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
불행인지 다행인지 혜라는 약속을 지켰다. 프레이야는 사이좋게 떠드는 혜라와 아로네를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불쾌하게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프레이야는 그 생소한 감정을 정의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대로 놔두면 언젠가 그의 발목을 잡을 거라는 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크리마 호수에서 혜라를 발견한 순간, 그도 모르게 말하고 말았다.
“어…… 같이 노는 건 어떠세요?”
혜라는 곤란해하며 후일을 기약했다. 그게 형식적인 말이라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아로네가 언제나 그 옆을 지키고 있는 한 절대로 혜라와 친해지지 못하리라는 것 또한 알았다.
그래서 프레이야는 예의 그 순진한 낯을 꾸며 냈다. 그때 처음으로 신시아라는 가면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떻게 하면 그 허망한 말을 구실로 혜라의 시간을 살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와중에 혜라가 연한 금발의 남자를 찾아다니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완벽한 이상형을 찾는다면서.
변신 지속 시간을 잘못 계산한 것도 모르고 바보 같이 싸돌아다닌 자신에게 혐오감이 들었었다. 하지만 그 소문을 듣자 본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혜라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다행을 넘어 꽤 기뻤다.
“……드디어 미친 건가?”
두 번 다신 프레이야의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꾸만 마음이 들떴다. 도래할 봄을 기대하듯 설레하는 감정이 겁났다.
프레이야는 혜라와 거리를 둬야 하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런데 왜 혜라와 눈이 마주치기만 하면 말이 멋대로 튀어 나가는 건지.
“나랑 차 한잔할래요?”
의외로 혜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근히 긴장했던 몸이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프레이야는 정말로 미친 게 분명하다고 자조했다.
그럼에도 프레이야는 혜라를 찾아가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도대체 왜? 혜라가 떠나고 소름 끼치도록 고요해진 방 안에서 프레이야는 생각했다.
취향도 아닌 제과점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놓아 버리면 끊어질 관계라는 게 허탈했다.
영양가 없는 이야기는 잘만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는 혜라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하지만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조금 행복해지는 것도 같았다. 저와 달리 무엇에게도 구속되지 않은 그 자유로움을 동경했다.
호의와 악의. 그 어느 쪽에도 서 있지 않은 사람이 귀해서 그 티 없음을 놓을 수 없었다. 프레이야는 혜라와 시간을 보내며 잃어버린 줄 알았던 활력을 아주 천천히 되찾았다.
프레이야는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그는 혜라와 더욱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용기를 내기로 결심했다. 진실해지기로.
평생 가슴에 묻었을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물론 핵심이 빠져 있는 이야기였지만 프레이야 딴에는 감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혜라의 반응은 언제나 그랬듯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래…… 걔네 낯짝이 황홀할 정도로 반반하긴 하더라.”
기발한 결론에 감탄을 해야 할지 탄식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프레이야는 제대로 된 변명도 못 하고 혜라를 떠나보내야 했다.
도대체 어떻게 했어야 했던 걸까? 프레이야는 오후 내내 자책했다. 황혼의 막이 내렸을 무렵, 노크 소리가 울렸다. 내심 혜라이길 바랐다. 그런데 정말로 문밖에 혜라가 서 있을 줄은 몰랐다.
혜라는 답지 않게 어물쩍거렸다. 인내심 있게 기다리자 그가 결심한 듯 눈을 마주하고 말했다.
“아까 그렇게 가서 미안. 늦게나마 위로해 주고 싶어서 왔어.”
“……나한테 위로가 필요해 보였어?”
“눈동자가 울고 있던데?”
그럴 리가. 감정 조절을 하지 못하고 언뜻 분노를 내비치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눈물은 이미 오래전 말라 버리고 이젠 복수심만 남았는데. 설마 그런 나약한 모습을 보여 줬을 리가.
“하여튼 하고 싶은 말은…… 네가 정확히 어떤 이유로 제이든이랑 친하게 지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동기가 순수한 게 아니라면 난 말리고 싶다. 무언가에 얽매어 맺어진 관계는 결코 건강할 수 없거든. 그런 관계는 오히려 너를 갉아먹을 거야.”
제이든의 외모에 홀렸다고 생각한 사람치고는 놀라울 만큼 정확한 조언이었다. 프레이야는 올곧은 갈색 눈동자를 멍하니 응시했다.
……왜 눈물이 나올 것 같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 그만둬도 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일련의 사건을 겪고도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건 네 강인함과 현명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그러니 지금의 문제도 잘 해결하리라 믿어. 아, 그렇다고 무조건 적대하라는 말은 아닌 거 알지? 어느 쪽이든 네가 행복해질 수 있는 걸 선택해. 그게 정답일 거야. 음…… 그럼 잘 자!”
