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카이사르 25년 07월 28일.
실질적으로 제이든과 난 약혼한 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그 애가 상식이 있다면 오늘 나를 에스코트하러 와야 했다. 하지만 내가 제이든을 너무 과대평가했나 보다. 제이든은 오지 않았다.
분노보다 체념의 감정이 더 컸다. 아마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애가 오지 않을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제이든이 오지 않은 것은 연회장에서 그 애가 벌인 일에 비하면 약과였다. 우리 가족이 도착하고, 뒤를 이어 주인공인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가 연회장에 입장할 때까지 그 애는 나타나지 않았다.
일단 나는 황후 폐하께 형식적인 축하를 건넸다. 폐하는 신부 수업을 잘 따라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나를 칭찬하셨다.
분위기는 꽤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닫힌 줄 알았던 문이 열리고, 제이든과 함께 그 망할 평민이 들어오면서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평민은 2주 전, 내가 처음으로 골랐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제이든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와 황후, 황제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 옆에 서 있는 평민은 조금 곤란해 보였고.
황후 폐하는 그 꼴을 보고 거의 쓰러지려고 하셨다. 그분은 급히 방으로 돌아갔고, 주인공이 사라진 연회장에는 웅성거림이 쏟아졌다.」
「카이사르 25년 07월 28일.
나는 제이든이 그렇게까지 책임감 없는 애일 줄 몰랐다. 그런 애인 줄 알았다면 진작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 애에게 가서 말했다. 이런 덜떨어진 애 데려다 시위할 바엔 차라리 단식 투쟁을 하는 게 더 효과 있을 거라고. 우리의 약혼이 이런 쇼 하나로 쉽게 깨질 것 같으냐고.
신부 수업이 그때 빛을 발했다. 견고한 가면을 유지하고, 목소리에 힘을 실어서. 그리고 당당하게 연회장을 나갔다. 솔직히 말해서 방에 돌아와서 많이 울었다. 오직 내 베개와 이 일기만이 알 테지만.」
***
“제이든 얘 미친 거 아니야?”
나는 씩씩거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신시아한테 아무 잘못이 없는 건 팩트고, 모든 과실은 제이든에게 있다.
왜냐면 제이든과 함께 등장했을 때 신시아는 곤란해했고, 그건 연회장에서 벌어진 모든 일이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걸 함의하니까. 나는 신시아의 신분이 ‘평민’이라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되뇌었다.
물론 아로네가 마냥 선한 사람은 아니지만, 나는 제이든이 더 질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아로네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떻게 한 나라의 황태자라는 놈이 그런 무책임한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가 안 됐다.
나는 제발 아로네가 노여움을 제이든에게만 쏟아 내길 바랐다.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 25년 08월 03일.
최악의 날이다. 오늘 일어나 보니 응접실에 그 평민이 있었다. 그 지겨운 푸른 머리칼을 봤을 땐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의연했던 며칠 전과 달리 나는 불가항력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삿대질까지 하며 네가 여기에 왜 있냐고 소리쳤다. 평민은 어울리지도 않는 값비싼 드레스를 입고 등장했을 때처럼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 표정이 질리도록 가증스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대답은 소란을 듣고 내려온 오라버니에게서 나왔다. 오라버니는 제이든에게 평민을 소개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평민의 재능을 높이 사 그 자리에서 후원을 약속했고, 따라서 앞으로 우리 저택에서 지낼 거라고 했다.
당연히 나는 격렬하게 항의했다. 나도 엄연히 이 저택의 구성원인데 왜 내 의사는 물어보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러나 오라버니. 아니, 이젠 그런 호칭으로 불러 주기도 싫다. 데네브는 내 말을 무시로 일관했다. 그리고 평민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 애한테 강습이라도 해 주려는 거였을까? 데네브는 답지 않게 친절하게 굴었다. 나를 스쳐 지나가며 그 애에게 지었던 눈빛을 똑똑히 기억한다.
왜 신은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 걸까? 왜 내 화를 자꾸만 돋울까?」
「카이사르 25년 08월 20일.
그동안 신경 쓸 게 너무 많아서 다과회 초대장을 모조리 거절하다가 오늘에서야 겨우 짬이 생겨서 레이첼이 주관한 다과회에 다녀왔다.
나를 제외한 애들은 그동안 틈틈이 교류를 한 것 같았다. 애들은 제이든과의 약혼이 성사됐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호들갑스럽게 축하를 건넸다.
그 애들은 내 감정을 알아차리고 축하하는 걸까, 아니면 줄을 잘 탔다는 자신의 선택에 기뻐하는 걸까. ……사실 답은 뻔하다.
우리는 한참 동안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 또한 평민의 이야기만 쏙 빼고 그간의 일상을 말해 주었다.
애들은 내가 매일 황궁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며 수업을 받는다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속은 텅 비었다는 것도 모르고.
애들은 의식적으로 황후의 탄신 연회를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병적으로 가십을 좋아하는 에이미가 다른 걸 묻고야 말았다. 님프 가문이 평민을 후원하기로 한 것이 사실이냐고.
그 애들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연회장에서 아버지와 평민 사이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나도 ‘님프’니까.
