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38)

<80화>

“믿고 말고는 황후 폐하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부탁드리건대, 시간을 두고 그 두 분을 가만히 지켜봐 주세요.”

“참고하지. 대화 즐거웠네.”

더 이상 할 말 없으니 이제 꺼지라는 소리다. 나는 대충 인사하고 황급히 응접실을 나왔다.

세상에, 1시간 동안 저 안에 잡혀 있었다니. 지나간 시간이 아까워서 눈물이 다 나왔다. 나는 씩씩거리며 출구를 찾아 걸었다.

“젠장! 이놈의 궁은 뭐가 이리 넓어?”

이젠 하다 하다 미아가 되네. 시녀의 도움을 마다하고 뛰쳐나온 데다가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도 아무도 없어서 나는 그냥 느낌 가는 대로 걸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화 좀 참고 도와 달라고 할걸.

나는 갈림길에 봉착하고 왼쪽과 오른쪽 중 어느 쪽이 나를 안내자에게로 데려가 줄지 고민했다. 언제나 고민은 짧았다.

“좋았어, 왼쪽!”

나는 당차게 왼쪽 코너를 돌았다. 그런데 지지리 운도 없지,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에게 몸통 박치기를 해 버렸다.

“어흑!”

웬 돼지 멱 따는 소리가 아래에서 울렸다. 나는 부딪힌 코가 얼얼해서 잠깐 혼을 놨다가 앓는 소리를 듣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헉, 나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세요?”

남자가 내 손을 찰싹 쳐 내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도대체 눈깔을 어디에…….”

남자가 내 얼굴을 보고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탁탁 옷 주름을 펴고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하지만 나는 남자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붉게 달아오른 손을 망연히 응시했다. 이야, 이 남자 완전 럭키 가이인데? 안 그래도 기분 별로인데 기름을 들이붓다니. 용기만큼은 아주 칭찬해.

눈을 부라리며 남자를 째려보던 찰나, 그가 바지 자락에 손을 쓱 닦고 악수를 청했다.

“결례를 범했군. 내 이름은 게일, 황후 궁을 관리하고 있네.”

이중인격이야 뭐야? 갑자기 딴 사람처럼 웃는 남자가 이상했다. 번들거리는 눈빛, 옆으로 길게 째진 눈, 터질 것 같은 셔츠, 묘한 땀 냄새, 그리고 느끼한 말투. 확실히 호감형은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악수를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놓고 무례를 저지르기엔 여기가 황후 궁이라서 나는 대충 악수하고 재빨리 손을 놓았다.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 혜라입니다.”

그러고 바로 게일을 스쳐 지나가려는데 그가 나를 따라 옆으로 한 발자국 움직였다. 나는 약간 욱해서 고개를 기울였다.

“뭐 하시는 겁니까?”

게일이 손을 마주 비비더니 간드러진 목소리를 냈다.

“건국 연회 때 멀찍이서 혜라 양을 봤었네. 평민치고는 꽤나 용모가 훌륭해서 눈여겨봤었는데, 오늘 이렇게 마주치다니. 이 운명 같은 만남…….”

우웩. 더 들었다간 토할 듯.

“그렇군요. 근데 제가 바빠서 말입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게일을 비켜섰지만 그는 또 내 앞을 막아섰다. 게일이 쩔쩔매며 말했다. 넓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이 끔찍하리만치 잘 보였다.

“이쪽은 주방으로 통하는데. 혜라 양이 황후 궁의 주방 갈 일이 뭐가 있을까나?”

거짓말은 안 된다며 게일이 검지를 까닥까닥 흔들었다. 나는 22년 인생 가장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고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두 눈을 찌르면 너무 늦을 걸까?

“보아하니 길을 잃은 듯싶은데 내가 친히 길 안내를 해 주지. 출구를 찾고 있었나?”

“아니요, 저는 혼자…….”

“자, 가지.”

게일이 후훗 웃고선 멋대로 에스코트를 받게 했다. 진저리치며 팔을 떼도 그는 날 부끄럼 타는 소녀처럼 대했다. 결국 나는 사고하기를 포기했다.

게일은 끊임없이 떠들어 아주 효과적으로 내 혈압을 높였다. 그 딴에는 내 호감을 사고자 했던 것 같은데, 40대 중반의 배 나온 아저씨가 그래 봤자 욕만 나왔다.

내가 거듭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게일은 극구 기숙사 앞까지 바래다주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그 강요와 같은 행동에 드디어 나는 폭발했다. 아무리 게일이 짜증 나게 굴어도 황후의 사람이라서 꾹꾹 참았는데 더는 못 참겠다. 나는 우뚝 멈춰 서고 게일을 죽어라 노려보았다.

“이봐요.”

“이봐요?”

게일이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렸다. 난생처음 들어 보는 저질 플러팅을 날릴 땐 속없는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제대로 화를 내니 조금 무서웠다.

내가 움츠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서글펐다.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라? 무슨 일 있어?”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이쪽을 바라보는 레이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레이?”

레이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옆에 서고 게일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상하지, 왜 게일을 죽다 살아난 사람 보듯 쳐다볼까?

레이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무의식적으로 내 손을 움켜쥐었다. 처음 맞잡은 손에는 안쓰러울 정도로 온기가 없었다. 나는 레이와 게일을 번갈아 보았다.

