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다니엘 스톤하츠, 아름답고 교활한 남자
힘을 지향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번도 힘을 그 손에 쥐어 보지 못한 사람뿐이다.
“으음.”
북경대 물리학과 학과장이자 세계적인 석학으로 이름 높은 왕리밍 교수가 다니엘 스톤하츠가 제출한 논문을 읽고 있었다. 포마드를 발라 깔끔하게 넘긴 머리카락과 각이 잡힌 랩 코트와 그 안에 입은 양복까지 아주 신경을 쓴 모습이었다. 그는 종이로 뽑은 그의 논문에 이따금 무언가 메모를 했다. 유려한 필기체였다.
그가 자신의 논문을 다 읽고 메모를 끝낸 종이를 다니엘에게 건네며 말했다.
“나가 봐.”
그러고 그는 다시금 자기 일로 돌아갔다. 왕리밍이 그저 그런 교수도 아니고 다니엘이 휴가니 뭐니로 한창 속을 썩일 땐 그렇게 불같이 화를 냈지만 그 이후로 성실하게 랩을 나오니 다시 신경을 끄기 시작했다. 서로 적응을 좀 했다. 물론 요새도 가끔 다니엘의 긴 머리가 마음에 안 드는지 자르라고 한소리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대로 자기 자리에 앉은 다니엘은 그대로 그날의 공부 분량을 끝낼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기초 과학 분야는 박사 1~2년 차까지도 책을 엄청 파야 한다. 집중하고 있는 동안은 다른 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가 오늘의 분량을 끝내고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한밤중이었다. 시계를 보았다. 밤 10시 30분. 생각했던 시간 내에 끝냈다. 다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치엔위는 자기 의자에 늘어져 잠깐 쪽잠을 자고 있었다. 간혹 타자를 치는 소리만 났다. 박사생들은 대부분 실험실에 가 있는 것 같았고 석사생들은 책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가 자고 있는 치엔위에게 다가가 그렇게 말했더니 그녀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니엘 스톤하츠를 보고는 잠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 교수님인 줄.”
원래 랩에 남자라고는 교수인 왕리밍 밖에 없었으니 다니엘의 목소리를 듣고 잠결에 왕리밍인 줄 안 모양이다. 그녀는 잠깐 교수실 쪽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그녀는 목을 돌리며 다니엘을 보았다.
“뭐라고?”
“가보겠습니다.”
“어, 그래.”
다니엘의 책상을 한 번 본 치엔위는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강장제를 하나 더 먹고는 다시 자신의 논문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그대로 랩을 나왔다. 다른 학생들은 전부 기숙사에서 살았지만 다니엘은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5성 호텔에서 장기 투숙하고 있었다. 공부하는 시간 외에 따로 시간을 쓰기는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학생들처럼 일부러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해야 할 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옷을 훌훌 벗고 씻고 나서는 얼굴에 팩을 올리고 캘리 박의 저서 중 하나를 읽다가 시간이 되자 팩을 떼고 바로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스파에 갔다가 마사지를 받고 시간을 맞춰 9시 수업을 들으러 갔다. 초전도 수업이었다. 물리학과 교수님 중 하나가 시간에 맞춰 교실에 들어와 수업을 하기 시작했다. 다른 랩 학생들도 있었다. 수업을 듣고 있는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 모습만으로도 화보를 능가하는 굉장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그가 작년 가을학기부터 석사 과정에 입학하여 베이징대를 다니기 시작하자 곧바로 교내 신문은 물론이고 유명 일간지의 스포츠연예란 등에도 대서특필되었다. 갑작스러운 은퇴와 예상치 못한 진로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가 학교 어디든 나타날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의 유명세도 유명세지만 그의 범상치 않은 미모 때문이기도 했다.
“좀 웃고 다니지. 얼굴 아깝다.”
그가 교내 식당에 등장하니 누군가 그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 분수를 모르는 같잖은 평가질을 철저하게 튕겨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그 말을 한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다가 얼굴을 벌겋게 붉히고 어딘가로 도망갔다. 다니엘은 다시 먹을 것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학 이래 이런 일은 연구실에서도, 연구실에 가는 길목에서도, 차를 타고 등교할 때도, 수업을 들을 때도 항상 일어나다가 한 학기가 지나니 이제 좀 잠잠해졌다. 물론 그런 소리가 들릴 때마다 다니엘 스톤하츠가 쎄~한 눈빛으로 가만히 쳐다보니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것이다. 뒤에서 뭐라고 수군거리든 상관없었고 어차피 막을 수도 없는 짓이다. 하지만 앞에서 그러는 건? 그를 우습게 본다는 것이다.
감히
‘주제 파악 못 하는 것들이 이렇게 많으니.’
