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나는 레이의 옆모습을 흘깃대며 미의 남신 같은 자태를 감상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저렇게 예쁜 애가 날 좋아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내가 레이보다 모자라서가 아니라 나르시시스트라고 해도 무조건 수긍할 외모의 소유자가 본인이 아니라 딴 사람을 좋아해서다.
레이가 시선을 눈치채고 반달처럼 눈을 접었다. 봐 봐, 저 습관적인 눈웃음.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와, 이러다가 진짜 쟤 좋아하게 되는 거 아니야?’
난 아직 누군가와 연애할 마음이 없었다. 반면 레이는 ‘연인’이라는 견고한 관계를 원했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건 두렵지 않다. 문제는 연애했을 때 부가적으로 따라올 상황들이다.
내가 정의하는 연애란 내 일상에 상대방이 들어와도 된다는 것인데, 나한텐 그게 침범처럼 느껴졌다. 연애하면서 느끼게 될 부수적인 감정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지쳤다.
와, 내 주변 커플들은 어쩜 그리 사소한 걸로 싸워 대던지. 연락 조금 잘 안 되는 걸로 싸우고, 번갈아 가면서 양보하면 될 것을 취향 차이 때문에 싸우고…….
내가 봐 온 모든 커플의 말로가 좋지 않아서일까. 나는 연애에 회의적이었다.
언젠가 금발 미인을 찾으러 다녔을 때? 그때도 딱히 그 사람이랑 잘해 볼 마음은 없었다. 그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유니콘이 정말로 실재하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하지만 한번 내 사람이라 여기면 죽을 때까지 품는 날 알기도 했다.
레이는 내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번거로움과 귀찮음을 감수하고 연인이라는 틀 안에 스스로를 끼워 넣을 만큼 내가 저 애를 좋아하게 될까?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미래가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햇살처럼 반짝이는 머리칼을 응시했다. 푸른 녹음을 배경으로 레이가 내게 말했다.
“혜라, 널 또 만나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해?”
“……내일 저녁에 할리랑 게임하기로 했어. 걔도 너랑 친해지고 싶어 했으니까 그냥 가도 상관없을 거야. 올래?”
“응, 가고 싶어.”
레이가 신나 죽겠다는 듯 웃었다. 나는 어색하게 눈알을 굴렸다. 미치겠네, 내가 이 정도로 시각적인 자극에 약했던가?
***
나는 화를 못 이기고 책상을 쾅 내려쳤다.
“젠장!”
어젯밤 늦게까지 달려서 안 그래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황후의 측근이 보내온 편지를 보자니 더욱 머리가 아팠다.
“무슨 일이야?”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몰골의 할리가 물었다. 창백한 안색이 금방이라도 사무실 바닥에 점심으로 먹었던 스튜를 쏟아 낼 것만 같았다.
하긴, 어제 레이까지 우리 셋 다 과음하긴 했다. 덕분에 초고속으로 친해질 수 있긴 했지만 그 대신에 지독한 숙취를 얻었다.
나는 씩씩거리며 문제의 편지를 할리에게 건네주었다. 할리의 동공이 글자에 집중하지 못하고 정처 없이 흔들렸다. 애잔해진 나는 마지막 구절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만 읽어도 돼.”
할리가 느릿느릿 편지를 암송했다.
“그리하여 참석인 명단은 극비로 다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헐?”
할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의 책상에 걸터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가 내 옷자락을 잡고 징징거렸다.
“어떡해? 우리는 무조건 그 명단을 입수해야 하잖아!”
“그러니까 문제지. 참나, 고작 참석자 명단이 뭐라고 극비로 다루는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도회 주인공이 필요하다는데!”
“제이든 님이 그 사람들 찾아가서 협박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 아니야?”
“풉, 설마 그렇게까지 기대치가 낮을…….”
자신감을 잃은 목소리는 끝내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할리가 ‘가슴에 두 손을 얹고서 다시 말해 봐’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련히 먼 곳을 응시했다.
“그래……. 그분의 과거 행적을 돌아보면 기대치가 낮을 만하긴 하다.”
“앞으로 어떻게 해? 수락해 줄 때까지 계속 요청할까?”
나는 할리가 먹으려고 꺼내 놓은 초콜릿 하나를 입에 털어 넣었다. 혀가 아리도록 단맛이 굳은 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집착 광공처럼 굴면 황후 폐하가 항복하실까?”
“음…….”
나는 여기저기서 주워들었던 황후의 성격을 떠올렸다.
그를 잘 알지 못했을 때 내심 짐작했던 것처럼 황후는 냉철하고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왕국의 귀족들이 모조리 목이 잘렸을 때 홀로 살아남았지. 그의 살겠다는 일념이 강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제국행 마차에 타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의 첫사랑과 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단숨에 적국의 황후가 된 서사라……. 나라면 어떻게든 도망쳤을 텐데 칼리아는 모든 과거를 불타던 고국에 묻어 두고 기꺼이 새 삶을 받아들였다.
그 냉정한 판단 이면에 공녀 칼리아가 언제나 그의 약한 모국을 혐오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진위 여부는 오직 본인만이 내릴 수 있을 테다.
