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너무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돌멩이를 빅터한테 던져 버렸어요. 잔뜩 화가 난 빅터는 저를 막 패대기쳤고, 저는 그게 너무 아파서 도망쳤어요. 그러다가 아가씨를 치게 된 거예요. 정말 죄송해요…….”
굵은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나는 서럽게 우는 로빈을 착잡한 마음으로 응시했다.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좋을 비극적인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빌어먹게도 로빈의 눈물은 진실했다.
울컥 치닫는 감정을 누르느라 목구멍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저 말없이 빙그레 웃고 아이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속으로 로빈의 이름을 되뇌었다.
저 나이대 아이라면 하하 호호 웃으며 뛰어노느라 일분일초가 아까울 시기이다. 그런데 온갖 폭력 속에서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자란다고? 그건 불공평하고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심지어 이노피아에는 제대로 된 경비대도 없었다. 내가 알기론 제국은 복지 정책에 소홀했고, 그건 어린 애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기껏해야 공영 보육원을 운영하고 장학 재단을 설립한 게 전부지.
그러나 그마저도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선발된 아이들한테 제공됐다. 그중 이노피아의 아이들에겐 애초에 지원 자격이 없었다. 그 애들이 나라가 버린 암흑가에 살고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게 뜻하는 바는 하나다. 로빈은 평생 폭력 속에서 자라야 한다.
나는 어른이고, 저 아이 하나만큼은 도와줄 힘이 있었다. 나는 그간 모아 둔 돈이 얼마나 있나 머릿속으로 셈하면서 등을 돌렸다. 후원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
마차로 돌아가는 길은 고요했다. 나는 나대로, 할리는 할리대로, 제이든은 제이든대로 생각에 잠겨 오랫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먼저 입을 뗀 것은 제이든이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확실히 달라.”
“네?”
“넌 공녀와 달라. 그런데 어떻게 막역한 사이가 됐지?”
공녀와 다르다니? 나는 아까 그 상황에서 아로네가 나와 다르게 행동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떠드는 대로 그 애가 로빈의 무릎을 꿇리고 싹싹 빌도록 시키지 않았을 거란 말이다.
하지만 지금 제이든은 아로네가 무슨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이라도 되는 양 말하고 있었다.
그게 화가 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어찌 되었건 이런 인식이 만들어지는 데 아로네 본인이 일조한 것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변화 전의 아로네도 로빈을 벌하지 않았을 거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
“당연히 아로네가 좋은 애니까 그렇죠. 속정이 깊고, 세심하고, 알고 보면 다정하고. 하루 종일 아로네의 장점을 읊을 수도 있어요. 제이든 님은 그동안 무작정 아로네를 싫어하느라 좋은 점을 못 보셨겠지만.”
제이든이 딴지를 거려는 기색이길래 황급히 덧붙였다.
“한번 말씀해 보세요. 근래 아로네와 만났을 때 단 한 번이라도 아로네의 말을 경청한 적이 있으세요? 당연히 없죠?”
제이든은 가뿐하게 내 말을 씹고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신시아를 괴롭혔던 것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공녀가 저질렀던 패악들은? 그래도 좋은 애라고 말할 건가?”
제이든은 아로네에 대한 내 주장을 꺾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조금 흥분한 것 같은 제이든을 주의 깊게 살폈다.
“다 사실인데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있나요? 그 점에 관해서는 아로네를 옹호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지금도 아로네가 같은 짓을 하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아니라고. 아로네가 마냥 선한 사람은 아니지만 제이든 님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그 애가 구제 불능은 아니에요. 뭐, 이대로라면 평생 이해 못 하시겠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여전히 제이든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기색이었다. 다소 반항적인 미소를 보니 애초에 내 말을 이해할 의지가 없었던 것 같았다. 그가 재미있다는 듯 중얼거렸다.
“공녀가 구제 불능이 아니라고…….”
제이든은 손끝으로 턱을 쓸더니 곧 사색에 잠겼다. 잠시 후, 그가 이채를 띠고 나를 바라보았다.
“……왜 공녀가 널 곁에 뒀는지 알겠군.”
어라, 이게 아닌데.
“예?”
“됐어. 이만 가지.”
듣는 사람 궁금하게 저게 뭐야. 내가 할리를 돌아보자 그가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환장할 것 같은 기분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
와. 오늘 처음으로 대차게 깨졌다. 혼나러 들어갈 때 할리가 왜 그렇게 세상 불쌍하다는 눈빛을 보냈는지 제이든의 첫마디를 듣자마자 깨달았다.
할리 걔는 미리 언질이라도 좀 해 주지. 그렇게 쥐 잡듯이 갈구어질 줄 알았으면 기저귀라도 차고 들어가는 건데…….
사건 경위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오늘 안에 꼭 사인을 받아야 하는 문서가 있었다. 근데 알다시피 나 혼자 처리해야 하는 문서가 어마어마하게 많지 않은가?
조금 있다가 해야지 생각하다가 결국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제이든 본인이 직접 ‘근데 그거 어디 있어?’라고 물어보고 나서였다.
꼭 오늘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일을 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정말 사고를 치니까 어찌할 줄을 모르겠더라.