다니엘은 바깥 풍경을 잘 볼 수 있으면서도 약간 그림자 진 테이블에 앉아 셀레나 카토가 준비한 도시락을 천천히 음미하며 먹었다. 예전에도 주는 대로 먹었지만 지금은 맛을 하나하나를 잘 느끼면서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감각을 날카롭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렇게 감각을 날카롭게 하여 정보를 수집할 때는 저런 버러지 같은 것들이 싸는 배설물들은 잘 피해줘야 했다. 관찰력이 비상하게 높아지면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 혹은 왜곡적 언어를 흡수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한 가지는 타인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공격적 방어를 하는 것이다. 다니엘 스톤하츠는 태생이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종자였기 때문에 당연히 두 번째 방법이 최고였다. 아무것도 아닌 말, 눈빛 같은 것으로 다치고 싶어 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도현 킬스버그는 누구나 좋은 건 한눈에 알아보는 법이라고 말했지만, 다니엘 스톤하츠는 그 말이 틀린 말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엔 베이징 교외에 위치한 중력 연구소로 다들 출장을 왔다. 베이징 물리학과와 연구진들이 협업하여 물리 연구를 하고 있었다. 주로 미시 상황에서 4대 상호작용 변환과 초기 우주 모델을 연구했다.
“치엔 박사.”
커다란 공동(空洞)을 진공 상태로 만들고 그 가운데 필요한 입자를 뿌린 후 중력 마법을 구현하여 그것을 플랑크 길이에 근접하도록 줄인다. 그 후 중력이 인력에서 척력으로 바뀌는 순간의 변화를 관찰한다. 플랑크 길이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블랙홀이 형성되고 입자가 증발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대단한 컨트롤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어차피 사람의 눈이나 감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치엔위 박사도 공동 앞에 설치된 기계 안에 들어가 감각을 유도하고 있었고 왕리밍 교수도 밖에서 화면을 보고 있었다. 포스트 닥터와 박사생, 석사생들도 모두 와서 지켜보고 있었다.
왕리밍 본인은 마도사이긴 해도 중력 마법을 잘하진 못했지만 그와 별개로 중력 마법에 대한 이해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치엔위에게 세세하게 지시했다. 그리고 그가 실험을 진행했다. 아주 찰나의 반응이기 때문에 이렇게 거대한 연구소에서 하는 실험이 뭐 이렇게 싱겁냐고 할 수도 있겠다. 치엔위는 곧 기계 안에서 나왔다. 그리고 왕리밍과 함께 데이터를 살펴보았다.
“역시 우주의 농도가 높았을 땐 전자 모형의 에너지 준위 이동과 같이 빛 에너지를 방출, 흡수해서 중력 준위를 만드는 느낌이죠?”
“사실 미시 상황에서도 플러스, 마이너스 대전 같은 건 없는 거 아냐? 내가 카시아키 교수님 퀘이사 논문들을 백 번도 더 읽어봤는데 역시 이상하단 말이야.”
“만약에 그런 거면 일반물리학부터 책을 전부 다 갈아엎어야 하겠네요.”
“흐음. 한 번만 더 해보자. 37차 진행합니다. 공동 내부 클리닝 얼마나 진행됐습니까?”
“12% 진행 중입니다. 45분 후에는 완료됩니다.”
“알겠습니다.”
왕리밍과 치엔위, 그리고 박사생 몇 명이 붙어서 이전 자료와 지금의 자료를 비교해보며 초기 우주 모델 시뮬레이션을 살펴보았다. 베이징대 물리학과의 슈퍼컴퓨터 <천문>과 중력 연구소에 있는 슈퍼컴퓨터까지 연산을 함께 하는데도 가끔 지직거렸다.
“이제 연습시켜.”
대략 8시간에 걸쳐 4번의 실험 데이터를 얻은 왕리밍은 슈퍼컴퓨터용 물리 모델 프로그래머를 포함한 자신의 박사생과 연구소 박사들을 데리고 대략 빅뱅 이후 1억 년 이내까지의 초기 우주 모델을 살펴보고 있었고 박사 2년 차 학생 하나와 석사생 2명이 아까의 기계로 들어가 중력 마법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다니엘 스톤하츠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구소 환경 내에서 고질량점(인공천체)을 만드는 법을 중점으로 연습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다니엘도 고전하고 있었다. 그가 중력 마법을 연습할 수 있는 건 거시 환경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런 미시적 환경에서 중력 마법을 조절하는 것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것보다도 훨~씬 마력량을 적게 쓰면서 섬세한 마도식이 굴러가는 의학 마법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왕리밍이 이번 학기부터 중력 연구소에서 다른 학생들과 연습하는 것을 허락해준 것이었다. 안 그랬으면 연구소를 통째로 날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 선배, 이거 봐요.”
“엉?”
방금까지 치엔위와 함께 탈탈 털리던 물리 모델 프로그래머이자 물리학 박사생인 사각 안경을 쓴 천페이페이가 멘탈을 회복하고 치엔위에게 말을 걸었다.
