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나는 놀라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런 기특한 짓을 했을 줄이야. 왜 아로네가 나한테 말을 안 했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라 딱히 서운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 애, 자존심 하나만큼은 세계 서열 0위였으니 아무에게도 그 사과 비스무리한 행동을 들키고 싶지 않았을 테다.
아마 사죄라고 하기엔 너무 당당한 태도가 아로네에겐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뭐, 옛날에는 결코 하지 않았을 행동을 지금은 한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닐까?
당장이라도 아로네에게 달려가 말하고 싶었다. 나는 네가 신시아에게 한 말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애가 질색할 게 뻔하기 때문에 그건 내 상상에서 그치고, 대신 레이에게 물었다.
“그렇게 아로네가 사라지고 나서 무슨 생각 했어?”
레이는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그가 담백한 어조로 말했다.
“역시 사과는 돈으로 하는 게 최고라는 생각?”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푸릇푸릇한 가로수 길 위로 노을이 내려앉았다. 선심 쓰듯 떠난 산책이라기엔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화기애애한 오후였다.
***
출근하는 길에 우편함을 확인하니 로빈의 편지가 와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하려면 10분 정도 남았다. 나는 그사이를 못 참고 봉투를 뜯었다. 호기심이 동한 할리가 고개를 들이밀고 같이 편지를 읽었다.
귀여운 필체가 마지막 온점을 찍고 나서야 할리는 말했다. 혹여 누가 들을까 봐 목소리는 잔뜩 낮춘 채였다.
“너 불법 길드에 의뢰하려고? 길드 하나를 부숴 버린 애가?”
“야, 뇌물까지 먹였는데 불법 길드가 대수겠어?”
“그래도…….”
나는 할리의 입을 틀어막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말린다고 말려지지 않을 거니까 괜히 힘 빼지 마.”
“그럼 제이든 님한테 뭐라고 말하게? 지금 남은 돈으로 의뢰 맡기기엔 좀 많이 부족하잖아!”
“어쩌긴? 당연히 돈 더 달라고 말해야지.”
할리는 너무 기가 막혀서 입도 제대로 못 다물었다. 나는 살포시 그의 입을 닫아 주고 얼빠진 그를 앞서 걸었다. 등 뒤에서 한 서린 신음이 들렸다. 할리가 후다닥 달려와서 다시 한번 변론을 시도했다.
“진심이야? 이미 뇌물로 뿌린 돈만 해도 꽤 되는데 과연 더 주실까?”
“할리야, 인생 뭐 있니? 일단 저지르고 보는 거지.”
할리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나를 착잡하게 내려다보았다. 결국, 그는 질끈 눈을 감고 제 이마를 콩콩 두드렸다.
“내 팔자야. 어쩌다 이런 애를 동료로 만나선…….”
내가 의기양양하게 사무실 문을 두드릴 때, 할리는 되레 자기가 전전긍긍했다.
이럴 때마다 우리의 차이점이 두드러졌다. 기본적으로 둘 다 털털하고 단순한 성격이지만 할리는 도전과 위험을 가능한 최후로 미루려고 했고, 나는 그 도박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이것저것 재지 않고 바로 부딪쳤다.
설사 일이 틀어진다 한들 요령껏 잘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은 내게 하늘을 찌를 듯한 자신감과 자존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나는 안부를 묻듯 산뜻하게 돌직구를 날릴 수 있었다.
“제이든 님, 제가 생각을 해 봤는데 길드에 한 번 더 의뢰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내키지 않으시겠지만 이번에는 불법 길드에 찾아가 보려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
제이든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무도회까지 2주도 안 남았는데 아직도 마땅한 계약 연애 상대를 찾지 못해서 요즘 그의 신경은 칼날보다 더 날카로웠다.
“이제 와서 또 길드 의뢰를 하겠다고. 그럼 저번에 한 건 뭐지? 돈 낭비?”
제이든은 일평생 시키는 입장이었으니 그동안 내가 제이든의 계약 연애 프로젝트를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르겠지? 그러니까 저런 신경질 난 표정을 지울 수 있는 거고.
나는 화를 가라앉히느라 침묵했다. 하지만 제이든은 굳이 인내할 필요가 없어서 빈정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자신 있게 날 설득하길래 기대했건만, 다 거품이었군. 도대체 그동안 뭘 한 거야?”
나는 입술을 꾹 말아 넣었다. 왜 내 탓을 하는지 모르겠네. 분명 마지막 보고서에서 1위를 차지한 한나 레인즈는 누가 봐도 완벽한 계약 상대였는데, 그걸 차 버린 사람은 당신이잖아.
적당한 계급, 욕심 없고 온순한 성정, 원만한 인간관계, 고상한 취미. 이 정도 조건이면 황제, 황후도 만족했을 테고.
게다가 남몰래 양치기와 열렬한 사랑을 나누고 있는데 결혼 압박을 받고 있대. 그럼 둘 다 상부상조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닌데 그걸 굳이 차 버린 이유가 뭐였지?
……아, 생각났다.
한나가 양치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저 그가 사는 곳이 깡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볼거리 많은 수도에 상경하고 호화로운 궁에 머물며 화려한 무도회에 참석하면 그 영원할 것 같던 애정도 사라질 것이다.