레이는 좀처럼 혼란을 수습하지 못했고, 게일은 도저히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레이가 왜 그러는지는 몰랐으나 계속 그렇게 세워 둘 순 없었다. 나는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고 자리를 벗어났다.

게일은 도망가는 우리를 굳이 따라오지 않았다. 애초에 그 짜리몽땅한 다리로는 죽어라 뛰는 우리를 따라잡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분수대 앞 벤치에서 멈췄다. 나는 일단 레이를 벤치에 앉히고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무 힘들어 보였는지 도리어 레이가 내 등을 토닥였다.

토닥임 받아야 하는 사람은 따로 있지 않나? 나는 허탈하게 웃고선 레이 옆에 풀썩 앉았다. 그는 괜찮아진 척 빙그레 웃었다. 참나,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괜찮아?”

“……티 났어?”

레이가 낭패라는 듯 한숨 쉬었다. 곧잘 마주치던 시선도 어쩐지 묘하게 빗나간 느낌이었다.

“난 네가 무슨 악마라도 본 줄 알았어. 그 사람 알아?”

“너는 알아?”

얘 봐라? 대답을 미루는 행동이 심히 수상했다. 미심쩍은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레이를 알고 나서 그가 지금처럼 불안해하는 건 처음 봤다.

아직까지도 맞잡은 손이 창백했다. 레이는 평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내 대답을 두려워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왜?

“오늘 처음 알았어. 그쪽은 건국 연회 때부터 날 알았던 것 같지만.”

레이는 한결 안심했다가 곧바로 험악했던 광경을 떠올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아까는 뭐였어? 브라운 표정이 안 좋아 보이던데.”

“웬 브라운? 그 사람 이름은 게일이야. 아는 사람 아니었어?”

“아…….”

레이는 자기 자신한테 실망한 것처럼 보였다. 그가 답답하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확실히 지금 그는 유별나게 굴었다. 도대체 게일이랑 무슨 사이길래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걸까?

나는 그의 손등을 살포시 두드렸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와 내 눈동자에서 멈췄다.

“도대체 뭔데 그래? 나한테 말 못 해 주는 거야?”

레이는 소중한 무언가를 새삼 기억 속에 박아 넣듯 눈을 마주했다. 나는 이유 모를 좌절감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희망의 빛이 떠오르는 광경을 지켜봤다. 그건 꽤 낭만적이었다.

한참 뒤, 레이가 말했다.

“이런 꼴 보여서 미안.”

그건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색하게 화제를 돌리는 레이의 노력이 눈물겹도록 필사적이라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어쩌면 조금 섭섭했던 것도 같다.

***

오늘은 내게 무척 특별한 날이다. 왜냐면 내일이 바로 아로네의 의상점이 개업하는 날이고, 오늘 미리 축하 파티를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나는 오랜만에 베키, 루나와 어울릴 수 있어서 기뻤다. 그동안 교류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우리 모두가 일에 치여서 따로 날 잡고 만난 적은 없었다.

나는 굳이 말할 것도 없고, 베키와 루나도 아로네를 도와주느라 거의 의상점에서 살다시피 했으니까.

솔직히 아로네가 우리의 파티에 그 애들도 끼워 주자는 이야기를 했을 때 조금 놀랐었다.

작년과 상황이 많이 달라졌고,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아로네가 그 애들에게 나름 애정을 가지게 됐다는 걸 안다. 하지만 사적으로 어울릴 정도로 정을 쌓았는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과정이야 어땠든 참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나는 퇴근하자마자 바로 튀어 나가서 마차를 잡아탔다. 옆구리에는 미리 준비해 놓은 선물 상자가 끼워진 채였다. 나는 깜짝 선물을 받고 좋아할 아로네를 상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기억 구현기를 사진 않았겠지?”

자고로 선물은 자기 돈으로 사기에 아까운 걸로 주는 게 최고다. 이건 내 오랜 선물 철학인데 항상 결과가 좋았다.

제이든이 때마침 상여금을 줘서 다행이었지. 그때 처음으로 내 상사가 황태자라는 것에 깊이 감동했다. 제이든 몰래 금액을 보니까 워후, 생각보다 씀씀이가 크더라고? 덕분에 내 몫의 기억 구현기도 살 수 있었다.

어쨌든 나는 아로네가 기억 구현기를 사지 않았을 거라고 99% 확신했다. 본인이 직접 그리는 그림으로도 충분히 과거를 기록할 수 있는데 무엇 하러 거금을 투자하겠는가.

하지만 기억 구현기 하나 쟁여 놓으면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유용할 것이다. 머릿속에 박힌 풍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바래지만, 기억 구슬의 마법은 영원하니까.

어쩌면 아로네가 직접 모델이 되어 홍보를 할 수도 있을 테다. 물론 아로네 성격이라면 질색부터 하겠지만.

풍만한 기대감은 지루한 마찻길도 순식간에 지나가도록 해 주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마차비를 지불하고 단골 케이크 가게로 향했다. 예약해 놓은 케이크를 찾기 위해서였다.

내가 지겹도록 신신당부를 해서 그런지 올리비아는 나 덕분에 희대의 역작을 만들었다고 했다. 나는 완성된 케이크를 보고 파티시에의 자부심을 수긍했다.

2단 케이크 전체를 덮은 프리지아꽃 모양 크림이 생화 같아서 입이 마르도록 감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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