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4부 3권) (15/21)

 Paradise (3)

다른 남자들이 아우성을 쳤다. 신태호에 이어 다니엘 스톤하츠도 저렇게 아무런 조건 없이 비키니를 돌려주었다. 이 배에서 이 게임만이 유일하게 남자들이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게임이었다. 여자들을 희롱하면서 노는 재미를 진정 모르는가! 그게 얼마나 좋은데!! 저건 배신이었다, 배신! 인류 남성 전체에 대한 배신이다.

도현은 활짝 웃었다. 그의 손에서 비키니를 돌려받고는 그에게 다가가 가슴을 가린 채 까치발을 들고 입을 맞췄다.

“역시 기특해요, 다니엘.”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당신을 이렇게 많은 남자들 앞에서 헐벗고 있게 놔둘 순 없습니다.”

그러자 그래도 조금은 그녀를 놀릴 마음을 가지고 비키니에 달려들었던 미르 킹쉴드와 송선호는 뜨끔한 얼굴을 했다. 도현은 굉장히 흡족한 얼굴을 했다. 남자가 이렇게 예쁘고 능력까지 있는 데다가 고분고분하게 따르면 더 좋다. 다니엘은 눈을 감으며 다시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저는 당신의 것이니까요.”

도현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앞에서 그와 눈을 마주치며 천천히 비키니를 입었다. 가까이 있으면 아무리 물에 가려져도 조금은 보인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볼 수 있는 건 오직 그뿐이었다. 다니엘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주며 그녀가 비키니를 입는 것을 도와주기까지 했다. 그녀가 다 입자 그녀의 두 손을 잡고 훌쩍 들어 올려 수영장 밖으로 나오게 해주었다. 그녀는 다니엘의 허리를 안았다. 둘은 눈을 마주쳤다. 아까 묘하게 눈길을 주고받으며 줄다리기를 했던 것과는 딴판으로 아주 친밀한 모습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둘은 더욱 친밀한 것일까? 둘은 다시금 입을 맞췄다. 다니엘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남자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눈을 뜨고 그들의 눈빛을 되받아쳤다.

최고의 남자라는 건 이런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떻게 해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 우월함. 힘, 미모, 지능, 재력, 그리고 그녀를 위한 이 마음까지. 저딴 놈들이 감히 다니엘 스톤하츠라는 남자의 발치나 따라올 수 있는 놈들인가.

‘나는 전부 도현 씨의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도 전부 나의 것이다.

그녀는 이 많은 남자들 사이에서, 그녀를 충분히 괴롭히고 난처하게 만들 수 있는 상황이 허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아주 고분고분하게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해주고, 해줄 수 있는 다니엘에게 퍽 흡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잠깐 무언가를 온전히 가지고 있다는 충족감과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남자를 가질 수 있는 자기 자신에게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다.

‘아, 남자 때문에 그런 걸 느끼는 건 바보 같은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럴 때 그런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알다시피 그는 몹시 영악하다. 그의 영악함을 사랑하게 될 정도로.

“그럼 이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도현 씨?”

다니엘이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도현이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자신이 들고 있는 셀레나 카토의 비키니를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도현은 셀레나를 돌아보았다. 평소라면 아마 바로 돌려주라고 했을 것이다.

[저… 사실 다니엘 좋아했어요. 눈치채셨겠지만….]

[그리고… 다니엘이 셀레나에게 무관심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분명히 다니엘은 셀레나를 사랑하고 있어요.]

[셀레나가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저 남자. 다니엘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이 드나요? 다니엘이 셀레나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드나요?]

[…네.]

잘난 수컷이라는 건 그런,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누군가와 공유할 수밖에 없다는 특성이 있다. 다들 그를 원하고 그래서 다들 어느 정도 그 남자에 대한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미르 킹쉴드를 봐라. 그는 웬만해선 자신과 인연이 있었던 여자들을 저버릴 남자가 아니다. 그 수가 굉장히 많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는 여자들을 좋아했고 그래서 친절하고, 존재만으로 그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건 전혀 나쁜 것이 아니다. 누차 말하지만 저 남자는 그런 남자고 그래서 좋은 남자다.

송선호는 미르 킹쉴드처럼 헤픈 스타일이 절대 아니다. 하지만 도현 외의 여자가 그의 지분을 일정 소유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지연 이바노프, 리자 송 등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여자들이었다. 그가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결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온전히 도현의 것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도현을 전부 가지려고 드는 것이다.

에반 블랙에 대해서는 분명 누구와도 지분을 공유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는 아무리 해도 스스로에 대해 놓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아직 그에 대해서 전부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너무나 도현의 것이 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걸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다니엘 스톤하츠는?

문득 전에 자신이 한 말이 기억났다.

[질투해서 싸우는 건 싫지만, 질투를 안 할 수는 없겠죠. 만약에 다니엘이 다른 여자랑 이렇게 있는 걸 보면 저도 질투할 거예요.]

그 말 때문에 이렇게 된 건가? 그녀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곤 다니엘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표정만으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미르 킹쉴드의 여자들은 도현과의 클래스 차이가 명확했다. 송선호의 여자들은 그의 가까운 혈육들이기 때문에 딱히 다른 생각이 들 게 없었다. 그와의 관계가 가까워지면 그녀도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어 좋기도 하다. 처음의 다니엘 스톤하츠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셀레나 카토는 그때도 그의 곁에 있었지만 그건 물리적인 의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치엔위, 한민유, 셀레나 카토…. 도현은 그들과 함께 다니엘을 공유해야 했다. 그들은 누구인가? 강력하고, 대단하고, 그리고 대단해질 여자가 아닌가.

[그게 저 남자 식의 사랑이에요. 남자의 사랑이란 폭력이죠. 그게 남자가 하는 사랑의 본질이에요. 사랑은 기만이에요. 그러니 가장 기만하는 상대야말로 가장 사랑하는 거죠.]

‘내가 제일 기만당하고 있어.’

참…. 도현은 다니엘의 뺨에 입을 쪽 맞췄다.

“돌려줘요.”

다니엘은 그녀의 얼굴을 보랏빛 눈동자로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셀레나를 내려다보았다. 셀레나는 조금 놀란 기색으로 몸을 가린 채 주춤주춤 그들 가까이 다가왔다. 다니엘은 그대로 선 채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셀레나는 주저하면서 손을 뻗어 그의 손에서 자신의 비키니를 가져갔다.

“…….”

그의 무정한 눈길이 셀레나를 잠깐 동안 내려다보았다. 셀레나는 입을 꾹 다문 채 그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그는 다시 도현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에 약간의 온기가 생겼다. 도현은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으며 그의 양쪽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도대체 이 예쁜 머리통 속에 얼마나 많은 게 돌아다니고 있는 걸까.”

“알고 싶으시다면 전부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평생 다니엘의 얘기만 들어야 할 것 같은데요?”

“즐거운 인생이 되겠군요.”

둘만이 알 수 있는 언어, 눈짓, 긴장감. 그런 것은 그 남자를 특별하게 만든다. 에반 블랙이 그랬던 것처럼. 다니엘 스톤하츠가 그걸 알아차리고 그를 따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특별히 그런 것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연스럽게 그렇게 변하게 된 것일까? 모르겠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다니엘 스톤하츠를 빤히 쳐다보았다. 관찰하게 되었다.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와 함께 왕좌로 돌아갔다. 한민유는 벌써 밖으로 나와 골골거리는 신태호의 턱밑을 쓰다듬으며 희롱하고 있었다. 셀레나도 곧 옷을 입고 나왔고 물속에는 샐리와 서연이 남아 있었다. 주드는 자신을 붙잡는 다른 남자들을 뿌리치고 얼른 샐리에게 비키니 팬티를 던졌다.

“받아!”

샐리는 자신의 가슴을 가린 채 수영장 안으로 떨어진 자신의 비키니를 주우러 영차영차 걸어갔다. 그녀는 웃으며 다른 남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주드를 바라보며 웃었다.

“고마워!”

주드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미소가 옮아와 바보같이 미소를 지었다가 다른 남자들에게 린치를 당했다.

“좋냐? 좋아? 이게 뭐야! 다들 그냥 주고! 재미없게!”

누가 그렇게 말하며 주드의 목에 헤드락을 걸었다. 주드는 그의 팔을 풀려고 노력하면서 저도 모르게 말했다.

“넌…! 샐리 좋아하면서 도대체 왜 이러는데?”

그러자 그의 목에 헤드락을 걸고 있던 크루가 당황하더니 빽 소리를 질렀다.

“내, 내가 언제! 내가 쟬?!”

“아, 놔!!”

주드는 그에게서 겨우 빠져나왔다. 주드는 그를 계속해서 나무랐다.

“요즘은 초딩도 좋아하는 여자애 안 괴롭힌다. 아니, 괴롭히는 게 뭐가 좋아하는 거야.”

주드가 기침을 하며 그렇게 말하자 그는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거렸다.

“어, 어차피 나 같은 건 안 좋아할 거니까…! 아니! 아니아니!”

그는 엄청 당황하더니 결국 도망가버렸다. 그건 주드가 아니더라도 다들 ‘병신…’이라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결국 남은 것은 서연뿐이었다.

“야, 오늘은 진짜 들어보자. 오빠한테 오빠라고 한번 해봐라. 어?”

“꺼져, 이 호빗아! 대머리! 멸치! 면봉! 츄파춥스!!”

“야! 나 머리 안 커!!”

박지훈이 버럭 소리 질렀다. 그 부분이 콤플렉스인 모양이다. 서연은 수영장 벽면에도 다가가지 않았다. 두 팔로 몸을 가린 채 가만히 수영장 계단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냥 빨리 올라가서 저기 있는 바스타월을 가져오면…. 그녀는 전혀 남자들에게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고작 이런 게임 한 번 득 보겠다고 마음에도 안 드는 남자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모르나? 원래 인생은 독고다이다. 그녀가 결국 마음을 먹고 수영장 계단 쪽으로 다가가자 남자들은 더욱더 가열차게 그녀를 놀렸다.

“오오~ 우리 서연이~ 그냥 올라가려고? 쪽팔릴 텐데~ 창피할 텐데~ 우리 막 눈 부릅뜨고 볼 텐데! 니가 전에 그런 것처럼!!”

“볼 것도 없는 멸치들이 뭐래! 그런 건 일부러 다 벗고 다녀도 안 봐!!”

서연이 그의 말을 받아쳤다. 그녀가 전혀 굴복하지 않자 그들은 우르르 수영장 계단으로 다가가 그녀가 오는 것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서연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다 두고 보자.”

“안 본다면서~ 지금은 또 본대~ 서연이 변태~”

그리고 그들은 제라드 라니에리의 옆구리를 마구 찔렀다. 비키니를 들고 있는 것은 그였으니 그가 괴롭히는 게 더 타격 있을 것이다.

“…….”

그가 서연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서연은 그가 거기에 있지도 않다는 것처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계단 앞에서 마음을 다잡았다.

“다 비켜!”

그러자 그들은 서연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통로만 만들어준 채 빽빽하게 모여 서 있었다. 서연은 팍 찌푸린 얼굴로 가장 최적의 경로를 탐색하며 계단을 올라갈 결심을 했다. 저번에 저 새끼들이 그랬던 것처럼 꼴사납게 뛰쳐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여자는 죽어도 자존심이다. 당당해야 덜 쪽팔리는 거다. 그녀가 한 팔로 자신의 가슴을 단단히 감싸고 다른 손으로 아랫부분을 감싼 채 천천히 물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야유와 휘슬을 불었다. 서연은 그런 남자들을 이제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의 몸이 허리까지 나오자 아무리 다들 비키니를 입고 다녀도 음흉한 눈길로 쳐다보지 않도록 단단하게 교육받은 지니호의 남자들이더라도 전부 그녀를 관음했다.

“잠깐만.”

그때가 되어서야 제라드가 인상을 쓴 채 그렇게 말했다. 서연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배꼽까지 물 밖으로 나왔다.

밝은 금발 머리, 짙고 깊고 푸르러 바라보고 있으면 빠져들 것같이 느껴지는 눈동자, 아름다운 얼굴, 훌륭한 몸매. 제라드 라니에리는 그런 남자였다. 아주 훌륭하고 대단한 수컷이란 말이다. 젊고 강하고 아름답고, 그는 자신의 전성기를 훌륭하게 즐기고 있었다. 서연은 분명히 그런 제라드 라니에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지금도 그랬다.

“잠깐만이라고 했잖아. 준다고.”

그는 계단으로 몇 걸음 내려가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뒤에 있는 남자들이 그의 등을 치며 말렸다. 제라드를 말리는 남자들을 말리는 남자들도 있었다. 이 정도로 놀렸으면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멈추면 무슨 소용인가. 그녀를 제외하고 다른 여자들은 시시할 정도로 간단하게 자기 비키니를 챙겨갔다. 이런 전례가 쌓이면 앞으로 여자 비키니 벗기기 벌칙은 지니호의 남자들이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 여자들에 대한 남자들의 충성 경쟁이 될 것이 뻔했다.