“짠.”
“오.”
갑자기 홀로그램이 모니터실 전체에 퍼지며 거대한 초기 우주 모델이 등장했다. 3D 초기 우주 지도라고 할 수 있겠다. 시간의 흐름이 표시되어 있었고 초기 은하나 천체들이 아주 세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현 우주에서 관측 가능한 천체들로 만든 우주 지도는 있었지만 초기 우주 지도까지 이렇게까지 세세한 것은 없었다. 랩에서 보는 초기 우주 모델은 단순화된 모델이기 때문에 이 정도로 시각화된 건 아니었다. 치엔위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거 논문 쓰려고?”
“써볼까요? 그냥 재미로 만들었는데.”
“야, 누가 깃발 꽂기 전에 먼저 써야지.”
“아이, 글 쓰는 거 귀찮은데.”
가장 시간 축을 앞당긴 것이 27만 년 정도였다. 천체는 없고 빛무리만 가득한 시절이다.
“증기 사우나 같은 느낌일까?”
“들어가자마자 흔적도 없이 타버리겠지만요.”
“눈으로 보면 이런 느낌일 거란 말이지?”
“멀리서요.”
아름다웠다.
천페이페이가 슈퍼컴퓨터를 끌어다 쓰자 시뮬레이션 모델을 보고 있던 왕리밍이 인상을 팍 쓰며 애들을 혼내려다가 홀로그램 영상을 발견했다. 다들 우와 하고 홀로그램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리밍이 손짓해서 모니터실 안의 불빛을 모두 껐다. 그러자 진짜처럼 선명한 가상의 우주가 모니터실 안을 가득 채웠다. 1분에 1억 년씩 흘러가는 모델이었다. 다들 동화 속에서 나온 마법에 취한 듯 우주의 아름다움에 잠깐 빠져들었다.
“와, 교수님, 이거 너무 좋은데요? 우리 물리과학동 시청각실 같은데 전시해 놓으면 안 되나요?”
치엔위가 약간 들뜬 목소리로 왕리밍에게 속닥거렸다. 사실 그녀는 중간에 퍼뜩 정신이 들어 천페이페이를 말리려고 했었다. 슈퍼컴퓨터를 이 정도로 끌어 쓰고 있으니 교수님이 노발대발하실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먼저 다른 조명을 낮추게 하고 천페이페이의 초기 우주 3D 모형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근방에 있는 한 은하의 형성 과정을 관찰하면서 대답했다.
“글쎄….”
“왜요?”
“…세, 아니, 그 미친, 아니, 그… 퀸 교수가 예전에 이런 거 하려고 했는데…. 박사생 때….”
“그래요?”
“응, 걔 원래 일루젼 마법이 좀…. 학회 부지랑 전국적으로, 그러니까 한국에 광역 도시별로 3차원 플라네타리움을 만들려고 했거든.”
그는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 말없이 추억을 떠올렸다. 치엔위가 물었다.
“왜 안 했어요?”
“그 정도 마법을 영구화시키는 방법은 아직 없잖아. 그래서 학회장님도 포기했지. 그래도 인상 깊으셨나 보더라고.”
“그래요? 이건 되지 않을까요? 물론 슈퍼컴퓨터는 필요하겠지만?”
“…그래, 이게 교육용으로는 더 좋겠네…. 그리고 간소화해야지. 이런 거에 슈퍼컴퓨터를 그렇게 쓸 거냐? 이거 논문은?”
“쓴대요.”
“그래.”
교수님 마음에는 썩 차지 않는 모양이다…. 치엔위는 그의 눈치를 보면서 그렇게 판단했다. 그런데 마음에 안 차면서 왜 안 혼내시는 걸까? 아니, 이런 게 어떻게 마음에 안 차지? 진짜 쩌는데? 연구소 소속 연구원 하나가 말했다.
“교수님, 이거 끄셔야겠는데요. 점점 갈수록 연산이 너무 커지는데요?”
“아. 천 박사, 꺼라.”
“아, 넵!”
다니엘도 말없이 아름다운 우주를 바라보고 있다가 홀로그램을 끄니 아쉬움마저 들었다. 모형일 뿐인데도 이렇게 아름답다. 그들이 추구하는 힘은 바로 이 우주를 형성하고 멸망시키는 힘이지 않던가. 그들이 세상사에 둔감해 보이는 것은 자신보다도, 이 지구보다도, 태양계, 우리 은하보다도 훨씬 더 크고 큰 것을 항상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자신이 추구하는 힘보다도 너무나 티끌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도 둔감해지는 것이 아니던가. 다니엘은 그런 사유를 잠깐 동안 했다.
