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s this all about
수중에 여윳돈이 백만 원 있으면 그건 이번 달 카드값을 내면 끝나는 돈이고 천만 원이 있으면 비상금이 되고 1억 원이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고 10억 원이 있으면 사치를 크게 하거나 중병에 걸리지 않는 이상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 수 있으며 100억 원이 있으면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경우가 거의 없게 되며 1,000억 원이 있으면 혼자서 그 돈을 다 쓰고 죽으려고 해도 힘들어지고 1조가 있으면 이미 그 사회에서 대단한 인물이 되어 있을 것이며 10조 원이 있으면 세계에서도 대단한 인물로 알려질 것이고 100조 원이 있으면 나라도 세울 수 있다.
세상에 사는 인간들은 딱 두 종류로 나뉜다. 노동에서 자유로운 사람과 자유롭지 않은 사람. 노동은 신성하지 않다. 노동은 생계의 수단일 뿐이다. 자아가 아무리 비대하더라도 사람은 어차피 먹고살아야 하는 동물이다. 진정한 자유는 선택의 자유로 표현된다.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느냐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그 사람을 표현하는 모든 것이다. 세상에 사는 인간들은 딱 두 종류로 나뉜다. 자신이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선택했는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기사가 떴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들이 누군가 차에서 내리자 재빨리 무릎을 꿇으며 용서를 비는 모습이 사진으로 실려 있었다. 장소는 대학교의 한 건물 앞, 그곳엔 엄청난 인원의 기자들이 와있었다. 검은색으로 도색된 대형 세단에서 내린 사람이 인상을 쓰고 그 모습을 한 번 봤다가 그냥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남자들이 무릎을 꿇고 반성하는 표정을 지으며 읽을거리를 가져와 읽기까지 하는 모습이 퍽이나 생소했다. 평소에는 술 마시고 마약이나 하다가 사고 치는 뉴스가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거나 스포츠연예란에서나 볼 수 있는 남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지성의 상아탑 앞에 있는 그 남자들의 모습이 참 안 어울렸다. 어쨌든 그들은 기자들 앞에서 그 쇼를 한참이나 했다. 곧 학교 경비원들이 우르르 와서 그들을 몰아내려고 했고 경찰도 왔다.
그 쇼를 하고 난 뒤 그들은 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쯤 1심 결과가 나왔다. 어느 정도 합의를 본 것인지 2명은 형을 살게 되었고 나머지는 엄청난 합의금과 벌금을 물어야 했다. 올해 엘 드라카에 출전하는 주전 선수들이 대거 걸려 있는 재판이었기 때문에 일을 빨리 해결하고 싶은 것은 가해자 쪽이었다. 역대 최고 벌금이 나왔다. 성희롱과 성추행, 위협, 협박, 일반 폭행, 기물 손괴 등에서 유죄를 받았고 모든 가해자들에게 일괄적용되었다. 말리지 않은 사람들도 방조죄로 벌금형에 처해졌다. 나라에 내야 하는 벌금도 다 합치면 몇십억 단위에 이르렀기 때문에 합의금도 상당한 금액일 거라고 예상되었지만 추측만 난무할 뿐 합의금의 정확한 액수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재판 결과가 뜨는 날 동시에 세계물리학회 측에서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무고하게 살해당하고(연에 2억 명 이상이 아버지, 남자 형제, 애인, 남편 등에게 살해당한다) 가장 많이 폭력에 희생되는 인종인 여성을 위하여 기금을 마련하여 재단을 출범했다. 22세기가 되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었다.
[그럼 웨스트이글이 이번 엘 드라카를 지속할 수는 있겠네요. 2명의 선수를 잃기는 했지만요.]
[이미 피프쓰 포틴에서 승리를 거머쥔 웨스트이글…. 솔직히 작년보다는 무난한 상대들을 만나왔기 때문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네요.]
[이런 면에 있어서는 확실히 웨스트이글이 이스트드래곤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선수 관리는 TFC 전체를 위해서라도 철저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번의 뼈아픈 교훈을 잊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웨스트이글.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선수들에게 피해를 입으신 피해자분께도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아마 중계위원들도 처음에는 일이 이렇게 크게 될 줄 몰랐던 것이 분명했다. 흔하다면 흔한 사고였기 때문이다. 간혹 그런 것으로 노이즈 마케팅이 되어 시청률이 올라간 적도 있었다. 웨스트이글 쪽으로 편파 중계를 하기도 하는 친(親)웨스트이글 중계진들이었으나 이번 사건은 본인들도 쉴드가 불가능한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어제는 엘 드라카 위원회 및 TFC 연맹 회장도 직접 기자 회견을 열어 사과했을 정도다. 이건 가해자 개개인에 대한 비난도 컸지만 TFC 문화 자체에도 엄청난 비난 여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화면이 전환되고 북소리가 둥둥 울리는 백색 돔이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은 9월 17일 월요일! 피렌체입니다! 피렌체의 <팔라딘> 클럽과 도쿄의 이스트드래곤의 경기! 이야, 팔라딘과 이스트드래곤이 붙네요.]
[둘 다 강호 팀으로 유명하고 친선 경기를 몇 번 한 적은 있는… 아, 친선 경기도 한 적이 없네요. 엘 드라카가 다른 스포츠 경기와는 다르게 전 세계 4,500여 개의 클럽이 동시에 참가하여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이는 무시무시한 스포츠이다 보니 이런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현행 엘 드라카가 개최되기 시작한 지 45년 동안 이스트드래곤은 13회, 팔라딘은 15회 드로우 선데이를 넘겨 본선에 진출했구요. 최고 성적은 이스트드래곤의 작년과 올해의 2연승, 그리고 팔라딘의 2125년도 우승입니다.]
[둘 다 챔피언이죠. 작년 메트로서울 연고의 웨스트이글과 여기 팔라딘의 경기는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팔라딘엔 2125년 우승을 이끈 주역 선수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어서 런던 레드폭스 이후로 최대의 위기였는데요. 솔직히 그때 웨스트이글 홈경기가 아니었으면 힘들긴 했겠죠.]
[그렇죠. 작년 빅토리아 돔 원정 경기, 그러니까 레드폭스 때는 기지를 발휘하여 경기 초반에 디펜스를 두 명이나 꺾고 시작했는데도 150분이 넘는 경기를 해야 했습니다. 어쨌든 웨스트이글이 팔라딘도 용케 이기고 올라갔지만 이스트드래곤에게서 우승컵을 빼앗을 수는 없었죠.]
[팔라딘 대 이스트드래곤, 이스트드래곤 대 팔라딘의 경기는 어떻게 진행될지 기대됩니다.]
피렌체의 여름은 뜨거웠다. 아름다운 도시를 배경으로 피렌체의 백색 돔이 강한 조명으로 빛났다. 경기장은 만석이다. 팔라딘 응원단의 흰색 티셔츠와 희게 칠한 얼굴이 융단처럼 관중석을 뒤덮고 있었다. 유럽 쪽이야말로 훌리건으로는 최고였다. 팔라딘 팬들은 빨간색 응원복을 입은 이스트드래곤 응원단 쪽 관중석 쉴드를 두드리며 야유와 욕설을 던졌다.
[항상 그랬지만 이스트드래곤은 오늘도 여유롭네요. 원정 경기면 좀 긴장할 만도 한데 말이죠.]
남자 캐스터가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선수들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음악을 들으며 몸을 풀고 있는 이스트드래곤 선수들의 표정은 대체로 무표정하거나 아니면 신태호에게 장난을 치는 모습이 간혹 보였다.
[요새 실험적인 전략을 많이 쓴단 말이에요, 이스트드래곤. 강하다고 다른 팀을 우습게 보는 걸까요?]
[어쩐지 서던라이온 같은 느낌도 나구요. 서던라이온도 이상한 포메이션이나 전략 같은 거 많이 쓰지 않습니까.]
[오늘도 속전속결로 나올지 궁금합니다. 팔라딘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닐 텐데요.]
[그리고 올해는 신태호가 비기닝 포틴부터 지금까지 전 경기를 출장하고 있습니다. 시청률이 엄청나네요. 역시 신태호. 비기닝 포틴부터 굉장한 근접전 실력을 과시했죠. 작년이나 재작년은 본선 이후에서나 필살기같이 쓰이던 신태호인데요.]
[신태호 선수, 등 번호 13번. 이제 19살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습니다. 사실 신태호 선수의 체격 조건을 고려해보자면 다 크고 나면 더 무시무시해질 거라는 말이죠.]
[그렇죠? 아직 다 안 큰 거겠죠? 우리… 그러니까 웨스트이글의 미하엘 로드리게스 선수도 170cm의 단신입니다만 그건 단순히 클 때 영양 섭취를 제대로 못 해서 그런 것이지 신태호 선수는 사춘기가 채 지나지 않은 상태로 보이니까요.]
원래 소드마스터들이란 무지막지하게 큰다. 중계위원 중 하나인 전설적인 디펜스 선수였던 이민아 중계위원도 2m의 키에 근육질 신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중에 크는 케이스도 없지는 않죠. 체격 차이는 근접전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태호 선수가 자신보다 덩치 큰 선수들을 상대하는 데 익숙해져 있고 오라와 근력이 강하니 항상 잘 막아냅니다만 상대 선수를 쓰러뜨리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체격도 체격이지만 선수 본인의 의지 문제인 것 같단 말이죠.]
[아아, 그렇네요. 위기에 몰리지 않으면 상대 선수를 때려눕히는 일은 거의 볼 수 없긴 했죠. 비기닝 포틴 이후로는 말 그대로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오펜스진을 지키는 역할만 하고 있는 신태호입니다.]
[저는 신태호 선수가 공격형 미드필더에 제격이라고 항상 생각했는데 말이죠. 스즈키 감독은 무슨 생각일까요?]
[글쎄요.]
그 뒤로 양 팀의 출전 선수와 포메이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예상 전략에 대해서도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스트드래곤, 이스트드래곤, 이스트드래곤.”
로웰은 흥분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들썩거리며 서 있었다. 엘 드라카는 원래 앉아서 보는 경기가 아니기도 했고, 직관을 하러 피렌체까지 왔으니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도현은 그 에반 블랙이라는 남자와 함께 피렌체를 유람하다가 백색 돔으로 와서 로웰 무리와 합류했다. 로웰은 도현의 손을 꽉 잡았다.
“이기겠죠?!”
“이길 거예요. 태호도 있고 우리 다니엘도 있는 걸요.”
“아, 이겨야 됩니다. 이겨라.”
약을 맞은 것 같다. TFC 경기장의 흥분은 그런 효과가 있었다. 도박, 혈투, 승패, 생사는 모두 그런 것이다. 에반은 둘을 물끄러미 보다가 도현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귀에 속삭였다.
“혹시 선생님이랑 잤어?”
에반이 물었다.
“뭐?”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선생님이랑 그런 사이 아니야.”
“그럼 무슨 사인데.”
“무슨 사이로 보이는데?”
“좋은 사이.”
“좋은 사이가 뭔데?”
“둘이서만 좋은, 그런 사이 있잖아.”
“으음~, 그게 뭔데.”
둘은 눈빛을 나누며 말장난을 했다. 저번에 도현이 말했던 것처럼 에반 블랙은 ‘준비’를 하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일주일 정도 걸렸다. 그래도 도현을 만나고 난 이후론 정기적으로 검사를 하곤 했기 때문에 많지는 않았지만 있을 만한 건 있어서 미르 킹쉴드가 했던 것처럼 마도의학의 도움도 살짝 받아야 했다. 돈 없는 사람들은 이런 것도 못 한다.
“누가 이길 것 같아?”
“이스트드래곤.”
“그래? 그럼 난 팔라딘에 걸게.”
“벌칙은?”
“스트립쇼?”
“어디서?”
“여기도 클럽은 있겠지.”
“오케이. 근데 다 벗어?”
“속옷은 봐주자.”
서로 입을 맞추며 그런 말을 하고 있으니 흥분해서 선수들을 보고 있던 로웰이 묘한 눈길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사이가 아주 좋네요? 누가 보면 쭉 사귄 줄?”
그러자 두 사람은 대답 없이 로웰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로웰은 살짝 흠칫했다. 분위기가 섹시하고 요염한 사람들이 그렇게 눈을 마주치고 웃으니 심장이 울렁거렸다. 분명히 다른데도 뭔가 닮았고 뭔가 닮았는데도 묘하게 달랐다.
‘두 사람 다 속눈썹이 짙어서 그럴까? 눈빛 때문인가?’
친밀하고 특별한 시간을 공유한 사람들 특유의, 타인과 단절되고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났다. 미르 킹쉴드가 에너지가 사방으로 발산되는 타입의 금발 미남이라면 이 남자는 모든 것이 그에게 빨려 들어오는 것 같은 타입의 금발 미남이다. 사람을 홀리게 한다.
그런 면이 도현 킬스버그와 조금 닮았다. 하여튼 둘이 같이 있으면 하도 요사스러워서 약간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비싼 보석이 무방비하게 아무 곳에나 굴러다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둘이서 왜 집을 함께 짓고 배를 만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들을 지킬 수 있는 커다랗고 단단한 벽과 천장. 로웰이 처음 도현을 만났을 때 그녀가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떠올려보면 비슷한 사람이 둘 만나서 덜컥 둥지부터 만든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녀는 원래도 수많은 법칙들로 스스로를 지키고 있었고 보아하니 저 남자도 돈과 권력으로 스스로를 지키려고 했던 모양이다.
경기를 시작하기까지 30초가 남았다. 10초가 남았을 때부터 사람들이 다 같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3, 2, 1, 0!!”
곧바로 양 클럽의 디펜스들이 부딪치며 큰 소리가 났다.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
이스트드래곤의 포메이션은 3-3-3으로 오펜스를 하나 더 넣은 공격형 포메이션이었다. 팔라딘은 정석적인 3-4-2의 포메이션을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이스트드래곤의 디펜스는 팔라딘의 디펜스를 잡고 오펜스와 공격형 미드필드는 팔라딘의 간판선수인 미드필더 제라드 라니에리를 노렸다. 그는 오펜스의 공격 마법을 피하다가 이스트드래곤 미드필더 제시 팔마의 클로스라인(Clotheline)을 맞고 땅에 처박혔다. 그의 뒤를 따른 다른 미드필더가 정확하게 타이밍을 맞춰 제라드의 턱밑을 축구공을 차듯 뻥 차서 저 멀리 날려버렸다. 쿠우웅! 그는 관중석 쉴드에 처박혔다. 아웃이었다.
[제라드 라니에리 아웃!! 팔라딘 7번, 럭키 세븐! 제라드 라니에리 아웃!! 세계 랭킹 9위! 아, 팔라딘이 자랑하는 선수인데요. 이스트드래곤의 스피드에 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이스트드래곤 오펜스의 명중률이 기가 막히네요! 다니엘 스톤하츠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팀 선수를 맞추지 않고 저렇게 연계하는 게 쉬운 게 아니거든요.]
팔라딘은 간판선수 몇몇의 컨디션에 좌지우지되는 경향이 있었다. 제라드 라니에리는 2125년 팔라딘 우승의 주역으로 그해 슈퍼 루키였다. 당시 19세. 2125년의 신태호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실력과 더불어 금발 벽안의 잘생긴 외모에 환한 미소와 소년 특유의 생기발랄함으로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솔직히 외모 때문에 대중적 인기는 제라드가 신태호보다 더 많았다.
[오늘의 이스트드래곤은 오펜스가 오펜스가 아니네요. 디펜스가 오펜스고 오펜스가 디펜스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오펜스가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을 하고 있네요. 오펜스 중 둘은 오펜스를 지키는 마법만 쓰고 다니엘 스톤하츠만 상대 팀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자기 팀 디펜스와 미드필드를 지키기 위한 쉴드 마법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보통은 마도사가 소드마스터의 감각이나 스피드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명중시키기 힘든 게 당연한데 수비형 미드필더 뒤로 상대 미드필더가 진출하려고 하면 무지하게 때리네요.]
[루카스 선수가 상대 팀 센터 포워드와 공격형 미드필더 하나를 커버하고 밀란 선수는 미드필더 둘, 나머지는 레프트 포워드 카알 아이젠. 신태호, 오펜스가 방어, 팔마 선수와 베라티 선수 달립니다.]
팔라딘은 제라드를 너무 빨리 잃고 당황한 것이 눈에 보였다. 팔라딘의 감독과 코치들이 라인 가까이 나와 소리를 마구 질렀다. 이민아 중계위원이 경기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말했다.
[이스트드래곤이 경기를 빠르게만 운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 클럽의 약점을 잘 알고 있군요. 2125년 우승 이후로 팔라딘은 제라드 라니에리의 개인기에 많이 의존하는 클럽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걸로 이렇게 의표를 찌를 수 있는 것이 대단합니다. 다들 그들의 약점을 알아도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그렇게 이스트드래곤은 무려 28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팔라딘을 격파했다. 이것도 기록이었다. 팔라딘도 패한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패한 것은 처음이었다. 얼굴을 희게 칠한 피렌체의 팔라딘 팬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눈물 자국을 남겼다. 말도 안 된다며 관중석 쉴드를 가지고 있는 배트나 부지깽이로 치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다. 팔라딘 또한 어마어마한 강팀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절망적인 패배는 처음인 것이다. 우승한 이스트드래곤은 차분했다.
[대단합니다, 이스트드래곤…! 이스트드래곤이 역사를 새로 쓰고 있습니다! 벌써 올 시즌 들어 몇 개의 기록을 세우는 겁니까! 전 경기를 30분 내에 끝내고 있습니다! 설마 본선에서도 이럴 생각인 걸까요!]
[현재의 이스트드래곤은 엘 드라카, 아니, TFC 전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최강의 클럽으로 기록될 겁니다. 무섭습니다, 이스트드래곤. 작년 2연패를 달성했던 때보다도 분명히 더 강합니다. 지금도 다들 세계 최강이라 공공연히 말하는데, 더욱 강해지고 있는 겁니다.]
[엘 드라카 역사상 이런 적은 처음입니다. ‘절대강자는 없다’라는 게 엘 드라카의 법칙 아니었습니까?]
[이대로라면 이스트드래곤의 3연패는 물론이고 내년도….]
중계위원과 캐스터가 흥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당부의 말을 남기며 중계를 마무리했다.
[2128 엘 드라카 피프쓰 포틴! 팔라딘 대 이스트드래곤, 이스트드래곤 대 팔라딘! 이스트드래곤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습니다. 팔라딘이 홈경기에서 이런 압도적인 패배를 당하는 것은 처음이죠? 피렌체에 계신 이스트드래곤 팬들은 훌리건에 유의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RVB 엘 드라카 중계위원 이민아였습니다.]
피렌체에도 응원 원정을 온 타 구단 팬을 위한 박스석이 있었다. 여기까지 원정을 올 정도면 다들 대단한 팬이다. 보통 엘 드라카 경기에서 응원팀이 이기든 지든 팬들은 위험했다. 아니, 그 위험을 불러일으키는 장본인들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쪽수는 대단히 유의미한 것이었다. 일반 관중들은 마도사나 소드마스터처럼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쪽수가 힘이었다. 그런 곳에서 원정 팬이란 항상 소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지어 이스트드래곤 관계자들마저 이탈리아군의 호위를 받아 숙소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싸우자! 이기자! 죽이자! 드래곤! 이스트드래곤!!”
로웰은 백색 돔을 나오며 기분이 좋아 그렇게 외쳤다. 이스트드래곤 팬들은 함께 움직이고 있었고 돔을 빠져나오니 경찰들도 많이 보였다. 도현은 사람들을 따라 나오다가 사람들 등쌀에 밀려 뒤쪽으로 밀리고 말았다. 엘 드라카가 볼 때는 재미있어도 이런 게 문제다. 사람들에게서 짐승 같은 냄새가 났다. 아예 뒤쪽으로 빠진 도현은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걷지 않아도 되어 한숨을 돌렸지만 이미 한밤중처럼 어두워진 백색 돔 밖은 역시나 불온한 분위기가 진동을 했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도현과 함께 이스트드래곤 팬 무리를 따라가고 있던 웬 젊은, 아니, 고작해야 고등학생쯤이나 되었을 것 같은 남자들이 도현에게 접근했다. 같은 붉은 티셔츠를 입은 이스트드래곤 팬들이었다.
“누나, 설마 혼자 왔어?”
“와, 개예쁘다. 킥킥.”
“우리랑 놀자.”
그들은 하나같이 눈알이 번들번들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들의 눈에 도현이 어떻게 보일지는 뻔했다. ‘이런 위험한 곳’에서 겁 없이 ‘혼자’다니는, ‘무슨 짓을 당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손쉬운 먹잇감’. 도현은 분명히 배트를 챙겨왔지만 아까 떠밀려오면서 그걸 에반에게 맡겼다. 낭패다.
웃으면서 비굴하게 굴어도 빠져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고, 공격적으로 방어해도 빌미를 주는 게 되어버리고, 도망가려고 해도 도망갈 수도 없고, 도와주려고 하는 인간도 없다. 도현은 그들을 무시하고 일행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중 하나에게 손목을 잡혔다.
“놔.”
“이럴 때는 이렇게도 놀 줄 알아야지.”
“분위기를 왜 이렇게 못 읽어?”
“예뻐서 칭찬하는 건데.”
분명히 도현보다 어린 놈들이었지만 그런 식으로 가르치려 들었다. 도현은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놀면 좋은 것은 가해자뿐이다. 이렇게 어린 놈들도 이런 식으로 피해자를 세뇌하는 것이다. 이런 훌리건 속에서도 같은 팀을 응원한다고 동질감을 느끼는 건 남자들끼리만 하는 얘기다. 그런 남자들에게는 이쪽 팀이든 저쪽 팀이든 여자란 강간의 대상일 뿐이다. 도현은 점점 그들에게 둘러싸였다. 진짜 큰일 나겠다. 도현은 손목을 비틀어 빼려고 했다.
“놔!!”
“작가님!!”
그때 로웰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소리쳤다.
“선생님…!!”
그러자 이 양아치 같은 남고생들의 뒷덜미를 누군가 콱 잡았다. 사라랑 퀸이었다.
“아, 이 좆만 한 것들은 뭐야?”
로웰은 도현을 잡아 끌어안았다. 그들을 보고 그 남고생들은 기뻐했다.
“뭐야? 여자들끼리만 왔네? 완전 노다지다.”
“어디로 갈까?”
“그래, 어둑한 곳이 좋잖아.”
도현을 주변을 살폈다. 같이 온 사람들 중에 배트를 쥔 사람들은 조금 떨어져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사라랑 퀸이 로웰과 함께 맨손으로 와서 그들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 양아치 남고생들은 8명 정도로 본인들이 다수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도현, 사라, 퀸, 로웰의 어깨에 손을 얹고 어둑한 골목으로 시시덕거리면서 갔다. 그리고 그들 몫의 배트까지 양손에 쥔 로웰의 이스트드래곤 팬 친구들과 도현을 따라온 지니호 크루 몇 명이 따라 들어갔다. 다 합치면 20명이 넘었다.
“요새 남학생들이 왜 이렇게 싹수가 노랗냐. 학생이면 공부나 처할 것이지.”
퀸은 뒤에서 배트를 건네받으며 디바이스를 껐다. 아마 이 양아치 남고생들도 디바이스를 켜놓진 않았을 것이다. 이럴 목적으로 따로 떨어진 여자를 물색하고 있었다는 것에 손가락도 걸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디바이스의 전원을 껐다. 그리고 도현도 화가 난 얼굴로 로웰에게서 배트를 건네받았다. 이런 일은 지금까지 살면서 크게든 작게든 항상 있었다. 화가 났다.
“내가 예쁘게 태어나고 싶어서 예쁘게 태어난 것도 아닌데!”
“안 예쁘게 태어났으면 그렇다고 또 만만하게 봐! 이 개좆 같은 것들이!”
로웰도 소리쳤다. 로웰은 손에 든 배트를 휘리릭 돌렸다. 그리고 맨 처음 도현의 손목을 잡고 끌고 갔던 놈의 관자놀이를 날렸다. 그렇게 그 8명의 남고생에게 참교육을 시켰다.
“고기 떼다 팔면 만원도 안 나올 것들이.”
사라가 침을 퉤 뱉으려다가 삼켰다. 아, 침 뱉으면 증거 남지. 얼마나 때렸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들 쓰러져서 뻗어 있었다. 도현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자신이 때려눕힌 훌륭한 범죄 꿈나무를 보다가 로웰을 휙 돌아보았다.
“이거 기분 좋네요.”
“그렇죠? 이게 바로 정의구현이라니까요. 이걸로 얘들한테 앞으로 강간당할 수많은 여자애들을 구해주는 거라구요.”
본인들도 약자를 손쉬운 먹잇감 정도로 생각했으면서 그들이 자신을 봐주길 기대하진 말아야 할 것이다.
“빨리 갑시다.”
퀸은 자신의 배트를 그들의 옷에 슥슥 닦아내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들도 대충 처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도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에반은 어디 갔어요?”
“차 가지러 보냈는데요.”
그리고 광장의 가운데로 걸어가니 차가 여러 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훤칠한 키에 예쁘게 생긴 그 남자가 보이는데…. 그 남자도 둘러싸여 있었다. 스킨헤드에 덩치가 울끈불끈하고 무지개색 바디페인팅을 한 남자들과 드랙킹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에게도 이런 이벤트는 스트레이트를 손쉽게(?) 따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인 모양이다. 그는 차에 타려고 시도했지만 불가능했다. 도현이 그걸 보고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상류층 파티가 아니고서야 사람들 많은 곳은 정말….”
그들은 우르르 몰려갔다. 다들 손에 배트를 하나씩 쥐고 있다 보니 스킨헤드와 드랙킹들이 깜짝 놀라 슬금슬금 옆으로 밀려났다. 로웰과 다른 사람들은 배트로 그들의 더러운 옷차림을 꾹꾹 누르며 밀었다. 그리고 도현은 그 가운데 있던 그 남자의 손을 잡고 끌어냈다. 그는 정색하고 있다가 도현의 얼굴을 보자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니가 안 보여서 찾으러 갔다가….”
“소리를 지르든가, 반항을 하든가 해야 할 거 아냐.”
도현이 말했다. 에반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도현을 살폈다.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아, 뭐. 선생님이 구하러 와주셨어.”
예전엔 이런 일이 있으면 기분이 아주 더러웠는데 오늘은 상쾌했다. 오늘만큼 확실하게 복수를 할 수 있었던 날은 처음이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가만히 있던 사람을 건드렸으면 그 응벌을 확실히 받아야 하는 법이다. 곱절로 되갚아 줘야 피해자가 그나마 마음이 풀리는 법이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차에 하나씩 들어가 타는 여자들의 배트를 살펴보았다. 어디다 대충 닦은 티가 나는 사용 후(?) 배트들이었다. 에반의 표정이 굳었다.
“왜 그래?”
도현이 그에게 물었다. 그는 도현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 시선을 멀리 돌렸다.
“아니… 피는 좀.”
도현이 차에 타고 뒤를 따라 에반이 탔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 사람 때려본 적 없어?”
“아니….”
에반은 그렇게 말을 멈추려다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대꾸했다.
“너무 많아서 싫은 거야.”
차는 숙소로 출발했다. 이런 말은 처음이다. 도현은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보면서 고급 렌터카에 비치된 향기가 나는 물티슈로 손을 닦았다.
2년이나 만난 남자가 뭐 하는 남자인지도 몰랐다니. 사실 원래의 도현이라면 절대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떤 짓을 하던 놈팽이일 줄 알고 그냥 만난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그는 그런 게 하나도 상관없다는 듯이 만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저 첫눈에 끌려서…. 그래서 역시 좋은 건 첫눈에 알아보는 것이라고 항상 생각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자신에 대해 무엇도 말한 적이 없는 남자였다는 걸 금방 그 말로 실감했다.
그걸 본인도 알고 있는 모양인지 도현의 시선을 피한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도현은 흐응, 하고 미소를 띤 채 그의 다리를 발로 툭 건드렸다. 에반이 돌아보았다.
“이리 와.”
“…….”
그녀가 많이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묘하게 말에 힘이 더 생긴 걸 느낀다. 이렇게 명령하듯 말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에반은 그녀에게 조금 더 붙어서 앉았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도현이 그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왠지… 좋은데. 이런 것도.”
“뭐가?”
“솔직한 거.”
역시 남자가 틈도 보이고 해야지 매력적인 모양이다. 그가 약해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벽이 무너졌달까. 옛날의 그가 얼마나 비싸게 굴었는가. 그는 도현에게 있어서 완벽한 남자를 연기했다. 그는 도현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자신의 허벅지 위에 있는 그녀와 손가락을 얽었다.
“네가 좋으면 나도 좋지만….”
그렇게 말하고 에반은 평소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도현이 그의 허벅지를 손끝으로 긁으며 속삭였다.
“나중에 클럽에서 스트립쇼 시키면 또 아까 같은 일 생기는 거 아냐?”
“설마.”
에반은 잠깐 인상을 쓰며 질색이라는 얼굴을 했다. 이런 얼굴도 처음이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도현은 그와 코를 비비며 속삭였다.
“너랑 누가 이기고 지는지 경주하는 것도 재미있었는데. 이런 너도 좋네. 좀 더 말해봐. 알고 싶으니까.”
