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138)

<45화>

그리고 다시 떴을 땐, 언젠가 애타게 찾아다녔던 남자가 애틋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식으로 소개할게. 내 진짜 이름은 레이야.”

“너…… 너……!”

그것이 내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남자가 황급히 나를 받아 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엿 됐음을 느끼며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

《외전: 프레이야 멜러니의 MELO DRAMA》

JMT공금

사실 처음부터 프레이야가 불행했던 건 아니었다. 적어도 본인은 나름 행복한 삶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척박한 땅과 연중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으로 악명 높은 왕국을 구원할 아이. 프레이야는 화려한 별칭으로 불리며 출생과 동시에 넘치는 기대와 관심을 받았다. 가장 낮은 계승권자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를 지지했다.

얼핏 광기로 느껴지기도 하는 그 관심은 프레이야의 출생 전 발표된 신탁에서 기인했다.

‘달이 둥글게 차오른 날, 하늘로부터 외면받은 땅을 구할 자가 나타나리라. 말라붙은 땅에 강이 흐르고, 오색찬란한 꽃들이 사시사철 만개하며, 먼 길을 떠난 인간의 벗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리라.’

프레이야는 옹알이를 하던 적부터 물의 정령을 불러냈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기가 웬만한 정령술사보다 정령을 잘 다루는 모습은 누가 봐도 신탁의 주인공다웠다.

그는 나름 행복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상냥했고, 신하들은 목숨이라도 대신 내어 줄 것처럼 충직했으며, 아버지 또한 바쁜 와중에도 상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 나라의 왕이자 엄격한 아버지인 카이든 멜러니에게 그런 대우를 받는 건 그 많고 많은 형제 가운데에서 오직 프레이야 한 사람뿐이었다.

그 비틀린 애정이 오롯이 압도적인 재능에서 기인했다는 걸, 프레이야는 아주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또래 아이들이 밖에 나가 뛰어놀 때 프레이야는 궁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교습을 받고 정령술 연습을 했다. 다정한 어머니는 그 평범하지 않음을 우려하며 어린아이에게 지나친 것을 바라는 아버지에게 몇 번이고 항의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말라며 단칼에 축객령을 내릴 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자란 프레이야는 일찍 철이 들었다. 그는 매일 밤 마음을 다잡았다.

‘이 정도면 버틸 수 있어. 내가 열심히 해야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그게 신탁의 주인공인 내가 감내해야 할 책임이야.’

그러나 프레이야가 신경 써야 할 건 책임감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형제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프레이야를 시기했다. 프레이야가 왕의 명을 받고 차근차근 국토를 돌아다니며 비를 내리기 시작했을 때, 질투심은 더욱 깊어졌다.

특히 1왕자 아이작의 질투는 차라리 병에 더 가까웠다.

아버지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도 벅찼던 프레이야는 그 질투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마주칠 때마다 대놓고 못마땅한 눈빛을 하는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굳이 형제들이 아니어도 프레이야를 아껴 주는 사람들은 주변에 널리고 널렸다. 어머니와 신하들과 국민들 모두가 그의 편인데 아쉬울 게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때 프레이야는 세상 물정을 모두 알기엔 너무 어렸던 탓에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했다.

아이작의 병적인 경계, 그리고 왕과 국민들의 노골적인 편애. 그 사실이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 프레이야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꿰뚫기에는 그의 식견이 아직 부족했고, 그가 순수하게 커 가길 바랐던 어른들은 더러운 물밑정치에 대해서 함구했기에.

그래서 프레이야는 그가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일어난 사건을 막지 못했다. 불행은 갑자기 찾아온다고 했던가?

그는 유난히 눈발이 거셌던 겨울 어느 날.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신뢰를 잃고, 보금자리를 잃었다. 그가 ‘신의 아이’가 아닌 ‘악마의 아이’라는 이유로.

프레이야는 그의 호위 기사 브랜던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악감은 그의 가슴을 아프게 짓눌렀다. 그를 돕겠다며 안락함을 포기하고 달려온 수하들이 평소와 달리 부담스럽기도 했다.

프레이야는 고작 하룻밤 만에 격변한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그는 실의에 빠져 이틀간 자지도 먹지도 말하지도 않다가 무심코 넋 나간 채로 중얼거렸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뒤늦게 알게 된 진실의 대가는 잔인했다. 프레이야는 브랜던에게 사건의 전말을 듣는 내내 자신의 해이함을 후회하고, 한편으로는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

모든 게 아이작의 짓이었다.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과 프레이야를 향한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코 일을 벌인 것이다. 프레이야는 예의 그 비열한 낯짝을 떠올리며 주먹을 쥐었다.

그는 애초에 왕위를 이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의 세력이 견고하고 강한 건 사실이지만 충분히 말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단 말이다.