그리고 다 같이 베이징대로 돌아갔다. 박사 1년 차 몇 명은 조교를 하러 갔고 나머지는 랩에서 각자의 논문이나 공부에 매진했다. 교수님은 잠깐 동안 오피스에 계시다가 외출하셨다. 오후 10시 30분. 다니엘은 오늘 하기로 마음먹은 것을 다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간 아쉬움이 들었지만 그 아쉬움을 끊어냈다. 이건 장기전이다. 전처럼 조급해하지 말자. 아마 아까 본 것 때문인 모양이다. 그 잔상이 아직 눈에 어른거렸다. 그건 이 땅에 존재하는 그 어떤 보석보다도 값진 것이었다.
다니엘은 물리과학동 건물 밖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불빛에 가로막혀 별빛이 땅에 닿지 못했다. 그는 디바이스를 들었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도현 씨.”
[다니엘.]
약간의 연결음이 지나가고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다니엘은 잠깐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하늘을 바라본 채 가만히 있었다.
“…오늘 굉장한 걸 봤습니다. 우주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아름답고 대단했습니다.”
[플라네타리움 같은 건가요?]
“비슷합니다. 하지만 컴퓨터로 우리가 관측한 거의 모든 천체와 은하의 정보를 넣은 것이라 좀 더 실제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멋있었겠어요.]
“함께 봤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 도현 씨에게 보여드릴 수 있었을 겁니다.”
도현이 웃었다.
[오늘 다니엘은 어쩐지 어린아이 같네요. 망원경으로 처음 토성을 찾아본 아이 같아요.]
다니엘은 잠깐 멈칫했다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왜일까. 그녀의 말이 감미롭다.
“네.”
[토요일에 봐요.]
“네. 안녕히 주무십시오, 도현 씨.”
[다니엘두요.]
그녀가 전화를 끊고 다니엘도 디바이스 화면을 껐다. 조금 더 불빛이 없는 곳을 바라보니 별이 몇 개 보였다.
“잘도 연애질을 하는구나.”
어느새 치엔위가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녀도 다니엘이 보고 있는 쪽의 하늘을 바라보며 별을 한두 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금연 껌을 씹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습니다.”
“그래? 영 시간 낭비 같던데.”
“어떤 남자랑 만나셨습니까?”
“엉? 어~ 학부생 때 잠깐 우리 랩에 있던 남자 선배랑 만났는데. 뭐, 썩. 아, 근데 그 남자 이름이 뭐였더라.”
치엔위 박사는 딱 한 번 해본 연애 상대의 이름이 기억 안 나 잠깐 골몰해야 했다.
“우리 랩을 졸업한 남자인가요?”
“졸업? 풋. 야, 우리 랩 나온 박사 졸업자 아무도 없어.”
“…그렇습니까?”
“우리 교수님이 얼~마나 깐깐한지 니가 아직도 감이 안 잡히냐? 아, 내가 얼마나 후회한 줄 아냐고. 그래도 퀸 교수님 랩은 한 명은 나왔다니까, 한 명은. 아, HNU 갔어야 했어, HNU!”
“10년 동안….”
다니엘도 잠시 말을 잃었다. 그는 순수하게 궁금하여 치엔위에게 물었다.
“교수님께서 치엔 박사님께는 졸업장을 주실까요?”
“…니가 교수님한테 한번 물어볼래? 어?”
치엔위는 그의 질문에 약간의 내상을 입고 다니엘을 띠겁게 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씹던 껌을 바닥에다 뱉고 새 껌을 씹기 시작했다.
“우리 교수님들 잘 보면 성향이 둘로 나뉜단 말이야. 제자 교육에 신경을 아예 안 쓰는 사람이랑 엄청 쓰는 사람이랑. 물론 둘 다 기준은 높지만. 들어보니까 학회장님은 원래 안 쓰는 쪽이었단 말이야? 그냥 자기가 다 못 하는 거 종 노릇이나 시키겠다, 이런 마인드로 제자를 굴리셨는데 그 밑에서 나온 교수님들이 아주 극단적으로 양쪽으로 나누어진다고. 우리 교수님처럼 하나하나 다 따지면서 갈구는 사람이랑 그냥 학회장님처럼 알아서 하라고 방치하되 제대로 안 해오면 졸라 갈구는 스타일이랑. 누가 졸업장을 더 잘 줄 거 같냐?”
“신경 쓰는 쪽이 더 잘 줄 것 같습니다.”
“아니라고, 멍청아. 신경 쓰는 쪽이 당연히 더 안 주지! 듣고 있냐. 퀸 교수님 랩은 하나는 나왔다니까!”
그게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사람의 심리는 투자한 만큼 매몰 비용을 아까워 자기 합리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다니엘이 물었다.
“왜죠?”
