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미르 킹쉴드, 이래서 과거 있는 남자는
“미르, 오늘도 빨리 올 거예요?”
“응, 당연. 벌써 보고 싶어.”
멋진 저택의 현관 앞에서 100m 밖에서도 미남이다! 하고 감탄할 만한 크고 번쩍번쩍한 남자와 아름답고 늘씬한 여자가 입을 맞추는 걸 멈추지 못하며 배웅을 하고 있었다.
“오늘도 열심히 잘해요.”
“응, 알았어.”
그리고 둘은 꼭 끌어안았다. 그는 여자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쥐었다. 여자도 남자의 엉덩이를 꽉 한 번 쥐고 놓았다. 둘은 다시 얼굴을 보고 뭐가 좋은지 활짝 웃고는 마지막까지 뽀뽀를 하면서 남자는 차를 탔다.
“갔다 와요, 미르~”
2층에서도 세 명의 여자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인사를 했다. 그는 그들에게도 손 키스를 날렸다. 미르 킹쉴드, 오늘도 아주 예쁜 그 남자의 활기찬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직접 운전을 했다. 이제 날이 제법 따뜻했다. 창문을 열고 거기에 왼팔을 얹은 채 운전을 하다 보면 언제나 수많은 여자들과 눈이 마주쳤다. 신호등 앞에 서서 문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떤 사람이 뚫어져라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는 평소처럼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잘생긴 건 알아가지고.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리고 괴상한 얼굴로 손을 마주 흔들고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계속 쳐다보다가 신호가 바뀌기 전에 얼른 뛰어갔다. 신호가 바뀌자 그는 차를 출발시켰다.
3월 중순부터 2129 엘 드라카 우승을 목표로 다시금 훈련이 재개되었다. 세계 각지로 휴가를 다녀온 선수들이 전부 돌아와 정기훈련에 들어갔다. 먹고 움직이고 자고 먹고 움직이고 자고. 선수들은 자신의 몸을 최상으로 단련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강인한 육체와 젊음. 그들 모두는 어디에서든 살아남을 수 있는 남자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삶에는 아~무런 걱정이 없게 되는 것이다. 살아남기에 충분히 강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오전 체력 훈련을 끝내고 점심을 먹고 2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뒤 다들 다시 일어나서 체력 훈련을 재개했다. 일주일은 오로지 체력 훈련과 근력 운동뿐이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급작스럽게 강도 높은 훈련을 시작하는 것은 몸에 무리를 줄 수 있었다.
“야, 그래도 얼굴색 멀쩡한 건 너랑 제수스밖에 없다.”
시 코치가 미르의 스트레칭을 도와주며 그렇게 말했다. 그는 선수들을 한 번 쭉 둘러보았다.
“다들 쉬는 동안 약을 얼마나 한 거야, 도대체. 정신 나간 것들.”
아무리 신체 능력이 남다른 그들이라도 향정신성 약품 오남용이 누적되면 당연히 안색부터 맛이 간다. 게다가 해독 능력도 남다르다 보니 뭐든 양을 많이 했다. 몇십 도짜리 술을 희석도 하지 않고 병나발로 부는 것들이다.
“시 코치도 예전에 다 했을 거 아냐?”
미르는 아주 유연하게 천천히 몸을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시 코치를 보았다. 시 코치는 쓰읍 하며 숨을 들이켰다.
“뭐 이쪽 구르면서 안 해본 애들이 어디 있겠냐만, 그래도 정도가 있지. 약 하다 죽는 놈들이 더 많은 거 모르냐? 특히 로드리게스는….”
“로드리게스?”
둘은 동시에 말했다. 미르는 몸을 아래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 새끼는 왜 그러지?”
미르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도 이런 새끼, 저런 새끼 다 봤지만 그 새끼는 정말 획기적으로 다양한 약을 섞은 강렬한 칵테일을 하곤 했다. 그런 건 누가 해도 골로 가기 십상이다. 시 코치는 자신의 온몸을 기대어 미르의 몸을 반으로 접어주고 있었다. 몸을 최대한 쭉 폈다.
“왜 그러겠냐.”
“응? 왜? 이유가 있는 거야?”
“원래 좆만 한 새끼들이 약 제일 많이 하는 거야. 모르냐.”
그의 말에 미르는 잠깐 기억을 되새겼다.
“어? 그렇네?”
“그렇다니까.”
“아, 못생긴 거 진짜 쓸데없네.”
뜬금없이 못생겼다고 까인 미하엘 로드리게스는 컨디션 난조로 골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TFC 세계랭킹 3위,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였다. 부동의 1위였던 다니엘 스톤하츠가 은퇴하고 작년에 엄청난 기량을 보이며 우승한 서던라이온의 부상으로 올해 랭킹은 상당히 변경될 예정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의 눈 밑이 시커멨다.
“그래도 로드리게스 머리도 좋고 아는 것도 많은데.”
“그러니까 더 그렇지.”
“아.”
미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시 코치와 함께 미하엘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언제나 소드마스터가 드글드글한 세계에서 살아왔다. 그들에게 신체적 열등함이란 상당히 생소한 개념이었다. TFC에서 미하엘 같은 단신은 마도사들을 다 합쳐도 미하엘 본인과 신태호 정도뿐이었다.
“너 신태호랑 좀 친하지 않냐? 휴가도 같이 갔다며? 너 다니엘 스톤하츠랑 같이 살았지? 걔 사이코패스라더니 자기 클럽 애들이랑은 친한가 보다?”
시 코치도 비슷한 연계로 신태호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몰라. 그 좆만이랑은 좀 친해졌지. 형이라고 부르던데.”
“그 좆만이 드디어 좀 크는 모양이던데? 일주일 전에 185 찍었다더라. 이스트드래곤에서 훈련도 안 시키고 그 새끼 몸 만들려고 혈안이다.”
“진짜? 몇 달 전에 봤을 땐 그냥 좆만 했는데?”
“이스트드래곤도 발등에 불 떨어진 거지. 작년에 서던라이온한테 거하게 한 방 맞았지 않냐. 건방지게 전 경기를 30분 이내에 이기겠다고 뒤도 안 보고 밀어붙이다가 역공에 당해서 우승 날리고. 수비는 신태호만 믿고 맡긴 거 아냐, 그거. 아니, 수비까지 갈 일도 없다고 생각한 거 아냐, 그거?”
시 코치가 다소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니엘 스톤하츠 그건 한창인 주제에 갑자기 뭔 은퇴냐? 게다가 작년에 루카스 죽었지, 이스트드래곤도 이제 머리 빠개지는 거지. 꼴좋다. 이제 크면서 190이나 찍겠냐?”
“이제 우리도 그거, 오라 쓰는 거 연습할 거라며?”
“어, 감독님이 서던라이온 훈련 정보 좀 입수한 모양이더라고. 코치진이 먼저 해봤는데 진짜 토 나온다.”
“되긴 돼?”
미르는 휴가를 가서 신태호가 말하는 대로 몇 번 해본 적이 있었다. 불편하고 어색한 느낌 때문에 금세 원래 하던 대로 하게 되어 잘 안 되었다.
“말로는 뭔 말인지 알겠는데…. 나중에 해보면 알 거다. 배 엄청 고파.”
“아.”
어쨌든 훈련 중에야 구단에서 먹여주지 챙겨주지, 다들 1~2주면 금세 얼굴이 피었다. 그런 몸뚱어리였기 때문이다. 물론 부작용으로 밥만 앞에 들이대면 다들 굶주린 짐승보다도 더 야만스럽게 먹어 치웠다.
“배고파. 고기 먹자.”
샤샤 부퍼가 졸리고 배고픈 얼굴로 가람 리한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징징거렸다. 훈련이 끝나고 다들 우르르 자주 가던 고깃집으로 향했다. 저번의 일 이후로 싹 리모델링을 새로 한 고깃집 사장은 선수들을 보자마자 난색을 표했다. 그녀는 양팔을 엑스자로 만들며 고개를 저었다.
“저거 보이시죠?”
사장은 <소드마스터 출입 금지>라고 적힌 스티커를 가리켰다. 선수들이 아우성을 쳤다.
“아, 왜! 차별이야!”
“네, 네. 가세요. 다른 데도 고깃집 많아요.”
“우리가 돈을 안 내, 뭘 안 해? 닥치고 고기만 먹는데!”
“뭘 닥치고 고기만 먹어요? 남의 영업장을 박살내 놓고. 염치가 있어야지!”
“우와! 그거 우리가 그런 거 아닌데!”
“아, 가세요. 안 가면 경찰 불러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들이 끝까지 그녀를 설득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쩝. 그들은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다른 고깃집을 찾아갔다. 그 근처에 있는 고깃집 두 곳은 똑같이 그들에겐 장사를 안 한다고 했다.
“아니, 진짜 그건 그때 그 여자가 그런 건데!”
