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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138)

<14화>

데네브의 시선은 정확히 날 향해 있었지만, 그가 던진 물음표는 아로네의 것이었다. 나는 일단 가만히 있기로 했다.

“요즘 한가한가 봐. 쓸데없는 짓을 다 하고.”

“글쎄, 하나밖에 없는 누이가 아둔하게 구는 것 같아서 오라비 된 도리를 했을 뿐이야.”

“농담이었다면 꽤 웃겼어.”

전혀 재밌어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아로네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리고 내 손목을 약하게 잡고 빠르게 데네브를 지나쳤다. 그러나 채 다섯 발자국을 딛기도 전에 나는 데네브에게 반대쪽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어쩌다가 남매에게 양 손목을 내주게 된 나는 애매해진 상황에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아로네가 눈을 부라리며 데네브를 노려보았다.

데네브는 양팔을 들어 올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다소 방어적인 몸짓과 달리 어조는 공격적이기 그지없었다.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마부의 말로는 네가 아카데미에서 퇴소할 때 혼자가 아니었다고 하던데. 학기 시작과 동시에 출입구가 봉쇄되는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학적부에 기입되지도 않은 사람을 데려왔지?”

“그건 네 알 바 아니야. 아버지도 이미 동의하신 일을 네가 뭔데 들쑤셔?”

“동의가 아니라 통보겠지. 그래, 네가 안 하겠다면 직접 묻지. 너, 뭐 하는 애야?”

복도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음에도 불구하고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까닥하면 잡아먹힐 것 같은 사나운 눈빛이 조금 무서워서 슬쩍 아로네를 곁눈질했다.

아로네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든지 본인이 커버 쳐 주겠다는 의미인가?

우다다 쏘아 대는 말을 들어 보니 이미 자기 혼자서 결론 내린 것 같은데 내가 여기서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데네브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코웃음 칠 게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아로네라는 뒷배를 믿고 그냥 또라이처럼 굴기로 결정했다. 나는 침울한 표정을 꾸며 내며 암울하게 말했다.

“좋아요……. 일이 이렇게까지 됐으니 더 이상 숨길 수 없겠군요.”

데네브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아로네는 입술을 꾹 깨물고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데네브는 그 사인을 패배 정도의 의미로 이해한 것 같지만, 그건 데네브가 아로네를 잘 몰라서 하는 얘기다.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을 때 아로네는 저런 표정을 짓곤 한다.

마치 너에게만 말해 주는 비밀이라는 듯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엄숙한 표정은 덤이었다.

“믿는 신이 있나요?”

데네브는 떨떠름해하면서도 일단 대답해 주었다.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르메스 님을 믿지.”

“그렇다면 얘기가 더 쉽겠군요. 사실 저는…… 신계에서 추방당했습니다. 네, 맞아요. 천사였으나 큰 죄를 저질러 날개와 신력을 몰수당한 채로 인간계에 떨어졌지요. 그렇게 갈 곳 없이 방황하는데 자비로운 아로네가 저를 구해 줬답니다. 어때요, 이제 제 정체가 납득이 되나요?”

인자하게 묻는 나 자신이 너무 우스워서 하마터면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어금니를 꽉 깨물며 필사적으로 슬픈 생각을 했다. 아로네는 주먹을 말아 쥐고 간신히 박장대소를 참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치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이 분명해 의식적으로 애먼 곳을 바라보았다.

폭소를 막다 보니 자연스레 생리적인 눈물이 흘렀다. 나는 옳다구나 하며 내 처지가 너무나 기구하고 애처로워서 못 견디겠다는 양 슬픈 시늉을 했다.

“그게 무슨…….”

가장 중요한 데네브는 도저히 못 믿겠다는 표정을 했다. 얼빠진 표정이 꽤 볼만했다. 역시 울리고 싶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방금 본인이 들은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눈물까지 흘리는 내 감정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야 당연히 이해가 안 되겠지. 내가 한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이니까!

얼빠진 데네브의 얼굴을 보고 아로네가 끝내 발작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로네는 숨이 모자라 헐떡이면서도 여전히 멍한 데네브에게 손가락질했다.

나는 끝에 끝까지 완벽한 연기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아로네와 눈이 마주쳐 버려서 그만 경박한 웃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우리는 멍청히 서 있는 데네브를 사이에 두고 미친 듯이 깔깔거렸다.

그제야 데네브는 본인이 장난에 놀아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자연히 올라간 목소리에는 선명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신성 모독죄로 잡혀가는 게 두렵지도 않나 보지?”

나는 거짓말처럼 웃음을 뚝 그치고 정색했다.

“신성 모독죄라니요? 죄가 성립하려면 일단 제가 한 말이 거짓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지금 날 놀리나? 방금까지 저열하게 낄낄거린 주제에 이제 와서 내빼겠다고.”

“제 말은, 제가 거짓말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시게요? 저는 능력도 뭣도 다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정말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데네브 님이 궁금해하시니 그 답을 해 주었을 뿐이라고요. 남의 상처를 굳이 후벼 파시더니 이제 와선 거짓말이라고 제 상처를 매도하시는 겁니까?”

