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조금 다행이네요.”
“그래도 앞으론 언행 조심하는 게 좋겠지?”
“그럼요. 지금은 진심으로 아로네 님을 모시고 있는걸요.”
살짝 미소 지은 루나는 내가 처음 저택에 발을 들였을 때와 현저하게 다른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는 기분 좋은 한숨을 쉬었다.
“그것 참 듣기 좋은 소리네.”
루나가 빙그레 웃으며 아로네 방문을 열었다. 나는 그를 보내고 조금 긴장하며 문틀을 넘었다.
“어…….”
불과 며칠 전에도 온 곳이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었던 방은 수많은 캔버스와 스케치북으로 빼곡히 차 있었다.
새하얀 도화지 위 내가 가장 증오하는 남자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껄끄러운 얼굴과 눈을 마주칠까 싶어 눈알을 데구루루 굴렸지만 그런 노력이 소용없게도 어차피 그의 시선은 나를 빗겨 갔다.
지중해 바다 같은 색으로 정성 들여 칠한 눈동자가 사방으로 직선을 그리며 어지러이 교차했다. 그 한가운데에 아로네가 앉아 있었다.
“아로네.”
활짝 열어 놓은 창문으로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로네가 천천히 몸을 틀었다.
무릎 위로 곱게 포개진 손에서 눈물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뺨으로 시선을 옮겼다. 체념이 짙게 드리운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아로네를 꽉 끌어안았다.
허리를 강하게 휘감은 손길에 몸이 부서질 것 같았지만 나는 도리어 더욱 힘을 줬다. 아로네가 한참 동안 침묵했다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나 네 말이 맞다는 걸 알면서도 왜 제이든을 놓지 못할까? 사실은 나도 우리의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사람 감정이 다 그렇지. 어떻게 바로 끊어 내냐? 더군다나 사랑하는 사람인데. 난 제이든을 인간으로서 좋아하지도 않고 일말의 정마저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얼마나 불가항력적인 일인지는 알아.”
나는 아로네의 결 좋은 머리칼을 소중한 보물 다루듯이 쓰다듬었다. 아로네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내 인생 대부분을 그 애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데 보냈어. 그런데 번번이 실패하다 못해 미움을 샀지.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이젠 그 애와 결혼하는 것도 다 상관없어. ……아니, 하고 싶지 않아.”
“어휴 이 바보야. 내가 옆에 있는데 서운하게 그런 소리 할래? 내가 보기엔 마음 접은 건 네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두 번째야. 첫 번째는 당연히 날 만난 거고. 그러니까 그 개똥 같은 새끼는 잊어버리고 새 출발 하자. 넌 아직 열아홉 살밖에 안 됐고, 무슨 일을 해도 어린 나이야.”
“열아홉 살이면 결혼 적정기인데?”
나는 실소했다. 진짜 웃기지도 않다. 여기나 저기나 시한부처럼 무슨 일에든 나이를 들먹이며 데드라인을 운운했다.
10대에는 대입을, 20대에는 취업을, 30대에는 결혼을, 40대에는 안정된 가정을, 50대에는 노후를…….
“결혼 적정기이니 뭐니 하는 건 때려치워. 적정기 이딴 건 네가 정하는 거지 사회가 정하는 게 아니야. 그냥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 아로네. 그래도 돼.”
아로네가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다시금 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한숨을 작게 조각내 삼키며 그의 등을 천천히 두드렸다. 미지근한 물기가 수묵화처럼 천천히 옷을 적셨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아로네를 올려다보았다. 아로네가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절망, 그리고 끝내 다른 여자의 손을 잡고 만 제이든에 대한 분노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신의 삶이 끝나지 않았다는 희망과 안도가 그 속에서 분명 불타오르고 있었다.
눈물을 살살 닦아 주자 아로네가 내 손 위로 그의 손을 포개었다. 열띤 온도가 느껴졌다.
“정말로?”
아로네가 불확실해하며 물었다. 나는 자신 있게 웃었다.
“정말로.”
“계속 옆에 있을 거지?”
“당연하지.”
“……그럼 됐어. 충분해.”
그제야 아로네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다소 밝아진 낯빛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싸늘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는 제이든의 초상화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근데 저 인간 그림은 왜 다 꺼내 놓은 거야?”
“아 저거…….”
아로네가 널찍한 방을 빈틈없이 채운 캔버스를 둘러보았다. 그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한숨 쉬듯 말했다.
“불태우려고.”
“뭐?”
그거 진짜 기막힌 아이디어다. 나는 기발한 아로네의 생각에 아낌없이 감탄을 보냈다. 마음 같아서는 뽀뽀라도 퍼부어 주고 싶었다. 벌떡 일어나 기립 박수를 치는 나를 아로네가 입술을 꾹 깨물고 바라보았다.
웃고 싶긴 한데 아직 실연의 슬픔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 갈등하는 게 분명했다.
“마지막 미련을 잘라 내야지.”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아는 아로네지. 그럼 지금 당장 화형식을 하자. 나 기대돼서 미칠 것 같아.”
나는 아로네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잽싸게 움직여 캔버스를 차곡차곡 쌓았다.