조나단 훅이 그렇게 투덜거렸다. 물론 그들도 남의 영업장을 본의 아니게(?) 때려 부순 적은 많았지만 그래도 저번에 그건 그들이 때려 부순 게 아니었다. 그때 그 정도로 때려 부수려면 그들도 꽤 노력해야 하는 정도란 말이다.
“그 여자가 마도사라 다 날라간 거지 우리가 그런 거 아닌데!”
보통 여자라면 찍소리도 못하고 그들에게 당하니까 말이다. 어쨌든 그들은 엄청 억울했다. 하여튼 게헨-세나에서 가장 가까운 식당들이 모인 이곳은 당분간 그들이 우르르 몰려다니기 좋은 곳은 아니게 된 모양이었다. 주린 배를 붙잡고 꽤나 먼 곳까지 걸어가야 했다. 돈이 있는데도 뭘 못 먹다니. 물론 고기를 앞둔 그들은 쫓겨난 일은 까마득히 다 잊어버렸다. 안 좋은 일을 금방 잊을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축복이다.
“아~ 잘 먹었다.”
“잠 온다~”
다들 배를 두드리며 늘어졌다. 그때쯤 누구에게 전화가 왔다. 미하엘 로드리게스의 전화였다.
[야, 미르 킹쉴드 바꿔라. 제수스도 있냐?]
“있는데요.”
미하엘은 그렇게 말하며 미르에게 자기 디바이스를 넘겼다.
“응? 왜?”
미르는 미하엘에게 전화를 넘겨받으며 그렇게 물었다. 미하엘은 ‘나한테 묻지 마라~’하는 얼굴로 고기를 몇 점 더 먹었다.
“왜요?”
미르가 전화를 받으며 감독에게 물었다.
[전화를 왜 안 받아? 너 아직 구단 근처지? 제수스랑 같이 내 방으로 와라. 당장.]
“왜요?”
[야 이 씨…! 토 달지 말고 오라면 재깍재깍 튀어와!]
그가 윽박질렀다. 미르는 욕을 하며 디바이스에 귀를 멀찍이 뗐다. 미르는 제수스를 보았다.
“오라는데?”
“왜?”
“몰라.”
제수스도 별생각 없는 얼굴이었다. 반쯤은 거기서 매니저를 불러 집으로 돌아갔고 반쯤은 게헨-세나로 함께 걸어갔다. 소화도 시킬 겸 말이다.
미르 킹쉴드와 제수스 강은 감독실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미르가 감독실 문에 노크를 했다. 그러자 잠시 뒤 문이 살짝 열렸다. 스튜어트 감독이었다. 그는 잠깐 미르와 제수스 뒤를 살펴보고는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왜 그래요?”
“쉿. 조용히 해.”
제수스가 이상하게 쳐다보며 묻자 스튜어트가 대꾸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게헨-세나에 상주하는 50대 의사가 있었다. 둘이 안으로 들어오자 감독은 갑자기 둘의 등짝을 엄청 세게 쳤다.
“악! 왜 때려요?”
미르가 등을 손으로 마구 비비며 그렇게 외쳤다. 그러자 스튜어트도 깜짝 놀라 자기 입 앞에 검지를 세워 쉿쉿 소리를 냈다. 으앙~ 하는 큰 울음소리가 터졌다. 미르와 제수스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감독의 책상 위에는 바구니가 한 개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소리였다.
“감독님 새끼 쳤어요?”
미르가 등을 문지르며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의사를 힐끗 보았다.
“둘이?”
“미쳤냐?”
의사가 가운뎃손가락을 세웠다.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난 갑니다, 감독님.”
“가, 가긴 어딜 가! 우리 보고 저걸 어쩌라고!”
“그럼 나보곤 어쩌라고.”
감독을 두 남자를 보며 타박했다.
“니들 이거 어쩔 거야!”
그는 목소리를 낮춰 소리쳤다. 미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이래? 그는 몹시 당황한 것 같았다. 제수스는 호기심을 가지며 감독의 책상으로 갔다가 두 아기의 얼굴을 보고 딱 굳어버렸다. 아기 재롱이라도 보려다가 표정이 확 굳더니 아기 하나와 미르 킹쉴드를 번갈아 보았다.
“야야야야….”
그리고 다른 아기를 보고 입까지 떡 벌렸다. 의사가 혀를 쯧쯧 찼다.
“20개월 정도 전에 스와핑했냐? 애 엄마가 누구야?”
“엉? 뭔 말이야?”
미르는 제수스의 옆으로 갔다. 아기는 둘이었다. 10개월 정도 되었고 잘 먹였는지 통통했다. 하나는 아주 밝은 금발, 플래티넘 블론드였고 하나는 불타는 빨간 머리였다. 그리고 쪽지가 있었다.
<쌍둥이예요. 애 아빠는 웨스트이글 선수입니다. 잘 키워주세요.>
미르 킹쉴드도 경악하여 입을 딱 벌렸다.
*
“얜가?”
“얘가 누구더라?”
“아! 그, 그 여자 아닌가? 그때 잠깐 미하엘 걸즈에 있다가 나간 애?”
“아~ 근데 걔 이름 뭐더라?”
“아, 아니다. 걔는 시간이 안 맞다.”
아기들이 깼다. 둘 다 설 수는 있는 모양이었다. 쌍둥이라더니 사이즈가 똑같다. 스튜어트는 아기를 둘 다 안아 들고 있었다. 어디서 본 건 있는지 몸을 살살 흔들며 아이를 돌보며 의사한테 물었다.
“아니, 이게 가능한 거야? 어?”
“가능하죠. 여자가 과배란 될 때 여러 남자랑 관계하면, 한 10만분의 1인가, 100만분의 1인가 하는 확률로….”
“아, 젠장. 재수 드럽게 없는 새끼들.”
“애 앞에서 말 좀 조심하지, 거. 아무것도 모를 것 같아도 다 알아먹는다니까.”
“아, 어. 어. 그렇지.”
스튜어트는 아기들에게 우쭈쭈 소리를 내며 둥가둥가 흔들고 있었고 일단 아빠로 추정되는 두 놈은 디바이스를 뒤지며 애 엄마를 추측하고 있었다. 의사가 그걸 보다가 말했다.
“닮긴 했는데…. 그래도 유전자 검사부터 해야 되지 않겠어요?”
“아, 그건 병원 가서 해야 하는 거잖아. 안 돼. 안 돼. 일단 애 엄마부터 찾아. 먼저 진짠지 확인하고 다른 건 그 다음에.”
구단 입장에서 스캔들은 웬만해선 다 좋았지만 딱 하나 안 좋은 게 있는데 바로 어디서 애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TFC 선수들이 얼마나 개판으로 사는가. 그런 환경에서 애가 큰다는 걸, 애 아빠가 목숨을 내놓고 산다는 걸 그제야 대중들이 질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거 당해본 클럽은 알겠지만 진짜 겁나 귀찮다. 나라에 따라서는 평소엔 관심도 안 보이던 무슨 사회단체까지 찾아와서 몇 달 동안 개지랄을 한단 말이다. TFC의 인기로 사람들을 호도하기 위해서다. 게다가 같은 클럽의 선수 둘이 난교를 하다가 한 여자에게서 아빠가 다른 쌍둥이가 태어난 것일 수도 있다니. 얼마나 자극적인 가십인가.
디바이스를 뒤지다가 제수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뒤로 팍 기댔다.
“아, 나 어떡해! 세현이가 분명…!”
제수스가 격앙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다가 입술을 움찔거렸다.
“화도 안 낼 거야….”
그녀는 분명 이런 지저분한 걸 싫어한다. 당연하다. 그녀와 같은 사람이 뭐하러 남자 때문에 추문이 자신에게 붙는 걸 가만히 놔두겠는가. 이번에야말로 진짜 버림받을 것이다. 미르 킹쉴드가 그의 팔을 퍽퍽 쳤다.
“뭐 하는 거야? 빨리 찾아.”
“이건 짚단에서 바늘 찾기야. 이걸 우리가 어떻게 찾아. 기억도 안 나는데.”
제수스가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르 킹쉴드가 그의 팔을 더 세게 퍽퍽 쳤다.
“등신아! 그럼 저걸 진짜 우리가 키우냐? 우리 앤지 아닌지도 모르는 건데!”
“야, 쟤들 얼굴 보라고…. 아….”
밝은 플래티넘 블론드에 밝은 파란색 눈동자, 불타는 빨강 머리에 헤이즐색 눈동자를 가진 쌍둥이 아이가 멀뚱멀뚱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미르는 맹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암만 생각해도 아니라고. 감독님, 그냥 병원 가서 무슨 검산가 뭔가 합시다. 아무리 뒤져봐도 안 나온다니까.”
10개월 전후의 아기는 인간이 가장 귀여울 때다. 사실상 미모(?)가 극치를 이룰 때는 바로 이때란 말이다. 스튜어트가 아주 깜찍하고 귀여운 아기 둘의 얼굴을 보며 우쭈쭈 하고 있다가 그들에게 버럭 화를 냈다.
