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138)

<28화>

저택에 머문 지 얼마나 됐다고, 그동안 아로네가 사다 준 옷이며 장신구며 갖가지 잡화가 상당했기 때문에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그 어마어마한 짐을 싸길 포기하고 차라리 맨몸으로 떠났을 것이 분명했다.

황혼이 지기 시작할 무렵, 내 이름 앞으로 재정부에서 서신이 왔다. 모레 오전 9시에 데리러 갈 테니 시간을 엄수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계약서 작성부터 시작해서 정말 절차가 쑥쑥 진행됐다.

원래 이런 건가? 취직해 본 적이 없으니 번갯불에 콩 튀겨 먹는 속도가 일반적인지 알 겨를이 없었다.

***

채 이틀도 안 되는 기간이었던 만큼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나는 하루 종일 아로네와 붙어 다니며 마지막 농땡이를 피웠다. 최후의 이틀 동안 우리는 알차게 시간을 썼다.

그러다 문득 그동안의 생활을 돌이켜 보니 우리가 생산적인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불현듯 드는 깨달음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럴 수가. 아로네가 놀라울 만큼―나에 비하면 양반이긴 하지만― 게을러졌잖아. 이곳에 머무는 동안 아로네가 공부하는 모습을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드물게 봤다.

세상에, 내가 성실하고 영민한 애를 망치고 있었던 건가? 쾌락에 눈이 멀어 친구를 망치다니.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나는 아침 9시까지 반나절을 앞두고 아로네와 진지한 이야기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특히 제이든의 이름은 다시 언급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아로네의 양손을 감싸 쥐고 얼굴을 단호하게 굳혔다. 아로네가 의구심과 불안을 담고 내 말을 기다렸다.

“아로네,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야.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지만, 그동안 우리 너무 놀기만 한 거 같아.”

“갑자기 뭐야?”

얘 또 시작이라는 듯이 아로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원래 넌 무슨 일에도 열심이었잖아. 공부, 예체능, 운동…… 뭐든지 말이야. 근데 내가 온 뒤로 전부 손에서 놓아 버린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아.”

“……그래서 그동안의 시간이 후회된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지금?”

어마어마한 확대 해석이었지만 내가 일정 부분 말을 오해하게 했음을 알아차렸다. 그간의 경험으로 확신하건대, 빨리 해명하지 않으면 아로네가 극대노해서 일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될 것이다.

“아니아니아니,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라! 어차피 나도 이제 일하느라 정신없을 테니까 너도 슬슬 전의 일상으로 복귀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거지. 어…… 그리고 제이든 말인데…….”

나는 말을 길게 늘이며 아로네의 눈치를 봤다. 아로네가 계속하라는 듯이 눈썹을 까닥였다.

“그때 내가 했던 말 기억해? 그렇게 좋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파혼을 막으라고 했던 말?”

“그래.”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평범한 사람들이 하듯 그런 방식으로 노력할 거지? 대화라든가 하는 방식으로?”

“……지금 신시아를 또 괴롭힐 거냐고 묻고 싶은 거야?”

어이없어하는 기색이 역력한 것으로 보아 확실히 아로네가 개과천선하긴 했나 보다. 뿌듯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와 별개로 나는 뒷수습을 해야 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지. 내가 널 몰라? 하하, 걱정할 필요 없겠네!”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로네의 반응이 냉담하기 그지없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로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부에 콕콕 박히는 무언의 질타가 조금 아팠다.

“하……. 네가 혼자 황궁에서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뭐든 지금처럼 가볍게 굴지는 마.”

“그럼 너는 뭐든 나처럼 굴어 봐! 안 그래도 복잡한 세상인데 매사에 진지하고 걱정하면 머리 터져. 넌 맨날 나한테 말 좀 예쁘게 하라고 하지만, 어느 정도 교양 내려놓으면 제이든한테 말 걸기 좀 편해질걸?”

“……나도 알아. 날 바꾼 게 누군데.”

아로네가 답지 않게 시선을 피했다. 새하얀 두 볼에 떠오른 홍조가 미치도록 귀여웠다. 어쩜 저리 사람이 사랑스러울 수가 있지?

오래간만에 몽글몽글한 분위기가 피어올랐다. 때마침 방에 들어온 베키가 낯선 공기에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풍차처럼 돌아가는 시선을 보아하니 창문 아래로 뛰어내리는 것과 복도로 탈주하는 것 중 무엇이 이 뻘쭘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게 해 줄까 고민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다가 죽기엔 아직 자신이 너무 젊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베키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안 보는 척해도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흘깃거렸던 우리는 베키가 나가자마자 빵 터져서 한참 동안 웃었다. 흠, 이 정도면 괜찮은 수습이겠지?

***

한밤중, 나는 몸이 살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눈곱으로 딱 달라붙은 눈을 힘주어 뜨자 꿈결 같은 파란 실타래가 얼굴 위로 쏟아졌다.

희멀건 얼굴이 흐릿한 시야를 가득 채웠다. 어둠 속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녹색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심장이 멎었다.