서연은 제라드를 본 체도 하지 않고 바스타월이 쌓여 있는 테이블만 주시하고 있었다. 제라드는 인상을 심하게 찌푸렸다. 손으로 아랫부분을 감싼 그녀의 엉덩이가 밖으로 불쑥 나왔다. 앞서도 말했지만, 아무리 여자들이 몸이 드러나는 비키니를 입고 다닌다고 해도! 다 벗고 다니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제라드는 데뷔 후부터 많은 여자들을 만났지만, 딱히 걸즈를 거느리고 살지는 않았다. 여자들의 호감은 언제나 좋았다. 그들은 부드럽고 좋은 냄새가 나며 기분 좋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혼자가 편했고 집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싫었다. 그래도 그가 여자에 아쉬울 일은 전혀 없었다. 그는 여자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남자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서연이 제라드의 옆을 그냥 지나쳐 올라가려고 하자 제라드는 평소와 달리 정말 정색을 하더니 사람들을 전부 등지고 냅다 그녀를 끌어안아 들었다.

“꺅!”

그녀가 깜짝 놀라 한 손으로 그의 등을 안고 다른 손으로 자신의 엉덩이를 가렸다. 그가 서연의 엉덩이를 가리며 받쳐 들었다. 그녀의 다리가 저절로 그의 허리를 감쌌다. 시큐리티들이 깜짝 놀라 달려왔지만 제라드는 그녀를 든 채 잽싸게 도망쳤다.

“어? 어어! 어어어! 야, 그래도 그러면 안 돼!”

그러자 서연을 놀리던 남자들까지 깜짝 놀라서 그렇게 말했다. 제라드는 발을 멈추고 그들을 돌아보았다가 서연을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놔?”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여기서 놓으면 진짜 다 보인다. 진짜 완전히 다 보인단 말이다. 서연은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퍽 쳤다.

“미쳤어? 노인네처럼 흰 머리나 잔뜩 난 게! 빨리 저거! 수건부터 줘!”

그녀는 제라드를 끌어안은 팔을 놓지 못했다. 몸을 가려야 했기 때문이다. 제라드는 쳇, 하고 짜증 난 얼굴을 하더니 바스타월을 한 장 집어 들었다. 그리고 슬금슬금 자리를 옮겨 선미로 향했다. 그러자 시큐리티들이 긴가민가 한 얼굴로 그들을 보다가 도현과 로웰을 바라보았다. 도현이 소리쳤다.

“서연아! 괜찮아?”

제라드의 머리카락을 막 잡아당기며 화를 내고 있던 서연은 아차 하고 도현을 바라보았다. 도현이 두 손바닥을 보이며 설명을 요구했다. 서연이 대꾸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서연이 그렇게 말하자 도현은 시큐리티들에게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그들은 선미 쪽으로 사라졌다. 로웰이 쯧쯧 혀를 찼다.

“서연이 같은 애가 은근히 남자한테 꽉 잡혀 살 스타일이죠. 안 그래요, 작가님?”

“그래요? 안 그럴 것 같은데.”

“서연이가 얼마나 남자를 가립니까. 그런데도 남자들이 놀리는 대로 반응하고, 다른 남자애들한테 멸치, 대머리라고 부르면서도 대꾸 다 해주고. 딱 제라드 라니에리 같은 천상 예쁜이한테 엄청 약할 타입이에요.”

“제라드 라니에리가 요물이죠. 미인계 쓰는 거지, 미인계.”

“여자가 그렇게 무르면 안 됩니다, 무르면. 초장부터 버르장머리를 제대로 잡고 시작해야지.”

“잘 하는 것 같던데요? 서연이가 어린데도 챙길 거 다 챙기고 인생관 뚜렷하고. 참 크게 될 애예요.”

“그런 사람일수록 남자를 조심해야 돼. 여자가 남자, 술, 도박만 멀리해도 다들 크게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커지면 잘생긴 남자야 절로 따르는 거고.”

“그건 그래.”

남자, 술, 도박을 전부 다 하는 연장자들이 잠깐 최연소자를 바라보며 그렇게 꼰대 같은 말을 나누고 있었다.

*

지니호에 근무하던 많은 남성 승무원과 스트리퍼들은 다들 묘한 상실감에 빠졌다.

예전 도현이 처음으로 배를 만들고 에반 블랙과 함께 여행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근무하고 있는 남성 승무원은 하나도 없었다. 스트리퍼들은 언제나 바뀌었고 남성 승무원들도 평균 근속 연수는 3년 정도였다.

여성 승무원과 직원들이 남성 직원보다 더 많았고 함장이나 항해사 등은 다들 50대 이상의 중년층이었고 셰프진도 아주 어린 스태프를 제외하고는 30대 중반에서 40대 이상이었다. 파티 플래너 등의 다른 전문가도 보통은 40대 이상이었다. 남성 크루들이나 스트리퍼들 중에선 분명 이런 고수익 전문직의 여성들을 선망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체로 그들은 이런 곳에서 일하는 배운 것 없는 어린 남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배운 어린 남자들을 좋아했다. 애초에 그들은 파티에 나와 어울리지도 않았기 때문에 일반 크루들과는 선이 많이 그어져 있는 편이었다.

사실 그건 다른 여성 크루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성 크루들은 때때로 새로 들어온 스트리퍼들과 친근하게 지낼지라도 동료인 남성 크루와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같이 일하는 사이가 굉장히 어색해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본인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고 깔끔하게 처신한다고 공언했던 많은 남성 크루들이 결국 여성 크루의 마음이 돌아서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분란을 일으켜 잘린 경우가 허다했다. 파티에선 흥겹게 춤추고 놀고 어울릴지라도 동료라는 선을 넘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것이다.

지금은 그러지 않지만 가령 도현 킬스버그가 간혹 스트리퍼가 아닌 남자 크루를 불러 자신의 성기를 빨게 하더라도 그게 그녀와 연인 사이가 된다는 신호나, 하다못해 승은(?)을 입은 것으로 여겨 취급이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큰 착각이었다. 그렇게 불린 남자 직원은 얼마 가지 않아 여지없이 잘렸다. 대개 그러고 난 뒤 그들이 꿈에 젖어 그녀에게 좀 더 친밀한 관계를 바라며 질척거리니 그녀가 주제넘은 것들을 자르게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점은 지금의 로웰도 마찬가지였다.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면 잘린다. 그게 사실상 성별을 따지지 않고 지니호에서 가장 유효한 법칙인데 남자들이 유독 그것을 잘 지키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근속연수가 여성 크루에 비해서 많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나마 오래 근속한 남자들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남자 크루들에게도 그 부분을 잘 가르쳐주고 있기도 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지니호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들 바다를 사랑하고 여행을 사랑하고 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선을 지켜야만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름다운 바다와 해변과 배, 스포츠와 음악, 맛있는 음식과 대화. 그리고 활기차고 건강하고 당당한 여자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도현 킬스버그와 로웰 리를 사랑했고 사라와 퀸을 사랑했고 샐리와 시즈카와 서연을 사랑했다. 도현과 로웰은 지니호의 왕이니 그렇게 사랑했고 사라와 퀸의 강함과 우월함을 사랑했으며 샐리와 시즈카와 서연은 연인으로 사랑했다. 특히나 사라와 퀸부터는 애초에 아주 굵디굵은 선이 쫙 그어져 있었기 때문에 동경의 마음이 컸고 본인들도 안 될 걸 알기 때문에(안 되는 걸 알면서도 바라보는 남자들도 간혹 있었다) 샐리, 시즈카, 서연에 대한 흠모율은 대단히 높았다.

샐리는 기다란 금발 머리에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환한 미소를 가진 미녀로 성격은 털털하여 모두를 친구이자 동료로 대해주었다. 시즈카는 역시나 글래머에 호기심이 많고 유머러스하며 가끔 대놓고 약은 짓을 해도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서연은 귀엽고 깜찍한 외모를 가졌지만 언제나 입이 험하고 곧잘 남자들의 아픈 부분을 찌르고 자주 정색하곤 했다.

여자들은 관심이 없어서 잘 몰랐지만 남자들은 다 알았다. 그들이 모이면 하는 얘기는 여자 얘기밖에 없었다. 그들 중에 가장 많은 남자들이 좋아하고 있는 여자는 단연 서연이었다. 왜냐. 예전 샐리와 시즈카는 두어 번 지니호 밖에서 연인이 있던 적이 있었다. 샐리 같은 경우는 그런 경우가 한 번도 없었지만 시즈카 같은 경우는 동료인 남성 크루와도 한 번 사귄 적도 있었다. 그는 시즈카와 헤어지고 알아서 일을 그만두고 나갔다. 그 부분이 그들의 인기에 마이너스 요인이 된 것은 아니다. 그런 부분 때문에 오히려 ‘나도 그녀와 사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라고 구체적으로 망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딱히 남자들의 플러팅이나 호감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선이 있었다. 그 선 때문에 보이는 그들의 덤덤함을 남자들은 어쩔 수 없이 섭섭하게 느꼈다. 남자들이 그들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남자들이 제풀에 상처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연은 아직 다른 여자들처럼 그들에게 덤덤하고 어른스러운 선을 긋지 않았다. 호감을 표하면 징그러워하고 짓궂게 굴면 화를 내고 반응해주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너무 심한 소리를 했나 싶으면 아닌 척 잠깐 안색을 살피기도 하고 도리어 더 뻔뻔하게 나오기도 했다. 그들은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까지 누구와도 연인 관계가 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눈이 굉장히 높았기 때문이다. 샐리나 시즈카처럼 누구는 사귀어 주면서 나는 안 된다는 그런 좌절감을 맛볼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그들의 아이돌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었다. 그녀가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다면 다 같이 마음껏 좋아하더라도 상처받을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학교 공부는 재밌어?”

“대학? 괜찮아. 수업도 나름 괜찮고. 가끔 날로 가르치는 교수님들도 있긴 한데 공부야 원래 혼자 하는 거니까. 나 과 수석이다.”

“뭐 배우는데?”

“생명과학과. 원래 어렸을 때부터 수학 과학 좋아했어. 나 바다도 좋아하고 동물도 좋아하고. 해양생태학자 되려고. 유전체 분석해서 생태 복원하거나 새로운 생물 찾아다니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고. 이런 것도 분류가 많이 달라서 아마 학부는 다 끝내 봐야 정할 수 있지 않을까?”

“니가 하는 말 반도 못 알아듣겠다.”

“바보 아냐? 요즘 세상에 얼굴만 예뻐 가지고 될 것 같아?”

“얼굴만 예뻐도 되거든! 그렇게 말하지 말고 니가 가르쳐주면 될 거 아냐.”

“에잇, 귀찮게. 봐봐. 얘랑 얘랑 이렇게 다르게 생겼어도 의외로 같은 종이라니까? 우리도 그렇고 몸을 이루는 세포 안에는 핵이라는 게 있는데….”

오늘 근무가 없는 서연은 아침을 먹고 나서부터 쭈욱 야외 수영장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라드 라니에리와 함께 말이다. 그녀는 그의 위에 올라타서 그가 입에 넣어주는 체리를 오물오물 먹으며 디바이스로 홀로그램을 띄워 제라드에게 자신이 배우는 학문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녀는 남자들에게 저렇게 사근사근하게(아무리 저렇게 무시하는 말투를 쓴다고 하더라도) 오래 얘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미르 킹쉴드를 직접 보고 난 이후로는 남자는 미르 킹쉴드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입에 달고 살았지만 그 정도뿐이었지 서연이 그에게 딱히 무슨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에 남자 비키니 벗기기 게임에서 그녀가 제라드와 모종의 딜을 성사한 후 그녀가 제라드와 잠자리를 함께했다는 것도 지니호 남성진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그 후 사람들이 있든 없든 제라드를 대놓고 까버린 그녀의 모습에 그들은 ‘역시 우리 서연이!’라며 내심 기뻐하기까지 했는데 결국에는 그에게 넘어가 버렸다는 것이 아닌가.

그간 그렇게 지니호의 남성 승무원과 스트리퍼들을 멸치니 대머리라고 부르며 은근히 그들의 매저키스틱한 면모를 저도 모르게 조련하던 서연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말을 걸어 욕을 먹을 틈도 없이 저렇게 제라드 라니에리와 딱 붙어있으니 그녀가 그와 잠자리를 했다는 것보다도 더더욱 큰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샐리와 시즈카도 눈이 낮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놈이 된다면 나도 혹시…’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남자들을 만났다면 서연은 아예 첫 남자친구부터 제라드 라니에리급 정도가 안 되면 눈에 안 찬다는 소리가 아닌가. 대놓고 너무 우월한 남자를 고르니까 남자들이 다들 묘하게 우울해하고 있었다. 차라리 모든 남자들을 지금까지처럼 싫어했다면 좋았을 텐데. 결국 자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녀가 쳐다보지도 않은 것이며 그녀가 했던 말들은 관심도 뭐도 아닌 팩트였을 뿐이라는 것을 괜히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굉장히 다양한 표정을 구사했지만 그들을 대할 때는 언제나 ‘멸치’, ‘대머리’, ‘극혐’이라는 단어를 얼굴에 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그녀는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재잘재잘 말하는 지금의 그녀는 그것보다 훨씬, 백 배, 천 배는 더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제라드 라니에리도 그렇게 생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처음에는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던 그녀의 말을 듣다가 어려운 파트로 넘어가자 홀로그램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야, 물어봐 놓고 집중 안 해? 안 들어? 이런 건 상식이야, 상식.”