“알았어….”
에반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그렇게 답했다. 어느새 에반의 위에 도현이 올라탔다. 서로 입을 맞추며 끌어안고 예전에 못다 한 이야기를 계속하는데 갑자기 렌터카가 급정거했다. 에반은 앞 좌석을 손으로 짚고 도현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밖에서 소란이 크게 들리며 사람들이 차창 밖으로 마구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훌리건이 난동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도현과 에반은 그것을 보다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역시 엘 드라카는 집에서 보는 게 좋을까?”
“홈경기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원정 경기는 확실히 위험하네.”
“응.”
일탈도 가끔 재미있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자신에게 맞고 안 맞고는 있는 법이다. 둘 다 일부러 위험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타입이 아니었다. 눈에 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잃을 게 없거나 구태여 스릴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다.
“선생님 대단하지 않아? 생각이 자유로운 사람이라니까.”
“그러게.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는 없는 타입이었어.”
“그러면서 책임감도 대단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포용력도 넓고, 전에 내가 선생님이면 결혼할 수 있다는 말도 했다니까. 아까도 딱 제시간 맞춰서 나 구하러 와주고.”
그녀가 자신의 위에 올라탄 채 손가락을 꼽아가며 로웰 리의 대단한 점을 늘어놓자 평소처럼 미소 지은 얼굴로 듣고 있던 에반의 미소가 점점 짙어지더니 물었다.
“…너 정말 선생님이랑 안 잔 거 맞아?”
“응? 아니라니까.”
“정말이지?”
“…? 정말인데?”
“…….”
*
“아, 그 접시가 어디 있었는데.”
피렌체에 다녀온 로웰은 한참 마감에 바빴다. 배경 자료로 쓸 만한 걸 생각해보다가 집에 있는 커다란 접시가 생각났다. 넣으면 멋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접시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무슨 접시 찾으세요?”
울리는 듯하면서 낮고 귀에 흔적이 남는 것처럼 근사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였다. 그는 헐렁한 하얀 셔츠에 바지만 대충 입은 차림이었는데도 색기가 질질 흘러서 퇴폐적인 인상이었다. 그는 로웰의 설명을 듣고 금세 그녀가 원하는 접시를 찾아주었다.
“오! 이거 맞아요.”
“이거 예쁘죠.”
“진짜 예쁘다니까요. 특히 색감이 진짜 훌륭합니다. 어디서 사셨어요?”
“멕시코에서 샀는데요. 세트로 사서 더 있어요.”
“그렇습니까!”
“여기요.”
로웰은 감탄하며 그릇을 몇 개 더 꺼냈다. 자료로 써야겠다. 그리고 2층으로 함께 갔다. 그릇을 옮겨준 그는 미소를 지으며 로웰과 어시들에게 말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더 말씀하세요.”
“네.”
로웰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다가 문득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이미 계단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에반 블랙. 로웰의 입장에서 저 남자는 네 명의 남자들 중에 가장 나중에 들어온 남자였지만 역시나 본인이 지은 집이라 이건지 뭐가 어디에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기억력이 엄청 좋은 모양이다. 미르 킹쉴드와 다니엘 스톤하츠는 시즌 중이라 집에 거의 들어오지 못했고 송선호는 어쩐지 자기 본가에만 콕 처박혀 있다고 한다. 그러니 마치 저 남자가 이 집에 있는 유일한 남자인 것처럼 자연스럽다.
미르 킹쉴드야 얼굴과 몸매는 쭉쭉빵빵이지만 집안일은 할 줄도 몰랐고 송선호는 뭐든 하면 다 잘했지만 잔소리가 심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누가 말 안 해도 척척 시중을 들었지만 그래서 도리어 속내가 뻔히 보이고…. 에반 블랙은 사람을 불러 시켰다. 하지만 전부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2층 거실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니 로웰에게 접시를 찾아준 그는 부엌에서 간단한 음식을 가져와 도현과 먹으며 찰싹 붙어있었다. 금발 머리와 철썩 붙어있는 도현의 모습이 익숙하다면 익숙하지만, 역시나 미르 킹쉴드와는 다르다. 미르 킹쉴드는 에너지가 사방으로 뻗쳐 도현 말고도 여러 여자가 붙어서 다 같이 떠드는 모습을 곧잘 볼 수 있었지만 역시 저 둘은 둘만의 세계가 있었다. 서로 말도 안 하고 눈만 바라보고 있을 때도 있었다. 누구도 끼어들지 못할 것같이 말이다.
‘저럴 거면서 왜 친구 흉내는 내고 다녔나 몰라.’
로웰은 흠, 하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잠깐 생각에 빠져 있는데 저 멀리 정문에서 차가 한 대 들어오는 게 보였다. 더럽게 비싼 차였다. 차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송선호였다. 드디어 집에 들어올 마음이 생겼나 보다.
다른 남자들이 집에 못 들어오니 한동안 송선호가 도현 킬스버그를 독점하고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지냈는데 이거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하여튼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남자다.
그리고 다시 일을 하려고 돌아서려고 하는데 차가 두 대 더 들어왔다. 피렌체에서 돌아왔을 다니엘 스톤하츠의 차와 미르 킹쉴드의 차였다. 날 잡았구만. 로웰은 어시들을 불렀다.
“야, 구경하자.”
“뭔데요?”
신재인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일어나서 로웰의 곁으로 다가갔다. 윤지호도 자신의 의자 위에 서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뒤뜰 쪽에는 도현 킬스버그와 에반 블랙, 그리고 정원 쪽에는 줄줄이 들어오는 차가 세 대 보였다.
“오! 드디어 처첩 대전!”
“누가 처고 누가 첩이냐?”
“그런 건 역시 시간으로 따져야 하는 거 아닐까요? 블랙 씨나 송 편집장님이 처고 미르나 스톤하츠 씨가 첩 아닐까요?”
신재인이 답했다. 윤지호가 반박했다.
“에이, 그건 시간이 아니라 작가님이 제일 좋아하는 순으로 따져야 하는 거 아냐? 미르가 1등이고 나머지는 떨거지야.”
“물건 좀 챙길까요? 또 싸우는 거 아니에요?”
신재인이 자신의 멀티스크린을 고이 챙기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아차, 하며 그들은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챙겼다. 스크린과 작업 도구들을 소중히 손에 든 그들은 여러 개의 창문을 번갈아 보았다. 그들은 싸움을 기대하고 있었다.
올해 들어서만 두어 번 부서졌던 모던 클래식 계열의 분수가 고상하게 세워져 있는 정원 가운데 있는 공터에 R사의 대형 세단이 섰다. 뒷좌석에서 훤칠한 남자가 하나 내렸다. 194cm의 키, 글래머러스한 근육질의 몸매를 값비싼 쓰리피스 슈트로 감싸고,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귀족적인 얼굴에 ‘나는 절대로 비싼 값을 할 거다’라는 도도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남자는 비서의 인사를 받고 차를 돌려보냈다. 비서와 수행기사는 그가 적을 여러 군데 두는 바람에 여기에도 분수에 맞지 않은 세컨드 하우스를 구해야 했다. 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집으로 들어왔다. 2층에서 구경을 하던 갤러리들은 자연스럽게 도현과 에반이 있는 뒤뜰 수영장 쪽을 바라보는 창문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도현을 찾아 수영장 쪽으로 왔다가 멈칫했다.
둘은 선베드 하나에 같이 누워 있었다. 가로누워 서로의 몸을 붙이고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도현은 그의 금빛 속눈썹을 검지로 만지며 희롱했고 그는 눈을 감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도현의 허리의 움푹 파인 곳을, 이곳이 좋다는 식으로 부드럽게 손가락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았다. 누구처럼 왁자지껄하지 않아도, 누구처럼 이상한 관계를 맺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5년 전처럼….
“…….”
그렇게 도현이 그를 내버려 두고 그의 본가를 나간 이후로 알 수 없는 불안에 차마 먼저 연락도 하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던 송선호였다. 직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좋았다. 안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녀도 놀란 것뿐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이 모습을… 또….
‘아니야. 괜찮아. 예전이랑 같지 않아. 나를 보면 반가워할 거야. 예전처럼 그렇지 않아. 도현이는 날 사랑해.’
지금 들어와 있는 셋도 지금의 균형이 맞기까지 많은 갈등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놈이 들어왔으니 나머지 둘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머리 빈 미르 킹쉴드 걸레 새끼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다니엘 스톤하츠는 반드시 뭔가 더러운 수를 쓰려고 할 것이다. 그 사이코패스 새끼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송선호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른 놈들도 싫었다. 하지만 그는 저 양아치 새끼가 제일 싫었다.
‘그래. 예전이랑 다르다. 나랑 도현이가 얼마나 좋은데. 도현이에게 나만큼 좋은 남자는 없다. 나한테도 도현이뿐이야. 그러니까 내가 포기하면 안 되잖아.’
송선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도….”
“도현 씨.”
누군가 그의 어깨를 퍽 치고 앞으로 나섰다. 송선호는 깜짝 놀랐다가 다니엘 스톤하츠의 뒤통수를 보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밝은 금색이 되어 있었다. 저 또라이 새끼가 자존심도 버리고 기어코 금발로 염색을 해버린 것이다.
“다니엘?”
도현은 어느샌가 벌써 가까이 다가온 그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몸을 일으키고 섰다. 그녀는 입을 딱 벌리고 다니엘에게 손을 뻗었다. 허리까지 길게 기른, 숱이 많고 아름다운 그의 검은색 머리카락이 밝은 금발이 되었다. 미르 킹쉴드의 플래티넘 블론드만큼 밝지는 않았지만 에반 블랙의 골든 블론드보다는 밝은 플렉슨 블론드(Flaxen Blonde)가 되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그것도 이렇게나 길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을, 이렇게나 밝은 금색으로 만들었으니 염색을 하는 데만 해도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여전히 머리카락은 찰랑찰랑했다. 머리카락이 손상되지 않도록 하는 헤어 관리도 받은 것이 분명했다. 몇백만 원은 들었을 것이다. 도현은 휘둥그레 뜬 눈을 깜박깜박하며 깜짝 놀라서 다니엘 스톤하츠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그를 살펴보았다. 눈썹마저도 조금 색깔을 뺐다. 원래도 차가운 인상의 미남이었지만 금발이 되니 그것도 분위기가 달라진다. 밝은 금발, 보랏빛 눈동자, 무표정한 얼굴. 미의 남신이었던 아폴론이 현신한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도현은 그의 머리카락을 손에 감고 만지며 그의 앞에 서서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다니엘….”
“마음에 드십니까?”
“염색할 시간도 없었을 텐데….”
“시간은 만들면 납니다.”
“뭔가 이상해요. 다니엘이, 다니엘이 아닌 것 같아.”
그렇게 말하자 다니엘은 흠칫하더니 약간 빠른 어조로 물었다.
“도현 씨가 보기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까?”
“그런 건 아닌데요.”
내 남자가 내 남자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는 남자지만 모르는 남자를 앞에 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도현은 그의 변화가 너무나 놀라운지 여전히 입을 딱 벌리고 그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다니엘은 그녀의 허리를 손으로 감싸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피렌체에서 보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도현 씨.”
“저두요.”
도현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의 뺨에 같이 입을 맞추다가 웃었다. 이 남자는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이상한 남자. 재미있는 남자. 도현은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여전히 그녀에게 다가갈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던 남자는 또 상처받았다. 그가 없어도 다른 남자들과 즐겁고 행복한 그녀를 보는 것은 너무나 가슴이 아픈 일이었다.
‘저 또라이 새끼…. 저런 게 뭐가 좋다고. 역시 나밖에 없잖아. 나밖에 없어.’
하지만 그는 또 자기 자신에게 괜찮다고 세뇌를 하며 그녀를 부르려고 했다. 그리고 그때 누가 또 그의 어깨를 퍽 치고 앞으로 나섰다.
“도현아! 나 왔어!!”
“어?! 진짜?! 미르~!!!”
빛나는 플래티넘 블론드! 환한 아이스블루의 눈동자! 신이 빚어준 울끈불끈한 몸매! 오늘도 역시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어도 쭉쭉빵빵한 미르 킹쉴드의 유쾌한 목소리를 듣자 도현이 진짜로 눈을 크게 뜨더니 몹시 기뻐했다. 그녀는 잠깐 선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는 미르 킹쉴드에게 달려가 폴짝 뛰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는 그녀의 몸을 두 손으로 끌어안아 들고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었다.
“미르~! 이제 집에 와도 돼요?”
“이제 다 끝났어. 나 보고 싶었어?”
“응~ 진짜 보고 싶었어요. 미르가 없으니까 몸이 다 아프더라니까.”
“어디? 어디? 내가 호 해줄까?”
“어깨도 뻐근하고 등도 아프고 손발은 차고.”
“진짜? 그러면 안 되는데.”
그는 도현의 엉덩이를 한 팔로 받쳐 들고 그녀의 손을 잡고 호 하고 입김을 불었다. 그리고 입을 맞추고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씨익 웃었다. 도현은 좀 감동했다. 정말 이 남자는 시간이 가도 영원토록 절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밝은 기운이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 따뜻하게 햇볕을 쬐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도현이 사랑하는 한여름 같은 남자다.
“여기? 여기?”
“어깨랑 등이라니까.”
“여기?”
“하아.”
그는 도현을 내려주고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다가 금방 엉덩이와 가슴을 대놓고 주무르며 계속 입을 맞췄다. 그녀도 그의 몸을 더듬거리더니 입술을 쪽 떼고 상기된 얼굴로 미르 킹쉴드의 화사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짜 미르 너무 좋아.”
그러자 그가 환하게 빛이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애정에 응답했다.
“나도. 세상에서 제일 좋아. 네가 제일 좋아. 사랑해~”
오랜만에 봤더니 정말 반가운지 둘은 주변으로 마구 하트가 날아가는 것같이 눈꼴신 애정행각을 벌였다. 그걸 보고 있던 송선호는 결국 자기 세뇌에 실패했다. 마음이 먹먹했다. 심장에 멍이라도 든 것 같았다.
‘분명히…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내가 제일 먼저….’
도대체 그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그는 여기 있는 남자들 중 도현 킬스버그를 가장 먼저 알아본 남자였다. 그 어떤 남자에게도 감흥을 느끼지 못하던 그 당시의 그녀에게 가장 크게 인상을 줄 수 있는 남자였을 것임이 분명했다. 처음의 그는 분명히 노력했다. 그녀의 눈에 들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이 그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종류였던 것은 분명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지금까지 품어오던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마음에 먹구름이 끼어도 포기할 수조차 없었는데.
이렇게 시간이 흘러도, 그녀에게 마음을 전달해도 그는 여기에 있고 다른 남자들은 저기에 있었다. 그녀의 곁에….
‘안 되겠다. 조금만….’
그는 돌아섰다. 도저히 그 자리를 견디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심장이 이상하게 쿵쿵 뛰고 있었다. 손끝이 새하얘졌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여기에서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이미 자존심은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그는 조용히, 빠른 걸음으로 집 안에 다시 들어왔다.
“으흑….”
그는 수영장이 훤히 보이는 창가 옆에 선 기둥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자마자 참던 눈물을 흘렸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너무나 답답했다.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아니, 정말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저러는 것이 아닐까.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나를 봐주지 않는 것이다. 아니, 나를 봐주지 않으니까 사랑하지도 않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봤는지 안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왜 이런 그를 봐줄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일까.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이렇게, 이렇게나 노력하는데….
‘힘들어…. 이제 그만하고 싶어. 너무 힘들어…. 그만하고 싶어.’
어차피 이렇게 떠나버려도 그녀는 잡지도 않을 것이다. 분명히….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자 정말 눈물이 줄줄 나왔다. 병신 같았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태어난 남자였다. 어떤 것에도 모자람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만 서면 이렇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가장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그는 언제나 가장 초라했다.
‘일단 나가자. 이렇게 있어 봤자 어차피 싸우기만 하겠지…. 지금은 안 돼. 힘들어. 마음이 너무 아파.’
이런 상황에서 그녀와 마주하면 정말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그는 그렇게 판단하고도 잠시 동안 꼼짝도 할 수 없어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숨죽이고 숨어 있었다.
“송선호? 왜 왔다가 그냥 가.”
“!”
그녀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벽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아, 아니….”
그는 당황해서 헛기침을 했다. 도현이 눈을 두 번 깜박하더니 그의 앞에 바로 섰다.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울어?”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녀의 손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의 뺨에 닿아서 부드럽게 자신의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했다. 그녀는 약간 당황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그녀는 양손으로 그의 뺨을 붙잡고 엄지로 눈 밑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가 다시 눈물을 뚝뚝뚝 흘렸다.
“흑….”
“야….”
그가 괴로운 얼굴로 눈을 질끈 감으며 울었다. 도현은 몹시 당황하더니 그의 뺨을 쓰다듬어 눈물을 닦아주며 물었다.
“왜 그래? 응? 사람 놀라게.”
그는 눈물을 참느라 벌게진 얼굴로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눈물 젖은 시선을 들어 그녀의 눈동자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나…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발….”
“뭐?”
도현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가 헛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그의 귀를 만졌다.
“왜 그래. 다 알면서.”
“모르…겠어….”
“진짜?”
“…….”
그래도 그녀는 쉽사리 말해주지 않았다. 송선호는 강한 정동이 한 차례 지나갔는지 눈물을 멈추고 표정이 굳었다.
“아니야. 됐어. 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돼. 잠깐 얼굴만 보러 온 거야.”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얼굴에서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그는 다소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감정을 감췄다.
“아직 시차 적응하려면 멀었잖아. 쉬어. 난 다시 회사 갈게.”
그는 그렇게 말하고 도현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그냥 가려고 했다. 그녀는 마음이 간질간질한 걸 느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괴롭히면 울고불고 난리가 나겠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순간에 강한 척, 괜찮은 척하는 게 같잖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숨겨왔다는 것이다. 아는데도 이런 모습을 보면 옛날 생각이 나서 ‘얘가 날 정말로 6년이나 좋아했구나’라는 실감이 드는 것이다.
도현은 아무 말 없이 현관으로 가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인사말도 더 하지 못하고 그대로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자 그녀가 그 손을 잡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도현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진짜?”
“…뭐가.”
도현은 현관과 그의 품 사이를 자연스럽게 비집고 들어가 섰다. 그의 허리를 끌어당겨 배를 꽉 붙였다. 다리를 그의 다리 사이에 넣고 그의 넥타이를 잡았다. 그는 여전히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버건디색 레이스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안이 비치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드는 야시시한 수영복이었다. 그는 쓰리피스 양복으로 중무장을 한 상태였다. 그녀는 물에 젖었고 그는 뽀송뽀송했다. 항상 세상에서 제일 잘난 남자라는 듯 오만한 얼굴을 한 그가 눈물을 흘리며 사랑을 구걸하는 것은 장관이다. 이렇게 뻗대는 모습도 귀엽게 보일 정도로.
“모르겠다며.”
“뭘.”
“내가 너 사랑하는지.”
“됐다니까. 가서 딴 놈들이랑 놀아.”
“흐응.”
“…하지 마.”
그녀가 다리를 세워 그의 다리 사이를 압박하자 그가 인상을 쓰며 그녀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았다. 그녀가 후후 웃으며 그의 뺨에 입술을 누르니 손에 힘을 주며 그녀를 밀어내려고 했다.
“이런 걸로 넘어가려고 하지 마.”
“응? 뭘?”
그녀는 그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그는 마지못해 끌려와서 그가 도현을 현관문에 밀어붙인 것같이 되었다. 정말 덩치가 아깝다. 말이랑 하는 행동이 따로 놀지 않는가.
“왜 보러 왔다가 그냥 가? 응? 인사도 안 하고.”
“굳이 나까지 필요 없잖아. 가라고.”
그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도현은 그의 말을 무시했다.
“내가 따라와 줘서 기쁜 주제에.”
“아니야.”
“뭐가 아니야.”
그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는 현관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화를 삭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금이라도 그녀가 사랑한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자신이 싫었다. 그녀는 그의 고집스러운 얼굴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자기는 이럴 때 너무 귀엽더라.”
“야!”
그가 울컥해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를 바보 취급하고 있었다. 도현이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러니 그는 더더욱 억울해졌다.
“젠장. 비켜. 나갈 거라고.”
“왜 그래. 오랜만인데 조금만 더 이렇게 있자.”
“그때 그렇게 사람 버리고 멋대로 가버리고 제대로 연락도 안 해줬으면서 뭐가 오랜만이야?”
“그때는 미안. 근데 왜 그런 걸 말도 없이 가지고 있어? 그냥 나한테 말하지.”
그녀가 순순히 사과하니 그는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그의 셔츠를 손톱으로 긁었다.
“얼굴 좀 보자. 응?”
“…….”
“나 사랑한다며. 얼굴도 제대로 안 보고 그냥 가버릴 거야?”
그녀의 말에 그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가 그녀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말했다.
“니가 이렇게 대놓고 날 휘두를 때마다 화가 나.”
“화만 나?”
그는 대답하지 못하고 윽, 하고 그녀의 얼굴을 복잡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도현이 ‘이제는 다 알아~’라는 얼굴로 그를 살살 긁으니 그는 울컥해도 말도 제대로 못 했다.
“흐응.”
도현은 기분이 좋은 얼굴로 그의 얼굴에 다시 입을 맞췄다. 깔끔하게 면도가 잘 된 그의 턱에 입을 맞추고 뺨에 입을 맞추고 귀족적인 광대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속눈썹이 짙고 분위기가 있는 그녀의 눈과 마주치니 그는 인상을 쓰면서도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못했다. 그렇게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다소 화가 난 마음이 가라앉았는지 그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밀어내기 위해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있던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 괴롭히는 게 그렇게 재밌어?”
“내가 언제 자기를 괴롭혔어? 자기 말 이상하게 한다?”
“내가 말을 말자….”
“회사 다시 간다는 거 거짓말이지?”
“…….”
“자기야말로 자꾸 나한테 거짓말하면서~”
“아니…! 그건 니가…!”
“내가?”
“윽…! 젠장….”
이제는 못 이긴다. 진짜 못 이긴다. 그가 한숨을 푹 쉬자 도현이 하하 웃더니 말했다.
“알았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다. 됐지?”“
“너 진짜 짜증 나…!”
“자꾸 화내면 늙는다, 자기~”
“아…!”
송선호는 한탄을 뱉듯 천장을 한 번 보았다가 그녀를 다시 보았다. 그는 도현과 이마를 콩 마주쳤다. 그리고 살짝 밀어붙였다. 그가 마음에 몹시 안 든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네 앞에서만 내가 이렇게 꼴사나워.”
“자기 이렇게 멋진데?”
“나 좀 그만 놀려.”
“싫은데.”
“…진짜?”
“하하하.”
그가 표정이 살짝 무너지며 그렇게 묻자 도현이 크게 웃었다. 그녀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가 선심을 쓰듯 말했다.
“자꾸 튕기지 말고 빨리 뽀뽀나 해봐라.”
“…….”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밉다는 기색을 팍팍 담아 보고 있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쪽쪽 몇 번 부딪치고 떨어졌다가 깊게 겹치고 혀를 섞었다. 그가 붉어진 얼굴로 눈을 감고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꾸욱 누른 채 입맞춤 사이로 속삭였다.
“사랑해….”
그러자 도현이 입술을 떼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천천히 눈을 뜨며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녀가 물었다.
“정말?”
“응…. 알면서.”
“그럼 자주 말해. 니가 사랑한다고 하는 거 듣기 좋아.”
“진짜?”
“사랑한다고 할 때 목소리가… 좋아.”
“알았어. 사랑해.”
그녀가 그의 목을 끌어안고 까치발을 드니 눈높이 차이가 줄어들었다. 그는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가 ‘나도 사랑해’라고 그의 사랑에 응답해줄 것을 말이다.
‘사랑한다고 말해줘. 사랑해. 너무 좋아.’
아까는 그렇게 절망적이었는데 그녀와 이렇게 둘이서만, 둘이서만 알 수 있는 말을 속삭이니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자신이 그녀의 앞에서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하는 날이 오기는 할까? 그녀가 너무나 좋았다. 그녀는 마음대로 그를 조종할 수 있었다. 그를 화나게도 만들고 기쁘게도 만들고…. 그걸 알면서도 빠져들었다. 더 빠져들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남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그녀의 눈동자를 사라질 듯 소중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도 좋아. 사랑해.”
진심으로 말했다. 그녀는 그런 말을 하는 그를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보았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술에 입을 쪽 맞추며 대꾸했다.
“나도 사랑해.”
그러자 송선호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게 미리 말 좀 해주지 이제 와서….
“역시… 좀 밉다….”
“뭐라고? 너무 좋다고?”
“……어.”
송선호는 그렇게 한숨 섞어 대답하고 다시 그녀를 끌어안았다.
*
“…….”
“…….”
“…….”
“…….”
둘은 얼굴이 밝고 둘은 얼굴이 어두웠다. 얼굴이 밝은 둘 중 하나는 나머지가 있든 말든 본인이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 가벼웠고(원래 별생각이 없다) 다른 남자는 원래도 잘 웃는 남자다. 여유로운 미소였다. 그런 면이 그를 항상 강해 보이게 만들었다. 얼굴이 어두운 남자 중 하나는 원래도 무표정 일색으로 사는 남자였고 나머지 하나는 똥 씹었다는 표정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도현은 금발 셋에 흑발 하나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들을 보며 박수를 짝 쳐서 주목을 끌었다.
“다들 몇 번 봤죠? 이름은 에반 블랙. 앞으로 같이 살게 됐어요. 원래 이 집도 에반이랑 같이 지어서 특별히 모르는 건 없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인사는 한 번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앞으로 사이좋게 잘 지내요.”
“예전엔 둘이서만 지냈는데 동거인들이 많아지니 활기차고 좋네요. 잘 부탁합니다.”
에반은 도현과 비슷한 느낌이 나면서도 다른 미소를 띠며 그렇게 말했다. 송선호는 그걸 ‘나는 그녀에게 특별한 남자라 그녀를 독점하고 살았다’로 들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의 웃는 얼굴을 탐색하며 속을 모를 남자라고 진단했다. 그의 말에 둘은 쉽사리 반응을 드러내지 못했다. 도현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미르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도현을 보았다.
“왜?! 또?! 나로 부족해?”
그는 도현의 허리를 훅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도현은 그의 턱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미르가 부족할 리가 없잖아요.”
“근데 왜?”
“추억이 많은 남자란 말이에요.”
도현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미르는 도현의 눈을 바라보며 그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정론을 말했다.
“한 번 헤어진 옛날 남자 같은 거 다시 만나 봤자 더 구질구질해질 뿐인 거 몰라?”
“어, 음…. 그럴지도 모르지만.”
가끔 미르 킹쉴드는 이렇게 정곡을 찌르는 맞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의 말에 도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 에반을 돌아보았다. 그날 호텔에서의 그도 그들이 끝까지 좋을 수 있을지 물었다. 도현은 피식 웃으며 미르의 턱을 계속 쓰다듬었다.
“그래도 한 번 더 만나보게요.”
“쳇.”
미르는 크게 혀를 찼다. 도현은 후후 웃으며 미르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는 도현의 엉덩이를 손으로 붙잡아 안으며 그녀와 가까이 눈을 마주쳤다.
“그래도 내가 최고지?”
“네.”
“뭐, 그럼.”
그렇게 그는 시원하게 문제를 넘겼다. 불만을 한 번 입에도 담을 수 없었던 송선호와 다니엘은 그 모습을 보고 좀 열 받았다. 그의 모습에 쫄아서 저런 말도 당당하게 꺼내지 못한 자신을 실감해서 싫으면서 동시에 질투가 났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도현이 에반을 소개할 때부터 뚫어져라 에반을 쳐다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현 씨가 좋다면 저도 좋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블랙 씨.”
“네, 스톤하츠 씨.”
그렇게 빤히 계속 쳐다보고 있으니 무서울 법도 한데 에반은 그저 웃는 얼굴로 더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도현은 미르의 무릎에서 일어나며 손을 뻗어 다니엘의 시선을 차단했다. 한참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을 하고 있던 그는 아차, 하고 도현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다니엘, 싸움은 안 돼요.”
“아닙니다.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답하며 자신의 얼굴 앞을 가리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도현은 송선호를 보았다. 그는 인상을 팍팍 찌푸리고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도현은 다른 손의 검지로 그의 미간을 꾹 눌렀다.
“주름 생긴다.”
그는 살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가 에반과 눈이 딱 마주쳤다. 에반은 미소를 지었다.
“왜 그래? 내가 다시 돌아온 게 그렇게 싫어? 난 반가운데.”
“…그래, 반갑다.”
송선호는 그를 노려보다가 그렇게 답했다. 에반은 더 활짝 웃으며 그의 성질을 긁었다.
“앞으로 잘 지내자. 구면은 너밖에 없잖아.”
“…….”
저 양아치와 잘 지낼 생각은 개미 눈곱만큼도 없었다. 송선호는 아예 눈을 부라리며 그를 치가 떨린다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도현은 그를 재촉했다.
“왜 그래? 기껏 에반이 먼저 잘 지내자고 하는데.”