혜라는 할 말을 마치자마자 냅다 줄행랑쳤다. 그렇게 사람 마음 흔들어 놓고 자기는 도망가 버리다니. 프레이야는 텅 빈 복도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혜라가 스치듯 지었던 미소가 잔향처럼 남아 아른거렸다.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게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이쯤 되니 프레이야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프레이야 멜라니가 결국, 혜라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처음 그 애를 마주친 순간부터 매료되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
혜라는 생각보다 곁을 내주는 데 까다로웠다. 마음 같아서는 정공법으로 다가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도망가 버릴 것이 분명했다.
프레이야는 혜라가 완전히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리고자 했다. 그러나 차근차근 다가가도 모자를 판에 장애물이 끼어들었다. 놀랍게도 그 장애물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제이든과 아로네,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신시아. 참으로 완벽한 치정극이 따로 없었다. 극이 절정으로 치닫던 순간 혜라는 말했다.
“그 감정이 남들 눈, 특히 아로네와 그 친구인 내 눈에 어떻게 비칠지 정말 몰라서 그래?”
머리로는 혜라가 이해되었지만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혜라가 그를 피할수록 짝사랑의 열병은 더욱 깊어졌다.
오해가 풀린 후, 혜라는 시간을 달라고 말했지만 사실 프레이야는 알고 있었다. 어차피 결말은 정해져 있다는 것을.
그러던 중 데네브가 파트너 신청을 했다. 프레이야는 고민했다. 데네브와 연회장에 입장했을 때 제이든이 어떻게 나올지 뻔해서. 그러나 오랫동안 못 봤던 혜라를 그곳에서 만날 수 있어서.
……그거면 충분하다 싶었다. 이제 제이든이든 뭐든 다 상관없어졌다.
“좋아요.”
필연적으로 제이든은 멍청하게 굴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혜라는 어쩔 수 없다며 영원한 작별을 고하겠지.
비극은 이미 질리도록 겪었다. 혜라와의 이야기만큼은 결코 불행으로 끝내지 않겠다고 프레이야는 다짐했다. 빛의 달콤함을 안 그는 더 이상 어둠을 쫓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그는 ‘신시아’를 버렸다.
따지고 보면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다. 어차피 사람들은 ‘프레이야 멜러니’가 전쟁 중에 죽었다고 알고 있다. 그의 정확한 얼굴을 아는 사람들도 다 죽었고, 그마저도 여덟 살 꼬마의 얼굴이다.
지금 그의 얼굴을 보고 죽었다 알려져 있는 여덟 살 왕자의 얼굴을 떠올리는 사람은 전무하리라고 프레이야는 확신했다. 그리고 혜라와의 완벽한 첫 만남을 위해 안타레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역시나 연회의 전개는 프레이야가 예상했던 대로 흘러갔다. 괴로워하는 혜라를 보자니 속상했지만 지금이 적기라는 건 확실했다.
그래서 프레이야는 날카로운 감정을 정면으로 맞으면서도 꿋꿋이 혜라를 붙잡았다. 그리고 계산했던 타이밍에 종소리가 울리던 순간.
“정식으로 소개할게. 내 진짜 이름은 레이야.”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날 집어삼킬 줄이야.
혜라, 현재를 살고 있는 널 쫓다 보면 언젠가 나도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네 미래에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
《제6장: 호우경보! 휩쓸려 내려가지 않도록 주의!》
JMT공금
나는 익숙한 천장을 바라보며 깨어났다. 발가락을 꿈틀거리자 찌르르 전율이 일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자세히 상처를 살피자 누가 했는지는 몰라도 야무지게 붕대가 감겨 있었다. 희미한 약초 냄새가 코끝에 감돌았다. 나는 물을 마시려다가, 침대 옆 탁자 위에 쪽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혜라는 보시오.
무슨 일 있었어? 너 안 보여서 다리가 부러져라 찾으러 다녔는데 숙소 가는 길에 쓰러져 있더라. 황태자님 뺨치게 겁나 잘생긴 남자가 너 부축하고 있던데 그 남자 누구야? 나 그 사람 뒤에서 후광 봤잖아.
내가 살다 살다 남자한테 설레 보는 일도 있네. 원래 알던 사람이야? 만약 그렇다면 당장 붙잡아라. 네 인생에 다신 없을 기회니까.
하여튼 그 사람한테 너 건네받고 치료해 줬어. 완전 고맙지? 쪽지 보면 찾아와. 무슨 일 있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털어놔야 할 테니까 준비 단단히 하고 와라? 그렇다고 내빼면 죽어!
추신: 근데 그 남자, 널 바라보는 눈빛이 참…… 애절하기 짝이 없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둘이 아는 사이 같은데 도대체 어디서 그런 사람을 만난 거야?
-할리가.」
나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세상에.
어젯밤의 일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질투에 눈이 멀어 경솔한 짓을 저지른 제이든, 상처받고 도망치듯 떠난 아로네, 우연히 마주친 제이든과 신시아,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내뱉은 독설, 그리고 상상도 못 했던 신시아의 정체…….
“와 망했다. 진짜 어마어마하게 망했다.”
오늘이 주말이라서 천만다행이었다. 어제 그 짓을 하고 사무실에 출근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다. 어쩌면 앞으로 아예 제이든 얼굴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