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38)

<84화>

게일이 씩씩거리며 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말했다.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야. 이 완벽한 옷을 보고 왜들 저리 수군거리지?”

주목받을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출근길 내내 느끼는 시선은 주목 그 이상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무리가 나를 보고 자기들끼리 킥킥거렸다. 어떤 사람은 대놓고 손가락질을 했다.

이상하다. 할리는 좋아서 기절하려고 했는데.

“아까 네가 한 말, 거짓말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근데 사람들 반응이 왜 저래?”

“너 설마 《귀족의 모든 것》 안 봤어?”

할리는 의외라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되레 할리가 의외여서 인상을 찌푸렸다.

“《귀족의 모든 것》? 설마 그 질 낮은 가십지 말하는 거야?”

《귀족의 모든 것》은 항간에 떠도는 루머를 사실인 양 떠드는 잡지이다. 내 이야기가 실렸다고 해서 호기심에 한 번 사 본 적 있는데, 살면서 들을 악담을 거기서 다 들은 것 같다.

보좌관으로 승진한 날 두고 그 기사가 뭐라 그랬더라? 아, 초고속 승진이 믿기지 않는다면서 분명 그 뒤에 엄청난 비리가 숨어 있을 거라 단언했지.

그때 기분이 참……. 익명 뒤에 숨어 버린 기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미치도록 궁금해지더라.

때로는 말보다 행동이 더 나아서 할리는 가방에서 오늘 자 기사를 꺼냈다. 강렬한 헤드라인이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파혼, 사생아, 그리고 사업까지 파격적 행보를 이어 가는 공녀. 드디어 모든 걸 내려놓은 것인가 혹은 미친 것인가? ……와, 선 넘네?”

역시 《귀족의 모든 것》은 사람을 화나게 하는 데 일가견 있다. 기사 사진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고 일부로 오픈 전 황량한 걸로 쓰다니. 덕분에 아로네의 사업은 오픈하자마자 망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격분해서 기사를 갈기갈기 찢고 근처 쓰레기통에 버렸다. 할리가 입을 일자로 다물고 내 눈치를 살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니까 정확히 다섯 번째에 평정이 찾아왔다. 나는 로봇처럼 웃었다.

“잡지는 미안. 쿠키 세트로 갚을게.”

“어…… 안 갚아도 돼.”

“아니, 갚을 거야.”

이름 모를 기자가 내게 가져다준 분노의 크기만큼 맛있고 커다란 쿠키로 갚겠어. 나는 이상한 투지를 불태우며 억지로 할리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문득 시중에 나온 잡지를 모두 사서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헛소리를 하면 익명으로 항의 편지를 보내야지. 《귀족의 모든 것》의 사장이 누군지 모른다는 게 분했다. 알기만 해 봐. 콱 그냥!

***

나는 평소 하루에도 몇 번씩 제이든의 사무실을 오간다. 그런데 오늘따라 제이든은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미묘한 눈빛을 인식한 순간부터 제이든이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혹시라도 내가 오해한 거면 완전 개망신이니까. 그런데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제이든은 타이밍만 재고 도저히 입을 열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이거야 원, 무슨 창과 방패도 아니고. 결국 인내심이 동난 내가 슬쩍 운을 띄웠다.

“제이든 님, 저한테 하실 말씀 있지 않아요?”

제이든이 펜을 탁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책상 위에는 분명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온갖 잡지와 신문이 늘어져 있었다. 놀랍게도 1면은 모두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바로 아로네의 의상점 ‘리베라’였다.

“와우, 제이든 님이 잡지도 읽으시는 줄은 미처 몰랐네요. 그것도 종류별로 다.”

나는 잡지들 사이에서 잊을 수 없는 로고를 발견했다.

“세상에, 제이든 님도 《귀족의 모든 것》 읽으세요?”

하도 놀라서 목소리 끝이 우스꽝스럽게 갈라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알고 보니 나만 빼고 다 구독하고 있는 거 아니야?

할리야 워낙 잡지 읽는 걸 좋아하니 그렇다 쳐도, 제이든이 그 저질 잡지를 읽는다니. 이거 완전 캐릭터 붕괴다.

제이든은 내 반응에 조금 머쓱해졌는지 잡지를 치우려고 했다. 하지만 금세 마음을 고쳐먹고 당당하게 말했다.

“비판적 사고를 기르고 정확하게 세상을 보기 위해선 다양한 매체를 접해야 하는 법이지.”

“그렇군요.”

나는 이해한 척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머릿속 의문은 여전했다. 아무리 그래도 《귀족의 모든 것》은 좀 너무한 거 아닌가? 그걸로 세상 보는 시각을 갈고 닦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높은 혈압과 살의를 얻으면 얻었지.

제이든이 내 옷차림을 훑었다.

“그 옷 말인데.”

야호 잘 걸렸다. 나는 제이든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반색하며 아로네 칭찬을 주르륵 늘어놓았다.

마음 같아선 이 환상적인 정장에 대한 찬사를 A4 용지 앞뒤 꽉꽉 채워서 길거리에 배포하고 싶었다. 참고로 글자 크기는 9 정도?

“아, 이거요? 아로네가 만들어 줬어요. 봉제하는 법 배운지 얼마 안 됐는데 솜씨가 아주 탁월하죠?”

“상당히 질이 좋아 보이는군.”

“당연하죠. 아로네가 얼마나 완벽주의자인데요.”

