇빛은 점점 뜨거워지고 공기는 선선했다. 도현은 송선호와 함께 외출을 했다가 그의 으리으리한 본가에서 퍼져버리고 말았다. 그의 집에 있는 수영장은 마치 로마식 목욕탕 같았다. 그의 부모님은 아직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으셨다. 덕분에 송선호는 무척 바빠진 것 같았지만 책임이 늘어난 만큼 누릴 수 있는 것도 많아진 것인지 그는 이런 성을 가진 왕으로, 도현은 왕비라도 된 기분이었다. 유럽의 궁전을 약간 축소해 놓은 것 같은 하얀 회백색 건물이 아름다웠다.

그를 왕자님 같은 남자라고 지칭하는 건 정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남자랑 함께 있는 여자라는 것만으로도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왕자님 같은 남자라는 것이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사용인들이 그들을 위해 화려한 데코용 과일과 꽃으로 테이블을 장식하고 하몽, 딤섬 등 예쁜 핑거 푸드를 잔뜩 만들어 놓고 값비싼 초콜릿과 젤라또, 샴페인도 있었다.

맛있는 걸 먹으며 잠깐 투닥대다가 또 서로를 끌어안고 정을 나누고 수영을 하면서 장난을 치다가 또 남자가 삐치면 그걸 놀리다가 다시 서로를 끌어안고 사랑을 나누는, 오래된 친구가 사귀게 된 커플 같이 된 둘이었다.

“으응…! 아… 윽. 도현아…. 하아… 거기….”

“아…. 하…. 송선호….”

그리고 송선호는 또 그녀의 아래에 깔려 있었다. 도현은 그의 탱탱하고 큰 물건 위에 앉아 있었다. 송선호가 그녀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잡고 문지르고 도현도 방향을 맞춰 몸을 움직였다. 몇 번 해서 이미 다리 사이가 끈적끈적한 상태로 둘은 입을 맞췄다. 둘 다 땀으로 온몸이 젖었다. 탱탱하고 매끈한 그의 표면에 부드럽고 푹신한 그녀의 것이 만나 비벼졌다. 도현은 자신의 음핵이 그의 기둥과 딱딱한 귀두를 오가며 문지를 때마다 신음을 흘리며 가쁜 숨을 내뱉었다. 송선호는 그녀의 부드러운 점막에 닿아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그는 도현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영원히… 이렇게 있고 싶어. 사랑해…. 도현아, 사랑해….”

“안 그런 척하면서 은근히 밝혀….”

도현이 그의 눈을 보며 웃었다. 송선호는 약간 뜨끔해서 변명하듯 말했다.

“내, 내가 다른 여자를 밝히는 것도 아니고…!”

“매일 야한 생각만 하지? 내가 싫으면 안 한다고 하면서 말이야. 사실은 너도 시도때도없이 하고 싶기만 한 거 아냐?”

도현은 또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좀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는 또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니…! 아니거든!”

“흐응, 비싼 척은 있는 대로 하면서. 사실 집에 돌아가면 내 생각하면서 매일 밤 혼자 하지?”

송선호가 말문이 턱 막혀서 눈만 크게 뜨고 그녀를 보자 도현이 너무나 예쁘게 씨익 웃으며 서로의 코끝을 마주쳤다.

“나쁜 아이네, 우리 선호. 내가 언제 그래도 된다고 했어? 내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몇 번이나 혼자 했어? 무슨 상상 했어? 말해봐.”

“…….”

송선호가 난감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시선을 피하자 도현은 그의 것을 지긋이 자신의 것으로 짓누르며 속삭였다.

“말해봐. 전부 다 말하면 용서해줄게. 언제 처음으로 내 생각하면서 했어?”

송선호는 그녀의 추궁에 심장이 마구 뛰었다. 이렇게 긴장되면 발기가 죽을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등골이 오싹오싹했다.

‘망할….’

“언제 처음으로 내 생각하면서 했냐니까? 기억나잖아. 말해봐.”

“도현아….”

송선호가 그만하라고 그녀의 어깨를 잡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린 그의 귓가에 좋은 목소리로 가만히 속삭였다.

“말해 보라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 좋았다. 들으면 뭐든 그 말대로 해주고 싶을 정도로. 게다가 여전히 그녀에게 눌릴 때마다 짜릿짜릿하게 쾌락이 느껴지는 섹스 중이다. 아니… 사실, 송선호는 그녀에게 이기지 못하게 된 지 오래되었다. 그녀가 송선호의 귓가에 입술을 누를 채 그의 다른 쪽 뺨을 검지로 살살 쓰다듬었다.

“응?”

“그…게….”

송선호는 그녀의 추궁에 밀려 결국 입을 열었다. 그는 눈을 감고 토해내듯 고백했다.

“처음 만난 날….”

“뭐?”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하하하, 하고 소리를 내서 웃었다. 송선호는 창피해서 얼굴이 벌게졌다.

“하려고 한 게 아니라…! 그날 어쩐지 피곤해서 맨션 돌아가자마자 잠들었다가 네 꾸, 꿈꿨단 말이야. 어떡하라고.”

