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1)

Sisterhood

돌아온 메트로서울은 여전히 매섭게 추웠다. 잠깐 차를 갈아타는 사이에도 추위가 뺨을 찔렀다. 송선호는 문득 시계를 확인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오후 6시였다. 그는 새벽부터 점심까지는 아버지 회사의 상무로(승진했다), 오후 시간에는 리엔으로 돌아와 일했다. 도현과 함께 배를 타고 다닐 때도 원격 업무를 많이 했지만 그래도 역시 회사로 오니 할 일이 태산이었다.

‘부가티 도착하기 전에 잠깐….’

송선호가 그녀에게 선물로 주기 위하여 구입한 스포츠카가 도착했다. 저번처럼 덜렁 차만 주자니 약간 모양이 안 나는 것 같아 선물을 사서 직접 끌고 갈 생각이었다. 그는 해러드 백화점으로 향했다. 운전기사가 열어주는 문으로 나오는데 마침 전화가 왔다.

[어, 아들~]

“엄마?”

[뒤돌아봐. 여기. 여기.]

송선호는 디바이스에서 귀를 떼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저쪽에 블랙진에 짙은 갈색의 스트랩이 달린 숏코트를 입고 있는 여자가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머리카락을 단발로 자르고 부츠를 신은 지연 이바노프는 전보다 더 활동적으로 보였다. 송선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들은 서로에게 다가갔다. 지연은 송선호를 끌어안았다.

“엄마? 언제 오셨어요?”

“금방. 우리 아들~ 잘 있었어?”

기약 없는 휴가를 떠났던 부모님이 반년이 지나서 돌아온 것이다. 송선호는 어머니가 이렇게 짧게 머리를 자른 것을 처음 보아 뭔가 신기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계속 쳐다보았다. 어머니가 바지를 입은 것도 어쩐지 오랜만이다. 지연은 원체 젊고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하고 있어 아들과 그러고 있으니 연인으로 보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아버지는요?”

“집에서 쉬고 있어.”

“엄마는 안 피곤하세요?”

“응, 괜찮아. 너무 좋아.”

지연의 얼굴이 확 피어 있었다. 송선호도 자연스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행 좋으셨나 봐요?”

“응, 진짜 좋았어. 아, 이래서 다들 많이 나가는구나, 싶더라니까. 중간에 한번 도현 씨랑 보려고 했는데 시간이 안 됐네.”

“하하.”

그건 안 만난 게 천만다행이다. 송선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어머니를 에스코트하여 해러드 백화점 안으로 들어왔다. 송선호의 수행비서인 김 비서와 어머니의 운전기사도 따라왔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사드릴게요.”

“어머, 우리 아들이 사주는 거야?”

“당연하죠.”

지연은 송선호와 팔짱을 끼고 1층부터 돌기 시작했다. 수영복과 스포츠용품을 구입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에르메스에 가선 승마용품도 잔뜩 구입했다.

“엄마가 어렸을 땐 말 타는 것도 좋아했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통 못해서 다시 연습 좀 해보려고.”

“정말요? 몰랐어요.”

“미술 보는 눈도 더 기르고 싶고. 이대론 재단도 너희 아빠 말대로만 운영하게 생겨서 공부도 해야겠어.”

“엄마 많이 바빠지시겠네요….”

송선호가 다시금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녀를 보았다. 뭔가, 뭐랄까. 기분이 이상하다. 그에게 어머니란 항상 집에 있는 존재로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자신을 위해 있는 존재 말이다. 어머니가 외모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혼은 안 하시겠구나.’

나쁜 건 절대 아니다. 그냥 그와 같은 남자에게는 이런 게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송선호가 말했다.

“저도 도와드릴 수 있는 건 다 도와드릴게요.”

“역시~ 우리 아들이 낫다. 내 아들.”

지연은 웃는 얼굴로 그의 엉덩이를 대견하다는 듯이 두드렸다. 정말 어머니의 웃음이 밝아졌다. 여행이 정말 좋긴 좋으셨나 보다.

“음? 이바노프 이사장님?”

“어머, 오랜만이야.”

그때 누군가 지연을 알아보았다. 해러드 백화점이면 입지부터 오는 사람들까지 전부 최상류층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 지연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보았다.

‘이제는 엄마가 우리 재단 이사장…. 아버지 회사뿐만 아니라 리엔에도 지분이….’

송선호는 여전히 어색한 기분을 버리지 못하며 엄마를 보고 있다가 뒤늦게 지연을 부른 사람을 돌아보았다가 깜짝 놀라 사레에 걸릴 뻔했다.

“선호 씨도 계셨네요?”

새카만 점 같은 눈에 귀여운 속눈썹을 가진 여자로, 박예나였다. 그녀도 이 나라의 최상류층을 이루는 대규모 기업 그룹의 상속자였다. 그녀의 어머니와 지연도 약간의 친분이 있었고 서로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와 송선호는 결혼을 전제로 만나기까지 했다.

“아… 오랜만입니다, 예나 씨.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송선호는 잠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박예나가 먼저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자 얼른 잡고 인사를 했다. 어색하다…. 송선호는 얼른 어머니를 끌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다.

“그럼 쇼핑 잘하십시오. 저희는 이제 다른 걸 사러….”

“어? 송선호?”

그때 또 누군가 들어왔다. 크림색 트위드 자켓과 스커트로 우아하게 차려입은 도현 킬스버그였다. 그가 그녀의 목소리를 못 알아들을 리가 있는가. 송선호는 그대로 딱 굳었다.

“어~ 도현 씨!”

“어머! 어머니~ 한국 들어오신 거예요?”

“응~ 잘 지냈어?”

“네, 여행은 재밌으셨어요?”

“응, 너무 좋았어. 도현 씨가 말해준 곳도 거의 다 가봤어. 너무 좋더라. 오늘 들어왔거든.”

“아, 진짜요? 저도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중간에 보고 싶었는데.”

“저두요~”

둘은 정말 사이가 좋았다. 누가 보면 송선호가 자식이 아니라 도현이 그녀의 자식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지연은 아차, 하고 박예나와 도현을 서로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박예나 부사장, 여기는 도현 킬스버그라고 유명한 작가님이시고 도현 씨, 여기는 근우에너지 부사장인 박예나 씨. 근우그룹 회장 둘째 딸.”

“안녕하세요, 도현 씨.”

“안녕하세요.”

두 여자는 악수를 했다. 지연은 박수를 짝 치며 말했다.

“어머, 이럴 게 아니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어디 가서 커피나 한잔해요.”

엄마, 제발…. 송선호는 지연을 말리려고 했지만 두 여자도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백화점 꼭대기에 있는 고급 카페로 향했다. 송선호는 도현의 옆에 앉았고 도현의 맞은편에는 박예나가, 그리고 그 옆에는 지연 이바노프가 송선호와 마주하여 앉았다. 층층의 디저트 플레이트에 예쁘게 진열된 디저트와 과일이 예뻤다. 각기 커피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잠깐은 쇼핑한 물건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이야기는 곧 송선호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다. 알다시피 이 자리에 모인 여자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본인들이 같은 성별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송선호와 공통분모가 있다는 점이었다.

“선호 씨 어떤 여자 만나는지 궁금했는데 기사 보고 조금 놀랐어요. 솔직히 우리가 아직은 좀 보수적이잖아요.”

박예나가 그렇게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한국인이나 여자라는 성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계급을 뜻하는 것이었다. 최상류층. 도현이 웃으며 말했다.

“저도 어쩌다 보니…. 솔직히 송선호랑은 오래 알았지만 딱히 사귀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었거든요.”

“그래요? 선호 씨 정말 잘생겼는데.”

박예나는 정말 순수하게 궁금한 모양이었다. 도현이 송선호를 돌아보았다.

“음,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으흠.”

송선호는 그녀의 말이 살짝 기분에 거슬려 언짢은 기색을 냈다. 그러자 도현이 피식 웃으며 다시 박예나를 보았다.

“이런 점이 좀.”

“아.”

아니, 도대체 저 짧은 말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서로 척척 알아먹는 것인가. 내가 방금 뭘 어쨌다고! 송선호가 황당하여 두 여자를 한 번 번갈아 보자 지연 이바노프도 이 상황을 찰떡같이 알아먹고 한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 이게. 애 아빠도 똑같아. 유전이야, 유전.”

“어머니….”

송선호는 지연에게도 살짝 그만하라는 눈치를 주었다. 이것 봐. 지연이 그런 눈짓을 다른 여자들에게 했다. 박예나가 말했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어서 저랑 결혼 못 하겠다고 했을 때 저는 선호 씨가 바로 결혼이라도 하는 건가 싶었거든요? 그런데 보니까 대단한 남자를 여럿 거느린 여자를 지금까지 좋아했다는 거 보고 이 남자가 눈이 높긴 높구나 싶더라구요. 저 선택한 것도 그렇고.”

“유전이야, 유전.”

“7년 동안 도대체 뭘 한 건가 싶어요, 이 남자. 제대로 대시도 못 하고 울긴 엄청 울고.”

“아, 정말요? 그때도 울더라구요, 선호 씨. 결혼 못 하겠다고….”

송선호의 등에서 땀이 뻘뻘 났다. 그는 모르쇠 하며 모두의 시선을 피하고 천장으로 고집스레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는 아들의 팔을 찰싹 때렸다.

“너 남의 집 귀한 딸들한테 왜 그래? 진상! 너희 아빠도 그런 건 안 한다.”

송선호는 그냥 자신이 없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계속 닥치고 있었어야 했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 금방 친해지는가. 그들은 한참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다가 번호도 교환하고 계모임도 만들기에 이르렀다.

“오늘 너무 좋았어. 다음에 또 봐요.”

“다음엔 술 한잔할까요?”

“좋죠.”

그렇게 말하고 박예나는 떠나고 도현과 지연, 송선호가 잠깐 같이 쇼핑을 했다.

“너는…! 굳이 그런 걸 왜 말해.”

송선호는 도현에게 불평을 말했다. 도현은 새로 수영복을 사기 위해 물건을 보다가 응? 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뭘?”

“내가 네 앞에서… 윽. 됐어.”

“참나…. 너 말이야.”

도현이 한쪽 허리에 손을 대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 내가 첫사랑이고 첫 애인이라고 계속 엄청 비싸게 구는데. 너 보니까 결혼할 여자도 있었고 데이트하던 여자들도 계속 있었잖아? 거짓말 아니야? 내가 처음이라는 거? 난 결혼할 남자는 없었어.”

“!”

도현이 그렇게 말하자 말문이 턱 막힌 송선호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보다가 황급히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 그건…! 내가 너 잊어보려고 노력한 건데…! 진짜, 진짜야…. 나 키스도 니가 처음이고 다른 것도….”

그는 엄마의 눈치를 슬쩍 봤다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서서 작게 속삭였다. 도현이 안 믿긴다는 눈빛으로 그를 계속 쳐다보자 그는 굉장히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진짜로 진짠데 그녀가 믿지 못한다는 태도를 보이니 그랬다. 도현이 말했다.

“그런 턱도 없는 거짓말하는 남자들이 한두 명이어야지. STD 키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그놈들이랑 내가 같아? 다른 놈들 다 쓰레기인 거 알긴 아는데 난 아냐. 그래서 난 처음부터 하나도 없었잖아!”

그는 억울한 마음을 마구 토로했다. 도현은 수영복을 이것저것 보다가 힐끗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정말 몹시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귀엽다니까.”

“아….”

그녀가 틈만 나면 자꾸 그를 놀렸다. 송선호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인상을 썼다가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내가 정말 너만 아니면….”

“나만 아니면?”

“…사랑한다고.”

어쨌든 쇼핑도 무사히 끝내고 그녀에게 다른 선물과 함께 부가티를 주었을 땐 정말 좋았다. 그녀가 진짜 좋아했다. 이제는 아무리 티격태격해도 전과는 달리 관계에 친밀함이 형성되어 있었다.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공적인 관계가 아니라…. 그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그를 사랑했다.

“음? 어머니, 그럼 예나 씨랑 그때 같이 만날까요?”

어느 날 자신의 어머니와 그런 통화를 하는 도현을 보고는 묘한 기분이 들긴 했다. 어째 그날은 그가 엄마와 박예나, 그리고 도현 킬스버그 사이의 오작교가 되어준 느낌이었다. 그 뒤로도 셋은 간간이 만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흑역사를 가장 많이 아는 사람들이 순서대로 다 있으니 약간 불안하기도 했지만, 전처럼 그가 저 사이에 끼어 있는 것보단 나았으므로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

미르 킹쉴드의 생일 파티가 열렸다. 장소는 112층 꼭대기에 위치한 유명한 파티장이었다. 작년에는 일이 많아 생일 파티를 할 생각도 못 했는데 올해는 돈도 다시 생기고 문제도 없어서 평소처럼 성대하게 열었다.

“미르~ 생일 축하해~”

“미르~ 사랑해~”

“생일 축하해, 미르~”

파티를 개장하자마자 여자들이 물밀 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에 비하자면 남자들의 수는 극히 적었다. 오히려 온 남자들은 여자들을 노리고 온 게 아닌가 싶었다. 그와 친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남자들은 거의 오지도 않았다.

그의 연인인 도현 킬스버그는 물론이고 식구인 로웰 리와 신재인, 윤지호, 그의 옛 걸즈도 다 모였다. 가장 최근의 걸즈뿐만 아니라 예전에 그의 걸즈를 했었던 여자들도 거의 다 오니 20명에 이르렀다. 그 외에도 웨스트이글 선수들의 걸즈 중에서 미르와 안면이 있는 GAS는 거의 다 왔다. 거기에 최근까지 같이 여행을 다닌 지니호의 크루들도 왔고 도현의 메트로서울 오픈 테니스 멤버들도 왔다. 그 외에도 크고 작게 그와 인연이 있었던 여자들은 거의 다 왔다. 커다란 파티장이 각양각색의 여자들로 바글바글했다.

이 시점에선 도현도 약간 질려서 중얼거렸다.

“그렇게 성병이 많던 이유가 있었어….”

“그건 별로 놀랍지도 않습니다, 작가님. 그냥 지나가던 남자 하나 찔러봐도 그 정도는 나올걸요. 그것보다도 저 남자가 생일 파티를 한다니까 다들 왔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작가님 같으면 별것도 아닌 구남친이 생일 파티 연다고 가겠어요? 돈 주고 만난 관계면 더더욱 안 오죠. 미르 킹쉴드니까 온 겁니다.”

사실 돈 내고 만나는 것뿐인 관계였다면 이런 곳은 절대 오지 않는다. 이미 미르 킹쉴드는 GAS를 만나지 않는 것으로 꽤나 소문이 퍼졌고 철벽도 확실하게 치고 있었다. 그는 이제 그들에게 돈줄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많은 여자들이 그의 생일을 축하하러 와준 것이다. 그게 다 뭐겠는가.

“하긴.”

헤어지고도 여자에게 원한을 사지 않는 남자란 인정해줘야 한다. 여자들에게 그만큼 잘해주고 만족을 줬다는 얘기다. 그는 한꺼번에 다섯 손가락이 넘는 여자들을 만나곤 했다. 그런데도 다들 여전히 그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세상에 남자가 75억 명이 넘게 있고 여자들은 남자와 다르게 남자 아쉬울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저 남자가 얼마나 세상 여자들에게 어필하는 남자인지 확연히 보이는 것이다.

“그래도 오늘 미르 뺨에 입은 안 맞춰야겠어요.”

파티장에 입장하는 모든 여자들이 미르 킹쉴드와 포옹하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결국엔 안면이 있는 여자들끼리, 혹은 없는 여자들도 서로 통성명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르랑은 여전히 좋나 봐?”

밝고 화려한 금발에 녹색 눈동자, 쭉쭉빵빵한 몸매를 가진 뛰어난 미녀, 제시카가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도현에게 그렇게 물었다. 도현이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응.”

“세 명이나 더 있는 주제에. 미르는 그냥 우리 주면 좋았잖아.”

타냐가 투덜거렸다.

“남자 많으면서 왜 그래?”

“하나라도 아쉬운 게 우리다.”

타냐는 술을 마셨다. 도현은 다소 신기하다는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미르 킹쉴드나 전의 에반 블랙도 그랬지만 역시 사회적 격차가 많이 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랄까, 배우지 못한 것이 확연히 드러나는 언어가 신기하다. 어떤 여자가 몸 파는 것을 꿈으로 꾸겠는가? 아무리 배우지 못했다 해도 이런 삶은 그녀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어쩌다가 이런 곳에 이르게 되었을까?

파티에는 용병들에게 몸을 팔던 창녀도 몇 명 와있었다. 미르가 정말 어렸을 때 연이 닿았던 사람들인 것 같았다. 처음에는 만나보지 못한 종류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던 것을 즐기던 도현도 점차 크루나 식구들과 같이 있게 되었다. 예전 로얄팰리스에서 개최된 웨스트이글 준우승 파티에 갔을 때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는 야만이 혼재한 느낌이다. TFC 경기장에서도 느낄 수 있는 분위기다.

“항상 남자들은 얼마나 가지고 못 가지고를 떠나서 다 같이 친하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연대감이랄까. 우리는 그럴 수 없는 걸까요?”

도현이 로웰에게 물었다.

“다 같이 친하지는 않죠. 송 사장이나 블랙 씨나 스톤하츠 씨를 봐요. 딱 자기 클래스 지키려고 하잖아요. 오히려 낮은 클래스에 자주 손 내미는 건 여자예요. 봉사활동이니 뭐니. 그리고 그것 때문에 살해당하는 것도 꼭 여자들뿐이고.”

“음, 그건 그렇죠. 그럼 무슨 차이일까….”

도현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솔직함의 차이인가. 남자는 남자인 자신한테 관대하고 남자인 자신이 가진 욕망에도 솔직한데 여자는 여자인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하고 욕망에도 솔직하지 못한 것 같아요.”

“무슨 말이에요?”

“차라리 걸즈가 그런 부분에선 나은 것 같아요. 자기 잇속을 항상 생각하는 거잖아요. 다른 여자들이라고 안 그런 건 아닌데 걸즈처럼 그 사실을 인정하진 못하더라구요. 자기가 항상 도덕적인 성인군자처럼 행동하려고 한달까. 그걸로 자신한테 없는 클래스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음.”

로웰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였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말했다.

“욕구불만.”

둘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하이파이브를 했다.

“맞아요. 저도 작가님 만나기 전에는 제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 인간인지, 아니, 제가 뭘 좋아하고 싫어할 수 있는 인간인지도 몰랐던 것 같아요. 이런 거, 저런 거, 이런 세상, 저런 세상 다 있는 건데. 심지어 TV나 매체에서도 끊임없이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건데도 이상하게 저건 내 일이 아니다. 나는 저렇게 될 수 없다.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자기 욕망을 잘 몰라요. 그리고 이상하게 오히려 자기 욕망과는 완전히 반대로 움직이는 사람도 많다니까요? 제 친구 중의 하나는 아무리 봐도 얘는 정말 잘생긴 남자가 취향인데 자꾸 못생긴 남자만 만나요. 그것도 꼭 제일 못생긴 남자를 선택했다니까요? 돈이나 외모나 그런 걸 가리는 게 되게 세속적이고 천박하다고 생각하더라구요. 그런 말을 자꾸 해요. 남자는 스펙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누가 안 물어봐도 혼자서 계속 얘기한다니까?”

남자는 스펙이 마음인데. 도현이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윤지호가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끼어들었다.

“아, 그거 뭔지 알 거 같아요. 모르세요? 돈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진짜 물질주의적인 거? 사실 진짜 원하는 건 돈인데 자신은 그런 부를 이루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자기가 원하는 걸 후려쳐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구는 거예요.”

“저번에 세이셸에서도 한민유 씨가 말씀하셨잖아요. 다들 자기처럼 한심한 사람이 되어주길 바란다고.”

신재인도 그렇게 말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또 그렇게 다 연결되는 건가. 그 친구는 항상 불안하고 불행해 보이더라구요. 자기 확신도 없고. 괜찮은 척, 잘 사는 척하려고 너무 노력하는 느낌이고. 어렸을 때는 잘 몰랐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런 사람은 단번에 티가 나는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과 아닌 사람.”

로웰도 고개를 끄덕였다.

“작가님이 느낀 여자랑 남자의 차이는 정말 솔직함의 차이인가 봐요. 대다수의 중산층 이하 남자들은 자신이 가지고 싶은 걸 가질 수 없는 게 세상 탓이라고 하는데 대다수 중산층 이하의 여자들은 자신이 가지고 싶은 걸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욕망하는 자기 자신을 후려치거나 자신의 욕망 자체를 부정한다.”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면 그게 바로 불행이에요.”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 자기 자신밖에 없다. 자신이 뭘 원하는 사람인지, 자신이 뭘 해야 행복한 기분을 느끼는 사람인지 스스로도 모르는데 그게 남자를 만난다고 해결이 되거나 친구들을 만나서 수다를 떤다고 해서 될 리가 만무하다. 스스로를 잘 모르니 오히려 자신의 욕구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고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이나 욕하면서 자기 위안하는 일그러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전 선생님이랑 작가님 덕분에 취미 생활 개발해서 진짜 좋아요. 제가 테니스에 재능이 있을지 누가 알았겠어요.”

신재인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윤지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잘생긴 게 짱이에요.”

항상 보던 사람이 아닌 사람들을 보는 것은 이런 환기가 되어서 좋다. 미르 킹쉴드의 생일파티 다음날 도현은 외출을 나왔다. 전망이 좋은 조용한 커피숍을 찾았다. 도현은 저번 여행에서 로웰과 비겼다. 그래서 서로 5개씩 새 작품 시놉시스를 가지고 오기로 했기 때문에 곰곰이 이때의 경험을 새 작품에 적용시켜 보려고 했다.

‘전에 에반이랑 같이 갔던 파티…. 어렸을 땐 잘 살았지만 나도 솔직히 중산층 출신이나 다름없고. 선생님도 그렇고….’

에반과 같이 갔던 파티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다들 에너지가 넘치고 아이디어가 넘치고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의 설렘이 가득 있었다. 허영심 있는 남자들도 약간…. 젊은 사업가들의 파티였기 때문이다.

‘진짜 최상류층은 송선호 집….’

그녀는 송선호의 본가와 거기서 흐르던 분위기,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려보았다. 기사에서 보았던 그의 할머니의 이미지나…. 그런 것을 곰곰이 생각하며 작품이 될 만한 걸 떠올리고 있었다. 혼자서 작품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 밖으로 나왔다.

“도현 씨는 일하고 계실 때 가장 멋있는 것 같습니다.”

“다니엘?”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그는 지금 베이징에 있어야 하는 남자였다. 다니엘은 테이블을 손으로 짚으며 도현의 뺨에 천천히 입술을 눌렀다.

“보고 싶었습니다.”

“진짜 머리 잘리는 거 아니에요?”

저번 주 주말에도 기필코 집으로 돌아왔던 그에게 걸려온 전화에서 그 왕리밍이라는 남자 교수가 다니엘에게 자기 눈에 띄면 바로 그 머리채부터 삭발시켜 버리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걸 다 들었다.

“서울에 잠깐 들어올 일이 있었습니다. 집에 도현 씨가 안 계셔서 여기로 왔습니다.”

도현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포옹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뒤에 선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에요, 셀레나.”

“네, 오랜만입니다.”

그녀도 도현에게 인사를 했다. 도현은 그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둘 다 서 있지 말고 앉아요. 여기 커피 맛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웨이터를 불렀다.

“많이 바쁘시죠? 세미나나 프로젝트도 많다고 들었고….”

도현이 그렇게 운을 뗐다. 셀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기 전엔 몰랐는데 선수들보다 훨씬 관리하기가 힘들어요. 선수들은 자는 것보다 먹는 게 먼저였는데 박사님들은 먹는 것보다 자는 게 우선이라 금방 몸을 망치신다니까요.”

셀레나는 기본적으로 베이징 대학에 있는 세계물리학회 소속 인원들의 건강관리를 위해 채용된 스포츠 전문 인사였다.

“저런.”

그렇게 잠깐 셋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또 누군가 알은척을 해왔다.

“어머, 도현 씨. 다니엘.”

