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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20/138)

<20화>

“뭐? 어휴 우리 아로네, 약속 지킨다고 놀러 가자는 거였어요? 오구오구.”

“왜 이래? 저리 가.”

아로네는 질색하면서도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그에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더욱 과장하며 아로네를 귀여워해 줬다. 돌처럼 가만히 있던 시녀들과 기사들이 염병한다는 표정을 했다.

그들은 생쇼를 하는 우리를 피해 탈주하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돈 벌기 힘들지? 알고 싶지 않은 상사의 모습도 봐야 하고?

나와 눈이 마주친 그들이 황급히 표정 관리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나를 또라이처럼 바라보던 것을 이미 목격했다. 빤히 기사 한 명을 쳐다보자 그가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나는 낄낄거리며 가져온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역시 맛이 끝내줬다.

그때, 마주 웃으며 샌드위치를 먹던 아로네가 내 등 너머를 바라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의아해하며 돌아본 나는 불가항력적으로 샌드위치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와…….”

신시아와 정체불명의 남자가 함께 있었는데, 그 남자의 외모가 탈인간급이었다. 신시아를 처음 봤을 때 딱 지금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기를 한가득 머금은 회색 머리칼이 창백한 피부와 완벽하게 조화되어 얼핏 조각상처럼 보였다. 또 이목구비는 어찌나 또렷하던지. 100m 밖에서 풍차 돌리며 걸어와도 눈, 코, 입의 위치를 정확하게 집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높은 콧대는 말할 것도 없었고, 눈썹은 아이브로펜슬로 그린 듯이 진했다.

조금 얇은 입술은 예민한 인상을 풍겼다. 그리고 은하수를 박아 넣은 듯 오묘한 빛을 띤 저 남색 눈동자라니!

밤의 남신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기품이 흘러넘치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나는 입에서 오렌지 주스가 흐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신시아가 내 강렬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것도 그때였다.

찬란한 녹음을 담은 눈이 나를 직시하자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나는 허둥거리며 축축한 입가를 훔쳤다. 그런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던 아로네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 주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다정함이었다.

그런 아로네의 질투가 어이없고 귀여워서 나는 가만히 그 애의 손길을 즐겼다.

“넌 외모에 휘둘리는 습관 좀 고칠 필요가 있어.”

“왜, 덕분에 내가 너한테 죽고 못 살잖아.”

“……말은 잘해.”

몰골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마자 나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신시아가 끝내주는 기럭지를 가진 남자를 이끌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신나서 해맑게 웃고 있는 신시아와 다르게 남자는 똥 씹은 표정을 했다.

“혜라! ……그리고 공녀님! 이런 곳에서 다 만나네요!”

“그러게요. 신시아도 날 좋아서 소풍 왔나 봐요?”

“네. 에단이 졸라 대서…….”

“……에단?”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로네를 쳐다보자 그 애가 눈썹을 까닥 올렸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신시아가 에단의 팔을 살짝 건드렸다.

“인사해, 에단. 전에 얘기한 적 있으니 이름은 알지?”

무슨 얘기? 별로 얘기를 나누어 보지도 않았는데 에단한테 해 줄 이야기가 있나?

에단은 정말 하기 싫다는 속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지만 신시아가 눈을 너무 반짝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사했다.

“에단 카터.”

그래, 자기 이름을 다짜고짜 뱉은 걸 인사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빈정이 상한 나는 딴지를 걸까 말까 고민했다. 하지만 나를 너무 잘 아는 아로네는 내가 끼어들 틈도 없이 상황을 종결시키고자 했다.

“인사도 했겠다, 그럼 볼일은 끝난 거지? 우리는 조용히 놀다 가고 싶은데 너도 그런 것 같고. 그러니 이만 가 주는 게 어때?”

적당히 상대의 심기를 거스르면서도 양쪽의 이익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말이었다. 나는 아로네의 화술에 감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엄지를 치켜들자 아로네가 우쭐댔다. 하지만 복병이 있었다.

“어…… 같이 노는 건 어떠세요?”

“엥?”

신시아가 너무 말도 안 되는 말을 그럴듯하게 해서 나도 모르게 반문이 튀어 나갔다. 에단이 삐뚜름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너?”

아로네 또한 어처구니없어했다. 사실 당황한 것은 에단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괴롭힌 아로네와 기꺼이 나들이를 즐기겠다니. 고통을 즐기는 변태가 아니고서야 자발적으로 그런 선택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네!”

어떡해……. 아무래도 신시아는 변태가 맞나 보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발랄하게 대답하는 신시아가 전과 달리 보였다. 착하고 순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첫인상은 믿을 게 못 된다.

“신시아, 나 하나만으로는 부족해?”

“그런 건 아니지만…….”

순식간에 멜로 눈깔로 바꿔 끼며 신시아를 설득하는 에단이 놀라웠다. 와, 쟤 완전 여우잖아? 나는 감탄하면서 에단의 이중성을 드라마 보듯 감상했다. 이 집 맛집이네.

곁눈질로 아로네를 살피자 그 애의 분노게이지가 대충 70% 정도 차오른 것 같았다.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은 외모의 소유자가 내 주변에 세 명이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에 몰렸다.

