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138)

<49화>

프레이야는 틈틈이 에단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거의 반강제적으로 매주 제이든과 다과를 나누었다. 그의 일상에 새롭게 추가된 데네브와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데네브는 정령술 교습을 해 준다는 명목으로 틈날 때마다 프레이야의 방문을 두드렸다.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경지는 이미 한참 전에 뛰어넘었기에 그 호의가 조금 우스웠지만,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그는 언젠가 도움이 될 테니까.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래로 프레이야는 줄곧 그렇게 살아왔다.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관계를 구태여 이어 나가고자 시간을 버리고 감정을 죽이는 삶.

이제는 ‘프레이야 멜러니’보다 ‘신시아’라고 불리는 것이 더 익숙했다.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이 아는 데우스 왕국의 왕자 프레이야는 이미 한참 전에 죽었으니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프레이야 멜러니가 사라진 순간, 프레이야도 자신의 이름을 버렸으니까.

프레이야는 많은 것을 잃고도 또 잃었다. 가진 것도 별로 없는데 어쩜 그리 상실은 끝도 없는지.

그는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해 줄 열쇠를 잃었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단단한 나무의 색은 독한 약을 견디지 못하고 정처 없이 흔들리는 갈대의 색으로 변했다.

유일한 연결 고리가 완전히 끊긴 날, 프레이야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밤새도록 울었다.

그는 올곧았던 자아도 잃었다. 복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그 위로 새로운 인격을 꾸며 냈다.

그를 높은 자리로 데려다줄 사람들에게 더 확실한 호의를 얻겠답시고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촌극이 오히려 그의 목을 졸랐다. 그렇게 프레이야는 그도 모르는 사이 시나브로 병들어 갔다.

차라리 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무기력한 나날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기계적으로 웃었지만 속 빈 강정이나 다름없었다. 에단의 제안에 화려하기로 유명한 축제를 구경해도 우울함은 나아지지 않았다.

반면, 항상 화가 나 있었던 아로네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안색이 좋아졌다.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아로네보다 못한 날을 보내며 프레이야는 그 대조적인 처지에 자조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무엇이 아로네를 웃게 만들었는지 의문했다.

그 답은 기대했던 것보다 늦게,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찾아왔다.

혜라와 처음 눈이 마주친 순간 불현듯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 애가 내 빛이 되리라는 것을.

***

공녀가 뜬금없이 ‘귀인’을 저택에 들였다는 소문은 자자했다. 매일 어울리는 애들도 저택에 초대한 적 없으면서, 도대체 웬 귀인? 프레이야는 꽤 놀라운 소문을 듣고 의문을 가졌지만 호기심은 금방 사라졌다.

어차피 사람은 끼리끼리 놀기 마련이니 공녀의 친구와 얽혀 봤자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데네브의 뒷담화는 미지의 인물을 다시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어느 날, 데네브는 씩씩거리며 프레이야를 찾아왔다. 책을 읽던 중이라 그런 그가 귀찮았지만 그래도 예의상 물어봐 줬다.

“무슨 일 있으세요?”

그 말에 데네브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평했다. 언제나 고아하게 굴던 데네브가 저리 성을 내는 것이 조금 뜻밖이라 프레이야는 책을 내려놓았다.

“아로네 친구라 떠들어 대는 애, 만난 적 있어?”

“아니요.”

“다행이네. 앞으로도 만날 일 없게 조심해. 살면서 그 여자처럼 정신 나간 사람은 처음 봤거든. 손님 자격으로 머무르는 주제에 나한테 바락바락 대들기나 하고. 교양이 없는 것도 정도껏이지, 천박하기는.”

데네브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조금 전 일을 되돌아보는 중인지 미간이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얼마나 별로였길래 저렇게 주의를 주는 걸까? 프레이야는 문득 호기심이 일어 데네브를 조금 더 찔러보았다.

“데네브 님한테 대들었다고요?”

“그래. 자기가 천사라느니 뭐라느니 별 궤변을 늘어놓으며 나를 골리더군. 아로네가 출신도 불분명한 애를 왜 곁에 두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이유가 있겠지. 하여튼, 나한테 약속해 신시아. 그 능구렁이 같은 여자를 만나면 피하겠다고.”

약속을 입에 담는 데네브는 의외로 진지했다. 그 여자가 정말 대단한 또라이인가 보다 하고 프레이야는 생각했다.

“노력해 볼게요.”

프레이야는 새끼손가락을 걸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데네브는 빙그레 웃는 프레이야를 보며 불안한 눈빛을 던졌다.

소문의 주인공은 생각보다 빨리 눈앞에 나타났다. 프레이야는 근래 계속 속이 답답해서 밤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현관 앞에서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3층 창가에서 낯선 얼굴을 보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근처에 있는 나무 뒤에 숨었다. 고요한 어둠을 배경으로 여자는 양초 하나만 켜 놓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불빛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얼굴이 어쩐지 슬퍼 보였다.

