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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0/138)

<10화>

아로네는 내가 어떤 연유로 마법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인지 묻지 않았다. 나로선 묻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조차 내게 벌어진 이 마법 같은 일에 무지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침묵이 의아하긴 했다. 나도 궁금해서 미칠 지경인데 아로네는 오죽할까? 어쩌면 아로네는 내가 먼저 털어놓길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아로네와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대략 한두 시간 내에 나는 멀미를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2주 내내 그런 식으로 쓰러지다 보니 이제는 적응이 됐다.

하지만 아로네에게는 아니었는지 그 애는 헤어질 때마다 내 이마에 손을 올리며 열이 있나 살폈다. 정말이지, 초반의 경계 어린 모습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촘촘한 속눈썹을 깜박이며 눈썹을 미묘하게 축 늘어뜨리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수치로 환산하자면 그동안 아로네와 보낸 시간은 다 합쳐도 고작 이틀밖에 안 된다. 객관적으로 봐도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나는 아로네를 이상하리만치 쉽게 내 선 안에 들였다.

겨우 한두 시간 동안 아로네와 있었지만, 나날이 그 애가 편해지고 좋아졌다. 아무리 초반의 내적 친밀감이 높았다 할지라도 사람한테 세우는 벽이 무지하게 두꺼운 나로서는 괄목할 일이었다.

아로네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얼마 만나지도 않았는데 그의 달력은 12월의 마지막을 가리켰다. 새해까지 한 시간을 앞두고 아로네가 말했다.

“방학하자마자 황실과 식사를 한대. 우리 가족이랑 같이.”

“와우…….”

그 말을 하는 아로네는 설레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제이든이 싫었다. 하지만 아로네는 제이든을 좋아했고, 나는 아로네의 행복을 바랐다.

제이든의 가족과 밥 한 끼 먹을 기회가 생겼다고 한 것에 대해 축하를 해 줘야 할지 불평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말을 살짝 틀기로 했다.

“아로네, 난 네가 행복한 삶을 살기를 진심으로 바라. 까놓고 말해서 난 제이든이 네 짝이 되기에는 아주 많이 모자라다고 생각하지만, 네가 좋다면 좋은 거겠지. 내가 어떻게 사람 감정을 강요할 수 있겠어? 그래도 너무 걔한테 목매지 않았으면 좋겠다. 걘 네가 소중한 줄 모르잖아.”

내 진심과 애정이 제대로 전달되었기를 소망했다. 아로네의 촉촉한 눈가를 보니 내 뜻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 같았다. 아로네가 말을 고르고 차분하게 얘기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고립되었어. 애정에 목말라 있었고, 관심이 필요했지.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이 그러더라. 나랑 제이든이 결혼하게 될 거라고. 어린 나는 생각했어. 결혼은 사랑해야만 할 수 있는 건데 그 애는 날 사랑해 줄까? 난 제이든과 만나길 손꼽아 기다렸고, 마침내 그 애를 본 순간 깨달았어. 제이든이라면 날 사랑해 줄 수 있을 거라고.”

그 결정이 믿기지 않아서일까? 절로 언성이 높아졌다.

“그렇게 한번 깨닫고 나니까 제이든이 좋아진 거야? 자연스럽게? 그게 가능해?”

“글쎄.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애를 사랑하고 있더라.”

아로네는 우주 한가운데에 홀로 버려진 사람처럼 쓸쓸한 표정을 했다. 사랑을 발음하는 목소리에서 가을 냄새가 났다.

자신을 갉아먹으며 하는 사랑은 절대 좋은 사랑이 아니다. 그건 상대뿐만 아니라 본인에게도 건강하지 못한 사랑법이다. 지나친 열정은 도리어 해가 되기 때문이다.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긴 아로네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차마 하지 못할 말이 입안에 맴돌았다.

‘그러한 범람은 네게 해가 될 거야. 결국엔 널 익사시킬 거라고.’

제이든 하나만 잘라 내도 훨씬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아로네가 답답해서 문득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내가 죽어라 말해도 아로네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로네의 세계에서는 그게 당연했고, 아무리 내가 설득한다고 한들 온 세상을 뜯어고치기엔 그 벽이 너무 견고했으니까.

멍하니 제이든의 이름을 읊조리는 아로네의 얼굴이 처량하면서도 행복해 보였다. 사랑이 뭐길래 기꺼이 을이 되길 자처하는 걸까. 나는 깊은 의문을 느끼며 ‘제이든 반대 운동’은 일단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큰 위기가 찾아왔다.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된 것이다.

매일 밤 마음속으로 아로네의 얼굴을 그렸지만, 꿈은 무슨. 요즈음 나는 몸 한번 뒤척이지 않고 아주 깊게 숙면했다. 그러나 마음은 더없이 불편했고,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아로네를 생각하니 부채감이 들었다.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이 서서히 나를 짓눌렀다. 그러한 죄악은 점점 달력이 넘어가는 아로네의 일기를 볼 때마다 더해졌다.

「카이사르 26년 01월 05일.

오늘이 그 날이었어. 언제나 그랬듯 황제와 황후는 나를 어여삐 여겼고, 아버지와 데네브도 그 자리에서만큼은 정상인처럼 행동했어.

