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38)

<56화>

제이든이 할리를 모자란 사람 보듯 흘기자 할리가 멋쩍게 웃으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지체된 업무를 시작했다.

할리는 애써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지만 곧 자신에게 돌아올 후폭풍이 두려워 땀이 삐질삐질 흘렸다. 손 안 쓰고 해고당하는 것에 실패한 나는 말없이 제이든을 응시했다.

그가 고개를 까닥였다. 사무실로 따라 들어오라는 신호였다.

“습격을 당했다고?”

“네.”

“멀쩡히 서 있는 것을 보아하니 네 잘난 혀로 살아남은 모양이고……. 배후는 알아냈나?”

쟤는 말 한마디 하나 곱게 하는 법이 없다. 보통 죽다 살아온 사람한텐 위로를 건네지 않나?

“당연하죠. 횡령 리스트 때문에 인생 시궁창이 된 귀족들이요. 정확한 명단은 아로네한테 보내 놨으니 걔가 알아서 처리할 거예요. 물론 오늘 퇴근하고 진술하러 가야 하지만요.”

“여기서 공녀의 이름이 왜 나오지?”

“높으신 분들이랑 연줄이 꽤나 두텁다는 걸 빌미로 협박했거든요. 쫀 것 같아서 돈으로 회유하니까 금방 넘어오더래요? 널 죽일 사람들도 같이 처리해 주겠다고 설득하니까 멍청한 게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고요. 덕분에 일타이피 했죠.”

죽음의 위협이 한참 가시고 나서 다시 내 대처를 생각하니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훌륭한 묘책을 고안해 낸 나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덕분에 이따 오후에 끔찍한 기억을 되살릴 용기가 조금 생겼다.

제이든이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네가 패 놓은 장작에 공녀가 불씨를 던졌다는 말이군.”

“그렇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유대감이란 말이야.”

제이든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눈에 이채를 띠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말꼬리를 늘였다.

“참. 네 의견이 궁금하군. 파혼을 진행할까 생각 중인데, 어떻게 생각하나?”

그 말을 하며 제이든은 나른하게 웃었다. 전혀 웃을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마터면 그 매혹적인 미소에 홀려 따라 웃을 뻔했다.

지난 주말에 아로네를 만나고 와서 천만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할리의 원맨쇼 따위 잊고 바락바락 소리 질렀을 테니. 나는 태평한 척 말했다.

“별생각 없는데요? 아로네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뭐?”

제이든은 선뜻 내 말을 믿지 못했다. 하지만 당황은 순간에 불과했다. 그는 금세 의기양양해져서 뻔한 거짓말은 하지 말라는 듯 비죽 웃었다.

그날 자기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걸까? 아니면 아로네의 오랜 연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어느 쪽이든 역겨웠다.

“이런 걸로 왜 제이든 님께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 파혼, 무조건 아로네도 찬성할 테니 원하시는 대로 진행하세요. 그럼 이만.”

멍청한 놈. 신시아가 남자라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때도 나는 겉모습이 아니라 네 영혼을 사랑한 거라며 절절하게 고백할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충격받은 제이든은 내가 문을 닫을 때까지 미동하지 않았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할리에게 괜찮다는 뜻으로 윙크 한 번 날려 주고 업무에 몰입했다.

이 사무실에 조금 더 오래 있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제이든이 아로네한테 역관광당하는 모습을 스탠딩 1열에서 구경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할리의 응원을 뒤로하고 사건 진술을 위해 경비대를 찾았다. 딱딱한 분위기를 예상했지만 의외로 경비대원들은 내게 친절했다.

내가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는 고작 범인의 몽타주가 맞는지 확인하고, 그날 벌어진 일을 설명하는 게 전부였다.

나를 담당한 경비대원 마크의 공감 능력이 아주 뛰어나서 나는 친구랑 수다 떨 듯 편안한 마음으로 진술할 수 있었다. 덕분에 조사는 1시간도 안 지나서 끝났다. 마크가 진술서를 정리하며 말했다.

“자, 이제 가셔도 됩니다. 곧 신문에서 좋은 소식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엥, 정말요? 나중에 증인으로 재판 나가야 하는 거 아니고요?”

마크가 우스운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이상한 말을 한 건가? 혼란스러워진 나는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재판 같은 건 아무래도 필요 없죠. 사실 그 암살자가 속해 있던 길드 말인데요, 이미 조사 들어간 곳이었거든요. 듣기론 불법 노예 시장을 열었다나? 아무튼 황제 폐하 입장에선 하루빨리 연관된 자들을 눈앞에서 치워 버리는 게 속 시원할 거예요.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고요. 공녀님이 화끈하게 암살자랑 핵심 증거를 이 건물 앞에 던져 주셔서 일이 쉽게 풀렸죠.”

“그렇군요…….”

나는 숙소 가는 길에 잠깐 아로네를 보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기만 믿으라더니, 정말 언행일치의 훌륭한 본보기다.

“그럼 고생하세요.”

마크가 넉살 좋게 손을 흔들었다. 정말 좋은 사람이야.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건물을 나섰다.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빨리 끝난 덕분에 아직 하늘은 밝았다.

