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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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루를 세 파트로 나누어 썼다. 일어나자마자 출근해서 오후에 걸쳐 알바를 하고, 집에 돌아와 진한 아메리카노와 함께 공부를 한다. 그리고 자기 전까지 책을 읽는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당연히 마지막 파트이다. 수기로 쓴 소설은 흔한 덕질 하나 하지 않는 내게 신선한 활력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과자를 집어 먹으며 책을 펼쳤다.
「카이사르 25년 03월 06일.
에단도 평민에게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네가 물의 정령을 동시에 3마리나 불러냈다는 애야?’ 하며. 내가 알던 에단이 아닌 것 같았다.
에단은 항상 세상사에 해탈한 눈을 하고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침잠된 눈은 현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혹은 사형수이던가.
에단이 눈에 이채를 띄는 건 우리가 그 애에게 불가능을 확언할 때뿐이었다. 비마법사인 나와 제이든이 알고 있을 정도로 복잡하고 어렵다고 소문난 마법을 그 애가 못 할 것이라 단언했을 때 말이다.
하지만 에단은 언제나 우리의 예상을 뒤엎고 마법을 성공시켰다. 에단과 쌓은 유일하게 즐거운 추억이 그 순간뿐이라 똑똑히 기억한다.
그렇다면 에단에게 평민은 어려운 마법과 같은 존재인 걸까? 지루한 일상에 나타난 오락거리와 같은 존재로 여긴 걸까? 아니면 평민이 본인과 마찬가지로 천재 소리를 들어서 흥미를 느끼는 걸까?
에단은 단 한 번도 나를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 애는 오늘 처음 본 여자애에게 내가 바랐던 눈길을 그렇게나 쉽게 던졌다. 평민이 상급 정령을 불러냈다는 이유, 단지 그거 하나 때문에.
평민은 주위의 반응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는지 다만 ‘그런데?’라고 말하고 자기 할 일에 집중했다.
내 눈에는 그 모습이 싸가지 없어 보였는데 에단에게는 달리 보였던 걸까. 그 애는 답지 않게 시원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그러고는 마음에 든다며 친구를 하자고 했다.
도대체 뭐가 마음에 들었는데? 그 꼴을 보고 하마터면 교양 없이 소리 지를 뻔했다. 하지만, 뒤늦게 나타난 제이든이 에단의 손을 쳐 내며 싸늘한 눈빛을 보냈을 땐 미처 탄식을 참을 수 없었다.
그때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단 하나였다. 왜 쟤야?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들과 사이가 멀어진 지 오래고, 말을 걸어 봤자 무시할 게 뻔해서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덕분에 앞으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날 버리고 택한 그 주제넘은 계집애의 삶을 불행하게 해 줄 것이다.」
「카이사르 25년 03월 12일.
오늘 북부에서 왔다는 아이에게 평민의 운동복을 숨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먼저 운동장에 도착해서 곧 보게 될 장면을 기대했었다.
날 졸졸 쫓아다니는 수하들은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해 주었다. 그 계집애는 황태자님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얼굴을 붉게 물들일 것이다, 드디어 한풀 꺾일 것이다, 나에게 겁을 먹고 앞으로 쥐죽은 듯 살 것이다…….
그런데 그 여우 같은 평민은 제이든과 함께 멀쩡한 꼴로 나타났다. 그 애는 한눈에 봐도 큰 품의 운동복을 입고 있었고, 제이든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이 우리가 있는 곳까지 걸어오는 시간이 얼마나 아득하게 느껴지던지. 내가 본 광경을 부정하고 싶었다. 어떻게 황태자나 되는 애가, 게다가 나랑 약혼이 오가는 애가 다른 여자애한테 운동복을 빌려줄 수 있지?
모든 수업이 끝났을 무렵에는 이미 제이든과 평민에 대한 소문이 전교에 퍼진 후였다. 모두가 쉬쉬하며 둘의 사이를 추측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 황급히 입을 다무는 애들이 수두룩했다.
내 평생 오늘처럼 수치스러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평민은 날 건드린 대가를 똑똑히 치러야 할 것이다.」
나는 혀를 끌끌 차며 책장을 덮었다. 건드린 대가를 똑똑히 치러야 할 것이라니. 읽을수록 느끼는 것이지만 소설의 화자는 인성을 집에 두고 다니기라도 하는 것인지 참 못됐다.
네 살 되는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동시에 아버지가 아로네를 포기했다고 했나?
삐뚤어진 환경에서 자란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그걸 굳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풀어야 했는지 의문이다. 아무리 아버지가 아로네를 포기했다 한들, 적어도 한 번쯤은 그만하라고 말렸을 텐데.
하나밖에 없는 형제와도 그다지 사이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또한 가문의 트레이드마크이자 아버지와 오빠는 능숙하게 하는 정령술을 본인만 못 해서 열등감도 상당해 보였다. 그래서 그 스트레스를 애꿎은 데 풀고.
제이든과 에단이 왜 아로네와 생깠는지 깊이 공감됐다. 나라도 저런 애와 친구하고 싶지 않을 거다. 게다가 아로네는 기본적으로 본인을 제외한 사람들을 하대했다.