“내가 교수여도 그럴 거 같거든. 내가 이 정도까지 투자를 했는데도 졸업 기준을 못 맞춰? 뭐, 이런? 괘씸죄지. 우리 랩 중간에 나간 인간들 여기 근처에도 못 와. 우리 교수님 눈에 띄면 죽어.”
다니엘은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왕리밍이 저렇게까지 제자의 일거수일투족에 열이 뻗치는 것도 상당 부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도 나중에 올라와 보면 안다. 올라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치엔위가 말했다. 구름이 별을 가리자 치엔위는 쩝, 하고 입맛을 다시곤 다시 랩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깐 보다가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의 주변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말이 통하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아칸소 프로젝트에 대해 왕리밍이 다른 교수들과 원격 통화를 나누던 그 날, 그때 그들이 나누던 말을 듣던 때는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건 처음으로 그가 이 세상을 이루는 힘에 관심을 갖고 배우기 시작하던 그때의 충격과 비슷했다.
말이 통하는 사람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 더 멀리 보는 사람들. 홀로 그들을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들은 함께하기 때문에 더욱 강하고 더 멀리, 그래서 더 빠르게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아는 것이, 자신이 느낀 것이 전부인 줄만 알았던 과거를 반성했다. 꺼져버린 줄만 알았던 앎에 대한 욕망이 다시금 불씨를 틔워 타올랐다.
처음에는 그들이 자신과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무리에 속하고 보니 또 제각각 달랐다. 다니엘은 곰곰이 생각했다.
‘학회장님이 보내주는 대로 여기로 왔지만… 나는 세현 퀸 교수님이나 알라나 루소 교수님 쪽이 좀 더….’
지금까지 일련의 사건들을 보아도 왕리밍과 그는 잘 맞지 않았다. 이것도 성급한 판단인 것일까? 교환학생 제도 같은 건 없나? 다른 교수님 밑에서도 공부해보고 싶다. 치엔 박사가 말한 것처럼 교수들의 성향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난다면 그에게도 선택의 재량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이런 말을 했다간 석사 1년 차 주제에 건방짐이 하늘을 찌른다고 하겠군.’
다니엘은 잠깐 거울을 바라보았다. 뜻을 세운 자에게 성급함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호텔 방에 도착한 다니엘은 곧장 샤워실로 직행했다. 명상을 해야겠다. 마도 순환을 하면서 명상을 하는 전통은 어디서 온 것일까? 전쟁터를 전전하며 하루하루 마력이 모자랄 때는 그걸 매우 귀찮게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면 명상은 정말 필수 불가결했다. 너무 많은 것을 머리에 집어넣으면 왜인지 비우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는 샤워를 하고 호텔방 중 하나를 명상실로 바꾼 곳으로 들어가 1시간가량 명상에 돌입했다. 이미지, 생각, 사유가 머리로 흘러들어왔다가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저 지금 이 공간에 존재하는 자신을 음미하다가 나왔다.
“…….”
그리고 바로 자려고 침실로 들어왔다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잠깐 그녀를 바라보았다. 셀레나 카토가 그의 침대 왼편에 별로 편하지도 않은 자세로 자고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학회에 비서관으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중국 쪽 연구실들을 통합 관리하고 있었다. 물론 왕리밍 교수의 랩이 가장 최우선이고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일단 학회 소속의 다른 연구실과 연구소들도 몇 개 더 있었기 때문에 출장이 잦았다. 그의 은퇴 전까지는 이스트드래곤에서의 일까지 다 하고 있었으니.
역시 매저키스트다.
다니엘은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셀레나.”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얼굴을 덮은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 넘기며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셀레나.”
그녀가 움찔했다. 그리고 인상을 약간 찌푸렸다가 눈을 서서히 떴다. 파란색과 녹색, 갈색이 오묘하게 섞인 눈동자가 천천히 드러났다. 그녀는 잠깐 다니엘의 얼굴을 직시한 채로 2초 정도 가만히 있다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상반신을 헐벗고 있었고 그의 오른팔은 자신의 얼굴 옆에 있었으며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아니, 아니…. 필요한 거 두러 왔다가…. 그러니까….”
학생들은 셀레나가 준비하는 건강 식단을 아주 잘 소비했다. 선수들과는 달리 말이다. 공부하느라 챙겨 먹는 것도 부실한 그들이 건강해지는 것을 보는 건 아주 보람찬 일이었다. 그녀의 담당이었던 다니엘도 물론 그의 가이드에 잘 따르긴 했지만….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다니엘과 눈을 마주친 채 그렇게 변명했다.
“알겠습니다. 계속 그렇게 있을 겁니까?”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그가 약간 몸을 뒤로 물렸다. 또 괴롭힌다…. 그녀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그를 외면한 채 말했다.
“필요하다고 한 책 전부 사 왔어요. 스케줄도 보냈구요.”
“네.”
그녀는 자느라 흐트러진 옷깃을 바로 하며 말을 이었다.