“어?”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셀레나랑 다니엘도였다. 한민유였다. 그는 커피 트레이를 잔뜩 든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가라고 지시했다. 도현과 한민유는 악수를 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출장 갔다 오는 길인데 학회장님께서 여기 커피 좀 사 오라고 하셔서 잠깐. 이렇게 보니까 반갑네요.”

“잠깐 시간 있으시면 앉으세요.”

한민유는 도현의 옆에 앉았다. 도현은 스크린을 가방에다 집어넣었다. 한민유는 활짝 웃는 얼굴로 다시금 도현과 악수했다.

“정말 큰 결정 하셨어요, 도현 씨. 저희 <인터유니버스>에 그렇게 큰 거금을 투자해주실 줄이야.”

“저도 고민 많이 했죠.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예, 앞으로 잘해봅시다.”

미르 킹쉴드의 생일 파티에서 봤던 사람들, 에반 블랙과 함께 만났던 젊은 사업가들, 송선호의 가족들. 그들은 정확하게 자신들이 가진 부의 크기와 교육 수준, 사회적 지위에 따라 크게 신분이 나누어졌다.

‘그리고 이 사람은 개인이나 가족의 부가 의미가 없을 정도로 사회적 지위가….’

부의 크기가 사회적 지위를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가 부를 선도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한민유는 도현도 처음 보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다니엘이 아니었으면 만나지도 못했을 사람이다. 그리고 사실상 이번의 투자로, 그러니까 이 사람들에게 부를 기여함으로써 커넥션이 생긴 것이 그녀가 건질 수 있는 다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내가 모르는 세계도 있는 거였어.’

그녀는 여전히 어리고 모르는 게 많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에반과 어울리며 잠깐 자신이 이제 세상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착각했던 것이 우습다. 사실 그녀는 그 당시 에반 블랙이라는 남자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럼 셋이서 더 시간 보내시죠. 저는 이제 슬슬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자주 보게 되겠네요, 도현 씨.”

“네, 다음에 봬요. 살펴 가세요.”

“그럼.”

한민유는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그녀를 배웅했다. 도현은 그녀가 가게에서 나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한민유 씨는 정말… 멋있어요.”

도현이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셀레나도 움찔하더니 말했다.

“그렇죠? 지금은 아직 젊어서 미디어 같은 데서도 크게 눈에 안 띄지만 10년만 지나도 정말 어디서 크게 한자리하고 계실 거 같아요. 20년쯤 뒤에 대통령 된다고 해도 안 신기할 거 같아요.”

셀레나는 여전히 전에 채용계약서에 사인을 할 때 느꼈던 기분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도현은 양손으로 턱을 괴며 한민유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멋있다….”

“그죠….”

셀레나도 도현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롤 모델은 중요한 것이다.

“도현 씨나 셀레나의 눈에는 한민유 비서관님이 그렇게 보이십니까?”

다니엘이 물었다. 도현과 셀레나는 그의 그런 물음이 어쩐지 신기해서 그를 돌아보았다. 알다시피 원래 이 남자가 하는 질문은 대부분 질문이 아니다.

“다니엘 같은 남자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나요?”

“뭔가, 조금 다르다고는 느꼈습니다.”

“어떤 점이요?”

“우리도 아니고, 금붕어도 아닙니다. 도현 씨와 약간 비슷한 느낌이지만 또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다니엘은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그의 말이 약간은 알쏭달쏭해 좀 더 소화시키고 있었고 셀레나는 그의 말에 어쩐지 상처를 받는 느낌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구분한다. 우와 열, 좋아하는 사람과 무관심한 사람. 그런 게 다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일까? 셀레나는 잠깐 도현의 눈치를 보았다.

‘그가 자신을 좋아하니까 그런 건 상관없는 걸까? 그의 마음이 멀어지면 곧바로 이렇게 무정해질 텐데…. 그런 게 두렵지 않은 걸까?’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셀레나가 봤을 때 한민유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냉철한 사리판단, 견고한 자기 확신, 사람을 꿰뚫어 보는 눈, 다른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결국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황을 이끌어가는 능력. 그녀는 타인에게 흔들리지 않았다. 중심이 무겁고 견고했다. 22세기,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방황과 흔들림을 정당화하고 오히려 그것을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전시하려 안간힘을 쓴다. 한민유는 그런 것에 코웃음도 치지 않을 것이다. 셀레나가 이전에 느꼈듯, 그녀는 도현과 비슷해 보이기보단 다니엘과 더 비슷해 보였다. 한민유는 그와 다르게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굴 줄도 알고 잘 웃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다니엘보다 더 무서운 점이 아닐까.

“다니엘이 사람을 나누는 기준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단 말이에요. 설명을 좀 더 해봐요.”

도현이 물었다. 다니엘이 대답했다.

“저와 비슷하게, 혹은 저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저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이해하는 사람들과 자기 자신에 갇혀서 비루하게 사는 인간들로 크게 나누었습니다.”

“나나 한민유 씨는 그 흑백에 속하지 않는 거구요?”

“그렇습니다.”

“그럼 나는 다니엘에게 회색분자 같은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니엘이 말했다.

“저는 도현 씨가 다양한 면을 가지고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도현 씨를 바라보면 제가 여전히 이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가장 사랑하는 도현 씨에 대해서도 이렇게 모르는 게 많으니까요.”

“하하. 나에 대해 이렇게까지 잘 아는 남자는 에반 외에는 다니엘이 유일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사람들의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 성향 거의 모든 것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난 유전 형질로 결정되는 것은 이미 학계에 보고된 지 오래된 사실이다. 살아가며 변해가는 것도 변해갈 수 있는 유전자를 타고 태어난 인간들만 가능하다. 적어도 변해가겠다고 선택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인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의 지위도, 명예도, 부도 언제든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DNA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을 정확하게 정의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자기 자신의 한계에 대해 알고 나서야 비로소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이다. 어디에 선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선을 넘어갈 수 있겠는가. 다니엘 스톤하츠는 많은 부분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진 능력치를 까마득히 상회하는 남자였다. 기준치를 하회하는 사람이나 상회하는 사람이나 자신의 열등함, 혹은 자신의 우월함이라는 한계에 갇히게 된다.

다니엘이 5년 전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된 것은 그런 자신의 우월함에 사로잡혀 더 우월한 것에 대한 고찰, 더 넓은 시야의 필요성을 실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자신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여 더 배워야 할 것, 알아야 할 것, 해결의 방법에 대한 탐색을 멈춘 것이 진짜 실패, 그 자체였다.

물론 다니엘 스톤하츠를 보면 명확하지만, 열등함보다는 월등함이 훨씬 낫다. 이렇게 그가 자기 자신의 함정에서 빠져나온 것은 그가 결국 우수한 종자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도현 씨는 흑이냐 백이냐 하는 색깔보다 그저… 제게 사람으로 보입니다. 여자로 보입니다. 이런 말은 싫으신가요?”

다니엘이 그녀의 손을 잡고 입을 맞췄다. 도현은 또 웃으면서 대답했다.

“싫지 않아요.”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셀레나는 다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내가 유일하고 최고의 존재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다른 모든 것보다 내가 가장 소중하다는 말을 들어야 만족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도현과 다니엘이 도대체 무슨 말을 나누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적어도 셀레나가 보기엔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말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다니엘과 셀레나도 더 시간을 내기 힘들어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머리카락 잘리지 말아요. 좋아한단 말이에요.”

“알겠습니다. 기필코 사수하도록 하겠습니다.”

둘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가 다시 눈을 마주치고 깊게 입을 맞췄다. 그림 같은 커플이었다. 그리고 다니엘은 밖으로 나갔다. 그를 따라가려다 말고 셀레나가 도현을 돌아보았다.

“도현 씨는… 그걸로 만족하시나요?”

“네?”

“다니엘의 태도요. 결국 도현 씨를 이용한다는 거잖아요. 자신의 목적에….”

도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셀레나는 자신의 말에 어쩐지 공격성이 있었던 것 같아 후회했다.

“남자에 대해 환상이 너무 많으신 것 같아요, 셀레나는. 원래 대부분의 남자는 자신의 목적에 여자를 이용하려고 해요.”

섹스나… 대부분 섹스지. 돈이 덜 드는 섹스 혹은 자신이 원하는 섹스. 도현의 말에 셀레나가 그녀를 바로 마주하고 섰다.

“그래서… 그걸로 괜찮으신 건가요?”

“다니엘이 날 어떻게 보는지는 내게 큰 영향이 없어요. 내가 다니엘을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한 거죠. 다니엘은 내가 사람이고 여자로 보인다고 했죠? 저는 다니엘이 커다랗고 번쩍번쩍하고 예쁜 다이아몬드처럼 보여요. 이것처럼요.”

도현은 왼손을 들어 다니엘이 준 바이올렛 스타를 셀레나에게 보여주었다.

“남자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판단할지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자신이 정말 뭘 원하는지 한번 잘 생각해봐요.”

그녀는 전에 다니엘이 자신에게 했던 말과 거의 비슷한 말을 했다. 다니엘은 도현과 한민유에게서 공통점을 느낀다고 말했다. 셀레나는 다니엘과 한민유가 오히려 더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현도 결국 다니엘과 닮은 것일까? 도대체 이게 무엇일까. 다니엘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남의 눈치를 본다는 건 핑계였을지도 몰라. 사실은 그냥 내가 원하는 거였어….’

셀레나는 문득 깨달았다. 우와 열, 좋아하는 사람과 무관심한 사람을 더 철저하게 나누는 것은 바로 자신이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을 열 혹은 관심 없는 사람으로 나눌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민유나 다니엘이라면 누군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에만 열중할 것이다. 아마 이 사람도… 설사 신경을 쓰더라도 결국엔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원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믿고’ 그래서 언제나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 상황에 휩쓸리고 쉽사리 자기 자신을 잃고 남의 칭찬이나 인정을 갈구하며 그것이 마치 정답인 것처럼 착각한 것은 자신이었다. 바보는 자신이었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잘 모르면서 지금 남을 가르치려고 들었다.

금붕어인 것이다.

셀레나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가 인사를 하고 나갔다. 도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

작품을 다섯 개 구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다니엘이 말한 <인터유니버스>라는 곳에 4백억이나 투자하게 되었고(나머지 백억 좀 넘게는 로웰이 함께했다) 이번 작품도 대중의 입맛을 고려하여 팔리는 작품을 쓰기로 했다. 다음번에는 좀 더 문제작을 적기로 로웰과 얘기했다. 그녀와 차기작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갈무리하고 잠깐 바깥바람을 쐬기 위해 정원으로 나왔다. 벌써 한밤중이다. 시간은 이러나저러나 잘 간다. 달은 없고 별만이 간혹 보인다. 한 번쯤 집의 불을 전부 끄고 별을 바라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때 딱 시간을 맞춰 정원에 차가 들어왔다. 에반의 차였다. 그가 차에서 내렸다. 차는 저절로 차고로 향했다. 짙은 아이보리색 슈트 위에 갈색 롱코트를 입고 기다란 캐시미어 목도리에 장갑까지 하고 내렸다. 그의 구두 소리가 섹시했다. 머리를 깔끔하게 넘기고 선 그 남자는 오늘도 아주 늘씬하고 예뻤다.

“슈트가 잘 어울린단 말이야.”

도현이 말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일까. 예전의 그는 격식을 차리는 곳에 가는 것이 아니고서야 저런 차림을 절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꼭 송선호 같지 않은가. 그녀가 앞에 나와 있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던 에반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피식 웃었다.

“예뻐?”

“응.”

“추운데 왜 나와 있어?”

“잠깐.”

에반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등 뒤로 거실의 주황색 불빛이 새어 나왔다. 에반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달빛이 밝았다. 차가운 공기도 그들의 사이에는 파고들지 못했다. 정원의 차분함이 둘을 더욱 가까이 붙게 만들었다. 둘에게는 둘밖에 없었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 번 헤어지고 다시 만났기 때문에 더욱 깨달았다. 이런 상대는 서로밖에 없을 것이다. 도현에게는 에반이, 에반에게는 도현이. 너무나 특별하다. 둘은 저택의 불빛에 의지하여 어둠 속에서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맞췄다. 그녀의 입술이 약간 서늘했다. 에반은 장갑을 벗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의 손가락에 있는 파란색 다이아몬드 반지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입술을 떼고 둘은 다시 손을 잡았다. 도현이 그의 반지를 보고 웃었다.

“정말 잘 끼고 다니네. 빼는 거 본 적 없어.”

“빼면 결혼반지가 아니지.”

“후후.”

에반은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자신의 입가에도 스르륵 미소가 지어지는 걸 느꼈다. 그럴 수 있는 게 어쩐지 뭉클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검은색의 작은 케이스였다. 그걸 보고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응.”

그는 자신도 도현에게 반지를 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케이스를 열려다 말고 도현의 얼굴을 보았다.

“무릎 꿇을까?”

“뭐, 말리지는 않을게.”

에반은 그녀의 말에 웃고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케이스를 열었다. 모서리가 둥근 정사각형 모양으로 세공된 쿠션 컷 에메랄드, 아니, 초록색 다이아몬드였다. 그의 눈동자 색과 같았다. 황금 반지에 새하얀 다이아몬드가 초록색 다이아몬드의 둘레와 링을 따라 쭉 박혀 있었다. 전혀 크지 않았다. 그가 준 샤샤 다이아몬드에 비하면 소박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는 아무런 반지도 끼고 있지 않은 그녀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현은 자신의 손가락을 보았다. 반지는 정말 예뻤다. 밝은 곳에서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에메랄드는 원래 불순물이나 흠이 많은 경우가 많은데 이건 다이아몬드라서 그런지 에메랄드보다 색이 밝고 정말 깨끗하고 투명했다. 보기보다 훨씬 비쌀 거라는 말이다.

“네가 전에 이건 편해서 항상 하고 다닌다고 말했잖아.”

반지는 하고 있지 않지만 팔찌는 그대로 끼고 있는 도현의 손목을 보며 에반이 말했다.

“다른 반지랑 같이 껴도 불편하지 않고 잘 때나 샤워할 때도 잊어버리고 항상 끼고 있을 정도로 편한 걸로 주고 싶었어. 화려하고 큰 건 샤샤 목걸이로도 충분하잖아.”

“…….”

도현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불빛에 보석을 비춰보고 있었다. 도현은 다이아몬드를 아주 좋아했다. 송선호가 준 투명하고 커다란 다이아몬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려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마음에 쏙 들었다. 다니엘이 준 바이올렛 스타는 보라색 다이아몬드가 손가락 한 마디 크기에 달하는 굉장히 크고 멋진 다이아몬드라 다른 장식이 전혀 없어도, 불빛이 별로 없어도 미친 듯이 반짝이곤 했다. 샤샤 다이아몬드도 송선호가 준 프로포즈 링에 비할 정도로 크고 역사도 있는 다이아몬드 목걸이였지만, 이 반지는 초록색 다이아몬드라는 것이 특이해도 보통 사람들이 많이 끼고 다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적당하고 정말 예뻤다. 누가 봐도 딱 이 반지가 눈에 들어올 정도로 섬세하고 예쁜 반지였다.

“마음에 들어….”

도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에반이 활짝 웃었다.

“예쁘지?”

“응…. 디자인 직접 한 거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진짜 예뻐.”

이걸 여기 끼면 바이올렛 스타는 검지에 끼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손가락을 보고 있으니 에반이 웃으며 말했다.

“다른 거랑 같이 껴도 괜찮을걸? 송선호가 준 반지는 밑에 살짝 공간이 있잖아. 같이 끼면 그냥 얘가 웨딩 밴드처럼 어울릴 거야.”

“그래도 괜찮아?”

“응. 네가 자주 끼워 주면 어떻게든.”

참 아이러니하다. 스스로를 내세울수록 더 평가받을 수도 있고 스스로를 낮출수록 더 평가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똑같은 결과를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남자가 특별하다. 에반 블랙이 특별하다.

둘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둘이 함께 지은 집이다. 둘 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다섯 살을 더 먹었다. 둘은 함께 어른스러워졌다. 둘은 지금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토요일이 되어서는 다들 집에 모였다. 도현도 로웰도 집에 있었고 신재인과 윤지호도 있었고 미르 킹쉴드, 에반 블랙, 송선호, 다니엘 스톤하츠도 전부 집에 있었다. 토요일 저녁 식사는 같이하는 것이 행사처럼 되고 있었다. 2년 전만 해도 혼자서 빚덩이가 된 이 집을 껴안고 끙끙거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어쩐지 감개가 무량했다.

“그럼 식사할까요?”

다들 자리에 앉았다. 대화는 주로 서로의 일주일간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했다.

“다니엘, 베이징은 서울보다 더 춥죠? 어때요?”

“좀 더 춥습니다. 그래도 연구실을 나올 일은 거의 없어서 크게 다른 건 못 느끼고 있습니다.”

“치엔 박사님께도 안부 전해줘요. 전에 박사님이 맛있다고 하신 것 좀 해서 가져가요. 다들 큰일 하시는데 너무 못 먹고 지내시는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내일 베이징으로 가기 전에 만들어야겠군요.”

“저도 좀 도와드릴게요.”

안부를 묻는 건 보통 다니엘부터 시작했다. 다니엘 스톤하츠가 집을 비우는 시간이 제일 많았기 때문이다. 미르 킹쉴드는 제일 집에 오래 붙어있고 도현뿐만 아니라 다른 식구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딱히 안부를 물을 게 없었다. 그는 식사 시간엔 식사에서 주의를 돌리기 어려운 남자였다.

의외의 모습을 보이는 건 오히려 송선호와 에반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무주공산이 되어버렸단 말이야. 미국이 들어가서 군정을 펼치는 동안, 적어도 30년은 몬스터 때문에 무기 수요가 엄청날 거라고. 군수 유통도 할 거 아니야?”

“몇 년 전에 아버지가 방위 업체를 열 개나 사시더니…. 이런 걸 생각하신 건가.”

“동해 게이트 때문에 컸던 군수 업체들?”

“어. 이제 완전히 내리막 아닌가 했거든. 재고랑 빚이 많아서 만 원에 산 것도 있어. 남중국해는 중국 업체들이 다 먹었으니까 사우디도 미국이 다 먹는 거 아냐?”

“미군이 쓰는 건 그렇겠지. 게릴라나 민병에게 팔아야지. 글로비스가 가진 재고 전부 털고도 훨씬 많이 생산할 수 있을걸?”

“게릴라랑 민병에게만 팔아도? 그래? 괜찮은데? 남중국해는 게릴라 같은 거 없나?”

“거긴 바다 한가운데 생긴 게이트라 주변에 베이트 섬들이 많아서 본토까지 거의 못 와. 와도 군대가 전부 소화할 수 있을 정도고. 지중해 게이트랑은 달라. 지중해 게이트는 예전 동해 게이트랑 거의 비슷한 상황이라고 보면 돼.”

“그래? 근데 그런 것도 줄이 있어야 할 거 아냐?”

“그쪽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만들고 옮겨오는 것까지만 신경 쓰면 된다. 가격만 맞춰.”

“그래, 마피아 보스시라고?”

“아니거든?”

누가 보면 참 사이가 좋은 줄 알겠다. 도현은 짝하고 박수를 쳤다.

“일 얘기는 적당히 하고 식사하죠.”

“아, 미안.”

어쨌든 나름대로 집안의 가풍이 잡혀가고 있달까. 식사를 다 마치고 가볍게 팀을 짜서 내기 당구를 하며 놀았다. 로웰과 다니엘이 제일 잘 쳤다. 그리고 잘 때쯤엔 오늘의 간택전이 이루어졌다.

“남자가 넷이니 고르는 것도 일이구나.”

로웰이 구경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 정도 수고로움은 기꺼이 지불해야 왕이 되는 거죠.”

“그건 그래.”

윤지호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셋은 내기를 했다. 오늘도 미르 킹쉴드, 일주일에 하루 집에 들어오는 다니엘 스톤하츠, 요새 사이가 더 좋아진 에반 블랙이 각각 물망에 올랐다. 거실에서 각기 초조한 기색으로 혹은 여유로운 기색으로 기다리고 있던 네 명의 남자는 도현이 샤워를 끝마치고 자신의 침실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 다들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니엘.”

그녀는 다니엘의 이름을 불렀다. 일주일에 한 번 오는 남자의 희소성이란. 하필이면 네 명이 모두 모였을 때 선택되는 확률이 높아지니 특히나 송선호 같은 남자에게는 타격이 크다. 어시 둘은 로웰에게 내기 돈을 지불했다.

그리고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아침 차리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푼 송선호의 훌륭한 아침상을 받고 그 뒤엔 다니엘 스톤하츠가 발 마사지를 해주는 것을 받고 에반 블랙이 뒤뜰의 골프 연습장에서 연습을 하는 걸 구경하고 송선호가 다소 컨디션 안 좋은 얼굴로 신문을 보며 커피를 마시는 것도 감상했다. 미르 킹쉴드는 밥을 엄청 먹더니 카우치에서 다시 잔다. 다들 하나같이 보기 좋은 작품들이라 보는 맛이 좋았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났다.

“누구?”

도현이 의아한 얼굴로 허리를 일으켰다. 송선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나가 볼게.”

송선호가 직접 현관문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라이언, 앉아!”

손님은 뒤통수를 이쪽에 보이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어디선가 많이 본 남색 머리카락. 짧은 머리 스타일이 딱 요즘 남자애들이 하고 다니는 스타일이다. 그는 데리고 온 강아지가 난리를 피우자 앉으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강아지가 앉자 그제야 다시 앞으로 돌아보았다.

180cm 정도 되는 키에 호리호리한 소년이었다. 키는 커도 이래저래 앳된 티가 나는 게… 송선호는 깜짝 놀라서 말없이 그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짙은 속눈썹. 밝은 갈색 눈동자.

“어…….”

“뭐야, 넌? 비켜.”

새파랗게 어려 보이는 소년이 아주 아니꼬운 얼굴로 그의 얼굴을 보고는 그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엄청나게 커다란 스포츠백을 등에 메고 있었다. 그는 착하다 못해 멍청해 보이는 자기 개를 영 미덥지 않은 눈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는 크게 소리쳤다.

“야! 도현 킬스버그!”

그는 그렇게 집주인의 이름을 부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카우치에 앉아서 가만히 쉬면서 독서를 하고 있던 도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엄청나게 크게 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스포츠백을 바닥에다 떨어뜨렸다.

“아, 무거워.”

“도진아….”

다른 사람들도 그, 도진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건 뭐, 부정할 수도 없이 혈연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도현은 진짜 깜짝 놀라서 잠깐 움직이지도 못하고 입을 벌리고 그를 보고 있다가 별안간 눈이 새빨개졌다.

“아… 진아… 도진아… 아, 어떡해. 도진아. 흑….”

그녀는 가슴께를 움켜쥐며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겨우 걸어서 그에게 다가가서 그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우는 건 처음 본 남자들이 깜짝 놀랐다. 로웰도 놀랐다.

“아, 또 뭘 오바를 이렇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도현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도현이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고개를 떼고 그의 몸을 더듬어 만졌다.

“몸은… 몸은 괜찮아? 이제 안 아파?”

“응. 엄마가 그때 마도의사까지 불러서 한 방에 고쳐 줬어.”

“진짜? 진짜…? 흑… 다행이다…. 흐윽… 보고 싶었어. 항상 보고 싶었어. 내 동생….”

도현은 다시 그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펑펑 울자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그가 말했다.

“누가 보면 귀신 나타난 줄 알겠다. 잘 살아있어요. 건강하게.”

사람들은 그렇게 누가 봐도 닮은 남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무의식중이든 의식 중이든 알아차린 것 같다.

그야말로 도현 킬스버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녀가 저러는 건 처음 봤다. 도진은 도현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다가 자신들을 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 특히 남자들 네 명을 확 째려봤다.

“뭘 봐, 씨발.”

“…….”

처남(?)은 아마도(확실히) 싸가지를 밥 말아 먹은 것 같다. 송선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동생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한 번도 연락하는 거 본 적 없었는데. 아버지랑은 딱히 사이가 좋은지 모르겠고 어머니도 연락이 안 되는…. 아, 내 생각이 짧았다. 내가 먼저 가족에게 연락해보자고 말했어야 했는데.’