“똑바로 안 해? 어? 너 그거 100% 확신할 수 있냐? 어? 야, 이 씨, 니들 하는 거 보면 이런 애들 백 명 튀어나와도 안 이상해! 빨리 찾아!”
“거, 감독님, 자꾸 아기들 앞에서 소리를 질러요. 애들 다 배운다니까?”
“어? 어? 어. 어. 어. 맞지. 아, 미안.”
그는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기들에게 그렇게 멋쩍은 얼굴로 사과를 했다. 아기들은 스튜어트의 팔이 불편한지 갑자기 몸을 뒤집으며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어? 어? 왜 이래? 내려줄까? 어?”
그는 아기가 마치 말이라도 알아들을 줄 아는 것처럼 그렇게 물었다. 그는 아이들을 얼른 소파에 내려주었다. 그래도 징징거렸다.
“배고픈가 보지.”
그렇게 말하며 의사는 슬쩍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퇴근 시간이 훌쩍 넘었다.
“이 선생! 왜 자꾸 가려고 그래. 얘들은 어떡하라고!”
스튜어트가 기겁한 얼굴로 다시 의사를 잡았다. 그녀는 아주 귀찮고 성가신 얼굴로 말했다.
“아니, 얘들이 내 자식이야? 자꾸 왜 이래요, 감독님? 내가 여기 있는다고 추가 수당이라도 줄 것도 아니면서.”
“줄게. 줄게. 제발 우리만 두고 가지 마라, 어? 나 애들 못 봐. 얘들 뭐 먹는데? 엄마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아니, 잘 보더만….”
그래도 추가 근무 수당을 준다는 말에 그는 그냥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애들이 10개월이면 뭘 먹지?”
“의사잖아! 그것도 몰라?”
“내가 정형외과 의사지 소아과 의산가.”
그리고 그녀는 디바이스르 조작하여 검색을 해보았다.
“애들 삶은 달걀이나 과일 같은 거 잘 잘라서 요거트랑 섞어서 먹이면 되나 본데요?”
“그, 그래? 식당에 있을까? 그거 먹여도 되겠지?”
“그렇겠죠?”
스튜어트는 얼른 나가서 구단에 있는 식당에 다녀왔다. 양팔 가득 과일과 달걀 같은 걸 가져오더니 잘 으깨서 정말 그럴듯한 이유식을 만들었다. 의사가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더니 말했다.
“감독님 애 키워봤어요? 잘하네?”
“내가 애를 어디서 키워 봐! 지금 미치겠구만!”
그는 애들은 소파에 앉혀 두고 자기는 바닥에 앉아 아기들의 입에 이유식을 조금씩 넣어주었다. 배가 고픈 게 맞는지 잘 먹었다. 아기들의 순진하고 동글동글한 눈은 그들이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실감하게 했다. 그래서 지켜보는 이쪽이 도리어 안절부절못하겠다.
“아휴…. 어떻게 이렇게 귀엽냐.”
스튜어트는 아기들의 귀여운 얼굴을 한 번씩 만지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가 저러는 건 처음 봤다. 아기들은 죄가 없다. 그동안 미르 킹쉴드 또한 애들 엄마로 추정되는 여자를 찾는 걸 포기했다.
“도저히 모르겠는데요, 감독님?”
“병원에 연락할까요?”
의사가 말했다.
“사람들이 알아봤자 애들한테 좋을 건 하나도 없는데…. 불쌍한 것들, 부모를 잘못 만나서….”
“부모 잘못 만난 인간이 한둘인가. 그래서 전화해요, 말아요?”
의사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스튜어트는 자신의 야구 모자를 벗어서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그는 양손으로 아기들의 고사리 같은 손을 하나씩 잡고 조심스럽게 만지며 말했다.
“아니, 애들도 통통한 게 잘 먹이고 잘 키운 것 같구만…. 돈 필요한 거면 그냥 달라고 하지. 애가 둘이나 돼서 키우기 힘들었던 건가.”
“아, 좀 데리고 있으면 돈 달라고 찾아올 수도 있겠네요. 쪽지에 다른 말은 없었어요?”
“없던데….”
스튜어트는 손을 뻗어 바구니에서 쪽지를 꺼내서 보았다. 진짜 별말이 없었다. 아기들이 걱정되었으면 아기들에 대한 정보라도 적어둘 법한데 그런 것도 없었다.
“그럼 어떡해요?”
미르가 물었다. 스튜어트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말했다.
“일단 애들은 당분간 니들이….”
스튜어트는 미르와 제수스의 멍청한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의사를 보았더니 그녀는 펄쩍 뛰었다.
“미쳤어요?”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까 애 엄마 연락 기다리면서 대책을 세워보자. 입단속 잘하고.”
“네….”
“에휴, 불쌍한 것들….”
그는 아기들을 다시 안아 들었다. 의사는 다시금 슬그머니 일어났다.
“일단 전 갑니다. 궁금한 건 검색해서 알아보세요.”
“그래…. 니들도 가봐.”
미르 킹쉴드와 제수스 강도 방에서 나왔다. 의사는 잠깐 그 둘을 보며 혀를 쯧 차더니 아무 말없이 가버렸다. 그 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푹 쉬었다.
“아~”
제수스는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탄식을 내뱉었다. 미르는 잠깐 뒷목을 긁적이다가 말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든 되긴 뭐가 어떻게든 돼. 진짜 니 애면 어쩔 건데?”
“어?”
“그 여자는 그런 거 괜찮대?”
“어?”
“등신 새끼.”
제수스는 미르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미르는 발끈했다.
“누가 누구보고 등신이래! 등신 같은 게!”
미르는 그렇게 소리쳤으나 갑자기 덜컥 불안해졌다. 도현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침까지만 해도 그에게 사랑을 말하며 다정한 그녀였다. 그런데 이 해프닝으로 그게 없던 것처럼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말일까?
‘그때나… 그때처럼.’
그녀와의 첫 데이트 때나, 로얄팰리스에서의 그 일처럼. 어떤 일 하나 때문에 그녀와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될 수도 있었다. 그 일들은 모두 그녀를 경악하게 만들고 미르에게 정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건 사실 그와 그의 주변에서는 너무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번 일도 어찌 보면 그랬다. 아빠가 다른 쌍둥이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들 막살았고 저런 게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보통… 여자들은 그렇게 싫어하나? 이런 거?”
“당연한 소리를 하고 지랄이야?”
제수스는 자신의 멱살을 잡은 그의 손을 쳐내며 그렇게 말했다. 미르는 인상을 찌푸리고 잠깐 생각을 하다가 물었다.
“20개월 전에 진짜 누구 있었냐? 진짜 난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
“우리가 누구 정해 놓고 했냐. 파티 가면 그냥 이름도 모르고 했는데. 감독님 말대로 누가 튀어나와도 안 이상해.”
제수스가 자신의 목덜미를 문지르며 그렇게 말했다. 그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나 도대체 왜 그렇게 살았냐, 아….”
그는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는데도 굉장히 후회하며 그렇게 말했다. 미르가 말했다.
“아닐 수도 있잖아.”
“맞을 수도 있잖아.”
과거 있는 남자라는 건 그 과거에서 무엇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말이다. 그게 무엇이든. 그렇게 과거 있는 두 남자는 일단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미르~”
도현이 웃으면서 그를 반겼다. 미르도 웃었다.
“도현아.”
그런데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매우 찜찜했다.
‘말… 해야 하나?’
그는 뭔가 마음에 담아두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는 항상 모든 것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애정이든 뭐든. 그런데 이번 일은 그러면 안 되는 것일까? 솔직해지면 안 될까? 받아들여지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은 사람에게 위축감을 준다. 이렇게 강하고 커다란 남자에게도 말이다. 그는 도현을 꼭 끌어안았다.
“사랑해.”
“후후. 나도 사랑해요.”
미르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약간 기분이 복잡해졌다. 그는 뭔가 말하려고 입을 움찔거렸다.
“왜요?”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미르는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아니야.”
이 집에 남자가 셋이나 더 있는 것은 어쩌면 운이 좋은 것일 수도 있겠다. 미르는 결국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도현의 곁에 있으며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왜 그래, 미르?”
파티마는 집에 오자마자 아무 말도 없이 소파에 쓰러져 얼굴을 파묻은 미르 킹쉴드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그의 머리맡에 앉아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무슨 일 있어?”
“…너 말이야….”
“응?”
미르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파티마는 구불구불한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얼마 전에 단발로 자르고 직모로 바꾸었다. 얼굴이 좋아 보인다. 선수도 안 만나고 술도 안 마시고… 건강해 보였다. 미르가 물었다.
“만약에 갑자기 너한테 니가 모르던 애가 생기면 어떨 것 같아?”
“응? 임신하는 거 말하는 거야? 예전에는 당연히 중절약 먹었지. 지금이라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미르를 보았다.
“애 아빠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지.”
