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요즘 부쩍 밤공기가 쌀쌀해져서 그냥 방에 있고 싶은데. 내가 시큰둥해하자 레이는 미리 핑곗거리를 생각해 둔 것처럼 재빨리 덧붙였다.
“전에 체력 달린다고 앞으로 운동해야겠다고 말했었잖아. 소화도 시키고 운동도 할 겸 조금 걷자. 어때?”
레이가 얼굴을 쑥 들이밀곤 눈을 반짝였다. 미인계를 쓸 거면 제발 예고 좀 하고 했으면 좋겠다. 가까이에서 본 이목구비가 천상의 것이라 심장에 해로웠다.
나는 고개를 뒤로 쑥 빼며 레이의 어깨를 약하게 밀었다.
“어우. 알겠으니까 얼굴 좀 치워.”
“간다는 거지?”
레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어휴, 저 능구렁이. 나는 괜히 민망해져서 할리에게 툴툴거렸다.
“너도 가?”
“나도 같이 가냐고? 무슨 그런 큰일 날 소리를. 둘이서 가. 난 먼저 들어가 볼게.”
할리가 짜게 식은 눈으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바람을 타고 그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가운데에 낀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냐는 투정을 뒤로하고, 나와 레이는 낯익은 풍경 속으로 나아갔다.
우리의 산책 코스는 보통 기숙사 입구를 시작으로 중앙 시계탑을 거쳐 황태자 궁 근처 가로수 길을 전환점으로 삼았다.
질리도록 익숙한 궁의 외관이 어렴풋이 보이고, 한창 공사 중인 식물원을 지날 때 즈음 나는 별안간 기이한 느낌을 받고 우뚝 멈춰 섰다. 옅은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내 보폭에 맞춰 걷던 레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뭔가 이상한데.”
“뭐가?”
그 무엇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겠어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질감이 식물원에서 느껴진다는 것이다. 뭐지? 오늘 출퇴근 때는 이런 느낌 없었는데.
“비웃으면 안 된다?”
“내가 어떻게 네 말을 비웃겠어.”
다른 사람 같았다면 영혼 좀 담아서 말하라고 타박했을 말이었다. 그러나 레이는 굳이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이미 목소리에서 나한테 진심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게 좀 겸연쩍어서 나는 부러 식물원에 시선을 고정했다.
“식물원에 귀신이 씌었나 봐.”
“귀신이 뭐야?”
아, 여기 애들은 유령이라고 불렀던가.
“난 유령을 그렇게 불러. 분명 퇴근할 때는 이런 느낌 없었는데 이상하네.”
“어떻게 다른 거 같아?”
레이가 눈에 이채를 띠고 물었다. 왜 저러는 거지?
나는 의구심을 느끼며 순순히 답했다.
“왠지 숲 냄새가 나는 거 같은데? 흠, 귀신 씐 것치고는 싸한 느낌은 없네.”
레이가 느릿하게 앞머리를 넘기곤 눈을 맞췄다.
“여러모로 특별하다, 너.”
“어?”
살짝 헝클어진 머리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나머지 일부러 의도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완벽한 흐트러짐을 탐미하듯 바라보았다.
“언젠가 네 기운이 맑다고 말했던 거 기억나?”
“……어. 근데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사이비인 줄 알고 지레 겁먹었던 과거가 번쩍 떠올랐다. 레이가 내 코끝을 툭 건드리곤 말했다. 계량할 수 없는 애정이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무도회 준비에 정령술사가 대거 동원됐거든. 식물원을 무도회장으로 사용하겠다는 황후의 포부 덕분에 저 안에서 내 동료들이 갈리고 있지. 바로 몇 시간 전부터.”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서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누가 봐도 이해하지 못한 사람 같았는지, 레이가 핑거 스냅 한 번으로 땅의 정령을 불러냈다.
해바라기 머리핀을 단 정령이 그의 키만 한 나무 막대기를 늠름하게 휘둘렀다. 나는 그 깜찍한 재롱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레이에게 집중했다.
“정령술사가 대거 동원되었다는 건 무색무취로 존재하던 정령이 그들에 의해 실체화되었다는 걸 의미해. 그래서 네가 그런 느낌을 받은 거야. 정령이 내뿜는 기운이 있으니까.”
“어쩐지.”
“그런데 그걸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 심지어 상급 정령술사 중에서도.”
“와우.”
점집에 갈 때마다 약간 신기가 있다는 말을 지겹도록 듣긴 했지만 정령의 기운까지 느낄 정도로 감이 좋을 줄이야. 나, 도대체 못 하는 게 뭐지?
레이가 신이 나서 말했다.
“이게 함의하는 바는 둘 중 하나야. 너한테 정령술사로서의 재능이 있거나, 아니면 네 타고난 감이 뛰어나거나. 그러니까 혜라, 나한테 정령술 한 번 배워 보지 않을래?”
레이는 그 말을 하게 되어서 무척 기뻐 보였다. 그는 내가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줄 알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마음 같아선 나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미안. 내가 정령술 쪽으로 재능이 하나도 없다는 건 명백해서 말이야.”
레이는 눈에 띄게 아쉬워했다. 그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재차 물었다.
“확실히 없는 거 맞아?”
“확실히 없어.”
잉여처럼 놀던 시절, 정령을 불러내려고 수백 번 시도해 봤다. 아로네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정령술 이론서를 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꽝이었다.
