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자기 욕하는 건 귀신같이 알아듣는 데네브가 2차전을 시작하기 전에 다행히도 마차가 출발했다. 나는 오늘도 데네브를 효과적으로 놀려먹은 것을 자축하며 편안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제4장: 우당탕탕 황궁 적응기》
JMT공금
“준비됐어?”
“어…… 아마도 그럴걸?”
“풋, 너도 긴장이라는 걸 하는구나?”
“참나. 야, 나도 사람이거든?”
“글쎄. 그동안의 네 모습을 보면 심장을 집에 두고 다니는 것 같아서 말이야.”
황궁에 도착하고 마차에 내리기 전, 아로네가 나를 부여잡고 대뜸 시비를 털었다.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는데 바빠서 차마 그 말에 대꾸할 겨를이 없었다.
놀랍게도 나는 차원 이동을 한 이래로 가장 긴장하고 있었다. 공작과 데네브를 만났을 때도 이렇게 떨지 않았는데……. 아로네 없이 딛는 메인 스테이지라서 그런 걸까?
장난기 가득한 말과 달리 아로네는 차게 식은 내 손을 지압해 주고 옷맵시를 점검해 줬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 갈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응…….”
드넓은 황궁에서 미아가 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나를 마중 나온 사람이 있었다. 갈색 머리칼과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였다.
그는 본인을 ‘피터’라고 소개하며 붙임성 좋게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나는 생전 처음으로 보는 대기업 면접이 떨려 생각이 많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저세상 친화력을 가진 피터도 입을 다물어 버렸다. 신화에나 나올 법한 웅장하고 화려한 황궁 사이를 걷는 것이 은근한 압박감을 주었다.
어디 멀리 끌려가는 사람처럼 죽상을 하고 걷다 보니 재정부이자 면접 장소인 건물에 도착했다.
건물은 고작 3층밖에 안 되었지만 그 면적이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피터가 착각하고 날 박물관으로 데려온 건 아닐까? 나는 지붕 위로 휘날리는 깃발을 바라보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각 층을 빼곡히 메운 유리창이 햇빛을 받고 보석처럼 번쩍거렸다. 나는 눈을 찡그리면서도 창문 너머의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일하고 있는 모습을 주의 깊게 보았다.
피터가 거대한 적갈색 문을 열었다. 나는 문 바로 위에 달린 재정부의 상징 로고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피터의 안내에 따라 건물에 들어가자 데스크가 바로 나타났다. 그 양옆으로는 사무실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
그는 나를 데스크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넘긴 뒤 담백한 작별 인사와 함께 바람처럼 사라졌다. 나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2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기나긴 복도를 걸어 어느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직원은 나뭇결이 멋들어진 문에 정중하게 노크했다. 곧이어 들어오라는 승낙이 들려왔다. 나는 다시금 터질 것처럼 뛰어 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문지방을 넘었다.
방 안에는 두 명의 면접관이 앉아 있었다. 한 명은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깐깐해 보이는 중년 여성이었고, 다른 한 명은 30대 초반 즈음 되어 보이는 안경 쓴 남성이었다. 나는 허리를 곧추 펴고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혜라입니다.”
“그래요. 오느라 힘들지는 않았고요?”
“네.”
친절하게 웃는 남자를 보니 긴장이 조금 풀렸다. 나는 공손하게 손을 모으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여자가 책상에 가지런히 놓인 서류를 성의 없이 넘겼다.
청탁으로 이루어진 자리 아니랄까 봐 면접장 특유의 꽉 조인 분위기가 부재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남자가 안경을 고쳐 쓰고 펜을 바로 잡았다. 나는 본격적인 면접이 시작되었음을 눈치챘다.
“추천서는 훌륭하기 그지없군요. 혜라 씨가 적힌 대로 유능하다면 바로 채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예요.”
으악. 양심이 가슴을 아프게 찌르는 동시에 추천서 내용이 조금 궁금해졌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재정부는 돈이라는 아주 민감하고 중요한 분야를 다루기 때문에 서면으로 쓰인 것만 가지고 채용을 할 순 없어요. 셈에 약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안 되죠.”
그 대목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그리 쉽게 풀리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한숨을 내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여자의 말을 남자가 이어받았다.
“그런 연유로 형식적인 테스트를 진행하고자 하는데요, 10분 이내에 모든 문제를 풀어 주시면 됩니다.”
남자가 양피지 한 장과 깃펜을 건넸다. 참 특이한 면접 방식이라고 생각하며 깃펜을 쥐었다. 그리고 5개의 문제를 읽는 순간 종이를 구겨 버릴 뻔했다.
문제의 수준은 절망적이었다. 길게 이어진 수식을 단순 연산하거나 말장난 쳐 놓은 돈 계산 문제를 풀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다만 숫자의 길이가 기본적으로 다섯 자리가 넘어간다는 점이 조금 까다로웠다.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학습지를 풀며 자란 한국인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나는 거의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과학 기술이 없는 곳이니 계산기 또한 부재해 길고 복잡한 수식을 단숨에 풀어내는 것이 어렵긴 할 테다.
‘……그렇다고 이 정도일 것까지야.’
엄격한 말과 달리 어쨌든 청탁을 받긴 했으니 어떻게든 나를 낙하산으로 채용하기 위해서 일부러 질문의 수준을 최하로 낮춘 건 아닐까?
