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웃으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폭소가 새어 나왔다. 웬만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것보다 술 취한 할리를 보는 게 훨씬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우냐?”
“끄흡, 내가, 흡, 얼마나 많이, 따흑, 깨졌는지, 흑, 넌 모를 거야…….”
“그래도 그런 과거가 있기 때문에 지금의 네가 있는 거 아니겠니.”
어쩌다 상황이 주객전도된 거지? 기계적인 위로를 듣고 할리는 세상 서럽게 꺼이꺼이 울어 대기 시작했다. 그동안 쌓인 게 어지간히 많았나 보다.
제이든 밑에서 홀로 일하면서 얼마나 생명 줄을 갉아먹었을까 생각하니 무척 안타까웠지만, 울부짖는 소리 때문에 혹여나 민원이 들어올까 봐 황급히 그의 입에 안주를 욱여넣었다.
천만다행이게도 할리는 얌전히 우적우적 안주를 씹었다. 그제야 나는 한숨을 돌리며 바닥에 누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던가. 나는 황급히 일어나 할리를 흔들었다.
“이 미친. 너 설마 자냐? 어?”
“…….”
진짜 환장할 노릇이다. 와인을 딴 지 1시간도 채 안 돼서 곯아떨어진 할리가 믿기지 않았다. 제 방처럼 편하게 누워 침까지 흘리는 모습은 또 뭐람? 결국 나는 자포자기하고 병나발을 불었다.
그래, 쟤한테 뭘 바래.
***
할리는 중간에 한 번도 안 깨고 코까지 골아 가며 잤다. 별 난리를 다 쳐도 안 일어나길래 대충 담요만 던져 주고 가려다가 눈물 자국이 말라붙은 얼굴을 보자니 갑자기 마음이 약해져서 소파 위까진 끌어 올려 줬다.
축 늘어진 몸이 무거워서 난리 블루스를 췄는데 그 와중에도 잘만 자는 그가 경이로웠다.
편안하게 숙면한 주제에 할리는 다음 날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나는 진작 일어나 모닝커피를 마시며 혼자 생쇼를 하는 할리를 구경했다.
전날 입었던 옷이 그대로인지 혼비백산해서 확인하는 꼴이 한심했다. 할리는 술 마셨을 때의 옷차림 그대로라는 걸 깨달고도 헛소리를 했다.
“우리…… 아무 일도 없었지……?”
“내가? 너랑? 미쳤냐 진짜?”
진짜 웃기지도 않았다. 나는 머리 옆으로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할리가 멋쩍게 웃었다.
나는 소파에 걸터앉아 눈곱이 낀 할리의 얼굴을 관찰했다. 친해진지 얼마 안됐을 때 모솔이라고 수줍게 고백했으니 여자 집에는 처음 오는 것일 텐데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푼수같이 행동한다고 해도 어쨌든 쟤도 남자인데 어쩜 이렇게 편할 수가 있지? 세상에 나와 할리 둘이서만 남아도 정말 건전하게 남은 여생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만큼 우리 사이에는 낯간지러운 감정이 완벽하게 부재했다.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더니. 우리는 그 희대의 난제에 반대돼서 다행이었다.
나는 숙취에 죽으려고 하는 할리를 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애매한 시간대라 그런지 식당은 한산했다.
할리가 허겁지겁 묽은 수프를 떠먹다 말고 갑자기 탄식을 내뱉었다. 나는 푹 익은 당근을 골라내 할리에게 건넸다. 그는 한입에 당근을 털어 넣고 웅얼거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건국 연회네…….”
“헐. 얼마나 남은 거지 그럼?”
“2주 정도?”
“뭐? 아이고 큰일이네.”
이미 황궁 어딘가는 연회 준비로 한창 바쁠 것이다. 아마 황실의 안주인인 황후가 총대를 메고 1년에 한 번 열리는 대축제를 위해 밤낮없이 동분서주하고 있겠지.
나는 한순간에 기력이 쭉 빠져서 수저를 휘휘 저었다. 건국 연회를 연다는 것은 전국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는 웬만한 귀족들이 다 참석한다는 뜻이고, 그 말은 즉 내가 외워야 하는 얼굴과 이름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제이든이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의 수가 열 손가락을 우습게 넘어서 근무 초기에 엄청 고생했는데, 그보다 두 배는 더 많은 사람들을 2주 만에 암기해야 한다니.
물론 내가 굳이 모든 귀족을 알 필요는 없다. 왜냐면 이미 제이든이 모든 귀족의 가계도를 빠삭하게 외우고 있거든.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황태자 보좌관인데 완전 모르고 있는 것도 넌센스였다.
“맙소사.”
나는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입을 떡 벌렸다. 그러면 아로네도 오는 거잖아? 모든 연회가 그렇듯 파트너를 데리고 와야 할 텐데. 일전의 황후 탄신 연회에서처럼 혼자 오려나?
에이 설마. 제이든이 제대로 돌아 버리지 않고서야 약속한 결혼까지 고작 1년 남았는데 이번에도 아로네를 내팽개치겠어? 내 상사에게 최소한의 상식은 남아 있을 거라 믿는다.
“……염병. 걔를 어떻게 믿냐. 차라리 내 손으로 장을 지지지.”
“뭐? 너 말투가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밥이나 먹어.”
일처리에 있어서만큼은 제이든을 신뢰하는 편이지만, 아로네와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진심으로 충격받은 할리를 무시하고 나는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 걱정에 다리를 달달 떨었다.