“으악 이게 뭐……!”

남색 나이트가운을 걸친 이 시대의 패션왕 귀신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공포에 절은 비명이 손가락 사이를 투과하지 못하고 입안에서 아우성쳤다. 귀신이 다정한 손길로 내 손등을 토닥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고막에 날아들었다.

“쉬이……. 나야, 혜라.”

“으, 으어……엥? 신시아?”

신시아는 내가 진정한 듯하자 바로 손을 뗐다. 순식간에 잠이 확 달아났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 야심한 밤에 신시아가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추측했다.

나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옆자리를 두드렸다. 신시아가 내 옆으로 파고들어 앉아 산발이 되어 버린 머리카락을 세심하게 정돈해 줬다. 나는 그 손길이 조금 어색해서 몸을 빳빳이 굳혔다. 음, 뭐라도 말해야겠군.

“어디 한번 말해 봐. 날 놀라게 하면서까지 깨운 이유가 뭐야?”

그 말에 신시아는 진심으로 서운해했다. 내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미처 몰랐다면서 신시아가 입을 삐죽였다.

“왜겠어? 내일 떠난다면서. 나한테 말도 안 해 주고 가려고 했던 거야? 그동안 얼굴도 안 비추고…….”

“아.”

신시아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그러진 눈가에 애달픔이 서려 있었다.

“아? 너한테 난 항상 뒷전이구나.”

나는 말을 아꼈다. 물론 우리 사이가 예전만 같았다면 당연히 말해 줬을 거다. 하지만 마냥 예전 같을 수 없게 만든 사건이 얼마 전에 벌어지지 않았던가?

내 속도 모르고 투정하는 신시아가 조금 답답했지만 나는 일단 사과했다.

“미안.”

“미안해할 거까진 아니었는데……. 그래도 사과해 줘서 고마워. 근데 갑자기 웬 취업이야? 공녀님이 너한테 엄청 잘해 주잖아.”

신시아가 피아노를 치듯 매트 위로 손가락을 두드리다가 예고 없이 팔짱을 꼈다. 나는 움찔하며 슬금슬금 팔을 뺐다. 난 아직 그날의 밀회를 완전히 잊지 못했다. 애초에 그 일 때문에 그동안 아로네한테만 붙어 있던 거였는데.

멋쩍어진 신시아가 작게 헛기침을 하고 괜히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분위기가 이렇게 어색해질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냥 가만히 팔을 내줄 걸 그랬다. 나는 길게 이어지는 정적에 숨이 막힐 것 같아서 끊어진 대화를 이었다.

“어, 그게…….”

그동안 내가 너무 한심하게 산 거 같아서 이젠 사람 구실 좀 해 보려고, 라고 말하기엔 모양새가 너무 빠졌다.

“그냥…… 갑자기 자아실현의 욕구가 생겼달까?”

내가 한 말이지만 진짜 얼토당토 없었다.

“그거 알아? 너 거짓말할 때마다 눈 내리까는 거.”

나는 퍼뜩 신시아를 마주 보았다. 분명 장난기 서린 얼굴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씁쓸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바라보는 눈빛은 멜로드라마의 주인공 같아서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말려들어 갔다.

신시아에게 미안한 감정이 설핏 들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와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호감이 전과 달리 몹시 불편해졌다.

물론 그 호감이 오롯이 순수한 의도에서 근거했다는 건 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는 사람을 설레게 하기 마련이고, 나 또한 그런 올곧은 애정이라면 언제나 환영한다.

하지만 신시아는 뭔가 좀 찝찝했다. 처음 신시아와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아로네와 함께 목격한 그 광경은 꽤 충격적이었다.

신시아가 먼저 나가자고 제안했을 것 같진 않다. 황태자나 되는 애가 ‘같이 바람 쐴래?’ 했을 때 단칼에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극히 적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제이든과 노닥거렸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날은 아로네의 생일이자 국혼이 발표된 당일이었다.

신시아든 제이든이든 미치지 않고서야 굳이 그날 같이 어울려야 했나?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고 해도 상황이 상황인데, 아무리 곤란해도 무조건 거절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만남이 설사 순수한 의도였다 해도 그딴 건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건 그 광경을 누가 봤느냐이다.

내 안에서 신시아라는 사람의 정의가 유의미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결코 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그와 웃고 떠들 수 없을 것이다. 진심으로 욕하는 사람은 제이든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걸 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불완전하고, 그렇기에 입체적이다. 아로네의 경우만 해도 처음엔 쟤는 왜 저럴까 싶어 혀를 찼지만, 지금은 죽고 못 살지 않는가.

……아로네의 죄까지 끌어안았으면 신시아의 찜찜함도 안고 가는 것이 타당한데 그게 왜 마음대로 안 될까? 아로네는 사랑하지만 신시아는 그저 그런 관계에 불과해서? 어쨌든 난 아로네의 편이라서?

필요 이상으로 침묵이 계속되었다. 결국 신시아는 제대로 된 대답을 듣는 걸 포기했다. 그가 한숨 쉬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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