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물론 나만큼 수상한 사람은 없을 테지만 나는 제국의 공녀가 직접 추천서를 써 줌으로써 따로 검사할 필요가 없었다.
혼란한 내 머릿속과 달리 레이의 대답은 간결하기 그지없었다. 속으로 갖은 추측을 했던 내가 도리어 허탈해질 정도였다.
“신시아가 다리를 놔 줬지.”
레이의 말을 정확히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아카데미 다닐 때 알게 된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은 신시아한테 졸업 후 꼭 자기 부서에 오라고 거듭 강조했지.”
“와, 그래서 신시아 이름으로 편지했니? 레이를 추천한다고?”
레이가 잘했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경쾌한 소리를 듣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쟤가 만만치 않은 애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잔머리가 잘 돌아갔다. 정말 끝까지 신시아를 쥐어짜는구나.
“하지만 그 편지가 믿을 만한 과거를 보장해 주진 못해.”
그러자 레이가 의뭉스럽게 웃으며 내게 손짓했다. 귀를 가까이 대라는 의미였다. 음식에 옷이 닿지 않도록 조심조심 고개를 숙이자 듣기 좋은 미성이 나긋하게 속삭였다.
“그거 알아? 돈으로 해결 못 하는 문제는 없다는 거.”
“여기서 돈 얘기가 왜 나와?”
“내가 전에 말했었지? 신분을 숨겨야만 했다고.”
“응, 기억해.”
레이가 씩 웃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코밑을 쓱 훑었다가 다행히도 축축한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아서 안도했다.
“맨얼굴로 다녀도 상관없어졌지만, 그래도 가능한 위험 요소는 줄이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기묘한 수수께끼를 푸는 기분이었다. 레이의 말이 길어질수록 그가 공백 가득한 과거를 어떻게 채웠는지 그 실마리가 내 손에서 더욱 멀어졌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신분을 샀어.”
오, 이건 예상 못 한 전개인데.
“그게 가능해?”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제국 곳곳을 뒤지니 나와 비슷한 외양, 나이, 능력을 가진 사람이 딱 한 명 나오더라. 정말 운이 좋았지.”
“그럼 걔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건데?”
“어떻게 되고 말 것도 없어. 그 사람은 먼 곳으로 떠났거든.”
하느님 맙소사. 그 의미는 즉…….
등 뒤에 소름이 쫙 끼쳤다. 나는 벌떡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나는 레이에게 삿대질하며 소리 질렀다.
“네가 죽였어?!”
레이는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고작 적법한 신분 하나 얻으려고 사람을 죽여?
“네가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하, 내 말 좀 들어 봐.”
“무슨 취직 하나 하자고 사람을…… 사람을…….”
“혜라!”
레이가 내 양 뺨을 감싸고 시선을 맞추었다. 그가 한숨을 길게 내쉬곤 지친 얼굴로 말했다.
“내 말은 그 사람이 먼 나라로 떠났다는 뜻이었어. 내가 죽인 게 아니라.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웁스, 미안.”
나는 요즘 극적인 사건을 많이 겪은 탓이라고 자기 합리화했다. 어휴, 창피해서 차라리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내가 눈에 띄게 쪽팔려 하는 걸 보고 레이가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오해할 만하게 말했다.”
네 눈빛도 다른 사람이 보면 오해할 것 같은데. 나는 슬금슬금 시선을 피했다.
“……근데 신분을 샀다고 해도 그 사람 지인들은 네가 가짜라는 걸 알잖아. 그럼 무용지물 되는 거 아니야?”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치매 걸린 노인 빼고는 다 죽었거든.”
“뭐 하는 사람이길래 주변 사람들이 다 죽었어?”
“용병이었어. 사는 게 궁핍했던 모양인지 위험한 임무도 가리지 않았고. 덕분에 회유하는 게 쉬웠지.”
신이 내린 운이라고 생각했다. 완벽한 조건의 사람을 찾기까지 돈이 얼마나 들었을까? 과정이 어땠든 레이가 드디어 진정한 삶을 살게 된 것은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나는 빙긋 웃었다.
“잘됐네. 그래서 네 새로운 이름이 뭐야?”
“서류상의 이름은 레이몬드야.”
정말 지독히도 안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내가 말없이 썩소만 짓자 레이가 알만 하다는 듯이 웃었다.
“난 남의 탈을 뒤집어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운명인가 봐.”
농담 던지듯 가벼운 말투였지만 그 이면에는 레이를 망령처럼 따라다니는 우울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쩐지 가라앉은 얼굴이 신경 쓰여서 나는 덜컥 말하고 말았다.
“내가 네 진짜 이름을 알잖아. 평생 기억할게.”
“……맞아. 너만 알면 돼.”
레이는 정말로 나만 있으면 된다는 듯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미소 지었다. 체념의 빛이 어렸던 녹안이 생기를 띠고 반짝거렸다. 너무나 과분한 순정을 방패 없이 맞으며 나는 생각했다.
다시 봐도 얼굴 하나는 정말 내 취향이네.
