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그래, 한번 두고 보자고. 아로네가 황궁에 들어가고 나면 내가 널 어떻게 할지.”
미래를 가정하는 어조에 뿌리 깊은 멸시가 깃들어 있었다. 분하게도 받아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건 강혜라 인생 최대의 수치다. 주먹을 말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데네브가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구제 불능을 대하듯 혀를 끌끌 찼다.
나는 비죽 올라간 얄미운 입매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알고 으스대는 게 보기 싫었다. 그래서 나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반쯤은 오기였다.
“그래요, 두고 봐요. 내가 가만히 있을지.”
데네브는 그저 비웃는 걸로 대신 답했다. 나는 씩씩거리며 아로네를 찾았다. 말에는 의지가 있고, 이미 내 다짐은 발화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데네브의 말마따나 ‘예산만 축내는 객식구’ 타이틀을 버리고 보다 생산적인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리고 솔직히 아로네가 나한테 해 준 게 얼마인데 그럴듯한 생일 선물을 못 사 주면 쓰겠어?
딱 기다려라 데네브. 내가 무조건 번듯한 직장 얻어서 네 콧대 눌러 준다.
***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잠귀가 밝은 나는 꼭두새벽부터 바쁘게 복도를 오가는 발걸음 소리에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기상해야 했다. 대충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아로네의 방으로 건너가자 난리 통이 펼쳐져 있었다.
아로네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치장을 받고 있었다. 나는 질린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말을 붙였다.
“연회는 한참 뒤인데 벌써부터 치장을 해?”
얼굴 마사지를 받느라 아로네가 눈을 감고 답했다.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 내고 잤으면 피곤할 법도 한데 아로네의 목소리는 산뜻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하지. 오늘이 무슨 날인데 평소보다 두 배, 세 배는 공을 들여야 하지 않겠니.”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선명했다. 나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시녀들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사실 이 세계에서 성년식이라는 것은 순전히 대외적 명목에 불과하고, 실상은 정치판이나 다름없다. 플라스마 제국 내에서 권력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이 승냥이 떼처럼 몰려들어 이익과 실을 셈하고 거래하는 발판이 되는 장소 말이다.
근데 그런 자리가 적어도 2시간 이상 이어진다는 거지? 어휴 피곤해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여튼…… 나는 좀 더 자다가 준비해도 되지? 난 주인공이 아니니까.”
아로네가 곁눈질로 내 얼굴을 확인하고 무심하게 말했다.
“얼굴만 비추고 바로 가 버리진 않을 거지?”
“당연하지.”
그토록 치열하게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로네는 불안해했다. 오늘 발표될 결혼 소식 때문인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한 달간 제이든과의 교류는 완벽하게 부재했고, 언젠가 황후의 탄신 연회에서 제이든이 모두를 엿 먹인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언제나 제이든이 문제다. 걔는 정말 문제가 뭘까?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주어 들어 올리고 아로네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자 아로네가 내 손을 꽉 쥐었다 놓았다. 창백한 온기가 미미하게 피부 표면에 남았다.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참, 그 아는 사람한테는 연락 왔어?”
“아, 응.”
이게 무슨 얘기냐고 하면. 며칠 전, 그러니까 데네브가 내 무능함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갔던 날.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제부터 독립하겠다고 선언했다.
스물두 살이나 먹고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 애한테 독립 선언을 하다니. 사실 그때 좀 쪽팔렸다.
그동안 하도 놀고먹느라 바빠서 내가 남들 눈에 얼마나 한심해 보일지 미처 생각을 못 했었는데, 내 입으로 직접 내뱉고 보니까 약간 인생 루저 같아 보였던 것이다. 내 선언에 당연히 아로네는 결사반대를 했다.
‘갑자기 뭐? 누구한테 안 좋은 소리라도 들었던 거야? 그동안 잘 지냈으면서 왜 떠나려고 해?’
이렇게 기겁을 하면서 말이다.
아로네는 그런 결정이 어디서 어떻게 나온 거냐고 나를 탈곡 털듯 탈탈 털었다. 그래서 하마터면 데네브의 이름을 말할 뻔했지만 이 지경까지 오니 나도 오기가 생겨서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물론 데네브가 극딜을 했다고 고자질하면 내가 굳이 일할 필요도 없이 단숨에 상황이 종결될 것이다. 분노한 아로네는 아무도 못 말리니까.
하지만 데네브의 말마따나 불과 1년 후에 아로네는 저택을 떠날 것이고, 내가 황궁까지 따라갈 수 있는 노릇도 아니다. 그러니 이렇게 마음 다잡았을 때 자립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
확고한 내 의지에 아로네는 언제나 그랬듯 항복했고, 결국 추천장―사실상 협박장―을 쓰기 위해 펜을 들었다. 그리고는 최강 권력자다운 말을 했다.
‘원하는 부서 있니?’
‘와, 골라서 갈 수도 있어? 뭐가 있는데?’
‘감사원, 재정부, 행정부, 환경부, 문화부 중에서 골라 봐.’
