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그래도 며칠간 혹독하게 몸이 굴려지니 일주일 즈음 되자 확실히 폼이 나아졌다.
나를 기사로 키울 것도 아니면서 열을 올리는 아로네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게 다 널 위한 거라는 세뇌와 설득 아닌 강요에 거의 오열하면서 운동했다.
오늘도 거의 실신해서 베키와 루나에게 양팔을 내주고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고 있는데 복도 저편에서 보이지 말아야 할 얼굴들이 보였다. 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부축을 떨치고 중심을 잡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베키와 루나가 불안한 눈으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내 몸을 지켜보았다.
다시 부축해 주면 안 되겠냐고 그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저 남자를 보아서라도 그런 쪽팔린 꼴을 보여 줄 순 없었다.
“안녕하세요, 공녀님. 그리고…… 혜라.”
신시아가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사랑스럽게 웃었다. 고된 운동으로 잔뜩 지쳐 있던 심신에 딱 필요했던 상쾌함이었다.
나는 혼절할 것 같은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그럴듯한 미소를 보냈다. 그러자 아로네와 데네브가 거의 눈을 뒤로 까집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남매는 남매라고 생각했다.
“혜라, 언제부터 저것…….”
“아로네.”
재빨리 눈을 부라리며 아로네에게 주의를 줬다. 아로네가 입술을 꾹 다물고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언젠가의 대화를 기억하고 방금 그 지칭이 적절하지 않았음을 깨달은 것이다.
아로네가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으로 말을 고쳤다.
“언제부터 쟤랑 인사하는 사이가 됐니?”
“얼마 안 됐는데. 일주일 즈음?”
“……어떻게?”
한밤중 정원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일을 간략히 줄여서 말하려는데 순간 신시아가 작게 헛기침했다. 흘깃 곁눈질하니까 그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비밀을 부탁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꾸며 냈다.
“너 황궁 갔을 때 심심해서 그냥 막 돌아다녔는데 그때 만났어. 사실 그때서야 만난 게 신기한 일이지. 그래도 한 건물 안에서 사는데 말이야.”
아로네는 대놓고 심기가 불편하다는 티를 냈다. 하지만 나는 아로네를 달래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애초에 나랑 신시아는 아무 사이 아닌데 인사 한 번 했다고 무슨 관계인지 해명해야 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닐까?
다행스럽게도 그런 내 의지가 잘 전달되었나 보다. 아로네는 토 달지 않고 미세하게 입만 삐죽였다.
그러나 아로네가 해결되니 데네브가 말썽이었다. 바통 터치하면서 불평 릴레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가 다정한 듯 강압적인 듯 신시아의 어깨를 잡았다.
“신시아, 내가 멀리하라고 말했잖아.”
데네브가 아이를 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나와 아로네는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고 같은 생각을 했다. 우웩, 쟤가 저렇게 입안의 혀처럼 굴 수도 있는 거였어?
“하지만 제가 본 혜라는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요?”
신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신시아는 다시금 나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였다.
나는 쟤가 지금 나를 꼬시는 건지 고민이 되었고, 아로네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뜨렸으며, 데네브는 뒷목을 잡고 쓰러지려고 했다. 데네브가 별안간 나를 쏘아봤다. 아로네는 나를 보호하듯 막아섰다.
“아로네도 꼬시더니 이젠 신시아까지라. 네가 어떤 간교한 말로 신시아를 꼬드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애는 네가 건드려도 되는 애가 아니야.”
얼토당토않은 표현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순서를 정할 수 없었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아로네의 팔을 약하게 밀었다.
아로네는 눈빛으로 ‘괜찮겠어? 지금 네 안색, 오늘내일하는 사람 같아’라고 말했고, 나는 ‘알아, 하지만 나는 걸어오는 싸움은 절대 피하지 않거든? 네 오빠 오늘 나한테 디졌다’라고 답해 주었다.
“엥? 그럼 제가 정말로 나쁜 사람이라면 아로네는 건드려도 된다는 의미세요? 친동생 취급이 너무하다…….”
옆에서 아로네가 한술 더 보탰다.
“걱정 마, 혜라. 저런 걸 오라버니로 둘 바엔 차라리 외동이 되겠어.”
“……뭐?”
데네브가 못 믿겠다는 듯이 반문했다. 나는 그 표정을 즐기며 계속 나불거렸다.
“그리고 전 신시아를 꼬신 적도, 건드린 적도 없는데요? 한 집에 오가면서 어쩔 수 없이 얼굴 맞대야 하는 사이인데, 인사 한 번 하는 게 뭐가 나빠요? 누가 보면 제가 신시아한테 욕이라도 한 줄 알겠어요. 데네브 님, 혹시 인사하는 데 안 좋은 기억 있어요?”
데네브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나는 직감적으로 여기서 그만두어야 함을 깨달았다.
데네브가 길게 숨을 내쉬며 감정을 가다듬었다. 강렬한 분노가 깜박임 한 번 사이에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선연한 경멸이 광포하게 일렁였다. 그가 으르렁거리듯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봐, 신시아. 주제넘게 굴잖아. 뻔하지 않아?”
아로네가 노기 서린 목소리로 바로 맞받아쳤다.
“말 똑바로 해. 먼저 시비 건 게 누군데.”