“아쉽다. 너랑 같이 있을 핑계가 생기려던 참이었는데.”
비 맞은 개처럼 풀 죽은 모습이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가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 놀랐다. 방금 뭐냐 강혜라? 미쳤어? ……아니, 내가 미친 게 아니라 필시 저 해로운 외모 때문일 거야. 그렇고말고.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네 동료들이 저기서 죽어 나갈 동안 넌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
“내일은 내가 죽어 나갈 테니까 괜찮아.”
“와, 불세출의 천재님도 죽어 나갈 정도면 일이 많이 빡센가 봐?”
나는 실실거리며 레이의 팔을 툭 쳤다. 그가 오른쪽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황후가 이번 무도회에 심혈을 많이 기울였더라고.”
“당연하지. 신시아도 떠났고 아로네랑도 완전히 쫑났으니 사실상 이게 마지막 기회잖아.”
나는 무도회에 대해 몇 마디를 더 얹으려다가 오랜만에 ‘신시아’를 발음하자니 생각나는 얼굴이 있어서 악동처럼 웃었다. 레이가 불안한 듯 시선을 피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별건 아니고, 제이든이 아직도 신시아를 못 잊고 찾아다닌다는 거 알까 싶어서.”
레이가 짜증스레 인상을 구겼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예상은 했었어. 근데 지금까지 그럴 거라곤 생각 못 했네.”
귀를 가까이 대라고 손짓하자 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언젠가 맡았던 희미한 비누 향이 여전히 포근해서, 하마터면 비누 정보를 물어볼 뻔했다. 나는 겨우 본 목적을 떠올리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신시아 얘기만 나오면 걔 완전 또라이처럼 굴어. 말하는 건 멀쩡한데 눈이 돌아있는 거 있지.”
“그래? 신시아가 잡히면 큰일 나겠는데?”
레이가 몹시 안타깝다는 투로 얘기했다. 우리는 동시에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한바탕 웃었다. 멘트 좋았다는 칭찬을 건네자 레이는 한 건 했다는 듯 만족스레 미소 지었다.
“근데 있잖아. 전에 보니까 데네브도 무슨 비련의 남자 주인공처럼 굴던데……. 걘 어떻게, 잘 정리했어?”
“나는 잘 정리했다고 생각해.”
“아, 걔가 괜찮은지는 모르겠고?”
레이가 긍정의 의미로 눈썹을 들썩였다. 데네브도 사람을 풀어 신시아의 행방을 조사할까? 그때 답지 않게 골골거리던 게 생각나서 기분이 묘했다.
“에단이랑도 꽤 친한 사이였잖아.”
“신시아가 그랬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 환상적인 외모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지.
나는 얼마 전 아로네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아로네의 판단을 믿자는 결심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내가 에단에 대해 아는 게 단 한 개도 없어서 말이야…….
나는 서론 따위 싹둑 잘라 버리고 대뜸 물었다.
“어떤 애야?
“걔는 왜?”
레이가 방어적으로 말했다. 경계 어린 눈빛을 보자니 왠지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제이든이나 데네브는 꽤 잘 안다고 할 수 있는데 걔는 아니니까. 그리고 잘생겼잖아. 그것도 환장하게.”
레이가 배신당한 사람처럼 입을 가렸다. 그러나 눈동자에는 이유 있는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마치 ‘난 네가 내 얼굴을 좋아한다는 걸 알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보다 걔가 잘생겼어?”
나는 심각하게 고민하는 척을 했다. 고뇌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레이의 얼굴에선 여유가 사라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저렇게나 초조해할까? 나는 픽 웃으며 그의 팔을 건드렸다.
“그냥 장난친 거야 이 바보야. 무슨 그런 시답잖은 이유로 갑자기 남을 궁금해하겠어, 내 성격에. 앞으로 아로네가 사업 하나를 할 생각인데 에단이랑 손잡았다고 해서 한번 물어본 거야. 내가 그 애에 대해 아는 건 성질 더럽다는 것밖에 없거든.”
순식간에 얼굴색이 밝아졌다. 레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다 감탄으로 노선을 틀었다.
“잠깐, 공녀가 사업을 한다고? ……그럼 그때 정말 진심이었나 보네.”
대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긴 속눈썹 아래로 빛바랜 과거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무슨 소리야?”
“말 안 해 줬어? 신시아가 저택을 떠나던 날, 아로네가 사죄의 뇌물인지 적선인지 모를 것을 줬는데.”
“뭐? 처음 듣는 얘기야!”
순간 우리가 같은 인물을 말하고 있는지 헷갈렸다. 레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여상하게 말했다.
“별거 아니야. 한밤중에 조용히 나가려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대뜸 나타나서 그러더라. 정령술 잘한다는 거 하나로 바깥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 같냐고, 의식주 해결할 돈은 있냐고. 마지막으로 시비 거려는 건가 싶었는데 보따리 하나를 던져 주더라. 보석과 금화가 잔뜩 든 보따리를 말이야. 그리고 말 걸 틈도 없이 사라졌어.”
“진짜로?”
“진짜로. 툴툴거리는 말투는 여전했지만 그 내용이 전이랑 딴판이라서 놀랐었어. 날 인정해 준 것도, 사과를 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고. 물론 그걸 사과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야. 직접 묻진 못했지만 그 애가 과거를 털어 버렸다고 내심 짐작했지. 근데 오늘 네 말 들으니까 정말 그런 거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