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겨우 이 정도 말에 동요할 거면서. 이리 약한 사람이 어떻게 15년 동안 공들여 애를 망쳤지?
위선자.
“……그만하라고 말했을 텐데.”
“그러죠. 첫인상이 우스워질 정도로 나약하시네요, 공작님.”
쓴소리 몇 마디 했다고 얼굴을 파리하게 물들이는 공작의 꼴이 우스웠다. 저런 자가 한 나라의 축이라니. 이 나라의 미래가 심히 걱정되었다.
완벽하게 기분을 잡쳤다. 나는 단 1초라도 더는 공작과 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아서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공작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 애는 내 아내를 죽였어.”
“고작 네 살짜리 애가요?”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세요, 공작님. 차마 하지 못할 말이 입안에 맴돌았다. 최후의 이성이 간신히 극치를 붙들었다.
“……어찌 되었건 그 애가 원인이었네.”
“차라리 데네브라고 하세요. 그편이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리니까. 네 살짜리가 무슨…….”
공작은 실소했다. 그를 등지고 서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광기에 돌아 버린 표정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 애가 자신의 친모를 죽일 리가 없지.”
“마치 아로네는 주워 온 자식이기라도 한 양 말씀하시네요.”
“그래.”
“뭐라고요?”
나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예상외로 공작은 축 처져 있었다. 초점을 잃은 동공이 추락했고, 힘 있던 어조는 파리하게 시들었다. 강인해 보였던 인상 위로 유난히 주름의 흔적이 두드러졌다. 그 모습이 죽어 있는 생물체와 비슷하여 소름 돋았다.
공작이 암울하게 중얼거렸다.
“그 애의 친모는 저택에서 일하던 하녀였어. 그 애를 낳자마자 내쫓겼고, 이후론 내 아내가 키웠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별안간 알게 된 출생의 비밀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는 물어야만 했다.
“……또 누가 알죠? 아로네는 알아요?”
“그럴 리가. 아무도 모르네.”
“그럼 그걸 왜 저한테 말해 주는 거예요?”
공작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을 내게 알려 준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내가 무조건적으로 비난해서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뭐라도 변명을 해야 한다고 느꼈던 걸까? 사생아인 아로네의 정체에 실망해서 알아서 떨어져 나가길 빌었던 걸까?
공작의 답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함구할 게 분명하니까.”
기가 막혀서. 날 시험하겠다는 거야, 아니면 감정 쓰레기통으로 삼겠다는 거야?
나는 길게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깜깜한 시야만큼 머릿속도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공작 부인이 아로네를 거두어 키워 줬다는 것이 어떻게 하면 아로네가 그를 죽였다는 논리로 이어지지? 차라리 남편의 외도로 마음의 병을 얻어서 죽었다고 하는 편이 더 그럴듯했다.
나는 할 말을 정리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하지만 공작은 이미 떠난 후였다.
나는 공작과의 대화로 기분이 걷잡을 수 없이 나빠져서 산책도 포기하고 그냥 방에 돌아가서 시간을 죽였다. 아로네에게 알려 줘야 할까? 그 생각밖에 안 들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고민했지만 결국 난 아로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이기적인 걸까? 그 잔인한 말을 해 주는 사람이 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공작의 뜻대로 해 주는 모양새가 돼서 못마땅했다. 그래도 나로선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때가 되면, 아로네가 조금 더 단단해지면 그때 말해 주자고 결심했다.
***
밤이 되니 보슬보슬 눈이 내렸다. 낮의 일이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 재생돼서 나는 한참 동안 몸을 뒤척였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잠이 올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천장의 무늬를 백 번쯤 세고 나서야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는 촛대를 들고 창가에 가까이 앉아 소복하게 쌓여 가는 눈을 구경했다. 누구 속도 모르고 신나게 휘날리는 눈발이 야속했다.
“그냥 산책이라도 할까…….”
생각해 보니 한밤의 정원을 산책하는 것도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했다. 내가 가진 외투 중 가장 두꺼운 것을 입고 야무지게 목도리와 장갑도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롱부츠를 신고 깜깜한 복도를 나섰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인 만큼 사위는 고요했다.
겨울의 시린 기운이 복도에 감돌았다. 나는 갑자기 드는 오한에 몸을 살짝 떨었다가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3층에는 예민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극도로 주의해야 했다. 나는 걸음마다 심혈을 기울여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갔다.
운 좋게도 현관을 빠져나오는 동안 아무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역사가 오래된 대저택은 그 명성과 우아함만큼이나 으스스한 감이 있어서 밤에 혼자 복도를 거닐곤 하면 오싹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코너를 돌다가 시종이라도 마주쳤다면 나는 분명 저택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그것만큼 꼴사나운 일이 없지.