미르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그러니까 갑자기! 그냥 니 눈앞에 누가 니 애라고 애를 들이미는 거야.”
“아니….”
파티마는 그 순간에 벌써 눈치를 챘다.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를 쳐다보았다.
“미르 애 있어?”
“아니! 누가 내 일이래? 너 말이야, 너! 너 같으면 어쩔 거 같냐고.”
“아니…. 여자랑 남자랑 같나…. 내가 임신도 안 하고 어디서 애가 갑자기 튀어나올 리가 있어?”
“요새는 뭐 이상한 것도 많잖아!”
“내가 내 몸으로 안 낳고 애 가지려면 그거 돈 엄청 들어. 누가 돈도 안 받고 그런 걸 해줘? 애 낳는 게 보통 일도 아니고. 자원봉사하다가 몸 망가지고 목숨 날릴 것도 아니면….”
파티마가 황당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미르가 다시 소파에 얼굴을 박았다. 이건 남자한테만 생기는 일이라는 말일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로드리게스 놈한테 물어보면 알려나? 근데 이렇게 하나둘 알기 시작하면 소문나는 건 십상이다. 파티마가 다시 물었다.
“미르 애 있었어?”
“아니… 몰라…. 뭔가 일이….”
미르가 그렇게 웅얼거리듯 말했다. 파티마가 말했다.
“하긴… 선수들한테 어디서 애 튀어나오는 게 그렇게 이상할 일은 아니지.”
“…그렇지….”
“애 엄마는? 보통 양육비나 이런 거 요구하는 것일 거 아냐.”
“몰라…. 누가 그냥 애를 구장 앞에다 버리고 갔어….”
“응? 진짜? 그럼 어떡해? 미르가 애를 키워야 하는 거야?”
“그래야 돼?”
미르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약간 풀이 죽어 있었다. 파티마가 피식 웃었다.
“킬스버그 때문에 걱정돼서 그러는 거구나.”
그는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빛이 쏟아지는 것 같은 야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 말이야. 나 좋아하잖아?”
“응? 그렇지.”
파티마는 약간 쑥스러워하는 것 같지만 그렇게 순순히 인정했다. 미르 킹쉴드를 좋아하는 여자가 어디 한둘인가.
“그럼 넌 어때? 이런 말 들으면? 애 딸린 남자는 여자들이 다 싫어하나?”
“음…. 어떤 남자냐에 따라서 다를 것 같긴 한데. 글쎄.”
파티마는 잠깐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남자가 어떤 남자냐에 따라서도 다르고 여자도 여자 나름이겠지.”
“넌?”
미르가 물었다.
“아기 귀여워?”
“응, 그런가 봐….”
“미르만 좋다면… 미르랑 같이 아기 키워도 좋겠지만. 미르는 킬스버그가 그럴지 궁금한 거 아냐?”
“…….”
“걔도 미르 많이 좋아하지 않아? 솔직하게 말해. 지금처럼.”
“아직 걔가 내 애라고 완전히 결론이 난 건 아닌데….”
미르는 한숨을 푹푹 쉬며 등받이에 걸친 자신의 팔에 얼굴을 기댔다.
“모르겠어….”
“왜?”
“싫어할 것 같아.”
“왜?”
“애 같은 거 귀찮은 거잖아…. 자기 애도 아니면 특히나. 그런 걸 나랑 같이 키워줄까?”
애 같은 거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만약에 정말로 그게 자신의 아이라면… 자신도 똑같이 버려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걸 키운다는 것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걔도 미르도 돈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미르한테 갑자기 애가 생기면 걔가 미르랑 헤어지자고 할 것 같아?”
“…그럴까?”
미르가 눈을 돌려 파티마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뭐라고 덜컥 말을 하지 못했다. 다들 미르에게 말했었다. 코치들이나 선수들이나 걸즈도 누차 말했다.
그런 여자가 널 왜 만나냐.
결국 그 여자랑 잘 안 될 거다.
잘 안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미르 킹쉴드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었다. 그는 강하고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 믿음과 합쳐져 정말 그를 최고로 만들어 주었다. 믿음의 힘이란 그 자체로 강력한 것이다. 자신만만한 그는 언제나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모두가 그를 사랑했다.
‘그 여자는….’
파티마는 몇 번 만나본 도현 킬스버그를 떠올려보았다. 살기 위해서는 무수한 고통과 학대도 견뎌야 했던 파티마와 달리 많은 걸 배우고 많은 걸 누리며 자란 여자일 것이다. 사실 파티마는 그녀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 왔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아마 도현도 파티마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 왔을지 상상도 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상상하더라도 그걸 체감하지는 못할 것이다. 굳이 해서 좋을 것도 아니고…. 그래서 파티마는 다른 사람들처럼 미르에게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예감했던 것 같다. 이르든 늦든 말이다. 그래도 파티마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참 미르도 웃겨. 제수스도 그렇고. 여자는 예쁜 게 다인 것처럼 굴더니.”
“예쁜 여자 싫어하는 남자가 어디 있어. 애초에 여자를 싫어하는 놈이 이상한 거지…. 도현이가 그러더라. 좋은 건 보면 바로 아는 거라고. 도현이도 그렇잖아.”
다들 자신의 클래스보다 더 나은 클래스에 속한 상대에게 이끌린다. 외모가 아름다운 상대, 혹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상대, 금전적으로 풍족한 상대, 정서적으로 여유로운 상대. 미르는 한숨처럼 덧붙여서 말했다.
“나도 그런 거고.”
“그럼… 걔가 애 정도는 봐줄 수도 있잖아.”
“으음~ 그럴까?”
미르는 여전히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저녁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2층으로 갔더니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 에반이 있었다. 미르가 올라오자 그는 책에서 눈을 떼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웬일로 늦게 들어오셨네요.”
“어….”
그의 왼손에 있는 푸른색 다이아몬드가 빛났다. 딱 맞춘 듯 잘 어울리면서 화려한 반지였다. 항상 볼 때마다 도현이가 사준 거다~ 라는 느낌이 팍팍 들어 정말 마음에 안 든다. 그렇게 지나가려다가 그가 들고 있는 책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좋은 아빠 나쁜 아빠>.
“…설마 너 애 있냐?”
미르는 순간 ‘설마 너도 애 있냐?’고 물을 뻔했으나 가까스로 교정했다. 에반은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아뇨.”
그는 우아하게 책장을 넘겼다. 미르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미리 알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미리?”
에반은 대꾸하지 않았다. 미르는 그의 쪽으로 가서 다른 쪽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가 들고 있는 책 말고도 앞에는 책 한 권이 더 있었다. <아이에겐 아빠가 전부다>. 미르는 그 책을 집어 들었다. 미르는 그걸 휘리릭 넘겨보고는 그냥 놓았다.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어디서 애라도 튀어나올까 봐 대비하는 거야?”
“그건 킹쉴드 씨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에반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미르는 당연히 확 찔렸다. 제 발이 저린다는 게 이런 것일 테다. 미르는 뚱한 얼굴로 칫 하고 고개를 돌렸다. 에반은 책장을 한 장 더 넘겼다. 그리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면 킹쉴드 씨는 어쩌실 겁니까?”
“으음~ 역시 도현이한테 먼저 말해야겠지?”
“뭘요?”
“어쩌다 보니 애가 생겼다고.”
“그게 끝입니까?”
“그럼 무슨 말을 더 해?”
“무책임하네요.”
“뭐? 지금 시비 거냐?”
에반은 피식 웃었다.
“적어도 그런 말을 할 땐 대책까지 함께 말해야 하는 겁니다. 일은 본인이 저질러 놓고 내… 도현이에게 결정을 떠맡기는 겁니까?”
“내가 무슨 대책을 들고 가든 어차피 도현이가 선택하는 건 마찬가진데.”
미르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에반은 책장을 넘기는 손을 잠깐 멈칫했다.
“그 말은 맞지만… 그래도 무책임한 건 무책임한 거죠.”
그는 다시 고상하게 책장을 넘겼다. 미르가 물었다.
“그럼 넌 어떡할 건데.”
“전 그런 실수 안 합니다.”
“흥, 모르는 소리 하고 있네. 그런 거 남자는 영원히 모르는 거야. 너 진짜 맹세코 단 한 번이라도 애매했던 적 없냐?”
“…….”
“지금까지 만난 여자는 몇 명인데?”
에반은 결국 인상을 약간 찌푸렸다. 미르가 계속 말했다.
“너 몇 살이더라? 지금쯤 10살짜리 애가 어디서 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
잠깐 대답이 없던 에반은 손으로 자신의 눈썹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응?”
미르는 그의 말에 약간 놀랐다.
“도현이가 안다고 생각하면 더 깜깜하구요. 도현이가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는데?”
에반은 책을 덮고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널린 그저 그런 놈들이랑 별반 다를 거 없다고 생각하겠죠.”
미르의 입술이 움찔했다.
‘이런 거….’