평소에 잘난 척, 있는 척은 다 하는 남자라 이런 얼굴을 하니 도현은 다시 그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확 솟구쳤다. 그녀는 그의 자지를 꾹꾹 누르면서 그를 비난했다.

“아, 기분 나빠. 처음 본 여자를 상대로 그런 걸 한다고? 남자들은 다 그래? 아니지? 너만 그런 거지? 변태.”

“아, 아니… 내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나는 그냥 피곤해서 잠들었는데 니, 니가 꿈에 나와서….”

“내가 언제 내 꿈 꿔도 된다고 했어? 그것도 야한 꿈이었지? 정말. 6년 동안 좋아한다는 게 그런 거였어?”

그가 궁지에 몰린 얼굴로 새빨개져서는 입을 뻐끔거리기만 했다. 도현은 그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면서 집에 가면 항상 나랑 야한 거 하는 꿈 꾸고 혼자 하고. 나 볼 때마다 엄청 음침한 눈으로 보고 그런 거 아니야?”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윽…! 자, 잠깐만 도현아. 내 말 좀… 으윽…. 으응….”

그녀의 성기가 자신의 남성기를 강하고 빠른 박자로 압박하기 시작하자 그가 말을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궁지에 몰린 그의 얼굴은 어쩐지 섹시했다.

“도현아….”

둘 다 클라이맥스에 달했다. 앞서 세 번이나 해서 도현은 자신의 것이 자신의 체액과 상대의 체액으로 잔뜩 젖고 피가 몰려 부풀고 이전보다 더 민감하고 좋아진 걸 느꼈다. 클리토리스에 전해지는 성적인 자극이 이전보다 더 강했다. 기분 좋았다. 더 강하고 짜릿한 오르가슴을 원했다.

“큭… 아… 도현아… 진짜… 윽….”

그가 잔뜩 헐떡거렸다. 금방 갈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가 다시금 도현의 엉덩이를 잡고 강하게 서로의 하반신을 겹쳤다. 입을 맞췄다. 아래도 위로 잔뜩 젖고 미끌거렸다. 운동을 열심히 해서 아름답게 다듬은 그의 육체를 도현은 빵빵한 그의 어깨부터 허리까지 주륵 쓰다듬었다. 그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아… 송선호…. 기분 좋아. 할 것 같아. 갈 것 같아. 아. 아으. 아아앗…!”

도현이 그와의 입맞춤을 멈추고 헐떡거리다가 절정에 이르렀다. 그녀의 얼굴이 야하고 너무나 예뻤다. 송선호는 지금까지 잘 참던 것이 무색하게 바로 심장이 크게 뛰며 사정하고 말았다. 그대로 크게 신음을 흘리며 몇 번에 나누어 희끄무레한 정액이 마구 나왔다. 그녀의 몸이 착 붙어오며 서로 온몸을 맞댔다. 그대로 겹쳐진 듯 찰싹 붙었다. 기분이 너무나 황홀했다. 절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꽉 안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끝까지 서로의 쾌락을 나누었다.

“하아…. 하아.”

그녀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송선호는 그녀의 뺨에 열렬하게 입을 맞췄다.

“도현아…. 도현아.”

너무 좋았다. 그녀가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 아니, 죽으면 안 되지. 그냥 너무 좋다. 너무 좋았다.

“너무 좋아…. 도현아, 사랑해. 응? 사랑해….”

“잠깐… 읍… 알았어.”

“사랑해. 진짜… 세상에서 제일 좋아. 도현아…. 도현아.”

“음… 으음…! 아, 이제 안 해.”

물놀이를 하고 나서 섹스까지 네 번이나 하는 건 확실히 지친다. 도현이 그를 말렸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 마구 입술을 눌렀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마를 맞댄 채 도현이 그의 입술에서 입술을 떼니 길게 타액의 선이 이어졌다 끊어졌다. 눈을 마주치니 쾌락에 지친 두 남녀가 야시시한 눈빛을 나누고 있었다. 살을 맞대고 있는 게 너무나 황홀했다. 약간 애처로운 듯한 그의 얼굴이 섹시했다.

‘기분 좋단 말이야. 은근히 잘 맞아.’

처음 했을 때도 느꼈지만 생각보다 합이 잘 맞았다. 오늘도 네 번이나 하고. 말을 항상 고분고분히 듣는 건 여전히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잘 듣고. 하면 또 잘하고. 귀엽고.

[나랑 결혼하자.]

문득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정말 그게 남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인가.”

“뭐가…?”

그는 여전히 도현의 턱과 뺨과 목덜미에 끊임없이 입을 맞추고 있었다. 평소엔 퉁명스럽지만 조금 끌어당기면 싫은 척해도 끌려오고 이렇게 사랑을 나누면 그는 도현이 너무 좋아서 못 살겠다는 마음이 이렇게 티가 팍팍 났다. 역시 좀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너처럼 하는 거 말이야.”

그는 눈을 감은 채 도현을 만지는 것에 홀딱 빠져서 그녀의 피부를 전부 손으로 쓰다듬고 만지고 입을 자꾸 맞추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너무 열중한 나머지 앉은 자세에서 점점 그녀 쪽으로 확 몸이 기울어져 있었다.

“결혼 말이야.”

도현이 그렇게 말하자 송선호는 핀트를 찾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응, 나랑 결혼해줘.”