송선호는 도현의 얼굴까지 잠깐 흘겨보았다가 한숨을 쉬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뭐, 이 정도에 만족하자. 도현은 그렇게 자평했다. 전에는 그냥 남자들끼리 알아서 잘 지내기를 바랐지만 아무래도 그건 만고 도현의 희망 사항이었을 뿐이었고 미리 이렇게 단속을 하는 게 맞는 모양이었다. 그게 성가셔서 하지 않았던 때의 수라장을 지나 지금에 도착하니 각기 나름의 정이 들어 이 정도 당부의 말은 귀찮아도 미리 해두는 게 앞으로 좋을 것이다. 도현은 검지를 하나 들면서 말했다.
“절~대 싸우면 안 돼요. 전 같은 아수라장이 한 번 더 생긴다, 그러면 다들 영영 안녕이에요. 알았어요? 특히 다니엘.”
“알겠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앞으로 다시 그럴 일은 절대 없습니다. 도현 씨는 절 사랑하시니까요.”
다니엘은 그렇게 말하며 도현의 손을 꼭 잡았다. 미르 킹쉴드야 어깨를 으쓱했다. 알다시피 가만히 있는 미르에게 싸움을 걸어온 것은 다른 이들이었다. 도현은 에반을 스쳐보았다가 송선호를 보며 무언의 제스처로 대답을 강요했다. 송선호는 왜 저 양아치에게는 닦달하지 않는지 억울했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대꾸했다.
“알았어.”
“오케이. 그럼 오늘은 다 같이 식사나 할까요? 저녁 준비는 지금 사람 부르면 될 것 같은데. 선생님은 어디 계시지?”
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네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저택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 할 말은 끝난 거지?”
송선호는 곧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자리가 정말 불편하고 싫었기 때문이다. 도현이 일어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응. 밥 안 먹을 거야?”
“먹을게. 그냥 여기 있기 싫은 거야.”
“에이, 또 그런다.”
송선호는 저택으로 먼저 들어가 버렸다. 하여튼 까칠하기는. 미르도 일어나더니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는 그녀의 비키니 팬티 안으로 손을 쑥 넣어 그녀의 허벅지를 주물렀다.
“옷 갈아입을 거야?”
“네. 이제 입어야죠.”
“이거 짱 예쁜데.”
그는 다른 손으로 도현의 허리와 배를 문질러 만졌다. 예쁜 버건디색 비키니였다. 그는 도현의 예쁜 가슴과 몸을 보다가 아쉽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이렇게 입고 저녁 식사를 어떻게 해요.”
“뭐 어때.”
미르는 그렇게 말하며 도현에게 딱 달라붙어 그녀와 함께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다니엘과 에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선이 약간 겹치자 에반이 웃는 얼굴로 양보했다.
“먼저 들어가시죠.”
“싸우지 않겠다는 말과는 별개로, 도현 씨에게 해를 끼치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다니엘이 그를 똑바로 보며 그렇게 말했다. 둘은 키가 비슷했다. 에반은 그의 말이 의외라는 듯한 얼굴을 했다가 되물었다.
“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죠?”
“그쪽 같은 남자는 도현 씨에게 해를 끼치면 모를까 별로 이득 되는 게 없어 보이니까요.”
“무슨 근거로?”
“남자의 감입니다.”
다니엘은 그렇게 말하고 에반이 양보해주는 대로 먼저 집으로 들어갔다. 에반은 그런 다니엘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마음이 복잡해져 약간 고민했다가 헛웃음을 짓고 집으로 들어갔다. 거짓말이군.
‘역시 도현이와 함께 있는 건 재미있어.’
자신이 있다고 말해도 거짓말이고 자신이 없다고 해도 거짓말이었다. 도현이 말한 것처럼 남자는 모두 겁쟁이다. 에반은 겁쟁이였다. 그러니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도현이 얼마나 많은 남자를 만나든, 얼마나 많은 남자가 주변에 더 있든 그는 도현에게 자신이 가장 특별한 남자이고 싶었다. 그런 것을 바라고 있었다. 사람에게 무언가를 바란 것은 처음이다.
에반은 그녀가 왜 자신을 그녀의 곁으로 초대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벌인 이 흥미로운 게임 속에서 그의 특별함을 증명해보라 속삭인다. 예전에는 에반이 말했다. 너는 자유로울 자격이 있다고. 너는 욕망할 자격이 있다고. 그녀에게 자유와 욕망의 세계를 함께 하자고 말했다. 이번엔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너는 기대할 자격이 있어. 넌 특별할 자격이 있어. 그래서 에반도 그녀에게 응했다.
주변에 견고한 성을 쌓으면 안전함을 느끼지만 금방 무료해진다. 모든 길을 스스로 개척하고 돌 하나도 자신의 손으로 쌓았다. 피가 묻은 손으로 획득한 왕관이 그의 머리 위에 얹어져 있고 시체로 쌓은 왕좌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바로 현재의 에반 블랙이라는 남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위험과 경쟁, 그리고 폭력에 익숙한 남자였다.
당연한 거겠지만 도현의 곁에 있는 다른 남자들이 모두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도현은 싸우지 말라고 했지만 그래도 분명히 불편한 일은 생길 것 같은데….
‘그래도 도현이에게 험한 모습은 안 보여주고 싶단 말이야. 모양 빠지기도 하고. 어차피 도현이가 선택하는 건데 다른 놈들이랑 힘겨루기할 생각도 없고.’
그는 팔짱을 낀 채 잠깐 그렇게 생각에 빠졌다. 햇살같이 아름다운 골든 블론드에 숱이 많아 그윽하고 분위기 있는 짙은 속눈썹, 아름다운 비취색 눈동자에 훤칠한 키와 모델 같은 몸매를 가진 그였다. 팔짱을 끼고 약간 몸을 기울인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분위기가 요염하고 눈길을 끌었다. 무방비해 보이기도 하고 퇴폐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송선호야, 뭐, 그의 명과 암이 무엇인지 에반은 예전부터 다 알고 있었다. 도현을 대하는 것에서 생기는 문제점만 제외하면 그는 약점이랄 것이 없었다. 그가 갖춘 조건들은 전생에 나라를 몇 개쯤 구해야 갖출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운이 따라야 하는 것들이었다. 세계를 호령하는 기업가 집안, 모범이 되고 그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며 양육해준 부모, 미남미녀를 부모로 둬서 자연스레 가진 외모와 신체조건, 자존감, 성격, 교육 수준, 교우 관계, 인척 관계 등등 그는 근본이 확실한 남자였다. 대단한 혈통서가 딸린 남자다. 하지만 그런 만큼 뻔히 보였기 때문에 그를 다루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미르 킹쉴드도 딱히 따로 알아볼 것도 없이 훤히 보이는 남자였다. 그의 환한 금발, 눈동자, 미소, 모두 여자들이 너무나 사랑하는 것들이다. 도현이 그런 것에 넘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에반의 희망 사항이었을 뿐이고 그녀도 좋은 것은 좋은 모양이었다. 아마 질릴 때까지는 어쩔 수 없겠지. 어쨌든 그런 바보 하나 구워삶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고.
문제는 딱 한 명이다.
‘다니엘 스톤하츠…. 세계물리학회로 들어갔지. 알고 하는 말인 것 같긴 한데.’
그가 얼마나 능력이 있을까?
보통 남자들보다야 훨씬 비싼 값에 팔리는 소드마스터들은 대부분 성별이 남자다. 장기를 죄다 떼다 파는 것이 아니라면 남자들은 고깃값이나 겨우 건진다. 마도사가 시장에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마도사의 능력은 굉장한 자산이고 그들은 대부분 머리가 좋았다. 그들의 성별은 대부분 여성이다. 따라서 그중에서 실력이 뛰어난 자들도 대부분 여자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약 1,500만 명의 마도사들 중에서도 최고의 마도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고작해야 열 손가락이 조금 넘을 뿐이다.
‘현존하는 마도사 중에선 캘리 박 교수, 세현 퀸 교수, 이예프 교수, 필리페 교수, 루소 교수가 최고야. 그다음 레벨과도 실력 차이가 꽤 있어. 그중에 한 명이라도 될 수 있을까? 다니엘 스톤하츠가? 그렇지 못하면 대권을 잡을 수는 없을 건데.’
그러면 다른 학계의 보통 학자들보다야 대단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역시 그저 그런 연구자나 교수로 끝날 뿐이다. 캘리 박 교수 밑에서 나온 13명의 제자들은 이미 다들 장성하여 제각각 자리를 잡았으니 노년의 캘리 박을 빼면 나머지 네 명의 밑에 있는 제자들 중에 또 누가 두각을 보이느냐도 변수다. 중국의 왕리밍 교수 같은 경우 남자에다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연구 실적은 적어도 필리페 교수에 버금갈 거라 보지만 마도사로서의 기량이 부족하여 캘리 박의 후계자 후보도 될 수 없었다. 캘리 박이 공공연하게 밀던 후계자 후보에 세기의 천재이자 저 중 제일 미래를 촉망받던 세현 퀸 교수는 최근 시한부 판정을 받아 현재 학회 내부는 물론이고 관련된 정권과 기업가, 금융가들까지 전전긍긍이었다.
저들이 가진 힘은 이미 세계를 정복하였다. 개나 돼지 같은 인간들만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저들은 지식, 지혜, 힘, 그리고 미래에 대한 비전, 그 모든 것을 독점하고 가끔 그것을 일반 대중에게 조금씩 흘리며 인망도 모았다. 이미 반신(半神)이나 다름없는 저들이 세계의 부를 가지고자 했으면 진작 가졌을 것이고 세계 통일을 하고자 했다면 벌써 했을 것이다. 그들이 인간 사회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다니엘 스톤하츠가 뛰어든 저 세계는 힘이 모든 것을 말하는 진정한 우열의 세계다. 정의? 평화? 도덕? 평등? 그런 패배자의 옹졸한 자격지심을 옹호하는 알량한 미사여구 따위 나올 새도 없는 강자생존의 세계다. 그러니 저 숫자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지하고 나태하고 자신의 문제를 남 탓으로 돌리며 자기 위안만 할 줄 아는 멍청한 150억의 사람들보다 한 줌도 되지 않는 저들이 이 세상을 움직인다. 솔직히 에반은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에 교과서에 나오는 대로 제대로 배운 것 하나 없는 눈먼 대중이 그 짧은 식견으로 판단한 다수결로 인간 세상의 핸들을 어느 방향으로 돌릴지 결정한다고 생각해보자. 정말로 끔찍할 것이다.
송선호나 자신은 도현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비등비등할 것이다. 둘 다 현재 가진 것은 많았고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송선호가 에반보다 조건은 더 좋았다. 송선호는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일이 없겠지만 에반은 많았고 그것은 분명히 위험 요소였다. 물론 송선호는 그 조건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가치관 때문에 도현에게 해줄 수 없는 것들이 많았지만. 미르 킹쉴드야 당연히 이 부분에 있어선 송선호나 에반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 아마 평생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니엘 스톤하츠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왕궁을 약탈하여 이미 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송선호야 거대한 기업 집단의 총수 일가에 속해 있었으니 그의 영향력이 닿는, 혹은 닿을 모든 자산을 합쳐보자면 몇 나라의 1년 예산이 넘을 것이다. 에반 블랙도 은행을 가지고 있으니 그가 영향을 끼치는 자산의 양은 숫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지만 석유 부자 국가의 왕궁을 털었다는 것도 분명히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재물의 한도를 훌쩍 넘는 돈을 가지고 있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도현이 끼고 있는 그 바이올렛 스타라는 다이아몬드는 마지막으로 경매에 나왔을 때 무려 800억에 낙찰되었던 보석이었다.
그가 훗날, 저 세계의 꼭대기에 다다를 수 있다면 그는 이 세상의 꼭대기에 올라설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때도 도현을 지금처럼 사랑하고 있다면, 그때 그가 도현에게 세계를 선물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았다. 사람들은 송선호나 에반 블랙의 옆에 선 도현 킬스버그를 단순히 부러워하거나 질시하겠지만 다니엘 스톤하츠의 옆에 선 도현 킬스버그는 두려워할 것이다.
만약에 그녀가 권력의 맛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남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정확하게는 상관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타인이 자신에게 상관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순진하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녀의 말 한마디에 벌벌 떨게 될 것이다. 무릎을 꿇고 숭배할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좋아할까, 싫어할까. 잘 모르겠다.
‘멋있지 않을까, 도현이…. 훌륭한 착취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저 정도로 힘을 추구하는 남자가 과연 그때도 도현을 그만큼 존중할 수 있을까? 위험한 남자다. 그가 추구하는 힘은 견제하는 의미조차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이다.
‘흠…. 노파심이긴 해도 다니엘 스톤하츠는 더 크기 전에 죽여버리는 게 나을까. 학회에 투자한 돈을 못 받으면 나도 큰일이란 말이지. 학회 내부엔 아직 정치질하는 인간들이 별로 없으니…. 누구를 부추기는 게 좋을까.’
모든 건 먼저 거시적으로 보고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아직은 심각한 것보단 즐기는 걸 생각하는 게 좋겠지. 뭘 해야 그녀가 좋아하려나. 그는 다시 여유로운 미소를 장착하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
9월 30일 일요일, 이스트드래곤의 라스트 포틴 결전 날이다. 이번에는 홈경기였다. 상대는 샌디에이고 연고의 클럽이다. 유럽의 클래식한 건물과는 다르게 모던한 TFC 돔 모양이 인상적이다. 경기가 시작하기까지 두 시간 정도가 남았다. 선수들은 감독과 함께 작전을 되새기다가 잠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갑자기 금발로 염색을 하고 나타나더니 시간만 나면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완벽하다.’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역시나 그렇게 판단했다. 팔방미인, 재색겸비, 문무겸비, 전부 그를 위한 말이 아니던가. 세상에 그만큼 강한 남자도, 똑똑한 남자도, 아름다운 남자도, 재물을 많이 가진 남자도 별로 없었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다 갖춘 남자는 그뿐인 것이 당연했다.
도현 킬스버그의 대저택에 사는 네 명의 남자들은 제각각 달랐고 제각기 매력을 가진 것은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 최고를 꼽으라면 당연히 자신이다. 그중에서 가장 특별한 남자를 꼽으라면 당연히 자신이다. 그중에서 가장 그녀에게 사랑받아야 할 남자를 꼽으라면 당연히 다니엘 스톤하츠, 바로 거울 속에 있는 이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니엘 스톤하츠. 그를 수식할 수 있는 단어는 무수히도 많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고작 누구나 목소리만 낼 수 있으면 지껄일 수 있는 언어로 하는 수식은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굳이 찾아서 지금의 그를 수식하라고 한다면 바로 ‘질투’라는 단어다. 네 명의 남자 중에서 가장 질투가 심한 남자도 분명히 그였다.
그는 강한 남자였다. 하지만 강한 남자가 꼭 이기는 것은 아니다. 이기고자 하는 열망이 가장 강한 사람이 이기기도 한다. 배타성이 가장 강한 남자가 결국 모두를 물리치고 1인자가 된다. 다행스럽게도 다니엘은 그 모든 소양을 갖춘 남자였다. 당연하다. 그는 완벽한 남자다.
‘에반 블랙.’
다니엘은 에반의 정체를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세계물리학회장 캘리 박의 비서관 한민유가 찾지 못하는 정보는 없었다. 그는 미르 킹쉴드만큼이나, 아니, 그보다도 더 밑바닥을 구르던 쓰레기 중의 쓰레기였다.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던 것은 아무리 값비싼 보석의 모양을 하고 있어도 구린 냄새가 날 뿐이다. 빨아도 걸레라는 말은 송선호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왜 개천에서 나온 용 같은 남자를 피해야 한다는 말이 있겠는가. 남자는 근본이 중요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무엇을 쥐고 태어났는지가 그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홀로 성공해 때깔 좋은 옷을 입어 봤자 없이 자라고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남자의 애정 결핍이란 구태의연하게 굳이 추하다 말하지 않아도 모양새가 뻔했다.
‘나란 남자의 훌륭함을 표현하기란 힘들다. 도현 씨는 잘 알아봐 주시지만 굳이 열 개 가질 수 있는 걸 하나만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1등이 되어야 맞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시간이 없다. 너무 바쁘다.’
다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거울 속에 있는 금발로 염색한 남자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변명일 뿐이다. 시간이 없더라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상대는 고작해야 그런 것들뿐이다. 방법을 생각하자.’
요새 도현은 볼 때마다 그가 선물한 바이올렛 스타를 손에 끼고 있었다. 그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왕궁을 털어서 가져온 보물이었다. 좋은 건 가까이하고 나쁜 건 멀리하고 싶은 것이 동물의 본성이며 그렇게 해야 옳다. 그는 도현에게 옳은 남자였다. 뭘 더 하는 게 좋을까? 무엇을 그녀에게 해주면 기뻐할까? 다음에 만났을 땐 어떤 말을 할까? 어떻게 해야 더더욱 그녀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녀에게 더 옳은 남자가 될 수 있을까? 다니엘은 오늘도 고민했다.
“여어, 스톤하츠.”
무거운 팔이 두 개나 그의 어깨 위에 올라왔다. 다니엘은 거울 속의 시선을 옮겨 자신의 양쪽에 선 무식하게 덩치 큰 남자 둘을 보았다. 남미 계열의 피가 짙은 외모에 나른한 회색 눈동자의 센터 포워드, 치엔이 루카스와 약간 긴 앞머리에 떡대가 어마어마한 카흐 밀란이었다. 그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그에게 친근한 척을 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염색이냐? 요새 거울은 왜 이렇게 봐?”
“혹시 거울 보면 흥분하냐? 변태~”
치엔이 루카스가 농담을 걸었다. 누가 누구를 변태라고 매도하는가. 다니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밝은 얼굴로 싱글벙글 웃으며 다니엘에게 말했다.
“근데 니가 소개해준 그 여자 뭔가 괜찮더라. 그런 여자는 처음 봤어.”
“그러니까. 도대체 뭐 하는 여자야? 넌 그런 여자를 어떻게 알고?”
카흐 밀란도 그렇게 물었다. 다니엘은 그들의 말에 거울 속으로 신태호를 찾았다. 신태호는 감독과 코치들에게 둘러싸여 ‘오늘도 괜찮다’, ‘오늘도 괜찮을 거다’, ‘이건 연습이다’, ‘아무도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 ‘할 수 있다, 신태호’라는 식으로 정신 세뇌를 하고 있었다. 그도 눈을 감은 채 그들의 말을 복창하며 컨디션을 조절하고 있었다.
“신태호는?”
다니엘이 물었다. 그러자 카흐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쟤 그동안 GAS는 한사코 싫다고 지랄을 하더니 그 여자는 좋은가 보더라. 어쩔 줄을 모르던데.”
“요새 저렇게 열심히 하는 것도 그 여자가 ‘좋은 플레이 기대하고 있어요~’ 이러니까 저러는 거 아냐. 웃긴 놈이야.”
“잘 지낸다면 다행이군.”
다니엘은 그렇게 말하며 둘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서 치우고 머리를 묶기 시작했다.
“뭐, 신태호랑은 소꿉장난 같은 거지. 여자한테 하는 거야 이 형들을 이길 수 있겠어? 킥킥.”
카흐가 그렇게 웃었다. 루카스는 거울에 한쪽 팔꿈치를 대고 자신의 머리를 괸 삐딱한 자세로 다니엘의 얼굴을 보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한테 이쁜 짓이라도 했냐? 갑자기 그런 선물을 해주고?”
몇 달 전엔 셀레나 카토에게 집적거린 걸로 사람을 묵사발 내더니. 루카스는 궁금한 모양이었다. 다니엘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 여자가 선물이 아니라 니들이 뇌물이다. 다니엘은 머리를 묶은 자신의 모습을 몇 번 살피며 머리를 묶었다 풀었다 반복하며 완벽한 각도를 찾고 있었다. 도현이 볼 것이다.
“설마 시스터즈한테 하듯이 한 건 아니겠지?”
다니엘이 물었다. 루카스는 ‘흐음~’하고 장난기를 잔뜩 담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나도 바보는 아니고. 그런 여자한테 벌써부터 그렇게 할 리가 있냐? 각을 잘 봐야지, 각을.”
루카스는 손바닥을 펴고 그 손으로 각도를 조정하는 흉내를 내며 그렇게 말했다. 다니엘은 흥분이 살짝 어린 두 남자의 얼굴을 무뚝뚝한 눈길로 한 번 보았다. 갑자기 과분한 게 손에 들어오니 정신을 못 차리는군. 뭐, 당연하겠지. 지성이 있다면 애초에 저렇게 살지 않을 테니. 다니엘은 머리를 자연스럽게 내려 둥글게 묶었다. 너무 공들인 티는 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예뻤다. 오늘은 이걸로 하자. 다음에는 미용실이라도 다녀와야겠다. 그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다시 집중하며 말했다.
“조심해라. 그 사람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사람이니까.”
“응? 뭐가? 허리도 한 줌 안 되는 여잔데?”
카흐가 그렇게 물었다. 루카스도 다니엘의 머리카락을 슬쩍 만져보며 거들었다.
“걱정할 거면 그 여자를 걱정해야지. 원래 예쁜 여자들은 인생이 고달프잖아.”
“나는 미리 경고했다.”
다니엘은 그렇게 말했다. 루카스는 더 다니엘과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녀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다니엘의 디바이스가 울렸다. 부웅. 다니엘은 거울 옆 선반에 있는 디바이스에 손을 뻗었다. 거울 속 완벽한 자신에게서 여전히 눈을 떼지 않은 상태다.
“네.”
[다니엘, 준비하고 있어요?]
“그렇습니다. 도현 씨 오셨습니까?”
[네. 다 같이 왔어요.]
뒤에서 로웰과 어시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이겨요, 다니엘. 오늘은 저도 걸었어요.]
엘 드라카 투기 관련 금융상품들은 예측이 틀려 큰돈을 잃게 되었을 때 몇 퍼센트까지 그 돈을 되돌려주는 리스크 헤지 상품까지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가장 큰 판이 가장 자유로우니 불법 도박도 별로 없다. 몇십만 배씩 돈을 벌어 뉴스를 타는 사람도, 돈을 잃고 자살하는 사람도 매해 신문에 실렸다. 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다.
다니엘은 거울 속 자신을 유심히 보면서 그녀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듣고 있으면 감미로운 음악같이 좋은 그녀의 목소리. 그는 다시금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긴다.’
TFC는 그가 방황하던 시절 뭘 해야 할지 몰라 으레 실력 있는 마도사 용병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다 들어오게 된 업계였다. 뭐든 하기만 하면 잘했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 없이 지냈다.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리면 아무런 생각이 없어진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승패에 크게 연연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약속했다. 이기기로. 그는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이 최강의 남자라는 사실을.
“도현 씨를 위해 이기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통화를 마치곤 다시 거울을 보았다. 치엔이 루카스가 다시 말을 걸었다.
“야, 니가 강한 건 알겠지만 그래도 경기에서 이기는 건 너 하나로 이기는 건 아닌데.”
다니엘은 그 잡음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그는 집중하고 있었다.
‘방법.’
근본이 없는 남자야 거울을 보는 것이 괴롭겠지만 그는 달랐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그는 조금 더 거울 속의 자신의 보라색 눈동자를 강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현재 여론은 무려 99 : 1로 이스트드래곤의 압도적인 승리를 점치고 있습니다. 샌디에고 펫코 클럽이 그렇게 약팀이 아닌데요. 16강 안에 든 일은 없지만 그래도 드로우 선데이를 지금까지 10번은 넘긴 강팀입니다.]
[저번 팔라딘 전의 영향이 크네요. 무려 팔라딘을 30분 이내에 꺾었으니 이제 팬들은 이스트드래곤의 3연패를 당연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솔직히 저도 이스트드래곤에 걸었습니다. 원래 이스트드래곤 경기가 좀 재미가 없지 않았습니까? 정석적인 포메이션에 디펜스, 오펜스, 미드필드 다 빠짐없이 강하고 약점도 별로 없고 힘겨루기를 하다 보면 결국 상대의 맷집이 딸려서 이기게 돼서 시시하다고 생각했죠.]
[지금이야 신태호가 있지만 예전에는 스타성 짙은 선수도 없었죠. 다니엘 스톤하츠는 무뚝뚝하고 치엔이 루카스는 거의 범…. 어쨌든요.]
[그에 비에 웨스트이글은 활동량도 많고 근접전도 화려하게 잘 벌이니 경기를 보는 맛은 확실히 웨스트이글이 더 있죠. 강한데도 운이 좀 없으니 아슬아슬하달까.]
[그런데 이스트드래곤이 올해 극단적일 정도로 공격형 전략만 펼치니 이게 또 재미가 있습니다. 앞으로 이스트드래곤이 계속 30분 내에 경기를 끝낼 수 있을지에 대한 내기판도 있다고 하네요.]
[와, 그건 몰랐네요. 될까요?]
[모르겠습니다만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선수들이 입장했다. 홈 클럽인 이스트드래곤부터 시가(市歌)를 불렀다. 홈경기이든 원정 경기든 이스트드래곤의 선수들의 컨디션은 비슷했다. 도쿄돔이야 전 세계적으로도 훌리건으로 유명하지만 일상생활에서의 도쿄인들이란 차분하기 짝이 없다. 다국적 선수들로 이루어진 클럽이었지만 도시가 그들에게 끼친 영향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신태호, 너는 하던 대로만 하는 거다.”
“네.”
“그래, 넌 할 수 있다. 치엔이 루카스, 오늘은 라스트 포틴이니 아무나 걸리는 놈은 죽여버려라. 니가 한 명 죽이면 내 운이 좋더라고. 드로우 선데이를 위해서라도 운을 모아야 한다.”
“네~”
“스톤하츠, 너는 공격형 미드필더 클라크의 머리를 노린다. 클라크는 발이 빠르다. 우리가 놓칠 가능성이 있다. 어떻게든 초반에 타격을 줘야 해.”
스즈키 감독은 앞서 몇 번이나 했던 말을 세뇌시키듯 그들의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선수들이 진을 짜고 경기장 양쪽에 섰다. 경기 시작부터 종료까지 딱 20분. 치엔이 루카스는 쉴드 치는 게 늦은 마도사를 한 명 죽였다.
“아아악!! 루카스!!!! 치엔이 루카스!!!!”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도쿄돔이 들썩거렸다. 그들은 승리의 환희에 차서 눈물을 흘리고 죽음에 환호했다. 무엇에 기뻐하고 무엇에 슬퍼하는지. 자신들은 그저 관중에 부외자들일 뿐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들이다. 남의 피땀 흘린 인생에 자신의 볼품없는 인생을 의탁해 과잉된 자아들.
꽃가루가 도쿄돔의 한쪽에 흩날렸다. 강한 조명의 아래에 흩날리는 꽃가루는 아름다웠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은 뒤 질끈 묶은 머리카락을 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관중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는 대중의 힘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많지 않은 사람들 중에 하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녀를 찾아낼 수 있을까. 잠깐 멈춰서 흔들리는 관중석을 올려다보고 있던 다니엘은 동료 선수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드는 신태호와 눈을 마주쳤다. 다니엘은 그에게 손짓하여 이쪽으로 오라고 했다. 그는 강아지 같은 고양이처럼 천천히 걸어서 이쪽으로 왔다.
“왜 그러세요?”
“여기서 도현 씨를 찾을 수 있나, 신태호.”
“도현 누나요?”
신태호는 열기로 인해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관중석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곧 말했다.
“저기요.”
그가 손짓했다. 다니엘은 그쪽을 보았다. 그가 가리킨 방향에 어렴풋이 샛노란 금발 삐삐 머리가 보인다. 다니엘은 신태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고맙다.”
소드마스터들이 유용한 게 바로 이럴 때다. 눈과 귀가 밝다. 다니엘은 그 뒤 바로 두둥실 떠올랐다. 신태호가 눈을 깜박깜박하며 마법의 힘으로 떠오르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보러 몇 번이나 왔는데도 보지 못하는 것이 싫다. 왜 서로를 이렇게나 바라보는데도 서로를 볼 수 없는 걸까. 함께 있고 싶다. 분명히 그녀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벌레 같은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그녀를 내버려 두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엔 지성을 가진 인간이 견디기 힘든 해로움이 존재했다. 그런데도 그녀가 자신을 보러 여기까지 와주었다면 그도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아니, 만나야만 했다. 자신은 그녀의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그는 이 벌레 떼를 까치들로, 그녀와 자신 사이에 놓인 오작교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가 갑자기 공중부양 마법을 써 허공으로 떠오르니 카메라들이 일제히 다니엘 스톤하츠를 바라보았다.
[엇, 다니엘 스톤하츠….]
거대한 경기장의 가운데서 빼어나게 아름다운 한 남자가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날아올랐다. 강한 조명의 사이로 그의 모습이 검게 그림자 졌다. 관중들도 그를 보며 그의 이름을 환호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이름을 입에 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의 눈은 환상에 젖어 있었다. 강하고 아름다운 그를 보며 강하고 아름다운 자신을 상상하며 자위했다. 그는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가치가 있는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밝은 금발로 염색한 그는 겉보기에는 무척 화사했지만 여전히 무표정하고 광물같이 빛나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공허했던 예전과는 달리 그 안에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미의 남신처럼, 그는 아름다웠고 무정했다. 그는 관중석의 대미사일 쉴드를 마법으로 갈랐다.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작게 탄성을 냈다.
