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38)

<15화>

디자이너가 줄자를 야무지게 펼치고 천천히 다가왔다. 나를 무슨 금은보화 보듯이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자본이 낳은 괴물 같았다.

그 뒤로는 쇼핑을 좋아하는 내게도 괴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피팅 룸을 바쁘게 오가며 수십 벌에 달하는 옷을 입었다가 벗었다 하는 지옥 말이다.

내게는 무척 힘들었던 시간인 데 반해 아로네는 가게를 나가면서 매우 만족한 얼굴을 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는 옷가지로 가득했다.

피로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아로네가 나와 같이한 쇼핑을 눈에 띄게 좋아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웃어 버렸다.

***

아로네는 이방인인 나에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지식들을 속전속결로 가르쳐 주었다. 물론 시녀들은 모두 물린 채였다. 애초에 아로네는 식사나 티타임 때를 제외하곤 보통 그들을 부르지 않았다.

가장 먼저 배운 것은 기본적인 예법과 에티켓이었다. 와, 팔자에도 안 맞는 사교술을 배우느라 죽는 줄 알았다. 웬만하면 솔직한 화법을 구사하는 내게 있어서 뭐든 우아하게 돌려 말하라는 가르침은 거의 고문과도 같았다.

끙끙거리며 인사법까지 배우고 난 후에는 실용적인 수업이 이어졌다.

첫 번째로는 화폐 단위였다. 아로네의 저택에서 머무는 한 내가 이곳의 돈을 만질 일은 없을 것 같았지만, 언젠간 일자리를 구해야 했으니 알아 두긴 해야 했다.

“가장 작은 단위는 페스야. 10배수로 단위가 커지는데, 순서대로 브론즈, 실버, 골드지.”

“평범한 중산층이 한 달에 버는 급여가 얼마야?”

“대략 300 골드?”

“흠……. 골드 하나에 만 원 정도 되는구나.”

동전과 지폐를 모두 사용했던 한국과 다르게 플라스마 제국이라는 이곳은 모두 동전으로 통일했다. 다만 특이점이라고 하면, 화폐의 가치에 따라 동전의 크기와 주조할 때 들어가는 금속의 성질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약 만 원에 달하는 골드는 제일 크고 겉면이 샛노랗게 코팅되어 있었다. 그래서 골드는 다른 동전에 비해 묵직했다. 나는 흥미롭게 골드를 관찰하다가 무언의 압박을 받고 잠자코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다음은 정치. 앞으로 플라스마 제국에서 살아가려면 무조건 알아야 하는 지식이니까 똑바로 들어.”

아로네가 정신 차리라는 듯이 눈앞에 대고 짝 박수를 쳤다. 그 잠깐 사이에 졸고 있던 나는 입가를 쓱 닦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다행히도 손에서 축축한 것은 묻어 나오지 않았다.

“현재 황제는 일기장의 연호를 봐서 알겠지만 카이사르야. 카이사르 헤인. 황후는 칼리아 헤인인데, 데우스 왕국에서 잡혀 왔어.”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잡혀 왔다고?”

“8년 전에 전쟁이 있었거든. 그때 데우스 왕국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모든 왕족과 귀족이 숙청당했는데, 그중 공녀였던 칼리아 민튼만 살아남았어. 황제의 첫사랑이자 죽은 정부와 똑같이 생겼다는 이유 하나로.”

“헐, 미친 거 아니야?”

현대 사회에서 살다 온 나로선 무척 충격적인 일이었다. 전쟁이며 팔려 가는 공녀며 하는 것들이 다른 세계의 일처럼 낯설었다.

“아니 어떻게 한 명만 내버려 두고 다 죽여?”

아로네가 고민하듯 탁자 위로 손가락을 두드렸다. 잠시 후 그가 작게 탄식했다.

“엄밀히 말해서 한 명만 살아남은 건 아니야. 고일인지 가일인지 하는 남자도 간신히 생을 부지했어. 그리고 막내 왕자는…….”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 중 첫 번째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나는 아로네를 보챘다.

“막내 왕자는 뭐?”

“그 당시 왕자는 대역 죄인으로 몰려 쫓기고 있었어. 나이도 어리고, 제국과 왕국 양쪽에게 쫓기고 있었으니 아마 죽었을 거야. 시체는 못 찾았지만.”

나는 오늘 수업 중 처음으로 흥미를 느꼈다.

“몇 살이었는데?”

“열한 살.”

아로네가 내 표정을 보고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게 되었지. 언젠가 한 번쯤은 만나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왜?”

“그 왕자, 뛰어난 정령술사였거든. 외모도 유명했고. 초상화를 본 적은 없지만 듣기론 숲처럼 푸른 녹안과 어두운 갈색 머리칼이 신이 공들여 만든 것 같았대.”

어머, 얘 봐라? 나는 건수를 잡았다는 양 빙글빙글 웃었다. 아로네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나는 인심 써서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황태자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지?”

“제이든 헤인 맞지? 이야…… 이름 한번 기깔 나게 멋들어지네.”

“하, 저 말투…….”

아로네가 골이 울린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내 일상적인 가벼운 표현이 진저리가 나는 것이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아로네는 유난히 내 말투에 난색을 표했다. 귀족 아니랄까 봐, 정말 교양 빼면 시체다.

“내가 뭐?”

데네브를 놀릴 때 지었던 표정을 그대로 재현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정확히 이해했지만 나는 못 알아들은 척할 것이고, 그러므로 앞으로도 내가 네 뜻대로 살 일은 죽어도 없을 것이라는 의미가 담긴 표정이었다.