“하하하.”

도현은 웃었다. 그녀는 그의 어깨와 목을 안고 그의 냄새를 맡았다. 이렇게 껴안고 있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속삭였다.

“너랑 애 낳고 가끔 싸우면서 지지고 볶고 살고 비슷한 여자들한테 내 남편이 얼마나 나한테 잘하는지 자랑하고 나중에 애 다 크고 은퇴하면 한적하게 둘이서 시간 보내면서 같이 늙어가고?”

“그게… 뭐가 나빠.”

그가 고개를 들어 도현의 얼굴을 보았다.

“아니, 안 나빠.”

좀 시시해서 그렇지. 도현은 송선호의 잘생긴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쪽 입을 맞췄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왜?”

송선호가 약간 불안한 듯 묻자 도현이 답했다.

“사랑해.”

그리고 그녀가 그의 코끝에 쪽 입을 맞췄더니 송선호의 얼굴이 새빨개지며 푸쉬쉬 김이라도 나올 것처럼 되었다. 도현은 양다리로 그의 허리를 꽉 안은 채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며 그의 턱밑을 검지로 살랑살랑 쓰다듬었다.

“자기, 지금 내가 사랑한다고 했는데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사, 사랑해…. 나도 사랑해….”

그가 더듬더듬 말했다. 금방까지 네 번이나 사랑을 나눠 놓고 뭐가 그렇게 쑥스럽고 좋은지, 그 뒤로 그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도현은 다시 하하 웃으며 그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귀여워.”

“…….”

사귀기 전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그의 집도 가보고 그의 부모님도 만나보고 하니 이런 남자랑 하는 결혼이면 정말 손해보다는 이득이 많은 것 아닌가, 싶었는데 역시 안 하는 게 좋겠다. 지금 송선호가 이렇게 귀여운 것도 다 결혼을 안 해서 귀여운 것 아닌가.

‘세상 다른 남자들이랑 다 한다고 해도 얘랑은 안 해야지.’

그랬을 때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역시 그녀는 어느샌가 돔 성향과 S 성향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의 빅 픽처가 빛나는 순간이다.

미르 킹쉴드와 하는 사랑은 어린애들이 하는 연애 같다. 그는 걱정도 없고 구김도 없다. 과거나 사회적 지식이 부족한 면을 감안하더라도 유전자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 정도까지 우월한 남자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그는 그런 남자다. 다니엘 스톤하츠와의 사랑은 이제 점점 기브 앤 테이크 같은 느낌이 난다. 그는 기본적으로 바라는 게 많고 까다롭고 질투가 많다. 그는 자신이 최고가 될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가지고 있는 강함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미래가 기대되었다. 그를 단단히 손에 쥐고 있고 싶어진다.

[나 아직도 사랑해?]

[영원히.]

그러면 그녀에게 사랑을 구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랑을 그만두지도 않겠다는 그 남자는 무엇인가. 도현의 머릿속에 부지불식 간에 그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도현은 인상을 약간 썼다. 성가시다.

‘이제는 그냥 확실한 게 좋아.’

이런 애매하고 불편한 감정이 이제는 싫다. 과거는 쉽사리 부풀려진다. 추억은 미화된다.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인지 그가 그리운 것인지 가끔 구분할 수가 없다. 아니,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딱히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가 그리운 것일까. 그를 만나지 않아도, 그와 함께 있지 않아도 그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게 가끔은 불쾌하다.

도현은 샴페인을 한 모금을 마시고는 송선호에게 말했다.

“아, 어깨 뻐근해.”

“왜? 내가 주물러 줄까?”

“응. 등도 약간 뻐근해. 너무 많이 했나 봐. 너 때문이잖아.”

“…엎드려 봐.”

편안한 선베드를 눕히고 비치 타월을 깔아주자 도현이 그 위에 엎드려 누웠다. 그 옆에 있는 선베드에 앉은 송선호는 손에 오일을 살짝 발라 자신의 손에 고루 묻힌 뒤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피부가 손에 착 감겼다. 그가 해주는 것인데도 호사라는 기분이 들었다.

“으응…. 잘하네.”

“뭐…. 이런 걸 가지고.”

“하여튼 하면 다 잘해.”

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반대쪽으로 뉘이며 눈을 감았다. 그는 그녀의 어깨와 날개뼈 근처를 부드럽게 누르며 그녀의 귀에 쪽 입을 맞췄다.

“시원해?”

“응. 좀 더 세게 해줘.”

“알았어.”

그는 열심히 했다. 이런 것에는 군말이 없다. 송선호라는 남자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아버지 같은 애처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도현과 함께 있는 그를 보고 공처가와 애처가는 한끝 차이라며 경고하곤 했다. 그런데 요새 하는 걸 보면 여자 엉덩이에 깔린 것은 아버지나 그나 비슷했다(요새 아버지… 엄마가 목소리만 좀 높여도 바로 존댓말이다). 그럼 뭐, 어렸을 때 예상과 결국 비슷하게 된 것이니 괜찮은 것 아닌가. 그녀와 함께 있으면 항상 신경이 곤두서는 것도 지금은 웬 말이냐 싶다. 원래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도 절을 하는 법이다.