그는 난간에 내려섰다. 그는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남색 머리카락의 여자였다. 주변 사람들이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카메라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그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근방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홀로그램과 전광판을 보고 있는 사람들도 전부 그 장면에 집중했다.
그는 금방의 혈투에도 털끝 하나 다치지도, 핏방울 하나 묻지도 않은 깨끗한 모습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입을 열었다.
“도현 씨.”
“다니엘… 내가 여기에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도현은 여러 가지로 놀라웠지만 그것이 가장 놀라워 그렇게 물었다. 다니엘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저는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입에 침 하나 묻히지 않고 거짓말을 했지만 본인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현은 자신의 앞에 천천히 날아온 그의 모습이 마치 신화 속의 남신과도 같아 저도 모르게 홀려서 보고 있었다. 강한 자기 확신,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와 노력, 그 모든 것이 다니엘 스톤하츠를 빛나게 했다. 예전의 그가 강한 힘과 업을 등에 지고 갈피를 잡지 못한 공허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면 지금의 그는 그 모든 걸 등에 지고도 굳건히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다니엘 스톤하츠!! 다니엘 스톤하츠!!!”
승리의 기쁨에 젖은 관중들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강한 믿음이 있는 자의 곁에는 믿고 싶은 자들이 몰려든다. 도현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카메라의 시선도 느꼈다. 부담스러웠다. 불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호들갑을 떨고 싶진 않았다. 어쩐지 오늘따라 모두의 앞에서 강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니엘.”
도현은 책망의 기색이 담긴 어조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도현의 앞으로 내려왔다. 군더더기 없어서 우아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는 도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으라는 듯이.
“저를 보러 왔지 않습니까?”
다니엘의 물음에 도현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남자다. 오만한 남자다. 그리고 오만할 만한 남자다. 그것을 타인과 스스로가 모두 아는 남자는 정말로 대단한 남자가 되는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도 그는 어딘지 모를 독선과 맹신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그 자신에 대해서도, 도현에 대해서도.
그의 눈빛, 그의 몸짓이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끌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저 남자만 보인다. 그녀도 도쿄돔의 열기에 취해 있는 상태였다. 술도 조금 마셔 흥분해 있었다. 그녀는 그가 내민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러자 다니엘은 언젠가처럼 대범하게 그녀의 손을 확 끌어당겨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보러 온 건 다니엘이면서.”
도현이 말했다. 맞는 말이다. 다니엘은 그녀의 등과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다니엘이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대단한 남자의 곁에는 항상 미녀가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그 미녀라는 거예요?”
“그러면 대단한 여자의 곁에는 항상 미남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다니엘이 그 미남인가요?”
“저는 둘 다 될 수 있습니다.”
“하하하.”
그의 말이 기분 좋았다. 그는 사람을 치켜세우는 데 재능이 있었다. 아니, 그는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도현과 자신에 대한 것은 전부, 그렇게. 그의 목소리엔 마력이 있었다. 듣는 사람도 그의 말을 믿고 싶게 만드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리고 그 모두가 그들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둘만 있는 것 같았다. 맞닿은 가슴으로 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자신의 심장 박동과 맞춰 점점 빠르게 뛴다. 눈이 마주쳤다. 평소라면 이런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엘 드라카를 또 보러 왔다. 이 손해를 감수할 만한 가치가 그에게 있다는 것일까?
도현은 언제나 위험을 경계하며 살았다. 유년기가 지나고 엄마가 사라지고 유산은 소실되고 아빠는 보호를 명목으로 족쇄를 채웠다. 아마도 그녀에게서 떠난 아내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지성과 지혜가 생겼을 즈음엔 그게 다소 역겹게 느껴지기도 했다.
남자들은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접근해왔다. 그들은 그녀에 대해 알고 싶어 했지만 동시에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나이대의 그런 남자들이란. 그들은 사랑을 쉽게 입에 담았지만 원하는 것은 착취였다. 그들은 그들의 환상을 그녀에게 투영했다. 남자인 자신을 사랑해주는 아름다운 여자. 남자로서의 자신을 인정해주는, 다른 남자들도 너무나 원하는 매력적인 여자. 그들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를 획득할 수 있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자신에게 성적 만족감까지 주는 예쁜 전리품. 그래서 도현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를 지키려고 했지만 글쎄, 그래도 어느 정도는 그들이 좋을 대로 착취당한 면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도현과 사귀면 항상 기뻐했다. 도현은 좋을 때도 있었고 좋지 않을 때도 있었다. 전에 말했듯이 이러면 수지가 안 맞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이러고 있는 것은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피렌체에 갔을 때와 똑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다니엘 스톤하츠의 품에 있었다. 위험한 순간에 가장 믿을 수 있을 만한 남자를 하나 꼽으라면 도현은 이제 다니엘을 꼽을 것이다. 예전에는 그런 것 따윈 없었지만 지금은 그랬다. 그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도현을 사랑하고 충성하며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남자였다. 그리고 보통 사람은 보지도 못하는 높고 먼 곳을 바라보며 굳건히 나아가는 그런 범상치 않은 남자다.
믿음이란 사람에게 나아갈 힘을 주기도 하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특히 그것이 타인에 대한 믿음이라면. 도현은 지금 술과 흥분에 취해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곤란한 상황을 불러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여우 같은 남자에게 알면서 넘어가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남자는 다 여우야.’
충동적이었다. 도현은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어깨너머로 넘기며 속삭였다.
“금발도 나쁘진 않지만… 역시 다니엘은 원래 머리가 잘 어울려요.”
도현이 그렇게 말하자 다니엘의 입술이 희미하게 호선을 그렸다. 그녀의 말이 기분 좋은 모양이다. 둘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눈동자를 보고 있다가 서서히 입을 맞추었다. 사진을 찍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남들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일 수 있는 것은 자신만만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혹은 심하게 멍청하거나.
*
온갖 사건 사고와 스캔들로 가득 찬 TFC의 세계였지만 세계 랭킹 1위, 올해의 TFC 선수, 세계 최강의 남자, 즉,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런 스캔들이 하나~도 없는 이례적인 남자였다. 인터뷰도 하지 않고 동료 선수들과 친분을 쌓지도 않고 여자도 만나지 않고 운동과 일밖에 하지 않는 남자였다. 게이라는 의혹도 잠깐 일었다가 사라졌다. 그는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꺼려했다. 그런 별종으로 유명한 스토익한 남자가 갑자기 올 상반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인질을 구출하여 영웅이 되는가 싶더니 연이어 인체실험 스캔들이 터져 그의 비인간적 이미지가 크게 부각되었다. 엘 드라카를 넘어선 문제적 인물이 되어 가고 있던 찰나에 그의 정체를 궁금해하던 사람들이 가장 듣고 보고 싶던 스캔들이 뜬 것이다. 즉, 연애 스캔들이다. 저런 남자를 차지한 여자라니! 그것도 라스트 포틴에서 또다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난 직후였다.
미의 남신이 있다면 바로 그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는 공중으로 날아올라 그녀의 앞에 섰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갑작스레 장발을 금발로 염색하고 미녀와 당당하게 입을 맞추는 모습은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을 모두 배경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모습은 화보처럼 아름다웠다. 무표정한 기계 같던 다니엘 스톤하츠가 그 순간만은 묘한 색기가 흘러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상대의 얼굴이 묘하게 가려진 사진이었다. 그녀는 이미 개인정보검색 금지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대중 매체들이 그녀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하지 않아도 되는 사진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다음날 또 특종이 떴다.
다니엘 스톤하츠의 그녀가 바로 8개월 전 미르 킹쉴드와 스캔들이 떴던 그 여자라는 것이다. 미르 킹쉴드가 그 여자를 만나고 나서 소리소문없이 그의 걸즈가 해산되었다. 원래도 라이벌 관계에 있는 이스트드래곤과 웨스트이글의 양대 얼굴인 다니엘 스톤하츠와 미르 킹쉴드였는데 거기를 갈아탔단 말인가.
그렇다면 킹쉴드 걸즈를 없애고 다니엘 스톤하츠까지 함락한 그 여자는 누구인가!
“아, 망했어….”
올림머리를 하고 우아한 차림을 한 도현 킬스버그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낀 채 한 호텔의 라운지 바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갖가지 색의 대리석과 아름다운 샹들리에가 인상적인 고급스러운 가게였다. 그녀는 이 기사들이 뜨기 전에도 이미 다니엘 스톤하츠와 입을 맞춘 걸 후회하고 있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실수도 할 수는 있는 거지만 얼굴이 팔린 남자와 그렇게 많은 관중의 앞에서 이런 일을 한 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다.
저번 미르 킹쉴드와의 스캔들은 파파라치가 찍은 사생활 사진이 뜬 것이라 그걸로 도현의 정체를 알 수 있는 사람은 도현을 아는 사람들뿐이었겠지만 이번엔 몇만 명의 관중이 꽉 찬 도쿄돔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한 것이었다. 대중 매체에 대놓고 그녀의 얼굴이 뜨지는 않겠지만 도쿄돔의 대형 스크린에 한 번 떴던 것과 사람들의 디바이스에 담긴 사진들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2128년 엘 드라카 라스트 포틴이 끝난 지금 본선 진출을 할 64개의 팀을 추첨하는 드로우 선데이를 앞두고 있었다. 사람들이 스캔들을 소비하기에 아주 적기라는 것이다. 스포츠 뉴스란뿐만 아니라 일일 검색어 순위에도 다니엘 스톤하츠의 이름과 그의 여자친구의 정체를 찾는 검색어가 잔뜩 올라와 있었다.
이제 한국도 여자가 남자를 좀 만났다고 비난만 받는 나라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달랐다. 전에 미르와의 스캔들이 떴을 때도 언급했다시피 당당한 미르 킹쉴드 같은 남자는 수두룩해도 당당한 미르 킹쉴드 같은 여자는 없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사회적 대우가 달랐다. 전자는 부러워하지만 후자는 괘씸하게 생각한다. 여전히 사회가 남성적 인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도현은 이 상황이 너무나 불공평하다며 사회적 반기를 들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건 도현 개인에게 자살행위일 뿐이다.
“뭐…. 전에 킹쉴드랑 떴을 때도 걱정했던 만큼 큰일은 없었잖아요. 이번에도 괜찮을 거예요.”
로웰이 시원한 아이스티를 빨대로 마시며 그렇게 도현에게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죠.”
“흑…. 아, 그때 그 남자가 너무 예뻤어요. 손을 잡고 싶었어요. 아, 내가 제일 바보야.”
“에이, 괜찮다니까. 빚만 크게 안 지면 되는 거예요, 인생은!”
로웰 리는 도현 킬스버그의 가장 암담한 순간을 함께 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배포 크게 그렇게 말했다.
“천억 빚에 비하자면야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겠죠?”
도현이 다소 불안한 얼굴로 기사를 보면서 말했다. 로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렇게 불안한 거예요?”
TFC 선수를 만난다는 건 GAS로 취급받기 쉽고, GAS라는 건 얼굴을 드러낸 창녀들이다. 도현도 몇 번의 사건을 통해 실감했다. 얼굴을 드러낸 창녀가 대중에게 받는 취급이란 불 보듯 뻔했다. 남자들은 자신보다 높은 계급의 여자를 만나면 계급이 올라가지만 낮은 계급의 여자를 만난다고 해서 계급이 내려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자는 높은 계급의 남자를 만나도 결국 ‘여자’고 낮은 계급의 남자를 만나면 또 그것으로 계급이 실추된다. 로웰에게 그것을 일일이 설명할 수도 있었다.
“그냥요…. 이런 건 제가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거잖아요. 독자들도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이라는 거 무서워요.”
도현이 말했다.
“이상한 자격지심 있고 맞지도 않는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고…. 쉽게 선동당하면서 반성은 하지 않고…. 어렸을 때는 사람들이란 다들 착하고 좋은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반대였어요. 사람들은 대부분 이상해요. 그래서 무서워요.”
“뭐….”
로웰은 창밖을 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같이 산 지도 벌써 1년이 훌쩍 넘었다. 작년 5월부터니까…. 도현을 만나고 로웰의 인생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의 그녀는 세상에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던 사람이었다. 으리으리한 대저택도, 크루즈 여행도, 이런 여흥도 그녀를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된 신세계였다.
모두가 이런 세계를 접하고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능력이 있거나 똑똑하거나 아름답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두는 이제 법 앞에 평등할지 몰라도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지닌 우와 열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인정하고 자신과 세상을 받아들이기에는 또한 모두가 과잉된 자아를 가진 시대다. 그리고 도현 킬스버그는 자신이 그들에게 만만한 먹잇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르 킹쉴드도 예쁘게 생겼고 본인 능력으로 출세했고 밑바닥부터 위로 올라온 거고 여자들을 주렁주렁 달고 갈아치워도, 심지어 부모를 죽였다고 해도 동정받고 사랑받는단 말이지. 우리 작가님도 예쁘고 본인 능력으로 출세했고 밑바닥부터 위로 올라온 거고 남자들 주렁주렁 갈아치우고 부모님도 안 죽였는데도 말이야.’
성적으로 자유로운 것도 미르 킹쉴드의 경우는 사람들이 부러워할 거고 도현 킬스버그의 경우는 비난할 것이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전에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억울하다고 억울함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그러니 도현은 걱정하는 것이다. 도현과 같은 사람도 고작 연인과 입맞춤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위험을 걱정해야 했다.
“차라리 미국이나 유럽이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런 사람들도 제법 있고….”
로웰의 말에 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여긴 아직 안 돼요.”
“그렇죠….”
로웰은 그렇게 대꾸하고는 도현의 얼굴을 보았다. 선글라스를 큼직한 걸 끼고 얼굴을 가려도 고급스럽고 세련된 아우라는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뉴스와 뉴스에 달린 댓글을 찾아보고 있었다. 가끔 작품에 대한 반응에도 저렇게 스트레스받곤 하더니. 그녀는 웃는 얼굴로 도현에게 권했다.
“걱정 말아요, 작가님. 여차하면 나랑 작가님이랑 미국이든 유럽이든 가면 되잖아요? 뭐 어때요. 둘이서면 어딜 가도 좋을 텐데. 난 어디든 좋아요.”
“선생님….”
그러자 도현은 감동한 기색으로 로웰의 얼굴을 보았다. 로웰은 도현의 스크린을 같이 보면서 말했다.
“이 정도 얼굴 팔린 것쯤은 괜찮아요. 전에 이미 개인정보 검색도 금지시켜 뒀고 더 일이 없으면 괜찮죠. 스톤하츠에겐 연락해봤어요?”
“안 그래도 연락 기다리고 있는데….”
양반은 못 될 남자인지 그 순간 전화가 왔다. 도현은 그의 이름이 뜬 화면을 화가 난 얼굴로 내려다보더니 바로 받았다. 그녀는 곧바로 언성을 높였다.
“다니엘!”
[도현 씨.]
“기사 이거 어쩔 거예요! 짜증 나…!”
[구단 측에 말해서 이미 보도 자제는 신청해 두었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그때 너무 도현 씨가 보고 싶어서. 몇 번이나 만나러 와주셨는데 만날 수 없는 게 슬퍼서….]
“거짓말하지 마! 일부러 그런 거죠? 맞죠? 다니엘이 허투루 그런 일 하는 남자도 아닌 거 뻔히 아는데!”
[아닙니다. 정말로 도현 씨가 보고 싶었습니다. 도현 씨의 일이면 그 외엔 잘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거 어쩔 거냐구요! 진짜 미워요, 다니엘! 왜 그때 그랬어요?”
[도현 씨….]
그는 어쩐지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그리고 그 기색에 도현은 더 화를 냈다. 로웰은 다니엘과 통화를 하는 도현이 어쩐지 남자에게 투정을 부리는 여자처럼 보이는 것에 놀랐다. 도현은 쉽사리 주변의 영향에 떠밀리는 스타일이 아니다. 남자에게 기대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 순간엔 그의 유혹에 이끌려,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려 스스로 입을 맞추었다. 그러면 나중에 이렇게 후회할 수밖에 없다는 건 그녀도 알았을 텐데.
“스톤하츠 씨랑 정말 사이가 좋네요, 작가님.”
로웰은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딱히 대꾸를 바란 것은 아니다. 둘은 서로 제일 예의를 지켰기 때문에 제일 서먹서먹하게 보였다. 어떻게 보면 다니엘 스톤하츠가 제법 믿음직한 남자긴 하다. 속은 시커멓긴 해도…. 역시나 남자는 미르 킹쉴드 같은 것이 최고다. 교활한 남자는 저렇게 여자를 조종하려 든다.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바꾸려고 든다.
‘지나치게 똑똑하단 말이야, 스톤하츠는…. 나도 가끔 깜빡 넘어가는데.’
도현과 다니엘의 통화는 로웰에게도 그대로 들리고 있었다. 다니엘이 말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쁜 상황이 아닙니다, 도현 씨. 저와 사귀는 걸 공식화하신다면 분명히 작품의 인기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겁니다.]
그러자 도현이 눈을 크게 깜박하더니 로웰을 보았다. 로웰도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떼며 도현과 눈을 마주쳤다.
[그때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도현 씨가 현재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은 그 부분이시지 않습니까. 미르 킹쉴드나 송선호나 에반 블랙이나, 그리고 저도 포함해서… 남자들에게 금전적으로 기대고 싶어 하지 않으시니까요. 다시 자유로워지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
[사람들은 금방 잊어버릴 겁니다. 저도 올 시즌이 끝입니다.]
“…제가 다시금 예전처럼 부자가 되고 자유로워진다면 다니엘도 필요 없다고 말할지도 몰라요.”
도현은 자신의 말에 그가 어쩔 줄 몰라 할 거라 생각했다. 다니엘은 짧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도현 씨는 절 사랑하시니까요.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이건 도대체 어디서 오는 자신감이야, 이 남자…. 도현은 잠깐 자신의 디바이스를 쳐다보았다. 다니엘이 말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드로우 선데이가 지나 본선에 들어가면 아마 우리에 대한 기사는 주춤하게 될 겁니다. 그럼.]
도현은 다시금 자신의 디바이스를 보다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로웰은 약간 정나미가 떨어졌다.
‘역시 너무 똑똑하잖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걸 저질러 놓고 도현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듯이 말하는 저 태도. 도현에게도 이득이 있는 척하지만 동시에 본인은 도현과의 사이를 만천하에 공표해버리고 말겠다는 거 아닌가. 도현은 혹한 눈치였다. 그녀가 로웰을 보면서 말했다.
“괜찮은 방법일까요, 이거? 돈만 있으면….”
미르 킹쉴드와 송선호가 3대 1의 비율로 원금을 전부 갚아주었다. 집도, 배도 다시 도현의 것이 되었다. 해외에 있는 부동산은 여전히 팔려고 내놓고 있었다. 임대 수익이 들어오는 곳도 두 곳 정도는 있다. 로웰과의 작품으로 들어오는 수익은 미약하게 증가세를 이루고 있었다. 연재한 지 어언 1년. 둘 다 월에 억대의 수익을 거두고 있다고 보면 역시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도현은 그 정도에 만족할 수 없었다. 이전에 대박을 쳤을 때도 그 돈이 모자라 빚까지 졌던 그녀다. 그녀의 자유를 위해선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잠깐만요. 좀 더 생각해봐요, 그런 건. 갑자기 연예인 되겠다는 말이나 진배없잖아요. 괜찮아요?”
“아, 맞다….”
TFC 선수는 그냥 셀레브리티가 아니다. TFC 선수를 만나는 여자들도 그냥 셀레브리티가 아니다. 도현은 그런 계급의 사람이 아니었다. 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은 멋대로 날 꽃뱀 취급이나 하겠죠? 생각만 해도 짜증 나네요.”
원래는 내가 돈도 훨씬 많았는데. 도현은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실제로 꽃뱀 취급당한 사람들 중에 남자한테 제대로 돈이라도 뜯어낸 사람이 있다면 차라리 다행일 텐데요.”
“그러게요.”
그러고 둘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도현이 빨대로 커피를 휘저으며 말했다.
“역시 남자를 만나서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는 걸까요? 그냥 안 만나야 하나? 사실 안 만나도 잘 사는데.”
“작가님은 왜 남자 만나는데요?”
“그냥… 요새는 재밌으니까?”
“요새요?”
“지금 생각해보면 에반 만나기 전엔 남자 만나는 거에 좀 의무감이 있었어요. 으레 다들 남자친구 있고 만나면 남자친구 얘기하고, 없으면 뭔가 하자 있는 사람처럼 취급받잖아요.”
“그렇죠. 은근~히.”
“저 좋다고 하는 남자들, 나름 다 귀여웠어요. 제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래도 역시 그런 남자들은 은근히 강요하는 느낌이 들어서 ‘너도 빨리 날 나만큼 좋아해 줘!’라는 게 부담스럽긴 했죠. 너무 그런 게 심해지면 헤어지고 또 누가 대시하고 괜찮으면 만나고, 그러다 보면 좋아할 만한 남자가 하나쯤은 있겠지, 싶었죠.”
“그래서 그게 블랙 씨예요?”
“음, 걔는 대시한 것도 아니었어요. 길 가다가 눈이 딱 마주쳤는데 뭔가, 이렇게, 확.”
“오오.”
둘은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랬더니 정말로 평소와 같아서 딱히 따로 불안할 만한 건 전혀 없는 게 아닌가 싶었다. 도현은 ‘괜한 노파심이었나?’라고 안도하며 로웰과 같이 집으로 향했다. 집의 대문 앞에서 송선호의 차와 딱 마주쳤다. 그는 도현에게 길을 양보했다. 대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도현은 창문을 열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도 창문을 내렸다.
“웬일로 일찍 와?”
“보고 싶어서.”
그는 항상 하는 말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도현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그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는 살짝 멋쩍은 기색은 숨기지 못했다. 도현은 먼저 대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다니엘 스톤하츠의 現여친이자 미르 킹쉴드의 前여친, 재벌 3세도 만나나>
그런데 문제는 그 장면이 다음날 신문을 탔다는 것이다. 도현의 얼굴은 모자이크였지만 송선호의 얼굴은 그대로 나왔다. 당연했다. 그는 이미 재계 쪽 매스컴을 몇 번이나 탄 재벌 3세이자 청년 실업가였다.
이미 그녀의 집 근처에도 파파라치가 상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송선호와의 기사가 뜨고 나서는 드로우 선데이를 지나면 잠잠해질 거라는 다니엘의 말이 거짓말이 되어버렸다. 송선호까지 연예 가십란에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었다. 게다가 미르 킹쉴드와도 여전히 만나고 있다는 정황까지 기사에 뜨자 스포츠연예란은 물론이고 각종 포털사이트, SNS들이 무슨 축제처럼 가십을 씹어 댔다.
“이런 거… 너한테도 별로 안 좋은 거지?”
회사에 들어가는 송선호를 따라간 파파라치 사진을 보며 도현이 물었다. 송선호는 넥타이를 풀면서 말했다.
“괜찮아. 금방 가라앉겠지.”
“정말?”
도현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송선호는 분명히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썩 안 좋아 보였다. 그는 도현의 불안해하는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이번 일에 대하여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도현의 탓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날 뭘로 보는 거야.”
“그래도….”
“내가 아는 경호 업체 불러 줄게. 주변에 파파라치 있는 거 너도 싫잖아. 도촬도 싫을 거고. 아직 더운데 수영장도 계속 쓸 거 아냐.”
“응…. 그래야겠네.”
“아, 경호원은 니가 아는 사람들로 할까? 배에서 일하던 그 여자들 있잖아. 모르는 남자들 얼쩡거리는 건 나도 좀 싫다.”
“응….”
송선호는 넥타이를 다 풀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스크린을 덮었다.
“그만 봐.”
그는 그렇게 말하며 도현의 손을 잡고 훌쩍 일으켜 세웠다. 그는 도현의 방 창가의 푹신한 1인용 소파에 앉으며 그녀를 무릎에 앉혔다. 순간 그녀는 밖을 살피며 파파라치가 있나 없나 보았다. 송선호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더니 말했다.
“넌 남의 눈 같은 거 신경 안 쓰는 줄 알았어.”
“안 쓰고 싶은 거야. 그런 걸로 족쇄 차고 살고 싶지 않아서.”
송선호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도현은 자연스럽게 그의 몸에 기댔다. 그녀가 말했다.
“세상은 사실 무섭잖아. 그래도 나름대로 재미있게 잘 살고 싶었을 뿐인데.”
송선호는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약간 주저했다. 그리고 다소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나랑 결혼해. 그럼 이런 기사도 함부로 못 나와.”
“왜 지금은 못 막아주는데?”
도현이 살짝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다.
“못 막아주는 게 아니야. 애초부터 이런 기사가 이렇게 안 나오게 된다고.”
“왜?”
“알잖아.”
“…싫어.”
이런 걸로 족쇄 차기 싫어서 걱정인 건데 이걸 막기 위해서 다른 족쇄를 차라니. 다니엘의 제안은 혹하기라도 했지. 그도 도현이 이걸로 자신과 결혼을 해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은 것인지 말을 돌렸다.
“새로운 네 사진은 안 나오겠지만 미르 킹쉴드나 다니엘 스톤하츠 건 나올 거야. 나도 이걸로 너랑 사진은 못 나오게 보도 제한 신청했어.”
“그래도 네 얘기 엮어서 나오긴 할 거 아냐.”
“그건 어쩔 수 없지. 나도 이름이 있는 남잔데. 나는 너무 걱정하지 마. 네 마음 추스르는 게 우선이지.”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도현이 고개를 들고 빤히 그의 얼굴을 보았다.
“왠지 마음에 안 들어.”
송선호는 등받이에 고개를 대고 피로를 풀고 있었다. 그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뭐가?”
그냥 할 수도 있을 법한 실수 한 번에 이렇게 불안한 자신과 아무렇지도 않은 이 남자…. 그는 도현의 머리카락을 손에 감고 그녀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불안해하지 마. 너답지 않게. 금방 지나가고 가라앉을 거야.”
“…그래.”
도현은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니 관중석인지 어딘지 모를 곳에서 찍은 도현의 얼굴로 인공지능 섹스 테이프를 만든 영상이 한밤중에 인터넷상에서 빠르게 퍼져 또 기사를 크게 탔다. 업로더는 바로 영상을 삭제했지만,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금방 용의자를 좁혔다.
빠르게 범죄자를 잡은 것은 어차피 사후에 일어난 일이고 도현이 크게 모욕감을 느낀 일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하기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금까지 삽입 섹스 한 번 하지 않은 사람이다. 근데 고작 덜 떨어진 어플 하나로 얼굴도 한번 본 적 없는 추한 남자들에게 당하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퍼지고 그것으로 사람들이 그녀를 매도할 것을 생각하니 수치감마저 들었다. 이쪽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도. 분노가 가장 강하게 드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운로더와 댓글로 인신공격하는 사람들까지 전부 고소해주세요. 절대 합의 안 할 거구요. 전부 감옥에 처넣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기사 보도도 하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곧 잠잠해질 거예요.]
변호사를 포함한 모두가 도현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게 그렇게 의미가 있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단체로 그녀를 욕보이고 있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미르 킹쉴드에 대한 섹스 테이프가 나왔다고 해서 그가 이렇게 타격받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런 남자들에 대해서는 전혀 그런 것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도현이 여자이기 때문에 이것이 공격이 되는 것을 그들은 아는 것이다. 도현은 몹시 기분 나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한국에서 안 살고 싶어.”
“작가님….”
로웰이 도현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송선호도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기사가 더 나오는 걸 막고 있었고 사이버 불링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대대적인 고소, 고발을 하겠다고 기사를 쫙 뿌렸더니 조금은 진정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자극적인 영상이 나오니 스페이스 등의 SNS를 통해 말이 퍼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이런 건 사실….’
도현의 옆에 있던 에반은 잠시 고민했다. 차라리 합의를 하라고 하고 그 뒤는 자신이 처리해줄 수도 있다고 말한다면 도현은 싫어할까? 그러는 사이 다니엘이 말했다.
“도현 씨, 정말 죄송합니다. 그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아니에요. 그때는 저도 하고 싶어서 한 거고 범죄를 저지른 건 그 사람들이니까요.”
전에는 다니엘에게 화를 내던 그녀가 그렇게 잘라 말했다. 다니엘은 잠시 바깥을 보았다가 고개를 숙여 도현의 귀에 입술을 대고 도현만 알 수 있을 정도로 정말 작게 속삭였다.
“그놈들을 다 죽여드릴까요?”
귀가 간질간질할 정도로 낮고, 마성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러자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진짜? 라는 눈빛이었다.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고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자신이 말한 내용에 대해서 일말의 주저함도 없어 보였다. 도현은 입을 살짝 벌리고 그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다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고민해볼게요.”
“알겠습니다.”
도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중얼거렸다.
“역시 이건 너무 억울해. 선생님, 잠깐 얘기 좀 해요.”
도현은 로웰과 함께 뒤뜰 테라스로 나갔다. 거실에 남은 남자 둘은 잠시 그녀를 돌아보았다가 자세를 바로 했다.
“역시 일부러 그런 겁니까?”
에반이 물었다. 다니엘은 그를 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순전히 실수일 뿐입니다.”