“알았어. 근데 어려워. 나중에 더 쉽게 설명해줘.”

“이게 어려워? 왜?”

서연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하였다. 제라드는 웃었다.

“귀엽기만 한 줄 알았는데 엄청 똑똑하네….”

그는 그녀의 뺨을 검지로 슬슬 만졌다. 그녀는 그가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하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와야 했는지 알 길이 없을 것이다. 제라드는 올해 22살이었다. 서연보다 한 살이 적었다. 그는 세상 여자들이 다 똑같은 줄 알았다. 술을 많이 마시고 약에 취해 있고 남자에게 매달리고. 그의 엄마처럼 말이다. 간혹 TV 속에 나오는 사람들을 볼 때나 TFC 업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 그들이 여자도 남자도 아닌 다른 인종으로 보였다. 그가 직접 겪은 여자들이란 엄마, GAS, TFC 관계자, TFC 광팬 정도였고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굳이 그 이상을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상상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니호에 와서 많은 여자들을 보면서 뭔가 다르다고 느꼈지만 결국 제라드의 가까이에 오는 여자들은 전부 제라드에게 호감을 표현했기 때문에 결국 크게 다른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제라드에게 좀 더 많은 어휘와 운율로 그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칭찬했다. 그런 식의 말을 듣는 것은 누군가 술이나 약을 먹고 매달리거나 제라드 라니에리라는 이름만 보고 환상에 젖은 이들보다 훨씬 좋았다.

다양한 게임도 재미있었고 다양한 사람들도 좋았고 이상한 춤을 배워보는 것도 즐거웠다. 서핑, 윈드서핑, 카이트서핑, 스쿠버다이빙, 스노클링 등 다양한 물놀이를 배우는 것도, 경기 때문이 아니라 여행으로 관광지를 돌아다니며 모르는 도시의 역사와 특색을 배우는 것도 어쩐지 너무나 즐거웠다. 단 몇 주만으로 그의 안에 새로운 것이 잔뜩 많아졌다. 딱히 세상에 대해 싫은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역시 그가 있었던 몬스터 게이트에 대한 기억 때문에 망망대해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좋아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서연에 대해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밤새 구음을 해주면 수영복을 돌려준다고 하길래 그렇게 해주겠다고 한 것뿐이었다. 그가 여자가 부족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잠자리를 하고 싶다는 여자를 굳이 뿌리칠 이유도 없었다. 남자의 입장에서는 어느 것도 손해 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잠자리를 한 여자들에 대해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다시 만나도 좋게 인사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고 다시 자고 싶으면 자는 것이고 귀찮게 굴면 떨쳐내면 그만이었다. 그녀의 요구에 제라드는 가볍게 응한 것이었다. 그에게 섹스라는 것은 원래 그랬다. 그는 자신을 원하지 않는 여자와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날 저녁, 일을 마친 그녀의 방으로 갔고 평소대로 얼른 벗기고 얼른 침대로 가려고 했더니 그녀는 엄청 까다롭게 굴었다. 씻는 것에도 일일이 조건을 달았고 성병 검사를 하는 이상한 기계를 들이밀고 넣지도 못하게 할 거면서 이상하게 생긴 콘돔도 씌우고 성병이 있다며 키스도 못 하게 했다. 심플한 브라렛도 그대로 착용한 채였다. 그녀도 제라드가 한 콘돔을 만든 회사에서 만든 여성용 콘돔을 하여 그는 그 위를 핥아야 했다. 고무 맛과 윤활제의 맛밖에 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아닌 척했지만 제라드의 얼굴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았고 계속해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어쩐지 잘 느끼지 못해 그녀의 몸도 같이 만지려고 했지만 가슴도 못 만지게 했다. 여자의 것을 핥는 건 처음이었지만 이런 걸 못할 턱이 없는데 너무나 제약이 많아서 굉장히 고군분투해야 했다. 그래도 나중에는 제법 느끼게 만들었는데도 형편없었다는 말을 들으니 그로서도 굉장히….

제라드는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은근히 유혹했다.

“그래서… 우리 언제 또 할까?”

그는 그녀의 허리 부근을 부드럽게 손끝으로 빙글빙글 쓰다듬었다. 서연이 몸을 움찔했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살짝 얼굴이 상기된 채 시선을 돌리며 관심 없는 듯한 얼굴을 했다.

“글쎄.”

“조금만 더 만지게 해주면 진짜 기분 좋게 해줄 수 있는데. 고작 그거 하게 해주고 못한다는 소리 들으면 얼마나 빡치는 줄 알아?”

“그거부터 해결해.”

“뭐?”

“성병.”

“알았어….”

그게 그렇게 큰일인가? 다른 여자들은 아무도 뭐라고 한 적 없는데, 쳇. 그래도 대개의 남자들이란 마음에 든 여자가 시키는 일은 다 해주고 싶은 법이다. 제라드는 순순히 그날 저녁에 비행차를 타고 외출을 했다가 나흘 뒤쯤 돌아왔다. 배는 드디어 세이셸에 도착했다. 라디그 섬 근처에 정박했다.

아름다운 날씨와 아름다운 바다, 아름다운 배, 그리고 아름다운 남자들. 이곳은 천국이었다. 배는 열흘 정도 세이셸에 머물 예정이다. 지니호를 라디그 섬에 정박시키고 근무 쉬프트를 바꾸어 사흘에 한 번씩 근무가 교체되었다. 세이셸 전체를 관광할 수 있는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도현과 로웰이 배려해준 것이다.

앙스 라 레위니옹 해변에서 많은 이들이 해양 스포츠를 즐기거나 수영과 일광욕을 즐기며 누워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선베드에 누워 가만히 자신의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끄적 적고 있었다. 그는 과학자였다. 관찰하고 가정을 세우고 검증한다. 이번 여행도 좋은 정보를 많이 수집할 수 있었다.

“다니엘!”

도현이 물놀이를 하고 있다가 다니엘을 불렀다. 그녀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자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옮아왔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랑을 느끼는지 몰랐다.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옳았다. 많은 사람이 그에 동의하는지 아닌지는 진실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그것을 모르는 인간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안색을 살핀다. 다니엘은 앞으로 절대 그런 무지렁이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랑임에 틀림없었다. 다니엘 스톤하츠에게 세상이란 바로 자기 자신, 그 자체다. 그리고 그곳에 존재하는 유일한 타인은 도현 킬스버그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그녀에게 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모든 것을 그에게 주도록 만들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에 그녀가 면하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그녀의 모든 것에도 자신이 면하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게 할 것이다. 그가 그녀를 받아들이고 기뻐한 것처럼 그녀도 그를 받아들이는 기쁨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그녀가 그것을 먼저 원해 견딜 수 없도록….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다. 나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를 사랑한다. 나의 모든 영광은 도현 씨의 것이다. 우리의 사랑은 나의 유산과 함께 우주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쓰던 글을 마무리 짓고 일어나 그녀가 있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물놀이를 즐겼다.

그리고 그사이 다니엘의 노트는 잠깐 방치되어 있었다. 근처 가게에서 먹을 걸 잔뜩 사 오던 미르 킹쉴드가 옆자리에 먹을 걸 내려놓다가 그걸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건 그 마도사 새끼가 잠깐씩 쓰던 물건이었다. 집에서도 한 번씩 가만히 저걸 쓰고 있는 걸 몇 번 본 기억이 났다. 요즘 같은 시대에 배울 대로 배운 놈이 무슨 종이에 글을 쓰나 싶었는데 이렇게 무방비하게 굴러다니는 걸 본 것은 처음이었다. 딱히 그가 저 종이 쪼가리를 싸고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미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니엘의 물건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의 일기를 슥슥 넘겨보았다. 몇 자 읽다가 바로 덮었다. 도현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당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가 아팠다.

“아, 먹자. 노는 것도 먹고 놀아야지.”

제시 팔마가 곯은 배를 붙잡고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물놀이 때문에 방전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고래처럼 음식을 삼키기 시작했다. 곧 신태호나 다른 소드마스터들도 잔뜩 자기 몫의 음식을 사 오더니 위에 때려 붓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바다도, 천국과 같은 해변도 일단 그들의 입장에서는 식후경의 일이다.

이렇듯 TFC의 세계도 미르에겐 나쁘지 않았다. 술과 마약, 섹스, 그런 것들을 즐길 땐 그것들도 좋았다. 하지만 그런 건 역시 공허할 때도 있었고 미래 같은 걸 생각해볼 일도 없는 하루살이의 생활이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걸 딱히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마약을 해도 헤로인이나 아편은 절대 하지 않았다. 용병 짓을 하거나 선수 짓을 하다가 죽는 놈보다 헤로인을 하다 죽는 놈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는 자해를 하기도 했고 공공장소에서 이상한 짓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미르 킹쉴드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기보단 현재에 집중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예전과 다르게 현재를 즐기는 것이 미래에 대한 보장이 되었다. 도현과의 현재가 좋다면 미래도 좋을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는 도현을 사랑했고 그녀도 그를 사랑했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당연히 그도 그녀에게 넣고 싶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에겐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만 그녀에게는 반드시 부드럽고 상냥하게 잘할 자신이 있었다. 그녀가 하자는 대로만 할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녀가 함께 즐기지 못할 것 같으면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에 그녀에게 예전 걸즈가 했던 말(사실은 못한다)을 들으면 정말 충격받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를 핥는 것은 미르도 굉장히 좋아했다. 예전에는 그 맛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지금은 하지 않으면 굉장히 아쉬울 정도다.

미르 킹쉴드는 세상에서 가장 남자다운 남자였다.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가장 기뻐하는 선택을 하였다. 그런 남자다.

에반 블랙은 앙스 라 레위니옹에서 제일 그럴듯한 레스토랑에서 칵테일을 하나 사며 가게 주인과 세이셸의 경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잠깐 나누고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세이셸의 바다와 같이 시원하고 청량한 푸른색으로 된 칵테일이 들려 있었다.

‘참 잘 먹는구나….’

에반은 또 엄청난 음식물을 소화시키고 있는 소드마스터들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배가 고프면 저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건 에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에반은 저런 저열한 식이는 좋아하지 않았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그냥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바다를 감상하며 음료를 마셨다.

세이셸은 오랜만이다. 4년 전쯤 그녀와 함께 오고 난 뒤로는 한 번도 오지 못했다. 그때가 세이셸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천국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환상적인 장소였다. 오늘 해가 질 때쯤엔 도현에게 앙스 세베르로 가자고 권해 봐야겠다. 그때 그녀와 단둘이서 보았던 앙스 세베르의 석양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양이었다. 망막에 새겨진 것처럼 영원히 기억할 수 있었다. 이번에 그녀와 단둘이서 또 지는 태양을 바라보는 기분은 더더욱 감동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오다가 문득 다니엘 스톤하츠의 빈자리를 보았다. 그가 쓰던 물건이 평소와 다르게 아무렇게나 의자 위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답지 않았다. 에반은 그의 물건을 작은 탁자 위에 다시 놓아둘 겸 해서 집어 들었다가 실수로 노트가 펼쳐졌다. 딱히 일부러 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에반은 잠깐 해변을 돌아보았다가 그녀와 물놀이를 하느라 정신이 팔린 아름다운 남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뭐, 어때.’

성공하고자 한다면 적절한 융통성은 필수다. 품위는 지킬 필요가 있었지만 언제나 실리가 더 중요하다. 에반은 그의 노트를 맨 첫 장부터 펼치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끝까지 읽었다. 중간중간에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하며 다 읽고는 탁하고 노트를 덮었다.

‘그녀에 대해서도, 나에 대해서도, 송선호나 미르 킹쉴드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없군. 스스로를 알기 위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분석하는 건가?’

그는 다니엘의 노트를 그의 선베드 옆 탁자 위에 탁하고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깐 미소도 뭐도 없이 가만히 도현과 다니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현이 준 반지를 엄지로 만지작거리면서.

도현과 에반은 운명이라는 말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으로 맺어졌다. 서로가 아니면 안 되는 것도 아닌데 서로가 아니면 안 되었다. 그런 시절을 함께 하며 그들은 결핍을 이겨내고 성숙할 수 있었다.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었다. 바로 설 수 있게 되었다.