조금 있다가 송선호가 전문 마사지사를 불러주었다. 도현은 여자 마사지사 두 명에게 마사지를 받기 시작했고 송선호는 그동안 집에서 회사 일을 했다. 남자는 일하고 여자는 그 돈으로 사치스럽게 산다. 이 집에는 그런 법칙이 정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도현은 마사지를 받고 개운한 얼굴로 2층에 있는 송선호의 서재로 갔다.

“알았어. 그건 그대로 해. 금방 서류 보낸 건 확인했어?”

집인데도 말끔하게 양복 차림을 한 그는 일 관련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슈트는 남자의 전투복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남자다. 그는 도현이 들어오는 걸 보고 좀 기다리라는 듯 살짝 눈짓했다. 도현은 그가 앉아있는 책상으로 갔다. 커다랗고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책상을 지나 그의 바로 옆에 섰다. 그리고 그의 책상 위에 엉덩이를 올려 앉고 스윽 그의 바로 눈앞에 앉았다.

“어, 음… 어… 어, 뭐라고? 어. 아니, 잠깐….”

그는 당황했다. 도현은 얇은 나이트가운밖에 안 입고 있었다. 그녀의 왼발이 그의 다리 사이를 턱 하고 밟았다. 도현이 다리를 꼬고 허리를 숙이니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떻게든 전화를 빨리 끝내려고 했다.

“그거…는 내가 회사를 가봐야지 알겠다. 아, 아니, 내가 김 비서한테 전화해보고 바로 연락해줄게. 갑자기 정확한 숫자가 생각이 안 난다.”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도현은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그의 귓가에 후, 하고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도현의 왼발이 슬금슬금 앞으로 전진했다. 그의 얼굴이 뜨끈뜨끈해졌다. 그의 턱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어, 어어어. 어. 어. 알겠어. 어, 아니. 어, 알겠다니까. 5분, 아니, 내가 10분 뒤에 연락할게.”

그는 전화를 확 끊었다. 그리고 한숨 같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10분 가지고 되겠어?”

“도현아….”

“넌 무슨 시간만 나면 일을 해? 웃겨.”

“다 너 먹여 살리려고 하는 거다….”

“하하하.”

그녀가 웃었다. 송선호는 눈을 슬그머니 뜨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내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살 것 같아.”

“응? 왜?”

“다른 사람이랑 전화하고 있는데 이러면 어떡해.”

“그래서 싫어?”

싫지 않아서 더 문제다. 송선호는 그녀의 무릎에 입을 맞췄다.

“더 부드러워졌네?”

“너희 집 마사지사 진짜 잘해. 얼마나 해?”

“글쎄…. 어머니한테 물어봐야 알 것 같은데.”

그는 천천히 그녀의 허벅지에 입을 맞췄다. 도현은 발에 힘을 줬다. 그가 움찔하며 입술을 뗐다.

“비싼 옷인데 실례하면 큰일이잖아.”

“윽.”

그가 인상을 썼다. 섹시하다. 그의 얼굴을 살랑살랑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그녀를 서재에 눕혔다.

“앗.”

“도현아…. 윽. 사랑해. 사랑해.”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송선호는 일렁이는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세상에. 이 책상 위에 그녀를 눕히다니. 송선호가 생각했던 판타지가 하나 실현되는 것 같았다.

“역시 이 집만 오면 내가 귀한 집 아들 꼬드기는 느낌이야.”

도현이 그의 넥타이를 다시 끌어당겼다. 그가 훅 끌려왔다. 그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신음처럼 말했다.

“계속 그래줘.”

“좋아?”

“어….”

그는 그녀에게 넥타이를 잡힌 채 완전히 그녀에게 헤벌레 홀려서는 그녀가 리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중심을 꾸욱 눌렸다. 그녀가 장난스럽게 아앙, 하고 신음을 내더니 그의 잘생긴 뺨을 날름 혀로 핥았다.

“요새 진짜 말 잘 듣네?”

“응…. 사랑한다고 말해줘.”

그가 풀린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기분이 아주 좋았으므로 그의 코에 쪽 입을 맞추면서 속삭였다.

“사랑해~”

그는 확 하고 일렁이는 얼굴을 하더니 그녀를 더 짓눌러 안았다.

“도현아…!”

“아…! 무거워. 무거워! 하하하.”

“사랑해. 진짜 사랑해. 하아… 어떡해. 죽을 것 같아. 너무 좋아. 도현아, 사랑해.”

그는 그녀의 얼굴에 마구 입을 맞췄다. 그가 너무 달려들어서 그를 좀 밀어내려고 몸을 일으키다가 책상 위에 잡다하게 올라와 있던 물건들이 책상 아래로 떨어졌다. 책상 끝으로 좀 밀려난 도현은 책상 밖으로 고개를 기울여 떨어진 것이 무엇인지 살폈다. 책, 필기구, 종이, 디바이스….

떨어지면서 뚜껑이 열린 벨벳 케이스는 도현에게 약간 등을 지고 있는 모습이라 안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하지만 굉장히 눈에 익은 모양새였다.

“저거….”

도현은 몸을 좀 더 일으켰다. 송선호는 그녀의 가운을 아래로 내리고 그녀의 어깨와 피부에 입을 맞추고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도현이 문득 물었다.