“너무 그렇게 숨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터질 거였으면 우리 쪽에서 미리 손을 쓰는 것이 좋죠.”
다니엘 스톤하츠야 원래도 스캔들이 없는 작자니 파파라치가 별로 없다고 치더라도 이쪽에서는 꽤나 이슈가 많던 미르 킹쉴드의 경우는 분명히 파파라치가 있을 것이다. 전에 도현과의 스캔들이 뜬 것도 그것 때문이니까. 게다가 그가 갑자기 걸즈를 해산하고 한 여자에게 정착했는데 지금까지 스캔들이 더 뜨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했다. 도현이 개인정보 노출을 하지 못하도록 걸어 놨다 하더라도 방법은 다 있는 법이다, 지금처럼. 그녀가 미르 킹쉴드 말고도 다른 남자들을 셋이나 더 만난다는 것도 그런 파파라치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게 당연하다는 말이었다. 스캔들을 터뜨릴 타이밍만 보고 있을 뿐이라는 것도.
“학회입니까?”
에반은 미소를 띤 얼굴로 와인잔을 입술에 대며 물었다.
“홉 중위가 터뜨린 사우디아라비아 게이트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더 멀리할 필요가 있죠. 학회나 정부 입장에서는.”
다니엘은 보랏빛 눈동자를 스윽 돌려 에반을 빤히 쳐다보았다. 에반은 미소를 지은 얼굴로 두 손을 드는 제스처를 취했다.
“싸우겠다는 거 아닙니다. 도현이에게 말할 생각도 없구요. 전 다니엘 스톤하츠 씨의 편입니다.”
“…뭘 원하는 겁니까?”
에반은 와인잔을 흔들면서 말했다. 짙은 색의 와인이 천천히 그의 손짓에 따라 소용돌이쳤다. 그는 그것을 보면서 말했다.
“예전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이제 도현이가 힘들어하면 저도 힘들어서요. 스케줄은 나와 있을 거 아닙니까.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돕고 싶습니다.”
“…….”
“그리고…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저번 수에즈 프로젝트와 다음 아칸소 프로젝트에도 제법 많은 돈을 투자했습니다. 학회가 힘들어지면 저는 더 힘들어집니다.”
에반은 자신의 사정을 봐달라는 식으로 말했다. 다니엘은 에반을 여전히 빤히 쳐다보다가 시선을 창밖으로 다시 돌렸다. 그리고 그는 둘을 감싸는 쉴드를 쳤다. 음성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쉴드였다. 에반은 몇 번 경험해봤기 때문에 그가 그런 쉴드를 쳤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완벽 차음이 되면서 느껴지는 묘한 정적.
“어떻게 해도 그런 기사가 터질 거라는 걸 알았으면 도현 씨는 우리 모두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겁니다. 헤어지더라도 그 기사는 터질 게 뻔했지만, 그래도 전부 정리하면 분명히 파급력이 약하긴 할 테니까요.”
“그렇겠죠. 그리고 그 김에 송선호는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결혼하자고 할 게 뻔하고.”
“도현 씨는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다시 크루즈 여행길에라도 오르시겠죠.”
“그러면 차라리 낫겠지만…. 어쨌든 지금 제 입장에선 어느 쪽이든 싫군요.”
“블랙 씨와의 스캔들까지 다 터질 겁니다. 그래야지 나중에 이걸 빌미로 나나 도현 씨를 공격하는 인간들이 다시 나오지 못할 테니까요.”
“저까지 말입니까? 전 좀 곤란한 것도 많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터뜨리는 겁니다. 주의가 분산될 테니까요.”
“그건 그렇죠. 언제쯤이면 좋습니까? 제 건 제가 관리하죠.”
“기사 전문은 이미 나왔습니다. 적당히 수정하고 컨펌하십시오. 자료와 기자들 연락처도 보내드리죠.”
다니엘은 자신의 디바이스를 슥 조정하더니 바로 에반의 디바이스로 자료를 보냈다. 홀로그램으로 기사 전문을 띄운 에반은 천천히 내용을 읽어보면서 속으로 혀를 쯧 찼다. 이런 건 도대체 어디서 다 찾은 것인가. 에반도 잘 모르는 생부, 생모에 대한 정보도 적혀 있었다.
“클로즈는?”
“터지면 알 거라고 하더군요.”
“하여튼 그쪽은 일을 정말 터프하게 진행하는군요.”
이야기는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었다. 쉴드를 해제했다. 다니엘은 옷매무새를 다시 다듬었다. 도현이 언제 들어올지 몰랐다.
‘생각보다 말이 조금 통하는군.’
이 집에 사는 다른 멍청한 것들보다는 낫다. 다니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에반은 대충 정리를 하고 디바이스를 껐다. 그리고 몸을 다니엘 쪽으로 비틀고 소파의 등받이에 팔꿈치를 대고 머리를 기댄 채 매력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대단하시군요, 스톤하츠 씨. 그쪽의 도제식 교육은 엄청 힘들다고 들었는데요. 중간에 들어간 케이스라면 더더욱 힘드시겠습니다.”
“힘든 편이 낫습니다. 가장 쓸 만한 제자를 가장 심하게 굴리는 게 이쪽 교수들 전통인 것 같더군요. 앞으로 더 기대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대하신다니 더 대단하시네요. 나이도 저보다 연하던데 배울 점이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서 그 나이에 그런 사회적 지위까지 올라간 블랙 씨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과찬이시네요.”
테라스에서 로웰과 이야기를 하고 거실로 돌아온 그녀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둘은 도현이 다가오는 걸 느끼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에반은 꿀같이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았고 다니엘도 그 나름대로의 환대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앉아 있는 커다란 소파 등을 손으로 잡으며 둘을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사이가 좋네요?”
“그래서 싫어?”
“아니….”
아까는 기분이 제법 나빴던 그녀였지만 둘이 싸우지 않고 사이좋은 모습을 보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기분도 싱숭생숭한데 남자들까지 싸우는 건 딱 질색이다. 그녀는 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안 싸우니까 좋네요…. 같이 잘 지내니까 보기 좋아요.”
“네가 싫어하는 일을 할 리가 없잖아.”
“저도 도현 씨와의 약속을 어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안 그래도 요새 잔뜩 기분 나쁜 일이 많아서 컨디션이 아주 안 좋았는데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기특하달까. 도현은 애정을 섞은 눈빛으로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교활한 남자와 여우 같은 남자는 저마다의 형태로 그녀에게 미소를 보냈다.
*
도현은 결국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의 작가 D.L. 킬스버그가 바로 미르 킹쉴드, 다니엘 스톤하츠, 송선호의 사이에 놓인 스캔들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이런 정신적 손해를 고작 몇몇 사람들만 잡혀 들어가는 것으로 퉁칠 수는 없었다. 다니엘 스톤하츠의 말대로 하는 것이 어쩐지 찜찜하긴 했지만 이미 손해가 난 상태이기 때문에 더 본전 생각이 나는 법이다. 얼굴을 밝히면 더더욱 매출이 오르겠지만 도현은 그러지 않았다. 이런 사건 앞에 피해자에게 당당하게 나서라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일 뿐이다.
자연스레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는 물론이고 도현의 예전 작품 <바로 나!> 시리즈의 매출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로웰의 <다시 만난 시간>의 매출도 덩달아 증가했다. 아예 작품 연재 페이지를 빌려 입장을 밝혔고 이걸 사용하고 싶은 대중 매체는 그녀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했다. 클릭 수가 돈인 이 세상에서 그건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녀는 아주 큰 숫자를 불렀다. 어떤 곳은 냈고 어떤 곳은 포기했다.
그리고 그 뒤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와 에반 블랙의 스캔들도 터졌다. 도현은 아침 식사를 위해 부엌으로 나왔다가 아마도 송선호가 두고 간 듯한 종이 신문을 발견했다. 그가 읽는 것은 주로 경제 신문이나 정통 일간지였는데 둘 다 1면에 에반의 얼굴이 나와 있어서 절로 집어 들었다.
<혜성같이 나타난 금융계의 총아, 에반 블랙도 ‘킬스버그 보이즈’?!>
가십 지에 나와도 좋을 내용이 버젓이 일간지 일면에 나와 있었는데 그 내용이 자못 충격적이었다. 그가 세운 은행은 인신매매를 할 뿐만 아니라 거대 그룹과도 금융거래를 맺고 있었고 금세기 각광받는 신사업 투자에 관해서는 몇 년 사이 괄목할 만한 혜안을 보이고 있다는 평이었다. 그의 불우한 가정사는 물론이고 그가 거의 동유럽 마피아 보스나 다름없다는 대목에서는 도현도 입을 딱 벌렸다.
“깨우지….”
도현은 신문 너머로 자신의 침실에서 눈을 비비며 나오는 그를 보며 배신감 가득한 얼굴을 했다.
“너… 진짜 마피아 보스야?”
도현이 다짜고짜 물었다. 그러자 에반은 눈을 몇 번 깜박거리더니 그녀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그녀가 신문을 들고 있었다. 그는 약간 얼굴을 붉혔다.
“마피아는 아니야. 불법적인 건 한 번도 한 적 없는데….”
그는 살짝 창피해하는 태도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도현이 다시 추궁했다.
“왜 말 안 했어?”
에반은 곤란하다는 듯 시선을 좀 피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말에 고분고분하게 답했다.
“네가 싫어할까 봐.”
에반은 그녀의 근처로 다가와서 얇은 신문지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신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좋은 아침.”
“…….”
그녀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다소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물었다.
“그래서… 역시 싫어?”
“…고민을 좀 해봐야겠어.”
“진짜?”
그가 눈빛에 애처로운 기색을 담아 마구 쏘았다. 분위기도 있고 눈빛도 근사한 남자가 그렇게 대놓고 수작을 부렸다. 전처럼 여유로운 척만 하지는 않을 것 같긴 했지만 이러는 건 또 처음 본다. 도현은 신문으로 막아 그것을 원천 봉쇄했다.
“일단 다 읽고.”
에반은 웃는 얼굴로 그녀의 허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냉장고 쪽으로 갔다. 도현의 의심 섞인 시선이 그를 따라갔다.
“뭐 먹고 싶어? 샐러드? 팬케이크?”
“…둘 다.”
그는 화사하게 예쁜 얼굴로 냉장고 안을 보고 있었다. 그는 요리할 재료를 꺼내고 프라이팬도 꺼냈다. 도현은 신문 너머로 그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뭐 저런 마피아 두목이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된다. 그는 배운 티가 났다.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하고 처세도 기가 막히고 교양도 있고 귀티도 저렇게 나는데 무슨 마피아 같은….
미르 킹쉴드는 라스트 포틴에서의 부상으로 드러누워 있었다. 불법 영상을 만들고 유포했던 인간들은 지금 재판 중이다. 기분이 몹시 더럽다가도 송선호에게서 매출 현황이 업데이트된 자료를 보고받으면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결국 엘 드라카 끝날 때까지 내 얘기만 나오는 거 아냐? 짜증 나.”
불법 영상 제작자를 잡고 나니 도현도 마음이 조금 놓였는지 컨디션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다. 성인 및 아동에 대한 불법 영상을 사이버상에 유포한 죄는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는 강력범죄였다. 특히나 사람들의 관심도가 높은 인물을 대상으로 계획범죄를 일으키면 형량은 더 올라간다. 도현은 절대 합의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누군지 모를 그 범죄자가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할 정도의 형량을 받을 때까지 항소할 생각이었다. 응벌은 피해자가 납득갈 때까지 받는 것이 제대로 된 것이다.
그녀는 엘 드라카를 직접 보러 다니는 건 당연히 관두었다. 요새는 책을 읽고 작품 활동을 하면서 저택과 수영장에서 저물어가는 여름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었다. 도현은 다이닝 테이블 앞에 앉아 신문을 계속 보고 있었다. 팬케이크를 다 구운 에반은 크고 화려한 접시에 음식을 예쁘게 플레이팅 하여 도현의 앞에 내놓았다. 도현은 신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포크로 팬케이크를 잘랐다. 에반도 같은 접시에 있는 샐러드를 한 입 먹으며 말했다.
“그래도 본명이랑 얼굴은 안 나왔으니까 괜찮을 거야. 경비도 많고 나도 있고.”
“회사 안 가?”
“은행은 스위스에 있는데, 뭐. 나야 내가 있는 곳이 회사지.”
그리고 둘은 말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도현은 신문을 계속 봤고 에반은 그런 도현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결국 도현이 탁 소리가 나게 신문을 테이블에 던졌다.
“역시 속은 느낌이야. 뭔가. 다.”
이번 일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뭔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도현도 처음부터 묘하게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뭔가를 느낀 것이 분명한데 그게 아닐 거라고 외면하다 보니 여기까지 진행된 거 아닌가.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에반을 바라보았다. 그는 불쌍한 척을 했다.
“좀 봐줘.”
“내가 왜?”
“너한텐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단 말이야.”
“못 믿겠어.”
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자 에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살짝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응….”
그는 손으로 입가를 감싸며 얼굴을 괴었다. 도현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더 변명 안 해?”
“더… 변명할 거리도 사실 없어. 거기 나온 건 다 사실이니까.”
“먹고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든가 그런 변명도 할 수 있잖아.”
도현이 그렇게 말하니 그는 더 고개를 돌려 얼굴을 숨겼다.
“…그런 거 구질구질하잖아.”
“…….”
미르 킹쉴드의 일 때 받았던 느낌과 비슷했다. 에반과 이질감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만났던 남자들 중에 가장 자신을 잘 이해하고, 그래서 가장 그를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미르 킹쉴드는 자신의 부모를 살해한 업을 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당당…까지는 아니더라도 떳떳했다. 에반은 과거를 후회하고 있는 것일까?
도현이 말했다.
“나는 네가 팔자 좋은 부잣집 도련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에반이 답했다.
“그런 게 좋은 거잖아.”
도현은 그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팬케이크를 먹으며 불평했다.
“하아, 모르겠어. 요즘은 그냥 바보가 된 기분이야.”
아침 식사를 다하고 씻고 옷을 갈아입은 도현은 수영장 앞 테라스에 있는 커다란 카우치에 앉아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일수록 현명한 사람들의 말이 필요한 법이다. 에반도 파라솔 아래에 앉아 독서를 했다. 독서만큼 계층 격차를 줄여주는 도구도 별로 없다.
무언가는 항상 일어나고 있다. 그것을 주도하는 사람이 있고 돕는 사람이 있고 휘둘리는 사람이 있고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이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쉽게 현재에 매몰되어 버린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눈앞에 터지는 불꽃에만 정신이 팔린다. 그래서 전후 사정도 파악하지 못하고 큰 그림도 보지 못한다.
“오직 하나만 생각할 때, 그것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
도현은 책에서 나온 어떤 명사의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시련은 정말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걸까? 실제론 약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아니면 그저 비겁하게 만드는 걸까.
도현 킬스버그의 인생에 거창한 시련이나 역경이라고 말할 만한 것은 13살 때 가세가 기울어지고 어머니와 헤어진 것, 18살 때 동생이 불치병에 걸리고 헤어진 것, 그리고 최근에 빚 때문에 팔려 갈 뻔한 처지에 놓인 것 정도일까. 10대 때는 어린 도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뿐이라 불합리에 분노하면서도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의 무력감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글을 쓰기 시작하며 그녀는 경제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독립할 수 있었다. 스스로의 능력에 기인한 자존과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행복했다. 무엇에도 부족함을 느낄 수 없었다. 누구의 영향에도 휘둘리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스스로의 일은 모두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다. 세상은 나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세상을 통제하는 힘은 오로지 그녀만이 가질 수 있었다. 그 충만함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겠지. 세상의 가장 좋은 것들만 누리고 살던 4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렸을 때의 일보다도 빚에 의한 시련은 도현을 굉장히 힘들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정말 잘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무절제한 소비로 인한 재정 파탄? 과도한 빚과 연체에 의한 신용추락?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많은 말을 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설명은 되지 못했다.
도현 킬스버그라는 인간의 자존이란, 결국 상황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그런 얄팍한 것이었나? 미르 킹쉴드가 채무를 다 갚아주고 난 이후 도현은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엄마는 말했다.
[넌 그렇게 살지 않아도 돼. 내 딸이니까.]
에반이 말했다.
[세상에 네가 가질 수 없는 건 없어.]
로웰 리는 말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는 거죠.]
동생은 말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다시 만나면 되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린 괜찮을 거야.]
미래에 대한 두려움 따윈 엄마 말처럼 두려워해야 하는 사람들이나 갖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현은 이제 그런 사람들처럼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을 불신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무서워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다시금 스스로를 믿고 살았다가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이미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샌가 위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한 불쾌감만을 곱씹게 했다.
라스트 포틴에서 다니엘 스톤하츠와 만인의 앞에서 키스를 한 것은 상당히 자유로운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위험에 대한 실감을 잠깐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도현은 후회했다.
‘남자를 통해 자유롭다고 느끼는 건 다 거짓이야.’
도현이 지니호에서 스트리퍼 하나의 엉덩이를 치는 모습이 찍혔다면 차라리 이런 무력감은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니엘과 찍힌 사진은 찍히는 과정부터 구도까지 전부 도현을 ‘다니엘 스톤하츠의 여자’로만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으음….”
도현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역시 그에게 속은 것일까? 모르겠다. 세상에 그만큼 똑똑한 인간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옆에 있으면 당연히 휩쓸릴 수밖에 없다. 그의 의견이 항상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똑똑하다는 것을 잘 알고, 또한 사람의 마음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인간이라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건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새에 그럴지도. 그들에게 자신의 우월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도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수영장 반대편 선베드에 앉아 있는 금발 머리의 그 남자에게 닿았다.
‘2년 전에 저 남자를 떠났던 건 그것 때문이었을까.’
도현은 책을 덮었다. 그는 여전히 그림 같은 모습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햇빛에 일렁이는 빛이 그의 골든 블론드를 반짝거리게 만들었다. 뒤로 펼쳐진 잔디와 담장, 장미, 모두 그에게 찰떡같이 잘 어울렸다. 마치 모든 것이 그를 위해 있는 것처럼.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이 집은 도현과 그가 지었으니. 도현은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갔다.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아?”
그는 책에 집중하고 있었는지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도현의 물음에 에반이 되물었다.
“무슨 말이야?”
“과거. 과거가 지금의 너를 얼마만큼 차지하고 있는 것 같냐고.”
“글쎄.”
그는 그렇게 말하며 책을 덮었다. 도현은 그의 선베드에 앉았다. 도현은 선베드에 팔꿈치를 대고 머리를 괴었다. 옆으로 누워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또 물었다.
“그럼 그 과거와 현재를 나누는 기준은?”
에반도 도현과 똑같은 자세로 마주 보고 누웠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거울을 들여다보듯 보고 있었다.
“너.”
그가 답했다.
*
“하아.”
솔직히 이번 도현 킬스버그와 다니엘 스톤하츠의 스캔들로 가장 직격타를 맞은 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송선호였다. 다행히도 부모님 두 분 다 기약 없는 크루즈 여행을 떠나시는 바람에 면대면으로 추궁을 들을 일은 없었지만 전화로 꾸중(주로 아버지, 어머니는 감탄에 가까웠다)을 들어야 했다. 사촌이나 삼촌, 이모, 할머니에게까지 연락을 받았다. 회사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거리고 별로 연락도 없던 학창 시절 친구들이나 대학 동창들에게도 연락이 왔다.
천하의 송선호가 지금 어디 어장 속 물고기 중에 한 마리인 것이냐. 언제부터 만난 거냐. 방송 타서 쪽팔려서 어떡하냐. 그 여자가 그렇게 예쁘냐. 구경 좀 하자. 그래서 넌 몇 번째냐.
흑역사라고 할 만한 건 이미 도현 킬스버그 앞에서 구구절절 저질러 봤기 때문일까. 오히려 올 게 왔다는 기분이 컸지만 그렇다고 별것도 아닌 놈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게 유쾌할 리가 없었다.
거기에 문제가 그것뿐이랴.
‘미르 킹쉴드, 다니엘 스톤하츠, 에반 블랙….’
리스트가 자꾸 늘어나기만 한다. 예전까지 합치면 당연히 더 길고 미래를 생각하면…. 아침부터 멋지게 차려입은 송선호였다. 그는 앞치마를 허리에 두르다가 멈칫했다. 미간에 ‘내 천’자가 강하게 잡혔다.
‘설마, 설마, 설마…! 앞으로 이것보다 더 늘지는 않겠지. 설마!’
아무리 도현 킬스버그라고 해도. 아방궁을 지을 게 아니라면. 설마. 설마! 송선호야 난봉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바람의 ‘바’자도 인생에 끼어들 일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남자든 여자든 상대를 가리지 않고 만나는 사람은 묘하게 자존감이 낮고 불안이 많은 스타일들이다. 얄팍한 관계도 숫자를 불리면 대단한 것이라도 될 줄 아는 것일까.
하여튼 도현은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가 먹고 입고 다니는 것, 하는 말만 들어도 알겠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몹시 사랑했다. 고상한 취향과 우아한 심미안을 가진 여자였다. 남자든 음식이든 보는 눈이 까다롭다. 지금 이 집에 사는 4명의 남자만 해도 이렇게 쟁쟁한데 설마 여기서 더 인원이 늘어나지는 않겠지. 설마. 설마.
송선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세상 시련을 다 겪은 남자인 양 한숨을 푹푹 쉬던 그는 허리에 검은 앞치마를 멋지게 둘렀다. 아침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심란할 땐 그냥 뭐든 하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11월 중순이다. 퍼스트 세븐이 한창이다. 이스트드래곤과 웨스트이글 모두 드로우 선데이를 무사히 지나왔다. 그가 도현과 만나기 시작한 지도 벌써 8개월이 넘었다. 처음엔 어떻게 되나 싶었는데 사람이 적응 못 할 것은 없나 보다. 여전히 열 받는 일은 많았지만, 열 받으면 그냥 집안일을 했다. 그러면 자신이 이 집에 그래도 쓸모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좀 나아졌기 때문이다.
올해 엘 드라카 라스트 포틴 때 터진 스캔들 때문에 도현은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다. 불법 합성 영상이 뜨지를 않나, 파파라치가 쫓아다니질 않나. 잘못한 것도 없이 매도당하니 어떻게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가 있겠는가. 그게 억울해서라도 돈은 벌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녀는 연재 플랫폼에, 그러니까 송선호의 회사가 운영하는 그 플랫폼에 작가 가 스캔들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밝히고 전 세계, 특히 아태 지역 매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지금도 늘어나고 있었다. 원래는 웹 콘텐츠 플랫폼 <리엔>을 사용하지 않던 엘 드라카 팬의 신규 유입이 많아졌다. 콘텐츠 매출은 물론이고 광고 매출도 엄청 올랐다. 덕분에 송선호도 돈을 번 것이다. 기분이 많이 찜찜하긴 했지만.
‘내가 뭐가 아쉬워서 사생활을 팔아 돈을 버냐…. 도현이도 비슷한 생각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막을 수 없다면 실속이라도 챙기고자 하는 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찜찜~하다. 그러니 도현도 썩 얼굴이 좋지만은 않은 것이다. 그녀가 스캔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건 그도 싫었지만 생각해보면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지 싶기는 했다. 올 초에 이미 미르 킹쉴드와의 스캔들이 터졌었고 그 이후로 미르 킹쉴드와 다니엘 스톤하츠의 과거 문제도 연달아 기사가 터졌다. 그런 상황에서 파파라치들이 그들의 사이에 있는 도현의 존재나, 송선호의 존재를 몰랐을 것 같지는 않다. 터질 게 터졌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
‘막을 수 없는 기사이긴 했지만 안일했다.’
송선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라스트 포틴도 끝났고 사람들이 제일 엘 드라카 가십을 많이 소비할 때니 그들은 이때만을 기다린 것이다. 그 사이 남자도 하나 더 추가되었으니 이야깃거리는 더욱 풍성해졌고, 요새 정세가 돌아가는 걸 보면 저번 사우디 게이트를 묻으려고 하는 것 같은 타이밍이기도 하고. 한창 시끄러울 당시의 송선호야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사업과 그녀와 자신의 데미지 컨트롤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크게 보지는 못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대충 그런 느낌이다. 굳이 확인하려고 하자면 할 수는 있겠지만 필요는 없겠지.
송선호는 아침을 준비해서 양손에 들고 뒤뜰로 향했다. 식기와 쟁반 모두 검은색으로 옻칠이 된 고급스러운 일식 스타일이었다. 쟁반 위에는 서너 개의 벤또 스타일 식기가 올라와 있었는데 하나에는 고슬고슬한 쌀밥 위에 간장 등으로 간하여 구운 연어 스테이크가 예쁘게 올라와 있었다. 쪽파도 썰어 위에 올려 모양을 냈다. 그리고 칸이 나눠진 다른 식기에는 레몬과 와인, 식초, 약간의 타바스코로 간한 생굴 두 쪽과 바싹한 새우튀김, 정갈하게 썰어 놓은 달달한 계란말이, 데친 브로콜리, 짭짤하게 입맛을 돋울 장요리가 있었다. 거기에 유자 드레싱을 뿌린 신선한 샐러드와 몸을 따뜻하게 해줄 두부 미소시루도 있었다. 금색 종이로 감싼 수저마저 예뻐 어디 갖다 팔아도 될 것 같았다.
그녀는 테니스를 즐겨 치고 춤추러 다니는 것도 좋아하기 때문에 칼로리 소모량이 꽤 높다. 적당한 식생활은 유지해줘야 한다는 소리다. 입맛도 더럽게 고급이라 맛없는 건 입에도 안 댄다. 아침은 간단히 먹는 게 모토인 그였지만 힘을 좀 내봤다. 근래 도현이 안 받던 스트레스를 받아 다소 입맛을 잃어 살이 약간 빠졌기 때문이다.
‘솔직히 도현이 날씬한 것도 좋지만 더 쪄도 될 것 같아, 좀 더.’
도현은 키도 크고 몸의 굴곡도 여성스러우면서 세련된 스타일이라 골반은 쭉 나와도 엉덩이나 가슴이 너무 크다는 느낌은 아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딱 적당한 크기였다. 다른 곳은 더 빠질 곳도 없다는 소리다. 요새 살이 약간 빠졌다는 느낌이 들더니 확실히 가슴부터….
“대박! 큭큭큭! 작가님~!”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더니…. 아, 선생님…!”
송선호는 뒤뜰로 나갔다. 거기엔 도현 킬스버그와 로웰 리가 딱 달라붙어 같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멀티스크린 하나를 같이 계속 보고 있었다. 어째 오늘은 둘 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아침 먹어, 도현아. 선생님도 같이 드시죠.”
“오, 송 사장님. 오늘 아침도 수고 많으십니다.”
송선호는 카우치를 돌아 테이블 위에 식사를 두었다. 그리고 본인의 토스트와 커피를 가지고 다시 돌아왔더니 그들이 식사엔 손도 대지 않고 여전히 스크린만 보면서 키득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대체 뭐 봅니까?”
송선호는 카우치의 등받이를 손으로 짚고 그들이 뭘 보는지 훔쳐보았다.
“어?”
송선호는 눈을 한 번 깜박였다. 도현이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매출 현황표를 달라길래 그냥 그녀의 매출 정보에 접근이 가능한 회사 인트라넷 계정을 하나 만들어주었다. 인공지능이 자동으로 그래프를 만들어주는 기능이 딸려 있었다. 그녀의 매출이 스캔들 당사자라는 걸 밝히고 나서부터 급속도로 늘더니 에반 블랙과의 스캔들을 기점으로 정말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리고 오늘 또 변곡점이 하나 생겼다.
“얘가 정말 미쳤나 봐. 이런 인터뷰를 다 하고.”
“뭔가 적당한 타이밍에 딱 했다 싶지 않아요?”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매출표는 멀티스크린에 떠 있었고 멀티스크린을 통한 홀로그램으로 기사가 하나 떠 있었다.
<‘킬스버그 보이즈’ 에반 블랙, 첫 독점 인터뷰! 그녀와의 운명적 만남부터 헤어짐까지 풀 스토리 독점 공개!>
자기가 무슨 연예인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잔뜩 빼입고 웃는 얼굴로 찍힌 그 양아치 새끼의 모습이 크게 박혀 있었다. 송선호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가 자신의 디바이스를 조작하여 기사 전문을 찾아냈다. 그리고 조용히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E(Evan Black): (그는 짧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웃는 모습이 참 근사한 남자다) 저는 그녀와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만 생각보다 다들 사이가 좋더군요. 특히 송선호 사장 같은 경우는 5년 전부터 알던 사이였습니다. 모르는 얼굴만 있었으면 불편했을 텐데 많이 도움받고 있습니다. 덕분에 저도 불편함 없이 잘살고 있습니다. 그녀가 정말 대단하죠.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I: 이런 질문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분명히 킬스버그 씨가 좋아하는 정도가 각기 다를 텐데요. 예전 역사 드라마를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왕이 총애하는 아내가 있고 소박맞는 아내가 있고…. 어떻습니까? 에반 씨는 총애받는 쪽입니까?