도현은 도진을 제일 큰 카우치에 앉혔다.

“밥은? 밥은 먹었어?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연락처 없어서 연락 못 했는데….”

“뭐? 연락처가 없었다고?”

도진이 부엌으로 뛰쳐들어가 그가 먹을 걸 잔뜩 내오는 도현을 돌아보았다. 그는 황당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연락 못 한 거라고? 아빠가 엄마 연락처 가지고 있을 텐데?”

“아빠가 없다고 했는데….”

도현이 여전히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도진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인상을 팍 썼다.

“아, 그 양반 참 끝까지 가지가지… 끝까지 니 연락처 안 가르쳐줄 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는 그렇게 투덜거렸다. 도현은 카우치 앞 테이블에 차랑 과자랑 과일을 잔뜩 내놓고는 하염없이 동생 얼굴을 보았다.

“엄청 컸어….”

“그럼. 엄청 쑥쑥 컸다.”

도현이 그와 헤어진 것은 도현이 18살 때, 그가 9살 때였다. 9살의 작고 아팠던 동생이 그녀보다 훨씬 더 커져서 나타난 것이다. 그는 배가 고팠는지 과일을 마구 집어 먹었다. 그리고는 또 완전 짜증이 난 얼굴로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근데 이것들은 다 뭐야?”

그동안 주변 인물들은 몸 둘 바를 모르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도현이 아차, 하면서 소개했다.

“여기… 여기는 로웰 리 선생님이라고 나 엄청 많이 도와주신 은인이셔. 로웰 선생님 없었으면 나 여기서 이렇게도 못 있었어.”

그녀는 얼른 로웰부터 소개했다.

“선생님, 여기는 제 동생이에요.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가지고… 도진 킬스버그에요.”

“아, 나 이름 바뀌었어. 도진 라인하트.”

“어… 엄마 성으로 바꿨어?”

“응.”

그는 로웰을 엄청 신기하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그는 로웰의 자존심인 삐삐 머리를 슬쩍 검지로 건드렸다.

“이거 진짜야?”

“어허. 어린 게 말이 짧다.”

“안 돼, 도진아. 선생님이라니까.”

“선생님, 안녕.”

“우리 작가님 닮아서 귀엽네요.”

도진은 한 손을 내밀어 로웰과 악수를 하였다. 그리고 도진은 엄청나게 짜증이 난다는 얼굴로 도현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나머지를 돌아보았다.

“저것들은 뭐냐고.”

“어… 내… 남자친구들?”

도현이 살짝 당황스럽다는 듯이 그렇게 소개했다. 9살의 동생과 19살의 동생의 간격은 아주 컸다. 도진의 얼굴이 확 상기하며 핏줄까지 올랐다. 그리고 도현과 그들을 번갈아 보고는 화를 냈다.

“진짜였어? 기사에 나온 거?!”

“어… 그거 봤구나. 일단 넷 다… 그… 어쩌다 보니까….”

도현이 그렇게 말하자 도진은 더 열을 받는다는 듯이 말했다.

“설마 설마 했다, 내가!! 설마!! 내가 왜 가출했는데!!”

“가출을 했다고?”

“너나 엄마나 똑같아!! 다시 나갈 거야!!!”

그는 그렇게 화를 내더니 다시 현관으로 가서 스포츠백을 챙겨서 나가려고 하자 도현이 깜짝 놀라서 그를 잡으러 갔다.

“왜 그래? 응? 무슨 일 있었어? 엄마랑 싸웠어?”

“아, 짜증 나! 왜 너나 엄마나 남자 없이 못 사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도진아, 가지 마. 응? 오랜만에 봤잖아. 어떻게 살았는지도 궁금하고 얘기도 많이 하고 싶은데….”

역시 가족은 다른 것인가. 그녀가 저런 식으로 애타는 목소리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자 도진이 뒤를 홱 돌아보았다.

“그럼 저것들 다 나가라고 해.”

“어?”

“당장.”

그러니까 가족은 달랐다. 그녀에게 누가 저렇게 자신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네 명의 남자들은 갑자기 하루아침에 보금자리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동생….’

도진의 성화에 현관문 밖으로 쫓겨나 도현의 앞에 선 에반 블랙은 잠깐 열린 문틈으로 실내를 바라보았다.

그에게도 동생이 있었다. 누나도 형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혈연을 공유한 가족이란 이제 얼굴도 제대로 기억이 안 나는 흐릿한 실루엣으로만 머릿속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실루엣은 그의 생각보다 크고 강렬한 존재로 그의 안에 자리 잡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그의 일부분이 되고 말았다.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얼굴이 생각보다 많이 닮았네.”

“하아, 10년 만이야…. 깜짝 놀랐어.”

도현은 여전히 놀란 가슴이 진정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에반은 평소처럼 미소를 띤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팠다고 했잖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응….”

그녀도 실내를 돌아보았다. 에반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묘한 기분은 뭘까. 자신과 마찬가지로 홀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있었던 그녀였다.

‘만나는 남자들이 더 있는 것보다… 로웰 리보다도 더 섭섭한 기분이 드네.’

핏줄이란…. 그는 도현의 뺨에 입을 맞췄다.

“호텔에 가 있을게.”

“갑자기 이렇게 돼서 미안. 도진이랑 얘기 잘해볼게.”

“응.”

도현은 다른 남자들도 돌아보았다.

“미르… 어디 지낼 데는 있어요?”

“나야 많지.”

미르 킹쉴드는 그녀와 포옹을 하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저게 그 동생이구나.”

그녀는 미르 킹쉴드가 부상으로 골골거릴 때 그렇게 많은 것을 해주지 않더라도 충분히 병간호에 익숙한 모습을 보였다. 환자에게 익숙했다. 어릴 때 동생이 아파서 그랬다고 했다. 반년 정도 그녀가 간호를 하다가 엄마가 와서 데리고 갔다고 했던가? 아팠다고 보기에는 굉장히 팔팔해 보인다. 키도 그녀보다 컸다.

“네. 미르도 있었다고 했죠.”

“응, 뭐. 걔는 죽었지만.”

미르에게도 동생이 있었다. 부모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가족이란 보통 사회적 통념과는 아주 먼 존재였고, 아니, 사회적 통념과는 멀지만 그가 아는 세계에서는 되게 흔한 가족이었다. TFC의 세계에서는 선수든 GAS든 부모가 개판인 게 평균이었다. 아니, 부모가 개판이니까 다들 그렇게 된 거고. 민간인의 가족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어색한 티를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음, 빨리 연락해. 이제 자는 건 집이 좋단 말이야.”

“바람피우면 안 돼요.”

“응, 당연.”

미르는 도현의 입술에 쪽쪽 입을 맞추며 그녀와 대화했다. 그간 다니엘 스톤하츠는 열린 현관문으로 실내를 뚫어져라 보며 머리를 팽팽 돌리고 있었다.

‘생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났다.’

가족. 가족. 가족? 가족. 동생. 동생? 가족이란 게 뭐더라? 앞의 두 남자와 다르게 다니엘 스톤하츠가 어린 나이에 부모와 헤어진 건 순전히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15세에 스스로 뜻을 세우고 출가했다. 속세의 연을 전부 뒤로 하고 지식과 힘의 길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가족과 연락한 적 없었다. 그럴 필요성도 못 느꼈다.

처음엔 도현에게 끌림을 느끼면서도 어찌해야 할 줄 몰라 엄청나게 버벅거렸다. 사람의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거기에 지금껏 관심이 없기 때문에 아예 순백의 백지상태였다. 그는 분명 마도물리학자치고는, 자신이 속한 인간들 중에선 그래도 다채로운 관심사를 가지고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처럼 매우 선택적으로 유식하고 선택적으로 무식했다. 그들은 대부분 어디에든 뛰어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자신이 판단했을 때 가치가 있거나, 아니면 가치를 두고 싶은 부분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인간의 감정, 특히 도현 킬스버그 개인의 감정과 연애 감정을 기준으로 열심히 파고들자 그는 도현과의 연애 감정에 대하여, 여성의 심리에 대하여 척척박사가 되었다. 도현이 남자의 명과 암에 밝은 것 이상으로 그는 여자의 명과 암에 밝아졌다.

하지만 가족은 또 다르다. 그는 지금 자신이 어떤 말을 해야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을지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그렇게 머리가 좋은 그가 자신의 부모 이름도 희미할 정도로 가족 자체에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는 인간이라 더더욱 판단 기준을 세울 수가 없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이것보다는 더 가족에게 의미를 두고 살 것이다. 아마. 아마도. 그녀도 그렇겠지? 하지만 그녀도 자신처럼 가족에게 연락을 하거나 그러는 건 본 적이 없는데? 그녀에게 가족이 중요할까? 근데 가족이 중요하다는 게 무슨 뜻일까? 사람들은 가족을 볼 때 무엇을 보는 것일까.

‘알 수 없군….’

사리분별이 뛰어나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그리고 무엇을 모르는지도 판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모를 땐 조용히 닥치고 추후를 도모한다. 저 변수가 얼마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일단 대충이라도 알아보자. 그는 도현에게 말했다.

“저는 베이징으로 돌아가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은 겨우 일주일에 하루 쉬는 건데. 미안하게 됐어요.”

“아닙니다.”

가슴 속에 이루고 싶은 이상과 목표가 있는 사람은 그 어느 때도 쉬지 않는다. 굳이 사회나 다른 사람의 통념에 맞출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에는 어느 정도 공통분모를 필요로 한다. 그게 거짓이더라도. 어차피 그가 가진 도현에 대한 애정과 그녀의 필요성은 불가분의 관계다. 그래서 다니엘은 그 정도로 말했다.

“동생은 뭐 좋아해? 오랜만에 만난 거잖아.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쇼핑도 많이 해.”

송선호는 지갑에서 자신의 블랙 카드를 하나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도현은 좋아했다.

“송선호~”

“네가 몇 번 어머니랑 동생 얘기할 때 먼저 연락해보자고 말했어야 했는데 내가 생각이 진짜 짧았다.”

송선호는 한숨을 쉬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네가 몇 번 동생 보고 싶다고 말했잖아. 그걸 그냥 넘어갔네.”

그야 근본이 아주 확실한 남자다. 양친뿐만 아니라 조모, 이모, 고모, 삼촌, 사촌들까지 전부 건재하다. 가족이 그에게 아주 든든한 토대가 되어 그라는 남자에게도, 그의 성공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그는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훌륭한 가족의 이로움을 가장 만끽하며 성장했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아마 죽을 때까지도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한 기댈 곳이 될 수 있는 가족을 가졌다.

“이렇게라도 다시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동생이랑 둘이서 회포 많이 풀고 나중에 동생 기분 나아지면 같이 식사해.”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안고 입을 맞춰 인사했다. 그렇게 남자들은 제각각 할 일을 하러 가거나 임시 거처로 향했다. 에반은 메트로서울에 올 때마다 썼던 프레지덴셜 스위트로 향했고 미르는 예전 집으로 향했고 다니엘은 베이징으로, 송선호는 본가로 향했다.

“도현 씨 동생?”

“어머, 그러게. 한 번 가족들끼리도 보면 좋은데.”

오랜만에 아들이 집으로 오니 부모님은 그를 반갑게 반겨주면서도 이유를 물었다. 어느 나라든 대를 이은 최상류층일수록 더더욱 가족 중심적이다. 자식이 장성해서 독립하더라도 서로 끈끈한 상호 관계를 이어간다. 그들은 도현의 동생이 왔다는 소식에 놀라워했다. 어쨌든 아들이 도현이 아니면 곧 죽어도 싫다고 하니 그가 이미 도현에게 장가를 간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가족은 그들의 가족도 되지 않는가.

“그건 그렇네. 한번 만나봤어야 했지.”

“그렇네. 우리가 생각이 짧았어.”

“먼저 얘기가 없길래 실례될까 봐 얘기 안 꺼냈는데 이쯤이면 얘기해도 되겠지? 당신은 도현 씨랑 많이 친해졌잖아.”

“아버지 쪽 얘기는 못 들었지만 어머니는 굉장히 훌륭한 분이신 것 같았어. 나도 만나고 싶다고 몇 번 말하긴 했는데 그냥 넘어갔네.”

송영제는 아들의 와이프 될 여자가 어떤 가정에서 자랐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지연 이바노프는 결혼이야 도현의 마음일 테니 자신이 간섭할 것이 아니라 생각했고 그것보다 그렇게 훌륭한 여자를 낳고 기른 여자를 만나보고 싶었다. 도현이 어린데도 얼마나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인가. 그녀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녀의 어머니도 굉장한 것 같았다. 어쨌든 그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들이 만나서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해가 되지 않을 계층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기꺼이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자 송선호는 잠깐 당황했다.

“아, 어머니…. 동생은 어머니랑 같이 살고 있다고 했으니까 어머니도 만나게 되는 건가?”

“당연하지.”

송영제는 4번 아이언을 꺼내면서 말했다. 그는 지연과 함께 집 옆에 딸린 커다란 연못의 앞에서 골프 연습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골프 칠 시간도 없지만 재단 이사장인 그의 마누라님은 당분간 치러 다니실 일이 많다고 하셔서 그가 직접 자세를 잡아주고 있었다.

“그냥 5번 해.”

“5번은 잘 치잖아. 그러니까 못 하는 4번을 더 연습해야지.”

“이러려고 당신이 직접 가르쳐준다고 한 거지?”

“이제 알았어?”

그는 지연을 뒤에서 끌어안고 같이 자세를 잡으며 그렇게 능청맞게 말했다. 1년 정도 이혼의 위기를 겪고 지나오니 어째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에 더 꿀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아버지, 아버지는 외할머니한테 어떻게 하셨어요? 엄마랑 결혼하기 전에?”

송선호는 그녀의 어머니를 만날 생각을 하자 갑자기 엄청 긴장되었다. 송영제는 드디어 지연에게서 떨어지고 그를 돌아보며 자신의 클럽을 꺼냈다.

“우리 장모님은 나 엄청 좋아하신다. 처음 뵐 때부터 좋아하셨지.”

그가 자신감 있게 말했다. 지연이 덧붙였다.

“그래서 엄마가 그렇게 덜컥 빨리 결혼한 거 아냐.”

지연이 공을 치며 말했다. 그러자 송영제가 자신의 공을 치다 삐끗하곤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때는 그렇게 말 안 했으면서….”

그가 투덜거리자 지연도 아차, 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나도 당신 사랑해서 결혼한 거지. 결혼이 조금 이르긴 했잖아. 만나고 3개월 만에 했는데.”

“그건 그랬지만….”

“그리고 당신이랑 결혼 안 했으면 우리 아들도 없었을 텐데. 우리 아들~”

그녀는 송선호의 엉덩이를 손으로 두드렸다. 아버지가 째릿 노려보자 송선호는 자연히 아버지에게서 시선을 돌려 엄마를 보았다.

“엄마, 저 어쩔까요? 어떻게 해야 도현이 어머니가 저 좋아하실까요? 할머니는 아버지 어떤 면이 그렇게 좋으셨대요? 아, 근데 도현이 말만 들어보면 진짜 어머니가… 진짜 만만치 않을 느낌인데. 완전 도현이보다 더 할 거 같은 느낌인데?”

그는 살짝 멘붕이 와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지연은 자기 남편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

“너희 아빠야 우리 엄마한테도 아예 앞으로의 청사진을 쭉 읊었지. 나 손에 물 한 방울도 안 묻히게 해준다고. 완전 호강시켜 준다고.”

“도현이도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을 정도 돈은 있는데.”

“어머, 엄마 친정도 잘 살았다, 너?”

“바짝 엎드려서 모셔야지. 나도 예전에 장모님 업고 다녔다. 지금도 그러고. 지금도 내가 네 엄마보다 장모님께 전화를 더 많이 한다니까.”

아버지는 다시금 멋진 폼으로 골프공을 치며 말했다. 그러자 지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돌아보았다.

“당신이 우리 엄마한테 전화를 그렇게 많이 해?”

“결혼하기 전에는 밤낮으로 당신 만나고 데려다주는 시간 꼬박꼬박 보고했고 결혼하고 나서도 일주일에 최소 세 번은 연락드렸고 선호 가졌을 때는 매일매일 전화 드리고 선호 낳고 나서는 애 사진도 매일매일 보내드렸고.”

“…….”

이건 지연도 처음 듣는 얘긴지 입을 딱 벌렸다. 송선호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 진짜 대단하시네요.”

“아빠 대단한 거 이제 알았냐, 아들. 내 인생에 네 엄마보다 더 많이 연락하는 여자가 딱 두 명 있는데 그게 바로 회장님이랑 장모님이시다. 주위 잘 봐봐라. 여자보다 남자가 웃어른한테 잘해야 가정이 평화로운 거다.”

역시 아버지. 작년 위기도 아버지가 얼마나 슬기롭게 헤쳐나왔는지 봐라. 아버지가 단지 재벌 2세로 태어나서 이렇게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아내, 훌륭하게 키운 아들, 입지전적인 성공기, 모두 아버지가 피땀으로 이룩한 것이다. 역시 아버지가 존경스럽다.

“어머님께 점수를 왕창 따야…. 근데 이미 벌써 같이 사는데 만나는 시간을 고해 바칠 수도 없고 외할머니랑도 완전 다른 타입인 거 같은데…. 역시 도현이 어머님이라면 선물…. 처음부터 물질 공세로 나오면 너무 속 보이지 않을까요, 아버지?”

“당연하지. 처음에는 일단 납작 엎드리는 자세와 태도가 중요한 거다. 장모님 말씀이라면 죽는시늉도 하겠다, 이런 자세가 중요한 거라고. 저는 장모님 말씀이라면 짚단을 이고 불구덩이 속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평생 장모님의 노예입니다, 이런 마음과 자세가 충분히, 넘칠 정도로 어필이 되어야 한다. 니가 선택한 여자의 어머니면 너한테 충분히 그런 대접받으실 자격이 있지. 너 도현 씨한테도 안 그러지? 하지만 장모님 앞에서는 죽는다고 장렬하게 쓰러지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라고. 여자는 자기 가족한테 잘하는 모습에 더 감동받아. 당신도 그랬지?”

“진짜, 당신.”

지연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송영제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까 빨리 칭찬해.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잔데. 세상에 이렇게 좋은 남자가 그렇게 흔한 줄 알아?”

“그건 그래.”

“진짜지?”

“응. 당신이 최고야.”

둘은 정말로 전보다 더 알콩달콩해졌다. 예전에 잘 모를 땐 아들인 자신을 제쳐두고 둘이서 저러는 부모를 보고 저렇게 좋을까, 싶을 때도 있었는데 그도 도현과 함께라면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좋을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바로 저렇게 말이다.

“자.”

송영제는 지연을 껴안은 채로 자신의 디바이스를 조작해 송선호의 디바이스로 무슨 파일을 하나 보냈다. <장모님>이라고 명명된 폴더 하나였다. 거기엔 송선호의 외할머니가 뭘 좋아하시고 뭘 싫어하시는지, 기념일, 주의할 점 등등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송선호는 더더욱 감탄했다.

“아버지 진짜… 존경합니다.”

“참고해라.”

그보다 인생을 한참 앞서, 그것도 무척이나 훌륭하게 살아온 아버지의 어마어마한 어시스턴스를 받은 송선호는 항상 그랬듯 남들보다 훨씬 앞선 출발선에 설 수 있었다.

*

송선호는 원래부터 다른 세 명의 남자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출발선에 서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다. 그는 다른 남자들보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부유하고 화목한 가정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물론이고 미르 킹쉴드? 에반 블랙? 그 남자들의 출신이란 출신이라 말하기도 비웃음이 나올 정도로 한미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를 발견한 것도 넷 중에서 그가 제일 먼저였고, 그간 도현 킬스버그가 시시한 남자들에게 크게 감명받지 못한 채 습관적으로 사귀고 헤어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을 시기 그녀에게 제대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그였다. 그가 마음을 제대로 먹고 대시했다면 사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단 말이다. 적어도 자기 아버지만큼만 했어도 충분히 사귈 수는 있었을 것이다. 첫 만남부터 인생의 청사진을 읊으며 너를 호강시켜 주겠다는 남자를, 설사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을지라도 그녀와 같은 여자가 흥미를 느끼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도현은 물론이고, 에반도, 다니엘도 언급하고 심지어 미르 킹쉴드조차도 저건 병신인가, 할 정도로 그는 지금까지 모든 조건을 다 완벽하게 갖추고도 되려 빙빙 돌았다. 그는 본인도 인정하듯이 다소 보수적인 남자였지만 그럼에도 그녀와 같이 자유로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였다. 본능적으로 자신과 다른 상대를 선택한 것이다. 그는 보수적인 집안에 너무나 안정적인 조건을 타고났지만 도전을 즐기는 뛰어난 남자였다.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첫 만남에서부터 자신의 패를 모두 까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을 남자로, 남편으로 존중할 여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터프한 정공법을 멋지게 성공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도현 킬스버그는? 그의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갈 여자였다. 그러면 그를 휘두르기만 하고 그를 하찮게 볼 것이다. 그런 여자라서 사랑하지만 그런 여자라서 경계도 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도 너무나 사랑하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에반 블랙을 만나기 전 반년 정도 앞선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건 그가 자신보다 좋은 남자는 그녀에게 없을 거라는 자신감과 그녀의 가치관에 대한 무지, 그리고 그가 대시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자신에게 반하길 바라는 기대와 어리숙함 때문이었다.

그녀가 에반 블랙을 만나고 그가 그녀에게 다른 남자들과 다르게 매우 특별한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를 포기하려고도 하고 미워하려고도 하고 별별 노력을 다했지만 실패했다. 그 뒤 그녀가 빚으로 힘들어졌을 때도 분명히 다른 세 남자에게 앞서 또 기회가 주어졌으나 이것마저도 날려버렸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남자를 선택한 그녀에게 벌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에 대해서는 분명 어리석은 부분이 있었으나 송선호는 바보도 병신도 아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가 그녀를 가지기 위해서 기브 앤 테이크 전술을 능란하게 사용하며 그녀를 유혹하고 그녀의 법칙을 무너뜨리듯이, 그도 그녀를 길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녀를 선택했고 그래서 그녀도 그를 선택하길 바랐다. 이렇게나 자유롭고 강하고 아름다운 그녀가 자신의 것을 다소 포기하고서라도 송선호를 선택하기를 바랐다. 자신이 그런 것처럼.

“당신 진짜 얼굴이… 10년은 젊어졌어.”

“그치? 딱 좋지? 이것보다 너무 어려 보이는 건 아직은 좀 그래.”

“그렇지. 당신 회사도 있고. 요즘 세상이 좋긴 좋다. 당신 몇 년 바빠서 정말 칙칙했는데.”

“진짜? 내가?”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아…. 그랬지. 지금이라도 한 게 어디야.”

“응, 그건 그래. 우리 남편 잘생겨서 좋았지.”

“그치? 하하하!”

작년, 이혼의 위기에 맞닥뜨린 아버지는 처음에는 현실을 부정하고 어머니에게 질척거리길 반복했으나, 그가 어디 그저 그런 남자던가. 송선호는 도현에게도 비싼 값 한다, 제 잘난 맛에 산다는 평을 꾸준히 받는 남자였지만 바로 그런 그가 유일하게 인정하고 본받기 위해 노력하는 남자가 바로 그의 아버지, 송영제이지 않았던가. 송영제는 굳이 일부러 문제를 찾아 해결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못 하는 게 없는 남자였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각도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는 태도부터 바꾸었다. 내가 잘못하는 것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으면 전부 고치겠다. 나는 당신 없으면 못산다. 내가 당신의 문제를 전부 해결해주겠다.

그리고 그는 아내에게 자신이 여전히 쓸 만한 남자라는 걸 알리기 위하여 선물 공세에 들어갔다. 평소 하던 선물 수준이 안 먹히는 것 같으니 미술관에, 럭셔리 크루즈십, 재단까지 들고나온 걸 봐라. 앞서 말했듯 송영제는 이렇듯 자기 패를 다 까도 되는 것이다.