“넌…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

“도현 킬스버그….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여자….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 네가 이럴 때마다 너무 섹시해…. 좋아서 죽을 것 같아….”

그는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붉게 상기되어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보는 잘생긴 그의 얼굴이 귀여웠다. 그녀가 좋아서, 좋아서 견딜 수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가 열정을 담아 말했다.

“사랑해….”

그녀는 약간 한숨을 쉬었다. 그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그리고 가운을 추슬러 올렸다.

“잠깐만.”

그를 다시 의자에다 앉히고 그의 얼굴을 한 번 내려다보고 천천히 책상을 돌아 나갔다. 뭘 하려고 하는 것일까? 아, 뭐든. 뭐든 좋다. 뭐든 좋아. 송선호는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세상에 태어나 제일 행복했다고 말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정말, 너무나 좋았다. 전부, 드디어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를 놀리기도 했고 유혹하기도 했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면서 괴롭히기도 했다. 전부 좋았다. 그녀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없이 떨어진 물건들 중에 하나를 집어 올렸다. 송선호는 그것을 멍청하게 보고 있었다. 그녀가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낼 때까지도 정말로 별생각이 없었다.

“…….”

저게 여기 있었나… 라고 생각하자마자 그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그녀는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달린 화려한 목걸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에반….”

도현은 그 길로 송선호를 내버려두고 저택을 나왔다. 그녀는 화가 났다. 이상할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도대체 왜? 다 끝난 것 아닌가? 사랑한다는 말도 진정성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믿지 못 한다기보다는 믿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마음에 자꾸 이상한 찝찝함을 남긴다. 다시 만나서 가까워지는 것도 그렇다고 멀어지는 것도 아니다. 친구같이 지냈다. 하지만 그와 자신이 친구 같은 게 될 수나 있는 사이였나.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이 목걸이는 샤샤 다이아몬드라는 대단한 물건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다이아몬드 순위에도 들 뿐만 아니라 역사도 있었다. 그와 함께 세상의 보물을 찾으러 다닐 때 발견하고 그녀가 너무나 마음에 들어 하니 그는 그것을 선물로 사주었다. 이 다이아몬드에 어울리는 건 자신밖에 없다면서. 그와 헤어지고 그녀가 빚 때문에 힘들어지기 시작할 때 제일 먼저 팔았다.

그가 뭘 하는 남자인지는 처음부터 몰랐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은 즐거웠으니까. 그도 도현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그러니 공평하다. 그는 마치 거울 같아서 그와 함께 있으면 자신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었다. 그게 좋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그에 대해서는 어쩐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남자 같은 게 그녀의 인생이 너무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언짢았을까. 정말 별거 아닌 것으로 헤어졌다. 같이 지내도 미래에 대한 계획 같은 것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다음 여행지에 대해서 얘기하다가 의견이 달랐고 어쩐지 그게 싫었다. 프라하에서 그녀는 서쪽으로 가버렸고 그는 동쪽으로 가버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잡지도 않았다. 잡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마지막이나 되어서야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때까지는 도현의 마음을 다 꿰뚫어 보는 것 같던 그가 그즈음에는 행동하는 것이 이상했다. 그녀를 피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아니, 가끔씩 멈칫했다. 그리고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덜컥 왜 그러냐고 물어보지 못했다. 그냥 물어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던 시절이었다. 거칠 것이 없던 때였다. 그런데 왜 하필 그를 대할 때 그런 어려움이 느껴졌을까. 그리고 그대로 헤어지게 되어버렸을까.

그가 있는 호텔은 알고 있었다. 그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로비에서 직원에게 신경질적으로 그의 행적을 물었다.

“지금 프레지덴션 스위트에 에반 블랙 있어요?”

“네, 계십니다.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도현 킬스버그.”

그리고 그녀는 바로 프레지덴셜 스위트로 올라갔다. 방문 앞에서 벨을 눌렀다. 잠깐 기다려야 하는 것도 어찌나 짜증이 나는지. 그녀는 바닥을 발꿈치로 탁탁 치다가 그가 문을 열자 곧바로 그를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도현아?”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이 주홍빛으로 빛난다. 도현은 화가 난 표정으로 그의 얼굴에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던졌다.

“나랑 뭐 하자는 거야.”

그는 바지에 셔츠만 입은 모양새였다. 어쩐지 흐트러져 있다 싶었더니 침실에서 누가 나왔다.

“에반?”

저쪽도 가운밖에 입고 있지 않았다. 도현은 인상을 팍 찌푸렸고 에반은 속을 모를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가운을 입은 여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누구?”

“연락드릴게요.”

그녀는 에반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가 도현을 보고 싱긋 웃었다. 도현은 인상을 더 썼다. 그녀는 침실로 돌아가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고 에반은 그녀를 배웅했다. 그리고 그는 바닥에 떨어진 목걸이를 주우며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왜 이래.”

“너 같은 거 제일 싫어.”

“…….”

“저 여자는 뭐야?”

“일로 알게 된 여자야. 진지한 사이는 아닌데….”

“몸이라도 팔아서 일해?”

“…….”