아로네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내가 말하긴 좀 뭐하지만 난 꽤 똑똑한 편이고, 어떤 환경이든 하루 이틀 만에 적응할 수 있는 생존의 대가였으며, 센스와 넉살도 고루 갖추었다.
한마디로 나는 사회생활에 있어서 최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객관적으로 나 자신을 평가하자 불현듯 강한 충격이 후두부를 강타했다.
세상에, 내가 이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었다니……? 이거야 원. 어딜 가든 잘할 게 분명해서 고민이었다.
문제는 일하는 게 미치도록 싫다는 것이다. 나는 머리를 싸매고 고개를 숙였다. 아로네는 한가로이 그 모습을 구경했다.
가만 보자. 그래도 명색이 추천받고 입사하는 건데 조금이라도 더 잘할 수 있는 곳에 가야 아로네 평판에 도움 되지 않을까? 아니, 그 전에 가장 노력이 적게 드는 곳은 어디지?
우선 환경부는 탈락. 관련 지식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그냥 관심이 없어. 같은 이유로 문화부랑 행정부도 탈락. 이 나라 돌아가는 꼴에 대해서 최소한의 최소한으로만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일을 하겠어? 잘 쳐 봤자 행정부 똘추 같은 별칭이 암암리에 돌아다니겠지.
그럼 남은 게 감사원이랑 재정부인데. 흠, 감사원이면 자주 출장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집 밖에도 잘 안 나가는데 무슨 출장이야. 탈락!
그래, 최후의 승자는 재정부 너구나! 22년간 경제랑 담을 쌓고 지내서 이제 와서 친해질 수 있을까 심히 걱정은 된다만, 최악보단 차악이 나은 거겠지.
뭐, 대한민국이라는 주입식 교육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나라면 어떻게든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심지어 난 2년 만에 사채를 청산했다는 전설의 기록을 세웠다고.
나는 희망의 싹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아로네 옆에 착 달라붙어 아무것도 안 하고 꿀 빨 수 있는 선택지를 포기하고 기꺼이 나라의 노예가 되기를 자청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데네브의 독설은 참 뭐랄까…… 없던 열의를 끌어올리는 힘이 있다. 여기가 한국이었으면 데네브한테 대치동 수능 강사 한번 해 보라고 강력 추천해 주는 건데.
나는 눈에 힘을 주고 단호하게 말했다.
‘결정했어. 재정부가 제일 나을 것 같아.’
‘내 생각도 그래.’
아로네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을 보자 내 선택에 강한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아로네는 그 즉시 추천서를 써서 부쳤다.
그리고 답장을 기다리기를 며칠. 드디어 오늘 답장이 온 것이다.
아로네가 못마땅해하는 기색으로 편지를 건넸다.
“면접 보러 오라는 내용이야.”
“오, 고마워!”
“혜라, 마지막 기회야. 면접 장소에 나가면 앞으로 황궁이 제공하는 숙소에서 지내야 해. 물론 여기서 출퇴근해도 괜찮지만 너처럼 게으른 애가 굳이 통근할 리가 없지. 그러니까…… 혼자 떨어져 살아도 정말 괜찮아?”
강렬한 눈빛이 괜찮지 않음을 말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너처럼 게으른 애? 역시 아로네, 날 정확히 꿰뚫어 봤군.
“난 괜찮아. 그래도 최대한 주말마다 올게. 시간 좀 지나면 너도 내가 첫 월급으로 뭘 선물해 줄지 꽤 기대하게 될걸?”
나는 부러 능청을 떨었다. 그제야 아로네는 내 마음을 결코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완전히 깨닫고 허탈하게 웃었다.
“얼마나 일할지는 모르겠지만, 힘들면 바로 그만둬.”
“그럴게. 하여튼…… 이따 보자. 모든 게 다 잘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래.”
나는 거울 속 아로네의 얼굴과 눈을 마주했다. 한 폭의 명화처럼 아름다운 아이가 따뜻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린 듯이 미소 지었다.
말에는 힘이 있다고 했다. 부디 무사한 하루가 되길 바랐다.
***
감미로운 선율이 넓은 홀을 가득 채웠다. 수십의 사람들이 하하 호호 떠들며 샴페인을 기울였다.
누군가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외침이 간헐적으로 공중에 떠돌았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문에 시선을 주며 익숙한 낯을 확인했다. 마치 정교하게 짜인 연극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연회장 구석에 자리를 잡고 주위를 둘러봤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 내가 원래 이렇게 낯가리는 사람이 아닌데 3초에 한 번씩 신기하다는 시선과 뒷말을 들으니까 절로 식은땀이 났다. 구경났냐고 소리라도 지르면 훨씬 나을 것 같은데 그럴 수 있는 노릇도 아니고 말이지.
“다 필요 없고 그냥 방으로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아로네를 위해서라도 계속 있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디저트를 축내며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하기를 기다렸다.
“님프 가문의 알렉산더 공작님과 데네브 소공작님, 그리고 아로네 공녀님 입장하십니다!”
나는 딸기 치즈 타르트에 뻗은 손을 도로 거두고 사람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택의 주인이자 제국의 축인 공작가 내외에게 사람들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