에반에게는 아마도, 그녀가 전부였다. 그녀가 그의 전부였다. 그가 이룬 피의 왕국도, 많은 이의 생사여탈을 결정하는 무소불위의 권력도 그녀가 없으면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을 부정할 때마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너무나 특별해서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의 모든 것이 전부 그녀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의 비참하던 어린 시절까지 정당화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와 처음 만나 함께하던 시절, 그녀가 그의 전부가 되어 갔듯이 그도 그녀의 전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세계가 되어 위태롭기 그지없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어찌나 불안하던지. 그녀에게 매달리던 수많은 남자들처럼, 그에게 매달리던 수많은 여자들처럼, 그렇게 서로를 잃게 되는 것을 에반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떠났다. 모든 것이 지나고, 그녀에게 반지까지 받고 이제 와 뒤돌아보니 알 수 있게 된 에반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게 좋아. 다른 남자들이 더 있는 게 좋아. 나와 그녀의 사이에는. 미르 킹쉴드 정도는 딱 좋아. 송선호도….’

서로의 사이에 거리가 필요했다. 그녀와 그는, 단둘만 있게 되면 또다시 예전처럼 그렇게 서로만을 바라보며 위태로워질 것이다. 너무나 가까워져서 서로를 구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는 이제 예전처럼 그녀에게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멀어질 수 없었다. 이제는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어서 온전히 그녀의 것이 되고 싶을 정도로, 그녀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온전히 그의 것이 되는 것도, 그가 온전히 그녀의 것이 되는 것도 서로에게 치명적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송선호 같은 남자와 맺어지면 여자는 그에게서 벗어나기 힘들어진다. 정확하게는 그에게 안주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 어려워진다. 그와 같이 능력 있고 가진 것이 많은 보수적인 남자들은 웬만해선 끝까지 자신의 여자를 책임진다. 그녀가 자신의 품에 있어 준다면 그는 많은 것을 수용하고 바꿔줄 수도 있었다. 그런 안전선은 그녀와 같이 스스로를 지킬 필요가 절실한 여자에게 어쩌면 가장 좋은 선택지일지도 모른다. 에반 블랙과 만났던 여자들은 대부분 자기 파괴적으로 무너지곤 했다. 심지어 도현마저도 그와 헤어지고 어째서인지 굉장히 힘들어졌다고 하지 않았는가. 만약 송선호에게 도현 외의 연인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에반을 만났던 여자들과 같은 식으로 되진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적당히만 다루면 그는 이 모든 관계의 좋은 누름돌이 되어 줄 것이다.

질투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에반은 이제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싶다는 욕구보다도 그녀를 더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뿐이다.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자신에게서 지키고 싶었다. 그렇다면 다른 남자가 얼마든지 더 있어도 좋았다. 그래도 그는 그녀에게 가장 특별한 남자니까.

‘다니엘 스톤하츠…. 다니엘 스톤하츠.’

[싸우지 않겠다는 말과는 별개로, 도현 씨에게 해를 끼치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의 위험함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에반과 다르게 완전한 확신범이었다. 그는 자신이 도현에게 끼치는 유해함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그것을 특별함이라고 맹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르 킹쉴드나 송선호는 날 견제하기 힘들어. 송선호가 조금만 더 정신을 차리면 좋은데…. 다니엘 스톤하츠…. 아니야. 그녀의 생각이 중요해. 도현이가 이걸 모를 리가 없어. 그런데도…. 도현이와 얘기해봐야 해. 결정하는 건 도현이야.’

그쯤 물속에서 도현이 혹시나 물을 먹거나 다치기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하며 함께 있던 송선호는 본인이 더 물을 먹고 체력이 방전되어 잠깐 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평소답지 않게 무표정하고 진지한 얼굴로 바다를, 그것도 도현을 바라보고 있는 에반 블랙을 발견하고 약간 인상을 썼다.

‘뭐야….’

송선호는 인상을 팍 썼다. 그리고 마실 걸 잡으려다가 탁자 위에 있는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다니엘의 노트이었다. 그도 그것을 단번에 알아봤다. 그 사이코 새끼가 가만히 이걸 적고 있을 때를 보면 제법 훌륭한 지성인 같아 보이는데 그래서 사실 더 소름 끼친다. 그는 모래가 살짝 묻은 그걸 툭툭 털어 다시 탁자 위에 올려 두려다가 무언가 알 수 없는 본능적인 이끌림에 그것의 가운데를 쫙 펴보았다. 그리고는 몇 장 더 넘겨보았다.

“이 새끼, 이거…! 진짜 사이코패스 아냐!”

송선호가 대노하여 외쳤다. 그는 그렇게 화를 내더니 그의 노트를 퍽 하고 탁자 위에 던지고 다시 도현에게 돌아갔다. 저런 사이코패스가 그녀의 곁을 저렇게 얼쩡거리는데 어떻게 그가 이렇게 있을 수가 있겠는가!

“도현아!”

“응?”

다니엘의 얼굴에 물총을 쏘고 있던 도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에게 벌컥 뭐라고 하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잠깐 입을 뻐끔거리다가 기세를 팍 죽이고 그녀가 타고 있는 튜브를 살짝 끌어당겼다.

“많이 탔어…. 안 아파? 마사지해줄게.”

“아, 진짜. 어쩐지 아프더라.”

화를 내는 것은 안 먹힌다. 성격을 죽여야 했다. 자신의 성격부터 죽여야 한다. 송선호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커다란 튜브에 하루 종일 올라타 있던 도현의 등과 어깨는 이미 새빨갰다. 다니엘은 아차, 하고 그녀의 피부를 보았다. 금방 그 말은 자신이 먼저 해야 하는 말이었다. 그녀가 집요하게 자신의 얼굴만 물총으로 맞추는 게 기뻐서 방심하고 있었다. 그라는 남자에게 약점이랄 것은 별로 없었지만 우월함 그 자체가 그의 약점이 되기도 했다. 교만이 아닌데도 교만과 같은 단점을 보인다.

그녀는 송선호의 손을 잡고 해변가로 돌아갔다. 송선호는 그늘진 곳으로 그녀의 선베드를 옮겼다. 그녀는 그 위에 앉았다. 물에서 나오니 피부는 금방 따가워졌다. 그는 가지고 온 가방에서 차가운 알로에 겔을 꺼냈다. 그녀의 손에도 짜주고 그도 손에 잔뜩 짰다. 그녀는 일단 그걸 얼굴에 바르고 자신의 팔과 어깨에 발랐다. 송선호는 그녀의 등과 목을 발라주었다.

“선크림도 다 지워져서 더 아파.”

“그러니까 좀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자니까.”

“송선호, 다리도.”

그녀의 늘씬한 다리에 알로에를 바르고 있는데 문득 그녀와 자신이 마치 휴가를 나온 젊은 부부 같은 모습이지 않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좀 좋아졌다. 그녀가 그의 얼굴에도 알로에를 발라주었다.

“…….”

그녀와 그런 밤을 보내고 나니 더더욱 그녀에게 책임감이 느껴지고 더더욱 그녀의 기분을 신경 쓰게 되었다. 전에도 그녀에게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거나 그녀의 기분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마음을 쏟는 걸 제어하는 장치가 망가진 것처럼 그녀에게 모든 것을 해주고 싶어졌다. 그녀가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그녀가 바라는 것이라면 아무리 자신이 싫어하는 것이라도 뭐든 기쁘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졌다. 체면이 망가지거나, 자존심이 상할 걸 예상하는 일에도 저도 모르게….

“도현아….”

“응?”

그는 그녀의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다시 선크림을 바르고 있는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너무나 좋았다.

“사랑해.”

그가 말했다. 그녀가 뭔가 웃기다는 듯이 후후 웃었다.

“요새 진짜 말 잘 듣네, 송선호.”

원래는 사랑한다는 말도 곧잘 체면 차리듯 말하던 그였다. 점잔을 빼는 남자다. 나이도 아직 몇 살 되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하면 권위를 세울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도현에게만은 자꾸 무너지더니 요새는 본인도 많이 포기한 게 눈에 보였다. 근래 둘은 정말 사이가 좋았다. 그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역시… 한 번 더 하고 싶다고 말하는 건 안 될까? 그러면 좀 더….’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마음이 애달았다. 그녀에게 억지로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와 하나가 되고 싶다는 것은 그의 오랜 열망이었다. 무려 6년 동안…. 그런데 그게 그렇게 딱 기억이 안 나다니. 꿈결같이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그녀와 하나가 되는 건….

어느새 다니엘 스톤하츠, 에반 블랙, 미르 킹쉴드까지 다 모여들었다. 송선호는 더더욱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지킬 것이다. 그러면 된다.

“아, 음…! 으음… 하…. 너무….”

제라드 라니에리는 잠깐 안 보인다 싶더니 세이셸로 바로 와서 서연을 끼고 놓아주질 않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키스도 절대 못 하게 했는데 진짜 다 고치고 온 모양인지 둘은 잔뜩 입을 맞추고 있었다. 제라드 라니에리가 속삭였다.

“나랑 키스하는 거 좋지? 좋아하잖아.”

그가 은근히, 섹시하게 속삭였다. 서연은 잠깐 이 요물 같은 금발 벽안의 미남에게 홀려 빨개진 얼굴로 그의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진짜 너무 예쁘다. 진짜 진짜 예쁘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예쁠 수가 있지? 진짜 예뻐. 너무 예뻐. 남자가 이 정도는 예뻐야지. 아, 예쁘다.’

남자는 예쁜 게 최고다. 그녀는 자신이 남자의 얼굴을 이렇게까지 밝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대체로 남자라는 것들은 전부 그녀의 눈에 안 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라드 라니에리는, 제라드 라니에리였다. 이런 남자는 정말 이런 남자인 것이다.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아랫배가 두근거렸다. 만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늘 밤은 진짜 기분 좋게 해줄게….”

그리고 그쯤 서연은 약간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흥, 하고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좋아.”

“나도 좋아. 귀여워.”

그는 그녀의 입술에 쪽쪽 입을 맞췄다.

“어차피 여행지에서 하룻밤 보내는 것 정도야 다들 하는 거잖아? 다시 만날 것도 아니고.”

제라드는 그녀의 뺨과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고롱거리다가 우뚝 멈췄다. 그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뭐?”

“뭐가?”

가끔 그녀의 말은 왜 이렇게 그의 기분을 안 좋게 만드는 것일까?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왜 그에게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일까?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뭘 잘못한 것일까? 그는 잠깐 서연의 얼굴을 보다가 다시금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술을 눌렀다가 천천히 뗐다.

“여행 끝나면 안 만날 거야?”

“누굴?”

“나.”

“내가 널 왜 만나?”

“…난 만나고 싶은데.”

하지만 그는 서연과 싸우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랑 왜 싸우는가?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면 풀어주면 될 일이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그녀의 손과 깍지를 꼈다.

“나 너 마음에 들어. 좋아. 좋아해. 만나고 싶어. 그럼 안 돼?”

빙빙 돌아갈 필요가 뭐가 있는가. 그는 제라드 라니에리였다. 그는 아무것도 숨길 것 없이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내놓았다. 그의 눈빛이 여자의 마음을 꽈악 하고 사로잡았다. 빠져들 것만 같은 눈동자였다. 야자수가 만들어낸 그림자, 그 뒤로 펼쳐진 햇살에 반짝거리는 터키색 바다. 깊고 깊은 남청색의 너무나 아름다운 눈동자. 서연은 저도 모르게 ‘돼…’라고 답할 뻔했다.

“음, 뭐. 그럼… 니가 하는 거 보고.”

“흐응.”

그러자 제라드는 씨익 웃었다. 그녀의 두 팔을 잡아 자신의 목을 감싸 안게 했다. 서연은 핫, 하는 소리를 내며 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몸을 서로 꼭 끌어안은 채 다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는 대놓고 섹시 어택과 미인계로 그녀를 사로잡으려고 하고 있었다. 서연이 어찌어찌 잘 버티고 있었지만 제라드 라니에리라는 남자가 원체 자기 매력을 잘 아는 놈이다 보니 정말 요물이 따로 없었다. 누구 말마따나 꽉 잡힐 게 보인다.

“저, 저기….”

그쯤 퀸 바르가스는 적당히 부는 바람을 타고 시원하게 물 위를 내달리다 해변으로 돌아왔다. 배가 고팠다. 그러자 필리페 버밍험도 슬슬 그녀의 뒤를 따라와 윈드서핑 보드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왜.”

그녀는 시원한 물을 마시며 그렇게 되물었다. 이제는 너무 귀찮아서 저리 꺼지라는 말도 관두게 되었다. 필리페는 지금까지 몇 번이고 그녀에게 이 말을 꺼내고 싶었다. 저번 비키니 벗기기 벌칙에서 그녀가 다른 여자들을 전부 때려눕히는 걸 보고 그 결심은 더더욱 확고해졌다. 하지만 그는 퀸에게 말을 걸 기회를 잡지 못했다. 아니, 맨날 쫓아다니고 있으니 말을 할 기회는 많았지만 본인이 우물쭈물하다가 기회를 놓치기 일쑤였다.