“도대체 서울엔 왜 왔어? 나 만나러 왜 왔어? 그건 왜 송선호한테 준 건데!”

“…갑자기 왜 이래, 진짜. 너답지 않아.”

“너야말로 갑자기 찾아오질 않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굴지 않나! 그건 왜 줬냐고. 떠날 땐 잡지도 않은 주제에!”

그는 인상을 썼다. 둘은 오래 사귀었는데도 이렇게 언성을 높이는 싸움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여자들이 그에게 소리를 지르는 일은 많았지만 그중에 도현 킬스버그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울컥했다.

“잡으면 잡혔을 거야? 아니잖아.”

“그래.”

“너는 나 잡았어? 잡을 생각이나 있었어?”

“없었어.”

“그런데 왜 이래?”

“그러니까 넌 왜 이러냐고.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억울할까. 그는 풀어진 단추를 잠그기 시작하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난 그냥…!”

그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등을 돌렸다.

“아니야.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송선호가 주면….”

“내가 바보야? 네가 준 거 눈치 못 챌 줄 알았어?”

“충분히 살 만한 남자잖아. 그냥 받으면 됐잖아.”

“걔가 네가 준 걸 나한테 주겠어?”

“…….”

“걔 성격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일부러 그런 거지? 왜?”

에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은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자신의 쪽으로 돌려세웠다. 인상을 찌푸린 그의 표정이 생소했다. 그는 시선을 가로 피하고 있다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난처하고 초조해하는 것 같았다. 항상 여유롭기만 하던 그였다.

“대답해.”

“…조금 괴롭히고 싶었던 것뿐이야…. 결국 너랑 만나는 거 보니까….”

추궁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도현은 인상을 팍 찌푸리고 그의 눈을 노려보았다. 에반은 그런 그녀의 눈빛이 심장을 콕콕 찌르는 것 같이 느껴졌고 그것이 생소했다. 뱃속이 두근거렸다.

‘이런 건 역시 너뿐이야…. 왜….’

에반 블랙은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손목을 꽉 잡고 있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대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

에반 블랙이라는 남자는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형제들도 주렁주렁 있었다. 가족들은 전부 볼품없었다. 그만 돌연변이처럼 이렇게 태어났다. 그는 부모에게 학대받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외도를 의심했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화를 피하기 위해 그를 외면했다. 형제들도 그를 싫어했다. 가출해서 보육원에 들어갔다.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어렸고 예뻤고 무력했다. 아무도 보호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좋은 선생님도 있었지만 나쁜 선생님도 있었다. 이유 없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도, 이유 없이 그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가 몸집이 커지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때까지 학대는 이어졌다.

대학을 들어갈 때쯤엔 이미 여자를 등쳐먹는 지골로 비슷한 게 되어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을 가지게 되면 스스로를 지킬 수 있고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쯤 같은 보육원을 나온 친구가 돈이 되는 일이 있다며 도와달라고 했다. 학비를 벌고 싶었다. 혼자서 살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이쪽 일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한 번 그렇게 돈을 벌기 시작하니 결국 대학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이야 고상하게 비싼 양복을 빼입고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직접 손을 더럽힐 일 없이 지내지만, 그때는 울고 불며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사람들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내고 돈을 못 갚는 사람들을 협박하고 그들에게 입에 담기도 힘든 저주를 들어가며 일해야 했다. 먼저 일을 하고 있던 친구는 지금까지도 아무렇지 않은데 그는 점점 마음이 깎여갔다. 언젠가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친구가 하던 구멍가게 같은 일을 10년 만에 여기까지 키운 것은 바로 에반이었다. 그는 자신의 나라에 있던 거의 모든 인신담보채권을 다루던 기업체를 인수했고 그를 기반으로 은행을 세우고 스위스로 본사를 옮기고 인신담보채권 외의 상품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때쯤 도현 킬스버그를 만났다.

그에게 여자들이란 너무나 간단했다. 아무리 잘난 여자라도 그랬다. 어리든 나이가 들었든 남자들의 눈을 만족시키기 위해 공을 들여 치장하고 화장을 하고 머리를 하고 향수 냄새를 풍기는 여자들은 전부 다 자신의 약점을 고스란히 타인에게 내보이고 있는 족속들이다. 애정결핍을 드러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이용할 수 있도록 스스로의 몸에 세일가격을 붙여 놓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아무리 비싼 여자라도 고작해야 사랑의 말이나 치켜세워주는 말에 자신을 싸구려로 팔았다. 그들은 남자에게 사랑받는 자신에게 집착했다. 그렇게 한 번 싸구려로 팔리면 결국 처음 가격이 얼마였던 의미가 없어진다. 싸구려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던 때인데도 그녀와 처음 눈이 마주칠 때를 잊을 수가 없었다. 충격적이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니. 공기가 달랐다. 누군가와 제대로 눈을 마주친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눈빛은 환상에 젖어 있지 않았다. 그를 이유 없이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를 있는 그대로 봐주었다. 함께 지내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함께 집을 짓고 배를 만들고 보물을 찾아다니고 무모한 짓을 잔뜩 저지르고…. 자유로웠다. 행복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오래 함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다른 때처럼 미친 듯이 자신에게 매달리는 여자에게서 도망치듯 헤어지거나 할 줄 알았을까. 그녀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데도.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가 이유 없이 더 좋아지고 이유 없이 미워졌다. 그때라서 그런 것인지 그녀라서 그런 것인지. 마지막이 되었을 땐 특별하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말하기도 했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힘들어졌다. 거울을 보면 주먹으로 쳐서 깨버리고 싶었다.