그는 주저 없이 주변에 조언을 구했다. 항상 자기 밑으로 보던 자기 아들이 연애하는 것도 유심히 지켜보다가 ‘도현 씨는 뭘 좋아하냐?’, ‘요즘 여자들은 남자가 뭘 해주면 좋아하냐?’라는 식의 질문을 몇 번 했다. 송선호는 제모라든가, 피부관리라든가, 수영복, 옷차림, 보석 등등에 대해서 쑥스러워하듯이 빼며 대충 설명해주었는데 그는 송선호보다도 먼저 미용 쪽으로 거침없이 도전하더니 저렇게 어머니의 예쁨을 받고 있었다. 그는 거금을 들여 마도의사를 만나고 진짜 한 10년 정도 회춘해버렸다.

이런 상황에 어머니의 입장에서도 굳이 이혼까지 하는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가 뭐가 있는가. 사랑하는 남자가 정신 차리고 자신의 말을 전부 들어주겠다는데.

“우리 이사장님께서 수고가 많으셔서 오늘도 저희 회사가 잘 굴러갑니다, 이바노프 이사장님. 어휴, 이 섬섬옥수에 저희 회사의 명운이 달렸죠.”

송영제는 자신의 무릎에 앉은 지연의 양손에 입을 쪽쪽 맞추며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싫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직은 당신이 일 다 봐주는데, 뭐.”

“그래도 우리 이사장님께서 처음 하시는 일인데도 너무나 훌륭하셔서 제가 더 할 게 없습니다.”

“이래봤자 떨어지는 거 없어.”

“아유, 그렇게 말씀하시면 전 어떡합니까, 이사장님~ 한 번만 예쁘게 봐주시죠, 이사장님~”

아버지는 지금까지 어머니를 공주님처럼 대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여왕님처럼 대해줄 모양이었다. 외할머니 말뿐만 아니라 엄마 말에도 죽는시늉을 하기로 마음 먹은 게 보인다. 회장님과 외할머니께 적절하게 치고 빠지며 아부를 떠는 스킬이 여기서도 빛을 발하는 것이다.

‘아니, 아버지는 어떻게 가지고 태어난 것도 많은 양반이 저런 것까지 척척박사시냐고.’

아버지는 천재인 게 틀림없었다. 어머니가 잠깐 서재로 간 사이 아버지는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송선호는 한숨을 쉬며 송영제에게 말을 걸었다.

“아버지… 전 아버지 따라잡으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나 봅니다.”

“그걸 이제 알았냐.”

송영제 같은 수컷 하나가 바로 이 세상의 가부장제를 유지시킨다. 그런 남자 하나가 22세기에도 가부장제의 매력을 생산하고 거기에 이끌린 암컷들이 바로 이 체제를 견고하게 유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른 수컷들은 그저 그 덕을 마치 처음부터 자기 몫인 줄 착각하고 누리고 산다. 150억 중 단 몇 명의 수컷과 환상에 취해 단지 수컷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알파 수컷도 아닌 열등한 수컷들을 선택하는 멍청한 암컷들 덕분에 말이다.

“도현 씨같이 젊은 여자야 당연히 하고 싶은 게 많을 때지. 옛날도 아니고. 하지만 바라는 게 많은 여자일수록 결국 널 선택할 거다.”

“돈이나 그런 게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도현이는.”

그러자 송영제가 웃었다.

“세상에 돈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없다. 단지 문제를 해결할 만큼 돈이 없는 게 문제인 거지. 우리가 세계 유수의 재벌가치고 자식들을 너무 검소하게 키우긴 하지만 내 아들이면 그건 잘 알고 있어야지. 니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니야. 도현 씨도 마찬가지고. 그 점을 잘 인지하고 있어야 니가 하고 싶은 걸 다 이룰 수 있을 거다.”

“아버지….”

“인생 길게 봐라, 아들. 조급해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믿고 기다려. 니가 누구 아들이냐. 연애는 밀당이지, 밀당. 애처가와 공처가는 한 끗 차이다, 어?”

송영제가 아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당부했다. 송선호는 감탄의 마음을 금치 못했다.

“아버지…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오냐.”

아버지는 다시금 콧노래를 부르며 신문을 보기 시작했다. 작년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아니, 작년의 위기를 헤쳐나온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더더욱, 역시나 아버지는 송선호가 인정하고 존경하는 최고의 남자였다. 봐라. 아버지가 가지지 못한 것이 뭔가. 그는 사회적 지위, 능력, 혈통, 자신감, 사랑하는 아내, 자신을 존경하는 아들까지 전부 가진 남자였다.

‘그래, 아버지는 결혼도 했고 나같이 다 큰 자식도 있는데도 저렇게 와이프한테 최선을 다하는데 내가 진짜 생각이 짧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도현과 진짜로 만나고 있는 상태이고 분명히 도현도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잘해줄수록 확실하게 점수를 딸 것이다. 아버지처럼 점진적으로, 길게 보고 차근차근 잘해주고 좋은 거 해주고 아버지처럼 생색도 확실하게 내고….

‘아직 제대로 만들어지지도 않은 회사에 출자를 하게 했다고?’

그는 도현이 얼마 전 다니엘 스톤하츠와 관련된 회사에 투자를 했다는 말을 들었다. 우스운 일이다. 그녀가 KP그룹 계열사에 투자를 하고 그게 자신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만 나도 주가가 단박에 두 배는 오를 것이다. 비상장 회사에 투자를 하게 하고 몇 년 뒤에 상장시키면 열 배도 벌게 해줄 수 있었다. 그걸 못해서 안 하는 줄 아는가. 그런 건 아직 때가 아니었다. 일에는 순서가 있었다.

‘난 예전 아버지처럼 좀 무심하게 하는 게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어떻게 저렇게 금세 바꾸시지. 회장님 때문인가.’

그리고 역시나 좀 난처한 기분도 들었다.

‘내가 아버지처럼 도현이한테 이사장님, 이사장님 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하지? 아니, 갑자기 그러면 도현이가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놀리겠지. 엄청 놀리겠지. 아….’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뭔가 바뀔 수 있을까.

*

도진 킬스버그, 아니, 도진 라인하트는 그때부터 도현 킬스버그의 대저택에 눌러앉았다. 도현은 그를 데리고 메트로서울에 있는 좋은 곳은 다 돌았다. 원래 혈연에게 잘해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법이다. 피를 나눴기 때문이다. 도현이 그간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말하자 그가 양 엄지를 들었다.

“진짜 엄마도 그렇지만 너도 대단하다. 사업가야.”

“엄마도 지금 뭐 하셔?”

“응? 몰랐어? 이거 엄마 거잖아.”

도진은 디바이스에 무언가를 검색해서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응?!”

도현이 미르 킹쉴드와 섹스할 때마다 그에게 착용하게 하는 그 콘돔, 그게 어떤 럭셔리 브랜드에서 만든 거였는데 분명히 브랜드명이 <라인하트>….

“대박….”

예전에 제법 송선호를 부러워하곤 했는데 그녀도 재벌 딸이나 다름없었다는 말이다. 도현이 감탄한 말투로 말했다.

“엄마 진짜 대단하시다.”

“그치? 도대체 아빠랑 왜 결혼했을까?”

“엄마는 어떻게 지내셔?”

“잘 지내지. 잔소리도 많고.”

“엄마가?”

도현이 도진의 얼굴을 보았다. 옛날 기억에서 비롯된 거지만 엄마가 잔소리를 많이 하는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도진은 엄마의 가르침이 전부 잔소리처럼 들리는 것일까? 도진은 불량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엉~ 어렸을 때도 생각했지만 나는 엄마랑 그렇게 많이 안 닮았잖아. 엄마랑 닮은 건 너지. 엄마랑 나는 라이프 스타일이 안 맞아.”

“…….”

어렸을 때도 동생은 강했다. 그렇게 아팠지만 그래도 아빠보다도, 도현보다도 더 강하고 씩씩했다. 건강해지고, 그리고 이렇게 크니 더 거칠 것이 없다는 느낌이다. 정말 훌륭하게 컸다.

“엄마가 도대체 넌 왜 같이 안 데려간 걸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는데. 내가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 쳤잖아. 너도 같이 살자고. 그런데 왜 나만 데려갔지?”

도진이 문득 고개를 들고 물었다. 도현이 말했다.

“내가 싫다고 했거든.”

“응? 왜? 나랑 헤어지는데도?”

그의 말에 어쩐지 도현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따라갔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냥 갑자기 나타난 엄마 따라서 멀리 가기 싫었어.”

“그래?”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거면 더 빨리 만나볼걸.”

“그건 그래.”

도현이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도진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근데, 진짜, 진심으로 진지하게 묻는 건데. 도대체 그 새끼들은 다 뭐야?”

“응? 누구?”

“그 낯짝 번지르르한 놈들! 진짜 그것들 다 사귀는 거냐? 넌 어째 엄마보다 한술 더 뜨냐? 대를 이어 진화하는 거냐? 어?”

“너는 말을….”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도진은 기세를 죽이지 않고 강하게 말했다.

“왜 너랑 엄마는 남자 없이 못 사는 거야? 남자 같은 거 없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잖아.”

“없이 못 사는 건 아닌데.”

“근데 왜 꼭 그렇게 남자를 차고 살아야 하는데? 그게 너한테 무슨 도움 준 적 있어?”

“빚 갚는 것도 도와주기도 했고…. 엄마도 그럴 거 아냐. 남자라고 꼭 나쁜 남자들만 있는 것도 아니야.”

“하, 진짜 그렇게 생각해? 그것들 다 너 어떻게 해보려고 그러고 있는 거잖아. 너랑 자려고. 짐승 같은 새끼들. 안 그러면 그것들이 정신 나가지 않고서야 여자 하나에 넷이나 들러붙어 있겠냐?”

“…….”

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결국 한마디 하게 되었다.

“도진아.”

“뭐.”

“내 인생이야. 널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니가 나에 대해 함부로 말해도 되는 건 아니야.”

“그게 사실인 걸 어떡해? 가족인데 이런 말도 못 해?”

역시 9살의 도진과 19살의 도진의 차이는 컸다. 더군다나 10년이면 아무리 가족이라도, 아니,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의 선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걸 8년 전의 엄마는 알고 존중해주었는데 동생은 그러지 못했다. 도현은 그를 위해 애인들도 전부 내보내고 지낼 곳도 주지 않았던가. 도현은 디바이스를 들었다.

“가출도 좋지만 이제 슬슬 엄마한테도 연락드려야 하는 거 아냐? 걱정하실 거야.”

“뭐?! 고작 그거 뭐라고 했다고 날 내쫓겠다고?”

도진은 그렇게 발끈했다. 도현은 잠깐 도진을 보았다. 그제야 반가움에 가려져 있던 지금의 동생이 조금씩 보이는 느낌이었다. 세상에. 엄마는 물론이고 아빠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동생이야말로 도현이 제일 꺼리는 종류의 사람이 되었다. 감정적이고 선을 지킬 줄 모르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

‘가족이랑 떨어져 산 시간이 길어서 그럴까. 피곤하다…. 왜 오랜만에 본 가족에게 굳이 저렇게 공격적으로 굴어야 하는 거지?’

어리니까 더 그렇겠지만, 보통 사람의 본질이란 나이가 든다고 바뀌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은 더 나빠지지. 사실 사람의 호불호란 가정환경에서 무엇을 겪느냐에 따라서 발달하는 것이다. 도현이 그런 사람을 싫어하는 건 그런 사람을 접하고 살아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동생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떨어져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도현보다 아버지를 더 많이 닮은 것일까. 유전자란 무섭다.

도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 도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나 엄마나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지! 그래, 잘 먹고 잘살아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비난하는 법이다. 자신의 이기적임을 만족시켜주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이기적이라 비난하는 것이다. 편협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작은 편협을 비난하고 능력 없이 높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원하는 사람일수록 노력하며 인생을 본인보다 훨씬 열심히 살아 부를 이룬 사람까지도 맥락 없이 비난한다. 자기는 착하게 살았는데 왜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냐고 세상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최소한의 자립할 능력은커녕 본인이 말하는 도덕적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제대로 모르는데 세상과 남을 알 리가 있는가. 누구나 떠들 수 있는 사회일수록, 권력이 분산된 사회일수록, 사리분별을 제대로 하는 것이 생존과 삶에 결정적인 이유다. 사람을 가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사람의 거짓된 말을 구분하고, 그 이전에 그런 사람이 자신의 곁에 생길 확률을 줄여야 하는 것이다.

도현은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 가버린 도진의 뒷모습을 보며 한 번 혀를 차고는 말았다. 엄마가 지금까지 고생이 많으셨겠네. 그녀는 디바이스를 들어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와요, 다들>

그렇게 짧게 단체 문자를 보내고 또 다른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빠, 잘 지내셨어요? 도현이에요. 엄마 연락처 좀 알려주세요. 꼭 연락할 일이 생겨서요>

그리고 남은 칵테일을 마시는데 전화가 왔다.

[도현이니?]

그의 목소리에 반가움과 섭섭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도현이 대답했다.

“네. 안 바쁘세요?”

[응. 괜찮아. 우리 딸이 전화를 다 했는데. 그래, 잘 지내고 있니? 건강하고? 무슨 일 있니?]

“네, 전 잘 지내고 있어요. 말씀드렸다시피 엄마 연락처가 필요해서요.”

[…왜? 네 엄마가….]

“아빠, 자꾸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세요. 엄마 연락처가 필요해요. 그것뿐이에요.”

도진이는 역시 이런 면이 아버지를 닮은 것일까? 상대에게 감정적 보살핌을 바라는 어린애 같은 모습. 상대를 자꾸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서 무척이나 대화하기 피곤하다. 이렇게 빨리 끊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맥락 없는 감정적 비난이 이어진다. 친절하게 대해주고 싶어도 이런 점 때문에 친절하게 대해줄 수가 없다.

[문자로 보내마.]

“네, 고마워요. 늦었는데 쉬세요.”

도현은 전화를 끊었다. 이번에는 순순히 엄마의 연락처를 보내준 아빠다. 도현은 그 연락처를 보고 바로 전화를 걸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엄마가 도대체 넌 왜 같이 안 데려간 걸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는데. 내가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 쳤잖아. 너도 같이 살자고. 그런데 왜 나만 데려갔지?]

그때의 도현은 18살이었다. 자신은 아직 어렸고 엄마가 데려가고자 했다면 싫다고 했어도 데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가 지금까지 이룬 것을 보면 정말로 그때 엄마를 따라갔던 것이 나쁜 선택이었을 것 같지도 않다. 물론 도현은 몇 년 안에 금방 스스로 자립했지만 그게 엄마를 따라갔다고 해서 바뀌었을 것 같지도 않다. 사람은 근본이 중요하고, 사실상 그게 전부인 이유다.

‘약간 긴장돼….’

엄마는 스위스에 계신다고 한다. 지금 전화하면 거긴 한낮일 테니 딱 적당하다. 하지만 도현은 쉽사리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것일까? 아니, 엄마에게 연락하는 게 맞다는 걸 안다. 도진은 아직 독립하지 않았고 여전히 그녀의 책임하에 있었다.

사람은 본인이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존재가 되어서야 비로소 성인이 되는 것이다. 어떤 나이이든 그 기준은 일괄적으로 적용된다. 나이가 40세가 되든 100세가 되든 누군가에게 경제적, 정신적으로 의탁하고 산다면 그건 어른이 아니라 어린애일 뿐이다. 도진은 스스로를 책임지지 못하는, 미성숙한 존재다. 남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라는 말을 하려면 한참 남았다. 그러니 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엄마가 필요한 것이다.

도현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세 번쯤 가자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엄마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알았다. 만나지 않은 지 10년, 아니, 13살 때 헤어지고 10년 전에 한 번 만난 게 전부인데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엄마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도현의 안에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실감하여 좀 놀라웠다.

“알렉시스… 라인하트 씨 전화인가요?”

[맞습니다. 누구십니까?]

도진은 분명히 가출을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엄마의 목소리는 타인에게 그런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실제론 그냥 지금의 도현처럼 가족이라고, 동생이라고 자기 일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다른 사람처럼 굴지 않는 것뿐일까?

엄마

도현은 어린 나이에도 자신이 엄마를 굉장히 존경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의 자신이 얼마나 많은 부분, 그 기억 속에 있는 그녀의 이미지를 따르고 있는지도. 그래서 도현은 자신이 그녀에게 실망스럽다고 여겨지고 싶지 않았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도현이에요, 엄마.”

그래서 도현은 목소리와 자세를 가다듬고 자신을 밝혔다. 그러자 잠깐 수화기 너머의 어머니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리고 도현 킬스버그의 어머니, 알렉시스 라인하트는 입을 열었다.

[도현이니?]

“네.”

[오랜만이구나. 잘 지내고 있니?]

“네, 잘 지내고 있어요. 엄마는요?”

[잘 지내고 있단다. 오랜만에 목소리 들으니 반갑구나.]

“네, 저두요.”

[도진이가 거기 있니?]

“네.”

[용케도 거기까지 갔구나. 모레 데리러 가마. 만날 시간은 이 번호로 메시지를 보내면 되겠니?]

“네.”

[그래, 그러면 그때 보자꾸나.]

“네, 그때 봬요.”

통화가 끊겼다. 도현은 잠깐 그대로 있다가 디바이스를 귀에서 떼고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크게 숨을 내뱉었다. 진짜 기분이….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저장이 되어있지 않은 번호를 보다가 곧 그것을 엄마, 아니, 알렉시스 라인하트로 저장했다. 그리고 그녀는 엄마가 만든 브랜드 사이트로 들어가 보았다. 물건이 좋고 나쁘고를 따지지 어떤 디자이너가 어떻고, 철학이 어떻고 이런 건 상식 수준 정도만 알아두는 편이 적당하다고 생각해서 라인하트 브랜드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그게 엄마가 만든 브랜드일 줄이야. 여성의 건강과 삶의 질을 위한 획기적인 아이템을 고급스럽게 만들어내니 처음엔 비싸니 뭐니 말이 많았지만 결국 굉장히 잘 자리를 잡아 성공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애초에 대중을 위한 물건들이 아니었다. 5%를 위한 가격대를 잡았고 그러니 나머지 95%도 인생에 한 번쯤은 가지고 싶은 브랜드, 일상적으로 쓰고 싶은 고급 브랜드로 자리 잡은 것이다.

‘지금도 그 개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혈통으로 해로운 사람들을 배제할 수 없으니까 가격으로 적절하게 나누는 거라고 했지. 다른 기준이랑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거를 순 없지만 해로운 사람을 만날 확률을 획기적으로 줄여준다. 그러니 여자가 더 벌고 더 사람을 가려야 인생을 똑바로 살 수 있다고.’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니 기억나지 않던 이야기들도 하나둘 떠올랐다.

“엄마….”

도현은 그대로 혼자서 엄마와 어린 시절의 기억에 잠겨 야경을 바라보았다. 늦은 시각 집으로 돌아갔다. 동생이 제대로 돌아왔나 확인을 하러 동생에게 내준 게스트룸으로 가보았다.

“가출을 밥 먹듯이 하나, 얘가.”

도현은 잠깐 팔짱을 끼고 빈방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도현아.”

“송선호.”

송선호는 아까 도현의 메시지를 받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는 도현에게 다가와 포옹했다. 그리고는 짧은 시간에도 몇 번을 고민하다가 말했다.

“보, 보고 싶었어.”

“며칠 떨어져 있었다고.”

“진짜야…. 엄청 보고 싶었어.”

“그래?”

서로의 허리를 안은 채 고개를 떼고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송선호는 먼저 쪽 하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도현은 미소를 지었다. 송선호는 빈 게스트룸을 돌아보았다.

“동생은?”

“또 가출했어.”

“뭐? 괜찮아? 왜? 싸웠어?”

송선호는 깜짝 놀라더니 그렇게 물었다. 도현이 대답했다.

“괜찮아. 들어오고 싶으면 알아서 들어오겠지. 가출하겠다고 스위스에서 한국까지 날아온 앤데.”

“그래도 동생인데….”

“엄마가 모레 데리러 오신대. 문자는 보냈어. 알아서 들어오겠지.”

“어, 어머님 오신대? 연락했어?”

“응.”

송선호는 긴장한 얼굴을 했다. 그는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그래, 아버지 말씀대로 초조해하지 말고 인생 길게 보고….

“이제 들어온 거야? 기분 괜찮은 거지? 고생했어. 손 차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도현의 두 손을 잡고 입을 맞춰 체온을 나눴다. 그러자 도현이 피식 웃더니 물었다.

“왜 이래? 뭔가 이상해.”

송선호는 솔직하게 대꾸했다.

“아버지를 더 본받기로 했어.”

“아, 나한테도 미술관 해주는 거야?”

“20년… 아니, 10년 내로 해줄 수 있게 해볼게.”

“하하. 내가 그거 받으려고 10년이나 널 만나야 하는 거야?”

도현은 흐응, 하고 웃으며 또 송선호를 살살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넥타이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송선호가 말했다.

“10년보다 더 만날 만한, 아니, 평생 같이 살 만한 남자라는 거야.”

“에게? 미술관만으로? 어머니는 크루즈도 받고 재단도 받으셨는데?”

“그러니까 내가 더 열심히 해야지. 더 노력할게. 내가 너한테 세상에서 제일 좋은 남자라는 거, 선택할 만한 남자라는 거 증명하면 되는 거잖아. 그렇게 할게.”

“…….”

도현은 그대로 송선호의 눈을 잠깐 바라보았다. 송선호는 그녀를 만나게 되어서도, 답을 아는데도 왜 못 하냐는 말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어느 정도는 체면을 차리려고 하는 게 있었다. 항상 좀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번엔 뭔가 확실히 마음을 먹은 모양이다. 중심이 바로 섰다.

“멋있는데…?”

도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자 송선호가 움찔하더니 물었다.

“지금까지는 별로 안 멋있었어?”

“자기는 귀여운 맛이지.”

“하….”

송선호는 한탄에 가까운 한숨을 잠깐 쉬고는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지금이라도 멋있어졌으면 됐지. 가자. 씻고 자자.”

남자라는 게 이렇게 쉽게 바뀌는 거였던가. 아닌데? 도현이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던 그였다.

‘아버지인가?’

도현은 그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송영제가 송선호에게 뭐라고 한 게 틀림없었다. 그가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누군가의 말을 귀 기울여 먼저 경청하는 것은 자신의 아버지밖에 없었다. 자기 자신과 자신보다 뛰어나고, 그래서 닮고 싶은 롤 모델의 말 이외에는 전부 가차 없이 튕겨내 버리는 남자인 것이다. 설사 도현과 다퉈서, 그가 먼저 태도를 굽히더라도 그게 그의 생각을 바꿨다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인생은 송선호처럼 살아야 한단 말이야.’

그의 배울 점을 인정하는 것과 그의 말을 따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도현은 오늘따라 살뜰히 도현을 에스코트하는, 뭐랄까, 모시는 것에 가까운 송선호를 보며 기분이 제법 좋아지긴 했다. 그렇게 자기 비싼 줄 아는 남자가 도현에게만 이렇게 구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도현을 상전으로 모시겠다는 거 아닌가?

“이런 거에 넘어가는 거구나.”

도현은 송선호의 위에 엎드려 누워 그의 코를 꾹 눌렀다. 그러자 송선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진짜 아버지 말씀 들어서 손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벌써 이런 반응이란 말인가!

“으흠, 흠, 흠, 뭐가?”

그는 잠깐 헛기침을 하며 들뜨는 마음을 제어한 후 그렇게 물었다. 도현은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눈을 내리뜨며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아, 도현이가 이럴 때마다 미칠 것 같아. 뭐지? 뭘까, 이거.’

유혹은 원래 눈빛과 시선으로 하는 것이다. 그는 도현의 허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키스하고 싶었다. 더 꽉 끌어안고 싶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 그녀가 고개를 뒤로 물렸다. 다시 시도했다. 그녀가 다시 살짝 물러났다.

“도현아… 키스하면 안 돼?”

“그게 아니지. 키스해주세요, 라고 해야지.”

“…….”

이러니 그녀는 자신의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갈 여자라는 것이다. 나중엔 선물을 줄 때도 제발 받아주세요, 라고 애걸복걸 빌면서 겨우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송선호만 도현을 길들이려고 하는 게 아니다.