그러자 아로네가 얕은 한숨을 내쉬고 잠시 느슨해졌던 분위기를 다시 조였다. 쳇, 나는 아쉬움에 입맛만 다셨다.

한국 살 때는 도대체 어떻게 그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 낸 거지? 습관적으로 하던 공부가 허상처럼 흩어지고 나니 글자를 읽고 필기하는 모든 행위가 토 나올 정도로 지겹게 느껴졌다.

“……이외에 국내 정세에 가장 영향력 있는 건 우리 님프 가문이야. 대대로 강력한 정령술사를 배출해 왔기에 명망이 높지. 가족 구성원은 설명 안 해도 되지?”

“응. 계속해.”

“플라스마 제국은 완벽한 전제 군주제야. 우리 가문만이 유일하게 황실에게 권력이나 영향력에서 뒤지지 않지. 그러니 나머지 가문들은 구태여 알 필요 없어. 중요한 것은 마탑이야.”

“에이, 그래도 다른 가문들도 미리 알아 두면 언젠가 쓸 데 있지 않을까?”

아로네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저 미소가 바로 누군가를 지옥에 처넣기 전에 짓는 미소인가? 왜 시녀들이 아로네의 말에 벌벌 떠는지 지금 이 순간 깊이 공감이 됐다.

그래도 요즘 아로네는 내가 틈날 때마다 잔소리해서 그런지 전보다 시녀들한테 잘해 줬다. 뭐, 갑자기 덜 차가우니까 시녀들이 뒤에서 뭐 잘못 먹은 거 아니냐고 수군대기는 하더라.

하여튼 나는 일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지기 전에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다시 생각해 보니 쓸데가 없을 것 같네. 하핫!”

그럴 줄 알았다며 아로네가 피식 웃었다.

“일기장에 쓴 적 있는데, 기억해? 황실과 마탑이 평화 조약을 맺긴 했지만 여전히 암묵적인 긴장 관계에 있다는 거.”

“응. 그래서 어렸을 때 그 생쇼를 했던 거잖아.”

그 말에 아로네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과거를 반추하는 찰나의 순간에 덧없는 회의감이 반짝 떠올랐다 사라졌다.

“생쇼라……. 무익 무실로 끝났으니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 어쨌든 마탑 쪽 주요 인물도 알아 두는 게 나아. 일단 현재 마탑주는 가브리엘 마이어인데 5년 이내로 에단한테 승계될 거야. 왜냐면 그 노인네, 오늘내일하거든.”

“근데, 그럼 에단은 처음부터 마탑에서 살았던 거야? 벌써부터 유망주면.”

“아니. 최초 에단의 신분은 카터 가문의 사생아였어. 카터 후작이 사창가에서 만들어 왔지. 후작은 갓난아이임에도 강력한 에단의 마력을 알아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친모로부터 에단을 뺏어왔어. 그렇게 에단은 정서적 학대와 방치 속에서 성장했지. 그러나 결국 가출을 감행하게 되는데, 그때 만난 사람이 가브리엘 마이어야.”

나는 소리 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아로네부터 시작해서 제이든, 에단까지. 여기 애들은 무슨 불행 배틀 하는 것도 아니면서 하나같이 저마다의 상처를 갖고 자랐다.

그리고 어떻게 친어머니가 멀쩡히 살아 계신 애가 한 명도 없을 수가 있지? 나는 참 불행한 공통점이라고 생각하며 화제를 돌렸다.

“마법사는 정확히 무슨 일을 해?”

“다양해. 마탑 산하의 상점에 소속되어 스크롤이나 마법 용품을 판매하는 사람도 있고, 연구비를 지원받아서 마탑에서 연구하는 사람, 평화 조약의 일부분으로 황실에서 근무하는 사람, 용병처럼 의뢰를 받는 사람 등등.”

아로네의 차분한 설명을 들으며 마법사들이 다방면에서 일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그들이 미친 듯이 부러워졌다. 젠장! 이왕 판타지 세계에 떨어질 거면 여느 흔한 소설처럼 특별한 능력 하나라도 쥐여 주지.

진짜 마법을 보고도 손가락만 빨아야 한다니. 이건 판타지 덕후에 대한 능욕이다. 나는 피눈물을 삼키며 마법에 대한 꿈을 힘겹게 접었다.

“어, 그럼 정령술사는? 아니 근데, 마탑이랑 황실은 사이 안 좋은데 정령술사 쪽은 뭐 없어?”

“그건 정령의 역사보다 마법의 역사가 지나치게 짧아서 그래. 고대부터 정령술사는 자연의 친구라 불리며 어딜 가든 환영받았거든. 그런 호의가 현재까지 이어져서 대부분의 정령술사들은 황궁에 소속되어 오염된 자연을 치유하거나 혹은 가뭄과 같은 재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곳에 가서 자연의 과도한 심술을 조절하는 일을 해.”

정령술을 설명하는 아로네는 어쩐지 씁쓸해 보였다. 내 가늘어진 눈매를 보았는지 그가 능숙하게 감정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반면 마법은 마녀가 부리는 흑마법과 표면적으로 구분되지 않아서 배척받았었어. 마법과 흑마법의 기운이 원천적으로 다르고, 마법과 달리 흑마법에는 까다로운 발동 조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지가 겨우 100년 전이야.”

하긴, 나 같아도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마법사보다는 귀여운 정령을 다루는 정령사가 더 친근할 것 같긴 하다. 지루해서 죽을 뻔했던 경제와 정치 파트를 지나 다다른 판타지의 영역은 정말 재미있었다. 나는 무심코 질문했다.

“그 발동 조건이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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