하지만 골칫거리는 언제나 제이든이지. 제이든은 그 자리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을 대놓고 드러내며 황후 폐하께 무례하게 굴었어.

똑똑한 애가 왜 부모 앞에서만 그리 멍청하게 굴까. 그래, 황제가 제이든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채 1년도 안 돼서 정부를 들인 것은 무심한 행동이었어.

그래도 사람이 짐승과 다른 이유가 있잖아. 아무리 싫다고 해도 그렇지,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결국 자리는 1시간도 안 돼서 파하고 말았어. 다 같이 황궁의 정원을 거닐며 소소한 잡담을 가장한 향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는커녕 쫓겨나듯 집에 왔다니까.

오늘 같은 날이면 제이든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미워지곤 해. 그런데 뭐 어쩌겠어.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며.」

「카이사르 26년 01월 12일.

왜 저번 주에 안 왔어? 자주 오는 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왔잖아.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난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아. 너도 잘 알 테지만. 무언가 일이 있어서 못 온 거였다면 빨리 해결해.」

「카이사르 26년 01월 15일.

오늘 석양이 지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간만에 붓을 들었어. 시중드는 애가 세기의 걸작이라느니 뭐라니 하면서 호들갑을 떨더라. 너도 보면 좋아할 것 같아. 원한다면 특별히 선물로 줄 수도 있고.」

「카이사르 26년 01월 18일.

2주 연속이라. 좋아. 최대한의 자비를 베풀어서 딱 한 달까지만 시간을 줄게. 그 이후로도 나타나지 않으면 나도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네.」

「카이사르 26년 01월 23일.

처음엔 신났지만 신부 수업이라는 거 정말 쓸데없는 것 같아. 황후로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언제나 고아한 자세를 유지하고 사교계를 꽉 틀어잡는 게 다래.

그럼 그동안 내가 쌓아 온 지식은 어디로 가는 거지? 현실에서 빛을 보기도 전에 사장되고 마는 걸까? 쓸모가 없을 것이라면 나는 무엇을 위해 수많은 밤을 지새웠던 건지 회의감이 들어.

내가 그 수업에서 건진 것이라곤 표정 관리가 다야. 황궁과 저택을 수도 없이 오고 가며 배운 게 고작 하나라니. 시간 낭비했다는 생각이 요즘 자주 드네.」

「카이사르 26년 02월 05일.

한 달이면 충분하지 않았나? 난 분명 기회를 줬고, 그걸 걷어찬 건 너야. 진심으로 말하건대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카이사르 26년 02월 16일.

……그래도 여전히 보고는 있는 거지?」

「카이사르 26년 02월 27일.

일주일 뒤에 새 학기가 시작해. 올해는 절대로 방과 후 수업으로 정령술을 듣지 않을 거야. 이번 방학 동안 그림 그리는 것에 재미를 붙였으니 그쪽을 선택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카이사르 26년 02월 29일.

오늘 책을 읽다 문득 피로를 느껴서 창밖을 내다봤다가 아버지와 평민이 정원을 걷는 모습을 봤어. 꽤나 편안한 분위기였고, 목소리는 안 들렸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그들의 표정이 밝았어.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평민이 정령을 불러내니까 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며 평민을 칭찬하더라. 아버지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지. 남한테는 그렇게 쉽게 짓는 그 웃음이 왜 나한테만 박할까?

……오늘만큼 네가 간절했던 적이 없을 거야.」

「카이사르 26년 03월 17일.

연락 하나 없이 잠수 타는 애가 뭐가 예쁘다고 계속 일기를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궁금해할 것 같아서 짧게 써. 올해 반 편성은 꽤 만족스러워. 제이든도 에단도 평민도 다 다른 반이야.

그리고 결국 나는 방과 후 수업으로 미술 수업을 듣기로 했어. 생각보다 적성에 잘 맞더라. 그림을 그리면 잡생각이 없어져서 꽤 만족하고 있어. 그렇다고 다른 공부를 포기한 건 아니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

참, 미술 선생이 말하기론 내가 꽤 소질이 있다더라. 그래서 앞으로 한번 열심히 해 보려고.」

「카이사르 26년 06월 25일.

학년 수석을 했어. 내 자리를 되찾아 왔는데 그다지 기쁘지 않네. ……네가 옆에 없어서 그런가 봐.」

「카이사르 26년 07월 13일.

7개월이나 지났어. 너 참 못됐다. 이럴 거면 왜 나타났니? 희망이란 희망은 다 주고 다시 사라질 거면 왜 나타났어? 네가 제일 나빠. 네 불행을 진심으로 빌어.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카이사르 26년 08월 21일.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너무 못돼서 그래? 그래서 날 버린 거야? 」

꾹꾹 눌러쓴 글씨체에서 깊은 절망감이 느껴졌다. 엉망으로 그어진 8월의 일기가 마지막 글이었다.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혹시나 싶어서 착잡한 마음으로 남은 페이지를 훑었다. 그러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새하얀 백지밖에 없었다.

내게는 겨우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로네의 시간은 반년을 뛰어넘은 지 한참이었다. 아로네는 글로 남기기도 두려운 사실을 구태여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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