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신시아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 사이는 겨우 두 뼘도 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신시아의 눈동자를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믿겨지지 않는 이목구비에 대놓고 감탄하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신시아가 설핏 웃었다.
“궁금해서요. 그 공녀님이 애지중지하는 사람이 누군지.”
순간 숨이 멈추었다. 나직하게 읊조리는 말이 묘하게 은근했다. 소름 끼치도록 푸르른 홍채가 올가미처럼 단단히 시선을 옭아매었다.
은은히 불던 바람이 일순 가라앉고, 나뭇잎이 땅을 뒹굴며 내던 작은 소음도 천천히 귓가에서 멀어졌다.
나는 힘을 주어 의식적으로 눈꺼풀을 깜박였다. 주술에 걸린 것처럼 옴짝달싹 못 했던 몸이 순식간에 풀렸다.
와, 방금 하마터면 미모에 홀릴 뻔했다. 이렇게 압도당하는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는 방금 전의 일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양 여유작작하게 말했다.
“거짓말. 그냥 내 진짜 정체가 궁금한 거 아니에요? 수상한 사람이라고도 데네브…… 님이 말해 줬을 것 같은데.”
아휴. 데네브 이름 뒤에 꼬박꼬박 ‘님’을 붙이는 것도 일이다. 아로네와 있을 때는 항상 내 마음대로 격의 없이 불렀기 때문에 그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렇긴 한데, 전 제가 직접 본 것만 믿거든요.”
“그래요? 그럼 직접 보니까 어떤 거 같아요? 데네브의 기대를. 아니, 데네브 님의 기대를 충족했나?”
신시아는 내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그런 집요한 수색으로 무엇을 찾으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기꺼이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이윽고 신시아는 해맑게 웃었다.
“데네브 님의 말과는 다르신 분 같아요.”
“어떤 의미에서요?”
“기운이 맑으신 게요.”
소름이 쫙 끼쳤다. 목덜미를 문지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도를 믿어요, 신시아?”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천만다행이었다. 믿는다고 했으면 냅다 줄행랑을 치려고 했거든.
나는 방금 전 신시아가 한 것과 똑같이 아주 자세하게 그를 관찰했다. 아로네의 편파적인 이야기만 듣다가 실제로 본 신시아는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사람 같았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운이 맑았달까?
“근데 혹시 방에 들어가던 중이었어요? 갑자기 생각났네.”
신시아가 작게 탄식하며 휘영청 뜬 달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네.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내가 괜한 사람 붙들었네. 미안해요, 어서 들어가 봐요.”
나는 옆으로 길을 터 주고 신시아를 바라보았다. 왠지 신시아는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따뜻한 방에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더욱 컸는지 그는 겨우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그럼 나중에 또 봬요.”
“그래요!”
신시아는 아주 천천히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굼벵이 같은 속도 덕분에 나는 신시아를 한 번 더 관찰할 수 있었고, 때문에 그의 머리색이 처음 마주쳤을 때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엥, 어떻게 파란색이 연한 노란색으로 바뀌지? 나는 악의 없이 물었다.
“어? 머리색 원래 파란색 아니었던가요?”
신시아가 매우 당황하면서 황급히 망토를 뒤집어썼다. 눈에 띄게 허둥지둥하는 모습에 조금 머쓱해졌다. 그가 큼큼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맞아요. 근데 가끔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이렇게 변해요.”
“아 그래요? 신기하네.”
정말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말 못 할 사정은 있기 마련이기에 그냥 수긍하는 척해 주었다.
“이 얘기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 주시면 안 될까요?”
축 처진 입매가 퍽 간절해 보였다. 그런 표정으로 부탁하는데 어떻게 오케이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완전히 헤어졌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계속 걷다가 순간의 충동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신시아는 무언가에 쫓기듯 뛰듯이 걷고 있었다. 근데 이상하지, 신시아 키가 저렇게 컸던가?
나는 한참 동안 신시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국 내가 헛것을 봤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 내가 많이 졸린가 보다. 5분도 안 되는 사이에 갑자기 키가 클 리가 없잖아?
***
오늘 다짜고짜 아로네는 내게 검술을 알려 주겠다고 했다. 쓸 줄 아는 검이라곤 식칼이 전부인 내겐 얼토당토않은 소리였다.
심지어 그 식칼도 웬만하면 쓸 일이 없었다. 직접 요리해 먹는 자취생이 얼마나 되겠어? 당연히 나는 황당해하며 반대했다.
“뭐? 난 그런 거 안 배워도 잘 살아왔어!”
“그건 네 세계에서였고. 여긴 여자애들도 자기 한 몸 지킬 줄 아는 게 일반적이야.”
“아 그래? 그럼 배워야지.”
남들은 다 할 줄 안다는데 나 혼자 못 하는 것도 별로였다. 내가 너무나도 쉽게 항복하자 아로네는 황당해했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금세 얼굴을 굳히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으라고 독촉했다.
