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38)

<68화>

“서론이 거창하군. 요지만 말하게.”

“제이든 님이 명단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 참석자들을 찾아가 오지 말라고 훼방 놓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죠. 무도회에 참석하는 미혼 영애의 수가 적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중 제이든 님과 잘 맞을 영애 한 명쯤은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죠.”

이쯤이면 필요한 밑밥은 다 깔아 놓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바쁘게 입을 놀리면서도 열나게 머리를 굴렸다. 황후가 믿을 법한 거짓말을 해야 했다.

“저는 제이든 님이 원하는 여성상을 잘 압니다. 따라서 참석자 개개인을 조사한다면 제이든 님이 흥미로워할 만한 상대를 추릴 수 있어요. 물론 폐하께서 원하시는 상대와 제이든 님이 고른 사람이 다를 순 있을 겁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선택권도 보장이 안 된다면 그분은 절대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을 겁니다. 그로 인해 더 큰 손해를 보는 건 폐하이실 거고요.”

그러니 상부상조하고 싶으면 당장 명단 달라, 이거야.

나는 당돌하게 고개를 쳐들고 황후의 눈을 직시했다. 황혼의 빛을 받은 눈동자가 순간 짐승의 안광처럼 번뜩였다.

“듣던 대로군.”

“네?”

“황제 폐하께 듣던 대로 입담이 아주 좋아. 그러니 이 질문에도 한 번 답해 보게. 신시아라는 아이를 알 테지? 얼마 전 제이든이 그 애와 절절한 이별을 했다던데…….”

긴장감에 머리끝이 쭈뼛 곤두섰다. 황후가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그 찰나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제이든이 그 애를 잊은 게, 확실하나?”

만약 제이든이 신시아를 잊지 않았다고 답한다면 지금껏 입 아프게 했던 말들은 다 무용지물이 되는 셈이다. 미련이 남아 있는데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건 제이든 성격에 절대로 불가능하니까.

우리 둘 다 그걸 알았다. 그래서 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네. 사실 이별 후유증도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그날 바로 제이든 님이 신시아의 행방을 조사하라 명령하시긴 했지만 아무리 조사해도 진척이 없었거든요. 수확 없는 날이 계속 이어지니 결국 포기하시더군요.”

포기는 개뿔. 제이든은 아직도 신시아를 잊지 못하고 날마다 할리를 닦달했다. 아, 왜 내가 아니라 할리냐고? 그건 제이든이 신시아 수색 업무를 오직 할리에게만 지시했기 때문이다.

굳이 나한테 맡기지 않는 이유는, 글쎄……. 내가 조사에 불성실하게 임할 거라는 걸 나도 알고 쟤도 알아서이려나. 나한테 신시아 추적 명령이 떨어졌다? 안 봐도 비디오다.

분명 나는 제이든이 진척 상황을 물을 때마다 이렇게 답할 것이다. 너저분한 책상을 이리저리 뒤지며 ‘아 분명 여기에 놔뒀는데 어디 갔지?’라고. 혹은 ‘사람 찾는 게 어디 쉽겠어요? 마음에 여유를 갖고 기다리세요. 그럼 언젠가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이런 식으로 태평하게 굴어서 제이든의 혈압을 올리겠지.

나는 가만히 황후의 결정을 기다렸다. 이 정도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지 싶었다. 황후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깊이 고심했다.

찻잔에 그려진 꽃의 개수를 세는 데 싫증이 났을 무렵, 마침내 황후가 나와 눈을 맞추었다.

“자네의 말을 다 믿는 건 아니네. 그러나 그럴싸한 말이 묘한 신뢰감을 준단 말이야…….”

황후가 그린 듯이 미소 지었다.

“내게 하나만 약속해 준다면 흔쾌히 명단을 주지.”

“무슨 약속이요?”

“그 만남이 최소한 세 번 이상으로 이어지도록 만들게.”

어차피 이미 제이든은 쇼맨십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는 내가 너무 쉽게 승낙해서 약간 당황한 눈치였다. 그리고 그게 허울뿐인 말이었나 싶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나는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각서라도 쓸까요?”

“……됐네.”

황후가 손짓하자 그의 시녀가 밀봉된 봉투 하나를 들고 왔다. 꾹꾹 눌린 실링 왁스에서 아무에게도 내용을 보여 주지 않겠다는 결의가 느껴졌다. 황후가 내게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행운을 빌지.”

그 말을 들으니 문득 얄밉게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데다가 서로 싫어하지만, 어찌 되었건 결국 가족이라는 걸까? 나는 꾸벅 인사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황후 궁을 나섰다.

세상에서 싹 사라지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기숙사 로비에 들어선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습관처럼 우편함을 확인했다.

“어랍쇼?”

편지 한 통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익숙한 봉투와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는 인장. 아로네의 편지다.

나는 편지를 손에 꼭 쥐고 바람처럼 계단을 뛰어올라 쓰러지듯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봉투를 뜯었다.

「유일한 내 편, 혜라에게.

먼저 이것부터 말할게. 난 괜찮아. 네가 걱정할까 봐 빈말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네가 떠난 후로 밤새도록 생각하고 고민했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앞으로 아버지와 데네브의 얼굴은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 사람들은 날 뭐라고 생각할까?