그녀와 헤어지게 되었을 때는 헤어지자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어쩐지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런 말을 할 줄은 자신도 몰랐다. 더 이상 그쪽 일이 하기 싫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정리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세계물리학회가 접촉해왔다. 큰 힘이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래서 그는 모든 걸 정리하고 그녀에게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힘과 손을 잡는 것을 택했다.

아니, 애초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세상의 가장 더러운 곳에 깊게 발을 드리우고 있었고 힘을 손에 쥐고 있지 않으면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아니, 그는 항상 그런 상황에 처해있었다. 스스로를 필사적으로 지키지 않으면 모두가 자신을 뜯어먹으려고 하는 그런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 시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힘을 원했다. 다시는 무력해지고 싶지 않았다. 지금보다도 더, 더….

그녀와 함께 있을 때는 그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는데 어느샌가 함께 있는 것이 괴로웠다. 떨어져 있는 것은 안도감이 드는데도 역시나 괴로웠다. 왜일까. 그도 알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는 강한 여자들만 만났다. 그를 노리개처럼 취급하는 여자들. 마음껏 착취하는 사람들. 그러면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그도 어느샌가 싸구려가 되었다.

강력한 힘을 뒤에 둔 황금이란 더욱 빛나는 법이다. 나름대로 자본이 충실하고 거래처가 확실한 은행이 되었다. 굵직한 파트너들과는 항상 직접 만났다. 그는 역시 인신매매에서 손을 떼고 싶었다. 이 힘도 계속 가지고 있고 싶었다.

KP글로비스와 거래를 시작했을 때는 이미 크고 작은 회사들과도 금전 관계를 맺고 있을 때였다. 처음 송영제를 만났을 때는 바로 송선호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얼굴은 물론이고 분위기나 특유의 오만함까지. 그는 이런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자신에게 물려줄 수 있는 아버지. 지위도 명예도 왕국도. 저 자신만만한 성격까지도. 처음 본 자신에게 대놓고 질투와 적의를 불태우는 그를 우습게 보았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와 만났을 때는 열등감을 느꼈다.

취리히에서 송선호와 만나고 있는 그녀와 재회했을 때는 역시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것은 누가 봐도 아는 법이다. 미련이 남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다시 보는 순간, 그것도 다른 남자와 있는 그녀를 보는 순간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모든 여자들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말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그런 남자가 아니었던 걸까. 순수하게 너무나 반가운 마음과 미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그때보다는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걸까. 왜 그에게 매달리던 그 여자들같이 된 것일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녀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다시 서울에서 만나서 그녀가 송선호뿐만 아니라 다른 남자들까지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어쩐지 통쾌했고 그녀가 자신과 만나던 시절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을 확인했을 때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녀가 빚을 져서 힘들어졌을 때도 자신에게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는 것에는 기분이 복잡했다. 하지만 다시 만나면 여전히 즐거웠다.

서로의 사이에 선이 있었다. 가까워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가까워지는 이상한 선이. 함께 있으면 두려우면서도 좋았다.

“송선호를 왜 괴롭혀? 왜? 내가 걔랑 만나는 게 싫어? 왜?”

“걔도 나 싫어한 거 알잖아. 처음부터 싫었어.”

“왜 이제 와서 이러는데?”

“이제 와서가 아니야.”

에반은 한숨을 쉬었다. 도현은 화를 냈다.

“그런 식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 다물고 있으면 대단해 보일 거라고 착각하나 본데 웃기지 마. 다 말해.”

“넌? 너도 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잖아.”

“물어본 적도 없잖아.”

“네가 그런 거 물어보는 거 싫어하니까 물어보지 않은 것뿐이야.”

“웃기지 마. 물어보지도 않고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알아. 널 아니까.”

서로의 손목을 붙잡은 채였다. 앞서도 말했듯 그들은 사귈 때도 이렇게 싸워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얼굴을 마주하자부터 전쟁이다. 도현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는 그대로 뒤로 밀렸다. 도현은 인상을 쓴 채로 그를 추궁했다.

“내가 널 싫어하는 게 무서워? 내가 널 거절할까 봐 무서워?”

“…아니야.”

“헤어지고 난 뒤로 네가 아무나 만나고 다녔을 거 생각하면 열 받아. 그 여자들 중에 한 명일뿐이야? 내가?”

“그건 나야말로 묻고 싶어…!”

그녀의 말에 에반도 울컥해서 소리쳤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도현은 더 화난 표정으로 그를 밀어붙였다. 그는 낭떠러지 같은 창문에 등을 붙여야 했다.

“그럼 물어봐야 할 것 아냐!! 다가오지도 않고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고!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거 눈에 거슬려! 너랑 내가 이런다고 친구같은 거라도 될 것 같아?”

에반의 숨이 거칠어졌다. 도현은 설명할 수 없는 분노 사이로 어쩐지 유쾌한 기분도 들었다. 그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것은 처음이다. 여유의 가면을 벗은 그는 처음 보았다.

