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38)

<37화>

그래도 속물처럼 안 보이려면 한 번은 튕기는 게 좋겠지? 나는 선량한 낯을 꾸며 내고 말했다.

“상 같은 건 괜찮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고, 운 좋게도 제가 그 기회를 잡았을 뿐이니까요.”

역시나 황제는 그 푸른 눈을 빛내며 내 거짓을 꿰뚫어 보았다. 입바른 소리는 필요 없다는 듯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자비를 베풀어 다시 한번 묻겠네. 정말 없나?”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 순간, 나는 모든 신경을 입술에 집중시키고 파도처럼 출렁이는 야망을 차분히 잠재웠다. 그리고 또렷이 눈을 뜨며 황제를 직시했다.

“……더 높이 올라가고 싶어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황제가 내 우아한 요구를 알아들었을 것이라 믿었다. 제이든은 어이없어하며 코웃음을 쳤고, 황제는 그저 말없이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그가 나를 맹랑한 꼬마 보듯 바라봤다. 하지만 심기가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야. 앞으로를 기대하지.”

“감사합니다.”

그것이 황제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나는 당당히 어깨를 펴고 들어올 때와 확연히 달라진 마음가짐으로 나갔다. 닫힌 문 너머로 황제와 제이든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나는 궁전을 나오자마자 기쁨의 막춤을 추었다. 궁전의 시종들이 주춤주춤 나를 피해서 걸었다. 이상한 사람 취급당하는 거?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곧 지옥 같은 재정부에서 해방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

다음 날, 나는 평소와 같이 출근해서 대용량 커피를 만들고 있었다. 휘휘 머들러를 젓고 있는데, 스칼렛이 어제와 달리 몹시 우울한 낯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스칼렛이 지금처럼 저기압이었던 적이 없어서 걱정됐다. 보통 큰일이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어떻게…… 어떻게 혜라 씨가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요……?”

스칼렛은 다짜고짜 동문서답을 했다. 나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멍 때렸다. 급기야 스칼렛은 대낮부터 꺼이꺼이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내가 지금 꿈을 꾸나?

직장에서 듣기 힘든 울음소리에 호기심을 느낀 타 부서 사람들이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스칼렛이 더욱 눈물을 쥐어짜 냈다. 세상이 떠나가라 우는 모습에 깊은 동정심이 일었다.

나도 모르게 스칼렛의 손을 포개어 잡자 그가 내 손이 마치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강하게 붙잡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힘드신 거면 차라리 오늘 하루 쉬시는 게 어떠세요?”

“제가 어떻게 그러겠어요! 지금 일분일초가 바쁜데! 앞으로 더 환장하게 바빠질 텐데!”

“이럴 수가. 앞으로 더 바빠진다고요?”

맙소사, 이제야 이해가 됐다. 몇 주 전 그날처럼 갑자기 또 업무량이 배로 뛰려는 모양이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였다. 나 또한 스칼렛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스칼렛은 고개를 내저었다. 다 큰 성인이 측은하게 울상을 짓는 것이 참 안 되어 보였다. 손수건을 건네자 스칼렛이 시원하게 코를 풀었다.

“그런 게 아니라…… 아니 앞으로 분명 그렇게 되겠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혜라 씨 부서가 바뀐대요! 어떻게 우리만 이곳에 남겨 두고 혼자서 그렇게 가 버릴 수가 있어요……?”

“엥? 어디로 가는 데요 제가?”

“황태자 전하 보좌관으로요……. 하, 그래요. 재정부에 있기엔 혜라 씨 그릇이 크긴 했어…….”

스칼렛이 가방에서 상부로부터 내려온 공문을 꺼냈다. 오늘 받은 공문이라기엔 지나치게 꼬깃꼬깃했다. 스칼렛이 내 인사이동에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나는 허겁지겁 공문을 훑어보았다. 제이든의 보좌관이라고? 도저히 내 귀를 믿을 수 없었다.

「황명에 의거하여 재정부 황실 예산 관리 1팀 혜라를 제이든 헤인 황태자의 보좌관으로 임명한다.」

“헐, 진짜네?”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이 뒷목을 잡고 쓰러지려고 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그레이스가 털썩 무릎을 꿇고 방금 본인이 들은 것을 부정했다.

하기야, 이 사람들 입장에서는 내가 떠나면 안 되겠지. 내가 똥이란 똥은 다 처리하고 있으니까!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문서 지옥인 재정부에서 탈출하는 것은 기뻤지만, 그 탈출구가 제이든의 보좌관이라고? 그럼 탈출이 아니라 문서 지옥에서 다른 지옥으로 이사 가는 게 아닐까?

그래도 제이든의 보좌관이 되면 확실히 데네브 앞에서 그것 보라며 의기양양하게 웃을 수 있긴 하다. 근데 앞으로 내 상사가 제이든이라고? 내가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는 제이든? 그건 많이 너무한 거 아닌가?

승진을 시켜 달랬더니 도리어 엿을 먹인 황제를 향해 가슴 깊숙이 우러나온 저주를 보낸다.

나는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데, 내 마음도 모르고 스칼렛은 다시 떼를 쓰기 시작했다.

“나도 같이 데려가요! 예? 혜라 씨 덕분에 겨우겨우 굴러간 부서였는데 나만 남겨 두면 나 정말 과로로 죽을지도 몰라요…….”

“저한테 무슨 권력이 있겠어요.”

