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야외 테라스로 향하는 유리 통로 주위로 장미 넝쿨을 휘휘 두른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든 것은 꺼지지 않는 램프였다. 꽃 모양으로 타오르는 불길은 정령의 힘이 분명했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도대체 레이는 어디 있는 거야?’
나는 마침내 본래 목적을 상기하고 바쁘게 눈을 굴렸다. 하지만 샅샅이 뒤져도 수많은 머리통 사이에서 빛나는 금발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퇴근했나? 포기하고 나가려던 찰나, 테라스 통로에서 반가운 얼굴이 걸어왔고 눈이 마주쳤다.
동료에게 사무적으로 대답하던 레이가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졸지에 홀로 남겨진 동료는 레이의 등을 황망히 응시했다.
“설마 나 보러 온 거야?”
“같이 퇴근할까…… 싶었는데 아직 일이 남았나 보다, 너?”
나는 레이 등 뒤의 남자를 곁눈질했다.
“아니야, 마침 퇴근하려던 참이었어.”
“정말?”
남자의 애절한 눈빛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신경 쓰였다. 레이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문을 활짝 열었다.
“그렇대도. 자, 가자.”
본인이 괜찮다니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기숙사로 가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 주제는 어제 못다 한 이야기―에단이 나와 데네브를 섞어 놓은 느낌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끔찍한 혼종이라며 질색을 표했다―를 거쳐서 길드로 흘러갔다.
나는 그제야 로빈에게 길드 추천을 받지 않아도 됐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앞에 경험자가 있는데 뭐 하러 먼 길을 돌아간 거지?
레이가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내가 같이 가면 안 될까? 가는 길이 위험해.”
“왜? 거기가 네가 갔던 곳이야?”
“응.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지.”
의뢰금이 비쌌다는 걸까, 아니면 그 과정이 험난했다는 걸까? 나는 걱정으로 가득 찬 눈앞의 남자에게 씩 웃음을 지어 주었다.
“걱정 마. 제이든이 준 돈은 과하게 충분하고, 네가 준 스크롤이 아직도 한참 남아 있거든.”
“혜라, 그곳이 위험하다는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널 그냥 보낼 수 있겠어?”
레이는 처음으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럴 애가 아닌데 저러는 걸 보니 밤의 이노피아가 확실히 위험하긴 한가 보다.
“걱정해 줘서 고마운데, 마음만 받을게. 신원 숨기고 그림자처럼 갔다 와야 하는데 너는 너무 눈에 띄잖아. 애초에 내 일이었고.”
“나 아직 변신 물약 남았는데도?”
소심하게 하는 반항이 제법 귀여웠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단번에 일축했다. 그러자 레이는 일단 한발 물러나겠다는 듯이 한숨 쉬었다.
“잠깐,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몰래 쫓아오면 진짜 내 손에 죽는다. 알겠지?”
“……알았어. 그냥 무사히 갔다 오겠다고 약속만 해 줘. 응?”
찔린 표정을 보니 속으로 그런 앙큼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구만. 나는 레이에게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 뒤에야 새침하게 대꾸했다.
“야, 그렇게 약속하면 꼭 뭔 일 생기는 거 알지?”
“정말 약속 안 해 줄 거야?”
레이가 울상 지었다. 나는 웃음을 터뜨리곤 팔목에서 머리끈을 빼냈다. 그리고 레이 손에 쥐여 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거 내가 제일 아끼는 머리끈이거든? 내일 꼭 되찾으러 올 거니까 잘 보관하고 있어. 그럼 됐지?”
나는 조금 멍한 표정의 그를 툭 치곤 여자 기숙사 쪽으로 걸어갔다. 네 발자국 걷고 힐끔 뒤를 돌아보니 피식 웃으며 머리끈을 만지작거리는 얼굴이 보였다.
2실버짜리 머리끈이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양 소중하게 품에 넣는 모습이 어쩐지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
하기 싫은 일을 앞에 뒀을 땐 어쩜 그리 시간이 빨리 가는지. 야심한 시각, 나는 로브를 푹 눌러쓰고 황궁을 빠져나왔다.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가 고요한 거리의 적막을 깨뜨렸다. 나는 품 안에 간직한 주머니를 목숨 줄처럼 붙들었다. 이거 잃어버리면 내 목숨도 같이 사라지는 거다. 비유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뻥 뚫린 도로는 주행 시간을 절반으로 단축시켜 주었다. 나는 이노피아로 넘어가는 경계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좋아, 이 선을 넘는 순간부터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어두운 골목 곳곳에 희생양을 기다리고 있는 승냥이 떼가 있다는 걸 잊지 마.’
나는 신발 밑창 아래와 양말 사이, 그리고 로브 주머니에 고이 넣어 놓은 스크롤을 재차 확인했다. 소매 사이에 숨겨 놓은 단검의 날카로움도 여전했다.
“지금부터 강혜라는 세계 서열 1위다. 후, 좋아. 아무도 플라스마 제국 짱인 날 건드릴 수 없어.”
나는 자기 암시하듯 중얼거리며 이노피아에 입성했다. 과대망상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날 감싸는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았다. 나는 부러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
마약에 취해 거리에 널브러져 있던 노숙자 한 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등 뒤로 쥔 깨진 유리병 조각이 위협적이었다.