우리는 부지 내에 있는 연무장으로 갔다. 발에 납덩이를 단 것도 아닌데 발걸음이 무거웠다. 나는 최대한 운동 시간을 늦추기 위해 미적거리며 걸었다.
연무장의 문을 열자마자 땀 냄새가 훅 끼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가 우리에게 쏟아지는 눈길을 마주하고 재빨리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차곡차곡 축적된 노력의 냄새는 연무장 벽뿐만 아니라 공기에도 뿌리 깊게 배어 있었다. 결국 나는 입으로 숨쉬기를 택했다. 이 강렬한 냄새가 입천장에 새겨지지 않기를 바랐다.
공녀와 화제의 인물이 등장하자 연륜 있어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다. 뒷짐을 쥐고 기사들의 훈련을 지도하던 사람이었다.
머리를 하나로 높게 묶은 아로네가 눈을 한번 깜박이는 사이에 남자가 허리를 살짝 굽히며 예우를 갖추었다. 유려한 동작이었지만 충성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먼저 입을 뗀 것은 남자였다. 눈가에 길게 난 상처가 꽤 깊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공녀님.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자카르 경도 여전하고 말이지.”
“어쩐 일로 연무장에 오셨습니까? 냄새난다며 근처에도 안 오셨지 말입니다.”
자카르의 말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역시 나만 이곳의 공기가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새삼 이 탁한 공기 속에서 훈련하는 기사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하도 맡아서 후각이 마비되기라도 한 걸까? 아니, 구린내가 이렇게 심한데 어떻게 참는 거지? 진심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아로네의 가르침이 제발 오늘 하루로 끝나길 빌었다.
아로네가 나를 곁눈질하자 자카르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짐승의 안광처럼 명도 높은 홍채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이 아이에게 검술을 좀 가르쳐 주려고.”
“아, 이분이 바로 그…….”
자카르가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 나를 관찰했다.
이쯤 되니 한번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듯싶다. 그렇다. 공작가 내부에서 나는 ‘저 사람이 그 사람이래?’로 통했다. 아로네는 대놓고 나를 편애했고, 사람들은 악명 높은 공녀가 아끼는 존재에 호기심과 의구심을 가졌다.
우리가 격식 없이 진짜 친구처럼 지내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이 반응했다. 사람들은 해맑게 웃는 아로네를 보고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경악하고, 두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왜? 우리의 우정을 왜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 이면에 엄청난 비밀과 거래가 있을 거라 지레짐작하는 거야? 하여간 이상한 사람들이다.
나는 자카르에게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사이에 흥미를 잃은 자카르가 눈을 떼었다.
“공녀님이 직접 가르치시는 겁니까?”
“그래. 무슨 문제라도?”
“아닙니다. 두 분이 사용하실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자카르는 우리를 연무장의 가장 구석으로 안내했다. 기사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조용히 훈련하다 가라는 의미였다. 뭐, 나름의 배려라고 할 수 있었다.
자카르가 떠나자 아로네는 엄격한 낯을 꾸며 내며 카리스마 있게 말했다. 이럴 때의 아로네는 딴 사람처럼 무섭고 엄격했다. 어떻게 아냐고? 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지시에 따라 허리를 곧추세우고 어깨를 활짝 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목검을 단단하게 쥐었다. 헝겊을 덧댄 손잡이의 감촉이 낯설었다.
“한번 휘둘러 봐.”
“……이렇게?”
언젠가 무협 영화에서 봤던 무림 고수의 동작을 어설프게 흉내 냈다. 몸이 팔 움직임을 완전히 감당하지 못하는 바람에 발이 불안정한 스텝을 밟았다. 아로네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말을 걸렀다.
엘리트인 그 애가 보기엔 내 동작이 많이 형편없었을 테다. 참고로 그날 본 무협 영화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집중해서 봐 둘 걸 그랬다.
“정말 형편없네. 팔에 근육이 하나도 없어서 그 쉬운 동작에도 매가리가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면전에 대고 말할 줄은 몰랐다.
“저기 말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닌지?”
“그동안 운동을 얼마나 안 하고 산 거야? 봐 봐, 목검 무게는 얼마 나가지도 않는데 손목이 안정적으로 지탱을 못 해 주잖아.”
“그래 솔직히 말할게. 나 22년간 각 잡고 운동한 적이 한 번도 없어. 성인 되고 나서는 그냥 숨만 쉬었다고 생각하면 돼. 하핫.”
아로네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 애가 욕설을 짓이겼다는 데에 내 핫한 트레이닝 바지를 걸 수도 있었다. 아로네가 투지를 불태우며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특단의 조치를 취하는 수밖에.”
열등생을 포기하지 않아 줘서 너무 고맙긴 한데 왜 눈물이 흐를까……?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아로네가 나를 쉽게 놔주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앞으로의 미래가 눈에 훤했다. 아로네가 자세를 교정해 주는 것이 지옥으로의 급행열차가 출발하는 신호 같았다.
***
역시나 내 예언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일어났다. 나는 아로네의 캐 해석이 완벽했다는 것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매일 밤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근육에 애도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