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38)

<53화>

바로 시내에 있는 카페 중 오직 오브리테만 방음 마법이 걸린 프라이빗 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프라이빗 룸엔 별도의 추가금이 붙지만 그렇다고 마땅한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옛날처럼 내가 ‘신시아’ 방에 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오후 1시. 나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최상층 가장 안쪽에 있는 방 앞에 섰다. 이 문을 열면 그 남자가 있겠지? 호기롭게 편지를 보내긴 했지만 막상 정말로 레이를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조금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아무 수확 없이 떠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나는 납득할 때까지 레이를 탈탈 털겠다고 결심하며 문손잡이를 강하게 틀어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손잡이를 돌리려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저절로 문이 열렸다.

“……어?”

훤칠한 인영이 입가에 다정한 미소를 걸치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눈빛이라는 무형의 것에서 달달한 향이 났다. 온갖 벌레가 달콤함에 홀려 달려드는 환각이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시선을 올려 익숙한 듯 낯선 얼굴과 눈을 마주쳤다. 지금 내 꼴이 멍청해 보일 거라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무어라 입을 뗄 수 없었다.

“고민하는 거 같아서.”

“……레이?”

내가 뭘 잘못 보고 있나 싶었다. 엄청난 사정이 있어서 여장했던 거 아니었나? 근데 진짜 모습으로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시내를 왔다고?

“벌써 날 잊은 건 아니지? 그럼 좀 서운할 거 같은데.”

남의 속도 모르고 레이는 싱글싱글 웃었다.

“미친……. 아주 네가 남자라고 광고하고 다니지 그러냐?”

나는 레이의 등짝을 찰싹 때리며 그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얇은 셔츠 아래로 균형 잡힌 잔근육이 느껴졌다.

나는 괜히 민망해져서 금방 우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마셨다.

탁, 찻잔이 테이블과 부딪히며 소음을 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물꼬를 틀지 고민하다가 그냥 잘하는 짓을 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너 진짜로 남자인 거지?”

“보다시피.”

“환장하겠네 정말…….”

펴 본 적도 없는 담배가 그리웠다.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찬찬히 레이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내 노골적인 시선에도 레이는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잘 보라는 듯이 곧은 자세로 고쳐 앉고 말갛게 웃어 보였다.

자기 잘난 것을 아주 잘 아는 태도였다. 성격만 봤을 땐 완전 딴 사람 같은데 해맑은 미소는 신시아의 얼굴과 겹쳐 보여서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레이의 얼굴은 할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이든 뺨치게 겁나 잘생겼다. 언젠가 그 옆태를 우연히 목격했을 때부터 알아봤다. 밝은 조명 아래에서 보니까 정말…….

나는 홀린 듯이 그 이목구비를 샅샅이 훑었다. 윤기가 흐르는 머리칼은 가을과 겨울의 경계를 지나는 들판의 색을 띠고 있었다. 연미색 눈썹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무해함을 한껏 어필했다. 그러나 미묘하게 짝짝이인 눈매에는 선과 악의 분위기가 공존했다.

숲의 정취를 담은 눈을 들여다보자 녹음 한가운데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내 얼굴이 보였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강렬한 시선과 마주하다가 이윽고 도망치듯 시선을 내렸다.

정성스레 빚어진 콧대는 툭 콧방울을 건드리고 싶을 만큼 탐스러웠다. 도자기처럼 깨끗한 피부는 자연광을 받고 더욱 빛났다.

이건 사람이 아니라 예술 작품이다. 감상을 마치자마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와. 너 진짜 잘생겼다. 아니, 이게 아니고.”

나는 테이블 아래로 허벅지를 있는 힘껏 꼬집었다. 내가 꼬집었지만 정말 눈물 나올 만큼 아팠다. 정신 차려, 강혜라. 고작 외모 감상이나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잖아.

나는 웃음기를 싹 거두고 진지하게 말했다.

“우선 미안하다는 말 먼저 할게. 그날, 내가 너무 지나쳤어. ……손수건도 고마웠고.”

나는 세탁한 손수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울화의 증표였던 선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였다. 레이가 가지런히 접힌 손수건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가 의뭉스럽게 말했다.

“정말 미안해?”

건수를 잡았다는 듯 이채를 띤 눈동자를 보자 조금 불안해졌다.

“……그래.”

레이는 씩 웃으며 내 손에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손등 위로 느껴지는 무게가 낯설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항상 내 손수건 들고 다니다가 언젠가 내가 울고 있으면 그때 나한테 똑같이 해 줘.”

나는 곧게 뻗은 새하얀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이 수수께끼를 풀 최적의 타이밍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날, 왜 그랬어?”

레이는 그 말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기라도 한 양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가 다분히 도발적인 어투로 반문했다.

“말해 주면, 감당할 자신 있어?

