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138)

<47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들으십시오. 지금 레이 님이 저 문밖으로 나가는 게 레이 님이 저희에게 해 주실 수 있는 최선의 신의이자 보상입니다. 그러니…… 살아 주십시오.”

그 말을 들으니 도저히 프레이야는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엄청난 굉음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그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으로 뒤덮인 숲에 들어가기 전, 그는 뒤를 돌아 활활 불타오르는 저택을 바라보았다.

타오르는 화염은 깜깜한 세상 속에서 유독 돋보였다. 바람을 타고 격양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프레이야는 이 분노를 머릿속에 각인시키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프레이야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정신없이 산을 올랐다. 칠흑 같은 어둠은 그의 방패막이자 창이었다. 그는 어둠에 몸을 숨기고 죽음으로부터 도망쳤다.

보이지 않는 가시와 나뭇가지는 인정사정없이 프레이야의 살갗과 옷을 찢었다. 뺨 위로 난 낙서 같은 상처에 핏방울이 맺혔지만, 그는 찍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묵묵히 앞만 바라보았다.

숨 가쁘게 달려 산 중턱까지 올라오고 나서야 프레이야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상황을 살피기 위해 뒤를 돌아보자마자 탄식을 내뱉었다.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횃불이 줄지어 선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프레이야는 5분도 채 못 쉬고 다시 바들바들 떨리는 발을 움직였다. 예민한 신경은 인기척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급한 마음과 다르게 발은 계속 느려졌다. 그는 무아지경으로 고함을 지르며 굳은 허벅지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아주 오래전부터 그는 몇 가지의 당위를 갖고 있었다.

첫 번째는 반란이 성공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이작과 달리 선왕이 되는 것이고, 세 번째는 힘든 시기 속 그를 믿고 따라 준 사람들에게 걸맞은 보상을 내려 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모든 당위가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생긴 당위는…….

“남의 목숨 팔고 생을 부지했으면 적어도 죽을 날이 오늘은 아니어야지…….”

프레이야는 브랜던이 쥐여 준 가방을 끌어안고 숨죽여 울었다. 흔한 귀뚜라미 소리 한 번 울리지 않는 한밤의 숲속, 간헐적으로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그 찰나의 절망조차 프레이야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바스락, 풀을 밟는 소리가 울렸다. 그는 주술에서 깨어나듯 벌떡 몸을 일으키고 필사적으로 달렸다.

무서울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희열에 찬 외침이 들렸다.

“찾았습니다!”

프레이야는 다리에 힘이 풀려 땅에 엎어지면서도 도망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지금 몸 상태로는 절대 군대와 싸울 수 없었고, 살길은 오로지 도망뿐이었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목소리는 발걸음 하나를 내디딜 때마다 다른 음역과 겹쳐졌다. 그는 손톱에서 피가 나는 줄도 모르면서 땅을 기었다. 하지만 결국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별안간 어깻죽지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뜨끈한 무언가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소름 끼치는 이명 사이로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아니야.”

프레이야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긁어모아 몸을 굴렸다.

프레이야는 몸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한 채 비탈진 경사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어깨에 꽂혔던 화살대가 부러짐과 동시에 화살촉이 더욱 깊숙하게 그의 살을 파고들었다.

쿵, 경사 끝자락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프레이야는 단단한 바위에 머리를 부딪치는 것을 마지막으로 혼절해 버렸다.

***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본 광경은 녹슨 철창이었다. 어리둥절해하며 상황 파악을 하는 프레이야에게, 같은 철창에 갇힌 남매가 자초지종을 설명해 줬다. 이 마차의 목적지가 불법 노예 시장이라는 것을 말이다.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제국군에 잡히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프레이야는 절로 이가 악물릴 만큼 강렬한 고통을 느끼는 한편, 빠져나갈 방도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 모습을 보고 여자가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손목에는 마법 억제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이 거지 같은 수갑 때문에 지금 난 아무것도 못 해. 하지만 이 밖으로 나가면 네가 원하는 게 뭐든 간에 다 들어줄 수 있어.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나 꽤 뛰어난 마법사거든. 마법사한테 빚을 달아 둔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는 알지? 그러니까…… 우리 남매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빚 따위 달아 두지 않아도 가능하다면 같이 철창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래도 본인이 먼저 은혜를 갚겠다는데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겠지.

사실 최악의 컨디션으로 정령을 불러낼 수 있을지 자신 없었다. 다만 불법 노예 시장의 무대 위에 올랐을 때의 결말이 뻔하도록 비극적이어서 무조건 해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기운을 그러모으는 것에 집중했다. 형편없는 몸 상태 덕분에 자꾸만 집중력이 깨졌다.

그래도 하늘이 또 한 번의 자선 사업을 하신 모양인지 프레이야는 가까스로 중급 정령을 불러낼 수 있었다. 그는 숨을 색색 몰아쉬며 범고래의 형상을 한 정령에게 명령했다.

