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다. 그래, 이쯤 되니 인정해야겠다. 내가 아로네를 진심으로 동정하게 됐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누구라도 아로네의 인생사를 들여다보면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소설 전개가 어떻게 진행될 지 추측하며 눈을 감았다. 아로네가 변호할 수 없을 정도의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벼락같이 눈을 떴다. 이상하리만치 몸이 붕 뜬 느낌이 들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자각몽인가? 사위는 고요하고 어두웠다. 나는 기묘한 기분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개를 반 정도 틀었을 때 이 공간에 나 외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가까스로 비명을 삼켰다.
수상한 인영은 등불을 켜 놓고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여자였지만 어쩐지 친근감이 들었다.
하지만 낯선 공간은 미지에 대한 불안감을 유발했다. 나는 앙다문 입술 사이로 혹여나 탄식이 새어 나갈까 봐 힘을 주고 바쁘게 눈알을 굴렸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낯선 풍경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직 여자는 나를 눈치채지 못했다.
여자의 방으로 보이는 이곳은 마치 중세 시대 귀족의 침실처럼 고급스러웠다. 내 자취방을 적어도 3개는 이어붙인 듯 넓었고, 화려한 샹들리에는 내 키만큼 거대했다.
낮은 명도의 청록색 벽지가 창문 사이로 새어 든 달빛을 받아 스산한 느낌을 풍겼다. 진회색 캐노피를 단 침대는 거구의 성인 두 명이 누워도 넉넉해 보였다.
그때, 숨 막히는 정적을 가르고 구슬픈 소리가 들려왔다. 울음소리가 새어 나갈까 두려워 억지로 틀어막은 듯 먹먹한 소리였다.
나는 이곳이 꿈속이라고 확신하면서도 벌벌 떨었다. 여자가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며 깃펜을 움직였다. 그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처량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켜고 말았다.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자 신비로운 자안과 눈이 마주쳤다. 여자의 눈이 당황과 공포로 물들었다. 그가 종을 울리기 위해 손을 움직이는 모습이 느리게 지나갔다.
나는 여자의 행동을 저지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동시에 뇌를 거치지 않은 헛소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누구세요?”
여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또한 주먹으로 내 입을 내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많고 많은 적당한 말 중에 뭐? 누구세요? 내 임기응변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
“나는 아로네 님프다. 넌 누구지?”
예? 누구요?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멍하니 여자를 쳐다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요즘 즐겨 읽는 소설 《아로네의 일기》의 그 아로네?
《제2장: 몽유 혹은 몽사》
JMT공금
맙소사. 아무래도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소설에 훨씬 더 과몰입했던 모양이다. 소설 속 인물의 외양과 공간을 구체화하는 경지에 도달할 정도로 내가 진심이었다니.
아로네는 언짢은 기색으로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내가 하도 얼빵해 보였는지 어느새 종은 내려놓은 채였다.
아로네는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그에 대한 내적 친밀감이 나름 상당했기 때문에 꿈속에서라도 그 애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아로네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한 당일이라 더더욱 그러했다. 어떤 대답이 베스트일까?
나는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렸다. 문득 마지막으로 읽은 구절이 기적처럼 뇌리를 스쳤다.
‘세상에 절 위해 주는 사람은 없어요. 가끔은 저 자신조차도 그러해요. 정말 저는 버림을 받은 걸까요? 왜 천사는 제게 웃어 주지 않죠?’
어차피 이건 꿈에 불과하니 무슨 말이든 해도 될 테지.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말했잖아. 왜 천사는 네게 웃어 주지 않냐고. 그래서 왔어.”
“……뭐?”
웩. 내가 말했지만 정말 토하고 싶었다.
아로네가 눈살을 찌푸리고 반문했다. 나는 한 발자국 내디뎠다. 아로네가 흠칫하며 다시 종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쓰고 있던 글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몽환적인 눈동자가 의문과 불신, 그러나 약간의 희망을 담고 나를 직시했다.
“증명해 봐.”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을 덜컥 믿을 것이라곤 기대조차 안 했다. 만약 그랬다면 캐붕이었겠지. 만만치 않은 아로네의 모습이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라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뭐라 말해야 아로네가 내 말을 믿어 줄까? 나는 태연한 척 여유롭게 웃으면서도 속으론 열나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가 내가 자각몽을 꾸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고로, 이 공간 안에서만큼은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마음속으로 천사다운 날개가 생기길 염원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하얀 깃털이 멋들어지게 펼쳐지지 않았다.
엥? 나는 팔을 들어 올린 채로 고개를 숙여 등 뒤를 살폈다. 계속 날개가 생기길 빌며 염불을 외웠지만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급기야 나는 입으로 작게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매끈한 등은 변신할 기미가 도통 보이지 않았다. 뭐야, 분명 인터넷에서 자각몽 꾸면 원하는 건 다 할 수 있다고 했는데? ……다 거짓말이었던 거야?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야심 차게 펼쳤던 양팔을 도로 거두었다. 아로네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로네가 속으로 나를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데에 내 손목을 걸 수도 있었다.
