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나는 검집에 들어갔다가 다시 세상 구경 나온 칼을 애써 모른 척했다. 남자가 이게 불리한 조건인지 열나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 나는 차게 식은 손을 맞잡았다.
신을 찾은 보람이 있는지 이윽고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하나만 생각할 줄 알고 둘은 모르는 멍청이라서 천만다행이었다.
“좋아. 하지만 네가 말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면 고통스럽게 죽어야 할 것이야.”
“걱정 말아요. 그럴 일 없을 거니까.”
나는 마지막까지 여유작작한 태도를 유지했다. 남자가 퍽도 그러겠다는 듯 비웃고선 말 한 마리를 훔쳐 달아났다.
그의 뒷모습이 점이 되고 시야에서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는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며 꾹 참았던 눈물이 새어 나왔다.
“……저 망할 새끼. 넌 뒤졌다 이제.”
나는 남은 말 한 마리를 타고 뒤를 돌아보았다. 마부의 시체가 부패하며 만든 온갖 분비물로 도로는 지저분했다. 불쾌한 냄새가 풍겼고, 썩은 내를 맡고 몰려온 파리 떼가 윙윙 날아다녔다.
경비대에 신고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랬다간 상황 설명을 해야 할 테고, 그건 남자가 원하는 전개가 아닐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진심을 담아 묵념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랴!”
싸늘하게 식은 마부의 형체가 끊임없이 떠올라 머리를 어지럽혔다. 나는 연신 말을 보채며 더욱 빨리 달릴 것을 종용했다. 바람이 거칠게 스쳐 지나가며 강렬한 파공음을 내었다.
나는 수중에 들어올 목돈을 상상하며 야비한 표정을 짓던 얼굴을 각막에 새겼다. 출세만을 목적으로 생각 없이 제출한 보고서가 이런 파장을 몰고 올지 몰랐다.
그래, 여긴 이런 세상이었지. 나는 울면서 자조했다. 두 번 다신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
나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아로네에게 급보를 부쳤다. 우편 배달원에게 팁을 두둑하게 쥐여 주자 그가 맡겨만 달라며 큰소리를 떵떵 쳤다.
「아로네에게
급하니까 본론부터 말할게. 숙소로 가던 중 암살자의 습격을 받았어. 내 놀라운 기지를 발휘해서 일단 목숨은 건졌지만, 어쩌다 보니 너네 아빠 이름을 팔아 버렸어. 날 살려 주면 의뢰비의 세 배를 주겠다는 협상을 했거든.
곧 공작 이름 앞으로 급보가 갈 거야. 다짜고짜 너희 가문을 내 개인적 일에 끌어들여서 정말 미안해.
그래도 너라면 그 편지를 가로채 날 죽이려 한 망할 것들을 감옥에 처넣을 수 있겠지? 시작만 네가 해 주면 마무리는 내가 지을게. 미리 감사의 인사를 전해.
추신: 나 다친 곳 하나 없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혜라가.」
몇 시간 동안 승마한 탓에 엉덩이가 배기고 한숨도 못 잔 머리가 띵하게 울렸지만 마음 편히 쉴 수 없었다.
나는 제2의 암살자가 숙소까지 쳐들어올까 봐 문이란 문은 꽁꽁 잠그고 안절부절못하며 노크 소리가 울리길 기다렸다.
다행히도 아로네의 답신은 자정을 넘기지 않았다. 나는 허겁지겁 봉투를 뜯고 빠르게 속독했다.
「혜라에게.
정말 다친 데 없는 거 맞니? 괜히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거짓말하는 거라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네가 어떤 기지를 발휘해 그 살벌한 상황을 타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다행이야.
네가 아버지의 이름을 팔았든 말았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이 끔찍한 일이 또 생기도록 내가 가만히 놔두진 않겠지만 만약 비슷한 상황이 생긴다면 기꺼이 무슨 짓이든 해. 설령 네가 살인을 했다고 해도 뒤처리는 내가 해 줄 테니까.
……네가 그런 일을 겪도록 놔둔 나한테 너무 화가 나. 분명 내가 몰락 귀족들의 동태를 살폈을 땐 그런 낌새 없었는데. 앞으로 너한테 더 신경 쓸게. 세상 사람들을 다 잃어도 너만큼은 그럴 수 없지.
그리고 그 망할 놈의 연락은 확보했어. 네 편지를 읽자마자 도착하다니, 타이밍이 좋았지. 나머지 일은 나한테 맡겨. 첨부한 자료를 보니 길드한테 쫓길까 봐 내부 고발까지 해 줘서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아.
앞으로 하찮은 것들이 너한테 집적거리는 일 없을 거야. 많이 놀랐을 텐데 잘 추스르고 조만간 꼭 보자.
-애정을 담아 아로네가.」
감정이 격앙된 상태에서 급하게 휘갈겼는지 평소의 필체와 달리 날림이 상당했다. 나머지 일은 제게 맡기라는 문장이 유난히 깊게 파여 있었다.
아로네가 이 사건에 얼마나 분노했는지 느껴졌다. 덕분에 일 처리가 깔끔해질 거라는 게 분명해졌다. 아로네는 감히 날 해치려고 한 이들을 절대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내 안전이 보장됐음을 확신하자 그제야 모든 긴장이 풀렸다. 축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시계를 보자 시침이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취침 시간을 계산하니 지금 당장 침대에 누우면 7시간 남짓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주말에 스크롤 상점에 가야겠다고 다짐하며 까무룩 수마에 몸을 내맡겼다.
