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38)

<76화>

나는 평소와 같은 냉정한 상태로 돌아와 편지를 쓱쓱 써 내려갔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모조리 제외하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뻔했다.

우리가 보내 준 마차를 타고 약속 장소에 오지 않으면 네가 숨기고 있는 비밀이 부모님을 포함한 세상에 밝혀지게 될 거라는 내용.

솔직히 치명적 비밀을 쥐고 있다는 것 하나로 사람을 좌지우지하려는 행동에 깊은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압박을 주지 않으면 벨라가 수상한 편지를 그냥 불쏘시개로 써 버릴 것 같았다.

물론, 벨라가 지레 겁먹고 도망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협박성 짙은 멘트와 함께 금전 거래를 암시하는 표현도 군데군데 집어넣었으니, 안타레스의 서류가 말했듯 벨라가 정말 호전적이고 대담한 성격이라면 분명 마차를 탈 것이다.

그렇게 소망하며 나는 급서를 부쳤다.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

일방적으로 벨라에게 약속을 통보한 날이 왔다. 제이든은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건지 아침부터 정신없어 보였다. 신시아가 떠난 후로 처음 보는 어수선함이었다.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갈수록 제이든의 심기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솔직히 조금 걱정될 정도였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벨라를 휘어잡고 유리한 계약을 할 수 있겠는가?

미운 정도 정이라고, 나는 퇴근을 30분 앞두고 제이든에게 조언을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제이든 님, 악담하려는 건 아닌데 그렇게 긴장하시면 잘될 일도 잘 안 되겠어요. 조금만 마음에 여유를 갖고 디아즈 영애에게 할 말을 정리해 보세요. 아니면 퇴근 전까지 저랑 같이 예행연습을 해 볼까요?”

제이든한테 너무 친절한 것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다행인 점은 이 정도가 내 한계라는 거다. 나는 멀뚱멀뚱 서서 제이든의 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제이든이 의아하게 반문했다.

“무슨 소리야? 너, 나랑 같이 갈 거라고 내가 말 안 했던가?”

그걸 알았으면 내가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호의를 베풀었겠니?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네. 방금 처음 알았네요.”

“이제 알았으면 됐네. 야간 수당 챙겨 줄 테니까 같이 가.”

야간 수당이라고? 제이든이 싹수는 없지만 경우가 없는 애는 아니라서 다행이다. 덕분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럼 기꺼이 같이 가야죠. 저녁 먹고 다시 오면 될까요?”

“……참 한결같군.”

제이든이 그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표정을 지었다. 징글징글하다는 시선을 받으면서도 나는 해맑게 웃었다. 하하, 이런 취급 한두 번도 아니고 돈만 많이 벌면 됐지!

***

예정에도 없는 야근 때문에 친구들과 약속했던 보드게임도 못 하게 되었다.

나는 후다닥 저녁을 먹고 바쁘게 황태자 궁으로 향했다. 그런 나를 할리는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그리고 레이는 속상하면서도 아쉽다는 눈빛으로 배웅해 줬다.

황태자 궁 뒷문으로 가자 제이든의 호위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질리도록 마주쳤지만 아직도 어색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숨 막히는 침묵 속, 그는 나를 처음 보는 마차로 데려갔다. 몰래 나가는 거라 그런지 대여 업체의 것처럼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기사가 마부석 쪽으로 가는 걸 흘깃 보고 마차에 올라탔다.

제이든은 이미 마차에 타 있었다. 그가 왔냐는 듯 눈썹을 까닥이곤 보고 있던 서류에 다시 집중했다.

얼마나 중요한 서류길래 퇴근 후에도 보나 싶어서 몰래 훔쳐보자 요즘 윗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쉬쉬하고 있는 이슈에 관한 보고서였다.

내 상사가 제국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사람이라 나도 그게 무슨 일인지 대충 안다. 그건 제국에 귀속된 어느 원주민 부족에 관한 이야기였다.

‘크바리엣’이라 불리는 그 부족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이 땅에 살았다. 그들은 제국 최북단에 위치한 ‘더스크번’에 머물며 그들만이 할 수 있다고 알려진 일을 했다.

바로 치료 물약을 만들 때 필수적인 ‘데이타스’을 채집하는 것이다. 그들은 제국에게 기하급수적인 돈을 받고 데이타스를 공급한다. 몇천 년의 역사 동안 제국과 크바리엣 간의 거래는 완벽했다.

하지만 2년 전, 크바리엣의 족장이 바뀐 후로 이따금씩 불량품이 뜨문뜨문 나오더니 최근에는 그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약초 채집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거냐는 편지를 보내도 크바리엣 부족은 자기네들 잘못 아니라며 딱 잡아뗐다.

근데 누가 그걸 순순히 믿겠는가? 제이든을 포함한 고위 관료층은 일단 썩은 데이타스를 모으고 자체적으로 연구해 보는 걸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게 임시 조치에 불과하다는 걸 우리 모두가 알았다.

데이타스는 제국의 역사 어디에든 존재했지만, 신기하게도 아무도 그 약초의 비밀을 밝혀내지 못했다. 기껏해야 가짜 데이타스를 가려낼 수 있게 된 게 전부였다.

서식지도, 채집 방법도, 약초의 특징도 모든 게 베일에 싸여 있다. 유일한 단서는 더스크번에 있는데 외부인 경계가 너무 심해서 그 근처에도 못 가는 판국이다. 그런데 갑자기 불량품이라고? 구린 냄새가 났다.