어쨌든 수습 불가능한 실수는 아니라서 어영부영 잘 넘어가긴 했으나 역시 제이든은 그냥 눈감아 주지 않았다.
할리를 시켜 문서를 해당 부서로 보내고 나는 도축장에 끌려가는 돼지의 심정으로 제이든의 사무실로 불려 갔다.
나는 스스로도 충분히 반성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있음을 어필하기 위해 눈을 내리깔고 두 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모았다.
제이든이 많은 말을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때론 눈빛만으로도 모든 것이 가능한 한 법이다. 슬쩍 서문을 띄우고 필요 이상으로 길게 침묵했다가 화룡점정으로 살벌하게 째려보는…….
“오늘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겠지.”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제이든이 차갑게 말했다.
“내가 널 보좌관으로 들인 이유는 오로지 네가 혼자 해낸 공적 때문이야. 그런데 오늘의 널 보면 내 결정이 후회스러워지는군.”
“시정하겠습니다.”
말을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솔직히 내가 오자마자 전보다 업무 효율성이 높아졌다는 거 본인이 제일 잘 알면서. 처음 왔을 때 할리는 감격해서 거의 혼절하려고 하더만.
내가 사라지면 제일 손해 볼 사람이 당신이야, 이 사람아.
내 잘못이 분명했지만 막상 신랄한 비난을 들으니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나는 죄송해서 죽으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 제이든을 까득까득 씹었다. 이로써 제이든을 싫어해야 할 이유가 101가지에서 102가지로 늘었다.
다행히도 내 불쌍해 보이는 연기가 통하긴 했나 보다. 제이든이 한숨을 내쉬며 손을 휘휘 저었다. 됐으니까 꺼지라는 의미다. 나는 끝까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사무실을 나오자 할리가 짐을 챙기다가 말고 작게 속삭였다. 속상해서 잔뜩 쳐진 눈썹이 순박했다.
“괜찮아?”
“어. 근데 오늘 술 한잔하자.”
“네가 그 말 하는 거 기다렸다.”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다. 제이든한테 꾸중을 들어서가 아니라 모두에게 피해를 준 내가 미워서. 그동안 잘해 오던 일인데 왜 뜬금없이 실수를 했을까?
어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후회를 털어 버렸다. 그리고 아로네가 승진 기념 선물로 보내 준 와인을 땄다.
비싼 술이라고 잔뜩 생색을 내자 할리가 반색하며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사람이 어쩜 저리 표정이 쉽게 읽히지?
나는 할리의 잔에 와인을 콸콸 따르며 물었다.
“가득?”
“말해 뭐해. 당연히 가득!”
와인은 조금씩 맛보는 것이 진리라고 했지만, 우리는 그딴 거 신경 안 썼다. 흘러넘칠 듯 가득 찬 잔을 들고 건배했다. 내가 한 모금만 마시고 내려놓자 할리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삿대질을 했다. 세상에. 할리는 나보다도 술을 못 하는 게 확실했다.
“야! 그렇게 조금 마시는 게 어디 있어! 분위기 망치려고 작정했어?”
“너 벌써 취했냐?”
“취하긴 무슨! 나 술 잘 마셔.”
목구멍이 얼마나 큰 건지 할리의 와인 잔은 어느새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쟤는 전생에 하마였나? 원샷 원킬이 좌우명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 많은 와인을 한 번에 마셔?
나는 꼰대로 인격을 바꿔 낀 할리를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그가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눈을 치켜뜨고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와인 잔을 들었다.
“으…….”
“자, 또 건배!”
“아니, 너 정말로 술만 마시다 가게? 우리 수다 안 떨어?”
“아, 얘가 뭘 좀 모르네. 초반에 좀 달리다가 알딸딸해졌을 때부터 수다 떨어야 재밌는 거야.”
순서가 바뀐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딴지 걸면 100% 할리가 꼬장을 부릴 것이 뻔해서 체념하기로 했다.
술 못 마셔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건지 할리는 계속해서 잔을 채웠다. 마시면 채우고 마시면 채우고…….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기계적으로 잔을 채우는 모습이 우스워서 처음에는 장단을 맞춰 줬지만, 저러다가 진짜로 뻗어 버릴 것 같아서 황급히 와인을 치웠다.
할리가 무슨 짓이냐면서 징징거렸다. 아무리 할리가 순박하게 생겼다고 해도 그렇지, 다 큰 성인이 떼를 쓰는 건 정말 볼 게 못 됐다. 나는 할리의 입에 생수를 꽂았다.
“깨진 건 난데 왜 네가 난리냐?”
“하지만…… 제이든 님이 그럴 때마다 내가 다 혼나는 것 같단 말이야…….”
할리의 말을 글씨로 옮기면 분명 꼬불꼬불할 게 분명했다. 풀린 눈이 웃겨서 나는 실실거렸다.
“풉. 왕년에 좀 불려 다녔나 봐?”
그러자 갑자기 할리가 바닥에 드러눕더니 난데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콧대를 타고 흐른 방울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저 미친놈. 나는 경악하면서도 그가 우는 모습을 구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