전율하듯 돌연 눈을 빛내며 행동을 개시한 사람은 노숙자뿐이 아니었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뱀들이 입맛을 다시며 오직 한 곳을 응시했다.
나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살의를 묵묵히 받아내며,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때 노숙자가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그가 유리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음습하게 물었다. 조각의 끝이 칼처럼 첨예했다.
“여기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오셨나?”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깔았다. 처음 들어보는 걸쭉한 목소리가 성대를 타고 흘러나왔다.
“알 바 아닌 거 같은데.”
“내 알 바라서 말하는 거야, 이 덜떨어진 놈아. 여긴 통행세라는 게 있거든.”
“아, 그래? 그럼 얼마나 내야 하지?”
노숙자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나는 끔찍한 악취를 맡고 인상을 찌푸렸다.
“글쎄……. 한 15골드면 적당할 거 같은데.”
양아치가 따로 없네. 하루빨리 이노피아가 어떤 식으로든 해결될 필요가 있겠어.
나는 돈을 꺼내는 척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어떤 스크롤을 써야 할까?
아슬아슬한 시야 너머로 통행세 구실로 날 강탈하려 하는 또 다른 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시선을 옮겨 남자를 응시했다.
“애송아, 이 형님 손 떨어지겠다.”
댁 같은 형님 둔 적 없는데 뭔 소리람. 나는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15골드가 없는데 어쩌지?”
남자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팔을 높이 쳐들었다.
“아, 이래서 애송이들이 싫다니까. 좋은 말로 할 때 가진 거 다 내놔.”
나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가진 걸 줘도 괜찮아? 진심으로?”
“뭐?”
남자가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벙한 표정을 지은 것과 동시에 나는 고심 끝에 고른 스크롤을 찢었다. 그 찰나에 상황 파악을 마친 남자가 손가락질을 했다.
“너, 너……!”
남자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스크롤이 완전히 두 동강 나는 순간, 남자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멀리 날아갔기 때문이다.
뚝. 어디선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러게 건드릴 사람을 건드려야지.”
나는 주위를 싹 훑으며 혼잣말하듯 경고했다.
“스크롤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까? 써 보고 싶은 게 너무 많네…….”
이쪽으로 다가오던 무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각양각색의 흉기가 인상적인 그룹이었다.
나는 비죽 웃으며 스크롤 두 개를 한꺼번에 찢었다. 불길과 돌풍이 합체하여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어둠 속 유일한 불빛은 비명과 함께 구석으로 사라졌다.
스크롤 세 개를 쓰고 나니 마음 편히 걷을 수 있었다. 나는 로빈이 그려 준 약도를 따라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물론 도중에 만난 인연이 참 많았지만 고급 스크롤은 눈 깜짝할 사이에 길을 깨끗이 치워 주웠다. 스크롤 이거, 정말 복덩이가 따로 없다. 나중에 레이한테 밥 한번 거하게 사야겠네.
한참을 걷던 나는 허름한 간판 앞에서 멈춰 섰다. 나는 나무판자에 대충 휘갈겨진 문구를 보고 실소했다.
“영원한 비밀?”
길드한테 영원한 비밀이 어디 있어. 비밀로 먹고사는 조직의 이름이 영원을 논하고 있다니. 참으로 훌륭한 반어법의 예시였다.
나는 조금 겁먹은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밤 일어날 모든 일을 감추어 주겠다는 듯 밤의 전등은 안개에 가려 그 빛이 흐릿했다.
“까짓것 한번 해 보지, 뭐.”
당차게 문을 열자 지하로 내려가는 긴 계단이 보였다. 깨진 전등이 바람을 맞고 위태롭게 흔들렸다. 뭐야, 공포 게임 퀘스트 깨는 것도 아니고.
나는 벽면을 짚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 뒤 내부로 이어지는 또 다른 문을 열었다. 깜깜한 어둠이 등 뒤로 사라지고 따뜻한 주홍빛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나는 그럴듯한 칵테일 바를 보고 감탄했다.
술집 안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짜고 치는 것도 아니고, 모두 몸에 흉터 하나씩은 달고 있어서 절로 경계심이 솟아올랐다.
나는 바 앞에 앉아 바텐더를 불렀다. 서글서글한 인상이 이곳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친절하게 물었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로빈은 그랬다. 의뢰하고 싶다는 말을 나타내는 은어가 있다고.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들으면, 정오에 하는 말은 누가 듣나?”
내 평생 이런 마피아스러운 말을 하게 되는 날이 오다니. 나는 기묘한 흥분과 긴장을 느꼈다. 바텐더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열쇠 하나를 건넸다.
“왼쪽 문으로 나가 복도를 걷다 보면 화장실 옆에 창고 하나가 있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곤 바를 가로질렀다. 노골적이진 않으나 은근해서 오히려 더 불편한 시선이 등 뒤로 따라붙었다. 나는 짜증스레 문을 닫고 층계와 달리 불빛이 잘 들어오는 복도를 걸었다.
“흠, 이 문만 열면 길드장을 만날 수 있는 건가?”
나는 일단 회색 철문 손잡이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 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