“천사는 무슨.”
아로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종을 흔들었다. 나는 황급히 달려가 종을 빼앗았다. 청아한 종소리가 울리긴 했지만 다행히도 시종이 알아차릴 정도로 길게 울리진 못했다. 아로네는 언성을 높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쉿! 나 진짜로 수상한 사람 아니야.”
나는 무해한 낯을 꾸며 내며 아로네를 올려다봤다. 어떻게 꾼 꿈인데 이토록 허무하게 끝낼 순 없었다. 아로네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변명이라도 해 보라는 듯이 고개를 까닥였다. 몹시 거만한 제스처였다.
“내가 인간계……는 처음 내려오는 거라 능력을 못 쓴다는 걸 깜박했네! 하지만 내가 그동안 널 지켜보고 있었다는 증거는 댈 수 있어.”
아로네가 흘긋 책상을 내려다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아마 아로네가 쓰고 있던 것은 일기가 아니었을까?
이곳이 자각몽이든 단순한 꿈이든 본디 꿈이란 세계는 무의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최근 몇 달간 책을 읽다 잤으니 마치 상사몽처럼 아로네를 그려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따라서 눈앞에 있는 아로네가 내 기억에 따라 구성된 존재라면 앞으로 내가 할 말들은 팩트일 수밖에 없다.
“오늘 등불 축제에 갔다 왔잖아. 그곳에서 본 인형극 때문에 기분이 상했고.”
“……사기꾼이군.”
아로네가 책상에 놓인 공책을 탁 소리 나도록 덮었다. 내가 몰래 글을 훔쳐봤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로네의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렸다. 솔직히 조금 쫄았지만 이곳이 꿈이라는 사실을 되뇌며 계속 입을 나불거렸다.
“글쎄. 정령술 선생 싫어해서 아버지께 편지를 보냈지만 무시당했지? 신시아를 괴롭히다가 데네브한테 경고 편지를 받기도 했고, 화를 참지 못하고 신시아의 뺨을 때린 적도 있고. 또 뭐가 있더라. 아, 특히 등불 축제를 좋아하는 이유가 어릴 적 어머니와의 기억 때문인 거 맞지? 음…… 더 해야 하나? 하자면 밤도 샐 수 있어.”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아로네를 쳐다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럴 리 없어.”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예감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가?”
아로네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그 애는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날 원망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로네가 주름이 잔뜩 질 정도로 옷을 꽉 쥐었다. 눈가에 가득 고인 눈물이 달빛을 받고 시리게 반짝였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 애는 한참 동안 감정을 갈무리하다 겨우 말문을 열었다. 목소리가 가냘프게 떨렸다. 그제야 나는 내가 필터링하지 않고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말을 믿게 하는 데 너무 급급했나 하는 후회감이 설핏 들었다.
“……다 지켜보고 있었으면서. 그러면서 천사라고? 17년간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이제야 나타난 당신이? 도대체 그런 모순이 어디 있지?”
나는 감정을 쏟아 내는 아로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비난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예고 없이 마주한 폭발은 급작스러운 만큼 당황스러웠다.
내 무의식이 꾸며 낸 인물치고는 소름 끼칠 정도로 감정 묘사가 디테일하고 현실적이었다. 내 공감 능력으로는 결코 저런 정교한 감정을 못 만들 텐데, 어떻게?
나는 이게 꿈이라는 것도 잊고 아로네의 감정에 몰입했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니 그동안 아로네가 기댈 곳이 얼마나 없었는지, 그동안 혼자 속으로 썩힌 감정이 얼마나 곪아 있었는지 짐작이 됐다.
어쩌면 아로네는 나 같은 존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럴듯한 증거를 들이밀며 네 편이라고 주장하는 사기꾼일지 진짜 천사일지 모를 인물을.
나는 조심스레 아로네를 껴안고 등을 토닥였다. 격정에 싸인 몸이 들썩거렸다. 그 애는 벗어나려 몸을 뒤틀다가, 이내 힘을 풀고 내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물기가 배었다.
“미안해. 이제야 와서 미안해.”
“……거짓말. 결국 당신도 날 버릴 거면서.”
악에 바친 말투와 달리 아로네의 속삭임에는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말끝에서 희미한 불신이 묻어 나왔다. 거짓말쟁이는 아로네였다.
뾰족한 어조는 자기 방어에 불과했고, 결국 그는 떠나지 말라 말하고 있었다. 나는 믿음직스러운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안 그럴게. 세상의 모든 이가 너한테 손가락질을 해도, 심지어 너조차 너를 저버렸을 때도 언제나 네 편이 될 것을 약속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