도현도 똑같이 송선호를 길들이려고 하고 있었다. 이번에 아버지를 보고 깨달은 거지만 사랑이란 사실 두뇌 싸움이다. 송선호는 살짝 얼굴을 붉히고는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저는 이미 당신에게 항복했습니다, 라는 뜻을 충분히 담아 말했다.

“키스해주세요, 자기야.”

“님.”

“키스해주세요, 자기님.”

아버지… 저는 처음부터 공처가밖에 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

도진 라인하트는 씩씩거리면서 돌아다녔다. 도현과 금방까지 있었던 곳은 메트로서울 한복판에 있는 고급 다이닝 장소였다. 밖으로 나오니 고급스러운 명품 가게들이 은은한 불빛을 내고 있었다. 늦은 시각이라 문을 닫고 간판과 안의 조명만을 켜놓았다.

‘엄마도 쟤도 이런 곳은 곧 죽어도 좋아하지. 뭘 먹고 살든 뭐가 그렇게 중요해? 그냥 아무거나 먹고 살면 되지!’

그는 발에 걸리는 대로 무언가를 차버리며 걸어갔다. 곧 으리으리한 맨션들이 주르륵 선 고급 주거단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근처 공원에 있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주머니에 껄렁하게 손을 찔러넣은 채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 인생이야. 널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니가 나에 대해 함부로 말해도 되는 건 아니야.]

왜 엄마랑 똑같은 소리를 하는 거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사랑해서 하는 말인데. 왜 자신을 거부하는 것일까. 내가 그들에게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인가? 그는 분명히 알렉시스 라인하트에게도, 도현 킬스버그에게도 가장 사랑받고 가장 사랑받을 존재가 아니던가.

‘엄마도 걔도 나한테는 잔뜩 이래라저래라 많이 했으면서 왜 내가 하는 건 무시해? 내가 하는 말이 맞는데. 열 받아….’

차라리 미식을 즐기고 좋아하는 걸 잔뜩 사고 그러는 거야 상관없었다. 엄마도 도현도 자기 밥벌이를 넘치게 하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그런 건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잔뜩 즐기고 살아도 괜찮았다. 앞선 말은 화풀이였을 뿐이니까.

하지만 남자는 그런 식으로 가지고 놀기엔 위험한 장난감이다. 술, 마약, 도박이나 별반 다를 것 없다. 당장 기분 좋다고 가까이하고 살면 인생을 망친다. 엄마도 그렇게 우아하게 살던 양반이 아빠 때문에 자식들도 잃고 고생하며 안 들어도 될 비난과 매도까지 잔뜩 듣고, 도현도 빚까지 져서 힘들었던 주제에 왜 그걸 아직도 모르는 것인가? 도대체 몇 번을 반복해야 그만둘 생각이란 말인가. 자신들이 우아하고 모든 것을 인간적으로 대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그들에게 그런 우아한 취급을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다. 결정적인 순간엔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그들은 짐승이다. 가리고 분별한다고 해서 그중에서 사람이 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들이 도진에게 그랬던 것처럼, 도진도 사랑하니까 지키고 싶은 것뿐이다. 왜 그걸 몰라주는 걸까. 그가 어려서 그러는 것일까.

“칫.”

그렇게 밤거리를 서성거리는 불량청소년 같은 짓을 하고 있던 도진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너만 남아 있는 거야?”

“응. 다들 다른 선수 만나니까, 이제.”

“넌 왜 안 만나? 아직 한창인데.”

“그냥. 저런 집도 생겼고 돈도 있고. 가끔 이렇게 미르도 오고.”

“…설마 아직도 나 기다리는 건 아니지?”

그러자 대화를 하고 있던 여자가 가볍게 웃더니 남자에게 되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어쩔 건데?”

“으음~ 내가 이쪽에서도 참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잘난 남자인 건 알지만 너 그래도….”

“후후. 딱히 강요하는 건 아니야. 나도 혼자 있으니까 좀 이상하긴 한데 그래도 좋아. 지금까지 먹고살려고 힘들게 살았잖아.”

“으음…. 내가 너도 많이 좋아하긴 하지만 이제 난….”

“강요하는 거 아니라니까? 왜 이렇게 심각해. 웃겨.”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사.”

“어? 이런 거 줘도 돼?”

“너야 예전에도 막 쓰진 않았잖아. 필요할 땐 써. 여자가 없으면 더 가오 안 살아.”

“후후. 이러니까 자꾸 여자가 붙는 거 아냐.”

“응? 그건 내가 잘난 남자라서 그런 거 아닌가?”

“응, 그리고 여자한테 이렇게 잘해주니까.”

“남자가 여자한테 잘해주는 게 일이지, 안 그럼 뭐에 써?”

“후후.”

그걸 가만히 보고 있던 도진은 인상을 확 쓰고 소리쳤다.

“야, 덩치! 너 지금 도현이 두고 바람피우냐!! 죽고 싶냐!!!”

그러자 깜짝 놀란 두 사람이 도진의 쪽을 돌아보았다. 미르 킹쉴드는 어둠 속에서도 그를 구분할 수 있었다. 파티마는 그의 팔짱을 낀 채였다.

“어? 너 여기서 뭐 하냐? 집에 안 있고.”

“와, 이 새끼 뻔뻔한 거 봐라. 그래서 지금 바람피우는 거냐고, 어? 죽고 싶냐고.”

도진은 그의 앞으로 걸어가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팍팍 찌르며 그렇게 말했다. 얘는 도현이 동생이라는데, 얼굴은 판박인데 성격은 전혀 달랐다. 미르가 대꾸했다.

“얘랑 밥 먹는다고 도현이한테 미리 말했는데? 바람 안 피웠어.”

“아니, 그런데 다른 여자랑 이렇게 팔짱을 끼고 다녀? 어?”

“이 정도는 그냥 하는 거지.”

“야, 나 이거 도현이한테 말한다? 어?”

그러자 미르도 얼떨떨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거리다 파티마를 보았다. 파티마가 말했다.

“킬스버그 동생, 맞지? 난 그냥 전에 이 남자랑 만났던 여자고 지금은 그냥 친구 같은 거야.”

“그런 게 어디 있어!!”

도진이 버럭 소리를 했다. 미르는 그냥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의 어깨 위에 팔을 올렸다.

“근데 너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하냐? 도현이랑 싸웠냐?”

“…….”

도진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파티마가 어머, 하며 말을 걸었다.

“지낼 데는 있어?”

“있으면 어쩔 거고 없으면 어쩔 건데.”

파티마는 슬쩍 도진의 쪽으로 와서 그의 팔짱을 꼈다.

“우리 집 갈래? 밥은 먹었어? 밤도 늦었는데 좀 쉬어.”

“…너 도현이한테 이를 거잖아.”

도진이 미르를 확 노려보며 그렇게 말했다. 미르가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내일 이를게.”

“집에 술 있나? 가출엔 술이지.”

“아, 그렇지. 약도 있나?”

“미르 끊지 않았어?”

“가출엔 약 아니야?”

“아, 그건 그래.”

도진은 헐, 하고 그들을 쳐다보았다가 마음을 바로잡았다. 그래, 나라고 왜 못 해! 그는 미르와 파티마를 따라 아크로폴리스 펜트하우스로 향했다. 이제 파티마의 집이 된 펜트하우스를 둘러보았다. 거실이 무척이나 컸고 메트로서울의 야경이 전부 보이는 높은 창문이 인상적이었다.

“집 좋네.”

도진이 말했다. 파티마가 약간 흐트러진 카우치 위를 정리하며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돼지 마구간이나 다름없었어. 사는 사람들이 좀 더러워야지.”

“사람들 더 있어?”

“응, 더 늦어서 들어올 거야. 많아. 한 열 명쯤?”

그럼 진짜 바람을 피운 건 아닌 건가? 그래도 전 여친이랑 만나고 다니는 게 바람이 아니면 뭔가. 도진은 인상을 찌푸린 채 제집처럼 뭔가 꺼내 마시는 미르 킹쉴드를 유심히 노려보았다.

“여기 원래 미르 집이었어. 킬스버그 만나면서 우리한테 주고 갔어.”

“여기를? 그냥?”

“응. 원래 여자한텐 통이 크거든, 미르. 다들 미르 좋아해. 그래서 그런 거니까 너무 그러지 마. 보기보다 좋은 남자야.”

그녀가 그렇게 그를 옹호하자 도진이 그녀를 빤히 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응. 저런 남자 잘 없잖아? 미르는 지금까지 한 번도 걸즈 때린 적도 없고 나름대로 친절하기로 유명했어.”

“그 정도면 좋은 남자인 거야?”

“그것 말고도 많지만…. 생각보다 그 정도라도 하는 남자가 잘 없어.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난 별의별 남자를 다 겪어봐서 미르 정도면 정말….”

그녀는 미르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애틋했다. 도진은 인상을 썼다. 미르 킹쉴드는 위스키, 브랜디, 와인 등을 종류별로 가지고 왔다. 파티마는 그걸 보고 얼른 잔을 가지러 갔다.

“잔은 있어야지.”

그녀는 잔과 안줏거리가 될 만한 것도 같이 가지고 왔다. 미르는 특유의 친근함으로 도진에게 술을 따라서 주었다. 도진은 호기롭게 한 모금 마셨다가 바로 뱉었다.

“아! 이런 걸 어떻게 마셔!”

“보통 사람은 그렇게 못 마셔, 미르. 얘가 선수야?”

“아, 그런가.”

GAS야 선수들의 시중을 들다 보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말술이 되거나 다들 요령이 생기지만 보통 사람들이 소드마스터처럼 마시다간 정말 죽는다. 얼음과 토닉 워터도 챙겨온 파티마가 친절하게 그의 술을 희석해주었다.

“천천히 마셔.”

파티마는 그의 보드카를 잔뜩 희석해주었다. 좀 마실 만해졌다. 도진은 잠깐 미르를 노려보았다가 술을 마셨다. 그들은 도진에게 대마를 피우는 방법도 가르쳐주었다. 알딸딸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여기 사는 식구들이라는 여자들도 잔뜩 돌아왔다. 그들은 다들 대충 차려입은 채 술을 같이 마시기 시작했다.

“그래? 킬스버그 동생? 많이 닮았네. 눈이 딱 닮았네.”

“으음~”

다들 도진을 한 번씩 만져보았다. 미르는 안주를 씹으며 물었다.

“근데 넌 왜 이렇게 인생에 불만이 많냐? 어렸을 때 고생 한번 안 한 사람이 어디 있어? 편하게 살아. 인생 별거 없어.”

“그럼 우리 도현이한테 집적거리지 마. 여자도 많은 주제에 왜 하필 도현이한테 질척거리고 지랄이야?”

“왜 이래? 우리 도현이 나 엄청 좋아한다? 니가 몰라서 그러는데….”

미르가 그렇게 말하자 도진이 발끈하고 소리쳤다.

“그래! 나 잘 모른다! 그러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아? 10년이나 도현이랑 같이 못 산 게 내 탓이야?”

“또 그런다, 또.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알게 되는 거야.”

파티마가 도진의 등을 두드리며 그렇게 말했다. 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얘 말이 맞네. 뭐야, 너? 요새 왜 이렇게 유식해졌어?”

“그래? 나 유식해 보여? 생각할 시간이 많아져서 그런가? 좋은데?”

“어떻게 한 거야? 가끔 도현이나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단 말이야. 도현이가 나 무식하다고 싫어하면 어떡해. 공부할까?”

미르 킹쉴드가 진지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공부? 미르가 공부?”

“상상만 해도 벌써 웃기다.”

“왜 이래? 좀 할 수도 있지!”

미르가 버럭했다. 파티마도 즐겁게 웃더니 말했다.

“요새 제수스도 공부한다고 난리야. 다들 왜 이래?”

“그 찌질이 새끼가? 걔는 뭐 하는데? 뭐 어쩌길래?”

“책 읽어, 책. 근데 진~짜 어려운 거 읽어. 이해는 하는 건지 모르겠어. 막 사람 말이 아니야, 그거.”

“에이, 설마.”

“보니까 제수스가 만나는 교순가 뭔가 하는 여자, 진짜 엄청 대단한 사람이었다며? 제수스 능력도 좋다.”

“그러니까. 우리도 우린데 그냥 TFC 전체가 다 발칵 뒤집어졌잖아. 그것 때문에 당장 올해부터 뭐가 엄청 많이 바뀌어.”

“멋있더라, 그 여자. 잘은 모르겠지만 진짜 대단한 사람이긴 한가 봐.”

“교수님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어쨌든 제수스는 또 엄청 우울 모드야. 역시 차였겠지?”

“차였겠지. 그런 사람이 뭐하려고 선수를 만나.”

“그 새끼 찌질한 거 보니까 금방 차일 줄 알았다, 등신.”

미르가 낄낄거리면서 말했다.

“이런 건 로드리게스한테 물어봐야지.”

그는 미하엘 로드리게스에게 전화를 했다.

“어~ 나다.”

[아, 왜 한밤중에 전화질이야?]

미르는 그렇게 뜬금없이 미하엘과 전화 통화를 시작하고 도진은 꿍한 얼굴로 술을 섞고 있었다. 옆에서 그에게 물었다.

“엄마가 너 때려?”

“아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데 뭐가 문제야?”

“꼭 때려야만 문제인 줄 아냐? 사람을 자기 기준으로 보지 말라고. 도대체 인생 사는 기준이 왜 다들 이렇게 낮은 거야?”

“너도 다른 사람 그렇게 보면서. 쳇, 부잣집 자식이라 이거지?”

그에게 질문했던 여자는 그렇게 투덜거렸다. 도진이 여자들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왜 이렇게 살아? 남자한테 빌붙어서. 이젠 돈도 없는 것도 아니라며. 그럼 좀 제대로 살아.”

그러자 몇몇은 말을 잃었고 몇몇은 화를 냈다.

“야, 사람이 좋게 말해줘도 그렇게 말 싸가지 없이 할래? 어리다고 봐주니까 사람이 우습게 보이냐?”

“내 말이 틀렸어? 남자한테 몸 팔고 사는 게 그럼 제대로 사는 거냐? 어?”

마음만 좋은 의도가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바꿀 수 있는 개인적 불리도 합리화하며 참고 사는 것. 그게 상대방을 어떤 방향으로 몰아가는지를 잘 생각해보라.

“누군 이렇게 살고 싶어서 이렇게 사는 줄 알아? 거지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팔려간 게 내 탓이야? 철창 달린 감옥에서 도망가지도 못하고 돈도 못 받고 팔리다가 불 나서 다른 사람들은 다 죽고 나만 겨우 빠져나왔는데도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게 몸 파는 거밖에 없는 게 내 잘못이냐고!”

“아니, 그러면 이제라도 제대로 살라고! 이제는 그렇게 먹고 죽을 돈도 없는 건 아니라며!”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건 줄 알아? 내가 아는 사람들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전부 여기에 있는데? 다 버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는 게 그렇게 쉬워?”

“그런 식으로 살면 평생 그런 식으로 살다 죽는 거야. 더 나아지는 것도 없고 갈수록 구질구질해지는 길밖에 없다고. GAS 이거 몇 년이나 해먹을 수 있어? 그리고 그다음엔 다들 어떻게 되는데? 다시 불나면 그냥 뒈질 수밖에 없는 그 철창 달린 감옥으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는 거 아냐? 그게 니가 원하는 거야? 정신 차려. 아무도 너 안 구해줘. 자기를 구하는 건 자기 자신밖에 없어.”

“야! 그래, 너 잘났다! 세상 사람들이 다 너같이 살 수 있는 줄 알아? 너처럼 다 가지고 태어날 수 있는 건 줄 아냐고!”

“야, 이 씨. 생각 똑바로 해. 이게 뭔 숟가락 물고 태어나야만 할 수 있는 말인 줄 아냐? 상황을 봐. 명확하잖아. 자기 자신이 싫냐? 그렇게 하찮아? 그런 취급 받으면서 살아도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살 거면 도대체 왜 사냐, 어?”

말하는 방식은 문제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도진 라인하트는 곧 죽어도 틀린 말은 안 한다. 싸움이 날 기세자 미하엘과 전화를 하고 있던 미르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말렸다.

“아니, 왜 싸워? 싸우지 마. 싸우지 마.”

“이게 자꾸 싸가지 없이 말하잖아!”

그 여자는 미르를 보며 해결을 바랐다. 도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기회가 무궁무진하게 주어진 거야. 더 이상 철창 속에 갇힌 여자가 아니잖아?”

“…….”

그녀는 자신을 철창 속으로 팔아버린 부모나 포주나 자신을 강간해왔던 남자들보다도 도진이 더 밉게 느껴졌다. 어쨌든 싸움은 관두었다. 도진도 한숨을 쉬었다.

‘이런 경우는 당연히 힘들겠지.’

하지만 그걸 누군가는 착실하게 이용하는 게 문제다. 듣기 좋은 양비론을 들먹여봤자 다 헛소리다. 누군가가 바뀌어야 한다면 결국 가장 피해를 받는 사람이 바뀌는 수밖에 없다. 세상은 자신이 겪은 것이 전부이기도 하지만 결코 전부가 아니기도 하다. 지금 좋다고 나중도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 힘들다고 나중도 그런 게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냥 바뀌는 것 없이 그저 상황에 맞춰 살아가는 방법밖에 없는 것인가. 착취당하면서, 이용당하면서.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아니지, 사랑이라고 애써 자위하면서.

‘아니, 그러니까 엄마나 도현이는 그런 상황이 아니잖아?’

이러나저러나 굳이, 꼭 자지를 몇 개 차고 있어야 속이 시원한 건가? 도대체 그것들이 뭐가 그렇게 예쁘다고? 똥인지 된장인지 굳이 먹어봐야 아나.

도진은 그렇게 속으로 엄청 투덜거렸다. 취한다. 그는 어느샌가 잠들어버렸다. 다음날엔 미르가 약속대로 도현에게 일렀다. 미르는 칭찬받을 걸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도진의 뒷덜미를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도현아~ 나 왔어!”

“미르.”

“…….”

도현은 미르와 포옹하며 도진을 보았다. 도진은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엄마 내일 오기로 했어. 문자 받았지?”

“…….”

“아빠도 한번 보고 싶다는데 만날래?”

“싫어.”

도진은 대답했다. 그는 2층에 있는 게스트룸으로 가버렸다. 도현은 한숨을 잠깐 쉬었다. 그리고 미르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발견했어요?”

“아크로폴리스 근처에서 죽치고 있더라고. 집에 데리고 올라갔어.”

“하긴… 쟤가 메트로서울에서 갈 데가 어디 있겠어.”

미르는 오랜만에 도현을 보아 기분이 좋았다.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고롱대며 도현과 함께 카우치에 앉았다.

“얼굴만 닮았지 성격은 많이 안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성격도 닮은 것 같아. 둘 다 깡 쎄다.”

미르가 도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도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래요?”

“자기 생각 절대 안 굽혀.”

미르가 키득키득 웃었다. 도현이 말했다.

“도진이가 폐 많이 끼쳤어요?”

“아니, 뭐. 재밌었어. 술 좀 먹였는데 괜찮아?”

“네….”

자기가 원해서 마셨으면 도현이라고 뭐라 하겠는가. 미르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은 그녀를 잠깐 보았다. 그녀는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파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손에는 트렌치코트가 들려 있었다.

“어디 나가려고?”

“네. 옷 좀 사려구요.”

“응? 왜? 사고 싶은 거 있어? 사줄까?”

“에반이랑 같이 쇼핑하기로 했어요. 내일 엄마 오시는데 입을 만한 게 없는 것 같아서요.”

“왜? 니가 입는 거 다 예쁜데?”

“그렇긴 한데…. 그래도 엄마 10년 만에 뵙는 거거든요. 잘 차려입고 싶어요.”

“니가 이러는 건 처음이네.”

“미르도 같이 가서 봐줄래요?”

“그래.”

도현은 미르와 함께 외출하여 해러드에서 에반과 함께 만났다. 양쪽에 번쩍번쩍 빛이 나는 아주 예~쁜 금발 미남을 둘이나 데리고 다니니 사람들이 전부 쳐다보았지만 도현은 고상한 태도로 진지하게 옷을 고르고 있을 뿐이었다.

“클래식하면서도 세련되고 너무 튀지 않으면서도 고급스럽고 촌스럽지 않고….”

도현이 중얼거렸다. 직원들이 줄줄이 그녀의 요구대로 각종 드레스와 구두를 가지고 왔다. 제법 옷을 직접 입었다 벗었다 했다.

“오늘 이렇게만 입고 나가도 될 것 같은데? 엄청 예뻐.”

미르가 뒤에서 도현의 허리를 껴안으며 말했다. 에반도 진지하게 옷을 골라주었다. 팔짱을 끼고 도현이 앞에 대고 있는 옷을 보면서 말했다.

“그거랑 가방까지 세트가 제일 우아하고 예쁘네.”

가방까지 세트로 된 톤 다운된 분홍색에 비단실로 고급스러운 문양이 허리를 둘러 자수가 들어간 자켓과 펜슬스커트였다. 클리비지가 깊었지만 고급스러웠다. 샤샤 목걸이를 걸면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녀는 옷을 직원에게 다시 주고 자신의 손을 쫙 펴보았다.

“아, 반지 다 껴도 될까?”

왼손 약지엔 에반이 준 초록색 다이아몬드 반지, 중지엔 바이올렛 스타, 오른손 약지엔 송선호가 준 순백의 프러포즈 링이 있었다. 샤샤 다이아몬드까지 걸면 그녀의 몸에만 도합 2백 캐럿이 넘는 다이아가 걸려 있게 되는 것이다. 그녀야 다이아몬드를 엄청 좋아하니 기꺼이 전부 걸고 다니곤 했지만 누가 보기엔, 아니, 엄마가 보기엔 좀 부담스러울까?

“뭐 그런 것까지 신경 써? 다 끼면 되지.”

미르는 그렇게 말했다. 에반도 어깨를 으쓱했다.

“좋은 건 좋은 거야.”

“그건 그런데. 너무 과하다고 생각 안 하실까, 엄마?”

“에이, 엄마가 그렇게 중요해? 엄마가 뭐라고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야. 니가 좋으면 좋은 거지.”

“그건 그래….”

도현이 중얼거리며 자신의 반지들을 만졌다. 에반이 웃었다.

“네가 이러는 거 정말 처음 봐. 어머니랑 만나는 게 그렇게 긴장돼?”

“응? 응…. 그런가 봐. 10년 전에는 이런 걸 따질 여유도 없었고 어렸고…. 근데 지금은 좀 다르잖아? 우리 엄마 진짜 대단한 사람이란 말이야. 걸맞게 보이고 싶어.”

“…….”

자신과 처음 만났을 때도 도현은 능력과 상관없이 여유롭게 자란 티가 났다. 어렸을 때는 정말 잘 살았던 것 같고 중간에 힘들어졌다는 말을 했지만 그래도 평범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여전히 여유로운 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굉장히 이른 나이에 스스로 많은 부를 이루기도 했다. 아마 그런 게 근본일 것이다. 송선호처럼 말이다.

“니 동생은 그런 거 신경 하나도 안 쓸걸?”

미르가 말했다.

“으음, 걔는 아직 어리잖아요. 난 이제 어른이 됐는데. 엄마한테 잘산다고 보여주고 싶잖아요.”

“그래?”

“아…. 저는 그래요.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럴 수도 있겠죠.”

“응. 괜찮아. 나야 뭐.”

미르는 별 구김 없는 태도로 그렇게 말했다. 사람은 다 다른 것이다. 에반은 가만히 도현을 보다가 손가락을 튕겨 직원을 불렀다.

“나도 사야겠어.”

“응? 왜?”

“어머니 뵐지도 모르잖아. 번듯하게 입어야지. 너한테 걸맞게 보이게.”

“뭐? 진짜?”

“어? 그럼 나도.”

에반은 자신이 좋아하는 슈트 브랜드들의 옷을 죄다 가져오게 했다. 미르 킹쉴드는 수선을 하더라도 맞는 옷부터 찾는 게 우선이었다. 에반이 직접 옷을 입고 나오자 도현이 휘파람을 불었다.