그래, 흔한 일이다. 그러니까 그저 그런 것이다. 미르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헝클며 괜히 딴짓을 했다.
“그래, 애 같은 거 귀찮은 거니까.”
“그렇죠.”
그렇게 대답하는 에반을 보고 미르는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이런 건 도대체 왜 읽는 거냐?”
미르가 손으로 테이블 위에 있는 책을 툭 건드렸다. 미르의 말에 에반은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이 약간 온화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책을 다시 펼쳤다.
“도현이와 제 아이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아니, 분명히 좋을 테니까요.”
“너 도현이랑 애 낳아?!”
미르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에반은 다시 책을 한 장 넘기면서 대꾸했다.
“당장은 아닌데요.”
“뭐?!”
“당장은 싫다고 하더라구요. 한 10년 뒤나….”
그럼 가지긴 가질 거란 말인가! 그녀가! 이 새끼랑?! 뭔지는 모르겠는데 미르는 기분이 확 상했다. 아니, 상한 정도가 아니라 분노에 가까웠다. 이런 비리비리한 새끼가 그녀와 아이를 가질 거라고? 그녀가 그걸 허락했단 말인가? 그녀가 자신보다 이 새끼를 더 인정한다는 말인가? 그를 더 최고로 여긴다는 말인가?
‘내가 더…!’
책을 보고 있던 에반 블랙은 미르 킹쉴드의 이글이글한 눈빛을 알아채고 피식 웃었다.
“도현이는 바보가 아니라는 거 킹쉴드 씨도 잘 알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그녀에게서 우리가 가지지 못한 걸 바라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도현이는 딱히 우리에게 바라는 게 없습니다. 스톤하츠 씨만큼은 못하더라도 대비를 할 필요는 있죠.”
에반은 상당히 모호한 말을 했다. 미르는 어쩐지 그의 말이 굉장히 기분이 나빴는데 그게 어째서인지 알 수 없었다. 미르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에반을 쳐다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는 똑똑한 것 같았다. 그 마도사 새끼도 그랬다. 그딴 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만약 동료 선수들과 갈등이 있다면 주먹다짐으로 해결을 보면 끝나는 일이었다. 여기서는 그럴 수 없었다. 도현은 미르를 가장 좋아했다. 그러니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녀가 자신을 최고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도 그런 거 때문에….’
미르는 낮에 본 백금발에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아기를 떠올렸다. 이건 도대체 무슨 기분일까? 생소한 기분이었다. 스스로가 싫어진다니. 미르는 컨디션이 상당히 안 좋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에반을 보면서 말했다.
“너랑 얘기하면 묘하게 기분이 나쁘단 말이야. 항상 웃고 다니는 주제에.”
“칭찬으로 듣죠.”
에반이 말했다. 미르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약간 잠을 설쳤다. 그리고 다음 날 훈련을 하러 갔더니 스튜어트 감독은 보이지 않고 코치들이 선수들에게 강도 높은 근력 훈련을 시켰다. 오후 시간은 전부 먹는 것으로 날렸다. 그리고 역시나 감독실로 불려갔다. 제수스도 함께였는데 그는 컨디션이 완전 망가져서 훈련하다가 구토도 엄청 했다. 감독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스튜어트 감독도 안색이 별로였다. 아기들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스튜어트의 양 무릎에 앉아 있었다.
“아기들 이거 보통이 아니구나…. 엄청 먹고 엄청 싸네.”
“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직 어디서 연락 없어요?”
미르가 물었다.
“아직…. 하. 그래도 일주일은 기다려 봐야지.”
스튜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나니 다들 안색이 썩어갔다. 독박 육아를 하고 있는 스튜어트는 말할 것도 없었고 제수스도 엄청나게 칙칙했다. 미르 또한 평소와 달리 여유가 없었다. 정말로 저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면(그것도 아빠가 다른 쌍둥이가 딸린) 도현이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여전히 답을 못 찾았기 때문이다.
스튜어트는 칭얼거리는 아이 둘을 안고 흔들거리며 말했다.
“아무리 못 배워먹어도 피임은 상식이지. 아니, 못 배워먹었으니까 더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 책임질 능력도 없는 것들이 한술 더 뜬다니까.”
“…그냥 감독님이 키우면 안 돼요?”
제수스가 말했다. 일주일 동안 스튜어트 감독은 마치 자기 아기들인 것처럼 육아에 완전히 전념 중이었다. 감독실이 육아용품 천지였다. 웨스트이글 전담 의사도 픽 웃었다.
“그래, 그냥 감독 때려치우고 애나 키우면 되겠네. 천직 아냐?”
“아… 힘들긴 한데 애기가 귀엽긴 하네. 이거 왜 가지는지 좀 알 것 같다.”
스튜어트는 금발 머리 아기의 뺨을 두 손으로 잡고 좀 눌렀다 뗐다 하며 장난을 쳤다. 아기는 방긋방긋 웃었다.
“그래도 언제까지 이럴 거예요. 이제 슬슬 검사는 좀 하죠. 병원이야 미리 얘기해 놓으면 금방 갔다 올 수 있는 거고.”
“하…. 이것들이 진짜 얘들 새끼라고 해도 문제고, 아니면 또 어떡해야 하냐?”
“경찰에 신고해야죠.”
“그러면 고아원 가는 거 아냐?”
“부모 찾으면 부모가 데려가겠죠. 고아원이 나아요. 지 새끼 이렇게 버리는 놈들이 나중에 애는 안 팔겠어요? 애들도 예뻐서 까딱하면 15살 되자마자 팔릴 텐데.”
“그건 그렇지….”
정이 무섭다. 스튜어트는 잠깐 데리고 있던 애들이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본인이 겪어 봤으니까 더더욱. 게다가 이 쪼그만 것들이 뭘 안다고 잠깐 본 그를 따랐다. 더더욱 책임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는 양손으로 능숙하게 애들에게 젖병을 물리며 한숨을 쉬었다.
“병원 가자.”
유전자 정보는 법적으로 본인이 직접, 혹은 법적 효력을 가진 대리인이나 사법 기관의 요청이 있을 때만 확인할 수 있었다. 유전자 정보는 관련 정부 기관이 담당하고 관리하여 검사 비용은 모두 공짜였다. 불법 사설 업체들을 근절하고 유전자 정보 도용 등의 폐해를 막기 위해서다.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차는 나눠서 탔다. 번쩍번쩍한 차들은 버려두고 짙게 썬팅된 차를 탔다. 미르와 제수스는 나란히 뒷좌석에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미르는 창밖을 보고 있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야, 찌질이.”
“시비 걸지 마라.”
제수스는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감싼 채 그렇게 대꾸했다.
“너 그 여자한테는 말했냐? 교수인가, 뭔가.”
“아직 밝혀진 것도 없는데 뭘 말해?”
그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맞으면 어쩔 건데?”
“뭘 어째….”
제수스는 진짜 박 터지게 고민을 한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마른 손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사실… 교수님은 별로 신경 안 쓸 수도 있대….”
“누가?”
제수스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미르에게 물었다.
“니가 생각을 해봐라…. 우리 교수님 같은 사람이 나 같은 놈한테 애가 있든 없든 신경이나 쓸 것 같냐…. 근데 만약에 이걸로 교수님이랑 엮여서 스캔들이라도 떠 봐…. 교수님이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날로 난 끝이야.”
“너 그 여자 왜 만나냐?”
미르가 황당해서 그렇게 물었다. 제수스는 미르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가 약간 풀이 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하냐….”
“등신.”
미르는 그렇게 말했다. 제수스가 발끈했다.
“그럼 넌 괜찮을 것 같냐? 그 여자는 너같이 못 배워먹은 게 애까지 딸려도 좋다냐? 부모형제도 아무것도 없는 게?”
“그거야…!”
사실 도현은 저번에 대대적으로 뜬 <킬스버그 보이즈 스캔들>로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거야 어떻게 잘 마무리가 되었지만 이번에도 그녀가 그렇게 넘어가 줄까? 미르만 아니었으면 이런 스캔들을 또 겪을 필요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 건 아닐까?
‘게다가 당장은 자기 아이도 가지기 싫다고 했다는데….’
그리고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비리비리한 거랑 아이를…. 역시 모르겠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겠지. 하지만 미르 킹쉴드가 어제 에반 블랙에게 말했듯이 그런 건 남자가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다. 병원에 도착했다.
“입 벌리세요.”
간호사가 그들의 구강상피세포를 채취한 면봉을 플라스틱 통 안에 담아 가지고 갔다. 다른 병실에서 아기들도 같은 조치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병원에선 금방 나와야 했다. 결과는 전자 메일로 받기로 했다. 결과는 다음 날 금방 나왔다.
“…….”
“…….”
감독실에서 같이 결과지를 까본 두 남자는 동시에 한숨을 푹 쉬었다. 뒤에서 아이를 둘 안고 있던 스튜어트도 허리를 숙여 디바이스를 들여다보았다.