나는 희망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지만 면접관들의 표정은 너무나도 진지해 보였다. 이게 진심이라면 이 나라의 예산 관리엔 구멍이 숭숭 나 있을 것이 뻔하다.
나는 후루룩 문제를 풀고 반쯤 체념하며 시험지를 제출했다. 남자가 무심하게 답을 채점하다가 돌연 흥분하며 옆자리의 여자를 간절하게 붙들었다.
동그라미가 가득할 것이 분명한 시험지를 곁눈질로 내려다본 여자가 기절초풍하며 이마를 짚었다. 그들의 얼굴에 얼핏 광기에 찬 환희가 차올랐다.
남자가 기쁨이 역력한 어조로 말했다. 어찌나 흥분을 했는지 삑사리가 울렸다.
“당장 계약합시다! 실장님, 혜라 씨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가 틀림없어요! 저희가 눈이 빠져라 찾아다녔던 계산 셔트을……이 아니라 인재라고요!”
“동감하네. 혜라 양, 지금 이 자리에서 계약서를 쓰지.”
진심으로 이곳에서 탈주하고 싶었다. 저들은 찐이었던 것이다…….
엄격해 보였던 여자조차 들떠서 허겁지겁 계약서를 들이 내미는 모습이 정말 없어 보였다.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천재라니? 지극히 평범한 문과생이 살다 보니 이과 천재라는 소리를 다 들어 보네. 날 아는 사람들이 이 꼴을 보면 분명 죽어라 웃어 댈 것이다.
아주 조금 남아 있었던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어진 지 오래였다. 내 상관 될 사람들이 이리 모자라 보여서 어떡하지? 설마 나, 천재라는 허울 좋은 칭찬에 가둬져 하루 종일 일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
그들은 무아지경으로 침을 튀겨 가며 내게 최고의 연봉과 복지를 약속했다.
허접하기 짝이 없는 테스트에 더듬거리는 지원자만 만나다가 만점을 받은 나를 만나서 더욱 놓치기 싫은 걸까? 마치 1년에 한 번 하는 블랙 프라이데이처럼? 이럴 줄 알았으면 정상적으로 취업할 걸 그랬다.
“자, 혜라 양? 이곳에 사인만 하면 된다네.”
“이 정도 연봉이면 신입치고는 파격적인 편이고, 연차와 실적에 따라 점점 올라갈 거예요. 황궁에서 제공하는 숙소도 끝내주게 좋고요. 혜라 씨 입장에선 실이 될 게 하나도 없어요. 제 경력을 걸고 약속합니다! 그러니 마음 편히 사인하셔도 돼요!”
“……예.”
아무리 내 자존감과 미래를 위해서라곤 하지만 정말 잘하는 짓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서명란에 대충 이름을 휘갈기자 그들이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배부르게 웃었다.
그 표정을 보니 갑자기 배알이 뒤틀리고 물밀듯 후회가 밀려왔다.
아, 그냥 내가 방금 미쳤었던 것 같다고 말하고 계약서 가지고 튈까?
***
내 취업 소식에 아로네는 함께 기뻐해 줬다. 그래서 도리어 수상쩍었다. 이상하다, 쟤가 저럴 리가 없는데?
내가 의문을 구체화하기 전에 아로네가 눈치 빠르게 미리 준비해 두었던 꽃다발을 건네줬다. 처음 보는 꽃이었는데 향기가 아주 좋았다.
“주말마다 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어떻게 가만두지 않을 건데?”
나는 다정한 선물과 어울리지 않는 말투가 웃겨서 실실거렸다. 그런데 나만 재밌고 아로네는 전혀 아니었나 보다. 아로네가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내가 지뢰를 밟았구나. 후회가 몰려왔다.
“글쎄. 정 궁금하면 그때처럼 또 잠수 타 보던가.”
“죄송합니다. 연락 꼬박꼬박하겠습니다.”
아로네가 마법의 단어를 꺼내 들었다. 솔직히 억울했지만 아로네의 입장에선 충분히 유죄였기 때문에 그냥 싹싹 빌었다. 아로네가 흥, 콧방귀를 뀌고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언제부터 출근하래?”
나는 주저하다가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어, 그게……. 모레부터 나오래.”
“뭐? 상도덕이 있지 무슨…….”
아로네는 당장이라도 책임자에게 항의 편지를 쓸 것처럼 몸을 들썩거렸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벌어질까 봐 몹시 두려워져서 황급히 말했다.
“야야! 그러지 말고 진정해 일단. 이게 다 내가 면접을 심하게 잘 봐서 그런가 봐. 나한테 키스라도 퍼붓고 싶은 표정이던데, 그 사람들?”
다시금 얼빠진 낯들을 떠올리니 절로 입가가 씰룩였다. 이 세계에 카메라가 없는 게 천추의 한이다 정말. 그 표정을 찍어다 짤로 써야 하는데.
아로네가 나를 지긋이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힘없는 동작에서 포기한 자 특유의 체념이 드러났다.
“하여간 특이해.”
담백한 대화 뒤로는 지옥의 짐 싸기가 시작됐다. 다행스럽게도 아로네가 수많은 하녀들을 내게 붙여 준 덕분에 수월하게 짐을 챙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