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 무도회가 끝나는 시각에 맞춰 사무실에 들렀다. 사탕을 먹으며 기다리자 얼마 있지 않아 제이든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제이든은 내가 사무실에 있을 거라곤 미처 생각 못 한 것 같았다. 놀란 감정은 순식간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가 불편한 재킷을 벗으며 무심하게 물었다.
“네가 일 중독자라는 건 몰랐는데.”
“궁금해서 왔어요. 일은 잘 풀렸나요?”
평온한 어조에서 이미 결과를 알아챘다. 하지만 나는 그의 목소리로 다시 한번 확인받고 싶었다.
“계획대로 됐어.”
어휴,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황후 폐하 반응은요?”
“좋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그게 최선이라 여기는 것 같더군.”
할렐루야.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다. 나는 기쁜 마음을 구태여 억누르지 않고 헤실헤실 웃었다. 제이든 앞에서 이렇게 진심으로 웃는 건 처음이었다.
“잘됐네요! 그럼 전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는 혹시나 제이든이 이왕 온 김에 일 조금만 하다 가라고 할까 봐 후다닥 짐을 챙겼다. 끼이익, 의자가 바닥에 끌리며 듣기 싫은 소리가 울렸다. 제이든이 허둥거리는 날 묘한 눈빛으로 지켜보다가 무심코 말했다.
“오늘 있었던 무도회, 네 생각이었다는 걸 알아.”
“헉.”
이런 반전이 숨겨져 있었다니. 나는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이든은 그다지 화나 보이지 않았다. 고요한 벽안은 배신감도 원망도 아닌 의문을 담고 있었다.
“……넌 나한테 충성하지 않아. 그런데 왜 이 일에 이상하리만치 적극적이지? 네 성격대로라면 차라리 내가 원하지 않는 정략결혼을 하도록 내버려 뒀을 거 같은데.”
“확실히 그렇긴 하죠.”
“그런데 왜?”
내 답을 듣고 제이든이 어떻게 반응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솔직해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저는 아로네가 제이든 님과 결혼하는 게 싫어요. 이 작전이 망하면 분명 황제 폐하는 아로네를 설득할 거였으니까. 그래서 열심히 했던 거예요. 아로네가 자유로웠으면 해서.”
제이든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는 표정을 했다.
“……너, 진심으로 그 앨 아끼는군.”
“제가 언제는 안 그랬나요?”
“그럴 가치가 있나?”
제이든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건 내게 묻는 게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묻는 거였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제이든의 시선이 내 책상 위 오늘 자 잡지에 닿았다. 기억 구현기에 의해 선명하게 인쇄된 아로네의 사진이 당당해 보였다. 그건 제이든이 끝내 부정했던 모습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 본인 사무실로 도망갔다.
쾅! 문 닫히는 소리 한번 참 요란했다. 나는 얼얼한 귀를 문지르며 사무실을 나왔다. 또 왜 저러는 거야?
***
난 누구, 여긴 어디? 분명 내 오후 계획은 황후 궁에 끌려오는 게 아니라 숙소에서 노닥거리는 거였는데.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황후의 찌를 듯한 시선을 피했다.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차 한 모금을 마시려는데, 불쑥 황후가 말을 걸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그만 입천장을 데이고 말았다. 찍소리도 못 내고 입만 헤벌리자 황후가 작게 혀를 찼다. 그가 근처에 있는 시녀에게 눈짓했다.
“얼음물을 가져와라.”
싸늘하든지 은근히 다정하든지 둘 중 하나만 해 주면 좋겠는데요, 황후 폐하.
황후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제이든처럼 쉬운 사람이면 얼마나 좋아.
데인 부분 위로 살살 얼음을 굴리자 알싸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황후는 감사 인사를 받는 대신 시녀들에게 나가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종종 뒷걸음질을 치며 문밖으로 사라졌다.
둘만 남은 응접실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나는 일단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황후가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나직이 물었다.
“그게 최선이었나?”
“예?”
“몰라서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황후의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살짝 가늘어진 눈매를 보니 당장 도망가고 싶었다. 내가 뭘 했다고 저렇게 살벌하게 쳐다보는 거야?
제이든은 약속대로 무도회에 성실히 참여했다. 연극이었을지언정 벨라와 제법 정답게 대화도 나누었다. 내가 직접 보지 않았지만 그 둘이 환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는 건 확실했다.
애프터 만남도 확실하고, 그대로 계속 제이든이 순종적으로 굴면 바로 결혼일 텐데. 그게 바로 황후가 바라던 결말 아닌가? 제이든이 번듯한 귀족과 결혼하는 게? ……가만, 번듯한 귀족?
“디아즈 영애가 마음에 안 드세요?”
“마음에 안 드냐고? 디아즈 영애가 자네의 최선이었다면 실망이야.”
나도 딱히 벨라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내 편인 사람이 남한테 욕먹으니 기분이 상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벨라를 변호했다.