“아휴…. 다행이다. 아니네.”
스튜어트는 바로 한 손으로 디바이스를 들어 변호사랑 구단 매니지먼트에 연락을 했다.
“댄튼 변호사, 난데. 아니, 누가 게헨-세나 앞에다….”
미르와 제수스는 결과지를 몇 번이나 읽어보고 있었다. 미르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하지만 기분이 그렇게 상쾌해진 것은 아니었다. 예전 같으면 분명히 이런 일은 자기랑 영영 상관없는 일처럼 굴었을 것이다. 옆을 힐끗 보니 제수스도 썩 개운한 얼굴이 아니었다. 뒤에 있는 스튜어트는 아기를 두 손으로 안은 채 전화 통화에 한창이었다. 미르는 제수스한테 물었다.
“너 말이야…. 저런 거 가지고 싶냐? 그 교수라는 여자랑?”
“어?”
제수스가 그를 돌아보았다. 미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런 거. 아기.”
미르는 인상을 팍 찌푸린 채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분노가 생생하다. 에반 블랙이 그녀와 아이를 가지기로 했다는 말에 그가 느낀 분노가 말이다. 그녀와 곧잘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다른 남자들 따위, 그녀의 앞에서 주눅이 드는 찌질이들 따위 자신에게 전혀 비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크고 강했다. 아름다웠다. 여자들은 그를 사랑했으며 남자들은 그를 시기 질투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최고라는 증거였다. 그런데 그런, 자신보다 비리비리한 새끼를 선택해 저런 걸 가지기로 결정했단 말인가? 도현이?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건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전에 그 마도사 새끼가 자신에게 덤벼왔을 때, 그 부잣집 도련님이 덤벼왔을 때의 미르도 굉장히 분노했었다. 강자에게 자신보다 약한 자가 덤벼오는 것은 굉장한 분노를 일으키는 법이다. 감히 저런 것들이 자신에게 어디 비빌 수나 있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
‘그런데 그딴 놈이 도현이랑 애를 가지기로 했다고?’
그들이 자신에게 직접 도전해온 것보다도 더 분노했다. 그렇지만 전처럼 자신의 강함을 보이며 그를 꺾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선택한 것이라면….
‘내가 그 새끼보다 못하다고?’
미르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제수스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미르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런 거….”
그는 굉장히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가 대답했다.
“모르겠어. 난… 그냥 세현이가 나한테 다정하게 대해줬으면 좋겠어.”
미르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어휴, 등신. 그걸 못해가지고.”
제수스도 인상을 찌푸렸다. 미르 킹쉴드는 맨날 자신을 갈궜지만 사실 그나 자신이나 다를 게 뭔가! 그는 벌떡 일어서서 미르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등신은 너다, 이 병신 새꺄! 너 분명히 얼마 안 가서 그 여자한테 차인다! 너같이 멍청한 새끼가 그런 여자랑 평생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지가 덜떨어진 것도 모르는 새끼가!”
“뭐라고?!”
미르도 벌떡 일어나서 그의 멱살을 잡았다.
“너 입조심해라. 죽고 싶냐?”
“너나 입 닥쳐, 개새꺄. 자꾸 니가 뭐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데 내가 봤을 때 그 여자가 너 좋아하는 거 개새끼 귀여워하는 거나 별반 다를 거 없어! 그게 좋냐?!”
미르는 먼저 주먹을 날렸다. 제수스는 얼굴을 한 방 맞고 오히려 웃었다.
“찔리지?”
미르는 대단히 빡쳐서 그의 얼굴에 주먹질을 더했다.
“닥쳐, 이 좆밥 새끼야! 그 교수한테 차일까 봐 맨날 벌벌 떠는 찌질이가!”
제수스는 그의 얼굴에 바로 박치기를 했다. 뒤에서 전화하랴, 애들 보랴 잠깐 정신을 빼놓고 있던 스튜어트는 그냥 말싸움만 하는 줄 알았던 그들이 주먹질을 시작하자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돌렸다.
“뭐야? 미쳤나, 저것들? 갑자기 왜 저래? 그만!”
소파가 부서졌다. 그만둘 기세가 전혀 안 보였다. 스튜어트는 그들을 말리려고 직접 다가가려다가 양팔에 안고 있는 아기들의 얼굴을 퍼뜩 보고는 문부터 찾았다.
“와씨, 저 좆… 저…! 내가…!”
스튜어트 감독은 평소의 거친 말버릇을 겨우 참으며 탈출을 모색했다. 애들만 없었으면 저것들을 직접 패서 말렸겠지만 민간인도 고래 싸움에 등 터질 마당에 1살도 안 된 이 아기들은 그냥 죽는다. 그는 그들의 싸움이 커지기 전에 애들을 한 팔에 몰아 안고 손에 잡히는 걸 그들에게 죽으라고 던지고 얼른 감독실을 나갔다.
“아오, 저 망할 새끼들, 내가 죽인다. 내가 저것들 죽이고 그냥 감옥 간다.”
스튜어트는 얼른 그들의 싸움 반경을 넘어서 나오며 그렇게 이를 갈다가 다시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린 채 아기들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니, 인상도 펴려고 노력했다. 아기들에게는 좋은 것만 보여줘야 한다는데.
“보통이 아니구나. 니들 키운다는 게….”
그는 얼른 코치진을 찾았다.
“감독님? 걔들은 뭐예요?”
“내 방으로 가라. 킹쉴드랑 제수스 붙었다. 그 새끼들 반쯤 죽여도 되니까 내 방에서 끌어내.”
“네? 걔들 미쳤어요? 어디 감독님 방에서….”
코치진이 일어났다. 오펜스 코치도 하나 데리고 갔다. 만에 하나의 일이 있으니 마도사는 있는 게 언제나 좋다. 그들은 우르르 감독실로 달려갔다. 스튜어트가 아차 하고 소리쳤다.
“야! 오면서 애들 기저귀 좀 챙겨와!”
*
“…….”
“…….”
아씨…. 훈련을 마치고 씻고 난 후 거울 앞에서 제수스와 서로 눈이 마주친 미르는 인상을 팍 썼다. 하지만 서로 무시했다. 그리고 거울을 본 미르 킹쉴드는 다시금 성질이 났다. 에이씨! 얼굴이 엄청 상해 있었다. 이마에는 엄청나게 큰 방수포를 붙여 놓고 있었고 왼쪽 광대와 뺨도 멍과 붓기로 엉망이었다. 어제 저 좆밥 같은 거랑 오랜만에 주먹다짐을 해서 그런데(도현에게는 훈련하다가 다쳤다고 했다.) 사실 저 새끼한테 맞은 것보다 코치들한테 더 많이 맞았다. 누차 말하듯 다굴에는 장사가 없었다. 제수스는 쇄골에 금이 갔다. 입술이 터지고 눈도 밤탱이가 되어 있었다.
‘아, 짜증나.’
아무리 예쁘고 잘생긴 남자라도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못생겼다. 미르는 자신의 얼굴을 이쪽저쪽 살폈다. 아무리 빨리 나아도 깨끗하게 낫는 데 4주는 걸릴 것이다. 아름다운 여자는 자신이 아름다운 여자인지 모르고 성장하는 경우도 간혹 있으나 아름다운 남자는 대부분 자기가 잘생긴 것을 아주 잘 안다. 미모라는 것은 소중한 것이다. 그것이 찰나일지라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당연한 것 아닌가? 우리 모두 영원하지 못하다. 영원하지 않다고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치면 못생긴 것도 영원하지 않은데 그럼 그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가? 여하튼 잘생긴 남자에게 미모란 그의 아이덴티티나 다름없었다.
“크하하! 야, 니들 존나 못생겼다.”
미하엘 로드리게스가 미르와 제수스를 동시에 비웃었다. 다른 선수들도 키득거렸다. 다 같이 싸우면 다 같이 눈탱이 밤탱이가 되지만 딴 놈들은 멀쩡했으니 그런 놀림이 술술 나오는 것이다. 미르는 거울도 보기 싫어 금방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집으로 갔다. 이제 날이 많이 화창해져서 도현과 로웰, 윤지호와 신재인이 밖에 나와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강사의 코칭을 받으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걸 밖에 있는 의자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다가 끝나고 바로 도현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다른 여자들은 웃으며 집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왔어요?”
“도현아~”
미르는 애교를 부리며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 잔디밭 위에 쓰러뜨렸다.
“하하. 미르, 오늘도 잘하고 왔어요?”
도현이 그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며 물었다. 다쳐서 못생겼는데. 미르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입을 맞춰주는 게 기뻐 그녀에게 자꾸 몸을 비볐다.
“응.”
푸른 잔디의 냄새가 싱그럽다. 자연이 싱그럽게 피어나고 있었다. 햇빛이 따뜻하다. 새소리가 어디서 들려온다. 그녀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다. 도현도 그의 품에 코를 문질렀다. 그에게서도 좋은 냄새가 나는 모양이었다. 미르는 애정을 드러내며 그녀의 코에 자신의 코를 맞췄다.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마주친 채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도현도 미르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있잖아.”
