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38)

<67화>

보나마나 아로네 이야기를 할 게 뻔한데 왜 답지 않게 주저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가 할 법한 대사도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알고 있었나? 정말 그 기사가 사실인가?

내 인내심이 바닥날 즈음, 드디어 제이든이 말했다.

“……됐으니까 나가 봐.”

“어라?”

아이코 실수.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걸 밖으로 내뱉어 버렸네.

제이든의 눈썹이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담고 씰룩였다. 나는 애먼 불호령을 받을까 봐 후다닥 튀어 나갔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의자에 앉자 할리가 쪽지를 던졌다. 별일 없었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감정 곡선이 최저치를 찍지 않아서 기뻤다.

하지만 제이든이 막판에 마음을 바꾼 이유를 모르겠어서 영 찜찜했다. 왜 그랬을까? 제이든이 나와 아로네를 배려할 만큼의 인성을 갖고 있다곤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흠, 어쩌면 그동안 내가 제이든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던 걸까? 아니면 드디어 철이 든 걸까? 어느 쪽이든 다소 어색하고 공포스러웠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라는데……. 나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보약이라도 지어 와야 하는 것인지 고민했다.

“왜 그래?”

할리가 떨떠름해하며 물었다. 나는 문에서 눈을 떼고 말했다.

“버킷 리스트를 못 이룰까 봐 걱정 중이었어.”

“버킷 뭐?”

할리는 내게 질문한 것을 후회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일단 물음표가 던져진 이상 그는 괴로운 운명에 승복해야만 했다. 나는 비장하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각 잡고 제이든 님 놀려 먹는 게 내 인생 목표 중 하나거든. 무려 별표 세 개짜리야.”

그러니 내가 그 리스트에 줄을 긋기 전까지 제이든은 무조건 살아 있어야 했다.

“……넌 문제가 많아.”

할리는 더 이상 말 섞는 것도 싫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왠지 한이 서려 있는 몸짓이었다. 가만 보면 가끔씩 쟤도 일반인 코스프레한다니까? 낱낱이 따지고 보면 쟤나 나나 다를 거 하나 없는데.

나는 입술을 삐죽이곤 업무에 몰입했다. 딱 떨어지는 일처럼 세상사도 명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떤 문제가 생기든 이미 정해진 답만 따라가면 될 텐데.

***

“황후가 무도회 관련하여 널 보고 싶어 한다고?”

“네. 그래서 말인데 조기 퇴근 가능할까요? 4시 정도에요.”

나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반짝였다. 제이든이 헛웃음을 지으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기 퇴근이라니! 거의 기쁨의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멋진 커리어 우먼이니까 내면의 흥김은 잠시 억눌러야겠지? 음, 씰룩거리는 입꼬리는 어쩔 수 없군.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돌연 제이든이 물었다.

“황후는 내게 명단을 넘겨줄 마음이 전혀 없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한 건가?”

제이든이 진기명기 재주를 부리는 원숭이를 보듯 감탄했다.

사실 제이든에게 저런 반응을 이끌어 냈다는 것은 기념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우쭐하기는커녕 그동안의 노고가 순식간에 머리를 스쳐 지나가서 나도 모르게 타박하고 말았다.

“그걸 아시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계셨어요?”

“명단 입수하겠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더라?”

“그건……! 그건 저였죠.”

나는 쳐들었던 고개를 내리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제이든 님이 명단 구해다 주시면 제가 마땅한 사람을 조사해 놓을게요’라고 말해도 되는데…….

나는 더욱 치밀해지겠다고 다짐하며 이어 말했다.

“별거 안 했어요. 황후 폐하께 명단 달라고 계속 조르는 편지 보낸 것 말고는요.”

“하루에 몇 통씩?”

“1시간마다 한 통씩이요.”

그 말에 제이든은 질린 기색을 보였다. 그가 지긋지긋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넌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어.”

나는 소리 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아, 저 말을 제이든 말고 다른 사람이 했다면 조금 설렜을 법도 한데. 제이든은 본인 보좌관을 향해 가차 없는 독설을 내뱉었다.

“그 얄짤없는 황후 폐하가 왜 널 불러냈는지 알겠군. 나라도 네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싶었을 거야. 얼마나 정신이 나갔길래 그런 미친 짓을 벌이는지.”

제이든 밑에서 일한 지 조금 됐다고 저 차가운 말 아래에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는지 대강 알 수 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지금 제이든은 잘했다고 칭찬하고 있는 거였다.

나는 허허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어휴,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하세요. 걱정일랑 하지 마시고 저한테 다 맡겨 주세요. 제가 말발 하나는 끝내주잖아요? 오늘 딱 명단 받아 올게요.”

나는 정말 자신 있었는데 의외로 제이든은 나를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곱게 패인 미간에서 불신이 느껴져서 조금 억울해졌다.

“……뭐 문제 있나요?”

“아니. 네가 세상에서 싹 사라질까 봐 문득 걱정이 돼서.”