나는 대여 마차가 오길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료한 시야에 형형색색의 꽃들로 뒤덮인 가게가 들어왔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잠깐 꽃집에 들리는 사이에 마차가 올 것 같지 않아서 발을 떼었다.

꽃집 내부는 훨씬 화려했다. 꽃 색깔별로 정리된 내부를 보니 갑자기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나는 가장 화려하고 큰 꽃다발을 부탁한 뒤 15골드라는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고 가게를 나왔다.

돈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아니, 꽃다발 하나에 15골드라니. 어쩐지 바가지 쓰였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사장의 말발이 거의 국가 대표급이라 누구든 그 유려한 말에 넘어갔을 것이다.

뭐, 어차피 난 돈 잘 버는 직장인이고 이건 아로네를 위한 거니까 사실 꽃다발이 얼마든 상관없다.

나는 때마침 도착한 마차를 잡아타고 꽃다발을 샅샅이 살폈다. 만개한 수국이 아로네의 눈동자와 꼭 닮아서 마음에 쏙 들었다. 아로네도 좋아할 거라는 데 할리 손목을 걸지.

내리막길을 내려가듯 일이 술술 풀려서 나는 꽤 희희낙락했다. 하지만 지나가는 행인을 기다려 주기 위해 마차가 멈춰 서던 순간, 나는 잊을 수 없는 두려움을 또 느꼈다.

나는 누군가가 내게 차가운 물을 끼얹은 것처럼 몸을 벌벌 떨었다. 식은땀이 나고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곧 마차는 다시 출발했지만 나는 쉽사리 진정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내 목에 칼날을 들이밀지 않았음에도.

죽을 뻔한 게 별일은 아니지만, 순간의 기지로 잘 대처했으니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물론 제2의 살인 미수가 벌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온갖 마법 스크롤로 무장하고 있을 테니 상황이 매우 다를 거라고 자신했다.

암살자와 딜을 하고 그 뒤통수를 쳐 버린 내 행동이 날 죽일 잠재적 의뢰인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거라 확신했다. 난 보통이 아니라고. 그깟 암살자한테 당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당분간 난 안전할 거라고, 이 정도면 이겨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세상을 잃어버렸을 때보다 참을 만하다고 믿었건만. 결국 오만이었나.

나는 창문을 열고 허겁지겁 찬 공기를 마셨다. 시원한 바람이 달아오른 머리를 식혀 주었다. 누가 봐도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의 형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나는 의식적으로 심호흡을 하며 겨우겨우 공작가에 도착했다.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위압적이기만 했던 대저택이 지금은 내 집처럼 반가웠다. 나는 식은땀을 훔치며 멀쩡한 낯을 꾸며 냈다.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로 아로네를 걱정시키기 싫었다.

쓰레기통을 꽉꽉 누르듯 감정을 숨기자 그 위로 인위적인 설렘이 둥실 떠올랐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정문을 지났다.

정말이지, 내 집도 아닌데 내 집 같다니까? 문지기가 별말 없이 문을 열어 주는 외부인은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아로네를 만날 생각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캉캉을 추듯 흥겹게 걸었다. 그리고 맞은편 복도에서 데네브 얼굴을 보았을 땐 그 기쁨이 배가 되었다. 야호! 간만에 봤으니까 신명 나게 놀려야지.

나는 데네브 앞을 가로막고 발랄하게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그런데 데네브는 영 기운이 없어 보였다. 데네브는 내 촐랑거리는 말을 듣고도 예의 그 얄미운 표정을 하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긴가민가하며 한 번 더 나대 보기로 했다.

“무슨 일 있어요? 공작님께 혼이라도 났나?”

“……오늘은 그쯤 하고 가지?”

이럴 수가. 얘 정말 데네브 맞아? 내일 세상이 멸망하려는 거야? 저렇게 기운 빠진 말투로 순순히 항복하는 데네브는 듣도 보도 못했다. 이런 심각한 캐붕이 다 있나. 이쯤 되니 정말로 데네브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진짜로 무슨 일 있어요? 안색이 완전…… 돌멩이 같아요.”

데네브가 마른세수를 했다. 광채 돌던 피부도 지금만큼은 거친 모래 같았다. 그가 몹시 음울하게 말했다. 우수에 찬 눈빛이 아주 인상적이어서 나는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었다.

“……신시아가 떠난다는군.”

“뭐라고요? 아니 왜?”

나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질렀다가 하녀들의 흥미 어린 시선을 보고 마지막 말은 속삭였다. 레이 이 자식, 그때 했던 말이 진심인 줄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후원마저 걷어찰 줄은 몰랐다.

아니, 그럼 이제 돈 나올 구석이 없어지는 건데 앞으로 의식주는 어떻게 하려고?

“아무리 캐물어도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넌 그 애와 꽤 친했지.”

“그랬었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묘하게 광기 어린 눈이 그가 할 말을 암시했다.

“그럼 네가 신시아 좀 설득해 줘. 그 애가 다시 저택에 돌아오겠다고 하면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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