대충 이런 논리였던 거 같다. 그때 제이든은 진지했지만 사실 난 아직도 긴가민가하다. 자기가 뭔데 남의 감정의 크기를 함부로 재단해?
나는 삼천포로 빠진 정신을 낚아채 현실로 내동댕이쳤다. 뭐라고 말해야 제이든이 진정하고 얌전히 돈을 줄까? 지금 쟤가 저렇게 씩씩거리는 건 순전히 일이 원하는 대로 안 풀려서 그러는 거다.
내가 계약 연애를 제안할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일사천리일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그래서 결국 또다시 부모님의 강매에 못 이겨 약혼을 하게 될까 봐.
“제이든 님, 불안해요?”
“……뭐?”
나는 카페 알바생이었던 시절을 떠올렸다. 내가 그때 어떻게 웃었더라.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제가 사람 뒤 캐는 걸로 유명한 길드 하나를 알거든요. 며칠만 기다리면 여태껏 조사했던 것보다 더 자세하고 은밀한 정보를 알 수 있을 거고, 그럼 정말 완벽한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아, 혹시 제가 너무 당당하게 범법을 저지르자고 해서 당황하셨나요? 하지만 제이든 님이 안심할 수 있는 상대를 찾으려면 이게 최선이에요.”
그러니까 네가 선택해. 쫄리면 그냥 한나랑 계약하는 거고.
들고 있는 깃펜에서 잉크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도 그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만큼 제이든은 넋을 놓고 내 반항적인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할리의 말대로 확실히 내가 미치긴 했나 보다. 그러니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굴지. 그러나 3주 내내 독촉을 받으면 누구라도 정신 줄을 살짝 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속으로 애국가 3절까지 제창했는데도 제이든은 여전히 멍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요?”
“……하.”
제이든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가 말없이 서랍을 뒤지더니 대뜸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훌륭하게 잡아챘다. 짤랑거리는 동전 소리가 들렸다.
“동의하시는 거죠?”
제이든이 잉크로 더러워진 양피지를 구겨 버리고 새 걸 꺼내 들었다. 그가 양피지에 무어라 휘갈기며 말했다.
“마지막 기회야. 확실하게 신원 가리고 내가 만족할 만한 결과 들고 와.”
“라져 댓.”
“라져…… 뭐? 아니, 됐다. 그냥 나가.”
나는 설명하기 위해 입을 떼었다가 시무룩하게 등을 돌렸다. 쟤는 왜 나만 보면 환멸 난다는 티를 잔뜩 내지? 이거 완전 적반하장 아닌가?
***
지금 내 가방 안에는 돈주머니가 들어있다. 황태자 궁에서 날 해칠 사람은 없을 텐데 괜히 심장이 콩닥거리고 신경이 예민해졌다. 나는 코너 하나를 돌 때마다 벽에 등을 딱 붙이고 첩보 요원 흉내를 내었다. 할리는 내 생쇼를 해탈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풍선이 터지듯 빵 터져 버렸다.
“어우 그만 좀 해!”
“아, 왜! 재밌잖아.”
나는 낄낄거리며 할리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할리가 지긋지긋하다고 불평하면서도 허리를 숙여 줬다.
나만 편한 자세로 궁을 나왔다. 일하면서도 언뜻언뜻 느끼긴 했지만 바깥으로 나오니 풀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나는 아무 생각 없는 할리를 힐긋 쳐다보고 잠시 고민했다.
“레이 잠깐 보고 갈래? 걔 오늘 식물원 담당이래.”
“웬일이야, 네가 걔를 챙기고? 혹시…….”
나는 할리의 입을 잡아 뜯었다. 할리가 비명 대신 팔을 허공으로 붕붕 휘저었다. 그를 풀어 주고 가만히 바라보자 입술 주변이 벌겠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그런 거 아니거든?”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선연했다. 할리가 양팔을 들어 올리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네 말이 다 맞아. 근데…… 나 갑자기 사무실에 놓고 온 게 생각났어. 기다리지 말고 레이랑 먼저 가!”
“야, 잠깐만. 야!
내가 미처 잡아챌 새도 없이 할리는 잽싸게 달아났다. 나는 머쓱해진 손을 내리고 점점 작아지는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하여간 김할리, 쓸데없이 눈치가 빠르다. 물론 레이 눈빛이 뻔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뭐. 자기가 무슨 큐피드라도 되겠다는 거야?”
나는 다리를 까닥이며 고민하다가 결국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식물원으로 향했다.
식물원은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져서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워낙 나무와 넝쿨이 많아서이기도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대박…….”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광활한 공간 안에 낯익은 혹은 처음 보는 정령들이 가득했다. 나는 범고래 정령이 내 머리 위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나는 감탄하며 식물원을 더 자세히 관찰했다.
식물원 한편에는 작은 호수가 조성되었고, 그 주위로 색색의 꽃들이 활짝 펴 있었다. 유리 천장을 통해 들어온 오후의 햇살이 나무 잎사귀에 밝은 오점을 만들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감탄을 자아내는 예쁜 꽃이 활짝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