‘왜? 이건 그, 그런 게(?) 아니니까 괜찮다고!’

그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자꾸 빙빙 돌려 말하니 그녀가 귀찮아할 때가 많았다. 그는 대뜸 본론을 꺼냈다.

“혹시 이직할 생각 없어?”

“이직?”

퀸은 입고 있던 물놀이용 슈트를 벗기 시작했다. 그녀의 등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의 문신이 크게 있었다. 필리페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등을 보다가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시큐리티…. 그러니까 보디가드 같은 것도 했다며. 그러니까…. 여기서 얼마나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줄 수 있는데. 많이 줄 수 있는데.”

그러자 퀸이 어이가 없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뭐라고? 나 보고 니 보디가드가 되라고?”

알다시피 소드마스터라는 것들은 몸이 무기나 다름없는 놈들이 아닌가? 그런 그가 무슨 보디가드가 필요하단 말인가. 가장 악질적인 파파라치들도 TFC 선수는 설설 기며 피해간다. 사람 팔다리를 당근 뽑아내듯 뽑을 수 있는 인간이 도시 생활에서 무슨 보디가드가 필요하단 말인가.

필리페는 당황한 얼굴로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 아니…! 내가 당신한테 무슨 관심이 있어서 이런 걸 권하는 게 아니라고…!!”

누가 뭐래. 퀸이 또 딴소리를 하는 그를 인상을 찌푸리며 올려다보았다. 필리페는 하늘로 시선을 확 돌렸다. 그리고 툴툴거리듯 설명했다.

“GAS가…! 그러니까 걸즈들이 얼마나 악랄한지 당신이 알아? 나 같은 건 그 여자들한테 돈줄일 뿐이라니까! 걸즈가 아니더라도! 여자들이 자꾸 집적거린다고!”

“집적거리지 말라고 해.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 하면 되잖아. 그것도 못 해? 덩치는 산만 해가지고.”

퀸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필리페의 얼굴이 좀 벌게졌다.

“그렇게 말해도 안 된다고. 다들 일단 달라붙는다니까! 그런 거 싫어! 절대 싫어! 그렇다고 내가 여자를 때릴 수도 없잖아.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그래도 당신은 여자한테든 남자한테든 다 강한 같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퀸은 잠깐 필리페의 빵빵한 가슴과 몸매를 훑어보았다. 얼굴은 새초롬한 게 청순계에 가까운 것 같은데 몸이 이러니 여자들이 꽤나 침을 질질 흘리는 모양이다. 게다가 이 성격…. 도현도 필리페가 눈에 들어오기만 하면 놀렸다.

‘이 새끼가 꽤 유명한 선수라고 했던가? 그러면 돈도 많이 벌겠는데? 킬스버그 님이 킹쉴드도 제법 번다고 했으니까….’

퀸은 다시금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몸을 훑어본다고 지랄하거나 하진 않았다. 얼굴이 벌게져선 모르는 척했다. 퀸은 몸을 돌려 그와 바로 마주했다.

“얼마나 줄 건데? 연봉상승률은 얼마야? 보너스는 줘? 보험은 뭐뭐 해줄 거야? 휴가는 얼마나 줄 건데? 그 전에 너 어디 살아?”

퀸이 처음으로 필리페에 대해 궁금해하며 질문을 던졌다. 필리페는 더욱 새초롬한 얼굴이 되더니 팔짱을 꼈다. 빵빵한 그의 가슴이 더더욱 빵빵해졌다.

“돈은 당신이 1년에 버는 거 두 배로 줄게. 다른 조건은 매니저한테 말해놓을 테니까 걔랑 맞춰.”

“두 배?”

두 배, 두 배면 좋은데? 역시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짱이지. 퀸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배 타고 돌아다니는 것도 정말 좋고 지니호에서 일하는 것도 정말 좋지만 채 사장이 렌트를 돌리지 않게 되니 그녀가 지니호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건 이제 도현과 로웰의 겨울 휴가 때뿐이었다. 나머지 계절에는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바운티 헌터나 수상 스포츠 강사나 이것저것 하면서 먹고 살 정도의 돈은 충분히 벌고 있었지만 하나의 일로 두 배의 돈을 벌 수 있다면 당연히 혹했다.

“나쁘지 않은데….”

퀸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필리페의 얼굴이 화색이 되었다.

“진짜?”

“두 배면 할만하지. 그런데 너 어디 산다고?”

“…런던.”

“뭐? 런던?”

퀸이 인상을 찌푸렸다. 필리페는 약간 당황했다.

“왜, 왜? 런던 좋은데….”

“아, 런던은 날씨가 안 좋잖아. 겨울, 봄엔 비만 오고 날도 짧은데.”

그녀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필리페는 진짜 당황했다.

‘클럽을 옮겨야 하나?!’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며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12월 말부터 적어도 3월까진 런던에 꼭 안 있어도 되고…! 따뜻한 데로 가면 되지! 나, 난 어디든 괜찮으니까! 그리고 4월부터는 런던도 낮 시간 많이 길어지고! 도시도 예쁘고! 음식은 영국 음식만 안 먹으면 되고! 아니면 요리사 고용해도 되니까!”

필리페는 그녀가 딴지를 걸지 않은 것까지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자 퀸은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두 배… 두 배…. 그러면 못 해도….”

그러자 필리페는 안 그런 척 그녀의 눈치를 엄청 살피다가 슬그머니 손가락을 펼쳤다.

“세 배?”

그러자 퀸이 씨익 웃었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보스.”

“!”

역시 돈이 최고다. 필리페는 잠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굳어서 눈을 크게 뜬 채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슬쩍 손을 내밀어 아주 소극적으로, 손가락 세 개로 그녀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그리고 퀸은 휘파람을 불며 옷을 갈아입으러 가버렸다. 필리페는 잠깐 그대로 어쩔 줄을 몰라 가만히 서 있었다. 뭔가,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되게 기뻤다.

‘따, 딱히 관심 있는 건 아니라니까! 여자들 진짜 싫고…! 구단이고 집이고 할 것 없이 달려드는 것도 싫었고! 저 여자가 그냥 있기만 해도 그런 여자들이 안 덤빌 거니까! 그, 그러니까!’

으…. 그는 그렇게 가만히 퀸이 사라진 곳을 꼼짝도 하지 않고 보고 있다가 세이셸의 다른 관광객들이 혼자 있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휘슬을 불자 다시 그녀를 따라갔다.

“가, 같이 가….”

그가 퀸을 좋아한다는 소문은 이미 지니호에 파다하게 나 있었다. 그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후후. 재밌네.”

그들을 구경하고 있던 한민유가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한민유는 지니호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지 또 잠깐 일을 하러 돌아갔다가 세이셸로 바로 왔다. 셀레나도 중간에 한 번 돌아갔다가 한민유와 함께 돌아왔다. 신태호는 한민유의 곁에 찰싹 붙어있었다. 셀레나는 주변의 관심을 물리치고 혼자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사색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좀 혼자 있어 볼 필요가 있었다. 한민유는 시원한 모히또를 한 잔 마시며 사람 구경을 하고 있었다.

“민유 누나.”

신태호가 애교 있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한민유가 그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왜?”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너무 좋아서요.”

그가 히히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귀여웠다. 한민유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멍청하면 행복하기도 쉬운 법이지.’

한민유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문득 자신을 보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니 그는 아차 하고 고개를 바로 돌렸다. 카흐 밀란이었다.

그는 여기 있는 남자들 중에서 두 번째로 컸다. 필리페 버밍험 다음으로 건장했다. 208cm의 키에 130kg이 넘는 몸무게. 앞머리가 약간 길고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에 장난기 많고 섹시한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한민유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재미있네.’

한민유는 신태호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추곤 속삭였다.

“태호야, 배고프지 않아? 저어~기 있는 레스토랑에 가서 제일 맛있는 걸로 종류별로 사와.”

“누나, 배고파요?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그는 벌떡 일어나서 얼른 레스토랑으로 달려갔다. 한민유는 모히또를 쪼옥 빨았다. 바다를 한 번 보았다가 다시금 카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또 한민유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이리 와. 그러자 그의 얼굴이 더욱 굳어지더니 주저했다. 하지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천천히 한민유의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는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거기에 앉았다. 한민유는 손을 뻗어서 그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계속 그렇게 인상만 찌푸리고 있을 거야?”

“…….”

그의 얼굴이 더더욱 굳어졌다. 평소에는 허파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웃고 다니는 남자였다. 장난기 많고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남자다. 신태호가 특이한 것이지 원래 소드마스터들이란 다들 성격이 느긋하고 걱정 같은 건 쌓아두지 않고 사는 인간들이다.

“그때는 그렇게 전화를 많이 하더니. 용건은?”

카흐는 그녀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한민유는 미소를 그치고 그의 턱을 부드럽게 손으로 잡고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말해.”

“…아무…것도….”

그는 겨우 그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없다고?”

그리고 그녀는 약간 소리를 내서 웃었다. 카흐는 시선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몇 달 전에 봤을 때와 똑같았다. 웃으며 식사를 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섹스를 하고…. 그랬을 때와 같았다. 당시의 그는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그녀가 너무 좋아서 매일 같이 그녀에 대한 생각만 하며 어떻게 하면 그녀를 기쁘게 해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런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치엔이 루카스와 그녀를 공유하는 것이 싫었다. 그녀에게 그가 아니라 자신을 선택해달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카흐….”

한민유는 그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그는 그녀와 드디어 눈을 마주쳤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게 예전의 설렘인지, 아니면 불안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의 귀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그녀를 충분히 뿌리칠 수 있는데도, 그는 그녀에게 끌려갔다.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이 닿는 것을 느꼈다. 카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손이 부드럽게 그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카흐의 숨이 점점 거칠어지다가 그녀의 몸을 와락 껴안았다. 그녀가 웃었다.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때는 연락 못 받아서 미안해. 너무 바빴어.”

“응….”

카흐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그렇게 조용히 대답했다.

“TV에 나오는 거 봤으니까….”

“그래? 어땠어? 나 멋있었어?”

“…응…. 엄청….”

“후후. 고마워. 나도 자기가 나오는 경기 다 봤어. 멋있었어.”

한민유는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나중에 내 방으로 와.”

입술을 떼고 그녀가 그렇게 속삭였다. 카흐는 그녀를 안은 손에 힘을 주며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그는 갈등하다가 말했다.

“고마워….”

“응? 뭐가?”

“그 일…. 네가 한 거지?”

“카흐…. 나 사랑해?”

그의 질문에 그녀가 동문서답했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카흐는 천천히 인상을 심하게 찌푸렸다가 괴롭게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나도 사랑해. 그래서 한 거야. 자기를 위해서.”

그녀가 속삭였다. 카흐는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동안 너무나 불안했다. 일이 왜 그렇게 된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 뒤에 일이 그렇게 된 것도, 왜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동안 아무리 연락하려고 해도 그녀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이렇게 불쑥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막상 그녀가 나타나니 그는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치엔이 루카스를 죽인 건 그였다.

“네 앞에선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아. 이상해져…. 그때도….”

“쉬이. 그런 생각하지 마. 카흐는 카흐야. 자기는 날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했잖아. 나도 자기를 위해서 내 모든 걸 걸었으니까.”

“응…. 알아. 미안해. 사랑해. 연락이 안 돼서 너무 불안했어. 네가 날… 버린 줄만 알았어.”

“앞으로도 종종 연락 안 될 수도 있어. 내 일이…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좀 그래. 이해해줘. 사랑해?”

“응….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미안해….”

카흐는 드디어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런데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전의 설렘과는 분명히 달랐다. 이건, 이건 그의 본능이 알리는 위험 신호였다. 그를 이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준 원초적인 본능이었다. 그의 본능은 그에게 그녀가 위험하다고 자꾸 말했다.

‘아니야.’

그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누군가를 이렇게 사랑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이런 것이다. 자기 자신 외에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취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카흐는 그런 점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이 여자를 가지고 싶었다.

한민유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속삭였다.

“근데 그동안 자기 바람피웠나 봐?”

“응…. 응?! 아니! 아니, 그건…!!”

카흐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니, 아니야. 그건, 그건…. 네가 날 떠난 줄 알고…! 다 가벼운 거였어. 진지한 건 하나도 없었어! 알잖아. 으…. 아니야.”

“하하하.”

그녀가 웃었다. 카흐도 약간 마음을 놓고 피식 웃었다. 신태호가 음식을 잔뜩 사서 돌아왔을 땐 다 같이 웃으면서 음식을 먹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상냥하고 재미있고 사랑스러웠다. 카흐는 더더욱 안심했다.

“아, 잠깐만.”