***
“뭐어어?”
“조용히 말해……! 동네방네 소문낼 일 있냐?”
어제의 일을 전해 듣자마자 할리는 얼굴의 모든 구멍을 최대로 확장시켰다. 100m 밖에 있는 사람한테도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짜증스레 우리를 흘겼다.
월요일 아침의 직장인들은 굶주린 짐승보다도 예민하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눈이 마주친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운동장만큼 넓어진 할리의 콧구멍에 엄지손가락을 콱 쑤셔 넣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할리는 여전히 못 믿겠다는 듯이 어버버거렸다.
“놀랍다 정말……. 어떻게 그 상황에서도 구라를 쳐, 너는?”
“나도 내가 대견함. 어쩜 사람이 그렇게 임기응변을 잘하지?”
“……이래서 넌 칭찬을 해 주면 안 돼. 그래도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다! 내 전우여.”
전우는 무슨? 나는 비웃음을 날렸다.
“저기요, 지금 잊고 계신 거 같은데 저 오늘 잘릴 예정이거든요?”
할리는 급발진해서 빽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그걸 단정해! 제이든 님이 너한테 해고한다고 말한 것도 아니잖아!”
“그걸 굳이 말해 줘야 아냐? 제이든 님 성격 알면서 괜히 또 그런다. 오늘 대차게 까면서 말하겠지.”
사실 나보다 할리가 제이든 캐 해석에 더 완벽했던지라 그는 차마 반론하지 못했다. 우리의 제이든은 시건방진 부하를 몇 번이나 참아 줄 만큼 인내심이 좋지 못했으니 나는 곧 사무실 책상을 정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리는 긍정 회로를 돌렸다. 둘이서 감내하던 폭탄을 앞으로 혼자서 맡을 생각에 심란해 보였다. 할리는 의미 모를 말을 구시렁거렸다.
“……정말 그 방법밖에 없는 것인가. 하지만 내 존엄성이 달려 있거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물어볼 만큼 그 내용이 궁금하지는 않아서 익숙하게 무시하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역시나 제이든은 먼저 출근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만남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던 탓에 날 응시하는 눈길이 곱지 않았다. 나와 할리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올 것이 왔군.
선빵은 제이든이 날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 네가 나한테 보여 줬던 행동이 참…… 불온하더군. 그러니 앞으…….”
“으아아아제이든님그것만큼은절대로안돼요혜라없으면저정말과로로죽어요!”
제이든이 무슨 말을 하든 겸허하게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갑자기 할리가 난동을 피웠다. 할리가 바닥에 드러누워 미운 네 살처럼 생떼를 썼다.
나와 제이든의 눈이 마주쳤고, 서로의 눈에서 ‘얘 정말 미친 건가’ 따위의 감상이 떠올랐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이든 님! 혜라가 온 뒤로 우리 삶이 얼마나 인간다워졌는데요! 얘가 가끔 욱해서 말을 세게 하는 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나라를 위해 얼마나! 예? 무려 어제는 그 횡령 보고서 하나 제출했다고 살해 위협도 받은 애라고요! 그러니 해고는 다시 한번 재고를…… 저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어쩐지 익숙한 광경 같더라니. 인사 발령 내려왔을 때 스칼렛이 딱 저렇게 체면 따위 다 내던지고 울고불고했다. 가슴 깊이 한심함이 우러나왔다.
다 큰 성인 남성이, 그것도 키도 큰 애가 대자로 누워 몸을 버둥거리는 모습이 정말 꼴불견이었다. 바닥 청소하려는 목적이었으면 인정.
제이든은 그 모습을 당황스럽게 관망했다. 웬만하면 깨지지 않는 포커페이스에 난처한 기색이 어렸다.
“하……. 일어나.”
“안 돼요! 혜라를 해고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여기서 꿈쩍도 하지 않을 거예요!”
“명령이다. 말로 할 때 일어나.”
제이든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일그러진 미간을 보아하니 어지간히 스트레스를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의외로 할리는 강경했다.
마법의 단어인 ‘명령’에도 잠깐 움찔하기만 하고 정말 꿈쩍하지 않다니. 할리의 용기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겠군.
그러나 제이든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제이든의 분노 게이지가 점점 차오르는 게 보여서 결국 내가 나섰다.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소곤거렸다.
“야,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빨리 일어나.”
“넌 가만히 내가 하는 거나 잘 보기나 해!”
쟤는 목숨이 두 개인가? 마지못해 일어나기는커녕 오히려 가만히 있으라고 타박하는 할리의 정신 상태가 심히 걱정스러웠다. 날 절대 다른 부서로 보낼 수 없다는 광기가 그토록 무서워하던 제이든을 거스를 정도라니.
이렇게까지 하는 할리가 조금 안쓰러워졌다. 네 생존이 달린 일을 내가 과소평가했었구나…….
제이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해고할 생각 없었어. 물론 처음에는 건방진 작태에 잘라 버리려고 했지만, 할리 네 말대로 쟤가 온 뒤로 업무 효율성이 놀라울 정도로 올라갔더군. 그래서 네가 저지른 짓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혼자 지레짐작하고 이리 난동을 벌이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