나도 명령받고 가기 싫은 곳에 가는 마당에…….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스칼렛은 바닥에 누워 의미 없는 일인 시위를 벌였다. 참나. 그동안 쓴 것만 먹고도 잘 살아왔으면서 사탕 몇 개 좀 먹었다고 다시 쓴 것 먹기를 거부하는 게 웃기고 안쓰러웠다.

아무래도 내가 스칼렛한텐 아편 같은 존재인가 보다. 나는 인내심을 갖고 스칼렛을 어르고 달랬지만 그래도 도무지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이길래 충격 요법을 쓰기로 했다.

“팀장님…… 그렇게 혼자서 농성하셔도 제가 어떻게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거부하겠어요. 다 쓸데없는 짓이니까 빨리 일어나세요. 그리고 아까 일분일초가 다 아깝다고 하셨잖아요. 전 내일모레까지만 일할 텐데, 제가 떠나기 전에 까다로운 업무란 업무는 다 처리하고 가야 후에 팀장님이 조금이라도 덜 고생하지 않겠어요?”

“아…… 아……!”

정신이 번쩍 들은 스칼렛이 황급히 일어났다. 그가 분주하게 자신의 사무실을 오가며 내 책상 위에 어마어마한 두께의 양피지들을 올려놨다. 스칼렛이 멋쩍게 웃었다.

“아이고, 축하해 주지 못할망정 내가 추태를 보였네. 미안해요. 그래도 가기 전까진 최대한 나 도와줄 거죠?”

“네, 그럼요…….”

저 환장할 인간. 나를 무슨 인간 계산기쯤으로 여기는 스칼렛이 짜증 날 때도 있었지만 헤어질 때가 되니 앞으로 양피지 산을 홀로 헤쳐 나가야 할 그가 조금 딱했다.

그래서 미운 정을 생각해서라도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하…… 오지게 많네, 진짜.”

여기서 탈출해서 다행인 걸까? 제이든 밑에서 일할 때는 제발 조금이나마 업무량이 적길 바란다.

***

“이걸 다 하라고요? 정말로……?”

차라리 이게 꿈이라고 믿고 싶었다. 나는 새 동료가 된 할리가 건네준 보고서의 양을 부정했다. 이럴 리가 없다. 하늘이 나에게 이럴 순 없다.

어떻게 재정부에서 일했을 때만큼이나 해야 할 일이 많을 수가 있지? 게다가 보좌관은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놀리는 것뿐만 아니라 가끔씩 제이든의 일정을 따라 밖을 나돌아 다녀야 했다.

내가 머리를 웅크리고 좌절하자 상사 된 도리로 신입을 마중 나와 준 제이든이 비웃었다. 그가 든 머그잔에서 라테 냄새가 났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싶다던 게 누구더라. 나라가 그저 쉽게 굴러가는 줄만 알았나?”

전에는 나름 젠틀했던 제이든은 내가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딴 사람처럼 바뀌었다. 그래, 이제 난 네 직속 부하라 사람 좋은 척 연기할 필요 없다, 이거지? 어휴, 나름의 합격선에 충족했다는 게 쓸 만한 보고서 셔틀을 찾았다는 의미였다니. 역시 제이든의 인정은 부질없는 거였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대답했다.

“물론 이면에는 이런 피나는 노력이 있었겠죠…….”

“잘 아는군. 재정부에서 했던 것만큼만 하도록.”

제이든이 검지로 내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툭 건들고 제 사무실로 쏙 들어갔다. 맞은편 책상에 앉은 할리가 어깨를 으쓱이고 바쁘게 깃펜을 움직였다.

나는 한숨을 삼키고 양피지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래서야 재정부에서의 생활과 다를 게 없었다.

사무실 공간이 더 넓어지고 가구가 훨씬 고급스러워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업무 환경은 놀라울 정도로 똑같았다.

다만 그 헉 소리 나오는 보고서를 처리하는 사람이 전과 달리 두 명으로 늘었고, 월급이 많이 올랐다는 점에서 전보다 버틸 이유가 늘긴 했다. 내 등장에 할리가 왜 그렇게 기뻐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몇 안 되는 짐을 들고 사무실 문을 두드렸을 때 할리가 지었던 표정을 잊지 못한다. 나를 무슨 구원자 보듯 바라봤었지. 왜 그런 눈빛을 했는지 1시간 만에 이해했다.

일전에 봤을 때 할리의 다크서클이 어둠보다도 짙었던 게 복선이었을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우아하게 돌려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대놓고 팀장 자리 달라고 할걸.

나는 피눈물을 흘리며 차근차근 업무를 보았다.

내 강점을 생각해 분배해 줬는지 숫자와 관련된 서류가 많긴 했지만, 아무래도 제이든이 일정 부분 국정을 다루고 있다 보니 내가 완전 젬병인 행정 관련 서류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물론 서류만 처리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제이든이 시킨 각종 심부름을 해야 했다.

그중 내가 가장 싫어하는 심부름은 신시아에게 보낼 편지를 대신 부쳐 달라는 것이었다. 을인 나는 그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완벽하게 명령을 수행했고, 그 모습을 보며 제이든은 어쩐지 긴가민가해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길 바라는 건지 정말로 모르겠다.

첫날부터 너무 힘든 하루를 보냈다. 나는 방금 막 제이든에게 마지막 보고서를 제출하고 쓰러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할리가 정신없이 펜을 휘갈기다가 넋 나간 내게 공감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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