보면 볼수록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쟤가 저런 말투, 저런 표정을 할 수도 있었어? 알맹이는 언제나 똑같았을 텐데도 이상하리만치 ‘신시아’와 ‘레이’가 별개의 인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 이중적인 삶을 끝낸 이유를 더욱더 알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기울이고 기꺼이 그의 도발을 받았다.

“못 할 건 또 없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오후의 햇살이 레이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한 줄기 빛의 경계에 걸쳐 있는 녹안이 순간 번득였다. 맹목적 애정으로 점철되었던 그 찰나가 정말 현실이었는지 나는 확신하지 못했다. ……내가 잘못 봤던 걸까?

레이가 테이블을 짚고 내 쪽으로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귓가 바로 옆에서 레이가 속삭였다. 조금만 더 고개를 틀면 입술이 스쳤을지도 모를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왜냐면…….”

절로 몸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그 와중에도 희미한 비누 냄새가 났다. 그 옅은 향에 홀릴 것 같아서 나는 숨을 참았다.

“널 잃고 싶지 않았거든.”

“……뭐?”

레이의 말을 해석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레이가 다시 자리에 앉고 여유롭게 웃었다. 하지만 테이블 위로 까닥이는 손가락은 조급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떤 대답이 나와도 놀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갑자기 고백을 들을 줄은 몰랐다.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며 말했다.

“날 정말 좋아해?”

사실 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흘러넘칠 듯 다정한 눈빛과 발갛게 달아오른 귓가는 인위적으로 꾸며 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니. 내가 얼뜨기처럼 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레이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푸스스 웃었다.

시원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보자니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레이가 내 손을 그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맥박이 빨랐다. 그것도 매우.

“이거면 답이 됐을까?”

나는 왠지 모를 허탈함이 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친한 척했던 게 다 날 좋아해서 그런 거였어?

편견에 사로잡혀 깨닫지 못한 내가 바보지. 나는 혼란한 머리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그 감정이 네 진짜 이름을 밝히는 거랑 무슨 관련이야? 오랫동안 숨겨 왔던 비밀이잖아.”

그 말에 레이는 청량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턱을 괴고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당연히 관련 있지. 넌 신시아를 다신 보지 않을 거였잖아.”

조금 죄책감이 들어서 눈을 피했다. 레이가 괜찮다면서 다정히 시선을 맞춰 왔다.

“하지만 레이라면 상황이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

“그럼 신시아는?”

“사람들은 신시아가 먼 길을 떠났다고 알 거야. 후원도 제이든도 걷어차고.”

레이가 정확히 언제부터 신시아의 얼굴로 살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시기가 적어도 보육원에 들어가기 전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족히 8년 동안 감춰야 했던 비밀을 이렇게나 쉽게 포기한다고? 나는 회의적으로 물었다.

“고작 날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신시아를 버린다고?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

“혜라 넌 네가 얼마나 굉장한 사람인지 모르는구나.”

엄밀히 말하자면 나도 내가 잘난 거 안다. 세상에 나만큼 자존감 높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난 나를 사랑한다. 하지만 레이가 8년의 비밀을 포기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다.

너 때문에 포기했으니까 다 책임지라고 하면 어떡하지? 레이가 그럴 것 같진 않았지만 난 궁지에 몰린 사람이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 아주 잘 안다.

내 생각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레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네가 걱정해야 하는 일은 없을 거야, 혜라. 어차피 내가 신시아로 살아가야 했던 이유도 이제 사라졌거든.”

나는 언젠가 ‘신시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누명 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뒤로 산 구석에서 숨어 살아야 했다는 이야기. 그 누명이 오랜 은둔과 신시아라는 가면의 근본적 원인일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했지만, 가족의 죽음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건 소시오패스나 할 짓이라 의문은 가슴 속에만 담아 두기로 했다.

나는 신입생 때 참석한 개강 파티에서 내게 무례한 질문을 늘어놓던 사람들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인간들, 내가 대학에 붙자마자 부모님을 잃은 것을 알고 그 전후 과정을 꼬치꼬치 캐물었었지.

주먹에 힘이 실렸다. 나는 레이의 말에 집중하고자 노력했다.

“다만 신시아로 사는 게 너무나도 익숙해진 나머지 결국 그 이름에 구속되어 버렸던 거야. ……근데 널 보니까 왠지 용기가 생기더라.”

아련히 과거를 그리던 눈동자가 현실로 돌아오면서 생기를 띠었다.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레이의 감정이 훨씬 깊고 진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보답할 수 없는 감정이 문득 불편해져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레이가 조심스럽게 내 양손을 감쌌다.

“너한테 내 감정 강요할 생각 없어. 내가 감히 그럴 순 없지.”

“…….”

“하지만 한 번만 나한테 기회를 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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