나는 담담히 그렇다고 답했다. 그들은 나름대로 표정을 숨기려고 했지만 눈빛에 서린 호기심까지 가리진 못했다. 혹독한 수업을 받은 결실이 그때 발했다. 그들의 가면은 내 것에 비하면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그래. 제이든의 바람을 건드리면 내가 진심으로 분노할 것이고, 객식구를 건드리면 원래부터 싫어했으니 평소처럼 굴 거라고 생각했나 보지?
하지만 그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모욕을 당할 거라면 차라리 전자가 나았다. 여러 정치적 이익이 얽히고설킨 약혼은 그깟 쇼 하나로 파기되지 않으니까.
그러나 후자는 달랐다.
나는 정령술로 인정받기 위해서 평생을 노력했다. 한데 그 평민은 내 일평생의 노력을 비웃는 재능을 가졌다. 그리고 아마 내가 영원히 갈구할 아버지의 인정을 단숨에 받아 냈다. 거기다 심지어 내 저택에 기어들어 오기까지 해?
내 밑으로 들어오길 자청한 주제에 감히 내 역린을 건드리는 꼴이 같잖았다. 테이블을 뒤집어엎기엔 그간 배운 게 많아서 그냥 조용하게 경고했다. 표정이 볼만했다. 그 애들은 앞으로 주제넘게 굴지 않을 것이다.」
「카이사르 25년 08월 25일.
오늘은 1년에 한 번 있는 등불 축제일이다. 수도인 발할라에서 열리는 축제인데, 웅장하고 아름답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대륙 가장 아래에 사는 사람들도 축제를 보기 위해 수도로 상경한다.
매년 있는 축제이지만 나는 유난히 그 축제를 좋아한다. 아주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소원을 적은 등불을 띄웠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기 때문이다.
흥겨운 축제 분위기에 들떠서 평소라면 절대 먹지 않을 길거리 음식도 사 먹고, 좌판을 깔고 노래를 부르는 남자를 구경하기도 하고, 요즘 인기 있는 인형극이라며 쩌렁쩌렁하게 홍보하는 아이의 말에 홀려 극을 감상하기도 했다.
인형극은 정말 쓰레기 같았다. 옛날 옛적에 금발의 왕자와 녹안의 공주가 있었다. 둘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왕자를 남몰래 사모했던 검정 마녀의 저주로 공주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왕자는 절규했으나 때마침 방랑하던 신원 미상의 마법사를 만났다. 마법사는 왕자의 절절한 사랑에 감동하여 그와 힘을 모아 마녀를 죽였다. 마녀가 죽음으로써 공주의 저주는 풀렸고, 왕자와 공주는 기쁨의 키스를 나눴다.
막이 올라가고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나는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왕자, 공주, 마녀, 마법사. 내용을 극적으로 바꾸었을 뿐, 인형의 외양과 기본적인 줄거리 틀은 지금 아카데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분명했다. 나는 당장 저 극단을 잡아 목을 매달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강경하게 나오면 사람들은 저 허구의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믿을 것이 뻔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기분이 상한 채로 광장을 벗어나는데 광장 구석에서 시시덕거리고 있는 익숙한 낯들을 발견했다. 에단과 평민이었다.
내 시선을 느꼈던 것인지 그들도 곧 나를 발견했다. 평민은 예의 그 난감한 얼굴을 했고, 에단은 인정사정없이 얼굴을 구겼다.
그래서 울컥했지만 잠시 후에 등불 행사가 있을 것이고, 기분 상한 상태로 등불을 날리고 싶지 않았기에 그냥 지나쳤다.
나는 가장 화려하고 큰 등불과 함께 홀로 나룻배에 올라탔다. 마법이 걸린 배는 알아서 느릿하게 호수의 가장자리로 헤엄쳤고, 누군가를 시작으로 하나둘씩 밝은 등불을 띄웠다.
수많은 등불이 찬란하게 밤하늘을 수놓았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어머니, 사람들이 저를 마녀라고 불러요. 신의 버림을 받고 스스로 악에 물들기를 선택했다는 괴물 말이에요. 세상에 절 위해 주는 사람은 없어요. 가끔은 저 자신조차도 그러해요.
정말 저는 버림을 받은 걸까요? 왜 천사는 제게 웃어 주지 않죠?」
나는 난도질된 글자를 내려다보며 사색에 잠겼다.
어떠한 경우에도 명백한 악행은 정당화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신념이 나는 남들보다 유난히 강했다. 하지만 아로네의 경우는 조금 참작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소설 한 페이지를 가득 메운 그 애의 절절한 감정이 자꾸 신경 쓰였다. 글로써만 존재했던 허구의 인물이 비로소 살과 뼈대를 얻고 내 마음속에서 구체적인 형상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외롭게 등불을 날리는 아로네의 모습이 상상됐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쭉 혼자서 축제를 구경했을까?
문득 속이 갑갑해졌다. 아로네에게는 정말 아무도 없다. 가족은 이미 글렀고, 제대로 된 친구는 하나도 없으며, 믿음직한 시종 하나 없다. 그런 환경에서 애가 똑바로 자라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아로네가 패악을 부리고 신시아를 괴롭히는 건 비단 그 애만의 잘못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