“황후 폐하께서도 아시잖아요. 제이든 님의 취향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분은 옆에 두고 계속 보고 싶을 만한 사람을 원하시죠. 하지만 황후 폐하가 원하셨던 영애들은 모두…….”
스펙만 좋지 사실은 따분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잖아요. 독설은 속으로 삼키고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황후는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본인도 알면서 왜 나를 부른 거야? 나는 조금 뚱해져서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디아즈 영애, 소문이 와전돼서 그렇지 알고 보면 괜찮은 사람이에요. 유쾌하고 발랄하니 얼마나 매력적이게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상대가 누구냐가 아니라 제이든 님 마음이 어떤가가 아닌가요? 무도회 끝나고 잠깐 제이든 님 뵀었는데, 살짝 여쭤보니까 디아즈 영애가 마음에 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거 완전 괄목한 일이에요. 잘 아시잖아요?”
황후는 가만히 내 얼굴을 뜯어보았다. 나는 고뇌하는 척하면서 딴생각을 했다. 아니 근데 이 변명을 왜 내가 해야 해? 내가 제이든한테 맞는 신붓감을 골라 놓겠다고 얘기는 했다만, 최종 결정은 어차피 제이든이 했잖아.
벨라가 탐탁지 않으면 제이든한테 따져야 하는 거 아닌가? 일개 보좌관인 내가 아니라?
그때, 황후의 목소리가 불만 어린 상념을 비집고 들어왔다. 눈을 한 번 깜박이자 황후의 의심쩍다는 표정이 명료해졌다.
“설마 날 기만하려는 건가?”
“……예?”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순간 포커페이스가 무너졌다. 나는 황급히 가면을 주워 썼지만 노련한 황후의 눈썰미는 당해 낼 수 없었다. 의심의 막이 한 꺼풀 더 덧씌워졌고, 황후는 방금보다 더 확신에 차서 말했다.
“나는 제이든을 오래 지켜봤네. 제이든이 신시아라는 평민 계집에게 꽤나 진심이었고, 그 애가 떠난 후 상심이 컸다는 걸 알아. 자네는 제이든이 과거를 잊었다고 말했지. 오늘 그 애는 이상하리만치 완벽했고.”
“……폐하.”
나는 최대한 생각할 시간을 벌려고 황후를 불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우리의 대화가 메인 스테이지로 들어섰다는 직감이 들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한들, 무도회에 성의껏 참여할 의사가 있었다 한들 그게 완벽한 태도의 이유가 될 순 없어. 왜인 줄 아나?”
“…….”
“날 감쪽같이 속이려던 게 아니고서야 제이든은 결코 그럴 수 있는 애가 아니거든.”
“그럴 리가요. 억측이 지나치십니다.”
“그러고 보니 그 애가 자네의 말은 유독 잘 듣는 것 같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간신히 떠올려 낸 변명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내가 제이든이랑 눈 맞았냐고 물어보는 거야?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내가 농담이나 하자고 자네를 부른 줄 아나?”
황후는 더없이 진지했다. 어쩌면 황후가 그 질문 하나 때문에 날 부른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혈통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했던 걸까?
그렇다면 언제부터 그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품었던 걸까? 내가 명단을 달라고 설득하러 왔을 때? 초대받지 않은 무도회에 당당히 입장했을 때?
됐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이제야 되짚어 본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자 드디어 뇌에 활력이 돌았다.
“네, 맞아요. 제이든 님이 비교적 제 말을 잘 들어주시죠. 왜냐면 제 성격이 좀 불같긴 하지만 일은 꽤 잘하거든요.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이든 님이 절 싫어하면서도 해고하지 않는 거예요. 부하로 두면 유용하니까.”
“제이든은 평민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 그런데 자네는 여성이지 않은가? 옆에 두면 재미있는 성격이기도 하고.”
그래, 사람들이 보는 나는 그냥 보좌관이 아니라 ‘여자인 보좌관’이지. 이젠 그 시선이 새삼스럽지도 않다. 다만 엮인 상대가 제이든이라니까 조금 짜증 나는 거다.
문득 너무 피로해져서 눈앞의 찻잔으로 세수하고 싶어졌다. 그러면 또라이라 생각하고 더는 날 건드리지 않을까? 나는 허벅지를 세게 꼬집으며 정신을 차렸다. 황후가 할 말 있으면 하라는 듯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제이든 님의 변화조차 믿어 주지 않으시면 어떻게 그 둘이 잘 될 수 있을까요? 물론 제이든 님이 극적으로 변하긴 했지만, 엄청난 충격을 받으면 누구나 그래요. 제이든 님은 현실에 순응하셨어요. 그래서 디아즈 영애와 대화를 나누고 후일을 기약한 거예요.”
나는 가슴에 오른손을 얹고 황후를 직시했다.
“맹세하건대 저와 제이든 님은 주종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주종 관계에 불과하다고.”
황후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고요히 읊조렸다. 내게 설득된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본인의 주장에 더욱 설득력을 가진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