E: 하하. 음(그는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이것만큼은 그녀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제가 사랑하는 만큼 그녀가 절 사랑해주길 바라지는 않습니다. 모든 걸 다 가져도 그녀가 더 이상 곁에 없다는 게 싫었습니다. 저한텐 모든 것 위에 그녀가 있지만 그녀에게 저는 모든 것 중의 하나일 뿐이겠죠. 상관없습니다. 첫 번째가 아니더라도 괜찮습니다. 다만 그녀에게 제가 제일 특별한 남자이고 싶을 뿐입니다.
I: 킬스버그 씨에게 특별한 남자란 무엇인가요?
E: 글쎄요. 그것도 그녀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그녀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남자’라는 걸 생각했을 때 바로 떠오르는 남자가 저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녀의 사고방식, 가치관, 인생의 목표와 목적을 세우는 데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남자. 그럴 수 있는 남자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저밖에 없을 겁니다. 일단은 그게 그녀에게 특별한 남자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I: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그럼 에반 씨가 보았을 때 킬스버그 씨에게 가장 총애받는 남자는 누구입니까? 재벌 3세인 송선호 사장? 미르 킹쉴드 선수? 다니엘 스톤하츠?
E: 이건 아마 누구한테 물어봐도 이견이 갈리지 않을 것 같네요. 미르 킹쉴드 씨입니다.
I: 앗, 정말입니까?
E: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I: ‘역시!’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E: 하하. 여자들 보는 눈은 다 똑같은 모양이군요.>
이 새끼가 지금 기자한테 뭘 신나게 떠들고 있는 것인가! 반박하고 싶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특히나 마치 자신과 그가 사이가 좋은 것처럼 대답을 한 게 제일 눈에 거슬렸다. 미르 킹쉴드가 도현에게 가장 총애를 받는다는 대답도…! 젠장! 그런 걸 왜 곧이곧대로 얘기하고 지랄인가, 이 미친놈이!!
그는 기자에게 지금 도현과 자신의 관계(feat. 딴 놈들)와 이전에 그녀와 만나고 헤어졌던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은 그녀의 작품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가 지금 그들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마무리 지었다. 그러니까 저 ‘작품이 그들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미심장한 언급 때문에 작품의 매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미친 거 아냐?! 누가 그런 변태 같은…!’
그 작품의 내용이 무엇인가! 여자 주인공에게 남자 주인공들이 절찬리에 처맞으면서 조교 당하는 내용 아닌가! 남자 주인공들은 죄다 맞으면서도 그녀에게 어쩔 줄 몰라 빌빌거리고! 사람들이 그걸 보고 자신을 상대로 그런 상상을 할 거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스트레스를 받았다. 도현이 가짜 섹스 테이프가 나왔을 때 스트레스를 받는 걸 보면서 그도 백방으로 빨리 손을 쓰려고 애썼지만 쉽게 공감할 수는 없었는데 이 상황을 맞닥뜨리니 바로 이해가 되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요, 작가님. 우리 작품이 재미가 없는 게 아니었다니까. 사람들이 마이너한 소재라고 미리 거르고 안 봐서 그런 거였다고. 아무리 신규 유입 많아져도 재미없으면 끝까지 안 보는데 첫 화부터 끝까지 구매해서 읽은 비율이 40% 가까이 되잖아요. 이거 진짜 쩌는 거죠.”
“하, 선생님…. 이 매출이 완결까지만 유지되어도…. 꿈만 같아요…. 다시 일주일에 2회씩 연재하라고 해도 할 것 같아요.”
“물 들어온 김에 노 저으라고 일주일에 1회 연재까지는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해볼까요?”
“저는 비축분 꽤 있으니까 그냥 2회 연재할래요. 돈…. 역시 돈이 최고야. 제 To-Buy 리스트, 처음부터 끝까지 다 살 거예요. 전부 다…. 하….”
도현은 꿈을 꾸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그것보다 돈을 몇 배나 많이 가진 남자들을 볼 때도 저런 얼굴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이 그만한 돈을 버는 것에는 저런 얼굴을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송선호는 도현의 얼굴을 봤다가 다시 에반의 인터뷰 기사를 보다가 디바이스를 옆에 던지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아….”
스트레스받는다. 이 새끼는 왜 이렇게 괜찮은가? 질투도 안 나나? 자존심도 안 상하나? 이런 걸 제삼자에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내뱉을 수가 있는가? 이 새끼는 배알도 없나?
‘도현이에게… 특별한 남자…….’
미르 킹쉴드는 자신만만한 게 누구의 눈에도 다 보였다. 그는 자신이 도현에게 가장 사랑받는 남자라고 자신하고 있었고 그 자신에 걸맞을 정도로 도현은… 그 걸레 새끼에게… 많은 애정을 주고 있었다. 그가 도현을 대하는 태도는… 많은 부분에서 송선호가 하고 싶은 것과 일치했다. 그래서 분했다. 저런 멍청이를 하필 왜.
만약에 자신이 에반 블랙의 입장이라면 억울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녀를 완전히 차지했던 건 그 양아치였다. 분하지만, 정말 분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던 존재였고 그래서 그녀가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그의 손을 붙잡고 따라가 버리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놓치고 이제 와 네 명 중 한 명으로 전락해버린 거라면 당연히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리고 이 인터뷰….
‘이제는 이것들이 이상한 건지 내가 이상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 잘 벌리니까 창작 의욕이 샘솟습니다! 벌써 완결 후 외전 내용까지 생각해 뒀습니다.”
“선생님~ 우린 천생연분인가 봐요. 저도 그 생각했는데.”
“그럼 밥 먹고 일합시다!”
“네~”
그들은 드디어 멀티스크린을 내려놓고 식사를 시작했다. 도현은 한 입 먹더니 눈을 감고 음미했다.
“진짜 맛있다. 돈 벌고 먹으니까 더 맛있어. 송선호~”
“어…. 맛있게 먹어.”
송선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미지근한 커피를 마셨다. 로웰과 도현은 그대로 앞으로의 내용 전개에 대한 이야기를 활발하게 나누며 디저트로 낸 과일까지 싹 해치웠다.
“씻고 나올게요~”
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로웰도 신나서 그림을 그리다가 문득 송선호를 보았다.
“송 사장~ 왜 그러고 있어요?”
“예? 예?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랑 작가님뿐만 아니라 송 편집장도 돈 벌었는데 기뻐해야죠. 새 빌딩 짓는다면서요.”
“예…. 기쁩니다.”
그가 열기 없이 대답하자 로웰이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작가님이 능력 있어서 돈 잘 버는 게 싫어요?”
이렇게 돈 버는 게 로웰이라고 다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 말했지 않던가. 사람들은 부유함이 불행함을 불러올 것이라 정신승리 하지만 원래 인간의 인생이라는 게 쉽게 불행해지는 경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가난함 속에서 불행한 것보다 부유함 속에서 불행한 것이 훨씬 낫다.
“네? 아뇨! 아닙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송선호가 깜짝 놀라 그녀를 보았다. 로웰이 말했다.
“작가님이 돈 벌면 또 사치하고 여행이라도 떠날까 봐 잔소리하려는 줄 알았죠.”
“…….”
그것도… 문제군. 송선호는 크로와상은 손도 안 대고 커피도 반쯤 마시다가 말았다. 그는 지끈지끈한 눈썹을 꾹꾹 누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방으로 올라가 넥타이를 매고 베스트와 상의를 갖춰 입었다. 넥타이핀, 행커칩, 커프스 버튼을 달고 머리를 정리한 뒤 거울을 보았다. 짙은 회색에 커다란 체크무늬가 자연스럽게 들어가 있는 고급 정장에 풀윈저 노트로 맨 고동색 실크 넥타이를 한 멋진 남자가 있었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나 같은 남자를 두고 왜.’
그는 언제나처럼 생각하고 거울 속의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도현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녀는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와 커다란 바스타월로 몸을 감싸고 머리카락도 커다란 수건으로 감싸 올린 후 콧노래를 부르며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고 있었다. 그녀는 송선호가 방에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우리 자기~ 오늘도 멋진데?”
그녀는 송선호의 넥타이를 살짝 잡아 끌어당기며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그냥 기분이 좋은 게 아니라 정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송선호는 순간 ‘돈이야? 나야?’라고 물어볼 뻔했다. 그는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발그레한 그녀의 하얀 피부는 몹시 촉촉해 보였고 입은 것도 없는 그녀의 모습은 허술했다. 그가 머리카락을 감싼 그녀의 수건을 끌어 내리니 그녀의 섹시한 남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내가 자기 회사에 돈 벌게 해줬는데 자기는 나한테 뭐 해줄 거야?”
도현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는가 싶더니 그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송선호는 팍 인상을 썼다.
“인세 받잖아.”
“에게, 이게 퉁쳐져? 이번엔 내 사생활이 팔렸는데.”
“나도 팔렸어.”
“그게 같아?”
“…뭐… 해달라고.”
“해달라고 하면 해주게?”
“그럼 내가 못 해준 건 뭔데?”
“흐응, 오늘은 또 왜 이렇게 까칠해?”
도현은 그의 목덜미를 살살 긁으며 얼굴을 더 가까이했다. 송선호는 그녀의 눈동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끌리고 있었다. 그녀가 오늘도 알 듯 모를 듯한 태도로 유혹하고 있었다. 덥석 물었다가 또 그녀가 괴롭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뱃속이 간질간질해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가고 싶기도 했다. 아까 전의 고민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도.
도현은 송선호를 자신의 침대에 앉게 하고 그 위에 올라탄 뒤 그의 어깨를 밀어 침대에 넘어뜨렸다. 표정을 보니 ‘오늘은 이 남자를 어떻게 요리할까?’라고 쓰여 있었다.
“나 회사 갈 거야.”
“사장님인데 좀 늦게 간다고 아무도 뭐라고 안 해.”
“아버지 회사도 가야 해.”
“그건 네 사정이지.”
송선호는 그녀의 바스타월을 확 끌어내렸다. 그녀가 꺅하며 손으로 그걸 잡았다. 송선호는 자세를 바꿔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내가 괴롭히지 말랬지!”
“앗! 송선호! 하하하!”
그가 도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그녀의 몸을 만졌다. 그녀도 송선호의 옷 안으로 손을 넣어 셔츠 위로 그의 가슴을 만졌다. 그녀가 무릎을 세워 그의 다리 사이를 압박하자 송선호는 인상을 썼다. 그게 정말 섹시했다. 도현은 다시 자세를 반전하여 그의 위에 올라탔다. 바스타월은 아무렇게나 그와 자신의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녀의 등이 햇살 아래 다 드러났다.
“회사 가기 싫지?”
도현은 그의 코를 손끝으로 누르며 속삭였다. 송선호는 벌게진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몸에 힘을 빼고 머리를 침대에 누이고 불만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너 때문이잖아.”
정말 기분 좋은 얼굴로 그녀가 씨익 웃었다. 송선호는 그녀의 촉촉한 등을 천천히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렇게 좋아?”
“응? 뭐가?”
“이번에 돈 번 거.”
“음, 오늘 전까지만 해도 그냥 그랬는데 이 정도로 벌면 꽤 괜찮은데? 본전은 충분히 찾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도대체 얼마나 나왔길래….”
아까 전엔 대충 봐서 모르겠다. 회사에 가서 한 번 자세히 봐야겠다. 송선호가 고개를 갸우뚱하니 도현이 설명했다.
“올해 말까지 무난하게 저번 작품만큼은 나오지 않을까? 어차피 올 엘 드라카 끝날 때쯤 완결 날 예정이었고.”
“진짜? 그 정도로 매출이 뛰었어?”
“엉~ 그렇다니까.”
“진짜 돈 벌었네….”
도현 킬스버그와 로웰 리가 둘 다 그 정도 벌었다면 진짜 새 빌딩을 짓겠다. 그녀가 이렇게 기분 좋아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송선호는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작가님이 돈 벌면 또 사치하고 여행이라도 떠날까 봐 잔소리하려는 줄 알았죠.]
갑자기 로웰의 말이 떠올랐다. 송선호는 그녀의 허리를 좀 더 힘을 줘 끌어안았다.
“돈 벌면… 뭐할 건데?”
“일단 미르한테 돈 갚고 드레스룸 다시 채우고 스포츠카 한 대 사고 수영장 증축 공사하고 퀸룸 인테리어 다시 하고….”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그렇게 읊었다. 송선호는 그녀가 배에 대한 얘기를 하자 움찔했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또 여행 가고 싶어?”
“당연히 가고 싶지. 연말에 휴가 가는 거 계획 바꿔야겠어. 완~전 호화스럽게 가야지. 친구들도 잔뜩 초대하고. 아, 어머니께도 한 번 여쭤봐. 중간에 어디서 만나도 재미있을 것 같아.”
그녀는 신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송선호는 속으로 한탄했다.
‘누가 남자는 배고 여자는 항구라고 했나….’
어머니도 그렇고 도현도 그렇고 여기는 여자들이 배처럼 미련 없이 항구를 떠나 세계를 누빈다. 송선호는 살짝 인상을 쓰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 거 말고. 또 몇 년씩 나가고 싶냐고.”
“응?”
도현은 눈을 깜박거렸다.
“별로 생각 안 해봤는데. 음, 그럴까? 로웰 선생님은 한 번도 그렇게 여행 못 다녀보셨는데 이참에 내가 세상이 얼마나 좋은지 한 번 알려드릴까? 좋은 생각 같아? 1년? 2년이면 좋을까?”
“…….”
솔직히 송선호는 조금 상처받았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건 전혀 고려를 안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떠나버리면 우리가 이렇게 함께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왜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내냐… 병신….’
송선호는 허리를 일으켰다. 그는 옷매무새를 바로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응? 왜 그래?”
“옷이나 입어.”
“왜 그래?”
도현은 그런 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가버리려고 했다. 도현이 그의 허리띠를 잡아당기자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도현이 말했다.
“혼자 꽁해 있지 말고 말로 해라, 말로.”
“꽁한 게 아니라…! 윽. 젠장….”
“뭐? 또 왜?”
도현은 대충 바스타월로 가슴 위를 덮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도현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잠깐 내적갈등을 겪은 후 작게 말했다.
“가지 마….”
“어딜?”
“1년이나 2년씩… 나가지 말라고. 어딜 간다는 거야. 내가… 여기 있는데….”
그는 평소처럼 강한 척하려고 했지만 중간에 살짝 처연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도현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소리를 내서 웃었다.
“하하하. 아, 송선호. 진짜. 하하하.”
“웃지 마!”
“하하하. 아니, 자기가 먼저 말 꺼내 놓고 뭐 하는 거야?”
그건 그도 생각했다. 그는 얼굴이 벌게졌다.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난처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나 이제 진짜 간다.”
“또 계속 어딜 간대. 이리 와.”
“간다고!”
도현은 그의 허리띠를 다시 끌어당겨 다시 그를 침대에 쓰러뜨렸다. 그가 난처하고 억울한 표정으로 도현을 올려다보았다. 도현은 잘 차려입은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너야말로 오늘 어디 못 가. 나 더 기분 좋게 해줘야지.”
“싫어!”
“후후.”
도현은 그를 회사에 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를 싹 벗겨 먹었다.
*
이제 슬슬 클로징 할 때가 됐는데, 라고 생각했다. 에반은 서울에 임시로 차린 전망 좋은 사무실에서 한 회사의 투자 IR을 듣고 있었다. 다 듣고 나서는 회사 사장과 식사를 하러 갔다.
“요새 사장님 얼굴이 안 나오는 곳이 없더군요. 너무 잘생기셔서 사진도 기가 막히네요.”
이번 회사 사장은 남자였다. 그는 그렇게 연신 감탄하면서 질문했다.
“그나저나 애인분 사진은 안 나오는 겁니까? 진짜 궁금한데요. 아, 블랙 사장님 디바이스엔 있을 거 아니에요. 저한테만 살짝 보여주시면 안 되나요?”
“그건 곤란하네요.”
돈이 필요 없는 건가. 에반은 여느 때처럼 가볍게 미소를 띤 얼굴로 답했다. 세상 어디나 똑같겠지만 사업한다고 설치는 인간들은 딱 두 부류로 나뉜다. 정말 손꼽히게 뛰어난 인재이거나 허영심에 가득 찬 병신. 처음엔 아니었다가 나중에 후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 오너가 회사에 돈이 필요해서 투자를 받으러 왔는데도 처신을 이 정도밖에 못 한다는 건 언제든 문제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회사라는 소리다. 에반은 그렇게 이미 결정을 내렸다.
“그러지 마시고 정말 한 번만….”
그가 주제 파악도 못하고 자꾸 에반의 사생활적인 걸 묻자 에반도 미소를 지우고 수저를 놓았다. 그때 그의 디바이스로 알림이 왔다. 그는 웃는 얼굴로 양해를 구했다.
“아, 실례합니다. 이건 확인을 해야 해서….”
그는 그렇게 말하며 디바이스를 보았다. 그의 눈이 엄청나게 커졌다.
“뭐?! 미친…!”
그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왔다가 그가 입을 확 막았다. 그는 에반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게….”
그는 에반에게 변명하면서도 디바이스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에반은 슬쩍 그의 화면을 훔쳐보았다. 화면의 헤드라인에서 ‘이스트드래곤’이라는 단어를 하나 보았다. 그 뒤로 그는 완전히 집중력을 잃고 허둥지둥거렸다. 에반은 그가 엘 드라카 도박에도 꽤 많은 돈을 쏟았을 거라고 짐작했다. 재미 수준을 넘어 도박에 손대는 CEO는 대개 회사를 말아먹을 가능성이 크다. 식사를 마치고 헤어질 때쯤 에반은 웃는 얼굴로 그를 배웅했다. 그제야 그는 정신을 퍼뜩 차리고 에반의 손을 꽉 잡으며 부탁했다.
“그럼 저희 회사, 정말 잘 부탁드립니다, 블랙 사장님.”
“네,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를 보내고 에반은 한숨을 쉬었다. 왜 이런 게 그의 앞에 오기 전에 걸러지지 못하는 걸까? 여자 좋아하고 도박 좋아하는 남자들이 같은 남자들에겐 호탕하고 리더십 있는 사업가로 보이는 건 다 착각이다. 그런 게 거품이지. 에반은 다소 심드렁한 얼굴로 커피숍 의자에 대충 기대앉은 채 디바이스로 기사를 검색해보았다.
‘아, 이게 클로징인가?’
그도 엘 드라카에 대해서는 남들만큼 알고 있을 뿐이었다. 도현 덕분에 몇 번 경기를 보러 간 게 다였다. 가장 최신 기사의 제목은 이랬다.
<충격! 치엔이 루카스 사망! 동료 선수를 살해한 것에 대한 보복 살해로 추정!>
지금까지 꾸준히 검색어 순위나 기사 순위에 킬스버그 보이즈와 관련된 단어나 이름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다 내려가고 전부 이 ‘치엔이 루카스’라는 선수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스트드래곤, 치엔이 루카스, 이스트드래곤 센터 포워드, 루카스 살해 범인, 루카스 살해 이유 등. 에반은 기사 전문을 모두 읽었다. 딱히 흥미로울 것은 없었다. 다른 기사를 살펴보았다. 보복 살해가 아니라 치정 살해를 추정하는 기사도 있었다. 에반은 건성으로 화면을 스크롤 했다.
‘학회가 이런 별것도 아닌 남자한테 관심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그 교수님들은 생각보다도 더 사람한테 관심이 없다고. 엘 드라카라는 단어가 뭔지도 모를 것 같은 사람들인데.’
이런 걸 컨트롤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다. 캘리 박 교수는 사람 이치에도 밝지만 이런 것까지 직접 관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가 믿을 만한 실무자가 있다는 말인데….
‘다음에 다니엘 스톤하츠를 슬쩍 찔러봐야겠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디바이스를 끈 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오늘 일은 이 정도로 해야겠다. 수영장에 뜨거운 물을 채워 수영을 할 생각을 하며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집 안에 수국 향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최근 수입이 늘어나며 이런 씀씀이를 아끼지 않게 되었다. 이런 것이 하고 싶었으면 해줬을 텐데. 기억해 둬야겠다. 카우치에는 쇼핑백이 한가득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롱 체어엔 로웰 리가 드러누워 있었고 그녀의 눈 위엔 차가운 수건이 올라가 있었다. 도현이 그녀의 옆에서 작은 부채를 들고 로웰에게 부채질을 해주고 있었다. 도현은 에반을 발견하고 한숨을 쉬었다.
“에반.”
“무슨 일이야?”
그는 양복 상의 단추를 풀며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몸에 달라붙는 새하얗고 우아한 원피스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었다. 오늘 밝은 군청색 쓰리피스 슈트에 파란 셔츠, 밝은 넥타이를 맨 그와 뭔가 착 어울렸다. 도현은 에반에게 속삭였다.
“아니, 로웰 선생님이 이스트드래곤에 돈을 꽤 거셨잖아. 그런데 거기 센터 포워드가 갑자기 죽었다는 기사가 떠서…. 쇼핑하다가 중간에 돌아왔어.”
“아.”
에반은 그 정도로 반응하며 로웰을 돌아보았다. 그는 도현에게서 부채를 받아 대신 로웰을 부쳐주었다. 에반이 로웰의 눈치를 보며 도현에게 작게 속삭였다.
“얼마나 거셨길래?”
“그게….”
도현이 에반의 귀에 속닥거렸다. 에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진짜? 라는 입 모양을 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기분 좀 푸세요. 치엔이 루카스 말고 다른 센터 포워드도 잘한다면서요. 올해도 이스트드래곤이 이길 거예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로웰이 눈 위의 수건을 손으로 잡고 벌떡 일어났다.
“그렇겠죠?”
“그럴 거라니까요.”
도현이 에반에게 눈짓하니 에반도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럴 겁니다.”
“하…. 알겠어요. 맞아요. 카흐 밀란도 있고 제시 팔마도 있고 다니엘 스톤하츠도 있고 신태호도 있고…. 신태호…. 그래, 신태호….”
로웰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흐느적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그녀는 깡냉수를 들이켜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그러고도 그녀는 그대로 흐느적거리며 말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둘 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걸었어?”
에반이 물었다. 도현이 답했다.
“조금?”
“그래? 어쨌든 덕분에 우리 기사는 다 떨어졌어.”
“어? 진짜?”
에반의 말에 도현이 디바이스를 들어 화면을 확인했다. 그녀는 로웰이 누워 있던 롱 체어에 누웠다. 에반도 그 롱 체어에 걸터앉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가슴 아래부터 허벅지까지 몸에 적당히 달라붙어 핏이 살아나는 원피스였다. 가슴 가운데는 파이고 빳빳한 고급 패브릭이 가슴과 어깨, 팔을 감쌌다. 꽃 같은 투명한 다이아몬드 반지는 오른손 약지에, 왼손 약지에는 보라색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꼈다. 목에는 샤샤 다이아몬드, 손목에는 다이아몬드 뱅글을 끼고 있었다. 오늘의 그녀는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에반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쇄골에 입을 맞췄다. 정확하게는 자신이 준 샤샤 다이아몬드에 입을 맞추고 그다음에 그녀의 쇄골에 입을 맞췄다.
“응?”
도현이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숱 많고 기다란 속눈썹이 그녀의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를 감싸고 있었다. 에반이 속삭였다.
“다이아몬드가 좋아, 내가 좋아?”
“다이아몬드.”
그러자 에반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잠깐 말을 잃었다. 하지만 티를 내지 않고 대꾸하려고 했는데 그녀가 그 전에 말했다.
“…보다는 니가 좋지.”
“이제는 나도 놀리네.”
“놀리는 맛이 아주 조~금 생겼어.”
에반은 미소를 지었다.
“어른스러워졌어. 예전보다 이런 옷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
“그렇지?”
도현도 웃었다. 그녀는 에반의 옷깃을 만지며 그의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너도 이렇게 양복이 잘 어울릴 줄 몰랐어.”
“아, 그래도 넌 양복이 안 어울릴 정도로 어린 남자가 더 좋은 거 아냐?”
“왜 이래. 우리 미르도 양복 잘 어울려.”
“기사 읽었어?”
“응.”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둘은 자연스럽게 깍지를 끼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코가 마주 닿을 듯 가까워지니 자연스레 숨이 섞였다. 둘은 부드럽게 입술을 마주쳤다. 에반이 그녀의 허리를 잡고 엄지에 약간 힘을 줘 그녀의 배를 쓰다듬으니 그녀가 간지러워서 몸을 비틀며 웃음을 터뜨렸다.
“간지러워.”
“나도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어.”
“뭐가?”
“뭐든. 니가 주는 거. 너랑 내가 함께한다는 증거 같은 거.”
“이 다이아몬드들이 그런 거 같아?”
“조금은.”
약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네 명의 남자들이 그녀에게 자기 거라는 이름표를 붙여 놓은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몫이라는 것처럼. 그녀의 양손에 자리한 저 지나칠 정도로 크고 화려한 다이아몬드들을 보라. 준 남자들의 커다란 에고가 보인다.
“볼 때마다 내 생각하는 거야?”
“응.”
“반지로 할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췄다.
“좋아?”
“응.”
“디자인은 어떤 게 좋아?”
“네가 주고 싶은 걸로 해줘. 네 취향으로. 그런 게 좋을 것 같아. 누가 봐도 저건 도현 킬스버그가 준 거구나, 싶은.”
“맞춤으로 해야겠다, 그럼.”
그녀는 선선히 그렇게 말했다. 에반은 그게 기뻤다. 그에게 그런 증거를 주는 것이 부담스럽거나 싫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좋다. 그는 약간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유부남이라고 하고 다녀야지.”
“하하하, 진짜?”
“응, 왠지 좋을 거 같아.”
“뭐야. 좀 기특하잖아.”
도현은 웃었다. 그리고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다른 사람은 싫어. 껄떡거리는 사람 있으면 짠하고 내밀어야지. 유부남이라고.”
그녀는 뺨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엄지로 문지르며 대꾸했다.
“네가 유부남이라고 하니까 뭔가 섹시하다.”
“네가 유부녀라고 해도 섹시해.”
“음, 그건 그렇겠다. 반지 별로 소용없겠는데?”
둘은 입맞춤을 나누며 이야기도 나눴다. 도현은 깍지를 낀 그의 왼손을 들어서 가만히 보았다.
“음….”
그녀는 반지 디자인을 몇 개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 반지 디자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것이 없었다. 몇 개 찾아봐야겠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딱 봐도 내가 산 거 같지만, 딱 봐도 유부남이다, 싶은 그런 반지….”
“하하하.”
에반도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리고 가만히 반지 디자인을 고민하는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소란스럽다. 불안한 것도 같았다. 그런데 기분이 좋았다. 다른 누구도 이렇지 않았다. 그녀의 피부가, 체취가 좋았다. 그녀의 분위기가 좋았다. 목소리가 좋았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홀리는 것처럼 부드럽고 좋은 목소리…. 도현만이 그를 똑바로 봐주었다. 그녀는 흥분하는 일도 없고 감정적으로 휘청거리는 일도 거의 없었다. 설사 감정적이게 되더라도 그녀는 자신을 잃지 않았다. 그런 면에 안도하는 자신이 있었다. 예전엔 그녀에게도 절대 약점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좋아하는 여자에게 허세를 부리고 싶은 그런 치기 어린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에게도 그런 귀여운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뭔가… 행복한지도….’
에반은 그대로 그녀를 소중하게 바라보다가 그녀와 이마를 마주치며 눈을 감았다. 도현은 그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좀 바뀌었어.”
“뭐가? 내가?”
“응. 우리 둘 다 어른스러워진 걸까?”
“싫어?”
“나쁘지 않아. 좋아.”
“난 내가 바뀌지 않을 줄 알았어.”
“나도.”
도현이 말하는 건 그녀도 에반이 바뀌지 않을 줄 알았다는 말일까, 아니면 자신도 자신이 바뀌지 않을 줄 알았다는 말일까? 어느 쪽이든 좋았다.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다. 그랬지. 그들에게 서로를 제대로 바라보고 알고 있는 건 서로밖에 없었다. 도현에겐 에반이, 에반에겐 도현이.
에반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만히 그녀의 존재감을 느끼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했잖아.”
도현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가 드러나며 그를 직시했다.
“이제 나에 대해서 다 알았는데 어때?”
“뭐….”
도현은 그의 속눈썹을 만졌다. 그가 간지러워서 한쪽 눈을 살짝 찌푸렸다.
“네 입으로 들은 건 아니지만.”
“내 입으로 들은 것보다 객관적이라 낫지.”
“그렇게 생각해?”
에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아 서로의 몸이 더 맞닿도록 했다. 그녀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손등으로 쓸었다.
“네가 섹시한 건 사연 많은 남자의 섹시함이었던 걸까, 하는 생각은 약간 들었어.”
“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좀 싫다.”
“항상 여유로워 보이는데 어딘가 공허하고, 기댈 곳이 없으니까 위태롭고 섹시하고 아슬아슬해서 자꾸 눈이 가는 거지.”
“으음.”
에반은 미소를 지우진 않았지만 그녀의 말에 약간 생각이 복잡해지는 모양이었다.
“좋은 평은 아니야. 맞지?”
“딱히 그렇지도 않아. 옛날은 지금보다 더 어렸고 지금은 좀 바뀌었다니까. 특히 나랑 같이 살면서부터는 뭔가, 좀 더. 네가 원래 이런 남자였나.”