아로네가 너무 든든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두 손을 모아 쥐고 감동받은 눈빛을 보냈다.
“……한 가닥 남은 우애를 생각해서 충고해 주지. 저 애는 네게 실이 되면 됐지, 결코 득이 되지 않을 거다. 네게도 현명함이라는 게 조금쯤은 남아 있겠지, 아로네?”
“너나 잘해. 잘 살고 있는 남의 신경 거스르지 말고.”
데네브는 대꾸하지 않고 신시아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신시아가 데네브에게 거의 끌려가다시피 하는 도중에도 끈질기게 나와 눈을 맞췄다.
뭐야? 나는 속으로 의문하면서도 습관적인 윙크를 했다. 그러자 신시아가 갑자기 우뚝 멈춰서 멍을 때렸다. 그 표정이 조금 웃겨서 나는 깔깔대면서 베키와 루나에게 몸을 맡겼다. 아, 이 맛에 윙크하지.
***
언제나 그랬듯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노여운 일이 있기라도 했는지 허구한 날 하얀 눈물을 흘리던 하늘은 차차 진정했고, 살을 엘 것처럼 날카로운 바람도 흥분을 가라앉혔다.
꽁꽁 얼었던 땅이 녹으며 노란 개나리가 정원 담벼락 사이로 얼기설기 꽃봉오리를 틔웠다. 바야흐로 봄의 시작이었다.
날씨도 풀렸겠다, 나와 아로네는 오랜 칩거를 끝내고 드디어 제대로 된 외출을 하기로 했다. 아로네는 내게 수도 발할라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변두리에 아름다운 호수가 있어. 라크리마 호수라는 곳인데 호수 둘레를 버드나무가 빼곡하게 감쌌지. 이즈음에 가면 풍경이 아주 예뻐.”
소문난 집순이인 나는 간만의 외출에 들떠 시녀들에게 몸을 맡겼다. 몇 달째 보는 얼굴인데도 아직도 사이가 그저 그랬다. 하긴, 그들로선 아로네의 친구인 내가 아로네만큼이나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래도 일은 야무지게 잘해서 딱히 불만은 없었다. 나는 아로네가 새로 사 준 연한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아로네는 분기가 바뀌었다면서 또 한 번 대량으로 옷을 주문했다. 이제는 아로네의 큰 씀씀이에 적응이 된 데다가 내가 말린다고 들을 애도 아니라서 그냥 해탈하기로 했다.
내가 봐도 화사한 모습에 미소를 짓다가 지금 막 시녀가 들고 오는 물체를 보고 경악해서 소리쳤다.
“저게 뭐야! 저 코르셋은 안 할 거예요.”
“네? 하지만…… 누구나 다 하는걸요.”
“저는 누구나가 아닌가 봐요. 아무튼 전 그 불편하기만 한 걸 할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저리 치워 주세요. 으…….”
코르셋이라니. 그 흉물스러운 것은 꼴도 보기 싫었다. 아로네의 독촉에 못 이겨 한 번 착용한 적이 있는데 그때 숨이 막혀서 죽을 뻔했다. 와, 베키가 내 등에 발을 가져다 대고 어찌나 세게 끈을 조이던지. 그때 내가 하도 캑캑거리고 걷지를 못하니까 결국 아로네가 포기했다.
우리는 시녀 두 명과 기사 두 명을 대동하고 출발했다. 둘이서 소풍 가는데 부수적인 인원이 많이 붙는다 싶다가도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이것 또한 귀족의 문화이며 앞으로 내가 익숙해져야 할 부분인 것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기온은 딱 맞게 따뜻했고, 몽실몽실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은 적당히 많아서 운치 있었다. 푸르른 하늘을 보아하니 비가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완벽한 날이었다.
우리는 빠르게 바뀌는 창밖 풍경을 배경 삼고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같은 마차에 탄 시녀들은 그런 우리의 모습에 초연해진 지 오래였기에 그저 무념무상으로 멍을 때렸다.
우리가 수다의 늪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주위에서 북적거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나는 마차에서 펄쩍 뛰어내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로네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물었다.
“어때?”
“와, 미친…….”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버드나무를 수줍게 건들고 도망갔고, 새순의 색을 띤 잎들이 잔잔하게 웃으며 흔들렸다.
버드나무 산림에선 요정들의 터전 같은 신비한 느낌이 감돌았다. 나뭇가지 위로 요정들이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니는 환상이 순간 덧씌워졌다.
작은 숲 사이로는 하늘을 옮겨 담은 듯 맑은 호수가 있었다. 호수 표면에서 반짝이는 잔물결이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앞은 봄을 맞아 묘경을 찾아온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로네가 작게 웃고선 내 팔을 끌었다. 그러자 시녀들이 재빠르게 명당을 사수해 돗자리를 깔고 피크닉 상자를 꺼냈다.
멍하니 호수를 바라보는 내게 아로네가 차가운 오렌지 주스를 건넸다. 나는 이색의 풍경을 머릿속에 각인하며 새삼 내가 다른 세상에 왔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나라였으면 호수 입구부터 노점들로 인산인해였을 것이다.
“여기 진짜 대박이다……. 데리고 와 줘서 고마워.”
“내가 좋은 것만 보여 준다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