이것으로 맨 얼굴의 그와 처음으로 마주한 것일까. 그의 비취색 눈동자가 이상하게 일렁거렸다. 눈물이라도 흘릴 것만 같다.

“만나고 싶지 않으면 떠날게.”

그가 말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사랑한다며. 보고 싶었다며. 그런 말 하면서 왜 쉽게 떠날 수 있는 것처럼 굴어?”

둘은 처음 보는 순간 운명처럼 서로에게 끌렸다. 누군가 서로를 위해 점 찍어둔 상대처럼. 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속을 알 수 있고 눈만 마주치고 있어도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서로가 있어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헤어지니 함께 있을 때처럼 자유로울 수가 없어졌다. 그런데도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이 길었다. 사랑해도 신뢰하지 못했다.

“네가 전부라고 하면…! 그럼 나도 네 전부가 될 수 있어? 아니, 전부가 아니어도 좋아. 나도 너에게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거야? 넌 운명도 믿지 않고 사랑도 믿지 않잖아!”

“너도 믿지 않잖아!”

“그런데도 너랑 함께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져.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아. 너 때문에 내가 좋아지고 너 때문에 내가 싫어져. 함께 있어도 괴롭고 떨어져도 괴로워. 다시 만나니까 만나는 걸 멈출 수가 없었어. 사랑한다는 말도 그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말할 수가 없었어.”

그가 속내를 토로하며 괴로운 표정을 짓자 도현은 화기가 가시고 일순 가슴이 찌릿하고 아팠다. 그때는 몰랐다. 끝나고 나서야 알았다. 누가 먼저 상대에게 더 다가가지 못했다. 헤어지고 나서는 후회했다. 하지만 둘 다 마치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처럼, 특별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연기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먼저 인정하면 지는 것만 같았을까? 무엇이 두려웠던 것일까. 그 정도로 둘이 함께 한 시간은 완벽했다.

“내가 세상의 전부 같이 구는 남자도 짜증 나지만 그렇지 않은 남자도 겁쟁이 같아서 싫어.”

“…….”

“이제야 널 조금 알 것 같아.”

“…그래서 싫어?”

“남자는 다 겁쟁이야.”

그 시절, 너무나 특별해 보였던 그도 결국 도현의 앞에서는 한 명의 남자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겁쟁이에 비겁하고…. 도현은 그의 손을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그의 셔츠를 끌어당겼다. 그가 고개를 낮추었다. 코가 닿을 듯이 가까웠다.

그녀와 다시 만나면 또 그에게 집착했던 여자들처럼 되는 것이 아닐까. 그녀가 헤어지자고 하며 싫은 눈빛이라도 보내면 칼이라도 들고 찌를 것처럼 추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건 싫은데. 에반은 이 마음을 그녀에게 전해도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분명히 싫어할 것이다.

“사랑해….”

에반은 목걸이를 꽉 쥐고 있던 손으로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너에게도 내가 특별한 존재이고 싶어. 다른 남자들이랑 같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의 목소리가 정말 감미롭게 들렸다. 도현은 가슴이 떨리는 걸 느꼈다. 남자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아마 엄마의 영향일 것이다. 남자가 자신이 휘두르는 존재 이상이 되는 게 싫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에반을 만나기 이전의 남자들은 전부 시시했다.

도현은 드디어 사랑한다는 말을 진심으로 전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좋아하던 아름다운 금발 머리, 하나씩 세곤 하던 짙은 속눈썹, 마주치고 있으면 세상이 전부 멀어지는 비취색 눈동자.

도현도 그의 뺨을 손등으로 살짝 만졌다. 그를 보면 가슴이 뛰는 것이 불쾌했다. 저절로 눈이 그를 따르는 것이 싫다. 그녀는 사랑 같은 것이 필요 없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생각이다.

도현은 입을 열었다.

“넌 특별해.”

도현의 말에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더니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쳤다. 그와 눈을 마주치니 마음이 아득해지며 세상이 멀어진다. 그녀는 그의 눈동자를 하나하나 진지한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그때를 함께한 남자니까.”

에반은 일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뺨을 잡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다이아몬드가, 어느새 어두워진 야경의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우리가 끝까지 좋을 수 있을까?”

“운명이 있다면 나라며.”

“…….”

“그럼 끝까지 가보면 될 것 아냐.”

그녀의 말에 에반은 심장이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왜일까?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둘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은. 그가 바랐던 것은 이것이었을까? 이것이었을까? 그녀와 함께하면 괴롭고도 행복했던 게? 이런 것을 기대했기 때문일까? 그는 태어나서 누구에게도 기대를 걸어본 적이 없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사랑해…. 사랑해.’

그녀를 생각하며 솔직하게 사랑을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서로 입이라도 당장 맞춰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에반은 홀린 듯이 사랑하는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며 무언의 허락을 기다렸다. 도현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서 몸을 뗐다.

“준비하고 집으로 와. 기다릴게.”

그녀가 말했다. 그러자 에반은 눈을 한 번 깜빡하더니 아차,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똑같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알았어.”

그가 대답했다.

<러블리 빗치 3부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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