“헤이, 예쁜이~ 뭘 입어도 이쁜데?”

“흥, 다니엘 스톤하츠가 더 예쁘다고 했으면서.”

“하하, 그거 자꾸 말하네. 진짜 삐쳤어?”

“조금.”

에반은 한 번 더 옷을 갈아입고 나오더니 결정했다.

“회색이 좋겠어.”

“칙칙해서 싫다며?”

“검은색보다는 나아. 좀 무게감 있어 보이려면. 머리카락도 약간 손봐야겠는데….”

“평소대로 해. 너까지 왜 이래?”

도현이 웃긴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에반은 옷을 대보며 말했다.

“너한테 중요한 사람이면 나한테도 중요한 사람이니까.”

“기특한데?”

“나 진짜 유부남이라고 하고 다니고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진짜 좀 함부로 처신 안 하게 되는 거 있지? 파티도 안 가.”

“어머.”

“진짜 어른이 된 기분이야. 나쁘지 않아. 기분 좋아.”

에반이 미소를 지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럼 진짜 어머니라고 불러도 되나?”

“내일 엄마한테 물어봐. 송선호는 따님을 달라고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던데.”

“걔는 진짜….”

에반이 어이없는 투로 피식 웃었다.

“넌 안 그럴 거지?”

도현이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물었다. 에반이 그녀의 허리를 안으며 답했다.

“난 너한테만 무릎 꿇어. 알잖아.”

“으음, 반지 볼 때마다 생각나긴 해. 네가 무릎 꿇으면서 나한테 이거 끼워 준 거.”

“좀 놀랐지?”

“응.”

그들은 항상 대등한 관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누가 누구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건 어색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헤어진 건 서로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조금 긴장된다.”

“진짜?”

“응.”

미르 킹쉴드가 수선을 위한 옷 태를 대충 잡은 슈트를 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수두룩한 직원들의 시중을 받으며 거울을 보고 있었다.

“근데 도현이 엄마도 예쁠 거 같다. 예쁘지?”

“우리 엄마요? 예쁘면 어쩌게요?”

미르 킹쉴드의 말에 도현이 웃더니 물었다. 미르가 도현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더 잘해줘야지. 원래 남자는 여자한테 잘해줘야 돼. 예쁜 여자면 더 잘해주고.”

“참나.”

다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꾸밀 옷과 구두를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송선호와 에반, 그리고 에반이 부른 사람들이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도현은 2층으로 가 게스트룸 문을 두드렸다.

“도진아.”

문을 여니 도진이 뚱한 얼굴로 책을 읽고 있었다. 도현은 그에게 다가가 그가 앉은 의자의 팔걸이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그녀는 도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스위스에서 왜 가출했어?”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뚱한 얼굴로 말했다.

“엄마가 또 남자 만나서. 자꾸 모르는 남자들이 엄마한테 잘 보이려고 나한테 말 거는 것도 싫고, 그냥 역겨워. 내가 왜 싫은 걸 참고 있어야 해?”

“엄마한테 말하지.”

“몇 번이나 말했어.”

“엄마가 집에 니가 있는데 남자를 많이 데려오실 것 같진 않은데?”

“안 데려와. 내가 못 데려오게 하니까. 그런데도 꼭 그 망할 새끼들이 날 만나고 싶어 한다고. 어떻게든 엄마랑 결혼하려고.”

“엄마가 남자 보는 눈이 없나? 아닌데.”

“남자 보는 눈이라는 게 의미가 있어?”

도진은 책을 팍 덮었다. 그리고 도현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엄마도 너도 다 지킬 거야. 내가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너랑 엄마밖에 없어. 그러니까 너도 엄마도 차라리 나만 사랑하란 말이야. 내가 부족해? 내가 자격이 없어?”

이 굳건한 자기 확신은 어렸을 때 병마를 이겨낸 자신감에서 오는 것일까? 누군가는 오히려 거기에 꺾이기도 하는데 동생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도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아직은 어리지만 엄마가 새 자식이라도 볼 거 아니라면 결국 엄마는 내가 책임져. 너도 마찬가지야. 나는 어렸을 때 니가 나한테 해준 거 절대 안 잊어. 내가 책임질 거야. 그러면 너나 엄마도 내가 아무리 어려도 책임져줄 사람 말은 들어야 할 거 아냐.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그런데 좀 귀에 거슬리는 소리 한다고 쫓아내는 거야?”

“…….”

먼 미래 같은 건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도현은 아직 너무나 젊었고, 그리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행복한 현재가 없다면 아무리 행복한 미래라도 환상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하나라도 더 좋은 것을 매일매일 해나가는 것이야말로 행복인 것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나이 좀 들었다고 누가 누굴 꼭 책임져야 하나?”

도현이 말했다. 도진은 한숨을 쉬었다.

“어떤 세상이든 마찬가지야. 가족이 없는 사람들이 왜 소외되겠어? 아무리 사회가 발전되어도 그런 점은 안 바뀔 거야.”

“나 식구도 이렇게 많은데.”

“아무리 그래도 그게 핏줄이랑 같은 줄 알아?”

“남보다 못한 핏줄도 많은데, 뭐.”

“우리가 그런 사이도 아닌데 그런 비교는 의미 없어.”

“어렸을 때도 똑똑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걸 벌써 생각한단 말이야? 나도 생각 안 하는데?”

“존중은 힘에서 나오는 거야. 한 방 맞았을 때 기꺼이 지랄해줄 가족이 있어야지 인생 살기 든든한 거라고. 혼자 잘 살 수 있다고 혼자 사는 것만이 답은 아니야. 그래서 너도 이런 식구를 만든 거잖아. 그동안 나랑 엄마가 없었으니까.”

“…….”

식사 준비가 다 된 모양이다. 에반이 올라와 노크를 했다.

“도현아.”

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는… 미안. 말 심하게 해서. 엄마한테 받았던 스트레스를 너한테 푼 것 같아. 너한테 그러면 안 되는데.”

“가족은 중요해. 하지만 나도 엄마도 너도 제각각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살든 각자의 선택인 거야. 존중해야 존중받을 수 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도진은 그렇게 말하고 1층으로 먼저 내려갔다. 어렸을 때도 그럴듯하게 어른스러운 말을 많이 했던 애였지만 크니까 더 거침이 없어졌네. 저렇게 독불장군 같은 스타일이었나? 아빠랑도 다르다. 맞는 말만 하긴 하는데….

아무리 맞는 말도 나에게 맞지 않으면 무소용이다. 실감하지 않으면 더 그렇기도 하고. 하지만 어떤 말들은 절대적이기도 하다. 가령 빚에 대한 것처럼.

*

다음날 도현은 새벽같이 일어나 사람들을 불러 집 안을 싹 청소하고 꽃과 장식을 비치하고 간식거리와 차까지 준비해놓은 뒤 초조하게 알렉시스 라인하트를 기다렸다. 그녀가 저렇게 초조하게 구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다. 에반과 미르는 덩달아 긴장했고 송선호는 보이지도 않았다. 도진은 끌려갈 생각에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뚱하게 앉아 있었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늦었습니다. 라인하트 씨는 오셨습니까?”

다니엘 스톤하츠였다. 평일인데 용케 집에 돌아왔다. 그에게 엄마의 이름을 가르쳐준 적이 있었던가? 도현은 잠깐 갸웃했다. 그는 오늘도 늘씬하게 차려입고는 시계를 잠깐 확인했다. 도현은 그에게 다가가서 포옹하며 인사를 했다.

“아직 안 오셨어요. 다니엘은 시간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그 뒤 다니엘과 에반의 눈이 딱 마주쳤다. 잠깐 서로의 모습을 체크한 것이다. 에반은 미소를 지었고 다니엘은 그저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바로 저택의 인공지능 비서가 누군가의 방문을 알렸다.

[알렉시스 라인하트 씨가 오셨습니다.]

“문 열어드려.”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멀찍이 들렸다. 도현은 다시 한번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와 머리를 만진 후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손님을 맞을 채비를 했다. 멋진 차가 저택 앞에 섰다. 그리고 뒷좌석에서 송선호가 먼저 내렸다.

“어? 송선호?”

도현이 깜짝 놀라 그를 보았다. 그는 얼른 내려서 차를 한 바퀴 돌아오더니 다른 쪽 문을 얼른 열어주었다.

“내리시죠, 어머님. 조심하시구요.”

그는 살뜰하게 누군가의 에스코트를 하고 있었다. 땅이 질었다면 무릎이라도 밟으라고 바쳤을 기세다. 도현은 허리에 손을 대며 잠깐 그를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곧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남청색 쉬스 드레스를 입고 남색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사람이 내렸다.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키가 굉장히 컸다. 모델처럼 아주 분위기 있고 근사했다. 그녀가 장갑을 낀 손으로 선글라스를 벗으니 짙은 속눈썹이 돋보이는 미형의 얼굴이 드러났다.

‘역시 도현이 엄마. 몸매도 쩐다. 몸매는 도현이보다 더 쩌는데?’

‘알렉시스 라인하트. 럭셔리 브랜드 라인하트의 창업자이자 오너. 현재 혹은 앞으로 도현 씨의 재정적 부분에 많이 기여할까? 그럼 약간 곤란한데.’

미르와 다니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알렉시스 라인하트는 잠시 도현의 집을 한 번 쭉 둘러보았다. 그녀는 아이홀이 깊고 눈동자가 밝아 도현보다도 더 눈빛이 강렬했다. 그리고 그녀는 문 앞에 서 있는 도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잠깐, 약간 고개를 기울인 채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오랜만이구나.”

“엄마….”

알렉시스의 목소리가 좀 더 낮았지만 둘은 목소리마저도 비슷했다. 그들은 가볍게 포옹했다. 그리고 가까이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10년 만이었다. 키는 알렉시스가 더 컸다. 하지만 역시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둘은 정말로 많이 닮았다. 아무리 떨어져 살았어도 말이다. 그들은 잠깐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알렉시스는 눈동자를 돌렸다. 뒤에 서 있던 도진을 바라보았다. 도진은 팔짱을 낀 채 엄마를 본체만체하며 시선을 홱 돌리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도현을 놓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도진아.”

“싫어! 안 가! 엄마가 그 초록 눈이랑 헤어지기 전에는!!”

알렉시스는 잠깐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말했다.

“헤어졌어. 이리 와. 인사해야지.”

“…진짜?”

“그래.”

그러자 지금까지 누가 건드리면 잡아먹겠다고 기세등등하던 도진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더니 알렉시스에게 다가갔다.

“엄마~”

“자꾸 말 안 들어.”

“엄마도 내 말 안 듣잖아.”

도진은 엄마의 품에 안겨서도 그렇게 말대꾸를 계속했다. 확실히 이쪽이 훨씬 부모 자식 같았다. 지금까지 함께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송선호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어머님, 먼 길에 노고가 많으셨는데 일단 들어가시죠.”

그는 앞에 멀뚱하게 선 남자들을 등으로 밀어버리며 살갑게 웃는 얼굴을 했다. 도현은 아, 맞다, 하면서도 그런 그가 웃겨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저택 내로 들어가서도 한 번 집을 둘러보았다. 도현은 약간 긴장했다.

“집은 직접 지은 거니?”

“네.”

“집이 좋구나. 세련되고.”

언제 가출을 했냐는 듯이 도진은 엄마 손을 꼭 잡고 철썩 붙어있었다. 도현은 슬슬 식구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엄마, 여기는 로웰 리 선생님이라고 제가 어려울 때 도움 많이 주신 분이세요. 일도 같이하고 있구요.”

“어머. 안녕하세요, 선생님. 알렉시스 라인하트라고 합니다. 제 딸을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어머니. 저도 도움 많이 받고 있습니다.”

“여기도 같이 일하는 신재인 씨랑 윤지호 씨에요.”

그들도 알렉시스와 악수했다. 잠깐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나서 알렉시스는 눈을 들어 나머지를 스윽 쳐다보았다. 이제 남은 건 그 남자들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로웰이나 어시들을 보는 눈빛과는 달리 그렇게 썩 부드럽진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딸이 만나는 남자란 이모저모 잘 따져볼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차례가 오자 먼저 튀어나온 건 그 남자였다.

“아, 진짜. 역시 도현이 엄마. 짱.”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는 그 남자 말이다. 미르는 여전히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우아하게 손을 먼저 내미는 알렉시스의 손을 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알렉시스는 미소를 지은 얼굴로 역시나 우아하게 물었다.

“몇 살?”

“23살.”

알렉시스는 잠깐 도현을 힐끗 돌아보았다. 도현은 그저 하하, 하고 웃었다. 다니엘은 드물게 인상을 팍 쓰더니 미르를 옆으로 치웠다.

“반갑습니다, 알렉시스 라인하트 씨. 다니엘 스톤하츠라고 합니다. 북경대 물리학과 왕리밍 교수님 밑에서 수학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알렉시스는 아무 말도 없이 다니엘과도 악수를 했다. 그녀는 잠깐 동안 아주 천천히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꽤나 노골적일 정도였는데도 다니엘은 가만히 그녀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에반은 평소답지 못하게 다소 굳어 있었는데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깜짝 놀랐다.

“에반… 블랙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알렉시스는 잠시 에반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손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어머님, 여기서 계속 서서 이러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가시죠. 식사는 하셨나요?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다과랑 먹을 것도 잔뜩 준비해놨습니다.”

“맞아요. 엄마, 시차는 괜찮으세요? 들어오세요. 차부터 한 잔 드세요.”

송선호와 도현이 알렉시스를 안으로 안내했다. 도진은 금붕어 똥처럼 자기 엄마한테 붙어서 갔다.

“엄마, 진짜 헤어진 거지? 어? 그 새끼랑 헤어진 거지?”

“말.”

“그 아저씨랑 헤어진 거 진짜지?!”

알렉시스가 제일 큰 카우치에 앉자, 도진은 바로 그녀의 옆에, 도현은 도진의 옆에 앉았다. 알렉시스 옆의 남은 자리는 송선호가 얼른 꿰차고 앉았다.

“어머님, 드시죠.”

저 남자가 비행차 타워까지 가서 엄마를 모셔오더니 그냥 오늘 하루 종일 저러기로 마음을 먹은 게 분명했다. 도진이 발끈했다.

“야! 너 뭔데 우리 엄마한테 친한 척이야?!”

“도진아, 목소리.”

“아, 저게 짜증 나게 하잖아!”

알렉시스는 경고성으로 그의 허벅지를 한 대 때렸다. 그러자 그는 또 홱 토라진 얼굴을 했다. 차를 한잔하면서 알렉시스는 남자들 하나 하나에게 말을 걸고 빤히 보며 관찰을 했다. 그러고는 별로 오래 있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은?”

“벌써 가게?”

알렉시스가 도진에게 묻자 도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렇게 물었다.

“다 큰딸 집에 갑자기 와서 오래 있는 것도 폐 끼치는 거잖니. 잘살고 있는 거 보니까 마음은 놓인다.”

“싫어. 가지 마. 안 가. 도현이 때문에 마음도 못 놓고 살았으면 더 같이 있어야지. 야! 니들 때문에 우리 엄마가 불편해서 간다잖아!”

“목소리.”

“그러네요. 오랜만에 가족끼리 상봉했는데 우리가 자리를 비켜줘야죠.”

로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른 식구들에게 말했다. 로웰은 도현의 등을 쿡쿡 찌르며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기라고 했고 남자들을 전부 부엌으로 몰았다. 그녀는 송선호의 허리띠를 잡고 질질 끌고 갔다.

“칫! 우리는 왜 이렇게 다 같이 못 있어? 가족인데!”

도진이 불평했다. 알렉시스는 창을 열며 저택의 정원을 구경했다.

“엄마가 그때 도현이도 같이 데리고 스위스 갔으면 안 이랬을 거 아냐!”

“또 그 소리.”

도현은 약간 놀랐다. 솔직히 도현은 그동안 가족에 대한 생각을 그다지 많이 하지 않았다. 문득 되돌아보면 그때는, 그때도 상황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그녀는 한 가지 가치 기준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독립하고 싶었다. 동생은 사랑했지만 동생은 분명히 부모의 책임이었다. 그런데 아빠는 제 역할을 못하고 엄마는 없었다. 그때 엄마에게 연락한 것도 도현이었다. 그런데 엄마랑 동생은 지금까지 그녀를 생각하면서 살았던 것일까? 어쩐지, 마음이 찌릿했다.

“너도 원망하니? 그때 널 안 데리고 간 거?”

알렉시스가 도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가기 싫다고 했잖아요.”

“데려가려면 너희 아빠랑 이혼할 때 처음부터 둘 다 데리고 갔어야 했어. 너희 아빠가 죽어도 애들은 못 준다고 난리를 쳤지.”

알렉시스는 피식 웃었다. 도현도 웃었다.

“아빠는 그러면 엄마가 자길 안 떠날 줄 알았나 봐요.”

“웃기는 남자야. 아직도 그렇게 사니?”

“아빠야 여전하신 것 같아요.”

알렉시스는 도진에게 자신의 가방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가방에서 새카맣고 향기로운 시가를 꺼냈다. 끝부분을 커팅하고는 문득 도현을 보았다.

“하니?”

“네. 얼마 전에 여행 가서 사 온 거 있는데 한 번 해보실래요?”

“그래?”

도현은 잠시 3층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크리스털 재떨이도 같이 가지고 왔다. 적갈색에 고급스러운 시가가 든 상자를 손에 들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잠시 하나를 들고 코에 대보았다.

“좋은 거구나.”

“네.”

“자.”

알렉시스는 자신이 커팅한 걸 도현에게 주었다. 그리고 도현의 시가를 꺼내 끝을 잘랐다. 도현이 그녀의 시가에 불을 먼저 붙이고 자신의 것을 붙였다. 알렉시스의 것은 향이 아주 강한 고급품이었고 도현의 것은 부드러웠다. 도진이 시가에 손을 대려고 하자 알렉시스가 그의 손을 잡았다.

“아직 안 돼.”

“쳇.”

그렇게 잠깐 너무나 닮은 엄마와 딸은 아무 말도 없이 몇 모금 담배를 태웠다. 묘한 분위기였다. 도진도 입만 다물고 있으면 그 분위기에 일조했다.

“훌륭한 유전자야. 그렇지?”

“그러게요.”

“저런 건 송 사장님 집이 유일한 건 줄 알았는데.”

“아버지도 어떨지 궁금하다.”

로웰과 어시들이 부엌에 있는 아일랜드 식탁에 기대어 그렇게 속닥거렸다. 송선호는 저쪽을 연신 보며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아, 어머님. 어쩌지? 준비한 거 진짜 많은데. 지금이라도 슬쩍 드시면서 말씀하시라고 갖다 드릴까? 아, 아니야. 태도가 중요한 거랬어, 태도. 너무 부담스러워도 안 된다고.’

그는 오늘 일찌감치 비행차 타워로 가서 도현의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보니 어머니가 이름 있는 사업가셨다. 아버지가 메트로서울의 비행차 타워 소유주를 알고 있어 어떻게 스케줄을 알아낼 수 있었다. 혹시나 못 알아보면 어쩌나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딱 보자마자 도현 킬스버그의 어머니다. 동생도 그랬지만 정말 혈연은 못 속이는 것이다.

어머니도 분위기부터가 장난 아니라 진짜 오는 내내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말을 걸어도 우아하게 대꾸는 해주셨지만 그렇게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도 않으셨고.

‘아…. 도현이도 나중에 저렇게 되는 걸까? 난 영원히 도현이한테 못 당할 거야. 절대 못 당할 거야.’

알렉시스 라인하트는 정말 고혹적이고 농염한 미녀였다. 송선호도 자기 아버지랑 닮았다는 소리를 정말 많이 들었지만 도현도 자기 어머니랑 완전 판박이였다. 도현도 나중에 저렇게 될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마구 뛰었다.

‘공처가도 좋다…. 제발 나랑 결혼해줘, 도현아!’

송선호는 마음이 애끓었다.

송선호가 또 마음부터 앞서 달려나가고 있는 동안 다니엘은 얌전히 앉아 로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동시에 도현과 그녀의 핏줄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결국 다 다른 사람들이군. 예전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로웰 선생님보다 그녀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적다. 괜한 시간 낭비를 한 건가?’

다니엘은 자신의 시계를 보았다. 미르는 로웰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왜? 왜?”

“역시 근본은 중요한 거예요.”

“응? 왜 같이 안 놀고 따로 놀아? 재미없게.”

“오랜만에 만났잖아요. 회포를 풀 시간을 줘야죠.”

“흐응?”

그러는 사이 에반은 술을 한 잔 따라놓은 채 잔을 만지며 미묘한 표정으로 도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의 동생을 보았을 때도 기분이 이상했다. 그때는 오히려 섭섭함에 가까웠던 것 같은데 지금은 더 이상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욕망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도현이 준 자신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근본이라.’

그는 살아남는 데 급급한 삶을 살았다. 이렇게 많은 것을 이루고도, 그는 더 힘을 가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만족할 수 없었다. 무력하게 하루를 더 사느니 권좌에 앉아 단명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게 에반 블랙이라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가 원한다고 생각했던 것, 이룬 것, 모두 다 그녀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 같아 싫었다. 그녀가 너무나 좋을수록 스스로 긍정할 수 없었던 그림자가 자신을 좀 먹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잊을 수 없었다. 왜일까. 그녀를 다시 만나니 너무나 좋았다. 떨어져 있을 때보다 함께 있는 게 좋았다. 다시금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게 좋았다. 그녀가 자신을 특별하게 여겨주는 것이 좋았다. 그걸로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그러면 엄마가 자길 안 떠날 줄 알았나 봐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에반은 초조해하는 송선호를 의식했다. 그는 저렇게 볼썽사나워지더라도 자신이 하는 욕망을 기꺼이 추구했다. 자신을 위해서 사랑하는 여자를 바꾸려고 들 정도로. 그 욕망대로 할 수 없다면 아예 아무것도 주지 않을 정도로. 에반은 그를 처음 볼 때부터 그가 싫었다.

‘아이…. 아이.’

아이? 나와 도현이 사이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아이 같은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는 어린애를 싫어했다. 무력하고 멍청하고 분수를 모른다. 절대로 싫었다.

‘도현이와 나의….’

하지만 그녀와 자신의 아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귀찮은 짐덩이나 학대의 대상이 아니라 너무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그녀와 자신의 사랑의 증거, 존재의 증거, 미래의 약속이 되어줄 것이다. 설사 헤어지더라도 아이는 남아 그녀와 자신 사이에 다리가 되어줄 것이다. 헤어지더라도 헤어지는 게 아니라, 저렇게 아이의 안에서 함께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저렇게 강하고 아름다운 어머니 아래에서 저렇게 강하고 아름다운 자식들이 나와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도현도 그런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녀와 자신의 자식에게. 아니, 그녀의 아이라면 나의 아이라도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아이가 나를 사랑해준다면 나도 나를 조금 더 인정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상상이,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도 머릿속을 주르륵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게 될 거야. 나는 물론이고 도현이보다도….’

가지고 싶었다. 정말로 가지고 싶었다.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이렇게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게 있었던가. 없었다.

‘그녀와 함께….’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녀와 함께 아이를 낳고 함께 기르며 살아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아팠다. 자기 자신보다 소중한 것이 생길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도현이에게 말해볼까? 대리모도 구하고 내가 다 키운다고 하고…. 싫어하지 않을까? 싫어할 것 같아. 그래도 물어보고 싶어. 어떻게 물어보지?’

에반은 평소의 여유로운 분위기가 가시고 초조하게 도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바라는 것 앞에서 항상 여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른 식구들이 각자 동상이몽에 빠져있는 동안 오랜만에 만난 모녀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원래 너도 그때 데리고 갈 생각이었어.”

“그래요?”

“근데 네가 싫다고 한 것도 그렇고… 헤어진 사이에 벌써 네가 다 컸더구나. 그때 네가 18살이었지. 그리고 날 닮았고.”

“…….”

“자유롭고 강하고.”

알렉시스는 도현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러면 억지로 데려가는 건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다 컸는데 엄마로선 할 일이 없지. 중간에 몇 번 만나러 왔었지만 처음엔 네 아빠가 못 만나게 했고 그다음엔 네가 서울에 없었어.”