***
드디어 학수고대하던 날이 왔다. 바로 아로네와 제이든 사이의 마지막 끈을 잘라 내는 그날 말이다! 나는 하도 설레서 두 번이나 깃펜을 부러뜨렸다.
날이 날이라 제이든도 오늘만큼은 눈빛이 또렷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아로네에게 파혼 동의 도장을 받아 내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내가 생떼를 부릴 필요도 없이 제이든은 날 콕 집어 외출 준비를 지시했다. 내가 신나게 짐을 싸는 모습을 지켜보며 할리는 손수건을 물고 눈물만 흘렸다.
공작가의 정문을 통과하던 순간, 사용인들은 제이든을 보고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가 온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이든이 자발적으로 공작가에 방문했다는 사실이 못내 믿기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베테랑인 그들은 금세 경악을 지워 내고 환대의 미소를 띠었다. 집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불과 몇 달 전 불청객 신분으로 이곳에 머물렀던 것을 생각하면 황태자 보좌관으로서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복도의 카펫을 밟는 지금이 꿈같았다. 역시 사람 일은 두고 봐야 해.
아로네는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집사의 목소리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는 제이든 뒤에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로네가 입가를 파르르 떨며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제이든은 여태껏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그가 뜻 모를 표정으로 아로네의 인사를 받고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바쁘니까 용건만 간단히 하지.”
나는 부탁을 해도 모자를 판에 싸가지 없게 물꼬를 트는 패기에 감탄했다. 저 정도 인성은 돼야 황태자라는 건가? 그럼 나도 한번 그 자리에 도전해 보고 싶군.
“무슨 일이죠?”
용건을 뻔히 알면서도 아로네는 물었다.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눈빛이 언젠가의 그날과 달리 아주 마음에 들었다.
제이든이 아로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손만 내 쪽으로 까닥였다. 미리 작성해 놓은 계약서를 잽싸게 건네자 제이든이 계약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서명란 중 한 곳은 이미 서명이 된 채였다.
“파혼 동의 계약서라…….”
지켜보는 있는 사람이 애탈 정도로 아로네는 아주 느릿하게 계약서를 훑었다. 조급해진 제이든이 다리를 반대로 꼬았다.
아로네가 마지막 장을 넘기자 제이든은 만년필을 테이블 위로 쓱 밀었다.
“읽어 봤으면 알겠지만 피차 손해 볼 거 없는 조건이야. 앞으로 이런 불편한 관계로 얽힐 일은 결코 없을 거라 약속하지. 계약금도 후하게 줄 거고.”
“하지만 제가 사인하지 않으면 결혼은 강행되는 거고요?”
“……놀랍군. 아직도 결혼에 미련을 못 버렸나? 넌 자존심도 없나 보지?”
제이든이 내게 곁눈질했다. 그것 보라는 듯 의기양양한 눈빛이 꼴불견이었다. 나는 흐린 눈을 하고 딴생각을 했다. 참자 혜라야…….
“아니죠.”
“뭐?”
“파혼은 저보다 전하가 훨씬 간절하지 않나요? 근데 지금 전하의 태도를 봐선 잘…… 모르겠네요.”
아로네가 진심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어조로 물었다. 공녀답지 않은 점잖은 반응에 제이든은 조금 당황했다.
“지금 내 말투가 마음에 안 들어서 사인을 안 하겠다는 말인가?”
“아니요. 하기 싫은 결혼을 왜 억지로 하겠어요. 다만 저는 전하보다 급하지 않다는 거죠.”
파혼을 빨리 처리하고 싶으면 보다 정중하게 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제이든에겐 그 예의의 범위가 한없이 추락해 ‘빌빌 기어라’ 정도로 이해된 것이 틀림없었다. 뚜렷하게 돋아난 손의 힘줄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그럼 타협점을 찾아보지. 내게 원하는 게 있나?”
“뭐든 들어주실 건가요?”
“분별력 있을 거라 믿지.”
“……그동안 전하는 제 감정을 비웃고 깎아내리고 외면하셨죠.”
아로네가 잠시 말을 멈추고 울컥 솟아오른 감정을 골랐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예요. 전하를 향한 그 마음, 끊어 낸 지 오래니까 앞으로 불쾌한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항상 잊으시는 것 같아 말씀드리자면, 저는 제국의 유일한 공녀고 그에 마땅한 대우를 받아야 할 권리가 있어요. 이 점 신경 써 주셨으면 좋겠네요.”
아로네가 몹시 지친 표정으로 옛사랑을 바라보았다. 제이든은 애정이라곤 한 톨도 남지 않은 눈을 들여다보다가 이윽고 목울대에 힘을 잔뜩 주고 계약서를 수정했다.
온점을 찍고 만년필을 내던지는 행위에서 신경질이 느껴졌다.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의 투덜거림을 들어줄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제 됐나?”
“완벽하네요.”
제이든이 후련하게 미소 짓는 아로네를 의심스럽게 바라봤다. 본인이 알던 공녀가 맞나 혼란스러워하는 심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아로네는 우리를 정문까지 배웅해 줬다. 정중하게 인사하는 아로네를 보며 제이든은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내가 작게 제이든을 부르자 그가 마지못해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겉만 번지르르한 말을 하는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