부우웅. 그녀의 디바이스가 울렸다. 카흐는 웃다가 말고 그녀의 디바이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는 디바이스를 들고 받으며 멀리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얼마 정도 떨어지고서야 전화를 받았다.

“네, 학회장님.”

[노니까 좋냐?]

“너무 좋은데요. 학회장님도 다음에 한 번 나오세요. 저만 이렇게 쉬러 나와서 죄송해요.”

[어, 그래. 많이 죄송해라. 그래도 니가 10년 만에 쉬는 거 아니냐. 푹 쉬어라.]

“감사합니다, 학회장님.”

[다니엘 스톤하츠는?]

“잘 놀고 있네요.”

[그 새끼가 진짜 정신이 나간 거냐?]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좋겠어요. 루소 교수님도 그랬다면서요. 셀레나 말로는 저러면서도 하는 건 전부 다 잘한대요.”

[쩝, 그래. 뭐 나야 루소가 독고다이 하는 거 그냥 뒀지만 리밍이 성격에 그게 되겠냐? 리밍이 그건 옛날부터 작은 거에 너무 신경을 많이 쓴다니까. 고작 석사 1년 차 가지고 뭘 그렇게 징징거려?]

“학회장님께 인정받고 싶으니까 그러시는 거죠.”

[홉스는?]

“최대한 미루고 있습니다. 1심 재판이 아칸소 프로젝트 이후에 이루어지도록 조정하고 있습니다. 11월 즈음 마무리를 짓는 게 학회에 피해가 적을 것으로 보입니다.”

[음, 그래. 그래. 세상에 누가 자살을 하냐. 자살은 당하는 거지. 계측기 쪽은 로라가 잘 진행하고 있다. 3차에 걸쳐서 다음 달에 예정대로 다 회수할 거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받고 나서도 그녀는 계속해서 걸어서 멀리 떨어졌다. 소드마스터들도 집중하지 않으면 굳이 주변의 소음을 하나하나 인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집중한다면 그게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더라도 감지할 수 있었다. 카흐는 그녀가 하는 전화 통화에서 신경을 끄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의 통화내용을 다 들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의심하는 스스로를 타박했다.

‘아니야. 왜 자꾸 나쁜 생각을 해. 아니야. 민유는 좋은 여자라고.’

그래서 카흐는 그녀가 돌아왔을 때는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

“야, 생각을 해봐라. 작년에도 10점 만점에 10점, 올해도 10점 만점에 10점이었다, 내가. 여기서도 그런 남자는 내가 유일하다고, 어? 못 들었냐?”

“빙신아, 내가 없을 때 있었던 일이 무슨 의미가 있냐? 어? 봐라, 봐. 이 키 차이. 갑빠도 내가 더 크다고.”

미르 킹쉴드 (201cm / 121kg / 27.2cm / 18.7cm)와 카흐 밀란(208cm / 131kg / 24.5cm / 16.5cm)이 시비가 붙었다. 미르가 픽 비웃었다.

“보이냐? 내 금발, 파란 눈! 사람들은 여기에 껌벅 죽어. 모르냐?”

“아, 병신 같은 소리 한다. 남자는 뭐든 큰 게 최고야.”

“까봐.”

“그래, 까자.”

둘 다 자신이 없을 것이 없었다. 둘 다 그대로 수영복 팬티를 벗으려고 하자 신태호 (174cm / 78kg / ??cm / ??cm)가 둘의 가슴을 양쪽으로 밀어내며 말렸다.

“아, 형들. 우리 이런 데서 이러지 말자구요. 사람들도 많은데!”

“그럼 들어가자. 어디로 갈까?”

“와, 이 새끼 키도 좆만 한 게 어디서 이런 근자감이 나오는 거냐?”

“좆에서 나온다, 빙아.”

그리고 미르는 픽 웃으며 말했다.

“야, 그리고 갑빠 크고 키 큰 게 다면 저 새끼가 최고란 소린데 저거 보이냐? 쟤가 진짜 최고라고?”

“왜 날 걸고넘어져!!”

갑자기 시선이 자신에게로 모이자 필리페 버밍험 (210cm / 149kg / ??cm / ??cm)이 버럭했다. 카흐 밀란이 가운뎃손가락을 폈다.

“금발에 파란 눈이 그렇게 좋은 거면 너보다 라니에리가 더 나아, 븅아. 너야 흰 머리에 흰 눈깔이나 다름없는데!”

“뭐, 그건 그렇지.”

제라드 라니에리 (202cm / 119kg / ??cm / ??cm)가 자신만만하게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미르가 손짓했다.

“너도 이리 와봐, 새끼야.”

제라드는 당연히 빼지 않고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 신태호는 가운데서 열심히 그들의 가슴을 밀고 그들의 팬티를 잡고 끄집어 올렸다.

원래 이런 시비는 한 번 터지면 모두에게 퍼지는 법이다. 그러니까 보통 남자들은 그런 시비를 피하려고만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어째 날 때부터 우월한 저 울끈이불끈이들만이 꼭 때 되면 물갈이까지 해가며 서로를 겨뤄보려고 했다. 그러니까 저렇게 발전이 있는 것일까. TFC의 법칙이라고 하지 않는가. 더 어리고 더 예쁘고 더 쭉쭉빵빵한 남자는 항상 나온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누가 최고인지 꼭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다.

“이런 걸 우리끼리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어! 저, 저기! 우리 형들 다 괜찮죠? 그렇죠?”

그런데 그렇다고 여기서 싸워봐라. 진짜 큰일 난다. 신태호가 그들을 말리다가 안 되겠는지 주변의 관광객을 끌어들였다. 주변에서 그들을 구경하고 있던 여자들이 자신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게다가 거기 있던 미르, 카흐, 제라드, 제시, 신태호 그리고 관심 없는 듯 옆에 있었지만 은근슬쩍 자신의 팬티 안을 확인하던 필리페나 제수스 강 (200cm / 134kg / 25.9cm / 18.8cm)까지 7명의 글래머들이 한꺼번에 자신들을 확 돌아보자 깜짝 놀랐다.

“다, 다들 전부 멋있으신데요?”

“다들 멋져요. 싸우지 마세요.”

그 여자들은 밍숭맹숭하고! 아무런 쓸 데도 없는!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었다. 다들 화를 냈다.

“그딴 하나 마나 한 소리 집어치워!”

미르 킹쉴드와 카흐 밀란이 서로를 노려보며 특히나 목소리를 높였다. 내세울 것 없는 인간들이나 저딴 말을 좋아한다. 세상에 잘난 것과 못난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언제나 명확하게 나뉘는데 도대체 저딴 말을 감히 누구한테 지껄이는 것인가! 그들이 그런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열등한 수컷들처럼 보인단 말인가!

“야, 좆만이, 너 빨리 안 꺼지냐? 죽고 싶냐?”

“꼬맹아, 형들 가운데 끼는 게 아니에요. 나가라. 다친다.”

“악! 그만하라고!!”

신태호가 소리쳤다. 그때 구원자가 나타났다.

“설마 싸워요, 지금?”

도현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다가왔다. 신태호가 화색이 되었다.

“누나!”

로웰과 한민유, 셀레나, 샐리, 시즈카, 서연, 퀸, 사라까지 전부 모여들었다. 저 남자들이 싸우면 기물 파손은 물론이고 인명 사상까지 일어난다. 지니호에서도 싸우면 안 되겠지만 남의 나라, 남의 동네에서 싸우면 수습하기 훨씬 어려워진다.

“싸우는 거 아니야, 도현아. 아, 이 새끼가 자꾸 나보다 지가 낫다잖아. 뭔 개소리야.”

“개소리는 니가 찰지게 하고 있다. 키도 좆만 한 게!”

“와, 죽고 싶냐? 싸우자고? 도현아, 이거 내가 시비 건 거 아니다? 어? 내가 시비 건 거 아니라고!”

미르 킹쉴드는 완전히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로 연신 도현을 돌아보았다. 로웰이 팔짱을 끼고 가만히 보더니 말했다.

“하긴 품평회 때는 이 남자들이 다 없었지. 다시 해야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얼굴은 블랙 님이랑 스톤하츠 씨가 짱이에요.”

로웰의 말에 시즈카가 바로 답했다. 그러자 거기서 시비가 붙은 남자들이 죄다 시즈카를 돌아보았다.

“왜!!”

뛰어난 이들이란 언제나 자신이 얼마나, 어떻게, 왜 뛰어난지, 혹은 아닌지를 일일이 다 따져주는 사람이 좋은 것이다. 어차피 남자는 다 같다느니, 뭐라느니 하는 말은 후려치는 것밖에 안 된다. 그들은 이렇게 우월한데 왜 그딴 소리를 얌전히 들어야 하는가.

“아니, 보면 딱 알지…. 블랙 님 머리카락은 진짜 찬란한 황금빛이라구요. 눈코입 어디 더 손볼 곳도 없고 눈동자, 속눈썹, 분위기도 장난 아닌데. 귀티도 팍팍 나고. 그리고 설마 눈 안 보여요? 스톤하츠 씨 얼굴 못 봤어요? 보라색 눈동자. 완전 보석 같은데.”

시즈카가 어이가 없다는 기색으로 주저 없이 팍팍 설명했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남 일처럼 보고 있던 에반 블랙과 다니엘 스톤하츠였으나 대차게 말려들었다. 남자들 사이에 이런 겨룸은 한 번 시작되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저것들은 진짜 키가 좆만 하잖아!”

카흐가 그렇게 말했고 미르와 제라드 등도 완전히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시즈카를 보았다.

“물론 크면 좋지만….”

그러자 ‘그럼 그렇지!’라는 태도로 그들은 다시금 서로에게 으르렁거렸다. 서연이 거기 있는 모두를 한 번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이쯤 보고 나니까 드는 생각이 역시 귀티 나는 게 제일 있어 보이는 거 같아요. 귀티 나는 게 제일 어려워. 키도 막 큰 거보다는 비율이 중요하고. VVIP님 밸런스가 제일 짱이라구요. 빠지는 것도 하나 없고. 역시 날 때부터 있는 집 자식이라 말하는 거, 입고 다니는 거 하나하나 다 다르고. 외국어, 스포츠, 음악, 예술 모르는 거 없고, 집안 짱짱하고, 부모 형제 할 것 없이 다 대단한 사람들뿐이고.”

송선호도 말려들었다. 서연이 양손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 부분에 있어서는 몹시 딸릴 수밖에 없는 소드마스터들이 입을 뻐끔뻐끔하며 서연을 쳐다보았다.

“아니! 돈은 나도 있을 만큼은 있어!”

언제나 여우같이 서연을 휘두르던 제라드도 그녀를 보며 그답지 않게 언성을 높였다. 서연은 ‘그래서?’라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도현도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다들 둘러보고 말했다.

“밸런스…. 그래도 역시 남자는 클수록 좋은 거야. 눈에 보이는 걸 무시할 순 없어. 필리페 씨처럼 저렇게 크고 단단하니까 확실히 더 눈이 가는 거 있지?”

도현이 그렇게 유심히 필리페와 다른 남자들을 비교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미르는 깜짝 놀라 펄쩍 뛰더니 도현의 얼굴을 보다가 필리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니야, 도현아. 저 새끼도 까봐야 해. 겉으로만 봐서는 남자의 대단함은 판별할 수가 없어. 싸워보거나 아니면 까봐야 한다고! 야! 너도 들어와, 이 찌질이 새꺄!”

그렇게 싫어하던 필리페도 결국 끌려왔다. ‘다 같이 손에 손잡고 함께 1등으로 골인하면 다들 1등이죠~’라는 식의 자위질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따라서 그런 말을 했던 관광객들은 다시금 들러리가 되어 멀찍이서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고 이 울끈불끈 우월한 남자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정확하게 판별하고 우열을 가려주는 여자들의 말에만 집중했다.

“음, 그것도 아니야. 크기만 크고 물렁해도 거지 같아. 역시 단단함이 중요하죠.”

“아, 재질. 맞아. 명품과 명품이 아닌 물건의 차이가 뭐야. 바로 재질과 마감이지.”

사라의 말에 도현이 박수를 짝 치며 크게 동의했다. 미르 킹쉴드가 도현을 홱 돌아보았다.

“역시 우리 도현이! 그러니까 나라고, 나!”

도현이 다가와서 턱 하고 미르의 가슴을 만졌다. 그리고 옆에 있던 카흐 밀란과 제라드 라니에리, 필리페 버밍험, 제수스 강, 제시 팔마, 신태호까지 전부 만져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들 ‘음~ 재질과 마감~’이라고 도현의 말을 복창하며 다가와서 남자들의 재질(?)과 마감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도현이 송선호, 다니엘 스톤하츠, 에반 블랙까지 만지며 역시나 재질(?)과 마감(?)을 확인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도 그들에게 손을 뻗쳤다.

“함부로 만지지 마십시오.”

“…….”

“VVIP 전용 상품이라서요.”