친구라고 부를 법한 관계를 ‘수하’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아로네의 귀족 우열 사상과 오만함이 진하게 묻어 나왔다.
“그리고 왜 열등감과 질투를 죄 없는 애한테 풀지? 정령술을 못 하면 죽어라 연습해서 실력을 끌어올리던가, 아니면 아예 다른 길을 찾아도 되잖아.”
제이든이랑 에단이 신시아한테 관심을 보여서 신경 쓰이면 성격 고치고 다시 다가가면 되고. 전혀 관련 없는 제삼자한테 분노를 돌림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되지.
한숨 섞인 하품이 나왔다. 도대체 몇 년도에 태어난 작가인지, 요즘 트렌드를 대놓고 벗어나는 요소가 많았다. 하지만 아직 책을 그만 읽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로네의 사고의 흐름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악인의 관점으로 쓰인 소설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페이지는 한참 남아 있었다. 극 초반인 지금과 달리 전개가 더 진행되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혹시 알아. 내가 이 선명한 악인을 이해하게 될지?
***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설 속 일기의 날짜가 4월의 끝에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나는 아주 조금씩 아로네에게 연민을 갖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아로네의 모든 행동을 이해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처음 글을 읽었을 때보다 ‘왜 저러는 거지?’ 하고 혼자서 의문하는 횟수가 감소했을 뿐.
「카이사르 25년 04월 08일.
오늘 정령술 선생이 혀를 차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나처럼 정령술에 재능이 없는 학생은 처음 본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며칠 전 아버지께 그 남자를 해고시켜 달라고 부탁드렸지만 역시나 답신은 없었다. 그래서 난 매일 아버지께 편지를 보냈고, 그렇게 독촉하고 나서야 드디어 아버지가 오늘 답장을 해 주셨다.
하지만 내용은 절망스러웠다. 아카데미는 따지자면 황궁의 세력권 안에 있어서 자신에게는 인사권이 없다는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실망스러웠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차별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는데 명색인 공작인 사람이 아무런 조치도 안 하다니. 짜증 나서 아카데미에 와서 처음 받는 편지에 답장도 안 해 줬다.
아버지는 신경도 안 쓰시겠지만.」
「카이사르 25년 04월 12일.
이봐, 너, 거기. 이런 식으로 수하들을 부르다 드디어 그들의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 주기로 했다. 한 달 동안 내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 그 정도 의지와 담력을 가진 애들에겐 당연한 대우이다.
그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평민을 괴롭혔다. 속내가 뻔하다 못해 투명하지 그지없다. 허울뿐인 알랑거림이 같잖았지만 어찌 되었건 굳이 내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돼서 묵인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 평민이 어찌나 독하던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세는 곧았고, 눈은 총명하게 빛났다. 일상이 괴롭힘인데 어떻게 그리 의연할 수 있지?
초지일관 무관심으로 응수하는 평민의 모습에 전의를 상실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내가 암묵적인 주축인 것을 분명 알 텐데도 평민은 입 한 번 뻥긋하지 않았다.
어쩌다 눈이 마주칠 때도 그 애의 눈동자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애들은 지켜보는 내가 흠칫할 정도로 날 선 말을 했다. 하지만 평민은…… 어쩜 그리 단단할 수 있지?
오히려 내가 탈력감이 들어 이 부질없는 짓을 그만둘까 싶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애가 제이든이나 에단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 식은 줄 알았던 불이 활활 타올랐다.
이미 내 곁을 떠난 애들이란 걸 안다.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우리 사이는 결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평민이 그 애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 왜 이리 화가 날까? 언젠가 오라버니가 말했던 것처럼 내가 답 없는 애라서?
모르겠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이런 것밖에 없다.」
「카이사르 25년 04월 20일.
날이 좋아서 산책하다가 승마장에서 제이든과 평민을 보았다. 반사적으로 능소화 덩굴 뒤에 숨었는데 내가 왜 그랬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제이든은 평민에게 승마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평민은 말이 무서운 듯 앓는 소리를 냈고, 그 모습을 보며 제이든이 햇살처럼 맑게 웃었다. 그 미소를 봤을 때 가슴 한구석이 알싸하게 아렸다.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서 둘을 지켜본 것 같다.
……기분이 더러웠다.」
「카이사르 25년 04월 22일.
이틀 전 본 광경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다정해 보이는 둘의 모습이 어찌나 신경 쓰이던지 두통까지 일 정도였다.
그래서 결국 오늘, 히스테리를 이기지 못하고 평민에게 손을 올리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주변엔 내 무리밖에 없었다.
나도 내 행동에 놀라 아무 말도 못 했는데 평민은 담담하게 말했다. 다 때렸냐고.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평민은 자리를 떴다. 스쳐 지나가며 본 그 애의 볼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때 왜 그랬을까?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답답하다.」
「카이사르 25년 04월 23일.
오늘 에단이 잔뜩 화가 난 채로 날 찾아왔었다. 그는 날 보자마자 음절 하나하나를 씹어 내뱉듯 말했다. ‘그동안 많이 참았다. 처신 똑바로 해.’라고. 서늘하게 읊조리는 게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