데네브의 말을 들었을 때는 저런 우울한 감정이라곤 모를 것 같은 사람처럼 느껴졌기에 조금 의아했다. 한참 동안 허공만 응시하던 여자가 한숨 쉬듯 말했다.

“너무 멀리 와 버려서 내 말이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말할게. ……난 여기서도 잘 살고 있어.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벌써 죽고 못 사는 친구도 생겼어. 나한테 정말 잘해 주는 친구야.

걔 덕분에 정말 적응 빨리했다니까.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내 이름처럼 언제나 강하게 살 테니까.”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몰라도, 여자에게 무척 소중한 사람일 거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엄마 아빠도 거기서 잘 지내야 해. 그럼 안녕.”

작고 가냘픈 불빛이 순식간에 꺼졌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일기장을 훔쳐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프레이야는 묘한 감정을 느끼며 발걸음을 떼었다.

***

기묘했던 그날 밤 이후, 여자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우연히 창밖을 내다보면서였다. 여자는 아로네를 벤치에 앉히고 단독 서커스를 벌이고 있었다. 난해한 춤을 추는 여자를 관람하며 아로네는 답지 않게 박장대소를 했다.

여자가 어찌나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지 프레이야의 방까지 말소리가 들렸다.

“이게 바로 케이 팝이라는 거야! 끝내주지?”

아로네는 너무 웃겨서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프레이야는 처음으로 아로네의 심정에 깊이 공감했다. 얼마 전 보았던 어두운 모습은 꿈이었던 걸까?

처음 들어 보는 노래여도 여자의 음정이 모조리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춤은 볼만했냐고 묻는다면 그건 더욱 상황이 나빴다.

오랫동안 방치된 바퀴를 굴리듯 여자의 몸은 뻣뻣했다.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는 소리다.

여자는 아로네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얼씨구, 이젠 눈물까지 흘리네? 내 노래가 그렇게 감동적이었어? 좋아, 서비스다. 한 곡 더 춰 줄게.”

아로네는 손을 내저었지만 여자는 모른 체하며 무아지경에 빠졌다. 여자는 흥에 취해 풍차 돌리기를 시도하다가 장렬하게 실패하고 우스꽝스럽게 바닥에 엎어졌다.

그는 기죽지도 않고 이번에는 공중제비를 시도했다. 한편의 희극을 보는 것만 같아서 프레이야는 숨죽여 웃었다. 아로네는 거의 죽으려고 했다.

이제야 프레이야는 왜 여자가 아로네의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공녀를 저렇게나 편안하게 만든 여자가 경이로웠다. 그래서 그 여자가 조금 궁금해졌다. ……행복하게 웃는 아로네가 부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다.

그의 바람은 빨리 이루어졌다. 고민이 많아서 한밤의 정원을 거닐던 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밤하늘을 올려다봐도 소란한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얼마나 벤치에 앉아 있었을까. 프레이야는 물약 지속 시간이 얼추 다 된 것을 깨달았다. 그는 급하게 정원을 빠져나가고자 했지만 뜻밖의 인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혜라’라는 이름의 여자였다. 속을 읽을 수 없는 심연의 눈동자가 놀랍게도 순수해서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로네의 친구라 신시아에게 적대적일 줄 알았다. 하지만 천연하게 말을 붙이는 혜라는 프레이야를 둘러싼 복잡한 관계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워 보였다.

어떻게? 프레이야는 의문스러웠다. 그리고 그 순간 언젠가의 경고가 떠올랐다.

‘살면서 그 여자처럼 정신 나간 사람은 처음 봤거든.’

확실히 혜라는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추궁에 못 이겨 데네브의 말을 그대로 전해 주자 혜라는 분개하기는커녕 무척 재미있어했다. 저게 일반적인 반응인 건지 헷갈릴 정도로 혜라는 소공작의 적대를 희화화했다.

아무리 봐도 평민이 분명한데, 소공작의 적의를 사고도 깔깔 웃을 수 있는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권력자들의 호의를 사기 위해 오랫동안 인내했던 프레이야로서는 혜라의 태도가 인상적이면서도 부러웠다.

게다가 혜라는 프레이야를 프레이야 그 자체로 대했다. 그의 사람을 모두 잃고 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 많은 후원금을 위해 존재하는 인형, 괴롭힘에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는 독한 애, 친하게 지내면 안 되는 애, 신분 봐 가면서 꼬리치고 다니는 여우, 사랑 따위 감정놀음의 여자 주인공…….

모든 사람들이 프레이야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았다. 난잡한 색은 엉망진창 섞여 결국 어둠의 색을 띠었다. 그 지옥의 한가운데에서 프레이야는 절대 행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혜라, 그 애는 달랐다. 그 다름이 소중하고 낯설어서일까? 프레이야는 곧 변신이 풀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 선뜻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끌면 몇 년간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터였다. 그는 이미 혜라 앞에서 지나치게 허점을 보였다.

필요 이상으로 허둥거린 자신이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프레이야는 합리화했다. 그래도 만약 혜라가 정말로 내 이상(異常)을 함구한다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실 된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