아이작은 왜 그랬을까. 꼭 피를 봐야 했던 걸까? 프레이야는 궁이 불타던 모습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아이작은 치밀하게 음모를 꾸몄다. 그 음모 이면에는 아이작의 충실한 수하이자 타고난 중상모략가인 게일 브라운이 있었고, 그는 프레이야도 익히 잘 아는 사람이었다.

평판이 아주 더러운 사람. 프레이야는 다시금 게일의 얼굴을 머릿속에 박아 넣었다.

그들은 기발한 음모론을 펼쳤다. 프레이야가 그의 죄목을 처음 듣고 너무 어이없어서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을 정도였다.

“신탁의 내용이 모두 허구라 고발했다고…….”

그들은 신탁 해석문을 발표한 대신관과 프레이야의 친모가 사촌지간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며 그 둘 사이에 어떤 은밀하고도 부정한 거래가 있었다고 모함했다.

왕궁 가장 구석에 있는 궁에 거처할 만큼 세력이 약한 사촌 동생을 위해 대신관이 선뜻 신관들을 매수하고 왜곡된 해석문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정말로 매수당한 신관이 다시 쓴 해석문을 왕 앞에 내밀었다. 조작된 해석문은 ‘나라를 구할 자’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망하게 할 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들이 거기서 그쳤으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프레이야의 능력이 마녀의 흑마법에 의해 인위적으로 생겨난 불길한 힘이라고 주장했다.

“헛소리. 내 능력이 어머니의 흑마법에 의해 생겨났다고?”

그들은 생각보다 더욱 악랄했고 부도덕했다. 얼마 전 왕국 곳곳에 뿌려졌다는 전단지를 받아 들며 프레이야는 이를 악물었다. 프레이야의 초상화가 그려진 그곳에는 악의적 모함이 적혀 있었다.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능력이 운명을 거스르고 생겨났다. 순수하다고 여겨졌던 그 능력은 사실 허상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 능력이 닿은 곳에는 신의 벌이 내려질 것이다.”

그들은 이제껏 프레이야가 수많은 마을에 내린 비가 풍요로움이 아니라 더 큰 재앙을 가져다주었다고 선전했다. 프레이야는 ‘재앙’이라는 단어를 읽고 얼굴을 구겼다.

“재앙이라니? 그럴 리가 없는데.”

프레이야의 의구심에 브랜던은 답했다.

“1왕자가 사람을 풀어 프레이야 님이 다녀간 마을에 오염 물질을 투기했습니다. 그리고 기형적인 물고기, 썩은 내 나는 토양, 닿으면 피부를 녹이는 물……. 이런 조작된 증거를 들이밀며 왕에게 처단을 요구했습니다.”

그 뒷내용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보나 마나 아버지는 지난 몇 년간의 편애가 우습게도 오래 고민하지 않고 즉결 처분권을 허락했겠지.

아이작의 말을 부정하기에는 그가 가져온 증거들이 너무나도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고, 아버지의 가장 큰 약점은 분노니까. 아이작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럼에도 말도 안 되는 속임수에 아버지가 속아 넘어간 게 믿기지 않았다. 나름 애정이라 여겼던 감정이 사실은 다 착각이었던 걸까?

“……날 왜 죽이려고 했던 건지는 알겠어. 하지만 어머니는? 어머니가 마녀라는 걸 어떻게 증명했지?”

“미리 시녀를 매수해 에일린 님의 처소에 금지된 흑마법 용품들을 숨겨 놓은 것 같습니다.”

프레이야는 앓는 소리를 내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진작 모략의 징조를 깨닫지 못하고 결국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는 그저 왕자로서의 책임에 다했을 뿐이었다. 그 결과가 추방과 쫓김이었다면 결코 착한 어린이처럼 고분고분하게 명령에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레이 님.”

사색은 누군가의 나직한 부름에 의해 끊겼다. 프레이야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열 쌍의 눈이 희망을 담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오랫동안 슬픔에 잠겨 어머니의 죽음을 추모하고 싶었다. 그러나 고작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그를 위해 목숨을 걸은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자니 차마 멈춰 있을 수 없었다.

프레이야는 의무적으로 슬픔과 자기혐오와 무력함을 천천히 마음속에서 지워 나갔다. 남은 것은 오직 배신감과 강렬한 분노뿐. 그는 어금니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감정을 담아 말했다.

“아이작 형님이 뒤에서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는 거, 알고 있었나?”

“……네.”

“그런데 왜 이제껏 내게 함구했지?”

“1왕자가 왕위 계승을 두고 레이 님을 견제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레이 님이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해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프레이야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걸 언제부터 알았지?”

브랜던이 잠깐 침묵했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프레이야는 한밤중 사이에 참 많은 걸 본다고 생각했다. 그 엄격하고 철저하던 브랜던이 머뭇거리는 광경을 하룻밤 사이에 도대체 몇 번이나 보는 건지.

“몇 년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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