그리고 베키를 시켜 마른 장작을 한 무더기로 가져오라고 한 다음, 아직 계절이 안 되어 휑한 벽난로에 성냥 네 개를 집어 던졌다. 아로네는 턱을 괴고 잔뜩 신난 나를 지켜보았다.
그림을 모두 쌓으니 높이가 거의 내 키만 했다. 이렇게나 많은 그림을 그리면서 아로네는 얼마나 제이든의 얼굴을 되새김질했을까? 그 시선이 언제나 자신을 향해 있지 않다는 것을 거듭 깨달으면서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을까?
“에휴.”
그래도 다행인 점이 있다면, 오늘로써 그 가슴앓이도 끝이라는 거다. 나는 싱긋 웃으며 아로네를 독촉했다.
아로네가 산더미처럼 쌓인 그림을 삭막한 낯으로 응시했다. 천천히 캔버스의 옆태를 쓸어 올리는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서 비 냄새가 났다.
나는 숨을 죽이고 아로네가 커다란 초상화를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안에 넣는 것을 지켜봤다.
탐스러운 금빛 머리칼에 불씨가 옮겨붙더니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매캐한 향이 코끝에 아른거렸다. 그제야 나는 숨을 내쉬었다.
“다음 그림부터는 한마디씩 하면서 불태우는 거 어때? 차마 제이든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하는 거야.”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라…….”
아로네가 정복을 입은 제이든의 뺨을 무감정하게 만졌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도 제이든은 여전히 딱딱한 표정을 했다. 가만히 관찰하니 그림 속 제이든은 아로네의 성인식 때 입었던 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로네는 과거를 반추하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져서 아로네를 유심히 관찰했지만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때, 아로네가 별안간 감정을 담아 그림을 집어 던졌다. 나는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점점 상황이 즐거워진다고 생각했다. 그래. 우울에 잠식되는 것보다 차라리 분노하는 편이 훨씬 낫다.
“……황태자라는 애가 그러면 안 되지.”
읊조리는 어조가 유난히 사나웠다. 나는 계속하라는 의미로 다음 그림을 건네주었다. 아로네가 캔버스를 있는 힘껏 바닥에 내려쳐 부숴 버렸다.
“상도덕도 없는 것.”
“싸가지도 같이 없는 놈!”
그 뒤로 아로네는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그동안 마음 깊숙이 쌓아 두었던 썩은 내 나는 감정을 폭발시켰다. 아로네가 격렬하게 캔버스를 던졌다. 그 박력에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기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감히 나를! 무시해?”
급기야 아로네는 페이퍼 나이프를 가져와 인정사정없이 그림을 난도질했다. 잘게 조각난 제이든의 얼굴이 무력하게 흩날렸다.
찬란한 애정에서 탄생한 피조물이 쓰레기보다 못한 존재가 된 광경은 신기했고, 동시에 아름다웠다. 나는 일렁이는 불꽃에 매료되어 속삭였다.
“멍청한 새끼라고 말해, 아로네. 결국 후회하는 건 너일 거라고 말해.”
“……결국 후회하는 건 너야. 이…… 멍청한 새끼야.”
마지막 그림이 전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로네가 숨을 몰아쉬었다. 동태 눈깔처럼 죽어 있었던 눈이 비로소 익숙한 총기를 띠었다. 나는 손수건을 건네주며 물었다.
“어때, 이제 후련해?”
“더할 나위 없이.”
아로네가 시원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환희를 감추지 않았다.
“야호! 함께 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 제이든!”
방방 뛰어다니는 나를 보며 아로네가 하하 웃었다. 나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물병을 벽난로로 기울이자 조르르 떨어진 물줄기가 사납게 일렁이던 불길을 허무하게 꺼뜨렸다. 아로네가 술을 마시겠냐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잽싸게 문밖으로 튀어 나갔다.
누가 봐도 행복해 보이는 날 보고 베키와 루나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굽 낮은 단화가 대리석에 부딪치며 듣기 좋은 소음을 냈고, 따뜻한 바람이 살결을 스쳤다.
아로네는 알까? 사랑이라 쓰고 집착이라 부르던 그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이 그 애의 인생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앞으로 아로네가 걸어갈 길이 궁금해졌다. 부디 그 길의 끝에 함께 서 있길 바랄 뿐이었다.
***
다음 날, 나는 점심을 먹자마자 떠날 채비를 했다. 오후에 잡아 놓은 레이와의 약속 때문이다. 뭐, 약속이라고 하기엔 내가 일방적으로 장소와 시간을 통보한 것에 가깝지만.
그래도 나는 레이가 시간에 맞춰 올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어마어마한 폭탄을 던지고 떠난 애인데 내가 바로 약속을 잡을 거라는 것 정도는 이미 예상했겠지.
약속 장소는 시내에서 가장 잘나가는 카페 ‘오브리테’이다. 오브리테는 디저트가 맛있기로 아주 유명해서 사시사철 사람들로 붐빈다.
이 점만 봤을 때 오브리테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곳으로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내가 굳이 오브리테에서 만나자 한 이유는 따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