그다지 지지받지 못하지만 또 다른 추측이 있다. 바로 칼리아가 아직 살아 있는 왕국 국민들을 위해 본인을 희생했다는 소문이다. 그가 제국의 황후가 되면 자국의 국민들을 보호해 줄 수 있을 거라는 계산하에 미래를 포기했다나.
내가 믿는 소문은 전자였다. 그렇지 않고선 황후의 제국 친화적인 태도가 설명 안 된다.
일전에 갔던 건국 연회는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화려했고, 황후 궁에서 이쪽으로 불어오는 입김도 꽤나 영향력 있었다. 그건 결코 의무감에서만 비롯될 수 없는 행동이다.
설사 정말로 모국을 멸시했다 한들, 그래도 모국을 앗아 간 제국인데 그렇게까지 맡은 바에 책임감 있을 수가 있나?
성실한 겉모습 너머에 어떤 속내가 자리하고 있을지는 본인만 알 테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황후는 꽤나 제국에 열성적이었고, 따라서 이번 무도회 준비에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왜냐면 그는 제이든을 사랑하지 않고, 그 무도회는 제국의 밝은 미래를 만들어 줄 도구니까. 그는 제국을 위해야 하는 황후니까.
나와 할리는 동시에 입을 모아 말했다.
“절대.”
나는 책상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그래도 계속 보내자. 제이든 님이 직접 부탁할 리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부딪쳐야지.”
“확실해?”
할리가 의구심을 품고 물었다. 나는 잠깐 뜸을 들였다. 황후를 직접 만나 본 적 없어서 확신할 순 없었지만 나름 짐작은 해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그라도 독촉 조금 했다는 이유로 감히 제이든의 사람을 건드릴 순 없다.
하지만 안 된다고 정중하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른 척 계속 들이대면 황후도 분개할 게 뻔했다. 그 격노 단계에 들어선 사람들이 보통 어떻게 행동하느냐? 그건 PC방에 가면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확실해.”
나는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황후의 인내심이 극치에 다다르면 그는 우리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할 것이다. 그걸 속된 말로 아마 ‘현피 뜬다’고 하지?
***
퇴근에 임박한 시간, 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딴청을 피우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나와 할리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할리는 잉크 범벅이 된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나는 혀를 차며 문을 열었다. 익숙한 유니폼의 남자가 지친 기색으로 인사를 건넸다.
“아, 편지 전해 주시려고 오셨군요? 황태자님께 온 건가요?”
퇴근 5분 전에 편지가 오다니.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편배달원이 입에 담은 건 생뚱맞은 이름이었다.
“성함이 혜라 맞으십니까?”
“……저요? 예, 제 이름이 혜라이긴 하죠.”
우편배달원이 직접 편지를 전해 주는 경우는 오직 하나였다. 급서의 경우는 반드시 본인이 직접 수령해야 했다.
나한테 급서 올 일이 뭐가 있을까 머리를 굴렸다. 우편배달원은 어리둥절한 내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손에 편지를 쥐여 주었다.
편지 상단에는 아로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평상시와 달리 글자의 삐침이 하늘로 솟을 것만 같았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황급히 봉투를 뜯고 편지를 훑었다. 속독할 필요도 없이 용건은 간단했다.
「네가 필요해. 지금 당장.」
“젠장.”
나는 황급히 가방에 짐을 쓸어 담았다. 내가 부산을 떠는 것을 보고 할리도 덩달아 급해져서 하던 일을 정리했다.
슬리퍼에서 구두로 갈아 신고 앞코를 탁탁 두드리며 모든 준비를 마치자 시침이 정확히 6을 가리켰다. 그를 신호탄 삼아 나는 육상 선수처럼 뛰쳐나갔다.
“저 먼저 퇴근합니다!”
죽어라 전력 질주를 하는 와중에 같이 가자고 소리치는 할리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나는 인생 신기록을 기록하며 정문에 도착했다. 퇴근 시간에 맞춰 마차들이 입구에 줄지어 서 있었다. 나는 가장 앞에 서 있는 마차를 잡아타고 비명 지르듯 외쳤다.
“님프 공작가로 가 주세요! 최대한 빨리!”
내 긴박함에 동화되었는지 마부는 연신 말을 채찍질했다. 깔끔하게 포장되지 않은 도로 위를 빠르게 달리면서 마차가 미친 듯이 덜컹거렸다. 딱딱한 판자로 만들어진 의자에 부딪히는 엉덩이가 아렸다.
질겅질겅 물어뜯은 입술에서 핏물이 배어 나왔다. 설상가상으로 창밖에선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물방울의 개수를 셀 수 있을 만큼 간헐적으로 내리던 비는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거세졌다. 바쁘게 돌아가는 바퀴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안 들릴 정도였다.
손에 잡히는 대로 돈을 쥐여 주고 저택 정문을 향해 뛰었다. 머리카락과 옷이 형편없이 젖어 들어갔고, 진흙투성이 구두는 똥통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보였다.
잠깐 비를 맞았는데도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축 늘어진 앞머리가 시야를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