사생아로 낙인찍혀 버린 이상 내 평판은 바닥으로 떨어졌을 텐데. 전처럼 괜찮은 척 웃고 고아하게 굴 수 있을까? 내 친엄마라는 사람은 마녀라는 초월적 존재이면서 왜 나한테 오지 않았던 걸까?

내가 엄마의, 그러니까 공작 부인의 죽음과 정말로 관련 없는 걸까? ……정말?

네가 해 준 말들은 정말 다정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때는 마음에 와닿지 않았어. 알다시피 난 한계에 다다라 있었잖아. 그래도 네가 내 옆에 있어 줬다는 거, 그것 하나만으로 조금 위안이 되더라.

편지 받자마자 달려와 줘서 정말 고마워.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그때 네 몰골 장난 아니더라. 물론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근데 있잖아. 밤새 울고 악쓰다 보니까 결국 몸이 못 버티더라. 덕분에 며칠 내내 병상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던 것 같아.

불운은 한꺼번에 온다는 말 알아?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산더미 같은데 열은 펄펄 끓고, 머리는 깨질 것처럼 아프고, 더군다나 내 치부가 전국으로 퍼졌지.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로 떠나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 그런데 혼미한 의식 사이로 네 얼굴이 자꾸 떠오르더라. 현실에선 베키와 루나가 성심성의껏 내 간병을 하고.

조금 놀랐어. 그 애들이 그 정도의 충성심을 갖고 있는 줄은 몰랐거든.

앞으로도 너와 함께하고 싶다는 의지 덕분일까?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며 점차 머리가 명료해지는 걸 느꼈어. 그리고 깨달았지.

혜라, 네 말이 맞아. 내가 잘못한 건 없고, 난 언제나 더 나아지고 있어.

다시 웃게 될 거라는 네 말을 믿어. 너는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만드는 아이잖아. 그래서…… 어머니가 널 나에게 보내 주셨나 봐.

네 말을 믿고 한번 용기를 내 볼까 싶어. 난 지긋지긋한 ‘님프’로부터 벗어날 거야. 내 삶은 언제나 가십과 외로움의 연속이었어. 이젠 그것도 다 끝이야.

앞으로 난 독립할 계획이야.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 줄게. 연락 기다릴 테니 언제든 편지 줘.

애정을 담아

-아로네가.」

나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답장을 썼다. 어쩐지 조금 눈물이 나올 것도 같았다.

***

도대체 이게 몇 번째 퇴짜지? 야심 차게 준비한 보고서는 제이든 손에 5분도 못 머무르고 내게 돌아왔다. 나는 터덜터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할리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속삭였다.

“또?”

나는 대답할 기력도 없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할리가 동정의 눈빛을 던지곤 다시 업무에 몰입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나 못지않게 어마어마한 폭탄을 안고 있으면서도 내게 보낼 안쓰러움이 있다니.

나는 일이 잘 안 풀리는 듯 머리를 싸맨 할리를 측은하게 쳐다보다가, 책상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내가 내 무덤을 팠지…….”

계약 연애 상대를 찾는 일이 순조로울 거라고 생각했다니 과거의 난 참 순진했군. 나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온 한숨을 쉬었다.

무도회에 참석하는 미혼 여성은 40명 남짓했다. 처음 명단을 봤을 때 생각보다 많은 숫자라서 조금 놀랐다. 그러나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갖고 있으면 주저 없이 리스트에 추가한 걸 알고 납득했다.

다행히 신상 조사는 생각했던 것만큼 어렵지 않았다. 합법 정보 길드에 의뢰하고 조사 결과를 기다리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보다 순조로운 조사에 신나 열심히 후보를 추렸건만, 결과는 처참했다.

“제대로 추린 거 맞나?”

“당연하죠.”

사실이었다. 본디 완벽한 계약 상대란, 제이든이 손쉽게 휘두를 수 있도록 여린 성정과 한미한 배경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단호한 틀은 거침없이 후보를 골라냈다.

이런 생각이 인간성 없다고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이게 실패하면 나는 아로네과 제이든을 이을 오작교가 돼야 했다. 그러니 나로선 어쩔 수 없었다.

제이든은 보고서를 돌려주며 말했다.

“네가 2순위로 고른 클라크 영애를 보면 제대로 안 한 것 같은데. 그의 아비가 얼마나 야욕 넘치는지 모르나 봐?”

이기죽거리는 말투가 얄미웠다. 사실 그의 말이 맞다는 걸 알아서 더욱 짜증 났다.

그래. 야먕가 아버지를 두면 절대로 계약 연애에서 그치지 못하고 자의든 타의든 그 계약이 현실로 이루어지길 바라겠지. 여러 경우의 수를 고려하지 못한 내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나는 실패를 거름 삼아 두 번째 보고서는 더욱 철저히 조사했다. 제이든이 조사할 때 쓰라고 던져 준 돈을 각 가문의 하녀를 매수했는데 썼으니 이번에는 더 정확도가 높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해 와.”

“왜요?”

이번에는 정말 자신 있었는데. 내 억울한 낯을 바라보며 제이든은 냉소했다.

“왜냐고? 페레즈 영애는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나한테 혈서를 보낸 적이 있거든. 그런데 1순위라고?”

“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