“뭐가?”
“예전에도 약점이 안 보인다는 느낌이었지만 요새는 약점을 보여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역시 어른스러워졌어.”
“마음에 들어?”
“응.”
에반은 갑자기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가 물었다.
“내 약점이 뭐라고 생각했는데?”
“뭐…. 전에 반응을 봐선 과거 얘기나 예전에 했던 일이나.”
그는 도현의 눈을 바라보며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분위기로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그래? 그럼 뭔데?”
도현이 물었다.
“내 약점은 너야.”
에반이 대답했다.
*
원래 생물이란 자기 파괴적이다. T세포는 외부 침입 인자를 제거하고 나면 쓸모가 없어지고 세포자살을 통해 목숨을 끊는다. 수개미는 교미 후 죽으며 수사마귀는 교미 후 암컷에게 자신의 몸을 양분으로 제공하기까지 한다. 생물이 아닌 범주로 넘어가도 자기 파괴적인 현상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별은 자신의 무게를 이용하여 밝은 빛을 만든다. 더 밝은 빛을 낼수록 더 빨리 사멸한다.
셀레나 카토는 이스트드래곤 매니지먼트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솔직히 반은 자의가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개인 스케줄링이 필요한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을 보좌하는 비서직 관력 교육을 받고 있었고 그녀를 눈여겨본 이스트드래곤 매니지먼트 사장이 다니엘 스톤하츠를 위하여 특별히 채용한 인사였다. 그는 지금까지 TFC에서 활동했던 그 어떤 선수와도 달랐기 때문이다.
새롭게 알게 된 비즈니스는 조금 위험하다고 느껴졌지만 그래도 재미있었고 그녀가 활동했던 4년간 이스트드래곤은 세계 최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름의 뿌듯함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그녀가 보좌하는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는 여러모로 뛰어난 남자였다. 아니, 몹시 뛰어난 남자였다. 그의 외모, 그의 지적 수준, 그의 성실함.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녀는 그에게 끌렸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의 사회성이 괴멸적 수준이라는 건 눈이 마주친 순간 알았다. 그에 대한 셀레나의 사랑이야말로 처음부터 자기 파괴적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세계물리학회까지 오게 되었다. 그녀가 물리학에 대해서 안다면 무엇을 알겠는가. 다니엘 스톤하츠는 이제 일개 대학원생이 되었을 뿐인데 도대체 비서가 왜 필요한가. 그녀는 처음에 학회장 보좌관이라는 한민유라는 사람과 한 시간이 넘게 면접을 봤다. 그녀는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부드럽게 이야기를 풀어나갔고 셀레나는 거기에 마음을 열고 많은 말을 했다. 다니엘을 따라 여기까지 온 자신이 한심했기 때문이었다. 면접 같은 건 통과하지 않아도 좋았다. 면접을 보고 난 후 둘은 식사와 술까지 한잔하며 누군가를 보좌하는 일, 상관에 대한 험담을 나누며 친밀함을 나누었다. 적어도 속은 풀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셀레나는 2차 면접을 보게 되었다. 한민유가 자신을 잘 봐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메트로서울로 가야 했다. 1차 면접과 다르게 2차 면접은 채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학회장이라는 사람은 언뜻 봐서는 그저 약간 괴팍할 것 같은 할머니처럼 보였다. 그녀는 셀레나의 이력서를 보고 그녀를 한 번 보고는 나가 보라고 말했다. 말 한마디도 나눠보지 못했다. 한민유는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한민유는 셀레나를 데리고 나왔다. 그녀는 부드러운 갈색 단발머리에 상큼한 인상의 미녀였다. 그녀는 셀레나를 보며 웃었다.
“방금 카토 씨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을 만난 겁니다.”
한민유가 말했다. 셀레나 카토는 아직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민유는 디바이스를 보면서 말했다.
“앞으로 북경대 물리학과에서 일하게 될 겁니다. 왕리밍 교수님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으시죠? 직급상으론 제가 카토 씨의 상관이지만 기본적으론 왕리밍 교수님과 그 밑에 계시는 박사님들의 관리를 맡게 될 겁니다.”
“제가… 채용이 된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제가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하게 되는 거죠?”
“지금까지랑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선수들의 사생활과 스케줄, 건강 관리, 대외 업무를 담당하셨죠? 우리 교수님이나 박사님들은 전부 점잖으신 분이시니 선수들만큼 속 썩일 일은 없을 겁니다. 요새 이슈가 몇 개 있어서 학회의 인력관리, 홍보, 대외 업무 관련 인력을 더 뽑고 있거든요. 요즘은 믿을 만한 사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
셀레나는 당황했다. 교수라는 사람들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자기 연구를 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닌가? 물론 세현 퀸 같은 스타 교수라면 대외 업무를 맡을 비서 같은 것이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그렇게 일이 많은 것일까? 셀레나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민유가 전자서류를 내밀었다. 채용계약서와 기밀유지각서가 있었다. 셀레나는 자신의 디바이스가 진동하는 걸 느꼈다.
“이슈라니요?”
“음, 첫 번째는 교수님과 박사님들의 건강 문제입니다. 이번 세현 퀸 교수님의 와병으로 마도물리학자가 다른 마도사보다 드레이닝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비공식 연구 결과를 얻었거든요. 우리 교수님들이나 박사님들이나 건강 해치면서 연구하기로도 세계 제일이라서요. 이 김에 우리 학계에 건강한 연구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학회장님 직속 프로젝트입니다. 마도물리학자는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재원입니다. 여기서 하나라도 더 잃는 것은 학회뿐만 아니라 여러 정부의 크나큰 손실이 됩니다.”
셀레나는 그녀의 말을 역시나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말하는 건 마도의사가 아닌가? 그녀는 전자서류를 읽어보았다. 디바이스를 꺼내 독소조항을 확인했다. 그걸 대충 보고 채용계약서를 다시 보니 그녀가 원래 받던 연봉의 두 배가 적혀 있었다.
“두 번째는요?”
셀레나가 물었다. 한민유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건 사인하면 알려드리죠.”
셀레나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그녀는 이 학회인지 뭔지에 들어오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니까 다니엘 스톤하츠를 따라가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그녀는 홀린 듯이 펜을 들었다. 아무런 말도 나눌 수 없었던 학회장이라는 사람과 너무나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웃는 이 사람이 풍기는 이 묘한 분위기, 이 묘한 위압감.
‘다니엘 같아….’
그녀는 사인했다. 사인을 하자마자 헉하고 놀랐다. 미쳤나 봐! 디바이스를 다시 보니 ‘어떤 문제’로 법정에 가게 되더라도 학회에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없다는 독소조항이 들어가 있었는데 대뜸 사인을 해버린 것이다.
“보기보다 화끈한 면이 있으시군요. 마음에 듭니다.”
한민유는 활짝 웃으며 계약서 원본 하나를 셀레나의 디바이스로 전송했다. 셀레나는 사인한 것을 무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좀 하다가 안 맞으면 그만두면 되지, 뭐. 어차피 하는 일은 비슷하다잖아. 민유 씨가 말한 것처럼 배운 사람들이 선수보다는 훨씬 낫겠지. 배울 점이 많을지도 몰라.’
그녀는 그렇게 합리화했다. 그녀는 한민유를 따라 걸으며 물었다.
“그래서 두 번째 이유는 뭔가요?”
한민유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현재 우리 학회는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 이스라엘에 있던 학회 지부가 철수하게 됐죠. 거기 계시던 우리 교수님과 박사님들이 옮겨갈 자리를 찾는 중입니다. 사실 남유럽에 있는 마도물리학자는 물리적 안전과 정치적 안전을 고려해 연내 전부 철수시킬 예정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교수님들의 품위에 맞는 자리를 이렇게 한꺼번에 찾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죠. 가끔 전임자를 밀어내기도 해야 하니까요. 유럽 쪽 투자금이 거의 끊겨서 재정 문제도 있고 각 정부나 언론 대응에도 사람이 모자라고, 미국은 아칸소 프로젝트 이후의 투자금 송금을 미루고 있고 중국은 국외 프로젝트에는 돈을 안 대려고 하고.”
“네…?”
셀레나가 얼떨떨해하자 한민유가 웃는 얼굴로 뜬금없이 물었다.
“전 세계 TFC 산업 규모가 어느 정도 되나요?”
“한… 7,000억 달러 정도 됩니다.”
“그럼 입자 물리 연구소를 하나 짓는 데 얼마나 드는지 아시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당 100억 달러 정도는 되죠. 전 세계에 대략 20개 정도 됩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스웨덴, 스위스, 일본, 중국, 한국, 러시아 등의 나라가 보유하고 있죠. 중력 연구소도 짓는 데 그쯤 듭니다. 역시 전 세계에 대략 20개 정도 있습니다. 현재 짓고 있는 곳도 10개 정도 되죠. 한 해 돌아가는 프로젝트가 각 연구소마다 2~3개씩은 되는데 프로젝트 하나당 적게는 몇억 달러에서 많게는 몇백억 달러가 들어가죠. 전 세계에 TFC 선수는 몇 명이나 되나요?”
“네? 아… 프로만 하면 15만 명 정도 될 것 같습니다. 리저브나 유스팀 같은 것도 합치면 더 되겠지만…. 30만 명, 40 …?”
“거기에 구단이나 매니지먼트나 광고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까지 다 합쳐서 파이를 나눠 먹죠. 하지만 우리는 만 명이 안 됩니다. 마도물리학자만 따지면 그것보다도 훨씬 적죠.”
“…….”
셀레나는 당황했다. 세상 사람들은 TFC에 대해서 안다. 그녀도 TFC에 대해 알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당연하다는 듯이 알았다. 그것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만큼의 돈을 사람들에게서 벌어들이는 만큼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세계물리학회에 대해 몰랐다. 셀레나 또한 세계물리학회가 어떤 존재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한 줌도 안 되는 사람들이 이렇게 큰돈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Welcome to being one of us.”
한민유가 셀레나에게 새 디바이스를 내밀며 웃었다.
그리고 셀레나는 베이징에서 일하게 되었다. 물론 아직은 시즌 중이라 도쿄에도 꾸준히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다니엘의 시즌이 끝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바쁠 것이라고 한민유는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홉슨가 뭔가 그 빌어먹을 배신자 년이 중국인이었으면 벌써 보위부에 끌려가 전기고문을 받다 뒈졌을 겁니다! 애초에 그런 기사가 떠서 우리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할 일도 없었을 거란 말입니다! 미국은 이런 스캔들을 무서워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우민 주의와 가장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금붕어를 무서워하는 사자입니다. 겁쟁이란 말입니다. 중국에 우리의 미래가 있습니다. 학회장님이 왜 계속 메트로서울에 계신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셀레나는 2주 뒤 베이징의 정재계 유명인사들을 초청하여 개최하는 과학 교양 세미나의 자료를 정리하여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었다. 치엔위 박사가 자료를 만들고 셀레나가 보기 좋게 꾸민 것을 왕리밍 교수에게 컨펌받으러 그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가 이런 통화 내용을 들었다. 등골이 서늘했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그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홉스…?’
그녀는 그 이름을 들은 기억이 났다. 본 기억도 났다. 다니엘 스톤하츠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인질을 구해서 돌아오고 미르 킹쉴드와 다니엘 스톤하츠의 과거 이야기가 스캔들을 타고, 그리고 곧바로 인질구출 작전을 수행했던 중대의 대장이던 홉스라는 한국 특수부대 소속 중위가 인질구출 작전뿐만이 아니라 ‘보복전’도 수행했다는 폭로를 감행해 한국 정계가 발칵 뒤집어진 사건이 있었다. 그 후 엘 드라카가 시작되며 사람들의 관심은 시즌으로 돌아갔고 중간에 다니엘 스톤하츠의 연애 스캔들이 터지며 소위 ‘킬스버그 보이즈’의 이야기가 뉴스란 전체를 도배했다. 그녀가 만나는 남자들 중엔 스포츠 셀레브리티뿐만 아니라 재계 인사, 국외 유명 인사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날엔 북경대 물리학 대학원을 다니는 모두를 데리고 메트로서울 시립병원을 가야 했다. 물론 그 모두를 데려가는 것은 몹시나 힘들었다. 일단 치엔위 박사는 몇 날 며칠 밤을 새웠는지 전혀 일어나지 못해 기숙사에서 직접 끌어내야 했고 왕리밍 교수는 북경대병원이 더 좋은데 왜 메트로서울까지 가야 하냐며 가는 내내 불평불만을 했다. 대학원생뿐만 아니라 학부생 중에서도 마도사들은 전부 데리고 가야겠다. 배운 인간이나 배우지 못한 인간들이나 인원이 그 정도로 모이면 다 뭐 같은 모양이었다.
“얘 왜 이래?”
치엔위 박사는 휠체어에 실어서 옮겨야 했다. 셀레나는 그녀의 휠체어를 직접 조종하다가 도쿄대학의학부 교수 엘리야 민이 있어서 깜짝 놀랐다. 도쿄대학병원은 시즌 중 이스트드래곤 선수들의 부상을 책임지는 곳이었고 그 책임자가 바로 엘리야 민 교수였다. 지금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세계 최고의 마도의사였다. 죽은 사람도 일으킨다는 명의로 전 세계에 힘 있는 사람들이라면 전부 그녀를 만나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고자 했다.
“박사 디펜스 준비해야지.”
왕리밍이 틱틱거리며 대꾸했다.
“야, 니들 애들 좀 살살 굴려라. 전에 퀸 교수가 최 박사 패는 거 보고 내가 다 놀랐다, 어?”
민 교수는 그렇게 말하며 치엔위의 미간과 단전 부근에 손을 댔다. 초록색 빛이 은은하게 나다가 번쩍하고 한 번 섬광이 터졌다. 치엔위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네, 교수님…!! 부르셨습니까!”
이거 봐라. 민 교수는 그런 눈빛을 왕리밍에게 보냈지만 왕리밍은 그걸 무시했다. 왕리밍은 옷을 갈아입으러 남자 탈의실에 들어갔다. 북경대 물리학과 팀은 대부분 여자들이라 다들 여자 탈의실로 들어갔고 다니엘 스톤하츠만이 남자 탈의실 밖에서 왕리밍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껌벅거리며 주변을 살피던 치엔위는 안경을 빼 옷에 대충 닦고 다시 꼈다. 그리고 민 교수를 발견했다.
“아, 아. 오늘 그 검진인가 뭔가 하는 날이었죠.”
“그래.”
“오. 와. 뭐하신 거예요? 컨디션 진짜 좋다.”
치엔위는 민 교수가 한 의료 마법 덕분에 컨디션이 날아갈 것 같은 모양이었다. 고질적인 어깨, 목, 허리 통증과 만성 피로가 싹 가셨다. 민 교수가 대꾸했다.
“이게 다 너네 교수랑 퀸 교수가 나한테 자기들 뇌를 주기로 해서 해주는 거 아니겠니?”
“아, 그거 진짜였어요? 그런데 그거 들고 가서 뭐하시게요?”
“음? 뭐, 할 건 다 있지. 것보다도 의미가 중요한 거 아니겠니? 총장님이 당신께서 가진 것 중에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내게 하사하시기로 한 게? 총장님께서 세상에서 제일 믿는 사람은 퀸 교수도 아니고 너네 교수도 아니고 나야, 나. 응? 알겠냐?”
“아, 맞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교수님. 전 오래 살고 싶어요. 오래오래 살고 싶습니다.”
“그럼, 그 자세야. 치엔 박사는 오래 살아야지. 지금 우리가 출렁거리는 게 다 뭐 때문인데.”
“사우디 건이요?”
“아니야~ 얘가 아직 뭘 모르네. 사실은 퀸 교수가 갑자기 나자빠져서 생기는 문제 아냐. 왕이 갑자기 요절하고 그래서 물러났던 상왕이 돌아오고 후계 경쟁까지 일어나니까 갑자기 다들 우리한테 덤비는 거 아냐, 이 겁대가리 없는 것들이.”
“아.”
“난 왕리밍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 대가리 하나로 사다리 올라가기가 쉽냐, 여기가. 그래도 네 교수의 가장 큰 역할은 널 키우는 거다. 알지? 너한테 거는 기대가 다들 크다고. 왕리밍이 왜 요새 총장님께 자꾸 어필하는 줄 아냐? 다 널 위해서야.”
“에이, 저한테 그런 말씀 하시는 건 민 교수님밖에 없어요. 아시겠지만 우리 교수님들은 자기밖에 모른다니까요.”
“에이~ 진짜 얘가 아직 뭘 모르네. 큰일이다, 야.”
“아, 진짜. 민 교수님은 중간에 나가서 모르신다니까요. 전 자다가도 교수님 목소리가 들려요. 우리 교수님이 거기 없어도 환청이 들린다니까요? 최 박사한테도 물어보세요. 걔는 더 심해요.”
이게 정말 ‘고작’ 물리학을 연구한다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요즘 세상에? 셀레나는 입을 다문 채 멀어져 가는 치엔위와 엘리야 민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셀레나의 모습을 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셀레나는 휠체어를 복도 옆에 치워 뒀다.
“셀레나.”
그가 셀레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움찔했다가 다니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물었다.
“구단 일과 학회 일까지 같이하려니 많이 바쁘십니까?”
“네…. 그래도 괜찮아요. 할 만해요.”
“뭔가 제게 묻고 싶은 게 있는 거 아닙니까?”
그때 탈의실의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피곤한 얼굴로 우르르 나왔다. 왕리밍도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으니 약간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검사실로 옮겨갔다. 그 사이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뭔가 바뀌었다. 겉으로 보기엔 매우 미묘해서 모르는 사람은 알아차릴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4년 동안이나 그의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셀레나 카토는 은연중에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의 태도나 그의 말투가 바뀌었다. 그 변화는 그가 갑자기 여자를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가 북경대로 적을 옮기기로 하고 나서부터 그 변화는 압도적이었다. 간혹 그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는 러시아의 전사자 가족을 돕던 지원을 끊었다. 그는 정부 용역을 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스위스, 룩셈부르크, 파나마 등에 비밀계좌를 만들어 입이 떡 벌어지는 양의 현금과 보물을 맡겼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셀레나를 개입시켰다. 또한 그녀를 이 세계물리학회라는 조직에 끌어들였다.
셀레나 카토가 아는 다니엘 스톤하츠란 전쟁 중에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인 후 자신의 인간성마저 파괴하고 만 남자였다. 너무나 뛰어나고, 그래서 그 뛰어남을 증명하고자 했고 그리고 그것에 실패하고, 절망마저도 느낄 자기 자신이 남아 있지 않은 공허한 남자였다. 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사람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살아 있었다. 그는 부표하고 있었다. 셀레나는 그런 그에게 의지가 되어주고 뿌리가 되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셀레나가 자신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한 그저 내버려 뒀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그는 누구인가?
멀리서 의료진이나 환자들이 내는 소음이 들려왔다. 그 복도에는 다니엘과 셀레나 둘밖에 없었다. 셀레나는 다니엘의 보랏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기다란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갈색과 파란색, 녹색이 오묘하게 뒤섞인 그녀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그녀가 말했다.
“솔직히… 무서워요 ….”
“뭐가 말씀이십니까.”
“전부요, 전부…. 왕리밍 교수님이나 치엔위 박사님도…. 학회도…. 다니엘도….”
그러자 다니엘은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물론 그의 표정은 그렇게 크게 바뀌지 않았다.
“셀레나는 이스트드래곤에서 했던 자신의 일이 좋았습니까?”
“네?”
“저야 특별했으니 넘어가더라도 치엔이 루카스나 다른 선수들에게 매일같이 성희롱이나 성추행에 시달리면서도 참고 일하는 건 무섭지 않았습니까?”
치엔이 루카스는 얼마 전에 죽었다. 그것도 굉장히 비참하게. 그는 유흥가의 뒷골목, 온갖 오물과 쓰레기를 쌓아 놓는 곳에서 넝마가 되어 발견되었다. 용의자는 그 전 경기의 상대 팀 선수다. 아니면 그의 시스터즈,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 범인이 잡히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다니엘이 또 물었다.
“학회가 뭘 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까?”
“물리학을 공부하는 교수님들의 집단… 아닌가요?”
“그게 답니까?”
“그리고… 뭔가 마피아… 아니, 왕국같이… 많은 정부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사람들을 지배하는…. 우주를 소멸하거나 창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사람들이 모인 곳….”
셀레나는 다니엘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자신이 문제에 대한 답을 맞혔는지 선생님의 얼굴을 확인하는 학생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니엘 또한 셀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주를 소멸하거나 창조할 수 있는 자를 뭐라고 부릅니까?”
“…….”
“사람들은 그런 자를 신이라고 부릅니다.”
다니엘이 말했다.
“우리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신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에 관심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사람들의 망상일 뿐이죠. ‘아직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배하는 것이죠.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다니엘의 말에 셀레나는 굳어 있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보다가 물었다.
“저도 마찬가지인가요? 그래서 다니엘은 저를… 지배하려고 하는 건가요?”
그녀의 질문에 다니엘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셀레나는 갑자기 자신의 등이 떠밀리는 것을 느꼈다. 다니엘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부드러운 힘에 밀려 셀레나는 앞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내디뎠다. 그의 손이 닿는 곳까지. 다니엘은 처음으로 자신이 먼저 셀레나의 피부를 만졌다. 그녀의 손을 잡고 이번에는 마법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끌어당겼다.
“그렇습니다.”
다니엘이 대답했다. 그의 대답을 듣고 셀레나는 몹시 화가 났다. 그가 자신에게 일을 그만두고 자신이 있는 학회로 오라고 했을 때, 어떻게 그에게 일말의 기대라도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라고, 그가 드디어 자신의 필요함을 인정한 것이라고 기대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이었다. 그런데 그는 마치 그런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본 듯 관심도 애정도 없으며 그저 필요해서 지배할 뿐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우는 겁니까?”
“몰라서 묻는 거예요?”
셀레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다니엘은 그녀의 뺨을 손으로 감싸며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
“울지 마십시오.”
그의 손길에 셀레나는 더 눈물을 흘렸다. 그가 속삭였다.
“아직은 어색해서 그런 겁니다. 힘을 가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곧 알게 될 겁니다.”
“그런가요? 지금은… 이렇게 비참한데?”
“어째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이게 셀레나가 원하는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게 내가 원하는 거라구요? 난 그저…!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날 사랑해주길 바란 것뿐이에요!”
셀레나가 소리쳤다. 다니엘은 하하, 하고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는 그렇게 웃는 게 정말 드문 남자였다.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많지 않군요. 왜 교수님들이 금붕어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이 상황에도 그가 자신을 모욕하자 셀레나는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퍽 쳤다. 다니엘은 자신을 때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셀레나는 왜 저를 사랑합니까? 여자들이 절 사랑한다는 건 제가 대단한 힘을 가진 남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편승해 자신도 대단해질 거라 착각하는 거죠. 그들이 결핍을 느끼는 건 남자가 아니라 힘입니다.”
“제가 착각하고 있다구요?”
“여자가 우월한 남자를 사랑한다는 건 그런 겁니다. 그 우월함의 일부가 되고 싶은 것뿐이지 남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죠. 다른 사람들보다 비교 우위에 있고 싶다는 매우 인간적인 욕구의 발현입니다.”
셀레나는 말을 잃었다.
“그러니 셀레나는 기뻐해야 합니다. 셀레나는 저에게 선택받았습니다. 그리고 대단해질 겁니다. 우월해질 겁니다. 남자가 아니어도, 강한 힘이 없어도, 소드마스터나 마도사가 아니더라도 강한 사람이 될 겁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이 당신 앞에 펼쳐진 겁니다.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될 겁니다.”
다니엘이 말했다. 셀레나는 그의 말이 너무나 뜻밖이라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인생에 힘이라든가 권력이라는 말이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건 그녀에게 너무나 생소한 것이었다.
“그럼….”
셀레나는 어느새 눈물을 그쳤다. 어째서인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를 보면 언제나 마음이 초조했다. 그에게 인정받고 싶어 안달이 나 어떻게든 그의 눈에 들려고 노력했다. 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그의 마음에 드는 모습은 어떤 것일지 매일같이 고민할 때도 있었다. 그가 자신을 봐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절망했고 그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인정해준다는 생각이 들면 날아갈 듯이 기뻤으며 그에게 애인이 생겼을 때는 슬펐다. 셀레나가 그가 만나는 여자보다 못해서 자신을 봐주지 않은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나 우울했다. 그가 자신을 이용하고 책임감 없이 휘두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화가 나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웠다.
“그럼 다니엘도 저를 무시할 수 없게 되나요?”
셀레나가 물었다. 다니엘은 대답했다.
“셀레나가 그럴 힘을 가지면 그렇게 될 겁니다.”
“…그냥 이용만 해도 됐을 텐데 왜 저한테 힘을 가지라고 하는 거죠?”
“저는 셀레나가 없으면 사는 데 불편함이 많습니다. 셀레나가 저를 그렇게 길들였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착취하고 싶은 사람은 도현 씨밖에 없습니다. 여자가 비굴하게 구는 모습을 보는 건 어쩐지 불편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사람들은 전부 여자뿐이고 그래서 주변에 있는 여자들은 모두… 뭐랄까. 매우 여자다운 여자뿐이니까요. 제가 잘났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저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
셀레나는 그의 말에 당황했다. 그에게 여성으로서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그에게는 말 그대로 ‘여자답게’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 아닌가. 비굴해 보인다는 말까지 했다. 셀레나는 그의 무례함에 화를 내야 할지, 그의 솔직함에 감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셀레나는 불현듯 물었다.
“도대체 다니엘에게 진정한 사랑은 뭔가요? 뭘 어떻게 해야 여자가 정말 자신을 사랑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가요?”
“어떤 사람이 저를 정말로 남자로서 사랑한다면 그건 저에게 잘 보이거나 제게 선택받으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저를 선택해서 성적으로 착취할 겁니다, 도현 씨처럼. 저를 즐기는 겁니다. 저를 남자로’만’ 보는 거죠. 그녀의 곁에 있으면 저도 자유로워진 기분이 듭니다. 그녀는 제게 화를 내고 저를 꾸짖고 저를 똑바로 봅니다. 저를 사랑한다는 걸 알 수 있죠.”
그는 다소 상기된 얼굴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에 셀레나는 살짝 정이 떨어져 생각했다.
‘변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는 생각이 드는지 다니엘은 남자 탈의실의 손잡이를 잡고 셀레나에게 말했다.
“한민유를 보고 배우십시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이 올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학회를, 저를 배신하지 마십시오. 배신자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충성하는 사람은 절대 버리지 않습니다.”
“…….”
“무서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좋은 것은 보는 순간 알 수 있는 거라고 도현 씨가 항상 말씀하시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다니엘은 그렇게 말하며 셀레나에게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뒤 탈의실로 들어갔다. 셀레나는 알 듯 모를 듯한 기분에 닫힌 문을 보고 있다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다니엘과 이야기를 하고 나니 막연했던 의문이 걷히고 길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래, 열심히 해보자.’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다니엘의 말에 그렇게 실감이 들지 않는 건 아직 그녀가 자신의 일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할 일을 하러 가고 다니엘은 옷을 갈아입고 느지막이 나왔다.
“빨리빨리 안 오냐? 어?”
엘리야 민이 짜증을 냈다. 다니엘은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피를 뽑고 혈압과 체온을 재고 마법으로 진단을 받고 스캔기에 들어가 온몸의 스캔을 떴다. 다니엘은 꽤 익숙한 것이라 아무 생각 없이 다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지루하고 불편한 모양이었다.
“오랜만이네요, 다니엘.”
스캔실을 막 나온 다니엘은 한민유와 마주쳤다. 캘리 박이 온 모양이었다. 다니엘은 캘리 박 교수가 어디 있는지 찾았다. 벌써 세현 퀸 교수에게 간 모양이었다. 다니엘은 환자복의 매무새를 다듬으며 잠깐 주변을 살펴보았다.
“루카스는 어떻게 된 겁니까?”
다니엘이 물었다. 다니엘이 일련의 스캔들을 일으킨 건 한 가지 목적만 달성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터질 스캔들이었다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운전하고 싶었다. 스캔들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고 학회에 도움도 되고 그래서 캘리 박의 눈에 쓸모 있게 보일 수 있다면 더 좋다. 하지만 그는 욕심이 많은 남자였고 이번 시즌 또한 우승하고 싶었다. 한민유가 그저 스캔들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만 치엔이 루카스를 이용한 것일까? 잘 모르겠다. 그녀의 생각이 보이지 않았다.
한민유는 의외라는 듯이 웃더니 물었다.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이러라고 소개해드린 게 아닙니다. 저는 이번 시즌도 이겨야 합니다.”
“그 남자가 클럽의 승패를 좌우할 정도의 실력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는데요. 신태호를 죽인 것도 아니고.”
“그래도 이스트드래곤이 가진 센터 포워드 중에는 가장 실력이 좋습니다.”
“이렇게 작은 것에 연연하는 남자였나요?”
“도현 씨와의 약속은 어느 것도 작은 것이 아닙니다.”
“하하.”