송선호는 그들의 손길을 바로 뿌리치며 신경질을 냈고 다니엘 스톤하츠는 ‘한 번 만져봐라. 어떻게 되는지 보자’라는 얼굴로 쎄하게 쳐다보았고 에반 블랙은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사람들 보는 눈(과 손)은 비슷한 것인지 가까이서 많이 보고 많이 만지는 남자들이 대충 좁혀졌다. 미르 킹쉴드, 제라드 라니에리, 카흐 밀란, 제수스 강, 필리페 버밍험은 다들 매우 크고 단단하고 아름다운 남자들이었기 때문에 자꾸 다시 만져보며 미묘한 재질과 마감의 차이를 느껴보려고 했다.

“단단함이 달라, 단단함이.”

필리페 버밍험도 여자들이 만지는 걸 질색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어떻게 해도 그들은 그를 만졌다. 퀸도 가만히 필리페의 가슴과 비슷한 덩치를 가진 카흐의 가슴에 양손을 각각 올리고 주무르며 상태를 확인했다. 비슷한 키에 비슷한 덩치인데도 몸무게가 28kg 정도 차이가 나는 둘이었다. 당연히 필리페 버밍험이 훨씬 더 단단하고 쩌는 재질을 가졌다. 퀸이 그렇게 말하자 너도나도 다가와 필리페의 몸과 다른 남자들의 몸을 만져서 비교해보았다.

“오오.”

“마, 만지지 마.”

필리페는 몸을 움츠리며 퀸의 뒤로 숨었다. 물론 그런다고 숨겨지는 덩치는 아니지만, 어쨌든 다들 그렇게 필리페의 쩌는 재질에 감탄하자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다 그를 만지려 들었다.

“그렇게 치면 태호도 재질은 좋아.”

사라가 태호의 얼굴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며 말했다. 단단함으로만 따질 것 같으면 그도 어쩐지 느낌이 좋았다. 그러니 또 너도나도 그를 만져보았다. 역시나 판가름이 잘 나지 않았다. 샐리가 ‘흐음’하는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한 번 쭉 둘러보더니 말했다.

“그럼 역시 킬스버그 님 말씀대로 엉덩이일까? 엉덩이의 모양, 재질, 마감….”

엉덩이? 남자들이 다들 자기 엉덩이를 한 번씩 보았다. 키, 어깨, 비율, 체형 등은 기본이라고 볼 때 역시 크게 판가름이 나는 건 갑빠와 엉덩이가 아닌가. 볼륨감인 것이다, 볼륨감. 그러자 또 엉덩이는 미르 킹쉴드나 제수스 강이 참 예쁘다. 다들 그들의 엉덩이를 만져보았다. 도현도 다가가서 남자들의 엉덩이를 찰싹찰싹 쳐보며 상태를 확인했다.

“아, 이거 어렵네.”

“어렵네요.”

“어려워요.”

다들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금 다들 팔짱을 끼고 유심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한민유가 다 마신 칵테일을 옆에 두며 말했다.

“굳이 1등을 따지고 싶다면 그걸로 따져요.”

“뭐요?”

도현이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한민유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자지 크기.”

“…와 재질과 마감.”

로웰이 거기에 덧붙였다.

“뭐.”

그러자 거기엔 커다란 이의가 없는 남자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더니만 어깨를 으쓱하고 자기 팬티를 잡았다. 필리페 버밍험은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를 반복하면서 고개와 손을 맹렬히 가로젓고 있었고 신태호도 어깨까지 벌게졌다. 꽤나 일이 진지해져 디바이스를 이용해 다각도로 사진을 찍고 3D 모델을 생성하고 재질과 마감 상태에 대한 각각의 의견까지 전부 수집하였다. 까다롭게 구는 남자들은 정보량이 적고 객관성을 잃어 비교군에서 탈락하였다. 그리고 결국 1등이 가려졌다.

도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미르 킹쉴드.”

미르는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두 팔을 들며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했다. 그는 구김 없이 크게 웃었다. 제라드나 카흐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왜?! 내가 뭐!”

“길이, 둘레, 부피, 모양, 재질, 마감 등을 다각도로 분석하여 점수를 매겨 평가한 거예요, 다 같이.”

“아, 이건 말도 안 돼. 절대 인정 못 해.”

몇몇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평가 내용을 밝힐 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들은 흔쾌히 자신의 평가 내용을 자세한 설명까지 덧붙여 말해주었다. 그들은 이보다 더 진지할 수 없는 태도로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확실히 다른 항목과는 다르게 그들 나름대로 뭔가의 우열이 가려졌다는 느낌이 들긴 하는지 불만족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싸움과 시비를 멈추고 투덜거리면서 자기들 자리로 가버렸다. 그리고 여자들끼리 잠깐 비공개 평가회를 가졌다.

“어때요? 버밍험이나 태호는 아예 순위도 못 매겼잖아요. VVIP님이나 스톤하츠 씨, 블랙 님도 그렇고.”

“필리페 씨나 태호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마감은 역시 송선호나 다니엘이 철두철미해. 빠지는 것도 모난 것도 없고 깔끔. 명품이란 말이야. 에반은 얼굴이랑은 안 어울리게 거기는 좀… 후후.”

“아, 난 솔직히 제수스 거 보고 깜~짝 놀랐어요. 예쁘고 뭐고 말할 수가 없는데 뇌리에 확 남아.”

“맞아. 뭔가 야성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야만적이었어.”

“저거 어떻게 해. 킥킥.”

“좋아하는 사람들은 엄청 좋아할걸. 그런 거. 킥킥.”

“니가 좋아하는구만. 그럼 필리페는?”

“크고 굵고 단단해. 기본을 철저하게 지킨, 딱 크고 굵고 딴딴.”

“오~ 용케 만지게 해줬네. 진짜 퀸 언니 좋아하나 봐.”

“귀찮아.”

“아, 근데 진짜 제라드랑 미르는 박빙이었어요. 제라드 것도 완전~”

“역시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아. 이름 날리는 건 다 이유가 있다니까.”

그렇게 다들 쑥덕쑥덕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문득 다들 한민유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태호는 어때요?”

다니엘 스톤하츠를 예외로 치면 거기서 가장 강한 남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신태호일 것이다. 아직 다 크지도 못한 거라고 하고…. 다들 호기심을 가지고 한민유를 바라보자 그녀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 진짜 너무 크던데. 더 크려나? 잘 모르겠네요.”

“역시…. 태호가 아직 다른 남자들에 비하면 덩치가 작아서 솔직히 밖으로 더 티가 나….”

“그죠? 저도 항상 그 생각했어요.”

“알렉스 킴이라는 선수도 되게 멋있던데. 태호도 그렇게 되려나? 기대된다.”

저 정도로 예쁜 남자들이 많으면 여자들도 하루 종일 남자 얘기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각자의 남성관과 좋은 남자에 대한 기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세상 남자들이 다 저런 남자들만 있으면 좋을 텐데~”

시즈카가 양손으로 턱을 괴고 잠깐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디에 어떻게 놔둬도 눈에 띄고 번쩍번쩍 빛이 나는 환~한 남자들이었다. 샐리는 자신의 몸에 선오일을 바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남자들을 한 번 보고 나면 다른 남자들이 무성체로 보인단 말이야.”

“왜 이렇지? 사실 자연적으로라면 소드마스터인 남자들만 남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시즈카의 말에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왜 세상 남자들의 반이 대머리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거야? 그리고 나머지 반도 결국엔 다들 차츰 빠져? 대머리인 남자들이 여자랑 결혼해서 애 낳을 생각을 안 하면 되잖아. 여자들도 그냥 알아서 대머리는 피하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어렵나. 왜 꼭 후대에 그런 고통과 우환을 남겨야 하는 거지? 한 세대만 딱 눈 감고 지나가면 되잖아? 이해가 안 된다니까.”

서연의 말에 도현도 반짝반짝한 미르 킹쉴드를 바라보면서 원거리로 양기를 얻으며 대꾸했다.

“맞는 말이야. 굳이 애를 낳고 싶으면 저런 남자애만 낳으면 되지. 못생긴 남자 좋아한다는 여자는….”

“자존감 이슈죠, 자존감. 자존감이 낮은 거예요. 자기 자신을 진짜 사랑하면 그런 남자를 만날 수가 없다니까.”

서연이 찰떡같이 도현의 말을 받아 그렇게 말했다. 사라도 말했다.

“못생긴 거에서 어떻게든 괜찮은 거 하나라도 찾아내서 주변에 설명하려고 하는 거 보면 애잔하지.”

“아니, 대부분 남자친구 얘기도 잘 안 해. 지들이라고 못생긴 걸 왜 몰라. 그런데도 도저히 애정 결핍 때문에 그런 남자조차도 놓지 못하는 건데. 다른 사람들이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하나?”

서연이 혀를 쯧쯧 찼다. 한민유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자기도 괜찮다고 자위하는 거죠. 자기가 뭔가 이루거나 잘나질 생각보다는 그냥 다 같이 자기처럼 외롭고 못난 존재가 되어 자신의 열등감을 자극하지 않아 주길 바라는 거예요. 그걸 위해서라면 기꺼이 열등감 없는 소수의 사람들을 공격하기까지 하죠.”

“아, 극혐.”

“뭐, 분수를 모른다는 게 문제가 되긴 하지만 멍청한 사람들이 많은 게 꼭 나에게 불리한 것만은 아니에요. 다들 똑똑하고 경쟁력 있다면 더 박 터지게 싸워야 할 거 아니에요. 저 남자들 봐요.”

그녀의 말에 도현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저렇게 발전이 있는 거죠. 저 경쟁과 발전은 인류에 이로운 거예요.”

아름다운 남자들이란 언제나 주변을 싱그럽게 밝히는 존재들이다. 천국 같은 이 세이셸도 젊고 아름다운 그들이 있어 더 행복하지 않은가. 다른 관광객들도 세이셸의 풍경을 보다가 저 남자들을 보고 저 남자들을 보다가 세이셸을 감상하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저 남자들만 용병과 TFC 세계에 갇혀서 발전하는 게 좀 아깝죠. 저건 세상 사람들과 나눌수록 더 좋은 건데요.”

한민유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보았다. 병도 잘 안 걸려, 암도 잘 안 걸려, 머리 안 빠져, 잘 늙지도 않아, 힘도 세고, 성격 느긋해…. 저 남자들은 용병이나 TFC를 구르며 금방 나자빠진다. 22세기임에도 불구하고 평균 수명이 40살도 되지 않는다. 상하이와 남중국해는 인류의 실험 배지(培地)다. 그러니 금방 세대교체가 되고 강한 개체만 선별되어 살아남아 몇천 년 문명사회 속에서 유전적으로 정체, 아니, 퇴화되고 있는 다른 남자들과 다르게 눈부시게 발전하고 또 발전하고 있었다. 그들은 갈수록 더 아름다워지고 갈수록 더 강해졌다. 신태호가 등장하고 2년도 되지 않아 알렉스 킴이 나온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몇천 년이 지나 그들을 다른 남자들과 같이 세워 두면 정말 같은 종이냐고 의아해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격차가 벌어졌다.

“그러니까요. 일반인들이랑 잘 섞이지 못한단 말이에요. 항상 아깝다고 생각했어요. 폭력적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그런 것 같은데 사실 사건 사고 일어나는 거 비교해보면 쟤들은 지들끼리 주로 싸우지 약자에 대한 폭력은 일반 남자들에 비해선 반의반의 반 정도밖에 안 되는데. 의외로 직접 만나보면 말도 잘 듣고.”

로웰도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쁘잖아요, 선생님.”

“맞아요. 그게 제일이죠, 작가님.”

둘은 하이파이브를 했다. 한민유가 의외로 진지하게, 바보짓을 하며 또 잘 놀고 있는 소드마스터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남자들이 전부 소드마스터였으면 몬스터 게이트 막는데 이 정도까지 돈이 들까? 걷어 먹이는 게 문젠데… 선진국은 팜 빌딩 수확률이 높아서 남아도는 게 식량이고. 수율만 맞추면 적절한 수준에서 가격 형성될 거고. 육고기 생산물의 안정성만 더 확실히 검증하면 곡식류만큼 가격을 떨어뜨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니, 솔직히 저 남자들은 이미 그런 거 안 따지고 잘 먹고 탈도 안 나잖아.”

게다가 기본적으로 에너지가 전부 육체를 유지하는 데 쓰여 예쁘고 멍청하니 더 좋다. 왕리밍이나 다니엘 스톤하츠 같은 짓을 하는 남자들이 등장할 확률도 떨어질 거란 말이다. 전부 치환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고, 하지만 이것보다 비율이 높아지는 건 확실히 도현의 말처럼 ‘세상(나)에게 이로울 것’ 같았다. 한민유는 정말 진지하게 찬찬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뭘 어떻게 해볼까.

‘아칸소 프로젝트. 터널 프로젝트. 웜홀을 자유롭게 조정. 소드마스터 해방. 인권. 교육…. 문제는? 정치화, 세력화. 해결방법은? 역할 고정. 이미지 고정. 법적 제재. 분열….’

