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38)

<2화>

거리로 나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눈을 씻고 헌책방이 있었던 자리를 재차 본다 한들 평범한 폐가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노파가 부득불 쥐여 준 책만은 그대로였다. 꿈이 아니라는 증거가 내 손안에 있었다.

그렇다면 귀신에 홀렸나? 오소소 소름이 돋으며 노파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쫓기는 사람마냥 허겁지겁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하지만 고작 책 한 권이 내 인생을 완전히 뒤바꿀 줄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노파를 찾았을 것이다.

《제1장: 수상한 그 악인의 일기》

긴긴 여행을 마치고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그동안 방치되었던 집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는 일이다. 그런 연유로 나는 노동요를 틀어 놓고 짐 정리와 밀린 집 청소를 시작했다.

모든 일을 끝마쳤을 때는 하늘이 어둑어둑해졌을 무렵이었다. 냉장고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배달 음식을 시키고 침대 헤드에 편안히 기댔다.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나니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다는 게 실감 났다.

왠지 울고 싶은 감정이 들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만큼 완벽했던 여행이었기에 더욱 후유증이 컸다.

맥주 캔을 따고 순살 치킨 하나를 집어 먹었다. 기름지고 짭짤한 맛이 환상적이었다. 허기졌던지라 음식이 동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알코올 쓰레기로 불릴 만큼 워낙 술을 못 했기에 한 캔을 다 비우자 기분 좋게 알딸딸했다. 나는 마지막 치킨까지 해치우고 기분 좋은 포만감에 만족하며 바닥에 누웠다.

이대로 양치하고 자면 바로 잠들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침 졸음도 슬금슬금 몰려오기 시작해서 침대에 누우려면 지금이 적기였다. 하지만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남은 오늘을 꽉 채워서 농땡이 피우고 싶었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수상한 책이 보란 듯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저걸 어떻게 하지? 나는 책을 집어 들고 고뇌했다.

책방과 노파가 사라졌던 걸 생각하면 찝찝해서 그냥 내다 버리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아, 이놈의 호기심이 언젠가 날 죽일 거야.”

나는 편한 자세로 고쳐 앉고 책을 펼쳤다. 새 종이 특유의 빳빳함이 짜릿했다. 세련된 책의 표지와 달리 글은 수기로 적었는지 만년필의 잉크가 한 면을 빼곡히 메웠다.

하여간 여러모로 독특한 책이다. 누가 요즘 시대에 수기로 글을 써? 이쯤 되니 어쩌면 이게 책이 아니라 낙서 가득한 공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거운 눈에 힘을 주며 차근차근 글자를 훑어 내려갔다.

「카이사르 25년 03월 02일.

오늘은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날이었다. 플라스마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이들만 모이는 세니스 아카데미 말이다. 나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자주 어울렸던 제이든과 에단도 함께 입학했다.

그야 제이든은 유일한 황위 계승자였고, 에단은 차기 마탑주로 손꼽히니 그들이 나와 함께 아카데미에 진학하는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당연한 순리와도 같다.

처음 강당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꽤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신시아라는 웬 평민이 주제넘게 입학식에서 선서를 하면서 심기가 뒤틀렸다. 황태자, 차기 마탑주, 공녀를 놔두고 평민에게 선서를 시키다니?

듣기로 그 평민은 수석 특별 전형으로 아카데미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 가난한 자작도 백작도 뭣도 아닌 평민 계집애가 수석을 하고, 우월한 우리들을 상대로 선서를 하는 것까진 자비롭게 이해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제이든이 그 계집애한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또한 그 애는 눈에 띄고 싶어서 아주 작정을 한 건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외양이 특이했다. 바다처럼 푸른 머리칼에 녹안이라니?

앞자리 남자애들은 그 평민을 두고 엘프의 현신이니 뭐니 하고 떠들어 대는데 듣기 싫어서 입 좀 다물라고 했다.

그 평민은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투성이다.

제일 마음에 안 드는 점을 세 가지 뽑자면 첫 번째는 그 애가 나와 같은 반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제이든이 그 애에게 호감을 가졌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그 애가 정령술 천재니 뭐니 하는 것이라는 거다.

에단은 다른 반이라 그런지 그 평민에게 흥미가 없어 보였지만 그것은 두고 볼 일이다. 나는 한때 내 소꿉친구였던 애들이 고작 하찮은 신분의 여자애에게 홀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다.」

「카이사르 25년 03월 03일.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 평민은 정령술에 분명한 재능이 있었다. 정령술 선생이 평민을 바라보던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명하다.

평민은 물, 불, 바람, 대지 중에서도 물 속성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러니 열일곱 살의 나이로 상급 정령을 동시에 세 마리나 불러내지.

찰나에 불과했지만 내가 잠깐이라도 상급 정령을 보고 입을 벌렸다는 것이 부끄럽다. 설마 누가 보진 않았겠지?

만약 그렇다면 그 기억을 무덤까지 혼자 가지고 가야 할 것이다. 입 밖에 내기라도 해 봐. 가문의 명예를 걸고 파멸시켜 버릴 테다.