한민유는 웃었다. 여기 인간들은 다들 자기 자신이나 사제지간 외에는 그다지 중요한 인간이 없었다. 마치 종교에 귀의하면 그 신과 신의 말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는 속세의 것이 되는 것처럼. 다 그들의 위대한 여정에 방해물이 될 뿐인 것이다. 한민유는 10년 가까이 캘리 박의 밑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맹신에는 여전히 크게 공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단하고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실감을 못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가진 학회에 대한 충성심에 영향을 끼치진 않았다.
다른 이들과 달리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 방해물을 아주 중요하고 필요한 것처럼 생각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런 인물이 또 나올 수도 있을까? 다니엘 스톤하츠가 만나는 그 여자는 한민유와 그의 관계에 어떤 레버리지가 될까?
“여자든 남자든 큰일을 하려면 색을 멀리해야 해요.”
한민유는 짐짓 가르치듯 그렇게 말했다. 다니엘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루카스를 죽인 겁니까?”
“원래 창놈한텐 두 번의 기회는 없죠.”
한민유는 자신의 표현이 마음에 드는지 미소를 지었다. 그 멍청하고 분수를 모르는 남자는 자신의 격에 맞게 쓰레기 더미 위에 걸레짝이 되어 발견되었을 뿐이다.
“리야드는 뭉개 버렸으면서 홉스 중위는 쉽게 처리하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암묵적 동의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죠. 위엄을 보이는 건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홉스 중위는 단순히 한국 정부의 핸들링 미스였어요. 이런 스캔들은 누구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루카스처럼 처리하면 되지 않습니까?”
“하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우리가 무슨 마피아예요?”
“…….”
마피아보다 무서운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다니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비밀주의의 이슬람 극단주의 국가의 수도를 눌러버리는 것과 용기 있게 부조리를 폭로하고 나선 군인을 살해하는 것. 후자가 더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겠지. 그것 자체가 부조리한데도 어차피 사람들은 그런 것에 관심 없다.
“그런 남자는 자기 시스터즈에게 찔려 죽든가, 독살당하든가, 원한을 산 과거가 드러나든가, 그런 과거에 언제 살해당해도 이상하지 않죠. 그런 게 사회적 계급이라는 거예요. 가령 으슥한 밤 골목을 지나가던 술 취한 여자가 낯선 남자에게 강간 살해당했다, 이런 기사를 누가 이상하게 생각하던가요?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그런 일이 일어날 만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하죠.”
한민유는 말했다.
“왜 저 사람이 죽임을 당했지?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인데? 문제 아냐? 라고 다른 사람들이 먼저 생각하고 문제 삼는 사람이 적어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사회적 계급이 높죠. 이런 건 이미 사람들 머릿속에 새겨져 있는 것이라 당장은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홉스 중위와 치엔이 루카스의 계급은 하늘과 땅 차이인 겁니다. 그래도 루카스가 죽은 기사는 묻히진 않았잖아요. 그의 죽음에 의문을 가질 이유는 없지만 포르노그래피 적으론 훌륭하죠. 일단은 얼굴도 몸매도 쭉쭉빵빵한 남자잖아요. 후후.”
한민유는 그 남자를 떠올렸다. 심미적으론 꽤 매력이 있는 남자였지. 하지만 그것뿐이다. 그런 남자에게 그런 것 말고 쓸모가 있나. 그래 봤자 그런 남자일 뿐인데. 그녀는 잠깐 그렇게 지나가듯 생각했다.
“다들 이제 우리에게 관심 없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학교 때 배운 자유 낙하 운동도 제대로 이해 못 해요. 그러니까 어렵고 가치 있는 것에 관심 없는 척하며 자신의 무지와 무능력도 모른 척하죠. 사람들이 이 정도까지 멍청한 건 우리에게 축복이에요.”
축복이라. 다니엘은 그런 한민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인간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다들 너무나 놀라울 정도로 똑같이 멍청하고 똑같이 무식하고 똑같이 어리석다. 어디 공장에서 찍어낸 것같이 말이다. 그래서 더 혐오감이 드는 것이다. 한 가지 종류의 밀만 가득한 들판은 취약하기 그지없다. 살아 있는 생물은 저열한 것을 혐오하는 본능을 가진다. 하지만 한민유는 달랐다.
“이렇게 저에게 다 말씀해주셔도 되는 겁니까?”
다니엘이 물었다. 한민유는 웃었다.
“제가 연하의 미남한테 약한 건 유명한데요.”
“당신은 뭘 원하는 겁니까?”
다니엘이 물었다.
“지켜보면 알겠죠.”
한민유는 웃었다.
*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박탈시켜줄 지배자를 원한다. 겉으로는 강한 척하려 하지만 사실 자신은 아는 것도 없고 무언가를 온전히 자신의 생각으로 결단 내리고 책임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스스로의 무능력에서 눈을 돌리고 사회만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사회를 비난하면 마치 자신이 대단한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모니터 뒤에 숨은 겁쟁이에 별것 아닌 인간이라는 실감을 할 때마다 필사적으로 그 개념에 저항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존재일 뿐이다. 혹은 그 무력감에 분노하기도 한다. 또 모든 것이 사회의 탓이라고 생각하도록 스스로를 세뇌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만 선택할 수 있었다. 사회적, 신체적, 미적, 금전적 격차는 언제나 존재한다. 우선 그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최선의 선택을 하느냐의 문제다. 자신을 똑바로 보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불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제대로 판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에게 무엇이 이득이고 무엇이 손실인지조차 판단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너무나 많다. 자신을 속이는 자들이 너무 많다고? 속이는 자를 처벌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도 속이는 자는 언제나 존재한다.
이상주의는 해롭다. 유라시아에 있는 공산독재국가나 남미의 좌파독재국가들을 보면 사람들이 무책임하게 명분주의, 이상주의에 빠지면 어떤 말로를 걷게 되는지 잘 보여준다. 인간이 자신을 형이상학적인 존재, 더 도덕적인 존재, 더 우월한 존재로 착각하(고 싶어 하)면 저런 일이 일어난다. 이상주의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아무것도 제대로 바뀌는 게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신을 치켜세워주는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흔들리게 만든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상적인 말만 속삭이는 사람들을 멀리해야 한다. 그들은 당신을 취약하게 만들고 조종하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바닥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한다. 사람은 그저 자신을 잡아먹는 포식자가 없기 때문에 카니발리즘을 즐기는 동물일 뿐이다. 유토피아는 없다. 생존만이 있을 뿐이다.
덩치가 작고 힘이 없고 남들이 무시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는 것이 아니다. 사자나 호랑이는 대부분 자신보다 덩치가 큰 먹이를 사냥한다. 그들은 먹이에게 도전했다가 실패하면 죽기도 하고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이 강력한 포식자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동시에 한계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먹이가 고립되거나 약해질 때를 언제까지고 기다린다. 풀숲에 바짝 엎드려 배를 곯으면서도 계속 기다리는 것이다. 자신이 쟁취할 수 있는 순간을.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시험한다. 실패는 피할 수 없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한다. 그렇게 승률을 높이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인정하고 그것을 이용하기까지 하는 것, 그런 것이 존재를 오히려 자유롭게 한다. 나에게 가장 해로운 존재는 사회나 개념 같은 그런 거대하고 모호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 나에게 가장 가까이 존재하는 누군가, 부모, 친구, 연인, 혹은 나 자신이다. 사회적 해로움엔 반기를 들면서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존재하는 해로움에는 반기를 든 적이 있는가? 주인님에게는 방긋방긋 웃으며 자신의 무력함을 전시하고 있진 않은가. 지금 당신은 당신에게 가장 해로운 자를 사냥하려고 바짝 엎드려 있는가? 상대의 힘을 가늠하고 내 힘을 가늠하며 단번에 숨통을 끊을 기회를 노리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무언가 거대한 것을 바꿔 나 자신을 바꾸겠다고 생각은 얼마나 공허하고 어리석은가.
소드마스터(90%가 남성)는 대자연의 관점에서든 암컷의 관점에서든 누가 봐도 압도적으로 우월했다. 그들은 크고 아름답고 강했다. 그러니 끊임없이 같은 인간들에게, 특히 같은 남성들에게 사냥당해 온 것이다. 그들을 키울 때 다른 인간들보다 많은 자본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사회적, 금전적으로 취약해질 가능성이 많았고 그 점을 살뜰히 이용하여 그들은 다 자라기도 전에 부모에 의해 사지로 팔려간다. 다른 취약 가정에 비하여 소드마스터 아이를 가진 가정이 아이를 파는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데도 사람들은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으레 ‘그럴 수도 있겠거니’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흔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진로는 거의 스포츠, 연예계, 군대, 용병으로 정해져 있다시피 하고 누구도 그들에게 높은 지적 수준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 기대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쪽으로 진로를 정하는 이들이 몹시 적다. 특히나 백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TFC 산업은 그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더더욱 공고히 했다. 폭력적이고 무식하고 잘 죽어 나자빠진다. GAS만이 현대의 노예가 아니다. 그들도 사회가 조직적으로 폭력을 가하며 오로지 엔터테인먼트의 기능으로 사용하거나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 나가는 노예다. 다들 그들의 아름다움과 강함에 열광하고 혹자는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도 이런 사회적 구조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아니, 깨닫지도 못한다. 평균적으로 덜 교육받고 덜 기대 받기 때문에(더 교육받고 더 기대받기 때문에 더 노예 같은 이들도 있다) 스스로의 강함과 아름다움에 취해 오히려 시혜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는 몹시나 강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취약하다. 혹자는 한정된 분야이긴 하지만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이도 있다. 그런 점이 자아 성찰의 기회를 극도로 낮춘다.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개개인의 문제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드마스터들은 본성이 강하고 유쾌하기 때문에 행복하게 산다. 1대 1로 마주쳤을 때 그들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몇몇 다른 취약 계층보다는 훨씬 나아 보이는 건 그런 점 때문이다.
결국 종합해보면 개인적 선택이 사회적 선택이 될 수 있는 그런 현명한 선택을 해나가야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유의미하고 더 나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순서는 결국 개인적 선택이 먼저다.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과 끊임없이 ‘객관적’ 자기판단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난하기 위한 비난이나 더 나은 선택을 유도하지 못할 뿐인 자기혐오는 그저 자기 파괴적이다.
“2128년 엘 드라카, 드디어 8강에 이르렀습니다. 웨스트이글도 사흘 후면 8강전입니다. 이틀 전 올 시즌의 첫 번째 4강행이 레드폭스로 확정되었죠.”
“그렇습니다. 레드폭스… 작년과 재작년엔 무척이나 운이 좋지 않았죠. 올해는 착실하게 하나하나 꺾으며 올라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스트드래곤과 서던라이온입니다. 작년의 서던라이온도 다소 아쉬웠지 않습니까? 16강에 머물렀으니 말입니다. 8강은 갈 줄 알았는데 말이죠.”
“그랬죠. 서던라이온은 선수 트레이드가 잦아서 그때그때 성적을 가늠하기가 힘듭니다만 그래도 강하죠.”
“새로운 전략을 많이 시도하기도 합니다. 엘 드라카의 통념과는 거리가 먼 전략을 구사하는데도 이기는 게 신기합니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현재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세계 최강 이스트드래곤…. 재작년부터 올해 8강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고 올해는 전 경기를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전 경기 30분 내 승리.”
“갑작스러운 치엔이 루카스 선수의 사망으로 전략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나 싶었는데 그게 또 아니었습니다. 카흐 밀란 선수가 센터 포워드로 포지션을 변경하고 레미 선수가 레프트 포워드로 나왔는데 전 레미 선수가 이렇게 잘하는 선수였는지 몰랐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니까요.”
“현재 엘 드라카 팬들은 8대 2로 이스트드래곤의 승리를 점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번 경기 내기 규모가 엄청나군요.”
“이스트드래곤이 서던라이온마저도 압도적인 격차로 이길 수 있을지.”
중계위원들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출전 선수와 포메이션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갔다. 양 팀의 선수 이름을 전부 호명했다.
“둘 다 2-4-3 포메이션입니다. 하지만 요즘 이스트드래곤은 포메이션이 의미가 없죠. 역시 오늘도 초기부터 전방 압박을 강하게 하는 속도전을 펼칠까요?”
“서던라이온은 올해 전 경기를 출장하고 있는 알렉스 킴 선수의 모습이 눈에 띄는군요. 등 번호 9번, 레프트 포워드, 19세, 올해 첫 출전인 루키입니다. 서던라이온에 등장한 간만의 미남 선수네요. 지금까지 보면 제때 제 역할을 잘하는 영리한 플레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어린데도 눈치가 제법입니다. 체격도 훌륭하고 맷집이 굉장히 좋더군요. 올 시즌 슈퍼 루키 순위에서 3위를 차지하고 있는 알렉스 킴 선수의 모습이 화면에 잡히고 있습니다.”
“알렉스 킴 선수는 서던 컵스 출신이죠? 유스팀을 운영하는 메이저 클럽은 잘 없는데요.”
“다들 서던 컵스가 어떤 결과를 낼지 지켜보고 있는 상태입니다. 잘 되면 세계적으로 유스팀이 늘어나겠죠.”
“알렉스 선수만 보면 꽤 괜찮은 것 같은데요? 올해 선수 관리 측면에서 TFC가 많은 질타를 받은 걸 생각해보면 유스팀은 분명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겁니다.”
오늘 경기장은 상하이의 <상해대경기장>이다. 서던라이온이나 노던타이거같이 중국 베이스의 클럽들도 이스트드래곤과 마찬가지로 붉은색을 많이 쓴다. 채도나 밝기가 다른 컬러를 쓰기 때문에 구분할 수 있었다. 붉은색 응원복을 입고 노란색 깃발을 흔드는 서던라이온 팬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8강! 상해대경기장에서 이스트드래곤 대 서던라이온, 서던라이온 대 이스트드래곤! 경기~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밀고 나오는 이스트드래곤의 디펜스, 미드필더로 인해 크러쉬 소리가 강렬했다. 다섯 명의 선수가 각자의 오라를 최대로 하여 상대를 밀어붙였다. 이스트드래곤의 디펜스 3명, 공격형 미드필더 2명과 서던라이온의 디펜스 2명과 공격형 미드필더 3명이 맞부딪쳤다.
“어…!”
중계위원 하나가 깜짝 놀라 탄성을 냈다. 서던라이온의 레프트 포워드, 알렉스 킴이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돌발행동을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맡아야 할 상대편 라이트 포워드를 상대하지 않고 자기편 센터 포워드 뒤쪽으로 전속력으로 달려 순식간에 경기장을 가로질렀다.
“서던라이온 9번 알렉스 킴! 알렉스 킴 선수 중앙돌파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보통 속력이 더 빠른 미드필더가 빠른 중앙돌파를 위해 경기장을 가로지르는 달리기였다. 알렉스는 경기장을 가로지르는 속력을 바탕으로 관중석 쉴드 위를 그대로 달려 올라갔다. 쉴드는 관중석 쪽으로 오목하게 기울어진 구조라 이런 식으로 활용이 가능했다. 일단 이스트드래곤의 라이트 포워드가 견제를 위해 그를 따라가려고 하다가 서던라이온의 미드필더에게 가로막혔다.
“이스트드래곤의 속공에 맞서는 속공인가요, 서던라이온!”
“하지만 저런 식의 중앙돌파는 위험할 텐데요!”
“이스트드래곤의 오펜스를 노립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스트드래곤 오펜스의 공격 마법이 쉴드 위에 꽂히며 엄청난 굉음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가 더 빨랐다. 그는 관중석 쉴드의 최정상까지 올라갔다. 모두들 고개를 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알렉스는 거기서 무슨 대포를 쏘는 것처럼 이스트드래곤 포메이션의 정중앙에 내리꽂혔다. 다들 눈을 휘둥그레 뜨고 볼 수밖에 없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를 노린 게 아닙니다!!”
다니엘 스톤하츠의 아이스 애로우가 알렉스 킴의 궤적에 따라 쉴드 위에 얼음꽃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지상에서는 잔디밭이 폭발하여 많은 이들의 시야를 가렸다. 잠시 후 먼지가 가라앉으며 경기장이 다시 보였다.
“시, 신태호입니다!! 2128년 데뷔한 루키, 서던라이온 9번! 알렉스 킴!!! 경기 시작하자마자 신태호를 노립니다!!!”
“엄청난 괴력입니다, 알렉스 킴!! 올해 19세!!”
하지만 타격 스코어는 뜨지 않았다. 신태호는 그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양팔로 교차하여 얼굴을 비껴가게 했다. 신태호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의 팔을 보다가 알렉스의 얼굴을 보았다. 알렉스의 다른 주먹이 다시금 자신의 얼굴을 노리자 신태호는 몸을 웅크렸다가 그의 가슴을 두 발로 뻥 찼다.
“신태호!! 예상치 못한 기습에도 놀라운 방어!”
알렉스는 그의 발차기에 자신의 힘까지 더해 뒤로 빙그르르 백 덤블링을 해서 충격을 최소화했다. 그리고 그는 북쪽 관중석 쉴드에 두 발로 착지하는 듯하다가 다시 신태호에게 돌격했다. 그는 투쟁의 환희에 절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이번에 그는 맨몸이 아니었다. 그는 한 손에 오라의 검을 생성하고 다른 쪽 팔에는 골프공만 한 황금색 구슬 십 수 개를 생성했다. 황금 공이 그의 왼팔 주위를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강력한 오라가 실체를 이루고 있었다.
“골드 스플래시…!!”
짧은 순간 그걸 본 이민아 중계위원이 그렇게 소리쳤다.
알렉스가 씩 웃었다. 그는 곧바로 신태호가 단 두 번, 도쿄돔과 게헨-세나에서 선보였던 골드 스플래시를 시전했다. 이스트드래곤 선수 전원의 머리를 노렸다. 황금색 구슬이 눈에 보이지도 않은 속도로 사방으로 비산했다.
“…!!!”
신태호는 그 순간 엄청나게 놀라서 반사적으로 똑같이 골드 스플래시를 시전했다. 독고저와 비슷한 모양의 그의 골드 스플래시는 알렉스의 황금 구슬을 모두 쏘아 맞혀 겨냥이 빗나가게 했다. 엄청난 초감각이었다.
쾅!!! 쿠콰광!! 콰광! 쾅!!!
굉음에 관중석의 비명이 묻혔다. 골드 스플래시는 전부 관중석 쉴드에 맞았다.
그리고 신태호는 곧바로 자신에게 돌격해온 그의 검을 오라의 방패를 형성하여 막았다. 재작년도, 작년도 상대 클럽이 신태호를 노리고 덤비는 전략을 짜는 일은 많았다. 그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남자들이 두려웠다. 그리고 두려움은 그에게서 통제력을 앗아갔다. 그것은 더 큰 절망만 불러왔다. 올해 이스트드래곤이 유례없이 공격적인 전략을 쓰는 것은 물론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고 흥행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적팀을 이스트드래곤의 공세에 우왕좌왕하게 만들어 신태호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도 있었다. 감독도, 코치도, 동료들도 그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는 것이다. 그는 겁먹어 어쩔 줄 모르며 웅크려 있는 것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동갑…이었지?’
신태호는 알렉스를 보며 그와 자신이 같은 나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마 생일은 신태호가 반년 정도 더 빠를 것이다. 하지만 신태호는 아직도 키가 작고 말랐다. 마치 사춘기에 접어들지 않은 소년처럼 말이다. 의사는 그의 몸이 스트레스 상황에 적응하기 위하여 성장을 늦춘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드마스터의 성장에는 막대한 열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회로 돌아오고 나서도 크지 않는 것도 경기에 대한 중압감으로 여전히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대로 가면 다른 형들처럼 크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신태호는 그래도 딱히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크다.’
그와 맞서는 이 동갑의 남자애는 그보다 훨씬 더 크고, 강해 보였다. 그는 신태호에게 살의를 가지고 있진 않았다. 그가 살기를 내뿜었다면 신태호는 이성을 잃었을 것이다. 자신보다 크고 강한 상대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에 공황발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싸워!!”
알렉스가 오로지 방어만 하는 신태호에게 외쳤다. 신태호는 자신의 목에 솜털이 서는 걸 느꼈다. 그는 신태호와 겨루고 싶어 했다. 그는 순수한 투쟁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신태호를 이길 작정이었다.
뭔가 신태호의 속에서 꿈틀거렸다. 기분이 나빴다. 울컥하는 게 이런 걸까.
[기분 좋지?]
치엔이 루카스는 올 시즌 첫 경기 때 신태호에게 한 명의 선수를 중상 ‘입히게 하고’ 다른 두 명의 선수도 상대하게 하며 일그러진 얼굴로 그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때도 기분이 나빴다. 그는 얼마 전에 정말로 비참하게 죽어버렸다. 그렇게 강하던 그가 그렇게 걸레짝처럼, 쓰레기처럼, 마치 도축당하고 필요 없어진 부분이 버려진 돼지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슬플 줄 알았는데 슬프지 않았다. 신태호가 생각했던 것만큼 그가 강하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나 살아남는 것은 신태호였다. 앞으로 살아남을 것도 그였다. 강한 것은 그였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라는 건 그것만으로도 매력적이네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역시 속에서 뭔가 울컥한다. 신태호는 자신을 상대로 파상공세를 펼치는 그의 품에 파고들어 그의 명치를 후려치며 오라의 검을 생성했다. 깡!!! 짧고 큰 소리가 나며 그의 쉴드에 막혔다. 그리고 알렉스는 관중석 벽에 쾅 하고 부딪쳤다.
“신태호 선수의 저런 공격적인 모습은 처음 봅니다…!!”
알렉스 킴은 별다른 타격이 없어 보였다. 그는 강했다. 마치, 마치, 그래, 신태호 자신 같았다. 그는 강력한 오라를 가지고 있었다. 알렉스는 다시 덤벼왔다. 그대로 두 선수의 주변으로 넘실거리는 황금의 오라와 황금색 구슬, 그것을 막기 위한 황금색 독고저가 회전, 생성과 사라짐을 반복하며 기이한 전자기음과 폭발음을 냈다. 모두들 귀를 막아야 했다.
“중계를 하기가 힘듭니다. 전에 볼 수 없던 근접전입니다, 두 선수…!”
중계위원은 말을 잃었다. 남이 당하는 것만 봤지 본인들이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이스트드래곤은 전부 몰살당할 뻔했다는 오싹함에 주의력을 잃었고 서던라이온은 그런 이스트드래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어…! 어어! 이스트드래곤 순식간에 레프트 포워드와 공격형 미드필더 한 명을 잃습니다! 지금 신태호와 알렉스 킴 선수의 근접전에 신경을 쓰면 안 됩니다, 이스트드래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이스트드래곤 핀치!!”
이스트드래곤이 밀고 들어갔던 간격을 그대로 서던라이온이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때 핀치에 몰린 이스트드래곤 쪽에서 서던라이온의 수비형 미드필더 두 명을 노리고 다니엘 스톤하츠의 아이스 애로우가 비켜 갈 틈도 없이 연달아서 두다다 내리꽂혔다. 중대급 규모의 마도사들이 동시에 두 명의 미드필더가 서 있는 지역 전체를 노리고 마법을 시전한 것 같았다.
“어어어! 다니엘 스톤하츠!! 마력 리미트 넘은 것 아닙니까? 동시 마법 시전은 분명히 반칙…!”
“아닙니다! 동시 시전이 아닙니다!”
두 미드필더와 뒤의 오펜스도 그들을 지키기 위한 쉴드를 쳤지만 하늘에서 간격을 두지 않고 중기관총 100대를 동시에 쏘는 것같이 일정 지역 자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자 두 명이 곧 동시에 아웃되었다. 마법이 시전되는 동안 아무도 그 근처에 얼씬도 할 수 없었다.
“다, 다니엘 스톤하츠…! 도대체 마도 순환을 얼마나 한 겁니까! 믿기지 않는 마력량…! 엄청난 컨트롤!!”
“신태호도 항상 필살기를 숨기고 경기를 해서 상대편을 우습게 보는 것 아니냐는 말이 있었는데! 스톤하츠! 엄청난 기술을 보입니다…!”
“서던라이온 미드필더 두 명 모두 부상이 심각해 보입니다.”
“서던라이온 17번 천허, 19번 차오런량 선수 모두 1급 부상…!”
두 명의 서던라이온 선수는 멀리서 봐도 넝마 짝이 따로 없었다. 둘 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으며 신체 부위가 절단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그 순간 다니엘 스톤하츠의 뺨을 스치고 무언가 날아왔다. 알렉스 킴의 골드 스플래시였다. 또 신태호가 빗나가게 하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것이다.
“이 개 같은 새끼가!!!”
신태호와 근접전을 하고 있으면서도 알렉스가 순간 다니엘을 노려보며 그렇게 소리쳤다. 그는 신태호보다 월등한 신체조건으로 점차 근접전에서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알렉스가 신태호의 등을 잡고 무릎으로 명치를 가격하자 드디어 처음으로 타격 스코어가 떴다.
“으윽…!!”
신태호는 순간 몸이 굳었다가 순식간에 알렉스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동물적인 움직임이었다. 그의 한 팔로 목에 초크를 걸며 동시에 서던라이온 전 선수의 심장을 노리고 골드 스플래시를 시전했다.
“으아아아아!!!”
‘젠장!’
이번엔 알렉스가 방어를 위해 그의 모든 황금 독고저를 맞춰서 빗나가게 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명중률이 신태호보다는 정확하지 않아서 서던라이온 선수 두 명이 팔이나 다리 쪽을 빗맞아 부상을 입었다. 팔이 반쯤 날아가고 허벅지가 움푹 파였다. 둘 다 아웃이었다. 숫자상으로 두 클럽은 초 단위로 역전에 역전을 거듭했다. 5:6. 알렉스는 뒤로 넘어지듯 신태호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리고 그 뒤로 서던라이온과 이스트드래곤의 경기는 그렇게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빠른 시간 안에 양 팀 다 서로에게 이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힌 강호 클럽끼리의 경기는 매우 드물었다. 강자와 강자와의 경기에선 결국 준비한 자가 이긴다. 오늘 서던라이온의 작전은 이스트드래곤을 이기기 위한 오랜 준비가 엿보였다. 이스트드래곤 전을 위해 지금까지 알렉스 킴 선수의 능력을 숨기고 바짝 몸을 낮추고 있었고 이스트드래곤의 오만함을 이용했다.
알렉스 킴은 결국 신태호를 꺾었다.
“아아!!! 신태호 선수!!! 일대일 근접전에서 첫 패배를 기록합니다!!”
“상대는 올해의 슈퍼 루키!!! 알렉스 킴 선수입니다!!! 알렉스 킴!! 알렉스 킴, 19세!!!”
신태호가 무너지고 이스트드래곤의 오펜스진을 노리는 그를 막기 위해 다른 이스트드래곤 선수들이 돌아오는 것을 서던라이온의 디펜스와 미드필더가 전부 막아냈다. 마지막으로 이스트드래곤의 오펜스진만 남으니 다니엘 스톤하츠는 이때다 하고 아이스 애로우 스톰을 생성했다. 금방까진 동료들이 남아 있어 시전하지 못한 마법이었다. 아웃되지 않은 다른 서던라이온 선수들은 전부 자신들 진영 끝까지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지만 알렉스 킴만은 관중석 쉴드 위를 달리며 얼음 칼날의 폭풍을 뚫고 이스트드래곤의 숨통을 끊기 위해 도전해왔다. 다니엘 스톤하츠도 경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남은 오펜스 둘을 감싸는 강력한 쉴드를 만들며 마력 리미트 오버로 아웃되었다.
‘이겼다.’
알렉스는 쑥대밭이 된 잔디밭 위에 멈춰 섰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조명이 강렬했다. 배가 고팠다.
“엘 드라카 최초 2승, 2연패에 빛나는 챔피언 이스트드래곤! 34전 만에 첫 패배입니다…!!!! 서던라이온!!!! 2연패에 빛나는 사상최강의 이스트드래곤을 꺾고 4강에 진출합니다!!”
“저기 서 있는 19세의 소년은 오늘!! 세계 최강의 남자로 여기 상해대경기장에 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모든 관중이 열광하고 있습니다!!! 엘 드라카의 역사가 다시 한번 쓰입니다!!! 서던라이온 알렉스 킴!!! 알렉스 킴!!!!!”
영원한 승자는 없는 것이다. 언제나 더 강하고 더 어리고 더 아름다운 남자가 등장한다. 그것이 엘 드라카의 법칙이었다. 그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다.
4강에 진출한 서던라이온은 올해 온갖 악재에도 불구하고 악착같이 4강까지 올라온 웨스트이글과 붙었다. 웨스트이글은 엘 드라카만의 특색인 무한 교체 카드를 이용하여 시즌 중 철창신세를 지게 된 2명의 선수를 제외한 28명의 선수를 전부 갈며 서던라이온과 혈투를 벌였지만 결국 패배했다. 피날레는 2년 동안 이를 갈고 또 간 런던 레드폭스와의 경기였다. 레드폭스도 부상 선수까지 포함하여 30명의 선수를 전부 소진하며 결사 항전을 벌였지만 패배했다.
강자는 많다. 하지만 챔피언은 언제나 하나다. 서던라이온은 2128년 엘 드라카의 챔피언으로 우뚝 섰다. 그것도 TFC 역사상 최강의 클럽이라는 이스트드래곤을 꺾고. 또다시 사상최강의 클럽이 등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