“이번 주 주말에 도현 씨랑 데이트할 레스토랑도 가장 좋은 자리로 예약했고 선물도 준비해놨어요. 토요일에 출발하기 전에 차에 미리 실어 놓을게요.”
헐벗은 남자는 침대에 앉아서 여자를 보고 있고 여자는 옷과 머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거리감이 존재했다. 동시에 긴장감도. 다니엘이 물었다.
“학회에서의 일이 구단에서의 일보다 더 바쁜 모양이죠?”
“관리해야 하는 사람이 훨씬 많이 늘었으니까요.”
“잠은 하루에 몇 시간씩 잡니까?”
“네 시간 정도 자요.”
“한 비서관이랑은 자주 만납니까?”
“아칸소 프로젝트 준비 때문에 한 달 정도는 같이 먹고 잔 것 같은데요. 안전 문제 때문에 인원이 자꾸 변경되어서 생필품 조달 계획이 계속 수정되고 있어요. 제가 소드마스터 선수 매니징 하는 거나 마도사 관리에 대해서도 전문가긴 하지만 그렇다고 소드마스터 군대를 관리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젠데 말이에요. 거긴 몬스터가 나와서 보급을 유지하기가….”
셀레나가 하소연을 하듯 그렇게 줄줄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다니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머리를 다시 묶고 있었다. 그는 널브러진 그녀의 가방을 챙겨서 잠갔다.
“방은 많습니다. 피곤하시면 자고 가셔도 좋습니다.”
“…외간 여자가 여기서 자고 가면 도현 씨가 싫어하실 텐데요.”
“도현 씨는 셀레나를 외간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셀레나가 한숨을 쉬며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도현 씨가 하는 말이 맞다는 걸 점점 알겠네요. 다니엘이 절 기만하고 있다고.”
그러자 다니엘이 웃었다.
“도현 씨는 제 영리함을 사랑하시죠.”
셀레나는 그가 건네는 가방을 탁 빼앗듯 가져갔다. 다니엘이 셀레나에게 이어 말했다.
“그리고 셀레나는 제 강함을 사랑하구요. 저는 제 대단함을 잘 알아봐 주는 여자들이 싫지 않습니다.”
“…….”
셀레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다니엘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가르쳐준 대로 말이다. 아름다웠다. 셀레나는 약간 상처받은 얼굴이 되었다가 그대로 그의 방을 나갔다. 다니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
“어땠습니까, 어제 미팅은?”
“약간 떨렸지만 괜찮았어요. 저보다 더 문외한도 있더라구요.”
“부를 가진 사람들 중엔 뛰어난 사람들이 많지만 부를 가졌다고 전부 뛰어난 것도 아니죠.”
“중요한 건 돈인가요?”
“필요한 게 돈일 뿐이죠.”
테라스 밖으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고급 린넨 커튼이 하늘거리고 향기가 좋은 다양한 꽃들이 테라스 한쪽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다.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아주 근사했다. 한쪽에 튀어나온 곳에는 꽃나무가 그득하여 조명으로 비추니 아주 환상적이다. 맛있는 음식을 함께하며 도현 킬스버그와 다니엘 스톤하츠는 천천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도현은 로제를 한 모금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
“여자들이 유달리 쇼핑을 좋아하는 게 왜인 줄 알아요?”
“왜입니까?”
“거기서 이 구두를 살지, 저 구두를 살지, 이 옷을 살지, 저 옷을 살지 선택할 수 있다는 게 기분 좋거든요. 럭셔리 브랜드에 가면 서비스도 철저하구요. 기분에 거슬리는 게 없죠. 하지만 무엇보다도 선택할 수 있는 것, 그걸 살 수 있는 것 그 자체로 기분이 좋으니까요.”
“그래서 도현 씨도 쇼핑을 좋아하시는 겁니까?”
“그것뿐만은 아니지만,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겠죠.”
도현이 기분 좋게 부는 바람을 느끼며 석양을 바라보았다.
“이런 걸 보면 기분 좋아요. 근사하잖아요. 바다가 좋아요. 파도 소리도 좋아하구요. 맛있는 음식도 좋아요. 이런 걸 즐길 수 있는 내가 좋죠. 다니엘은 좋아하나요?”
“별은 좋아합니다. 도현 씨가 좋습니다. 도현 씨의 말을 듣는 게 좋습니다.”
“기분 좋았어요. 어제 그 미팅에 참여하면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를 아주 대단하고 중요한 사람으로 대우해줬어요. 이게 조금은 생소하게 느껴진다는 게 억울할 정도로 기분 좋았어요. 힘을 가진다는 게 이런 걸까.”
도현이 말했다.
“그래서 송선호도, 에반도, 다니엘도 절대 놓지 않으려고 하는 걸까.”
“내가 중요하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삶은 대단히 특별해지죠.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건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충분히 나 자신을 긍정하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마저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틀렸던 걸까요?”