미르가 입을 열었다. 도현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말해도 좋다는 그녀의 무언의 승낙이었지만 그는 약간 말을 머뭇거렸다. 도현이 물었다.
“뭔데요?”
뭐라고 말해야 좋은 것일까, 이 마음을.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보면 문득문득 느껴지는 이 느낌이 무엇인지 쉽사리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새벽, 자신의 품에서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보며 그저 이 시간이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라며 숨을 죽이던 그때처럼. 그녀의 속눈썹이나 미소나 목소리가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질 때면. 그녀에게 이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적당한 말을 고를 수 없어 그답지 않게 초조해질 때면….
미르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뺨을 감싸게 했다.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도현은 그의 얼굴을 만졌다. 눈썹이나 화려한 플래티넘 블론드, 남자다운 골격과 턱.
“나도 미르가 좋아요. 귀여워요.”
그녀가 먼저 말했다. 미르는 눈을 잠깐 크게 떴다가 그녀에게 더 몸을 붙였다.
“응…. 나도 좋아.”
미르는 눈을 감으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쪽 맞추고 다시 눈을 마주쳤다가 깊이 입을 맞췄다. 그녀가 미르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손이 그의 티셔츠 안으로 성큼 들어와 그의 몸을 만졌다. 조각 같은 그의 등 근육을 세심하게 그녀가 어루만졌다. 만지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근사하기 짝이 없는 육체였다. 그녀는 그의 상의를 벗겼다. 미르는 그녀의 손과 깍지를 꼈다. 잔디의 느낌이 파슬파슬했다. 좀 더 몸을 붙여 입맞춤에 집중했다. 미르는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어 올라가 그녀의 여성기를 옷 위로 어루만졌다. 도현은 움찔하며 허리를 꿈틀했다.
“으응…. 여기서?”
“방에 갈까?”
미르는 그녀의 엉덩이 한쪽을 주무르며 그녀의 여성기도 손가락으로 은근히 꾹꾹 눌렀다. 그리고 점점 불끈불끈해지고 있는 하반신으로 그녀의 치골 위도 자극했다.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도현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신음을 흘리며 그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하아… 방에 가요.”
그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녀가 웃었다.
“진짜 힘세.”
“너도 밥 많이 먹어.”
미르는 그렇게 당부하며 도현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췄다. 그들은 도현의 침실로 향했다. 미르는 그녀의 밑에 깔렸다. 그녀는 자신의 옷을 쭉 벗어 던졌다. 그녀가 섹시했다. 미르도 자신의 남은 옷을 벗었다. 미르는 알몸에 그녀는 속옷만 입은 채였다. 그는 몸을 일으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그녀의 속옷 아래로 손을 넣었다. 그녀의 피부를 핥았다. 금방 운동을 해서 그런지 그녀의 체취가 짙었다. 그리고 그게 너무 좋았다. 미르는 그녀의 피부에 얼굴을 계속 비비면서 말했다.
“왜 이렇게 예뻐?”
“미르도 왜 이렇게 예뻐요?”
“나? 나야 예쁘지.”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며 그렇게 말하니 그녀가 웃었다. 곧 알몸이 되어 꼭 끌어안았다.
“아… 앗! 아아. 미르…. 하아.”
도현이 상기된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그의 커다란 남성기가 그녀의 것을 문질렀다. 미르도 상기된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녀의 엉덩이가 박자에 맞춰 움직였다. 미르는 그녀의 허벅지를 만지며 그녀의 턱에 입을 맞췄다.
“도현아… 기분 좋아.”
살갗이 맞붙은 듯 포개져 있었다. 촉촉한 입술이 스치는 것이 아찔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언제까지 보아도 절대 질리지 않을….
“아앗… 하, 거기…. 거기 좀 더….”
도현이 말하자 그는 그녀의 여성기를 좀 더 빠르게 자극했다. 흥분한 도현의 얼굴에 땀이 흘렀다. 도현은 미르의 귀를 깨물었다. 야한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다가 곧 둘 다 절정을 맞이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도현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았다. 그에게선 언제나 좋은 냄새가 났다. 이런 남자는 모름지기 털 한 가닥도 남다르다. 머리카락이 부드러웠다. 냄새가 좋았다. 품에 넘치는 남신 같은 그의 육체가 아주 뜨거웠다. 그의 몸을 안고 있으면 마음까지 꽉 차는 것 같다. 남자란 뭐니뭐니해도 육체적 우월함이 최고인 것일까? 그와 하는 섹스는 언제나 기분 좋았다. 항상 남자에게 빨게 하는 최고의 섹스만 하는 도현이라도 만족스러운 섹스와 그렇지 않은 섹스는 나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대낮에 한바탕 그와 즐거운 섹스를 즐기고 나른한 얼굴로 부엌으로 가 함께 간단한 요리를 하고 먹었다. 그는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도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맛있어?”
“네.”
미르 킹쉴드 하면 육식이니 그는 소고기로 만든 찹 스테이크와 조림을 했다. 라만 셰프의 음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에게 몇 번 친근하게 구는 모습이 눈에 띄더니 간단한 요리법을 배운 모양이다. 그의 음식에서 그녀의 맛이 조금 나는 것 같았다. 그와 어울리면 도현도 에너지를 많이 소진하는 느낌이라 더 먹게 되는 것 같다.
“참, 미르는 어디 내놔도 걱정은 없을 것 같아요. 이런 것도 이제 잘하고.”
“나야 뭐.”
미르가 천진하게 웃었다. 그렇게 잠깐 아무것도 아닐 것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좋은 것이다. 재미있는 얘기를 서로 거리낄 것 없이 하고 있던 와중에 도현의 디바이스로 전화가 왔다.
“아, 잠깐만요.”
화면을 잠깐 보니 도진 라인하트였다. 도현이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도진아.”
[뭐하냐.]
“밥 먹어. 넌 뭐해?”
[과제. 하기 싫어. 엄마 보고 싶어. 너 보고 싶어.]
“어려워서 그래?”
[아니, 그냥 하기 싫어. 하기 싫어~]
“오늘은 왜 그럴까, 내 동생.”
그녀는 그다지 누군가의 응석을 받아주는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동생에 대해서는 다른 모양이었다. 그녀는 동생의 징징거림을 웃으며 받아주고 있었다. 미르는 턱을 괴고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뭐, 동생한테 질투하고 그러는 건 아니지만…. 도진이는 나도 좋아하고.’
가족. 가족이란 건 뭘까? 그녀에겐 결국 말하지 못했지만 자기를 닮은 그 아기도 생각나고 에반 블랙이 한 말도 생각났다.
‘그런 게 생기면 그녀와… 가족이 되는 걸까?’
가족. 미르는 그의 어머니와 양아버지를 떠올려보았다. 어렸을 때 죽은 동생도. 아무리 미르 킹쉴드라 할지라도 유쾌할 수 없는 기억이었다. 전혀. 그의 속에 티끌만 한 어두움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건 전부 그때의 일 때문이다. 자신을 낳은 어머니마저도 교살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진창. 그런 거. 그런 거다. 가족이란 거.
‘하지만 도현이랑은 분명히 다르겠지? 그러면 그런 거… 귀엽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겠지?’
그녀와 함께 살아온 1년은 그가 지금껏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었다. 뭔가 부드럽고, 따뜻하고, 간질거리는…. 알다시피 미르 킹쉴드는 진창이든 어디서든 전부 살아남을 수 있는 남자였다. 그는 강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홀로 살아남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었다. 그는 통화를 하고 있는 도현의 손등을 검지로 살살 만졌다. 정말 부드러웠다. 자신과는 달랐다. 그녀는 그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도 절대 가지지 못할 것을 말이다.
[너 분명히 얼마 안 가서 그 여자한테 차인다! 너같이 멍청한 새끼가 그런 여자랑 평생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럴까….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히 미르는 괜찮을 것이다. 그는 언제든 살아남을 수 있는 남자였으니까.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이더라도 헤어진다는 게 그에게 그렇게 치명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찌질이 새끼처럼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굴지는 않는다. 미르 킹쉴드는 미르 킹쉴드로 남을 것이다.
‘그래도 평생 잊지는 못하겠지. 아니, 잊고 싶지 않아….’
미르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전화 통화를 끝내자 미르가 물었다.
“아기 좋아해?”
“아기요?”
“응.”
“아기…. 글쎄요. 좋아하는 편인 거 같아요. 귀엽잖아요?”
“우리도 아기 가질까?”
미르가 물었다.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있는 게 좋을까?”
“글쎄요….”
그가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얼굴이었다. 미르는 그냥 가만히 도현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도현은 이 남자들이 요새 한꺼번에 왜 이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난 지금이 좋아요. 미르는 싫어요?”
“아니, 너무 좋아.”