폭발한 아로네가 스스로 루머에 박차를 가하는 꼴은 죽어도 못 보므로, 내가 한번 나서 보기로 했다.

“저, 신시아? 저분 말대로 오늘은 둘이서 데이트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저도 아로네랑 처음으로 바깥 구경 나온 거거든요.”

에단이 흥미로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네가 걔구나.”

나는 단박에 에단이 하는 말을 알아들었고, 솔직히 어딜 가나 듣는 말이라서 이젠 ‘네가 걔구나’ 따위의 말이 내 이름 같았다. 에단이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물었다.

“이름이 뭐라고?”

“혜라요.”

“그래. 신시아, 얘도 내 뜻을 지지해 주는데 어찌하겠어?”

초면에 반말이라니. 내가 너보다 나이가 몇 살이나 많은 줄 알아?

내 안의 꼰대 기질이 부들거렸지만 일단은 소시민인 나는 얌전하게 주먹만 쥐었다. 공작이나 데네브와 달리 에단은 진짜로 또라이처럼 보여서 선뜻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질 수 없었다.

결국 신시아는 쪽수에 밀려 제 뜻을 관철시켰다. 그가 두 손을 맞잡고 희망적으로 물었다.

“……그럼 다음은 괜찮을까요?”

“아, 예. 뭐 그러죠.”

나는 아무 뜻 없이 형식적으로 한 말이었는데 이게 웬걸, 신시아는 눈에 띄도록 기뻐했다. 옆에서 아로네가 눈길을 쏘아 대는 것이 느껴졌지만, 빈말이었다고 정정하기엔 상황이 너무 애매했다.

아니나 다를까, 신시아와 에단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아로네는 바로 따졌다. 나는 잔뜩 화가 난 얼굴을 보고 한숨을 삼켰다. 어쩐지 얘기가 길어질 것 같다.

아로네가 뾰족하게 물었다.

“왜 그랬어?”

“왜기는. 단칼에 싫은데요? 이럴 순 없잖아.”

“그게 뭐가 어때서?”

아로네는 무슨 말을 하든 반박해 주겠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나는 고구마 10개 먹은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있잖아, 이건 분명히 해야 할 거 같은데 난 신시아한테 아무 감정도 관심도 없어. 아무 뜻 없이 한 말이었는데 쟤가 그냥 말 그대로 받아들인 거지.”

“그걸 누가 몰라서 물어? 내가 쟤 싫어한다는 거 알면서 왜 여지를 주냐는 거잖아.”

아로네는 하나뿐인 친구를 독점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꽤 강했다. 아로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사나운 말투를 들으니 나도 조금 신경질이 났다. 통상적인 말 한 번 했다고 이런 짜증도 받아 줘야 하나?

“알지. 근데 그렇다고 나까지 쟬 싫어해야 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 그럼 쟤랑 돈독한 관계라도 다지게?”

왜 내 말을 이해 못 하지? 나는 슬슬 열이 올라오는 것 같아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가 언제 신시아랑 친해지고 싶다고 했어? 걔가 뭔 짓 한 것도 아닌데 구태여 내가 면박 주고 피할 필요가 어디 있어?”

“아무 짓도 안 했다고?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아로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흔들리는 동공이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질책하고 있었다.

코르셋을 차지도 않았는데 속이 갑갑했다. 차라리 이 기회에 할 말 다 하고 신시아와 관련된 문제를 종결짓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씩 다 따져 볼까? 넌 신시아가 정령술을 잘하고, 단숨에 공작의 신임을 얻고, 제이든과 에단의 관심을 사서 싫어하지. 근데 있잖아, 그게 다 신시아의 의지였어? 걔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그냥 그렇게 된 거잖아. 그리고 걔 황후 탄신 연회에서도 난감해했다며. 걔가 자기 의지대로 걸어 들어왔으면 그런 얼굴을 했겠어?”

감정이 격해지려는 것 같아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아로네를 직시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제이든은 그렇다 치고 신시아도 걔를 좋아하는지 모르잖아, 너. 그냥 같이 있는 모습 몇 번 봤을 뿐이지. 제이든이 정상적인 방법, 예컨대 자기 지위나 이런 거 전혀 안 이용하고 신시아한테 다가갔다고 말할 수 있어? 아니잖아. 다른 사람 다 놔두고 걔한테만 너무 야박하다는 생각 안 들어?”

아로네가 눈에 핏대를 세우고 죽어라 나를 노려보았다.

“……좋아, 네 말이 다 맞다고 치자. 내가 질투에 눈이 멀어서 만만한 애만 괴롭혔고, 그 질투에도 허점이 있었다고 치자고. 근데 그러면 내 모든 상황도 그냥 그랬던 거야?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던 불운이었어?”

나는 가슴 깊이 우러나온 한숨을 내쉬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힘겹게 답했다. 아로네가 울듯 말듯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그런 의미로 하는 말 아니라는 거 알잖아. 네 가정 환경 거지 같았던 건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러니까 네가 신시아 괴롭혔다는 것까지 끌어안은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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