“뭔 농담을 그렇게 살벌…….”

나는 웃어넘기려다가 제이든의 표정이 누가 봐도 진심이라서 얼굴을 굳혔다. 제이든이 저런 말을 할 정도면 도대체 황후는 어떤 인간인 거야?

“마지막으로 조언 한마디라도?”

나는 퍽 간절하게 물었고, 제이든은 보기 좋게 입꼬리를 휘었다. 나한텐 그게 악마의 미소 같았다.

“행운을 빌지.”

망할 놈.

***

비상이다. 강혜라 인생 중 이토록 살 떨렸던 적은 처음이다. 맙소사, 저토록 강렬한 시선이라니. 눈빛에도 열기가 있다면 나는 이미 10분 전에 타 죽었을 게 분명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는가? 바로 내가 10분 내내 황후의 말 없는 질책을 받고 있었다는 얘기다.

으리으리한 응접실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두려움보다는 투쟁심이 더 컸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왜 제이든이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했는지 알겠다.

뭐? 네가 세상에서 싹 사라질까 봐 걱정이 된다고? 그걸 아는 놈이 웃으면서 나를 전장으로 내보낸 거야? 나는 이 빚은 나중에 꼭 갚아 주리라 다짐했다.

1시간마다 한 통씩 편지를 보내면 온화한 사람도 잔뜩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러니 무섭다고 유명한 황후는 뭐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래. 황후가 내게 꽤나 악감정을 갖고 있을 거라 이미 예상했었다. 근데 이 정도로 분노했을 줄이야.

내가 먼저 대화를 시작하지 않는 이상 침묵이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먼저 그간의 무례를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황후는 여전히 침묵한 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사람 숨통을 옥죄는 효과적인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동안 내가 보낸 편지들을 테이블 위로 우르르 쏟아 낼 리가 없다.

나는 멋쩍어하며 말했다.

“……많긴 하네요.”

지금 생각해 보면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으로 저랬는지 모르겠다. 황후가 나를 서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어찌나 기쁘던지. 나는 상황도 잊고 그만 함성을 지를 뻔했다.

“자네의 의지는 잘 보았네. 그 집념이 너무 잘 느껴져서 문제일 정도로 말이지.”

뼈가 담긴 말이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황후의 약지에서 반짝거리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황후의 머리칼을 닮은 붉은 가넷이 그의 눈만큼 커다랬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 상투적인 말 듣자고 부른 건 아니고. 무슨 목적이지?”

“앞서 편지에서 말씀 드렸…….”

“잠깐.”

미리 준비해 온 멘트를 칠 새도 없이 황후가 뚝 말을 잘랐다. 나는 제이든 앞에서 그랬듯 입술을 삐죽거리려다 상대가 황후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볼 안쪽 살을 콱 깨물었다.

“내가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해야 할 거야.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불유쾌한 일이 벌어질 거라 미리 말해 두지.”

경고 한번 살벌했다. 나는 달달 외웠던 모범 답안을 단숨에 머릿속에서 지우고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예리한 눈빛이 뻔한 거짓말을 득달같이 잡아챌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황후 쪽으로 약간 상체를 기울였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제이든 님이 드디어 운명에 순응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번 무도회에 성의껏 참가하겠다는 의사도 내비치셨고요. 그리고 저는 전하의 보좌관으로서 그분의 완벽한 짝을 찾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짓으로라도 이런 말을 하게 되는 날이 오다니. 나는 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허벅지를 꼬집었다.

황후는 제이든이 중앙 시계탑 앞에서 춤췄다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인상을 썼다. 한마디로 그는 내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 애가?”

와, 저 가소롭다는 표정. 나는 오기가 생겨서 더욱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했다.

“황후 폐하께서도 제이든 님이 정략결혼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질색하신다는 걸 아실 테죠. 하지만 제가 지켜본 바로는, 사실 제이든 님은 정략결혼 그 자체를 싫어하시는 게 아니었습니다.”

황후가 조금 구미가 당긴 듯 고개를 까닥였다. 나는 속으로 믿지도 않는 신을 찾았다. 힘줘, 내 아무 말 대잔치 능력……!

“제이든 님은 그저 감정적 교류를 생략한 결혼을 꺼리시는 겁니다. 본디 일반적인 결혼이란 남녀가 서로의 호감을 인식하고 얼마간 동안 유대감을 쌓은 뒤 행하는 서약을 의미하죠. 제이든 님은 그 정석적인 단계를 밟고 싶어 하십니다. 누군가가 정해 준 상대가 아닌, 제이든 님이 직접 고른 상대와 말이죠.”

목이 타서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싶었지만, 황후의 심기가 별로 안 좋아 보여서 울며 겨자 먹기로 재빨리 덧붙였다.

“물론 제이든 님도 알고 계십니다. 황태자인 이상 결혼에 있어서 상대의 가문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말이죠. 그래서 이번 무도회에 기꺼이 참석하시겠다고 하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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