“…만나러 왔었어요?”

“응.”

“왜요?”

“글쎄…. 보고 싶었다고 하면 너무 상투적이고….”

그녀는 그렇게 설명을 시작했다.

“너희 아빠랑 헤어질 때 화도 나고 짜증 나는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자식은….”

알렉시스는 도현을 보고 도진을 돌아보았다.

“얘도 벌써 19살인데 너랑은 전혀 달라. 아직 어린애야.”

“뭐? 내가!? 왜! 나도 이제 어른이야!”

“어린애.”

알렉시스는 도진의 코를 꼬집었다. 그리고 도현에게 조용히 말했다.

“네가 잘살지 못한다면 그건 내 탓인 걸까,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

“하하.”

도현이 웃었다. 알렉시스도 웃었다.

“신문 보고 나도 웃었다. 역시 내 딸이구나 싶었어. 여기 와서 널 보고도 그렇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나도 신기하고. 네가 잘살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엄마라고 괜히 유난 떨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고.”

도현은 알렉시스의 말에 긴장이 풀리고 기분이 좋아졌다. 잘 몰랐는데 도현은 정확하게 엄마가 저렇게 생각해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도현이 부드럽게 웃자 알렉시스가 몇 번 더 도현의 얼굴을 다시 쓰다듬었다.

“역시 첫 아이는 신경 쓰이는 거구나. 날 닮았으면 특히….”

“그런가요?”

“그런가 봐.”

도현은 약간 주저하다가 엄마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엄마가 제 엄마라서 다행이라고 항상 생각했어요. 엄마가 어렸을 때 가르쳐줬던 것들이 절 지킬 수 있게 해줬어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미 그때 다 가르쳐주셨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알렉시스 라인하트가 아닌 다른 어머니를 두었더라면, 그래도 도현은 도현이니까 결국엔 잘 살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 지금보다 세상의 나쁜 것을 훨씬 더 많이 겪고 세상의 좋은 것은 더 적게 누렸을 것이다. 인생의 고난이 닥쳤을 때 남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어 팔려가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다. 그리고 구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족쇄와 감옥이 되어 남을 위한 인생만 살다가 끝났을지도.

알렉시스는 미소를 지었다.

“날 닮아서 어렸을 때부터 예뻤지. 잘못하면 남자 때문에 고생할 게 훤히 보였어. 그래도 역시 내 딸이야. 혼자서도 잘 컸어. 대견해.”

한 때, 불안할 땐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엄마와 함께 살았던 기간이 그렇지 않았던 기간보다 훨씬 적은데도 엄마의 유산은 도현의 모든 것에 남아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 그래서 도현은 엄마가 항상 그녀에게 올바른 걸 가르쳐주고 해답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12살까지의 도현 킬스버그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28살의 그녀에게 엄마, 알렉시스 라인하트는 그저 도현보다 조금 더 많은 시간을 살아왔던 사람으로 조언을 줄 수도 있고 도움도 줄 수 있겠지만 무엇이 올바른 해답인지 결정하는 것은 이제 도현 킬스버그 자기 자신이 된 것이다. 그런 게 어른이 된다는 것이었다.

“앞으로는 종종 보자.”

“아니이~ 같이 살자고!”

도진이 그렇게 말하며 끼어들었다. 알렉시스도 도현도 웃었다.

“뭐, 어디서 같이 살자고?”

도현이 약간 어이가 없어서 묻자 도진이 말했다.

“니 집이든 엄마 집이든! 다 같이 살자고!”

도진은 어렸을 때부터 알렉시스와 도현과 다 함께 살고 싶었다. 가족인데 왜 헤어져야 하는가. 서로를 이렇게 생각하고 위하는데 왜? 그래서 언젠가 자신이 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 반드시 다시 엄마와 도현과 같이 살 수 있게 만들 것이라 다짐했다.

“어떻게 그러니. 언니는 벌써 다 컸는데. 이렇게 식구들도 많고.”

알렉시스가 말했다. 도현도 아쉬운 듯이 도진을 보았다.

“어렸을 땐 언니라고 불렀으면서. 초등학교 들어가서 친구 잘못 만나가지고….”

“응? 아닌데? 내가 자체적으로 한 건데?”

응?! 그들의 말을 엿듣고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정확하게는 미르 킹쉴드와 다니엘 스톤하츠를 제외하고는 다들 도진 라인하트의 성별이 여자라는 것에 놀랐다.

“처남이 아니라 처제….”

맙소사. 송선호는 처음부터 말실수를 주야장천 한 것을 깨닫고 이마를 딱 짚었다. 에반도 좀 놀랐다. 로웰과 어시들도 놀랐다.

“키 크고 목소리 허스키해서 남자인 줄.”

“머리 스타일부터 전부 다 남자애들이 주로 하는 스타일이라 남잔 줄 알았어요.”

그러자 미르 킹쉴드가 이상하다는 듯이 그들을 보았다.

“엥? 뭔 소리야. 여자랑 남자는 냄새부터 다른데. 남자들은 아무리 빡빡 씻겨도 쉰 냄새 난다고. 여자들은 좋은 냄새 나는데.”

미르는 킁킁하고 로웰의 냄새를 맡다가 잠깐 옆에 있는 다니엘의 냄새를 맡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 다니엘은 그를 잠깐 벌레 보듯이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딱 봐도 여성이었습니다만.”

그동안 도진은 엄마와 언니에게 계속 졸랐다.

“그래도 같이 살자~ 좀 컸으면 어때! 같이 살면 좋지!”

“안 돼. 자주 만나면 되지. 서로에게 민폐야.”

“가족이 어떻게 서로 민폐야!”

“그런 경우도 있는 거야. 나나 네 언니나 프라이버시가 중요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엄마 나 싫어하는 거야? 그런 거야?”

도진이 분한 얼굴로 따졌다. 알렉시스는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어떻게 널 싫어해.”

도진은 엄마를 꽉 껴안았다. 그는 알렉시스보다도 컸다. 커다랗게 자란 자식이 자신보다도 작은 엄마의 품에 자꾸 파고들려고 하는 것이다. 알렉시스도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현과 눈이 마주치자 알렉시스가 대꾸했다.

“인생은 마음대로 할 수 있어도 자식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아악! 그래서 나 싫어하냐고!”

“아니라니까. 좋아해. 좋아해. 우리 도진이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남자를 향한 사랑이든 자식을 향한 사랑이든 자기 자신을 향하지 않는 사랑은 모두 사람을 취약하게 만든다. 자기 자신을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마저도, 남자 같은 건 아차 하는 순간에 버릴 수 있는 사람이더라도 자식은 또 다른 문제였다.

알렉시스는 자식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그 자식이 자신을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할 거라고도 생각 못 했다. 그리고 그건 전남편보다도 자신을 훨씬 휘둘렀다. 그를 데리러 메트로서울까지 몇 시간이나 날아왔다. 아직도 반항으로 자신이 사랑받는 것을 확인하려고 드는 도진을 보면 웃기면서도 귀엽다. 그가 자신의 가장 큰 족쇄라는 걸 진즉에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자식이란.

“진짜지?”

“그럼.”

“그럼 엄마 내 거지?”

도진이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렉시스가 그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했다.

“다 클 때까지는 어쩔 수 없지.”

“흥, 그럼 평생 안 클 거다.”

도진은 도현과 함께 아빠와 살 때도 도현에게 자주 어리광을 부렸다. 도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도진이는 원래 어리광쟁이죠.”

“그렇지.”

그들은 바깥에 화로를 피우고 앉았다. 알렉시스는 정원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스위스도 풍광이 수려하기로 유명했지만 도현의 취향대로 꾸민 저택과 정원도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도현의 두 손을 잡아서 보았다.

“이 반지들은 다 뭐니? 너 다이아 좋아하는구나?”

“네.”

이 반지들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도 전부 쳐다볼 정도로 대단했다. 송선호의 프러포즈 링과 다니엘의 바이올렛 스타.

“이건 바이올렛 스타 아니니? 맞지?”

이게 진짜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정말 유명한 반지이긴 한 모양이다. 엄마는 한눈에 알아보셨다.

“네.”

“이 목걸이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샤샤 다이아몬드예요.”

“아아, 맞아. 네가 샀니?”

“받았어요.”

도현은 자신의 손가락에 있는 반지들을 바라보았다. 알렉시스는 웃었다. 목걸이야 도현에게 딱 맞춘 듯이 잘 어울려 그것만 눈에 보인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손에 끼고 있는 이 반지들은 정말 독보적으로 눈에 띄었다.

“어지간히도 잘난 남자들인가 보네. 자기 거라고 이름표 붙여놓은 거야, 뭐야.”

“역시 그래 보이죠?”

“누가 줬어?”

“이건 저 남자가 줬고, 이건 저 남자가 줬어요.”

“아.”

도현과 알렉시스가 잠깐 저택의 안쪽을 돌아보니 미르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에반은 웃을 타이밍을 놓쳤으며 다니엘은 그 시선을 온전히 받으며 무뚝뚝하게 바라보았고 송선호는 긴장했다. 알렉시스는 잠깐 송선호를 더 보더니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저 남자는 젊었을 때 네 아빠 닮았어.”

“네? 진짜요? 전혀 아닌데요?”

도현은 깜짝 놀라 다시 송선호를 돌아보았다. 알렉시스는 다시금 도현의 다이아몬드들을 감상하며 여상하게 대꾸했다.

“원래 좋은 집안 출신 남자들은 다 비슷비슷해.”

“…….”

“그래도 반지는 진짜 예쁘다. 역시 큰 게 예쁘구나. 나도 하나 새로 살까?”

순백의 꽃 같은 프러포즈 링과 휘황찬란한 광채를 빛내는 바이올렛 스타를 한참 감상하던 알렉시스는 그제야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초록색 다이아몬드와 팔찌도 살펴보았다. 도현은 다이아몬드를 보고 있는 엄마의 짙은 속눈썹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엄마는 아빠랑 왜 결혼했어요?”

“응? 그 남자 젊었을 땐 멋졌잖아. 한 입으로 두말하는 남자도 아닌 것 같고 딴짓할 남자도 아니고 집안도 좋고 가정 교육도 잘 받았고 나 떠받들고 평생 살 것 같길래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 결혼했지. 아마 일만 안 어려워졌어도 진짜 그렇게 살았을 거야, 너희 아빠.”

알렉시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럼 왜 이혼했어요?”

“자기가 가진 게 없어지니 바로 무너지는 남자를 그럼 내가 거두고 살아야 하니?”

알렉시스는 여전히 도현의 반지를 만져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도현의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며 다이아몬드들의 광채를 살펴보았다.

“그때도 네 아빠가 나한테 청혼할 때만큼 당당했다면 나도 더 고민했을 거야. 그런 남자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난 네 아빠가 그것보다는 좀 더 근본이 확실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자기가 가진 게 나밖에 없다는 식으로 집착하는 걸 내가 왜 견뎌야 하니? 구질구질했어. 나도 네 아빠 좋아했고 너희들도 있으니까 걱정은 했어도 답은 처음부터 나와 있었어.”

도현도 알렉시스와 함께 다이아몬드를 보고 있었다. 역시 잠깐 보고 말 만한 물건이 아니다. 도현이 하고 있는 다이아몬드만 다 합쳐도 천몇백억 원이 그냥 넘는다. 도현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자신의 다이아몬드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 아빠는 지금도 엄마가 돌아오길 바라실지도 몰라요.”

“그래? 귀엽네.”

그녀는 역시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도현은 그녀의 말에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맞는 말이다.

“저 남자는 그럴 일은 없겠지. KP그룹 아들이라며? 나 그 회장님 예전에 한 번 만나본 적 있다? 진짜 대단한 양반이더라. 그렇겠지. 그 시절에 그런 제국을 만든 여잔데.”

“어머, 진짜요? 저도 아직 송선호 할머니는 뵌 적 없는데.”

“남자는 아버지를 봐야지. 저 남자 아버지는 어떠니?”

“자기랑 똑같아요. 아버지가 좀 더 화통해요. 와이프한테 선물 주는 수준이 이 다이아 수준도 훨씬 넘더라구요. 미술관에 크루즈에 회사까지 주던데요.”

“그래? 대단하네. 그런데 그런 거까지 받으면 빼도 박도 못하고 평생 같이 살아야 된다.”

“그렇겠죠? 선물은 받아도 돈은 받지 마라.”

“후후. 기억하고 있구나? 돈 우습게 보거나 돈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가까이하는 거 아니야.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이고 하찮은 인간들이야.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 미성숙한 사람들이지. 와, 그런데 진짜 이 다이아들은 물건이구나. 이런 건 얼마나 하니?”

“이건 마지막 경매에서 800억에 낙찰됐대요. 그게 몇십 년 전이니까 지금은….”

“세상에.”

알렉시스 라인하트는 예정보다 며칠 더 메트로서울에 있기로 했다. 도현은 그녀에게 자신이 VIP로 등록된 보석 브랜드로 데려가 다이아몬드를 고르는 걸 도와주기도 했고 메트로서울에서 유명한 레스토랑들만 골라서 식사를 하러 다녔다.

“음, 네가 이런 좋은 취미가 있는 줄 몰랐구나. 그래, 먹는 게 남는 거지.”

“역시 그렇죠? 한 끼라도 더 맛있는 걸 먹는 게 결국 제일 인생을 풍족하게 사는 것 같더라구요.”

“맞아. 인생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야.”

많은 사람들과 함께 미식을 즐기곤 했지만 엄마를 데리고 이런 데를 다니는 건 처음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다들 둘이, 도진까지 있으면 셋이 가족인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도진이 말한 게 이런 것일까? 마음이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엄마와 함께 있을 때 말이다. 이런 어머니를 가진 것이야말로 도현 킬스버그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크게 쥔 행운일지도 모른다.

‘나 엄마 진짜 많이 닮았구나.’

거울에 비친 엄마와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다시금 깨달았다. 비록 헤어져서, 떨어져 산 기간이 길었는데도 그녀는 자신이 태어나 처음 본, 자신과 같은 여자인 어머니를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따라 하고 있었다.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이가 들수록 더더욱 닮아가는 것이다.

[어머님은? 지금 해러드에 같이 간 거야? 언제 쇼핑 다 할 거 같아? 데리러 갈까?]

“전화 좀 그만해.”

[어? 내가 전화를 그렇게 많이 했나? 미안미안. 쇼핑 잘하고 내 카드 꼭 써! 나중에 전화해. 데리러 갈게. 사랑해~]

그리고 송선호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이 남자가 요새 진짜 일을 안 하나?”

도현은 디바이스를 보며 중얼거렸다. 알렉시스가 옆에서 웃었다.

“참나. 귀엽다, 이제.”

“엄마까지 귀여워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귀여워서 자꾸 봐준단 말이에요.”

“귀엽기는 걔가 제일 귀엽던데. 덩치 큰 애.”

“아, 미르. 미르는 진짜 귀엽죠. 남자는 원래 좀 귀여운 맛에 데리고 사는 건가 봐요?”

“걔는 데리고 살맛 나겠더라. 귀엽고 잘 웃고 보기도 좋고.”

그 남자는 진짜 뭐가 있는 게 틀림없다. 알렉시스는 도현의 집이 아니라 처음엔 호텔에 묵었지만 지금은 2층에 있는 게스트룸이 아니라 3층을 전부 다 쓰면서 지내고 있었다. 가끔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미르 킹쉴드가 도진뿐만 아니라 알렉시스에게도 친근하게 굴며 하하호호 웃고 있을 때가 있었다.

“맞아. 기운이 좋아요. 다들 좋아해요.”

알렉시스는 새로 나온 럭셔리 제품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자기 브랜드의 라인을 쭉 생각해보고 있었다.

“그 초록 눈은 옛날에도 만났던 남자라며?”

“네, 다시 만나고 있어요.”

“걔는 원래 좀 말수가 적니? 소극적인 성격인가.”

“평소엔 안 그런데, 가끔 그런 거 있어요. 왜, 너무 예뻐 가지고 인생이 피곤해서 사람들 꺼려 하는 사람 있잖아요. 진짜 이렇게 티 안 내는 앤데. 좀 이상하긴 해요. 평소엔 항상 웃고 다니거든요. 엄마 만난다고 좀 긴장된다고 하긴 했는데.”

“흐음. 차라리 떠벌리는 남자가 다루기는 쉽다. 속을 안 내비치는 남자는 여우보다 더 영악해.”

알렉시스가 그렇게 말하자 도현이 웃었다.

“영악한 걸로 치면 다니엘 따라갈 남자는 없어요.”

“그 긴 머리?”

“네.”

알렉시스는 드레스를 하나 들어 도현의 몸에 대보며 말했다.

“너 눈치 빠르고 똑똑한 남자 좋아하는구나?”

“어? 왜요, 갑자기?”

“그것도 적당해야 돼. 너무 똑똑한 남자는 결국엔 여자 머리 아프게 한다. 조심해라.”

“아….”

도현은 자신이 금발 미남은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가장 처음으로 제대로 된 연인이 된 것은 에반 블랙이었다. 미르 킹쉴드와 정을 쌓고 나서는 금발 미남의 맛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자신은 원래부터 금발 벽안의 미남이 취향이었을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했다.

미르 킹쉴드가 좋았다. 남자는 딱 저 정도가 좋다고 생각한다. 송선호도 사귀고 나서는 제법 귀엽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어쨌든 그도 속이 빤히 보이는 남자였다. 다른 몇몇 사람들은 남의 속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의 욕망에 휩쓸려 반사적으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 남의 속을 알게 되는 것은 그녀에게 더 큰 힘을 줄 뿐이었다.

하지만 에반 블랙이나 다니엘 스톤하츠를 그들보다 좀 더 인정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자신에게 대적이 된다고 생각하게 되어서였다. 그녀에게 무작정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남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처럼 그들도 도현에게 영향력을 끼쳤다. 송선호가 하는 식으로 무조건 직진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도현을 알았다. 자신을 알고 이해한다는 느낌이 결국 그들을 좀 더 보게 하는 매력이 되는 것이다.

‘다른 여자들도 남자만이 자신을 알아봐 주고 인정해준다는 생각에 넘어가서 노예처럼 사는데 말이야….’

이것도 그런 것일까? 물론 그런 애정 결핍이나 콤플렉스와는 달랐다. 원래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이해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저차원적인 것도 고차원적인 것도, 드러나는 양상은 비슷할 때가 많다. 하지만 사람이 누구냐, 어떤 의도냐, 무엇이 목적이냐에 따라 본질도 의미도 전혀 달라진다.

“아무리 똑똑한 여자라도 남자랑 결혼하면 애 낳고 애 키우면서 남편 자랑만 하고 살기도 하는데요, 뭐.”

“그 긴 머리도 그렇게 하겠대?”

“글쎄요. 물어보고 싶네요. 음, 진짜 그럴까?”

진짜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 그건 좀… 좋을지도? 도현은 잠깐 생각했다. 그와 같은 남자가 온전히 전업주부처럼 도현을 위해서, 도현의 수발을 들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꽤 근사한 트로피가 아닌가?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상당히 기분이 좋을지도. 어떻게?

‘안 하려고 할 텐데.’

그는 보이지 않는 야망을 가슴 속 깊이 숨기고 있는 남자였다, 아마도. 그런 남자를 꺾어서 집에 묶어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러면서도 영원히 지금처럼 도현에게 충성하도록. 원래 어리석은 남자란 자신의 어리석음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고 똑똑한 남자란 자신의 똑똑함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어쨌든 알렉시스 라인하트와 도진 라인하트는 그렇게 도현과 함께 오랜만의 가족 상봉을 즐기다 스위스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 가기 싫어.”

“학교 안 갈 거야?”

“학교는 갈 거지만. 도현이도 같이 가자.”

“자꾸 그러네.”

알렉시스와 도현은 작별의 포옹을 했다.

“연락하마. 그래도 1년에 한두 번은 보자.”

“네, 엄마. 오랜만에 봬서 너무 좋았어요.”

도진도 입을 삐죽거리고 있다가 도현을 냉큼 안았다.

“도현아~”

“도진아.”

도진은 도현의 얼굴을 울렁거리는 눈빛으로 보다가 뺨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엉덩이랑 가슴을 콱 쥐었다.

“어머, 도진아.”

그는 잠깐 뒤에 서 있는 키 크고 번드르르한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그는 검지와 중지로 자신의 눈을 한 번 가리키고 그들을 똑바로 가리켰다. 내 거다 이거고 지켜보겠다 이거다.

“난 자주 올 거다. 불시에 올 거다.”

도진이 말했다. 도현이 웃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추며 답했다.

“알았어. 언제든지 와, 내 동생. 사랑해.”

“흥. 그래야지.”

다른 식구들도 전부 라인하트 모녀를 전송했다.

“선생님, 우리 딸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아유, 아닙니다, 어머님. 만나서 정말 좋았습니다. 또 뵙겠습니다.”

알렉시스와 로웰은 서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어머님, 언제든 기탄없이 편하게 오십시오. 언제나 어머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송선호는 두 손으로 알렉시스의 손을 꼭 잡으며 열렬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알렉시스는 피식 웃었다.

“잘 있어요. 다음에 봐요.”

“네!”

미르 킹쉴드는 아예 알렉시스를 꽉 끌어안았다.

“또 와. 벌써 보고 싶을 거 같아.”

그는 알렉시스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도진이 발끈했다.

“야! 우리 엄마한테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잘 있어, 미르.”

알렉시스는 미르의 뺨에 입을 맞추며 그렇게 인사했다. 다니엘은 없었고 에반은 웃는 얼굴로 알렉시스와 악수를 했다.

“저도 회사가 스위스에 있습니다. 가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요. 또 봐요.”

알렉시스는 마지막으로 도현의 얼굴을 잠깐 보다가 비행차에 올라탔다.

“신기해요. 그때 헤어질 때도 뭔가 섭섭했는데 지금도 그렇네요.”

도현이 로웰에게 말했다.

“그렇죠. 가족이니까요. 나쁜 가족도 그런데 저렇게 좋은 어머니랑 동생이면 더 그렇죠.”

“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갔다. 로웰 리와 도현 킬스버그는 새 작품 구상에 골몰했고 다니엘 스톤하츠는 여전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며(공부하랴 미모 유지하랴 집에 오면 집안일까지 완벽하게 하랴) 송선호 또한 회사일 하랴 집안일 하랴 정신이 없었다. 미르 킹쉴드야 낮에는 운동하고 집에 오면 도현과 놀고먹으면서 행복하게 지냈고 에반도 가끔 일 때문에 외출할 때를 제외하면 집에서 도현과 함께했다. 토요일에는 다 같이 식사를 하며 일주일 동안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진 라인하트는 진짜 뜬금없이 가끔 와서 로웰과 친해지고 남자들의 속을 뒤집어 놓고 가곤 했다.

‘알아. 도현이는 결혼할 생각 정말 없다는 거.’

봄꽃이 활짝 피었다. 송선호는 본가에 들러 옷도 새로 갈아입고 도현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꽃집에 들러 새하얀 장미꽃을 한 다발 샀다. 그녀에게 다시 프러포즈를 제대로 하고 싶었다. 반지도 도현이 우연히 발견한 것이고 결혼하자는 말도 사실 정식으로 한 적이 없었다. 도현이 거절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정말 그녀는 지금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송선호는 그녀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하는 제대로 된 방법이 이것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여전히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많고 불만인 점도, 불안한 점도 많지만, 역시 그는 도현 킬스버그를 정말 사랑했다. 그의 인생에 여자란 그녀밖에 없었다. 그걸 알려주고 싶었다. 자신의 사랑을 전하고 싶었다.

그는 꽃다발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조금 긴장되었다.

“도현아.”

그녀는 3층 테라스에 나가 정원에 핀 봄꽃을 보며 글을 적고 있었다. 도현은 훤칠하게 차려입고 화려하고 큰 꽃다발을 들고 나타난 그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송선호?”

“도현 킬스버그.”

날씨가 화창했다. 정원에는 화려한 봄꽃이 피어 계절을 빛냈다. 그리고 약간 긴장한 얼굴을 한 그는 굉장히 멋있었다. 그는 도현의 앞으로 와서 바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사랑해, 도현아. 네가 결혼 생각 없다는 거 잘 알아. 그래도 정식으로, 제대로 프러포즈하고 싶었어. 나랑 결혼하자, 도현아. 평생 너를 위해서 살게.”

