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우리는 소나기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빠르게 떠났다. 나는 마차의 커튼을 치기 전 시선이 마주친 아로네에게 윙크를 보냈다.
다음에 올 때 맛있는 걸 잔뜩 들고 와야지. 아로네가 기특해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탈탈 터는 제이든 덕분에 미소는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어휴. 아로네의 사무적인 태도가 연기 아닌 진심이었냐고 다그치는 물음에 대답하느라 혼났다.
그래도 제이든의 주의를 신시아에서 아로네로 돌린 것 같아서 다행……. 아니, 정말 다행인가?
***
나는 목에서 피날 때까지 아로네의 진실성을 주장했지만, 제이든은 언제나 그랬듯 내 말을 흘려들었다. 내 말 무시할 거면 도대체 왜 물어본 건지 모르겠다.
걔가 내 월급 주는 사람이라 그렇지, 만약 아니었다? 이미 한참 전에 서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웠을 것이다.
제이든은 아로네가 짝사랑을 접었다는 걸 쉽게 믿지 못했다. 아로네가 선뜻 사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이든은 분명 그 이면에 비겁한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제이든은 혹시 아로네가 계약을 무를까 봐 그날 바로 황제를 찾아가서 계약서를 흔들었다.
그 자리까지 따라가진 않아서 제이든과 황제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제이든이 황제의 심기를 어마어마하게 긁어 놓았다는 것 말이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언젠가 봤었던 황제의 보좌관이 날 황제 앞으로 데려다 놓으면 누구라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숙소에서 잘 쉬고 있던 참에 이게 무슨 봉변이람? 감히 직장인의 금 같은 휴식 시간을 방해하다니. 황제가 날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었지만 긴장은커녕 신경질만 났다.
굳이 개인 집무실로 부른 이유를 짐작할 수도 없었다. 나는 반항심을 꾹꾹 누르고 고개를 숙였다.
“듣자 하니 자네는 공녀의 절친으로도 유명하더군.”
“맞습니다.”
“그리고 황태자의 보좌관이기도 하고.”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어쩐지 황제가 할 말이 예상됐지만 제발 내 예감이 틀리길 바랐다. 근데 언제는 하늘이 내 편이었던가?
“나의 친애하는 아들이 상의도 없이 기특한 짓을 했던데, 자네도 아나?”
“……파혼 계약서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네, 압니다.”
황제는 의도적으로 긴 간격을 두고 말했다.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훗날 제국을 이끌 황태자의 보좌관으로서 그 계약을 어떻게 평가하나?”
애초에 황제가 원하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혼은 황실과 님프 가문 간의 지속적인 상의와 타협 끝에 결정된 계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여러 이해관계가 국익이라는 통일된 목적을 갖고, 결혼이라는 수단을 통해 구체화되었죠. 사랑 없는 결혼. 하기 싫을 수 있죠. 하지만 황태자라는 직책은 하기 싫은 일도 해야만 하는 당위와 책임을 갖습니다. 저 같은 평민과 달리요.”
나는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소름 끼치도록 파란 눈동자가 기묘하게 빛났다. 황제는 흥미로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감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황제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는 경보 장치가 시끄럽게 울렸다.
“자네가 해 줄 일이 있네.”
“제가 할 일이라니요?”
“본디 계약이란 두 사람의 의사가 서로 일치할 때 성립되는 법이지. 그러니 그 반대도 같은 순서를 따르면 되지 않겠나?”
“그 말씀은, 제가 계약 당사자들의 의지를 돌려놓아야 한다는 건가요?”
황제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날 짓누르는 압박감이 명백한 긍정을 암시하고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아로네가 어떻게 그 계약서에 사인을 했는데, 그걸 무효로 만들라고? 주구장창 제이든을 욕했던 내가 다시 그 결혼을 성사시키려는 것만큼 모순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절대로 황제의 요구를 수락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처음부터 나에겐 선택권이 없다는 것이다.
“저는…….”
하기 싫다고 딱 잘라 말하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 침묵을 달리 오해한 황제가 인심 쓰듯 덧붙였다.
“만약 자네가 그 일을 해낸다면 원하는 보상을 내리지.”
그 보상으로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든지 간에 난 아로네가 제이든이랑 엮이는 게 싫었다. 더군다나 만약 내가 거절할 수 있다고 한들, 황제는 그 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굳이 나를 체스 말로 쓰지 않아도.
그러니 나는 더 나은 대책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아로네를 위해서.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못 할 것 같습니다.”
“오해가 있는 것 같군. 이건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네.”
뼈가 실린 말이었다. 싸늘한 시선이 피부를 콕콕 찔렀다. 만약 황제가 내 의견을 들은 척도 안 하면 어떡하지?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놓으며 말했다.