오래갈 권력자가 되기 위해서는 야심만 있어서도 안 된다. 능력만 있어서도 안 된다. 둘 다 있어야 한다. 인류를 수백억 년 너머의 세계로 이끌 꿈을 꾸는 건 캘리 박과 세현 퀸 같은 왕자(王者)들의 몫이다. 그들이 가진 다른 모든, 아주 훌륭한 자질들은 다 부차적이고 그들은 제왕의 자질을 타고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한민유도, 그들과 유착한 정권들도 그들의 신하고 권세가다. 그들의 치하에서 오래도록 권력을 누리고 싶을 뿐이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여기서 이 구도가 조금이라도 바뀌기를 바라지 않는다. 만일 저들이 분해되어 사분오열한다면 세계는 엄청난 혼란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핵 경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군사 경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마도사들은 전부 중력 마법이라는 인류 역사상 제일 위대하고 훌륭한, 희대의 발명품으로 과무장될 것이고 인재들은 발전의 여지도 없이 소모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학회장님 사후가 가장 큰 위기인데 퀸 교수님이 갑자기 저렇게 되셨으니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마도 의학의 발전으로 앞으로 30년은 더 정정하시겠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과중한 업무에서 벗어난 한민유의 고민은 거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지상낙원에서의 여유롭고 아름다운 시간이 천천히, 하지만 거스를 수 없이 지나 몇몇 사람은 각자의 거처로 돌아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정말 이번 겨울은 평생 잊지 못하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웰 리 씨, 도현 킬스버그 씨. 우리 종종 만나도록 하죠.”

한민유가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도현도 웃으며 그녀와 손을 맞잡았다.

“저도 민유 씨를 알게 되어서 기뻤습니다. 많이 바쁘시지 않다면 언제든 좋아요. 다 같이 만나서 수다라도 떨죠.”

“정말 좋네요. 저는 언제나 친구가 많은 사람이 부러웠거든요. 우리 셀레나는 앞으로도 자주 만나게 될 텐데 잘 부탁드립니다.”

“네, 하시는 일 다 잘 되시구요. 연락드릴게요.”

“네, 저도 연락드리겠습니다.”

한민유는 웃는 얼굴로 로웰과도 굳게 악수를 했다. 셀레나도 도현과 로웰에게 인사를 했다. 다니엘도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결국 세이셸을 끝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도현 씨….”

다니엘은 침통한 표정으로 도현을 끌어안았다. 남들이 보기야 표정을 움직이는 근육이 고장이라도 난 것 같은 남자였지만 자기 나름대로는 굉장히 우울한 얼굴이었다. 처음에 학회로 들어가게 될 때는 족쇄를 차는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금 삶의 목표를 찾고 나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역시 족쇄 같이 느껴졌다.

“사랑합니다, 도현 씨. 언제나 생각하고 있겠습니다, 도현 씨.”

그는 도현의 이마에 애틋하게 입을 맞추며 그렇게 말했다. 이 좋은 곳에 그녀만 두고 가려고 하니 어찌 아쉽지 않겠는가.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속닥거렸다. 그러자 그가 도현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도 무언가 밀어를 속닥거렸다. 둘만이 알 수 있는 언어가 생겼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집에서 뵙겠습니다.”

“다녀와요, 다니엘.”

그녀는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는 도현의 얼굴을 잠시 본 뒤 한민유와 셀레나를 따라 비행차에 올라탔다. 로웰과 도현은 웃는 얼굴로 그들을 배웅했다. 비행차가 떠올랐다.

“한민유 씨랑은 친하게 지내요, 우리.”

도현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비행차에 손을 흔들며 말했다. 로웰도 마찬가지였다.

“저런 사람 한 명 잘 알아 놓으면 인생이 쭉 편하죠. 설 되면 선물 큰 거 하나 해서 보냅시다.”

“좋은 생각이에요.”

비행차가 점처럼 작아지자 둘은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칵테일을 한 잔씩 나눠 마시며 이야기도 나눴다.

“역시 돈 많은 사람들 입장에선 우린 돈 많은 축도 아니에요, 그쵸?”

도현이 말했다. 로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당장 송 사장이나 블랙 씨만 봐도. 블랙 씨는 자기 고향 나라 대통령보다도 더 힘이 있다는데요. 리엔도 10년이 안 된 기업인데도 돈 엄청 벌고, 게다가 송 사장은 리엔도 리엔이지만 자기 아버지 회사랑 그룹까지 하면 정말 엄청나잖아요. 다 합치면 한국 시총 1위 아니에요? 그 정도쯤 되면 나라 하나도 어찌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생기는 거겠죠.”

로웰이 말했다. 도현이 칵테일을 휘휘 젓다가 문득 말했다.

“조만간에 학회에서 사기업을 하나 만들 거래요. 요즘 학회 사정이 안 좋아 자금을 모으기 힘들다고 하더라구요. 한 달 뒤쯤 세미나 같은 게 열리는데 다니엘이 꼭 오래요. 그리고 그 기업에 투자를 하라는데, 세상에 얼마를 투자하라는지 아세요?”

“얼마나요?”

“지금 제가 가진 거 다요.”

“진짜요? 아니, 작가님한테 이런 반지도 덥썩 주는 거 보면 자기도 어디 돈 꿍쳐뒀을 거면서 왜 작가님 돈을 쓰래요?”

“자기가 직접 못한다고. 그리고 자기 돈을 나한테 줘서 해도 나중에 문제 생긴다면서 내 돈은 자금 출처가 깨끗하고 분명하니 제일 좋다는 거예요. 앞으로 우리가 생활하는 거야 자기가 다 책임진다면서.”

그러자 로웰도 퍽 걱정되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도현은 로웰에게 빚진 것도 전부 다 갚았다. 아직은 작품에서 인세가 꽤 들어오고 있는 데다가 그녀야 인망이 훌륭하니 또다시 그렇게 휘청하더라도 궁핍해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자산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입장이 전혀 다르다.

“작가님 어머니가 남자한테 돈 받는 건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다면서요. 돈 주는 거에 대해서는 별말 없으셨어요?”

“그건 뭐 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 안 되는 거겠죠. 하아. 사업에 대해 쭉 설명을 해주면서 이쪽 사정이 어려울 때 들어와야 크게 돌려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솔직히 혹해요.”

도현은 바다를 보며 칵테일을 휘휘 저었다.

“해외 부동산도 다 팔렸고, 미르랑 선생님께 돈 갚고 나니 딱 5백 얼마 정도 남아서 앞으로 그럭저럭 사는 데는 전혀 지장 없겠지만 송선호네 집 같은 거 하나 더 가지고 싶어도 살 수는 없는 거잖아요. 이런 반지도 내가 사고 싶을 때 못 산다니. 글 쓰는 거 좋지만 솔직히 이번처럼 아무것도 못 하면서 글만 쓰는 건 힘들어요.”

도현은 자신의 양손에 끼워져 있는 커다란 보라색 다이아몬드 반지와 투명한 순백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같이 바라보았다. 다이아몬드의 마력이란. 그녀가 말했다.

“유럽에 있는 회원제 레스토랑을 다닐 때도 에반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었어요. 천요정이나 도쿄 엠페리오스도 송선호가 없으면 아무리 가고 싶어도 전 갈 수 없어요. 내가 좋아하는 걸 즐기는 데 남자가 없으면 들어갈 수조차 없는 곳이 있는 게 싫어요. 송선호야 그렇다 쳐도 에반은 자기 힘으로 성공해서 그런 데 들어갈 수 있게 된 거잖아요.”

“그건 당연한 생각이지만 그래도 남자 말만 듣고 그렇게 큰돈을 덜컥 쓰는 건 안 돼요. 생각해봐야죠. 도박이 무서운 이유가 뭐예요. 거기에 자신의 욕망을 싣기 때문에 제대로 판가름을 못 하는 게 문제잖아요.”

로웰은 도현보다도 더 도박을 좋아했지만 분명히 말했다. 하지만 도현의 머릿속에는 다니엘의 말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은, 아니,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도현에게 해주었다. 그런 정보는 돈 이상의 가치, 아니, 세상에 돈으로 표현하지 못할 가치가 있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넌센스다. 그 정보는 엄청난 금액의 가치가 있었다. 다니엘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도현은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예전의 도현은 사치품을 사 모으는 데 일말의 주저 없이 돈을 펑펑 써대곤 했다. 돈과 시간의 가치에 대해서 실감하지 못할 때였다. 그 뒤 인생의 굴곡을 겪고 나니 어쩔 수 없이 사람이 조금 조심스러워진 것이다. 고민하게 되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살면서 무언가에 대해 이토록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투자를 하고 싶으면 송 사장이나 블랙 씨한테 물어봐도 좋잖아요.”

로웰이 말했다. 도현은 어딘가를 의미 없이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채로 대답했다. 그녀는 바이올렛 스타를 엄지로 천천히 쓰다듬고 있었다.

“송선호는 절대 안 된다고 할 거예요. 에반은 모르겠어요. 그런데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요.”

“참….”

오직 하나만 볼 때 그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야심이 큰 사람은 결코 평화를 알지 못한다. 가장 유능한 사람은 스스로 가장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한민유나 다니엘 스톤하츠 같은 사람들은 이런 격언들이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처음에 어떤 형태로 태어났든 결국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는 특출난 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어떤 리스크라도 기꺼이 감내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고서라도 가지고 싶은, 이루고 싶은 꿈과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현 킬스버그는 어떠한가. 그녀가 가진 삶의 태도는 쾌락주의와 보신주의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삶의 태도를 영위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어느 정도 이상의 자산이 필요로 했고 어떤 순간에는 그녀도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그녀는 그런 순간에 있었다.

“전처럼 급하게 하지 말고 이번엔 좀 더 고심해서 작품 하나 같이 해요.”

“네, 그것도 그럴 생각이지만….”

선택할 수 있는 항목은 많았다. 작품활동에 매진하는 것, 다니엘의 비공개 정보에 투자하는 것, 심지어 송선호나 에반과 결혼하는 것까지도 선택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전부 그녀에게 장단점이 있었다. 그 남자들과 결혼을 한다면 도현은 막대한 자산을 가진 남자를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자유는 상당히 제약받게 될 것이다. 작품활동에 매진하는 것은 좋다. 작품을 만드는 건 물론 돈을 버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지만 그 외의 재미도 충분히 많았으니까. 하지만 도현은 지금 번 돈보다도, 전에 벌었던 돈보다도, 그걸 다 합친 것보다도 더 큰 부를 원했다. 자신을 지키는 것 이상의 힘을 원하게 된 것이다.

로웰이 말했다.

“우리에겐 밸런스가 중요한 거예요.”

“…그렇죠?”

도현은 로웰을 돌아보며 그렇게 반문했다. 로웰이 말했다.

“그럼 같이해요, 같이. 나는 이번에 번 돈도, 작가님이 갚아준 돈도 다 있으니까. 작가님 혼자서 그 리스크를 다 질 필요가 어디 있어요? 다니엘 스톤하츠 그건 얌체같이 자기 발은 뺐는데.”

“다니엘은 이미 그런 건 안 해도 될 정도로 돈이 많은 것 같아요. 개인 자산으로만 치면 에반이나 송선호보다도 많은 것 같아요. 느낌일 뿐이지만….”

“돈도 많으면서 작가님한테 왜 그래요?”

“다니엘은 내가 자기를 지배해주길 원해요. 동시에 날 지배하고 싶어 해요. 지금까지는 괜찮았지만 앞으로 그가 더 강해지고 원하는 목표에 더욱 다가간다면 결국 자기가 날 지배해버리고 말 거라는 걸 알아요. 그것도 본인 입장에선 나쁘지 않겠지만…. 그 남자는 내가 강해지길 바라요. 자기를 영원히 지배해주길 바라고 있어요. 도전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도록 내가 거울이 되어주길 바라는 거죠.”

이 말은 로웰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둘만이 통하는 언어와 눈빛으로 친밀한 시간을 보낸 자들은 주변과 격리된 본인들만의 세계가 생기게 된다. 로웰과 도현의 관계도 특별하지만 다른 남자들과도 시간이 지나며 점점 특별해지는 것이다.

“작가님이랑 만나서 알게 된 거지만 인생은 즐겁게 살면 즐거운 거고 불행하게 살면 불행한 것 같아요. 가끔은 어쩔 수 없겠지만 기본은 즐겁게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거잖아요.”

로웰의 말이 도현의 머릿속을 환기시켰다. 도현은 그녀의 말에 크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도현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래서 여행과 휴가가 좋은 것이다. 평상시의 자신에게 매몰되어 있다 보면 명확한 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로웰과 도현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리 얘기해도 앞으로의 모든 것을 전부 슬기롭게 헤쳐나가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즐겁게 살고자 하면 대부분 즐겁게 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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