가로등과 전기가 없는 세계의 밤이 얼마나 황홀한지 내가 말한 적이 있던가? 불빛 한 점 없는 사위는 무서웠지만, 밤하늘에 알알이 박힌 무수한 별들의 향연은 꿈결 같았다.
손을 뻗으면 별 한 무리를 잡을 수 있을 것처럼 빛이 선명했다. 이따금 떨어지는 유성이 은하수가 흘리는 눈물처럼 보였다.
나는 한참 서서 하늘을 구경하다가 누가 올까 봐 걸음을 재촉했다. 숨을 내쉴 때마다 구름 같은 입김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단단히 옷을 챙겨 입은 덕분에 그다지 춥지 않았다.
나는 등불에 의지해 더듬더듬 익숙한 길을 밟았다. 낮에 걷는 정원과 밤에 걷는 정원은 당연하겠지만 분위기가 천차만별이었다.
햇빛 아래의 정원은 정령들이 잠깐 쉬어 가는 휴게소처럼 화사하고 생기 넘쳤다면, 달빛 아래의 정원은 모든 생명체가 사멸하고 오직 나만이 남은 듯한 아련하고 신비로운 느낌이 가득했다.
하얀 도화지에 발자국이 찍히며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흔한 벌레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고, 시야는 등불의 빛이 닿는 곳이 다였으며, 머리 위로 차가운 눈송이가 끊임없이 내렸다. 그러한 잔잔함이 내게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반대편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불빛 때문에 깨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잠 못 드는 이가 또 누가 있나 그 얼굴 좀 볼 요량으로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내가 진짜 꿈을 꾸나? 나는 유성우보다도 더 비현실적인 광경에 눈을 비볐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당혹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영원 같은 찰나의 시간 동안 시선을 마주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선명한 녹안이었다. 한 번 눈을 마주치면 결코 시선을 돌리지 못할 만큼 눈동자 색이 매력적이었다.
살짝 처진 눈매는 순하고 무해해 보였다. 하지만 결코 만만해 보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한낱 인간이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고결한 분위기가 풍겼다.
설마 정령인가? 정령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로네에게 들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여자는 인간의 경지를 한참이나 초월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은은하게 빛나는 머릿결은 푸른 달빛을 잘라서 엮어 놓은 듯 몽환적이었다. 새하얀 피부가 푸른 머리색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제야 나는 여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신시아.”
“저를 아시는군요.”
잔잔한 물결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글로만 읽던 책 속 주인공을 맞닥뜨린 기분이 들었다.
“얘기 많이 들었거든요.”
“공녀님께요?”
“네.”
신시아가 흥미로워하며 물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나는 아로네의 얘기 중 그마나 쓸 만한 내용을 찾아 뒤졌다. 욕밖에 없는 비평 속에서 그나마 둥근 표현을 찾는 것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었다.
“음…… 정령술에 뛰어나다고?”
“공녀님이 정말 그러셨다고요?”
신시아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올라간 말끝에서 깊은 불신이 드러났다. 여기서 반응을 잘못하면 다 새 되는 거라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뭐, 결국엔 그런 의미였죠.”
“……의외네요.”
나는 신시아랑 아로네 얘기하는 게 불편해서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저는 혜라예요. 편하게 불러요.”
신시아가 의미를 짐작할 수 없는 눈빛으로 날 빤히 바라보다가 싱긋 웃었다.
“저도 혜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무슨 얘기? 설마 데네브…… 님이?”
신시아가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쪼잔한 놈이 어떤 식으로 내 평판을 깎아 놨을지 기대가 되었다. 나는 실실 웃으며 계속 말하라는 듯 눈짓했다.
“……공녀님의 손님 자격으로 머무는 주제에 성격이 고약하다고 하셨어요.”
“푸흡, 고약하다고요? 그것참 칭찬이네. 그리고요? 더 한 말 없어요?”
신시아는 이게 정말 맞나 싶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가 너무 즐거워하니까 어쩔 수 없이 데네브의 말을 전했다.
“또 공녀님이 싸고도는 이유가 있을 거라면서 가까이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정신이 조금…… 이상한 것 같다고도 했고요.”
나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폭소했다. 진지한 얼굴로 내 험담을 했을 데네브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데네브 이 귀여운 놈. 신시아 좀 아낀다고 경고해 준 거야? 하지만 그런 것 치고 신시아는 그다지 나를 경계하는 기색이 아닌데?
오히려 신시아는 외계인 보듯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나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쓱 훔치고 물었다. 말끝에서 즐거움의 흔적이 드문드문 묻어 나왔다.
“근데 왜 도망 안 가요? 이 야밤에 고약하고 정신 이상한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솔직히 데네브 입장에서는 내가 정말 또라이 같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느 평민이 미치지 않고서야 소공작한테 구라를 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