미르는 도현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채로 도현의 손을 잡고 손가락에 입술을 눌렀다.
“그냥. 좋은 거면 가져도 좋을 것 같아서.”
“하하. 애가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뭐, 어렸을 땐 비슷하잖아?”
도현은 미르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미르 아기면… 미르처럼 이렇게 크고 예쁘고 튼튼하겠죠?”
“그렇겠지?”
“그럼 진짜 키우는 보람이 있긴 하겠다.”
도현이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미르도 웃었다. 그녀의 말이 기분 좋았다. 뭐, 지금은 이거면 됐지.
*
“부모는 찾았어요?”
“경찰에서 찾고 있긴 한데…. 애 버린 놈들이 찾는다고 어지간히 금방 튀어나오겠다.”
“뭐, 후회하고 돌아오는 인간들도 좀 있지 않겠어요?”
의사가 말했다. 미르는 턱을 괸 채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런데 도대체 걔들은 왜 감독님이 계속 데리고 있는 거예요?”
“말도 못하는 것들을 그런 데 어떻게 맡겨?”
스튜어트는 질색을 하며 아이 포대기로 앞뒤로 아기를 안고 있었다. 의사가 혀를 찼다.
“나랏일 하는 사람들 너무 물로 보는 거 아냐?”
“나랏일 하는 놈들이고 자시고! 일 똑바로 하는 사람들이 없다고! 이런 쪼그만 것들까지 손이 올 것 같아?”
“애들 훈련은 안 시킬 거예요? 그러다 짤려요. 감독직이 무슨 철밥통인 줄 아나.”
“그건…!”
맞는 말이다. 스튜어트 감독은 젖병을 쪽쪽 빠는 금발 머리 아기를 잠깐 보며 한숨을 쉬었다. 미르는 그의 등에 매달려 자고 있는 빨간 머리 아기의 뺨을 건드리며 장난을 쳤다.
“우리를 이렇게 애지중지해봐요. 퍽하면 손이나 들면서.”
“니들이 얘들이랑 같냐? 어? 누가 맞을 짓 하랬냐? 얘들은 죄가 없는 애들이야.”
“감독님 전화 오는데요.”
“어? 누군데?”
“댄튼이요.”
“잠깐 얘 좀 들어 봐.”
스튜어트가 젖병을 물리고 있던 아기를 의사에게 주려고 하자 의사가 인상을 팍 썼다. 아기에게 저런 거부의 표정은 좋지 않다. 스튜어트는 반사적으로 미르 킹쉴드를 보았다.
“잡아.”
“어? 내가?”
미르는 반사적으로 아기를 받았다. 젖병도 손으로 잡았다. 깜짝 놀랐다. 스튜어트는 한 번 들썩하며 뒤에 업은 아이의 자세를 다시 잡고 전화를 받았다.
“어, 댄튼 변호사.”
미르는 스튜어트가 아이를 안겨준 그대로 굳어 있었다. 사람이란 게 이렇게 가벼울 수 있는 건가. 이거 사람 맞아? 아기는 젖병을 쪽쪽 빨다가 자기를 안아주는 사람이 바뀌자 눈을 돌려 미르와 눈을 마주쳤다. 아기는 미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은 하얗게 보일 정도로 밝은 금발 머리였다. 피부도 아주 하얗고 부드러웠다. 눈썹도 금발이었고 속눈썹은 약간 더 짙은 색으로 길었으며 눈동자가 거의 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컸다. 아기는 미르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자꾸 쳐다보고 있었다. 관찰하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기의 눈에 비치는 자신은 어떤 것일까?
“의, 의사 쌤….”
미르는 이 이상한 기분을 견디지 못하고 의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손사래 쳤다.
“나 아기 안 좋아해.”
“기분 이상해. 떠, 떨어뜨리면 어떡해?”
“안 돼. 저리 가.”
미르가 안절부절못하며 아기를 떠넘기려고 하자 의사가 뒤로 훌쩍 물러났다. 아기는 젖병을 떨어뜨렸다. 울기 시작했다.
“울어. 어떡해?”
미르는 아기가 떨어뜨린 젖병을 얼른 들어 다시 먹이려고 했다가 한 소리 들었다.
“야, 땅바닥에 떨어뜨린걸!”
전화 통화를 하고 있던 스튜어트가 갑자기 뭐라고 했다. 미르는 행동을 멈췄다. 아기는 계속 울었다. 결국 미르는 아기를 소파에 그냥 털썩 내려놓았다. 그러니 아기는 울음을 뚝 그쳤다. 아기는 소파의 등받이를 잡고 일어나서 전화 통화 중인 스튜어트를 바라보며 옹알이를 했다.
“알았어. 어, 어. 음. 그래.”
스튜어트는 결국 통화를 하면서 아이를 안으러 다가왔다. 그는 한 팔에 애를 안은 채 계속 통화를 지속했다. 의사는 다시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감독님 곧 결혼이라도 하는 거 아냐? 왜 저렇게 애를 좋아하는 거야? 그런 거랑 연도 없었을 양반이.”
“그러게….”
미르는 여전히 아이를 안아 들었을 때의 그 미묘하고 이상한 감각이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너무 가벼워서 무서웠다. 저렇게 가볍다니. 얼마나 약할 것인가.
“애들 부모 찾았다.”
스튜어트는 전화를 끊고 그렇게 말했다.
“찾았대요? 어떻게요?”
“아니, 애를 버리고 간 거라고 생각해서 근처 CCTV부터 찾다가 혹시나 싶어서 실종 아동 DB에 돌려봤더니 바로 나왔다네.”
“실종이요? 애 버린 거 아니래요?”
“그래, 애들이 그런 거치고 너무 통통하다 싶더라니. 쇼핑 나왔다가 누가 유모차 째로 애들을 납치했나 봐. 범인 수색 중이래.”
연락이 되자 아기들의 부모가 경찰을 대동하고 바로 나타났다. 둘 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얼굴이 핼쑥했다. 애 엄마는 금발에 애 아빠는 빨간 머리였다. 애 엄마는 애를 둘 다 안고 하늘을 보며 기도를 했고 애 아빠는 애들을 보자마자 통곡했다. 그에 비해 애들은 아주 반질반질하고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기들이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자 스튜어트는 잠깐 굉장히 섭섭한 표정이 되어서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연신 자신의 야구 모자를 썼다 벗었다 하며 경찰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놈인데.”
경찰은 자신의 디바이스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게헨-세나 앞의 CCTV와 백화점 CCTV 화면이었다. 후드를 푹 눌러쓴 사람이 유모차를 슬그머니 끌고 가는 모습과 게헨-세나 앞에 바구니를 두고 재빨리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묻지 마 범죄 같은데…. 일단 범인 잡기 전에는 알 수가 없네요. 납치하자마자 애를 버렸으니까요. 이런 거 가끔 있거든요.”
“진짜 세상에 뭔 병신 또라이 같은 새끼들이 다 있네.”
스튜어트가 그렇게 말하자 경찰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놈들이 생각보다 정말 많습니다.”
그리고 아기 부모가 정신을 차리고 다가왔다.
“정말 감사합니다. 애들 잘 봐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기들 엄마가 스튜어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스튜어트는 또 어쩔 줄 몰라 했다.
“아, 예. 예…. 아닙니다.”
아기를 둘 다 껴안고 눈물 콧물 흘리고 있던 애 아빠도 고개를 숙였다.
“제, 제가 진짜 별별 생각이 다 들어서…. 흑. 감사합니다. 아, 죄송합니다. 마음이 놓이니까 눈물이 자꾸 나와서.”
스튜어트도 마주 고개를 숙이고는 야구 모자를 벗고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마지막으로 애들 한 번 안아봐도 될까요?”
“네? 네.”
아기 아빠는 아기들을 다시 한번 꼭 안고는 스튜어트에게 아기들을 넘겨주었다. 스튜어트는 애들의 얼굴을 한 번씩 봤다가 다시 부모에게 넘겨주었다. 아기들과 부모는 연신 감사 인사를 다시 전하고 경찰과 함께 가버렸다.
“…….”
다른 사람들이 잠깐 스튜어트 감독의 눈치를 봤다. 그는 멀어져 가는 차를 한 번 봤다가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이상한 눈빛을 인지하곤 인상을 썼다.
“뭘 봐? 안 들어가?”
그렇게 말하고 그는 먼저 게헨-세나 안으로 돌아갔다. 제수스도 같이 나와 있었다. 그는 감독의 눈치를 아직도 보고 있다가 슬쩍 의사에게 물었다.
“감독님 괜찮은 거야?”
“뭐, 안 괜찮으면 어쩔 거야?”
“그래도….”
“괜찮겠지.”
미르가 말했다.
“감독님도 강하니까.”
그래도 스튜어트 감독은 한동안 헛헛한 마음을 떨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정이 드는 것에 시간은 그렇게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단 2주뿐이었는데도 평생 이따금 떠올릴 기억이 되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