“…….”

도현은 송선호가 준 반지를 이미 끼고 있었다. 도현은 그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그의 꽃다발을 받았다. 꽃향기를 맡으며 말했다.

“나 결혼하기 싫다니까.”

“알아. 그래도 제대로 하고 싶었어. 술 먹고… 흠흠, 결혼하자고 한 걸 내 프러포즈라고 생각하면 그렇잖아.”

그가 고개를 좀 돌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에 도현이 웃었다.

“아, 맞아. 이 반지도 못 주고 그냥 들고 다니기만 했지, 너.”

“그건…! 나도 모르게 니가 먼저 발견한 거지. 난 제대로 주려고 다 생각해놨어.”

“진짜?”

“진짜야.”

송선호는 거짓말을 했다. 도현은 후후 웃으면서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꽃다발 고마워. 예쁘다.”

“응….”

그는 자신의 뺨에 입을 맞추는 도현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뺨이 상기되는 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마음이란 뭘까. 왜 도현 킬스버그일까? 그런 생각을 수없이 했다. 왜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지 원망하기도 하며 고통으로 불면의 밤을 보냈다. 그런데도 이렇게 함께 하니 행복하고 또 미워지기도 하고, 그리고 이렇게 다시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그녀와의 행복을 그저 상상하기만 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직접 겪은 그녀와의 사랑은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했다. 빠져들 때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빠져들고 마음을 다칠 때는 눈물부터 터질 정도로 그녀에게 휘둘렸다.

“내 인생에 여자는 너밖에 없어. 알지?”

“하하.”

“사랑해.”

“나도 사랑해.”

도현도 그를 좋아했다. 정이 들어버렸다. 둘은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같이 그녀의 안락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풍경을 감상했다. 사실 그들이야 이미 오래 사귄 연인, 아니, 젊은 부부로 보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는 그만큼 근본이 확실한 남자였고 도현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오랫동안 이 관계가 유지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평생? 그가 바뀌지 않는다면.

‘엄마도 괜히 아빠랑 결혼한 게 아니니까.’

그가 아빠랑 닮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었는데 엄마의 말을 듣고 몇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엄마의 말처럼 정말 좋은 집안의 남자란 비슷비슷한 모양이다. 어렸을 때의 아버지를 생각해보면 확실히 멋있었다. 세상 남자는 다 그런 줄 알 정도로 말이다. 송선호도 도현의 앞에서야 앞으로도 몇 번이고 꼴사납겠지만 아마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는 절대 안 그렇겠지.

‘비싼 남자라 이거니까.’

그리고 사실 진짜 비싼 남자는 따로 있었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토요일 밤이면 밤마다 당연하다는 듯이 도현의 선택을 받았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미래를 일부 걸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하게 만들 수 있고 기어코 그렇게 하는 남자였다.

“이게 뭐예요?”

다니엘은 넥타이를 풀고 있었다. 도현은 그가 그전에 건네준 봉투를 열어보았다. 초대장이 두 장 들어 있었다.

“아칸소에 가기 전에 크게 행사가 있습니다.”

“저번 학회랑은 다른 건가요?”

“이번엔 각 정부 인사까지 모여서 전 세계에 아칸소 프로젝트에 대해 대대적으로 발표하는 자리입니다. 그 뒤에 비공개 파티도 있을 예정입니다. 한 비서관이 도현 씨의 초청장까지 같이 주었습니다.”

“…….”

이게 사실 몇백억짜리 티켓일지도 모른다. 도현은 잠시 그것을 보고 있었다. 다니엘이 말했다.

“아마 블랙 씨도 올 겁니다.”

“네? 정말요?”

“제가 도현 씨의 곁을 계속 지키지 못할 수도 있으니 그 남자가 오는 게 나쁘지는 않겠더군요. 그도 학회에 꽤 돈을 투자했습니다.”

“결국 아는 사람들은 안다는 거구나.”

도현은 중얼거렸다. 그녀는 가운만 입은 채 자신에게 다가온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이 남자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가치를 최고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결국 알아내고 마는 남자였다. 그는 도현과 지내는 시간이 다른 남자들보다도 극도로 적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세웠다. 현재가 없으면 미래도 없다. 하지만 결국 미래가 현재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는 그 미래를 선점해버렸다.

“떨리십니까?”

“약간.”

“그런 설렘은 기분 좋지 않습니까?”

“맞아요.”

다니엘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의 미소는 이제 아주 자연스럽고 아름다웠다. 그는 도현의 허리를 껴안았다.

“저를 똑바로 보십시오.”

“보고 있어요.”

“당신의 앞에 있는 남자는 어떤 남자입니까?”

그가 물었다.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지금 나한테 깔릴 남자.”

도현은 그를 침대로 밀어 쓰러뜨렸다. 다니엘과의 관계는 점점 갈수록 더 스릴 있고 재미있게 느껴지고 있었다. 엄마의 말처럼 결국엔 머리가 아파질까? 하지만 아직까진 즐거운 현재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도현은 자신이 언제 어떤 상황이더라도 고작 남자 하나를 버리는 데 그렇게 애를 먹을 것 같진 않았다.

‘트로피 허스밴드라.’

도현은 다니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즐겁게 생각했다. 그는 다음 날 점심까지 같이 있고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봄이 되자 미르 킹쉴드는 발정 난 고양이처럼 도현에게 자주 들이댔다. 데이트도 잔뜩 다니고 파티도 다니고 쇼핑도 다니고 선물도 잔뜩 주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걱정 없이 즐거웠다.

“예뻐.”

저택의 수영장에 적당히 따뜻한 물을 채워놓고 난로를 피운 채 봄꽃을 보며 수영을 잔뜩 하고 사진도 잔뜩 찍었다. 아름다운 집과 정원, 넓고 깨끗한 수영장, 맛있는 음식과 잘생긴 미남이 있으니 세상에 부러울 게 뭐가 더 있으랴. 도현은 미르 킹쉴드의 태평양 같은 가슴을 만지며 그렇게 말했다. 미르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네가 더 예뻐.”

“진짜요?”

“응.”

미르는 장난스러운 소리를 내며 도현의 입술에 쪽쪽 입을 맞췄다. 도현은 그의 애무에 간지러움을 느껴 아이처럼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미르는 옆으로 몸을 기울여 도현을 끌어안고 햇살같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입을 계속 맞췄다.

“사랑해. 너무 좋아.”

아름다운 햇살, 그 햇살보다도 밝고 아름다운 남자. 도현은 햇살을 등진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젊음, 여름, 활기, 이런 걸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이 남자가 생각날 것만 같다. 미르 킹쉴드는 여전히 남자들 중에서 독보적으로 도현의 시간을 차지하는 남자였다. 여자에게 세상의 시름도 고민도 잊을 수 있게 해주는 남자란 얼마나 기특한가. 시간이 가도 정말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이 남자와 함께 하는 이 즐거움이. 영원히.

“사랑해요.”

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미르 킹쉴드의 입술에 쪽 하고 답으로 입을 맞췄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시간만 나면 그렇게 닭살 커플처럼 딱 달라붙어 있었다.

“…….”

그리고 도현은 에반의 방에 갔다가 그가 짐을 싸고 있는 것을 보고 약간 놀랐다. 그는 자신의 넥타이를 캐리어에 넣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찾아온 도현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스위스에 돌아갈 일이 생겨서. 짐 챙기고 얘기하러 가려고 했는데.”

그는 셔츠 차림이었다. 넥타이도 양복도 침대 위에 던져져 있었다. 그는 새로 갈아입을 양복을 꺼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급해?”

“조금 일이…. 투자한 회사 하나에 문제가 생겨서.”

“정말? 괜찮은 거야?”

“난 괜찮지.”

에반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금방 옷을 다시 멀끔하게 차려입었다. 꿀 같은 금발, 짙은 속눈썹, 비취색 눈동자, 붉은 입술. 군청색의 명품 슈트를 입은 그는 굉장히 아름다웠다. 그는 간단하게 챙긴 캐리어를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도 현관까지 그를 배웅했다. 현관 앞에서 도현은 그의 옷깃을 한 번 더 바로잡았다.

“언제 와?”

“가봐야 알 것 같아.”

그가 말했다. 도현은 잠깐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반도 주차장에서 차가 자동으로 나오는 걸 잠깐 보다가 도현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도현은 밝은 색의 짙은 속눈썹에 휩싸인 그의 비취색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또 헤어지는 건가?”

에반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확하게 말하지 않아도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프라하에서 헤어질 때를 언급하고 있었다. 그는 사랑한다고 말했다. 도현은 그를 떠났다. 그들은 언제든 다시 만날 것처럼 헤어졌다. 이번엔 그가 도현을 두고 갑작스레 어딘가로 가버리는 것이다. 자신과 그는 서로를 거울 보듯이 보더라도, 서로가 그렇게나 특별해도, 역시나 언제든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사랑인 걸까?

“헤어지고 싶어?”

에반이 물었다.

“아니.”

도현이 대답했다.

“다시 돌아올게.”

에반은 도현의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여긴 너와 내가 지은 집이야. 여길 같이 지으면서 난… 나도 모르게 네게 내 미래를 걸고 있었어. 그런 게 나한텐 너무 이상해서… 그래서 그땐 도망쳤어. 바보 같지?”

“나도야.”

둘은 서로의 허리를 안고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것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처럼, 이 세상에 단둘만이 있는 것처럼. 에반은 그녀와 코를 마주치며 미소를 지었다.

“사랑해. 언제까지고, 영원히 너랑 함께 있고 싶어.”

“흐응, 겁쟁이가 요즘은 정말 솔직하단 말이야.”

도현도 미소를 지으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에반이 소리를 내서 웃었다.

“맞아. 난 겁쟁이지.”

그는 도현의 뺨을 만졌다. 그의 손가락에서 다이아몬드 결혼반지가 반짝거렸다.

“그래서 더 큰 힘을 원해. 여기서 만족할 수가 없어.”

“그래서 가야 해?”

“응.”

둘은 눈을 마주친 채 천천히 입을 맞추며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세상 둘도 없는 애틋한 연인이었다.

“예전에는 끝이 보이지가 않았는데 지금은 좀 다른 것 같아…. 도현아.”

“응?”

“나 아이 가지고 싶어. 너랑 내 아이.”

“…응?!”

에반이 세상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도현은 깜짝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그는 유례없이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너랑 내 아이면 분명히… 정말 무척 사랑스러울 거야. 보는 것만으로 행복할 정도로.”

“…….”

“네가 싫다면 앞으로 다시는 말하지 않을게. 하지만… 조금은 생각해줘.”

“…나 임신하기 싫은데.”

“응. 나도 네가 아프거나 위험한 건 싫어. 한다면 좋은 대리모를 구하자.”

“애는 누가 키워?”

“함께 하면 좋겠지만…. 걱정하지 마. 네가 싫어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그런 건 다 내가 할게.”

그는 전에 없이 긴장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다가 떨리는 한숨을 한 번 푹 쉬었다.

“지금 당장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그냥 한번 생각만 해달라고….”

그는 눈을 감은 채 그렇게 말했다.

“널 닮은 내 아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막… 가슴이 뛰어서.”

도현은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진짜 그의 가슴이 빠르게 쿵쿵 뛰고 있었다. 에반은 자신의 가슴 위에 있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아이는 우리의 보물이 될 거야. 분명히, 분명히 정말 사랑스러울 거야.”

그가 이렇게 확정적으로 말하는 건 처음 들었다. 그것도 미래에 대해서. 도현은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그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갔다 올게.”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도현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잠깐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다가 떠났다. 도현은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언젠가처럼 기분이 무척이나 복잡해졌다.

“하….”

그의 차가 대문을 빠져나갈 때까지도 거기에 서 있던 도현은 의미를 모를 한숨을 잠깐 쉬었다.

‘애라고?’

애 타령이야 송선호도 한때 줄기차게 했지만 그는 오히려 아이가 목적이라기보단 도현과 함께하기 위하여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뻔히 보였다. 아이가 있으면 자기를 떠나지 못할 거라는, 뭐, 이제는 도현을 조금은 알게 되었을 테니 못 하진 않더라도 힘들 거라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에반은 정말로 진지했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은 초조하고 불안해하면서도, 기대에 차있었다. 그런 그는 처음 보았다. 그는 언제나 여유를 뽐내는 남자가 아니었던가.

에반의 말은 생각보다도 도현을 심란하게 했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뭔가 미지의 세계를 맞닥뜨린 느낌이었다.

‘나랑 에반의 애라면 당연히 예쁘겠지….’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과 그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는다는 건 어쩐지 이상하기만 했다. 물론 유부남이니 뭐니 농담도 하고 반지도 서로 주고받았지만 그렇다고 결혼이고 뭐고….

도현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를 에반의 핵폭탄 같은 발언에 한동안 시간이 나면 그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런 건 도현도 처음이었다. 도현은 시간을 확인하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도현이니?]

“엄마, 잘 지내셨어요?”

[응, 잘 지냈지. 너도 잘 지냈니?]

“네. 엄마, 지금 바쁘세요?”

[으응, 아니. 왜?]

“엄마는 자식이 없을 때가 좋았어요, 있을 때가 좋았어요?”

도현은 단도직입적으로 알렉시스에게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알렉시스가 웃었다.

[네 남자 중에 누가 애 가지자니? 가만있어 봐. 그 남자지? 송 회장 손자.]

“아뇨…. 걔는 오히려 결혼부터 하고 애는 한참 나중에 가지거나 없어도 좋다고 했는데….”

[응? 그럼 누구야?]

“일단 그전에… 어때요, 엄마? 있는 게 좋았어요, 없는 게 좋았어요? 솔직하게 말해봐요.”

[으음….]

알렉시스는 잠깐 생각에 잠겨 바로 대꾸하지 못했다.

[그렇게 천편일률적으로 말하기 힘들어…. 네 아빠랑 결혼하고 너희들 태어나고 나서는 정말 좋았어. 그 남자 능력도 있었고 가정적이었고 아이를 키운다고 힘들어야 할 경제적 상황도 아니었잖니, 우리가. 우리도 너 가질 때는 모험이긴 했지만. 난 이상하게 아이는 꼭 가지고 싶었거든. 그때는 정말 부족한 게 없었지.]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이혼 때는 확실히 자식들이 있기 때문에 고민도 걱정도 몇 배나 늘었고 네 아빠가 도진이 아픈 것도 나한테 숨기고 그러고 있었다는 걸 알았을 땐 진짜 머리끝까지 화가 났는데…. 그래도 난 너희들, 딸들 가지고 있는 게 좋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모든 자식들이 너희 같지는 않으니까. 물론 도진이는 가끔… 자주 귀찮게 하긴 하지만. 자식이란 거 두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귀여워.]

그리고 알렉시스는 덧붙였다.

[뭐, 없어도 사는 데 딱히 크게 문제는 없었을 거야.]

도현은 그녀의 말에 선뜻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자식을 가지면 안 되는 사람들이 자식을 가지면 자식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처럼 보여. 결혼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 결혼하면 결혼 때문에 불행한 것처럼 보이듯이. 네 조건에 자식을 가진다고 경제적인 문제로 걱정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요즘 같은 시대에 직접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 않니? 유전병 같은 것도 다 피해서 낳을 수도 있고.]

알렉시스가 말했다.

[물론 그 전에 네 인생에 아이가 있으면 좋겠냐, 안 좋겠냐는 문제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자식 때문에 얻는 기쁨도 크긴 했어. 하지만 다 클 때까진 확실히 그거 부모 책임이다, 자식.]

알렉시스의 말에 도진 라인하트가 바로 떠올랐다. 그녀의 말에 애정과 다소의 부담감도 같이 느껴졌다.

“애는 좋아해요. 보면 귀엽잖아요. 나도 나중에 딸이 잔뜩 있으면 어떨까, 라는 생각도 몇 번 지나가듯이 한 적은 있지만 직접 가지는 건 다른 문제라서….”

[그래서 누군데?]

“에반이요….”

[걔? 의외네? 자식 같은 거 절대 안 원할 스타일로 보였는데?]

“역시 그렇죠? 저도 깜짝 놀랐어요….”

알렉시스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중얼거렸다.

[네가 아이를 가지면 난… 할머니가 되는 건가?]

“그렇죠?”

[그것도 좀 기분이 이상하네.]

“그렇죠?”

알렉시스와의 통화를 끝낸 도현은 마침 봄 햇살 아래에서 어시들과 요가 매트를 깔고 있는 로웰을 발견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도현도 자신의 요가 매트를 들고 잔디밭으로 나갔다.

“어머님이랑 통화 중 아니었어요?”

“네, 오랜만에 잠깐… 긴 얘기는 아니었어요. 선생님, 선생님은 자식이 있으면 좋을 것 같으세요?”

도현은 매트를 깔며 곧바로 물었다. 로웰은 잠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음, 글쎄요…. 아기는 그런 거 아닌가요? 귀여운 아기는 귀엽고 안 귀여운 아기는 안 귀엽고.”

“그렇죠….”

도현은 신재인과 윤지호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가 다시 도현을 보았다.

“애들 좋아해요. 애들 귀여워요.”

신재인이 말했다.

“아, 애들 극혐이에요. 그것들 완전 괴물 아니에요? 법이 보호해주는 악마들?”

윤지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흐음…. 도현은 더더욱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로웰은 매트에 앉아 팔 근육부터 풀면서 말했다.

“그래도 난 나랑 우리 작가님 애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좋아할 것 같아요.”

“어… 진짜요?”

“뭐, 요즘 같은 세상에. 아무 생각 없이 남들 따라 하는 게 문제인 거지. 내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자식을 안 가지는 것도 어떻게 보면 손해일지도 몰라요. 우리 애라면 정말 귀여울 것 같지 않아요?”

“정말….”

도현은 로웰과 자신의 아이를 생각해보자 곧바로 꽤 즐거운 광경이 그려졌다. 신나는 모험을 함께 하는 모녀들? 그녀와 자신의 자식이라면 분명히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할 거라는 이상한 확신까지 들었다.

“역시 결혼은 선생님이랑….”

도현은 로웰을 빤히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로웰은 킥킥 웃었다.

“진짜 할까요? 사실 우리는 도장 찍는 것밖에 안 남았잖아요.”

“그건 그래요.”

도현도 웃었다.

“애가 있으면 좋을 것도 같고 힘들 것도 같고.”

“왜요?”

“애들 어릴 때는 귀엽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게 무서워요. 있으면 분명히 사랑할 거예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제 인생이 저당 잡히는 건 아닐까 생각하면 싫달까. 태어나기 전까진 완전히 미지의 존재인데 태어나고 나면 일단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렇죠. 사실 자연 상태라면 어미의 마음에 안 드는 새끼는 버려야 하는 거지만. 그러니까 디자인 아기가 있잖아요.”

“맞아요…. 솔직히 저는 아픈 아이 키울 자신은 없어요. 도진이 때도 힘들었어요.”

“블랙 씨야 자기가 다 알아서 하겠다는데, 뭐. 아기 재롱만 보고 나중엔 권위만 챙겨요. 엄마라는 거 한 사람의 인생에선 엄청 큰 존재잖아요.”

“하찮아지지만 않다면 그렇죠.”

“작가님 어머님을 봐요. 얼마나 멋있어요.”

“우리 엄마는 진짜 대단하긴 하지만.”

“엄마만큼 할 자신 없어요?”

“한다면 하겠죠. 그게 내 인생과 반대로 갈까 봐 걱정되는 거지.”

그렇게 말하고 도현은 로웰을 보았다.

“선생님은 아이 가지고 싶은가 봐요.”

“귀여운 아기는 귀여운 거고 안 귀여운 아기는 안 귀여운 건데 나랑 작가님 애면 분명히 그냥 귀엽다니까요. 그러면 가지고 싶어요.”

“…….”

“나랑 작가님 유전자잖아요? 엄청난 애가 나올지도요? 킥킥.”

사실 아이를 가지는 사람들은 대책 없이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근거가 있으면 그것은 자신감이고 근거가 없다면 생각이 없는 것이다. 말은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사람이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다. 똑같은 말도 누가 하느냐로 의미가 완전히 바뀐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남을 따라 하는 게 바보 같은 짓이고 아무 생각 없이 누군가의 말을 따라가는 게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만든다. 말은 아무 의미도 없다. 누구냐가 중요하다.

“하긴….”

도현은 또다시 로웰과 자신의 아이를 떠올려 보았다. 어떨까? 어떻게 생겼을까? 성격은 어떨까? 누굴 더 닮을까? 아예 안 닮을까? 도현이야 알렉시스를 똑 닮았다지만 도진은 엄마도 아빠도 그다지 안 닮은 느낌이다. 알렉시스 라인하트가 그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면서도 그를 다소 버거워할 정도다. 그런 자식이 태어나면?

‘즐겁겠지…. 도진이는 귀엽지. 내 동생.’

“으음…. 에반, 진짜….”

도현은 끙하고 고민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들다니.

“지금 당장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왜 그렇게 고민해요?”

“모르겠어요…. 예전에 막연하게 나중에 딸들이 많으면 좋겠다, 생각해본 적이 있어서 그런가. 생각해보니까 엄마도 29살에 날 낳았고…. 내년….”

“하여튼 그 남자는 작가님이랑 타이밍 하나는 기똥차다니까요. 그런 게 인연인 건가.”

누구는 앞서 출발해도 타이밍이란 타이밍은 다 놓치는데~ 로웰은 송선호를 떠올리며 킥킥거렸다.

“가지고 싶은 사람은 가지면 되고 가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안 가지면 될 문제예요. 자기 인생인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지.”

“으음~~”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잘 생각해봐요. 어떻게 살고 싶은지, 뭘 하고 살 건지. 작가님 인생에서 중요한 게 뭐예요? 그게 아이라는 것과 병행이 가능한 건지, 아닌지부터 봐야죠. 득인지, 실인지. 작가님은 완벽한 아기라면 가지고 싶지만 그렇지 않다면 안 가지고 싶다는 마음인 것 같아요.”

로웰의 말에 도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지도.”

도현은 그대로 자세를 유지한 채 잠깐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로웰을 보며 상큼하게 웃었다.

“어쨌든 지금 할 일은 아니네요. 10년쯤 뒤에 다시 고민해봐야겠어요.”

“그래요. 그거면 됐죠.”

“앞으로 인생 또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겠구요. 전 아직 엄마 따라잡으려면 멀었나 봐요. 엄마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이 흔들린 적이 없다는데.”

도현이 말했다.

“가끔은 믿음 그 자체가 중요한 것 같죠?”

로웰이 말했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전 어렸을 때 집안의 등락이 있었던 데다가 커서도 빚 때문에 한 번 고생을 하니 좀….”

“그런 상황에서도 결국 다 잘 빠져나왔으니까 스스로를 믿을 수도 있는 거예요.”

“그건 그렇죠….”

실패는 자신을 믿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건 아니다. 불안해야만 실패를 전부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불안이 모든 것을 실패로 만들 수도 있다. 어떤 시련들은 어떻게 대비를 하더라도 닥쳐온다. 자신을 믿고 그 모든 역경을 다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것,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내가 뭘 원하고 싫어하는지 내 마음속을 잘 들여다보는 것, 그래서 나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그런 마음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게 먼저 이루어졌을 때 진정으로 타인도 애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운이 좋을 수도 있다. 운이 나쁠 수도 있다. 어떤 것은 전혀 내가 통제할 수 없다. 그런 것은 그런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한동안, 혹은 그것보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힐 수도 있다. 어떤 것은 영원히 마음속에 그림자로 남아 나의 일부가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좀 더 나은 선택지는 있다. 적어도 그것을 항상 믿고 있어야 선택의 기로에서 나에게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잘할 수 있다고 믿어야 잘할 수 있게 될 가능성이라도 생기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이 나를 포기하더라도, 나만은 나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정말, 선생님이 없었으면 전 어떻게 됐을까요?”

도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가 없었어도 작가님은 분명히 멋지게 다시 일어섰을 거예요.”

로웰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러블리 빗치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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