“글쎄요. 적어도 저는 틀렸었습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척하면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으니까요?”
“그래도 도현 씨는 아니었습니다. 특별했습니다.”
“다니엘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볼지 궁금해요. 캘리 박 같은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볼지도 궁금해요.”
“저도 학회장님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볼지는 조금 궁금하군요.”
식사를 끝마치고 테이블을 치우고 진주색 카우치로 자리를 옮겼다. 석양이 진 하늘이 오묘한 색깔로 변했다. 수많은 별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베이징에서는 도시의 불빛이 너무 강해 별을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아름다워요…. 다니엘은 왜 별이 좋아요? 예뻐서?”
“그건….”
다니엘은 바로 대답하려고 했다가 잠깐 말을 멈췄다. 막상 대답하려니 잘 모르겠다.
“빛나고… 말씀하신 대로 예쁘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주가 끝날 때까지 어떤 식으로든 남을 것이고….”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강력함의 상징이라는 말인가요? 지구의 거의 모든 것도 태양이 존재하니까 이루어질 수 있는 거니까요?”
“네.”
다니엘이 도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현 씨 말이 맞습니다.”
“그러면 왜 태양이 아니라 별인가요? 너무 멀리 있잖아요.”
“아마… 멀리 있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 여기까지 도달하는 별이 지금은 빛을 잃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죠. 실제로는 어떨지 궁금합니다.”
“멀리 있으니까 더 좋다라….”
“그 너머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존재하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 힘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요. 아마 다니엘이 밝혀내겠죠?”
도현은 그의 보라색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그렇게 속삭였다. 다니엘이 그녀의 시선을 마주친 채 잠깐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기분이 이상합니다.”
“나쁘다는 건가요?”
“아뇨. 그 반대입니다.”
다니엘은 힘을 주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도현이 어머, 하며 웃었다. 그는 그대로 도현을 카우치로 쓰러뜨렸다. 그리고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도현은 그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으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셀레나에게 제가 도현 씨를 기만한다고 말했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하게는 이 남자에게 기만과 사랑은 같은 거다, 라고 말했는데요.”
“그럼 저에 대한 도현 씨의 사랑은 무엇과 같습니까.”
“우월한 수컷에 대한 암컷의 본능적인 기호랄까.”
“저는 수컷인 거군요.”
“수컷이죠.”
다니엘은 약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선물이 있습니다.”
“또?”
그는 도현의 입술에 훅 입을 맞췄다. 도현은 눈을 감으며 그의 머리를 감싸 잡았다. 그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입술을 뗐다. 타액이 잠시 이어졌다가 떨어졌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아름다운 미소였다. 도현의 눈빛이 마치 ‘진짜?’라고 되묻는 것 같았다. 다니엘도 말 대신 혀를 살짝 내밀어 보여주었다. 그의 혀에 은색으로 빛나는 둥근 금속이 있었다. 새끼손톱보다 약간 작은 정도의 금속이었다.
“차가운 걸 좋아하시죠?”
그는 카우치 앞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손을 뻗었다. 얼음이 담긴 모히또가 있었다. 그는 얼음 하나를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아래로 내려갔다. 도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의 얼굴이 기대에 찼다. 그가 그녀의 스커트를 한 손으로 스르륵 걷어 올렸다. 그의 손이 뜨겁게 느껴졌다.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요사스러울 정도로 색기가 도는 다니엘 스톤하츠의 모습은 너무나 섹시했다. 이런 얼굴은 도현만이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니엘….”
도현은 그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그는 그녀의 파란색 속옷을 벗겨냈다. 그리고 잠깐 웃는가 싶더니 그녀의 치마 속에 얼굴을 넣었다.
“아…!”
도현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혀가 차가웠다. 아니, 그의 혀에 박힌 은 피어싱이 놀라울 정도로 차가웠다. 그의 부드러운 혀가 그의 여성기를 핥아 올렸다. 동시에 피어싱의 딱딱한 감촉이 아주 자극적이었다.
“으응…! 아! 하아….”
도현은 그대로 관능에 젖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이 늘어진 다니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지다 손에 감아쥐었다. 다니엘은 그녀의 탄력 있고 부드러운 허벅지를 자신의 어깨에 더 걸쳐 올리며 잠깐 거기에 입을 맞췄다가 다시 그녀의 다리 사이를 정성스럽게 핥았다. 구석구석 그가 닿지 않은 곳이 없도록 시간을 들여 모든 것을 핥았다.
“하아…. 다니엘…. 좀 더…. 으응…. 애태우지 말고 제대로….”
그녀가 다니엘의 머리를 손으로 잡고 꾹 눌렀다. 다니엘이 카우치를 손으로 잡으며 움찔했다가 웃었다.