나는 얄밉게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다 궤변이다. 하지만 아주 그럴듯한 궤변이어서 아무리 데네브라도 ‘혹시?’ 싶어진 것이다.

데네브는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분해서 환장하려고 했다. 급기야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나를 위압적으로 내려다보았다.

“건방지게 구네, 감히.”

바르르 떨리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명백한 악의를 마주하자 손끝이 찌릿했다. 이런, 내가 너무 나댔나?

다행스럽게도 아로네가 중재에 나섰다.

“그만. 듣고 싶은 말 들었으면 이제 가.”

“아로네, 너 저런 사기꾼이랑 어울릴 정도로 형편없었던가?”

“입조심해. 사기꾼이라니?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도 없는 마당에 그건 모를 일이잖아. 안 그래?”

“……좋아, 네가 이리 한심하게 구니 나도 이제 손 떼겠어. 쟤가 별 같잖은 천사든 뭐든 간에 다 네 책임이라는 거 명심해.”

“언제는 내 책임 아니었나?”

아로네는 구태여 답을 기다리지 않고 내게 눈짓했다. 나는 데네브를 피해서 멀리 돌아갔다.

상황이 완전히 마무리되고 나니까 잔뜩 화가 난 데네브의 모습 위로 무해한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생각해 보니까 한번 놀린 것 가지고 겁나 씩씩거리네. 개복치인가?

***

다채로운 파스텔 톤의 건물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익숙하지 않은 옷차림의 사람들이 바쁘게 거리를 오갔다.

사람들의 외양이 묘하게 한국인과 달랐는데, 서양인처럼 뚜렷한 이목구비가 그러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뺨을 쓸었다. 조금 다른 겉모습 때문에 손가락질을 받진 않을까 살짝 걱정이 됐다.

“유의미할 정도로 차이 나는 건 아니니까 안심해.”

“어?”

“네 외모 말이야. 플라스마인들이랑 별로 다르지 않다고.”

무심하게 툭 내뱉는 말이 다정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아로네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툭 밀었다.

“그치? 내 이목구비가 좀 괜찮긴 해~”

“……넌 좀 겸손해질 필요가 있어.”

한참 동안 멍을 때리다 보니 마차가 멈추었다. 나는 마부의 에스코트를 예의 바르게 거절하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아로네의 최애 의상점을 올려다보았다. 한눈에 봐도 귀족들만 오갈 것 같은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베이지색 벽돌이 차곡차곡 2층을 쌓고, 넝쿨에서 모티브를 따온 금테 장식이 창문을 구불구불 감쌌다.

밤하늘의 색을 그대로 담아온 지붕은 벽면과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었다. 의상점 앞에 작게 조성된 화단에는 선혈처럼 붉은 장미꽃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간판은 1층 현관 바로 위에 걸려 있었다. 나는 ‘메종드 메리’라는 상호를 읽고 조금 웃었다.

아로네가 손짓하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베키가 문을 열었다. 청아한 종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듣기 좋은 톤의 목소리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VIP에게만 주어진다는 초특급 대기실로 향했다. 침대처럼 푹신한 소파에 앉자 직원이 디저트가 푸짐하게 쌓인 3단 트레이와 찻잔을 들고 왔다.

딸기 타르트를 먹고 있자니 디자이너가 영업용 미소를 띠고 나타났다. 가게에 들어오기 전 보았던 장미처럼 입술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새빨갰다.

“어머, 공녀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아 참, 내 정신 좀 봐. 아카데미 졸업이 얼마 전이었죠? 축하드려요!”

“그래.”

“근데 이분은……?”

디자이너의 입술이 씰룩였다. 고양이 눈을 닮은 안경알이 호기심으로 번득였다.

“이 애의 옷을 새로 맞출까 싶은데. 산적의 습격으로 가진 걸 몽땅 잃어버렸거든.”

아로네가 단칼에 말을 무시해도 디자이너는 기분 상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옷을 모조리 잃었다는 말을 듣고 노골적으로 기뻐했다. 저게 바로 귀족들만 상대하는 사람의 짬밥인가?

디자이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략 몇 벌 정도 맞추실 예정이신지……?”

“급한 것만 지금 맞추고 나머지는 카탈로그를 보고 서신으로 주문할까 해. 일단 외투 열 벌, 평상복 열두 벌, 드레스 아홉 벌, 운동복 일곱 벌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 아, 속옷이랑 구두도 같이 부탁하고 싶은데.”

저기요? 너무나 충격적인 주문량에 사고가 멈추었다. 디자이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로네에게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러고선 그들은 나를 소외시킨 채 디자인 북을 뒤적이며 열띤 토론을 나누었다.

저기요? 지금 얘기하시는 거 제 옷 아닌가요?

나는 어색함에 어찌할 줄 모르고 다 식은 홍차만 연신 들이켜다가 결국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디저트 먹는 일에 집중했다.

나 혼자 2단 분량의 디저트를 해치웠을 때 즈음, 디자이너와 아로네가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흠칫했지만 일단 침착하게 티슈로 입가에 묻은 자국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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