거기까지 사고가 도달했는데 한참을 달리던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해가 넘어가고 드리운 짙은 어둠, 그리고 사방을 둘러싼 울창한 숲. 나는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의 스크롤을 쥐고 귀를 기울였다. 각인된 두려움이 째깍째깍 크기를 불렸다. 나는 겨우 한마디를 뱉었다.

“왜…… 왜 멈춘 거예요?”

제이든은 당연한 소리를 왜 하냐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중간에 갈아타야 확실히 비밀 보장이 되지. 여기에 다른 마차를 대기시킨 건 너였잖아. 그사이에 잊었나?”

긴장했던 게 민망해질 정도로 명쾌한 답변이었다. 나는 몸에서 힘을 쭉 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다른 생각 하느라 완전 잊고 있었어요.”

나는 무기력하게 마차를 갈아탔다. 제이든이 의아하게 쳐다보았지만 나는 꿋꿋이 창밖만 내다보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 끝없는 어둠뿐이었는데도.

마차는 또 다시 지겹도록 오래 달렸다. 그 장시간 동안 어색함 대신 묘한 편안함을 느낀 것을 보면 제이든이 많이 편해지긴 했나 보다.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다가 차창에 머리를 박았을 무렵, 제이든이 나직하게 말했다.

“다 왔으니까 내려.”

찬 바람을 쐬자 졸음기가 확 가셨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땅을 밟았다. 제이든은 많이 와 본 듯 익숙하게 어둠을 뚫고 지나갔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숲 한가운데에 있는 별장을 구경했다.

후 불면 꺼질 것 같은 등불과 창백한 회색 벽돌, 심지어 바늘 같은 첨탑까지. 분명 외관은 멀쩡했는데 이상하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났다.

그게 어쩐지 제이든이랑 묘하게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우연히 이곳을 찾은 사람을 겁줘서 쫓아내려는 목적이었으면 성공했네.

우리는 응접실에 앉아 벨라를 기다렸다. 꾸준히 관리를 해 줬는지 별장은 내가 청소할 필요도 없이 이미 깔끔했다.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던 홍차의 김이 꺼지려던 찰나, 문밖으로 잔뜩 성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와우. 나는 제이든을 바라보고 감탄하듯 말했다.

“벌써부터 만만치 않은데요.”

제이든은 눈가를 꾹꾹 눌렀다. 옅게 패인 미간이 몇 초 뒤부터는 더욱 깊어질 것 같아서 미리 애도를 보냈다.

그때였다. 쾅! 폭풍이 들이닥친 것처럼 문이 활짝 열렸다. 나는 멍하니 오늘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급하게 온 건지 눈처럼 하얀 머리칼은 산발이었고, 팔뚝 두께만 한 장검이 바닥에 질질 끌렸으며, 무엇보다 분노로 타오르는 눈빛이 여자의 감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나는 한순간에 벨라의 아우라에 압도되어 시선을 피했다. 흘긋 옆을 보니 제이든은 몹시 집에 가고 싶어 보였다. 나는 시선을 벨라의 미간에 고정하고 겨우 말했다.

“디아즈 영애? 일단 진정하시고 앉아서…….”

벨라가 버럭 윽박질렀다.

“일단 진정?”

“……저희 나쁜 사람 아니에요.”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벨라가 차갑게 코웃음을 내뱉곤 성큼성큼 다가왔다. 끽끽거리는 소리를 내는 칼도 칼 나름인데 단단히 돌아 버린 눈동자가 제일 무서웠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이거 완전 웃기는 애네. 그럼 협박은 왜 했니? 어? 내 비밀은 또 어떻게 안 거야?”

목 끝에 드리운 칼이 서늘했다. 나는 무작정 짜증 나서 벨라를 원망스레 응시했다. 유난히 밝은 갈색 홍채도 지지 않고 나를 노려보았다. 언뜻 보면 노을처럼 보이는 색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칼날이 더 깊숙이 들어왔다. 진짜 이 또라이가.

“가만히 보고만 계실 거예요, 제이든 님?!”

다 필요 없고 제발 안락한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친구들한테 오늘 일을 하소연하면서 위로받고 싶었다. 그 애들은, 특히 레이는 내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서 뭐든 할 텐데.

젠장, 이 상황에서 레이를 떠올리는 걸 보면 그동안 어느 형식으로든 그 애의 다정함에 길들여졌나 보다.

“……제이든 님이라고?”

벨라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고, 드디어 제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이든이 힘주어 칼을 내리고 엄숙하게 말했다.

“이제야 정신이 들었나 보군, 디아즈 영애.”

“황태자 전하가 왜 여기에…….”

가출한 벨라의 이성이 마침내 돌아와 황태자를 알아보았다. 나는 바닥에 풀썩 쓰러지려는 걸 간신히 버텼다. 충격받은 벨라가 댕그랑 칼을 떨어뜨렸다. 제이든이 매혹적으로 미소 지었다.

“일단 앉지.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

모든 게 손안에 잡힐 듯 순조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심지어 제이든의 컨디션도 상한선을 달리고 있었다.

충격적이었던 첫인상과 달리 벨라는 계약 연애에 협조적으로 나왔다. 마약과 담배도 이왕 끊은 김에 계속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성질도 좀 줄이겠다고 거듭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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