평민은 선생의 호들갑스러운 칭찬에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그 얼굴을 보는데 갑자기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쳐서 참느라 힘들었다.

어쨌든 오늘 나는 명백한 실책을 저질렀다. 아주 먼 옛날, 어머니는 귀족이라면 응당 표정 관리에 능해야 한다고 하셨다.

제이든이 평민에게 이상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이상, 그리고 우연찮게도 그 애가 정령술이 특기인 이상 그 애는 스스로 내 악연이 되기를 자처한 것과 다름없다. 앞으로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자려는데 낮의 일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 아니던가. 잠도 안 오고, 화도 나고……. 차라리 밤을 새우며 여기에 감정을 털어놓으려고 한다.

이곳의 선생은 철저하게 실력이 있는 학생들을 편애했다. 그 건방진 사내는 감히 님프 공작가의 막내딸인 나를 신랄하게 지적했다.

‘님프 양은 자연 친화력이 형편없군요. 손위 형제의 능력은 대륙에서 손꼽힐 정도라고 들었는데 말이죠.’라고.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큰 소리로 그리 말했다. 그런데 평민이 나를 흘긋 쳐다보는 게 아니던가?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속으로는 나를 비웃고 있었다는 데 100골드를 걸 수도 있다.

세니스 아카데미의 교육이 훌륭하다는 명성이 자자해서 기대했건만, 순 거짓말이다. 내게 모욕감을 안겨 준 그 선생 같지도 않은 자는 조만간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차라리 아버지가 붙여 줬던 사람이 훨씬 낫다. 그는 비굴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적어도 말은 가려서 했다. 그 이유는 아마 우리 가문이 정령술로 명망이 높기 때문이겠지.

과외를 받을 수만 있다면 이까짓 수업 당장 그만둘 텐데. 더 이상 정령술 과외를 지원해 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나는 왜 아버지와 오라버니처럼 정령술에 소질이 없을까?

걸어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교습을 받았지만 나는 아직도 하급 정령 하나 제대로 못 불러냈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개인의 성격에 따라 더 친화력 강한 속성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내가 당신을 닮아 불같은 성격이라며, 불 정령사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종국에 아버지는 나를 포기했다. 네 살이라니. 어머니의 죽음에 아무리 충격을 받았다 한들 너무 어린 나이 아닌가?

아버지가 날 포기하자 시종들마저 날 포기했다. 그들은 항상 내 뒤에서 수군거린다. 그들은 아주 오래 적부터 그래 왔다. 그래서 난 날 지키기 위해 가시를 길렀지만, 안타깝게도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날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오라버니는 내 일상적인 신경질에 질린 지 오래다. 그래서 지금은 남보다 못한 사이고. 근데 웃긴 건, 애초에 오라버니는 내가 왜 화내는지 알아보려 시도조차 안 했다.

오랜만에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니 기분이 더 나빠졌다.」

“와, 이거 대박이다.”

저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책을 덮고 여운에 몸을 맡겼다. 뻔하디뻔한 사랑 이야기라니! 앞으로의 전개가 완전 예상 가능한 게 딱 내 스타일이잖아?

우리나라에서 한참 먼 곳에서 이런 감성의 책을 얻다니 이런 행운이 다 있나. 나는 내가 짬이 날 때마다 이 책을 붙들고 있을 것을 예감했다.

“아니, 이걸 책이라고 말할 수 있나?”

《아로네의 일기》는 잉크 자국에서도 알 수 있듯 정식으로 출판된 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아날로그 한 작가 지망생이 공책에 끼적인 글 같았다.

하지만 오타 하나 없는 글자로 추측컨대 작가는 꽤나 작품에 애정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그런 글이 어쩌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책방에 남겨지게 됐을까?

나는 책장 한편에 《아로네의 일기》를 꽂아 두고 불을 껐다.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 올리고 가만히 눈만 깜박이자 어둠이 드리운 천장 위로 빛바랜 눈동자가 둥실둥실 떠올랐다.

소름 끼치도록 예리한 시선을 생각하자니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그 노파, 정말로 뭐 하는 사람인 걸까? 처음 책을 받아 들던 그 순간에도 의아했지만, 책을 읽고 나니 더욱 궁금해졌다.

도대체 내가 이 책을 좋아할 거라는 건 어떻게 안 거지? 관상을 보면 그 사람한테 어울리는 책이 반짝 떠오르는 신기라도 있는 걸까?

하필이면 여행 마지막 날에 그 책방을 발견했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더 빨리 발견했다고 한들 노파와 책방이 눈 깜짝하는 사이에 사라졌던 과거가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에휴, 그래. 아쉬워할 필요가 뭐가 있어.”

노파의 정체와 의도 따위가 중요한가 지금? 당장 내일부터 다시 알바 구해야 하는 게 중요하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기억 저편에 노파의 얼굴을 묻었다. 어차피 답이 안 나올 고민,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할 바엔 차라리 잠이나 자는 게 훨씬 이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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