“다 부숴 버려. 철창도 저 앞에 있는 놈들도.”

***

여자는 고맙다면서 딱히 정해진 행선지가 없다면 같이 제국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프레이야는 찰나 동안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죽어도 제국 영토를 밟기 싫었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데우스 왕국에서 살아남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심각한 상처를 달고 있는 지금 같은 상황에선 더더욱.

프레이야는 정체를 밝혀야 하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차라리 마법사와 동행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그는 열여섯 살 마법사 안타레스와 평범한 네 살 꼬마를 일행으로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옳았다. 안타레스는 프레이야의 정체를 알고도 그를 내치지 않았다. 대신 가방을 주섬주섬 뒤져 신비한 색의 물약을 건넸다.

“마법 물약?”

“변신 물약이야. 사실 내가 쓰려고 만들어 둔 건데 네 사정 들으니까 너한테 더 필요한 거 같네. 도중에 사람들한테 정체 들키면 너나 나나 곤란해지잖아. 같이 제국까지 가기로 했는데.”

프레이야는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을 괴롭혔던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된 것에 감격했다.

“……고마워.”

“뭘. 아, 근데 너 이건 알아야 해. 장기적으로 복용하면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어. 사람마다 달라서 딱 하나 콕 집어서 얘기해 주진 못하겠네.”

“신분만 속일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어.”

“그럼 다행이고. 어쨌든 이걸로 빚 갚은 거다?”

안타레스가 눈을 뾰족하게 떴다. 그러나 단호했던 말과 달리 그는 틈틈이 재료를 구해다가 갖가지 물약을 만들어 주었다.

변신 물약의 지속 시간은 일주일을 채 지나지 않았다. 프레이야는 해가 뜨는 시간에 맞추어 물약을 마시고 사위가 깜깜해질 때까지 걸었다.

원래의 외모가 조금 남아 있긴 했지만 성별부터 시작해서 머리 색, 체형, 목소리 등 모든 것이 달라진 덕분에 프레이야는 제국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심문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보호자 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다른 의미로 위협적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부지런히 제국을 향해 걸었던 이유다.

전쟁의 살기에 동화되는 것은 전장에 나가는 기사들만이 아니다.

평화로웠던 마을이 마법 공격 한 번에 쑥대밭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전쟁에 끌려가고, 어젯밤까지만 해도 즐겁게 수다를 떨었던 사람이 눈 깜짝하는 사이에 목숨을 잃는다. 그것이 전쟁의 참상이다.

각박한 삶은 인심을 어지럽혔고, 굶주림은 폭력과 범죄를 낳았으며, 상실은 더 많은 상실을 초래했다.

한껏 날카로워진 분위기 속 어린애들은 몇몇 사람들에게 아주 탐스러운 먹잇감이 되었다. 매 순간 폭력의 한복판에 내던져지며 프레이야는 능력을 사용하는 것에 있어 어느 정도 잔인함을 갖게 되었다.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들.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영토. 기세등등하게 남의 나라를 활보하는 제국군.

프레이야는 그의 나라가 순조롭게 망가지는 것을 지켜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얽히고설킨 분노의 실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불행의 주범인 아이작?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무익한 전쟁을 일으킨 제국의 황제?

제국에 가까워질수록 그 의문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 제국의 국경을 넘은 날, 고장 난 나침반은 프레이야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방향을 단호히 가리켰다.

간판조차 없는 작고 볼품없는 식당에서 첫 끼를 먹던 중이었다. 로브를 깊숙이 눌러쓰고 조용히 식기만 움직이던 프레이야는 맞은편에서 들려온 이야기에 우뚝 숟가락질을 멈추었다.

“그 소식 들었나? 데우스 왕국이 드디어 항복을 했다더군.”

그는 더욱 존재감을 죽이며 이야기를 엿듣는 데 집중했다.

“당연히 들었지. 거리가 온통 그 얘기뿐이라네. 허, 참. 어차피 질 싸움을 한 달이나 질질 끌더니만 결국 수도에 불덩이가 떨어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나 봐.”

“그쪽 국민들은 지지리 복도 없지. 하필이면 그런 인간을 왕으로 둬서는.”

“근데 그 왕도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프레이야는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남자 둘이 의아해하며 프레이야를 힐긋거렸다가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왕뿐만이 아닐세. 왕족은 물론이고 공녀를 제외한 모든 귀족이 싹 다 숙청당했다는 것 아닌가.”

“쯧, 진작 항복했으면 목숨 줄이라도 붙어 있었을 것을.”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식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 프레이야는 음식이 다 식어 가는 것도 모르고 충격에 빠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이작만은 살아 있을 줄 알았다. 아이작의 능력을 믿어서가 아니라 남의 인생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사람이 그토록 쉽게 죽을 것 같진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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