“송구하오나 황태자님과 공녀가 계약을 철회할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두 분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제가 감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황제의 눈썹이 씰룩이는 것을 보고 나는 잽싸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는 많지 않습니까? 혹 황태자님의 짝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무도회를 여는 건 어떨까요? 물론 님프 가문과 결합하는 것보다 이익이 크진 않겠지만, 황태자님이 병적으로 공녀와의 결혼을 꺼리시니 긁어 부스럼을 만들 바엔 차라리 차선책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성공적으로 스피치를 끝낸 나 자신에게 속으로 박수갈채를 보냈다. 갑자기 떠오른 방책치고는 꽤 괜찮았다. 나는 신뢰감 주는 미소를 짓고 황제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깊이 고심했다. 나는 적어도 바로 호통이 날아오지 않았으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한참 만에 꺼낸 말은 다소 뜬금없었다.
“자네가 평민인 게 아쉽군.”
“……예?”
내가 무슨 망발을 들은 거지? 얼빠진 나를 보고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가 오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야. 이만 가 봐도 좋네.”
나는 너무 기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인사를 하고 물러나기 전, 나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탄식을 내뱉었다.
세상에 마상에. 내가 신붓감 찾기 무도회의 고안자라는 걸 제이든이 알면 그는 날 죽이려 들 것이다.
“폐하, 부디 황태자 전하께 오늘 일을 비밀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 이유는 충분히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허, 그러지.”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휴, 하마터면 명줄을 올해로 앞당길 뻔했네.
***
당연하게도 제이든은 그 소식을 듣고 길길이 날뛰었다. 덕분에 보좌관 듀오는 초비상 사태였다. 할리는 내가 그 구혼 무도회의 제안자라는 것을 알고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걔가 뭐라더라?
“넌…… 넌 물에 빠져도 입만 동동 뜰 거야.”
“칭찬 고마워.”
멋지게 위기 상황을 모면한 내가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내 높아진 자존감과 제이든의 신경질을 감당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무도회는 불과 한 달 뒤였다. 무도회장을 꾸미는 것부터 시작해서 참석자를 선별하는 것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텐데 날짜를 촉박하게 잡은 것을 보면 황제가 제이든한테 단단히 화가 나긴 했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 독단적인 황제의 통보에 제이든 역시 무척 분개했다. 제이든은 매일 황제를 찾아가 무도회 취소를 요구했다. 그러나 황제는 강경했다.
그래서 결국 제이든은 무도회 당일에 잠수 탈 계획을 세웠지만 내가 필사적으로 말렸다. 만약 제이든이 그 무도회에도 안 나간다면 황제가 날 다시 부를 게 뻔했으니까.
어휴, 신은 왜 내게만 이런 시련을 내려 주시는 걸까?
내가 다섯 번째로 제이든을 설득하던 참이었다. 그가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보았다. 부자 아니랄까 봐, 마음에 안 들 때 짓는 표정이 똑 닮았다.
“내가 무도회에 꼭 가야만 하는 이유가 뭔지 말해 봐.”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제이든이 그동안 얼마나 편한 삶을 살아왔는지 알겠다. 해야만 하는 일을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무시할 수 있다니.
“……최소한 참석이라도 하셔야 황제 폐하의 화가 누그러지죠. 무도회는 시작일 뿐이에요. 만약 이런 식으로 계속 피한다면 황제 폐하는 더욱 강경책을 두실 거고요. 설마 그걸 원하시는 건 아니죠?”
“이미 아버지는 강경책을 두고 계셔. 아버지가 어떤 방책을 강구하든 내가 끝까지 버티면 결국 아버지도 포기하시겠지.”
진짜 황소 같은 고집이네. 차라리 무도회 전날 제이든을 기절시키고 다음 날 무도회장에 던져 놓을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아버지는 날 회유하려고까지 했는데? 나는 차마 한심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다행히도 제이든은 딴생각을 하느라 내 불경을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그는 마지못해 내 말을 인정했다.
“……확실히 아버지가 고집이 세긴 하시지.”
너만 할까.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일단 무도회장에 참석하세요. 분명 황제 폐하는 미리 염두에 두었던 영애를 소개하시겠죠. 그럼 그때 부정적으로 반응하지 말고 최대한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세요. 마치 황제 폐하의 뜻에 굴복했다는 듯이 말이에요. 그럼 황제 폐하도 얼마간은 뒤로 물러서서 제이든 님을 지켜보겠죠.”
“그래, 얼마간은 말이지.”
제이든이 한껏 빈정댔다. 내가 설마 그 정도도 생각 못 했겠냐는 뉘앙스였다. 나는 제이든에게 꿀밤 먹여 주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
“그러니까 그 얼마간을 이용해야 해요. 급한 불을 꺼 줄 영애를 찾아서 계약 연애를 제안하세요. 단지 황제 폐하께 어필만 하면 되니까 서로에게 애정을 쏟을 필요도 없어요. 그냥 겉만 연인처럼 보이면 돼요. 그리고 만약 그 계약 기간을 넉넉하게 잡는다면 그사이에 제이든 님도 진짜 사랑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