“시간을 들인 보람이 있을 겁니다. 제게 맡기십시오.”
“아…! 입 대고 말하지 마…. 아앗.”
그리고 그는 그녀의 클리토리스 주변을 둥그렇게 피어싱으로 그리듯 문질렀다. 그녀의 허리에 힘이 들어가며 몸을 심하게 움찔거렸다.
“흐읏….”
그는 드디어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피어싱으로 강하게 압박하며 빠르게 비볐다.
“아앗! 다니엘…! 미칠 것 같아. 으응…! 아아아……!”
그녀가 그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세게 잡아당기며 신음을 크게 냈다. 그녀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그는 쪼오옥 하고 소리를 크게 내고는 그녀의 여성기에 입술을 뗐다. 그의 입술이 야하게 번들거렸다. 그는 그녀의 위로 다시 올라왔다.
“마음에 드셨습니까?”
“으응….”
그녀는 아직도 쾌락에 빠져 속눈썹을 떨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다니엘은 뿌듯함을 느꼈다. 대답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주 만족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쥔 그는 꽤 흡족한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감상했고 그녀는 그의 섹시한 얼굴을 잠깐 보다가 그의 팽팽해진 앞섶을 손으로 꽉 쥐었다.
“윽…!”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팔을 살짝 꺾어 그녀에게 더 몸을 숙였다. 가슴이 서로 살짝 닿을 정도였다. 도현은 그의 얼굴을 보았다. 고통과 쾌락에 찌푸린 그의 얼굴은 몹시나 아름다웠다. 이마, 반듯하고 높은 코, 의외로 글래머러스한 입술, 깨끗한 피부. 도현은 그의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우리 여기서 이래도 돼요?”
“안 될 것도… 없습니다.”
“으음, 그래도 다니엘은 안 될 것 같은데. 속옷 더럽힌 채로 밖에 돌아다닐 거예요?”
“저는… 참아야 하는 겁니까? 으윽.”
“어떡할까.”
“도현 씨….”
그는 도현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그녀의 뺨에 조르듯 입을 맞췄다. 도현이 웃었다.
“좀 더 세게?”
“으윽, 아픕니다.”
“아픈 거 좋아하면서.”
“그렇긴… 하지만…. 아윽.”
도현은 손가락에 힘을 줘서 그의 기둥을 꽉 쥐였다. 그가 헉 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섹시했다.
“참아요. 내 남자가 밖에서 꼴사납게 하고 다니는 거 싫으니까.”
“도현 씨….”
그의 체취가 향기로웠다. 괴로운 모양이다. 그가 아픈 걸 좋아하는 건 살아있다는 실감 때문일까? 너무 큰 걸 바라보는 사람들은 현실과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기 쉽다. 완벽주의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매저키스트 성향을 띠는 건 아무리 뛰어나도, 잘해도 완벽할 수는 없는 자신에 대한 벌을 받고 싶기 때문이라지 않은가.
다니엘 스톤하츠가 모든 것에 무감한 것처럼 보인다고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다. 그가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진 것은 아니다. 그가 아무리 강해 보인다고 해서 그에게 취약한 부분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의 교활함은 적을 만들고 그의 뛰어난 이해력과 적응력은 자기 자신을 너무나 순식간에 변하게 만들어 중심을 잃게 만들 수도 있다.
강한 남자의 약점은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옳다. 중요한 것은 그도 그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도현에게 지배당하고 싶어 하지 않는가.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도록.
힘을 가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둘은 오래도록 입을 맞추며 서로를 애무했다. 석양이 다 지고 밤이 다가와 서늘한 바닷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별빛을 찾아냈다. 그건 무엇일까. 기대, 희망? 가장 오래가는 관계는 결국 필요로 묶인 관계다. 도현 킬스버그와 다니엘 스톤하츠는 분명 도현이 다른 남자들과 맺은 관계보다도 훨씬 오랫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높았다. 도현은 강해지기로 마음먹었고 그도 도현이 강해지기를 바랐다. 그라는 남자의 닻이 될 수 있도록.
행복이란 건 찰나의 착각 같은 것이다. 어차피 인간은 불행을 더 잘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강함은…. 힘이란 행복의 순간에서도, 불행의 순간에서도 자기 자신을 긍정하게 만든다.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 없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고 도리어 누군가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 굉장한 만족감이 드는 일이다.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기분 좋아요.”
“앞으로 더 기분 좋아질 겁니다.”
“기대돼요.”
“저도 기대됩니다.”
미래의 비전과 그것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오늘도 내디뎌 간다는 기쁨. 그런 걸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다니엘 스톤하츠의 말이 맞다. 다른 어떤 남자도 그와 같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사랑합니다, 도현 씨.”
그는 도현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도현은 그의 반짝이는 보랏빛 눈동자를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을 보듯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사랑해요, 다니엘.”
<러블리 빗치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