***
평화로운 초여름 어느 날, 황후 궁에서 사람이 왔다. 부서를 이동하고 처음 겪는 일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고 할리는 올 것이 왔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황후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께 오후 3시에 있을 다과회에 필히 참석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또한 명령을 어길 시 엄하게 책임을 물을 것이니 반항할 생각은 일절 하지 말라는 말씀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 이거 좋지 않았다. 나는 할리에게 경악 어린 시선을 던졌고, 그 또한 같은 것을 돌려주었다. 우리는 제이든에게 이 소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서로에게 미루었다. 할리가 입을 벙긋거렸다.
‘난 의자에서 죽어도 안 일어날 거거든? 그러니까 선택은 네 몫이야! 같이 죽던가! 나만큼은 살리던가!’
쟤가 진짜. 당장 저놈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다. 나보다 먼저 선수를 쳤다 이거지?
분해 미칠 것 같았지만 시종을 오랫동안 세워 둘 수 없었기에 나는 마지못해 총대를 멨다. 내게 폭탄을 떠넘긴 이 빚은 나중에 꼭 갚아 줄 것이다.
나는 벌벌 떨며 제이든에게 시종의 말을 곧이곧대로 일렀다. 예상대로 제이든은 신경질을 부렸다. 여기 와서 제이든이 저렇게 심통 난 모습은 처음 봤다.
“젠장…….”
제이든이 화를 못 이기고 펜을 부러뜨렸다. 부러진 펜대에서 잉크가 새어 나왔다. 제이든은 연신 머리를 쓸어 넘기며 감정을 정리하느라 바빴기에 한가한 내가 황급히 서류를 멀리 치우고 티슈를 뽑아 건넸다.
그가 사납게 티슈를 낚아채 손에 묻은 잉크를 성의 없이 닦았다.
“알았으니까 나가 봐. 신경 거슬리게 앞에서 알짱대지 말고.”
제이든이 으르렁거리듯 음절 하나하나를 씹어뱉었다. 이래서 할리가 비겁한 수까지 써 가면서 등 떠민 거구나. 나는 속으로 고개를 주억이고 혹여나 불똥이 튈까 봐 신속하게 튀었다.
안타깝게도 제이든의 심기는 시침이 점점 3에 가까워질수록 불편해지는 듯했다. 나와 할리는 모든 신경을 제이든에게 꼬투리 잡히지 않는 데 쏟았다. 황태자 궁에서 일한 이래로 가장 숨 막혔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시간은 계속 흘렀기 때문에 결국 제이든은 무거운 엉덩이를 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걔가 그러는 모습을 정말 처음 봤다.
황후가 얼마나 싫길래 치과 가기 싫은 다섯 살 꼬맹이처럼 저렇게 늑장을 부리는 거지? ……돈가스 사 주겠다고 하면 흔쾌히 갔다 올까?
나는 일하면서도 몰래몰래 그 진기한 광경을 뇌리에 담았다. 쟤가 내 심기를 긁을 때마다 지금 이 순간을 떠올려야지.
제이든은 최후의 최후까지 늑장을 부리다가 약속 시간을 5분 남기고서야 겨우 사무실을 떠났다. 그때부터는 나와 할리의 세상이었다.
우리는 살아남은 서로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한결 느슨한 분위기에서 일을 했다.
그러나 그 평화로움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제이든이 떠난 지 1시간 정도 흘렀을 때 갑자기 할리가 복통을 호소하며 바닥에 쓰러진 것이다.
할리 스스로 자가 진단하기론 점심에 먹은 거 때문에 탈이 난 것 같다고 했다. 그 와중에도 할리는 병동 상황극을 하자고 제안했다.
창백하게 질린 낯빛이 다 연기일까? 나는 할리에게 꿀밤 한 대 쥐어박을지 말지 고뇌했다. 그러나 할리가 아픈 걸 가지고 장난칠 애가 아니라는 걸 알아서 결국 업히라고 말했다.
할리를 의사에게 데려다준 후 나는 쓸쓸함 속에서 쉴 새 없이 깃펜을 움직였다. 근데 이게 어찌 된 일이지?
혼자 일한 지 30분 정도 흘렀을 때, 나는 당장 우편 부쳐야 하는 서류에 사인이 안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얼마 전 했던 실수를 되풀이하는 건가 싶어서 심장이 쿵 떨어졌다. 더군다나 지금 내게는 할리도 없었다. 그러니 뭐 어째?
나는 죽어라 황후 궁으로 달렸다. 13일의 금요일도 아닌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것인지 분통한 마음이 들었다.
황실 일가의 궁은 중앙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오래 뛰지 않아도 됐다.
얇은 원피스 아래로 굵은 땀줄기가 흘렀다. 나는 혹시나 겨드랑이에 땀자국이 생길까 봐 엉거주춤 팔을 부풀리고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날 괴짜 보듯이 바라보았다.
티 파티 장소는 황후 궁 내 응접실이었다. 나는 시종을 재촉해 재게 발을 놀리면서도 황태자 궁과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의 황후 궁을 곁눈질했다.
제이든의 궁은 뭐랄까, 손가락으로 창틀을 쓸어도 먼지 하나 안 묻어날 만큼 지나치게 깔끔해서 사람 냄새가 안 났다. 장식물도 구색만 맞추겠다는 듯 최소한으로만 있어서 화려함보다는 적막감이 먼저 느껴졌고.
하지만 황후의 궁은 화려하게 꾸며놔서 그런지 유명한 미술관에 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 걸음 간격으로 놓인 조각상과 그림들이 그러한 미학적 느낌에 한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