웬일로 쟤가 아로네 칭찬에 수긍하지? 나는 오늘 꼭 일기를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제이든이 실밥 하나까지도 살펴볼 기세로 집중하길래 소매를 걷어 줬다. 차라리 재킷을 벗어서 마음껏 보라고 하고 싶었지만 제이든 성격에 막상 판을 깔아 주면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하냐고 내뺄 게 분명해서.

“마탑과 손을 잡았다지?”

“네. 덕분에 다양한 시도를 해 볼 수 있었죠. 옷부터 시작해서 가게 디자인까지. 저는 에단이 생각보다 아로네 사업에 진심이어서 놀랐다니까요?”

“에단?”

제이든은 잘못 들었다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내가 방금 ‘에단’이 아니라 ‘제이든’이라고 잘못 말했나? 나는 혼란스러워져서 물었다.

“제가 무슨 실수라도?”

“언제부터 에단을 편히 불렀지?”

“음, 아로네 가게에서 봤을 때부터?”

“뭐?”

제이든은 너무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의자가 잠시 덜컹거렸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표정을 수습했다. 그게 더 이상했다.

“왜 그러세요?”

“그 자리에 공녀도 같이 있었나?”

“당연한 걸 물으시네. 에단 걔 가게에 자주 놀러 오던데요? 저랑도 그 이후로 몇 번 더 마주쳤어요. 차기 마탑주라는 사람이 그렇게 한가해도 되나 몰라.”

백발백중까지는 아니더라도 에단은 70%의 확률로 가게에 눌어붙어 있었다. 나는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에단이 조수로 취직한 줄 알았다.

자기 전용 소파도 만들어서 내가 어쩌다 그곳에 앉으면 별 난리를 다 치고……. 하루는 왜 자꾸 남의 영업장에 오냐고 물어보니까 나랑 아로네가 티키타카 주고받는 게 재미있다나? 하여간 걔도 참 특이하다.

“……자주라고.”

제이든이 한참 생각하다 무심코 중얼거렸다. 찌푸려진 미간이 못마땅하다는 속내를 드러냈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요. 왜 갑자기 아로네 일에 신경 쓰세요? 원래 안 그러셨잖아요.”

“그랬지. 하지만 그때는 공녀가 파혼 계약서에 사인하지도, 사생아이지도, 무모한 사업을 하지도 않았어.”

자기가 말하면서도 제이든은 본인 감정에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분노와 멸시를 느끼는 대신 방황하는 눈동자에 또 하나의 물음표를 던졌다.

“그럼 지금은 좀 다른가요?”

“……최근 공녀의 행동은 내게 많은 의문을 가져다줬어. 그리고 난 빈칸을 공백으로 남겨 두는 사람이 아니지.”

대박. 나는 감탄사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입으로 손을 가렸다. 이게 웬 떡이람?

그동안 나는 타인에게 엉뚱하고 특이한 사람. 즉 흥미를 유발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았고, 그 관계가 뒤집힌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방금 찾은 것 같다. 제이든 스스로 후회 남주의 길로 들어서는 모습은 비현실적이면서도 손발이 짜릿했다.

“그 답, 궁금하네요. 찾게 되면 꼭 알려 주세요.”

나는 불순함을 뒤로 감추고 상냥하게 웃었다.

***

이웃 도시 ‘루디체’에서 축제를 벌인다는 소문이 우리 사무실까지도 자자했다. 워낙 대대적으로 선전을 해서 모를 수가 없었다.

2년에 한 번씩 열린다는 그 축제는 ‘리오델라’라는 생명체를 마스코트로 내걸었다.

리오델라는 마법 생물로, 2년 동안 깊은 잠에 빠졌다가 낙엽이 떨어질 즈음 깨어난다. 반딧불이와 나비가 합쳐진 듯한 형상이 아주 아름답다고 할리는 입이 닳도록 말했다.

나는 주말을 반납할 만큼 그 축제가 가치 있을까 고민했다. 리오델라는 확실히 신기했지만, 루디체까지는 마차를 타고 최소 3시간은 가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리가 강력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지난 축제 때 갑자기 배탈이 나서 못 갔다면서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내 일자리가 위태로워졌을 때 이후로 할리가 그토록 투지를 불태우는 모습은 처음 봤다. 나와 레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애가 저렇게 가고 싶어 하는데 가 줘야지 뭐 어쩌겠는가.

그리고 드디어 오늘. 우리는 사전에 맞췄던 드레스 코드를 입고 나타났다. 나는 푸른색 머리띠를, 레이는 남청색 셔츠를, 그리고 할리는……. 나는 이 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와, 네 모자 대박이다.”

“그치?”

우쭐해진 할리의 어깨가 대기권을 부술 것 같았다.

“그래. 미아 방지용 목적이었다면 완전 성공.”

할리가 내게 눈을 흘기곤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일부러 문을 쾅 소리 나게 닫는 걸 보면 삐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신을 산란하게 하는 푸른 얼룩말 무늬와 들판처럼 넓은 챙이라니! 구입처가 심히 궁금해지는 그 모자를 본 이상 누구나 놀리고 싶었을 것이다.

“화난 거 같은데?”

레이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웃긴 말을 들었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걱정 마. 쟤 엄청 단순하잖아. 아마 지금쯤이면 다 풀렸을걸?”

“그렇게까지 단순했던가?”

“네가 아직도 쟤를 모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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